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에 위치한 고불선원(古佛禪院)1)의 석암(石岩) 강희준(姜熙俊) 선원장(禪院長)은 선친의 유품을 발굴하여 소위 ‘육필 대순전경’과 ‘천심경’, 가사집, 간찰 등을 공개하였고, 언론에 소개된 바 있다.2) 이와 관련하여 『근·현대문화유산 종교(민족종교)분야 목록화 조사연구 보고서』(2016, 조사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문화재청)에 실리기도 하였으며, 석암 선원장이 『대순전경과 천심경』(2017) 및 『증산 강일순 상제의 성해는』(2019)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소장·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살펴볼 수 있다. 『대순전경』의 경우 서(序), 찬(贊), 보주(補註), 목차, 본문, 가사, 「증산대선생약사(畧史) 문답」 등으로 이뤄져 있다. 해당 자료는 고불선원 측에서는 대순전경 필사본의 경우 소위 ‘육필 대순전경’이라 하며, 1910년에 작성되었다고 보고 있고, 이외에 『천심경』, 가사집, 간찰 역시 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해당 주장을 치밀하게 다시 살피고, 자료에 대해 성격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신종교의 자료의 성격에 대해 전체적 상을 그리지 못하여 잘못 이해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고, 고불선원의 해당 자료 역시 그러한 사례로 보인다. 이를 다시금 되짚어 자료의 온전한 성격을 찾아줄 필요가 있으며, 이 역시 신종교 연구에 있어 일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Ⅱ. 고불선원 자료 현황과 기존의 입장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전자사료관을 통해 가치 있는 자료들을 일반에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3) 이들 자료들 중 종교 관련 자료도 많이 공개되어 있으나, 아직 종교학계에서 이를 원활히 이용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이 가운데, 위에서 언급한 고불선원의 자료가 공개되어 있는데, ‘충북 충주시 고불선원 소장 자료(사료군 DCB030)’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사료 계열 | 자료명 | 사료철 건 수 | 내용 | |
---|---|---|---|---|
0 | DCB030_00 | 충북 충주시 고불선원 소장 자료 | 658 | 간찰, 천심경, 음양시비가, 대순전경, 차용증서, 토지매매계약서, 졸업앨범, 시문, 만사, 통지문, 혼서, 망기, 제문, 장택기(葬擇記), 점복문, 호적, 서목, 부적, 사주론, 사주점, 한글가사, 농사일기 |
1 | DCB030_01 | 충북 충주시 고불선원 소장 자료 2015년 수집 | 351 | 토지계약서, 영수증, 문중안내문, 월보를 비롯한 광업관련자료, 임명장, 수료증, 진단서, 성덕도의 성덕도보(聖德道報)4), 신결(神訣) 등 |
2 | DCB030_02 | 충북 충주시 고불선원 소장 자료 2017년 수집 | 101 | 차용증서, 이력서, 토지매매계약서, 묵화, 비결(祕訣), 성황당 등 제문, 사주단자, 혼서, 간찰, 동란일기(東亂日記), 간식류편(簡式類編) 등 |
3 | DCB030_05 | 충북 충주시 고불선원 소장 자료 2019년 수집_황계(篁溪) 하긍호(河兢鎬) 문중 관련 문서 | 35 | 진양 하씨집안 문중 관련 문서(하주운, 조용헌, 하해웅, 권만수, 이봉호, 권재규, 이성보, 윤병채, 송달호, 권복근, 손태헌, 하용래, 이태동 등) |
4 | DCB030_06 | 충북 충주시 고불선원 소장 사료 2020년 수집 | 51 | 시(詩), 만시(輓詩), 만장(輓狀), 서화(書畫), 혼례택일기(婚禮擇日記), 간찰(簡札), 혼서(婚書), 산도(山圖), 지적도, 대구 미국공보원 소식지 등 |
5 | DCB030_07 | 충북 충주시 고불선원 소장 사료 2021년 수집 | 4 | 1800년대 진주강씨 간독, 을축년 조하정(趙河亭) 병풍, 풍방장문(風防長門)5) 등 |
이중 살펴볼 자료는 사료계열 DCB030_00에 속한 다음의 4자료이다.6)
위의 자료들은 신문기사에 소개된 이후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근·현대문화유산 종교(민족종교)분야 목록화 조사연구 보고서』에 증산교(증산계 교단) 자료로 아래와 같이 2016년 10월 조사되었다.7)
<표 4>에 실린 해제의 작성자는 유물 소유자인 석암 강희준 고불선원 선원장이다. 이와 관련한 다른 이들이 발표한 논문이나 설명은 없기에 여기서 말하는 기존의 입장은 곧 석암의 입장을 말한다. 석암은 위의 조사연구 보고서 내용을 시작으로 『대순전경과 천심경』(2017)과 『증산 강일순 상제의 성해는』(2019) 두 권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는데,8) 발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위의 유물들은 1945년 해방되면서 증산교의 17개 교단 대표들이 모여 증산교단 통정원의 설립자를 독립운동가 유동열(임시정부참모총장)을 추대하였다. 그 단체의 대표자인 유동열은 6·25 때 납북 되는 바람에 증산교단 통정원은 와해 되고 말았다. … 『대순전경』 증산 강일순 선생의 서찰 36점, 증산 강일순 자필 『천심경』, 교리서인 『참정신으로 배울일』 전체를 정통성의 민족종교 근거 자료로써 통교인 유동열께서 포교를 하기 위해 대표로써 준비하고 있던 유물들이다. … 이 책은 일제 치하의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종교의 필요성을 자각했던 강일순 선생의 자료를 토대로 엮었다. … 특히 충남 공주 출신의 경제인 정한명이 증산 선생에게 보낸 서찰, 고령 현감 송순혁이 증산 선생에게 보낸 서찰 2점, 기장현감 오영석이 증산 선생에게 보낸 서찰 2점, 참봉 노정현이 증산 선생에게 보낸 서찰 3점 등을 발췌하여 첨부함으로써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증산 선생이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집대성하여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9)
『대순전경』과 『천심경』은 선친의 유품입니다. 아주 어린 기억은 없을지라도, 기억이 있는 한 『대순전경』 육필본과 서찰(비록), 『천심경』과 『참 정신으로 배울 일』은 언제나 곁에 있었습니다. 어릴 때 선친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한 묶음으로 제게 주셨습니다. … 부친은 진주강씨(晉州姜氏) 후손이십니다. 저 또한 아버지의 핏줄이니 진주강씨이고 24대손이 됩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증산상제(강일순) 어른도 가까운 집안입니다. 그래서 이 소중한 유물이 선친께 전해지고 아끼셨으며 보중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저는 이 물건을 아끼고 지키라는 선친의 약속을 지키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10)
일단 해당 자료의 성격에 있어 그 입장이 동일하지 않다. 『대순전경과 천심경』서문에서는 증산교단통정원(甑山敎團統整院)11)의 대표 유동열이 포교를 위해 준비하던 자료라 하였다. 이의 맥락은 본 자료를 첫 소개한 다음의 기사에 조금 더 자세하다.
강증산 사상에 영향을 받은 증산도, 대순진리회, 원불교 등 민족종교들의 경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대순전경(大巡典經)’의 유일한 필사본이 발견됐다. 최근 국사편찬위원회는 충북의 한 선원이 소장하고 있는 각종 문화재급 자료 2만여 점 중 700여 점을 조사, 검증하는 가운데 드러난 대순전경 필사본은 1949년 1월 11일 증산교의 17개 교단 대표들이 임원을 선출하고 증산교단 선언과 교의체계, 신앙체계 증산규약을 만들기 위해 쓰여 졌으며 증산교단 통정원을 선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전으로 알려졌다. 유동렬이 통교의 직책을 맡고 대순전경 저자인 이상호가 부통교 직책을 맡았다.12)
기사에서는 증산교단통정원을 선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전이라 『대순전경』 필사본을 설명하고 있다. 『대순전경』을 필사하여 증산교단통정원의 경전으로 쓰기 위함이라고 본 듯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고 이후 『증산 강일순 상제의 성해는』에서는 선친의 유품으로 그 성격을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 후자의 입장이 옳을 듯하고, 증산교단통정원을 위한 유동열의 자료라는 점은 확언하기 어렵다. 본 자료들은 석암의 부친이 석암에게 남긴 유품으로 일단 간주해야 할 듯하다.
보고서 및 단행본을 통해 각각의 자료에 대해 석암의 주장 중 눈여겨 볼 부분은 다음과 같다.13)
앞서 서문에서는 증산의 자필이라고 하였다. 증산이 지은 것이라는 강력한 전언(傳言)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하는 한편,14) 경전의 주체가 되는 신앙의 지도자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전후 사실을 고려하면 복희, 문왕, 주공, 공자의 신성함을 뒤이은 증산선생이었을 개연성이 짙다고 한다.15) 그리고 사람이 만물중 가장 존귀하며, 이를 위협하는 사악함과 요사함에 대한 강한 배척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16)
석암은 여러 가사 및 여타 자료가 묶인 이 자료에 대해 1889년 작성된 것으로 추측17)되며 증산의 소개를 긍지에 가득 찬 자세로 밝히고 있다고 하고 있다.18) 「음양에 관한 시비(陰陽是非) 끝났음을 말하는 노래(歌)」, 「해(害)가 많은 천언(天言)을 보고 듣고서 알지 못하고 도가 없으면서 허둥지둥 말을 삼는 자에게」, 「한 마음의 살리는 말씀(一心生言)」, 「예수 제자 기별(弟子 寄別) 간다」, 「수운 제자 소식(水雲弟子 消息) 간다」, 「증산제자 기별(甑山弟子 寄別) 간다」, 「갔다 오는 화민인심(和民人心) 기별(寄別) 가자분다」, 「환본정신(還本精神) 옳은 사람 기별(寄別)가자 부른다」, 「삼인부(三印符)」19)를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으로 예수 등의 여러 신앙 지도자를 돌아가며 위대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고도 한다.20) 그리고 당시 도탄에 빠진 조선민중에게 신앙적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며, 그 과정에서 ‘하날임’과 연결되는 ‘선생임’의 신이한 존재를 조명하고 있다 한다.21)
이후에 낸 저작에서는 저작시기를 설명 없이 1948년에 작성되었다고 하였는데,22) 같은 책의 맺는글에서는 다시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하였다.23) 이는 기존 저작의 내용을 다시 전재(轉載)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잘못으로 보인다.
증산이 1909년 세상을 뜨자 1910년 7월 26일 전라남도 장성 살던 이양섭이 『대순전경』을 완필하였다고 한다.24) 석암은 『대순전경』에 담긴 증산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이러저러한 해석들을 가하고 있다. 많은 분량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다만 단순한 내용 소개 및 평이한 의미부여에 그치고 있다. 하나만 예로 든다. “『대순전경』의 ‘제4장 59’ 부분을 보면, 증산선생이 당시에 자신에게 불경(不敬)하게 대하는 이에게 도리어 더욱 성심을 다하고자 했음을 알게 된다. 곧, 증산선생에게 대해 심하게 불경하고 능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이에게 더욱 예의를 갖추어 대우했다고 한다. 그러자 종도 가운데 그러함을 불만으로 여겨 선생의 행동이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자 증산선생은 말하길, ‘저들이 불경(不敬)하게 생각함은 나를 모르는 연고(緣故)로 비롯됨이다. 만일 나를 잘 알면 너희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터이다. 그러하니 저들이 나를 알지도 못하고 불경하며 능욕함을 너희들이 개의(介意)할 일이겠느냐?’고 했다. 증산선생의 입장은 자신의 속마음과 정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이 자신을 헐뜯거나 불손하게 대한 다고 하여 화를 낼 일이 아니고, 더욱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함으로써 지닌 뜻을 잘 전파하면 그만이라는 논리로 이해되는 상황이다. 대중적 신앙 지도자의 면모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25)
그리하여 『대순전경』의 특성으로 다음을 들고 있다. 첫째, 근대 세계관을 일부 수용한 조선말의 새로운 신앙사상 문건, 둘째, 신앙지도자(증산선생)에 관한 연대기적 서술, 셋째, ‘만고해원(萬古解冤)’의 의지가 담긴 조선말기 민중적 신앙문건, 넷째, 피흉추길(避凶趨吉) 경향의 신앙지도자(증산선생) 내면을 드러냄, 다섯째, 광구천하(匡救天下)를 위한 신앙지도자의 세계관 표출, 여섯째, 도술적(道術的) 기담(奇談)의 연속적 서술, 일곱째, 교훈적 일화와 교학(敎學)의 실례를 소개.26)
처음 보고서 설명에서는 앞서 보았듯 간찰의 성격을 증산 강일순이 쓴, 증산의 활동 및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라 하였다. 이후 『대순전경과 천심경』 서문에서 서찰을 발췌하여 실었다 하였는데,27) 세부적 설명 없이 서찰 사진을 책 군데군데에 실었다. 책에는 따로 밝혀두지 않았기 때문에 편의상 쪽수와 설명을 옮겨 둔다. ① 127쪽: 고령 현감 송순혁 일제강점기 44*26(곧은 지조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함 증산 강일순 신도), ② 143쪽: 고령 현감 송순혁 일제강점기 44*26(곧은 지조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함 증산 강일순 신도), ③ 166쪽: 기장 현감 오영석 근대/개항기 증산 강일순 신도, ④ 181쪽: 참봉 노정현 일제강점기 45*22 증산강일순 신도, ⑤ 190쪽: 참봉 노정현 일제강점기 45*22 증산강일순 신도, ⑥ 195쪽: 참봉 노정현 일제강점기 45*22 증산강일순 신도, ⑦ 243쪽: 정한명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경제인: 증산 강일순 종교 재단에 독립 자금을 낸 자료 서찰 30*24. 서문에서는 정한명의 서찰도 있다 하였는데, 책에서 찾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서찰이 부기해둔 간단한 설명과 부합되는지는 의문이다. 짤막한 설명만 볼 때, 송순혁, 오영석, 노정현, 정한명 등을 강일순의 신도로 본 듯하나 그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이후 발간한 『증산 강일순 상제의 성해는』에서는 서찰을 비록(秘錄)이라고 소개하면서, 책에 사진과 번역을 실었다(‘제2부 간찰을 통해서 본 성여 모시기’). 이에 대해 별도의 설명 없이 다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60살이 넘어서 『대순전경』과 『천심경』도 공개를 하였고, 이번에 또다시 증산상제와 연관이 있는 여러 증빙(證憑)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21년부터 해방 후까지의 증산 상제 성해(聖骸)와 관련된 문서(서찰)들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28)
해당 저서의 1부 제목은 ‘증산 상제의 성해는 어디에’라 하여 증산의 성해와 관련한 여러 논란들을 다루었는데, 2부의 간찰 내용을 ‘증산 상제 성해(聖骸)와 관련된 문서(서찰)’라 규정한 것이다. 이는 앞서 증산의 친필이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증산의 성해를 모셨던 이들이 보낸 편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찰의 종수에 대해서는 처음 신문기사에서는 33종으로 소개되었으나, 이후 보고서에서는 36종으로 확대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Ⅲ. 고불선원 자료의 성격 (1) : 『참 정신(情神)으로 배울 일』, 『천심경』, 간찰
우선 이들 자료들이 석암이 주장하듯 과연 증산과 관련한 자료들인가? 석암은 신문기사와 저서를 통해 『천심경』이 증산의 자필로 이뤄졌다고 하였고, 『참 정신으로 배울 일』은 증산에 대한 소개라 하였으며, 간찰은 증산 당시의 상황들을 알리는 내용이라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석암 스스로의 해제를 통해 아무런 여과 없이 문화재청 보고서까지 올라가 공신력을 얻게 되었고, 현재까지 아무런 반박도 받지 않았다. 본 장에서는 이들 자료들의 성격을 밝혀, 증산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
『참 정신으로 배울 일』은 가사를 비롯한 여러 자료들이 묶인 필사본 자료이다. 이 자료들은 갱정유도의 경전 『부응경(符應經)』에 속한 자료들이다. 갱정유도는 그 정식명칭을 시운기화 유불선 동서학 합일 대도대명 다경대길 유도갱정 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으로 하는데, 1929년 영신당(迎新堂)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이 전북 순창에서 도통하며 시작한 신종교이다. 강대성은 1934년 3월 가장 근본이 되는 경전인 「해인경(海印經)」을 저술하였고, 이후 「해인경」을 비롯하여 『부응경』을 이루는 경전 365권을 1934년 운장산 생활로부터 약 10년 기간 동안 저술하였다. 갱정유도의 교조 영신당 강대성 자료 원본은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묻어두었으나, 해방 이후 발굴한 경전들은 습기로 인해 부패하여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발굴된 일부 경전만 책으로 엮었다. 이후 1949년 「해인경」 6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해인경」을 읽으면 죽지 않는다”라는 소문이 전국에 널리 퍼질 정도였다. 이후 본부를 도령동, 전북 남원읍 천거리, 그리고 전북 김제군 광활면 학당리로 옮겨 체제를 정립하고 각지의 묻혀 있던 경전을 다시금 발굴하고 유실된 경전을 재서술하기도 하여 석판 인쇄하여 경전을 다시금 간행하였다. 현전하는 경전들은 대략 365권 중 50여 권이라 한다. 1970년 첫 번째 집성으로 『시운기화도덕경(時運氣和道德經)』(별칭 『제화대전(濟化大全)』이 간행되었고, 이에서 경전 자료를 보충하고 오탈자를 고치고 영신당이 친히 불렀던 『부응경』 이름으로 바로잡아 1980년 『부응경』을 발간하였다. 또한 2대 교주인 계도선사의 저술들도 『만민해원경』을 함께 첨부하였다. 해당 『부응경』 외에도 고창 지역 일심형제들이 영인본 『부응경』 5권29)을 간행하였다.30) 『근·현대문화유산 종교(민족종교)분야 목록화 조사연구 보고서』를 참고해 볼 때, 남원 갱정유도 성당에 『부응경』 원본이 다수 남아 있으며,31) 이외에도 한글박물관32), 가사문학관33) 등에서 몇몇 소장하고 있다.
아래의 표에서 『참 정신으로 배울 일』의 세부 편들의 원본 쪽수34)를 밝히고, 이들이 영인본 『부응경』에 어디에 실려 있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제목이 없이 실려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시작하는 첫머리를 인용해서 표시하기로 한다. 한편으로 석암이 해당 필사본에 대해 제목이 없음으로 인하여 소개를 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비고에 표시해 둔다.
‘천심경(天心經)’이란 이름은 갱정유도의 『부응경』에도 여러 건 있는데,35) 이와는 상관 없다. 우선 고불선원본 『천심경』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無極有極에 惟精惟一ᄒᆞ사 天動以後에 地靜ᄒᆞ고 地靜ᄒᆞ고 地靜以後에 人生ᄒᆞ고 人生以後에 心正ᄒᆞ니 天爲日月星辰之君이요 地爲利慾十二之君이라 君者ᄂᆞᆫ 鬼也요 心者ᄂᆞᆫ 天也이 半畝方塘에 天君이 座定ᄒᆞ시고 一寸丹田에 地君이 座定ᄒᆞ시고 方塘丹田之間에 日月星辰이 四會라 四會之間에 惟人이 最貴ᄒᆞ고 萬物之中에 惟人이 最靈ᄒᆞ니 邪不犯正ᄒᆞ고 妖不勝德이라 天奪邪氣ᄒᆞ니 邪氣自滅ᄒᆞ니라 誦伏羲之先天ᄒᆞ며 誦文王之後天ᄒᆞ며 法周公之正心ᄒᆞ며 法孔子之仁心ᄒᆞ사 天皇이 始傳之地皇ᄒᆞ시고 地皇이 次傳之人皇ᄒᆞ시고 人皇又傳之文武周公孔子七十二賢ᄒᆞ시니 諸惡鬼은 速去千里 晻晻吸吸如律令娑婆阿
마지막 부분(“옴옴흡흡여율령사바하晻晻吸吸如律令娑婆阿”)은 주문의 끝에 붙여서 주문이 빨리 이뤄지도록 바라는 문장이다. 곧 『천심경』은 일종의 주문과 같은 성격을 지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천심경』과 유사한 주문이 기문둔갑을 다루는 책인 『무사자해기문둔갑장신법(無師自解奇門遁甲藏身法): 부 비전양택입문법(付 秘傳陽宅立門法)』36)에서 ‘전도주(傳道咒)’라는 주문으로 발견되는데,37) 본문은 아래와 같다.
無極有極에 惟精惟一이라 天動而後에 地靜하고 地靜而後에 人生하나니 天爲日月星辰之君이요 心爲利慾是非之君이라 君者는 心也요 心者는 天也이 半畝方塘에 天君이 座政하시고 一炷坍前에 干星이 司位라 三才之中에 惟人이 最貴하고 萬物之中에 惟人이 最靈하니 奸不勝德이요 邪不犯正이라 天奪邪氣하시니 邪氣自滅하리라 誦伏羲之先天하며 誦文王之後天하며 法周公之聖心이라 天皇은 以是로 傳之地皇하시고 地皇은 以是로 傳之人皇하시고 人皇은 以是로 傳之三皇五帝文武周公孔子大聖至聖七十二賢諸大聖賢하시고 諸大聖賢은 以是로 傳之南贍部洲東朝鮮國某道某郡某面某里居奉道弟子某하시니 三員大將과 九天玄女는 聽吾分付하야 無得留遲하고 及弟子身에 諸惡邪鬼와 諸惡邪崇을 速去千里 急急如律令38)
내용에 다소간 출입은 있지만 밑줄 친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유사하다. 기문둔갑(奇門遁甲)은 길흉을 판단하거나, 도술을 부리는 술수로 활용되는데, 이미 19세기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듯하다.39) 본 전도주는 기문둔갑의 많은 주문 중 하나인데,40) 『천심경』은 이 전도주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한편으로 한국가사문학관에 소장된, 저작시기를 알 수 없는 『옥룡자십조경산서(玉龍子十條經山書)』41)에 주문(呪文)이란 제목으로 『천심경』과 유사한 글이 나온다.
無極有極, 惟精惟一, 天動之後地静, 地静之後人生, 人生之後身㝎, 天爲日月星辰之君, 神爲利慾十二之君, 君自心耶, 心自天耶, 半畝方塘, 天心邪正, 一寸端正, 天性邪僞, 三才之中, 惟人最貴, 万物之中, 惟人最靈, 邪不犯正, 妖不勝德, 天奪邪鬼, 邪鬼自滅, 誦伏羲之先天, 誦文王之後天, 法周公之善心, 法孔子之仁心, 天皇以是傳之, 地皇以是傳之, 三皇五帝, 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 凢七十二賢, 諸悪寃鬼, 與猛獸, 一切消滅, 三災八乱, 官災口舌, 魔戱䓁事一時消滅, 雖千㐫万惡, 莫之敢窺, 六字大明王嗔言.
마지막 부분을 보면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嗔言, 곧 六字大明王眞言)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옴마니반메훔(唵麽抳鉢銘吽)을 말하는 것으로 관세음보살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되는 주문이라 한다. 본 주문이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천심경』의 마지막 구절 “晻晻吸吸如律令娑婆阿”에서의 사바하(娑婆阿) 역시도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ᅌᅳᆷ을 볼 때, 흥미로운 비교가 될 듯하다. 곧 『천심경』은 도교적 색채를 띤 기문둔갑의 전도주를 기본으로 하되 구전을 거치며 여러 변용을 겪은 것으로 보이고, 술수적 지식을 추구했던 이들 사이에서 제법 알려졌던 주문으로 보인다. 이것이 고불선원으로 필사되어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석암은 간찰이 증산이 친필로 당시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라거나, 증산의 성해(聖骸)를 모신 이들의 편지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해와 관련한 상황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는 ‘보고서’에 사진만 실려 있는 간찰 36종을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일일이 찾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작업한 해제 내용 등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 간찰에 대한 자세한 고찰, 곧 성립시기, 내용 분석, 인물 관계도 등은 본고의 범위를 벗어난다. 다만 해당 내용을 살펴볼 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병의 치료와 관련된 약물을 부탁하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등 일상적이고 전형적인 조선시대 간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증산과 관련한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간찰로 보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위의 간찰 중 2종류의 간찰42)에 ‘증산(甑山)’이라는 호칭이 등장하기에, 이를 바탕으로 전체 간찰을 강증산과 관련한 것으로 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중 한 간찰만 보고자 한다.
증산 성좌 집사께
겨울이 봄처럼 따뜻합니다. 요즘에 부모님 모시는 나머지 형의 안부도 내내 좋으시고 탕절(湯節: 부모의 병환을 이르는 말)은 요사이 나으셨는지요? 아울러 간절히 그립고 걱정이 됩니다. 며느리도 잘 지내시는지요? 원친(元親)의 안부는 늘 건강치 못하니 애타는 마음을 어떻게 말씀드리겠습니까?
미아(迷兒: 자신의 아이를 낮추어 이르는 말)를 일간 보내려고 했었는데, 가을걷이에 바빠 지금에야 보내니 이달 그믐이나 내달 초에 돌려 보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비록 한 번 찾아뵙고 의논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도 몸을 뺄 방법이 없어 제 맘 같지 않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혹시라도 한번 왕림하실 수 있는지요? 나머지는 마음이 번요하여 이만 줄이고 편지를 드립니다.
무인년 10월 18일 사제 원영(元永)은 두 번 절합니다.43)
해당 간찰의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 해제에서도 나오듯, 자신의 아이를 추수 때문에 바빠서 지난 번에 보내지 못하고 이제서야 보내며, 한번 왕림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서로의 건강과 사정을 묻는 등 일상의 안부를 묻는 간찰의 일반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하겠다. 이를 증산교단에서의 강증산과 관련한 내용으로 보는 것은 자의적인 판단이다. 게다가 강증산(1871~1909)과 관련된 무인년은 1878년밖에는 없는데, 이때 강증산의 연령은 8세에 불과하기에 간찰의 상황과도 맞지 않다.
본래 신문기사에서는 간찰을 33종이라 했다가 추후 보고서에서는 36종으로 확장하였고, 해당 종수는 『증산 강일순 상제의 성해는』에서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서에는 보고서에는 나오지 않는 엉뚱한 문헌을 간찰류에 넣어 소개함으로써 혼동을 가중시키고 있다. 게다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는 표의 36종 간찰 외에도 수많은 간찰들이 고불선원 자료군에 포함되어 있는데, 수많은 간찰 자료 중 왜 이 36종이 선택된 것인지 의문이다. 간찰을 번역하여 소개한 『증산 강일순 상제의 성해는』에도 별다른 설명은 없는데, 다만 원문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소나마 그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就寧母藥 아뢰올 말씀은 약은(종교에 쓰이는 자금)
今時已爲付授 지금 이미 받아 부쳤습니다.44)
且慮 而子婦 그리고 성여를 모시는 여신도께서도
亦善在耶 또한 잘계십니까?45)
于禮擇日 … 혼례의(집회의)날을 잡는 것은
或是置于貴中 혹시 당신의 집(성여가 모셔진곳)에 두었다가46)
어머니에게 쓸 약을 종교에 쓰이는 자금으로 설명을 달고, 며느리를 성여47)를 모시는 여신도로, 혼례 때 행하는 의례인 우례(于禮)를 집회의 날로 설명하고, 상대의 집을 바로 성여가 모셔진 곳으로 아무 설명없이 간주하고 있다. 곧 아무 관련 없는 일상의 대소사를 묻는 간찰의 평범한 내용들을 증산과 관련한 것으로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증산’이라는 호칭이 쓰인 편지도 내용을 살펴볼 때 증산계 교단에서 상제로 인식되는 강증산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여타의 편지 역시 전혀 그러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곧 36종의 간찰들은 증산 강일순과 아무 관련 없는 자료이다.
Ⅳ. 고불선원 자료의 성격 (2) : 소위 육필 『대순전경』 필사본의 성격
우선 기존 주장 중 가장 문제시되는 점은 1910년 7월 26일 전라남도 장성 살던 이양섭이 고불선원에 소장된 『대순전경』을 완필하였다고 주장하는 점이다.48) 이는 ‘千九百十年’에다 첨자를 하여 (一)千九百(五)十年이라 고쳤으며,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육필 ‘대순전경’은 1910년에 육필로 쓰여졌고, 1948년 통정원의 전경으로 쓰기 위해 1929년 초판 당시의 서(序) 부분과 찬(贊)부분을 넣어 책의 모양을 갖춰 완성시켜 준비했으며, 1949년에 표지를 입힌 것으로 보여진다.”49)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필사기(筆寫記) 내용을 옮겨 본다.
연도가 둘이 있어서 혼란스럽지만, 전남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154반에 거주하는 이양섭(41세)이 필사한 글이고, 단기 4281년, 곧 1948년 5월 중순부터 6월 20일간 대전에서 완기(完記)하였고, 1957년 7월 26일 완필(完畢)하였다는 내용이다. 필사하면서 쓴 글을 고치는 일은 왕왕 있는 일이고,50) 굳이 이를 ‘千九百十年’으로 볼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장성면이 장성읍으로 승격한 것은 1943년의 일이기에 1910년은 이에 맞지 않는다. 또한 주지하다시피 이상호(李祥昊), 이정립(李正立) 형제가 증산의 행적과 가르침을, 증산의 생전 제자들을 만나 수집·편찬하여 1926년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使公事記)』를 냈고, 이후 이를 수정·보완하여 1929년 『대순전경』을 발행하였다. 1910년에 『대순전경』을 필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완필했다고 하는 1957년을 최종 필사년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순전경』은 1929년 초판이 나온 뒤로, 판을 거듭해 계속하여 나왔다. 그렇다면 이 필사본은 몇 판을 대상으로 삼아 필사한 것일까? 1957년 필사가 되었다면 『대순전경』 4판이 나온 것이 1949년이기에 4판까지 비교해 보면 될 듯하다.
구분 | 필사 및 발간 시기 | 비고 |
---|---|---|
필사본 | 1957. 7. 26. | 大巡典經序, 贊, 補註, 大巡典經 目錄, 第一章 先生의 誕降과 幼年時代(6), 第二章 先生의 遊歷(6), 第三章 先生의 成道와 奇行異蹟(108), 第四章 先生께서 門徒의게 從遊와 訓誨52)(76), 第五章 治病(42), 第六章 天地公事(81), 第七章 傳敎(12), 第八章 法言(72), 第九章 開闢과 仙境(24), 第十章 文明(32), 第十一章 引古文明(四), 第十二章 化天(30), 第十三章 先生의 異表(6) 採藥歌, 處世歌, 書傳序文, 知止歌, 弓乙歌(金一夫 先生), 傷世歌, 甑山大先生略史問答, 濟世新藥歌 |
1판 | 1929. 7. 30. | 先生의 筆跡, 銅谷藥房南棟에 揭한 天師의 筆跡, 大巡典經序, 贊, 補註, 大巡典經 目錄, 第一章 先生의 誕降과 幼年時代(6), 第二章 先生의 遊歷(6), 第三章 先生의 成道와 奇行異蹟(108), 第四章 門徒의 從遊와 訓誨(76), 第五章 治病(42), 第六章 天地公事(81), 第七章 傳敎(12), 第八章 法言(72), 第九章 開闢과 仙境(24), 第十章 文明(32), 第十一章 引古文明(四), 第十二章 化天(30), 第十三章 先生의 異表(6) |
2판 | 1933. 7. 15. | 1장53) 당신의 탄강과 유년시대(6), 2장 당신의 유력(6), 3장 당신의 성도와 긔행이적(116), 4장 문도의 종유와 훈회(151), 5장 치병(50), 6장 천지공사(94), 7장 교범(12), 8장 법언(108), 9장 개벽과 선경(29), 10장 화텬(29) |
3판 | 1947. 12. 22. | 天師少時의 筆跡, 銅谷藥房南棟에 揭한 天師의 筆跡, 대순전경서, 찬, 대순전경 목차, 제일장 천사의 탄강과 유소시대(30), 제이장 천사의 성도와 긔행이적(120), 제삼장 문도의 추종과 훈회(136), 제사장 천지공사(148), 제오장 개벽과 선경(42), 제육장 법언(145), 제칠장 교범(21), 제팔장 치병(58), 제구장 화천(31) |
4판 | 1949. 2. 16. | 3판과 동일 |
고불선원본 『대순전경』 필사본은 말미에 여러 가사 등의 부록 같은 것이 함께 필사되어 있지만, 『대순전경』 내용만 볼 때, 서(序), 찬(贊), 보주(補註), 목록(目錄), 그리고 13장으로 이뤄진 본문으로 되어 있다. 무척 꼼꼼하게 필사되어 있는데, 표에서 보듯 이는 장절까지 1판과 일치한다. 다만 필사본은 4장 제목이 “先生께서 門徒의게 從遊와 訓誨”로 되어 있고, 1판은 “門徒의 從遊와 訓誨”로 되어 있는 점 정도가 차이이다. 2판은 13장에서 10장으로 장이 조정되며, 증산에 대한 호칭이 ‘先生’에서 ‘당신’으로 바뀐다. 3판은 9장으로 바뀌고, 호칭이 ‘天師’로 바뀐다.54) 곧 판별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러한 점들을 볼 때 『대순전경』 필사본은 1판을 대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55)
고불선원 소장 『대순전경』 필사본은 『대순전경』 외에도 말미에 가사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을 필사해 두어 흥미를 끈다. 이들 자료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성격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표를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대순전경』 경전 필사의 말미에 가사를 비롯한 서전서문, ‘증산대선생약사문답’을 실었는데, 이는 이를 경전만큼이나 중시하여 특별히 부록처럼 적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증산대선생약사문답’은 증산에 대한 신앙고백의 문답 내용인데, 출처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외의 가사들 몇몇은 확인 가능하다. 우선 서백일 용화교의 경전 『만법전』56)에서 「채약가」57)와 「제세신약가」58)가 발견된다. 「지지가」는 상주에 소재한 동학교의 가사집 『용담유사』 권2 「임하유서」에 실려 있는데, 권2의 가사들은 동학교 교주 김주희가 작성한 것은 아니며, 경천교 등의 교단 등에서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59) 「궁을가」는 일반적 「궁을가」(용호도사 궁을가 유형)와는 차이를 보이는데, 곧 “朝鮮江山 名山이라 道通君子 다시난다” 구절과 “四明堂이 更生하니 昇平時代 不遠이라”란 구절이 보이지 않는다. 해당 유형은 한편으로 가사문학관에 백운도사의 소작으로 소장되어 있다.60) 「상세가」는 가사문학관에 필사본으로 소장되어 있는데,61) 본래의 출처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처세가」 역시 미상이다. 이들 고불선원본 『대순전경』에 실린 가사들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의 연구를 통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
Ⅴ. 맺음말
석암이 고불선원에 소장된 『대순전경』 필사본, 『천심경』, 『참 정신(情神)으로 배울 일』, 간찰 36종을 공개하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개하도록 함으로써 증산계를 비롯한 신종교 자료의 외연이 확대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문기사, 『근·현대문화유산 종교(민족종교)분야 목록화 조사연구 보고서』, 『대순전경과 천심경』, 『증산 강일순 상제의 성해는』 등을 통하여 첫 신문기사가 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계속하여 자료에 대한 오해를 심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소위 ‘육필 『대순전경』’이란 표현을 써서 이상호·이정립이 직접 1910년에 『대순전경』을 저작한 것처럼 오도하는가 하면, 『천심경』이 증산이 직접 쓴 것으로 보거나, 『참 정신으로 배울 일』 가사집에서의 신앙의 대상을 증산으로 여기거나, 간찰 등이 증산 당대의 시대상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모두 근거 없이 석암의 자의적인 의견으로 제시되었다.
『참정신으로 배울 일』은 20편에 가까운 갱정유도의 가사들을 모은 가사집이다. 곧 증산에 대해 노래하고 있지 않다.
『천심경』은 증산의 자필로 작성된 것이 아닌, 기문둔갑에서 사용하는 ‘전도주(傳道咒)’에서 왔을 개연성이 크다. 여타 필사본 『옥룡자십조경산서』에도 『천심경』과 유사한 글이 발견된다.
간찰 36종은 비록(祕錄)같은 것이 아니며, 일상 생활에서의 비근한 일들을 담아낸 평범한 간찰이다. 이를 ‘증산(甑山)’이라는 호칭이 등장하는 간찰이 있다 하여 증산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대순전경』 필사본은 전남 장성에 거주했던 이양섭이 『대순전경』 초판을 1957년에 필사한 것으로, 뒤에 「채약가」, 「제세신약가」 등 여러 종교가사를 비롯한 자료들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그 의미가 크다. 특히 아직 출전 미상으로 남아 있는 자료들에 대해 보다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들 고불선원에서 소장한 자료들은 갱정유도, 증산교단 등의 여러 한국 신종교와 관련한 가치가 높은 자료들이기에 더욱 자료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있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석암의 부친으로부터 내려온 자료이기에, 석암 부친의 종교적 배경 및 해당 자료를 소유하게 된 경위 등을 구술조사 등을 통해 밝히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왜 고불선원이라는 불교의 선원에서 증산교단, 갱정유도 등의 신종교 자료가 나오게 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곧 후속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이를 통해 해당 자료들을 증산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하려는 소장자의 입장 역시도 이해 가능할 것이다. 십여 년 동안의 혼란에서 벗어나 다시금 원점에 서서 해당 자료들을 차근히 분석해 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