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종교현상의 전개 과정에서 종통(宗統), 법통(法統) 혹은 도통(道統) 계승은 중요한 변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1) 특히 근대 한국에서 성립된 종교의 경우 도통 승계는 그 종교현상의 전개와 특징 이해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평으로서 기능한다. 기원은 같지만, 도통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2) 따라서 동학 도통 승계 과정의 실제는 수운에서 시작된 동학의 전개를 분석, 이해하고 기술함에 있어서도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다.3)
동학의 도통(道統)은 대부분 수운이 해월(海月)에게, 해월이 의암(義庵)에게 전했다는 기사를 기반으로 논해진다.4) 수운-해월-의암의 순서로 진행된 도통전수를 역사적 사실로 내세워 그 정통성을 세운 후 이외의 도통론을 부가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수운-해월-의암의 도통 계승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다수의 문헌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운에서 기원한 동학계 교단의 종교 지형에서 수운-해월-의암의 도통을 정통으로 보는 천도교가 그 주류를 형성하면서 대부분의 도통 관련 기록이 천도교를 중심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해월과 의암의 시대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학의 도통, 특히 해월의 도통 승계에 관한 동학 교단 내외의 관점과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증산(甑山, 1871~1909)은 그 생존 시기가 해월, 의암의 활동 시기와 겹쳐 있고 그 휘하에 동학도 출신이거나 일진회 활동을 했었던 종도가 많았다. 따라서 증산의 동학 도통에 대한 시각은 당시 동학 내외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증산은 자신의 종교활동이 “참 동학”이라 주장했다.5) 이 같은 증산의 주장은 당대의 동학이 참이 아닌 ‘거짓’이라는 것으로 수운 이후의 동학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증산을 통해 본다면 수운-해월의 도통 담론은 당시 교단 내외로부터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청림교, 동학교, 수운교 등과 같이 수운-해월의 도통을 수용하지 않는 교단이 20세기 초에 성립되었고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6) 이처럼 20세기 초까지 동학의 도통에 대한 비주류 담론이 활발했었다는 사실은 해월의 도통 전수와 관련된 초기 문헌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본 연구는 이러한 동기에서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최초로 나타나는 과정을 문헌을 통해 분석하여 도통 담론의 형성 과정을 알아보고자 기획되었다.
문헌을 통한 해월의 도통전수 연구는 오래전부터 천도교 교학자와 외부 학자 간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논쟁의 맥락과 그 과정은 본 연구의 선행연구에 해당하며 본 글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는 데 중요한 연결점을 제시해 준다. 따라서 선행연구에 대한 검토는 본론에서 논지를 전개해 나가면서 진행할 것이다.
Ⅱ.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 해제 검토
동학의 경전에는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없다.7) 이는 경전에 수록된 수운의 저술이 저작된 시기, 수운은 자신의 부재(不在)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기록은 수운이 처형된 후 생존한 제자들에 의해 그의 저작이 수집되고 행장이 기록 편집되면서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한 시기는 1863년 7~8월이다. 이 시기의 동학을 기록하고 있는 가장 앞선 문헌은 『수운문집(水雲文集)』,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이하 『도원기서』)이다.8)
문제는 세 문헌의 도통전수 관련 기록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해월의 도통전수 기사의 유무에 따라서 문헌의 신빙성과 선후 관계에 대한 대립하는 주장이 전개되면서 어느 문헌이 실제를 보다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선행 문헌인지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해월의 도통 계승 과정의 실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문헌의 성립연대, 정확성, 기술 방향, 문헌에 반영된 신앙체계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해월의 도통전수 담론의 개연성, 형성 과정 및 맥락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연구에서는 세 문헌에 관한 기존 연구에서 발생한 논점들을 확인하고, 문헌 간의 차이를 실제 고증하여 그 성립연대와 선후 관계 및 정확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수운문집』 또는 『대선생주문집(수운재문집)』이라는 서명(書名)으로 불리는 네 개의 필사본을 최초로 고증하고 해제한 이는 김상기이다.9) 그가 네 개의 필사본에 붙인 명칭은 ‘계룡본, 단곡본, 도곡본, 용강본’이며, 김상기는 도곡본과 용강본이 일치하고 누락도 같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단곡본(丹谷本)’을 중심으로 다른 세 개의 본과 대조하여 교정하였다. 문헌을 해제하면서 그는 “원제가 ‘수운문집’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그 내용으로 보아 최수운[濟愚]의 행장 또는 연보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보고 이것들을 한 계열의 문헌으로 보고 ‘수운행록(水雲行錄)’이라고 명명하였다.10) 실제 이 문헌들은, 비록 ‘문집’이라는 용어가 있지만, 수운의 글을 모은 문집이 아니라 수운(1824~1864)의 일대기를 삼인칭 시점으로 기술한 행장이다. 하지만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내용상 차이가 있기에 본 글에서는 『수운행록』이라는 별칭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으로 구분하고자 한다.11) 『수운문집』 또는 『대선생주문집』이라는 서명이 있는 문헌들은 그 필사 지역, 발굴 지역, 내용 등으로 분류하면 대략 네 종류이다.
첫째는 ‘용강본’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한 필사본이다. 서울대 규장각 본을 저본으로 하여 1940년 7월 필사된 판본이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소장되어 있다.12) 필사본 제목은 모두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이다. 이 가운데 천도교 중앙총부의 필사본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에 있던 허찬(許璨; 수운의 둘째 사위)이 필사해 그 후손인 허갑(許鉀)이 소장하였다.13) 그리고 천도교 중앙총부의 소장본과 거의 같은 필사본이 규장각에 소장된 관몰(官沒) 기록 『동학서(東學書)』 15책(冊) 30권(卷) 중의 권이(卷二)인 「운수재문집ㆍ통장(雲水齋文集ㆍ通章)」에 들어 있다.14) 대략 39종의 문헌으로 구성된 권이(卷二)의 서두가 바로 「대선생주문집」이다.15) 규장각 본은 「수운재문집ㆍ통장」 서미(書尾)에 있는 “경자원월념사일오시용강임중칠획린(庚子元月念肆日午時龍岡林仲七獲麟)”이라는 부기로 1900년 음력 1월 24일 용강(龍岡)의 임중칠이 필사한 자료임을 알 수 있기에 ‘용강본’이라고 불린다.16) 이 용강본에 대해 표영삼(1925~2008)은 홍기조(洪基兆)가 1928년 11월 『신인간』 통권 29호에 기고한 「사문개로실기(師門開路實記)」에 근거하여 평안도 용강군 하양리의 홍기조(洪基兆), 홍기억(洪基億), 임복언(林復彦) 3인이 1896년 11월에 문경(상주시 은척면) 은척원(銀尺院)에 가서 해월을 대면했을 때 얻은 필사본을 1900년 임중칠이 다시 필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7) 그런데 이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홍기조가 쓴 1928년 「사문개로실기(師門開路實記)」, 즉 「사문에 길을 열든 」라는 글을 보면 그가 1896년 말 평안도 용강에서 출발하여 문경에서 해월과 의암을 만나 2개월간 수도 범절과 포덕의 방법을 배운 것이 분명하지만, 용강으로 돌아오면서 받은 것을 접주첩과 육임첩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18) 임복언이 임중칠이라는 주장도 명확한 근거가 없다.
둘째는 ‘단곡본(丹谷本)’으로, 영주군 단산면(丹山面) 단곡리(丹谷里)에서 발견된 필사본이다. 이 본은 천도교인 최수정이 수집하여 1964년에 공개했다.19) 당시 공주군 계룡면 경천리 부근에 사는 김정원(金正元)이 소장하던 것이다. 필사자는 그의 조부인 김옥희(金玉熙)이며, 필사 시기는 김옥희가 영주군 단산면 단곡리로 이거 한 1898년 이후로 추정된다.20) 언제인지 모르나 김옥희가 1898년에 영주군 단산면 단곡리로 피신 후, 경천리에서 가지고 온 원본을 다시 쓴 것이라면 실제 이 본의 성립은 1898년 이전으로 소급된다. 단곡본은 1964년에 공개된 후 다른 본들과 비교 교감 되었는데 교단 외부의 학자들은 그 객관성과 정확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여 초기 동학 연구의 기본 자료로 삼고 있다.21)
이 필사본을 직접 확인하고 최초로 교감한 김상기가 이 필사본 원제를 ‘수운문집’이라고 밝혔고, 천도교 교학자인 표영삼이 이 본을 1865년경 수운의 장질(長姪)인 최세조(자; 맹륜) 또는 영해 접주였던 박하선이 편집한 것이라고 추론한 것을 보면 원래 제목은 ‘수운문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22) 수운을 ‘대선생주(大先生主)’라 칭한 것은 해월의 도통 승계가 확립된 이후 해월을 선생으로 높여 부르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23) 단곡본은 현재 그 원본의 소재나 사본을 확인할 수 없다. 천도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단곡본 사본을 김상기의 「수운문집」 교정본과 대조한 결과 단곡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본은 용강본과 유사하기에 도곡본일 가능성이 크다.
단곡본 『수운문집』과 같은 기원을 지닌 것으로 분류되는 다른 필사본은 ‘상주동학교당’이 소장한 필사자와 필사 연도 미상의 문헌이다. 이 필사본은 표지와 제목이 없어 실제 책명을 알 수 없지만, ‘대선생연혁사’로 지칭되고 있다.24) 『수운문집』과 비교하면 거의 같지만 한문에 한글로 토를 단 것이 특징이며 ‘ㆍ’(아래 아)가 남아있는 것으로 본다면 1933년 이전의 필사본임이 분명하다. 김상기가 교감해 편집한 『수운행록』과 대조하면 단곡본의 원 형태를 추론할 수 있는 자료인데, 일부 글자가 훼손되어 있고 몇몇 필사 오류도 발견된다. 후술하겠지만 『수운문집』은 실체가 있는 독자적 계열의 ‘수운 행장’으로, 서지학적으로는 가장 1860년대의 원본 문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여러 근거가 확인된다.25)
셋째는 ‘계룡본’으로, 공주 계룡면 경천리(敬天里)에서 수집된 필사본이다. 이 본은 단곡본과 같이 최수정이 수집해 1964년에 공개되었다. 박석기가 소장하던 것으로 필사자는 그의 숙부이며 필사연대는 미상이다. 김상기는 이 필사본의 필사 장소를 알 수 없어 입수 장소를 근거로 계룡본이라고 지칭하였다.26) 이 계룡본을 다른 본과 비교 검토한 김상기는 오서낙자(誤書落字), 즉 오탈자가 백 개 정도가 있다고 하였다. 표영삼은 계룡본이 단곡본의 내용과 같다는 점과 오자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였다.27) 이를 통해 본다면 계룡본은 단곡본과 같은 기원을 지닌 필사본으로 볼 수 있다. 계룡본이 단곡본과 같은 지역에서 입수되었고 단곡본 역시 계룡본이 입수된 계룡면의 19세기 말엽 필사본에서 기원하였으므로 이러한 추측의 개연성은 높다. 하지만 네 가지 본의 원본을 모두 비교 교감했던 김상기는 계룡본과 단곡본의 유사성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한 바가 없다.
넷째는 ‘도곡본(道谷本)’으로, 논산군 두마면 도곡리(道谷里)에서 입수된 필사본이다. 이 본 역시 단곡본과 같이 최수정이 1964년경에 공개하였다. 이 도곡본은 김인순이 소장하던 것으로 필사인(筆寫人)이 그 부친이고 필사 시기가 신해년, 즉 1911년으로 명기되어 있다.28) 김상기는 앞서 소개한 용강본이 도곡본과 일치하며 그 누락도 같다고 하면서, 21행에 걸쳐 구절의 누락이 더 발견된다고 지적하였다.
이상의 네 가지 필사본에 대해서는 제목 상 천도교 중앙총부와 규장각이 소장한 용강본이 『대선생주문집』, 그 외 단곡본과 계룡본과 도곡본이 『수운문집』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내용상 도곡본은 용강본 계열에, 계룡본은 단곡본 계열에 포함된다. 따라서 ‘용강본’ 계열 문헌은 그 제목인 『대선생주문집』, ‘단곡본’ 계열 문헌은 그 원제인 『수운문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문헌들이 수운 사후의 1860년대에 누군가 집필한 것에서 기원한 것인지, 아니면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 수운의 ‘도원(道源)’ 부분만 떼어 만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29)
『도원기서』는 1978년 일반에 공개된 문헌으로, 수운 행적에 관한 내용은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과 대략 유사하면서도 1880년까지의 동학 교단의 상황을 해월 중심으로 기술한 기록이 추가되어 있다.30) 수운의 행적에 관한 기사는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과 유사하지만, 유의미한 차이도 있다.
책의 후미에 세 사람의 간행기가 있어 편찬자와 편찬 시기를 알 수 있는데, 당시 도차주(道次主)였던 강시원(姜時元, 본명 강수, 이하 강수)의 간행 후기에 따르면 초고 편집은 1879년 11월 10일에 시작되었다.31) 다른 두 문헌과 달리 편찬 시기와 편찬자를 명확히 알 수 있어 문헌의 편집 시기나 방향 등을 고증하는 기준이 된다.
수운과 해월 중심으로 1824년부터 1880년까지의 교단사를 기록한 이 문헌은 『최선생문집』에 수운의 행적 및 문집 편찬 과정을 부록으로 수록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32) 문헌의 제목에 ‘최선생문집’이 특정되어 나타나 있고, 주 내용이 조선조 문집의 부록(附錄)에 해당하는 행장과 발문(跋文)이기 때문이다.33) 『도원기서』에 ‘선생문집’과 관련하여 “5월 초(初) 9일 각판소를 설치하였고, 11일에 개간(開刊)하기 시작하여 6월 14일에 인출(印出)하기를 마쳤다. 15일에 따로 제(祭)를 설(設)했는데 그때 공(功)을 나타낸 별록(別錄)을 기록했다.”라는 기록과, “‘선생문집’의 각판 작업을 경영한 지도 이미 세월이 오래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34) 『도원기서』가 원래 ‘최선생(수운)문집’의 행장과 발문으로 편집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된다.35)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1906년 필사된 『대선생사적(大先生事蹟)』,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천도교회월보》에 연재된 「본교역사(本敎歷史)」, 1915년 간행된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 그리고 1920년에 작성된 『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의 해당 기록이다. 이들 기록은 모두 『도원기서』와 달리 당시 간행된 것을 경전이라고 하였다.36) 20세기 초반에 편찬된 문헌 대부분은 ‘수운문집’을 의미하는 서적의 간행 시점과 장소를 『도원기서』와 거의 같게 기록하지만, 서명을 『동경대전』 또는 『대전(大全)』이라고 하여 『도원기서』의 ‘문집’과 차이를 보인다. 『도원기서』 편찬이 시작된 1879년 말, 수운의 유고를 모아 ‘최선생문집’으로 간행하려 했지만 1880년 5월의 간행소 설치 전에 경전의 간행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충남 서산에서 발견된 『동경대전』 목판본이 1880년에 간행된 『동경대전』으로 비정(比定)이 되면서 이 개연성은 더욱 확실해졌다.37) 이 판본은 그 체제가 ‘권지일(卷之一), 권지이(卷之二) … ’ 등으로 되어 있어 경전이 아닌 문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특히, 권지육(卷之六)은 ‘부(附)’라는 말을 붙여 부시부(附詩賦)로 되어 있는데, ‘시부(詩賦)’를 부록으로 한 조선조 문집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이후의 판본과 달리 동학의 의식(儀式)이 수록되지 않아 『동경대전』이 판각 직전까지는 경전보다 문집으로 기획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38)
『도원기서』에는 기묘년(1879) 11월 초에 해월이 선생(先生; 수운)의 수단소(修單所)를 방시학의 집에 정하고 유사(有司)를 분정(分定)했다는 기록과 “기묘년(1879) 가을에 나(강수)와 주인(해월)이 선생의 도원(道源)을 잇고자 함이 있어 선생의 사적(事績)을 수단(修單)한즉”이라는 강수의 간행기가 있다.39) 행적 등이 기록된 단자를 수집(收集)하여 정리한다는 ‘수단(修單)’의 의미를 생각하면 해월과 강수 등 동학의 지도자가 수운의 행적인 ‘행장’을 정리하고 문집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인 ‘발문’을 추가하여 『최선생문집』의 끝에 『최선생문집도원기서』라는 제목으로 첨부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40)
그렇지만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도원기서』가 『최선생문집』, 즉 『동경대전』 뒤에 첨부되어 간행되지 않은 연유를 『시천교종역사』와 『천도교회사초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탈고하자 목판으로 간행하여 오래 전하려는 계획으로 우선 인장을 찍어 굳게 봉하고서 유시헌 집에 보관해 두었다.41)
신사 대신사의 도적(道蹟) 편집소를 방시학 가에 설(設)하시고 탈고됨에 급(及)하여 견봉날인하야 유시헌에게 임치(任置)하시고 밀촉(密囑)하야 왈(曰) 차고(此稿)는 인안(人眼)에 경괘(輕掛)함이 불가라 하시니 … 42)
탈고 후 목판 인쇄를 위해 밀봉하였는데 해월이 공개를 꺼려 간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봉인 시점으로 주장되는 1880년 초 이후인 1880년 3월의 수운 기제(忌祭)와 6월의 『동경대전』 간행 기사가 『도원기서』에는 수록되어 있다.43) 이것은 『시천교종역사』와 『천도교회사초고』의 기록에 착오가 있음을 알려준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본다면 『도원기서』는 탈고 이후 문집 간행이 경전 간행으로 전환되면서 그 판각이 유보되었고, 『동경대전』 간행 이후 어떤 이유에서 봉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월이 『도원기서』를 봉인한 것은 ‘인안(人眼)에 경괘(輕掛)함이 불가(不可)’하다는 것, 즉 사람들에게 『도원기서』를 공개할 수 없다는 이유라 주장되고 있다. 『도원기서』에는 해월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부 다수가 이필제에 포섭되어 1871년 3월 영해부(寧海府)의 민란에 참여한 것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 사실이 공개되면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가던 동학은 다시 극심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월이 교단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원기서』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44)
해월이 『도원기서』를 봉인한 것은 교단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만, 이 밖의 다른 두 가지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동학 교인의 신앙을 흔들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이다. 『도원기서』에 기술된 수운의 모습과 달리, 후대의 교단사는 수운의 면모를 신비화하고 높이면서도 일반이 이해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일부 내용을 첨삭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45) 『도원기서』에는 수운의 인간적 한계, 가족의 횡액(橫厄) 그리고 제자의 고난 등이 거의 그대로 기재되었다. 해월은 『도원기서』의 여러 기사가 교인들에게 공개되면 수운에 대한 신비적 일화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동학 교인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다고 염려하여 『도원기서』의 판각과 공개를 유보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당시까지 생존한 수운의 친견 제자들이 인정하기 어려운 기사들이 『도원기서』에 있었다는 점이다. 『도원기서』는 해월 외의 친견 제자를 대부분 배제하면서 수운과 해월을 중심으로 기사 대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수운이 해월에게 비공개적으로 도통을 전수했다는 것을 명확히 했고 해월을 ‘주인’으로까지 지칭한다. 이러한 내용은, 도통전수의 사실 여부와 별개로, 접주로 임명된 직계 제자들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만약 생존해 있던 직계 제자 중 누구라도 이를 부정하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동학 교단은 분열될 수 있었다.
봉인된 『도원기서』 원본은, 해월의 수제자 중 일인인 구암 김연국(金演局, 1857~1944, 이하 구암)이 1908년 1월 천도교에서 시천교로 가면서 한 부를 필사한 후, 최종적으로 1918년에 시천교로 넘어갔다.46) 그리고 구암 사후 그 아들 김덕경이 소장하여 오다가 1978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따라서 원본 외에 1908년 필사된 판본도 존재한다. 이 본은 서유사(書有司)로서 1879년 『도원기서』 편찬에 참여했던 김세인이 필사했는데 교감을 한 흔적이 있어, 원본보다 더 정확하다고 평가된다.47)
『도원기서』의 출처와 편찬자 및 편찬 시기를 특정할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하여 표영삼은 『도원기서』가 ‘수운 행장’의 원본이며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다른 ‘수운 행장’인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대해 『도원기서』가 봉인되기 전에 수운 일대기 부분만을 필사한 데서 기원한다고 하여 그 정확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도원기서』에서 『대선생주문집』이 기원했고, 이를 가필하여 『수운문집』이 나타났다는 것이다.48)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김상기나 박맹수 등 다른 연구자들의 입장과 정반대된다. 이 논쟁의 맥락을 학문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문헌 고증이 필요하다.
Ⅲ.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 비교
『수운문집』(단곡본 계열), 『대선생주문집』(용강본 계열), 『도원기서』의 세 문헌을 둘러싼 논점들은 도통 전수와 이를 둘러싼 조직체계 및 권위구조 등이다. 세 문헌을 둘러싼 중요 논점들과 관련하여, 박맹수는 해월의 도통전수 부분에 국한해 『수운문집』과 『도원기서』 두 문헌을 비교하면서 『수운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앞선 기록이며 더 정확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49) 그에 비해 표영삼은 박맹수의 주장을 비판하고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의 내용이 대부분 같기에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필사하면서 내용을 보완한 것이며,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을 가필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50) 이는 박맹수와 정반대되는 견해였다. 또 다른 견해로는 2021년 김용옥이 주장한 『대선생주문집』 원본설이 있다. 그는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을 비교하여 그 차이를 명확히 했고, 통사론, 의미론, 음운론, 문자학의 모든 관점에서 『대선생주문집』 → 『도원기서』의 순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51) 이에 대해서 조성환은 김용옥의 주장에 이견을 제시하고 표영삼의 주장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52)
박맹수는 『수운행록』과 『도원기서』를 비교하였지만, 실제 비교된 것은 『수운문집』과 『도원기서』였다. 그는 문헌의 차이점과 당시의 상황 등을 귀납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여 『수운행록』(『수운문집』) → 『도원기서』라는 논리적인 추론을 전개하였다. 그에 비해 표영삼은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이 대부분 같다는 연역적인 전제에서 출발하여 『도원기서』 → 『대선생주문집』 → 『수운문집』의 주장을 전개하였다. 김상기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 문헌 전체를 대조하였지만 『도원기서』를 접할 수 없었고, 박맹수와 표영삼은 문헌 전체를 비교하여 고증하지 않았으며 김용옥은 『수운문집』의 실체를 부정했다. 조성환은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을 수정한 것이라는 표영삼의 견해를 수용하고 이에 기반하여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만을 비교하여 김용옥의 주장을 비판했다.
기존 주장들이 종합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게 된 것은 이처럼 지엽적인 비교와 추론에서 발생한 한계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문헌을 전체적으로 비교하여 차이를 밝히면 보다 논리적인 기반에서 선후 관계를 세밀하게 특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차이의 원인까지 분석할 수 있기에 본 연구에서는 문헌 전체를 대조하여 고증을 시도하였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수운행록』으로 통칭된 문헌을 내용상 중요한 차이들을 고려하여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으로 구별하고, 『도원기서』와 함께 상호 대조하였다. 특히 『수운행록』과 상주 동학교당에 소장된 『수운문집』 계열의 필사본인 『대선생연혁사』를 비교하여 『수운문집』의 원본을 비정했다.53) 고증 내용 중 본론에는 문헌의 선후 관계나 정확성에 관련된 중요한 부분만 수록하였고 자세한 비교와 분석은 부록에 수록하였다.
전체 문헌을 비교 분석하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원기서』의 중요한 부분이 『대선생주문집』에 없거나 반대되는 경우도 다소 존재한다. 『대선생주문집』은 오히려 『수운문집』과 유사도가 높고 해월과 관련된 특정 기사에서만 『도원기서』와 일치한다. 따라서 표영삼의 주장은 박맹수의 경우에 비해 더 많은 논리적 문제를 지닌다. 『수운문집』은 해월과 관련된 특정 기사를 제외하면 『대선생주문집』과 많은 부분 유사하며 문법이나 내용상 가장 적은 오탈자를 지니고 있다. 비교 분석의 결과를 큰 틀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의 전문을 대조하면 『도원기서』에는 있지만 『대선생주문집』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 있는데, 이는 그 내용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의도적인 삭제나 실수로 보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도원기서』에 있는 해월 관련 일화는 도통 계승을 정당화할 수 있는 내용이고, 교리 관련 설명은 『동경대전』과 유사하다.54)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를 필사한 것이라면 이를 삭제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필사 과정에서 실수로 누락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구조나 맥락으로 본다면 『대선생주문집』은 관련 내용이 원래부터 없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원기서』에 부자연스러운 문맥이 적지 않다. 『도원기서』에만 있는 글자나 구절 등은 『동경대전』과 일치하거나 편찬자인 강수의 개인적 경험과 소회 등과 관련되어 있어 『동경대전』 편찬 시기의 수정이나 보완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필사하면서 미진한 점을 보완한 문헌은 『대선생주문집』이 아니라 오히려 『도원기서』로 보인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에는 있지만 『도원기서』에 없는 내용은 주로 해월의 도통전수와 모순될 수 있는 기사이다. 『대선생주문집』은 해월의 도통전수 기사를 수록한 문헌이므로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를 필사하면서 중요 기사를 삭제하고, 해월의 도통전수와 모순될 수 있는 기사를 추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처럼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를 비교할 때 대부분의 차이가 『도원기서』를 『대선생주문집』의 원본으로 가정할 때 성립될 수 없다면55) 『도원기서』가 『대선생주문집』의 원본이라는 표영삼의 전제도 성립되기 어렵다. 그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 수록된 해월의 도통전수 기사가 높은 유사도를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두 문헌의 차이점이 지니는 의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전제는 연역적이며, 실제 문헌을 대조하고 고증했다면 성립되기 어려운 비논리적인 것이다.
『대선생주문집』이라는 명칭을 근거로 『도원기서』가 먼저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선생주문집』 본문에서 수운은 선생으로 기술될 뿐 ‘대선생’으로 기술된 곳은 없다. 필사 과정에서 제목의 ‘수운’, ‘수운재’ 또는 ‘수운선생’을 ‘대선생주’로 수정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56)
『대선생주문집』에는 있지만 『도원기서』에 없는 기사 대부분은 『수운문집』에 내용이나 문법상 오탈자 없이 수록되어 있다. 즉, ‘수운 행장’이 집필되던 1860년대 중반, 해월의 도통전수가 교단 내에 공식화되거나 수용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볼 경우, 『수운문집』은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내용이나 문법적 오류를 확인할 수 있고, 수정의 맥락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 문헌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 성립 과정을 분석한 교단 외부 학자들은 『도원기서』를 통해서 보더라도 해월의 도통 전수가 공식적이지 않았거나 실재하지 않았으며, 교단 내에서 해월의 도통 계승이 수용된 시기가 1875년 이후라고 주장했다.57) 이를 통해 본다면 해월의 도통 전수 기사가 기재되지 않은 『수운문집』이 1860년대에 집필된 ‘수운 행장’에 가장 근접한 필사본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세 문헌 가운데 ‘수운 행장’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은 『수운문집』이며, 가장 많은 첨삭이 이루어진 것은 『도원기서』이다. 유사성에 따른다면 『대선생주문집』은 『도원기서』가 아니라 『수운문집』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도원기서』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을 저본으로 수정 편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수운문집』이 수운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술되었지만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수운을 통해 해월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세 문헌이 모두 수운의 문집에 들어갈 ‘행장’에서 기원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해월 중심의 기사와 기술 방식은 1870년대 중반 이후의 수정임이 분명하다.
문헌의 선후 관계를 객관적으로 입증해 주는 또 다른 증거로 두 개의 지명을 들 수 있다. 『수운문집』에 사용된 ‘공충도(公忠道)’와 ‘화령(化寜)’이라는 지명인데, 『대선생주문집』은 공충도가 공충로(公忠路)와 화령(化寜)으로, 『도원기서』에는 충청도(忠淸道)와 화령(華嶺)으로 되어 있다. 충청도는 1862년부터 1871년까지 충청도라 지칭되는 것이 금지되었고 공식적으로 공충도(公忠道)였다.58) 화령은 조선조 지리지에 모두 화령(化寜)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당시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도 화령(化寜)으로 되어 있다.59) 화령(化寜)은 보은과 상주 사이에 있는 상주의 속현으로서 1870년대 이전까지 화령(華嶺)이라는 고개 이름으로 쓰인 예가 없다. 서지학적으로 본다면 ‘수운 행장’에 충청도와 화령(華嶺)이라는 지명이 사용될 수 있었던 시기는 충청도라는 지명이 복원된 1871년 이후이며, 상주를 중심으로 교단 재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령(華嶺)이 알려진 다음이다.60) 지명의 차이는 『수운문집』이 1871년 이전에 집필된 ‘행장’을 저본으로 필사된 문헌이며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수운문집』을 저본으로 수정 편집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각 문헌은 수운에서 해월로의 동학 도통전수에 대해 다른 인식과 해석의 차이를 보인다. 이 점에 주목하면 각 문헌에 나타난 차이를 비교 고증하여 문헌의 성립 시기를 비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세 문헌의 성립 시기에 대해 이르게는 1860년대 말부터 늦게는 20세기 초까지로 다양하게 주장되었기에, 문헌 간 차이는 20년~30년 동안의 동학 교단의 도통 인식과 이에 따른 신앙과 조직 체계의 미세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러 고증 결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비정이 가능하다.
첫째, 『수운문집』은 수운의 서거 직후부터 동학도의 최초 반란인 1871년 영해 민란 사이, 유교적 기반에서 수운을 따랐던 지식인 출신의 친견 제자가 집필한 ‘수운 행장’의 필사본일 가능성이 크다. ‘수운 행장’은 이 조건에 부합하는 영해 접주 박하선의 관점에서 기술된 일화를 많이 수록하고 있기에 박하선과 수운의 장질 맹륜과의 공동 저작으로 비정할 수 있다.61) 이는 조선 유교 전통에서 자손이나 친족이 주도해 사후 문집을 수집 정리하고, 제자나 지인이 행장을 편찬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빙성이 크다.
둘째, 『대선생주문집』은 해월 단일 지도체제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해월을 중심으로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을 수정 편집한 것이다.62) 해월이 수운의 계승자임이 수용되면서 생존한 친견 제자들은 해월을 교단의 지도자로 옹립하였고, 교단의 또 다른 구심점이었던 수운의 두 아들이 사망한 1875년 이후 해월의 도통 승계 담론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대선생주문집』에서 사용된 해월의 지위인 ‘주인’과 가장 일치도가 높은 ‘도주인’의 지위가 공식 사용된 시기가 1875년 10월이고, 1877년 11월부터 ‘도포덕주(道布德主)’의 지위가 사용된 점을 고려할 때 『대선생주문집』은 1875~77년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63) 이때는 해월이 도통 계승자로 수운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한 시기였다.64) 다만, 『대선생주문집』에 해월의 도통전수와 모순되는 기사가 남아있게 된 것은 당시에는 해당 기사와 도통전수와의 모순점에 대해서 면밀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셋째, 『도원기서』는 수운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문집을 편찬하고 그 부록으로 행장과 발문을 첨부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전통에 따라 1879년 수단소를 설치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한 후 『대선생주문집』 또는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을 저본으로 삼아 해월 중심으로 수정 편찬하였고, 수운 서거 이후의 교단사를 해월 중심으로 추가하였다. 1878년 해월의 개접을 전후로 종래 유교적 동학의 사유와 차별화된 해월의 신앙체계가 자리 잡으면서 기존의 기록 중 이에 배치되는 부분은 수정되었다. 1880년의 『동경대전』이 문집 형태이면서도 행장 없이 경전의 위상을 갖게 되고, 동학이 유교 학파에서 신종교로 전환한 것도 『도원기서』의 편찬 방향과 일맥상통한다.65) 동학의 세계가 해월을 중심으로 구축되면서 이와 모순되는 행장의 일화는 수정, 삭제되었으며 수운 중심의 기사까지 해월을 중심으로 편집되었다.
이상의 결론을 통한 ‘수운 행장’ → 『수운문집』 → 『대선생주문집』 → 『도원기서』의 문헌 성립 순서에 기반한다면 수운은 해월에게 ‘북도중주인’, 즉 경주 북쪽에 있었던 해월 휘하 접의 연원주임을 인정해 주었을 가능성은 크지만 공개적, 공식적으로 동학의 도통을 전수한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해월의 도통 승계 담론은 수운 사후 교단 내 제도적, 종교적 권위가 해월에게 집중된 후 해월이 자신에게 주어진 북도중주인이라는 지위를 도통전수로 해석하면서 성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해월의 도통 승계 담론이 어떠한 배경하에 성립되었는지를 분석해 볼 것이다.
Ⅳ. 해월의 도통전수 담론 성립 배경
세계의 중심으로 존재하는 교조나 정통성 있는 후계자의 부재는 신도들에게 현실 세계의 성화(聖化) 단절과 구원에 대한 불확실성을 야기하여 종교 공동체의 권위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성스러운 도통 인맥으로 그 권위구조가 유지되는 동학과 같은 연원제 조직의 경우 최고 정점이 부재할 때 그 분열과 축소는 불가피하다. 동학의 경우 후계자가 명시적, 공개적으로 지명되지 못하고 그 선정 방식 또한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정점에 있던 수운이 처형되었다. 종교 교단에서 후계자가 지명되었거나 그 선정이 제도화되었음에도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닌 경쟁자가 등장했을 때 교단 분열이 초래된 일이 다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수운의 부재 이후에 동학의 접조직이 대부분 붕괴하거나 연원별로 분열될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1863년 12월 수운의 체포와 함께 시작된 동학에 대한 탄압은 1864년 3월 수운의 처형과 중요 지도자의 유배 등으로 공식화되고 최고조에 이르렀다. 후대의 교단 측 기록과 달리, 수운 체포 당시 전후 상황을 상세히 기술한 정운귀의 서계(書啓)는 수운이 자신의 체포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서계에 따르면 당시 용담정에는 30~40여 명의 교인과 입도자가 모여 있었고, 수운은 별다른 확인도 없이 신원이 불확실한 초면의 인물을 접촉하였으며, 제자들에게 동학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었다.66)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펼쳐진 동학의 압도적 전파 양상으로 본다면 수운과 접주들의 방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67) 무극대도의 출현과 서양인의 내습이 예정된 갑자년(1864)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수운에게는 보국안민을 위해 포덕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68) 따라서 1863년 7월의 파접(罷接) 이후 약 5개월 동안 눈에 띄는 탄압이 없자 수운과 접주들이 종교활동을 재개했다고 볼 수 있다.
현실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조와 주요 지도자가 체포되어 처형, 유배되고 남은 지도자들이 탄압 정국에 따라 그 활동을 중지하거나 지하로 숨게 되자, 동학의 조직 전반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수운은 처형되었고, 경주부의 접주 백사길, 강원보, 이내겸과 수제자로 알려졌던 최병철(최자원)은 정배(定配)되었으며, 단양 접주 민사엽은 1865년에, 영해 접주 박하선은 1869년경에 사망하였다.69) 현현한 상제의 조화와 의지를 전하며 동학 세계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수운을 대신할 권위구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권위를 계승하여 상제의 현현을 실현할 공식적 후계자도 없었다. 수운 처형 이후의 교단 상황을 기록한 『도원기서』가 수운이 임명한 접주가 아니라 수운의 가족과 신앙을 지키던 교인을 중심으로 기술된 것은 동학 교단 조직이 입었던 타격의 강도를 잘 보여준다.
강수는 『도원기서』에서 “갑자년 이후 소위 도인이라는 이들이 혹 죽고 혹은 생존하고 혹은 도를 버렸는데, 막혀서 서로 통하지 않고 오래도록 발길이 끊어져 피차 서로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하니 자연히 서로 상종할 수 없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였다.70) 남은 접조직은 붕괴하거나 접별로 독립하여 지하로 숨어들었다. 해월 역시 지목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865년 3~4월 영양의 용화동으로 은거하였다. 이때 오래도록 산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는 기록으로 본다면,71) 동학 조직의 재건은 물론이고 휘하 접의 재건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72)
그러나 북도중에 휘하의 여러 접을 형성하였던 해월의 생존은 동학 교단 조직이 다시금 구축되고 정비되어 체계화될 수 있는 중요한 불씨가 되었다. 해월은 접주가 아니었지만 휘하에 접주를 거느린 수운의 수제자로, 때에 따라 접주 이상의 권위를 지닌 지도자로 교단 내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73) 이는 1862년 수운이 가족의 호구지책을 해월에게 부탁하고 1863년 자신의 글을 출판하라는 명을 해월에게 한 것으로 방증된다.74) 따라서 대부분의 접주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의 교단 내 책임과 위상은 수운 사후 오히려 강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운과 함께 체포된 20여 명 대부분이 남도중(南道中)인 경주 남쪽 지방의 인물들이었기에 이후 교세의 중심 기반은 북도중(北道中)의 접이 되었다.75) 북도중에 휘하 접을 다수 두었던 해월의 위상은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수운의 가족은 그 생계를 지원하던 단양 접주 민사엽이 사망하자 1865년 7월 영양 용화동에 있던 해월을 찾아 생계를 의탁하였다. 이를 계기로 1866년 3월 10일 수운의 탈상 제사에 상주접의 책임자였던 황문규를 비롯한 여러 도인이 참여하였고, 해월 주변으로 교인들이 이주해 왔다.76) 수운의 가족과 해월의 결합은 교단 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1866년 8월의 병인양요로 인해 교단 재건은 현실화하였는데 동학도들에게 양요는 수운이 예언한 서양인의 내습이 실현된 것이었기에 수운의 신성성과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도원기서』에는 병인양요 이후 도인들 가운데 연원을 잃은 사람들이 해월을 찾았다고 기술하고 있다.77) 속인제인 연원 조직의 경우 전도인이 사라지거나 교를 버렸을 때 신앙을 지속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연원을 찾는 것이었다. 수운의 수제자로 알려진 해월이 그 대상이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수운에 대한 제사권이라는 제도적 권위를 지닌 가족과 수제자라는 종교적 권위를 지닌 해월이 이원적 지도 체제를 형성하였다는 관점은78)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신빙성이 크다. 공식 지위가 없었던 해월에게는 제도적 권위가 없었고, 수운의 가족에게는 수운의 카리스마를 대신할 수 있는 종교적 권위가 없었다. 따라서 수운의 가족과 수제자 해월이라는 두 구심점의 결합은 연원제 교단 조직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요한 사건이었다. 비록 이원적이지만, 제사권을 통해 구현되는 제도적 권위와 해월의 카리스마를 통한 종교적 권위의 결합으로 연원제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도통 연원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제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제사장의 위상을 지녔던 수운을 이원적인 지도 체제가 완벽히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연원을 상실한 교도들과 분립하여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접들이 하나의 교단 조직으로 포괄될 수 있는 연원제 조직의 중핵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1866년 3월 상주접의 교인들을 필두로 교인들이 수운 가족 주변으로 모이는 현상은 병인양요를 기점으로 증폭되었고, 1866년 10월 수운의 생일을 기점으로 교단의 재건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도원기서』는 그 무렵부터 수운의 가족을 대가(大家)로 불렀으며 수운의 제사를 위해 계(契)를 조직한다는 통문을 각처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79) 해월은 수운에 대한 제사권을 활용하여 흩어진 접조직을 통합하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870년까지 동학의 많은 잔존 조직은 대가(大家)와 해월을 중심으로 집결하였다.80) 자신의 연원을 잃거나 알지 못했던 이들은 해월과 해월 휘하 교인을 연원으로 하여 조직화 되었다.81) 해월을 따르는 조직은 교단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하였다.82) 영해 민란의 주모자인 이필제가 봉기를 위해 집요하게 해월을 설득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83)
그렇지만 잔존하던 접이 해월을 도통 연원으로 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수운의 가족들이 생존해 있었고 해월의 권위가 비공식적이었기 때문이다. 강원 양양 지역의 동학도들은 1870년 수운의 가족을 영월로 이주시키면서 양양 지역의 포덕을 활발히 진행하였고,84) 경북 영해 지역의 동학 교인은 연원이 불확실한 이필제라는 인물을 지도자로 수용하면서 변란을 주도하였다.85)
접들의 독자적 활동은 교단 조직을 다시 큰 위기로 몰아갔다. 다원적 지도 체제 아래에서는 이필제의 난, 즉 영해 민란과 같은 반란에 동학의 접이 참여하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영해 접주 박하선의 아들이었던 박사헌(박영관)과 여러 영해 교인이 이필제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해월 역시 이필제에게 설득되어 휘하의 조직 지휘 권한을 그에게 일시적으로 넘겼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86)
영월로 이주한 수운의 아들은 이필제의 난으로 쫓기는 해월을 멀리하려고 했다.87) 영월과 양양 지역 접의 노선이 민란 참가 접과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맹수는 영해 민란의 결과 1860년대 말 동학 교단의 주요 기반이던 경북 북부지역의 교세가 거의 와해 되었고 주요 기반이 강원도로 이전되었다고 분석했는데, 이는 강원도 지역의 동학 조직이 영해 민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표영삼은 영월, 정선, 양양, 인제 지역의 교인들이 수운의 아들과 상종하였으며 해월과 거리를 두었다고 지적하였다.88) 각 지역에 남아있던 접조직은 1875년경까지 독자적인 활동 속에서 나름의 종교적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89)
연원제 조직에서 연원을 달리하는 조직들이 하나로 규합되기 위해서는 각 연원주가 도통 연원의 존재를 수용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이원적 지도 체제와 해월의 비공식적 지위, 잔존 접조직의 독자 활동 등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해 민란 이후 동학에 대한 집요하고 광범위한 탄압은 오히려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성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90) 탄압으로 인하여 1872년 1월 수운의 장남 세정은 체포되어 1872년 5월 장살되었다. 또한 지목을 피해 정선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수운의 부인이 1873년 12월 사망하였고, 차남 세청이 1875년 1월 병사하였다.91) 대부분의 동학 지도자들도 지목을 피하여 활동을 중지하거나 은신하였다.92) 수제자로 인정된 해월이 수운에 대한 제사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도래하였다. 도피 과정에서 이루어진 해월과 수운의 친견 제자 사이의 의형제 결의(結義)로 해월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었다.93) 친견 제자의 관점에서 해월을 의형으로 둔다는 서약은 자신의 연원은 수운이지만, 해월이 교단의 유일한 지도자이며 수운의 후계자라는 것을 수용한다는 뜻이었다. 각 연원주가 해월을 도주(道主)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으며, 이는 해월이 동학의 모든 접조직을 포괄하는 도통 연원의 권위를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것이 명확히 입증되지 않는다면 접조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도통 연원으로서의 해월의 지위는 언제나 도전받을 수 있었다. 도통의 계승이 상제와 수운의 뜻인지를 확인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운과 해월 사이에 있었던 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작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해월이 여러 북도중 접의 연원주임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수운이 비공식적으로 해월에게 준 ‘북도중주인’이라는 지위는 새롭게 해석되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해월의 진술이 다음과 같은 『도원기서』의 기록이다.
예전에 선생이 항상 시형에게 말하기를 “이 도의 운은 오래도록 북방에 있다. 남북의 접을 택하여 정하라.” 하셨다. 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북접을 위해 가리라.”고 하셨다.94)
해월의 진술은 수운이 동학의 정통성은 남과 북의 접 중에 북에 있음을 명확하게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해월의 이 진술로 북도중이나 북접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역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95) 『도원기서』가 이후의 모든 기록에서 해월을 주인(主人), 도주인(道主人), 도주(道主), 도포덕주(道布德主)로 지칭한 것은, 해월의 진술에 근거하여 ‘북도중주인’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863년 8월 15일 새벽 수운이 여러 제자 앞에서 외워 준 결시(訣詩)인 “용담수류사해원 검악인재일편심(龍潭水流四海源, 劒岳人在一片心)”의 ‘검악인’은 해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실제 해월이 살던 곳의 지명은 금둥골, 금등골이었지만96) 검골, 검등골이라 하여 검악을 해월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결시는 심법 전수의 전법시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도통 전수의 증거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 해월의 종교적 체험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872년 10월 해월은 정선의 사찰인 정암사 적조암에서 강수, 전성문 등과 함께 49일간의 수련에 들어갔다. 수운의 천성산 기도를 참고하여 49일간 수련을 통해 수운이 걸었던 구도의 길을 재현하였다. 수제자라는 권위만으로는 영해 민란에서처럼 지휘권 이양에 따른 조직 붕괴를 또다시 겪을 수 있고, 수운을 대신할 연원 정점으로서의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교단의 재건이나 통합이 불가하다는 것을 해월이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해월은 이 수련을 통해 미래에 대한 계시로 해석되는 현몽을 얻었는데97) 이러한 체험은 수운의 남긴 가르침과 강결(降訣) 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촉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1875년 8월 15일 해월은 수운이 행하던 치제를 재현하면서 강화의 가르침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공표하고, 소고기를 빼고 제례를 행하도록 했다.98) 이는 해월이 자신의 도통 승계를 확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원 정점이던 수운만이 받을 수 있었던 강화가 해월에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해월이 스스로 수운을 대신하여 도통 연원에 올랐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1875년 10월 선도(仙道)의 복식으로 만든 예복을 도입한 새로운 제사 의례를 창설하며 공식적으로 자신을 도주인(道主人)으로 명명한 것, 1878년 7월 수운의 접(강론)을 계승하여 개접을 선언하며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것, 1879년 치제(致祭)였던 구성제를 인등(引燈) 의식으로 대체한 것 등으로 본다면 이는 명확히 입증된다.99)
해월이 자신을 도통 연원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근거는 접주에게 사제(司祭)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해월이 집단 의례를 시작한 시점은 1875년이며, 접을 단위로 하여 접주를 의례에 주도적으로 참여시킨 시점은 1877년 기존의 고천 제례를 구성제(九星祭)로 바꾸면서이다. 1879년 해월이 구성제를 인등제(引燈祭)로 변경하여 의례가 간소화되자 여러 지역에서 소규모 의례가 가능하게 되었다.100) 해월의 명과 감독하에 접주가 사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877년을 전후로 한 시기로 볼 수 있다.
1870년대 중반 이후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시작되면서 동학 교문은 해월을 중심으로 재건되었고, 이후 ‘북도중주인’이었던 해월을 주인, 즉 도주로 옹립하면서 학파적 조직에서 종교 교단으로 재탄생하였다. 수운의 의도와 별개로 그의 서거 후에도 유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던 동학 교문(敎門)은 해월의 종교적 체험과 이에 따른 교의(敎義) 재해석으로 유교적 사유를 벗어나 새로운 교단이 된 것이다.101) 이것은 해월의 도통 승계로 연원 정점이 지니는 강한 구심력이 작동하고, 도통 계보가 복구되면서 포교가 활성화되어 교단이 통합되고 확장된 결과이기도 했다.102)
연원제 조직에서 연원 정점은 성속의 매개자, 진리와 구원의 담지자라는 권위를 지니면서 벼리처럼 인적 계보의 그물망에 강력한 구심력을 가한다. 동시에 인적 결사의 연쇄 사슬은 도통 계보의 지위를 얻어 조직의 원심력은 한층 강화된다. 해월의 도통 승계는 수운 서거 후에 멈춰 버린 도통 연원과 연원제 인적 결사의 상호 보완적 체계를 작동하여 흩어진 접과 교인들을 교단에 흡수하고 도통 계보의 그물망 확장으로 이어졌다.103)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성립 5년 만에 수운이 남긴 가르침을 경전으로 간행하면서 유교적 사유에서 벗어나 동학의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도통 승계 담론의 확산에 따라 도통 연원이라는 해월의 권위가 확보된 결과였다.104) 『도원기서』가 전통적인 행장의 집필 방식에서 벗어나 경전 간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후계자인 해월의 여정을 통해 상세히 기술한 것은 해월의 독자적 카리스마가 1880년을 전후로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도원기서』가 편집된 1879년~1880년은 도통 승계의 담론이 완성되면서 유교적 학파로서의 동학 교문(敎門)과, 유교를 초월하는 무극대도로서의 동학 교단(敎團) 중에서 후자로 무게 중심이 이전되던 시기였다. 즉 도통 승계의 담론을 통해 종교적 권위를 확고히 한 해월이 수운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여 유교적 한계에 머물러 있던 동학을 새로운 종교 교단으로 재편하기 시작한 때라 할 것이다.
이후 해월은 수운의 시천주 신학을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 사상을 통해 인즉천(人卽天)의 명제로 이끌어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양천주(養天主)의 교의로 전개하고, 시천주의 천주를 상제로 변경하여 ‘봉사상제일편심조화정만사지(奉事上帝一片心造化定萬事知)’로 고쳐 약 1년간 사용하였다.105)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이나 의례에서 시천주 주문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절대적인 권위를 고려할 때 도통 승계 담론을 통해 해월의 종교적 권위가 수운의 카리스마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106)
Ⅴ. 나가며
동학이 근대 신종교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따라서 동학의 전개 과정에 관해서는 보다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연구될 필요가 있다. 특히 1960년대부터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전승을 담론이라고 주장하는 연구가 있었음에도 많은 연구에서 수운-해월의 도통 승계는 당연한 전제처럼 여겨졌기에 도통과 관련된 기존의 전제는 새롭게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출발한 본 연구는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다는 전승이 1870년대 말에 등장한 새로운 해석에서 기원한 하나의 담론일 수 있음을 문헌 비교를 통해 어느 정도 입증했다. 따라서 근대 신종교에 미친 동학의 영향과 근대 신종교의 동학에 대한 관점들은 동학 도통 담론의 관점에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수운의 동학과 해월의 동학이 지니는 차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 각각의 동학과 한국 근대 신종교의 관계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토록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로 ‘참 동학’을 자처한 증산의 동학에 대한 언설을 분석해 보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증산의 동학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언설은 다음과 같다.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107) 지금까지 이 선언은 계시와 강화의 참뜻을 밝히지 못한 수운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해월의 도통전수가 천도교 전통의 담론이며 이를 부정하는 도통 담론이 존재했다고 본다면, 증산의 언설은 수운 사후의 동학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증산이 해월 시대의 동학과 동학혁명, 천도교 전통의 도통과 그 신앙체계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생존 시기가 해월, 의암의 활동 시기와 겹쳐 있고 종도 중 많은 이들이 동학, 일진회 출신이었으며 수운가사를 자유롭게 활용할 정도로 동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증산이 해월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었으며 해월의 시대에 발생한 동학혁명이나, 해월을 계승한 의암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실도108)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증산의 동학에 대한 비판을 ‘수운의 동학’을 변형한 해월과 이를 계승한 의암에 대한 비판으로, 그리고 수운이 펼친 대도의 본질이 자신의 사유와 동일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 록
<표 1>의 내용은 수운의 가계, 그리고 모친과 부인에 관한 내용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는 있고 『도원기서』에는 없는 부분으로 수운이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던 최예(崔汭, 1393~1446)의 13대손이며 모친이 청주 한씨, 부인이 밀양 박씨라는 것이다. 수운이 최예(崔汭)의 13대손으로 기록된 본은 단곡본 『수운문집』이 유일한데109) 가장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한다.
水 | 先生姓崔也 諱濟愚字性默 號水雲齋 慶州人也 山林公諱鋈之子也 貞武公諱震立之六代孫也 司成公諱汭之十三代孫也 母韓氏籍淸州 配朴氏籍密陽 |
大 | 先生姓崔氏 諱濟愚字性默 號水雲齋 慶州人也 父山林公諱鋈之 貞武公諱震立 六世孫也 司成公諱訥之十一代孫也 母韓氏籍淸州 配朴氏籍密陽 |
道 | 先生姓崔也 諱濟愚字性默別號水雲齋 慶州人也 山林公諱鋈之子也 貞武公諱震立之六世孫也 |
이 부분과 관련된 문헌 간의 정확도와 문맥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2021~22년 김용옥과 조성환 간에 벌어졌는데 『수운문집』을 제외한 두 문헌을 비교하여 상반되는 주장을 전개했다. 김용옥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수록하고 있고, 문장 구성이 엉성하다는 이유로 『대선생주문집』을 초략본, 『도원기서』를 세련본으로 주장했다. 이에 반해 조성환은 『대선생주문집』에도 부정확한 부분이 있고, 『대선생주문집』에 보다 많은 정보가 수록된 것은 오히려 수정 보완의 흔적이라는 이유로 『도원기서』를 원본, 『대선생주문집』을 수정본이라 주장했다.110) 공통적으로 두 사람은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을 수정한 것이라는 표영삼의 견해를 수용하여 <표 1>의 『수운문집』 내용에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문헌 고증의 기준을 정보의 양과 정확성에 두었기에 가장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 정보의 양도 많은 『수운문집』을 비교 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논거의 허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김용옥과 조성환은 “‘사성공 눌(訥)’의 11대 손[司成公諱訥之十一代孫也]”이라는 『대선생주문집』의 기록과 “(수운이) 진립의 6세 손 [… 震立之六世孫也]”이라는 『도원기서』의 기록을 오류라고 보고 논지를 전개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111) 즉 진립에서 수운까지 7대라는 점을 참고하여 6대가 되기 위해서는 『대선생주문집』의 해당 구절 주어를 수운의 부친인 산림공으로 보고 해석하여 “아버지 산림공은 이름을 옥이라 하는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6세 손이요, 사성공 최예(崔汭)의 11대 손이시다. [父山林公諱鋈之 貞武公諱震立六世孫也 司成公諱訥之十一代孫也]”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수운이 ‘진립의 6대손‘이며 ‘최예의 13대 손’이라는 『수운문집』 기록을 참조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즉 수운은 ‘경주 최씨’ 25세(世)로, 18세인 최진립으로부터 6대, 12세인 최예(崔汭)로부터 13대 손이다. ‘사대봉사(四代奉祀)’가 제주(祭主)로부터 4대인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를 의미했으므로 이러한 셈법으로 ‘수운 행장’도 집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수운문집』은 기준이 되는 선조로부터 몇 대(代) 후손인가를 세는 방식에 따라 수운의 가계를 기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운을 최진립의 6대손이라 보면 『대선생주문집』의 해당 문장 주어는 생략되어 있으며 수운의 부친 최옥이 아니라 수운을 지칭하는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해당 문장은 “(선생은) 부친이 산림공 최옥이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6세 손이요, 사성공 최눌의 11대 손이시다.”라고 해석된다. 문헌 기술 방식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해석이 더욱 신빙성이 크다. 원본 ‘수운 행장’이 조선 후기의 문집으로 기획, 편찬되었으므로 당연히 문집의 주인공을 기준으로 그 가계를 기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문집의 행장에서 주인공의 가계를 아버지를 기준으로 기술하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세 문헌 모두 수운에서 진립까지의 가계 기술에는 오류가 없다.
『수운문집』이 정확하게 쓰여진 앞선 문헌이라면 『대선생주문집』의 “父山林公諱鋈之”의 첫 글자인 ‘父’는 필사 과정에서 덧붙여진 글자로도 볼 수 있다. 『대선생주문집』에는 <그림 2>와 같이 “父山林公諱鋈之” 다음에 공백이 있는 필사본이 대다수이지만, 천도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선생주문집』 판본 중에는 <그림 1>처럼 공백에 ‘子’가 채워진 것이 있다는 사실로도 그 개연성이 입증된다.112) 즉 “山林公諱鋈之子”에서 父가 오기되고 그 영향으로 나중에 子가 탈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대선생주문집』을 원본이 아니라 원본을 필사한 수정본으로 보아야 ‘눌(訥)’과 ‘11대 손’이라는 『대선생주문집』의 오류 원인에 관하여서도 보다 논리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대선생주문집』을 원본으로 본다면 오류는 행장 집필자의 단순한 실수나 오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만 추측해야 하는데, 실제 1860~80년대 후반의 조선 사회에서 ‘수운 행장’의 편찬에 참여한 제자나 친척이 경주 최씨 사성공파 파조인 최예의 이름이나 수운이 최예의 13대 후손이라는 사실을 잘 몰라서 이 같은 오류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대선생주문집』의 오류는 집필자의 단순 실수나 초략본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운문집』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오탈자를 그 원인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필사체에서 ‘예(汭)’는 ‘눌(訥)’로 오인되기 쉽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그림 1>의 예(汭)와 <그림 2>의 ‘눌(訥)’을 비교하면 필사 오류의 과정을 추정할 수 있는데 『대선생주문집』 계열의 필사본이라도 어떤 본은 ‘예(汭)’로 어떤 본은 ‘눌(訥)’로 필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글자가 다양한 글자로 변이된 문헌이 더 후대의 것이기에 『대선생주문집』은 원본이 아니다.
결국 <표 1>과 관련하여 김용옥과 조성환이 『대선생주문집』의 오류나 문맥의 문제라 지적한 부분은 『수운문집』을 필사하면서 발생한 오탈자로 인한 것으로 해석하면 논리적으로 해석된다. 『수운문집』의 해당 기록을 다른 두 문헌과 비교하여 두 사람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문헌의 선후를 판단했던 중요한 기준이었던 정보의 양이나 정확성에 있어서는 『수운문집』이 가장 많고 정확하기에 『수운문집』이 원본인 ‘수운 행장’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대선생주문집』은 『수운문집』을 필사하면서 오탈자가 발생한 판본으로, 『도원기서』는 『수운문집』의 일부 내용을 삭제한 판본으로 보아야 한다.
『도원기서』에는 수운이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던 최예(崔汭, 1393~ 1446)의 13대손이며 모친이 청주 한씨, 부인이 밀양 박씨라는 내용이 없다. 조성환은 이에 관하여 『도원기서』의 편찬자가 일부 내용을 삭제했다기보다는 『대선생주문집』이 후대에 보완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처럼 『도원기서』를 저본으로 『대선생주문집』을 편집하면서 내용을 보완 추가했을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도원기서』에 없는 부분은 조선 후기 문집의 행장에서 필수적인 가문의 파조(派祖), 모친, 부인에 대한 것이었고, 이는 편집을 주도했던 강수가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다. 강수는 수운의 친견 제자로 수운 사후 그 가족들과 밀접한 교류를 하였고, 교단의 2인자인 도차주로 『도원기서』의 편집을 책임질 정도의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집된 여러 ‘수운 행장’을 저본으로 하여 『도원기서』를 편집하면서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도원기서』에만 강수에 의한 의도적인 첨삭으로 보이는 부분이 여러 곳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도원기서』가 편집된 1879~80년은 수운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이 확립되면서 성리학을 혁신하는 신유교로서의 동학 교문(敎門)과 유교를 초월하는 무극대도로서의 동학 교단(敎團) 중에서 후자(後者)로 무게 중심이 이전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113) 즉 보국안민을 위해 유교를 혁신하는 신유교 학파로서의 동학 교문에서 유교적 세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고 이를 실행하는 도문, 즉 종교 교단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수운의 문집을 간행하려던 계획이 경전인 『동경대전』 간행으로 전환된 시기가 1880년 4월경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를 전후로 수운의 위상이 한 학파의 선생에서 교단의 교조로 명확히 전환되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환점에서 『도원기서』는 문집에 첨부될 행장이기보다는 교조의 신성한 일대기가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도원기서』가 처음에는 ‘수운문집’의 행장으로 기획되었지만, 탈고를 앞두고 문집의 형식은 의도적으로 탈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스승의 문집에 첨부될 행장이라기보다는 종교 지도자와 계승자의 행적에 방점을 두면서 편집된 『도원기서』에서 ‘경주최씨 사성공파’의 파조인 최예에 대한 기술은 사실상 불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수운을 신비화하면서 신분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재가녀(再嫁女)였던 수운의 모친에 대한 정보가 감춰지고 이와 연관되어 가족인 부인에 대한 정보도 삭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은폐를 통해 수운의 신성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라고도 해석된다.114) 이상이 『도원기서』가 전통적인 행장의 집필 방식에서 벗어난 배경일 것이다.
결국 위에서 검토된 논점들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간행한 것이고, 이를 의도적으로 수정, 가필한 것이 『수운문집』이라는 표영삼의 주장이 여러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재검토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또한 『수운문집』이 가장 정확히 조선조 행장의 틀에 맞추어 기록된 ‘수운 행장’의 필사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표 2>는 수운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술인데, 『수운문집』이 가장 정확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도원기서』만이 사광(師曠)을 사광(司曠)으로 오기(誤記)하고 있다.115) 사광을 인용한 유사한 문구가 수운의 저술에도 나타난다.116) 따라서 사광(司曠)이라 오기한 『도원기서』를 원본으로 보기는 어렵다.117)
水 | 生纔至四五歲容貌奇異 聦明師曠 山林公居常愛育 視同奇貨 |
大 | 纔 四五歲容貌奇異 聦明師曠 山林公居常愛育 同視奇貨 |
道 | 生纔 四五歲容貌奇異 聦明司曠 山林公居常愛育 視同奇貨 |
행장 집필자의 의도가 오탈자 없이 정확히 반영된 문헌은 『수운문집』이다. 정확성을 기준으로 본다면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의 순으로 정확도가 감소하기에 이 순서로 편찬되었음을 시사한다. 『도원기서』나 『대선생주문집』의 오류는 필사 과정의 오탈자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조성환은 『도원기서』 원본설의 입장에서 『도원기서』의 오자가 『대선생주문집』에서 수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118) 하지만 『동경대전』에도 수록되어 있고, ‘사광지총(師曠之聡)’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사광에 대해 『도원기서』 편찬자인 강수가 처음부터 오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원기서』 편찬 과정에서 참조된 필사본에 이미 오기된 것을 강수가 파악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표 3>은 수운의 10세 경의 상황과 16세 시의 부친 별세를 다룬 내용이다. 『대선생주문집』만이 수운이 10세에 부친을 여위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표영삼의 주장처럼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따로 떼 『대선생주문집』을 만들었고 이를 의도적으로 첨삭한 것이 『수운문집』이라면 『수운문집』에 『대선생주문집』과 같은 오류가 발생했어야 한다. 하지만 『수운문집』에 같은 오류는 나타나지 않는다.
水 | 稍至十歲餘 氣骨壯肅 智局非凡 年至二八己亥之歲 山林公沒 |
大 | 稍至十 歲山林公歿 |
道 | 稍至十餘歲 氣骨壯肅 智局非凡 年至二八己亥之歲 山林公沒 |
수운이 열 살 때 모친이 별세하였다는 기록이 『천도교회사초고』에 있다는 점으로 본다면 『대선생주문집』이 모친의 별세를 부친의 별세로 오기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대선생주문집』을 『수운문집』과 비교하면 15자 정도의 누락이 자주 나타나기에 탈자로 보아야 한다. 『대선생주문집』의 착오가 아니라 필사 과정의 누락이다. 이 탈자로 인한 오류는 후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1910년 간행된 「본교역사」에는 수운 10세 때 부친이 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19)
김용옥은 『수운문집』에 주목하지 않았기에 『대선생주문집』이 지닌 오류를 모친 별세 기록의 오기라 보았고 『도원기서』의 기록을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레토릭을 활용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성환은 여러 근거를 동원해서 그 허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논쟁은 『수운문집』을 원본으로 보면 간단하게 해소된다. 앞서 지적한 대로 『대선생주문집』은 『도원기서』보다는 『수운문집』과 유사하다. 하지만 사실관계나 문맥의 문제가 발생하는 곳을 『수운문집』과 비교하면 오탈자나 문구의 누락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도원기서』의 경우도 유교적 사유나 체제 순응적 기술이 이루어진 곳과 해월의 도통전수와 관련된 기사를 제외한다면 많은 부분에서 『수운문집』과 유사하다. <표 3>에서 세 문헌이 보이는 차이는 이에 포괄된다.
<표 4>는 수운이 20대 초반에 지녔던 사유를 기술한 것인데 그 차이가 문헌의 고증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세 가지 차이점을 중심으로 문헌의 기술 방식이나 정확성을 평가한다면 다음과 같다.
水 | 而察 理之凡術 則必是欺世誤人之理 故一笑唾棄又爲反武 |
大 | 而察其各理之凡術 必是欺人誤世之理 故一笑打棄又爲反武 |
道 | 而察其各理之凡術 則必是明世誤人之理 故一笑打棄又爲返武 |
첫째로 주목할 부분은 ‘察(其各)理之凡術’ 부분이다. 『수운문집』에만 ‘기각(其各)’이 없는데 누락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운문집』은 ‘이치를 살피는 범술이 반드시 세상을 속이고 사람을 그르치는 이치라 여겨 일소에 부쳐’의 뜻이고,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모든 이치의 범술을 살핀즉슨 반드시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그르치는 이치라 여겨 일소에 부쳐’로 해석되어, 누락이라기보다는 중요한 의미 차이를 보인다. 즉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각각의 리가 지닌 범술[各理之凡術]’은 유(儒)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수운문집』의 ‘이치를 살피는 범술 [察理之凡術]’은 유(儒)를 포함하지 않는 표현이다.
세 문헌 외에 유사 기록 중 가장 이른 것은 1920년의 『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인데, 역시 『수운문집』과 유사하다.120) 『천도교회사초고』는 ‘뜻을 선도(禪道)와 역수(易數)에 두었으나’로 되어있고121), 『천도교서』는 ‘일찍 선도와 점(占)과 역수에 뜻을 두시다가 작다고 하여 하지 아니 하시고’이다.122) 이 두 문헌에서는 다른 기록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교나 기독교가 나타나지 않는다.123) 『수운문집』의 기록이 탈자에 따른 오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조에서 왕명으로 사사된 이들에 대한 행장의 집필 방향은 기본적으로 유교적 질서 안에서 그 억울함을 신원(伸冤)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교를 포함하는 모든 이치인 ‘각리(各理)’를 수운이 부정했다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 보다는, 선도와 역수 등을 수운이 부정했다는 『수운문집』의 ‘이치를 살피는 범술 [察理之凡術]’이라는 표현이 보다 앞선 기술 방식이다. 수운의 행장이 집필된 시기에 관과 유생들의 동학 탄압이 엄중했던 상황에 더하여 수운을 신원하려는 행장 집필 동기를 고려한다면 유학에 대한 비판적인 표현은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운이 유교를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이를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수운의 유교 비판은 사상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이끌어가는 지도적 기능을 상실한 부분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유교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교적 세계와 결별한 1870년대 후반 이후의 동학 사유체계에서 수운의 언설을 바라본 결과일 뿐이다. 수운 당대 그의 사유체계가 유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저술한 경전을 통해 분석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124)
두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도원기서』의 ‘明世誤人之理’부분이다.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을 그르치는 이치’라는 뜻인데 글의 맥락에 따른다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欺世(人)誤人(世)之理’, 즉 ‘세상(사람)을 속이고 사람(세상)을 그르치는 이치’가 더욱 적절하다.125) 『수운문집』은 ‘欺世誤人’이지만 상주동학교당 필사본은 ‘明世誤人’으로 되어 있음으로 본다면 『도원기서』의 표기도 필사과정의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126)
세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서 사용된 ‘타기(打棄)’와 『수운문집』의 ‘타기(唾棄)’이다. ‘타기(打棄)’는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구타하고 유기한다’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지만 ‘타기(唾棄)’는 ‘혐오한다’, ‘더럽게 생각하여 돌아보지 않고 버린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관용어이다.127) 따라서 글의 맥락으로 본다면 『수운문집』이 올바르게 사용된 것이다. 이상 세 가지 점으로 본다면 『수운문집』이 가장 집필자의 의도를 잘 보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운문집』이 ‘수운 행장’ 원본에 가장 근접한 문헌임을 의미한다.
<표 5>는 경주로 몰래 돌아온 수운을 제자들이 찾아가고 담화를 나눴다는 기사다. 『대선생주문집』이 『수운문집』과 전체적 유사도가 높지만, 해월 관련 일화에서만큼은 『도원기서』와 높은 유사도를 보이는데, <표 5>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대선생주문집』이 다른 부분에서 『도원기서』와 많은 차이를 보이면서도, <표 5>와 같이 해월이나 도통 전수 관련 부분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은 『대선생주문집』이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을 저본으로 편집되었지만, 해월 관련 기록에 있어서의 편찬 방향은 『도원기서』와 같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위 기사에 따르면 1862년 3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해월이 홀연히 박대여의 집으로 수운을 찾아왔다고 하였고, 『수운문집』은 해월이 박하선, 하치욱 등과 같이 찾아왔다는 하였다. 이 차이는 해월의 도통 계승과 관계된 논쟁으로 이어졌다. 박맹수는 『도원기서』가 해월의 역할을 강조하는 해월 중심의 기술이라는 주장이고, 표영삼은 『수운문집』이 박하선을 내세우기 위한 가필이라 주장한 것이다.128)
박하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표 5>와 같은 일화가 『수운문집』에 다소 기록되었기에 표영삼은 1985년에는 『수운문집』을 1865년경 박하선이 집필한 것으로 추측했다고 보인다.129) 하지만 2000년대에 이르러서 표영삼은 기존 주장을 철회하면서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의 해월 관련 기사를 수정 편집한 것이며, 그 편집 의도가 박하선을 내세워 해월의 도통 전수를 부정함으로써 남접을 정당화하기 위한 데에 있다고 주장하였다.130)
표영삼이 『수운문집』의 조작 근거로 제시한 “나는 박하선이 올 것을 알았다. [吾知夏善之來也]”라는 부분을 박하선을 내세우기 위한 가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구절은 수운이 박하선이 올 것을 미리 알았던 이유가 박하선의 꿈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해월보다 박하선을 더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다는 박하선이 체험한 수운의 신성성에 대한 일화이기 때문이다.
표영삼은 『수운문집』이 1880년 이후 남접의 정통성을 주장하던 이들에 의해 조작된 문헌이라 주장했지만, 1880년 이후 박하선이나 그와 관련된 동학도들의 활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 박하선은 경주 북쪽의 영해 접주여서 지역적으로 북접 소속이었고 1869년경 박해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그의 아들 삼 형제도 수운의 신원을 위해 해월이 참여했던 영해 민란에 관련되어 1871년 모두 체포되어 죽었다.131) 따라서 박하선은 남접과 관련된 바가 전혀 없었고, 남접을 계승했다던 이들과 박하선이 관련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된 적도 없다. 남접을 주장하면서 『수운문집』을 조작한 배후라고 표영삼이 지목한 김주희(1860~1944)는 『수운문집』의 필사 시기 이후에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박하선과의 관련성은 전혀 없다.132) 또한 김주희의 ‘동학본부(상주동학교)’는 방대한 간행 사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수운문집』을 간행하거나 활용한 바가 없다.
오히려 『수운문집』은 여러 제자가 함께 있었던 일화에서는 해월의 도통전수로 해석될 수 있는 기록을 배제하지 않았다.133) 단지 해월과 수운만이 알 수 있는 일화가 기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만 『대선생주문집』이나 『도원기서』와 다르다. 만약 표영삼의 주장처럼 『대선생주문집』에서 해월 관련 일화를 조작하거나 삭제하여 『수운문집』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수운을 찾은 여러 제자 중 해월이 가장 부각되는 상황을 상세히 묘사한 <표 5>의 기사는 『수운문집』에서 배제되었어야 한다.
이 일화에서 추가로 주목할 부분은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서도 해월이 수운을 홀연히 찾아왔다고 할 뿐, 해월 홀로 왔다고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해월이 홀로 수운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1900년을 전후로 하여 편찬된 문헌인 『대선생사적』의 「해월선생문집」에도 나타난다. 이 문헌에는 해월이 박대여의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백사길이 급히 와서 해월을 불러세우고 어디로 가는지를 묻자, 해월이 “선생(수운)이 박대여의 집에 좌정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라고 하고 이에 백사길이 자신이 “먼저 가겠다.”라고 하자 해월이 “앞뒤의 차이는 없다”라고 답하는 내용이 있다.134) 해월이 영감을 느끼고 수운을 찾아가는 도중에 박하선이나 하치욱이 아니라 백사길을 만났으며, 백사길도 수운에게 갔음을 보여주는 이 일화는 해월이 홀로 수운에게 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박하선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인지, 해월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어느 한쪽이 사실관계를 조작했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135) 『도원기서』 원본과 1908년 필사본 간의 차이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원본에서는 ‘요외삼월(料外三月)’이지만 필사본에서는 ‘요외시세삼월(料外是歲三月)’이다.136) 필사본은 『수운문집』의 표현을 따르고 있는데 이 부분은 필사자인 김세인이 수정에 참고한 문헌이 『수운문집』 계열의 문헌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수운과 해월이 박대여의 집에서 나눈 대화도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수운과 해월의 일대일 대면으로 기록되어 있어 해월을 부각하는 기록임을 알 수 있다.137) 『수운문집』도 해월이 수운과의 대화에서 중심 화자로 나타나 있어 해월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잘 보여준다. 만약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면 해월을 중심 화자로 내세우지 않고 기술했어야 한다. 이는 『수운문집』이 해월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의도 아래 첨삭된 문헌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대화에서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는 『수운문집』에 비해 ‘선생이 그것에 대해 말하라 하시니 경상이 꿇어앉아 고하기를[先生曰且言之 慶翔跪告曰]’이라는 표현이 더 들어가 있다.138) 이로 인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의 경우 하나로 연결해도 되는 해월의 질문이 둘로 분리되어 의미상 중복되는 문맥이 나타난다. “어찌 그러합니까? [何爲其然也]”와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其故何也]”는 의미상 중복되는 표현이다. 여기서 수운에 대한 해월의 존경과 예를 강조하면서 해월이 체험한 이적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또한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는 『수운문집』에 없는 “경상이 또 묻기를 ‘이후 포덕을 하오리까?’ 여쭈니 ‘포덕하라’고 하셨다. [慶翔又問曰 自後布德乎 曰布德也]”라는 대화가 추가되어 있다. 이는 해월이 포덕을 허락받은 후 해월에 의해 사방의 현사(賢士)가 입도했다는 기사를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교세의 확장이 해월의 포덕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해월을 부각하는 기술 방식이다. 이에 비해 『수운문집』은 수운이 먼 곳(전라도)에 있었음에도 그 권능에 의해 제자가 조화를 체험하였다는 것을 시사하여 이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포덕이 된 것이 수운의 권능임을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선생사적』에는 해월이 당시 ‘도수사’와 ‘권학가’ 2권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으며 해월이 포덕을 허락받았다는 기사는 없고 “1862년 6월에 해월이 포덕의 뜻이 있어 포덕을 시작하였다.”라고 되어 있다.139) 결국 『수운문집』의 기록은 해월 중심의 기록인 『대선생사적』과 비교해도 삭제라고 보기 어렵다.
『수운문집』은 수운이 먼 지방에 있었음에도 제자가 조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을 부각한 반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은 해월이 조화를 체험하였고 그에 의해 교단의 교세가 급속도로 커졌음을 암시하여 동일 사건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운문집』은 오롯이 수운에 집중하여 해당 사건을 기술하였다면,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은 수운을 통해 해월의 정통성과 공로를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분석은 『수운문집』이 해월의 도통 승계가 동학 내에서 수용되고 확립되기 전에 편찬된 원본 ‘수운 행장’의 필사본이며,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해월의 도통 승계를 확립하기 위해 원본 ‘수운 행장’이나 그 필사본을 해월 중심으로 수정 편집한 것임을 시사한다. 『수운문집』이 1860년대 동학의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표 6>은 해월이 수운과 그 가족을 위해 물품을 마련한 기사로, 『수운문집』에는 해월과 여러 도인이 이불 한 채와 옷 한 벌을 지어 수운에게 올리고, 부서접(府西接)에서 수운의 가족들이 먹을 미육(米肉)과 금전을 구하여 수운의 본가로 보냈다는 기사가 있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는 모두 해월이 홀로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당시 해월의 경제적 상황이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기록처럼 해월이 단독으로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140) 오히려 『수운문집』에 기록된 내용의 개연성이 높다. 해월의 정통성과 신성성에 입각한 문헌인 『대선생사적』에서도 해월과 수삼(數三) 인이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수운문집』의 기록과 일치한다.141) 또한 『대선생사적』에서는 해월의 주선하에 접조직이 나서서 수운 가족의 생계를 해결했다는 『수운문집』의 기록과 유사한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142) 이는 해월이 몇몇 도인들과 함께하거나 해월의 주선하에 접조직이 나서서 물품을 마련했다는 『수운문집』의 내용이 더 정확한 기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수운문집』은 1862년 11월, 접이 접주 임명 이전에 구축되어 있었고 교인들이 접을 매개체로 활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의 연원조직과 같은 속인제 조직의 경우 책임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기 전에 조직이 먼저 구성되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준다.143) ‘접내 다수가 빈한(貧寒)한데’라는 말에서 접이 의미하는 것은 해월을 연원으로 하는 인맥 조직이며 해월과 함께 수운을 찾아간 여러 도인은 해월 휘하의 교인이라고 볼 수 있기에 연원을 중심으로 한 인적 계보 조직인 접이 동학 종교활동의 구심점이었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수운문집』은 이 기사 이후 일관되게 동학의 공식 조직인 접을 중심으로 교단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어, 해월을 중심으로 교단사를 기술하고 있는 『도원기서』의 편집 방향과 확연히 대비된다. 『수운문집』이 수운의 행적을 해월이 아니라 여러 접을 매개로 하여 기술한 사실은 『수운문집』이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교단 내에 확립되기 시작하기 이전에 편찬된 것임을 시사한다.
<표 7>은 1863년 7~8월에 관한 기사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유사하지만 『도원기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표 7>에 나타나는 차이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전에 연구된 바는 없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운문집』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8월 어느 날 전시황이 와서 뵈니 선생께서는 액자를 주시되 스물두어 장 가운데 특히 이행(利行) 두 글자를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멀리서 온 데 대한 정을 표시하노라.’ 하셨다. 나머지 스무 장은 주동접에 나누어 하사하셨다. 또 「흥비가」의 한 장(章)을 특별히 내려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노래 역시 외우고 생각하면 좋은 것이니 시황이 접중을 분명히 일깨워 상종하면 또한 공부라, 신중히 하여 말(馬) 위에서 상종하듯 하지 말라’고 하셨다.144)
이 기사에는 전시황이라는 인물과 주동접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본교역사」(1910)와 『천도교회사초고』(1920)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전황(全晄)과 김광응(金廣應)과 관련된 기록이다. 전황, 김광응은 내용상 중요한 친견 제자임에도 해당 문헌의 일화 외의 다른 어떠한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이 오기로 인해 나타난 허수의 인물이기 때문이다.145) 필사 과정에서 전시황은 전황(全晄) 또는 김광응(金廣應)으로 오기되었지만, 해당 일화는 1920년까지 전승되고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운문집』과 다른 문헌의 비교를 통해서만 오류가 드러난다는 사실은 『수운문집』이 기준이 되는 문헌임을 잘 보여준다.
전시황은 실존 인물이었기에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 이 기사를 의도적으로 가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전시황은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는 수운의 친견 제자로, 『도원기서』에서는 『동경대전』 편찬 시의 도차주였던 강수와 같이 해월 다음의 지위를 지닌 감역으로 기록되어 있다.146) 그런데도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에는 전시황 관련 기록이 없다. 전시황이라는 이름은 『도원기서』에는 경진년(1880) 1월에 처음 나타나고, 해월이 쓴 인제판 『동경대전』 간행 시의 ‘별록(別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147) 즉 1880년 1월, 해월은 도차주 강시원(강수)과 전시황을 대동하여 인제접으로 가서 인등제를 베풀었고, 이후 동경대전 각판의 감역으로 강수와 전시황을 임명하였다. ‘별록’에 따르면 해월은 당시 도차주인 강수와 더불어 전시황의 이름을 직접 거명한다.148) 『도원기서』에서 1880년 이전에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이가 수운 문집 간행 과정에서 갑자기 등장하여 교단의 이인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전시황이 1880년에 수운의 친견 제자 자격으로 『동경대전』 간행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고 반드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시황이 『도원기서』의 편집을 주도했던 강수와 같이 『동경대전』 편찬 작업의 감독인 감역(監役)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149)
<표 7>을 보면, 『도원기서』에는 해월도 중요한 친견 제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전시황뿐만 아니라 그의 접인 주동접의 기록까지 누락되어 있다. 이처럼 『대선생주문집』과 『수운문집』이 수록한 전시황과 주동접의 기록을 『도원기서』만이 누락시킨 이유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동경대전』 편집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지만,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제자들의 기록을 『도원기서』의 편찬자인 강수가 삭제했을 가능성이다.
둘째, 친견 제자 관련 기사의 경우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거나 모순점이 있다고 판단해 삭제했을 가능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도원기서』에는 수운이 파접한 이후 해월을 제외한 친견 제자나 해월 휘하 접이었던 영덕 접 등과 관련되지 않은 기사 대부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운문집』에서 해월이 다른 제자와 함께 등장하는 일화들을 『도원기서』는 모두 해월을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해월 홀로 수운과 대면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는 파접의 의미에 대한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조선 시대에 ‘접(接)’은 ‘문사들이 글을 짓거나 책을 읽는 모임’ 또는 ‘학생들의 학기’를 의미했지만, 해월은 1878년 이를 문사의 개접이 아니라 ‘천지의 이치에 맞추어 하늘의 운을 받고 하늘의 명을 받아 도(道)를 강(講)하는 것’으로 선언하였다.150) 따라서 해월의 도통전수를 인정했던 교인에게는 파접 후에 다른 제자들이 도통 계승자인 해월을 통하지 않고 수운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 것이 공식적인 일이 될 수 없었다.151) 그에 따라 『도원기서』를 편집한 강수도 1863년 8월 이후에 있었던 친견 제자와 수운의 일화를 대부분 비공식적인 일로 보고 삭제했을 개연성이 크다.
셋째, 그 위상이 해월에 버금갈 정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인물의 기사가 『도원기서』 편집 시에 일괄 누락되었을 가능성이다. <표 7>의 내용처럼 수운이 전시황과 그의 접에 22장의 액자를 모두 주고, 「흥비가」를 처음 공개하면서 한 장(章)까지 하사하고 이것으로 접의 교인들을 가르치라는 명을 내렸다면, 다른 제자나 접주의 입장에서는 일견 파격적이다. 따라서 수운의 전시황에 대한 대우로 인해 관련 기사는 해월 추종자들에 의해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도원기서』와 달리 파접 이후 수운과 친견 제자 간의 일화가 『대선생주문집』에 남아있는 이유로는 세 가지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1878년 7월의 ‘개접(開接)’의 의의에 대한 해월의 선언 이전에 『대선생주문집』이 편집되었을 가능성이다. 둘째, 해월을 통해야만 수운을 만날 수 있었다는 도통전수 담론이 교단 내에 확산하기 전에 『대선생주문집』이 편집되었을 가능성이다. 셋째, ‘파접’ 시점을 특정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모순점을 충실히 검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실제로 『대선생주문집』에는 7월 23일에 파접했다는 기사가 8월에 수운이 전시황을 만난 기사 이후 기록되어 있어 파접 시점이 후에 추가되어 사건 순서가 역전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도원기서』에서는 파접 시점을 특정하면서도 전시황의 일화를 배제하여 시간 역전을 피했고 파접과 관련된 교리적 모순도 없앴다.
한편, 『수운문집』만은 파접 시점을 특정하지 않고 있는데, 유일하게 파접 시점을 특정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이 문헌의 신빙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도원기서』 이후의 문헌인 『대선생사적』, 「본교역사」, 『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 『시천교종역사』, 『시천교역사』 등에서도 파접 시점이 특정되지 않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152) 특히 『도원기서』를 토대로 편찬된 것이 명확한 『시천교종역사』조차 7월 23일을 파접일로 기록하지 않았다. 『수운문집』이 파접 시점을 특정하지 않은 것은 예외적인 일이 아닌 것이다.
20세기 초의 일부 문헌에 파접 시점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파접이 해월의 도통 확립 이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 또는 ‘북접주인’ 임명의 의의를 드러내는 일화로 새롭게 조명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수운 부재 시에 교단을 총괄하는 이인자 임명이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수운이 공식적인 활동과 가르침을 폐지할 수밖에 없는 파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접 시점은 해월의 도통 계승이 교단에 수용되기 시작했던 1875년 이후에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고 1878년 해월이 개접을 선언하면서 중요한 사건으로 해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월의 도통 계승을 명확히 하는 문헌인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 『대선생사적』이 모두 후계자 임명으로 해석된 ‘주인’, ‘북도중주인’, ‘북접주인’과 파접을 관련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 문헌들이 모두 교단 내에서 해월의 도통 계승이 확립된 후에 편집되었음을 시사한다.
『수운문집』에서 파접은 8월 초부터 8월 13일 사이의 일이며 후계자 임명과 관련 없는 사건이다. 파접은 수운이 박해로부터 자신과 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 중단을 선언하는 대외적 조치로만 암시될 뿐이다. 『수운문집』의 편집자는 파접을 『대선생주문집』이나 『도원기서』의 편집자와는 다르게 인식했다. 그리고 이는 수운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고 후계자를 미리 임명하였다는 담론이나, 천명에 따라 ‘도를 강론’한다는 해월의 ‘개접’ 해석이 교단 내에서 확립되기 전에 『수운문집』이 저술되었음을 알려준다.
해월의 개접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가 커질수록 수운의 파접이 지니는 의미도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해월이 새로운 의미의 개접을 선언한 1878년 7월 이후 편집된 『도원기서』가 파접과 해월로의 도통전수라는 사건의 맥락과는 모순되어 보이는 일화를 대부분 수록하지 않은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더하여 『도원기서』는 파접과 해월의 ‘북도중주인’ 임명을 기점으로 서술의 중심을 명확하게 수운에서 해월로 옮기고 있다. 이는 이후 『도원기서』가 해월을 주인으로 기술했다는 것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도원기서』에 없는 파접 이후의 수운과 여러 친견 제자의 만남이 『수운문집』이나 『대선생주문집』에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도원기서』보다 앞선 문헌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표 7>에는 문헌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차이도 나타난다. 「흥비가」와 관련된 것인데, 『수운문집』은 “또 「흥비가」 일 장을 특사하였다. [又興比歌一章特賜]”고 하여 이미 흥비가가 저술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대선생주문집』은 “「흥비가」 일장을 지어 특사하였다. [又作興比歌一章特賜]”고 하여 이때 저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대선생주문집』에는 이후에 수운이 ‘8월 13일 「흥비가」를 지었다’는 내용이 또 있다는 것이다. 『대선생주문집』에 따르면 수운은 「흥비가」를 두 차례에 걸쳐 지은 후 전시황과 해월에게 각각 주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오기에 따른 내용상의 모순으로 보이므로 『대선생주문집』을 원본으로 보기는 어렵다.153)
<표 8>은 해월의 (북도중) 주인 임명, 즉 도통 계승과 관련된 기사이다.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유사한데, 각각 해월을 ‘주인(主人)’과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특정한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그에 비해 『수운문집』에는 해당 기사가 아예 없다.
『대선생주문집』의 내용에 대해 김상기는 ‘대도주의 공직 임명이 7월에 선행되고 심법 전수가 8월에 후행되었다는 것이 선후가 엇갈린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54) 박맹수는 1862년 12월 29일의 접주 임명에서 빠진 해월이 1863년 7월에 접주보다 상위직인 ‘북도중주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 비상식적이라고 주장했다. 『도원기서』의 기록은 ‘해월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비약’이라는 입장이다.155) 이에 반해 표영삼은 『수운문집』의 편찬자가 해월의 역할을 약화하기 위해 이 기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주장했다.156)
『수운문집』은 일관되게 해월이 홀로 수운을 대면한 일화를 수록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수운문집』에 <표 8>의 기사가 없는 것은 편찬자가 그 일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지 의도적 삭제라고 볼 수 없다. 실제 해당 기사를 사실로 가정하고 그 상황을 보더라도 당시 수운과 해월 두 사람만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수운문집』이 1860년대 후반, 친견 제자 중 해월 휘하의 인물이 아닌 이가 집필한 ‘수운 행장’의 필사본이라면 해월의 기억에만 있었던 해당 일화가 『수운문집』에 기록되지 않는 것이 논리적이다.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기술에 따르더라도 수운이 해월을 ‘주인’이나 ‘북도중주인’으로 인정한 일은 비공식적이며 비공개적인 일이었다. 이는 1875년까지 해월이 교단 내에서 ‘주인’의 위상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는 『도원기서』의 해월 관련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따라서 ‘주인’이나 ‘북도중주인’과 관련된 일화가 실제 있었더라도 1875년 이후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성립될 즈음에 공표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해석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대선생주문집』의 ‘주인’과 『도원기서』의 ‘북도중주인’이라는 차이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발췌하여 간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주인’은 수운의 계승자를, ‘북도중주인’은 특정 지역의 여러 접을 아우르는 책임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57) 『도원기서』가 <표 8> 이후에는 해월을 주인(主人), 도주인(道主人), 도주(道主), 도포덕주(道布德主) 등으로 지칭하면서도 이 기사에서만 ‘북도중주인’이라고 한 것은 이례적이다.158) 오히려 『대선생주문집』의 ‘주인’이라는 표현이 『도원기서』의 전체적인 기술 방식과 일치한다. 『도원기서』의 <표 8> 부분에서만 ‘주인’을 ‘북도중주인’이라고 수정했다고 보아야 논리적이다.159) 이는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에 해월을 ‘북도중주인’이 아니라 ‘주인’으로 기술한 부분이 나타난다는 사실로도 방증된다.160)
‘주인’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본다면 『대선생주문집』은 『도원기서』보다 이른 1875년~1877년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선생주문집』의 ‘주인’과 가장 일치도가 높은 ‘도주인’이라는 지위를 해월이 공식 사용한 시기를 『도원기서』에서는 1875년 10월 이후로 기록하고 있고, 1877년 11월 이후에는 ‘도포덕주(道布德主)’라는 지위를 사용했기 때문이다.161)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맥락에서 보면 수운은 다른 제자가 없는 자리에서 해월을 교단의 중요 간부로 임명하고, 교단의 일에 관여하라고 명령하였다. 교단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비공식, 비공개적으로 선정하는 것은 교단의 분열을 초래하는 위험하고 낯선 방식이다. 이것은 『도원기서』보다 후대인 1900년 전후로 집필된 『대선생사적』의 해당 기사와 비교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교단 이인자인 북접 주인의 임명은 파접 전 1863년 4월 공식적,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162) 『도원기서』가 해월의 직접적인 기억을 반영하였으므로 『대선생사적』의 기록이 부정확하다고 볼 수 있지만, 후계자의 권위가 구축되어 교단이 통합되기 위해서는 그 임명이 공식적이며 공개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대선생사적』은 잘 보여준다.
<표 9>는 1863년 8월에 해월이 수운을 면담한 내용으로, 도통 전수와 관련하여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사이다. 세 문헌에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수운문집』이 다른 두 문헌과는 차이가 크다.
첫 번째 차이는 「흥비가」 부분에서 발생한다. 『수운문집』에서는 수운이 「흥비가」를 노래할 때 여러 제자가 왔다고 기록한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에서는 수운이 「흥비가」를 지었는데 전해 줄 사람이 없었던 바로 그때 해월이 찾아왔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도원기서』도 『대선생주문집』과 유사하게 해월이 혼자 온 것으로 기록한다.
<표 7>을 보면 『대선생주문집』은 이미 수운이 「흥비가」를 지어 전시황에게 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표 9>에서 다시 「흥비가」를 지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오탈자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 근거는 1908년에 김세인의 필사본 『도원기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필사본에는 본문 옆에 작은 글씨로 ‘영소가(咏霄歌)’라고 부기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원본 『도원기서』를 교감하면 해당 내용은 ‘작영소가흥비가(作咏霄歌興比歌)’가 되어, 『수운문집』의 ‘작영소가흥비(作咏霄歌興比)’와 거의 일치한다.163) 다만, 문제는 ‘작영소가흥비가(作咏霄歌興比歌)’를 ‘영소가와 흥비가를 지었다’로 읽을지, 아니면 ‘영소를 짓고 흥비가를 읊었다’로 읽을지에 따라 흥비가가 지어진 시점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영소’는 계미(1883년) 목천판 『동경대전』에서 ‘영소(詠霄)’라고 되어 있지만, 경진(1880년) 인제판에서 ‘영소(咏霄)’로 표기되고 있어, 『수운문집』의 표기는 후자와 일치한다.164) 『수운문집』에 기록된 ‘영소(咏霄)’의 한문표기는 『수운문집』이 최초의 『동경대전』과 가장 근접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경진(1880년) 인제판 『동경대전』에 ‘논학문’이 『수운문집』과 동일하게 ‘동학론’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165) 가장 앞선 기록과 일치하면서도 오탈자로 인한 내용상의 모순이 없는 『수운문집』을 후대의 가필로 보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작영소가흥비가(作咏霄歌興比歌)’는 『수운문집』처럼 ‘영소를 짓고 흥비가를 읊었다. [作咏霄歌興比]’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필사 과정에서 ‘영소가와 흥비가를 지었다’로 오기되고 ‘영소가’가 누락되면서 『대선생주문집』이나 원본 『도원기서』처럼 ‘작흥비가(作興比歌)’로 되었다고 보면 설명이 된다.
두 번째 차이는 『수운문집』이 당시 수운을 찾은 제자들이 해월과 박하선을 포함하여 6~7인이라고 한 데 반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해월이 홀로 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선생사적』의 다음 기록을 보면, 『수운문집』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는 점이 입증된다.
8월 13일 선생(해월)이 예닐곱 선비들과 함께 배알하러 가니 대선생(수운)이 “추석이 가까이 오는데 무슨 연고로 왔는가?”라고 하자 선생이 말하길 “모시고 추석을 지내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선생이 기쁜 기색을 띠었다.166)
『대선생사적』은 해월의 신성성을 전제로 하여 기술된 문헌이다. 그럼에도 『수운문집』과 동일하게 6~7명이 함께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월의 역할을 약화하기 위해 『수운문집』이 가필되었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표 10>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도원기서』에도 8월 14일에 여러 제자가 수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어, 8월 13일 여러 제자가 수운을 찾았다는 『수운문집』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8월 13일의 수운과 해월의 만남은 『수운문집』에서는 6~7인의 제자가 함께 추석 절일을 보내기 위해 수운을 찾은 일에 따른 부수적 사건이지만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에서는 도통 전수를 앞두고 해월이 운명적으로 수운을 찾은 것이다. 『수운문집』의 기사가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에서는 해월의 도통 전수 사건으로 해석되어 수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해월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오히려 ‘수운 행장’에 해월이 추가되어 『수운문집』이 수정 필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월 외의 다른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의 순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은 문헌의 성립 역시 이러한 순서로 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구축되고 도통전수 담론이 확립되면서 문헌 또한 이에 맞추어 수정 편집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해당 기사의 수정 과정을 재구성하면, 『수운문집』의 “8월 13일 영소를 짓고 「흥비가」를 부르며 무료하게 있을 즈음 하선과 경상 등 6~7인이 마침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대선생주문집』의 “8월 13일 (「영소가」와) 「흥비가」를 짓고 전해줄 곳이 없던 즈음 경상이 마침 이르렀다.”로 수정되었고, 『도원기서』의 “8월 (「영소가」와) 「흥비가」를 지었는데 13일 경상이 생각지 않게 마침 이르렀다.”로 수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표 10>은 186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신비체험 기사로, 해월의 도통전수 증거로 주로 언급된다. 세 문헌의 내용에 차이가 있지만, 『대선생주문집』의 경우에 오탈자가 많아 비교하기가 어렵기에 『수운문집』과 『도원기서』의 차이점을 주로 분석했다.
『수운문집』에는 14일 밤늦게까지 여러 제자가 수운과 시를 읊으며 함께 즐긴 것으로, 『도원기서』에는 13일부터 14일 밤늦게까지 수운의 곁에 해월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도원기서』에는 8월 14일 여러 제자가 수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 즉 “14일 3경(23시~1시) 좌우를 물리고[十四日三更 辟左右]”라는 내용도 있다. 유사한 기록이 『대선생사적』에도 있는데 “ … 5경(3~5시)에 이르자 대선생이 모두 물러가 침소에 들라고 이르고 나서 특별히 선생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명했다. … ”167)는 것이다. 따라서 해월 외의 제자들이 수운과 함께 있었다는 『수운문집』의 기록을 조작으로 볼 근거는 없다.
박맹수는 <표 10>의 차이에 대해서 『수운문집』은 1870년대 중반 이전, 즉 해월 중심의 지도 체제가 확고해지기 전에 쓰였고, 『도원기서』는 1879년 의식적으로 해월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편찬되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168) 박맹수가 제시한 증거는 주로 정황상의 추론이므로 본 연구에서는 문헌 그 자체에 집중하여 분석하여 좀 더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수운문집』에만 있는 “十四日夜 秋聲入樹月色滿堦 先生與群弟 或論或誦之際 咏處士之歌 松菊如帶栗里之淸風 誦飛仙之句 老鶴來弄赤壁之舟月”의 부분을 분석했는데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14일 밤, 가을소리 나무에 들고 달빛이 섬돌을 가득 채우니, 선생께서 여러 제자와 함께 혹 담론도 하고 혹 시를 외웠는데, 처사가(處士歌)를 읊으니 소나무와 국화꽃이 마치 율리(栗里)의 청풍(淸風) 두른 듯하였고, 비선(飛仙)의 시구를 읊으니 늙은 학이 날아와 적벽(赤壁)의 뱃길 비추는 달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14~15일에 6~7인의 다른 제자가 수운과 함께 있었다는 『수운문집』이 정확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수운문집』에서는 위의 문구를 통해 홀로 절일(節日)을 지낼 스승을 생각하여 찾아온 제자들과 수운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8월 13일 제자들이 수운을 찾아온 이후 14일 3경까지의 수운의 행적을 밝혔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도원기서』에는 13일부터 14일 저녁까지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수운문집』의 기록과 유사한 내용이 『대선생사적』에 있다는 점이다. “至十四日夕秋月揚輝和氣滿堂誦吮論學以至五更 [14일 저녁에 이르러 가을 달이 밝게 빛나고 화기(和氣)가 집에 가득하였다. 주문을 외우고 학문을 논하면서 5경에 이르니]”라는 문구이다.169) 해월의 도통 전수를 명확히 하는 『대선생사적』이 1900년을 전후로 집필된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수운문집』의 해당 구절이 20세기 초에 가필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수운문집』에만 수록된 문구는 시부(詩賦) 등의 고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활용하여 당시의 정황을 표현한 문학적 비유로, 조선조 유생들의 사장(辭章) 방식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가을소리 나무에 들고[秋聲入樹]’는 한시와 문집에서 주로 가을의 정취를 표현하는 문학적 표현이다.170) 또 ‘소나무와 국화꽃이 마치 율리(栗里)의 청풍(淸風)을 두른 듯하였고[松菊如帶栗里之淸風]’라는 문구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있다. [三徑就荒 松菊猶存]”라는 문구와 이태백의 <희증정률양(戱贈鄭溧陽)> 중의 “ … 청풍 불어오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소박한 복희 황제 때의 사람이라 하였네. 어느 시절 율리로 가서 평생의 친구를 한번 만나보리.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何時到栗里 一見平生親]”라는 문구를 활용하여 수운을 도연명에 비유한 것이다.171) 그리고 “비선(飛仙)의 시구를 읊으니 늙은 학이 날아와 적벽(赤壁)의 뱃길을 비추는 달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誦飛仙之句 老鶴來弄赤壁之舟月]”라는 문구는 소동파의 <전적벽부(前赤壁賦)>, <후적벽부(後赤壁賦)>와 주자의 <서현원삼협교(棲賢院三峽橋)>의 시부를 조합하여 수운을 소동파에 비유한 것이다.172) 이처럼 유교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사장을 통해 수운을 도연명과 소동파에 비유한 것은 『수운문집』이, 『도원기서』와 달리, 유교적 사유체계를 지닌 친견 제자에 의해 집필된 ‘수운 행장’에 가장 근접한 문헌임을 시사한다.
넷째, 『수운문집』의 해당 문구는 수운이 직접 저술한 <처사가>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처사가>는 경전에 나타나는 가사 제목은 아니지만 ‘수운 행장’에는 분명하게 그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173) 이후 『동경대전』 <화결시>의 세 번째 부분이라 전해졌는데, 태산(泰山)과 공자(孔子), 청풍(淸風)과 오류선생(五柳先生), 청강(淸江)과 소동파(蘇東坡), 청송(靑松)과 허유(許由), 명월(明月)과 이태백(李太白)을 소재로 했기에 <처사가>로 이름 지어졌다고 알려졌다.174) 그런데 『수운문집』은 수운이 <처사가>와 ‘비선(飛仙)의 시구’를 읊은 정취를 도연명, 이태백, 소동파의 문장을 활용하여 묘사함으로써 수운을 도연명과 소동파에 비유하였다. 이는 “청풍이 서서히 불어옴이여, 오류선생이 잘못을 깨달았도다. 맑은 강의 넓고 넓음이여, 소동파와 손님의 풍류로다.”라는 <처사가>의 구절을 집필자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75) 결국 『수운문집』의 해당 문구는 수운으로부터 <처사가>를 직접 듣고 그 내용과 그 의미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도연명, 이태백, 소동파 등의 시부에 해박해야 지을 수 있다. 후대의 조작이나 가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176) 『수운문집』 집필자는 <처사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 유교적 시부에 해박했던 친견 제자일 가능성이 크다.
『수운문집』의 신빙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은 신비체험과 관련된 문헌 간 차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수운의 의지에 따라 베풀어진 조화를 해월만이 아니라 여러 제자가 체험했다고 하는 『수운문집』 기사의 신빙성은 상대적으로 높다. 수운은 서양의 침입으로 인한 병란이 1863년 12월에 닥칠 것과 이를 조화로 물리칠 수 있다고 예언한 바 있었다. 따라서 1863년 8월에 서양의 침입을 물리칠 조화를 보여주었다면, 그 시현 대상은 다수가 되어야 한다. 곧 닥쳐올 병란을 물리칠 보국안민의 권능을 가능한 한 많은 제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당시 동학에 대한 탄압의 와중에서 그 신앙을 유지하는 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수운과 제자들이 체포된 후 받은 심문 내용에는 수운이 제자들에게 양인(洋人)을 무력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주문과 칼춤으로 막을 수 있고 천신이 이를 도울 것이며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177) 이 부분도 『수운문집』 기록이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수운문집』의 기록은 수운이 있었다면 신통 조화로 양요(洋擾)를 평정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기에 동학 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수운의 죽음이 억울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화이다.178) 그에 비해 해월의 도통 전수를 확립하려 했던 이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화의 체험은 『도원기서』의 기록처럼 해월만의 도통전수 일화로 해석되고 편집되어야 했다.
둘째, 신비체험 이후 수운이 한 말을 보면 『수운문집』이 더 자연스럽고 정확하다.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서는 “어찌 걱정하는가? 후세의 난을. [何患乎後世之亂也]”으로 되어 있어 짧은 문장이 둘로 구분되면서 뒤의 문장이 불완전한 형태를 띤다. 강조의 의미로 해석한다고 해도 부자연스럽다. 『수운문집』은 “어찌 후세의 난을 평정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가? [何患平後世之亂也]”로, 구조나 맥락의 의미에서 자연스럽다. 이러한 차이는 호(乎)와 평(平)의 쓰임새 때문인데, 평(平)이 필사 과정에서 호(乎)로 오기되었다고 보면 해소될 수 있다.
이상의 분석은 『수운문집』이 『대선생주문집』이나 『도원기서』보다 앞선 문헌임을 입증한다. 하지만 표영삼이 『수운문집』의 가필 증거로 지적한 문제를 추가로 논의할 필요는 있다. 경상(慶翔, 해월)으로 되어 있는 곳을 『수운문집』에는 군제(群弟) 또는 군등(君等)으로 수정하면서 실수로 일부를 군(君)으로 남겨두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앞서 살펴본 여러 사실을 반박하는 근거로는 충분하지 않다. 『수운문집』에서 군제(群弟), 군등(君等)이 사용되어야 할 곳이 군(君)으로 표기된 곳은 모두 수운의 말을 직접 인용한 곳이어서 맥락상 제(弟), 등(等)의 생략이 가능하며 맥락상 복수로 하지 않아도 복수로 읽히는 부분이다. 군제(群弟), 군등(君等)으로 하지 않는 것이 문맥으로 본다면 더 자연스럽다. 또한 필사 과정에서 글자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한 것도 표영삼이 이미 『수운문집』의 가필을 결론짓고 문제에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표 11>은 수운이 동학에 대해 유불선을 겸한 것으로 설명한 후 강결시(降訣詩)를 내려준 기사로, 천도교 전통에서는 심법의 전수, 즉 도통 전수로 여겨지는 일화이다. 수운이 동학의 도(道)를 설명하고 강결시 등을 준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세 문헌은 차이를 보인다. 『수운문집』에는 1863년 8월 15일 수운이 여러 제자가 있는 자리에서 도를 강(講)하고 부서(符書)와 강결시를 준 것으로,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는 해월이 홀로 듣고 받은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위의 내용 가운데 “용담의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검악의 사람에게 한마음이 있네.”라는 시는 해월의 단일 지도체제가 명확해지는 1870년대 후반부터 수운이 해월에게 하늘의 천명을 전하는 도통 전수의 증거로 해석되고 있었다.179) 이를 고려하면, 『수운문집』이 1900년대를 전후하여 해월의 위상을 약화할 의도로 가필된 것이라는 표영삼의 주장은 근거는 박약하다. 1870년대 후반부터 공식적으로 해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검악인(劍岳人)’의 강결시가 『수운문집』에서 삭제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운문집』은 수운이 여러 제자에게 모두 공표한 바를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해월의 도통 전수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화가 수록되지 않은 『수운문집』에 이 강결이 기록된 이유는 삭제를 하지 못한 것이라기보다 이 강결이 『수운문집』 집필 당시에 수운이 해월에게 내려 준 전법시로 해석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해월이 살던 곳의 지명이 금둥골, 금등골이었으므로180) 검악인이 해월을 의미한다는 해석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이 강결이 전법시였다고 하더라도 수운이 해월의 위상을 명확히 하려면 『수운문집』과 같이 여러 제자가 있는 자리에서 공표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해월의 도통전수를 인정하는 관점에서도 『수운문집』의 기록이 『도원기서』나 『대선생주문집』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다. 『수운문집』을 가필된 문헌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다. 『수운문집』에 전해지는 사실은 수운이 여러 제자에게 강결과 가르침 등을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수운은 명확하게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한다는 의미의 전법시를 준 바가 없었고 따라서 연원제 원리를 벗어난 수운-해월-접주의 권위구조를 구축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는, 『수운문집』과 달리, 강결을 전법시로 보고 당시의 가르침 등 모든 것을 비공개적으로 해월에게만 알려준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수운의 행적보다는 해월의 도통전수 담론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편찬된 문헌임을 잘 보여준다.
<표 12>는 1863년 12월 수운의 생일 전후 일화인데 『수운문집』에는 잔치를 영덕 접의 도인들이 준비한 것으로,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는 주인인 해월이 비밀리에 영덕 접에 준비를 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위의 내용에서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이다. 첫째,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해월을 주인(主人)으로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운 문집’에 첨부할 ‘행장’에 해월을 주인으로 지칭하며 그를 중심으로 기사를 기록한 것은 사제관계를 중시했던 당시의 행장 집필 방식을 고려하면 예외적이다. 해월의 도통전수 담론이 확립된 후 ‘수운 행장’ 수정 과정에서 일어난 착오로 볼 수 있다. 두 문헌에서 모두 해월을 이름 대신 ‘주인’으로 지칭한 곳도 이곳이 유일하다는 점과, 해월이 ‘북도중주인’ 또는 ‘주인’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일관되게 경상(慶翔)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게다가 이 부분 이후 해월 관련 기사가 없는 『대선생주문집』과 달리 『도원기서』에는 이 부분 이후로도 경상(慶翔)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둘째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비해 『도원기서』에 수운과 강수의 대화가 더 자세히 실려 있다는 점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수운의 물음에 강수가 대답하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일화가 종결되는 데 반하여, 『도원기서』는 강수가 대답을 못 한 후 오히려 강수가 수운에게 질문을 하고 수운이 이에 대해 답변하는 내용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해당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강수가 묵묵히 대답하지 못하니 선생께서 웃으며 농으로 ‘그대는 진짜 묵방(墨房) 사람이다’ 하셨다. 강수가 도리어 뜻을 여쭈니, 선생께서 서쪽을 가리키고 동쪽을 가리켰다. 강수가 또 문장군(蚊將軍)의 뜻을 여쭈니 선생께서 ‘네가 마음을 통하면 알 수 있으리라’ 이르시고 강수가 또 무궁의 이치를 여쭈니 선생께서 ‘그 역시 마음을 통하면 알 수 있다’ 하셨다.
후에 강수는 영해 민란에 참여했다가 도피한 뒤인 1871년 4월경, 동학을 민란에 끌어들인 주모자 이필제가 「흥비가」의 ‘문장군’임을 깨달았다는 후회를 『도원기서』에 남긴다.181) 따라서 강수가 자신의 해석에 기반하여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본 일화를 자신의 기억을 통해 보완하여 『도원기서』에 추가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분석해 본 두 부분은 『수운문집』의 기록이 원본 ‘수운 행장’에 가장 근접함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표 13> 1863년 10월 수운의 생일과 관련된 일화로, 접 단위의 움직임을 담고 있다. 세 문헌이 모두 다른데 이는 문헌 성립의 선후 관계를 추론할 수 있는 여러 실마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는 전시황의 주동접에서도 생일 연회 음식을 준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도원기서』에는 없다. 앞서 밝혔지만 『도원기서』에는 파접 이후 해월과 그 휘하인 영덕 접 관련 기사 외에는 대부분 기록되지 않았다.182)
또 다른 차이는 『도원기서』가 수운의 생일 이후 상제의 강화가 끊어진 일과 수운이 알려준 교리와 의례의 핵심 사항을 추가하여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동경대전』의 글귀를 인용하면서 당시의 문제점에 대한 강수의 개인적 견해와 소회를 드러낸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183)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에는 『도원기서』의 300여 자나 되는 해당 문구가 없다. 수운의 예언과 교리 및 의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삭제할 이유가 없고 단순한 누락으로 보기에 그 글자 수가 상당히 많아서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따로 편집한 것이라는 표영삼의 주장은 논리적이지 않다. 이 부분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대선생주문집』이 『수운문집』을 필사하면서 수정된 문헌임을 방증한다.
이것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가 아니라 『수운문집』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선생주문집』의 “마침 선생 탄신을 맞아 주동접중에서 술과 음식, 약과 몇 그릇, 어포 몇 묶음을 마련해 연석에 바치고 존안을 뵌 후 가르침을 받고 물러났다.”는 내용은 『수운문집』과 유사도가 높다. 『수운문집』의 해당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선생 탄신을 맞아 주동접중에서 술과 음식, 약과 몇 그릇, 어포 몇 묶음을 마련해서 연석에 바쳤다. 선생께서 좌중에 앉으시고 여러 제자가 열 지어 모셨다. 온화하고 즐거운 음악이 짙게 퍼져 마치 봄바람의 화기가 불어오는 듯하니 선생의 다정하고 친절한 명교의 남은 즐거움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달 상주의 전시봉이 장석(丈席)을 배알하고 존안을 뵌 후 가르침을 받고 물러났다.
두 문헌을 비교하면 『대선생주문집』처럼 “존안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 물러났다. [承顔受敎而退]”의 주어를 주동접으로, 시점을 생일날로 되어 있는 구조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일 연회를 준비한 영덕접을 배제하고 주동접만이 생일에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정황에도 어긋난다. 『수운문집』에서는 “존안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 물러났다. [承顔受敎而退]”의 주어는 전시봉이며 시점은 생일이 아니라 10월의 어느 날로 생일과 관련된 기사가 아니다. 『대선생주문집』이 편집 필사 과정에서 “先生在座中 群弟列侍 誾御和悅之樂 襲若春風之和氣 莫非先生諄諄命敎之餘悅也 是月尙州人全時奉 來謁丈席”의 40여 자를 누락했다고 보아야 논리적이다. 만약 실수로 인한 누락이 아니라면 전시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면서 발생한 탈자이다.
따라서 『수운문집』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상주 사람[尙州人] 전시봉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원기서』에서 전시봉은 1880년 『동경대전』 간행 시 교정(校正)으로 기록되어 있다.184) 전시봉과 같이 당시 교정이었던 유인상(유시헌)은 1874년 정선 접주가 된 이로, 1870~80년대의 동학 교단 활동을 설명하는 데에 없어서 안 되는 중요 인물이었다.185) 이는 해월이 명교(命敎)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시형으로 바꾸면서 시(時)를 돌림자로 하여 강수를 강시원, 유인상을 유시헌으로 개명했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186) 전시봉도 시자 돌림으로, 유인상과 같이 『동경대전』 간행 시 교정(校正)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시봉의 당시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고 보아야 한다.187) 전시봉이 주동접의 전시황과 같이 『동경대전』 간행에 참여했던 것으로 본다면 친견제자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수운문집』의 전시봉 관련 기록은 사실로 보아야 한다. 해월의 역할을 축소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낼 이유는 없다는 점, 그리고 중요 인물이었던 전시봉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에는 한 번도 나타난 바가 없다는 점은 오히려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에서 전시봉 관련 일화가 파접 이후라는 사실 때문에 삭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표 14>는 ‘여덟 가지 절목’[八節]에 관한 1863년 11월 기사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기록은 대부분 같지만, 『도원기서』의 기록은 완전히 다르다. 이 차이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따로 편집한 문헌이 아니라, 『수운문집』 계열 문헌을 저본으로 편집 수정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기록은 11월 13일 주동접의 전시황이 찾아와 수운의 팔절(八節)에 댓구(對句)를 하면서 나눈 대화와 수운이 교문의 상황에 대한 소회를 말한 것이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11월 주동의 시황이 선생 팔절의 댓구에 응했는데 그날이 13일이다. 선생에게 배례하고 각절마다 댓구하니 선생은 이를 지켜보다 미소를 짓고 ‘어찌 이리 댓구를 하였는가?’ 하셨다. 시황이 꿇어앉아 여쭈기를 ‘선생님의 안색을 보니 어찌 여위고 고단하신지요?’하였다. 선생께서 이르시기를 ‘나도 모르겠다. 내 팔절결을 지어 그대들에게 보인 것은 그 사람됨을 보고자 함이었는데 이제 댓구하는 것을 보니 나의 도문에 사람이 없구나! 한탄스럽고 애석한 바로다.’ 선생께서 ‘저번에 상산 사람 황맹문이 도를 묻고자 하는 마음으로 마침 와서 묻기에 포덕과 권학 등 여러 제한이 있는 일을 더불어 설명하였는데 포덕 교화된 자가 몇인지 알지 못하고 수도의 과제가 어느 등급을 쫓고 있을지?’ 이르시며 여러 말씀을 하셨다.188)
두 문헌과 달리, 『도원기서』에서는 수운이 11월 불연기연(不然其然)과 팔절을 지은 후 팔절을 각처에 보내 이에 댓구를 하여 자신에게 보내도록 한 명령과 당시 각처에 보내진 팔절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도원기서』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내가 팔절결을 지어 그대들에게 돌려 보여 그 사람됨을 보고자 하였다.”라는 수운의 말을 제삼자의 시점에서 설명하고 당시 수운이 지은 팔절의 본문까지 수록한 것이다.
『수운문집』과 유사한 내용은 『대선생사적』과 「본교역사」에도 있다. 『대선생사적』에는 수운이 생일 잔치에서 팔절시를 짓고 댓구를 하게 했으나 한 사람도 응대하지 못하여 개탄하였고, 11월에 팔절구를 지었다고 하는 일견 중복된 내용이 있다.189) 그렇지만 11월에 팔절을 지었으며 팔절에 댓구하는 이가 없어 수운이 실망했다는 사실만큼은 『수운문집』이나 『대선생주문집』과 유사하다. 「본교역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신사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을 지었고 또 팔절사(八節詞)를 지었다. 문인 김황응(金晃應)이 대신사가 지은 팔절을 득한 후 특별히 자기의 뜻으로 댓구를 지어 나아가 올리니 대신사 이를 보고 미소를 띠며 “우리 도중에 사람을 얻기가 실로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셨다.190)
유사한 내용은 1920년의 기록인 『천도교서』와 『천도교회사초고』에도 나타난다. 이는 1920년대까지도 『수운문집』의 해당 기사는 천도교 전통에서도 인정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두 기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수운문집』 기사의 정확성을 잘 보여준다.
그날 대신사 불연기연과 팔절을 지으시도다. 지으신 팔절을 전만응이 보고 자기의 뜻대로 대구를 지어 가져오니 대신사 미소를 지으며 “도를 봄이 어렵도다”라고 하셨다.191)
대신사께서 팔절을 지으셔서 문도들에게 두루 보이시고 댓구를 할 것을 명하셨는데 문도 중 바르게 댓구하는 자 없으니 대신사께서 친히 댓구를 다셨다.192)
이상의 문헌들을 비교해 보면 <표 14>에는 『수운문집』이 가장 앞선 문헌임을 방증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운문집』의 전시황 관련 기록을 통해서만 『대선생주문집』을 비롯한 후대 교단사의 오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전시황의 이름에 대한 오탈자가 『수운문집』에는 없다가 『대선생주문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생주문집』 필사본을 보면 <그림 3>처럼 수운을 의미하는 ‘선생(先生)’ 앞의 모두 글자를 띄우거나 줄을 바꾸고 있고, 전시황과 관련되어 시(時) 자가 누락되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193)
‘시’가 누락되고 선생이라는 글자에 줄을 바꾸면서 가장 앞줄 끝의 ‘전황이 응답하였다’라는 뜻의 ‘전황응(全晄應)’을 전황응이라는 이름으로 오독하여 필사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 줄의 척대(隻對)가 동사 역할을 하기에 가능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이후 『대선생주문집』을 필사한 문헌들은 대부분 전시황을 전황응(全晄應)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표기한 듯하다. 『천도교서』에서 황(晄)의 필기체는 유사한 글자인 만(晩)으로 오독되어 전만응(全晩應)으로 오기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195) 「본교역사」에서는 필기체 전(全)이 김(金)으로, 황(晄)이 통용되는 글자인 황(晃)으로 쓰여 김황응(金晃應)으로도 표기되었다.196) 김황응(金晃應)의 황은 광으로도 읽을 수 있어서 『천도교회사초고』에서는 김광응(金廣應)으로도 나타났다.197) 후대의 문헌에서 전시황을 대신하여 이 기사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인물들은 해당 문헌 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독으로 인해 나타난 허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수운문집』 기록이 가장 최초의 기록에 가깝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도원기서』만 11월 기사를 다르게 기술한 것은, 앞서 논하였지만, 파접 이후에 수운이 해월 외의 친견 제자를 접견한 기록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팔절에 대해 적절히 댓구를 하는 제자들이 없자 수운이 “이제 댓구하는 것을 보니 나의 도문에 사람이 없구나! 한탄스럽고 애석한 바로다. [今看隻對 吾道中無人 可歎惜處也]”라고 탄식한 것은 해월의 도통전수와는 모순되는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상산인 황맹문과 관련된 일화도 수운이 해월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인을 만나 가르침을 전한 일화였기에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원기서』는 배제된 내용 대신 『동경대전』에 수록된 문구를 인용하여 팔절에 관한 부연 설명을 수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표 15>의 기사는 수운이 풍습(風濕) 질병에 대응한 내용으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기록은 유사하지만, 『도원기서』의 기록은 완전히 다르다.
『도원기서』에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고 천주에게 소지(所志: 관청에 올리는 소장, 청원서, 진정서)를 올리는 것을 수운만이 아니라 접주도 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도원기서』에는 해월의 접이 많았던 북도 대부분 접에서 발생한 질병이 수운의 질고(疾苦)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만약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를 원본으로 삼았다면 해월의 도통전수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이를 누락할 이유가 없다.
질병의 발생 지역을 『도원기서』와 『수운문집』은 ‘북도(北道)’로, 『대선생주문집』은 ‘도(道)’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선생주문집』에는 북도라는 표현이 없고, 『도원기서』에는 ‘수운 행장’ 이외의 부분에서 해월과 관련해 북도(北道)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 편집자의 관점에서는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하여 교문의 모든 접이 해월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북도와 남도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선생주문집』이 북도중이 아니라 도(道)에서 풍습이 발생했다고 한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도원기서』는 수운 생전에 북접과 남접의 구분이 있었다는 해월의 진술을 근거로198) 북도중이라는 표현을 ‘수운 행장’ 부분에서는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수운문집』에서 ‘북도중’이라는 표현은 ‘경주 북쪽 지역의 접들’이라는 의미로 여기서 처음 나타난다. 북도중의 접인 영해 접주 박하선이 수운의 명에 따라 소지(所志)를 적어 수운을 찾는 내용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이 같은 북도중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199)
『수운문집』에는 접을 기준으로 다수 교도를 표현할 때 접내(接內), 접중(接中)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부서 접중, 영덕 접중, 주동 접중 등이다. 지역의 여러 접을 포괄하여 지칭할 때는 도중(道中)이라고 기술한다. 예를 들면 영덕도중, 북도중 등이다. 그에 비해 ‘북접’이라는 용어는 『도원기서』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해월 단일 지도체제가 성립된 이후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수운문집』이 북접이라는 용어 대신 북도중이라고 쓴 것은 해월의 지도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저술된 기록임을 방증한다.200)
<표 15>에서 가장 주목할 차이는 수운이 도인들의 호소에 답한 부분이다. 『도원기서』만 다르게 되어 있고, 실제로 몇 글자의 차이지만, 권위구조와 교리 및 의례의 차이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풍습(風濕)의 질병에 대한 도인들의 호소에 대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는 “가서 소지를 지어서 (수운에게) 돌아와 천주에게 호소하라. [卽去作所志來訴於天主也]”라고 한 데 비해, 『도원기서』에서는 “지금부터는 가서 소지를 지어 천주에게 호소하라[此後去作所志訴於天主也].”라고 하였다. 이는 “소지가 수운을 통해서만 천주에게 전해질 수 있는지, 각처 접주를 통해서도 천주에게 전해질 수 있는지”라는 중대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상제와의 소통이라는 제사장적 권위가 수운에게 집중된 상황을, 『도원기서』는 제사장적 권위가 수운에서 여러 접주와 지도자들에게 분산된 상황을 반영한다. 전자의 신앙체계와 권위구조가 후자보다 앞선 것이므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도원기서』보다 앞선 문헌임이 분명해진다. 『도원기서』는 해월 시대의 권위구조가 수운 시대의 역사 해석에 투영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또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는 소지를 수운에게 가져와서 천주에게 호소해야 하기에 <표 15>의 풍습 질병 사건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지만, 『도원기서』에서는 수운이 차후의 대응 방법을 알려준 것으로 풍습의 질병이 종결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수 있다. 단지 세 글자인 래(來)와 차후(此後)의 유무에 의해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부분은 이전에 주목된 적이 없지만, 권위구조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함축하기에 추후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특히 『수운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수운 당대의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면 이 차이는 천주와 인간의 관계, 수운의 위상과 역할, 접주의 권위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표 16>은 <표 15>와 연결된 부분으로 당시 교단의 권위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표 16>을 <표 15>와 연결해 보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서는 풍습과 관련하여 천주에게 호소할 소지(所志)를 지어 오라는 수운의 명을 듣고 박하선이 글을 지어 수운을 찾아온다. 이에 비해, 『도원기서』에서는 북도중의 풍습과 명확한 연계 없이 박하선이 글을 지어 수운을 찾아온다. 이 같은 차이는 “얻기 어렵고 구하기도 어렵지만 실로 이는 어려운 것이 아니로다. 심기를 화하게 하여 봄의 화를 기다리라. [得難求難實是非難 心和氣和以待春和]”라는 제서의 의미 해석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맥락에서 보면 풍습에 관한 청원에 천주가 답을 준 것이고, 『도원기서』의 맥락에서 보면 강화가 끊어진 후 수운이 다시 명을 받고자 할 때 천주가 준 답이 된다. 끊어진 강화가 다시 시작된 것이라면 상당히 중요한 일임에도 『도원기서』는 이를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도원기서』의 기사는 개연성이 떨어진다.
주목할 부분은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영해 접주 박하선이 해월을 거치지 않고 수운을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맥락에서 본다면 해월의 도통전수는 사실이 아니거나 현실화되지 못한 비밀지령이다. 『도원기서』 맥락에서 본다면 ‘북도중주인’인 해월의 허락 없이 관할 접주가 수운을 찾는 상황이다. 박하선은 수운이 직접 포덕한 인물이기에 해월 휘하의 접주가 아니지만 영해가 경주 이북이므로 그의 접은 북도중에 포함되기에 『도원기서』 맥락에서 보더라도 ‘북도중주인’의 위상은 도통계승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도원기서』는 『수운문집』이나 『대선생주문집』과 달리 풍습과 박하선 관련 기사를 분리하여 박하선의 방문을 개인적 차원으로 기록하여 모순을 회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월의 도통 전수를 확고하게 하고자 모순되거나 부합되지 않는 기사를 편집했지만 모순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대선생주문집』은 해월 중심으로 기사를 편집하면서도 도통전수와 모순되는 기사들을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았다. 이는 『대선생주문집』이 편찬되던 시기에는 도통전수에 따라 조직체계와 권위구조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표 16>에서 또 주목할 부분은 『수운문집』에만 유일하게 수록된 다음의 기사이다.
선생께서 이르시기를 “너는 득도의 날과 강서의 이치를 아는가?” 이르시니 하선이 대답하기를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신중히 하여 누설하지 말라.” 하시고 다시 이르시기를 “지난해 내가 서북에서 영우를 찾고자 하였으나 지금은 그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후에 반드시 나에 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은 완북호서(完北湖西)의 땅에 있고 가르침에 능하리라. 너는 안심하고 따르라.” 하셨다.
이 기사는 수운이 박하선에게 비밀리에 전한 예언으로, 자신에 비견되는 인물인 영우(靈友), 즉 영적 친구를 서북쪽에서 찾았으나 당시에 없었고, 앞으로 완북호서(完北湖西; 완주의 북쪽 의림지의 서쪽)에서 나타날 것이니 그를 따르라는 것이다. 자신의 뒤를 이을 후인이 나타나면 따르라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1863년 말에 내린 것인데,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서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한 것과 모순된다. 따라서 『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에서 이 일화가 삭제될 가능성은 절대적이다.
문제는 이 일화의 후대 가필 가능성이다. ‘서북영우’를 수운이 언급한 근거가 『동경대전』에 있기에 이 기사가 『수운문집』에만 있다는 이유로 가필이라고 할 근거는 없다. 경진(1880) 인제판 『동경대전』의 강결(降訣)에는 “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으로 시작되는 시가 있는데 7구와 11구에 ‘서북영우’와 ‘영우’가 나타난다.201) 경진판 이후의 동경대전에서는 주로 결(訣)로 지칭되는데, 현재 천도교 전통에서는 주로 접주제의 실행과 교단의 장래를 읊은 것으로 해석한다.202)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에는 모두 1863년 정월 초하루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수운이 공표한 강결로 기술되어 있어 결보다 강결이 정확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각처의 접주를 임명하고 난 다음 날 천주로부터 받은 강결을 공표한 것이다.
만약 『수운문집』이 해월의 역할을 축소하고 남접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필된 것이라면 영우(靈友)의 존재를 경주의 북쪽인 서북지역, 구체적으로 완북호서에 있다고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영우가 남쪽에 있다고 가필해야 한다. 천도교 전통에서 수운의 도통 계승자인 해월은 경주 서북쪽 출신이며, 특히 표영삼이 『수운문집』의 성립 시기라고 주장하는 20세기 초의 동학의 공식 도통은 청주 출신으로 완북호서(完北湖西)의 기준에 부합하는 의암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기사가 가필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해월의 도통전수 관련 기사를 수록하고 있지 않은 『수운문집』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 일화는 다른 기사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도원기서』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또한 『수운문집』이 박하선의 관점에서 취합된 정보를 토대로 집필되었고 따라서 박하선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크기에 신빙성이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후대의 가필이라기보다는 박하선의 단독 전승이었기에 『도원기서』와 『수운문집』에서 삭제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1871년의 영해 민란에서 박하선의 아들인 박사헌이나 영해의 동학교도가 연원이 불확실한 이필제를 따르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서북영우에 대한 예언일 수도 있다. 수운 이후에 그와 비견될 서북영우가 나타날 것임을 영해 교인들은 박하선을 통해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영해의 동학도들은 이필제를 수운이 예언한 서북영우로 믿었기에 이필제의 변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표 17>에는 수운을 체포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던 즈음, 수운에게 있었던 불길한 징조를 묘사하고 한 교인이 조정에서 수운을 해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소문을 전해주며 도피할 것을 청하자 이를 수운이 거절하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은 형식과 내용이 유사한 데 비해, 『도원기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과는 달리 『도원기서』는 해당 기사를 설명하기 전 당시의 상황과 민심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12월이 되자 팔절에 대한 댓구를 지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10일에는 50~60인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추가되어 있다. 『도원기서』의 이와 같은 상세한 정황 설명이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에는 “오호라, 시운이 불행하도다”라는 문구로만 되어 있다.
『도원기서』에만 있는 내용은 동학에 대한 곡해와 탄압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수운 체포 당시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던 이유를 팔절과 관련하여 해명하는 것이다. 만약 『대선생주문집』 편집자가 『도원기서』를 저본으로 하였다면 이를 삭제할 이유는 없다. 수운의 억울함을 설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월의 도통을 언급하지 않는 『수운문집』이 『도원기서』를 저본으로 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를 삭제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해월의 역할이나 위상과는 관계없기 때문이다. 분량상으로 보더라도 필사 과정에서의 누락으로 보기도 어렵다. 만약 누락이라면 남겨진 부분의 형식상 차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 17>의 차이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을 독립시킨 것이며, 『수운문집』이 『도원기서』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준다. 오히려 『도원기서』에만 수록된 문구에서 편집자인 강수의 개인적인 견해를 볼 수 있어, 후대의 첨부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양학이 세상에 가득 찼다.’, ‘사람들이 동도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서학으로 돌아갔고 동도를 해하니 애석하도다’, ‘들어와서는 마음으로 틀렸다고 하고 나가서는 거리에서 떠드니 실로 막기 어려우니 심히 두렵도다’ 등의 표현은 당시의 민심에 대한 강수의 소회로 볼 수 있다. 『도원기서』만이 불길한 징조를 선전관 정귀룡(이하 정운귀)이 경주부에 도착한 일과 관련하여 기술한 것으로 본다면 이는 더 확실해진다.203) 기존의 ‘수운 행장’을 저본으로 『도원기서』를 편찬하면서 잘못되었다고 판단된 부분을 수정하고 내용을 추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선생주문집』과 『수운문집』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수운문집』은 11월 20일, 접중의 제자들과 대화를 하고 난 저녁에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면, 『대선생주문집』은 12월 접들을 순회하는 도중에 징조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수운이 여러 접을 순회한 사례가 없고, 『도원기서』가 후대의 여러 정보를 종합하여 당시의 상황을 더 상세히 기술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12월, 수운은 용담에 있으면서 각처에서 오는 팔절의 척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대선생주문집』의 ‘순접도중(廵接道中)’은 ‘수접중도제(酬接中道弟)’의 오탈자로 보아야 한다. 이외에도 『대선생주문집』은 수운이 “편안한 기색이 있었다. [有豫色]”라고 하여 “편치 않은 기색이 있었다. [有不豫色]”라고 한 『수운문집』과 정반대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도원기서』의 “근심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如有憂色]”는 서술을 참고한다면 필사 과정에서의 누락이 명확하다.
『도원기서』가 징조가 있던 날을 12월 10일로 특정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를 저본으로 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정확하고 자세한 『도원기서』의 기록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도원기서』 편찬자인 강수는 선전관 정운귀의 경주부중 도착 시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기에 『도원기서』는 징조 바로 뒤에 선전관의 경주부 도착을 명시하여 상세하고 정확하게 징조가 암시하는 바를 묘사하였다.
세 문헌 간의 시점의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을 추측해 본다면 『수운문집』의 ‘是月二十日’이 여러 번의 필사 과정에서 『대선생주문집』의 ‘歲癸亥十二月’로 오기되었거나 수정되었고, 『도원기서』는 수운이 체포된 날이 정확히 12월 10일임을 확인하여 이를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운귀의 장계에 따른다면 그의 경주부 도착 시점은 12월 9일경이며 수운의 체포 시점은 12월 10일이다.204) 따라서 『도원기서』는 부중의 교인이 와서 조정의 소문을 전하고 수운에게 피할 것을 권하는 일화 앞에 『수운문집』, 『대선생주문집』과 달리 전일(前日)을 추가하여 12월 10일 이전으로 수정한 것이다.
만약 『수운문집』이 후대에 어떤 의도를 지니고 『대선생주문집』을 수정한 것이라면 불길한 징조와 관련된 시점을 11월 20일로 특정하며 수정할 이유는 없다. 12월 9일의 선전관 정운귀의 경주부 도착과 10일의 수운 체포는 교단사에서 중요한 날이었고, 11월 20일이 지니는 의미는 1880년대 이후 교단 내에서는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운문집』은 “바로 그때 선전관 정귀룡이 봉명하였고 [當是時 宣傳官鄭龜龍奉命]”라고 기술하여 11월 20일을 선전관 정운귀가 왕명을 받은 날임을 명시하여 왕명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조선조 문집의 형식을 보인다. 1930년대까지의 동학 교단의 문헌은 정운귀가 왕명을 받은 날을 대부분 수록하지 않고 있어 『수운문집』의 이 기록은 명확히 1860년대 후반 수운 제자들의 유교적 사유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운귀가 11월 20일 왕명을 받았다는 기록은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의 정운귀 서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205) 『수운문집』은 11월 20일 정운귀가 어명을 받은 시점을 기준으로, 『도원기서』는 12월 10일 수운이 체포된 시점을 위주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문헌이 왕명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지는 그 편찬 연대의 선후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경진(1880년) 인제판 『동경대전』의 경우 ‘천주나 상제’, 그리고 수운을 지칭하는 ‘선생’의 경우는 물론이고 ‘왕(王)’, ‘선고(先考)’ 앞에서도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그 원본을 확인할 수 있는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의 경우도 왕명을 의미하는 명(命), 어명(御命), 전교(殿敎), 전교(傳敎), 계교(啓敎) 앞에 띄어쓰기를 한 것은 그 영향이 분명하다. 필사의 형식에조차 그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그 이전에는 일화를 서술하는 데 왕명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206) 『수운문집』의 서술 방식이 왕명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보다 오래된 기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기에 『수운문집』이 가장 이른 문헌임을 알 수 있다.
정운귀가 왕명을 받은 시점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로 『수운문집』의 가필을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왕명은 승정원에서 각 관아로 보내지던 기별(奇別)을 참고할 수 있었다. 1900년을 전후한 기록이라 할 『대선생사적』도 불길한 징조가 있었던 날을 11월 25일로 기록하고 있기에 『수운문집』의 전승을 후대의 가필로 보기는 더욱 어렵다.207) 1940년 간행된 『동학사』에 와서야 『승정원일기』를 인용하여 11월 20일을 선전관 정운귀가 봉명한 날임을 확인하고 있기에 『수운문집』이 다른 문헌의 정보를 활용하여 20세기 초에 가필되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208)
<표 18>은 수운의 체포와 압송 과정 관련 기사로, 이동 경로와 기술 방식의 차이를 통해 각 문헌의 정확성과 편찬 시기를 추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문장 형식과 내용이 거의 같지만 『도원기서』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대선생주문집』의 경우 오탈자로 추측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수운문집』과 거의 같다.
당시의 행정구역과 지명에 기반하여 본다면 가장 정확한 지명과 이동 경로를 제시하고 있는 문헌은 『수운문집』이다. 앞서 밝혔듯이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에 나타나는 ‘공충도(公忠道)’와 ‘화령(化寜)’이라는 지명이다. 충청도는 1862년부터 1871년까지 충청도라 지칭되는 것이 금지되었고 공식적으로 공충도(公忠道)였다.209) 화령은 조선조 지리지에 모두 화령(化寜)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당시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도 화령(化寜)으로 되어 있다.210) 충청도라는 지명이 사용될 수 있었던 시기는 충청도라는 지명이 복원된 1871년 이후이며, 화령(華嶺)이라는 곳이 알려진 때는 상주를 중심으로 교단 재건 활동이 활발해진 1870년대였다. 이는 『수운문집』이 1871년 이전에 집필된 ‘행장’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동 경로와 관련하여 장영민은 『수운문집』의 보은-청산-청주의 경로가 잘못된 것으로 주장했지만,211) 이는 조선 시대 보은 북쪽의 주성부곡(酒城部曲) 지역이 청산현에 소속되어 있었던 월경지이며 행정구역상 청산 소속이었음을 간과한 결과이다. 『대동여지도』에는 보은의 남북 양쪽에 모두 청산이 존재한다. 조선 시대 주성부곡에는 사창(社倉)과 역이 있었다.212) 따라서 보은-청산(주성)-청주의 경로는 정확하다.
<표 18>에서 또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도원기서』의 기술 방식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체제 순응적 기술 방식이다.213)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 곳이다.
첫째, 수운이 영천으로 체포되어 가는 상황에 대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포졸들 습속의 악독하게 모욕하는 기풍이 (공자가) 송국에서 겪은 액과 (진국과) 채국(사이)에서 당한 곤욕보다 심하였다[率習之惡侮陷之風甚於厄宋困蔡之日].”라 기술하였지만, 『도원기서』는 “소속 하졸들의 언사 불경함과 멸시함이 범상함이 없었다[所屬下卒言辭不恭蔑視無常].”라고 기술한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수운의 고난을 공자의 고사에 비유하여 체제에 대한 비판을 피했지만, 『도원기서』는 제도권의 박해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선전관 정운귀를 지칭하는 방식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봉명귀룡(奉命龜龍)’, 『도원기서』는 ‘귀룡(龜龍)’으로 표현했는데, 전자의 방식이 왕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를 존중하는 역사 기술이다.
셋째, 철종의 승하에 대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이해 12월 초이레에 철종 임금이 승하하였다. 이제 현 임금이 대리한 초여서 각도에 반포 지체됨이 여러 날이니, 선생이 비로소 국상(國喪) 상중(喪中)의 통지를 들었다[歲十二月初七日卽哲宗朝昇遐之日也 今當宁代理之初各道頒布遲滯多日先生始聞國恤之報哀].”라고 기술하였지만, 『도원기서』는 “이에 이르러 철종이 12월 초이레에 승하하고 이제 현 당저(當苧)가 대리한 후 각도에 반포하여 중도가 막힘이 여러 날이니 선생이 비로소 국상 상중의 통지를 들었다[及此哲宗廟十二月初七日昇遐今當苧代理後頒布各道故中滯多日先生始聞國恤之哀報].”라고 기술한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임금이 승하한 날을 독립된 문장으로 표현하고 이를 기준으로 일화를 서술하지만, 『도원기서』는 수운의 과천 도착을 시작으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왕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와 사유를 반영한 조선조의 문집 기준에 부합하지만 『도원기서』는 수운을 위주로 한 예외적 기술 방식이다.
『도원기서』의 이러한 서술 방식은 현 황제나 임금을 의미하는 ‘당저(當宁)’를 당저(當苧)로 오기한 것과 결합되면서 수운이 12월 7일 과천에 도착했다는 잘못된 해석으로 파급되었다.214) 12월 7일은 수운이 체포되기 전이다. 『도원기서』의 기록으로도 수운이 체포된 시점은 12월 10일이다. 그런데도 『도원기서』의 ‘及此’를 ‘이때에 이르러’로 해석하여 수운이 과천에 호송된 시점을 12월 7일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215) 현대의 동학 문헌 연구자들조차도 이러한 실수를 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마 오자로 인해 해석이 불가해지고 수운을 중심으로 사건을 기술하면서 오역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선생사적』이 수운의 과천 도착 시점을 12월 8일로 기록하고 이때 수운이 북쪽을 향해 곡을 하였다고 한 것 역시 이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이 체포되어 상경하던 도중 철종의 승하를 먼저 알고 통곡했다는 후대의 전설도 이러한 오역에서 기원했다고 보인다.
『대선생주문집』의 당우(當于)와 『도원기서』의 당저(當苧)는 모두 오자로 『수운문집』으로 교감하지 않으면 해석할 수 없다. 현 임금을 의미하는 당저(當宁)를 오기한 것으로 본다면 『도원기서』를 편찬한 강수나 『대선생주문집』 편집자는 『수운문집』의 저자보다 한학적 지식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임금을 의미하는 용어의 필사 오기는 동학의 주류가 이미 유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에서 평민으로 전환된 시기에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가 필사되고 편찬되었음을 시사한다.
<표 19>는 수운이 과천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돌아와 심문을 받는 부분으로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은 한두 글자의 차 이외에는 모두 동일하나, 『도원기서』는 두 문헌에 없는 내용이 많다. 『대선생주문집』은 『수운문집』과 유사하게 동학도들의 수운에 대한 존경심, 해월의 수운 옥바라지, 해월의 도피, 수운의 해월 도피 명령 등의 내용이 없는데, 해월의 도통전수를 명확히 하는 『대선생주문집』이 이러한 내용을 삭제할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표 19>는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의 ‘수운 행장’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편찬한 것이라는 주장이나, 『대선생주문집』이 편집과정에서 『도원기서』의 내용 중 일부를 삭제했다는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화 단위로 배제되어 있어 누락으로 보기도 어렵다. 『도원기서』가 다른 두 문헌이 지니고 있지 않은 정보들을 추가하면서 문구를 수정하였다고 가정하면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해월과 관련 당사자 극소수가 알 수 있었던 일이 『도원기서』에만 수록되었고, 해월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지막까지 수운의 곁을 지키려 하였으며, 이에 수운이 해월의 도피를 명하는 일화들이 『도원기서』에만 나타난다는 사실은 『도원기서』가 도통전수를 매개로 해월의 도피를 정당화하는 입장에서 편집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도원기서』는 해월의 지도 체제가 확고해진 이후 ‘수운 행장’을 철저히 검토하여 모순되거나 부족한 내용을 수정 보충하여 편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선생주문집』이 이 기사들을 수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보다 앞서 편찬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도원기서』는 심문 과정에서의 수운 답변을 다른 두 문헌과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무리를 모아 풍속을 어지럽힌바’를 묻는 심문에 다른 두 문헌이 “아이들에게 권하여 글을 쓰니 하늘이 내린 필법이었다. 내가 도인들을 원한 것이 아니라 도인들이 나를 원한 것이니 멀리서 찾아옴을 또한 즐김이 아닌가? 이것을 도로 삼았는데 어찌 풍속을 무너지게 했다고 하는가?”라고 한 데 반하여, 『도원기서』는 “아이들에게 권하여 글을 쓰니 스스로 총명해졌다. 그런 까닭으로 이를 업으로 삼아 세월을 보냈다. 여기에 풍속은 무슨 말인가?”로 되어 있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답변은 『논어』를 인용하여 멀리서 찾아온 이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것은 풍속을 해침이 아니며 따라서 그 행적이 유교에 어긋남이 없음을 해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도원기서』의 답변은 무리를 모았다는 죄목이 근거가 없음을 부각하여 처벌이 부당하다는 직접적인 비판의 의도를 드러낸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유교적 사유를 반영한 문헌임을 보여주며 『도원기서』는 유교적 사유와 결을 달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표 20>은 1864년 수운의 처형과 안장까지의 과정을 기술한 행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세 문헌 가운데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내용이 유사하다. 그에 비해 『도원기서』의 내용은 두 문헌과 차이를 보인다. 『도원기서』에만 있는 부분은 여러 가지이지만, 크게 세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수운의 죽음을 표현한 부분이다. 『수운문집』에는 ‘직수이몰(直受而歿)’, 『대선생주문집』에는 ‘진수이몰(眞受而歿)’, 『도원기서』에는 ‘수욕별세(授辱別世)’로 표기되어 있는데, 『대선생주문집』의 진(真)은 직(直)의 오기로 보아야 하기에 『도원기서』만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216) 『수운문집』의 ‘직수이몰’에서 ‘직수’는 『시전(詩傳)』과 『중용집주(中庸集註)』의 주자 주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조선조 문헌에서 주로 충직(忠直)하여 기꺼이 왕명을 받거나, 횡역(橫逆)이 올 때 피하지 않고 받음을 표현하는 말이다.217) 『수운문집』은 수운이 죄가 없지만 충직하게 왕명을 받들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표현하여, 왕명 중심으로 일화를 서술하면서 수운의 충직(忠直)을 부각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도원기서』는 “욕을 주어 (수운이 이를 받아) 별세했다.”라는 식으로 왕명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였다. 『수운문집』의 집필이 유교적 사유에 기반했다면 『도원기서』는 유교적 질서보다 동학의 독자적인 신앙체계에 기반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도원기서』가 수운과 같이 체포된 이들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부분이다.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수운의 처형 사실과 그 시신을 수습한 인물들만을 간략히 소개했다면, 『도원기서』는 유배, 방면, 옥사로 나누어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대선생주문집』이 『도원기서』 앞부분만을 떼어내어 그대로 편집한 것이라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과 함께, 『도원기서』가 동학의 교단 조직이 정비되어 교조인 수운만이 아니라 접주나 교인의 상황에 관해 서술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된 환경에서 편찬되었음을 시사한다.
셋째는 『도원기서』가 수운의 운구를 수운의 장자인 세정을 중심으로 서술한 데에 비해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이 세정보다 영해 접주 박하선을 중심으로 서술한 부분이다. 수운의 시신을 모시고 용담으로 갈 때 주막 주인이 물은 말에 대해, 『도원기서』는 수운의 아들 세정이 대답한 것으로, 『대선생주문집』과 『수운문집』은 영해 접주 박하선이 대답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표영삼은 이 기사와 관련하여 『수운문집』에만 박하선이 나타난다며 해월의 정통성과 관련된 대목에 이르면 어김없이 『수운문집』이 박하선을 등장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218) 그렇지만 『도원기서』만이 세정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 『대선생주문집』도 운구 과정을 세정을 중심으로 기술하지도 않았으며 주막 주인의 물음에 답한 이도 박하선이라고 기술하여 『수운문집』과 같다. 표영삼은 문헌을 실제로 비교하여 고증하지 않고 연역적인 전제에서 잘못된 주장을 한 것이다. 오히려 『도원기서』가 박하선의 역할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편집되었다고 보아야 논리적이다.219) 실제로 박하선은 수운에 의해 영해 접주로 임명된 바 있는 동학의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220) 『도원기서』에도 수운이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있을 당시, 장질인 맹륜 및 여러 접주와 함께 감영에 와 있었고, 그의 접인 영해접이 영덕접과 함께 육백 금을 내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 그가 운구 과정을 주도하였다는 『수운문집』과 『대선생주문집』의 기록은 신빙성이 크다.221) 『도원기서』의 편찬자인 강수는 수운의 장례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는 뜻과, 스승의 운구와 안장을 옆에서 지키지 못한 해월과 이를 주도한 박하선이 대비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장자인 세정을 내세워 수운의 운구가 이루어졌다고 기술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