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한국과 근대
서구 유럽에서 역사 구분 방법을 제시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독일 역사학자 크리스토프 셀라리우스(Christoph Cellarius, 1638~1707)이다. 그는 유럽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는데, 이는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때부터 로마 제국이 몰락한 지점(476년)까지인 고대(Ancient), 로마 제국 몰락 이후부터 르네상스가 이전까지를 중세(Medieval),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부터 현대까지를 새 시대(New Period)로 구분한 것이다. 이 중 새 시대란, 중세라는 암흑기가 저물고 인간의 이성이 재생되기 시작한 시기로 정의된다. 구체적으로는 17세기 서유럽에서 일어난 과학주의와 계몽주의를 근간으로 한 근대(modern era)를 의미한다.1) 셀라리우스의 견해에 따르면, 서구의 근대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인간 이성의 능력이 부각된 ‘새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구분은 유럽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세계 각 지역의 모든 역사적 흐름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새 시대’나 ‘근대’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사용하더라도, 각 지역에서 그 시대를 유럽식 인간 이성의 부활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의 근대는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한국에서의 근대는 유럽과 달리 외세 침략으로 인한 자주권 상실과 서구 문명의 충격으로 종교적·사상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와 전통과의 단절을 겪었던 시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2) 따라서 한국의 근대는 주체성이 상실되고 외부의 강압을 겪었던 뼈아픈 시기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을 통한 강제적 문호 개방부터 1945년 일제강점기의 종결과 광복까지로 규정된다.
중국 역시 외세 침략을 근대의 출발점으로 본다.3) 중국에서는 1840년 아편전쟁 발발부터 1919년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인 5⋅4운동까지를 근대, 그 이후를 현대라고 구분하는 마오쩌둥의 시대 구분법이 널리 통용된다. 일본은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 앞바다에 쿠로후네[黒船]를 이끌고 온 사건 이후부터 또는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부터 태평양전쟁 패전까지를 근대, 그 이후를 현대라 간주한다.4) 이에 따라, 일본의 근대는 한국·중국과는 달리 외세 침탈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였던 시대로 평가된다.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동아시아가 근대를 인간 이성의 부활이 아닌 외세로 인한 직접적인 억압(피침략국 또는 침략국이든지)과 연결짓는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동아시아 근대의 개막은 외세 진출의 결과였으므로, 서구 문명의 대규모 유입 또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정치·경제·제도·교육 등 세속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 것은 당연했다. 근대 직전[근대 이행기]에도 점진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으나, 강제적 문호 개방으로 인해 서구 근대 문명이 봇물 터지듯 유입되면서 그 변화의 폭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전통적 가치관과 인식에도 심각한 뒤틀림이 발생했다. 이러한 변화 중 하나가 자연관(自然觀)이다. 자연관의 변화는 세속적 영역에서는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세속적 일상의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근대 한국에서는 자연관의 변화가 문명화 또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세속적 영역에서 주로 나타났으나, 종교적 영역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조용히 전개되었다.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의 종교운동에서 그러한 변화가 뚜렷하게 관찰된다. 그는 서구 문명이 내포한 문제점을 비판하며 새로운 가치를 담은 자연관을 제시했다. 이러한 자연관은 기존 종교들의 자연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Ⅱ. 세속 영역의 자연관 변화 : 개발과 이용
전통 시대 동아시아인은 경험 세계를 하나의 일련의 과정(process)으로 이해했다. 이는 저절로 그러한[自然] 속에서 계속 생성하고 변화하며 나아가는 과정 속에 세계가 놓여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영원하고 당연한 질서로 간주되었으며, 동아시아인들에게 시간으로 인식되었다.5) 동아시아인은 이 시간을 절대적인 변화의 법칙[天時, 易, 天道]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천지의 사덕(四德)인 원형이정(元亨利貞)·생장염장(生長斂藏)·춘하추동(春夏秋冬)의 변화로 나타났다.
동아시아인은 이 법칙에 따라 삶[人事]을 영위해야 한다고 보았다. 삶의 터전이 되는 동서남북의 ‘공간’ 방위와 ‘인간’ 윤리의 사단(四端)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원형이정-생장염장-춘하추동이라는 ‘시간’에 대응하여 설명한 점은 이러한 사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6) 재이설(災異說)·천견설(天譴說)이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이 발전한 형태의 사유들은 동중서(董仲舒, BCE. 179~104) 학파에 의해 음양오행과 감응의 논리가 더해지고 체계화되었다.7) 이와 같은 작업이 주로 유교 집단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사상이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에 유입된 불교 역시 유사한 관점을 공유했다. 불교는 존재와 법이 연기(緣起)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기를 본성으로 삼는 우주 만물이 상호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천지 만물은 동근(同根)이며, 물질과 비물질을 포함한 모든 것은 연기의 업(業)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윤회하고 전생(轉生)한다. 따라서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 부분과 전체, 인간과 사물은 분리될 수 없으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보았다. 만물은 연기의 자성(自性)인 다르마에 따라 무위로 이루어지고 흩어지므로, 영원불멸이라는 개념은 인정되지 않는다.8) 불교는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삶이 구성된다고 강조했다. 하늘·만물·인간은 분리되지 않고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이러한 유기적이며 전일적(全一的)인 사유는 한국인에게 하늘과 만물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 법칙의 인과(因果)에 순응하도록 유도했다.
내용상 차이는 존재하지만, 큰 틀에서 주어진 법칙에 따라 인간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유교는 유사한 관점을 보였다. 이러한 관념은 전통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천지 또는 만물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한국인의 전통적 삶은 새로운 세계관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세속 영역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는 외부 사물을 타자화하여 단순한 객체로 규정하고, 인간이 이를 마음대로 착취하고 조작하려는 서구 근대 문명이 소위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에 유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문명화 과정은 전통적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한편, 하늘과 만물을 바라보는 전통적 인식에도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이라는 용어의 정의가 확장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이미 예정된 결과였다.
서구 문명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서구 문물의 개념과 용어는 주로 일본식 번역 한자어를 통해 한국에 전달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에 사용되던 전통적 용어가 근대 문물의 영향을 받아 의미가 변형되거나 중첩되기도 했다. 예컨대, 시니피앙(signifiant)은 동일하게 유지되었지만, 시니피에(signifié)가 바뀐 경우라 할 수 있다.9) ‘자연(自然)’이라는 단어 역시 이러한 과정을 겪었다.
‘자연’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노자(老子)』로, ‘사람은 땅을 본받고[人法地], 땅은 하늘을 본받고[地法天], 하늘은 도를 본받고[天法道],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라는 구절이 그 예이다.10) 그중에서도 자연은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인위적이지 않은 사물의 본래 무위(無爲) 상태나 본성을 의미한다. 시대나 학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동아시아에서 이천 년이 넘게 사용된 자연의 정의는 이러한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근대가 시작되며 서구 문물이 유입되자, 자연이라는 시니피앙은 서구적 개념으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자연은 ‘nature’라고 표현되며, 무기물과 유기물 같은 외적 사물의 총체나 세계 혹은 환경으로 바뀐 시니피에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서구의 ‘nature’를 번역하기 위해 자연이라는 단어를 채택하면서 가속화되었다.11)
nature는 라틴어 natura에서 단어로, 본래 ‘태어난 원래 그대로의 것, 본질이나 본성’을 의미한다. 이는 『노자』가 전하는 자연의 의미와 유사하다.12)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들은 natura를 살아있는 개별 사물이나 그 내적 본성(본질), 또는 자립적 법칙으로 인식하며, 인간과 분리되지 않는 비이원론적 태도로 접근했다.13)
중세 이후 서구에서 natura는 영어 단어 nature로 번역되었다. 이 nature는 헤브라이즘의 강한 영향을 받아 최고신의 피조물로 정의되었다.14)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최고신은 nature와 인간을 창조하였으나, 인간은 최고신과 동일한 형상을 지녔기에 nature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진다.15) 따라서 인간이 nature 위에 군림하고 이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최고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행위로 간주된다.16) 이처럼 서구 중세에서 nature는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을 상실하며 탈성화(desacralization)되었다. 그렇게 신성을 잃은 nature는 인간과 대립하는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고, 인간의 기술적 조작과 양적 분석의 대상이자 착취와 이용이 가능한 도구적 물리 세계로 전락하였다.17)
근대를 연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 르네 데카르트(1596~1650), 존 로크(1632~1704), 아이작 뉴턴(1643~ 1727) 등은 중세의 nature 개념을 계승하고 이를 체계화하였다. 베이컨은 인간이 nature를 지배할 권리를 최고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nature를 착취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사고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이분법 사고를 통해 nature를 탐구와 지배의 대상으로 규정하며 기계론적 세계관을 확립했고, 이는 인간의 nature 약탈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사유를 고전역학의 과학적·결정론적 기계관 패러다임으로 구체화했으며, 로크는 이를 철학에 도입했다.18) 이러한 사상은 nature를 타자화하여 인간과 단절시키고 단순히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시켜 인간의 종속물로 만드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19) 유럽의 근대는 기독교에 대한 절대적 의존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이성을 부활시킨 시기로 특징지어지지만, nature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여전히 기독교적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
근대 서구에서도 유물론적·기계론적 사고의 반대편에서 nature를 유기적 과정(organic process)으로 인식하고,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흐름이 존재했다.20) 이러한 관점의 주요 사상가로는 라이프니츠, 괴테, 헤겔, 프리드리히 셸링 등 이른바 ‘자연의 철학자(philosophers of nature; Naturphilosophen)’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의 외적 사물만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생명력과 생산성(productivity)을 중시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nature는 죽어있는 외적 대상이 아니라 신화적인 질서의 역사를 가진 유기적 실체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비주류로 남았고,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점차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21)
서구 근대 문명의 주류는 여전히 nature를 기계론적·유물론적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nature 사상은 근대 동아시아에도 유입되었으며, 여기서 nature는 인간 이성의 작동에 따라 이용되어야 하는 외적 대상이자, 정신과 물질이 분리된 상태에서 존재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일본의 근대 학자들은 nature를 번역할 때 외적 대상뿐 아니라, 정신과 대립하는 물질적 개념까지 고려해야 했다.
동아시아에서 nature에 대응하는 전통적 용어로는 천지, 만물, 만유(萬有), 만상(萬象), 금수초목(禽獸草木), 산천초목(山川草木), 법계(法界, Dharmadhatu) 등이 있었다.22) 그러나 이 용어들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대립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서구의 nature 개념과는 다른 맥락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용어들은 서구적 nature의 번역어로 채택되지 않았다.23) 또한 모리 오우가이(森鷗外, 1862~1922)를 비롯한 일본의 번역가들은 ‘천지’나 ‘만물’과 같은 용어가 외적 대상 세계를 나타낼 수는 있으나 정신에 반대되는 물질적 개념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스스로 그러하다’는 전통적 자연의 시니피에에 물질(외적 대상 세계) 전체를 의미로 추가하여 ‘자연’이라는 번역어를 만들어냈다.24) 이로 인해 ‘자연’이라는 시니피앙에 담긴 시니피에는 ‘스스로 그러한 상태’라는 전통적 의미와 더불어 과학적·유물론적·결정론적·도구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외부 대상 세계와 사물을 지칭하는 개념이 추가적으로 포함되었다.
서구 문명의 유입과 함께 한국에서도 이러한 서구적 nature 개념이 확산되었으며, 일본을 통해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소개되었다. 이 새로운 서구적 ‘자연’개념은 한국인들이 기존에 이해했던 전통적 자연, 즉 『노자』의 ‘스스로 그러한 상태’ 또는 인간이 본받아야 할 천지 만물의 법칙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구 문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한국인들은 ‘스스로 그러한 상태’라는 전통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등의 부사나 형용사로만 사용하게 되었고, 명사로서의 ‘자연’은 외적 사물의 총체를 의미하는 서구적 nature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근대적 ‘자연’은 세속 영역에서 인간과 대립하는 대상으로 규정되며,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유는 문명화 또는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빠르게 확산되었다. 전통 한국에서도 주변 환경과 사물을 이용 대상으로 간주했으나, 탈성화된 서구의 nature 개념을 담아 번역한 전문 용어(terminology) ‘자연’의 확산은 그 이용의 정도를 과도한 착취와 폭압으로 치닫게 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의 근대 문명화 과정에서 거대한 에토스를 구축했으며, 결과적으로 근대 한국에서 세속적 자연관의 강력한 변화를 초래했다.
III. 종교 영역의 자연관 변화 : 변화와 치유
근대 개막한 이후, 한국에서는 서구 과학주의 세계관에 기반한 자연관이 세속적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동학을 비롯한 종교적 영역에서도 전통적 자연관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자연관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의 종교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 서구 근대 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당시 한국의 지식인 대다수는 자연을 도구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이에 반해, 증산은 이러한 관점을 부정하며, 자연을 종교적 관점에서 ‘변화와 치유’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증산은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추종하던 서구 근대 문명의 세속적 자연관을 비판하였다. 대순진리회 경전인 『전경』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근대 서양의)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 .25)
증산은 서구 근대 문명의 출현과 성격에 대해 독특한 종교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서구 근대 문명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 1552~1610]의 사후 활동으로, 동양 문명신과 지하신이 천상 문명을 모방하여 전한 결과로 나타났다. 둘째, 이 문명은 물질적 측면의 발전에 치우쳐 있었으며, 물질적 가치를 지나치게 중시한 인간은 교만에 빠져 자연에 대해 폭압적이고 지배적인 태도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위 인용문에서 사용된 ‘자연’은 『노자』가 말한 인위적이지 않은 사물의 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서구 근대적 개념에서 탈성화, 타자화, 도구화된 nature의 번역어로 이해된다. 다만, 증산이 실제로 이 근대 서구적 자연 개념을 장착한 단어를 직접 언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는 증산의 언설을 처음으로 모아 간행한 최초의 서적인 『증산천사공사기』(1926년)26)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다음과 같이 ‘자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利瑪竇가 처음 東洋에 와서 道를 行하야 天國을 셰우랴하되 儒敎의 根據가 깁허서 그痼弊를쉽게 改革 할 수 업슴으로 다만 歷書를 改製하야 民時를 밝힌 後 東洋의 大神明을 거느리고 西洋에 도라가서 文運을 열으니라 대개 古昔에는 天上神과 地下神이 各各方域을 安保하야 서로 侵瀆하지 못하더니 利瑪竇가 비로소 그 界限을 開放하야 天上地下에 神明이 來往하게되니 이로부터地下神이 天上의 모든 妙法을 본밧아네려 地下에 벳펏나니 西洋의 모든 文物은 天國의 모형것이니라 利瑪竇가 西洋을 開闢하야 天國을 建設하랴하되 그文明은 도로혀 人類의 相殘을 助長케되니라. 利瑪竇의 일이 헛되게 되야 道의 限源이 치게 됨으로 내가 비로소 大法國 天啓塔에서 天下에 大巡하야 甲子로부터 八卦에應하야 八年을 經한 後 辛未로써 降世하얏노라.27)
『증산천사공사기』가 간행된 지 3년 후인 1929년에 『대순전경』 초판이 발행되었다. 이 문헌에는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자연’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西洋人利瑪竇가東洋에 來하야 天國을建設하려고 여러 가지意圖를 發하엿스나 容易히모든積弊를고치고 理想을 實現하야 마참내 ᄯᅳᆺ을이루지못하고 다만天上과地下의境界를 開放하야 예로부터各히境域을 固據하야 서로넘나들지못하든神明으로햐여금 서로交通케하고 그死後에 東洋의文明神을引率하고西洋에歸하야 다시天國을建設하려하였나니 일로부터 地下神이天上에올나 모든 妙法을바더본내려 사람의게慧竅를열어주어 人世에모든文化와利器를啓發하야 天國의模型을 본ᄯᅥᆺ나니 이것이現代의文明이라 그러나이文明은 다만物質과事理에 技藝를精極하엿슬ᄲᅮᆫ이오 實際로는도로혀 人類의驕肆와殘暴를增長하야 悖法과非義로 天道를抗爭하며 自然을征服하려는氣勢를呈하야 儌天과慢神이極에達하니 이에神威가墜失하고 三界가混亂하야 天道와人事가常度를어김으로 元始의모든神聖佛菩薩이會合하야 三界의混亂과神人의否劫을 悲悶하야 救治의急을九天에 呼籲함으로 내가이에 西洋大法國天階塔에降하야 三界를周視하고 天下에大巡하다가 … .28)
『증산천사공사기』는 편년체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반면, 『대순전경』 초판은 증산의 사상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주제별로 13개의 장(章)으로 나누고, 문장과 문법을 당시 기준으로 ‘현대적(1920년대 기준)’으로 수정하여 출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한국에서 nature의 번역어인 ‘자연’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06년경으로 추정되며, 1920년대까지는 서구 근대적 개념의 ‘자연’과 『노자』에서 유래한 전통적 개념의 ‘자연’이 혼재되어 사용되었으나, 점차 서구적 개념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는 보고가 있다.30) 따라서 『대순전경』 초판 간행자들이 증산의 언설을 현대적으로 수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이라는 서구 근대적 개념의 용어를 삽입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비록 증산이 근대적 개념의 nature 번역어인 ‘자연’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서구 근대 문명이 전한 정복과 지배의 자연관을 비판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증산처럼 서양 물질문명의 문제와 인간의 교만, 그리고 자연 파괴를 비판하는 것은 더 이상 특별히 주목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나온 시기와 장소가 1900년대 초기 한국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0여 년 전 당시 서구 물질문명은 비(非) 서구인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여겨졌으며, 개화를 시작한 한국 역시 그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이었던 당시 한국은 적자생존과 우승열패로써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하던 사회진화론과 문명개화론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예컨대, 유길준은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통한 서구화, 서재필과 윤치호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미국화를 민족의 과제로 제시했다.31) 당시 문명개화론자들은 서양 문명의 핵심을 기독교에 두고 기독교화를 추진했으며, 미국을 이상적인 모범 국가로 동경하는 한편, 현실적으로는 일본화를 목표로 삼았다.32) 개화기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조차 우승열패의 인종론에 영향받아 백인을 찬양하고 제국주의를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논조를 유지하고 있었다.33)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당시 지식인들은 서구 중심적 시각에서 자신의 조국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강했다.34) 이처럼 과학주의에 기반한 서구 근대 문명의 폐해를 비판하는 작업이 기대되기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에서, 증산이 역사를 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서구 문명의 문제를 적시한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35)
자연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세속적 자연관을 비판했던 증산은 이와 대조되는 새로운 자연관을 제시했다. 이는 그의 다음 발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ㄱ)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神道)로부터 원(冤)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人事)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36)
(ㄴ) 내가 삼계 대권을 주재(主宰)하여 선천의 모든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선경을 만들리라.37)
증산이 말한 자연관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상극과 상생의 자연관이고, 둘째는 원한과 해원의 자연관이다.
증산의 발언 (ㄱ)은 자연 만물이 선천적으로 상극에 지배를 받아왔음을 언급하며, 개벽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서는 만물이 상생의 도를 따르게 될 것임을 제시한다. 여기서 상극과 상생은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두 가지 상반된 관계를 뜻한다. 상극은 서로 억압하는 관계를, 상생은 서로 살리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 두 관계는 적절한 균형을 통해 만물의 성장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상극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 인간과 자연 만물이 참혹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증산은 자신이 자연을 지배하는 상극 원리를 폐기하고, 상생의 도를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장담했다.
증산의 주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자연을 지배하는 원리가 상극에서 상생으로 바뀐다고 명시한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근대 신종교의 출발점으로 알려진 최수운(崔水雲, 1824~1864)은 ‘다시 개벽’을 통해 새 시대가 열린다고 주장하였고, 『정역(正易)』으로 유명한 김일부(金一夫, 1826~1898)는 개벽 이전의 혼란한 세계를 선천(先天), 개벽 이후의 새 시대를 후천(後天)으로 처음 지칭하였다. 이후 증산은 선천과 후천의 특징을 상극과 상생으로 명확히 대비시켰다. 즉, 개벽 이전의 선천에서는 자연 만물이 상극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개벽 이후의 후천에서는 자연 만물이 상생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38) 증산은 수운과 일부가 새 시대의 도래를 주장한 데서 더 나아가, 낡은 시대와 새 시대의 만물 지배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더구나 증산은 단순히 지배 원리의 변화를 예언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는 오행의 수화금목(水火金木) 관계에서 상극 원리인 수극화(水克火)·화극금(火克金)·금극목(金克木)을 대신하여, 상생 원리인 수생어화(水生於火)·화생어수(火生於水)·금생어목(金生於木)·목생어금(木生於金)을 제시하였다.39) 이는 종교적 차원에서 진행된 그의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상극 관계에서 ‘극(克)’을 ‘생어(生於)’로 전환하는 것은 해원과 보은을 바탕으로 상극에서 상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며,40) 궁극적으로는 상극 자체가 사라지는 원리로 해석될 수 있다.41)
따라서 기성종교 전통들이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고 그에 순응하는 삶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면, 증산은 이러한 전통적 관점을 부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선천 자연의 지배 원리를 상극으로, 후천 자연의 지배 원리를 상생으로 정의하고, 자연의 변화를 자신이 직접 이루어낸다고 선언하였다. 개벽을 기점으로 자연의 지배 원리가 달라진다는 그의 주장은 명백히 종교적 영역에서 일어난 자연관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증산의 발언 (ㄱ)에 따르면, 개벽 이전의 선천은 상극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로 인해 자연 만물은 억압과 방해를 받아 답답함, 억울함, 분함, 원망함, 뜻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겪게 된다. 그 결과 원(冤)이 발생하였다.42) 증산은 이러한 원(冤)이 풀리지 못하고 누적되면서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고 재앙으로 점철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천지는 새롭게 뜯어고쳐져야 하며, 그는 이를 삼계공사(三界公事)·개벽공사(開闢公事) 또는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명명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천지의 도수(度數)를 정리하여 새롭게 구성하고, 신명을 조화(調和)하여 만고의 원(冤)을 풀고, 상생의 도로써 새 시대를 건설하는 것이다. 원(冤)이 풀리는 과정에는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며, 증산은 이를 해원시대라고 명명하였다. 해원시대는 선천과 후천 사이에 존재하는 과도기의 일부로 정의된다.43) 증산은 자신이 천지인 삼계를 주재(主宰)하는 권능을 가진 존재로서 해원시대와 그 뒤이은 새 시대를 열었다고 선언하며, 이 과정을 1901년에 시작하여 1909년에 마쳤다고 주장하였다.44)
그의 발언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자연의 만물이 원한을 갖는다고 언급한 점이다. 증산은 자연의 만물, 즉 인간뿐만 아니라 망자(亡者), 동물, 심지어 땅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가 상극의 지배를 받아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원한을 풀어야만 세상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45) 자연이 원한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과 그 원한을 해소해야 한다는 관점은 도교의 『태평경』에 등장하는 해원결(解冤結) 사상이나 무속의 한풀이·씻김굿에서도 일부 유사한 맥락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증산의 해원사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에서 차별화된다. 그의 원한의 원인을 인간의 책임에 국한하지 않고 우주의 구조적 모순에서 더 큰 원인을 찾으며, 원한의 범주와 해원 방식도 기존과 다르다. 특히 윤리적 실천을 강하게 강조하는 점에서 독특하다.46)
자연, 즉 천지 만물이 원한을 갖는다는 이 독득한 발상은 다음 그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니 비록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옮겨가면 무너지나니라.47)
따라서 자연이 원한을 가진다고 할 때, 그 원한의 주체는 생명과 의지를 지닌 신명(神明)이다. 증산은 신명이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풀잎이나 벽 등 만물의 모든 곳에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생기론[生氣論, vitalism]보다는 애니미즘에 가깝다. 생기론은 질료나 잠재력이 특정 형상을 얻어 실현된다는 의미의 엔텔레키(entelechy)를 생명현상의 본질로 삼으며, 신명이라는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반면, 애니미즘은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며, 증산이 만물에 신명이 깃들었다고 주장한 것은 명백히 애니미즘적 성격을 띤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관점이 단순히 전근대적이고 비문명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B. Tylor, 1832~1917)가 처음 제안한 애니미즘은 종교 진화론 패러다임 속에서 서구 유럽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비서구 원시 신앙을 폄훼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 논의되는 뉴 애니미즘(new animism)은 ‘살아 있는 세계(living world)’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과 자연의 절대적인 구분을 반대하는 관계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환경 위기를 초래한 서구의 물질주의적 인식론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점차 인정받는 추세에 있다.48)
증산에 따르면, 의지와 생명을 지닌 신명이 천지 만물, 즉 자연에 깃들어 있다. 따라서 자연의 존재들은 상극에 지배받은 결과로 원한을 가질 수 있다. 증산은 이러한 원한이 세상에 재앙을 초래하므로 반드시 해소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천지를 주재하는 자신이 직접 자연 만물의 원한을 해원시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자연, 보다 정확히는 신명에 대한 깊은 존중을 나타내며, 물질적이고 도구적인 자연관을 거부한 것이다. 또한, 그가 천지와 만물이 원한을 가진다고 보고 그 원한을 풀어내는 해원시대를 제시한 것은, 자연을 치유의 대상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증산이 보여준 독특하고도 차별화된 자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도수(度數)의 역할이다. (ㄱ)에서 증산은 만물의 해원과 새 시대의 도래를 위해 도수를 굳건히 조정한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도수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를 전개하는 일종의 프로그램을 의미한다.49) 도수에 따라 사건이 전개되고 역사가 구성된다는 점에서, 도수의 역할을 강조하는 증산의 자연관은 특정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목적론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목적론적 관점에 비판적인 서구 근대의 과학주의 문명과 대조를 이룬다. 근대 과학주의는 자연적 사건들 배후에 의도된 목적이 없으며, 모든 사건은 단지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벌거벗은’ 사실일 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인간은 이를 통해 자연적 사건을 통제하거나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전기의 법칙을 발견하여 전기를 생산하고 이용하는 인간의 행위는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사례이다.50)
정리하자면 상극에서 상생으로의 전환과 원한에서 해원과 치유를 강조하는 증산의 목적론적 자연관은 자연과 그 법칙에 순응하는 삶을 강조해 온 동아시아 기성종교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다. 더 나아가, 천지의 자연 만물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조정한다고 주장한 증산의 관점은 세계 종교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례라 할 수 있다.51) 따라서 증산은 20세기 초반 종교 영역에서 새로운 자연관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되어야 한다.
Ⅳ. 닫는 글
시대와 학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동아시아에서 자연 개념은 『노자』의 ‘스스로 그러하다’는 본성의 의미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그러나 근대가 열리면서 이 개념에는 두 가지 주요 변화가 감지된다.
첫째는 외부의 충격에 의해 형성된 세속적 변화로,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하려는 문명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서구 근대 문명은 nature를 외적 사물의 총체, 세계 또는 환경으로 정의하며 이를 철저히 타자화하여 착취와 이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상은 한국에 유입되며 ‘nature’가 ‘자연’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자연 개념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고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자연관 대신, 자연을 도구화하고 유물론적·기계론적으로 이해하는 서구 근대 자연관이 세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자연관은 오늘날 환경·기후·문명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다.
둘째는 내부의 개혁에서 비롯된 변화로, 그중 하나는 자연을 변화시키고 치유하자는 종교적 움직임이었다. 이 자연관의 변화는 증산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근대 서구 문명의 물질적이고 도구적인 자연관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주된 원인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자연의 명령과 법칙에 순응하는 전통적인 자연관을 부정하고, 상극에 지배되는 자연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며 이를 해체하고 상생의 원리로 재구성함으로써 새 세상[後天]을 개벽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증산은 자연을 신명이 깃든 거처로 간주하며, 자연 만물을 의지와 생명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였다. 그는 이러한 존재들이 상극의 지배 속에서 원한을 품게 되고, 그 원한이 세상에 재앙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원한을 해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며, 이는 자연에 대한 명백한 가치와 존중을 인정했기에 가능했던 관점이었다. 이러한 증산의 자연관은 전통적인 자연관에서 벗어나 종교적 차원에서 자연을 새롭게 조명한 독특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환경과 문명 위기의 대안으로 떠오른 뉴 애니미즘적 사고와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세속 영역에서의 자연 착취 관점이 생태 위기의 주요 원인이라면, 종교 영역에서의 자연 존중 관점은 생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관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증산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 만물의 해원은 현재와 미래의 생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적 자연관은 생태학적 차원에서 ‘에코(eco)-해원’이라는 주제를 논의하고 실천하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52) 따라서 증산의 종교적 자연관이 이러한 논의와 연계될 수 있다는 점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글을 닫으며 몇 가지를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이 글이 자연관 변화를 세속과 종교에서 각각 다르게 전개된 것으로 보았다고 해서, 세속과 종교의 명확한 이분법을 인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근대 세계에서 정교분리가 강조되면서 세속과 종교가 구분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세속과 종교의 빈번히 상호 교섭하고 혼합되었기 때문에 양자의 명확한 구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제강점기의 근대 한국에서도 정교분리와 정교유착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으므로, 세속과 종교의 완전한 분리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53) 따라서, 앞으로 근대성과 관련하여 세속과 종교가 서로 어떻게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지하듯, 종교가 사회를 변동시키기도 하고, 사회변동이 종교를 변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54)
둘째, 이 글은 종교의 자연관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과학화와 세계화가 상당히 진척된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토착 전통이나 기성종교의 신비주의적 자연관 회복에서 찾으려는 주장은, 실제 문제 해결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주장은 조화와 미덕을 강조하더라도, 실제로는 몽상에 그치거나 오만한 태도로 비치기 쉽다. 심지어 인간에게 무지를 강요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도 있다.55) 그러므로 종교의 자연관이나 생태 문제를 다룰 때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이 또한 차후 집중적으로 논의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