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해월의 동학 도통전수 담론 연구: 문헌 고증을 중심으로

박상규 1 , *
Sang-kyu Park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아시아종교연구원 선임연구원
1Senior Researcher, The Asian Institute for Relig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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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Jan 25, 2024; Revised: Mar 13, 2024; Accepted: Mar 25, 2024

Published Online: Mar 31, 2024

국문요약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傳授)한 때로 알려진 1863년 7~8월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되는 문헌은 『수운문집(水雲文集)』,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이하 『도원기서』)이다. 이 세 문헌의 수운 관련 기록은 구조, 내용, 기술 방식으로 본다면 같은 문헌에서 기원했음이 분명하다. 세 문헌이 지닌 차이는 어느 문헌이 도통전수의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초래했으며 신앙과 조직 체계 등 초기 동학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환기하고 있다. 따라서 세 문헌을 고증하여 각 문헌의 선후 관계와 성립연대, 정확성, 기술 방향, 문헌에 반영된 초기 동학 신앙체계의 특징을 밝혀낼 수 있다면 1860~1880년의 동학 전개 과정을 보다 명확히 기술할 수 있으며 여러 도통전수 담론이 지닌 의미를 보다 깊이 분석할 수 있다.

세 문헌을 비교하고 관련 문헌과 대조하여 고증한 결과, 해월의 도통전수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수운문집(水雲文集)』 계통의 문헌이 이를 명확히 기록한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과 『도원기서』의 저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과 『도원기서』가 편찬되는 시기까지 해월의 도통전수는 동학 교단 내외에서 명확하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해월의 연원이 동학의 최대 조직이 된 18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해월을 중심으로 동학의 교리가 재해석되고 조직이 재건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는 방증 된다. 따라서 해월의 도통전수를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담론으로 보는 관점에서 수운 이후의 동학은 조망될 필요가 있다. 이는 ‘수운의 동학’과는 단층을 이루는 ‘해월의 동학’, 그리고 해월과 한국의 근대 신종교 운동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Abstract

Among the records that attest to the period from July to August of 1863, when Suwun was believed to have transmitted the orthodox lineage to Haewol, the oldest documents are The Collection of Suwun’s Literary Works (水雲文集), The Collection of Great Master Lord’s Literary Works (大先生主文集), and The Records of Dao Origin of Master Choe’s Literary Collection (崔先生文集道源記書, hereafter referred to as The Records of Dao Origin). The records regarding Suwun in these three documents are considered to have originated from the same context. The variances embedded in the three documents have led to arguments about which documents accurately reflect the fact of orthodox lineage transmission. Additionally, these variances highlight the necessity of a review regarding the characteristics of early Eastern Learning, such as its faith and organizational systems. Accordingly, by thoroughly examining these three documents, it is possible to elucidate the chronological order, establishment-date, accuracy, descriptive direction, and characteristics of the faith system of early Eastern Learning as these are reflected in each document. If successful, this examination would provide a clearer description of the developmental process of Eastern Learning from 1860 to 1880, facilitating a more in-depth analysis of the significance embedded in various forms of discourse on the movement’s orthodox lineage transmission.

In comparing the three documents and contrasting them with related sources, the results of the textual examination assert that the documents within the lineage of The Collection of Suwun’s Literary Works, given they lack a clear record of the event regarding Haewol’s orthodox lineage succession, may be the first draft of The Collection of Great Master Lord’s Literary Works and The Records of Dao Origin, as these texts distinctly include that record. This reflects that Haewol’s succession was not precisely recognized within and outside of the Eastern Learning order until the time when The Collection of Great Master Lord’s Literary Works and The Records of Dao Origin were published. This is further attested to by the fact that during the late 1870s, when various Yeonwon (fountainhead) factions of Eastern Learning began to converge around Haewol, and his Yeonwon became the largest organization within Eastern Learning. At that point, the order’s doctrine was reinterpreted, and its organization was reestablished. In this regard, it is necessary to view Eastern Learning after Suwun—especially the orthodox lineage transmission to Haewol—from a perspective that considers it more as competing forms of discourse than as a historical fact. This view enables a new perspective on Haewol’s Eastern Learning, which forms a distinct layer from Suwun’s, shedding light on the relationship between Haewol and the new religious movements in modern-day Korea.

Keywords: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 도통(道統); 동학; 『수운문집(水雲文集)』; 증산;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Keywords: The Collection of Great Master Lord’s Literary Works (大先生主文集); orthodox lineage (道統); the Eastern Learning; Collection of Suwun’s Literary Works (水雲文集); Jeungsan; The Records of Dao Origin of Master Choe’s Literary Collection (崔先生文集道源記書); Haewol Choi Si-Hyeong (海月 崔時亨)

Ⅰ. 들어가며

종교현상의 전개 과정에서 종통(宗統), 법통(法統) 혹은 도통(道統) 계승은 중요한 변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1) 특히 근대 한국에서 성립된 종교의 경우 도통 승계는 그 종교현상의 전개와 특징 이해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평으로서 기능한다. 기원은 같지만, 도통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2) 따라서 동학 도통 승계 과정의 실제는 수운에서 시작된 동학의 전개를 분석, 이해하고 기술함에 있어서도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다.3)

동학의 도통(道統)은 대부분 수운이 해월(海月)에게, 해월이 의암(義庵)에게 전했다는 기사를 기반으로 논해진다.4) 수운-해월-의암의 순서로 진행된 도통전수를 역사적 사실로 내세워 그 정통성을 세운 후 이외의 도통론을 부가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수운-해월-의암의 도통 계승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다수의 문헌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운에서 기원한 동학계 교단의 종교 지형에서 수운-해월-의암의 도통을 정통으로 보는 천도교가 그 주류를 형성하면서 대부분의 도통 관련 기록이 천도교를 중심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해월과 의암의 시대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학의 도통, 특히 해월의 도통 승계에 관한 동학 교단 내외의 관점과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증산(甑山, 1871~1909)은 그 생존 시기가 해월, 의암의 활동 시기와 겹쳐 있고 그 휘하에 동학도 출신이거나 일진회 활동을 했었던 종도가 많았다. 따라서 증산의 동학 도통에 대한 시각은 당시 동학 내외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증산은 자신의 종교활동이 “참 동학”이라 주장했다.5) 이 같은 증산의 주장은 당대의 동학이 참이 아닌 ‘거짓’이라는 것으로 수운 이후의 동학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증산을 통해 본다면 수운-해월의 도통 담론은 당시 교단 내외로부터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청림교, 동학교, 수운교 등과 같이 수운-해월의 도통을 수용하지 않는 교단이 20세기 초에 성립되었고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6) 이처럼 20세기 초까지 동학의 도통에 대한 비주류 담론이 활발했었다는 사실은 해월의 도통 전수와 관련된 초기 문헌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본 연구는 이러한 동기에서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최초로 나타나는 과정을 문헌을 통해 분석하여 도통 담론의 형성 과정을 알아보고자 기획되었다.

문헌을 통한 해월의 도통전수 연구는 오래전부터 천도교 교학자와 외부 학자 간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논쟁의 맥락과 그 과정은 본 연구의 선행연구에 해당하며 본 글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는 데 중요한 연결점을 제시해 준다. 따라서 선행연구에 대한 검토는 본론에서 논지를 전개해 나가면서 진행할 것이다.

Ⅱ.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 해제 검토

동학의 경전에는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없다.7) 이는 경전에 수록된 수운의 저술이 저작된 시기, 수운은 자신의 부재(不在)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기록은 수운이 처형된 후 생존한 제자들에 의해 그의 저작이 수집되고 행장이 기록 편집되면서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한 시기는 1863년 7~8월이다. 이 시기의 동학을 기록하고 있는 가장 앞선 문헌은 『수운문집(水雲文集)』,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이하 『도원기서』)이다.8)

문제는 세 문헌의 도통전수 관련 기록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해월의 도통전수 기사의 유무에 따라서 문헌의 신빙성과 선후 관계에 대한 대립하는 주장이 전개되면서 어느 문헌이 실제를 보다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선행 문헌인지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해월의 도통 계승 과정의 실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문헌의 성립연대, 정확성, 기술 방향, 문헌에 반영된 신앙체계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해월의 도통전수 담론의 개연성, 형성 과정 및 맥락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연구에서는 세 문헌에 관한 기존 연구에서 발생한 논점들을 확인하고, 문헌 간의 차이를 실제 고증하여 그 성립연대와 선후 관계 및 정확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1.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해제 검토

『수운문집』 또는 『대선생주문집(수운재문집)』이라는 서명(書名)으로 불리는 네 개의 필사본을 최초로 고증하고 해제한 이는 김상기이다.9) 그가 네 개의 필사본에 붙인 명칭은 ‘계룡본, 단곡본, 도곡본, 용강본’이며, 김상기는 도곡본과 용강본이 일치하고 누락도 같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단곡본(丹谷本)’을 중심으로 다른 세 개의 본과 대조하여 교정하였다. 문헌을 해제하면서 그는 “원제가 ‘수운문집’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그 내용으로 보아 최수운[濟愚]의 행장 또는 연보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보고 이것들을 한 계열의 문헌으로 보고 ‘수운행록(水雲行錄)’이라고 명명하였다.10) 실제 이 문헌들은, 비록 ‘문집’이라는 용어가 있지만, 수운의 글을 모은 문집이 아니라 수운(1824~1864)의 일대기를 삼인칭 시점으로 기술한 행장이다. 하지만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내용상 차이가 있기에 본 글에서는 『수운행록』이라는 별칭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으로 구분하고자 한다.11) 『수운문집』 또는 『대선생주문집』이라는 서명이 있는 문헌들은 그 필사 지역, 발굴 지역, 내용 등으로 분류하면 대략 네 종류이다.

첫째는 ‘용강본’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한 필사본이다. 서울대 규장각 본을 저본으로 하여 1940년 7월 필사된 판본이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소장되어 있다.12) 필사본 제목은 모두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이다. 이 가운데 천도교 중앙총부의 필사본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에 있던 허찬(許璨; 수운의 둘째 사위)이 필사해 그 후손인 허갑(許鉀)이 소장하였다.13) 그리고 천도교 중앙총부의 소장본과 거의 같은 필사본이 규장각에 소장된 관몰(官沒) 기록 『동학서(東學書)』 15책(冊) 30권(卷) 중의 권이(卷二)인 「운수재문집ㆍ통장(雲水齋文集ㆍ通章)」에 들어 있다.14) 대략 39종의 문헌으로 구성된 권이(卷二)의 서두가 바로 「대선생주문집」이다.15) 규장각 본은 「수운재문집ㆍ통장」 서미(書尾)에 있는 “경자원월념사일오시용강임중칠획린(庚子元月念肆日午時龍岡林仲七獲麟)”이라는 부기로 1900년 음력 1월 24일 용강(龍岡)의 임중칠이 필사한 자료임을 알 수 있기에 ‘용강본’이라고 불린다.16) 이 용강본에 대해 표영삼(1925~2008)은 홍기조(洪基兆)가 1928년 11월 『신인간』 통권 29호에 기고한 「사문개로실기(師門開路實記)」에 근거하여 평안도 용강군 하양리의 홍기조(洪基兆), 홍기억(洪基億), 임복언(林復彦) 3인이 1896년 11월에 문경(상주시 은척면) 은척원(銀尺院)에 가서 해월을 대면했을 때 얻은 필사본을 1900년 임중칠이 다시 필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7) 그런데 이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홍기조가 쓴 1928년 「사문개로실기(師門開路實記)」, 즉 「사문에 길을 열든 」라는 글을 보면 그가 1896년 말 평안도 용강에서 출발하여 문경에서 해월과 의암을 만나 2개월간 수도 범절과 포덕의 방법을 배운 것이 분명하지만, 용강으로 돌아오면서 받은 것을 접주첩과 육임첩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18) 임복언이 임중칠이라는 주장도 명확한 근거가 없다.

둘째는 ‘단곡본(丹谷本)’으로, 영주군 단산면(丹山面) 단곡리(丹谷里)에서 발견된 필사본이다. 이 본은 천도교인 최수정이 수집하여 1964년에 공개했다.19) 당시 공주군 계룡면 경천리 부근에 사는 김정원(金正元)이 소장하던 것이다. 필사자는 그의 조부인 김옥희(金玉熙)이며, 필사 시기는 김옥희가 영주군 단산면 단곡리로 이거 한 1898년 이후로 추정된다.20) 언제인지 모르나 김옥희가 1898년에 영주군 단산면 단곡리로 피신 후, 경천리에서 가지고 온 원본을 다시 쓴 것이라면 실제 이 본의 성립은 1898년 이전으로 소급된다. 단곡본은 1964년에 공개된 후 다른 본들과 비교 교감 되었는데 교단 외부의 학자들은 그 객관성과 정확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여 초기 동학 연구의 기본 자료로 삼고 있다.21)

이 필사본을 직접 확인하고 최초로 교감한 김상기가 이 필사본 원제를 ‘수운문집’이라고 밝혔고, 천도교 교학자인 표영삼이 이 본을 1865년경 수운의 장질(長姪)인 최세조(자; 맹륜) 또는 영해 접주였던 박하선이 편집한 것이라고 추론한 것을 보면 원래 제목은 ‘수운문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22) 수운을 ‘대선생주(大先生主)’라 칭한 것은 해월의 도통 승계가 확립된 이후 해월을 선생으로 높여 부르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23) 단곡본은 현재 그 원본의 소재나 사본을 확인할 수 없다. 천도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단곡본 사본을 김상기의 「수운문집」 교정본과 대조한 결과 단곡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본은 용강본과 유사하기에 도곡본일 가능성이 크다.

단곡본 『수운문집』과 같은 기원을 지닌 것으로 분류되는 다른 필사본은 ‘상주동학교당’이 소장한 필사자와 필사 연도 미상의 문헌이다. 이 필사본은 표지와 제목이 없어 실제 책명을 알 수 없지만, ‘대선생연혁사’로 지칭되고 있다.24) 『수운문집』과 비교하면 거의 같지만 한문에 한글로 토를 단 것이 특징이며 ‘ㆍ’(아래 아)가 남아있는 것으로 본다면 1933년 이전의 필사본임이 분명하다. 김상기가 교감해 편집한 『수운행록』과 대조하면 단곡본의 원 형태를 추론할 수 있는 자료인데, 일부 글자가 훼손되어 있고 몇몇 필사 오류도 발견된다. 후술하겠지만 『수운문집』은 실체가 있는 독자적 계열의 ‘수운 행장’으로, 서지학적으로는 가장 1860년대의 원본 문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여러 근거가 확인된다.25)

셋째는 ‘계룡본’으로, 공주 계룡면 경천리(敬天里)에서 수집된 필사본이다. 이 본은 단곡본과 같이 최수정이 수집해 1964년에 공개되었다. 박석기가 소장하던 것으로 필사자는 그의 숙부이며 필사연대는 미상이다. 김상기는 이 필사본의 필사 장소를 알 수 없어 입수 장소를 근거로 계룡본이라고 지칭하였다.26) 이 계룡본을 다른 본과 비교 검토한 김상기는 오서낙자(誤書落字), 즉 오탈자가 백 개 정도가 있다고 하였다. 표영삼은 계룡본이 단곡본의 내용과 같다는 점과 오자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였다.27) 이를 통해 본다면 계룡본은 단곡본과 같은 기원을 지닌 필사본으로 볼 수 있다. 계룡본이 단곡본과 같은 지역에서 입수되었고 단곡본 역시 계룡본이 입수된 계룡면의 19세기 말엽 필사본에서 기원하였으므로 이러한 추측의 개연성은 높다. 하지만 네 가지 본의 원본을 모두 비교 교감했던 김상기는 계룡본과 단곡본의 유사성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한 바가 없다.

넷째는 ‘도곡본(道谷本)’으로, 논산군 두마면 도곡리(道谷里)에서 입수된 필사본이다. 이 본 역시 단곡본과 같이 최수정이 1964년경에 공개하였다. 이 도곡본은 김인순이 소장하던 것으로 필사인(筆寫人)이 그 부친이고 필사 시기가 신해년, 즉 1911년으로 명기되어 있다.28) 김상기는 앞서 소개한 용강본이 도곡본과 일치하며 그 누락도 같다고 하면서, 21행에 걸쳐 구절의 누락이 더 발견된다고 지적하였다.

이상의 네 가지 필사본에 대해서는 제목 상 천도교 중앙총부와 규장각이 소장한 용강본이 『대선생주문집』, 그 외 단곡본과 계룡본과 도곡본이 『수운문집』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내용상 도곡본은 용강본 계열에, 계룡본은 단곡본 계열에 포함된다. 따라서 ‘용강본’ 계열 문헌은 그 제목인 『대선생주문집』, ‘단곡본’ 계열 문헌은 그 원제인 『수운문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문헌들이 수운 사후의 1860년대에 누군가 집필한 것에서 기원한 것인지, 아니면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 수운의 ‘도원(道源)’ 부분만 떼어 만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29)

2.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해제 검토

『도원기서』는 1978년 일반에 공개된 문헌으로, 수운 행적에 관한 내용은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과 대략 유사하면서도 1880년까지의 동학 교단의 상황을 해월 중심으로 기술한 기록이 추가되어 있다.30) 수운의 행적에 관한 기사는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과 유사하지만, 유의미한 차이도 있다.

책의 후미에 세 사람의 간행기가 있어 편찬자와 편찬 시기를 알 수 있는데, 당시 도차주(道次主)였던 강시원(姜時元, 본명 강수, 이하 강수)의 간행 후기에 따르면 초고 편집은 1879년 11월 10일에 시작되었다.31) 다른 두 문헌과 달리 편찬 시기와 편찬자를 명확히 알 수 있어 문헌의 편집 시기나 방향 등을 고증하는 기준이 된다.

수운과 해월 중심으로 1824년부터 1880년까지의 교단사를 기록한 이 문헌은 『최선생문집』에 수운의 행적 및 문집 편찬 과정을 부록으로 수록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32) 문헌의 제목에 ‘최선생문집’이 특정되어 나타나 있고, 주 내용이 조선조 문집의 부록(附錄)에 해당하는 행장과 발문(跋文)이기 때문이다.33) 『도원기서』에 ‘선생문집’과 관련하여 “5월 초(初) 9일 각판소를 설치하였고, 11일에 개간(開刊)하기 시작하여 6월 14일에 인출(印出)하기를 마쳤다. 15일에 따로 제(祭)를 설(設)했는데 그때 공(功)을 나타낸 별록(別錄)을 기록했다.”라는 기록과, “‘선생문집’의 각판 작업을 경영한 지도 이미 세월이 오래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34) 『도원기서』가 원래 ‘최선생(수운)문집’의 행장과 발문으로 편집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된다.35)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1906년 필사된 『대선생사적(大先生事蹟)』,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천도교회월보》에 연재된 「본교역사(本敎歷史)」, 1915년 간행된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 그리고 1920년에 작성된 『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의 해당 기록이다. 이들 기록은 모두 『도원기서』와 달리 당시 간행된 것을 경전이라고 하였다.36) 20세기 초반에 편찬된 문헌 대부분은 ‘수운문집’을 의미하는 서적의 간행 시점과 장소를 『도원기서』와 거의 같게 기록하지만, 서명을 『동경대전』 또는 『대전(大全)』이라고 하여 『도원기서』의 ‘문집’과 차이를 보인다. 『도원기서』 편찬이 시작된 1879년 말, 수운의 유고를 모아 ‘최선생문집’으로 간행하려 했지만 1880년 5월의 간행소 설치 전에 경전의 간행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충남 서산에서 발견된 『동경대전』 목판본이 1880년에 간행된 『동경대전』으로 비정(比定)이 되면서 이 개연성은 더욱 확실해졌다.37) 이 판본은 그 체제가 ‘권지일(卷之一), 권지이(卷之二) … ’ 등으로 되어 있어 경전이 아닌 문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특히, 권지육(卷之六)은 ‘부(附)’라는 말을 붙여 부시부(附詩賦)로 되어 있는데, ‘시부(詩賦)’를 부록으로 한 조선조 문집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이후의 판본과 달리 동학의 의식(儀式)이 수록되지 않아 『동경대전』이 판각 직전까지는 경전보다 문집으로 기획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38)

『도원기서』에는 기묘년(1879) 11월 초에 해월이 선생(先生; 수운)의 수단소(修單所)를 방시학의 집에 정하고 유사(有司)를 분정(分定)했다는 기록과 “기묘년(1879) 가을에 나(강수)와 주인(해월)이 선생의 도원(道源)을 잇고자 함이 있어 선생의 사적(事績)을 수단(修單)한즉”이라는 강수의 간행기가 있다.39) 행적 등이 기록된 단자를 수집(收集)하여 정리한다는 ‘수단(修單)’의 의미를 생각하면 해월과 강수 등 동학의 지도자가 수운의 행적인 ‘행장’을 정리하고 문집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인 ‘발문’을 추가하여 『최선생문집』의 끝에 『최선생문집도원기서』라는 제목으로 첨부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40)

그렇지만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도원기서』가 『최선생문집』, 즉 『동경대전』 뒤에 첨부되어 간행되지 않은 연유를 『시천교종역사』와 『천도교회사초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탈고하자 목판으로 간행하여 오래 전하려는 계획으로 우선 인장을 찍어 굳게 봉하고서 유시헌 집에 보관해 두었다.41)

신사 대신사의 도적(道蹟) 편집소를 방시학 가에 설(設)하시고 탈고됨에 급(及)하여 견봉날인하야 유시헌에게 임치(任置)하시고 밀촉(密囑)하야 왈(曰) 차고(此稿)는 인안(人眼)에 경괘(輕掛)함이 불가라 하시니 … 42)

탈고 후 목판 인쇄를 위해 밀봉하였는데 해월이 공개를 꺼려 간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봉인 시점으로 주장되는 1880년 초 이후인 1880년 3월의 수운 기제(忌祭)와 6월의 『동경대전』 간행 기사가 『도원기서』에는 수록되어 있다.43) 이것은 『시천교종역사』와 『천도교회사초고』의 기록에 착오가 있음을 알려준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본다면 『도원기서』는 탈고 이후 문집 간행이 경전 간행으로 전환되면서 그 판각이 유보되었고, 『동경대전』 간행 이후 어떤 이유에서 봉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월이 『도원기서』를 봉인한 것은 ‘인안(人眼)에 경괘(輕掛)함이 불가(不可)’하다는 것, 즉 사람들에게 『도원기서』를 공개할 수 없다는 이유라 주장되고 있다. 『도원기서』에는 해월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부 다수가 이필제에 포섭되어 1871년 3월 영해부(寧海府)의 민란에 참여한 것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 사실이 공개되면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가던 동학은 다시 극심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월이 교단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원기서』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44)

해월이 『도원기서』를 봉인한 것은 교단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만, 이 밖의 다른 두 가지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동학 교인의 신앙을 흔들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이다. 『도원기서』에 기술된 수운의 모습과 달리, 후대의 교단사는 수운의 면모를 신비화하고 높이면서도 일반이 이해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일부 내용을 첨삭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45) 『도원기서』에는 수운의 인간적 한계, 가족의 횡액(橫厄) 그리고 제자의 고난 등이 거의 그대로 기재되었다. 해월은 『도원기서』의 여러 기사가 교인들에게 공개되면 수운에 대한 신비적 일화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동학 교인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다고 염려하여 『도원기서』의 판각과 공개를 유보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당시까지 생존한 수운의 친견 제자들이 인정하기 어려운 기사들이 『도원기서』에 있었다는 점이다. 『도원기서』는 해월 외의 친견 제자를 대부분 배제하면서 수운과 해월을 중심으로 기사 대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수운이 해월에게 비공개적으로 도통을 전수했다는 것을 명확히 했고 해월을 ‘주인’으로까지 지칭한다. 이러한 내용은, 도통전수의 사실 여부와 별개로, 접주로 임명된 직계 제자들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만약 생존해 있던 직계 제자 중 누구라도 이를 부정하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동학 교단은 분열될 수 있었다.

봉인된 『도원기서』 원본은, 해월의 수제자 중 일인인 구암 김연국(金演局, 1857~1944, 이하 구암)이 1908년 1월 천도교에서 시천교로 가면서 한 부를 필사한 후, 최종적으로 1918년에 시천교로 넘어갔다.46) 그리고 구암 사후 그 아들 김덕경이 소장하여 오다가 1978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따라서 원본 외에 1908년 필사된 판본도 존재한다. 이 본은 서유사(書有司)로서 1879년 『도원기서』 편찬에 참여했던 김세인이 필사했는데 교감을 한 흔적이 있어, 원본보다 더 정확하다고 평가된다.47)

『도원기서』의 출처와 편찬자 및 편찬 시기를 특정할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하여 표영삼은 『도원기서』가 ‘수운 행장’의 원본이며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다른 ‘수운 행장’인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대해 『도원기서』가 봉인되기 전에 수운 일대기 부분만을 필사한 데서 기원한다고 하여 그 정확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도원기서』에서 『대선생주문집』이 기원했고, 이를 가필하여 『수운문집』이 나타났다는 것이다.48)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김상기나 박맹수 등 다른 연구자들의 입장과 정반대된다. 이 논쟁의 맥락을 학문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문헌 고증이 필요하다.

Ⅲ.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 비교

1. 문헌 비교 분석

『수운문집』(단곡본 계열), 『대선생주문집』(용강본 계열), 『도원기서』의 세 문헌을 둘러싼 논점들은 도통 전수와 이를 둘러싼 조직체계 및 권위구조 등이다. 세 문헌을 둘러싼 중요 논점들과 관련하여, 박맹수는 해월의 도통전수 부분에 국한해 『수운문집』과 『도원기서』 두 문헌을 비교하면서 『수운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앞선 기록이며 더 정확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49) 그에 비해 표영삼은 박맹수의 주장을 비판하고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의 내용이 대부분 같기에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필사하면서 내용을 보완한 것이며,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을 가필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50) 이는 박맹수와 정반대되는 견해였다. 또 다른 견해로는 2021년 김용옥이 주장한 『대선생주문집』 원본설이 있다. 그는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을 비교하여 그 차이를 명확히 했고, 통사론, 의미론, 음운론, 문자학의 모든 관점에서 『대선생주문집』 → 『도원기서』의 순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51) 이에 대해서 조성환은 김용옥의 주장에 이견을 제시하고 표영삼의 주장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52)

박맹수는 『수운행록』과 『도원기서』를 비교하였지만, 실제 비교된 것은 『수운문집』과 『도원기서』였다. 그는 문헌의 차이점과 당시의 상황 등을 귀납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여 『수운행록』(『수운문집』) → 『도원기서』라는 논리적인 추론을 전개하였다. 그에 비해 표영삼은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이 대부분 같다는 연역적인 전제에서 출발하여 『도원기서』 → 『대선생주문집』 → 『수운문집』의 주장을 전개하였다. 김상기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 문헌 전체를 대조하였지만 『도원기서』를 접할 수 없었고, 박맹수와 표영삼은 문헌 전체를 비교하여 고증하지 않았으며 김용옥은 『수운문집』의 실체를 부정했다. 조성환은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을 수정한 것이라는 표영삼의 견해를 수용하고 이에 기반하여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만을 비교하여 김용옥의 주장을 비판했다.

기존 주장들이 종합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게 된 것은 이처럼 지엽적인 비교와 추론에서 발생한 한계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문헌을 전체적으로 비교하여 차이를 밝히면 보다 논리적인 기반에서 선후 관계를 세밀하게 특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차이의 원인까지 분석할 수 있기에 본 연구에서는 문헌 전체를 대조하여 고증을 시도하였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수운행록』으로 통칭된 문헌을 내용상 중요한 차이들을 고려하여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으로 구별하고, 『도원기서』와 함께 상호 대조하였다. 특히 『수운행록』과 상주 동학교당에 소장된 『수운문집』 계열의 필사본인 『대선생연혁사』를 비교하여 『수운문집』의 원본을 비정했다.53) 고증 내용 중 본론에는 문헌의 선후 관계나 정확성에 관련된 중요한 부분만 수록하였고 자세한 비교와 분석은 부록에 수록하였다.

전체 문헌을 비교 분석하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원기서』의 중요한 부분이 『대선생주문집』에 없거나 반대되는 경우도 다소 존재한다. 『대선생주문집』은 오히려 『수운문집』과 유사도가 높고 해월과 관련된 특정 기사에서만 『도원기서』와 일치한다. 따라서 표영삼의 주장은 박맹수의 경우에 비해 더 많은 논리적 문제를 지닌다. 『수운문집』은 해월과 관련된 특정 기사를 제외하면 『대선생주문집』과 많은 부분 유사하며 문법이나 내용상 가장 적은 오탈자를 지니고 있다. 비교 분석의 결과를 큰 틀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의 전문을 대조하면 『도원기서』에는 있지만 『대선생주문집』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 있는데, 이는 그 내용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의도적인 삭제나 실수로 보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도원기서』에 있는 해월 관련 일화는 도통 계승을 정당화할 수 있는 내용이고, 교리 관련 설명은 『동경대전』과 유사하다.54)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를 필사한 것이라면 이를 삭제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필사 과정에서 실수로 누락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구조나 맥락으로 본다면 『대선생주문집』은 관련 내용이 원래부터 없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원기서』에 부자연스러운 문맥이 적지 않다. 『도원기서』에만 있는 글자나 구절 등은 『동경대전』과 일치하거나 편찬자인 강수의 개인적 경험과 소회 등과 관련되어 있어 『동경대전』 편찬 시기의 수정이나 보완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필사하면서 미진한 점을 보완한 문헌은 『대선생주문집』이 아니라 오히려 『도원기서』로 보인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에는 있지만 『도원기서』에 없는 내용은 주로 해월의 도통전수와 모순될 수 있는 기사이다. 『대선생주문집』은 해월의 도통전수 기사를 수록한 문헌이므로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를 필사하면서 중요 기사를 삭제하고, 해월의 도통전수와 모순될 수 있는 기사를 추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처럼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를 비교할 때 대부분의 차이가 『도원기서』를 『대선생주문집』의 원본으로 가정할 때 성립될 수 없다면55) 『도원기서』가 『대선생주문집』의 원본이라는 표영삼의 전제도 성립되기 어렵다. 그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 수록된 해월의 도통전수 기사가 높은 유사도를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두 문헌의 차이점이 지니는 의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전제는 연역적이며, 실제 문헌을 대조하고 고증했다면 성립되기 어려운 비논리적인 것이다.

『대선생주문집』이라는 명칭을 근거로 『도원기서』가 먼저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선생주문집』 본문에서 수운은 선생으로 기술될 뿐 ‘대선생’으로 기술된 곳은 없다. 필사 과정에서 제목의 ‘수운’, ‘수운재’ 또는 ‘수운선생’을 ‘대선생주’로 수정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56)

『대선생주문집』에는 있지만 『도원기서』에 없는 기사 대부분은 『수운문집』에 내용이나 문법상 오탈자 없이 수록되어 있다. 즉, ‘수운 행장’이 집필되던 1860년대 중반, 해월의 도통전수가 교단 내에 공식화되거나 수용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볼 경우, 『수운문집』은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내용이나 문법적 오류를 확인할 수 있고, 수정의 맥락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 문헌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 성립 과정을 분석한 교단 외부 학자들은 『도원기서』를 통해서 보더라도 해월의 도통 전수가 공식적이지 않았거나 실재하지 않았으며, 교단 내에서 해월의 도통 계승이 수용된 시기가 1875년 이후라고 주장했다.57) 이를 통해 본다면 해월의 도통 전수 기사가 기재되지 않은 『수운문집』이 1860년대에 집필된 ‘수운 행장’에 가장 근접한 필사본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세 문헌 가운데 ‘수운 행장’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은 『수운문집』이며, 가장 많은 첨삭이 이루어진 것은 『도원기서』이다. 유사성에 따른다면 『대선생주문집』은 『도원기서』가 아니라 『수운문집』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도원기서』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을 저본으로 수정 편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수운문집』이 수운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술되었지만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수운을 통해 해월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세 문헌이 모두 수운의 문집에 들어갈 ‘행장’에서 기원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해월 중심의 기사와 기술 방식은 1870년대 중반 이후의 수정임이 분명하다.

문헌의 선후 관계를 객관적으로 입증해 주는 또 다른 증거로 두 개의 지명을 들 수 있다. 『수운문집』에 사용된 ‘공충도(公忠道)’와 ‘화령(化寜)’이라는 지명인데, 『대선생주문집』은 공충도가 공충로(公忠路)와 화령(化寜)으로, 『도원기서』에는 충청도(忠淸道)와 화령(華嶺)으로 되어 있다. 충청도는 1862년부터 1871년까지 충청도라 지칭되는 것이 금지되었고 공식적으로 공충도(公忠道)였다.58) 화령은 조선조 지리지에 모두 화령(化寜)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당시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도 화령(化寜)으로 되어 있다.59) 화령(化寜)은 보은과 상주 사이에 있는 상주의 속현으로서 1870년대 이전까지 화령(華嶺)이라는 고개 이름으로 쓰인 예가 없다. 서지학적으로 본다면 ‘수운 행장’에 충청도와 화령(華嶺)이라는 지명이 사용될 수 있었던 시기는 충청도라는 지명이 복원된 1871년 이후이며, 상주를 중심으로 교단 재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령(華嶺)이 알려진 다음이다.60) 지명의 차이는 『수운문집』이 1871년 이전에 집필된 ‘행장’을 저본으로 필사된 문헌이며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수운문집』을 저본으로 수정 편집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2. 문헌 선후 관계 비정

각 문헌은 수운에서 해월로의 동학 도통전수에 대해 다른 인식과 해석의 차이를 보인다. 이 점에 주목하면 각 문헌에 나타난 차이를 비교 고증하여 문헌의 성립 시기를 비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세 문헌의 성립 시기에 대해 이르게는 1860년대 말부터 늦게는 20세기 초까지로 다양하게 주장되었기에, 문헌 간 차이는 20년~30년 동안의 동학 교단의 도통 인식과 이에 따른 신앙과 조직 체계의 미세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러 고증 결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비정이 가능하다.

첫째, 『수운문집』은 수운의 서거 직후부터 동학도의 최초 반란인 1871년 영해 민란 사이, 유교적 기반에서 수운을 따랐던 지식인 출신의 친견 제자가 집필한 ‘수운 행장’의 필사본일 가능성이 크다. ‘수운 행장’은 이 조건에 부합하는 영해 접주 박하선의 관점에서 기술된 일화를 많이 수록하고 있기에 박하선과 수운의 장질 맹륜과의 공동 저작으로 비정할 수 있다.61) 이는 조선 유교 전통에서 자손이나 친족이 주도해 사후 문집을 수집 정리하고, 제자나 지인이 행장을 편찬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빙성이 크다.

둘째, 『대선생주문집』은 해월 단일 지도체제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해월을 중심으로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을 수정 편집한 것이다.62) 해월이 수운의 계승자임이 수용되면서 생존한 친견 제자들은 해월을 교단의 지도자로 옹립하였고, 교단의 또 다른 구심점이었던 수운의 두 아들이 사망한 1875년 이후 해월의 도통 승계 담론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대선생주문집』에서 사용된 해월의 지위인 ‘주인’과 가장 일치도가 높은 ‘도주인’의 지위가 공식 사용된 시기가 1875년 10월이고, 1877년 11월부터 ‘도포덕주(道布德主)’의 지위가 사용된 점을 고려할 때 『대선생주문집』은 1875~77년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63) 이때는 해월이 도통 계승자로 수운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한 시기였다.64) 다만, 『대선생주문집』에 해월의 도통전수와 모순되는 기사가 남아있게 된 것은 당시에는 해당 기사와 도통전수와의 모순점에 대해서 면밀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셋째, 『도원기서』는 수운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문집을 편찬하고 그 부록으로 행장과 발문을 첨부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전통에 따라 1879년 수단소를 설치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한 후 『대선생주문집』 또는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을 저본으로 삼아 해월 중심으로 수정 편찬하였고, 수운 서거 이후의 교단사를 해월 중심으로 추가하였다. 1878년 해월의 개접을 전후로 종래 유교적 동학의 사유와 차별화된 해월의 신앙체계가 자리 잡으면서 기존의 기록 중 이에 배치되는 부분은 수정되었다. 1880년의 『동경대전』이 문집 형태이면서도 행장 없이 경전의 위상을 갖게 되고, 동학이 유교 학파에서 신종교로 전환한 것도 『도원기서』의 편찬 방향과 일맥상통한다.65) 동학의 세계가 해월을 중심으로 구축되면서 이와 모순되는 행장의 일화는 수정, 삭제되었으며 수운 중심의 기사까지 해월을 중심으로 편집되었다.

이상의 결론을 통한 ‘수운 행장’ → 『수운문집』 → 『대선생주문집』 → 『도원기서』의 문헌 성립 순서에 기반한다면 수운은 해월에게 ‘북도중주인’, 즉 경주 북쪽에 있었던 해월 휘하 접의 연원주임을 인정해 주었을 가능성은 크지만 공개적, 공식적으로 동학의 도통을 전수한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해월의 도통 승계 담론은 수운 사후 교단 내 제도적, 종교적 권위가 해월에게 집중된 후 해월이 자신에게 주어진 북도중주인이라는 지위를 도통전수로 해석하면서 성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해월의 도통 승계 담론이 어떠한 배경하에 성립되었는지를 분석해 볼 것이다.

Ⅳ. 해월의 도통전수 담론 성립 배경

세계의 중심으로 존재하는 교조나 정통성 있는 후계자의 부재는 신도들에게 현실 세계의 성화(聖化) 단절과 구원에 대한 불확실성을 야기하여 종교 공동체의 권위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성스러운 도통 인맥으로 그 권위구조가 유지되는 동학과 같은 연원제 조직의 경우 최고 정점이 부재할 때 그 분열과 축소는 불가피하다. 동학의 경우 후계자가 명시적, 공개적으로 지명되지 못하고 그 선정 방식 또한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정점에 있던 수운이 처형되었다. 종교 교단에서 후계자가 지명되었거나 그 선정이 제도화되었음에도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닌 경쟁자가 등장했을 때 교단 분열이 초래된 일이 다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수운의 부재 이후에 동학의 접조직이 대부분 붕괴하거나 연원별로 분열될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1863년 12월 수운의 체포와 함께 시작된 동학에 대한 탄압은 1864년 3월 수운의 처형과 중요 지도자의 유배 등으로 공식화되고 최고조에 이르렀다. 후대의 교단 측 기록과 달리, 수운 체포 당시 전후 상황을 상세히 기술한 정운귀의 서계(書啓)는 수운이 자신의 체포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서계에 따르면 당시 용담정에는 30~40여 명의 교인과 입도자가 모여 있었고, 수운은 별다른 확인도 없이 신원이 불확실한 초면의 인물을 접촉하였으며, 제자들에게 동학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었다.66)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펼쳐진 동학의 압도적 전파 양상으로 본다면 수운과 접주들의 방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67) 무극대도의 출현과 서양인의 내습이 예정된 갑자년(1864)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수운에게는 보국안민을 위해 포덕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68) 따라서 1863년 7월의 파접(罷接) 이후 약 5개월 동안 눈에 띄는 탄압이 없자 수운과 접주들이 종교활동을 재개했다고 볼 수 있다.

현실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조와 주요 지도자가 체포되어 처형, 유배되고 남은 지도자들이 탄압 정국에 따라 그 활동을 중지하거나 지하로 숨게 되자, 동학의 조직 전반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수운은 처형되었고, 경주부의 접주 백사길, 강원보, 이내겸과 수제자로 알려졌던 최병철(최자원)은 정배(定配)되었으며, 단양 접주 민사엽은 1865년에, 영해 접주 박하선은 1869년경에 사망하였다.69) 현현한 상제의 조화와 의지를 전하며 동학 세계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수운을 대신할 권위구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권위를 계승하여 상제의 현현을 실현할 공식적 후계자도 없었다. 수운 처형 이후의 교단 상황을 기록한 『도원기서』가 수운이 임명한 접주가 아니라 수운의 가족과 신앙을 지키던 교인을 중심으로 기술된 것은 동학 교단 조직이 입었던 타격의 강도를 잘 보여준다.

강수는 『도원기서』에서 “갑자년 이후 소위 도인이라는 이들이 혹 죽고 혹은 생존하고 혹은 도를 버렸는데, 막혀서 서로 통하지 않고 오래도록 발길이 끊어져 피차 서로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하니 자연히 서로 상종할 수 없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였다.70) 남은 접조직은 붕괴하거나 접별로 독립하여 지하로 숨어들었다. 해월 역시 지목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865년 3~4월 영양의 용화동으로 은거하였다. 이때 오래도록 산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는 기록으로 본다면,71) 동학 조직의 재건은 물론이고 휘하 접의 재건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72)

그러나 북도중에 휘하의 여러 접을 형성하였던 해월의 생존은 동학 교단 조직이 다시금 구축되고 정비되어 체계화될 수 있는 중요한 불씨가 되었다. 해월은 접주가 아니었지만 휘하에 접주를 거느린 수운의 수제자로, 때에 따라 접주 이상의 권위를 지닌 지도자로 교단 내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73) 이는 1862년 수운이 가족의 호구지책을 해월에게 부탁하고 1863년 자신의 글을 출판하라는 명을 해월에게 한 것으로 방증된다.74) 따라서 대부분의 접주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의 교단 내 책임과 위상은 수운 사후 오히려 강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운과 함께 체포된 20여 명 대부분이 남도중(南道中)인 경주 남쪽 지방의 인물들이었기에 이후 교세의 중심 기반은 북도중(北道中)의 접이 되었다.75) 북도중에 휘하 접을 다수 두었던 해월의 위상은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수운의 가족은 그 생계를 지원하던 단양 접주 민사엽이 사망하자 1865년 7월 영양 용화동에 있던 해월을 찾아 생계를 의탁하였다. 이를 계기로 1866년 3월 10일 수운의 탈상 제사에 상주접의 책임자였던 황문규를 비롯한 여러 도인이 참여하였고, 해월 주변으로 교인들이 이주해 왔다.76) 수운의 가족과 해월의 결합은 교단 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1866년 8월의 병인양요로 인해 교단 재건은 현실화하였는데 동학도들에게 양요는 수운이 예언한 서양인의 내습이 실현된 것이었기에 수운의 신성성과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도원기서』에는 병인양요 이후 도인들 가운데 연원을 잃은 사람들이 해월을 찾았다고 기술하고 있다.77) 속인제인 연원 조직의 경우 전도인이 사라지거나 교를 버렸을 때 신앙을 지속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연원을 찾는 것이었다. 수운의 수제자로 알려진 해월이 그 대상이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수운에 대한 제사권이라는 제도적 권위를 지닌 가족과 수제자라는 종교적 권위를 지닌 해월이 이원적 지도 체제를 형성하였다는 관점은78)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신빙성이 크다. 공식 지위가 없었던 해월에게는 제도적 권위가 없었고, 수운의 가족에게는 수운의 카리스마를 대신할 수 있는 종교적 권위가 없었다. 따라서 수운의 가족과 수제자 해월이라는 두 구심점의 결합은 연원제 교단 조직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요한 사건이었다. 비록 이원적이지만, 제사권을 통해 구현되는 제도적 권위와 해월의 카리스마를 통한 종교적 권위의 결합으로 연원제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도통 연원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제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제사장의 위상을 지녔던 수운을 이원적인 지도 체제가 완벽히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연원을 상실한 교도들과 분립하여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접들이 하나의 교단 조직으로 포괄될 수 있는 연원제 조직의 중핵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1866년 3월 상주접의 교인들을 필두로 교인들이 수운 가족 주변으로 모이는 현상은 병인양요를 기점으로 증폭되었고, 1866년 10월 수운의 생일을 기점으로 교단의 재건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도원기서』는 그 무렵부터 수운의 가족을 대가(大家)로 불렀으며 수운의 제사를 위해 계(契)를 조직한다는 통문을 각처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79) 해월은 수운에 대한 제사권을 활용하여 흩어진 접조직을 통합하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870년까지 동학의 많은 잔존 조직은 대가(大家)와 해월을 중심으로 집결하였다.80) 자신의 연원을 잃거나 알지 못했던 이들은 해월과 해월 휘하 교인을 연원으로 하여 조직화 되었다.81) 해월을 따르는 조직은 교단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하였다.82) 영해 민란의 주모자인 이필제가 봉기를 위해 집요하게 해월을 설득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83)

그렇지만 잔존하던 접이 해월을 도통 연원으로 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수운의 가족들이 생존해 있었고 해월의 권위가 비공식적이었기 때문이다. 강원 양양 지역의 동학도들은 1870년 수운의 가족을 영월로 이주시키면서 양양 지역의 포덕을 활발히 진행하였고,84) 경북 영해 지역의 동학 교인은 연원이 불확실한 이필제라는 인물을 지도자로 수용하면서 변란을 주도하였다.85)

접들의 독자적 활동은 교단 조직을 다시 큰 위기로 몰아갔다. 다원적 지도 체제 아래에서는 이필제의 난, 즉 영해 민란과 같은 반란에 동학의 접이 참여하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영해 접주 박하선의 아들이었던 박사헌(박영관)과 여러 영해 교인이 이필제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해월 역시 이필제에게 설득되어 휘하의 조직 지휘 권한을 그에게 일시적으로 넘겼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86)

영월로 이주한 수운의 아들은 이필제의 난으로 쫓기는 해월을 멀리하려고 했다.87) 영월과 양양 지역 접의 노선이 민란 참가 접과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맹수는 영해 민란의 결과 1860년대 말 동학 교단의 주요 기반이던 경북 북부지역의 교세가 거의 와해 되었고 주요 기반이 강원도로 이전되었다고 분석했는데, 이는 강원도 지역의 동학 조직이 영해 민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표영삼은 영월, 정선, 양양, 인제 지역의 교인들이 수운의 아들과 상종하였으며 해월과 거리를 두었다고 지적하였다.88) 각 지역에 남아있던 접조직은 1875년경까지 독자적인 활동 속에서 나름의 종교적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89)

연원제 조직에서 연원을 달리하는 조직들이 하나로 규합되기 위해서는 각 연원주가 도통 연원의 존재를 수용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이원적 지도 체제와 해월의 비공식적 지위, 잔존 접조직의 독자 활동 등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해 민란 이후 동학에 대한 집요하고 광범위한 탄압은 오히려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성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90) 탄압으로 인하여 1872년 1월 수운의 장남 세정은 체포되어 1872년 5월 장살되었다. 또한 지목을 피해 정선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수운의 부인이 1873년 12월 사망하였고, 차남 세청이 1875년 1월 병사하였다.91) 대부분의 동학 지도자들도 지목을 피하여 활동을 중지하거나 은신하였다.92) 수제자로 인정된 해월이 수운에 대한 제사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도래하였다. 도피 과정에서 이루어진 해월과 수운의 친견 제자 사이의 의형제 결의(結義)로 해월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었다.93) 친견 제자의 관점에서 해월을 의형으로 둔다는 서약은 자신의 연원은 수운이지만, 해월이 교단의 유일한 지도자이며 수운의 후계자라는 것을 수용한다는 뜻이었다. 각 연원주가 해월을 도주(道主)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으며, 이는 해월이 동학의 모든 접조직을 포괄하는 도통 연원의 권위를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것이 명확히 입증되지 않는다면 접조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도통 연원으로서의 해월의 지위는 언제나 도전받을 수 있었다. 도통의 계승이 상제와 수운의 뜻인지를 확인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운과 해월 사이에 있었던 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작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해월이 여러 북도중 접의 연원주임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수운이 비공식적으로 해월에게 준 ‘북도중주인’이라는 지위는 새롭게 해석되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해월의 진술이 다음과 같은 『도원기서』의 기록이다.

예전에 선생이 항상 시형에게 말하기를 “이 도의 운은 오래도록 북방에 있다. 남북의 접을 택하여 정하라.” 하셨다. 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북접을 위해 가리라.”고 하셨다.94)

해월의 진술은 수운이 동학의 정통성은 남과 북의 접 중에 북에 있음을 명확하게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해월의 이 진술로 북도중이나 북접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역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95) 『도원기서』가 이후의 모든 기록에서 해월을 주인(主人), 도주인(道主人), 도주(道主), 도포덕주(道布德主)로 지칭한 것은, 해월의 진술에 근거하여 ‘북도중주인’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863년 8월 15일 새벽 수운이 여러 제자 앞에서 외워 준 결시(訣詩)인 “용담수류사해원 검악인재일편심(龍潭水流四海源, 劒岳人在一片心)”의 ‘검악인’은 해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실제 해월이 살던 곳의 지명은 금둥골, 금등골이었지만96) 검골, 검등골이라 하여 검악을 해월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결시는 심법 전수의 전법시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도통 전수의 증거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 해월의 종교적 체험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872년 10월 해월은 정선의 사찰인 정암사 적조암에서 강수, 전성문 등과 함께 49일간의 수련에 들어갔다. 수운의 천성산 기도를 참고하여 49일간 수련을 통해 수운이 걸었던 구도의 길을 재현하였다. 수제자라는 권위만으로는 영해 민란에서처럼 지휘권 이양에 따른 조직 붕괴를 또다시 겪을 수 있고, 수운을 대신할 연원 정점으로서의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교단의 재건이나 통합이 불가하다는 것을 해월이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해월은 이 수련을 통해 미래에 대한 계시로 해석되는 현몽을 얻었는데97) 이러한 체험은 수운의 남긴 가르침과 강결(降訣) 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촉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1875년 8월 15일 해월은 수운이 행하던 치제를 재현하면서 강화의 가르침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공표하고, 소고기를 빼고 제례를 행하도록 했다.98) 이는 해월이 자신의 도통 승계를 확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원 정점이던 수운만이 받을 수 있었던 강화가 해월에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해월이 스스로 수운을 대신하여 도통 연원에 올랐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1875년 10월 선도(仙道)의 복식으로 만든 예복을 도입한 새로운 제사 의례를 창설하며 공식적으로 자신을 도주인(道主人)으로 명명한 것, 1878년 7월 수운의 접(강론)을 계승하여 개접을 선언하며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것, 1879년 치제(致祭)였던 구성제를 인등(引燈) 의식으로 대체한 것 등으로 본다면 이는 명확히 입증된다.99)

해월이 자신을 도통 연원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근거는 접주에게 사제(司祭)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해월이 집단 의례를 시작한 시점은 1875년이며, 접을 단위로 하여 접주를 의례에 주도적으로 참여시킨 시점은 1877년 기존의 고천 제례를 구성제(九星祭)로 바꾸면서이다. 1879년 해월이 구성제를 인등제(引燈祭)로 변경하여 의례가 간소화되자 여러 지역에서 소규모 의례가 가능하게 되었다.100) 해월의 명과 감독하에 접주가 사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877년을 전후로 한 시기로 볼 수 있다.

1870년대 중반 이후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시작되면서 동학 교문은 해월을 중심으로 재건되었고, 이후 ‘북도중주인’이었던 해월을 주인, 즉 도주로 옹립하면서 학파적 조직에서 종교 교단으로 재탄생하였다. 수운의 의도와 별개로 그의 서거 후에도 유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던 동학 교문(敎門)은 해월의 종교적 체험과 이에 따른 교의(敎義) 재해석으로 유교적 사유를 벗어나 새로운 교단이 된 것이다.101) 이것은 해월의 도통 승계로 연원 정점이 지니는 강한 구심력이 작동하고, 도통 계보가 복구되면서 포교가 활성화되어 교단이 통합되고 확장된 결과이기도 했다.102)

연원제 조직에서 연원 정점은 성속의 매개자, 진리와 구원의 담지자라는 권위를 지니면서 벼리처럼 인적 계보의 그물망에 강력한 구심력을 가한다. 동시에 인적 결사의 연쇄 사슬은 도통 계보의 지위를 얻어 조직의 원심력은 한층 강화된다. 해월의 도통 승계는 수운 서거 후에 멈춰 버린 도통 연원과 연원제 인적 결사의 상호 보완적 체계를 작동하여 흩어진 접과 교인들을 교단에 흡수하고 도통 계보의 그물망 확장으로 이어졌다.103)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성립 5년 만에 수운이 남긴 가르침을 경전으로 간행하면서 유교적 사유에서 벗어나 동학의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도통 승계 담론의 확산에 따라 도통 연원이라는 해월의 권위가 확보된 결과였다.104) 『도원기서』가 전통적인 행장의 집필 방식에서 벗어나 경전 간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후계자인 해월의 여정을 통해 상세히 기술한 것은 해월의 독자적 카리스마가 1880년을 전후로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도원기서』가 편집된 1879년~1880년은 도통 승계의 담론이 완성되면서 유교적 학파로서의 동학 교문(敎門)과, 유교를 초월하는 무극대도로서의 동학 교단(敎團) 중에서 후자로 무게 중심이 이전되던 시기였다. 즉 도통 승계의 담론을 통해 종교적 권위를 확고히 한 해월이 수운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여 유교적 한계에 머물러 있던 동학을 새로운 종교 교단으로 재편하기 시작한 때라 할 것이다.

이후 해월은 수운의 시천주 신학을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 사상을 통해 인즉천(人卽天)의 명제로 이끌어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양천주(養天主)의 교의로 전개하고, 시천주의 천주를 상제로 변경하여 ‘봉사상제일편심조화정만사지(奉事上帝一片心造化定萬事知)’로 고쳐 약 1년간 사용하였다.105)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이나 의례에서 시천주 주문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절대적인 권위를 고려할 때 도통 승계 담론을 통해 해월의 종교적 권위가 수운의 카리스마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106)

Ⅴ. 나가며

동학이 근대 신종교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따라서 동학의 전개 과정에 관해서는 보다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연구될 필요가 있다. 특히 1960년대부터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전승을 담론이라고 주장하는 연구가 있었음에도 많은 연구에서 수운-해월의 도통 승계는 당연한 전제처럼 여겨졌기에 도통과 관련된 기존의 전제는 새롭게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출발한 본 연구는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전승이 1870년대 말에 등장한 새로운 해석에서 기원한 하나의 담론일 수 있음을 문헌 비교를 통해 어느 정도 입증했다. 따라서 근대 신종교에 미친 동학의 영향과 근대 신종교의 동학에 대한 관점들은 동학 도통 담론의 관점에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수운의 동학과 해월의 동학이 지니는 차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 각각의 동학과 한국 근대 신종교의 관계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토록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로 ‘참 동학’을 자처한 증산의 동학에 대한 언설을 분석해 보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증산의 동학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언설은 다음과 같다.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107) 지금까지 이 선언은 계시와 강화의 참뜻을 밝히지 못한 수운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해월의 도통전수가 천도교 전통의 담론이며 이를 부정하는 도통 담론이 존재했다고 본다면, 증산의 언설은 수운 사후의 동학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증산이 해월 시대의 동학과 동학혁명, 천도교 전통의 도통과 그 신앙체계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생존 시기가 해월, 의암의 활동 시기와 겹쳐 있고 종도 중 많은 이들이 동학, 일진회 출신이었으며 수운가사를 자유롭게 활용할 정도로 동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증산이 해월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었으며 해월의 시대에 발생한 동학혁명이나, 해월을 계승한 의암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실도108)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증산의 동학에 대한 비판을 ‘수운의 동학’을 변형한 해월과 이를 계승한 의암에 대한 비판으로, 그리고 수운이 펼친 대도의 본질이 자신의 사유와 동일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 록

<표 1>의 내용은 수운의 가계, 그리고 모친과 부인에 관한 내용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는 있고 『도원기서』에는 없는 부분으로 수운이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던 최예(崔汭, 1393~1446)의 13대손이며 모친이 청주 한씨, 부인이 밀양 박씨라는 것이다. 수운이 최예(崔汭)의 13대손으로 기록된 본은 단곡본 『수운문집』이 유일한데109) 가장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한다.

표 1. 貞武公諱震立
先生姓崔也 諱濟愚字性默 號水雲齋 慶州人也 山林公諱鋈之子也
貞武公諱震立之六孫也 司成公諱汭之十三代孫也 母韓氏籍淸州 配朴氏籍密陽
先生姓崔氏 諱濟愚字性默 號水雲齋 慶州人也 山林公諱鋈之
貞武公諱震立 六世孫也 司成公諱訥之十一代孫也 母韓氏籍淸州 配朴氏籍密陽
先生姓崔也 諱濟愚字性默號水雲齋 慶州人也 山林公諱鋈之子也
貞武公諱震立之六世孫也

水는 『수운문집』, 大는 『대선생주문집』, 道는 『도원기서』를 의미하며, 비교를 위해 임의로 공백을 두었고 차이가 나는 부분 중 주목해야 하는 내용은 구별되게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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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과 관련된 문헌 간의 정확도와 문맥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2021~22년 김용옥과 조성환 간에 벌어졌는데 『수운문집』을 제외한 두 문헌을 비교하여 상반되는 주장을 전개했다. 김용옥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수록하고 있고, 문장 구성이 엉성하다는 이유로 『대선생주문집』을 초략본, 『도원기서』를 세련본으로 주장했다. 이에 반해 조성환은 『대선생주문집』에도 부정확한 부분이 있고, 『대선생주문집』에 보다 많은 정보가 수록된 것은 오히려 수정 보완의 흔적이라는 이유로 『도원기서』를 원본, 『대선생주문집』을 수정본이라 주장했다.110) 공통적으로 두 사람은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을 수정한 것이라는 표영삼의 견해를 수용하여 <표 1>의 『수운문집』 내용에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문헌 고증의 기준을 정보의 양과 정확성에 두었기에 가장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 정보의 양도 많은 『수운문집』을 비교 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논거의 허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김용옥과 조성환은 “‘사성공 눌(訥)’의 11대 손[司成公諱訥之十一代孫也]”이라는 『대선생주문집』의 기록과 “(수운이) 진립의 6세 손 [… 震立之六世孫也]”이라는 『도원기서』의 기록을 오류라고 보고 논지를 전개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111) 즉 진립에서 수운까지 7대라는 점을 참고하여 6대가 되기 위해서는 『대선생주문집』의 해당 구절 주어를 수운의 부친인 산림공으로 보고 해석하여 “아버지 산림공은 이름을 옥이라 하는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6세 손이요, 사성공 최예(崔汭)의 11대 손이시다. [父山林公諱鋈之 貞武公諱震立六世孫也 司成公諱訥之十一代孫也]”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수운이 ‘진립의 6대손‘이며 ‘최예의 13대 손’이라는 『수운문집』 기록을 참조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즉 수운은 ‘경주 최씨’ 25세(世)로, 18세인 최진립으로부터 6대, 12세인 최예(崔汭)로부터 13대 손이다. ‘사대봉사(四代奉祀)’가 제주(祭主)로부터 4대인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를 의미했으므로 이러한 셈법으로 ‘수운 행장’도 집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수운문집』은 기준이 되는 선조로부터 몇 대(代) 후손인가를 세는 방식에 따라 수운의 가계를 기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운을 최진립의 6대손이라 보면 『대선생주문집』의 해당 문장 주어는 생략되어 있으며 수운의 부친 최옥이 아니라 수운을 지칭하는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해당 문장은 “(선생은) 부친이 산림공 최옥이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6세 손이요, 사성공 최눌의 11대 손이시다.”라고 해석된다. 문헌 기술 방식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해석이 더욱 신빙성이 크다. 원본 ‘수운 행장’이 조선 후기의 문집으로 기획, 편찬되었으므로 당연히 문집의 주인공을 기준으로 그 가계를 기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문집의 행장에서 주인공의 가계를 아버지를 기준으로 기술하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세 문헌 모두 수운에서 진립까지의 가계 기술에는 오류가 없다.

『수운문집』이 정확하게 쓰여진 앞선 문헌이라면 『대선생주문집』의 “父山林公諱鋈之”의 첫 글자인 ‘父’는 필사 과정에서 덧붙여진 글자로도 볼 수 있다. 『대선생주문집』에는 <그림 2>와 같이 “父山林公諱鋈之” 다음에 공백이 있는 필사본이 대다수이지만, 천도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선생주문집』 판본 중에는 <그림 1>처럼 공백에 ‘子’가 채워진 것이 있다는 사실로도 그 개연성이 입증된다.112) 즉 “山林公諱鋈之子”에서 父가 오기되고 그 영향으로 나중에 子가 탈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대선생주문집』을 원본이 아니라 원본을 필사한 수정본으로 보아야 ‘눌(訥)’과 ‘11대 손’이라는 『대선생주문집』의 오류 원인에 관하여서도 보다 논리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대선생주문집』을 원본으로 본다면 오류는 행장 집필자의 단순한 실수나 오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만 추측해야 하는데, 실제 1860~80년대 후반의 조선 사회에서 ‘수운 행장’의 편찬에 참여한 제자나 친척이 경주 최씨 사성공파 파조인 최예의 이름이나 수운이 최예의 13대 후손이라는 사실을 잘 몰라서 이 같은 오류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대선생주문집』의 오류는 집필자의 단순 실수나 초략본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운문집』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오탈자를 그 원인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필사체에서 ‘예(汭)’는 ‘눌(訥)’로 오인되기 쉽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그림 1>의 예(汭)와 <그림 2>의 ‘눌(訥)’을 비교하면 필사 오류의 과정을 추정할 수 있는데 『대선생주문집』 계열의 필사본이라도 어떤 본은 ‘예(汭)’로 어떤 본은 ‘눌(訥)’로 필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글자가 다양한 글자로 변이된 문헌이 더 후대의 것이기에 『대선생주문집』은 원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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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도곡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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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용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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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표 1>과 관련하여 김용옥과 조성환이 『대선생주문집』의 오류나 문맥의 문제라 지적한 부분은 『수운문집』을 필사하면서 발생한 오탈자로 인한 것으로 해석하면 논리적으로 해석된다. 『수운문집』의 해당 기록을 다른 두 문헌과 비교하여 두 사람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문헌의 선후를 판단했던 중요한 기준이었던 정보의 양이나 정확성에 있어서는 『수운문집』이 가장 많고 정확하기에 『수운문집』이 원본인 ‘수운 행장’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대선생주문집』은 『수운문집』을 필사하면서 오탈자가 발생한 판본으로, 『도원기서』는 『수운문집』의 일부 내용을 삭제한 판본으로 보아야 한다.

『도원기서』에는 수운이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던 최예(崔汭, 1393~ 1446)의 13대손이며 모친이 청주 한씨, 부인이 밀양 박씨라는 내용이 없다. 조성환은 이에 관하여 『도원기서』의 편찬자가 일부 내용을 삭제했다기보다는 『대선생주문집』이 후대에 보완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처럼 『도원기서』를 저본으로 『대선생주문집』을 편집하면서 내용을 보완 추가했을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도원기서』에 없는 부분은 조선 후기 문집의 행장에서 필수적인 가문의 파조(派祖), 모친, 부인에 대한 것이었고, 이는 편집을 주도했던 강수가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다. 강수는 수운의 친견 제자로 수운 사후 그 가족들과 밀접한 교류를 하였고, 교단의 2인자인 도차주로 『도원기서』의 편집을 책임질 정도의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집된 여러 ‘수운 행장’을 저본으로 하여 『도원기서』를 편집하면서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도원기서』에만 강수에 의한 의도적인 첨삭으로 보이는 부분이 여러 곳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도원기서』가 편집된 1879~80년은 수운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이 확립되면서 성리학을 혁신하는 신유교로서의 동학 교문(敎門)과 유교를 초월하는 무극대도로서의 동학 교단(敎團) 중에서 후자(後者)로 무게 중심이 이전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113) 즉 보국안민을 위해 유교를 혁신하는 신유교 학파로서의 동학 교문에서 유교적 세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고 이를 실행하는 도문, 즉 종교 교단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수운의 문집을 간행하려던 계획이 경전인 『동경대전』 간행으로 전환된 시기가 1880년 4월경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를 전후로 수운의 위상이 한 학파의 선생에서 교단의 교조로 명확히 전환되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환점에서 『도원기서』는 문집에 첨부될 행장이기보다는 교조의 신성한 일대기가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도원기서』가 처음에는 ‘수운문집’의 행장으로 기획되었지만, 탈고를 앞두고 문집의 형식은 의도적으로 탈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스승의 문집에 첨부될 행장이라기보다는 종교 지도자와 계승자의 행적에 방점을 두면서 편집된 『도원기서』에서 ‘경주최씨 사성공파’의 파조인 최예에 대한 기술은 사실상 불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수운을 신비화하면서 신분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재가녀(再嫁女)였던 수운의 모친에 대한 정보가 감춰지고 이와 연관되어 가족인 부인에 대한 정보도 삭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은폐를 통해 수운의 신성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라고도 해석된다.114) 이상이 『도원기서』가 전통적인 행장의 집필 방식에서 벗어난 배경일 것이다.

결국 위에서 검토된 논점들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간행한 것이고, 이를 의도적으로 수정, 가필한 것이 『수운문집』이라는 표영삼의 주장이 여러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재검토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또한 『수운문집』이 가장 정확히 조선조 행장의 틀에 맞추어 기록된 ‘수운 행장’의 필사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표 2>는 수운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술인데, 『수운문집』이 가장 정확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도원기서』만이 사광(師曠)을 사광(司曠)으로 오기(誤記)하고 있다.115) 사광을 인용한 유사한 문구가 수운의 저술에도 나타난다.116) 따라서 사광(司曠)이라 오기한 『도원기서』를 원본으로 보기는 어렵다.117)

표 2. (生)纔(至)四五歲
生纔至四五歲容貌奇異 聦明曠 山林公居常愛育 視同奇貨
纔 四五歲容貌奇異 聦明曠 山林公居常愛育 同視奇貨
生纔 四五歲容貌奇異 聦明曠 山林公居常愛育 視同奇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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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집필자의 의도가 오탈자 없이 정확히 반영된 문헌은 『수운문집』이다. 정확성을 기준으로 본다면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의 순으로 정확도가 감소하기에 이 순서로 편찬되었음을 시사한다. 『도원기서』나 『대선생주문집』의 오류는 필사 과정의 오탈자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조성환은 『도원기서』 원본설의 입장에서 『도원기서』의 오자가 『대선생주문집』에서 수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118) 하지만 『동경대전』에도 수록되어 있고, ‘사광지총(師曠之聡)’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사광에 대해 『도원기서』 편찬자인 강수가 처음부터 오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원기서』 편찬 과정에서 참조된 필사본에 이미 오기된 것을 강수가 파악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표 3>은 수운의 10세 경의 상황과 16세 시의 부친 별세를 다룬 내용이다. 『대선생주문집』만이 수운이 10세에 부친을 여위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표영삼의 주장처럼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따로 떼 『대선생주문집』을 만들었고 이를 의도적으로 첨삭한 것이 『수운문집』이라면 『수운문집』에 『대선생주문집』과 같은 오류가 발생했어야 한다. 하지만 『수운문집』에 같은 오류는 나타나지 않는다.

표 3. 稍至十歲餘
稍至十歲餘 氣骨壯肅 智局非凡 年至二八己亥之歲 山林公沒
稍至十 山林公歿
稍至十餘歲 氣骨壯肅 智局非凡 年至二八己亥之歲 山林公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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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이 열 살 때 모친이 별세하였다는 기록이 『천도교회사초고』에 있다는 점으로 본다면 『대선생주문집』이 모친의 별세를 부친의 별세로 오기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대선생주문집』을 『수운문집』과 비교하면 15자 정도의 누락이 자주 나타나기에 탈자로 보아야 한다. 『대선생주문집』의 착오가 아니라 필사 과정의 누락이다. 이 탈자로 인한 오류는 후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1910년 간행된 「본교역사」에는 수운 10세 때 부친이 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19)

김용옥은 『수운문집』에 주목하지 않았기에 『대선생주문집』이 지닌 오류를 모친 별세 기록의 오기라 보았고 『도원기서』의 기록을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레토릭을 활용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성환은 여러 근거를 동원해서 그 허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논쟁은 『수운문집』을 원본으로 보면 간단하게 해소된다. 앞서 지적한 대로 『대선생주문집』은 『도원기서』보다는 『수운문집』과 유사하다. 하지만 사실관계나 문맥의 문제가 발생하는 곳을 『수운문집』과 비교하면 오탈자나 문구의 누락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도원기서』의 경우도 유교적 사유나 체제 순응적 기술이 이루어진 곳과 해월의 도통전수와 관련된 기사를 제외한다면 많은 부분에서 『수운문집』과 유사하다. <표 3>에서 세 문헌이 보이는 차이는 이에 포괄된다.

<표 4>는 수운이 20대 초반에 지녔던 사유를 기술한 것인데 그 차이가 문헌의 고증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세 가지 차이점을 중심으로 문헌의 기술 방식이나 정확성을 평가한다면 다음과 같다.

표 4. 而察(其各)理之凡術
而察 理之凡術 則必是欺世誤人之理 故一笑唾棄又爲反武
而察其各理之凡術 必是欺人誤世之理 故一笑打棄又爲反武
而察其各理之凡術 則必是明世誤人之理 故一笑打棄又爲返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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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주목할 부분은 ‘察(其各)理之凡術’ 부분이다. 『수운문집』에만 ‘기각(其各)’이 없는데 누락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운문집』은 ‘이치를 살피는 범술이 반드시 세상을 속이고 사람을 그르치는 이치라 여겨 일소에 부쳐’의 뜻이고,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모든 이치의 범술을 살핀즉슨 반드시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그르치는 이치라 여겨 일소에 부쳐’로 해석되어, 누락이라기보다는 중요한 의미 차이를 보인다. 즉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각각의 리가 지닌 범술[各理之凡術]’은 유(儒)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수운문집』의 ‘이치를 살피는 범술 [察理之凡術]’은 유(儒)를 포함하지 않는 표현이다.

세 문헌 외에 유사 기록 중 가장 이른 것은 1920년의 『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인데, 역시 『수운문집』과 유사하다.120) 『천도교회사초고』는 ‘뜻을 선도(禪道)와 역수(易數)에 두었으나’로 되어있고121), 『천도교서』는 ‘일찍 선도와 점(占)과 역수에 뜻을 두시다가 작다고 하여 하지 아니 하시고’이다.122) 이 두 문헌에서는 다른 기록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교나 기독교가 나타나지 않는다.123) 『수운문집』의 기록이 탈자에 따른 오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조에서 왕명으로 사사된 이들에 대한 행장의 집필 방향은 기본적으로 유교적 질서 안에서 그 억울함을 신원(伸冤)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교를 포함하는 모든 이치인 ‘각리(各理)’를 수운이 부정했다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 보다는, 선도와 역수 등을 수운이 부정했다는 『수운문집』의 ‘이치를 살피는 범술 [察理之凡術]’이라는 표현이 보다 앞선 기술 방식이다. 수운의 행장이 집필된 시기에 관과 유생들의 동학 탄압이 엄중했던 상황에 더하여 수운을 신원하려는 행장 집필 동기를 고려한다면 유학에 대한 비판적인 표현은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운이 유교를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이를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수운의 유교 비판은 사상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이끌어가는 지도적 기능을 상실한 부분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유교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교적 세계와 결별한 1870년대 후반 이후의 동학 사유체계에서 수운의 언설을 바라본 결과일 뿐이다. 수운 당대 그의 사유체계가 유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저술한 경전을 통해 분석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124)

두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도원기서』의 ‘明世誤人之理’부분이다.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을 그르치는 이치’라는 뜻인데 글의 맥락에 따른다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欺世(人)誤人(世)之理’, 즉 ‘세상(사람)을 속이고 사람(세상)을 그르치는 이치’가 더욱 적절하다.125) 『수운문집』은 ‘欺世誤人’이지만 상주동학교당 필사본은 ‘明世誤人’으로 되어 있음으로 본다면 『도원기서』의 표기도 필사과정의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126)

세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서 사용된 ‘타기(打棄)’와 『수운문집』의 ‘타기(唾棄)’이다. ‘타기(打棄)’는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구타하고 유기한다’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지만 ‘타기(唾棄)’는 ‘혐오한다’, ‘더럽게 생각하여 돌아보지 않고 버린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관용어이다.127) 따라서 글의 맥락으로 본다면 『수운문집』이 올바르게 사용된 것이다. 이상 세 가지 점으로 본다면 『수운문집』이 가장 집필자의 의도를 잘 보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운문집』이 ‘수운 행장’ 원본에 가장 근접한 문헌임을 의미한다.

<표 5>는 경주로 몰래 돌아온 수운을 제자들이 찾아가고 담화를 나눴다는 기사다. 『대선생주문집』이 『수운문집』과 전체적 유사도가 높지만, 해월 관련 일화에서만큼은 『도원기서』와 높은 유사도를 보이는데, <표 5>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표 5. 是歲(料外)三月
是歲三月新寧人河致旭問於朴夏善曰或知先生之居處乎 答曰昨夜夢與朴大汝共見先生今欲往拜也
二人偕行路遇崔慶翔料外訪到 先生 曰君等或聞而來耶  生等何以知之 自有欲來之志
故來之矣 先生笑曰 君可眞然而來耶 吾知夏善之來也
慶翔問曰 生等其間所工不實 然有如此之異    以油半鍾子達夜
二十一日其故何也 先生曰 此則造化之大驗 君等心獨喜自負也
自此以後  四方賢士 日以稍益 不勝堪當也
料外三月
崔慶翔忽然訪到 先生問曰 或聞而來耶 慶翔答 何 知之 自有欲來之志
故來之矣 先生笑曰 君可眞然 來耶 曰然也
慶翔問曰 其 所工不實 然有如此之異 何爲其然也 先生曰且言之 慶翔跪告曰 以油半鍾子達夜
二十一日其故何也 先生曰 此則造化之大驗 獨喜自負 慶翔又問曰 自後布德乎 曰布德也
自慶翔之來後 四方賢士 日以稍益 不勝堪當也
料外三月
崔慶翔忽爲訪到 先生問曰 或聞而來耶 慶翔答 何 知之 自有欲來之志
故來之矣 先生笑曰 君可眞然而來耶 曰然也
慶翔問曰 其間所工不實 然有如此之異 何爲其然也先生曰且言之 慶翔跪告曰 以油半鍾子達夜
二十一日其故何也 先生曰 此則造化之大驗 心獨喜自負也 慶翔又問曰 自後布德乎 曰布德也
自慶翔之來後 四方賢士 日以稍益 不勝堪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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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생주문집』이 다른 부분에서 『도원기서』와 많은 차이를 보이면서도, <표 5>와 같이 해월이나 도통 전수 관련 부분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은 『대선생주문집』이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을 저본으로 편집되었지만, 해월 관련 기록에 있어서의 편찬 방향은 『도원기서』와 같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위 기사에 따르면 1862년 3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해월이 홀연히 박대여의 집으로 수운을 찾아왔다고 하였고, 『수운문집』은 해월이 박하선, 하치욱 등과 같이 찾아왔다는 하였다. 이 차이는 해월의 도통 계승과 관계된 논쟁으로 이어졌다. 박맹수는 『도원기서』가 해월의 역할을 강조하는 해월 중심의 기술이라는 주장이고, 표영삼은 『수운문집』이 박하선을 내세우기 위한 가필이라 주장한 것이다.128)

박하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표 5>와 같은 일화가 『수운문집』에 다소 기록되었기에 표영삼은 1985년에는 『수운문집』을 1865년경 박하선이 집필한 것으로 추측했다고 보인다.129) 하지만 2000년대에 이르러서 표영삼은 기존 주장을 철회하면서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의 해월 관련 기사를 수정 편집한 것이며, 그 편집 의도가 박하선을 내세워 해월의 도통 전수를 부정함으로써 남접을 정당화하기 위한 데에 있다고 주장하였다.130)

표영삼이 『수운문집』의 조작 근거로 제시한 “나는 박하선이 올 것을 알았다. [吾知夏善之來也]”라는 부분을 박하선을 내세우기 위한 가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구절은 수운이 박하선이 올 것을 미리 알았던 이유가 박하선의 꿈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해월보다 박하선을 더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다는 박하선이 체험한 수운의 신성성에 대한 일화이기 때문이다.

표영삼은 『수운문집』이 1880년 이후 남접의 정통성을 주장하던 이들에 의해 조작된 문헌이라 주장했지만, 1880년 이후 박하선이나 그와 관련된 동학도들의 활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 박하선은 경주 북쪽의 영해 접주여서 지역적으로 북접 소속이었고 1869년경 박해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그의 아들 삼 형제도 수운의 신원을 위해 해월이 참여했던 영해 민란에 관련되어 1871년 모두 체포되어 죽었다.131) 따라서 박하선은 남접과 관련된 바가 전혀 없었고, 남접을 계승했다던 이들과 박하선이 관련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된 적도 없다. 남접을 주장하면서 『수운문집』을 조작한 배후라고 표영삼이 지목한 김주희(1860~1944)는 『수운문집』의 필사 시기 이후에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박하선과의 관련성은 전혀 없다.132) 또한 김주희의 ‘동학본부(상주동학교)’는 방대한 간행 사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수운문집』을 간행하거나 활용한 바가 없다.

오히려 『수운문집』은 여러 제자가 함께 있었던 일화에서는 해월의 도통전수로 해석될 수 있는 기록을 배제하지 않았다.133) 단지 해월과 수운만이 알 수 있는 일화가 기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만 『대선생주문집』이나 『도원기서』와 다르다. 만약 표영삼의 주장처럼 『대선생주문집』에서 해월 관련 일화를 조작하거나 삭제하여 『수운문집』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수운을 찾은 여러 제자 중 해월이 가장 부각되는 상황을 상세히 묘사한 <표 5>의 기사는 『수운문집』에서 배제되었어야 한다.

이 일화에서 추가로 주목할 부분은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서도 해월이 수운을 홀연히 찾아왔다고 할 뿐, 해월 홀로 왔다고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해월이 홀로 수운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1900년을 전후로 하여 편찬된 문헌인 『대선생사적』의 「해월선생문집」에도 나타난다. 이 문헌에는 해월이 박대여의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백사길이 급히 와서 해월을 불러세우고 어디로 가는지를 묻자, 해월이 “선생(수운)이 박대여의 집에 좌정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라고 하고 이에 백사길이 자신이 “먼저 가겠다.”라고 하자 해월이 “앞뒤의 차이는 없다”라고 답하는 내용이 있다.134) 해월이 영감을 느끼고 수운을 찾아가는 도중에 박하선이나 하치욱이 아니라 백사길을 만났으며, 백사길도 수운에게 갔음을 보여주는 이 일화는 해월이 홀로 수운에게 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박하선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인지, 해월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어느 한쪽이 사실관계를 조작했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135) 『도원기서』 원본과 1908년 필사본 간의 차이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원본에서는 ‘요외삼월(料外三月)’이지만 필사본에서는 ‘요외시세삼월(料外是歲三月)’이다.136) 필사본은 『수운문집』의 표현을 따르고 있는데 이 부분은 필사자인 김세인이 수정에 참고한 문헌이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수운과 해월이 박대여의 집에서 나눈 대화도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수운과 해월의 일대일 대면으로 기록되어 있어 해월을 부각하는 기록임을 알 수 있다.137) 『수운문집』도 해월이 수운과의 대화에서 중심 화자로 나타나 있어 해월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잘 보여준다. 만약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면 해월을 중심 화자로 내세우지 않고 기술했어야 한다. 이는 『수운문집』이 해월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의도 아래 첨삭된 문헌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대화에서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는 『수운문집』에 비해 ‘선생이 그것에 대해 말하라 하시니 경상이 꿇어앉아 고하기를[先生曰且言之 慶翔跪告曰]’이라는 표현이 더 들어가 있다.138) 이로 인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의 경우 하나로 연결해도 되는 해월의 질문이 둘로 분리되어 의미상 중복되는 문맥이 나타난다. “어찌 그러합니까? [何爲其然也]”와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其故何也]”는 의미상 중복되는 표현이다. 여기서 수운에 대한 해월의 존경과 예를 강조하면서 해월이 체험한 이적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또한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는 『수운문집』에 없는 “경상이 또 묻기를 ‘이후 포덕을 하오리까?’ 여쭈니 ‘포덕하라’고 하셨다. [慶翔又問曰 自後布德乎 曰布德也]”라는 대화가 추가되어 있다. 이는 해월이 포덕을 허락받은 후 해월에 의해 사방의 현사(賢士)가 입도했다는 기사를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교세의 확장이 해월의 포덕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해월을 부각하는 기술 방식이다. 이에 비해 『수운문집』은 수운이 먼 곳(전라도)에 있었음에도 그 권능에 의해 제자가 조화를 체험하였다는 것을 시사하여 이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포덕이 된 것이 수운의 권능임을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선생사적』에는 해월이 당시 ‘도수사’와 ‘권학가’ 2권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으며 해월이 포덕을 허락받았다는 기사는 없고 “1862년 6월에 해월이 포덕의 뜻이 있어 포덕을 시작하였다.”라고 되어 있다.139) 결국 『수운문집』의 기록은 해월 중심의 기록인 『대선생사적』과 비교해도 삭제라고 보기 어렵다.

『수운문집』은 수운이 먼 지방에 있었음에도 제자가 조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을 부각한 반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은 해월이 조화를 체험하였고 그에 의해 교단의 교세가 급속도로 커졌음을 암시하여 동일 사건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운문집』은 오롯이 수운에 집중하여 해당 사건을 기술하였다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은 수운을 통해 해월의 정통성과 공로를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분석은 『수운문집』이 해월의 도통 승계가 동학 내에서 수용되고 확립되기 전에 편찬된 원본 ‘수운 행장’의 필사본이며,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해월의 도통 승계를 확립하기 위해 원본 ‘수운 행장’이나 그 필사본을 해월 중심으로 수정 편집한 것임을 시사한다. 『수운문집』이 1860년대 동학의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표 6>은 해월이 수운과 그 가족을 위해 물품을 마련한 기사로, 『수운문집』에는 해월과 여러 도인이 이불 한 채와 옷 한 벌을 지어 수운에게 올리고, 부서접(府西接)에서 수운의 가족들이 먹을 미육(米肉)과 금전을 구하여 수운의 본가로 보냈다는 기사가 있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는 모두 해월이 홀로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표 6. 是時 慶翔(與諸道人)
是時 慶翔與諸道人 衾一件上下衣 裁納于先生 先生曰 接內多貧寒 何爲竭力乎
先生 又曰 吾家之妻子所食乏艱  可爲救急之計耶  府西接中卽備米肉與錢四五十金竝
先生內書而付送本家
是時 慶翔  衾一件上下衣 裁納于先生 先生曰 素貧寒 何爲竭力
先生情話曰 吾  妻子所食之艱 君何 救急之計耶  慶翔 卽 米肉與錢四五金竝納
先生內書而付送本家
是時 慶翔   衾一件上下衣 裁納于先生 先生曰 素貧寒 何爲竭力乎
先生情言曰 吾家之妻子所食乏艱 君可救急之計耶  慶翔  卽備米肉與錢四五十金竝
先生內書而付送本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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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월의 경제적 상황이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기록처럼 해월이 단독으로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140) 오히려 『수운문집』에 기록된 내용의 개연성이 높다. 해월의 정통성과 신성성에 입각한 문헌인 『대선생사적』에서도 해월과 수삼(數三) 인이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수운문집』의 기록과 일치한다.141) 또한 『대선생사적』에서는 해월의 주선하에 접조직이 나서서 수운 가족의 생계를 해결했다는 『수운문집』의 기록과 유사한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142) 이는 해월이 몇몇 도인들과 함께하거나 해월의 주선하에 접조직이 나서서 물품을 마련했다는 『수운문집』의 내용이 더 정확한 기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수운문집』은 1862년 11월, 접이 접주 임명 이전에 구축되어 있었고 교인들이 접을 매개체로 활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의 연원조직과 같은 속인제 조직의 경우 책임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기 전에 조직이 먼저 구성되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준다.143) ‘접내 다수가 빈한(貧寒)한데’라는 말에서 접이 의미하는 것은 해월을 연원으로 하는 인맥 조직이며 해월과 함께 수운을 찾아간 여러 도인은 해월 휘하의 교인이라고 볼 수 있기에 연원을 중심으로 한 인적 계보 조직인 접이 동학 종교활동의 구심점이었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수운문집』은 이 기사 이후 일관되게 동학의 공식 조직인 접을 중심으로 교단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어, 해월을 중심으로 교단사를 기술하고 있는 『도원기서』의 편집 방향과 확연히 대비된다. 『수운문집』이 수운의 행적을 해월이 아니라 여러 접을 매개로 하여 기술한 사실은 『수운문집』이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교단 내에 확립되기 시작하기 이전에 편찬된 것임을 시사한다.

<표 7>은 1863년 7~8월에 관한 기사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유사하지만 『도원기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표 7>에 나타나는 차이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전에 연구된 바는 없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표 7. 八月(日)全時晄來謁
八月日全時晄來謁 先生授額字二十二餘張中特贈利行二字曰以表遠來之情 餘二十張分賜
鑄銅接 又 興比歌一章特賜曰此歌亦好誦之思之 時晄曉明接中以相從 則此亦工夫愼勿馬上
相從也云云 先生卒爲發文罷接 其時會集者 僅爲四五十人也
八月 全時晄來謁 先生授額字二十二 張中特贈利行二字曰以表遠來之情 餘二十張分賜
鑄銅接 又作興比歌一章特賜曰此歌亦好誦之思之 曉明接中以相從 則 亦工夫愼勿馬山
相從也云云 先生猝爲發文罷接 定于七月二十三日 其時會集者 近爲四十五
先生卒爲發文罷接 定于七月二十三日 其時會集者 僅爲四五十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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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문집』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8월 어느 날 전시황이 와서 뵈니 선생께서는 액자를 주시되 스물두어 장 가운데 특히 이행(利行) 두 글자를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멀리서 온 데 대한 정을 표시하노라.’ 하셨다. 나머지 스무 장은 주동접에 나누어 하사하셨다. 또 「흥비가」의 한 장(章)을 특별히 내려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노래 역시 외우고 생각하면 좋은 것이니 시황이 접중을 분명히 일깨워 상종하면 또한 공부라, 신중히 하여 말(馬) 위에서 상종하듯 하지 말라’고 하셨다.144)

이 기사에는 전시황이라는 인물과 주동접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본교역사」(1910)와 『천도교회사초고』(1920)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전황(全晄)과 김광응(金廣應)과 관련된 기록이다. 전황, 김광응은 내용상 중요한 친견 제자임에도 해당 문헌의 일화 외의 다른 어떠한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이 오기로 인해 나타난 허수의 인물이기 때문이다.145) 필사 과정에서 전시황은 전황(全晄) 또는 김광응(金廣應)으로 오기되었지만, 해당 일화는 1920년까지 전승되고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운문집』과 다른 문헌의 비교를 통해서만 오류가 드러난다는 사실은 『수운문집』이 기준이 되는 문헌임을 잘 보여준다.

전시황은 실존 인물이었기에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 이 기사를 의도적으로 가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전시황은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는 수운의 친견 제자로, 『도원기서』에서는 『동경대전』 편찬 시의 도차주였던 강수와 같이 해월 다음의 지위를 지닌 감역으로 기록되어 있다.146) 그런데도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에는 전시황 관련 기록이 없다. 전시황이라는 이름은 『도원기서』에는 경진년(1880) 1월에 처음 나타나고, 해월이 쓴 인제판 『동경대전』 간행 시의 ‘별록(別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147) 즉 1880년 1월, 해월은 도차주 강시원(강수)과 전시황을 대동하여 인제접으로 가서 인등제를 베풀었고, 이후 동경대전 각판의 감역으로 강수와 전시황을 임명하였다. ‘별록’에 따르면 해월은 당시 도차주인 강수와 더불어 전시황의 이름을 직접 거명한다.148) 『도원기서』에서 1880년 이전에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이가 수운 문집 간행 과정에서 갑자기 등장하여 교단의 이인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전시황이 1880년에 수운의 친견 제자 자격으로 『동경대전』 간행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고 반드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시황이 『도원기서』의 편집을 주도했던 강수와 같이 『동경대전』 편찬 작업의 감독인 감역(監役)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149)

<표 7>을 보면, 『도원기서』에는 해월도 중요한 친견 제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전시황뿐만 아니라 그의 접인 주동접의 기록까지 누락되어 있다. 이처럼 『대선생주문집』과 『수운문집』이 수록한 전시황과 주동접의 기록을 『도원기서』만이 누락시킨 이유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동경대전』 편집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지만,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제자들의 기록을 『도원기서』의 편찬자인 강수가 삭제했을 가능성이다.

둘째, 친견 제자 관련 기사의 경우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거나 모순점이 있다고 판단해 삭제했을 가능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도원기서』에는 수운이 파접한 이후 해월을 제외한 친견 제자나 해월 휘하 접이었던 영덕 접 등과 관련되지 않은 기사 대부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운문집』에서 해월이 다른 제자와 함께 등장하는 일화들을 『도원기서』는 모두 해월을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해월 홀로 수운과 대면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는 파접의 의미에 대한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조선 시대에 ‘접(接)’은 ‘문사들이 글을 짓거나 책을 읽는 모임’ 또는 ‘학생들의 학기’를 의미했지만, 해월은 1878년 이를 문사의 개접이 아니라 ‘천지의 이치에 맞추어 하늘의 운을 받고 하늘의 명을 받아 도(道)를 강(講)하는 것’으로 선언하였다.150) 따라서 해월의 도통전수를 인정했던 교인에게는 파접 후에 다른 제자들이 도통 계승자인 해월을 통하지 않고 수운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 것이 공식적인 일이 될 수 없었다.151) 그에 따라 『도원기서』를 편집한 강수도 1863년 8월 이후에 있었던 친견 제자와 수운의 일화를 대부분 비공식적인 일로 보고 삭제했을 개연성이 크다.

셋째, 그 위상이 해월에 버금갈 정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인물의 기사가 『도원기서』 편집 시에 일괄 누락되었을 가능성이다. <표 7>의 내용처럼 수운이 전시황과 그의 접에 22장의 액자를 모두 주고, 「흥비가」를 처음 공개하면서 한 장(章)까지 하사하고 이것으로 접의 교인들을 가르치라는 명을 내렸다면, 다른 제자나 접주의 입장에서는 일견 파격적이다. 따라서 수운의 전시황에 대한 대우로 인해 관련 기사는 해월 추종자들에 의해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도원기서』와 달리 파접 이후 수운과 친견 제자 간의 일화가 『대선생주문집』에 남아있는 이유로는 세 가지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1878년 7월의 ‘개접(開接)’의 의의에 대한 해월의 선언 이전에 『대선생주문집』이 편집되었을 가능성이다. 둘째, 해월을 통해야만 수운을 만날 수 있었다는 도통전수 담론이 교단 내에 확산하기 전에 『대선생주문집』이 편집되었을 가능성이다. 셋째, ‘파접’ 시점을 특정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모순점을 충실히 검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실제로 『대선생주문집』에는 7월 23일에 파접했다는 기사가 8월에 수운이 전시황을 만난 기사 이후 기록되어 있어 파접 시점이 후에 추가되어 사건 순서가 역전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도원기서』에서는 파접 시점을 특정하면서도 전시황의 일화를 배제하여 시간 역전을 피했고 파접과 관련된 교리적 모순도 없앴다.

한편, 『수운문집』만은 파접 시점을 특정하지 않고 있는데, 유일하게 파접 시점을 특정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이 문헌의 신빙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도원기서』 이후의 문헌인 『대선생사적』, 「본교역사」, 『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 『시천교종역사』, 『시천교역사』 등에서도 파접 시점이 특정되지 않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152) 특히 『도원기서』를 토대로 편찬된 것이 명확한 『시천교종역사』조차 7월 23일을 파접일로 기록하지 않았다. 『수운문집』이 파접 시점을 특정하지 않은 것은 예외적인 일이 아닌 것이다.

20세기 초의 일부 문헌에 파접 시점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파접이 해월의 도통 확립 이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 또는 ‘북접주인’ 임명의 의의를 드러내는 일화로 새롭게 조명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수운 부재 시에 교단을 총괄하는 이인자 임명이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수운이 공식적인 활동과 가르침을 폐지할 수밖에 없는 파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접 시점은 해월의 도통 계승이 교단에 수용되기 시작했던 1875년 이후에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고 1878년 해월이 개접을 선언하면서 중요한 사건으로 해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월의 도통 계승을 명확히 하는 문헌인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 『대선생사적』이 모두 후계자 임명으로 해석된 ‘주인’, ‘북도중주인’, ‘북접주인’과 파접을 관련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 문헌들이 모두 교단 내에서 해월의 도통 계승이 확립된 후에 편집되었음을 시사한다.

『수운문집』에서 파접은 8월 초부터 8월 13일 사이의 일이며 후계자 임명과 관련 없는 사건이다. 파접은 수운이 박해로부터 자신과 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 중단을 선언하는 대외적 조치로만 암시될 뿐이다. 『수운문집』의 편집자는 파접을 『대선생주문집』이나 『도원기서』의 편집자와는 다르게 인식했다. 그리고 이는 수운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고 후계자를 미리 임명하였다는 담론이나, 천명에 따라 ‘도를 강론’한다는 해월의 ‘개접’ 해석이 교단 내에서 확립되기 전에 『수운문집』이 저술되었음을 알려준다.

해월의 개접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가 커질수록 수운의 파접이 지니는 의미도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해월이 새로운 의미의 개접을 선언한 1878년 7월 이후 편집된 『도원기서』가 파접과 해월로의 도통전수라는 사건의 맥락과는 모순되어 보이는 일화를 대부분 수록하지 않은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더하여 『도원기서』는 파접과 해월의 ‘북도중주인’ 임명을 기점으로 서술의 중심을 명확하게 수운에서 해월로 옮기고 있다. 이는 이후 『도원기서』가 해월을 주인으로 기술했다는 것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도원기서』에 없는 파접 이후의 수운과 여러 친견 제자의 만남이 『수운문집』이나 『대선생주문집』에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도원기서』보다 앞선 문헌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표 7>에는 문헌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차이도 나타난다. 「흥비가」와 관련된 것인데, 『수운문집』은 “또 「흥비가」 일 장을 특사하였다. [又興比歌一章特賜]”고 하여 이미 흥비가가 저술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대선생주문집』은 “「흥비가」 일장을 지어 특사하였다. [又作興比歌一章特賜]”고 하여 이때 저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대선생주문집』에는 이후에 수운이 ‘8월 13일 「흥비가」를 지었다’는 내용이 또 있다는 것이다. 『대선생주문집』에 따르면 수운은 「흥비가」를 두 차례에 걸쳐 지은 후 전시황과 해월에게 각각 주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오기에 따른 내용상의 모순으로 보이므로 『대선생주문집』을 원본으로 보기는 어렵다.153)

<표 8>은 해월의 (북도중) 주인 임명, 즉 도통 계승과 관련된 기사이다.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유사한데, 각각 해월을 ‘주인(主人)’과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특정한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그에 비해 『수운문집』에는 해당 기사가 아예 없다.

표 8. 慶翔適來久與相談特定(北道中)主人
慶翔適來久與相話特定 主人 先生親爲歎息 而如有怒色 更爲下氣怡聲曰 眞可謂成功者去也
此運想必爲君而出也 自此以后 愼爲干涉俾無爲我之訓也 慶翔對曰 何若是有此訓也
先生曰 此則運也 吾於運何 誠君當明心不忘 慶翔又對曰 先生之敎言於生過矣
先生笑曰 事則然也 勿煩勿疑云云
慶翔適來久與相談特定北道中主人先生親爲歎息 而如有怒色 更爲下氣怡聲曰 眞所謂成功者去也
此運想必爲君以出也 自此以後 道事愼爲干涉俾無違我之訓也 慶翔對曰 先生何若是有此訓乎
先生曰 此則運也 吾於運何也 君當銘心不忘也 慶翔又對曰 先生之敎言於生過矣
先生笑曰 事則然也 勿煩勿疑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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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생주문집』의 내용에 대해 김상기는 ‘대도주의 공직 임명이 7월에 선행되고 심법 전수가 8월에 후행되었다는 것이 선후가 엇갈린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54) 박맹수는 1862년 12월 29일의 접주 임명에서 빠진 해월이 1863년 7월에 접주보다 상위직인 ‘북도중주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 비상식적이라고 주장했다. 『도원기서』의 기록은 ‘해월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비약’이라는 입장이다.155) 이에 반해 표영삼은 『수운문집』의 편찬자가 해월의 역할을 약화하기 위해 이 기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주장했다.156)

『수운문집』은 일관되게 해월이 홀로 수운을 대면한 일화를 수록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수운문집』에 <표 8>의 기사가 없는 것은 편찬자가 그 일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지 의도적 삭제라고 볼 수 없다. 실제 해당 기사를 사실로 가정하고 그 상황을 보더라도 당시 수운과 해월 두 사람만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수운문집』이 1860년대 후반, 친견 제자 중 해월 휘하의 인물이 아닌 이가 집필한 ‘수운 행장’의 필사본이라면 해월의 기억에만 있었던 해당 일화가 『수운문집』에 기록되지 않는 것이 논리적이다.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기술에 따르더라도 수운이 해월을 ‘주인’이나 ‘북도중주인’으로 인정한 일은 비공식적이며 비공개적인 일이었다. 이는 1875년까지 해월이 교단 내에서 ‘주인’의 위상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는 『도원기서』의 해월 관련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따라서 ‘주인’이나 ‘북도중주인’과 관련된 일화가 실제 있었더라도 1875년 이후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성립될 즈음에 공표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해석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대선생주문집』의 ‘주인’과 『도원기서』의 ‘북도중주인’이라는 차이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발췌하여 간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주인’은 수운의 계승자를, ‘북도중주인’은 특정 지역의 여러 접을 아우르는 책임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57) 『도원기서』가 <표 8> 이후에는 해월을 주인(主人), 도주인(道主人), 도주(道主), 도포덕주(道布德主) 등으로 지칭하면서도 이 기사에서만 ‘북도중주인’이라고 한 것은 이례적이다.158) 오히려 『대선생주문집』의 ‘주인’이라는 표현이 『도원기서』의 전체적인 기술 방식과 일치한다. 『도원기서』의 <표 8> 부분에서만 ‘주인’을 ‘북도중주인’이라고 수정했다고 보아야 논리적이다.159) 이는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에 해월을 ‘북도중주인’이 아니라 ‘주인’으로 기술한 부분이 나타난다는 사실로도 방증된다.160)

‘주인’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본다면 『대선생주문집』은 『도원기서』보다 이른 1875년~1877년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선생주문집』의 ‘주인’과 가장 일치도가 높은 ‘도주인’이라는 지위를 해월이 공식 사용한 시기를 『도원기서』에서는 1875년 10월 이후로 기록하고 있고, 1877년 11월 이후에는 ‘도포덕주(道布德主)’라는 지위를 사용했기 때문이다.161)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맥락에서 보면 수운은 다른 제자가 없는 자리에서 해월을 교단의 중요 간부로 임명하고, 교단의 일에 관여하라고 명령하였다. 교단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비공식, 비공개적으로 선정하는 것은 교단의 분열을 초래하는 위험하고 낯선 방식이다. 이것은 『도원기서』보다 후대인 1900년 전후로 집필된 『대선생사적』의 해당 기사와 비교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교단 이인자인 북접 주인의 임명은 파접 전 1863년 4월 공식적,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162) 『도원기서』가 해월의 직접적인 기억을 반영하였으므로 『대선생사적』의 기록이 부정확하다고 볼 수 있지만, 후계자의 권위가 구축되어 교단이 통합되기 위해서는 그 임명이 공식적이며 공개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대선생사적』은 잘 보여준다.

<표 9>는 1863년 8월에 해월이 수운을 면담한 내용으로, 도통 전수와 관련하여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사이다. 세 문헌에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수운문집』이 다른 두 문헌과는 차이가 크다.

표 9. 八月(十三日)
八月十三日 作咏霄歌興比 無聊之際 夏善與慶翔等六七人適至 先生喜問曰 節日
不遠 君等何以急來 對曰 先生獨過節日 故倍以同過之意 竟爲來之 先生益有喜色
八月十三日 作興比無所傳之際 慶翔 適至 先生喜問曰 節日
不遠 君 何 急來 慶翔對曰 先生獨過節日 故倍以同過之意 竟爲來之
八月作(咏霄歌)興比歌十三日 慶翔料外 適至 先生喜問曰 節日
不遠 君 何 急來 慶翔對曰 先生獨過節日 故陪而同過之意 竟爲來之 先生益有喜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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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차이는 「흥비가」 부분에서 발생한다. 『수운문집』에서는 수운이 「흥비가」를 노래할 때 여러 제자가 왔다고 기록한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에서는 수운이 「흥비가」를 지었는데 전해 줄 사람이 없었던 바로 그때 해월이 찾아왔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도원기서』도 『대선생주문집』과 유사하게 해월이 혼자 온 것으로 기록한다.

<표 7>을 보면 『대선생주문집』은 이미 수운이 「흥비가」를 지어 전시황에게 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표 9>에서 다시 「흥비가」를 지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오탈자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 근거는 1908년에 김세인의 필사본 『도원기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필사본에는 본문 옆에 작은 글씨로 ‘영소가(咏霄歌)’라고 부기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원본 『도원기서』를 교감하면 해당 내용은 ‘작영소가흥비가(作咏霄歌興比歌)’가 되어, 『수운문집』의 ‘작영소가흥비(作咏霄歌興比)’와 거의 일치한다.163) 다만, 문제는 ‘작영소가흥비가(作咏霄歌興比歌)’를 ‘영소가와 흥비가를 지었다’로 읽을지, 아니면 ‘영소를 짓고 흥비가를 읊었다’로 읽을지에 따라 흥비가가 지어진 시점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영소’는 계미(1883년) 목천판 『동경대전』에서 ‘영소(詠霄)’라고 되어 있지만, 경진(1880년) 인제판에서 ‘영소(咏霄)’로 표기되고 있어, 『수운문집』의 표기는 후자와 일치한다.164) 『수운문집』에 기록된 ‘영소(咏霄)’의 한문표기는 『수운문집』이 최초의 『동경대전』과 가장 근접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경진(1880년) 인제판 『동경대전』에 ‘논학문’이 『수운문집』과 동일하게 ‘동학론’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165) 가장 앞선 기록과 일치하면서도 오탈자로 인한 내용상의 모순이 없는 『수운문집』을 후대의 가필로 보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작영소가흥비가(作咏霄歌興比歌)’는 『수운문집』처럼 ‘영소를 짓고 흥비가를 읊었다. [作咏霄歌興比]’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필사 과정에서 ‘영소가와 흥비가를 지었다’로 오기되고 ‘영소가’가 누락되면서 『대선생주문집』이나 원본 『도원기서』처럼 ‘작흥비가(作興比歌)’로 되었다고 보면 설명이 된다.

두 번째 차이는 『수운문집』이 당시 수운을 찾은 제자들이 해월과 박하선을 포함하여 6~7인이라고 한 데 반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해월이 홀로 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선생사적』의 다음 기록을 보면, 『수운문집』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는 점이 입증된다.

8월 13일 선생(해월)이 예닐곱 선비들과 함께 배알하러 가니 대선생(수운)이 “추석이 가까이 오는데 무슨 연고로 왔는가?”라고 하자 선생이 말하길 “모시고 추석을 지내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선생이 기쁜 기색을 띠었다.166)

『대선생사적』은 해월의 신성성을 전제로 하여 기술된 문헌이다. 그럼에도 『수운문집』과 동일하게 6~7명이 함께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월의 역할을 약화하기 위해 『수운문집』이 가필되었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표 10>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도원기서』에도 8월 14일에 여러 제자가 수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어, 8월 13일 여러 제자가 수운을 찾았다는 『수운문집』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표 10. 十四日
十四日夜 秋聲入樹月色滿堦 先生與群弟 或論或誦之際 咏處士之歌 松菊如帶栗里之淸風
誦飛仙之句 老鶴來弄赤壁之舟月 如此之際 先生默念良久 呼群弟君等可爲歛膝平坐
諸人應其言坐之 先生謂曰 君等手足任意屈伸也 群弟子卒不對言精神如有如無而身不可屈伸
先生見笑而 體身慕仰謂曰 何 如是耶 聞其言則皆屈伸 先生曰 之身與手足前何不伸
今爲伸之何也 對曰 莫知其端也 先生曰 此則造化之大驗也 何患後世之亂也 愼哉愼哉
先生默念良久 呼慶翔 可爲斂膝平坐
慶翔應其言坐之 先生謂曰 之手足任意屈伸 慶翔 卒不對言精神如有如無 身不可屈伸
先生曰 之 手足前何不伸
今爲伸之何也 慶翔對曰 莫知其端也 先生曰 此則造化之大驗也 何患後世之亂也 愼哉愼哉
十四日三更
先生默念良久 呼慶翔曰 可爲歛膝平坐
慶翔應其言坐之 先生謂曰 之手足任爲屈伸也 慶翔 卒不對言精神如有如無身不可屈伸
先生見而笑之體身慕仰謂曰 何爲如是也 聞其言卽爲屈伸 先生曰 之身與手足前何不伸
今何伸之何也 慶翔對曰 莫知其端也 先生曰 此則造化之大 也 何患後世之亂乎 愼哉愼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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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의 수운과 해월의 만남은 『수운문집』에서는 6~7인의 제자가 함께 추석 절일을 보내기 위해 수운을 찾은 일에 따른 부수적 사건이지만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에서는 도통 전수를 앞두고 해월이 운명적으로 수운을 찾은 것이다. 『수운문집』의 기사가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에서는 해월의 도통 전수 사건으로 해석되어 수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해월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오히려 ‘수운 행장’에 해월이 추가되어 『수운문집』이 수정 필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월 외의 다른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의 순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은 문헌의 성립 역시 이러한 순서로 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구축되고 도통전수 담론이 확립되면서 문헌 또한 이에 맞추어 수정 편집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해당 기사의 수정 과정을 재구성하면, 『수운문집』의 “8월 13일 영소를 짓고 「흥비가」를 부르며 무료하게 있을 즈음 하선과 경상 등 6~7인이 마침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대선생주문집』의 “8월 13일 (「영소가」와) 「흥비가」를 짓고 전해줄 곳이 없던 즈음 경상이 마침 이르렀다.”로 수정되었고, 『도원기서』의 “8월 (「영소가」와) 「흥비가」를 지었는데 13일 경상이 생각지 않게 마침 이르렀다.”로 수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표 10>은 186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신비체험 기사로, 해월의 도통전수 증거로 주로 언급된다. 세 문헌의 내용에 차이가 있지만, 『대선생주문집』의 경우에 오탈자가 많아 비교하기가 어렵기에 『수운문집』과 『도원기서』의 차이점을 주로 분석했다.

『수운문집』에는 14일 밤늦게까지 여러 제자가 수운과 시를 읊으며 함께 즐긴 것으로, 『도원기서』에는 13일부터 14일 밤늦게까지 수운의 곁에 해월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도원기서』에는 8월 14일 여러 제자가 수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 즉 “14일 3경(23시~1시) 좌우를 물리고[十四日三更 辟左右]”라는 내용도 있다. 유사한 기록이 『대선생사적』에도 있는데 “ … 5경(3~5시)에 이르자 대선생이 모두 물러가 침소에 들라고 이르고 나서 특별히 선생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명했다. … ”167)는 것이다. 따라서 해월 외의 제자들이 수운과 함께 있었다는 『수운문집』의 기록을 조작으로 볼 근거는 없다.

박맹수는 <표 10>의 차이에 대해서 『수운문집』은 1870년대 중반 이전, 즉 해월 중심의 지도 체제가 확고해지기 전에 쓰였고, 『도원기서』는 1879년 의식적으로 해월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편찬되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168) 박맹수가 제시한 증거는 주로 정황상의 추론이므로 본 연구에서는 문헌 그 자체에 집중하여 분석하여 좀 더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수운문집』에만 있는 “十四日夜 秋聲入樹月色滿堦 先生與群弟 或論或誦之際 咏處士之歌 松菊如帶栗里之淸風 誦飛仙之句 老鶴來弄赤壁之舟月”의 부분을 분석했는데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14일 밤, 가을소리 나무에 들고 달빛이 섬돌을 가득 채우니, 선생께서 여러 제자와 함께 혹 담론도 하고 혹 시를 외웠는데, 처사가(處士歌)를 읊으니 소나무와 국화꽃이 마치 율리(栗里)의 청풍(淸風) 두른 듯하였고, 비선(飛仙)의 시구를 읊으니 늙은 학이 날아와 적벽(赤壁)의 뱃길 비추는 달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14~15일에 6~7인의 다른 제자가 수운과 함께 있었다는 『수운문집』이 정확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수운문집』에서는 위의 문구를 통해 홀로 절일(節日)을 지낼 스승을 생각하여 찾아온 제자들과 수운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8월 13일 제자들이 수운을 찾아온 이후 14일 3경까지의 수운의 행적을 밝혔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도원기서』에는 13일부터 14일 저녁까지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수운문집』의 기록과 유사한 내용이 『대선생사적』에 있다는 점이다. “至十四日夕秋月揚輝和氣滿堂誦吮論學以至五更 [14일 저녁에 이르러 가을 달이 밝게 빛나고 화기(和氣)가 집에 가득하였다. 주문을 외우고 학문을 논하면서 5경에 이르니]”라는 문구이다.169) 해월의 도통 전수를 명확히 하는 『대선생사적』이 1900년을 전후로 집필된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수운문집』의 해당 구절이 20세기 초에 가필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수운문집』에만 수록된 문구는 시부(詩賦) 등의 고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활용하여 당시의 정황을 표현한 문학적 비유로, 조선조 유생들의 사장(辭章) 방식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가을소리 나무에 들고[秋聲入樹]’는 한시와 문집에서 주로 가을의 정취를 표현하는 문학적 표현이다.170) 또 ‘소나무와 국화꽃이 마치 율리(栗里)의 청풍(淸風)을 두른 듯하였고[松菊如帶栗里之淸風]’라는 문구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있다. [三徑就荒 松菊猶存]”라는 문구와 이태백의 <희증정률양(戱贈鄭溧陽)> 중의 “ … 청풍 불어오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소박한 복희 황제 때의 사람이라 하였네. 어느 시절 율리로 가서 평생의 친구를 한번 만나보리.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何時到栗里 一見平生親]”라는 문구를 활용하여 수운을 도연명에 비유한 것이다.171) 그리고 “비선(飛仙)의 시구를 읊으니 늙은 학이 날아와 적벽(赤壁)의 뱃길을 비추는 달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誦飛仙之句 老鶴來弄赤壁之舟月]”라는 문구는 소동파의 <전적벽부(前赤壁賦)>, <후적벽부(後赤壁賦)>와 주자의 <서현원삼협교(棲賢院三峽橋)>의 시부를 조합하여 수운을 소동파에 비유한 것이다.172) 이처럼 유교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사장을 통해 수운을 도연명과 소동파에 비유한 것은 『수운문집』이, 『도원기서』와 달리, 유교적 사유체계를 지닌 친견 제자에 의해 집필된 ‘수운 행장’에 가장 근접한 문헌임을 시사한다.

넷째, 『수운문집』의 해당 문구는 수운이 직접 저술한 <처사가>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처사가>는 경전에 나타나는 가사 제목은 아니지만 ‘수운 행장’에는 분명하게 그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173) 이후 『동경대전』 <화결시>의 세 번째 부분이라 전해졌는데, 태산(泰山)과 공자(孔子), 청풍(淸風)과 오류선생(五柳先生), 청강(淸江)과 소동파(蘇東坡), 청송(靑松)과 허유(許由), 명월(明月)과 이태백(李太白)을 소재로 했기에 <처사가>로 이름 지어졌다고 알려졌다.174) 그런데 『수운문집』은 수운이 <처사가>와 ‘비선(飛仙)의 시구’를 읊은 정취를 도연명, 이태백, 소동파의 문장을 활용하여 묘사함으로써 수운을 도연명과 소동파에 비유하였다. 이는 “청풍이 서서히 불어옴이여, 오류선생이 잘못을 깨달았도다. 맑은 강의 넓고 넓음이여, 소동파와 손님의 풍류로다.”라는 <처사가>의 구절을 집필자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75) 결국 『수운문집』의 해당 문구는 수운으로부터 <처사가>를 직접 듣고 그 내용과 그 의미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도연명, 이태백, 소동파 등의 시부에 해박해야 지을 수 있다. 후대의 조작이나 가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176) 『수운문집』 집필자는 <처사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 유교적 시부에 해박했던 친견 제자일 가능성이 크다.

『수운문집』의 신빙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은 신비체험과 관련된 문헌 간 차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수운의 의지에 따라 베풀어진 조화를 해월만이 아니라 여러 제자가 체험했다고 하는 『수운문집』 기사의 신빙성은 상대적으로 높다. 수운은 서양의 침입으로 인한 병란이 1863년 12월에 닥칠 것과 이를 조화로 물리칠 수 있다고 예언한 바 있었다. 따라서 1863년 8월에 서양의 침입을 물리칠 조화를 보여주었다면, 그 시현 대상은 다수가 되어야 한다. 곧 닥쳐올 병란을 물리칠 보국안민의 권능을 가능한 한 많은 제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당시 동학에 대한 탄압의 와중에서 그 신앙을 유지하는 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수운과 제자들이 체포된 후 받은 심문 내용에는 수운이 제자들에게 양인(洋人)을 무력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주문과 칼춤으로 막을 수 있고 천신이 이를 도울 것이며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177) 이 부분도 『수운문집』 기록이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수운문집』의 기록은 수운이 있었다면 신통 조화로 양요(洋擾)를 평정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기에 동학 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수운의 죽음이 억울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화이다.178) 그에 비해 해월의 도통 전수를 확립하려 했던 이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화의 체험은 『도원기서』의 기록처럼 해월만의 도통전수 일화로 해석되고 편집되어야 했다.

둘째, 신비체험 이후 수운이 한 말을 보면 『수운문집』이 더 자연스럽고 정확하다.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서는 “어찌 걱정하는가? 후세의 난을. [何患乎後世之亂也]”으로 되어 있어 짧은 문장이 둘로 구분되면서 뒤의 문장이 불완전한 형태를 띤다. 강조의 의미로 해석한다고 해도 부자연스럽다. 『수운문집』은 “어찌 후세의 난을 평정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가? [何患平後世之亂也]”로, 구조나 맥락의 의미에서 자연스럽다. 이러한 차이는 호(乎)와 평(平)의 쓰임새 때문인데, 평(平)이 필사 과정에서 호(乎)로 오기되었다고 보면 해소될 수 있다.

이상의 분석은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이나 『도원기서』보다 앞선 문헌임을 입증한다. 하지만 표영삼이 『수운문집』의 가필 증거로 지적한 문제를 추가로 논의할 필요는 있다. 경상(慶翔, 해월)으로 되어 있는 곳을 『수운문집』에는 군제(群弟) 또는 군등(君等)으로 수정하면서 실수로 일부를 군(君)으로 남겨두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앞서 살펴본 여러 사실을 반박하는 근거로는 충분하지 않다. 『수운문집』에서 군제(群弟), 군등(君等)이 사용되어야 할 곳이 군(君)으로 표기된 곳은 모두 수운의 말을 직접 인용한 곳이어서 맥락상 제(弟), 등(等)의 생략이 가능하며 맥락상 복수로 하지 않아도 복수로 읽히는 부분이다. 군제(群弟), 군등(君等)으로 하지 않는 것이 문맥으로 본다면 더 자연스럽다. 또한 필사 과정에서 글자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한 것도 표영삼이 이미 『수운문집』의 가필을 결론짓고 문제에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표 11>은 수운이 동학에 대해 유불선을 겸한 것으로 설명한 후 강결시(降訣詩)를 내려준 기사로, 천도교 전통에서는 심법의 전수, 즉 도통 전수로 여겨지는 일화이다. 수운이 동학의 도(道)를 설명하고 강결시 등을 준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세 문헌은 차이를 보인다. 『수운문집』에는 1863년 8월 15일 수운이 여러 제자가 있는 자리에서 도를 강(講)하고 부서(符書)와 강결시를 준 것으로,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는 해월이 홀로 듣고 받은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표 11. 十五日曉頭
十五日曉頭 先生 曰 此道以儒佛仙三道兼出也 群弟對曰 何爲兼也…而受訣曰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授之 此詩爲君將來後之事 而降訣之詩也
十五日曉頭 先生呼慶翔言曰 此道 儒佛仙三道兼出也 慶翔對曰 何爲兼也…而受訣曰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气心 授之 此詩爲君將來後之事 而降訣之詩 永爲不忘天也
十五日曉頭 先生呼慶翔言曰 此道以儒佛仙三道兼出也 慶翔對曰 何爲兼乎…而受訣曰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授之曰此詩爲君將來後之事 而降訣之詩也 永爲不忘 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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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 가운데 “용담의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검악의 사람에게 한마음이 있네.”라는 시는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명확해지는 1870년대 후반부터 수운이 해월에게 하늘의 천명을 전하는 도통 전수의 증거로 해석되고 있었다.179) 이를 고려하면, 『수운문집』이 1900년대를 전후하여 해월의 위상을 약화할 의도로 가필된 것이라는 표영삼의 주장은 근거는 박약하다. 1870년대 후반부터 공식적으로 해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검악인(劍岳人)’의 강결시가 『수운문집』에서 삭제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운문집』은 수운이 여러 제자에게 모두 공표한 바를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해월의 도통 전수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화가 수록되지 않은 『수운문집』에 이 강결이 기록된 이유는 삭제를 하지 못한 것이라기보다 이 강결이 『수운문집』 집필 당시에 수운이 해월에게 내려 준 전법시로 해석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해월이 살던 곳의 지명이 금둥골, 금등골이었으므로180) 검악인이 해월을 의미한다는 해석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이 강결이 전법시였다고 하더라도 수운이 해월의 위상을 명확히 하려면 『수운문집』과 같이 여러 제자가 있는 자리에서 공표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해월의 도통전수를 인정하는 관점에서도 『수운문집』의 기록이 『도원기서』나 『대선생주문집』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다. 『수운문집』을 가필된 문헌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다. 『수운문집』에 전해지는 사실은 수운이 여러 제자에게 강결과 가르침 등을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수운은 명확하게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한다는 의미의 전법시를 준 바가 없었고 따라서 연원제 원리를 벗어난 수운-해월-접주의 권위구조를 구축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수운문집』과 달리, 강결을 전법시로 보고 당시의 가르침 등 모든 것을 비공개적으로 해월에게만 알려준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수운의 행적보다는 해월의 도통전수 담론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편찬된 문헌임을 잘 보여준다.

<표 12>는 1863년 12월 수운의 생일 전후 일화인데 『수운문집』에는 잔치를 영덕 접의 도인들이 준비한 것으로,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는 주인인 해월이 비밀리에 영덕 접에 준비를 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표 12. 冬十月二十八日
冬十月二十八日 卽先生之誕辰也 若爲通文則四方從者數甚 多 故先生本意設宴之事
先有未安之動靜 於是盈德道人 各密備宴禮 設爲大宴 其數其然 不可勝數 先生曰
興比歌前日頒布矣 或爲熟 誦之耶 各爲面講也 次第講之後 姜洙來獨出座中對先生
而面讀問旨 先生節節句句 先爲問旨 洙默默然 不能對而退
冬十月二十八日 卽先生之誕日 若爲通文則四方從者數夥多 故先生本意設宴之事
先有未安之動靜 主人密奇寧德 各 備 禮 設爲大宴 其數其 不可勝 先生曰
興比歌前 頒布矣 或爲熟讀誦之耶 各爲面講也 次第講之後 姜洙 獨出座中對先生
面讀問旨 先生節節句句 先爲問旨 洙默默 不能對
冬十月二十八日 卽先生之生辰也 若爲通文 則四方從者數甚夥多 故先生本意設宴之事
先有未安之動靜 主人密寄盈德 各 備讌禮 設爲大宴 其數其然 不可勝數 先生曰
興比歌前頒布矣 或爲熟 誦之耶 各爲面講也 第次講之後 姜洙 獨出座中 對先生
而面讀問旨 先生節節句句 先爲問旨 洙默默 不答
先生笑戲曰 子誠墨房之人也 洙亦及爲問旨 則生指東指西也 洙亦問蚊將軍之意
先生曰 君爲心通可知矣 洙亦問無窮之理 先生曰 其亦心通知之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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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에서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이다. 첫째,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해월을 주인(主人)으로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운 문집’에 첨부할 ‘행장’에 해월을 주인으로 지칭하며 그를 중심으로 기사를 기록한 것은 사제관계를 중시했던 당시의 행장 집필 방식을 고려하면 예외적이다. 해월의 도통전수 담론이 확립된 후 ‘수운 행장’ 수정 과정에서 일어난 착오로 볼 수 있다. 두 문헌에서 모두 해월을 이름 대신 ‘주인’으로 지칭한 곳도 이곳이 유일하다는 점과, 해월이 ‘북도중주인’ 또는 ‘주인’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일관되게 경상(慶翔)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게다가 이 부분 이후 해월 관련 기사가 없는 『대선생주문집』과 달리 『도원기서』에는 이 부분 이후로도 경상(慶翔)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둘째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비해 『도원기서』에 수운과 강수의 대화가 더 자세히 실려 있다는 점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수운의 물음에 강수가 대답하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일화가 종결되는 데 반하여, 『도원기서』는 강수가 대답을 못 한 후 오히려 강수가 수운에게 질문을 하고 수운이 이에 대해 답변하는 내용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해당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강수가 묵묵히 대답하지 못하니 선생께서 웃으며 농으로 ‘그대는 진짜 묵방(墨房) 사람이다’ 하셨다. 강수가 도리어 뜻을 여쭈니, 선생께서 서쪽을 가리키고 동쪽을 가리켰다. 강수가 또 문장군(蚊將軍)의 뜻을 여쭈니 선생께서 ‘네가 마음을 통하면 알 수 있으리라’ 이르시고 강수가 또 무궁의 이치를 여쭈니 선생께서 ‘그 역시 마음을 통하면 알 수 있다’ 하셨다.

후에 강수는 영해 민란에 참여했다가 도피한 뒤인 1871년 4월경, 동학을 민란에 끌어들인 주모자 이필제가 「흥비가」의 ‘문장군’임을 깨달았다는 후회를 『도원기서』에 남긴다.181) 따라서 강수가 자신의 해석에 기반하여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본 일화를 자신의 기억을 통해 보완하여 『도원기서』에 추가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분석해 본 두 부분은 『수운문집』의 기록이 원본 ‘수운 행장’에 가장 근접함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표 13> 1863년 10월 수운의 생일과 관련된 일화로, 접 단위의 움직임을 담고 있다. 세 문헌이 모두 다른데 이는 문헌 성립의 선후 관계를 추론할 수 있는 여러 실마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표 13. 先生曰 前有一夢
先生曰 前有一夢 太陽殺氣着於左股 而變爲火起終夜寫人字 覺後見股則有一點紫痕露於三日
是以尙有所憂 心獨知禍將至也 繼適及先生誕辰 鑄銅接中具酒饌油果幾器魚脯數束進奉於宴席
先生在座中 群弟列侍 誾御和悅之樂 襲若春風之和氣 莫非先生諄諄命敎之餘悅也
是月尙州人全時奉 來謁丈席 承顔受敎而退
先生曰 前有一夢 太陽殺氣着於左股 而變爲火氣終夜寫人字 覺後見股則有一點紫痕露於三日
是以尙有所憂而心獨知禍將至也 繼適及先生誕辰 鑄銅接中具酒饌油果幾器魚脯數束進 於宴席
承顔受敎而退
先生曰 前有一夢 太陽殺氣着於左股 而變爲火起終夜寫人字 而覺後見股則有一點紫痕露於三日
是以尙有所憂而心獨知禍將至也
自是 上帝收掇降話之敎 時只敎矢石之避法 而後無降話云云 先生謂道人曰 日後道事 所以爲法者 在一 不在二 在三 不在四 在五 不在六 平居常謂道人曰 自開闢後 世或有與上帝親侍問答之敎歟 非吾所以浮言也 世或不然 而知其浮言 則此所以各運明明也 是故 天運循環 無往不復 以五萬年無極之道 命授於吾 此非吾家之聖德也 然則古不聞今不聞之事 古不比今不比之法也 嗚呼 世人之毁道者 惟或然矣 嗟我道人 敬哉愼哉 先時先生布德之初 次第道法有二十一字而已 而流言而修之流呪而誦之者太 非聖德之敬傳也 是故師無受訓之師 則禮義安效 自古師師相授者 自在淵源 則豈以誤傳 敢違聖德也哉 眞修者有實 問以修者有虛 則日後之虛實 亦在於斯人之爲人也 又在於其人之爲誠也 初爲入道有一番致祭 改過遷善而永侍之重盟 有祝文者 所謂知 蓋載之恩 照臨之德也 無他道理 只在信敬誠三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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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는 전시황의 주동접에서도 생일 연회 음식을 준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도원기서』에는 없다. 앞서 밝혔지만 『도원기서』에는 파접 이후 해월과 그 휘하인 영덕 접 관련 기사 외에는 대부분 기록되지 않았다.182)

또 다른 차이는 『도원기서』가 수운의 생일 이후 상제의 강화가 끊어진 일과 수운이 알려준 교리와 의례의 핵심 사항을 추가하여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동경대전』의 글귀를 인용하면서 당시의 문제점에 대한 강수의 개인적 견해와 소회를 드러낸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183)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에는 『도원기서』의 300여 자나 되는 해당 문구가 없다. 수운의 예언과 교리 및 의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삭제할 이유가 없고 단순한 누락으로 보기에 그 글자 수가 상당히 많아서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따로 편집한 것이라는 표영삼의 주장은 논리적이지 않다. 이 부분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대선생주문집』이 『수운문집』을 필사하면서 수정된 문헌임을 방증한다.

이것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가 아니라 『수운문집』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선생주문집』의 “마침 선생 탄신을 맞아 주동접중에서 술과 음식, 약과 몇 그릇, 어포 몇 묶음을 마련해 연석에 바치고 존안을 뵌 후 가르침을 받고 물러났다.”는 내용은 『수운문집』과 유사도가 높다. 『수운문집』의 해당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선생 탄신을 맞아 주동접중에서 술과 음식, 약과 몇 그릇, 어포 몇 묶음을 마련해서 연석에 바쳤다. 선생께서 좌중에 앉으시고 여러 제자가 열 지어 모셨다. 온화하고 즐거운 음악이 짙게 퍼져 마치 봄바람의 화기가 불어오는 듯하니 선생의 다정하고 친절한 명교의 남은 즐거움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달 상주의 전시봉이 장석(丈席)을 배알하고 존안을 뵌 후 가르침을 받고 물러났다.

두 문헌을 비교하면 『대선생주문집』처럼 “존안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 물러났다. [承顔受敎而退]”의 주어를 주동접으로, 시점을 생일날로 되어 있는 구조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일 연회를 준비한 영덕접을 배제하고 주동접만이 생일에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정황에도 어긋난다. 『수운문집』에서는 “존안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 물러났다. [承顔受敎而退]”의 주어는 전시봉이며 시점은 생일이 아니라 10월의 어느 날로 생일과 관련된 기사가 아니다. 『대선생주문집』이 편집 필사 과정에서 “先生在座中 群弟列侍 誾御和悅之樂 襲若春風之和氣 莫非先生諄諄命敎之餘悅也 是月尙州人全時奉 來謁丈席”의 40여 자를 누락했다고 보아야 논리적이다. 만약 실수로 인한 누락이 아니라면 전시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면서 발생한 탈자이다.

따라서 『수운문집』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상주 사람[尙州人] 전시봉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원기서』에서 전시봉은 1880년 『동경대전』 간행 시 교정(校正)으로 기록되어 있다.184) 전시봉과 같이 당시 교정이었던 유인상(유시헌)은 1874년 정선 접주가 된 이로, 1870~80년대의 동학 교단 활동을 설명하는 데에 없어서 안 되는 중요 인물이었다.185) 이는 해월이 명교(命敎)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시형으로 바꾸면서 시(時)를 돌림자로 하여 강수를 강시원, 유인상을 유시헌으로 개명했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186) 전시봉도 시자 돌림으로, 유인상과 같이 『동경대전』 간행 시 교정(校正)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시봉의 당시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고 보아야 한다.187) 전시봉이 주동접의 전시황과 같이 『동경대전』 간행에 참여했던 것으로 본다면 친견제자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수운문집』의 전시봉 관련 기록은 사실로 보아야 한다. 해월의 역할을 축소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낼 이유는 없다는 점, 그리고 중요 인물이었던 전시봉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에는 한 번도 나타난 바가 없다는 점은 오히려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에서 전시봉 관련 일화가 파접 이후라는 사실 때문에 삭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표 14>는 ‘여덟 가지 절목’[八節]에 관한 1863년 11월 기사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기록은 대부분 같지만, 『도원기서』의 기록은 완전히 다르다. 이 차이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따로 편집한 문헌이 아니라, 『수운문집』 계열 문헌을 저본으로 편집 수정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표 14. 十一月
十一月 鑄銅 時晄應先生八節隻對 其日十三日也 拜先生各言隻對 先生觀之微笑曰
惡是何對也 晄跪坐問曰觀先生顔色何瘦而憊也 先生曰吾不知也 余作八節訣輪示君等
欲觀其人 今看隻對 吾道中無人 可歎惜處也
先生曰 其時 商山人黃孟文以問道之心適至問 說與布德勸學等數條件事
而別未知布化者幾人 修道之工果 何等送諸云云
歲十一月 鑄銅全 晄應先生八節隻對 其十三日也 拜先生各言隻對 先生觀之微笑曰
惡是何對也 晄跪 問曰觀先生顔色何瘦而憊也 先生曰吾不知也 余作八節 示君等
欲觀其人 今看隻對 道中無人 可歎惜處也
先生曰吾其時 商山人黃孟文以道之心適問 說與布德勸學等數條件事
而別未知布化者幾人 修道 工果 何等送諸云云
至十一月 作不然其然 又作八節句輪示於各處 又作八節句理合爲此文之旨 封送丈席云 其詩曰 不知明之所在 不知德之所在 不知命之所在 不知道之所在 不知誠之所致 不知敬之所爲 不知畏之所爲 不知心之得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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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기록은 11월 13일 주동접의 전시황이 찾아와 수운의 팔절(八節)에 댓구(對句)를 하면서 나눈 대화와 수운이 교문의 상황에 대한 소회를 말한 것이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11월 주동의 시황이 선생 팔절의 댓구에 응했는데 그날이 13일이다. 선생에게 배례하고 각절마다 댓구하니 선생은 이를 지켜보다 미소를 짓고 ‘어찌 이리 댓구를 하였는가?’ 하셨다. 시황이 꿇어앉아 여쭈기를 ‘선생님의 안색을 보니 어찌 여위고 고단하신지요?’하였다. 선생께서 이르시기를 ‘나도 모르겠다. 내 팔절결을 지어 그대들에게 보인 것은 그 사람됨을 보고자 함이었는데 이제 댓구하는 것을 보니 나의 도문에 사람이 없구나! 한탄스럽고 애석한 바로다.’ 선생께서 ‘저번에 상산 사람 황맹문이 도를 묻고자 하는 마음으로 마침 와서 묻기에 포덕과 권학 등 여러 제한이 있는 일을 더불어 설명하였는데 포덕 교화된 자가 몇인지 알지 못하고 수도의 과제가 어느 등급을 쫓고 있을지?’ 이르시며 여러 말씀을 하셨다.188)

두 문헌과 달리, 『도원기서』에서는 수운이 11월 불연기연(不然其然)과 팔절을 지은 후 팔절을 각처에 보내 이에 댓구를 하여 자신에게 보내도록 한 명령과 당시 각처에 보내진 팔절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도원기서』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내가 팔절결을 지어 그대들에게 돌려 보여 그 사람됨을 보고자 하였다.”라는 수운의 말을 제삼자의 시점에서 설명하고 당시 수운이 지은 팔절의 본문까지 수록한 것이다.

『수운문집』과 유사한 내용은 『대선생사적』과 「본교역사」에도 있다. 『대선생사적』에는 수운이 생일 잔치에서 팔절시를 짓고 댓구를 하게 했으나 한 사람도 응대하지 못하여 개탄하였고, 11월에 팔절구를 지었다고 하는 일견 중복된 내용이 있다.189) 그렇지만 11월에 팔절을 지었으며 팔절에 댓구하는 이가 없어 수운이 실망했다는 사실만큼은 『수운문집』이나 『대선생주문집』과 유사하다. 「본교역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신사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을 지었고 또 팔절사(八節詞)를 지었다. 문인 김황응(金晃應)이 대신사가 지은 팔절을 득한 후 특별히 자기의 뜻으로 댓구를 지어 나아가 올리니 대신사 이를 보고 미소를 띠며 “우리 도중에 사람을 얻기가 실로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셨다.190)

유사한 내용은 1920년의 기록인 『천도교서』와 『천도교회사초고』에도 나타난다. 이는 1920년대까지도 『수운문집』의 해당 기사는 천도교 전통에서도 인정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두 기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수운문집』 기사의 정확성을 잘 보여준다.

그날 대신사 불연기연과 팔절을 지으시도다. 지으신 팔절을 전만응이 보고 자기의 뜻대로 대구를 지어 가져오니 대신사 미소를 지으며 “도를 봄이 어렵도다”라고 하셨다.191)

대신사께서 팔절을 지으셔서 문도들에게 두루 보이시고 댓구를 할 것을 명하셨는데 문도 중 바르게 댓구하는 자 없으니 대신사께서 친히 댓구를 다셨다.192)

이상의 문헌들을 비교해 보면 <표 14>에는 『수운문집』이 가장 앞선 문헌임을 방증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운문집』의 전시황 관련 기록을 통해서만 『대선생주문집』을 비롯한 후대 교단사의 오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전시황의 이름에 대한 오탈자가 『수운문집』에는 없다가 『대선생주문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생주문집』 필사본을 보면 <그림 3>처럼 수운을 의미하는 ‘선생(先生)’ 앞의 모두 글자를 띄우거나 줄을 바꾸고 있고, 전시황과 관련되어 시(時) 자가 누락되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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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대선생주문집』의 수운 표기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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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顔受敎而退歲十一月鑄銅全晄應

先生八節隻對其月十三日也拜 先生各言

隻對 先生觀之微笑曰惡是何對也晄跪

問曰觀 先生顔色何瘦而憊也194)

‘시’가 누락되고 선생이라는 글자에 줄을 바꾸면서 가장 앞줄 끝의 ‘전황이 응답하였다’라는 뜻의 ‘전황응(全晄應)’을 전황응이라는 이름으로 오독하여 필사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 줄의 척대(隻對)가 동사 역할을 하기에 가능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이후 『대선생주문집』을 필사한 문헌들은 대부분 전시황을 전황응(全晄應)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표기한 듯하다. 『천도교서』에서 황(晄)의 필기체는 유사한 글자인 만(晩)으로 오독되어 전만응(全晩應)으로 오기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195) 「본교역사」에서는 필기체 전(全)이 김(金)으로, 황(晄)이 통용되는 글자인 황(晃)으로 쓰여 김황응(金晃應)으로도 표기되었다.196) 김황응(金晃應)의 황은 광으로도 읽을 수 있어서 『천도교회사초고』에서는 김광응(金廣應)으로도 나타났다.197) 후대의 문헌에서 전시황을 대신하여 이 기사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인물들은 해당 문헌 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독으로 인해 나타난 허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수운문집』 기록이 가장 최초의 기록에 가깝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도원기서』만 11월 기사를 다르게 기술한 것은, 앞서 논하였지만, 파접 이후에 수운이 해월 외의 친견 제자를 접견한 기록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팔절에 대해 적절히 댓구를 하는 제자들이 없자 수운이 “이제 댓구하는 것을 보니 나의 도문에 사람이 없구나! 한탄스럽고 애석한 바로다. [今看隻對 吾道中無人 可歎惜處也]”라고 탄식한 것은 해월의 도통전수와는 모순되는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상산인 황맹문과 관련된 일화도 수운이 해월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인을 만나 가르침을 전한 일화였기에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원기서』는 배제된 내용 대신 『동경대전』에 수록된 문구를 인용하여 팔절에 관한 부연 설명을 수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표 15>의 기사는 수운이 풍습(風濕) 질병에 대응한 내용으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기록은 유사하지만, 『도원기서』의 기록은 완전히 다르다.

『도원기서』에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고 천주에게 소지(所志: 관청에 올리는 소장, 청원서, 진정서)를 올리는 것을 수운만이 아니라 접주도 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도원기서』에는 해월의 접이 많았던 북도 대부분 접에서 발생한 질병이 수운의 질고(疾苦)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만약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를 원본으로 삼았다면 해월의 도통전수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이를 누락할 이유가 없다.

표 15. (此)時 (北)道(中)風濕
時 北道中風濕 猶獨大熾勿論男女老弱 緣厥濕症多敝課工
道人以是爲悶告于先生 答曰卽 去作所志訴於天主也
道 風濕之浠 濁大熾勿論男女老弱 緣厥濕症廢多課工
有道人以是爲悶告于先生 答曰旣 去作所志訴於天主也
先時先生身有風濕 形如珠玉 又如痘瘇 雖無處不生 只有梳楊小無痛傷 自先生風濕之後
北道中風濕之氣 猶獨大熾勿論男女老弱而緣於厥濕久敝課工
故道人以是爲悶告于先生 則曰此後去作所志 訴於天主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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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발생 지역을 『도원기서』와 『수운문집』은 ‘북도(北道)’로, 『대선생주문집』은 ‘도(道)’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선생주문집』에는 북도라는 표현이 없고, 『도원기서』에는 ‘수운 행장’ 이외의 부분에서 해월과 관련해 북도(北道)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 편집자의 관점에서는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하여 교문의 모든 접이 해월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북도와 남도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선생주문집』이 북도중이 아니라 도(道)에서 풍습이 발생했다고 한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도원기서』는 수운 생전에 북접과 남접의 구분이 있었다는 해월의 진술을 근거로198) 북도중이라는 표현을 ‘수운 행장’ 부분에서는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수운문집』에서 ‘북도중’이라는 표현은 ‘경주 북쪽 지역의 접들’이라는 의미로 여기서 처음 나타난다. 북도중의 접인 영해 접주 박하선이 수운의 명에 따라 소지(所志)를 적어 수운을 찾는 내용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이 같은 북도중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199)

『수운문집』에는 접을 기준으로 다수 교도를 표현할 때 접내(接內), 접중(接中)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부서 접중, 영덕 접중, 주동 접중 등이다. 지역의 여러 접을 포괄하여 지칭할 때는 도중(道中)이라고 기술한다. 예를 들면 영덕도중, 북도중 등이다. 그에 비해 ‘북접’이라는 용어는 『도원기서』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해월 단일 지도체제가 성립된 이후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수운문집』이 북접이라는 용어 대신 북도중이라고 쓴 것은 해월의 지도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저술된 기록임을 방증한다.200)

<표 15>에서 가장 주목할 차이는 수운이 도인들의 호소에 답한 부분이다. 『도원기서』만 다르게 되어 있고, 실제로 몇 글자의 차이지만, 권위구조와 교리 및 의례의 차이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풍습(風濕)의 질병에 대한 도인들의 호소에 대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는 “가서 소지를 지어서 (수운에게) 돌아와 천주에게 호소하라. [卽去作所志來訴於天主也]”라고 한 데 비해, 『도원기서』에서는 “지금부터는 가서 소지를 지어 천주에게 호소하라[此後去作所志訴於天主也].”라고 하였다. 이는 “소지가 수운을 통해서만 천주에게 전해질 수 있는지, 각처 접주를 통해서도 천주에게 전해질 수 있는지”라는 중대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상제와의 소통이라는 제사장적 권위가 수운에게 집중된 상황을, 『도원기서』는 제사장적 권위가 수운에서 여러 접주와 지도자들에게 분산된 상황을 반영한다. 전자의 신앙체계와 권위구조가 후자보다 앞선 것이므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도원기서』보다 앞선 문헌임이 분명해진다. 『도원기서』는 해월 시대의 권위구조가 수운 시대의 역사 해석에 투영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또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는 소지를 수운에게 가져와서 천주에게 호소해야 하기에 <표 15>의 풍습 질병 사건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지만, 『도원기서』에서는 수운이 차후의 대응 방법을 알려준 것으로 풍습의 질병이 종결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수 있다. 단지 세 글자인 래(來)와 차후(此後)의 유무에 의해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부분은 이전에 주목된 적이 없지만, 권위구조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함축하기에 추후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특히 『수운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수운 당대의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면 이 차이는 천주와 인간의 관계, 수운의 위상과 역할, 접주의 권위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표 16>은 <표 15>와 연결된 부분으로 당시 교단의 권위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표 16>을 <표 15>와 연결해 보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는 풍습과 관련하여 천주에게 호소할 소지(所志)를 지어 오라는 수운의 명을 듣고 박하선이 글을 지어 수운을 찾아온다. 이에 비해, 『도원기서』에서는 북도중의 풍습과 명확한 연계 없이 박하선이 글을 지어 수운을 찾아온다. 이 같은 차이는 “얻기 어렵고 구하기도 어렵지만 실로 이는 어려운 것이 아니로다. 심기를 화하게 하여 봄의 화를 기다리라. [得難求難實是非難 心和氣和以待春和]”라는 제서의 의미 해석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표 16. (其後)寧海人朴夏善
寧海人朴夏善聞而作狀往見 先生曰吾必受命得題 遂 執筆停息 俄而降題
題書曰 得難求難實是非難 心和氣和以待春和 先生曰 君知得道之日 降書之理乎
夏善對曰不知也 先生曰愼不漏也 又曰去歲吾欲尋靈友於西北而今無其人也 然日後必有與我比之者其人在於完北湖西之地而善於敎誨 君其安心相從也
濱海人朴夏善聞而爲狀往見 先生 先生曰吾必受命得題 遂 執筆停息 俄而降題
書曰 得難求難實是非難 心和氣和以待春和
其後寧海人朴夏善 作爲狀往見於先生 先生曰吾必受命得題 遂以執筆停息 俄而降題
題書曰 得難求難實是非難 心和氣和以待春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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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맥락에서 보면 풍습에 관한 청원에 천주가 답을 준 것이고, 『도원기서』의 맥락에서 보면 강화가 끊어진 후 수운이 다시 명을 받고자 할 때 천주가 준 답이 된다. 끊어진 강화가 다시 시작된 것이라면 상당히 중요한 일임에도 『도원기서』는 이를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도원기서』의 기사는 개연성이 떨어진다.

주목할 부분은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영해 접주 박하선이 해월을 거치지 않고 수운을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맥락에서 본다면 해월의 도통전수는 사실이 아니거나 현실화되지 못한 비밀지령이다. 『도원기서』 맥락에서 본다면 ‘북도중주인’인 해월의 허락 없이 관할 접주가 수운을 찾는 상황이다. 박하선은 수운이 직접 포덕한 인물이기에 해월 휘하의 접주가 아니지만 영해가 경주 이북이므로 그의 접은 북도중에 포함되기에 『도원기서』 맥락에서 보더라도 ‘북도중주인’의 위상은 도통계승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도원기서』는 『수운문집』이나 『대선생주문집』과 달리 풍습과 박하선 관련 기사를 분리하여 박하선의 방문을 개인적 차원으로 기록하여 모순을 회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월의 도통 전수를 확고하게 하고자 모순되거나 부합되지 않는 기사를 편집했지만 모순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은 해월 중심으로 기사를 편집하면서도 도통전수와 모순되는 기사들을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았다. 이는 『대선생주문집』이 편찬되던 시기에는 도통전수에 따라 조직체계와 권위구조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표 16>에서 또 주목할 부분은 『수운문집』에만 유일하게 수록된 다음의 기사이다.

선생께서 이르시기를 “너는 득도의 날과 강서의 이치를 아는가?” 이르시니 하선이 대답하기를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신중히 하여 누설하지 말라.” 하시고 다시 이르시기를 “지난해 내가 서북에서 영우를 찾고자 하였으나 지금은 그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후에 반드시 나에 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은 완북호서(完北湖西)의 땅에 있고 가르침에 능하리라. 너는 안심하고 따르라.” 하셨다.

이 기사는 수운이 박하선에게 비밀리에 전한 예언으로, 자신에 비견되는 인물인 영우(靈友), 즉 영적 친구를 서북쪽에서 찾았으나 당시에 없었고, 앞으로 완북호서(完北湖西; 완주의 북쪽 의림지의 서쪽)에서 나타날 것이니 그를 따르라는 것이다. 자신의 뒤를 이을 후인이 나타나면 따르라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1863년 말에 내린 것인데,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서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한 것과 모순된다. 따라서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서 이 일화가 삭제될 가능성은 절대적이다.

문제는 이 일화의 후대 가필 가능성이다. ‘서북영우’를 수운이 언급한 근거가 『동경대전』에 있기에 이 기사가 『수운문집』에만 있다는 이유로 가필이라고 할 근거는 없다. 경진(1880) 인제판 『동경대전』의 강결(降訣)에는 “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으로 시작되는 시가 있는데 7구와 11구에 ‘서북영우’와 ‘영우’가 나타난다.201) 경진판 이후의 동경대전에서는 주로 결(訣)로 지칭되는데, 현재 천도교 전통에서는 주로 접주제의 실행과 교단의 장래를 읊은 것으로 해석한다.202)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에는 모두 1863년 정월 초하루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수운이 공표한 강결로 기술되어 있어 결보다 강결이 정확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각처의 접주를 임명하고 난 다음 날 천주로부터 받은 강결을 공표한 것이다.

만약 『수운문집』이 해월의 역할을 축소하고 남접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필된 것이라면 영우(靈友)의 존재를 경주의 북쪽인 서북지역, 구체적으로 완북호서에 있다고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영우가 남쪽에 있다고 가필해야 한다. 천도교 전통에서 수운의 도통 계승자인 해월은 경주 서북쪽 출신이며, 특히 표영삼이 『수운문집』의 성립 시기라고 주장하는 20세기 초의 동학의 공식 도통은 청주 출신으로 완북호서(完北湖西)의 기준에 부합하는 의암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기사가 가필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해월의 도통전수 관련 기사를 수록하고 있지 않은 『수운문집』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 일화는 다른 기사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도원기서』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또한 『수운문집』이 박하선의 관점에서 취합된 정보를 토대로 집필되었고 따라서 박하선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크기에 신빙성이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후대의 가필이라기보다는 박하선의 단독 전승이었기에 『도원기서』와 『수운문집』에서 삭제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1871년의 영해 민란에서 박하선의 아들인 박사헌이나 영해의 동학교도가 연원이 불확실한 이필제를 따르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서북영우에 대한 예언일 수도 있다. 수운 이후에 그와 비견될 서북영우가 나타날 것임을 영해 교인들은 박하선을 통해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영해의 동학도들은 이필제를 수운이 예언한 서북영우로 믿었기에 이필제의 변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표 17>에는 수운을 체포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던 즈음, 수운에게 있었던 불길한 징조를 묘사하고 한 교인이 조정에서 수운을 해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소문을 전해주며 도피할 것을 청하자 이를 수운이 거절하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은 형식과 내용이 유사한 데 비해, 『도원기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표 17. 嗚呼 時運不幸
嗚呼 時運不幸 是月二十日 酬接中道弟
此 夜 先生定內夾房寢所 明燈挑懷 心神散落 有不豫色 終而待曙
府中道人來告于先生曰生等聞之則 廟堂之論方欲害
先生云先生豫避似好耳 先生曰道則自吾所由而出也 寧爲當之況於諸君何爲乎 不聽其言
嗚呼 時運不幸 歲癸亥十二月 廵接道中
是時 先生定內夾房寢所 明燈挑懷 心神散落 有 豫色 終而待曙
府中道人來告于先生曰生等聞之則 廟堂之論 害
先生云 豫避似好耳 先生曰道則自吾所由而出也 寧爲當之況諸君何爲 不聽其言
是時 四方紛撓人心乖傷俗不秉彝洋學滿世虛無之說不可取信 而世人徒知陰害之端然 而時人未知東道之理歸之於西學而害之惜乎彼何人兮入則心非出則巷議實爲難防而甚可畏也 適當十二月 八節句作來者自北自南無使不從連 至初十日而留宿者近於五六十人也
是日夜 生獨定內挾房寢所 明燭高掛 坐不安席 起動不已 而如有憂色焉 不寐觀時
於是宣傳官鄭龜龍奉命而到本府 前日府中道人來告於先生曰生等聞之則方有廟堂之論而欲害
於先生云先生豫避似好也 先生曰道則自吾所由而出也 寧爲當之況於諸君何爲 不聽其言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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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과는 달리 『도원기서』는 해당 기사를 설명하기 전 당시의 상황과 민심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12월이 되자 팔절에 대한 댓구를 지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10일에는 50~60인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추가되어 있다. 『도원기서』의 이와 같은 상세한 정황 설명이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에는 “오호라, 시운이 불행하도다”라는 문구로만 되어 있다.

『도원기서』에만 있는 내용은 동학에 대한 곡해와 탄압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수운 체포 당시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던 이유를 팔절과 관련하여 해명하는 것이다. 만약 『대선생주문집』 편집자가 『도원기서』를 저본으로 하였다면 이를 삭제할 이유는 없다. 수운의 억울함을 설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월의 도통을 언급하지 않는 『수운문집』이 『도원기서』를 저본으로 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를 삭제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해월의 역할이나 위상과는 관계없기 때문이다. 분량상으로 보더라도 필사 과정에서의 누락으로 보기도 어렵다. 만약 누락이라면 남겨진 부분의 형식상 차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 17>의 차이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독립시킨 것이며, 『수운문집』이 『도원기서』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준다. 오히려 『도원기서』에만 수록된 문구에서 편집자인 강수의 개인적인 견해를 볼 수 있어, 후대의 첨부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양학이 세상에 가득 찼다.’, ‘사람들이 동도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서학으로 돌아갔고 동도를 해하니 애석하도다’, ‘들어와서는 마음으로 틀렸다고 하고 나가서는 거리에서 떠드니 실로 막기 어려우니 심히 두렵도다’ 등의 표현은 당시의 민심에 대한 강수의 소회로 볼 수 있다. 『도원기서』만이 불길한 징조를 선전관 정귀룡(이하 정운귀)이 경주부에 도착한 일과 관련하여 기술한 것으로 본다면 이는 더 확실해진다.203) 기존의 ‘수운 행장’을 저본으로 『도원기서』를 편찬하면서 잘못되었다고 판단된 부분을 수정하고 내용을 추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선생주문집』과 『수운문집』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수운문집』은 11월 20일, 접중의 제자들과 대화를 하고 난 저녁에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면, 『대선생주문집』은 12월 접들을 순회하는 도중에 징조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수운이 여러 접을 순회한 사례가 없고, 『도원기서』가 후대의 여러 정보를 종합하여 당시의 상황을 더 상세히 기술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12월, 수운은 용담에 있으면서 각처에서 오는 팔절의 척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대선생주문집』의 ‘순접도중(廵接道中)’은 ‘수접중도제(酬接中道弟)’의 오탈자로 보아야 한다. 이외에도 『대선생주문집』은 수운이 “편안한 기색이 있었다. [有豫色]”라고 하여 “편치 않은 기색이 있었다. [有不豫色]”라고 한 『수운문집』과 정반대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도원기서』의 “근심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如有憂色]”는 서술을 참고한다면 필사 과정에서의 누락이 명확하다.

『도원기서』가 징조가 있던 날을 12월 10일로 특정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를 저본으로 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정확하고 자세한 『도원기서』의 기록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도원기서』 편찬자인 강수는 선전관 정운귀의 경주부중 도착 시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기에 『도원기서』는 징조 바로 뒤에 선전관의 경주부 도착을 명시하여 상세하고 정확하게 징조가 암시하는 바를 묘사하였다.

세 문헌 간의 시점의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을 추측해 본다면 『수운문집』의 ‘是月二十日’이 여러 번의 필사 과정에서 『대선생주문집』의 ‘歲癸亥十二月’로 오기되었거나 수정되었고, 『도원기서』는 수운이 체포된 날이 정확히 12월 10일임을 확인하여 이를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운귀의 장계에 따른다면 그의 경주부 도착 시점은 12월 9일경이며 수운의 체포 시점은 12월 10일이다.204) 따라서 『도원기서』는 부중의 교인이 와서 조정의 소문을 전하고 수운에게 피할 것을 권하는 일화 앞에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과 달리 전일(前日)을 추가하여 12월 10일 이전으로 수정한 것이다.

만약 『수운문집』이 후대에 어떤 의도를 지니고 『대선생주문집』을 수정한 것이라면 불길한 징조와 관련된 시점을 11월 20일로 특정하며 수정할 이유는 없다. 12월 9일의 선전관 정운귀의 경주부 도착과 10일의 수운 체포는 교단사에서 중요한 날이었고, 11월 20일이 지니는 의미는 1880년대 이후 교단 내에서는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운문집』은 “바로 그때 선전관 정귀룡이 봉명하였고 [當是時 宣傳官鄭龜龍奉命]”라고 기술하여 11월 20일을 선전관 정운귀가 왕명을 받은 날임을 명시하여 왕명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조선조 문집의 형식을 보인다. 1930년대까지의 동학 교단의 문헌은 정운귀가 왕명을 받은 날을 대부분 수록하지 않고 있어 『수운문집』의 이 기록은 명확히 1860년대 후반 수운 제자들의 유교적 사유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운귀가 11월 20일 왕명을 받았다는 기록은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의 정운귀 서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205) 『수운문집』은 11월 20일 정운귀가 어명을 받은 시점을 기준으로, 『도원기서』는 12월 10일 수운이 체포된 시점을 위주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문헌이 왕명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지는 그 편찬 연대의 선후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경진(1880년) 인제판 『동경대전』의 경우 ‘천주나 상제’, 그리고 수운을 지칭하는 ‘선생’의 경우는 물론이고 ‘왕(王)’, ‘선고(先考)’ 앞에서도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그 원본을 확인할 수 있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경우도 왕명을 의미하는 명(命), 어명(御命), 전교(殿敎), 전교(傳敎), 계교(啓敎) 앞에 띄어쓰기를 한 것은 그 영향이 분명하다. 필사의 형식에조차 그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그 이전에는 일화를 서술하는 데 왕명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206) 『수운문집』의 서술 방식이 왕명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보다 오래된 기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기에 『수운문집』이 가장 이른 문헌임을 알 수 있다.

정운귀가 왕명을 받은 시점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로 『수운문집』의 가필을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왕명은 승정원에서 각 관아로 보내지던 기별(奇別)을 참고할 수 있었다. 1900년을 전후한 기록이라 할 『대선생사적』도 불길한 징조가 있었던 날을 11월 25일로 기록하고 있기에 『수운문집』의 전승을 후대의 가필로 보기는 더욱 어렵다.207) 1940년 간행된 『동학사』에 와서야 『승정원일기』를 인용하여 11월 20일을 선전관 정운귀가 봉명한 날임을 확인하고 있기에 『수운문집』이 다른 문헌의 정보를 활용하여 20세기 초에 가필되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208)

<표 18>은 수운의 체포와 압송 과정 관련 기사로, 이동 경로와 기술 방식의 차이를 통해 각 문헌의 정확성과 편찬 시기를 추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문장 형식과 내용이 거의 같지만 『도원기서』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대선생주문집』의 경우 오탈자로 추측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수운문집』과 거의 같다.

표 18. 當是時(及此)
當是時 宣傳官鄭龜龍奉命而 到本邑府 多率羅將不意突入 以御命招捉
先生顔色自若曰旣犯御命順受捉去 其時光景不可忍言 同時被捉者十餘人 竝到本府
翌日發行至永川 率習之惡侮陷之風甚於厄宋困蔡之日
先生常坐馬上 馬足 接地移不得步 數十下隷大驚惶惶急告曰小人等果不知先生也
惟望先生平安行次少須臾之間馬忽移足疾行 到大邱營宿所 翌日 宿所善山
又 發行至商州宿所 奉命龜龍初意 作程於鳥嶺 聞道人數千聚會嶺路心甚大怯以化寧
作路到公忠道報恩宿所其邑首吏卽道人也 善待支供需資五緡奉上先生 早發行到靑山宿所
又行到淸州宿所 發行數三日艱到果川 歲十二月初七日卽哲宗朝昇遐之日也
今當宁代理之初各道頒布遲滯多日 先生始聞國恤之報哀 先生曰 我雖罪人 設哭斑之位
北向拜哭哀痛須甚 留府數日傳敎內慶尙道慶州罪人東學先生崔某還該營招考下敎云云
當是時 宣傳官鄭龜龍奉命而忽到本 府 多率羅將不意突入 以御命招致
其時光景不可忍言 時被捉 十餘人 竝到本府
翌日發行至永川 率習之惡侮陷之風甚於厄宋困蔡之日
先生常坐馬上 足不接地移不得步 數十下隷大驚惶惶告急曰小人等果不知先生也
惟望先生平安行次少須臾之間馬忽移 疾行 到大邱營宿所 翌日 宿所善山
又 發 至商州宿所 奉命龜龍初意 作程 鳥嶺 聞道人數千聚會嶺路心甚大怯以化寧
作路到公忠路報恩宿所其邑首吏卽道人也 善待支供需資五緡奉上先生 早發 到懷仁宿所
又作 忠州宿所 發行數 日艱到果川 歲十二月初七日卽哲宗朝昇遐之日
今當代理之初各道頒布遲滯多日 先生始聞國 之報哀 先生曰 我雖罪人 設哭斑 位
北向再拜哀痛須甚 留府數日殿敎內慶尙道慶州罪人東學先生崔某還該營招考 云云
及此 龜龍 多率將羅不意突入 以御命招捉
先生以御命之致勢無奈何而順其命捉去 其時曠境不可勝言 同時所捉者十餘人也 竝到于本府
而翌日發行至永川所屬下卒言辭不恭蔑視無常
先生坐馬上 馬足接地 撓動不移 數十下大驚惶惶急告曰小人等果不知先生也
惟望先生平安行次 於斯之際馬忽 疾行宿所永川翌日發行到大邱營宿所 翌日發行至善山宿所
明日發行至尙州宿所 龜龍 意爲作程於鳥嶺 聞道人數千人屯聚云心爲大怯以華嶺發行
作路到忠淸道報恩宿所其邑吏房則道人也故朝夕支供善待錢五緡奉上先生 翌日發行到靑山宿所
明日發行到淸州宿所發行數日到果川 及此哲宗廟十二月初七日昇遐
今當代理頒布各道故中滯多日 先生始聞國恤之哀報 先生曰 我雖罪人 國哀之痛尤是不幸也極不已 留數日傳敎內慶尙道慶州東學先生罪人諱濟愚送于該營招考狀啓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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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행정구역과 지명에 기반하여 본다면 가장 정확한 지명과 이동 경로를 제시하고 있는 문헌은 『수운문집』이다. 앞서 밝혔듯이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나타나는 ‘공충도(公忠道)’와 ‘화령(化寜)’이라는 지명이다. 충청도는 1862년부터 1871년까지 충청도라 지칭되는 것이 금지되었고 공식적으로 공충도(公忠道)였다.209) 화령은 조선조 지리지에 모두 화령(化寜)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당시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도 화령(化寜)으로 되어 있다.210) 충청도라는 지명이 사용될 수 있었던 시기는 충청도라는 지명이 복원된 1871년 이후이며, 화령(華嶺)이라는 곳이 알려진 때는 상주를 중심으로 교단 재건 활동이 활발해진 1870년대였다. 이는 『수운문집』이 1871년 이전에 집필된 ‘행장’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동 경로와 관련하여 장영민은 『수운문집』의 보은-청산-청주의 경로가 잘못된 것으로 주장했지만,211) 이는 조선 시대 보은 북쪽의 주성부곡(酒城部曲) 지역이 청산현에 소속되어 있었던 월경지이며 행정구역상 청산 소속이었음을 간과한 결과이다. 『대동여지도』에는 보은의 남북 양쪽에 모두 청산이 존재한다. 조선 시대 주성부곡에는 사창(社倉)과 역이 있었다.212) 따라서 보은-청산(주성)-청주의 경로는 정확하다.

<표 18>에서 또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도원기서』의 기술 방식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체제 순응적 기술 방식이다.213)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 곳이다.

첫째, 수운이 영천으로 체포되어 가는 상황에 대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포졸들 습속의 악독하게 모욕하는 기풍이 (공자가) 송국에서 겪은 액과 (진국과) 채국(사이)에서 당한 곤욕보다 심하였다[率習之惡侮陷之風甚於厄宋困蔡之日].”라 기술하였지만, 『도원기서』는 “소속 하졸들의 언사 불경함과 멸시함이 범상함이 없었다[所屬下卒言辭不恭蔑視無常].”라고 기술한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수운의 고난을 공자의 고사에 비유하여 체제에 대한 비판을 피했지만, 『도원기서』는 제도권의 박해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선전관 정운귀를 지칭하는 방식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봉명귀룡(奉命龜龍)’, 『도원기서』는 ‘귀룡(龜龍)’으로 표현했는데, 전자의 방식이 왕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를 존중하는 역사 기술이다.

셋째, 철종의 승하에 대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이해 12월 초이레에 철종 임금이 승하하였다. 이제 현 임금이 대리한 초여서 각도에 반포 지체됨이 여러 날이니, 선생이 비로소 국상(國喪) 상중(喪中)의 통지를 들었다[歲十二月初七日卽哲宗朝昇遐之日也 今當宁代理之初各道頒布遲滯多日先生始聞國恤之報哀].”라고 기술하였지만, 『도원기서』는 “이에 이르러 철종이 12월 초이레에 승하하고 이제 현 당저(當苧)가 대리한 후 각도에 반포하여 중도가 막힘이 여러 날이니 선생이 비로소 국상 상중의 통지를 들었다[及此哲宗廟十二月初七日昇遐今當苧代理後頒布各道故中滯多日先生始聞國恤之哀報].”라고 기술한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임금이 승하한 날을 독립된 문장으로 표현하고 이를 기준으로 일화를 서술하지만, 『도원기서』는 수운의 과천 도착을 시작으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왕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와 사유를 반영한 조선조의 문집 기준에 부합하지만 『도원기서』는 수운을 위주로 한 예외적 기술 방식이다.

『도원기서』의 이러한 서술 방식은 현 황제나 임금을 의미하는 ‘당저(當宁)’를 당저(當苧)로 오기한 것과 결합되면서 수운이 12월 7일 과천에 도착했다는 잘못된 해석으로 파급되었다.214) 12월 7일은 수운이 체포되기 전이다. 『도원기서』의 기록으로도 수운이 체포된 시점은 12월 10일이다. 그런데도 『도원기서』의 ‘及此’를 ‘이때에 이르러’로 해석하여 수운이 과천에 호송된 시점을 12월 7일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215) 현대의 동학 문헌 연구자들조차도 이러한 실수를 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마 오자로 인해 해석이 불가해지고 수운을 중심으로 사건을 기술하면서 오역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선생사적』이 수운의 과천 도착 시점을 12월 8일로 기록하고 이때 수운이 북쪽을 향해 곡을 하였다고 한 것 역시 이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이 체포되어 상경하던 도중 철종의 승하를 먼저 알고 통곡했다는 후대의 전설도 이러한 오역에서 기원했다고 보인다.

『대선생주문집』의 당우(當于)와 『도원기서』의 당저(當苧)는 모두 오자로 『수운문집』으로 교감하지 않으면 해석할 수 없다. 현 임금을 의미하는 당저(當宁)를 오기한 것으로 본다면 『도원기서』를 편찬한 강수나 『대선생주문집』 편집자는 『수운문집』의 저자보다 한학적 지식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임금을 의미하는 용어의 필사 오기는 동학의 주류가 이미 유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에서 평민으로 전환된 시기에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필사되고 편찬되었음을 시사한다.

<표 19>는 수운이 과천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돌아와 심문을 받는 부분으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한두 글자의 차 이외에는 모두 동일하나, 『도원기서』는 두 문헌에 없는 내용이 많다. 『대선생주문집』은 『수운문집』과 유사하게 동학도들의 수운에 대한 존경심, 해월의 수운 옥바라지, 해월의 도피, 수운의 해월 도피 명령 등의 내용이 없는데, 해월의 도통전수를 명확히 하는 『대선생주문집』이 이러한 내용을 삭제할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표 19>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편찬한 것이라는 주장이나, 『대선생주문집』이 편집과정에서 『도원기서』의 내용 중 일부를 삭제했다는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화 단위로 배제되어 있어 누락으로 보기도 어렵다. 『도원기서』가 다른 두 문헌이 지니고 있지 않은 정보들을 추가하면서 문구를 수정하였다고 가정하면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표 19. 甲子正月初六日
此時甲子正月初六日到達大邱營囚在獄中
明査官趙永和 監司徐憲淳也
廵使招致問呈之場先生着枷入庭 廵使問曰汝何聚黨 濁亂風俗 先生答曰敎人誦呪則藥自效
勸兒寫書則天生筆法 非我求道人道人求我不亦樂遠方之來乎 以此爲道頹風俗何爲 廵使更無問 因爲下獄
二月 再問呈之日 執杖之下忽有如雷 聲 廵使 該問 執杖曰杖下有聲何壯 執杖對曰 罪人之股折 而有聲矣 卽爲分付刑吏下獄 先生在獄 有詩曰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時甲子正月初六日到達大邱 囚在獄中
明査官趙永和 監司徐憲淳也
廵使招致問呈之場先生着枷入庭 廵使問曰汝何聚黨 濁亂風俗 先生答曰敎人誦呪則勿藥自效
勸兒寫書則天生筆法 非我求道人道人求我不亦樂遠方之來乎 此爲道頹風俗何爲 廵使更無問 爲下獄
二月 再問呈之日 執杖之下忽有 雷 聲 廵使 該問 執杖曰杖下有聲何壯 執杖對曰 罪人之股折 而有聲矣 卽爲分付刑吏下獄 先生在獄中有詩曰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自果川發行作路於鳥嶺抵到聞慶草谷則數百道人店店窺視 或擧火而隨之 或含淚而望之 到此不忍之情如思赤子之心也 是月二十九日到于留谷 過歲甲子正月初六日得達大邱營 囚在獄中
本府罪人移囚於營獄以尙州牧使趙永和定于明査官時監使徐憲淳也 及此時潦雨不霽故停退問呈而多出將差俾杜道人出入 是時崔慶翔在外聞先生之嚴囚惶惶奔走以盈德劉尙浩錢百餘金用賂得路完入城中各樣周旋之際適逢玄風郭德元言及于先生食床之擧行 德元卽應爲奴以爲擧行 至二十日
廵使招致問呈 先生着枷入庭 廵使問曰汝何聚黨而濁亂風俗 先生答曰敎人誦呪勿藥自效
勸兒寫書則自有聰明故以此爲業 以送歲月矣於其風俗何爲 廵使更無問呈 反爲下獄
於是慶翔聞爲人口招之言卽日與金春發出城逃避遽 至二月 廵使招致先生問呈之際 忽有如雷之聲 廵使驚駭問于羅卒曰杖下有聲是何壯也 羅卒告曰 罪人之股折矣 分付刑吏 卽爲下獄 在獄中有詩曰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先生謂郭德元曰慶翔方在城中耶非久出捕矣以吾之言傳及而高飛遠走也 若爲所捉則事甚危矣勿煩愼傳 德元告曰慶翔旣爲去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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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과 관련 당사자 극소수가 알 수 있었던 일이 『도원기서』에만 수록되었고, 해월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지막까지 수운의 곁을 지키려 하였으며, 이에 수운이 해월의 도피를 명하는 일화들이 『도원기서』에만 나타난다는 사실은 『도원기서』가 도통전수를 매개로 해월의 도피를 정당화하는 입장에서 편집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도원기서』는 해월의 지도 체제가 확고해진 이후 ‘수운 행장’을 철저히 검토하여 모순되거나 부족한 내용을 수정 보충하여 편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선생주문집』이 이 기사들을 수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앞서 편찬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도원기서』는 심문 과정에서의 수운 답변을 다른 두 문헌과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무리를 모아 풍속을 어지럽힌바’를 묻는 심문에 다른 두 문헌이 “아이들에게 권하여 글을 쓰니 하늘이 내린 필법이었다. 내가 도인들을 원한 것이 아니라 도인들이 나를 원한 것이니 멀리서 찾아옴을 또한 즐김이 아닌가? 이것을 도로 삼았는데 어찌 풍속을 무너지게 했다고 하는가?”라고 한 데 반하여, 『도원기서』는 “아이들에게 권하여 글을 쓰니 스스로 총명해졌다. 그런 까닭으로 이를 업으로 삼아 세월을 보냈다. 여기에 풍속은 무슨 말인가?”로 되어 있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답변은 『논어』를 인용하여 멀리서 찾아온 이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것은 풍속을 해침이 아니며 따라서 그 행적이 유교에 어긋남이 없음을 해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도원기서』의 답변은 무리를 모았다는 죄목이 근거가 없음을 부각하여 처벌이 부당하다는 직접적인 비판의 의도를 드러낸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유교적 사유를 반영한 문헌임을 보여주며 『도원기서』는 유교적 사유와 결을 달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표 20>은 1864년 수운의 처형과 안장까지의 과정을 기술한 행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세 문헌 가운데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내용이 유사하다. 그에 비해 『도원기서』의 내용은 두 문헌과 차이를 보인다. 『도원기서』에만 있는 부분은 여러 가지이지만, 크게 세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표 20. 三月十日
三月日廵使遂以啓敎十日施威嚴刑 先生直受而歿 越三日廵使招致先生妻子 卽爲白 放 分付收屍 其 斂襲人 金敬弼鄭用瑞郭德元林益理 尙州金德元等數人也
反柩之路天地慘肅而諸道人見之者痛爲何如也
喪行 到慈仁縣西後淵酒店日已夕矣 請夜之止宿 主人 曰自何而來
朴夏善曰自大邱來 店主 知其事機 請尸入房一禁行客 撫屍體有溫熱之氣 幸或有回蘇之理料以三日之驗守 屍而待留 雙虹起淵亘天雲霧繞淵及店五色玲瓏連蔽三日 先生上天 雲捲而虹解其後尸臭卽出 更爲斂襲翌日發行到于龍潭 先生長侄孟倫
安葬于龍潭西原
三月日廵使遂以啓敎十日施威嚴刑 先生眞受而歿 越三日 招致先生妻子 卽爲白 放 分 其 斂襲人 金敬弼鄭用瑞郭德元林益 商州金德元四五人也
反柩之路天地慘肅而諸道人見者之痛爲如何也
喪行 到慈仁縣西後淵酒店日已夕矣 請夜 止宿 主人 曰自何而來
朴夏善曰自大邱來 店主人知其事機 請尸入房一禁行人 撫 體濕熱 幸或有回蘇之理料理三日之驗守 留待 雙虹起淵互天雲霧繞淵及店五色玲瓏連弊三日 先生上天 雲捲 虹解其後尸臭卽出 更 斂襲翌日發行到龍潭 先生長侄孟倫
安葬于龍潭西原
廵使遂以啓敎三月初十日施威嚴刑 先生授辱別世 越三日廵使招致先生妻子 卽爲白頉放送分付收尸其時斂襲人金敬叔金敬弼鄭用瑞郭德元林益瑞 尙州人金德元 也
其餘罪人各爲定配各道各邑白士吉姜元甫李乃兼崔秉哲李景華成一龜趙常彬兄弟朴命仲叔侄新寧人丁生名未詳 其白放人李民淳朴春華寧海人朴生名不知朴明汝其時獄死 先生長子世貞使金敬弼金敬叔金德元將爲返柩哀哉痛哉此地形狀豈可言豈可言
發行抵到慈仁縣西後淵酒店日之夕矣 問主人曰今夜止宿如何 主人問曰自何以來至
世貞曰自大邱來 主人知其實一喜一悲入尸於房中一禁行客尸體有溫熱之氣故幸或爲回還之理料以三日之驗守其尸而待留 雙虹起淵連天雲霧繞淵繞屋五色玲瓏連蔽三日 先生上天而雲捲 虹解其後尸臭卽下 更爲歛襲翌日發行卽到龍潭 先生長侄孟倫
從後而來到 安窆于龍潭西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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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수운의 죽음을 표현한 부분이다. 『수운문집』에는 ‘직수이몰(直受而歿)’, 『대선생주문집』에는 ‘진수이몰(眞受而歿)’, 『도원기서』에는 ‘수욕별세(授辱別世)’로 표기되어 있는데, 『대선생주문집』의 진(真)은 직(直)의 오기로 보아야 하기에 『도원기서』만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216) 『수운문집』의 ‘직수이몰’에서 ‘직수’는 『시전(詩傳)』과 『중용집주(中庸集註)』의 주자 주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조선조 문헌에서 주로 충직(忠直)하여 기꺼이 왕명을 받거나, 횡역(橫逆)이 올 때 피하지 않고 받음을 표현하는 말이다.217) 『수운문집』은 수운이 죄가 없지만 충직하게 왕명을 받들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표현하여, 왕명 중심으로 일화를 서술하면서 수운의 충직(忠直)을 부각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도원기서』는 “욕을 주어 (수운이 이를 받아) 별세했다.”라는 식으로 왕명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였다. 『수운문집』의 집필이 유교적 사유에 기반했다면 『도원기서』는 유교적 질서보다 동학의 독자적인 신앙체계에 기반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도원기서』가 수운과 같이 체포된 이들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수운의 처형 사실과 그 시신을 수습한 인물들만을 간략히 소개했다면, 『도원기서』는 유배, 방면, 옥사로 나누어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 앞부분만을 떼어내어 그대로 편집한 것이라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과 함께, 『도원기서』가 동학의 교단 조직이 정비되어 교조인 수운만이 아니라 접주나 교인의 상황에 관해 서술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된 환경에서 편찬되었음을 시사한다.

셋째는 『도원기서』가 수운의 운구를 수운의 장자인 세정을 중심으로 서술한 데에 비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세정보다 영해 접주 박하선을 중심으로 서술한 부분이다. 수운의 시신을 모시고 용담으로 갈 때 주막 주인이 물은 말에 대해, 『도원기서』는 수운의 아들 세정이 대답한 것으로, 『대선생주문집』과 『수운문집』은 영해 접주 박하선이 대답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표영삼은 이 기사와 관련하여 『수운문집』에만 박하선이 나타난다며 해월의 정통성과 관련된 대목에 이르면 어김없이 『수운문집』이 박하선을 등장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218) 그렇지만 『도원기서』만이 세정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 『대선생주문집』도 운구 과정을 세정을 중심으로 기술하지도 않았으며 주막 주인의 물음에 답한 이도 박하선이라고 기술하여 『수운문집』과 같다. 표영삼은 문헌을 실제로 비교하여 고증하지 않고 연역적인 전제에서 잘못된 주장을 한 것이다. 오히려 『도원기서』가 박하선의 역할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편집되었다고 보아야 논리적이다.219) 실제로 박하선은 수운에 의해 영해 접주로 임명된 바 있는 동학의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220) 『도원기서』에도 수운이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있을 당시, 장질인 맹륜 및 여러 접주와 함께 감영에 와 있었고, 그의 접인 영해접이 영덕접과 함께 육백 금을 내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 그가 운구 과정을 주도하였다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기록은 신빙성이 크다.221) 『도원기서』의 편찬자인 강수는 수운의 장례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는 뜻과, 스승의 운구와 안장을 옆에서 지키지 못한 해월과 이를 주도한 박하선이 대비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장자인 세정을 내세워 수운의 운구가 이루어졌다고 기술했을 가능성이 크다.

Notes

1) 본 글에서는 동학 전통에서 많이 사용된 ‘도통(道統)’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자 한다.

2) 증산 종단의 경우 종통에 따라서 경전과 증산의 신격 등 신앙 체계 전반이 다르다. 증산 종단 간의 종통을 고려하지 않는 일괄기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차선근, 「증산계 신종교 일괄기술에 나타난 문제점과 개선방향」, 『신종교연구』 30 (2014), pp.62-87 참조.

3) 가장 대표적인 예는 해월의 도통 승계를 세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동학의 전개 과정을 기술한 한국종교연구회,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 (서울: 청년사, 1998), pp.284-287 참조.

4) 한국학 관련 대표적 사전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해월이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ㆍ영해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등 해월의 도통전수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문헌에 근거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시형」 (https://encykorea.aks.ac.kr/Article, 2023. 11. 6. 검색) 참조.

5)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초판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74), 권지1-11 참조.

6) 村山智順, 『朝鮮の類似宗敎』 (京城: 朝鮮總督府, 1935), pp.195-213, p.233, pp.243-283 참조.

7) 동학의 경전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로만 한정한다.

8)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을 『수운재문집(水雲齋文集)』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박맹수,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서울: 모시는사람들, 2009), p.66, p.97 참조.

9) 김상기, 「수운행록 : 원제 수운문집」, 『아세아연구』 7-1 (1964), pp.177-178 참조.

10) 같은 글, p.177 참조.

11) 표영삼은 단곡본 원제를 ‘수운문집’이라고도 했다가 ‘최선생문집’이라고도 하고 있다. 표영삼이 쓴 것으로 보이는 『대선생주문집』 해제에는 “상주 동학교본부 소장 『대선생주문집』과 영주 단곡본 『대선생주문집』 (명칭이 수운문집(水雲文集)인지 아니면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 못 했음)이 또한 동일하다.”라고 되어 있다. 박맹수는 김상기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지만, 필사본의 원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용강본을 따로 취급하여 『수운재문집』으로 분류했다. 표영삼, 「수운대신사의 생애 : 년대에 대한 새로운 고증」, 『한국사상』 20 (1985), p.95; 표영삼, 「동학사상과 접(接)ㆍ포(包) 조직」, 『한국사상』 22 (1995), p.102;《동학농민혁명사료아카이브》, 「대선생주문집 해제」 (http://e-donghak.or.kr/archive, 2023. 11. 12. 검색); 박맹수, 「동학사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와 그 이본(異本)에 대하여」, 『한국종교』 5 (1990), pp.45-46; 박맹수, 「해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pp.8-9, p.12 참조.

12) 이현종, 「수운재문집(관몰기록)에 대하여」, 『이해남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 (1970), p.241 참조.

13) 「해제 대선생주문집」,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3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5), p.3;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서울: 통나무, 2005), p.97 참조.

14) 「운수재문집(雲水齋文集)」은 「수운재문집(水雲齋文集)」(이하 「수운재문집」으로 표기)의 오기로 추측된다. 본 연구에서는 규장각 본을 사용하였다.《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水雲齋文集 通章」 大先生主文集 (https://kyudb.snu.ac.kr. 2023. 11. 20. 검색). 김상기는 1964년의 『수운문집』 해제와 교감본을 1975년 『동학과 동학란』의 부록에 다시 게재하며 『수운문집』의 번역을 추가하였다. 김상기, 앞의 글, p.177; 김상기, 『동학과 동학란』 (서울: 한국일보사, 1975), 부록 pp.3-38;《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東學書』 해제」 (https://kyudb.snu.ac.kr. 2023. 11. 20. 검색) 참조.

15) 이현종, 「「수운문집」해제 (Ⅰ)」, 『신인간』 284 (1971), pp.20-25 참조.

16) 이현종, 「「수운문집」해제 (Ⅱ)」, 『신인간』 285 (1971), p.69 참조.

17)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pp.97-98;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4), pp.227-228; 「해제 대선생주문집」,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3, p.3 참조.

18) 홍기조, 「사문에 길을 열든 jdaos-48-0-41-g4」, 『신인간』 29 (1928), pp.38-39 참조.

19)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228 참조.

20) 김상기, 앞의 글, p.177 참조.

21) 같은 글, pp.177-178, p.182; 박맹수, 「동학사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와 그 이본(異本)에 대하여」, pp.45-46; 박맹수, 「최시형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 논문, 1995), pp.8-9; 박맹수, 「해제」, pp.8-9 참조.

22) 표영삼은 수운의 장질(長姪)인 최세조(자; 맹륜) 또는 영해 접주였던 박하선이 1865년경 『수운문집』을 집필했을 가능성을 최초로 주장했다. 이후 박맹수는 표영삼의 주장을 문헌 비교를 통해 논리적으로 고증하고 이를 통해 해월의 도통 전수가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하였다. 표영삼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 『수운문집』에 대한 기존의 주장을 철회했는데, 아마도 천도교 교학자로서 자신의 주장이 해월의 도통 전수를 부정하는 연구에 활용되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수운 사후인 1865년경 변고를 피한 수운의 친척, 제자들에게 수운이 남긴 문헌들을 모아서 문집을 엮을 필요성이 있었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표영삼, 「수운대신사의 생애 : 년대에 대한 새로운 고증」, p.95;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p.131-133, pp.228-230;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8-9, pp.40-47; 박맹수, 「해제」, pp.8-9 참조. 따라서 문집의 부록에 해당하는 행장이 학식이 있는 이들에 의해 집필되고 행장 제목이 임시로 『수운문집』이 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용강본을 분석 해설한 이현종은 권두의 제목이 「수운재문집」이었음을 근거로 해당 문헌을 수운선생의 측근 제자가 수집 종합하여 오다가 최제우의 처형 후 수운재문집이라고 명명하여 보관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이현종, 「수운재문집(관몰기록)에 대하여」, p.242 참조. 김용옥은 『대선생주문집』을 박하선의 저작으로 비정했는데, 『수운문집』을 박하선과 최세조(맹륜)의 저작으로 추측한 표영삼의 견해를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김용옥, 『동경대전 1 : 나는 코리안이다』 (서울: 통나무, 2021), pp.74-78 참조.

23) “『대선생주문집』은 제목이 말해주듯 신사 때에 이르러 대신사를 대선생이라 칭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제 대선생주문집」,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3, p.3. 1880년 탈고되어 봉인된 『도원기서』 원본 책명이 ‘수운선생도덕집’(겉표지), ‘최선생문집도원기서’(서두)로 되어 있지만, 1908년에 필사된 표지는 ‘대선생사적’(겉표지), ‘수운대선생사적안’, ‘최선생문집도원기서’(서두)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수운을 지칭하는 표현이 ‘대선생’이 된 시기가 1880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도원기서」, 『동학사상자료집』 1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8), pp.157-158;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pp.175-176 참조.

24) 『상주동학교당 소장유물도록』 (상주: 상주시, 2006), p.80 참조.

25) 김용옥은 『대선생주문집』과 김상기의 교감본 『수운행록』을 비교 분석하여 『수운행록』을 ‘불량본’이라 평가하며 『대선생주문집』이 원본 ‘수운 행장’이라 주장했다. 그는 표영삼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수운행록』이 해월의 도통 계승을 부정하기 위해 『대선생주문집』을 첨삭하여 만든 위서이고, 교감자인 김상기 등에 의해 임의로 뜯어고쳐져 만들어진 문헌이므로 문체가 조잡하고 저열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원본이 존재하지 않아 실체가 없으므로 “『수운행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수운문집』이 독립된 계열의 문헌이 아니라 『대선생주문집』을 조작해 만든 필사본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문헌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비평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수운문집』의 필사본인 상주 동학교당에 소장된 『대선생연혁사』를 김용옥은 전혀 참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용옥, 앞의 책, pp.69-74, pp.90-97, pp.162-163 참조.

26) 김상기는 단곡본도 역시 계룡면에서 입수되었지만 필사지를 기준으로 단곡본으로 지칭하였고, 용강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용강에서 필사된 것으로 추정하여 용강본이라고 하였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엄밀하게 천도교 본부의 용강본은 인제본으로 지칭되어야 한다. 하지만 용강본과 가장 유사하기에 용강본으로 지칭한다. 김상기, 앞의 글, p.177 참조.

27) 표영삼이 실제 계룡본과 단곡본을 대조하여 그 내용상의 동일성을 확인하였는지 아니면 김상기의 연구를 통해 이를 유추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계룡본에 대한 표영삼의 주장은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132 참조.

28) 김상기, 앞의 글, p.177 참조.

29) 《동학농민혁명사료아카이브》, 「대선생주문집 해제」 (http://e-donghak.or.kr/archive, 2023. 11. 12. 검색) 참조.

30) 「최제우-최시형의 비밀 포교기록 동학 『도원기』 발견」,《중앙일보》1978. 4. 4. 참조.

31) 『최수운선생문집도원기』 (대동학연구원, 1978), p.129, p.135.

32) 신일철은 1880년 해월의 지도하에 동경대전으로 추측되는 ‘최선생문집’을 먼저 간행하고 그 뒤에 문집의 마무리로 선생의 행적을 기록한 ‘도원기서’를 만들어 바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신일철, 「『동학사상자료집』 해제」, 『동학사상자료집』 1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9), p.13 참조.

33) 유탁일, 「한국 옛 ‘문집’의 양태와 출판과정」, 『영남지방출판문화논고』 (부산: 세종출판사, 2001), pp.385-386 참조.

34) “五月初九日設爲刻板所而十一日爲如開刊至於六月十四日畢爲引出 十五日別爲設祭其時表功別錄記文 … 先生文集鋟梓之營歲已久矣” 『최수운선생문집도원기』, p.131 참조. 『시천교종역사』에 당시 해월이 친히 발문을 지어 책 뒷부분에 붙였다고 하였기에 『도원기서』의 해월이 쓴 별록이 『최선생문집』, 즉 『동경대전』 초판의 발문으로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창동, 『시천교종역사』 (경성: 시천교본부, 1915), p.63 참조.

35) 여기에 관해서는, 윤석산, 「새로 발견된 목판본 『동경대전』에 관하여」, 『동학학보』 20 (2010), pp.201-230 참조.

36)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p.397; 「본교역사」,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p.494; 박창동, 앞의 책, p.63;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8), p.428; 「천도교서(Ⅱ)」, 『아세아연구』 5-2, (1962), p.297 참조.

37) 1880년 인제에서 간행된 『동경대전』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윤석산은 독립기념관에 2009년 기증된 목판본이 1880년의 『동경대전』임을 2010년에 입증한 바 있다. 윤석산, 앞의 글, pp.201-230 참조.

38) 같은 글, pp.215-217 참조.

39) 『최수운선생문집도원기』, pp.129-130, p.136 참조. 당시 유사(有司) 분정(分定)은 다음과 같다. “道布德主 崔時亨, 道次主 姜時元, 道接主 劉時憲, 修正有司 辛時來, 校正有司 辛時一, 都所主人 房時學, 監有司 崔箕東, 安敎一, 書有司 全世仁, 筆有司 安敎常, 紙有司 金源中, 接有司 尹宗賢, 收有司 洪時來, 崔昌植, 冊子有司 辛潤漢, 安敎伯, 輪通有司 洪錫道, 安敎綱.”

40) 윤석산은 해월이 경진 인제판 『동경대전』을 판각할 당시 모든 문헌의 원본을 지니고 있지 못했으며 구송한 글과 모을 수 있는 원본들을 종합하여 경진 인제판을 간행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1880년에서 1888년까지 간행된 『동경대전』은 수운의 여러 제자가 지니고 있던 자료들과 해월을 필두로 한 동학의 다양한 인사들의 논의를 거쳐 판각된 경전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도원기서』 역시 당시 존재했던 행장과 구전 및 친견 제자들의 진술을 취합하여 편찬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윤석산, 앞의 글, p.226 참조.

41) 박창동, 앞의 책, p.62.

42)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427.

43) 윤석산은 2010년 이미 같은 이유로 『도원기서』의 최종 편집 시기를 1880년으로 보아야 함을 주장하였다. 윤석산, 앞의 글, p.213 참조.

44)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p.226-227;《동학농민혁명사료아카이브》,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해제」 (http://e-donghak.or.kr/archive, 2023. 11. 12. 검색).

45) 이에 대해서는 조동일이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는 여러 문헌을 비교하여 수운에 관한 이야기가 신비화와 합리화의 방향으로 전승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조동일, 『동학 성립과 이야기』 (서울: 홍성사, 1981), pp.126-176 참조.

46) 박맹수, 「해제」, pp.10-11;《동학농민혁명사료아카이브》,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해제」 (http://e-donghak.or.kr/archive, 2023. 11. 12. 검색) 참조.

47) 박맹수, 「해제」, pp.10-11 참조. 『도원기서』 원본은 1978년 『최수운선생문집도원기』로 간행되고 1979년 『동학사상자료집』 제1권에 영인되었다. 또 다른 필사본은 1996년 영인되어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에 수록되었다. 원본과 필사본은 표지 제목에도 차이가 있다. 원본은 ‘수운선생도덕집(水雲先生道德集)’이고 필사본은 ‘수운대선생사적안(水雲大先生事蹟案)’으로, 필사되면서 변경된 것이다. 『최수운선생문집도원기』; 「도원기서」, 『동학사상자료집』 1, p.157;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175 참조.

48)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p.97;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p.224-230; 윤석산, 앞의 글, p.21 참조.

49)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41-47; 박맹수, 「해제」, pp.8-9 참조. 박맹수 연구의 한계는 『수운행록』을 비교에 활용하여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을 구분하지 않아 두 문헌 간의 차이점을 분석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용강본 『대선생주문집』을 『수운재문집』으로 분류하면서 『도원기서』와 대동소이 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표영삼과 같이 『대선생주문집』을 『도원기서』 전반부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김상기가 교감한 필사본에 용강본 『대선생주문집』인 『수운재문집』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결국 박맹수는 『수운재문집』(『대선생주문집』)을 비교 대상에서 제외하고 『수운문집』과 『도원기서』만을 비교하였다. 박맹수, 「동학사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와 그 이본(異本)에 대하여」, pp.45-46; 박맹수, 「최시형 연구」, p.41 참조.

50) 표영삼, 「접포조직과 남북접」, 『동학연구』 4-1 (1999), p.102;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p.224-230; 표영삼, 『동학 1: 수운의 삶과 생각』 (서울: 통나무, 2004), pp.251-254;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p.97 참조.

51) 이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앞선 기록이라는 관점에서는 본 연구의 결론과 일치한다. 김용옥, 앞의 책, pp.72-73, p.222 참조.

52) 조성환 견해에 관한 검토와 결론은 부록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조성환, 「동학 문헌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의 선후 관계 : 최제우 전기의 성립연대에 관한 비판적 고찰」,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94 (2022), pp.211-251 참조.

53) 『대선생연혁사』는 2009년 상주 동학교당을 방문하여 사진 촬영한 자료를 활용하였다.

54) 여기에 관해서는 부록의 <표 13>, <표 19>, <표 20> 참조.

55) 이에 관해서는 김용옥의 주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김용옥, 앞의 책, pp.72-73, p.222 참조.

56) 『도원기서』보다 후대에 집필된 『대선생사적』은 본문에도 수운을 ‘대선생’, 해월을 ‘선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만약 『대선생주문집』이 수운을 ‘대선생’으로 지칭하던 시기에 편집되었다면 본문에서도 수운을 ‘선생’이 아니라 ‘대선생’으로 표기했어야 한다.

57)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44-47; 조경달, 『이단의 민중반란 :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그리고 조선 민중의 내셔널리즘』, 박맹수 옮김, (서울: 역사비평사, 2008), pp.61-68; 장영민, 『동학의 정치사회운동』 (파주: 경인문화사, 2004), pp.68-70; 한국종교연구회, 앞의 책, pp.283-286 참조.

58) 『高宗實錄』, 8年 (1871), 1月 3日 참조.

59) 대동여지도는 충청도와 화령(化寜)을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충청도가 사용된 것은 대동여지도가 1861년에 목판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世宗實錄』, 地理志, 慶尙道 尙州牧;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二十八, 慶尙道 尙州牧; 『대동여지도』 (서울: 진선출판사, 2019), 八道行政統計, 十五-三 聞慶 槐山 報恩 참조.

60) 여기에 관해서는 부록 <표 19> 참조.

61) 상주동학교당에 있는 『수운문집』 필사본인 『대선생연혁사』 마지막에는 孟胤(世祚), 林益瑞가 표기되어 있다. 장질 최세조는 맹륜(孟倫) 또는 맹윤(孟胤)으로 표기되고, 임익서는 해월의 매부이다. 이 기록은 수운문집이 맹륜, 임익서를 거쳐 필사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선생연혁사』 (상주동학교당소장) 참조.

62) 해월 단일 지도체제 성립에 대해서는,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48-101 참조.

63)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63, p.277 참조.

64) 해월에 의한 의례 변화와 그 배경은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89-94 참조.

65) 윤석산은 경전이라기보다 문집에 가깝다고 평가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문집으로 보기도 어렵다는 의미이다. 제목을 경전으로 하고 행장을 첨부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전통적 관습에서 벗어난 것으로 유교적 질서로의 편입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윤석산, 앞의 글, pp.213-217 참조.

66) 『備邊司謄錄』, 高宗 卽位年 (1863), 12月 20日 참조.

67) 정운귀의 서계는 조령부터 경주부까지의 동학 전파 상황을 잘 보여준다. “조령에서 경주까지는 4백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경주 주변의 인근 여러 고을에서는 그에 대한 말들이 더욱 심하여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위천주(爲天主)’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지(侍天地)’라고 명명하면서 편히 하여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감히 사람마다 모두 그 동학 교도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점차 동학에 물든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고 얼마나 번성한 지를 이를 통해서 알 만합니다. [自鳥嶺至慶州, 爲四百餘里, 州郡凡十數, 東學之說, 幾乎無日不入聞, 而環慶州隣近諸邑, 其說尤甚, 店舍之婦, 山谷之童, 無不誦傳其文, 名之曰爲天主, 又曰侍天地, 恬不爲怪, 亦不得掩是白乎, 則臣非敢曰, 人人皆學其學, 蓋其漸染之久而熾盛, 於斯可知是白只.]” 『備邊司謄錄』, 高宗 卽位年 (1863), 12月 20日.

68) 수운은 상원갑, 즉 1864년 무극대도가 이 세상에 날 것이며 태평성대가 오래지 않아 도래할 것임을 몽중노소문답가(1861)를 통해 예언한 바 있고, 1861년 도수사를 통해 ‘자신의 도가 삼 년 내 불성(不成) 하면 헛말이 아닌가?’라고 하여 1864년에는 성과가 있을 것임을 자신한 바 있다. 또한 최수운 심문 결과를 기록한 공초에 따르면 수운은 1864년 10월 서양인이 내습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용담유사」,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p.138, pp.141-142; 『高宗實錄』 1年 (1864) 2月 29日 참조.

69) 표영삼은 청하 접주 이민순도 죽었다고 했지만, 이는 『도원기서』의 해당 구절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윤석산은 해당 구절을 이민순이 석방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문맥의 구조로 보면 윤석산의 해석이 적절하다. 『천도교회사초고』 역시 이민순은 석방된 것으로 되어 있다. 표영삼, 『동학 1: 수운의 삶과 생각』, p.320; 윤석산(역주), 『초기동학의 역사』 (서울: 신서원, 2000), p.105;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410 참조.

70) “自甲子以後所謂道人者或死或存或棄閉無相通永爲絶跡而彼此相見如見仇讐自不能相從也”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18.

71) “移遷英陽龍化洞永以不出山外之意誓以隱跡云云” 같은 글, p.218.

72) 박맹수, 「최시형 연구」, p.56 참조.

73) 한국종교연구회는 교단 사료를 통해 당시 해월의 위상을 ‘유력한’ 일개 접주로 평가한다. 한국종교연구회, 앞의 책, p.285 참조.

74) 김상기, 앞의 글, p.180;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195-196;《한국사데이터베이스》, 「木川版 東經大全 - 通諭」 (http://db.history.go.kr, 2023. 11. 13. 검색) 참조.

75)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49-51 참조.

76)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18 참조.

77) 같은 글, p.221 참조.

78) 조경달, 앞의 책, p.62 참조.

79)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19-222 참조.

80) 같은 글, pp.220-225 참조.

81) 『도원기서』에는 1869년 2월 양양의 도인 최희경, 김경서가 해월을 찾아 수도절차를 묻자, 해월이 그들의 연원을 확인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연원을 알지 못한다고 하자 입도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해월은 자신의 연비인 박춘서와 더불어 양양으로 가서 30여 호를 포덕하였다. 같은 글, pp.224-225;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413 참조.

82) 조경달은 영해 민란 시 해월에 의해 11개 지역의 접에서 교도가 동원되었음을 주장한다. 표영삼은 해월의 동원령에 따라 16개 지역의 접조직에서 5백 명이 동원되었다고 추정했다. 성봉덕은 수운 생존 시 접주가 있던 16개 지역 중 4곳을 제외한 여타 지역에서 모두 참가했다고 분석했다. 성봉덕, 「영해 교조신원운동」, 『한국사상』 24 (1998), pp.135-136; 조경달, 앞의 책, p.65; 표영삼, 『동학 1: 수운의 삶과 생각』, p.397 참조.

83) 1870년 10월부터 2월까지 4~5명의 영해 교도들이 해월을 찾아와 이필제를 만날 것을 설득하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26-229 참조.

84) 1870년 10월 공생이 수운의 장남 세정을 찾아와 양양의 도인들이 대가(大家), 즉 수운의 가족들을 모시기를 원하니 영월로 이주할 것을 권하였으며, 세정이 이를 받아들여 영월의 소밀원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공생은 양양에서 활동한 교인이지만 강수는 도를 바르게 전하지 않는 인물로 『도원기서』에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공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양의 교인은 자신이 포덕한 이들이며 해월은 자신이 포덕한 이들을 가로채고 양양에서 자기 휘하의 조직을 만든 인물이다. 아마도 공생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운의 가족을 모시기로 하고 해월을 견제하기 위해 수운의 가족을 영월로 이거 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공생이 세정에게 영월에 수운의 가족이 오면 상종하기 편하고 생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한 점으로 본다면 공생은 동학의 정통성을 수운의 가족인 대가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영월의 소밀원에서 수운의 가족을 주로 지원한 이는 장기서로 추정되는데 그의 연원은 수운과 함께 체포되어 후에 영월로 정배된 이경화이다. 이로 본다면 양양 지역 교인들은 해월을 연원으로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73년 세정이 체포된 후 해월이 그 옥사를 파악하기 위해 양양을 찾았을 때 상황을 『도원기서』에서는 “난도(亂道)가 극심하여 서로 간의 투기로 재물을 씀과 권세를 행하는 류(類)가 천에 이르러 군과 현, 그리고 4~5개의 읍에 이르니 포덕이 장석(丈席, 수운) 때보다 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본다면 세정을 중심으로 한 종교활동이 상당히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해월의 사위이자 수제자가 되는 구암(김연국)은 수운의 차남 세청의 처당숙 김병내(김광문)의 조카이다. 김병내는 세청과 사돈 간이 되면서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수운의 가족을 연원으로 하는 포덕이 활발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같은 글, pp.224-226, pp.250-251; 박맹수, 「최시형 연구」, p.78 참조.

85) 박맹수는 영해 민란을 교조 신원을 명분으로 한 변란으로, 조경달은 교조 신원, 조선왕조의 타도와 창업을 명분으로 한 민란으로 보았다. 같은 글, p.66; 조경달, 앞의 책, pp.63-66 참조.

86) 당시의 상황은 『도원기서』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조경달은 해월이 이필제에게 지휘권을 빼앗긴 상황으로서, 일시적이지만 동학의 주도권이 이필제에게 넘어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26-240; 조경달, 앞의 책, pp.63-66 참조. 『도원기서』에는 박사헌이 박하선의 아들이라는 것이 기록된 바가 없다. 하지만 성강현은 표영삼, 박맹수, 성봉덕 등의 연구를 종합하여 박사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필제가 영해로 들어온 후 박사헌과 특히 친했는데 박사헌의 아버지는 영해접주 박하선이었다. 영해의 신향(新鄕)이었던 박하선이 동학에 입도해 동학 세력을 늘려나가자 구향(舊鄕)들은 박하선을 관에 고발하였다. 박하선은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필제는 박사헌처럼 관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세력을 확장해갔다. 해월을 교조 신원의 명분으로 끌어들였다. 해월을 비롯한 지도부는 교조 신원이라는 명분에 찬성해 동학도를 동원하였지만, 이필제는 영해부를 습격한 이후 교조 신원에 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에서는 동학도들이 난리를 일으켰다고 동학 탄압에 들어갔고 해월도 어쩔 수 없이 피신해야 했다.” 성강현, 「해월 최시형 평전 : 교조신원운동의 여파로 일월산을 떠나 강원도로」,《울산저널i》 2018. 3. 21. (http://www.usjournal.kr/news, 2023. 11. 13 검색).

87) 수운의 차남인 세청은 당시 영월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장기서의 의견을 따라 해월과 강수의 청을 거절하고 이들을 빨리 집에서 내보내려 하였다. 수운의 직계 제자로 영월로 유배 온 이경화가 장기서의 연원이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42-243; 박맹수, 「최시형 연구」, p.65 참조.

88)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p.66 참조.

89) 박맹수는 신분이나 학식 면에서 해월보다 상층에 있던 인물들이 동학을 변란의 이념으로 수용하였으며 영해 민란으로 교문 안의 변란 세력들이 거의 사라졌다고 하였다. 이는 동학 내의 노선 차이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조경달은 이필제의 난을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동학 내의 이단 운동으로 평가한다. 박맹수, 「최시형 연구」, p.65; 조경달, 앞의 책, pp.65-68 참조.

90) 한국종교연구회는 영해 민란이 해월의 교단 내 위상변화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그 결과 1870년대 중반 해월은 세습 카리스마의 확고한 권위를 확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종교연구회, 앞의 책, pp.285-286 참조.

91)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47, p.254, pp.259-261 참조.

92) 당시 난에 참여했다가 피신한 이 중에는 수운이 울산 접주로 임명한 서군효가 있다. 이후에는 어떠한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39 참조.

93) 강수와의 의형제 결의는 1871년 5월, 전성문과의 결의는 1873년 1월이다. 박맹수는 해월 중심의 단일지도체제 확립의 토대가 된 사건을 적조암 수련, 결의형제, 제사권 장악, 새 의례 창설과 개명(改名)의 네 가지로 제시하였다. 강수나 전성문의 교단 내 위상이나 그 역할에 대해서는 박맹수의 견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성문(全聖文)이 수운 체포 시 옥바라지에 참여한 전석문(全碩文)과 동일인이라는 박맹수의 주장에 대해서 필자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부록의 <표 7> 각주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16, p.241, p.259;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78-81 참조.

94) “先時先生常謂時亨曰斯道之運永在於北方也 擇定南北之接後曰吾必爲北接去矣云云”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77-278.

95) 박맹수는 ‘북도중주인’이라는 『도원기서』의 표현부터 동학 도통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해월이 동학 도통의 정통성을 상징하기 위하여 1880년대에 북도 대신 북접을 사용하였음을 주장하였다. 표영삼은 ‘북도중주인’이란 표현은 경주 이북 지역의 접을 관할하는 책임자라는 뜻이고, 북접이라는 표현은 동학이 곧 북접이고 북접이 곧 동학이라는 인식에서 사용되었다고 보았지만, ‘북도중주인’이라는 직명이 북접주인으로 되었음은 부정한다. 박맹수는 ‘북도중주인’ 임명과 도통전수가 실재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표영삼은 실재했다는 전제에서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는 듯하다. 박맹수의 전제는 『수운문집』의 정확성을 인정하며, ‘북도중주인’ 임명과 도통전수가 후대의 주장이며 해월 추종 세력의 의도라는 것이고, 표영삼은 『도원기서』의 정확성을 주장하며 이것이 모두 교단 내에서 수용된 공식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앞서 『수운문집』이 공식적인 사실 기록에 부합하고, 『도원기서』는 해월의 기억에 의존한 수정 기록임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수운은 해월을 ‘북도중주인’으로 인정했지만, 비공식적인 일이었고, 해월에 대한 공식적인 도통 전수는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지역을 의미하는 북도중이 해월의 지도체제 아래에서 정통성의 상징으로 재해석되면서 북접으로 대치되었고, 수운과 해월에 관련된 다른 일화들이 도통 전수의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의미이다. 박맹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대한 재검토」, 『동학연구』 9ㆍ10 (2001), pp.111-112; 표영삼, 「접포조직과 남북접」, pp.116-117 참조.

96)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6』 (서울: 한글학회, 1970), p.203 참조.

97) 이에 대해서는, 최종성ㆍ박병훈 역주, 『시천교조유적도지』 (서울: 모시는사람들, 2020), pp.147-148 참조.

98) 박맹수는 이 치제를 새 제사 의례의 창설로 평가하지만, 표영삼은 기존의 치제를 수정한 것으로 평가한다. 필자는 표영삼의 견해에 동의한다. 당시 해월의 권위는 새로운 의례를 만들 정도로 강할 수 없었다. 이는 1879년 4월에 해월이 구성제를 인등제로 변경하기 전 도차주인 강수에게 의견을 물은 바로도 입증된다. 박맹수, 「최시형 연구」, p.84;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pp.66-68, p.92 참조.

99) 1875년 10월의 제사에서 의복을 선도 복식으로 변형한 것은 수운 당대에는 없었던 것이며 수운의 유불선에 대한 가르침을 해석한 것이다. 또한 1878년 7월, 수운 당대에는 서당의 개강, 집단적인 학습활동, 문사들의 사장 모임의 맥락에서 활용되었던 접을 천명과 천운에 따라 도를 강하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재해석하였다. 1877년 10월 해월이 구성제를 새롭게 실행하였는데 이는 수운 당시의 치제를 재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1879년의 인등제의 경우 인등 의식으로 제사를 대신한 것으로 수운의 의례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해월은 수운의 친견 제자였던 강수에게 인등제에 관한 의견을 물었고 이에 대해 강수는 “도의 진원이 형(해월)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63, p.269, p.275;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pp.83-95 참조.

100) 해월에 의해 의례가 정립되고 변경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89-94;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pp.73-95 참조.

101) 여기에 관해서는 부록 <표 17>~<표 20> 참조.

102) 목정균은 동학에서 해월이 지녔던 구심력을 포착하고 이것이 집단의 응집력을 강화하여 동학의 운동역량을 고도로 결집하였다고 평가한다. 이 구심력에 의한 반발로 원심력이 발생하여 1893년 교단 노선의 분열이 발생하였고 결국 동학혁명에 이르렀다고 분석하고 있다. 목정균, 「동학운동의 구심력과 원심작용 : 동학교단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한국사상』 13 (1975), p.242 참조.

103) 1875년 9월 해월은 결의형제인 강수, 전성문과 함께 수운의 초기 제자인 신녕접주 하치욱을 방문했고, 용담으로 가서 역시 초기 제자인 수운의 장질인 맹륜을 만났다. 이러한 행보는 정통성을 확보하여 흩어진 접과 교인들을 통합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동경대전』 각판 시 수운의 친견 제자인 강수, 전시황 그리고 전시봉이 감역과 교정으로 참여했고, 정선접, 인제접, 청송접 등 수운 당시 접이나 접주가 존재하지 않던 지역의 접들이 발문에 이름을 올린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62, p.279 참조.

104) 수운의 대구 심문 기록과 관련하여, 『도원기서』만이 동학도들의 수운에 대한 존경심, 해월의 수운 옥바라지, 해월의 도피, 수운의 해월 도피 명령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해월의 도통 전수를 명확히 하는 『대선생주문집』이 이 내용을 고의로 삭제할 이유가 없으므로 『도원기서』가 정보들을 추가하면서 문구를 수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해월과 극소수만이 알 수 있었던 일이 『도원기서』에만 수록되었다는 점과 그 내용이 해월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지막까지 수운의 곁을 지키려 하였고, 이에 수운이 해월의 도피를 명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도원기서』는 도피한 해월의 행보를 정당화하는 입장에서 편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도원기서』의 편찬 시기에 해월의 권위가 명확해졌음을 의미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09-210 참조.

105)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65-266, pp.275-276; 「천도교서(Ⅱ)」, 『아세아연구』 5-2 (1962), p.298, p.302; 황선희, 『동학ㆍ천도교 역사의 재조명』 (서울: 모시는사람들, 2009), pp.54-65; 박창동, 앞의 책, p.66 참조.

106) 한국종교연구회, 앞의 책, p.286 참조.

107)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교운 1-9.

108) 같은 책, 행록 1-23, 공사 2-19, 교운 1-15, 교운 1-58, 권지 1-33, 예시 60 참조.

109) 김상기의 교감본 『수운문집』인 『수운행록』에는 11대손과 13대손이 병기되어 있다. 교감에 활용된 용강본 『대선생주문집』에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단곡본이나 계룡본 『수운문집』에는 13대손으로 기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주동학교당 소장 『수운문집』에는 최예(崔汭)의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상기, 앞의 글, p.178; 『대선생연혁사』 (상주동학교당소장), p.1 참조.

110) 조성환 앞의 글, pp.222-226 참조.

111) 김용옥, 앞의 책, p.87; 조성환 앞의 글, p.225 참조.

112) <그림 1>의 자료는 천도교도서관에 단곡본을 요청하여 받은 것이지만 실제 내용을 비교한 결과 도곡본으로 추정된다.

113) ‘신유교로서의 동학교문’이라는 정의의 근거가 된 주장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동학의 우주론이 성리학의 전통적 이기론 패러다임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교적이라는 지적은 박성주와 김용휘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조경달은 수운의 동학이 주지주의적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나 결코 반 유교적이지 않았고, 유교의 인의예지와 삼강오륜을 선험적으로 절대화하였음을 주장한다. 즉 중심 윤리사상이 유교에 의존하고 있으며 공자에 대항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공자의 계승자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수운이 자신의 고향 구미산을 소중화라고 한 것으로 본다면 동학이라는 명칭에서 보이는 ‘동국의식’은 탈중화라기 보다는 ‘소중화’의 재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조경달의 주장은 수운이 기존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학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이를 혁신하려 한 것이며 따라서 전통 유교사상의 발전 맥락에서 수운의 사상이 연구되어야 한다는 조용일, 배상현, 박성주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박성주, 「동학의 창도와 기존 종교와의 관계」, 『동학연구』 28 (2010), pp.23-28, p.43; 김용휘, 「최제우의 시천주에 나타난 천관」, 『한국사상사학』 20 (2003), p.238; 조경달, 앞의 책, pp.48-52; 조용일, 「근암에서 찾아본 수운의 사상적 계보」, 『한국사상』 12 (1974), pp.80-115; 배상현, 「수운 최제우의 사상고(思想考)」, 『동학연구』 2 (1998), pp.129-156 참조.

114) 후대의 문헌일수록 수운에 대한 신비화가 강화됨은 조동일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조동일, 앞의 책, pp.126-176 참조.

115) 사광(師曠)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진평공(晉平公) 때 악사(樂師)를 지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는데, 음률(音律)을 잘 판별했고 소리로 길흉(吉凶)까지 점쳤다는 말이 전하는데 ‘사광지총(師曠之聡)’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을 정도로 총명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16) 수운은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총명(聰明) 사광(師曠)이오”라고 하였으며, 수덕문(修德文)에서는 “정성이 지극한 아이는 다시 사광의 총명도 부러워하지 않더라”라고 하여 총명이라고 하면 사광을 손꼽았다. 천도교중앙총부 편, 『천도교경전』 6판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2008), p.53, p.179 참조.

117) 이에 대해서 필자는 김용옥의 주장에 동의한다. 김용옥, 앞의 책, p.94 참조.

118) 조성환, 앞의 글, p.226 참조.

119) 「본교역사」,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438;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391 참조.

120) 『천도교서』는 말미에 「편집여언」을 게재했는데 다음과 같다. “布德61년 4월 1일 編終. 1. 本書는 天道敎敎理臨時講習會員의 요구에 應하야 수집함 1. 本書는 時間의 短縮함에 인하야 編輯上 多少 不完全한 遺憾이 유함. 1. 本書는 後日 敎書 大成의 原稿 資料에 萬一의 助가 될 줄로 自信함.” 따라서 1920년 4월 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도교서 3」, 『아세아연구』 6-1 (1963), p.455 참조.

121) “의(意)를 선도(禪道)와 역수(易數)에 유(留)하였으나”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391.

122) “일즉 禪道와 卜數에 留意하시다가 小하다하야 爲치 안이하시고” 「천도교서」, 『아세아연구』 5-1 (1962), p.211.

123) 1933년 간행된 『천도교창건사』에는 “그날로부터 조선이래로 숭봉(崇奉)하든 유학(儒學)을 숙고하엿으나 아무 소득이 없음으로 보든 유서(儒書)를 화중(火中)에 던져버리고 … 다시 불서(佛書)를 연구한 후에 이어 같으되 … 최종으로는 당시 서양으로부터 새로 수입된 기독교를 연구하섯으나 또한 소득이 없음으로 … 음양(陰陽)복술(卜術)의 글까지도 연구하엿으나 필경은 하나도 창생을 건질 큰 도(道)가 아니라 하시고 … ”라 기록되어 있고, 1940년 간행된 『동학사』에는 “ … 일찍 유도(儒道)와 불도(佛道)와 선도(仙道)와 야소설(耶蘇說)이며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모도다 섭렵하여보왔었다 그러나 한가지도 일찍 마음속에 허락(許諾)을 받지 못하여 … ”로 기술되어 있다.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경성: 천도교중앙종리원, 1933), pp.3-4; 오지영, 『동학사』 (경성: 영창서관, 1940), p.2 참조.

124) 수운은 자신의 도가 하은주 삼대의 이치와 통하며 공자의 도와 대동소이함을 밝혔다. 이는 유학의 성인들이 내놓은 천도를 다시 실천하자는 맥락으로도 독해된다. 그의 사유가 근본적으로 유교적인 것이었음을 밝히는 연구로는 조용일, 배상현, 조경달, 박성주의 논문이 있다. 다음 수덕문의 내용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察其易卦大定之數 審誦三代敬天之理 於是乎 惟知先儒之從命 自歎後學之忘却 修而煉之 莫非自然 覺來夫子之道則 一理之所定也 論其惟我之道則 大同而小異也 去其疑訝則 事理之常然 察其古今則 人事之所爲 [주역괘의 대정수를 살펴 보고 삼대적 경천한 이치를 자세히 읽어보니, 이에 오직 옛날 선비들이 천명에 순종한 것을 알겠으며 후학들이 잊어버린 것을 스스로 탄식할 뿐이로다. 닦고 단련하니 자연한 이치 아님이 없더라. 공부자의 도를 깨달으면 한 이치로 된 것이요, 오직 우리도로 말하면 대체는 같으나 약간 다른 것이니라. 의심을 버리면 사리의 떳떳한 것이요, 예와 지금을 살피면 인사의 할 바니라.]” 천도교중앙총부 편, 앞의 책, pp.48-49; 조용일, 앞의 글, pp.80-115; 배상현, 앞의 글, pp.129-156; 조경달, 앞의 책, pp.48-54; 박성주, 앞의 글, pp.23-28 참조.

125) 조선조 문헌 상의 사용 빈도를 분석하면 『대선생주문집』보다 『수운문집』의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126) 『대선생연혁사』 (상주동학교당소장), p.1 참조.

127)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타기(打棄)’는 ‘구타하고 유기한다’라는 뜻으로 1회 사용되었지만 ‘타기(唾棄)’는 ‘더럽게 생각하여 돌아보지 않고 버린다’라는 뜻으로 9회 사용되고 있다.

128)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p.131-133, pp.228-230;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8-9, pp.40-47; 박맹수, 「해제」, pp.8-9 참조.

129) 표영삼, 「수운대신사의 생애 : 년대에 대한 새로운 고증」, p.95 참조.

130)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p.131-133, pp.228-230; 표영삼, 『동학 1: 수운의 삶과 생각』, pp.208-209 참조.

131) 박하선의 아들이 영해 민란에 관여되었을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이는 표영삼이며, 그 후로 박맹수와 성봉덕은 물고된 박사헌(박영관, 박상제)이 박하선의 아들이라고 비정하였다. 특히 성봉덕은 박사헌이 1871년 당시 상제, 즉 상중이었음을 근거로 박하선이 1869년 사망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김기현은 향토사적 연구를 통해 이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표영삼, 「동학의 신미 영해 교조신원운동에 관한 소고」, 『한국사상』 21 (1989), pp.149-151; 박맹수, 「최시형 연구」, p.63; 성봉덕, 앞의 글, pp.128-129, p.148; 김기현(편저), 『최초의 동학혁명 : 병풍바위의 영웅들』 (서울: 황금알, 2005), p.40, p.66 참조.

132) 김주희에 관해서는 최원식의 조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최원식에 따르면 김주희는 공주 출신으로 부친인 윤집(1823~1881)이 수운 문하에 입도하였다고 한다. 동학혁명(1894)을 전후로 속리산에 입산하여 수도하였고, 1904년 정수기를 옹립하여 상주 화북면 장암리에 교당을 세우고 경천교를 설립하였으나, 1908년 정수기와 결별한 후 속리산에 다시 은거한 후에 1915년 상주군 은척면 우기리에 교당을 설립하고 동학본부라 하여 동학교를 설립한다. 1922년 조선총독부 공인을 받은 후 1933년까지 각종 동학 경전을 비롯하여 총 40책에 이르는 방대한 간행사업을 전개하였으나, 1936년 공인이 취소되고 1944년 김주희도 사망하였다. 최원식, 「동학가사 해제」, 『동학가사 Ⅰ』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pp.3-9 참조.

133) 후에 해월 도통 전수의 중요한 근거로 해석된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의 시는 『수운문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134) “ … 心自不平 在路默思則 完然坐定于朴大汝家矣 將向朴家 纔出數里 士吉急來 搖手呼之曰 今往何處 答曰 大先生座定于大汝家 今往郍家也 士吉曰聞於何人乎 答曰 心之所感 自然有知 從何得聞乎 士吉然則 吾先去矣 答曰先後無間 … ”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71 참조.

135) 박맹수는 『도원기서』의 기술을 해월이 홀로 수운을 찾아간 것으로 해석하여 해월 중심의 기술로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해월 중심의 기술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해월만이 홀로 수운을 찾아간 것으로 해석할 근거가 없다고 본다. 박맹수, 「최시형 연구」, p.42 참조.

136) 같은 글, p.190 참조.

137) 박맹수는 『수운문집』이 해월을 비롯한 여러 제자가 문답 과정에 참여했음을 알려주는 데 비하여, 『도원기서』는 해월 혼자 수운과 문답하고 있다고 하여 해월의 위치와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42-43 참조.

138) 이 장면과 관련하여 세 문헌 외에 가장 앞선 기록은 1906년 필사된 『대선생사적』의 「해월선생문집」인데 ‘선생이 공수하여 공경히 고하기를[先生拱手敬告曰]’이라는 문구이다. <표 5>의 대화 부분에 들어가 있는데 해월이 수운을 보자마자 예를 갖춘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과 같은 중복 표현이 없다. 1920년의 문헌인 『천도교서』는 『도원기서』와 유사하게 “경상(해월)이 또 절하고 고하니[慶翔이 且拜告曰]”라 되어 있지만 보다 상세한 대화로 이루어져 중복되는 표현은 없다.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72; 「천도교서」, 『아세아연구』 5-1 (1962), p.214 참조.

139)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71 참조.

140) 당시 해월의 상황에 대해서는 박맹수가 여러 문헌 자료를 비교 검토하여 상세히 밝혀 놓았다.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27-40 참조.

141)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0 참조.

142) 수운이 요청하는 금전적인 문제를 해월의 주선 하에 접의 도인들이 힘을 모아 해결하는 방식은 다음의 일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大先生曰淸河李敬汝被人陰害至於定配宜可納續兔配誰可善爲處卞耶 先生曰當自下措處矣與李乃兼往寧德接主吳明哲家收合三百餘金納續二百五十兩用費五十餘兩圖免李敬汝定配歸告丈席 [대선생이 이르되 “청하에 사는 이경여가 음해를 입어서 귀양을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땅히 납속해서 귀양을 풀어주어야 할 텐데 누가 이를 처리하는 게 좋은가?”라고 하였다. 선생이 가로되 “마땅히 제가 조치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이내겸과 함께 영덕 접주 오명철의 집에 가서 3백여의 돈을 모아 2백50냥을 납속하고 비용으로 50여 냥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이경여의 귀양살이를 풀어주고 장석에게 아뢰었다.]” 같은 글, p.355 참조.

143) 표영삼은 『수운문집』의 기록과 동일한 맥락에서 접조직의 태동을 설명하고 있다. 즉 포덕이 시작된 1861년 6월부터 전도자와 수도자의 인맥에 따른 조직, 즉 접이 구축되었고 초기에 주로 인명으로 ‘아무개 접’으로 불리다가 1862년 12월 그믐날 접주 임명으로 공식화되었다고 한 바 있다. 표영삼은 『수운문집』의 신빙성을 부정하면서도 접에 관해서는 『수운문집』을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표영삼의 관점에서도 <표 6>의 『수운문집』 내용이 논리적이라는 반증이다. 표영삼, 『동학 1: 수운의 삶과 생각』, pp.222-223 참조.

144) 『대선생주문집』을 다른 문헌과의 교감 없이 번역하면 문의가 통하지 않는다. 『수운문집』을 통해 교감하면 문의가 잘 통한다.

145) 「본교역사」에는 전시황의 일화가 전황의 일화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교역사」는 이 일화를 기록하지 않은 『도원기서』가 아니라 『대선생주문집』을 참고하여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대선생주문집』이 전시황(全時晄)을 전황(全晄)으로 표기한 후 옆에 시(時)자를 부기하기도 하고 황(晄)으로도 오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본교역사」가 『수운문집』보다 『대선생주문집』을 저본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현대에 와서도 『대선생주문집』을 번역하면서 교감을 하지 않아 전시황(全時晄)을 전광으로 표기하여 마치 전시황과 전광이 다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수정이 필요하다. “八月에全晄이來謁이어大神師ㅣ書贈利行二字 사表其遠來之誠 시다.[8월에 전황(全晄)이 찾아와서 뵙자, 대신사가 ‘이행(利行)’ 두 글자를 써서 주시면서 멀리서 찾아온 정성을 드러내 칭찬하였다.]” 「본교역사」,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448-449; 「대선생주문집」, 『한국민중운동사자료대계 : 1894년의 농민전쟁 부(付) 동학관계자료 1』 (서울: 여강출판사, 1985), p.152; 「대선생주문집」,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3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5), p.28. 『천도교회사초고』의 김광응(金廣應) 역시 전시황(全時晄)이 필사되면서 오기된 것인데, 교단의 인명사전까지도 영향을 미쳐 김광응을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오기의 근거는 <표 14>에서 상술한다. “ … 김광응(金廣應)에게 이행(利行) 이자(二字)를 서수(書授) 하시다.”「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401; 『동학천도교인명사전』 (서울: 모시는사람들, 1994), p.127 참조.

146) “繼適及先生誕辰 鑄銅接中 具酒饌油果幾器 魚脯數束 進奉於宴席 [이때 선생 탄신을 위해 주동접에서 술과 음식, 약과 몇 그릇, 어포 몇 묶음을 마련해서 연석에 바쳤다.]”, “十一月 鑄銅時晄應先生八節隻對 其日十三日也 拜先生各言隻對 先生觀之微笑曰 … [11월에 주동접의 전시황이 선생의 팔절척대에 응하였으니 그날이 13일이다. 그는 선생께 배례하고 마디마디 척대하니, 선생께서는 이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시며 가로되 … ]” 김상기, 앞의 글, p.181;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9 : 동학농민운동편』, p.279 참조.

147)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78-279 참조.

148) 같은 글, p.279 참조.

149)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전시황이라는 인물의 등장과 그 위상의 중요성으로 인해 수운의 친견 제자이며 해월의 의형제인 전성문이 전시황으로 개명하였다는 주장이 전개된다. 2004년 장영민은 전성문이 개명하여 전시광이 되었으며, 따라서 『수운문집』의 편찬 시기는 해월이 시(時) 자가 있는 이름으로 총 12명을 개명하기 시작한 1875년 10월 이후라고 주장했다. 전시황을 전시광으로 오기하고 있지만, 장영민의 연구는 전시황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수운문집』의 편찬시기를 추적하고, 기사의 지역 편향성을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중요하다. (장영민, 앞의 책, pp.69-70 참조). 장영민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수운 행장’의 집필 시기를 1875년 10월 이후로 볼 이유는 없다. 필사 과정에서 전성문을 개명된 이름인 전시황으로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수정은 필사 과정에 당사자가 직접 관여했음을 반영하는 증거일 수 있다. ‘행장’ 편찬을 위한 수단유사(修單有司) 분정(分定)에서 친견 제자로 추정되는 전시황과 전시봉이 제외되었는데,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에 전시황, 전시봉 관련 기사가 없다는 사실은 당사자의 편집 참여 여부가 기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윤석산(역주), 앞의 책, pp.265-273 참조. 문헌상 명확히 시(時)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개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들은 총 3명으로 최시형(최경상), 강시원(강수), 유시헌(유인상)이다. 이외의 개명인 명단은 전해지는 바가 없지만 표영삼은 3인 외에도 시(時)자가 들어간 이름을 지닌 교인이 10명 더 나타난다는 것을 밝혔다. 그중 전 씨는 전시황 외에도 전시명, 전시봉이 있는데 전성문이 수운의 친견 제자로 최시형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교단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전시황이라는 추론은 개연성이 있다. 같은 책, p.236; 표영삼, 『동학 2: 해월의 고난 역정』, p.78 참조. 전성문의 교단 내 위상이나 그 역할에 대해서는 박맹수의 견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성문(全聖文)이 수운 체포 시 옥바라지에 참여한 전석문(全碩文)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전성문은 『도원기서』의 편집자인 강수와 가까운 관계였기에 강수가 이름을 잘못 기재할 가능성은 크지 않고, 전석문은 주로 김석문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헌순의 동학 조사 내용 보고에 등장하는 전석문(田錫文)이 전성문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전석문(田錫文)은 수운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죄가 입증되지 않아 정상 참작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전성문은 수운의 친견 제자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전성문이 수운과 같이 체포되었다 석방된 인물일 경우 친견 제자로서 그 교단 내의 영향력은 더 컸을 것이다. 『수운문집』에 또 다른 친견 제자인 전시봉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전성문이 전시황인지 전시봉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16, p.241, p.259;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78-81; “田錫文等, 竝無眞贓, 合有參量.” 『高宗實錄』, 1年 (1864), 2月 29日 참조.

150) “吾道之開接云者是何謂也 先生時有罷接之理 故來今開接是非文士之開接也 … 是以開於天而接於天則 受運於天受命於天 開接之理 是豈不宜哉 [우리 도의 개접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선생이 계실 때 파접의 이치가 있었기에 지금 개접 하니 이는 문사의 개접은 아니다. … 이로써 하늘에서 열고 하늘에서 접하니 하늘에서 운을 받고 명을 받는 개접의 이치가 어찌 의당치 않겠는가?]”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69-270; “포덕 19년(1878년) 무인(戊寅) 7월 25일 신사 접소(接所)를 유시헌가에 정하시고 각지의 도제(徒弟)에게 개접(開接)의 의(義)로써 문을 발(發)하시며 왈(曰) 오도(吾道) 중에 개접이라 명하는 것은 결코 근일(近日) 문사(文士) 상회(相會)하여 시부(詩賦)를 제(製)하는 예(例) 아니라. 대신사 재세의 시(時)에 기수(氣數)의 질대성쇠(迭代盛衰) 하는 리(理)를 추(推)하여 기(旣)히 개접 파접의 유(喩)있었는 고(故)로 오(吾) 또한 접을 개하노니 제군은 차의(此意)를 체(體)하라 개접 시에는 각지 도인들이 상회(相會)하여 진리를 연구하는 제도니 무인 갑진시에 신사 강도하사 … ” 「천도교서」, 『아세아연구』 5-1 (1962), p.227.

151) 『대선생사적』의 경우 수운이 해월을 북접 주인으로 세운 이후 왕래하는 선비들은 매번 해월을 거쳐서 오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四月盈德人姜洙來問修道之節答以信誠敬三字是時會士滿席 大先生曰今以崔慶翔定北接主人自此以後來往之士每先由劍谷而來也至五月寧海李進士直入龍潭 大先生問知不由劍谷主人家而來大責曰君藉勢矜文能無禮乎李進士謝退往主人宅謝過而去.”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2.

152) 『대선생사적』에서 파접 시점은 6월 초순이며, 「본교역사」, 『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에는 파접 기록이 없다. 『천도교서』는 7월 23일을 해월을 ‘북접주인’으로 정한 날로만 기록하고 있다. 『시천교종역사』와 『시천교역사』에는 7월의 파접 이후, 동월 23일에 해월을 ‘북접주인’으로 임명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같은 글, pp.352-353; 「본교역사」,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448-449;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p.401-402; 「천도교서」, 『아세아연구』 5-1, p. 215; 박창동, 앞의 책, p.21; 최유현, 『시천교역사』 (경성: 시천교총부, 1920), p.33 참조.

153) 『도원기서』를 편찬한 강수가 『대선생주문집』을 보았다면 이 문제점에 대해서도 인지했을 것이다. 강수가 수단소에 모여진 자료를 ‘두미가 착잡(錯雜)하고 전후가 문란(紊亂)’하다고 평가한 데에는 이 모순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강수가 『도원기서』를 편찬하면서 날을 특정하지 않고 8월 어느 날 수운이 「흥비가」를 지었다고 기록한 것도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아야 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82 참조.

154) 김상기, 앞의 글, pp.177-178 참조.

155)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41-47 참조.

156)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p.228-230 참조.

157) 표영삼 역시 북도중이라는 말을 경주 이북 지역의 도중(道中)이며 ‘북도중주인’ 임명을 경주 남쪽은 수운이 직접 담당하고 경주 북쪽은 해월이 분담하여 담당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표영삼, 『동학 1: 수운의 삶과 생각』, p.233 참조.

158)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13-289 참조.

159) 해월을 북도중주인이라 지칭하지 않고 주인으로

160) <표 12>를 참조.

161)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63, p.277 참조.

162) “四月 … 大先生曰今以崔慶翔定北接主人自此以後來往之士每先由劍谷而來也 [4월 … 대선생 이르기를 ‘지금부터 최경상을 북접 주인으로 정하였으니 이후로는 내왕하는 이들은 매번 먼저 검곡을 경유하고 오라’고 하였다.]”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2.

163) 1908년 김세인에 의해 필사된 『도원기서』는 원본과 다른 부분이 여럿 있는데 예를 들면 천성산(天聖山)을 천상산(天上山)으로, 표녀(漂女)를 표모(漂母)로 필사한 부분이 있다. 표기를 두 가지 모두 혼용한 것으로 본다면 필사 과정의 오탈자라기보다 『도원기서』 편찬 당시의 여러 저본을 참고하여 김세인이 수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소가(咏霄歌)’는 원본과 다른 부분 중 하나인데 이것이 『수운문집』과 일치한다는 점은 필사 시에 참고한 저본이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이었음을 시사한다. 작은 글씨로 ‘영소가(咏霄歌)’와 바로 아래에 ‘무료지제(無聊之際)’를 부기하고 있는데 『수운문집』과 일치한다. 박맹수, 「해제」, p.4; 『최수운선생문집도원기』, p.36; 「도원기서」, 『동학사상자료집』 1, pp.162-163, p.176, p.182; 박맹수,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p.88;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180-181, p.193, p.199.

164) 「동학론」은 『高宗實錄』 35년(1898) 7월 18일 법부대신 조병직이 해월의 처형을 진주(進奏)한 곳과 『대한계년사』 권3 209항에 나타난다. 두 자료 모두 동학의 원문을 제1편 「포덕문」, 제2편 「동학론」, 제3편 「수덕문」, 제4편 「불연기연문」으로 나열하고 있다. (東學原文第一編《布德文》ㆍ第二編《東學論》ㆍ第三編《修德文》ㆍ第四編《不然其然文》) 해월의 심문 과정에서 나온 기록이므로 1898년까지도 「논학문」은 「동학론」으로 지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高宗實錄』, 35年 (1898), 7月 18日; 『大韓季年史』 卷之三, 高宗皇帝 光武二年 戊戌, 七月 209項;《한국사데이터베이스》, 「木川版 東經大全 - 詠霄」 (http://db.history.go.kr, 2023. 11. 12. 검색); 『동경대전』 (1880, 독립기념관 소장 1-012968-000) 卷之六 咏霄 참조.

165) 윤석산, 앞의 글, pp.217-219; 『동경대전』 (1880, 독립기념관 소장 1-012968-000) 卷之一 東學論 참조.

166) “八月十三日 先生與六七士同往拜謁 大先生曰節日在邇緣何來耶 先生曰爲陪過節 大先生有喜色”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3.

167) “ … 至五更 大先生使諸生各歸寢所特命先生入室 … ” 같은 글, p.353. 「대선생사적」은 해월만 조화를 체험했다는 점에서는 『도원기서』와 일치한다.

168) 박맹수, 「최시형 연구」, pp.45-47 참조.

169)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3.

170) 대표적으로 청하 권극중(權克中, 1585~1659), 성호 이익(李瀷, 1681~1764), 제산 김성탁(金聖鐸, 1684~1747년)의 문집에서 秋聲入樹가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가장 이른 기록은 1700년대 초이다. “ … 秋聲入樹 夕涼生墟 … ”《한국고전번역원》, 「靑霞集文集」 序, ‘息營堂序’. (http://db.itkc.or.kr, 2021. 1. 7. 검색); “ … 秋聲入樹聞先最 懷仰高風響有蟬 … ”《한국고전번역원》, 「星湖先生全集」 卷之六 詩, ‘步金判監寄來韻’ (http://db.itkc.or.kr, 2021. 1. 7. 검색); “ … 露氣橫江冷 秋聲入樹哀 … ”《한국고전번역원》, 「霽山先生文集」卷之一 詩, ‘次密庵韻’. (http://db.itkc.or.kr, 2021. 1. 7. 검색).

171) 율리(栗里)는 동진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 潛 365~427)의 고향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곳이기도 하다. 율리의 집 뜰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자신을 오류선생이라고 일컬었다.<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는 도연명의 저작인데 “五六月中 北窓下臥 遇凉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 [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에 누워있으면 서늘한 바람이 이따금 스쳐 지나가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복희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라는 내용이다. 이를 인용하여 이태백은 <희증정률양(戱贈鄭溧陽)>을 지었는데 이에 따라 ‘청풍’, ‘북창’, ‘율리’는 도연명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이 시는 『고문진보』에 수록되어 있었으므로 『수운문집』 집필자는 이를 참조하였을 수 있다. 『古文眞寶 前集』 卷一, ‘戱贈鄭溧陽’; 『古文眞寶 後集』 卷一,‘歸去來辭’; 『陶淵明集』 卷八, ‘與子儼等疏’.

172) 소동파의<전적벽부(前赤壁賦)>에 임술년 7월 적벽에서 선유(船遊)하다가 “비선(飛仙)을 끼고 한가로이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 길이 마치려 한다[挾飛仙以遨遊 抱明月而長終].”라고 읊은 구절이 있다. 『古文眞寶 後集』 卷八, ‘前赤壁賦’ 참조. 또한<후적벽부(後赤壁賦)>에는 신선과 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임술년 10월 보름달 밝은 밤에 객(客)과 함께 적벽(赤壁) 아래서 선유를 하노라니, 한밤중 사방이 적막한 때에 마침 학 한 마리가 강을 가로질러 동쪽에서 날아와 울면서 소동파가 선유(船遊)하는 배를 스쳐서 서쪽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객은 가고, 소식은 잠이 들었었다. 꿈에 한 도사(道士)가 깃으로 지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임고정(臨皐亭) 밑을 지나다가 소식에게 읍(揖)하며 말하기를 “적벽의 놀이가 즐거웠소?” 하므로, 그의 성명을 물어보니, 그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소식이 말하기를 “아, 슬프도다. 나는 알겠도다. 지난밤에 울면서 나를 스쳐 날아간 그가 바로 그대가 아닌가?”라고 하자, 그 도사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소식 또한 놀라 잠에서 깨어 문을 열고 내다보니,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古文眞寶 後集』 卷八, ‘後赤壁賦’ 참조. 주자의<서현원삼협교(棲賢院三峽橋)>의 “노선(老仙)에게 현묘한 시구가 있어 천고에 기이하니, 여전히 학이 되어 날아와 물결 타고 밝은 달을 희롱함을 상상하네. [老仙有妙句 千古擅奇崛 尚想化鹤来 乘浣弄明月]”라는 시구도 소동파와 관련되어 해석할 수 있다. 주희, 『국역주자시선』, 서정기 옮김 (파주: 한국학술정보, 2010), pp.293-294 참조.

173)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 모두 <처사가>를 1861년 4월경에 용담가, 교훈가와 같이 지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공식 동학 경전에서는 제목을 찾을 수 없다.

174) 《동학농민혁명사료아카이브》, 「경주판 동경대전 해제」 (http://e-donghak.or.kr/archive, 2023. 11. 12. 검색) 참조.

175) “淸風之徐徐兮 五柳先生覺非 淸江之浩浩兮 蘇子與客風流”《한국사데이터베이스》 『東經大全』 木川版, 和訣詩. (http://db.history.go.kr, 2021. 1. 5. 검색); 『동경대전』 (1880, 독립기념관 소장 1-012968-000) 卷之五 和訣詩.

176) <처사가>는 1880년에 간행된 경진 인제판, 1883년에 간행된 계미 목천판 『동경대전』에도 제목이 나타나지 않기에 문헌을 참고하여 후대에 가필되기는 어렵다. 수운의 친견제자들만이 처사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177) 『高宗實錄』, 1年 (1864), 2月 29日 참조.

178) 이것으로 본다면 『수운문집』은 병인양요로 수운의 예언이 일부 실현된 1866년 이후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79)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4; 박창동, 앞의 책, p.23; 「천도교서」, 『아세아연구』 5-1, p.219;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402 참조.

180)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6』, p.203 참조.

181)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40-241 참조.

182) 『도원기서』는 해월 외 제자들의 기록을 대부분 배제하고 있지만 영덕 접과 관련된 일화는 배제하지 않는다. <표 13> 이전의 내용 중 음해를 입은 청하 사람 이경여를 영덕 도인들이 힘을 모아 구해준 일화는 세 문헌이 같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於是淸河人李敬汝結幕山谷出入浪藉被人陰害而遂其營廉以至定配 獨盈德道中收合二百餘金納贖解配 先生聞之特爲讚稱矣 盈德人劉尙浩體當百金以爲接賓之資其誠可佳云耳” 『대선생사적』의 「수운선생사적」에도 해월이 직접 영덕 접주 오명철의 집에 가서 돈을 모아 이를 해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영덕 접주는 오명철이지만 오명철의 연원은 해월이다. 이는 『대선생사적』의 「해월선생문집」과 「본교역사」, 『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에 기록되어 있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오명철을 수운이 직접 포덕했다고도 기록된된 곳이 있어 자체적으로도 모순되지만 영덕이 경주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북접에 포괄되고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는 해월의 지시를 영덕 접이 받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해월이 포덕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01;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5, p.373;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p.397-398; 「천도교서」, 『아세아연구』 5-1, p.219 참조.

183) 강수의 개인적인 견해가 드러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전에 선생의 포덕 초기에 차제 도법은 오직 21자가 있을 따름이어서 말이 흘러 닦고 주문이 흘러 외우는 일이 많으니 성덕이 공경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스승이나 가르침을 받음이 없었던 스승이기에 예와 의가 어찌 나타날 것인가? 자고로 스승에서 스승으로 차례로 주는 것 자체에 연원이 있으니 어찌 잘못 전하여 감히 성덕을 그르치리오? 참으로 닦는 것에 실이 있고, 물음으로 닦는 것에 허가 있으니 시일이 지난 후의 허실은 또한 그 사람의 위인 됨에 있으며 또한 그 사람의 정성 됨에 있는 것이다.”

184)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80 참조.

185) 본명은 유인상으로 해월에 의해 시헌으로 개명되었다. 그와 정선 접이 아니었다면 1880년의 『동경대전』의 간행은 많은 어려움에 부닥쳤을 수도 있었다. 박맹수, 「해제」, p.6; 『동학천도교인명사전』, p.991 참조.

186)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63-264 참조.

187) 전시봉의 개명 전 이름은 문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16, pp.276-277, pp.279-280 참조.

188) <표 14>의 『수운문집』 원문을 번역하였다.

189) “又作八節詩輪示使各隻對無 一應對者 大先生慨歎不已” “十一月作不然其然又作八節句”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7, p.359.

190)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김황응(金晃應)은 전시황의 오기이다. “大神師ㅣ作不然其然之辭 시고又作八節詞 시다門人金晃應이就大神師所作八節 야別以己意로作對以進이어大神師ㅣ見之微笑曰吾道中得人이實難이로다” 「본교역사」,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451.

191) “是日에 大神師 不然其然과 八節을 作하시도다 大神師 作하신 八節을 全晩應이 見하고 自己의 意로써 作하여 들이거늘 大神師 微笑曰 道를 見함이 難하다 하시다” 「천도교서」, 『아세아연구』 5-1, p.216.

192) “大神師ㅣ 八節을 作하야 門徒에게 布示하시고 和答을 命하시니 門徒ㅣ 和하는者 無함으로 大神師ㅣ 스스로 解釋하시다”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407.

193) 『대선생주문집』에는 全晄이라는 글자 옆에 時를 추가하고 있어 엄밀하게 오탈자라고 볼 수는 없다. 「대선생주문집」, 『한국민중운동사자료대계 : 1894년의 농민전쟁 부(付) 동학관계자료 1』, p.30 참조.

194)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東學書」 卷二, 水雲齋文集 通章 大先生主文集, p.15b (https://kyudb.snu.ac.kr, 2023. 11. 20. 검색).

195) 「천도교서」, 『아세아연구』 5-1, p.216 참조.

196) 「본교역사」,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449, p.451 참조.

197) 황(晃)의 필기체가 광(廣)과 잘 구분이 안 된다는 점도 오인의 원인일 수 있다.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401 참조.

198) “先時先生常謂時亨曰斯道之運永在於北方也 擇定南北之接後曰吾必爲北接去矣云云”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77-278.

199) 『도원기서』에도 박하선이 이후 수운을 찾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주인’ 또는 ‘북도중주인’이라는 해월의 지위가 도중이나 북도중의 모든 접을 관할하는 지위였다면 영해 접주 박하선이 해월을 거치지 않고 수운을 찾아오는 일은 조직체계에 어긋난다. 해월이 지닌 ‘주인’이나 ‘북도중주인’이라는 지위가 교단 전체나 북도중 전체 접의 주인이 아니라 북도중에 있었던 해월을 연원으로 했던 접의 주인이라고 보아야 박하선의 움직임이 해석된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함에도 『도원기서』의 편찬자가 박하선 관련 기사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 것은 해당 기록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200) 『도원기서』의 ‘북도중주인’이라는 명칭도 『수운문집』의 북도중이라는 표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강수가 직접 저술한 『도원기서』의 해월 관련 기사들은 모두 북접으로만 쓰고 있는데 반해 ‘수운 행장’ 부분에서만 북도중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201) “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 成功幾時又作時 莫爲恨晩其爲然 時有其時恨奈何 新朝唱韻待好風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 春來消息應有知 地上神仙聞爲近 此日此時靈友會 大道其中不知心” 『동경대전』 (1880, 독립기념관 소장 1-012968-000) 卷之五 降訣.

202) 표영삼은 접주로 임명된 많은 제자가 찾아와 세배를 올리고 도의 장래를 묻자 이들에게 계해년에는 어떤 결단과 장래를 타개할 조치를 하겠다는 뜻을 비치고, 모인 접주로서 능히 대도의 앞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나타낸 시로 해석한다. 윤석산은 접주제의 실행과 미래를 읊은 것으로, 라명재는 대도의 장래를 읊은 것으로 보았다. 비결시이기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수운문집』 기사를 참고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즉 ‘去歲西北靈友尋’를 ‘작년에 서북에서 영우를 찾았는데’로 해석하여 기존 해석과 달라지는 것이다. 기존의 해석은 주로 ‘지난해 서북에서 영우가 찾아오니’이다. 천도교중앙총부(편), 앞의 책, pp.90-91; 김대권(편저), 『동학 천도교 용어사전』 (부산: 신지서원, 2000), p.234;《동학농민혁명사료아카이브》, 「경주판 동경대전 해제」 (http://e-donghak.or.kr/archive, 2023. 11. 12. 검색) 참조; 윤석산(역주), 『동경대전』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4), pp.105-106; 라명재, 『천도교 경전 공부하기』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0), pp.94-95 참조.

203) 정귀룡(鄭龜龍)의 원래 이름은 정운귀(鄭雲龜)지만 동학의 문헌 대부분은 정귀룡으로 오기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정운귀로 표기한다.

204) “故臣於今月初九日, 別遣梁有豐及臣從人高英晙等, 直往福述所居處, 使之詳探以來矣. … 故臣於當夜, 秘發本州鎭, 府校卒三十牌, 使梁有豐ㆍ張漢翼ㆍ李殷植等, 率領乘月, 疾馳二十里, 用夜半直搗巢穴, 梁有豐突前先登, 隨後將卒, 奮不顧身, 縛出福述, 又縛弟子二十三名.” 『承政院日記』, 高宗卽位年 (1863) 12月 20日; 『備邊司謄錄』, 高宗卽位年 (1863), 12月 20日.

205) 『고종실록』은 정운귀의 서계를 인용하면서 봉명의 날을 11월 12일 기록하고 있는데 『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을 참고하면 11월 20일을 12일로 오기했음이 분명하다. 『고종실록』에는 생략된 내용인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의 “ … 바삐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튿날인 22일에 출발하여 신분을 감추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 [忙出城外, 翌日是在二十二日, 發行藏蹤秘跡, 星夜馳往]”라는 기록을 본다면 20일이 명확하다. 『高宗實錄』, 卽位年 (1863) 12月 20日; 『備邊司謄錄』, 高宗 卽位年 (1863) 12月 20日 참조.

206) 1908년에 필사된 『도원기서』까지도 이 형식은 유지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07-208, p.211 참조.

207) 『대선생사적』은 “25일에 이르러 대선생이 여러 제자를 물리치고 홀로 골방에 앉아서 촛불을 켜놓고 밤을 지새우면서 앉았다 누웠다 불안해하였다. [至二十五日大先生屛退諸生獨處挾室明燭達夜坐臥不安]”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9 참조.

208) 1940년에 간행된 오지영의 『東學史』가 『승정원일기』를 인용한 20세기 최초의 문헌이다. 오지영, 『동학사』 (경성: 영창서관, 1940), p.19 참조.

209) 『高宗實錄』 8年 (1871), 1月 3日 참조.

210) 대동여지도는 충청도와 화령(化寜)을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충청도가 사용된 것은 대동여지도가 1861년에 목판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世宗實錄』, 地理志, 慶尙道 尙州牧;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二十八, 慶尙道 尙州牧; 『대동여지도』 (서울: 진선출판사, 2019), 八道行政統計, 十五-三 聞慶 槐山 報恩 참조.

211) 장영민, 앞의 책, p.69 참조.

212) 『대동여지도』, 十五-三 聞慶 槐山 報恩, 十六-三 尙州 善山 茂朱;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3』 (서울: 한글학회, 1970), p.146; 『世宗實錄』, 地理志, 忠淸道 淸州牧 참조.

213) 수운이 양반의 생활 규범을 이상화하고 유교적 우민관(愚民觀)을 지녔으며 현실적으로 체제 순응적이었다는 점은 조경달, 앞의 책, p.50, p.52 참조.

214)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61;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 1, p.408;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서울: 천도교중앙종리원, 1933). p.51 참조.

215) 윤석산(역주), 『초기동학의 역사』, p.97 참조.

216) ‘직수이몰(直受而歿)’에서 직수는 적절하게 사용되었지만, ‘진수이몰(眞受而歿)’에서 진수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217) “군자는 허물이 없으면서도 충직함으로써 화를 받음을 비유한 것이다. [君子無辜而以忠直受禍也]” 『詩傳』 國風 王 兎爰. “무도(無道)함에 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횡역(橫逆)이 옴에 한갓 받기만 하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다. [不報無道 謂橫逆之來 直受之而不報也]” 『中庸集註』 中庸章句 十章.

218) 표영삼,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pp.228-230 참조.

219) 박하선이 수운 사후인 1869년경 탄압으로 죽음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삼 형제 모두 1871년 해월이 참여한 교조신원운동인 영해 민란에 관련되어 죽었으므로 그와 관련된 기록 축소는 박하선의 배신에 연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록 축소의 실마리는 그의 장자인 박사헌이 해월을 영해 민란에 끌어들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강수도 그가 박하선의 아들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표영삼, 「동학의 신미 영해 교조신원운동에 관한 소고」, pp.149-151; 박맹수, 「최시형 연구」, p.63; 성봉덕, 앞의 글, pp.128-129, p.148; 김기현(편저), 앞의 책, p.40, p.66;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p.227-228 참조.

220) 『수운문집』에서 해월보다도 더 많이 언급된 인물이 박하선이다. 『도원기서』를 따르더라도 수운이 천주로부터 마지막 제서를 받는 일화는 박하선이 관련되어 있다. 『대선생사적』을 통해 보더라도 1863년 8월 30일 청하인 이경여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 해월보다 먼저 수운에게 가 있었던 인물로 박하선ㆍ백사길ㆍ이사겸ㆍ박대여ㆍ이무중ㆍ최중희가 언급되어 있다. 「대선생사적」,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355 참조.

221)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한국학자료총서 9 : 동학농민운동편』, p.216 참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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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古文眞寶 前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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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眞寶 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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