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갑진년(甲辰年)은 청룡의 해이다. 용은 십이지지(十二地支)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상상 속 동물이다. 용은 실재하지 않지만, 『한비자(韓非子)』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형태가 없는 것은 볼 수 없으므로 쉽다[無形者不可睹,故易也]”고 한 바와 같이, 오히려 실체가 없기에 용이라는 상징적 표상1)으로서 우리 문화 전반에 존재하였다. 회화와 조각·공예 등 예술품뿐만 아니라 신화·전설·민담 등의 설화2), 고대가요3)·향가4)·악장5)·한시 등의 고전시가, 무속6), 종교7) 등에서 용은 문화적 원형으로 회자되어 왔다.
민속에서 용은 수신(水神) 및 우신(雨神)으로서, 깊은 못이나 강·바다와 같은 물속에서 살며, 비와 바람을 일으켜 몰고 다닌다고 여겨졌다. 용은 순우리말로 ‘미르’라고 불리는데, 미르의 어원은 ‘밀-’로서 물의 어원과 같다. 물과 관련이 깊은 용은 용소(龍沼)·용담(龍潭)·용연(龍淵) 등의 지명과 용산(龍山)·용두(龍頭) 등 지형에서 비롯한 용 관련 지명이 전국적으로 많다.8) 또한 용의 치수(治水) 능력은 제왕과 왕권, 호국(護國)과 호법(護法)의 상징으로 연결되었다. 천자가 타는 수레인 용거(龍車), 천자의 덕을 용덕(龍德), 왕의 얼굴은 용안(龍顏), 왕이 입는 옷을 곤룡포(袞龍袍), 왕의 혈통을 용손(龍孫) 등으로 불렀으며, 호국과 관련된 대표적 문헌 자료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용은 종교적으로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왕·용신은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 불법을 수호하는 반신반사(半身半蛇)인데 용신도(龍神圖)와 용왕도(龍王圖)로 표현되었다. 그 외 절의 단청이나 벽화, 탱화 등에 용을 그렸고, 범종에 새긴 용의 조각은 용뉴(龍鈕)라고 하였다.
제화시는 시인이 그림을 화재(題材)로 삼아 떠오른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압축적인 형태의 시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제화시의 형상화 과정은 보다 복잡하고 흥미롭다. 사물과 도상, 화면(畫面)과 화의(畫意), 화인(畫人)과 시인(詩人) 등 그림을 둘러싼 여러 요소들이 시의 창작 동기와 내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양화는 하나의 상징체계다. 그림에는 겉으로 드러난 형상[화면] 외에 속뜻[화의]이 담겨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림 속 사물의 상징의미를 공유하며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즉 제화시의 ‘그림’과 ‘시’의 연결 도식에는 이러한 상징의미의 교환과 교류 작용9)이 집약되어 있다.
그동안 용의 표상과 관련하여 국문학 분야에서는 주로 구비문학이나 민속학, 한문서사 속 용을 분석하는 데 초점이 맞춰 있었다. 그렇지만 한시(漢詩)에서도 용은 관념적 비유물10)로 종종 언급되며, 특히 용 그림을 대상으로 한 제화시에서 용은 중심소재로 형용되고 묘사되어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제화시 속 용은 언제·어떻게 표현되어 드러나며, 그 특징과 의미는 무엇일까. 그림으로 그려지거나 또는 그림을 통해 떠오른 용이 다시 시의 언어로 구체화되면서 그 상징의미가 강화된 것이 바로 제화시이다. 고려-조선시대 제화시를 대상으로 당대 관념 속 용이 언어로 어떻게 구현되는지 짚어보도록 하겠다. 이를 통해 용의 표상이 예술적으로 형상화되는 방식과 그 의미를 분석할 수 있다. 본고에서 인용한 원전 자료는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을 기준으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이에 대한 번역은 기본적으로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였으며, 때에 따라 추가적으로 참고한 자료는 출처를 따로 명시하도록 하겠다.
Ⅱ. 그림 속 용 : 화룡(畫龍)의 형상과 기운
화룡(畫龍)은 용을 그린 그림이다. 용의 기원에 대해서는 용오름·용솟음의 기상현상이나 뱀, 해마, 악어, 공룡 등에서 생겨났다는 다양한 설이 있다. 대표적인 학설로는 인도의 ‘나가(नाग, Nāga)’나 고대 도철문에 나타나는 뱀에서 용이 출현하였다는 설, 기상학적인 현상에서 비롯했다는 설, 고대 중국 부족 토템인 용봉(龍鳳)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공룡을 근원한다는 설 등11)이 있다. 여러 기원설이 있지만 용의 기원을 한 가지로 정하기는 힘들다. 용은 말 그대로 상상 속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역사상 용을 실체가 있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노래하며 그림을 그려 기렸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용의 형태와 특징은 무엇일까. 역사상 여러 문헌에 존재하는 용의 형상12)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훈고서 『광아(廣雅)』에서는 “용은 인충(鱗蟲) 중에 우두머리로, 다른 아홉 가지 짐승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과 같고, 눈은 토끼와 같고, 귀는 소와 같고, 목덜미는 뱀과 같고, 배는 큰 조개와 같고, 비늘은 잉어와 같고, 발톱은 매와 같으며,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그런 가운데 99 양수인 여든한 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것과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있고,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이 있다”라고 용을 ‘구사(九似)’로 설명하고 있다. 용은 부분적으로 아홉 가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용을 “비늘이 있는 인충 중 가장 큰 것으로, 능히 몸을 감추었다가 커지기도 하며 짧아졌다가 길어지기도 한다”고 하였다. 전한(前漢)의 『회남자(淮南子)』에서는 “교룡이 물에 사는 것과 호랑이나 표범이 산에 사는 것은 천지의 이치이다”라고 전하며, 『춘추좌전(春秋左傳)』 소종 29년조에 “용은 물에 사는 동물이고 물에서 잃어버리면 얻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 문헌 기록에도 일찍부터 용이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삼국유사』에서는 북부여, 신라 혁거세, 탈해왕 등의 건국 신화나 만파식적, 수로부인, 처용랑과 망해사 설화 등에서 용이 나타난다. 이때 용은 대체로 왕의 탄생이나 죽음과 관련된 상서(祥瑞)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60년 가을 9월에 용 두 마리가 금성(金城)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졌다.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13)와 같이 기후 현상으로 용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 기록에서 용은 시조나 기원을 나타낼 때 그 신이로움과 비범함을 드러내기 위해 천둥·번개 등의 기상현상과 동반되어 등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지낼 때 사용된 화룡(畫龍)에 대한 기록이 종종 보인다. 삼국시대 때 시작된 화룡제(畫龍祭)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열렸다. 그중 세종 10년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옛 제도에는 용(龍)을 그려놓고 비를 빌고 나서 3일 동안 비가 흡족히 오는 것을 기다려, 수퇘지를 잡아 보사(報祀)하고 용의 그림은 물속에 던지는 것이었는데, 본조에서는 화룡(畫龍) 기우제나 오방토룡(五方土龍) 기우제에 대한 보사를 입추(立秋) 뒤에 거행하고 있는 것은 옛 제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화룡과 토룡의 기우제를 지낸 뒤 3일 내에 비의 은택이 흡족하면 곧 입추를 기다리지 말고 길일(吉日)을 가려서 보사를 지내고, 3일 내에 비가 오지 않으면 보사를 지내지 말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14)
용이 물을 다스린다는 관념에서 비롯하여 기우제의 대상은 용이었고, 위 제시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 속 용을 대상으로 제사를 지낸 뒤 비가 오면 수퇘지를 잡아 바쳤다. 보사(報祀)는 비를 내려준 용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보답하고자 하는 행위였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까지 용 그림은 주로 의식용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까지 그림 속 용을 소재로 창작한 제화시는 그리 많지 않은데15), 다음은 용 그림을 대상으로 한 조선 전기 제화시 작품 중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것이다.
金剛寺法堂, 畫龍行 16) 금강사 법당의 용 그림에 대한 노래
임억령은 금강사(金剛寺) 법당 용마루에 그려진 용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실제 불교에서 장엄용으로 용을 많이 활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 법당 지붕에 그려진 용이 시적 대상이다. 비록 그림이긴 하나 그림 속 용의 맑은 눈과 날카로운 발톱, 굼틀거리는 몸의 형상은 실제 용과 같이 푸른 하늘을 뒤집을 듯하다. 이때 갑자기 산중에서 비바람이 몰아친다. 승려는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에 불당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하지만, 이 순간 풍우와 함께 실제 용이 용마루에 내려앉는다. 이에 임억령은 깨닫는다. “진짜와 가짜는 유래부터 다르니[眞假由來了不同]” 그림 속 용이 방불(彷佛)할 수 있을지언정 실제 용과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용이 신묘하게 거취를 바꾸어 인간은 그 자취를 쉽게 찾을 수 없지만, 비와 바람·벼락과 천둥 등과 같은 찰나(刹那)의 기상 변화에서 용의 웅장한 덕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그림이 현전하지 않지만 우리는 임억령의 시를 통해 화룡의 형상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 용의 형상을 어떻게 파악하였는지 확인 가능하다 “눈은 맑은 거울 같고[眶如明鏡], 발톱은 칼날 같은[蚤如鋒]” 그림 속 용은 “굼틀굼틀한 기운[蜿蜒氣]”이 마치 실제 용처럼 “푸른 하늘을 뒤집어[飜蒼穹]” 금방이라도 비바람을 몰고 올 수 있을 듯하다. 그렇지만 풍우 속에서 감지한 용덕(龍德), 즉 용의 신(神)은 그림으로는 표현될 수 없다. 그림 속 용의 형상이 용과 유사하나 일수유(一須臾) 순간 스치는 용의 기운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임억령은 제화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비교적 다수의 문인이 화룡을 대상으로 시를 지었다. 오도일(吳道一, 1645~1703)17), 권헌(權攇, 1713~1770)18), 박제가(朴齊家, 1750~1805)19), 정약용(丁若鏞, 1762~1836)20) 등을 들 수 있는데, 용 그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이서(李漵, 1580~1603)의 작품으로부터 포착된다.
題恭齋尹孝彦神龍圖歌 21) 공재 윤효언의 <신룡도> 노래를 짓다
이 시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린 <신룡도>에 옥동(玉洞) 이서가 쓴 작품이다. 윤두서는 조선 후기 대표 문인화인으로 <자화상>, <백마도> 등의 그림이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海南 尹氏 家傳 古畵帖)』에 실려 전한다. 이 화첩에는 화룡을 표현한 <격룡도(擊龍圖)>, <희룡행우도(戱龍行雨圖)>가 전하는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윤두서가 그린 <신룡도>의 형상과 기운을 파악할 수 있다.
윤두서가 그린 용은 신룡(神龍)이다. 크고 높고, 또 넓고 깊은 하늘과 바다를 위아래로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용은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스럽다. 이에 ‘신룡’이라 이름 붙이며 “용이여[龍乎]”라고 예찬한다. 용의 “성품은 의롭고 지혜로워[性義且智]” 오묘한 조화의 원리에 모두 통한다. 또한 웅장한 뿔갈기[角鬣]와 비늘 갑옷[鱗甲]은 용의 형상을 “기묘하고 괴이[形奇且異]”하게 만든다. 이에 <신룡도>에도 천기(天氣)의 비구름과 우레바람이 함께 묘사되어 <희룡행우도>와 같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용의 신비로움[神]을 윤두서가 그림을 통해 재현하였다. 이에 이서는 윤두서를 “관찰을 잘하는 사람[善觀者]”이라고 칭송한다. 천년 전의 진룡(眞龍)을 그림으로 그려낸 윤두서의 조화로운 솜씨가 용의 “천진을 빼앗았다[奪天眞]”고 말이다. 미술사에서 조선 후기 회화를 윤두서의 사실주의 회화로 기점을 삼는다. 윤두서는 그림을 그리기 전 사물 대상을 “종일토록 주목하여” 그 “의태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 보아 털끝만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는 연후에야 붓을 들어 그렸다”22)고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선관(善觀)이 용의 신(神), 즉 천진(天眞)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만든 것이다.
이서는 <신룡도>로써 윤두서라는 사람을 알 수 있다며, 윤두서에게 “나는 그대가 하려는 바를 알겠으니[吾知爾之所爲] 삼가 천기(天機)를 누설하지 마시게나[愼莫泄天機]”라고 당부한다. 해남 윤씨 가문의 윤두서와 여주 이씨 가문의 이서는 17세기 말~18세기 초 붕당정치가 난무했던 시기의 남인계(南人系) 재야 지식인이었다. 특히 이서는 윤두서와 함께 근기남인(近畿南人) 그룹으로서 서화(書畫)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이서는 당시 유행하던 한호(韓濩, 1543~1605) 석봉체(石峯體)에서 벗어나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바탕으로 한 옥동체(玉洞體)를 창안하여 윤두서, 윤순, 이광사 등에게 전수하였다23). 그들의 학문·예술적 네트워크는 서체뿐만 아니라 성현도(聖賢圖)·지도·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고, 이는 이와 같이 제화시를 지어 감평을 남기고 있는 데서24) 확인 가능하다. 더욱이 근기남인 서화가 그룹의 활동은 윤두서의 장남 윤덕희(尹德熙, 1685~1766)와 손자 윤용(尹愹, 1708~1740), 이서의 이복동생 이익(李瀷, 1681~ 1736), 윤두서의 막내사위 신광수(申光洙, 1712~1775),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에게 전승되며, 윤두서의 외증손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까지 이어졌다.25)
뿐만 아니라 이서의 용 그림에 대한 인식은 앞서 임억령의 시에서 “진짜와 가짜는 유래부터 다르니[眞假由來了不同], 비록 비슷하게 닮을지언정 어찌 똑같이 그릴 수 있겠는가[雖云惟肖將焉工]”라고 반문한 것과 대비를 이룬다. 그림이 용의 ‘천진’과 ‘천기’를 재현하고 있다는 인식은 그림을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말기(末技)로서 경계해야 한다는 조선 전기 회화 인식과 대조적이다. 물론 문인 윤두서가 그린 사기화(士氣畫)라는 전제가 있지만, 전신(傳神)과 사의(寫意)의 기능을 화룡이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 후기 화룡, 즉 그림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이서의 제화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의 전환은 정약용이 정철조(鄭喆祚, 1730~1781)가 그린 화룡에 대한 시에 더 명확히 드러난다.
題鄭石癡畫龍小障子 26) 정석치의 작은 장지에 그린 용 그림에 대해 짓다
정약용 역시 근기학파의 영향으로 철학 사상뿐만 아니라 서화가로서 예술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감식안도 뛰어나 다수의 제화시27)를 남겼는데, 주로 시를 통해 그림에 대하여 논평하고 그 가치를 이야기하였다. 그중 문인화인 정철조가 그린 용 그림에 대해 지은 제화시에서 정약용의 그림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게 드러나 주목할 만하다. 먼저 정약용은 당대 화공들이 그리는 용 그림에 대해 비판한다. 화공들 마음대로 “기두에 뱀 꼬리를 함께 그린(魌頭與蛇尾)” 화룡은 용의 원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용을 본 사람이 드물기에 그럴 듯이 믿으니[人稀見龍信其然]” 세상을 어지럽게 하여 홀리게 만드는 것이다. 용의 형사(形似)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화룡은 신(神)은 고사하고 마치 ‘귀신[鬼]’의 몰골이다.
이러한 세태에 발분(發憤)한 정철조는 용의 형상을 핍진(逼眞)하게 구현해내고자 하니, “비늘 하나 눈동자 하나에 모두 전신(傳神)하여[一鱗一睛皆傳神]” 마치 용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다. 이에 정약용은 굼틀 굽은[夭蟜] 몸이 떨쳐 일어나[奮發] 천장으로 솟구칠까, 사람을 떠받을까 걱정되고 두려워진다고 토로한다. 정철조의 화룡에 대한 예찬인데, 그림이 이실득진(以實得盡)으로 형사(形似)를 통하여 사의(寫意)에 경지에 올랐음을 기리는 것이다. 이는 신형묘합(神形妙合)의 전신론28)으로서 정약용의 중용적(中庸的) 심미 의식을 기저로 삼는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회화는 도본예말(道本藝末)·문이재도(文以載道)로써 형사보다는 신사(神似)를 중시하였다. 정약용도 그림은 천진(天眞)의 뜻을 담아내야 한다는 사의론자였지만 그 뜻만 중시한 것은 아니었다. 외형도 실제와 다름없이 그려야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으며, 오로지 전신만을 주장하는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을 수[矯俗] 있다고 보았다. 이에 정약용이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고 한 경계[戒我勿洩]”를 “내가 돌이켜 발설[我發之]”한다고 말한 것은 이와 같은 형과 신의 조화를 추구한 정약용의 회화 인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형사신(以形寫神)으로서 “용 그림은 주옥같이 얻기 어려우니[此畫難得如珠玉]” 정철조는 세상과 단절한 채 용의 형신을 그려내었다. 이에 화룡은 실존적 용으로서 살아 숨쉬게 되었다.
Ⅲ. 그림에서 떠오른 용 : 소나무, 대나무, 매화의 현현
용을 표현한 제화시는 용을 그린 그림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오히려 용이 아닌 다른 사물 대상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보고 2차적으로 용을 떠올린 경우가 많아서 흥미롭다. 즉, 그림 형상을 묘사하거나 그 기운을 표현할 때 용을 비유적 소재로 활용한 경우가 많다. 용을 비유 대상으로 형상화한 제화시 작품으로는 소나무·대나무·매화 그림을 들 수 있다. 이 그림들을 보고 떠오른 용은 각 소나무, 대나무, 매화를 어떻게 현현할까. 먼저 소나무 그림의 예이다.
璨首座, 方丈所蓄畫老松屛風, 使予賦之 29)
찬수좌가 방장에 간직한 노송(老松) 병풍에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다
이 시는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늙은 소나무 병풍을 보고 지은 작품이다. 이규보는 화면에 표현된 노송(老松)의 기세에 압도당하고 있다. 온종일 턱을 받치고 보아도 먹물로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진 이 노송은 이규보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러한 재주가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감탄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규보를 매료시킨 것은 단순히 소나무의 외형을 잘 베껴 표현한 그림 솜씨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외로이 뿌리박고 서서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소나무에게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천년 묵은 소나무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이규보는 뱀과 용의 심상을 차용했다. 소나무를 가리켜 “안개 자욱한 어두운 산골짜기[山盲谷暗煙霧裏]”에서 “달리려다가 말고 머리를 쳐드는[欲走未走低復起]” 검은 뱀(黑蛇)인지, “물결이 말라붙어[波乾浪涸] 바다가 땅[海變田]”이 되자 “그 틈새마다 입과 코를 벌리고[枵然罅縫呀口鼻]” 울부짖는 용(龍吼)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울툭불툭 쌓여 있는 돌무더기(磊磈)처럼 구불구불 얽혀 솟은 소나무의 형상은 뱀과 용의 몸통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 영험한 기세는 벽해상전(碧海桑田)의 용의 기운과 닮았다. 이에 용이 등장할 때 나오는 배경인 “구름 짙게 드리운 날(雲陰之日)”에 갑자기 일어나는 우레 바람(風雷)으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렇지만 이 노송은 청산에 실제 존재하는 자연물이 아니다. 이것은 찬수좌가 방장에 소장한 병풍 속 수묵화일 뿐이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이규보는 소나무 그림을 보고 또 보면서 감탄하고 있다. 그 다음은 대나무 그림에서 현현한 용의 모습이다.
墨竹 一首 30) 묵죽 한 수
此君奇節可同袍 | 차군(此君)의 기이한[奇] 절조는 함께할 만하니 |
玉立亭亭百丈皐 | 백 길 언덕에 우뚝이 아름답게 서 있네 |
龍騰變化應多術 | 용이 승천하여 변화함에 응당 재주가 많았으리 |
一夜風雷換骨毛 | 하룻밤 천둥 바람에 환골(換骨)의 솜씨를 부렸으니 |
그림 속 대나무는 용의 화신(化身)으로 나타난다. 먼저 대나무를 몹시도 사랑하여 하루라도 대나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동진(東晉)의 왕휘지(王徽之) 고사에서 비롯한 “차군(此君)”의 호칭을 빌려 대나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실제 서거정은 묵죽도에 대한 시를 많이 남겼는데, 묵죽을 용으로 비유한 것도 서거정 묵죽도 제화시의 주된 특징31)이다. 이어서 대나무의 절조를 ‘기이하다[奇]’고 표현하는데, 이는 용이 대나무로 환골(換骨)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본래 용이었다. 지난밤 바람 불고[風] 천둥 칠 때[雷] 그 소란스러운 틈을 타 하늘로 올라가 변화의 재주를 부려 대나무로 탈태(脫態)하여 백 길 언덕(百丈皐)에 자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신묘한 재주는 우뚝이[亭亭] 서 있는 대나무를 고고하게 만든다. 다음은 조선 3대 묵죽화가로 꼽히는 탄은 이정(李楨, 1554~1626)이 그린 화죽(畫竹)에 대해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이 지은 시 가운데 두 번째 수이다.
石陽正畫竹歌 二首 32) 석양정 대나무 그림에 대한 노래 2수
이 시는 <설죽도(雪竹圖)>를 보고 지은 시인데, 여기에서도 설죽은 용으로 묘사된다. 대나무가 눈을 맞아 그 가지가 다른 때와 달리 땅바닥으로 늘어졌는데, 이에 작은 대는 “흰 눈에 푸르른 잎새가 반쯤 묻혔[白雪半埋靑靑葉]”지만 큰 대는 여전히 그 “기운이 찬 하늘로 너머로 일어서려 하는데[氣凌寒霄欲起立]” 그 자태가 푸른 용(蒼龍)의 모습이다. 눈에 덮여 가리운 듯 보이지만 대나무의 기상과 기운은 본래 청룡인 것이다. 곧 하늘로 승천할 잠룡처럼 대나무는 눈 속에 깨끗하게 자리한다.
묵죽은 탄은의 특기 중 하나였다. 탄은은 왕실 종친으로서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았으며, 당시 서화에 관심이 많던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지원에 힘입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33). 특히 설죽에 뛰어났던 탄은이 그림에 대나무의 신(神)을 잘 담아냈기에, 여름날 흰 벽에 걸어두면 찬 빛이 어리고[映寒色], 대숲에 있는 사람은 “산음에서 흥을 타고 가는 객[山陰乘興客]34)”인 왕휘지와 닮았다고 표현하였다. 대나무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인물이자 눈 내린 날의 흥을 제대로 느낄 줄 알던 사람인 왕휘지를 내세워 대나무에 대한 순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초은시(招隱詩)는 한(漢)나라 회남왕 유안(劉晏)의 소산(小山) 지은 「초은사(招隱士)」를 가리킨다. 산림에 은거하며 몸을 깨끗이 하는 일을 노래했는데 이는 탄은의 생애와도 연결된다. 탄은은 충남 공주에서 만년을 보냈는데, 이정의 호인 탄은도 이곳 탄천(灘川)에서 은거한다는 의미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두경은 탄은이 그린 설죽을 보며, 용의 기이(奇異)한 기운을 감지하고 이를 흰 눈의 차고 깨끗한 이미지와 연결하여, 탄은의 순결한 마음을 노래하였다.
마지막으로 매화 그림35)에서 현현한 용의 자태이다. 매화의 오래 묵은 이미지가 강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은 바로 용이다. 이는 고매(古梅)의 심상인데, 강희안(姜希顔, 1418~1464)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자세하다.
고매는 가지가 구불구불하여 온갖 형상을 띠며, 파란 이끼가 끼고 비늘처럼 주름진 껍질이 몸통을 가득 에워싸고 있다. 또 가지 사이에 이끼가 수염처럼 드리워진 것도 있는데, 어떤 것은 그 길이가 몇 치에 이르러, 바람이 불면 푸른 실이 흩날리는 듯하여 완상할 만하다.36)
매화나무는 늙을수록 신묘하고 기이한 모습이다. 매화나무가 고목(古木)이 되면 가지가 굽고 휘어져서 굼틀거리고, 또 서로 얽혀서 온갖 모습으로 나타난다. 매화도 제화시에서는 이러한 오래된 매화의 형상을 주로 용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다음은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매화 병풍 10폭[梅屛十幅]」 중에서 「고매」이다.
古梅 37) 고매
古榦龍結糾 | 묵은 줄기는 용이 얽히고설킨 듯한데 |
嫩枿筍直上 | 여린 그루터기에 새순이 바로 올라왔네 |
老不侮其幼 | 늙은 가지는 그 어린 가지를 업신여기지 않으니 |
少豈阿其長 | 어린 것이 어찌 그 어른에게 알랑거리겠는가 |
北平王子孫 | 북평왕(北平王) 자손의 |
玉雪摠可賞 | 옥설(玉雪) 같은 자태를 모두 볼 만하구나 |
매화도에서 고매를 표현할 때, 꽃이 아닌 그 매화나무의 형상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서도 ‘묵은 줄기(古榦)’라고 말하며 그 모습을 마치 “용이 얽히고설킨 듯(龍結糾)하다”고 말한다. 용은 전설상 기린·봉황·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신물(神物)이었다. 오랜 세월을 겪어낸 매화나무의 묵은 줄기를 용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모습이라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신묘한 옛 가지이지만 교만하게 새로 갓 나온 가지를 깔보지 않는다. 이러한 늙은 가지의 경지를 본받아 어린 가지들도 옥설(玉雪)과 같은 자태이다.
「고매」에는 주석38)이 달려있는데,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지(殿中少監馬君墓誌)」의 일부 구절이다. 한유는 명장 마계조(馬繼祖)가 죽자, 그와 그의 부친 마창(馬暢)·조부 마수(馬燧) 삼대가 자신에게 베푼 은덕을 기리며 지은 묘지명을 지었다. 이를 차용해 김안로는 그림 속 매화의 늙은 가지와 어린 가지를 용호(龍虎)와 같은 북평왕(北平王) 마수와 그 가문에 걸맞은 마창·마계조와 같은 자손들로 형상화하였다. 이들은 모두 옥설의 모습인데, 마씨 삼대와 매화 신고(新古)의 가지 모두에 대한 예찬이다.
다만 매화를 용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조선 전기 몇몇 작품에만 보일 뿐이다. 그 이유를 조식(曺植, 1501~1572)의 매화 그림 제발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생각건대 이 그림은 잘 그리기는 하였지만, 매화와 닮은 것은 아니다. 대개 그 그림은 반드시 절벽 가로 사이에서 오래된 매화나무 그루터기를 그렸는데, 사실상 새 나뭇가지에서 서너 가지를 뻗어나가게 한 다음에, 서너 개의 늘어진 꽃송이를 표현하였고, 꽃은 복숭아보다 컸다. 내가 매화를 많이 보지 않았으나 모두 땅에서 곧장 올라왔지 그림처럼 가로로 자란 것은 없었다. … 비단 객이 그린 그림이 그러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 그린 그림이 모두 동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이르노니, 세상에 그림 그리는 자들은 모두 틀렸음이라.39)
조식은 옆으로 가지가 굽어 얽히고설킨 모습을 한 그림 속 매화는 실제 매화의 생태와 전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매화는 “땅에서 곧장 올라왔지[然皆生地直上] 그림처럼 가로 자란 것은 없었기[未有橫生如所畫者]” 때문이다. 이에 지금 세상에 그림 그리는 자들은 모두 틀렸다고 단언하며, 매화의 생리에 맞게 그림을 그려야 진짜 매화 그림임을 피력한다. 이와 같은 발언은 실제 조선 중기 수직 구도의 매화 그림40)이 유행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연 속 매화나무의 습성도 그러하지만, 당대 문인들은 수직으로 뻗은 매화나무가 매화의 고고한 절개를 드러내기 알맞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용으로 비유되는 고목의 매화나무는 옆으로 구불구불 뻗은 줄기가 특징인데, 이에 매화도의 용에 대한 비유 표현도 점차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 권헌(權憲, 1713~1770)의 「묵매기(墨梅記)」41)에 더 직설적으로 “매화의 가지와 줄기가 굽어[其枝榦屈曲]” “용이나 뱀이 얽히고설킨 것 같은 모양”은 지극한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매화의 본령은 그 풍신(風神)이니 매화의 “가지와 잎은 논의할 것이 못 된다[枝葉不論也]”고 설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 후기에는 전반적으로 용처럼 가로로 굼틀대는 매화나무를 그린 그림과 시가 드물어지는 양상을 띠었다.
Ⅳ. 맺음말
이 글은 용을 구체적 형상으로 표현한 제화시(題畫詩)를 대상으로 용의 문학적 형상화 방식과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당대 용에 함축된 상징의미와 관습화된 수사 표현을 파악하고, 이를 그림과 시로 어떻게 공유하였는지 그 양상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림 속 용을 소재로 한 제화시에서 화룡의 형상은 ‘신(神)’의 기운으로 구체화된다. 신은 신이(神異)함, 즉 신묘(神妙)·신령(神靈)·신비(神祕)·신기(神奇), 기이(奇異)·괴이(怪異) 등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는 용이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 동물인 데에 기인한다. 그렇지만 당대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용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이에 관행적으로 맑은 안광[眶], 날카로운 발톱[蚤], 웅장한 뿔과 갈기[角鬣], 비늘 갑옷[鱗甲] 등으로 용의 형상을 실체화하고, 이 형상에서 신이함을 어떻게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용에 내재한 기운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비[雨]와 바람[風], 구름[雲], 안개[雺], 우레[震·雷], 벼락[霹] 등의 기상현상이 동원된다. 이는 용을 우신(雨神)으로 받들어 모시던 민간풍습과도 연결되지만,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가 일변(一變)하는 용의 자취와도 일치한다.
또한 화룡의 본령은 용덕(龍德)·천진(天眞) 등과 같은 용의 기운, 즉 ‘전신(傳神)’의 형상화에 있었다. 시서화에 관심이 많았던 근기남인 계열 문인들은 이를 시로써 적극 표현하고자 했고, 이는 조선 전기와 후기의 그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로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그림은 사의(寫意)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이 유교적 예술론이었지만, 신사(神似)뿐만 아니라 형사(形似)도 함께 아울러야 한다는 것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기조를 정약용의 화룡 제화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실제 제화시에서 용의 심상이 비교적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소나무[松]·대나무[竹]·매화[梅] 그림을 형용할 때였다. 송죽매(松竹梅)는 세한삼우(歲寒三友)로서 추위에도 끄떡없이 제 모습을 지키는 존재로 북송시대 이후 문인의 고결함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굳어졌다. 용으로 현현되는 송죽매는 외형적으로 옆으로 구불구불 뻗은 가지와 얽히고설킨 줄기, 푸른 옥빛의 자태 등을 공통분모로 삼으며, 화룡과 같이 비·바람·번개 등의 기상현상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기(奇)’를 표출하여 그 형상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이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송죽매=선비의 절개’라는 인식이 강화되면서 용의 비유적 수사는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제화시는 사회적 소통의 산물이다. ‘용-화룡/그림-제화시’로 연결되는 도식엔 원래 용의 의미가 형상으로, 언어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이 의미가 용의 표상이며, 이 상징의미는 시와 그림을 본 당대 문인들 사이로 공유되었다. 제화시 속 용의 상징의미는 화가, 시인, 문인, 사회, 시대 간 소통의 결과물인 셈이다. 제화시에 나타난 용의 표상은 상상 속 동물인 용의 영험하고 신묘한 이미지를 강화하고, 그림으로 표현된 형상에 실재감을 더하여, 그림 감상에 생생함을 더한다. 다만 현재 전하는 화룡 그림이 극소수이며, 전체 제화시 가운데 용을 제재로 한 작품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아 논의에 한계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제화시를 통해 나타난 용 표상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자리한 전통적 용의 이미지와 관념을 추출해볼 수 있다. 추후 용뿐만 아니라 <용호도(龍虎圖)>, <팔준도(八駿圖)>, <노안도(蘆雁圖)> 등과 같이 영모화(翎毛畫) 또는 민화(民畫)로 범위를 넓혀 한국 영모의 상징의미와 표현기법을 아울러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