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구비설화 속 ‘이별-재회’ 구조에 나타난 ‘화합’의 원리*: <나무꾼과 선녀>와 <구렁덩덩 신선비>의 비교를 통해

김정희 1 , *
Juong-hee Kim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학술연구교수
1Epic And Literarytherapy Research Institute, Konkuk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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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Jul 25, 2024; Revised: Sep 11, 2024; Accepted: Sep 25, 2024

Published Online: Sep 30, 2024

국문요약

본고에서는 <나무꾼과 선녀>와 <구렁덩덩 신선비>를 비교하여 ‘이별-재회’ 구조에 반영되어 있는 갈등과 화합의 원리를 탐색하고자 하였다. 이 두 작품은 부부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데, 이 부부 관계는 신이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의 결연으로 이루어진다. 나무꾼과 셋째 딸은 평범한 존재의 표상이고, 선녀와 신선비는 신이한 존재의 표상이다. 그리고 이 서사에서는 부부가 존재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방점을 둔다.

본고에서는 이에 주목하여 부부 관계에서 존재적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2장에서는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의 서사가 동일한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두 작품의 서사를 관계의 문제를 중심으로 파악하면, ‘(등장 및 탐색)-만남-결연-이별-재회-시험-통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서사의 핵심은 특히 ‘이별-재회’에 담겨 있다. 배우자가 떠나고(이별), 남겨진 배우자가 찾아가는(재회)의 구조에는 부부 관계의 불화를 일으키는 지점과 화합을 가능케 하는 지점에 대한 성찰이 내포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떠난 배우자’와 ‘남겨진 배우자’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펴 화합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데 어떠한 서사적 차이가 나타나는지 탐색하였다. 즉, 두 작품의 서사에 나타나는 관계 변화 과정에서 이를 추동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살피고, 불화의 원인과 화합을 성사시키는 힘이 무엇인지 포착하여 화합의 원리가 무엇인지 포착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가 ‘세상의 소망’, 즉 상대의 소망을 잘 파악하고 보살펴야 부부 관계를 지속해나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즉, 두 작품은 부부 관계에 대해 지속하려는 의지만으로는 화합에 이르기 어렵고, 배우자라는 세상의 소망에 귀기울일 때 진정한 화합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림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Abstract

In this article The Woodcutter and the Fairy (나무꾼과 선녀) and Snake Bridegroom (구렁덩덩 신선비) are compared to explore the principles of conflict and harmony reflected in the ‘separation-reunion’ structure. These two works center on relationships; couples formed by the union of a divine being and an ordinary being. The woodcutter and his third daughter are the representatives of ordinary beings, while the fair maiden and the fresh rain are the representatives of divine beings, and the narrative emphasizes that the members of each couple are existentially different.

This article focuses on the problems that arise due to existential differences in such relationships. Thus, in section 2, the narratives of The Woodcutter and the Fairy and Snake Bridegroom are shown to be based on the same structure. If the narrative of both works is analyzed centered on the relationship problem of couples, the sequence can be summarized as ‘(appearance and search) - encounter - connection - separation - reunion - test – passage.’ And in this structure, the core of the narrative is especially contained in the ‘separation-reunion’ stage. The structure of a spouse leaving (separation) and a spouse returning (reunion) implies a reflection on the points that cause discord in a couple’s relationship and the points that make unity possible.

Accordingly, this article explores the narrative differences in the failure and success of reconciliation by examining how the ‘leaver’ and ‘left-behind’ spouses respond to this issue. In other words, it examines the factors that drive the process of relationship-change in the narratives of the two works, and attempts to capture the principles of reconciliation by capturing the causes of discord and the forces that bring about reconciliation.

Through this, it can be found that The Woodcutter and the Fairy and Snake Bridegroom are works that convey the realization that a couple can continue their relationship by understanding and caring for the wishes of the world or the wishes of the other person. In other words, the two works tell readers that it is difficult to reach harmony through the will to continue the relationship, and that listening to the wishes of the world or one’s spouse opens the way to true harmony.

Keywords: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 이별-재회 구조; 부부 관계; 불화; 화합
Keywords: The Woodcutter and the Fairy; Snake Bridegroom; ‘Separation-Reunion’ Structure; marital relations; discord; harmony

Ⅰ. 서론

한국의 구비설화는 선학들의 노력으로 많은 자료가 기록되어 보존되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특히 ‘동화’로 재현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어린 시절에 그 내용과 가치를 한 번쯤 짚어볼 기회를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를 읽지 않는 시기를 지나면 대부분 한국 구비설화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다. 이는 구비설화에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어렴풋하게 기억하면서도, 그 이야기가 우리의 존재와 삶에 어떤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지에 대해 천착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안타까운 이유는, 구비설화가 삶의 의미를 탐구해나가는 여정에 나침반이자 길잡이가 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착안하였다. 설화 연구를 통해 구비설화에 담긴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지혜 한 자락을 찾아내어 공유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더 잘 꾸려나갈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데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는 이를 위해 구비설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서 출발하고 있다.

구비설화의 큰 매력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든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드러낼 수 있는 서사적 의미는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석에 대한 논의가 다양해지고 풍부해져야 자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늘어나고, 설화가 더 오래 지혜의 보고로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설화를 읽는 여러 가지 관점 가운데 관계론적 관점에서 보이는 서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로 설화 해석에 다양성을 보태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바꾸어 말하면, 문학이 어떤 인간관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여 분석을 통해 드러낸 서사적 의미가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로 귀결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한국 구비설화의 부부 관계를 다루는 작품들 가운데 대표격인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의 서사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이 두 작품은 채록 편수도 많고, 이를 분석한 논문도 많다.1) 이 두 작품이 문학사적 중요도가 높기 때문에 그간의 선행 연구에서는 각각의 작품에 대한 작품론을 별도로 논의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간간이 다른 작품과 서사를 비교하는 논의가 눈에 띈다.2) 논의할 거리가 워낙 많은 작품들이다 보니 선행 연구에 축적된 관련 연구의 관점이 몹시 다양한데,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연구들에서도 <나무꾼과 선녀>와 <구렁덩덩 신선비>를 비교하는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부부 관계의 지속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두 작품의 서사를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3)

본고에서는 두 작품의 서사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두 작품은 부부 관계의 문제를 다루며, 어떻게 해야 관계를 유지하고 지속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특히 두 작품의 서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속하려고 할 때, 이 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그 문제는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 다룬다. 속해 있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 현실에서의 어떤 상황과 관련되는가에 대해서는 열린 해석이 가능하다. 계층이 다르거나 문화적 배경이 다른 상황 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현실에서도 계층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구체적 삶을 살아가는 일상적 공간과 삶의 양태에 차이가 있는 상대와 교류하고, 소통하고, 관계를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고민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종종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표현하기도 한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두 작품의 문제 상황을 우리 삶의 구체적 장면과 연동해볼 수 있다.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의 관계의 구도는 지상계의 존재인 나무꾼과 셋째 딸, 또 다른 세계의 존재인 선녀와 신선비의 짝으로, 신이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의 결합으로 설정되어 있다. 선녀와 신선비가 속해 있고, 결국 되돌아가는 또 다른 세계는, 선녀의 경우 지상계와 대척되는 천상의 공간이고, 신선비의 경우 현실계와 대척되는 신성의 공간이다.4) 공통점은 속해 있는 세계가 선녀와 신선비의 이질적 존재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즉, 선녀와 신선비가 돌아가는 이세계(異世界)는 현실에 비해 더 수준이 높거나 살기 좋은 세계를 의미한다기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선녀와 신선비가 평범한 존재인 배우자와 얼마나 상이한 존재인지를 강조하는 요소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공간의 이동은 서사 구조에 영향을 미치며, 두 작품의 서사에 골자를 이룬다. 신이한 존재는 평범한 배우자와 만나 그가 속한 세계에 정착했다가 배우자를 떠나며 다시 본인이 속한 세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남겨진 배우자는 자신을 떠난 신이한 배우자를 쫓아가 재결연을 이루고 그 세계에 정착하여 살아간다. 본고에서는 ‘떠난 배우자 찾아가기’에 이 두 서사에서 다루는 부부 관계의 갈등과 갈등 해소의 핵심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관계의 변화 과정에 주목하여 서사 구조를 파악하고, 공통의 서사 구조를 단락소(motifeme)로 정련하고자 하였다. ‘단락소’는 ‘관계가 변화하여 도달한 상태’를 중심으로 추출하여 ‘(등장 및 탐색)-만남-결연-이별-재회-시험-통과’라 명명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나무꾼과 선녀>는 나무꾼이 수탉이 되는 결말의 유형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5) <나무꾼과 선녀>에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사건의 진행 순서가 바뀌지 않고 각 사건이 정리되는 지점에서 관계의 상태는 달라지지 않는다.6) 부연하면,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춰 선녀와 결연했다(결연). 날개옷을 얻은 선녀가 하늘로 돌아갔다(이별). 나무꾼이 선녀를 쫓아 하늘로 올라가 재회했다(재결연).7) 나무꾼이 지상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 땅을 찾았다가 하늘로 돌아가지 못했다(이별).’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며, 이 순서는 뒤바뀌지 않는다. 또한 각 사건에서 두 사람의 관계의 상태가 ‘결연-이별-재결연-이별’라는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선행 연구에서는 대개 어떤 사건에서 이야기를 끝마치느냐에 따라 <나무꾼과 선녀>의 유형을 나누었다. 즉, 이야기가 선녀의 승천으로 끝나는가, 나무꾼이 선녀를 따라 승천하며 끝나는가, 나무꾼이 결국 땅으로 돌아와 선녀와 재회하지 못하고 닭이 되며 끝나는가에 따라 각편의 유형을 나눈 바 있다. 이러한 선행 연구의 성과를 받아들이면 <나무꾼과 선녀>는 어느 사건에서 이야기를 끝마치느냐에 따라 유형이 나뉘나, 전체적인 서사의 진행 순서나 관계의 상태 변화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나무꾼과 선녀>에서 처음부터 마지막 사건(나무꾼이 수탉이 되는 사건)까지 모두 나타나는 유형이 <나무꾼과 선녀> 서사의 전모를 담고 있다고 보고, 이 유형을 <구렁덩덩 신선비>와 비교하고자 한다.

<구렁덩덩 신선비> 또한 <나무꾼과 선녀>와 마찬가지로 하위 유형이 존재하는데, 본고에서는 ‘신선비가 셋째 딸과 결연하고 허물을 벗었다(결연). 셋째 딸에게 맡긴 허물이 불에 타자 신선비가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이별). 셋째 딸이 신선비를 쫓아가서 재회했다(재결연).’의 순서로 진행하는 유형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8)

2장에서는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의 서사가 동일한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이는 두 서사가 관계의 문제를 중심으로 보면 상동적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서사의 핵심은 특히 ‘이별-재회’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두 작품의 ‘이별-재회’ 서사 구조에 어떤 관계의 문제가 담겨 있는가 포착해보고자 한다.

3장에서는 ‘떠난 배우자’와 ‘남겨진 배우자’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펴 화합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데 어떠한 서사적 차이가 나타나는지 탐색해보고자 한다. 즉, 두 작품의 서사에 나타나는 관계 변화 과정에서 이를 추동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살피고, 불화의 원인과 화합을 성사시키는 힘이 무엇인지 포착하여 화합의 원리가 무엇인지 포착해보고자 한다.

II.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의 ‘이별-재회’ 서사 구조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의 서사 구조는 ‘(등장 및 탐색)-만남-결연-이별-재회-시험-통과’의 단락소로 정리해볼 수 있다. 단락소를 중심으로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의 서사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 서사 구조 비교
<나무꾼과 선녀> 서사 구조 <구렁덩덩 신선비>
- 나무꾼이 노루(사슴)를 구해줌. 노루가 은혜를 갚겠다고 함. (보은담)
- 노루가 선녀를 만날 방법을 알려줌.
(중심 인물의) 등장 및
(일방적) 탐색
- 구렁덩덩 신선비가 태어남. 어머니가 부끄러워 덮어둠. (탄생담)
- 셋째 딸이 축하하기 위해 찾아옴(우연히 마주침).
- 나무꾼이 목욕하는 선녀를 찾아냄. 만남 - 신선비가 장자의 세 딸들에게 청혼함.
- 나무꾼과 선녀가 혼인함. 결연 1 - 신선비와 셋째 딸이 혼인함.
- 선녀가 나무꾼을 떠나 돌아오지 않음. 이별 : 위기 1 - 신선비가 셋째 딸을 떠나 돌아오지 않음.
- 떠난 선녀를 나무꾼이 뒤따라감.
- 나무꾼이 선녀와 재회함.
재회 - 떠난 신선비를 셋째 딸이 뒤따라감.
- 셋째 딸이 신선비와 재회함.
- 선녀의 가족에게 나무꾼에게 선녀의 배우자가 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라는 요구를 받음. 시험 : 위기 2 - 신선비의 새로운 가족에게 셋째 딸이 신선비의 배우자가 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라는 요구를 받음.
- 나무꾼이 시험에 통과하여 선녀의 배우자로 인정받음. 통과 - 셋째 딸이 시험에 통과하여 신선비의 배우자로 인정받음.
- 나무꾼이 이전 가족을 만나기를 원하여 혼자 찾아감. 이별 : 위기 3 없음.
- 나무꾼이 선녀가 알려준 (두 번째) 금기를 어겨 돌아오지 못함. (관계의) 단절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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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과 ‘탐색’은 나무꾼/셋째 딸과 선녀/신선비가 만나기 전의 상황에 관한 내용이다. <나무꾼과 선녀>는 나무꾼을 중심으로, <구렁덩덩 신선비>는 신선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부분에서는 나무꾼과 신선비의 배경과 내력을 설명한다. 나무꾼의 경우, 나무꾼이 노루를 돕는 사건을 통해 착한 심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착한 심성’은 나무꾼의 변하지 않는 기질로 선녀와의 관계를 맺게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착한 심성’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노루를 돕게 되고, 노루가 선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무꾼이 가진 고유의 특성은 선녀와의 관계 맺기에 단초를 마련한다.

신선비의 경우, 구렁이 허물을 쓴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구렁이 허물을 벗기 전까지는 구렁이로 살아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 신선비는 구렁이이기 때문에 부모에게조차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할 자식으로 취급되며, 이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장자의 세 딸들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대표하는데, 두 언니는 이웃에 생긴 출산을 경사로 여겨 방문했다가 구렁이 모습을 한 신선비를 보고 혐오감을 드러내며 돌아간다. 이를 통해 구렁이 모습인 신선비가 세상에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가를 엿볼 수 있다. 고귀한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시기에 신선비는 구렁이일 뿐이다. 이처럼 구렁이는 신선비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일부라 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감을 갖게 한다 하더라도 버릴 수 없는 본연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셋째 딸은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구렁이’로서의 신선비를 마주하고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배척하지 않고 호의와 배려로 대하는 인물이다. 즉, 신선비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신선비가 셋째 딸과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는 내력을 설명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나무꾼과 선녀>에서 이 부분이 맡고 있는 역할과 일치한다. 이 부분은 나무꾼과 선녀, 신선비와 셋째 딸이 어떻게 부부로 만나게 되는가 하는 전사에 해당한다. 즉, 평범한 인간인 나무꾼과 셋째 딸이 신이한 존재인 선녀와 신선비를 배우자로 맞이하게 된 내력을 보면, 사슴을 살리는 나무꾼의 선함과 누구나 눈살을 찌푸리는 구렁이를 보고도 존중과 배려를 표하는 셋째 딸의 선함이 배우자와의 혼인을 성사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나무꾼과 셋째 딸이 갖는 고유의 자질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장차 부부가 되는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내용이 ‘만남’ 부분에서 제시된다. 나무꾼은 노루의 안내에 따라 목욕을 하고 있는 선녀를 찾아내고, 신선비는 장자의 세 딸들에게 청혼을 한다. 결연을 위한 탐색과 만남의 과정은 나무꾼과 신선비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 선녀와 셋째 딸은 변화될 관계의 당사자이지만 ‘혼인’이 상대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피동적인 대상에 머무르게 된다.

그나마 셋째 딸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언니에게도 ‘구렁이’와 혼인할 의사가 있는지 묻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구렁이가 장자의 딸들 중 하나와 혼인하겠다고 결정했고, 이 상황은 바꿀 수 없다. 그런데 두 언니가 거절을 했고, 셋째 딸은 상대가 ‘구렁이’라고 해도 어엿한 남성으로 대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셋째 딸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구렁이가 구혼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구렁이의 배우자로 셋째 딸이 낙점되어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만남’에서 셋째 딸의 반응을 본 구렁이는 진작 셋째 딸과의 결혼을 확정했다고 볼 수 있다. 만남이 구렁덩덩 신선비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만남의 지점에서는 구렁덩덩 신선비가 ‘미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셋째 딸이 선한 행동의 대가로 구렁덩덩 신선비를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구심이 남는다. 그러나 구렁덩덩 신선비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보이는 셋째 딸의 노력을 고려하면 배우자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있다고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선녀와 셋째 딸에게는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은 채 결혼이 성사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부분에서의 부담은 추후에 이 관계에서 풀어야 하는 과업으로 남으며, 부부 관계를 애정으로 가꾸어 나가기 위한 쇄신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일방적 성혼은 부부 관계에 위기를 초래하는 잠재적 요인으로 남는다. 선녀와 셋째 딸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 헐거운 결속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틈이 장차의 위기를 초래한다. 부부는 두 사람이 관계의 지속에 동의하고, 앞으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지속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며 맺어야 하는 관계임에도 한쪽의 의사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하였기 때문에, 이 관계에는 결속을 어떻게 단단하게 할 것인가 하는 숙제가 남겨지게 된다.

결국 나무꾼과 선녀, 신선비와 셋째 딸은 혼인하여, 부부로의 ‘결연’을 이룬다. 나무꾼과 셋째 딸은 혼인 전과 후에 크게 달라지지 않은 데 비해, 선녀와 신선비는 혼인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선녀는 ‘날개옷’을 잃고 나무꾼의 아내로 살아가게 되고, 신선비는 ‘구렁이 허물’을 벗고 셋째 딸의 남편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9) ‘날개옷’과 ‘구렁이 허물’은 주인이 원치 않았는데 떼놓게 되었든, 주인이 원해서 떼놓게 되었든, 이를 가졌던 주인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물건이다. 날개옷을 가졌기에 선녀이고, 구렁이 허물을 가졌기에 신선비이기 때문이다. 날개옷과 구렁이 허물은 이를 가진 주인에게 고유의 ‘-다움’을 가능케 하는 물건인데, 혼인을 기점으로 배우자에게 관리의 주관이 넘어가게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선녀는 이 물건을 가지고 있던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신선비는 원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 물건을 배우자에게 저당 잡혀 있음으로 인해 배우자가 이 물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좌우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는 점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은 당장 문제를 발생시키지는 않지만, 결국 이 지점의 문제로 인해 관계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별’은 나무꾼/셋째 딸이 감추고 있던 ‘날개옷’/‘구렁이 허물’을 내놓게 되면서 발생한다. 나무꾼은 선녀에게 날개옷을 보여주지 말라는 노루의 당부에 따라 혼자만 아는 곳에 날개옷을 감춘다. 셋째 딸은 신선비가 직접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하여 혼자만 아는 곳에 구렁이 허물을 감춘다. 나무꾼과 셋째 딸이 이를 감추게 된 내력은 다르지만, 감추고 있는 이유는 동일하다. 이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혼자만 알고 있어야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부 관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의무가 나무꾼/셋째 딸에게만 부과되고 있다. ‘~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조건은 이 조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상정하고, 이는 자칫하면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이 의무가 나무꾼과 셋째 딸에게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부부 관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나무꾼/셋째 딸만 기울이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한 방향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언제든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결국 실현된다. 나무꾼과 셋째 딸은 이 물건을 밖으로 꺼내어 보이게 되고, 이로 인해 부부 관계를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된다.

날개옷을 되찾은 선녀가 나무꾼과 살던 곳을 떠나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신선비도 셋째 딸과 살던 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선녀/신선비는 배우자와 이별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이별은 관계의 큰 위기이기는 하지만 이별 상황이 곧바로 관계의 파국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선녀도, 신선비도 이 지점에서는 배우자를 떠나지만 ‘재회’의 지점에서 보이는 선녀/신선비의 반응과 연결하여 보면 이 지점에서의 이별은 완전한 파국으로 보이지 않는다. 선녀/신선비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을 찾아온 배우자를 다시 받아들이며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기 때문이다.10)

선녀/신선비는 선녀로 살 수 있는 곳, 신선비로 살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 정착한다. 선녀와 신선비는 고귀하고 특별한 존재로서 그 존재성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터를 옮겨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선녀와 신선비는 선녀가 존재해야 할 곳, 신선비가 존재해야 할 곳에서 날개옷이나 허물을 의식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다움’을 되찾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선녀와 신선비가 옮겨간 세계는 존재의 조건이 사라진 곳이다. 날개옷이 있어야 선녀가 된다든지, 구렁이 허물을 내보이지 않아야 신선비로 당당할 수 있다든지 하는, 존재의 조건이 붙지 않고 그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인 것이다. 따라서 선녀/신선비의 이별은 세계의 이동, 공간의 이동에 방점을 두고 보아야 한다. 즉, 그때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긴 것이라는 점을 유념하면, 관계의 청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유보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또한 날개옷/구렁이 허물을 보이게 되는 사건이 이별의 계기가 되지만, 이 사건은 나무꾼/셋째 딸의 배우자를 위하는 마음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건의 외피에 주목하면, 나무꾼은 선녀를 위해 날개옷을 보인 것이고, 셋째 딸은 언니들의 농간에 빠져 보이기 때문에 차이가 커 보인다. 그러나 나무꾼과 셋째 딸이 추구하는 바에 주목하면 상통하는 바가 나타난다. 나무꾼/셋째 딸에게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일관된다. 이 관계에서 변하지 않는 요인인 것이다. 그리하여 관계 회복의 여지가 남게 된다.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의지를 가진 존재인, 나무꾼과 셋째 딸이 움직여야 한다.

나무꾼/셋째 딸은 우여곡절 끝에 선녀/신선비가 있는 곳을 찾아간다. 그래서 배우자와 ‘재회’하게 된다. 선녀/신선비는 홀로 떠나왔지만, 남겨두고 온 배우자가 찾아오자 맞아들인다. 이 부분에 와서야 선녀/신선비는 부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선녀/신선비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부부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것보다 우선한다. 선녀로 살고 싶어서 혹은 구렁이 허물을 내보이는 것이 싫어서 떠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꾼/셋째 딸은 이를 탓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왜 너는 우리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느냐’고 타박하지 않고 자신을 바꾸어 떠난 상대의 마음을 다독이려 노력한다. 나무꾼/셋째 딸이 자기 자리에서 머물기를 주장하면, 이 부부 관계는 더 이상 지속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꾼/셋째 딸은 상대가 옮겨간 터로 자신도 옮겨가면서 상대의 뜻에 따르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으로 주어지는 ‘시험’은 관계를 근간에서 위태롭게 하는 위기가 될 수 없다. 나무꾼과 셋째 딸은 선녀/신선비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격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에서 이 단계를 보여주는 각편들에서는 단 한 편도 실패를 말하지 않는다. 나무꾼/셋째 딸이 치르는 시험은 각편에 따라 그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나타난다.11) 그러나 어떤 시험이더라도 어렵다. 중요한 것은 선녀/신선비가 터 잡은 곳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격을 얻으려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무꾼/셋째 딸은 시험에 ‘통과’해낸다. 갈등을 드러내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부부의 결속이 얼마나 단단한가를 입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선녀/신선비는 나무꾼/셋째 딸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고, 나무꾼/셋째 딸은 이를 위해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는 데 성공한다. 특히 셋째 딸은 신선비를 찾아오는 과정에서도 여러 난관을 넘어왔기 때문에 노루가 방법을 알려주어 아내가 있는 곳까지 쉽게 도달한 나무꾼과는 대조된다 할 수 있다. 게다가 나무꾼은 아내인 선녀의 도움을 받는 데 비해, 셋째 딸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통과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나무꾼의 시험과 셋째 딸의 시험을 동일한 의미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에 대해 부담이 있지만, 그럼에도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은 나무꾼과 셋째 딸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배우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위기와 그 대응은 부부로 살아가며 어떤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되고, 어떻게 해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이 나무꾼과 선녀, 셋째 딸과 신선비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부부로 거듭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구렁덩덩 신선비>는 여기에서 끝이 나지만, <나무꾼과 선녀>에서는 이 뒤에 이야기가 더 이어진다. 나무꾼과 선녀의 세 번째 관계의 위기는 나무꾼이 원래 살던 세계를 살펴보고 싶어 하며 발생한다. 첫 번째 관계의 위기가 관계 내부의 불안 요인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면, 두 번째 관계의 위기는 관계 외부의 방해로 발생한 것이다. 관계 외부에서 발생한 방해는 오히려 관계의 결속을 다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앞선 두 위기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관계 외부에서 발생하는 요인보다 관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요인이 관계의 지속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위기는 나무꾼이 일시적으로나마 선녀의 배우자로서의 삶보다 나무꾼 자신으로서의 삶에 더 비중을 둠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즉, 나무꾼이 원래 살던 세계에 가보고 싶다고 하는 데에는 어떻게 하면 선녀와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목표나 관심사는 틈입할 여지가 없다. 오히려 나무꾼을 관계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여 선녀와의 관계 지속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무꾼이 원래 살던 세계에 가보고 싶다고 하고 찾아가는 지점까지는 이로 인해 관계가 불안해지기는 해도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아직 나무꾼과 선녀의 관계가 이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무꾼과 선녀의 이별은 나무꾼이 가족(어머니 혹은 친척)이 준 음식을 먹는 순간에 확정된다. 선녀가 용마에서 내리지 않아야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당부했는데, 음식을 먹다가 흘리는 바람에 용마에서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선녀의 당부는 음식과는 무관한데, 음식을 먹는 행동이 예상치 못하게 이별의 도화선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무꾼과 선녀는 헤어질 의도로 한 행동이 아님에도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 행동의 의미에 천착하면, 관계 지속을 방해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이다. 이는 화합의 원리를 탐구하는 3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볼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가 공통의 서사 구조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혔다. 서사를 이루고 있는 단락소에 초점을 맞추어 그림으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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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떠난 배우자 찾아가기’ 서사의 단락소(motif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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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배우자 찾아가기’를 핵심으로 하는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는 만남-결연, 이별-재회, 시험-통과가 짝이 되어 서사를 구성한다. 여기에서는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부부의 인연을 맺는 데 관여하지 않는 배경 부분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였다.

만남-결연에서는 부부 관계가 성립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이때의 결연은 당사자 간의 온전한 결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남과 결연이 일방에 의해 확정되고 진행된다. 뿐만 아니라 혼인을 요구하는 나무꾼/신선비나, 혼인을 요구당하는 선녀/셋째딸 모두,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탐색하거나,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구체적인 상을 그려보지 못한 채 결연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탐색의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부부 관계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부 관계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배우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배우자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이해하고 서로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서사의 만남-결연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탐색과 이해가 시도되는 순간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관계에서 지속을 추구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이 부부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아직은 풀지 못한, 그래서 앞으로 풀어야 하는 과제로 남겨 두고 있는 것이다. 이는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지속 가능한 관계로 나아가게 되며, 화합을 이룰 수 있게 되는가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이별-재회에서는 부부가 미결로 남겨둔 과제가 갈등으로 비화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나무꾼/셋째 딸은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날개옷/구렁이 허물을 감춘다. 날개옷/구렁이 허물을 잘 가지고 있어야 관계가 지속되기 때문에 이 물건들을 감추는 행동을 통해 나무꾼/셋째 딸이 관계 지속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꾼/셋째 딸의 이런 노력의 방향성을 염두에 두면, 헤어짐은 막을 수 없었던 갑작스러운 사고라 할 수 있다. 나무꾼/셋째 딸은 배우자가 왜 떠나는지 모르는 채 이별을 맞게 된 것이다. 선녀/신선비에게서 역시 배우자의 의도나 노력에 대한 이해는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나무꾼과 선녀, 셋째 딸과 신선비의 이별은 관계의 당사자들의 관심이 상대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배우자와 별거하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로 인해 관계는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선녀/신선비는 이 부분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드러내고, 나무꾼/셋째 딸은 배우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다. 재회는 나무꾼/셋째 딸이 배우자의 원하는 바를 헤아리며 적극적으로 배우자에게 맞추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며 이루어진다. 떠난 선녀/신선비를 찾아가는 과정이 배우자와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하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가 전과 다르게 불안하지 않고 단단하다는 것은 ‘시험-통과’ 부분에서 드러난다. 재회를 이루며 나무꾼과 선녀, 신선비와 셋째 딸의 관계는 함께 삶을 일구어나가는 동반자 관계로 거듭난다.12) 이들의 관계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그 결속의 견고함은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하는 외부의 힘에 굴하지 않고 진가를 발휘하며 승리를 쟁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시험-통과’는 ‘이별-재회’에 뒤이어 발생하며, ‘재회’로 봉합된 갈등이 얼마나 관계의 결속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확인하게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구렁덩덩 신선비>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마치는데, <나무꾼과 선녀>는 이야기를 더 진행시킨다. <나무꾼과 선녀>를 통해 함께 위기를 넘으며 단단해진 배우자와의 결속도 언젠가는 다시 위기를 맞을 수 있으며, 이 고비에서 지난 고난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실천하지 않으면 관계는 결국 다시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나무꾼과 선녀>와 <구렁덩덩 신선비>는 공통적인 서사 구조를 기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계의 지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별-재회’이다. 이 부분은 관계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선녀/신선비의 떠남은 배우자와의 관계를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이는 배우자와의 불화가 임계점을 지났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 이러한 불화는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다음에서는 어떤 서사적 요인들이 갈등과 불화를 발생시키고, 이를 극복하여 화합으로 나아가게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Ⅲ. 서사 비교를 통해 본 ‘화합’의 원리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부부는 배우자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다고 해서, 혹은 공인받은 부부가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신뢰가 생기거나, 화합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은 부부 관계의 상호성에 대해 다루면서 관계가 일방의 선택이나 의도에 따라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지만, 상호성을 놓치면 곧 그로 인한 여파를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가체험하게 한다. 그래서 이 작품 속 이별의 과정은 부부 관계를 어떻게 운영했을 때 관계에 위기가 찾아오는지 이해하게 하고, 재회의 과정은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 이해하게 한다.

이 서사들이 이별-재회를 둘러싼 맥락에서 ‘떠난 배우자 찾아가기’를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부부 관계의 불화를 드러내는 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방식이 담겨 있다.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가 서사 구조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계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무꾼과 선녀>는 관계의 실패로, <구렁덩덩 신선비>는 관계의 성공으로 나아가고 있어서 이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살피면, ‘떠난 배우자 찾아가기’ 서사의 스펙트럼을 포착해볼 수 있다.13)

나무꾼과 선녀, 셋째 딸과 신선비의 첫 번째 결연은 잠재적 불안 요소를 품고 있다. 이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관계가 위태로운지 아닌지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이처럼 위기가 없으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이 서사에서 부부 관계가 맞이하는 이별의 위기는 결속이 약하다는 것을, 시험의 위기는 결속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당사자 간의 불화와 화합은 관계 결속의 정도를 판단하는 척도라 할 수 있다. 불화는 한 공간에서 머물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분리하는 별거로 나타난다. 이는 관계의 지속을 전망하기 어렵게 한다. 그런데 화합은 한 공간에서 머물러도 부딪히지 않고 조화롭게 뜻을 모으는 상태를 가능케 한다. 화합이 잘 이루어졌다는 것은 위기가 찾아와도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건강한 관계는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이겨낸 상태라 할 수 있으며, 갈등을 얼마나 잘 이겨냈는가는 화합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이별’은 이 관계에서 가시화된 첫 번째 위기이다. 두 작품에서 이별은 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불안 요인이 활성화됨으로 인해 발생한다. 두 사람의 관계에 잠재된 불안은 ‘날개옷’과 ‘허물’에 얽혀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 ‘날개옷’과 ‘허물’은 배우자를 만나 변화된 삶을 살기 이전의 존재성을 상기하게 한다. 선녀는 더 이상 선녀가 아니고, 구렁이도 더 이상 구렁이가 아닌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평범한 배우자와 다른 존재로 살아온 삶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선녀/신선비가 배우자를 만나 이를 벗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적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즉, 관계의 변화가 존재의 변화와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날개옷이 있다’, ‘허물이 있다’를 강조하는 상태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이질적 존재임을 의식하게 한다. 함께 살아가는 현재보다 서로 다르게 살아왔다는 과거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관계를 불안정하게 하기 때문에 날개옷과 허물이 있는 한 ‘이별’은 내정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날개옷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허물은 과거의 치부를 은폐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물건이 서사에서 수행하는 기능은 동일하다. 선녀/신선비에게 배우자와 결연하기 이전에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일깨우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선녀/신선비의 관심은 배우자가 아닌 물건의 행방에 맞춰지고, 이는 자신의 존재성을 지키는 데 주안점을 두고 관계를 운영한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 물건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상태는 관계를 불안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즉, 날개옷이나 허물은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요인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의 존재성’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선녀는 날개옷을 남편인 나무꾼에게, 신선비는 허물을 아내인 셋째 딸에게 저당 잡힌 상태이기 때문에 배우자를 항상 경계해야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부부 관계에서 지속은 상대에게 나의 고유한 존재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할 때가 아닌, 상대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소망을 품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성취할 수 있다.14) 그런데 여기에서 선녀/신선비의 초점은 상대의 소망이 아니라 상대의 행동에 가 있다. 선녀/신선비는 (빼앗긴 것이거나, 맡긴 것이거나) 현재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나의 중요한 물건을 배우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고 물건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은 물건이 드러남과 동시에 증명된다. 선녀는 날개옷을 보자마자 회수하고, 신선비는 허물이 불에 타자마자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이를 알아챈다. 이를 통해 선녀/신선비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선녀/신선비는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을 결정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관계의 주도권을 배우자에게 맡겨두고, 관계의 행방에 대한 책임 또한 배우자에게 묻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선녀가 떠나는 것은 나무꾼이 날개옷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고, 신선비가 떠나는 것은 셋째 딸이 허물을 (누가 그랬든지 신선비에게는 중요하지 않음으로)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즉, 선녀/신선비의 입장에서는 배우자의 잘못이 선행되고, 자신은 그 잘못에 대한 반응으로 배우자를 떠나는 상황이 된다. 여기에는 관계의 지속이 깨지게 된 원인이 배우자에 있음을 특정하는 태도가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나무꾼/셋째 딸은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물건을 지킨다(감춘다). 나무꾼/셋째 딸의 목표는 선녀/신선비와는 달리,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데 있고, 이를 위해 물건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여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춘다’는 ‘드러난다’ 혹은 ‘드러낸다’를 내포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감춘다’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선택되는 방법이지만, 결국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놓여날 수 없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미봉책이라 할 수 있다. 나무꾼/셋째 딸이 이 물건을 지켜야 하는 한, 관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별’로 인해 나무꾼/셋째 딸 역시 선녀/신선비와 마찬가지로 배우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과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나무꾼/셋째 딸은 남겨지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른다. 선녀/신선비는 배우자와의 관계 지속이 자기를 지키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나무꾼/셋째 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나무꾼이 날개옷을 보여주고, 셋째 딸이 허물을 들키는 부분을 통해 폭로된다. ‘날개옷’과 ‘허물’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고 있다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나무꾼의 행동은 선녀가 떠날 것을 예상하고 한 행동이 아니다. 나무꾼은 선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날개옷을 보여준다. 이는 선녀가 자신과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기를 원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안일함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셋째 딸의 행동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셋째 딸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라는 신선비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 신선비가 아닌 자기 기준으로 허용 가능한 대상의 범위를 정한다. 순간일지라도, 언니들의 접근을 허용하는 행동은 신선비의 요청보다 언니들의 요청을 우선하는 유약함의 발로인 것이다. 나무꾼/셋째 딸이 이러한 느슨한 태도로 범하는 실수가 이별로 이어진다.

정리하면, ‘이별’은 선녀/신선비와 배우자(나무꾼/셋째 딸)의 불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표면상으로 선녀와 나무꾼, 신선비와 셋째 딸이 다투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선녀/신선비는 배우자가 (드러내지 말아야 할 날개옷/허물) 드러내는지, 아닌지 끊임없이 주시해야 하는 상태에 있고, 나무꾼/셋째 딸은 (드러내지 말아야 할 날개옷/허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이 상태의 관계에서 선녀/신선비, 나무꾼/셋째 딸은 모두, 배우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우선하여 행동한다. 주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기 때문에 이는 결국 관계를 해제시키는 힘을 발생시킨다. 또한 무언가 감추어져 있는 상태는 ‘드러난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관계를 일관된 상태가 아닌, 변화 가능성이 큰 상태로 두게 한다. 즉,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관계를 불안하게 하는 변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별’은 위기이기도 하지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선녀/신선비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해지고, 나무꾼/셋째 딸은 이를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드러내지 말아야 할, 지켜야 할 물건은 사라지고, 관계의 주체들은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이별로 인해 관심의 초점이 ‘나’에서 ‘배우자’로 옮겨간 것이다.

선녀/신선비는 배우자를 떠나 자신이 있어야 할, 있음이 자연스러운 자리로 돌아간다.15) 더 이상 날개옷/허물에 매이지 않아도 자기 존재성을 인정받고 발휘할 수 있는 세계로 옮겨간 것이다. 선녀/신선비는 배우자와 함께 살던 세계에서는 평범한 혹은 혐오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나 선녀/신선비는 본래 고귀한 존재이기에, 본래의 존재성을 온전히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즉, 선녀는 지상계에서는 나무꾼의 평범한 아내이나, 이세계에서는 하늘의 주인(옥황상제)의 딸인 고귀한 존재이다. 신선비는 지상계에서는 구렁이이나, 이세계에서는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고귀한 존재이다. 이처럼 선녀/신선비는 속한 세계가 어디인가에 따라 다른 존재로 규정되고 인정받으며,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신선비는 선녀와 달리, 지상계에 있을 때도 셋째 딸과의 혼인으로 구렁이 허물을 벗고 미남자가 되기 때문에 존재성을 일부 회복한다. 그러나 이때도 신선비의 ‘고귀함’보다 외모가 고와졌다는 데 더 초점이 맞추어진다. 신선비는 셋째 딸을 떠나 ‘은으로 만든 물그릇을 타고16)’ 간 세계에서야 외모와 능력을 온당히 대우받는다. 이처럼 선녀/신선비가 지상계를 떠나 이세계에 정착하는 것은 곧, 존재성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부부의 재회 가능성은 이별의 사유에 배태되어 있다. 선녀/신선비는 재회를 기약하지 않고 떠나고, 나무꾼/셋째 딸은 남겨진다. 관계는 행동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변화의 국면을 맞이한다. 이별은 나무꾼/셋째 딸의 잘못(행동)과 그로 인한 떠남(선녀/신선비의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재회는 선녀/신선비의 떠남에서 시작된다. 선녀/신선비의 떠남(행동)과 그로 인한 찾아감(나무꾼/셋째 딸)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선녀/신선비의 떠남이 나무꾼/셋째 딸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었으므로 이를 촉발시킨 이별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무꾼/셋째 딸에게 지워진다. 그리고 재회의 몫은 떠난 배우자가 아닌 남겨진 배우자에게 남겨진다. 떠난 배우자는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남겨진 배우자에게는 ‘찾아간다’는 변화의 가능성 또한 남겨진다. 나무꾼/셋째 딸은 떠난 배우자를 찾아가는 여정에 오르며 이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시킨다.

남겨진 배우자는 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찾아간다’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변화를 선도한다.17) 남겨진 배우자는 떠난 배우자를 향해 움직여 나간다. 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여 점점 멀어지고 있던 심리적 거리를 좁히며 상대이 원하는 바를 이해하고 다가가는 것이 된다. 나무꾼/셋째 딸은 떠난 배우자가 향한 곳으로 향하며, 떠난 배우자가 정착한 곳에 정착하기를 결정한다. 선녀/신선비에게 지상계는 본래의 고귀함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세계이나, 초월계는 자기 자신으로 온전할 수 있는 삶을 보장받는 세계이다. 나무꾼/셋째 딸은 지상계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배우자를 찾아가 배우자가 원하는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즉, 떠난 배우자를 찾아가, 배우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옮겨가는 것이다. 이는 상대에게 자신의 소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상대의 소망에 귀기울이며 상대가 원하는 삶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바꾸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관계의 지속이 화합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가 된다.

그런데 재회한 것만으로는 두 사람이 화합을 이루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나무꾼/셋째 딸은 선녀/신선비에게 걸맞은 배우자인지 시험을 통해 그 자격을 입증하라는 과제를 받게 된다. 이 시험에 통과하는 것이 고귀한 존재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험에 통과해도 나무꾼은 여전히 나무꾼, 셋째 딸은 여전히 셋째 딸이다. 이는 나무꾼/셋째 딸의 존재적 변화를 의미한다기 보다, 그 자신의 존재성을 발휘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세계에 자리잡은 선녀/신선비의 결정에 따라, 배우자로서 그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각오가 되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시험을 통해 그 세계의 구성원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할 수 있는가, 그 결심은 꺾이지 않는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롯이 배우자가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구렁덩덩 신선비>에서는 신선비와 셋째 딸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나무꾼과 선녀>에서는 또 다른 위기가 도래하게 된다. 나무꾼은 시험을 통과하여 천상계에서 선녀의 배우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잠시’ 지상계에 가서 어머니를 보고 오겠다고 한다.18) 이 자체로는 위기가 되지 않는다. 나무꾼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미지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만으로 비극을 점칠 수 없다는 것은 비슷한 상황이 나타나는 <지네각시>와의 비교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지네각시>의 남자도 각시의 집에서 각시와 부족함 없이 잘 살다가 문득 원래 살던 집을 살펴보고 오고 싶어 한다. 남자에게 각시의 집과 원래의 집은 대비되는 공간이다. 각시의 집은 잘 살 수 있는 곳이지만 원래의 집은 잘 살 수 없는, 잘 살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집을 보고 돌아오겠다는 남자에게 각시는 가서 살펴보되 잠은 자지 말고 돌아오라고 한다. 이는 선녀가 나무꾼에게 용마를 타고 가서 살펴보되 말에서 내리지는 말라고 한 당부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원래 살던 곳은 더 이상 나무꾼의 삶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꾼이 선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원래 살던 곳에서의 삶을 청산해야 한다. <지네각시>의 남자는 이를 망설임 없이 해내며 자신이 살던 곳을 ‘잠시’ 돌아보는 데 그치지만, <나무꾼과 선녀>에서 나무꾼은 미련으로 여지를 남겨둠으로 인해 ‘잠시’ 돌아보는 데 실패한다. 이것은 <나무꾼과 선녀>에서 나무꾼이 선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존재성에 천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선녀가 그래서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로 떠났듯이, 나무꾼도 선녀를 떠나 자신이 살아온(살아갈) 세계로 옮겨간 것이 된다. 자신의 존재성에 주안점을 두면 관계에서의 화합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같은 문제를 다시 한 번 반복하며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나무꾼은 지상계에서, 선녀는 천상계에서 살아가게 되어 배우자와의 관계 지속에는 실패하게 된다. 즉, 나무꾼이 ‘어머니’로 표상되는, ‘나무꾼’으로서 맺은 관계에 대한 청산을 미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구렁덩덩 신선비>에서 셋째 딸은 자신이 맺고 있던 관계에 대한 집착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어머니 또는 첫째, 둘째 언니 등 이전의 관계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재의 관계를 통해 이룬 발전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무꾼과 셋째 딸의 공통점은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관계망을 대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발전적인 상태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관계망이다. 나무꾼에게 어머니가 그러하고, 셋째 딸에게 첫째, 둘째 언니가 그러하다. 이로 인해 관계에 위기가 발생하고, 결국 배우자와 헤어지게 되는 서사적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점 또한 공통적이다. 그런데 셋째 딸은 이 문제를 극복하고 재회를 이루어내고, 나무꾼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재회를 이루어내지 못하게 된다. 이 차이는 발생 시점으로 인해 결정된다. 셋째 딸은 신선비가 원하는 바를 함께 이루며 살아가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이를 알아채 만회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런데 나무꾼은 선녀가 원하는 바를 함께 이루며 살아가겠다고 결정하며 동행을 확정했음에도 이를 번복한 것이기에 만회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배우자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 셋째 딸과 나무꾼에게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암묵적 금기가 설정되는데, 셋째 딸은 이를 어기지 않고, 나무꾼은 이를 어겨 성패가 나뉘게 된다 할 수 있다. 또한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계에 대한 미련은 배우자와의 ‘화합’의 의지를 가늠하는 중요 요인이라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이별-재회-시험-통과’는 관계를 화합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과정에서 짚어낼 수 있는 화합의 원리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지속을 주안점으로 삼는 관계에서 자기 존재성을 의식하고 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면 상대와 불화하게 된다. 두 번째, 상대의 행동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상태로 두면 상대와 불화하게 된다. 세 번째, 역설적이지만 배우자가 떠남으로 인해 문제가 드러나고, 문제가 드러났기 때문에 고쳐볼 수 있게 되므로, 배우자의 떠남으로 인한 ‘거리두기’는 새로운 관계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네 번째, 배우자의 떠남이 관계 변화의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남겨진 배우자가 이전과는 다른 태도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이루어내야 한다. 이 태도의 전환은 안일함과 유약함을 극복한 토대 위에 성립한다. 다섯 번째, 배우자의 존재성을 이해하고 이를 실현해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고 동행해야 한다. 이는 배우자가 동반자가 됨을 의미하며, 부부 관계에서 이룰 수 있는 화합의 이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여섯 번째, 관계의 문제를 극복하고 회복하려는 의지의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이전의 상태를 그리워하지 않고,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는 태도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Ⅳ. 결론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의 서사는 부부 관계의 구도와 문제에 상동성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작품은 나무꾼과 선녀, 셋째 딸과 신선비가 각각 기반을 둔 세계가 다른 고귀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의 결합이라는 관계 구도의 공통점이 있다. 고귀한 존재는 이세계에, 평범한 존재는 현실계에 적을 둔다는 것을 존재성과 영역 기반의 차이를 표상한다. 이로 인해 이 관계에 내재한 문제는 고귀한 존재성을 가진 배우자가 평범한 존재성을 가진 배우자를 떠나는 ‘이별’을 통해 가시화된다.

이별은 평범한 배우자가 고귀한 배우자의 중요한 물건을 감추고 있다가 이를 밖으로 꺼내는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다. 이 사건은 관계가 그동안 비평형적 상태에서 일방의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존속이 이를 감추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나무꾼/셋째 딸에게 전적으로 일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추고 있는 상황은 언젠가 되더라도 드러날 상황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는 부담도 발생한다. 이처럼 선녀/신선비는 배우자가 이를 잘 해내는지 지켜보고, 나무꾼/셋째 딸은 이를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시혜적 구도가 성립한다.

시혜적 구도의 불균형성은 선녀/신선비가 떠남으로 인해 깨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은 관계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전화위복의 계기라 할 수 있다. 한쪽만 관계 지속의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구도가 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지속이 깨진 관계는 나무꾼/셋째 딸이 떠난 배우자를 찾아감으로 인해 회복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나무꾼/셋째 딸은 감추어야 한다는 임무에 실패했지만,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여 나간다. 그리고 이 일관적 태도가 이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 힘으로 인해 관계는 전보다 더욱 단단한 신뢰의 기반을 닦을 수 있게 되며, 이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험’에서 흔들리지 않는 강건함의 토대가 된다.

‘시험’은 이들이 관계의 내적 위기를 얼마나 잘 극복했는가를 증명하는 장이다. 시험은 관계 외적으로 발생하는 위기이며, 나무꾼/셋째 딸이 옮겨간 세계에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나무꾼/셋째 딸이 배우자를 따라 삶의 기반을 옮기며 이미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그 결과가 정해졌다 할 수 있다. 이처럼 시험을 극복하는 힘의 핵심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이별-재회’가 나타나면 그 뒤에 이어지는 ‘시험’은 ‘통과’로 이어지는 전개가 필연적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구도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에 대한 대응의 과정이 ‘결연’ 이후, ‘이별-재회-시험-통과’의 서사 구조를 통해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서사 구조는 불화를 겪던 두 사람이 이를 극복하고 화합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합은 갈등이 극대화된 상태인 ‘이별’의 발생 원인에서부터 살펴야 그 과정과 원리를 포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서사에서 화합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즉, 성취되지 못한 것이기에,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 원인은 관계 당사자들 간의 힘의 불균형에서 기인한다. 선녀와 나무꾼, 신선비와 셋째 딸은 존재적 속성이 다르다는 전제를 통해 그 힘의 불균형을 드러낸다. 그러나 ‘지속’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부부관계가 되면서 이 불균형이 관계의 문제로 전면에 내세워진다. 최초의 지속은 이 불균형성을 온전히 다 극복하지 못하여 불안정하게 유지된다. 그러므로 곧 이 관계에 내정되어 있는 위기가 도래한다. 선녀/신선비는 배우자가 ‘~하면’ 그 대가로 ‘배우자가 되겠다’는 단서를 붙여 배우자에게 관계 지속의 책임을 미룬다. 그리고 이 책임을 맡은 배우자, 나무꾼/셋째 딸의 잘못이 저질러지고, 선녀/신선비는 ‘배우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철회하며 떠난다.

선녀/신선비 나름의 노력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자신의 존재성을 감추어야 하는 세계에서 정착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력은 배우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시점에서 거두어들인다. 배우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배우자의 세계에서 머무르던 선녀/신선비는 자신의 존재성을 자연스럽게 펼쳐낼 수 있는 세계로 돌아간다.

이처럼 이별로 인해 도래한 위기는 나무꾼/셋째 딸의 단서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지속에 대한 일관적 의지로 일단락된다. 나무꾼/셋째 딸은 떠난 배우자를 찾아간다. 나무꾼/셋째 딸은 관계가 불균형적인 상황에서, 지속의 책임을 오롯이 지고 있을 때도 일관되게 관계의 지속을 목표로 한다. 나무꾼/셋째 딸의 행동은 관계의 지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감추어진 물건이 밖으로 꺼내지며,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행위 그 자체보다 배우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나무꾼/셋째 딸은 관계 지속을 원하지만, 배우자의 소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여 위기에 당면하게 된다.

나무꾼/셋째 딸은 배우자를 찾아가는 행동으로 배우자와의 관계가 어그러진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다. 이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방법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무꾼/셋째 딸은 관계 파탄의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부정이나 해명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간다. 그리고 배우자가 선택한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재회’의 대목에서 배우자의 세계로 옮겨가는 행동으로써 배우자와의 관계 지속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이 관계의 ‘재회’는 성공을 내정한다 할 수 있다. 배우자를 바꾸려는 방식이 아닌, 자신을 바꾸는 방식이기 때문에 주체적이기도 하고, 실현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해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가 ‘세상의 소망’, 즉 상대의 소망을 잘 파악하고 보살펴야 부부 관계를 지속해나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부부 관계는 지속하려는 의지만으로는 화합에 이르기 어렵고, 배우자라는 세상의 소망에 어떻게 귀기울여야 진정한 화합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Notes

*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21S1A5B5A16078146).

1) 다른 이야기와 결합하지 않은 단일한 유형의 <나무꾼과 선녀>와 <구렁덩덩 신선비>는 『대계』에 각각 43편, 49편이 발견된다. 자료의 대상을 증편 『대계』를 비롯한 다른 자료들로 넓히면 더 많은 작품들이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세계 광포 설화에 속하면서 한국의 문화 원형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한국 문학의 중요 작품으로 연구되어 왔다. 본고는 이에 관한 통계학적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으므로 양적 현황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이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으로 본다.

2) <나무꾼과 선녀>, <구렁덩덩 신선비>는 광포설화이고,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와 관련한 연구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본고의 논의와 관련성이 있는 논의로 간추려 제시하였다. <나무꾼과 선녀>에 대한 연구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승되는 작품들과의 서사적 관련성을 탐구한 연구군과,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욕망과 서사적 특징을 탐색한 연구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 욕망을 탐구하는 연구들은 이 작품의 하위 유형 양상과의 관련성을 밝히는 논의와 현대 문학 작품들과의 관련성을 밝히는 논의를 포함한다. <나무꾼과 선녀>의 하위 유형과 관련한 논의는 최근에 이루어진 김용선의 연구에서 정리한 내용을 참고하였다. 김용선, 「<선녀와 나무꾼> 설화의 ‘혼인 유형’에 관한 소고 : ‘약탈혼(掠奪婚)’에서 ‘신성혼(神聖婚)’으로의 변이를 중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 63 (2021), pp.123-155.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연구한 논문들로는, 김화경, 「일본 날개옷 설화의 연구」, 『어문학』 95 (2007), pp.469-498; 김환희, 「<나무꾼과 선녀>와 일본<날개옷> 설화의 비교연구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가능성」, 『열상고전연구』 26 (2007), pp.85-116; 양민정, 「「나무꾼과 선녀」형 설화의 비교를 통한 다문화 가정의 가족의식 교육 연구 : 한국. 중국. 베트남. 몽골 설화를 중심으로」, 『국제지역연구』 15-4 (2012), pp.45-65; 진영, 「<선녀와 나무꾼>의 신화적 재해석」, 『동아시아고대학』 47 (2017), pp.221-242. 등이 있다. 또 욕망과 서사적 특징을 연구한 논문들로는, 김대숙, 「‘나무꾼과 선녀’ 설화의 민담적 성격과 주제에 관한 연구」, 『국어국문학』 137 (2004), pp.329-351; 권애자, 「<선녀와 나무꾼> 설화의 욕망 층위와 꿈의 위상」, 『국학연구론총』 18 (2016), pp.255-291; 노제운, 「『나무꾼과 선녀』 그림책에 나타난 ‘혼인’의 의미 고찰」, 『동화와번역』 36 (2018), pp.83-115; 이명현, 「<나무꾼과 선녀> 서사의 웹툰 수용과 재해석의 방향 : <망월선녀설화>와 <계룡선녀전>을 중심으로」, 『국제어문』 91 (2021) pp.31-61; 하경숙, 「설화 <선녀와 나무꾼>의 형성과 전승 양상」, 『동방학』 39, (2018), pp.77-100; 김지현, 「문화콘텐츠 웹툰으로 재창작된 〈선녀와 나무꾼〉속 ‘사슴’의 의미와 기능 변모양상」, 『한국문학과예술』 31 (2019), pp.65-93. 전주희, 「한국의 혼인과 가족 문화의 관점에서 본 <선녀와 나무꾼> : 결혼 생활에 관한 집단 기억과 공유된 정서를 중심으로」,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9 (2019), pp.101-153. 등이 있다. <구렁덩덩 신선비>를 비교문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한 논문들로는, 김정은, 「금기를 통한 “신랑 되찾기” 서사의 의미 고찰 : 한국민담과 독일민담을 중심으로」, 『겨레어문학』 47 (2011), pp.5-31; 민선홍, 「민담 「구렁덩덩 신선비」와 「두꺼비 신랑」의 비교 : 결혼 후 통과의례담의 관점에서」, 『구비문학연구』 56 (2020), pp.5-34; 한명환, 「한국 민담(전래동화)의 환상 구조 : <쥐의 둔갑>, <구렁덩덩 신선비>을 중심으로」, 『한중인문학연구』 6 (2001), pp.442-467; 이성희, 「다문화시대 상호문화능력 신장을 위한 한국 구비문학 읽기 : <뱀신랑-AT 425. 잃어버린 남편을 찾아서>·<구렁덩덩 신선비>를 중심으로」, 『온지논충』 58 (2019), pp.339-365; 김용선, 「<구렁덩덩 신선비>와 <두꺼비 신랑> 속 ‘허물’과 ‘아내 고행’의 의미 : 동물 토템에서 기인한 가부장제로의 이행을 중심으로」, 『온지논총』 69 (2021), pp.111-139. 등이 있다.

3) 이는 문학치료학적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선행 논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승민·김정애, 「신선비를 중심으로 본 설화 <구렁덩덩 신선비>의 불균형적 관계 맺기 양상과 문학치료적 의미」, 『문학치료연구』 60 (2021), p.71; 김정애, 「<나무꾼과 선녀>에 대한 중국인 학생 A, B의 다시쓰기 사례의 특성과 그 문학치료학적 의미」, 『문학치료연구』 39 (2016), pp.201-233; 김정애, 「<나무꾼과 선녀>의 결말 양상에 대한 문학치료적 해석의 의의」, 『문학치료연구』 23 (2012), pp.228-257; 서은아, 「<나무꾼과 선녀>의 부부갈등 중 ‘선녀의 개인적 결점’으로 인한 갈등과 그 문학치료적 가능성 탐색」, 『문학치료연구』 2 (2005), pp.169-195; 서은아, 「<나무꾼과 선녀>의 옹서갈등과 문학치료적 접근」, 『국어교육』 123 (2007), pp.587-609; 신동흔, 「문학치료를 위한 설화의 서사적 분기점과 서사 반응 분석 : <선녀와 나무꾼> MMLT를 중심으로」, 『문학치료연구』 61 (2021), pp.9-128.

4) 서대석은 <나무꾼과 선녀>에서 나무꾼과 선녀가 지상과 천상 공간을 오가는 과정은 신화가 민담으로 변모하게 된 경위와 관련하여 파악할 수 있다고 논한 바 있다. 지상과 천상이라는 ‘대칭적 공간’을 오가는 이동이 신화와 민담에서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구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간의 이동에 대한 논의는 <구렁덩덩 신선비>를 분석한 논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렁덩덩 신선비>가 수신 신화의 흔적을 간직한 민담이기 때문에 셋째 딸과 신선비가 지상과 수중 공간을 오가는 과정이 나타난다고 논한 바 있다. 이처럼 이 두 작품에는 부부가 된 등장인물들이 공간을 이동하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본고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관계론적 관점에서 논하고자 한다. 서대석의 논의가 민담과 신화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데 있기 때문에 본고와 논의의 결이 다르지만, 이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부부가 공간을 이동하는 과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대석, 「한국 신화와 민담의 세계관 연구 : 세계관적 대칭위상(對稱位相)의 검토」, 『국어국문학』 101 (1989), pp.15-20; 서대석, 「「구렁덩덩신선비」의 신화적 성격」, 『고전문학연구』 3 (1986), p.200.

5)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나무꾼과 선녀>에 해당하는 각편은 총 42편이다. 그 가운데 본고에서 살핀 자료들은 나무꾼과 선녀의 만남과 재회, 결별에 이르는 과정이 모두 나타나는 7편이며, 해당 각편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나무꾼과 선녀>, 『대계』 1-7 (1988), pp.287-292; <나무꾼과 선녀>, 『대계』 6-3 (1988), pp.111-116; <나무꾼과 선녀, 노루 이야기>, 『대계』 7-1 (1988), pp.268-270; <나무꾼과 선녀>, 『대계』 8-9 (1988), pp.357-361; <선녀와 나무꾼(뻐꾹새의 유래)>, 『대계』 1-7 (1988), pp.839-840; <뻐꾸기의 유래>, 『대계』 1-3 (1988), pp.65-68; <선녀와 나무꾼(다시 찾은 옥새)>, 『대계』 1-6 (1988), pp.58-79. 본고에서 분석한 서사 구조는 이 7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6)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논의를 참조하였다. 김정애, 「<나무꾼과 선녀>의 결말 양상에 대한 문학치료적 해석의 의의」, 『문학치료연구』 23 (2012), pp.228-257.

7) 나무꾼과 선녀가 재회한 후, 나무꾼에 대한 시험이 제시되고 그 시험에 통과하는 과정이 진행되는데, 여기에서는 관계의 상태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 과정의 양상에 대한 언급은 축약하였다.

8)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구렁덩덩 신선비>에 해당하는 각편은 총 49편이다. 그 가운데 본고에서 살핀 자료들은 구렁덩덩 신선비와 셋째 딸의 만남과 재회에 이르는 과정이 모두 나타나는 20편이며, 해당 각편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구렁덩덩 신선비>, 『대계』 1-9 (1984), pp.453-460; <구렁덩덩 신선비>, 『대계』 1-9 (1984) pp.200-205; <구렁덩덩 소선비>, 『대계』 4-5 (1984), pp.162-165; <구렁덩덩 소선비>, 『대계』 4-5 (1984), pp.355-362; <구렁덩덩 신선비>, 『대계』 4-6 (1984) pp.178-188; <구렁덩덩 신선비>, 『대계』 5-3 (1983), pp.466-473; <구렁덩덩 신선비>, 『대계』 5-4 (1984), pp.827-833; <구렁덩덩 시선부>, 『대계』 5-5 (1987), pp.395-397; <구렁덩덩 신선비>, 『대계』 5-7 (1987), pp.174-182; <구렁덩덩 신선비>, 『대계』 8-13 (1986), pp.558-564; <구렁 선비>, 『대계』 8-10 (1984), pp.597-606; <구렁이 신랑>, 『대계』 8-11 (1984), pp.440-446; <구렁이를 낳은 할머니>, 『대계』 4-1 (1980), pp.357-360; <구렁이 허물 벗은 선비>, 『대계』 7-12 (1984), pp.140-144; <동동시선부>, 『대계』 8-9 (1983), pp.999-1006; <뱀 아들의 결혼>, 『대계』 7-10 (1984) pp.631-640; <뱀서방>, 『대계』 7-6 (1981), pp.578-588; <뱀 서방>, 『대계』 6-5 (1985), pp.154-161; <뱀신랑>, 『대계』 8-5 (1981), pp.50-54; <뱀 신랑과 열녀 부인>, 『대계』 8-7 (1983), pp.638-645.

9) 신선비에게 ‘허물’은 능력의 은폐 표상이며, 이를 감추려는 시도는 새로운 능력자로 전환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과 관련된다는 논의가 개진된 바 있다. 허물은 신이한 존재인 구렁이가 일상적 존재인 선비로 넘나들 수 있게 하는 마술적 힘이 내재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지켜야 하는 셋째 딸의 위치 역시 특수하다는 것이다. 이태문, 「「구렁덩덩 신선비」와 「두꺼비 신랑」의 비교」, 『연민학지』 5 (1997), pp.413-435.

10) <구렁덩덩 신선비>에서는 신선비가 후처를 들인다는 내용이 부연되기도 하지만, 신선비는 셋째 딸과의 관계를 ‘묵은 장’에 비견하며 후처가 있어도, 혹은 후처와 헤어져도 셋째 딸과 다시 부부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11) 나무꾼과 셋째 딸이 치르는 시험의 내용을 젠더적 관점에서 조명하면, 나무꾼의 시험과 셋째 딸의 시험은 질적으로 다른 면이 포착된다. 나무꾼의 시험은 장인인 선녀의 아버지의 곤란을 해결해주거나, 또는 초월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셋째 딸의 시험은 현모양처로서 자질이 있는가를 증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나무꾼의 시험은 시험을 출제하는 주체가 장인(선녀의 가족)인데 비해, 셋째 딸의 시험은 출제하는 주체가 남편인 신선비이다. 이와 같은 점에 착목하면, 나무꾼의 시험과 선녀의 시험의 대비를 통해 젠더적 의미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이 또한 유의미한 논의가 될 것이지만, 본고에서는 시험의 내용보다 이 시험을 통해 부부 관계가 어떤 지점으로 나아가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였다. 즉, 시험이 관계의 결속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12) 선녀/신선비는 고귀함이 부각되는 존재성을 갖고, 나무꾼/셋째 딸은 평범함이 부각되는 존재성을 갖지만, 존재성이 곧 관계에서 불평등한 ‘힘’을 발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서사들은 존재성에서 비롯된 불평등한 ‘힘’보다, 존재성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위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녀 또는 신선비가 자신들과는 다르게 배우자가 사회적으로 무능하여 혹은 외모가 모자라고, 사회적 배경이 미천하여 떠나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대한 배우자의 무성의한 태도에 실망(나무꾼이 선녀를 적당히 위로하기 위해 날개옷을 꺼낸 것이나, 신선비가 반드시 보이지 말라고 한 허물을 태워버린 것에)하여 떠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주목하면, 이 서사들은 선녀와 나무꾼, 신선비와 셋째 딸의 관계에서 존재성의 차이보다 관계에 임하는 태도의 문제를 더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3) 이는 본고가 선행 연구와 차별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나무꾼과 선녀>와 <구렁덩덩 신선비>는 각각의 작품론을 통해 ‘떠난 배우자 찾아가기’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논의된 바 있다. 그럼에도 그 차이에 착목되어 두 작품을 비교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로써 두 작품의 서사 비교를 통해 드러낼 수 있는 공통의 서사 구조와 그에 담긴 서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논의된 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본고는 동일한 관계의 구도와 서사 구조 등에서 포착되는 불화와 화합의 과정에 천착하여 갈등의 발생과 해소의 원리를 포착해보고자 하였다.

14) 정운채, 「문학치료학의 서사이론」, 『문학치료연구』 9 (2008), pp.247-278.

15) 신선비를 수신의 신격으로 보는 논의에서는 셋째 딸을 떠난 신선비가 신격으로서 좌정해야 할 수중 세계로 이동하고, 셋째 딸이 뒤따라 수중 세계로 진입한다고 보기도 한다. 신격을 다루는 논의와는 다르지만 본고에서는 신선비가 셋째 딸이 속한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16) 신서임(여, 74) 구연, <구렁덩덩 신선비>, 『한국구비문학대계』, 5-3 (1983), pp.68-75.

17) 정운채는 이에 대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장자네 막내딸이 맨 먼저 한 일은 남편인 구렁덩덩신선비를 찾아나서는 일이었다. 의사소통이나 상호 이해는 만나고 나서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으며 무엇이 어찌 되었는가는 일단 만난 다음에 따질 일이다. 또한 관계를 회복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과 상대방에 대한 신뢰감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정운채, 「부부서사진단도구를 위한 구비설화와 부부서사의 진단 요소」, 『고전문학과 교육』 15 (2008), p.27.

18) 장갑춘이 구연한 각편에서는 나무꾼이 어머니가 아니라, 조실부모하여 자신을 길러준 ‘고모’를 찾아간다고 나타나기도 한다. 장갑춘(남, 60) 구연, <나무꾼과 선녀>, 『한국구비문학대계』 6-3 (1984), pp.1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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