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음양합덕’과 ‘무자기’에 관한 정치철학적 고찰: 통약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모색

정병화 1 , *
Byung-hwa Chung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대진대학교 교수
1Professor, Unification Graduate School, Daejin University

© Copyright 2024,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24, 2024; Revised: Nov 29, 2024; Accepted: Dec 20, 2024

Published Online: Dec 31, 2024

국문요약

대순진리회의 ‘음양합덕’사상은 우리에게 ‘옅은 의미에서의 통약가능성’이라는 제3의 길을 제공한다. 니이체적 전통이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을, 헤겔적 전통이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강조한다면, ‘음양합덕’(陰陽合德)사상은 ‘이질성 속에서 동질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음양합덕’은 ‘나’와 ‘타자’가 대대적(對待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차 혹은 얽힘으로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나’와 ‘타자’ 간의 이러한 교차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와 ‘타자’ 간의 교차는 우리에게 정음(正陰)과 정양(正陽)이라는 실천적 상태에 부합하는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를 요구한다.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는 타자의 시선에 민감한 자아의 윤리적 태도와 관련된다. 타자의 시선에 민감한 자아란 항상 타자의 시선에 사로잡힐 정도로 타자에 대해서 열려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는 ‘나와 타자를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로 이끌면서, 나와 타자는 서로에 대해서 왜곡된 시선 없이 각자의 고유성을 상호 교환한다.

음양합덕을 위한 무자기가 사심의 배제를 통해서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통약가능성을 위한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의 재구성은 ‘정치적 입장의 배제’라는 규범적 조건의 부여로 제시된다. ‘정치적 입장의 배제’로 정립된 공적 영역은 정치적 입장의 물질적 토대인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들의 체험적 삶’으로 표면화된다.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들의 체험적 삶’에 토대한 나와 타자 간의 대화는 자연적 도덕감인 공감으로 제시된다. 타자의 체험적 삶에 묻어 있는 흔적으로서의 의미가 온전히 나에게 전달되어 나의 주관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정치적 입장의 배제’를 통한 공적 영역의 구성은 무자기라는 인간의 실천적 태도에 근거하여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관계의 회복을 추구한다.

Abstract

The philosophy of ‘Virtuous Concordance of Yin and Yang’ in the Daesoon Jinrihoe provides practitioners with a third path, which can be understood as a thin commensurability. While the Nietzschean tradition emphasizes heterogeneity over homogeneity and the Hegelian tradition emphasizes homogeneity over heterogeneity, the philosophy of ‘Virtuous Concordance of Yin and Yang’ seeks ‘homogeneity within heterogeneity.’ This notion can be described as the intersection or entanglement between the ‘self’ and the ‘other’ in a reciprocal relationship. However, this intersection between the ‘self’ and the ‘other’ does not naturally occur. It demands a practical attitude called ‘Guarding against Self-deception,’ which corresponds to the principle states of ‘right Yin and right Yang.’ The practical attitude of ‘Guarding against Self-deception’ is related to an ethical attitude of the self that is sensitive to the gaze of the other. A self that is sensitive to the gaze of the other refers to an openness to the other to the extent of being captivated by the gaze of the other. In other words, the practical attitude of ‘Guarding against Self-deception’ leads to a direct and essential dialog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self and the other, where both parties exchange their uniqueness without distorted perspectives.

‘Guarding against Self-deception’ for ‘Virtuous Concordance of Yin and Yang’ pursues a direct and essential dialog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self and the other and the reconstruction of the public realm based on ‘Guarding against Self-deception’ for the sake of commensurability. This is proposed by imposing the normative condition of the exclusion of political positions. The public realm established through the exclusion of political positions is manifested as the experiential lives of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towards the world, which is the material basis of political positions. Dialogue between the self and the other based on the experiential lives of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is presented as sympathy that occurs on a physical level. The meaning embedded in the other’s experiential life is fully conveyed to oneself and that influences one’s subjectivity. Thus, the construction of the public realm through the exclusion of political positions based on the practical attitude of ‘Guarding against Self-deception’ aims to restore a direct and essential dialogue relationship between the self and the other.

Keywords: 통약가능성; 음양합덕; 정음정양; 무자기; 공감; 공적 영역
Keywords: commensurability; Virtuous Concordance of Yin and Yang; right yin and right yang; Guarding against Self-deception; sympathy; public realm

Ⅰ. 들어가는 말

‘나’와 ‘타자’ 간의 ‘통약가능성’(commensurability)테제는 정치학 분야에서 오래되고 치열하게 전개된 논쟁적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나와 타자 간의 통약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니이체(F. Nietzsche)적 전통은 나와 타자 간에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어떠한 동질성도 부정하면서 나와 타자간의 관계를 힘의 논리로서 기술한다. 이 입장은 우리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시화된 모든 규범적인 것들의 한 가운데에는 나와 타자 간의 공존이나 어울림이 아니라 힘에 기초한 피의 투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나와 타자 간의 통약가능성을 주장하는 헤겔(F. Hegel)적 전통은 동질성을 전제로 한 나와 타자간의 수렴가능성을 주장하다. 그 수렴은 이성적 명령에 의해서 나와 타자 간의 차이를 극복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나와 타자 간의 수렴으로서 주어지는 규범들은 이론적으로 나와 타자 어느 누구에도 편파적이지 않는 중립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통약가능성’테제에 관한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 속에서 대순진리회의 ‘음양합덕’(陰陽合德)사상은 우리에게 ‘옅은(thin) 의미에서의 통약가능성’이라는 제3의 길을 제공한다. 니이체적 전통이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을, 헤겔적 전통이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강조한다면, 대순진리회의 ‘음양합덕’사상은 ‘이질성 속에서 동질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음양합덕’은 ‘나’와 ‘타자’가 대대적(對待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이중적 운동성에 기초해 있다. 그 이중적 운동성이란 ‘나’라는 존재는 타자를 ‘본다’(seeing)는 점에서는 주체(subject)이지만, 동시에 타자에 의해서 ‘보여진다’(being seen)는 점에서는 객체(object)가 되는 ‘나’와 ‘타자’ 간에 이루어지는 가역적 운동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중적 운동성 속에 놓여 있는 음양합덕은 어떤 하나로의 수렴이 아니라 ‘나’와 ‘타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차(intersection) 혹은 얽힘(entanglement)으로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나’와 ‘타자’ 간의 이러한 이중적 운동성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이중적 운동성은 우리에게 정음(正陰)과 정양(正陽)이라는 원리적 상태에 부합하는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를 요구한다.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는 이성주의자들이 말하는 신체적 사슬로부터 해방된 계몽된 이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 민감한 자아의 윤리적 태도와 관련된다. 타자의 시선에 민감한 자아란 항상 타자의 시선에 사로잡힐 정도로 타자에 대해서 열려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자기 충만한 존재가 타자의 시선에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독백적 목소리에만 몰두해 있다면, 무자기적 자아는 타자에 대해서 항상 열려있어서 타자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는 ‘나와 타자를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로 이끈다. 이 관계 속에서 나와 타자는 서로에 대해서 왜곡된 시선 없이 각자의 고유성을 상호 교환한다.

음양합덕을 위한 무자기가 사심의 배제를 통해서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의 재구성은 ‘정치적 입장의 배제’(exclusion of political position)라는 규범적 조건의 부여로 제시된다. ‘정치적 입장의 배제’로 정립된 공적 영역은 정치적 입장의 물질적 토대인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들의 체험적 삶’으로 표면화된다.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들의 체험적 삶’에 토대한 나와 타자 간의 대화는 자연적 도덕감인 공감(sympathy)으로 제시된다. 타자의 체험적 삶에 묻어 있는 흔적으로서의 의미가 온전히 나에게 전달되어 나의 주관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정치적 입장의 배제’를 통한 공적 영역의 구성은 무자기라는 인간의 실천적 태도에 근거하여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관계의 회복을 추구한다.

본고는 대순진리회의 음양합덕과 무자기라는 두 핵심적 개념의 범위를 세속적 차원에 한정하여 나와 타자 간의 통약가능성에 대한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대순진리회가 이 두 핵심적 개념을 신(神)과의 교감이라는 종교적 영역까지 확장하여 이해한다면,1) 본고는 이 두 핵심적 개념을 윤리적 차원에 한정하여 차용하고자 한다. 본고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첫 번째는 음양합덕이란 무엇인가이다(2장). 음양합덕은 음과 양이 어떤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이 대대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음과 양의 상호 교차 내지 상호 얽힘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음양합덕을 위한 정음정양의 실천적 태도로서의 무자기이다(3장). 정음정양이 음양합덕을 위한 음과 양의 원리적 상태를 기술한다면, 무자기는 정음정양이라는 원리적 상태에 부합하는 실천적 태도를 가리킨다. 세 번째는 무자기에 기초한 공적 영역의 재구성이다(4장). 여기서는 무자기에 기초한 공적 영역의 재구성을 통해서 통약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모색한다. 무자기에 기초해서 정립된 공적 영역은 정치적 입장이 배제된 ‘공감의 정치’(politics of sympathy)로 재구성된다.

II. 음양합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음양합덕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양론이 가지는 상관론적 사유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음양론에 대한 상관적론적 사유의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음양합덕을 음과 양이 새로운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2) “역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3)라는 『주역』의 계사전에 기술된 언명은 태극(太極)4)에 의해서 음과 양은 서로 연결된 채로 음(또는 양)은 양(또는 음)이 있어야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상관론적 사유를 지시한다. ‘상대가 존재함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가 존재한다’5)라는 음양론의 상관론적 사유는 음과 양이라는 상반적인 것의 근원적 연루(original involvement)를 강조한다.

이러한 음양론의 상관론적 사유는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에 대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 하나는 우리의 현존(dasein)에 대한 기술이다. 음양론의 상관론적 사유의 견지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은 개별적인 음과 개별적인 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태극에 의해서 음과 양이 근원적으로 연루된 ‘음양’의 형태로 현존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은 ‘음 속에 양’(陰中陽), ‘양 속에 음’(陽中陰)의 형태로 실존한다.6) 이미 자기 속에 타자라는 부정성을 품은 채로 존재하는 ‘음양’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김형효의 표현처럼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라는 애매한 존재(ambiguous being) 내지 결핍된 존재(deficient being)임을 각인시킨다.7) 이제 ‘나’라는 존재의 현존은 데카르트(L. Descartes)나 칸트(I. Kant)의 주체, 그리고 헤겔(G. F. Hegel)의 변증법에서 기술되는 절대적 아이(absolute I)가 보여주는 오류 가능성이 없는 자기 충만하고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타자’라는 부정성을 내적으로 안고 있는 불충만하고 결핍된 존재로서 제시된다.

또 다른 하나는 세상에 대한 의미의 발생에 관한 것이다. 음양론의 상관론적 사유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미론에서 벗어나 있다. 일상적인 의미론은 개별적인 음과 양 그 각 각의 고유하고 고정된 의미에서 출발하여 그 각 각의 의미의 발생과 변화를 개체 그 자신의 고유하고 고정된 의미의 발현이라는 맥락에서 설명한다. 반면에 음양론의 상관론적 사유는 음과 양은 애초에 그 각 각의 고유하고 고정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연루 속에서만 그 각 각의 의미가 발현되고, 그 각 각의 의미변화 또한 음과 양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표면화된다. 이처럼 음양론의 상관론적 사유는 세계에 대한 의미의 고유성이나 고정성을 부정하고 세계에 대한 의미와 그것의 변화를 음과 양의 관계적 망 속에서 기술한다. 『전경』에서는 이러한 상관론적 사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천지의 일[天地之事]은 모두 음양 가운데 이루어지고[陰陽中有成], 만물의 이치[萬物之理]는 모두 이 음양 가운데 이루어진다[陰陽中有遂]. 천지는 음양으로써 변화를 이룬다[天地以陰陽成變化].8)

『전경』에서는 이를 음양상합(陰陽相合)으로도 표현하고 있다. 『전경』에는 ‘음양상합’을 “음양이 서로 합한 후에는 변화의 길이 있다”(陰陽相合然後 有變化之道也)9)라고 하여, 존재의 새로운 변화를 음과 양의 상관성 속에서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음양합덕은 음의 음덕(陰德)과 양의 양덕(陽德)이 서로 합하여 새로운 조화 내지 변화를 창출해 내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제시된 음양론의 상관론적 사유가 지시하는 두 가지에서, 우리는 음양합덕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음양합덕은 어떠한 절대적인 관점이나 가치를 전제하지 않고 단지 애매한 혹은 결핍된 현존재인 음과 양이 변화를 추동하기 위한 하나의 쌍으로 존재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서로의 변화를 추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애매한 혹은 결핍된 현존재인 음과 양이 서로 상반된 덕(陰德과 陽德)을 통해서 서로의 결핍을 메우는 것을 말한다.10) 이처럼 음양합덕은 음과 양이라는 상반된 관계를 상보적(相補的)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음양합덕은 음과 양의 관계를 서로 상반적이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 제시한다. 『주역』에 나오는 ‘여택(麗澤)’은 음양합덕이 지시하는 음과 양의 상보적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11)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인 이택은 서로 간에 물을 풍요롭게 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동료 상호 간에 서로 도와서 덕과 학문을 수행해야 함을 지시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이 서로를 풍부하게 듯이 학문을 하는 동료들이 서로 도와서 그 학문의 깊이를 보다 더 높게 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이 서로를 더하여 서로를 풍부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음양합덕이 지시하는 음과 양의 상보적 관계를 의미한다.

음양합덕이 지시하는 이러한 음과 양의 상보성은 원리적으로 대대적(對待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이중적 운동성에 기초해 있다. 대대적 관계의 이중적 운동성이란 양이 음을 바라보고 있다는(seeing) 점에서는 주체(subject)로서의 지위를 가지지만, 동시에 양은 음에 의해서 보여진다는(being seen) 점에서는 객체(object)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대대적 관계에 있는 양(혹은 음)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라는 이중적인 지위에 놓여있다.12) 그래서 대대적 관계에서 가시화되는 의미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론적 틀을 벗어난다. 일반적인 인식론적인 틀이 지시하는 의미의 생성은 전적으로 ‘바라보는 자’인 주체의 능력에 달려있다. ‘보여지는 자’로서의 객체는 ‘바라보는 자’인 주체에 의해서 판별되는 대상일 뿐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자’인 주체는 자명하고 투명한 존재로서 세계에 대한 의미의 판단의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 반면에 대대적 관계에서의 의미생성은 음과 양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힘 혹은 제약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13)이 아니라 음과 양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양의 새로운 의미생성은 ‘주관적인 양’에 음에 의해서 보여진 ‘객관화되어진 양’이 제약(constraint)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음과 양의 가역적 의미생성의 역학은 자기성찰 내지 자기반성이라는 것이 독백적 자아의 내적 대화가 아니라 오로지 나와 상반적인 위치해 서 있는 상대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음양합덕이 대대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음과 양의 상호제약 내지 상호영향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이러한 상호관계를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려서 이것(양)과 그것(음) 간에 이루어지는 얽힘(entanglement)내지, 교차(intersection), 혹은 혼합(mixture)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나라는 존재가 반성에 의해서 더 나은 존재로 되고자 함은 … 나의 삶과 타자의 삶이 얽힘으로써, 나의 지각장이 타자의 지각장과 교차됨으로써, 나의 지속이 타자의 지속과 혼합됨으로써 그 같은 동기를 얻을 수 있다. … 내가 반성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옆에 타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험이 매순간 나의 반성을 일으키게 한다.”14)

이런 점에서 나(양)에게 있어 타자(음)의 존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서양의 근대적 유아론이 타자를 나의 독백적 삶을 방해하는 배제의 대상으로 규정했다면, 음양합덕에서의 타자(음)라는 존재는 나(양)에게 은혜롭고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의 자기 결핍은 타자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결핍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순진리회의 훈회(訓誨)는 타자를 은혜롭고 소중한 존재로서 대우하라는 윤리적 규범체계로 채워져 있다. ‘언덕을 잘 가져라’, ‘마음을 속이지 말라’, ‘척을 짓지 말라’,‘은혜를 저버리지 말라’, ‘남을 잘되게 하라’15)라는 훈회의 내용은 타자지향적인 규범적 태도와 직접으로 연결된다. 타자를 나와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로 정립하는 것이 나와 타자를 화해불가능한 관계로 전환시키는 반면에 타자를 나와 상보적인 관계로 위치지우는 것은 나와 타자를 화해가능한 관계로 전환시킨다.

Ⅲ. 음양합덕을 위한 정음정양의 실천적 태도로서의 무자기

제2장에서 필자는 음양합덕을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동시에 있으면서, 양이 음과 사귀고 음이 양과 사귀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하지만 음양합덕에 대한 이 기술은 음양합덕에 대한 의미론적 기술이지, 이 언명이 실질적으로 음과 양이라는 상반적인 것이 주어지면 무조건적으로 음과 양이 조우하는 것까지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음과 양이라는 상반적인 것은 서로에 대해서 배타적인 자연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6) 이런 점에서 음양합덕에서의 합덕은 음과 양의 특별한 상태를 필요로 한다. 중국의 기철학자 왕부지(王夫之)는 이를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강(剛)과 유(柔), 한(寒)과 온(溫), 생(生)과 살(殺)은 상반되어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이 구극이지만, 서로 이루어, 끝까지 서로 적대 시 하는 이치 없이 서로 화해하여 태허로 돌아가는 것이다.”17)

우리는 음양합덕을 위한 이러한 음과 양의 특별한 상태를 바른 음으로서의 정음(正陰)과 바른 양으로서의 정양(正陽)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의 이러한 기술은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18)에서 보여주는 ‘괘의 형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복희팔괘도(伏羲八卦圖)19)는 건괘(乾卦)와 곤괘(坤卦), 간괘(艮卦)와 태괘(兌卦), 진괘(震卦)와 손괘(巽卦), 감괘(坎卦)와 이괘(離卦)가 상반의 대칭적 배열로서 괘의 바른 위치지움을 보여주고 있지만, 복희팔괘도의 ‘괘의 형상’은 ‘안에서 밖으로’ 향해 있어 음과 양이 분리되어 있고 팔괘가 등을 대고 있음으로써 음과 양이 교차 내지 합덕하지 못하는 이치를 품고 있다. 반면에 정역팔괘도는 건괘(乾卦)와 곤괘(坤卦), 간괘(艮卦)와 태괘(兌卦), 진괘(震卦)와 손괘(巽卦), 감괘(坎卦)와 이괘(離卦)가 상반의 대칭적 배열로서 괘의 바른 위치지움을 보여주고 있고, 정역팔괘도의 ‘괘의 형상’은 ‘밖에서 안으로’ 향해 있음으로써 음과 양의 운동이 분열이 아닌 음과 양이 상호교차로서 합덕하는 형국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음양합덕은 정음과 정양의 상태에 있는 음과 양이 대대적 관계를 이루면서 상호교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음양합덕을 위한 음과 양의 실천적 상태인 정음과 정양은 어떤 실천적 태도와 연결되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단초를 『전경』에 수록된 상제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상제께서는 문왕팔괘도의 난음(亂陰)과 난양(亂陽)으로 대변되는 사심(私心)과 정음정양으로 대변되는 정심(正心)을 대별하시고 사심을 버리고 정음정양이 지시하는 정심에 대한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상제께서 어느 날 후천에서의 음양 도수를 조정하시려고 … 상제께서 공신을 돌아보시며 경석은 열둘씩이나 원하는데 너는 어찌 하나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요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일양이 원리인 줄 아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너의 말이 옳도다”고 하시고 “공사를 잘 보았으니 손님 대접을 잘 하라”고 분부하셨도다. 공신이 말씀대로 봉행하였느니라. 상제께서 이 음양 도수를 끝내시고 공신에게 “너는 정음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고 분부하시고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고 일러 주셨도다.20)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정음정양이 지시하는 정심을 위한 실천적 태도를 무자기(無自欺)라고 하여, 무자기를 ‘사심을 버리고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인 양심에 준하여 행하는 실천적 태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죄악이 근원이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되므로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해야 한다.”21) “인성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22)

무자기가 사심을 버리고 하늘로부터 부여된 양심에 맞게 사는 실천적 태도를 지시하는 것이라면, 필자는 무자기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 다음의 두 가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무자기가 지시하는 천성으로서의 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무자기가 원래 심신일원론에 기초하고 있는 유가적 전통에서 나온 개념이라는 점에서, 무자기는 그것이 토대하고 있는 도덕적인 것으로서의 양심을 자연적 도덕감인 ‘공감’에서 그것의 단초를 찾는다. 공자(孔子)는 서(恕)를 인간관계의 황금률로서 제시하면서,23) ‘서’를 ‘같다’(如)와 마음(心)이 결합된 말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서’는 타인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공감적 삶을 가리킨다. 맹자(孟子) 또한 ‘서’로서의 공감을 마음에서 직접 발견한다. 특히, 그는 도덕적 인간의 특징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을 제시했고, 그 사덕의 단서를 사단(四端)에 두고 있다.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양보하고 공경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동물과 다른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근거로서 제시된다.24) 이와 같이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는 인간의 도덕적인 것의 단초를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것과 결부된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직접적이고 즉발적으로 가시화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도덕적 기질인 공감에서 찾는다.25)

다음으로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행하는 것’으로서의 무자기가 실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 위해서 마음이 먼저 자기중심적인 사심26)과 타자 지향적인 양심이라는 독립된 두 개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두 층위가 독립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하나의 것으로 또 다른 하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심과 양심은 우리가 학습하지 않고도 직접으로 즉발적으로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두 가지 마음의 영역이다. 이 두 가지 점(마음이 사심과 양심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층위로 구성, 사심과 양심의 직접성)에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보여주는 우리 자신의 판단이나 행위가 사심과 양심이라는 독립된 두 개의 층위의 상호작용에 근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나의 판단이나 행동이 자기중심적이라면 그 사람은 양심을 인식하지 못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심이 타자지향적인 양심에 우선하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자기의 실천적 태도에서 기술된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행하라’는 정확히 사심에 대한 양심의 완전한 제어 내지 통제를 의미한다.27)

위에서 기술된 두 가지 점(양심의 의미와 무자기의 실천적 의미)에 기초하여 음양합덕과 무자기의 상관관계를 요약해 보자면, 음양합덕은 정음과 정양이라는 실천적 상태에 부합하는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 속에서 음과 양이 상호교차 내지 상호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심이 양심보다 위에 있을 때, 나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은 타자를 나의 방식대로 점유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거꾸로 양심이 사심보다 위에 있을 때 나는 타자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는 사심에 대한 양심의 완전한 제어 속에서 우리를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로 이끈다. 사심은 항상 타자를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사심은 타자 그 자체의 온전한 의미를 자기중심적으로 왜곡한다. 이런 이유에서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관계란 나와 타자를 각 각 둘러싸고 있는 사심이라는 외피를 버리고 공감이라는 양심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나와 타자의 대화적 관계를 말한다.

Ⅳ. 무자기에 기초한 공적 영역의 재구성

현대 정치학에서 통약가능성테제는 정치학의 핵심적인 논제이다. 일견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 지칭되는 통약가능성은 오늘날 다원주의적 시대와 민주주의라는 통치구조의 중첩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뚜렷하게 하고 있다. 특히 법과 정책이라는 공적인 것(the public)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democratic legitimacy)의 확보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벤하비브(S. Benhabib)는 이를 다음과 기술하고 있다. “민주적 사회들이 대면하고 있는 공공선, 특히, 경제적 복지, 집합적 정체성, 민주적 정당성의 확보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이들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복지의 성취와 권위주의적 정치적 지배가 서로 양립할 수 있고, 반민주주의적 정치체계에서도 민주적인 정치체계보다 집합적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28)

하지만 현대 정치학에서 민주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통약가능성테제는 양분되어 있다. 한편으로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맥락적 정치’(lifeworld politics)29)로서의 담론윤리학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간의 통약가능성에 대해서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간의 의사소통의 배후에 자리 잡은 그의 생활세계는 그 자체 내적으로 애매성 내지 결핍성이 탈화된 자기충만한 존재로서 그려진다. 하버마스는 그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이러한 자기충만한 생활세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30) 첫째, 생활세계는 이데올로기가 없는 동질적인 공간으로써 의사소통의 근본적인 술어로서 기능한다. 둘째, 생활세계는 다양한 담론들 간의 수평적 다원성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셋째, 생활세계는 다양한 담론들 간의 의사소통적 합의를 매개할 뿐만이 아니라 촉진시킨다. 생활세계에 대한 이러한 그의 기술에서 우리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간의 어떠한 갈등이나 적대도 인식할 수 없다. 그의 생활세계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침투적 합의(interpenetrating consensus)를 보증하는 보편화된 유토피아(universalized utopia)로서 기능한다.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맥락적 정치가 가지는 통약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들도 하버마스와 같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비판하면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이해를 공간적 차원에서 제공되는 인식의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은 하버마스와 같이 생활세계를 자기충만한 존재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 생활세계는 단지 기호들 간의 차이체계31)에 의해서 형성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미메시스(mimesis)일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생활세계에 대한 특권적 지위의 부여에 대해서 비판적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간의 다의적 접근의 허용을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생활세계의 자기분열을 방해하는 폭력성32)에 주목하여 생활세계의 자기분열이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간의 적대적 대립관계로 표면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33)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자기충만한 생활세계에 기반하여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간의 화해가능성을 주장하는 하버마스의 담론윤리학은 생활세계에 대한 특권적 지위를 허용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러한 현대 정치학의 지형 속에서, 필자는 무자기 개념을 통해서 통약가능성을 위한 공적 영역(public realm)을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음양합덕을 위한 무자기가 사심의 배제를 통해서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의 재구성은 ‘정치적 입장의 배제’(exclusion of political position)라는 규범적 조건의 부여로 제시된다. 이는 공적 영역의 대화참여자들이 가지는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와 연결된다. 만일 공적 영역의 대화참여자들이 자기중심적인 정치적 입장의 층위(사심의 층위)에서 상호 간의 대화를 진행한다면, 이 같은 대화는 각자의 독백적 목소리만을 서로 확인한 채로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공론장을 나갈 것이다. 정치적 입장은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의 특정한 체험적 삶’의 논리적 추상물로서 일반화되고 표준화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이유에서 정치적 입장은 세계에 대한 다양한 체험적 삶들이 가지는 의미나 가치를 용인하거나 수용하지 못한다. 단지 정치적 입장은 자기동일성의 논리에 입각하여 그 정치적 입장이 토대하고 있는 특정한 체험적 삶의 의미나 가치를 부단히 지지하고 재생산할 뿐이다. 이처럼 정치적 입장은 내적으로 대화지향적이기 보다는 비반성적 체계의 닫힌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독백지향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34)

무자기가 규범적으로 요구하는 공적 영역의 구성적 조건으로 제시된 ‘정치적 입장의 배제’는 롤스(J. Rawls)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나 후설(E. Husserl)의 ‘현상학적 판단중지’(epoche)와 유사하지만35) 다르다. ‘무지의 베일’을 통한 롤스의 공적 영역이 상호무관심한 합리적인 개인들로 귀결되어 합리적 개인들 간의 타협과 절충으로 정의(justice)의 규범들을 도출한다면,36) 그리고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통해서 구성된 후설의 공적 영역이 나와 타자간의 소통을 선험적인 자아의 자기 동일성의 논리로 전개하였다면,37) ‘정치적 입장의 배제’로 정립된 공적 영역은 정치적 입장의 물질적 토대인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들의 체험적 삶’으로 표면화된다.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들의 체험적 삶’에 토대한 나와 타자 간의 대화는 자연적 도덕감인 공감으로 제시된다. 타자의 체험적 삶38)에 묻어 있는 흔적으로서의 의미가 온전히 나에게 전달되어 나의 주관적인 것(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정치적 입장의 배제’를 통한 공적 영역의 구성은 무자기라는 인간의 실천적 태도에 근거하여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관계의 회복을 추구한다.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공감은 타자의 체험적 삶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를 의미한다. 정치적 입장은 타자의 체험적 삶에 대해서 그 체험적 삶이 가지는 그것의 고유한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 자신의 입장 내지 관점에 입각하여 타자의 체험적 삶을 재해석한다. 반면에 공감은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타자의 체험적 삶 속에 묻은 있는 그 삶 자체의 온전한 의미로 나를 이끌면서 타자와 어울리게 한다. 예를 들자면 공감은 타자가 가족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할 때, 나 또한 그 슬픔을 타자와 함께 공유한다. 이때 나를 엄습한 이 슬픔이라는 감정은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실 속에 묻어있는 타자의 슬픔으로부터 기인한다. 공감의 직접적 대상은 죽음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이다. 이리하여 나의 슬픔은 타자의 슬픔과 지향적 관계를 맺으면서 나는 타자의 내면에 깊이 접근한다. 나는 이러한 공감 속에서 타자와 더불어 살다.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의 체험적 삶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는 이야기(narrative)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타자의 체험적 삶의 원래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공적 영역에 노출시켜 상대방이 온전히 그것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방식이 가지는 이러한 속성을 조나단 글로버(J. Glover)의 『휴머니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나단 글로버는 이 책에서 20세기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재앙에 대한 교훈을 찾기 위해서 인간의 야만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들 중 하나인 ‘찰리부대에 의한 베트남의 미라이 학살사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성과 소녀들을 추행했고 죽였다. 어떤 여성들에게는 음부를 난자했고, 또 다른 여성들은 유방이 도려내어지고, 이들의 머리와 손은 잘렸다. 임산한 여자의 배를 가라서 그대로 두어 죽게 했다. 집단적 추행들이 여기저기서 이루어졌고 칼이나 총으로 살인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 수십명은 구덩이 속에 넣어져서 총으로 난사당하여 죽었다. 거의 네 시간동안 수 백여명의 마을사람들이 살해되었다.”39) 이 문구를 접하는 독자는 이 이야기 속에 묻은 있는 의미를 직접적이고 즉발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이야기방식은 논증의 방식처럼 타당성에 대한 상호검증을 통해서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체험적 삶에 대한 화자의 이해를 서사적 방식으로 표현하여 상대방의 감수성에 다가가서 서로 간의 공감대를 형성케 한다.

이러한 이야기방식은 한나 아렌트(H. Arendt)의 ‘이야기하기’와 일맥상통하다. 한나 아렌트는 현실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현실을 정치적 입장이라는 외피 속에서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면하기를 원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녀는 사회과학의 전통적인 방법들 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체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하기’ 라는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체험이 가지는 직접적인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하기’라는 서술방식으로 저술되었다.40) 또한 영(I. M. Young)과 샌더스(L. M. Sanders)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간에 보여주는 논증의 한계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전제로 하여 나와 타자간의 소통을 이야기하기나 고백(testimony)으로 제안하고 있다.41)

요약하자면,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은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를 이끈다.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 속에서 나는 타자의 체험적 삶의 온전한 의미에 참여한다. 이러한 참여 속에서 나는 나의 주관적인 것(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이 내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자기 결핍을 나에게 전달된 타자의 체험적 삶이 가지는 온전한 의미로 채운다. 결핍된 나의 주관적인 것(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의 자기 확장으로 기술될 수 있는 이러한 채움은 타자의 체험적 삶의 온전한 의미가 나의 주관적인 것(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이 가지고 있지 않은 덕이기에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음양합덕의 상보성을 다시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정치적 입장의 층위에서 타자의 체험적 삶은 나의 주관적인 것(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의 결핍을 채우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나의 주관적인 것(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의 결핍을 ‘참’인 것처럼 과잉결정화(over-determination)하거나 극화(極化)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닌다. 정치적 입장의 층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것(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이 가지는 내적 결핍이 아니라 나의 주관적인 것(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의 정당성 확보에 있다. 그래서 정치적 입장의 층위에서 나는 타자와 대면하고 있지만, 실상 그 공간에는 타자는 없고 나라는 존재만이 거주할 뿐이다.

Ⅴ. 맺음말

하버마스의 담론윤리학이 정치적 입장의 층위에서 나와 타자 간의 상호이해를 기술하고 있지만 기실 그의 공적 영역은 이론적으로 기획된 공간일 뿐이다. 그의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상화된 생활세계’가 지시하는 보편화된 지평을 동질적으로 공유하면서 정치적 입장의 딱딱한 외피를 벗어 던진다. 그의 공적 영역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간의 대화적 합의는 각 각의 정치적 입장이 배경으로 하는 자기충만한 생활세계로의 재귀뿐이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담론윤리학은 칸트 윤리학의 한계42)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단지 칸트의 독백성을 상호성으로 전환시킨 것에 불과하다.

무자기가 요구하는 ‘정치적 입장의 배제’라는 규범적 조건 속에서 정립된 공적 영역은 우리에게 통약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가져다준다. 첫 번째는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은 나와 타자를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로 이끈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직접적이라 함은 나와 타자가 정치적 입장(사심)이라는 외피를 벗어 던지고 정치적 입장의 물질적 토대가 되는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의 체험적 삶’의 층위에서 나와 타자가 서로 대면하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본연적이라 함은 나와 타자 간의 대화를 자연적 도덕감인 공감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같이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은 나와 타자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본연적인 성향인 공감에 기초해 있다.

두 번째는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은 주체철학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타자라는 존재를 복원시킨다. 나와 타자는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 속에서 나는 타자의 체험적 삶의 온전한 의미에 참여한다. 이러한 참여 속에서 나는 나의 주관적인 것의 결핍을 나에게 전달된 타자의 체험적 삶이 가지는 온전한 의미로 채운다. 결핍된 나의 주관적인 것의 자기 확장으로 기술될 수 있는 이러한 채움은 타자의 체험적 삶이 가지는 온전한 의미가 나의 주관적인 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덕이기에 가능하다. 이처럼 타자라는 존재는 나의 자기 확장성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고맙고 은혜로운 존재이다.

세 번째는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은 논증적 방식이 아닌 이야기방식으로 나와 타자간의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를 이끈다. 왜냐하면 이야기방식은 ‘세계에 대한 공동체구성원의 체험적 삶’의 원래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공적 영역에 노출시켜 상대방이 온전히 그것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방식은 세계에 대한 특정한 체험적 삶에 대한 화자의 이해를 서사적 방식으로 표현하여 상대방의 감수성에 다가가서 서로 간의 공감대를 형성케 한다.

네 번째는 무자기에 토대한 공적 영역의 재구성은 우리에게 통약가능성을 위한 대화참여자의 실천적 태도를 문제 삼는다. 우리가 어떤 공적인 것에 대한 합의적 접근을 시도할 때, 우리는 보통 대화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그 대화를 위한 우리의 실천적 태도는 문제 삼지 않는다. 만일 그 대화에 참여하는 참여자가 자기의 이해관계나 입장을 온전히 가진 채로 그 대화에 참여한다면, 그 대화참여자들은 각자의 입장만을 서로 확인한 채 등을 돌리고 그 공간을 떠날 것이다. 그래서 대화에 참여하는 참여자들의 태도 문제는 중요하다. 이것은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무자기라는 실천적 태도는 나와 타자와의 만남을 직접적이면서 본연적인 대화적 관계로 이끈다.

Notes

1) 대순진리회는 음양합덕의 원리에 입각한 신과의 교감을 ‘신인조화’(神人調化)로서 제시하고 있다.

2) 음양합덕에 대한 이런 식의 해석의 대표적인 것이 하버마스(J. Habermas)의 담론윤리학에서 기술하고 있는 나와 타자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침투적 합의’(inter- penetration consensus)일 것이다.[J. Habermas, The Inclusion of The Others (Cambridge: MIT Press, 1988)]. 그의 상호침투적 합의는 나와 타자가 그 자신의 특수성을 벗어나 이미 설정된 보편적 가치에로 수렴되는 것을 의미한다.

3) 『周易』, 「繫辭上傳」 11장, “易有太極, 是生兩儀.”

4) 천지라는 세계와 만물이 생성되게 된 궁극적인 근원이면서 천지만물의 존재원리인 태극은 천지만물의 생명변화를 음과 양이라는 이원론적 분화 속에서 제시한다. 특히, 태극으로서의 리(理)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이라는 정형화된 변화의 형태 내지 패턴과 결부된다.[『性理大全』, 「性理」 6, “易說一陰一陽之謂道, 這便兼理與氣而言, 陰陽氣也, 一陰一陽則是理矣, 猶言一闔一闢謂之變, 闔闢非變也, 一闔一闢則是變也, 蓋陰陽非道, 所以陰陽者道也.”]

5) 이경원, 「대순종지의 사상적 구조와 음양합덕론」, 『대순사상논총』 2 (1997), p.492.

6) ‘음양’의 상함성(相含性)은 계사전에서 보여주는 6괘의 형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순양인 건괘(乾卦)와 순음인 곤괘(坤卦)를 제외한 6개의 괘는 양괘(陽卦)인 진괘(震卦), 감괘(坎卦), 간괘(艮卦)는 ‘陰爻二·陽爻一’로 구성되어 있고, 음괘(陰卦)인 손(巽卦), 리(離卦), 태괘(兌卦)는 ‘陽爻二·陰爻一’로 되어 있다. 하지만 양효만으로 구성된 건괘에도 기실 九二·九四·上九라고 하는 음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음효로만 구성된 곤괘에서도 初六·六三·六五라는 양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周易』, 「繫辭下傳」 3장). 음양론의 상관론적 사유에 기초한 ‘음양’의 상함성은 현대 서양철학자들에게서 확인될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음양’의 상함성과 유사하게 ‘나의 몸은 익명의 실존적 흔적으로서 두 몸이 동시에 한 몸에 거주한다’[M. Merleau- Ponty,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London: Routledge, 1962), p.354]라고 하면서 이러한 현존재를 ‘야생적 존재’라고 기술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의 현존이 타자라는 부정성을 내적으로 안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은 충만하고 완성된 존재일 수 없다. …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은 어떤 경우에서도 그 자신의 본래적인 모습을 드러내거나 전개할 수 없는 ‘애매하고 결핍된 존재’ 혹은 ‘야생적 존재’이다.”(M. Merleau-Ponty, Visible and Invisible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8), p.167). 자크 데리다(J. Derrida) 역시 그의 ‘흔적’(trace)이라는 개념으로 현존의 자기 동일성에 각인된 근원적인 타자성을 기술하고 있다[J. Derrida, “Differance,” in Speech and Phenomena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3), pp.142-143].

7) 김형효, 『메를로-퐁티와 애매성의 철학』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9) 참조.

8) 『전경』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교운 2장 42절, “天地之事皆是陰陽中有成萬物之理皆是陰陽中有遂天地以陰陽成變化.”

9) 같은 책, 제생 43절.

10) 이것과 저것이 음과 양이라는 상반적인 관계로 위치할 때 이 둘 간의 상호관계는 결과적으로 상보성을 띨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과 저것이 상반적일수록 이것의 입장에서 저것의 덕은 이것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것과 저것이 음과 양이라는 상반적 관계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음과 음 혹은 양과 양이라는 동질적인 관계로 위치한다면, 이것과 저것의 상호관계는 결과적으로 서로의 결핍에 대한 메움이 아니라 그 결핍을 ‘참인 것’처럼 과잉결정화 내지 극화(極化)하는 것으로 가시화될 것이다.

11) 『周易』, 「兌卦傳」.

12) 대대적 관계 속에 놓여있는 양(혹은 음)의 이중적 지위는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의 공시태라고 할 수 있다.

13) 헤겔의 ‘절대적 자아’(absolute I)가 타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듯이, 레비나스(E. Levinas)의 ‘절대적 타자’(absolute other) 또한 나를 수동적인 존재로 위치지운다. E. Levinas, 『시간과 타자』, 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6).

14) M. Merleau-Ponty, Visible and Invisible, p.32.

15) 『대순진리회요람』 (여주: 대순진리회 교무부, 2010), pp.18-20.

16) 억음존양(抑陰尊陽)은 음과 양이라는 상반적인 것의 자연적 속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억음존양은 이것(양)이 저것(음)에 대한 극(克)함과 이러한 극(克)함이 가역적으로 유발하는 이것(양)의 극(極)화로서 기술된다. 이러한 억음존양은 단순히 ‘음을 누르고 동시에 양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음을 억누름으로써 양이 고양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억음존양을 ‘음을 누르고 동시에 양을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인식한다면, 이러한 인식은 애초에 음과 양을 분리된 채로 존재하는 개별자로서의 음과 개별자로서의 양이라는 입장에서 억음존양을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억음존양은 음과 양이 분리된 채로 억음(抑陰)하고 존양(尊陽)하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근원적인 연루 속에서 억음(抑陰)을 통해서 존양(尊陽)하는 형태를 취한다. 다시 말해서 억음존양은 이것(양)이 저것(음)에 대한 배척과 부정(抑陰)을 통해서 가역적으로 이것(양)이 자기정당성을 확보(尊陽)하는 것을 의미한다.

17) 『張子正蒙注』 一拳 (王夫之 注本), 최영진, 「역학사상의 철학적 탐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89). p.33에서 재인용.

18) 정역팔괘도는 「설괘」 6장에 기초해 있다. 『周易』, 「說卦」 제6장, “신이라는 것은 만물이 묘합해서 말씀이 된 것이니 만물을 움직이는 것은 우레(震)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흔드는 것은 바람(巽)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말리는 것은 불(離)보다 마르는 것이 없고,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연못(兌)보다 기쁜 것이 없고,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물(坎)보다 윤택하게 하는 것이 없고, 만물을 마치고 시작하는 것은 간괘(艮卦)보다 성대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물(坎)과 불(離)이 서로 미치며, 우레(震)와 바람(巽)이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산(艮)과 연못(兌)이 기가 통한 연후에 능히 변화하고 이미 만물을 이루는 것이다.”

18)

19) 복희팔괘도는 「설괘」 3장에 근거해 있다. 『周易』, 「說卦」 제3장, “천지(乾坤)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산(艮)과 택(兌)의 기운은 서로 통하고, 우레(震)와 바람(巽)은 서로 부딪치고, 물(坎)과 불(離)은 음양작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팔괘는 서로 음양대응을 이루고 있다.”

19)

20) 『전경』, 공사 2장 16절.

21) 『대순진리회요람』, p.19.

22) 같은 책, p.19.

23) 『論語』, 「衛靈公」 21장.

24) 『孟子』, 「公孫丑上」 5장.

25) 이성과 신체의 이분법에 기초한 서양의 근대적 사유의 맥락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부도덕한 행위는 인간의 계몽적 이성의 능력에 달려있다. 계몽되지 않은 인간은 인간 이성이 지시하는 도덕적 계율을 애초에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반면에 동양적 사유는 인간의 도덕적인 것의 단초를 자연적 도덕감인 공감에서 구하기 때문에 동양적 사유에서의 부도덕한 행위는 몰라서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26) 사심은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가치나 목적을 문제 시 하지 않기 때문에, 사심은 자기중심적이다. 사심은 단지 나 자신의 가치나 목적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달성할 것인지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사심은 타자를 나 자신의 틀 내에서 대상화(objectification)한다. 사심은 자기반성이 없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지향한다.

27)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무자기의 수양론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맹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孟子』, 「公孫丑上」 6장, “자기에게 사단이 있는 자는 이를 확충할 줄 안다.(擴而充之), 이는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다. 실로 이것을 확충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을 족히 보전할 수 있으나, 만일 확충하지 못한다면 부모도 섬기기 못할 것이다.”

28) S. Benhabib, Democracy and Difference: Contesting the Boundaries of the Political (New York: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67.

29) 현대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들 중에 하나는 정치(학)를 논의하는데 있어 생활세계(lifeworld: 전통, 관습, 언어, 혹은 ‘공동체의 가치체계’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있다. 이러한 생활세계의 도입은 세계와 인간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서양 근대의 주체 중심의 정치학에 대한 회의인 동시에 주체가 점하고 있는 공간(생활세계)에 대한 주목에 기인한다. 특히, 훗설(E. Husserl)의 생활세계(lifeworld) 개념(E. Husserl, The Crisis of European Science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An Introduction to Phenomenological Philosophy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0)이나 하이데거(M. Heidegger)의 현존재(dasein)에 대한 분석(M. Heidegger, 『존재와 시간 :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이기상 옮김 (파주: 살림, 2008)), 그리고 비트켄슈타인(L. Wittgenstein)의 언어철학(L.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London: A Blackwell Paperback, 1958)) 등의 등장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이해가 생활세계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버마스 역시 ‘언어학적 전회’(linguistic turn)라는 표현으로 생활세계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30) J. Habermas,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II): Lifeworld and System (Boston: Beacon Press, 1987), pp.124-356.

31) 생활세계가 기호들 간의 차이체계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점은 생활세계가 지시하는 세계에 대한 의미는 그 의미와 내적으로 연결된 배경적 부정성과의 관계 속에서 산출되었다는 것을 지시한다.

32) 무페(Ch. Mouffe)는 이 폭력성을 차이체계의 고정화로 기술한다. 푸코(M. Foucault)의 구조적 권력개념은 우리에게 ‘권력과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차이체계의 고정화에 대한 구체적인 작동방식을 제공한다. M. Foucault,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 and Other Writings 1972~1977 (Brighton: Harvester Press, 1980).

33) E. Laclau & Ch.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Towards Rational Democratic Politics (New York: verso, 2001), p.125.

34) 물론 하버마스의 담론윤리학은 정치적 입장이 가지는 이러한 독백성을 해체하여 정치적 입장들 간에 이루어지는 타당성에 대한 상호검증을 필력하고 있다(J. Habermas, 『이질성의 포용 : 정치이론연구』, 황태연 옮김 (서울: 나남, 2000), pp.59-72). 하지만 이러한 상호검증은 생활세계가 제공하는 보편화된 지평에 기인하고 있다. 그의 담론윤리학에 기술된 상호검증은 온전히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 입장이 취하는 가치나 관점을 문제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가 제공하는 보편화된 지평에 근거하여 자기 입장을 문제 시 한다. 여기서 나와 타자와의 의사소통은 단지 생활세계가 제공하는 보편화된 지평으로 이끄는 촉매제일 뿐이다. 하버마스의 담론윤리학은 온전한 나와 타자 간의 대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화된 지평이 나와 타자간의 대화를 이끌 뿐이다. 이처럼 하버마스의 담론윤리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생활세계(real lifeworld)와는 다른 이상화된 생활세계(idealized lifeworld)라는 이론적 설정을 통해서 정치적 입장의 독백성을 해체하고 있다.

35)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나 후설의 ‘현상학적 판단중지’ 역시 배제를 통해서 공적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 롤스는 ‘최소수혜자의 최대 혜택’(maximin)라는 정의의 원칙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무지의 베일을 사용하였다. 무지의 베일이란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공동체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 능력, 가치관이나 삶의 목표 등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후설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호주관성의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도입한다. 현상학적 판단중지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태도(natural attitude), 즉 세계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 내지 편견을 배제시키는 것을 말한다.

36) J. Rawls,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pp.118-123.

37) E. Husserl, The Crisis of European Science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An Introduction to Phenomenological Philosophy, p.168.

38) 공적 영역에서 표면화되는 ‘타자의 체험적 삶’은 ‘이미 설립된 공동체의 가치체계’의 지속이 표출할 수밖에 없는 징후적 현상(symptomatic phenomenon)으로서의 한계적 삶(critical life)을 가리킨다. 가부장적 지배문화의 지속이 산출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편집적 현상이나 선진자본주의사회에서 표출되는 노동자의 비참한 삶 등은 이러한 타자의 체험적 삶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39) J. Glover, Humanity: A Moral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Pimlico, 2001), p.58.

40) 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San Diego: A Harvest Book, 1976).

41) I. M. Young, “Communication and the Other,” Democracy and Differen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129; L. M. Sanders, “Against Deliberation,” Political Theory 25:3 (1997), pp.370-371.

42) 이성과 신체의 이원론에 기초한 칸트 윤리학의 한계점은 인간 이성에 기초한 도덕적 명령이 가지는 자명성 문제에 있다. 다시 말해서 칸트 윤리학의 한계점은 이성적 명령으로서의 도덕적 규범이 자명하여 우리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느냐에 있다. 결국 이러한 자명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칸트의 도덕적 규범은 행위자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재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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