Ⅰ. 서론
전라북도 정읍은 한국 사상사에서 주목을 요하는 지역이다. 한 지역의 역사를 통시적 사상사로 엮을 수 있는 지역도 정읍 외에는 드물다. 부족국가시대의 무교(巫敎)사상 – 남북국시대 최치원의 풍류도사상 – 고려시대 경한화상의 무심선(無心禪)사상 – 조선초기 정극인의 유가적 풍류사상 – 조선중기 이항의 본격적 유교사상 – 조선후기 동학사상의 재창조 – 조선말기/근대초기의 증산사상 등.1) 이 땅의 자생적, 외래적 온갖 사상들이 한 곳에 어우러져서 잔치 마당을 벌이는 곳, 그 이름처럼 끝없는 사유의 ‘샘골’, 또 ‘우주의 배꼽’이라는 칭호도2) 잘 어울린다. 그래서 사상적 탐구 공간이 무한하다.
또한 정읍은 문학사의 ‘첫 동네 이름’이다. 잘 알다시피 일반 대중들에게 정읍은 <정읍사>로 먼저 익숙하다. <정읍사>는 노랫말이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 노래이자, 지역명을 작품명으로 삼고 가사가 전하는 최초의 작품이다.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애절한 사연이 곁들여져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데, 특유의 가락과 여성 화자의 노래 방식이 뒤에도 이어지는 호남문학의 특징으로 꼽힌다.3) 현대에도, 정읍 산외면 상두리 태생으로 88올림픽이 막을 내리던 날 홀로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진’(<終詩>) 시인 박정만(1946~1988)의 노랫가락에도 이어진다.
또 첫 손에 꼽히는 정읍의 문학사적 사건은 사대부 가사의 출발지라는 점이다. 불우헌 정극인(1401~1481)의 <상춘곡>은 고려말 승려의 손에서 시작된 가사가 사대부의 문학 갈래로 옮겨 새롭게 탄생한 첫 작품이다. 사대부가 자연에 묻혀 산수를 즐기며 강호한정(江湖閑情)을 노래한 강호가사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둘째 구절 ‘옛 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에서 신라시대 태산군이었던 이 지역 태수를 지낸 최치원(857~?)의 풍류에 비겨 선비 풍류의 대를 이었다는 지적이 있다.5) 최치원이 태수로 재임시에 유상대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기며 풍류를 즐긴 일화가 전하기에 그것과 연결지은 설명인데6) 여기서 풍류는 정감적, 예술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최치원의 풍류라고 하면 우리 고유사상을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 여덟 자로 함축한 ‘풍류(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풍류도에 대한 해석은 십인십색이고 상상력과 추리력, 신비성이 개입되어 백화난만에 이르고 있다.7)
풍류도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필자는 이 여덟 자를 어떠한 사상의 내용보다는 사유의 방식으로 보기를 제안한 바 있다.8) 즉 이질적인 사상을 차별 없이 수용하는 태도 내지는 방식으로, 다양한 사물 현상(군생)을 포용하여 결합, 융합하여 새롭게 생성(접화)하는 방식으로 보고자 하였다. 풍류도는 포용과 창조의 사유 방식으로, 바람결 물결같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르는 것, 작은 물이 모여서 더 큰 물을 이루어 흘러가듯이 생성되어가는 문화의 속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이 글의 주제인 정읍과 최치원의 만남에 대한 유용한 설명틀이 될 수 있다. 정읍이라는 공간의 사상사가 보여주는 유연하고 포용적인 태도는 새로운 사유와 문학의 잉태를 가능하게 하는 모성과 같은 지점이 있다. 그래서 최치원이 사유한 여덟 자의 언명이 이 공간을 만나 ‘치인(治人)’으로 실현되었고 그 결과 이 지역의 상징적 인물로 좌정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 무성서원의 성립이 자리 잡고 있다.
정읍과는 특별한 연고가 없고, 서원이나 사상, 선비문화에 대한 식견이 얕은 필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기획 주제임을 알면서도, 최치원에 대한 평소 관심 때문에 정읍의 무성서원의 성립과정과 선비문화에 있어서 최치원의 연관성을 다소 살펴보게 되었다.9) 이 성긴 논의가 향후 정읍의 문화와 최치원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가 되기를 기대한다.
Ⅱ. 무성서원 건립 근원으로서의 최치원
무성서원은 최치원, 신잠, 정극인 등을 배향한 곳이다. 처음에는 사당과 가숙의 형태였지만 1615년에 태산서원으로 합쳐졌고, 169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전라도의 대표적 서원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영향으로 을사보호 조약 이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1906년에 의병을 일으킬 때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무성서원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1968년에 사적, 201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0)
무성서원의 건립 과정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615년 태인현 선비들은 700여 년 전에 태산군 태수로 부임하여 이 고을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최치원과, 70여 년 전에 태인현감으로 6년간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푼 신잠을 함께 모시는 태산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1630년에는 태인 고을의 향현인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을 추배하였다. 추배된 인물들은 타계한 지 각각 149년, 111년, 73년, 72년이 지난 영광정씨, 여산송씨, 경주정씨, 도강김씨로, 생몰시기와 성씨는 다르지만 서로 가까운 친인척이었다. 멀리는 이미 5세대가 지났고 가까이는 2세대가 지난 인물들을 같은 해에 함께 추배하였으며, 이로부터 45년이 지난 1675년에는 마지막으로 도강김씨 김관의 추배가 이루어졌다. 김약묵과 김관은 정극인의 사위인 김윤손의 후손이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태산서원에서는 전라도 내 유림들과 함께 청액소를 올려 1696년(숙종22)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무성은 신라 때의 이 지역 고을 명칭이지만, 공자가 정치의 본령을 밝힌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는 ‘현가지성(弦歌之聲)’과 ‘우도할계(牛刀割鷄)’의 연원이 되는 공자의 제자 자유가 다스렸다는 고을 이름 무성에서 그 명분을 찾을 수 있다. 사액을 받은 무성서원에는 복호 3결과 보노 30명이 지급되었으며, 원생의 정원은 최치원을 모신 문묘 종향 유현서원이었으므로 사액서원보다 더 많은 30명으로 정해졌다. 사액서원이 된 무성서원은 이제 종전과 격이 달라졌다. 더 이상 태인 고을만의 서원이 아니었다. 태산서원 건립 당시 제향된 최치원 신잠과는 달리 후에 추배된 인물들은 모두 태인의 향현들이다. 이들은 고현동의 향학당을 중심으로 상호간에 학연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혈연으로도 밀접하게 연결된 태인의 사족들이다. 그런데 태산서원에 추배되면서 우리나라 유현으로는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상징적인 인물인 최치원과 함께 제향되었으며, 태산서원이 무성서원으로 사액되면서 전국적인 공인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태산서원의 건립과 향현의 추배, 무성서원으로의 사액 과정을 통해 그 후손들은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11)
무성서원 건립 관련 선행연구들을 참조하면,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지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 경우도 있고, 사실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것은 고대 문헌 기록의 미비에서 발생한 것인데, 당대 기록으로 재임 사실이나 재임 기간을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후대의 기억과 전승이라고 본다. 김종직, 김수항 등 조선시대 문인들이 남긴 시에서 이 지역과 최치원을 연결하여 언급한 사례가 많은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서원의 사액을 위해 청액소를 올리고 윤허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지만 결국은 최치원으로 인해서 사액이 결정된다.12)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부임한 것은 어지러운 정국 때문에 중앙에서 포부를 펼치기 어려워서 외직을 자임한 것이라고 하였다. 태산군 외에도 부성군(충남 서산), 천령군(경남 함양) 태수를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천령군에서 수해를 방지하는 상림을 축조한 것은 지금도 남아 있는 치적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태산군에서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고을 사람들이 선정에 보답하는 의미로 태산사라는 생사당을 건립하였고 그것이 근원이 되어 후대에 무성서원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기록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두 고을에서의 치적을 조선후기 실학의 두 경향과 비기면 천령군의 상림은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해당하고, 태산군의 생사당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여하튼 최치원으로서는 자신의 포부와 역량을 세상에 실현한 셈이 된다. 특히 조선중기 무성서원의 건립과 사액 과정에서 최치원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역사회 사대부들의 자신들의 지위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최치원을 해당 지역의 상징적 인물로 소환하면서 최치원 역시 희미해져가던 역사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날 수가 있었다. 무성서원은 이후 정읍은 물론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매김하였고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발간된 국역 『무성서원지』(1884)에서 최치원에 대한 기사만 발췌하여 살펴보고자 한다.13) 아래 세 편의 글은 모두 현감들의 서발문으로 해당 지역에 최치원이 부임한 사실과 유풍을 적시하고 있다.
1) 현감 서이원의 <무성서원지 서문>
… 우리 현의 최치원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아끼던 유물이 남아 있다. 선생이 진식(식봉)을 하던 장소이다. 천년이 흘렀는데 높은 산을 우러러보듯 현인을 본받아야 한다. 유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공자 말씀을 암송하고 그 말을 생각하고 그분을 존경하고 사모했다. … 고인이 평소에 아끼던 유물을 남기고 가셨으니 선생의 위패를 일정한 곳에 잘 갖다 섬겼는데 모신 자리가 선생이 다스렸던 땅이 되니 어찌 우연이 아니겠는가?
2) 현감 기양연의 <서원지 발문>
… 최치원 선생이 일찍이 이 현의 현감이었은즉 옛날 이 행정구역의 이름이다. 유풍과 좋은 풍속이 남아 있다. 선생의 존령을 어찌 간절하게 생각함과 그리움이 없겠는가? 아 선정을 베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으니 … 멀고 가까운 유생이 이곳에서 예를 다하여 제사를 지낸다.
3) 현감 신기조의 <서원지 발문>
… 최치원께서 옛날 관리로서 은근히 지낼 때 유택이 신비하게 존재하고 술 마시며 시가를 읊고 속박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생활하던 땅이다. 그리하여 사우로부터 시작하여 서원이 되었다.
서발문 뒤로 『계원필경집』을 중간하면서 쓴 홍석주와 서유구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중 서유구의 서문에서 최치원의 출생지를 옥구(湖南之沃溝人)로 적고 있어 출생지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 필자는 연전에 이와 관련하여 문헌을 두루 검토하였으나 자료 불충분으로 확정을 하지 못하였다.14) 서유구는 1833년 4월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기간 4월 10일부터 1834년 12월 30일까지 약 1년 9개월간의 『완영일록』을 남기고 있는데 여기서도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 출생지에 대한 논란을 연구자 간의 혼란을 가중하여 특히 중국의 학계에 더욱 혼선을 초래하였다. 경주 중소 귀족 출생, 호남 옥구(신라 지명으로 지금의 경주 경내) 사람, 신라 옥구 지방 열두살 소년 등.15)
그다음으로 유상대 비문이 실려 있고 태산사 사적이 있다. 1696년 사액 이후의 기록이다. 최치원의 풍류가 여전히 전해짐을 말해주고 있다.
4) <태산사사적>
… 문창후 최 선생이 사랑을 베풀던 자취가 남아 있는 읍인데, 가야시산이 있고 여기에 월연대와 유상대가 있다. 선생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술을 마시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거문고 가락에 맞춰 시가를 읊던 옛 풍속이 수백 년 동안 없어지지 않고 있다. 고을 사람들이 월연대 아래에 사당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
다음으로 청액소가 이어지는데 관련 대목만 옮겨 온다.
5) <청액소>
… 신라 때 문창후 최치원은 유학자로서 유교의 경서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사람으로서 혼란한 시대를 만나 태산군 즉 오늘날 태인현의 태수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문헌이 비록 부족하여 증빙할 수는 없으니 그가 남긴 풍습의 여운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아 고을 사람 모두가 사당을 세워 제사로써 보답하였습니다. …
6) <청액사적>
… 최치원은 우리나라에서 유학에 탁월해 이미 문묘에 제사를 지내고 있고 …
두 편의 청액의 글에서 장황한 사정을 쓰고 있으나 윤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상기 발췌문의 내용, 즉 최치원의 유학자로서의 위상 강조였다. 치적에 대한 문헌이 부족한데도 최치원이 문묘에 이미 배향되었다는 사실과 그의 유풍을 지역민이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사액을 받고 난 이후의 글에서는 최치원에 대한 특기할 사항은 기술되지 않았고, 지리산 쌍계사의 최치원 영정을 봉안해오는 일과 관련하여 여러 편의 기록이 실려 있다. <문창후최선생영정봉안사적>에 따르면 정조 7년(1783)에 주변 고을에 두루 통문을 돌려 알린 내용은, 최치원의 덕화가 태산에서부터 두루 미치고 있으니 협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문묘에 있어야 할 초상화가 사찰에 있어 유학자의 부끄럼이 되어 영호남 유생들이 협력하여 쌍계사로부터 봉안해왔고 가장 적임지가 최치원 생전의 임지 무성서원이라는 것이다. 그다음은 봉안의 실무 절차를 적은 일기 등이다. 이후 서원 사우를 단청하고 중수한 기록 등이 이어지는데 영정의 이안(移安) 때부터 계속 영호남 유생의 협력이 강조되고 있다. 불교 사찰과 대응하는 과정에서 세력 및 경비의 문제로 지역 간의 유생들의 협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최치원이 한 지역의 인물을 넘어 유학자들의 공통의 숭앙 대상으로 인식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서원지 하권의 첫 마리에는 <격황소서>를 싣고 있다.16) 최치원이 중국에서 문명을 알린 출세작이기에 실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치원이 건립했다고 알려진 정자 피향정에 걸린 제가의 시를 모아서 실었다. 김종직 이하 11명의 시는 모두 이 장소와 최치원의 연관성을 다루고 있다. 이후 글은 『계원필경중간기』를 제외하고는 건물의 중수, 서원의 운영과 관계된 것으로 최치원 관련 중요한 언급은 없다.
이상에서 무성서원의 건립 과정과 서원지의 기록을 통해서 최치원 관련 사항을 살펴보았다. 서원의 건립과 사액, 일련의 운영은 지역사회 유생들의 현실적 필요성에서 진행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최치원은 상징 인물로 지속적으로 소환되었고,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지역사회와 하나로 융화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17세기 전후부터는 최치원의 출생지도 이 지역과 연관된다는 주장과 전승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어느덧 최치원은 태산(무성, 옥구), 정읍의 인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영정의 이안 작업을 통해서 최치원의 형상도 보다 유학자, 유학적 선비의 모습으로 좌정해나가는 것도 볼 수가 있다.
Ⅲ. 최치원의 시문을 통해 본 선비(지식인) 의식
앞서 정읍의 무성서원의 건립과 관련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최치원이 한 지역의 상징적인 인물로, 나아가 우리나라 유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좌정해나간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 이루어진 무성서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자리를 잡고 선비문화의 원류로 최치원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서원 건립과정에서 상징화된 것 말고는 직접적인 언명을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므로 최치원이 남긴 시세계에서 유학적 선비, 당대 지식인으로서 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최치원은 신라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한문한문학의 개조(開祖)로 불린다.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근 60여 명 신라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나자, 고변(高騈)이 이끄는 관군의 군막 서기로 종군하여 “천하 사람이 모두 그대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가만히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고 논하여, 황소가 저도 모르게 상 아래로 내려와 무릎 꿇게 했다는 저 유명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어 문명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당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진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고 귀국하였다. 그 사정을 “해내의 누가 해외 사람 어여삐 여기겠습니까 / 나루를 물어도 어느 길이 나루로 통하는지요.”라고 읊은 <진정상태위시(陳情上太尉詩)>나, “천한 땅에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라고 읊은 <촉규화(蜀葵花)> 시에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동문선(東文選)』에는 그의 시문이 140여 편이나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 문인의 총 수록 작품 가운데 압도적인 숫자이다. 그는 부단히 노력하여 수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대부분 유실되고 귀국 후 헌강왕에게 올린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바, 이것은 신라인의 개인 시문집으로 현전하는 유일한 것이다. 귀국 후에는 또 육두품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과 이미 기울어진 신라 말기의 정세 때문에 포부를 실현해 보고자 한 뜻을 잃고 외직을 전전하다 은거하게 된다. 그는 사륙문의 전범을 이룩하고 근체시의 전통을 이 땅에 정착시켰으며, 당나라 유학과 부단한 저술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모두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한국한문학을 산출해 놓은 점에서 ‘동국문종(東國文宗)’으로 추앙되기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러한 업적을 이룩하고 높은 명성을 얻은 데에는 뛰어난 재능에다가 남다른 각오와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그는 공부할 때 머리털을 천장에 잡아매고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가면서, 이른바 현자(懸刺)를 일삼으면서 정진하였던 것이다.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가 이르기를, “10년 동안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서 불철주야 공부함으로써 마침내 6년 만인 18세에 당당히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그 실상은 헌강왕에게 올린 <계원필경 서문>에서 잘 드러나 있다.
신(臣)이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서쪽으로 가려고 배를 탈 때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훈계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 나도 또한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겠다. 가거든 부지런히 공부하며 힘을 다하거라’ 하였습니다. 신은 그 엄격하신 훈계를 마음에 새겨 조금도 잊지 않았습니다.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매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참으로 남들이 백의 노력을 할 때 신은 천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에 유학 간 지 6년 만에 신의 이름이 방(牓)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느꼈던 심정을 읊고 사물에 의탁하여 편을 이룬 것들이 부(賦)이고 시이니 거의 상자에 넘칠 만큼 되었습니다. … 회남 절도사의 종사관이 되어 고시중(高侍中)의 붓과 벼루를 도맡게 되자 군서(軍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서류들을 힘껏 담당하며 4년간 마음 써서 1만여 수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찮은 글들을 가려내다 보니 열 가운데 한 둘도 남지를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모래를 파헤쳐 금을 발견하는 것에 비교하고, 헐어진 기와 조각으로 벽에다 긋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 드디어 ‘계원집’ 20권을 이루었습니다. 신이 마침 난리를 만나 군막에 머물며 먹고 살았는지라, 이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습니다. …
위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치원은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 급제하고 벼슬을 하는 동안 주로 그의 뛰어난 문필로써 능력을 인정받고 생계를 삼았으며, 마침내 문사로서의 명성을 중원에 드날리는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가 지은 시는, <계원필경 서문>에서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기까지의 작품이 상자에 가득했다고 했고, 급제 이후 유랑하던 시기, 또 고변의 종사관으로 지내던 시기를 비롯한 재당(在唐) 시기의 작품이 수백 수로 추산되고, 신라에 귀국해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남겼을 터이나 거의 인멸되고 현재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에 수록된 60수를 포함하여 120여 편이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만한 현존 작품만으로도 신라 한문학의 유산으로서는 양적으로 가장 많은 것이요, 질적으로도 발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시세계에는 자연 경물을 읊은 것, 교유 관계를 읊은 것, 풍속을 읊은 것 등도 있으나, 특히 지식인으로서의 시름과 번뇌, 비판적인 내면의식을 표출한 것이 많고, 또 그 가운데에 빼어난 작품이 많다.
이제 주요한 작품을 들어보기로 한다.
蜀葵花 | 접시꽃 |
---|---|
寂寞荒田側 | 거친 밭 언덕 쓸쓸한 곳에 |
繁花壓柔枝 | 탐스러운 꽃송이 가지 눌렀네. |
香經梅雨歇 | 매화 비 그쳐 향기 날리고 |
影帶麥風欹 | 보리 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
車馬誰見賞 | 수레 탄 사람 누가 보아 주리 |
蜂蝶徒相窺 | 벌 나비만 부질없이 찾아드네. |
自慚生地賤 |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
堪恨人棄遺 |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
접시꽃은 제 자태를 한껏 발휘하지만 태어난 땅이 거친 밭 곁이므로 귀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벌 나비들만이 찾을 뿐이다. 이 같은 표현은 최치원 자신이 학문이나 문학으로 스스로 자부하지만 태어난 곳이 해외 변방이기에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당나라에서의 상심과 자기 모멸감을 담고 있다. 즉 시인은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도 외면당하는 접시꽃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途中作 | 길을 가다가 |
---|---|
東飄西轉路岐塵 | 동서로 떠돌며 먼지 나는 길에서 |
獨策羸驂幾苦辛 | 홀로 여윈 말 타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
不是不如歸去好 | 돌아감이 좋은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
只緣歸去又家貧 | 다만 돌아가도 집이 또한 가난하다네. |
이 작품은 길을 가면서도 일정한 방향과 목적지가 없어 동서로 떠도는 나그네의 고통과 외로움이 드러나 있다. 그렇다고 귀향해본들 포부를 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에서, 그야말로 외로운 구름 같은 신세의 자탄이 진하게 배어 있다.
郵亭夜雨 | 여관엔 밤비 내리고 |
---|---|
旅館窮秋雨 | 여관엔 늦가을 비 내리고 |
寒窓靜夜燈 | 고요한 밤 찬 창가에 등불만이. |
自憐愁裏坐 | 애달파라, 시름 속에 앉았노라니 |
眞箇定中僧 | 정녕 참선하는 중이 따로 없어라. |
위의 시에서도 나그네로서의 객고가 제시되고 있다. 그것도 가을비 부슬부슬 내려 더욱 고독과 수심에 잠겨 등불 돋우고 잠 못 이루는 모습이 그려진다. 참선하는 중처럼 앉아 있으나 내심으로는 번뇌의 불길을 끌 수가 없다. 그가 뜻한바 벼슬길이 여의치 못해서일까. 좀처럼 출세의 꿈을 실현할 수 없는 당나라에서 주변인으로서의 곤궁한 나날이 여실히 그려져 있다.
秋夜雨中 | 가을밤 비 소리에 |
---|---|
秋風惟苦吟 | 가을바람에는 괴로운 시뿐이던가 |
擧世少知音 | 세상에는 지음(知音)이 드물구나. |
窓外三更雨 | 창밖에는 한밤중 비 내리는데 |
燈前萬里心 | 등불 앞에 내 마음 아득하여라. |
이 시는 흔히 최치원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이다. 여기에서도 시인은 자기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벗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수심에 잠기고 있다. 삼경이 지나도록 잠 못 이루며 가을바람 가을비에 고독을 반추하는 모습에서 뛰어난 문학과 경륜을 지니고도 제대로 발탁되어 쓰이지 못한 울울한 심사가 만리를 오감을 보게 된다.
春日邀知友不至 | 봄날 벗을 청하였으나 오지 않아서 |
---|---|
每憶長安舊苦辛 | 늘 장안에서 고생하던 일 생각하면 |
那堪虛擲故園春 | 어찌 고향의 봄을 헛되이 보내랴. |
今朝又負遊山約 | 오늘 아침 산놀이 약속 또 저버리니 |
悔識塵中名利人 | 세속의 명리인 알게 된 것 후회스럽네. |
일찍이 유학하여 과거 급제하고 벼슬하면서 보냈던, 당의 수도 장안에서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생각할 때, 고국에 돌아와 맞는 봄의 흥취는 그냥 지나쳐 버려두기 어렵다. 친구를 불러서 함께 봄 동산에서 놀자고 약속했는데 벗이 와 주지를 않는다. 그래서 최치원은 그 친구가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좇기에만 바쁜 명리인(名利人)인 줄 모르고 사귀게 되었다면서 약속을 저버린 친구를 탓하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 자신도 이전에는 당나라에서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세상의 명리를 추구했고 또 그것이 여의치 않아서 상심했던 사실에서 볼 때, 위의 시는 단지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는 친구에게 부친 시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여 부친 글이기도 하였다. “세속의 명리인 알게 된 것 후회스럽네”라는 결구가 바로 틀려버린 세상에서 입신양명한다는 일의 부질없음을 깊이 인식한 자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
入山詩 | 산속에 들어가며 |
---|---|
僧乎莫道靑山好 | 중아, 청산이 좋다 말하지 말라 |
山好何事更出山 | 산이 좋으면 무엇 하러 나오느냐. |
試看他日吾踪跡 | 두고 보라, 훗날 나의 자취를 |
一入靑山更不還 |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
산속의 스님에게 준 위의 시에서 최치원은 분명하게 입산의 뜻을 밝히고 있다. 그것도 한번 산속에 들어가면 다시는 인간 속세로는 나오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은 산중에서 수도하면서도 때로 산문(山門)을 나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오가지만 자신은 한번 산에 들어가면 세상과의 인연은 다 끊어버리고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점에서 예사롭지가 않다.
사실 최치원은 신라 진성여왕 때에 아찬이라는 벼슬길에 올랐지만, 이미 신라의 국운은 기울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의 포부를 실현할 방도가 없었다. 각간 위홍을 비롯한 세력자들이 황음한 여왕과 더불어 정사를 문란하게 이끄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원망 소리가 높았고, 바른 신하들의 충성스런 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입산하며 이 시를 남겼는데, 과연 뒷날 최치원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이바지하고자 했던 신라 사회에 대한 상심과 환멸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題伽倻山讀書堂 | 가야산 독서당 |
---|---|
狂奔疊石吼重巒 | 돌 사이 세찬 물에 온 산이 부르짖어 |
人語難分咫尺間 | 곁의 사람 말소리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
常恐是非聲到耳 | 옳다 그르다 시비 소리 귀에 들까 늘 두려워 |
故敎流水盡籠山 |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에워쌌네. |
가야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던 최치원은 세상과 결별한 자로서의 격절감과 그래도 못내 걱정스러운 나라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지척 간에도 사람 말소리조차 알아듣기 어렵게 울부짖는 계곡 물소리로 하여금 세상의 시비 소리 귀에 들어옴을 막게 하였다는 표현은 세상에 대한 근심을 완전히 떨쳐 버린 초탈한 심사를 보여 주기보다 오히려 세상 근심을 끊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가야산 홍류동의 독서당에서 사색에 잠겨 일생을 돌아보는 마음은 그야말로 처연하였을 터이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불철주야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격문인 <격황소서>를 짓고 일약 문명을 드날렸지만 변방의 외국인 출신이었던 데다가 당나라도 말기의 어지러움에 처하여 더 이상 크게 진출할 수가 없었다. 금의환향의 모습으로 귀국하여 조국 신라에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치국의 이상을 실현해 볼 수 있는 지위에는 오를 수도 없었고 실권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지방관으로 맴돌 뿐이었다. 당나라에서나 신라에서나 최치원은 정치의 중심부에는 다가설 수 없었기에 그의 큰 포부는 한갓 꿈으로만 남아 있어야 했던 것이니 얼마나 안타까운 심사였겠는가.
더구나 신라 사회의 말기적 징후가 여러가지로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에서, 그의 고심과 번뇌는 그냥 속세에서 안주할 수 없게 만들어, 마침내 가야산 깊은 산중에 자취를 감추고 은거하게 하였던 점을 위의 시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작품들에서는 주로 최치원의 번민과 좌절, 실의와 은둔의 심경이 그려져 있다. 그는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급제하고 문명을 떨쳤으니 크게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반면 그의 내면세계는 항상 나그네로서의 외로움과 상심이 넘실거렸다. 당나라에서나 금의환향한 신라에서나 그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었기에 자연히 울울한 수심을 담아낸 작품들이 다수 산출되었고, 또 그것들이 우리의 심금을 절실하게 울리는 것이다.
한편 최치원은 세태와 사회를 비판 풍자한 작품을 여럿 남기기도 하였다.
위의 시는 저 가난한 백성의 곤고한 삶에도 눈을 돌려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후대의 애민시(愛民詩)의 전통을 형성하는 선구적 작품이 되었다. 종일 수고하며 베짜는 여인은 생산에 종사하는 가난한 민중의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애써서 짜 놓은 비단은 결코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처지이다. 자신의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되고 마는 가련한 백성의 삶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점에서, 애민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웃집 딸의 수고를 비웃는 강남녀의 건실하지 못한 삶의 행태 역시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최치원은 두 여인의 삶을 대비시켜 놓음으로써 잘못된 사회의 단면을 부각시키며 우수에 잠기고 있다.
寓興 | 세태에 빗대어 |
---|---|
願言扃利門 | 원컨대 이욕의 문을 막아 |
不使損遺體 | 부모께 받은 몸 상하게 말라. |
爭奈探利者 | 어찌하여 이끝 좇는 사람들 |
輕生入海底 | 목숨 가벼이 바다 밑에 들어가나. |
身榮塵易染 | 몸의 영화는 티끌에 물들기 쉽고 |
心垢非難洗 | 마음의 때는 잘못을 씻기 어렵다네. |
澹泊與誰論 | 담박한 맛을 누구와 의논하리 |
世路嗜甘醴 | 세상 사람들 단술만 즐긴다네. |
사람들이 명리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고 탐욕을 부리나, 그것이 바로 몸과 마음을 망치고 타락시키는 원인이다. 그렇다고 담담한 삶의 가치를 함께 의논할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까운 세속의 추세이다.
題芋江驛亭 | 우강역 정자에서 |
---|---|
沙汀立馬待回舟 | 강변에 말 세우고 돌아오는 배 기다리니 |
一帶烟波萬古愁 | 한 줄기 연기 물결 만고의 시름이네. |
直得山平兼水渴 | 산이 곧 평지되고 이 강물 다 마르면 |
人間難別始應休 | 인간 세상에 이별도 비로소 그치련만. |
역마 머무는 곳과 강나루는 인간의 애끊는 이별의 현장이다. 세월이 수없이 흘러도 이별의 슬픔은 그곳에서 되풀이되게 마련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곧 만난 사람은 언젠가 이별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 운명의 질곡에서 한번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 하고 골몰할 때 비약적인 상상력이 발동된다. 즉 저 산이 낮아지고 대신 저 강물이 말라 버리면 강나루에서의 슬픈 이별은 아주 없어질 터이다.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의 표현이 바로 그 같은 엉뚱한 발상이다. 이 같은 발상법은 이별시의 절창이라는 고려조 정지상(鄭知常)의 시 송인(送人)에서도 다음과 같이 읊어 두 작품 간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送人 | 벗을 보내며 |
---|---|
雨歇長堤草色多 | 비 맞은 언덕에 풀빛 더욱 푸른데 |
送君南浦動悲歌 | 남포에서 님 보내니 노래도 구슬퍼라. |
大同江水何時盡 | 대동강 강물은 어느 때나 마를까 |
別淚年年添綠波 | 해마다 이별 눈물이 푸른 물결 더하누나. |
물론 정지상의 위의 시에서는 대동강 물이 결코 마를 리가 없고 인간의 이별의 슬픔도 끝이 날 날이 없으리라는 현실 인식이 덧붙여졌다. 그러나 두 작품의 시적 상상력은 서로 합치되고 있다.
윤주(潤州)는 지금 중국의 강소성 진강현이다. 그곳에 있는 절, 자화사(慈和寺)를 찾아 읊은 작품인데, 속세와는 격절되어 있는 산중의 절에 올라 세속의 인간사에서 빚어지는 흥망성쇠의 흐름을 되돌아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자기성찰이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에 대한 자기갱신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사람이 세속에 묻혀서 지낼 때에는 세속적 부귀공명에 인생의 모든 가치와 의미가 있는 양 착각하여 그에 골몰하고, 추구하는 바가 뜻같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애통해하고 한탄과 수심에 잠기게 된다. 초탈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늪에서 헤쳐 나올 자가 누가 있겠는가. 또 애당초부터 현실에서 몸을 빼서 정신과 영혼을 초월적인 세계에 노닐게 한 사람이 과연 있었던가.
그러나 사람이 어떤 절실한 계기를 맞아서 세속적 삶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사태를 직시하게 되면 지나온 삶이, 흥망성쇠에 따른 희로애락이 기실 덧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이 시에서도 바로 그 같은 깨달음의 과정이 나타나 있다. 즉 시인은 속세의 티끌 자욱한 갈랫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절을 찾아와 산수자연에 처하고 보니 그가 지금까지 골몰해 왔던 세간의 일들이란 것이 한갓 사소한 것들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되돌아봄의 여유에서 얻어진 새로운 인식인 것이다. 제1, 2구에서 그 같은 관조적 인식이 표출되고, 제3, 4구와 제5, 6구에서는 대구적 표현을 통하여 이를 구상화하고 있다. 즉 인위적인 뿔피리 소리와 자연적 물결, 또 시간과 더불어 영속하는 청산과 그 산자락에 누운 유한한 고금의 인물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짐으로써 자연과 인간사 사이의 어긋남을 똑바로 헤아리고 있다. 유한자가 무한의 경지를, 순간적 인생이 영속적인 자연을 동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간파하고 자각하게 되면, 속세적 가치의 성취에만 모든 소망과 보람을 걸고 매달려 온 자아의 실상이 얼마나 부질없었던가를 비로소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한시 가운데서도 절구, 율시 같은 근체시에서는 특히 대구의 기법을 중시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인위와 자연, 단절과 영속, 소리와 색채 등의 대비가 절묘하게 구사되어 있어 시적 효과를 다면적, 중층적으로 고조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시인은 시를 통해서 이를 일찍이 포착하고 깨달음의 시의 경지를 개척한 사씨(謝氏) 집안 시인들을 떠올림으로써 문학을 통한 덧없음의 극복과 깨달음의 획득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한에 잠겼던 자세에서 벗어나 삽상한 정신을 회복하게 되었음을 제7, 8구에서 보여 준다.
조선 초기의 서거정이 펴낸 『동인시화(東人詩話)』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문창후 최치원은 당나라에 들어가 급제하여 문명을 드날렸다. 윤주 자화사에 붙인 시 가운데 ‘畵角聲中朝暮浪 靑山影裏古今人’의 시구는 뒷날 신라 사람이 당나라에 들어가 좋은 시를 사려고 하자 그 곳 사람이 바로 이 대목을 써 주었다.” 이것은 이 시가 당나라 시인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고 애송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삶의 덧없음 또는 깨달음은 신라인과 당나라의 국가, 민족적 차이나 옛날과 지금의 시공간적 격차를 뛰어넘어 문학의 한 항구적 주제의식이 됨을 이 작품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위의 시는 비관적 세계인식의 산물이다. 이 시의 창작 경위는 당성(唐城)에 나그네로 놀러 갔을 때, 선왕(先王)때의 악관(樂官)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밤에 두어 곡을 노래하며 선왕을 그리워하고 슬피 울기에 시를 지어 준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사의 성쇠가 무상하니 뜬구름 같은 인생이란 슬프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속에 항상 슬픔에 젖고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음을 읊은 것이다. 최치원 역시 해외 출신의 한 나그네로서 과거 급제와 벼슬살이의 영화도 맛보았지만, 그의 떠돌며 방황하는 영혼과 넘치는 감회는 이 같은 비관적인 정조에 쉽게 휩싸이게 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무상한 인생에 대한 공감의 눈물을 함께 흘리고 있다.
이상으로 최치원의 시문을 통해 그의 의식 세계를 살펴보았다. 시세계가 다양하지만 특히 유자 지식인으로서 현실에서 오는 시름과 고뇌, 비판적인 내면의식 등을 표출한 작품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오는 고뇌의 정서를 읊은 작품은 대부분의 경우 그의 재당(在唐) 시절에 지어진 것들로서, 현실인식의 깊은 내면화를 통한 보다 고양된 내면정서의 표출이라는 점에서는 한층 심오한 시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최치원은 남다른 포부와 각고의 노력으로 당대의 우뚝한 문사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는 하였으나, 그 자신 주변국의 한 시객으로서의 지역적, 정신적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세계인식 면에서의 치열성은 자연히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강한 서정성을 가지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치원의 문집에는 당대의 말기적 현상에서 초래된 다양한 형태의 병리적 현상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는 가난하고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가 하면, 왜곡된 생산관계 속에서 결국 희생되고 마는 가련한 백성들의 삶의 실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당대의 잘못된 사회의 단면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최치원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이러한 양상은 가장 이른 시기의 지식인의 내면의식으로 읽을 수 있다. 선비의 사전적 정의가18)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유교 용어’이므로 바꾸어 말하면 유학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오늘날 의미로는19)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사회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질서 속에서 확립하는 원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할 때 최치원의 삶과 시세계에서 고뇌하는 모습은 곧 지식인의 고뇌, ‘선비(士)’로서의 책무를 자각하였기에 나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최치원은 가장 이른 시기의 유학적 지식인, 곧 선비의 원류라고 보아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Ⅳ. 결론
정읍은 사상사나 문학사로 보아서 특별한 지역이다. 특히 ‘새로운 시작’의 공간이다. 풍류도가 그렇고, 동학사상이 그렇고 모두 발원지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개화하였다. 노래나 가사문학도 그렇다. 다양한 사물 현상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결합, 융합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는 것이 풍류도의 사유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이 땅에 실현된 구체적인 현실 공간이 곧 정읍이다. 그러한 점에서 정읍과 최치원은 만나야 했고, 만나서 새로운 시작을 이루었다. 곧 ‘포함삼교 접화군생’의 실천 지역이 정읍이다. 풍류는 한국적 사유와 실천 방식이자 삶의 방식이다. 선비문화도 특정 사상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새롭게 넓게 해석하여 이러한 사유를 자기 시대 모순 해결에 구현하는 인간문화로 확장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