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대순진리회의 상생생태론 연구: 상생의 의미를 중심으로

김귀만 1 , *
Gui-man Kim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대진대학교·강의교수
1Visiting Professor, Department of Daesoon Studies, Daejin University

© Copyright 2024,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an 23, 2024; Revised: Mar 12, 2024; Accepted: Mar 25, 2024

Published Online: Mar 31, 2024

국문요약

이 글의 목적은 대순진리회의 생태주의 담론인 ‘상생생태론’에서 ‘상생’의 의미를 생태적으로 규정하는 데 있다. 인간을 대상으로 윤리적 측면에서 통용되던 상생이 그 적용 범위를 비인간까지 확장시키는 생태학의 영역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상호의존성이라는 생태학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생태학에서의 상호의존성은 개체와 개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긍정적, 부정적, 중립적인 관계를 조합하여 경쟁, 포식, 기생, 그리고 공생으로 구분한다. 개체와 개체 사이의 관계가 부정적으로 끝나더라도 생태계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모두 ‘의존’이라는 개념에 포함된다. 그러나 개체와 개체 사이의 부정적 결말은 원을 발생시킬 수 있고 이러한 상호의존은 상생윤리의 관점에서는 그대로 통용될 수 없다. 따라서 생태적 상생은 긍정적 상호의존의 관계만 해당하거나 혹은 포원이 존재하지 않는 포식, 기생, 경쟁의 관계도 포함될 수 있다.

생태론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둘 사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요구한다. 천지생인용인(天地生人用人)이라는 우주관은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호의존적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게 한다. 천지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인간으로 삼았고, 지인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배후에 있는 천지의 신성성까지 깨달아 비로소 천지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깊은 상호의존의 관계가 성립한다. 그러나 근대적 인간이 등장하면서 자연을 짓밟고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천지와 인간의 상호의존성은 붕괴된다.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은 천지와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에 끊어진 상호의존성을 다시 잇는 해결책이다. 공부 의례를 통해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수도를 통해 도통에 도달하는 과정이 보은상생의 실천이며 이로써 인간은 생태적 본성을 지닌 인존으로 거듭나 자연과 영원한 상호의존을 누리게 된다. 요컨대 상생생태론에서의 상생은 자연과 인간이 상호의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영원히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이념이자 실천이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define the meaning of ‘Sangsaeng (mutual beneficence)’ within the context of ‘Sangsaeng ecological theory,’ a form of discourse of that has emerged from Daesoon Jinrihoe’s perspective on ecology. Sangsaeng ecological theory applies the concept of interdependence to ecology in order to explain how Sangsaeng, which is commonly used as an ethical system for humans, can be applied to the realm of ecology such that it extends its scope of application to include non-human beings. Interdependence, when applied to ecology, is formed via relationships between individuals. Such relationships can be positive, negative, or neutral, and the type of interdependence that emerges can be competitive, predatory, parasitc, and symbiotic. Even if the relationship between individuals ends negatively, it can still exert a positive effect on the ecosystem. Consequently, all of these produce a type of ‘dependence’. However, relationships that end negatively can generate grievances, and from the perspective of Sangsaeng ethics, this type of interdependence is to be avoided. Therefore, by way of contrast, ecological Sangsaeng may include both relationships of positive interdependence and relationships of predation, parasitism, and competition in so far as there no grievances.

Ecological theory requires a perspective that enables an understand of the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humans in an integrated way that does not separate them. One view of universe, known as Cheonji-saengin-yongin (Heaven and Earth give produce humans make use of them) provides insights in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universe and humans and nature and humans from an interdependent perspective. Heaven and Earth take humans as the basis of their existence, and only after humans discover the law of nature and the sacredness behind it can a deep interdependence between Heaven and Earth and humans and nature and humans be established. However, as modern humans emerge, the interdependence between Heaven and Earth and humans collapses as they destroy nature and lower the authority of Shindo (divine order). Haewon Sangsaeng (the resolution of grievances for mutual beneficence) and Boeun Sangsaeng (the reciprocation of favors for mutual beneficence) is the solution to reestablish the interdependence that has been disconnected between Heaven and Earth and humans and nature and humans. The practice of Haewon Sangsaeng through Gongbu rituals is the way to restore interdependence between nature and humans. The process of humans achieving Dotong (mastery of the Dao) through religious practices is the practice of Boeun Sangsaeng, and humans will be reborn into Injon (Human Nobility or ‘divine humans’) with ecological nature and enjoy an eternal interdependent relationship with nature. In summary, Sangsaeng in the context of Sangsaeng ecological theory is the idea and practice of allowing nature and humans to restore their interdependence and live on eternally.

Keywords: 생태론; 생태주의; 우주관; 우주론; 대순사상; 강증산; 상호의존성; 상생윤리; 해원상생; 보은상생; 인존
Keywords: ecological theory; ecologism; view of the universe; Daesoon Thought; Kang Jeungsan; interdependence; Sangsaeng ethics; Haewon Sangsaeng; Boeun Sangsaeng; Injon

Ⅰ. 머리말

생태학(ecology)은 생물과 생물, 생물과 자연환경의 상호의존성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하며 생물학의 한 분과로 시작되었다. 이에 반해 생태주의(ecologism)는 생태학이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경계를 넘어 학계 전반, 더 나아가 사회 각 분야에 생태적 사고와 실천을 불러일으키면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1) 생태주의는 학문의 영역에서 생태적 위기의 원인과 그것에 대한 해법을 다루는 다양한 논의를 양산했고, 그것은 심층생태론, 사회생태론 등의 생태 담론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 글의 제목인 ‘상생생태론’에는 이러한 생태논의들에 발맞춰 대순진리회의 핵심적인 종교이념인 ‘상생’을 축으로 생태와 관련된 논의들에 대해 본격적인 이론화를 시도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대순진리회의 생태 담론인 상생생태론은 ‘상생’에 대한 의미를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상생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론화를 추진한다면 그것은 주춧돌이 없이 기둥부터 세우는 셈이다. 그동안 대순진리회의 상생 이념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완결된 것은 아니다. 아직 더 많은 분야와 관점에서 상생이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상생’을 생태적 관점에서 논의하고 그 맥락과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상생을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 상생은 상생윤리로 인식되어 왔다.2) 윤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관계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판단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이 윤리적 삶이다. 그런데 윤리의 대상이 인간이 아닌 비인간으로 확장되었을 때 상생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3),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4)라는 증산의 말씀은 곧 상생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인간에게 피해를 준 존재가 동물이라면,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호랑이라면, 말라리아에 걸려서 생을 마감했다면 우리는 그 대상과도 상생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세균과도 상생하고 바이러스와도 상생해야 하는가? 만일 상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상생인가? 이러한 문제는 상생윤리를 생태적 관점에서 다룰 때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사안이다. 이 때문에 상생생태론이 생태 담론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상생에 대한 생태적 개념 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상생생태론의 명명은 차선근의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5) 그의 연구는 대순진리회 생태론의 기초를 구축한다는 의도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대순진리회의 자연관을 존재론적 기반으로 두고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실천적 생태론의 두 축으로 구성하였다. 본 논문은 위 연구의 취지, 자연관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생태론의 기초라는 인식, 그리고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이 실천 담론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논의에 동감하면서도 위의 연구에서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점, 이를테면 대순사상 속에 풍부하게 녹아 있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생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 그리고 존재론적 기반인 자연관에서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유기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 등에 주목하여 본고의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친종교적 성향의 생태 담론인 심층생태론이 종교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계관 형성에 토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생태 위기의 원인이 인간중심주의를 불러일으킨 종교적 세계관, 우주관에서 유래했다면,6) 인간중심주의를 불식시키고 생태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을 이끌 수 있는 세계관, 우주관 역시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론은 단순히 우주의 기원이나 구조 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근원이 인간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는 형이상학의 한 영역이다.7) 우주론이 제공하는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첫 관계 맺음에 대한 서사가 종교적 생태론의 구축을 위한 존재론적 토대와 종교적 실천으로까지 일관성 있게 구조화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할 것이다.

이 글은 각 장에서 모두 ‘상호의존성’이란 키워드로 내용이 구성된다. Ⅱ장에서는 상호의존성이 서로 다른 학문의 영역에서 교차적으로 사용이 가능한지 검토한다. 생태학에서 사용되는 상호의존성이란 개념을 상생윤리의 차원에서 검토하고 이를 근거로 생태적 관점에서의 상생에 대한 개념 규정을 시도한다. Ⅲ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대순사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본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천지로부터 시작되고 인간이 이에 화답하여 상호의존성이 성립하며 근대적 인간의 등장으로 상호의존성이 붕괴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Ⅳ장에서는 대순진리회의 해원상생 보은상생이 자연과 인간의 단절된 상호의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실천임을 밝힌다.

Ⅱ. 상호의존성과 상생

1. 생태학에서의 상호의존성

생태학은 생물과 생물 그리고 생물과 자연환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물과 생물의 관계는 곧 개체와 개체의 일대일 관계를 말하고, 생물과 자연환경의 관계는 개체와 주변 환경 더 나아가 생태계8) 전체와의 관계를 말한다. 두 개체의 상호관계는 긍정적일 수 있고, 부정적일 수 있으며, 중립적일 수 있다. 개체군 생태학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그 성격에 따라 ‘긍정적(+)’, ‘부정적(-)’, ‘중립적(0)’으로 표시하기도 하며, 이러한 표기법으로 둘 사이 관계의 조합을 경쟁(--), 포식(+-), 기생(-+), 편리공생(+0), 협동 또는 상리공생(++)으로 나타내기도 한다.9) 이러한 관계들이 생태학에서는 상호의존성에 해당한다.

포식(捕食)의 경우, 먹는 쪽은 긍정적(+)이며 먹히는 쪽은 부정적(-)이다. 상호의존의 양상은 두 개체 간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부정적 조합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개체와 개체 사이의 부정적 관계에서도 ‘의존’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좀 더 거시적인 범위, 즉 개체와 생태계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개체와 개체의 부정적 결말이 전체 계인 생태계에 반드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생태계 내에 생물은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생산자(식물), 소비자(동물), 그리고 분해자(미생물)로 구분할 수 있다. 생산자인 식물은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합성하며, 소비자는 식물을 먹이로 하는 초식동물, 초식동물을 먹이로 하는 육식동물로 구분되며, 동물의 사체나 배설물은 미생물에 의해 무기물질로 분해되어 다시 생산자에게 흡수된다. 만일 육식동물이 모두 사라져 포식이 없어진다면 그것이 초식동물의 번영으로 이어질까? 주지하다시피 육식동물이 사라지면 초식동물의 개체수가 증가하고 그렇게 되면 초식동물이 풀을 먹는 속도가 풀이 생장하는 속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결국 초식동물 공동체의 공멸을 가져올 수 있다. 개체와 개체 사이에서 먹고 먹히는, 죽고 죽이는 부정적 관계가 생태계 차원에서는 부정적이 아니라 전체를 유지하고 순환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호의존하고 있으며, 소비자와 분해자가, 그리고 다시 분해자와 생산자가 상호의존하고 있다. 생태계의 이러한 구조적 원리를 상호의존성이라 한다.10)

만일 개체 사이에서 죽고 죽이는 양상을 ‘상극적’이라고 한다면, 생태계에서 상극적인 요소는 필요하다. 상극이 없다면 물질은 순환할 수 없고 생태계의 각 단계에서 상호의존성이 깨지고 만다. 상극적인 것은 생태계라는 네트워크의 전체 순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생적’이다. 그렇다면 생태계의 상호의존성에는 상극적인 부분과 상생적인 부분을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생태적 관계의 본질 역시 ‘상호의존성’이라 할 수 있다.11)

그런데 이러한 관계들을 생태학적 관점이 아니라 포원(抱冤)의 가능성을 문제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대순사상의 상생윤리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생명과 생명 사이의 포식, 경쟁, 기생 등의 관계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원이라는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면 그 관계를 여전히 상호의존적이라 할 수 있을까?

2. 상생윤리의 관점에서 본 상호의존성

상호의존성은 생태학의 용어다. 반면 상생생태론에서 ‘상생’은 기본적으로 생태학의 용어가 아니다. 특히 해원상생이라는 대순진리회의 종지는 해원시대를 맞아 인간이 원을 풀 때 상생이라는 방향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윤리로 통용된다.12) 그런데 상생을 키워드로 한 생태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적 상생을 생태적으로 풀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생을 생태적 개념, 예를 들면 상호의존성과 같은 개념 등으로 풀어내야 한다. 물론 하나는 윤리학의 용어고 다른 하나는 생태학의 용어이므로 ‘상생=상호의존’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살린다는 상생의 의미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상호의존과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유사하므로 하나의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다.13)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부정적 관계, 이를테면 죽고 죽이는 관계 속에서 포원(抱冤)을 인정하는가의 여부다. 예를 들어보자. 만일 굶주린 호랑이가 사람을 죽였다면 이것은 생태학적 상호의존성에 해당하는가? 생태계의 각 단계에서 개체들이 지닌 조건이 상호의존적이므로 − 초식이면 초식, 육식이면 육식이라는 조건이 생태계 차원에서는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 이 사건은 생태적으로 상호의존적이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생의 관점에서는 양상이 달라진다.

상제께서 일찌기 손바래기 시루산에서 호둔을 보시고 범의 성질이 너무 사나워 사람을 잘 해친다 하기에 그 성질을 알아보시니라. “사람이 전부 돼지 같은 짐승으로 보이니 범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그 피해를 심하게 입을 것이므로 종자를 전할 만큼 남겨 두고 번성치 못하게 하였노라”고 종도들에게 이르셨도다.14)

증산은 범이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만드는 현상을 보고 범의 성질을 파악한 후 그 개체수를 줄이고 번성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범에게 피해를 당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이것은 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증산의 천지공사는 해원을 위주(爲主)로 한다.15) 해원은 피해자가 원을 풀거나 가해자 등이 피해자의 원을 풀어주는 것이다. 천지공사는 수천 년 쌓인 원을 푸는 공사인데 만일 사람들이 범에게 계속해서 다치거나 죽임을 당해서 망자나 혹은 망자의 가족들이 원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천지공사의 취지와 어긋나는 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발생하는 원의 문제를 대하는 증산의 방식과 차이가 난다. 종도인 박공우가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돌에 맞아 크게 고통을 당하며 후에 완쾌가 되면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한 사건이 있다. 증산은 공우의 이런 생각을 읽고 스스로 마음을 풀고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고 하였다.16) 또 차경석 형제가 아버지를 밀고하여 죽게 만든 자에게 복수하고자 하였으나 증산 역시 이것을 알고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좇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17)라고 하였다. 경석이 상생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종도로 둘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신 거다.

박공우와 차경석의 예에서 살펴본 상생윤리는 ‘범의 경우’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아무리 원수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은인처럼 여기는 것이 상생이다. 만일 이와 같은 의미의 ‘상생’생태론이라면, 인간을 해친 범도, 말라리아를 걸리게 한 모기도, 온갖 병을 일으키는 세균도, 바이러스도, 은인처럼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해치는 범을 은인으로 여기지 않았고 더 나아가 그 개체수를 줄이고 번성치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상생생태론에서의 ‘상생’은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어야 한다.

이 도삼이 어느 날 동곡으로 상제를 찾아뵈니 상제께서 “사람을 해치는 물건을 낱낱이 세어보라” 하시므로 그는 범·표범·이리·늑대로부터 모기·이·벼룩·빈대에 이르기까지 세어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사람을 해치는 물건을 후천에는 다 없애리라”고 말씀하셨도다.18)

상생에 대한 생태적 개념 규정은 후천에서의 상호의존의 양상으로 가늠할 수 있다. 어떤 개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이나 성질이 인간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면 후천에서는 그러한 존재들이 사라진다고 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후천에서 또다시 원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해치는 물건을 후천에는 다 없애리라’라는 말씀에서 후천의 상호의존성은 긍정적 관계(++)만 있거나 혹은 포원이 존재하지 않는 포식, 기생, 경쟁의 관계도 포함될 수 있다. 증산이 대원사 공부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자신에게 모여든 금수(禽獸)에게 “너희 무리도 후천 해원을 구하려 함인가”19)라고 한 것에서 후천에 펼쳐질 생태계의 상호의존성에도 더 이상 포원이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상호의존의 원칙 아래에서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상생을 ‘생태적 상생’으로 규정할 수 있고, 이러한 전제에서 비로소 ‘상생’생태론이 기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언설은 생태주의자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범, 표범, 이리, 늑대, 모기, 이, 벼룩, 빈대를 모두 없앤다고 한다면 생태주의자들은 이것을 인간중심주의라고 비난할 것이다. 이 문제는 후천이라는 세계에 대한 논의로 풀어가 보자.

3. 후천에서의 상호의존성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를 가르는 기준은 비인간적 존재에게도 내재적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여부다. 내재적 가치가 있는 존재에게 인간은 윤리적 배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에서는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했기에 인간은 자연을 단지 자신의 편의와 번영을 위한 도구로 착취하였고 이것은 결국 현재의 환경 위기를 불러왔다.

내재적 가치란 어떤 대상이 그것의 속성 때문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가치를 말한다. 어떤 목적에 이용되거나 다른 존재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가치 평가자라는 외부적 존재에 의해 가치가 부여되는 것도 아닌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20) 내재적 가치는 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가치인 도구적 가치, 인간의 평가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는 외재적 가치와 반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

“범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그 피해를 심하게 입을 것이므로 종자를 전할 만큼 남겨 두고 번성치 못하게 하였노라”라는 구절에서 동물을 도구적 가치로 인식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범도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욕망을 충족하고 목적을 달성하여 종 자체의 좋음을 유지하려는 내재적 가치가 있는데, 그러한 범의 개체수를 줄이는 것은 범의 내재적 가치를 무시하고 인간의 편의대로 그 가치를 환원한 처사가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문제제기는 종교에서 사실과 가치에 대한 판단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선이해를 필요로 한다.

종교적 서사는 그 자체가 세계에 대한 인식이면서 동시에 가치를 내포한다.21) 종교의 세계에서 도덕이나 가치에 대한 판단은 그 종교에서 발화되는 여러 사실이나 지식에 근거한다. 대순사상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선천과 후천으로 나뉘고 그것의 기준점은 천지공사다. 선천은 상극과 적원(積冤)의 시대고, 후천은 무상극과 무포원의 시대라는 것이 증산의 천지공사에 담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공사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정에 대한 가치판단은 ‘후천이라는 세계에 도달’이라는 사실과 정합성을 이루어야 하고, 선천의 모든 존재 또한 ‘후천이라는 선경이 지배하는 원칙’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후천이 있다는 사실은 선천의 모든 존재를 상생의 가능 여부라는 심판대 위에 올려놓은 셈이다.

선천의 신명들은 심판되었고,22) 인간도 참된 자와 거짓된 자의 심판이 진행 중이며,23) 동물도 사람과의 상호의존성을 기준으로 종 자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 신명도, 인간도, 동물도, 그 어떤 존재도, 후천의 포원 없는 상호의존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24) 다만 인간과 동물에 차이가 있다면, 스스로 변화를 선택하고 실천하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교화될 수 있는가이다.

인간관계에서 상생하는 방법은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덕이 되어서 복을 이루게 되나니라”25)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비록 원수라도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원수 역시 복을 이룬다고 했는데 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사람은 관계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동물이다. 그러나 범은 성질이 너무 사납고 사람 보기를 돼지 같은 짐승으로 보므로 사람과 관계개선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모기, 이, 벼룩, 빈대와 같은 존재 역시 스스로 자신의 성질을 바꿀 수 없고, 제삼자로부터 교화될 수도 없다. 인간은 상호의존적 존재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 종 자체가 없어진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모기, 이, 벼룩 등은 다른 존재로 거듭날 방법이 없으므로 후천에서 다른 선택을 기대할 수 없다. 만일 지구상의 인간이 단 한 사람도 상호의존적 인간, 생태적 인간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인간 역시 종 자체가 소멸한다고 본다. 후천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물건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해치는 사람, 사람 이외의 존재를 해치는 사람 역시 사라진다.

유신론적 종교는 신의 권위로부터 진리와 가치가 살아난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인간에게 동물의 이름을 마음대로 짓게 했고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할 수 있는 당위성을 얻게 되었다면, 대순진리회의 하느님은 후천이라는 판을 직접 짜고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들도 후천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화하라는 명령이지 인간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 물건을 후천에는 모두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 장에서 상생을 상호의존성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상생의 의미를 알아보자.

Ⅲ. 천지생인용인(天地生人用人)의 우주관에서 본 자연과 인간

1. 천지생인용인(天地生人用人)의 우주관

생태론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둘 사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요구한다.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채로는 ‘생태’라고 하는 개념이 제대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26) ‘생태’는 인간을 척도로 하는 ‘환경’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인간이라는 기준을 넘어서 있다.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자연’은 ‘인간과 대비되는 존재 범주’(좁은 의미의 자연)를 지칭하지만, 생태중심적 관점에서 ‘자연’은 인간과 비인간 혹은 생물과 비생물의 구분 없이 ‘우주 전체’, ‘존재 전체’(넓은 의미의 자연)를 뜻한다.27)

대순사상의 핵심개념들은 ‘천지’와의 관련성에서 논의될 수 있다. 그것은 증산의 천지공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정점으로 여러 사건과 개념들이 천지와 인간과의 관련성에서 다루어진다. 예를 들어, ‘천지공사’에서 ‘천지’는 인간이 포함된 세계다. 천지공사를 ‘삼계공사’라고도 하는데 ‘삼계(三界)’에 ‘인계(人界)’가 포함된다. 반면 ‘천지생인용인(天地生人用人)’처럼 ‘천지가 인간을 낳고 인간을 쓴다’일 때 생인(生人) 전의 천지는 인간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언급되는 ‘천지’는 그 맥락에 따라 인간이 배제된 좁은 의미의 자연일 수 있고 혹은 인간이 포함된 넓은 의미의 자연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범주적 구분에서 ‘천지와 인간’은 곧 ‘자연과 인간’의 관계 맥락으로 논의할 수 있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의 직접적인 이유는 산업문명이며, 이 산업문명은 서구의 근대문명에서 유래한다.28) 생태학자이자 신부인 이재돈은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위해서 자연을 무분별하고 무차별하게 착취한 것이 환경파괴의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방임하거나 조장하는 세계관과 우주관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말한다.29) 그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서구인들에게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인간중심적 신념을 제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대순사상의 ‘천지생인용인’의 우주관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태적 관계로 출발한다.

일이 마땅히 왕성하게 됨은 천지에 달린 것이지 반드시 사람에게 달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사람을 낳고 사람을 쓴다[天地生人用人].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지가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쓰이지 못한다면 어찌 인생이라고 할 수 있으랴.30)

이 구절은 우주에서 인간의 탄생을 그리고 있다. 천지가 인간을 낳은 이유는 천지의 일에 인간을 쓰려고 한 것이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없다면 천지 또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자연과 인간이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고 말하면서도 ‘인간 없는 자연’은 전혀 문제될 게 없지만 ‘자연 없는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자연은 전부이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31) 그러나 천지생인용인의 우주관에서는 ‘인간 없는 자연’도 불가능하다. 인간이 없으면 천지도 없는 것이니 천지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로 인간을 낳은 것이다. 천지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성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렇다면 천지는 어떤 내재적 가치가 있을까? 사지당왕재어천지(事之當旺在於天地)에서의 ‘일[事]’은 천지에 달린 것이지 반드시 사람에게 달린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은 곧 ‘천지의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지는 그 일에 인간이 쓰이길 원했다. 천지의 일이 무엇인지 단정 지을 순 없으나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32)라는 구절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차선근은 이 구절에서 천존, 지존, 인존을 ‘봉신(封神)’ 개념으로 설명한다. 봉신은 신명이 ‘거주하게 된다’라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공적인 일을 수행한다’라는 뜻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봉신은 신명이 특별한 장소[天地人, 三界]를 거주처로 삼아 주어진 사명에 따라 공적인 일을 수행한다”라는 것이다. 인존은 후천에서 신명의 권한을 행사하여 자연의 특정 부분을 맡아서 지배하고 운용할 수 있는 존재다.33) 천지는 인간을 낳았고, 또 인간을 천지의 일에 쓰고자 한다. 여기서 인간과 함께 삼계를 경영하겠다는 천지의 우주적 가치와 선이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서 인간은 천지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고 그때 비로소 자연과 인간이 깊은 상호의존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천지는 인류가 탄생하기 전과 후로 구분해서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인류의 출현 이전의 천지는 천, 지의 이계(二界)로, 이후는 천, 지, 인의 삼계(三界)가 된다. 문맥에 따라 삼계를 천지라고 쓰기도 한다. 대순사상에서 사용하는 이 ‘삼계’는 존재론적 범주다. 우리가 ‘우주(宇宙)’라고 표현할 때 그 의미는 인공위성이 떠다니는 물리적 우주공간을 떠올리거나 『회남자』에 기초한 한자의 유래로부터 공간과 시간34)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삼계라고 하면 천계, 지계, 인계로 인간이 속한 인계 외에 다른 두 세계, 즉 천계와 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직관적으로 이들의 특성과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우주라고 할 때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삼계라고 할 때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는 인간인데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습관적으로 회자되는 우주에 속하는 게 아닌 인계에 속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머지 천계와 지계에 대해서는 대답을 머뭇거리게 된다. 이 우주는 한 통의 공간일 수 있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범주화한다면 세 개의 세계가 되고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이 속한 인계 외에 두 세계의 주체성을 인식하면서 접근하게 된다. 삼계는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 즉 생태적인 존재 범주다.35)

이 삼계라는 표현은 천, 지, 인과 신명에 대한 통합적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증산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명부공사(冥府公事)의 일부에 착수하였다.36) 명부는 인간의 생사를 관장하는 신명계의 영역이다. 따라서 삼계라고 할 때는 신명계까지 포함되는 것이다.37) 그렇다면 삼계라는 것은, 인간은 삼계 내 존재고 나머지 두 세계의 주체성 또한 충분히 고려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인 신명계까지 아우른다는 취지이므로 대순사상의 생태론은 삼계중심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천지와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성립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이러한 천지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상제께서 정미년 섣달 스무사흘에 신 경수를 그의 집에서 찾으시니라. 상제께서 요(堯)의 역상 일월성신 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일월이 아니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인(知人)이 아니면 허영(虛影)이요, 당요(唐堯)가 일월의 법을 알아내어 백성에게 가르쳤으므로 하늘의 은혜와 땅의 이치가 비로소 인류에게 주어졌나니라” 하셨도다. … .38)

요임금이 일월성신의 움직임을 헤아려 계절이 변화하는 마디를 깨닫고 이를 기반으로 인간이 먹고사는 기초가 되는 농사짓는 시기와 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는 구절이다. ‘지인(知人)’은 어떠한 가치를 알아주는 인간을 말한다. 물론 여기서 그 가치는 천지의 가치다. 인간이 천지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볼 수 있다. “천지는 일월이 아니면 빈껍데기고, 일월은 지인이 아니면 빈 그림자”에서 각각의 존재근거는 ‘천지 → 일월 → 지인’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인간이 천지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은 이것의 역순인 지인 → 일월 → 천지다. 지인은 해와 달의 규칙성에서 자연의 시간을 알아내고, 또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연에 위대한 법칙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존재다. 그러나 지인은 자연의 물리 법칙에만 매달리는 존재는 아니다.

지인은 그 법칙 배후에서 인간을 태어나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마침내 자신의 일에 쓰려고 하는 자연의 신성성까지 발견하는 존재다. “역상 일월성신 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에서 공경[敬]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의 신성성에 대한 공경을 말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요전」편에서 이 구절에 바로 이어지는 “뜨는 해를 공손히 맞아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39)하고, “지는 해를 공손히 전송하여 추수를 고르게 다스리도록”40)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지인은 땅의 이치를 발견하고 하늘의 은혜까지 깨닫는 삼계중심적인 존재가 된다.

천지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인간으로 삼았고, 지인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배후에 있는 천지의 신성성까지 깨달아 비로소 천지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깊은 상호의존의 관계가 성립한다. 선(善)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아는 것을 말한다면 인간은 천지생인용인의 우주관에서 천지가 자신의 내재적 가치에만 사로잡힌 게 아닌 인간과 상호의존 하고자 한 그 선을 발견할 수 있다.

2.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성의 붕괴

전술하였듯이 생태위기는 근대문명에서 비롯되었고 그 배후라는 혐의는 기독교의 우주관이 받고 있다. 중세적 인간은 자연에 포함되고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인간은 인간 자신을 자연과 분리하여 바라보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게만 내재적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반면 자연은 오로지 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가치, 즉 도구적 가치만을 지닐 뿐이다. 인간은 이성적, 문화적, 윤리적 존재로 자율성을 지닌 주체이고, 자연은 오로지 타율적으로만 기능하는 객체이자 대상일 뿐이다. 근대적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우주에서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월한 인간이 열등한 자연을 정복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신념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이로써 인간과 자연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었고 이러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대순사상에서 서구의 근대문명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일련의 사태로 결국 최고신이 인세에 강세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제께서 어느 날 김 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41)

요임금이라는 동양전통의 인물을 내세워 지인(知人)을 설명하였다면, 이 구절은 서양의 근대문명을 축으로 삼계가 어떻게 혼란에 빠지는가를 그리고 있다. 서양이 자신의 내재적 역량으로 근대문명을 일으켰다는 서구중심주의와 달리 대순사상에서는 동양의 문명이 그 역할을 했다고 본다. 동양의 문명신에 의해 서양에 문운이 열리고, 서양의 지하신이 활동하여 그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교만은 천계와 지계라는 존재 자체를 망각 속에 가두었다. 이로써 천지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이라는 대전제가 흔들리고, 인간의 자연정복이라는 행위로 그것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자연은 신명이 가득 찬 공간이면서 천존과 지존의 권위가 살아 숨 쉬는 영역이다.42) 신명이 가득 찬 영역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죄악은 천존과 지존이라는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고, 둘 사이에 지켜졌던 상도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삼계가 혼란하여 그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질서의 근원인 도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뜻이며 그렇다면 도의 근원은 끊어진 셈이다.

천지생인용인의 우주관은 천지가 인간을 낳고 인간을 쓰겠다는 관점이다. 인간을 쓰기 위해서는 인간이 미개한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고 문명화의 단계로 나아가야 했다고 본다.43) 그 역할의 일부를 담당했던 것이 문명신과 같은 신명들이었고, 이 구절에서 보듯 문명신의 역할은 동양과 서양을 미개의 수준에서 문명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천지의 이 계획은 서구의 근대문명으로부터 오도되기 시작한다. 문명신과 같은 존재들은 인간을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변화 속에서 교만이 싹텄고, 문명화된 서구는 오히려 자연을 짓밟고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천지의 은혜를 죄악으로 갚았다.44) 인간의 배은은 천지에, 그리고 자연에 원한을 품게 하였다. 이로써 천지와 인간의 상호의존성은 붕괴되었다.

Ⅳ. 해원상생 보은상생 생태론

1. 의례를 통한 해원상생과 상호의존성의 복원

서구문명의 발흥이라는 근대사를 천지생인용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근시안적으로는 인계의 번영이지만 거시적으로는 삼계의 붕괴라 할 수 있다. 삼계는 원으로 가득 찼고 삼계 내 존재들만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증산은 천지공사를 해원을 위주로 하여 보은으로 종결하였으니 이 양원리(兩原理)로 말미암아 만고에 쌓였던 모든 원울(冤鬱)이 풀려 결국 삼계의 위기가 극복된다고 본다.45)

상생생태론에서 상생이라는 실천 덕목은 구체적으로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말한다. 이때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은 어떤 한 가지의 실천만을 특정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천지생인용인으로부터 시작된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규정해보는 것이다.

차선근은 자연이 품은 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만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는 태도는 상극적인 것이다. 상극은 원을 만든다는 게 대순진리회의 주장이다. 따라서 산업화 이후 공존과 어울림의 대상에서 정복의 대상으로 전락한 자연은 인간에게 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입장이다”46) 그리고 이러한 선천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개벽에 의해 해결된다고 보고 있다.47) 필자 역시 자연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원을 품었다는 위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런데 개벽으로 가기 전에 과거로부터 쌓였던 자연과 인간 사이의 원을 푸는 해원상생의 과정이 대순진리회의 수도 방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자연이 “정복의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입장은 그 ‘정복’을 천지생인용인의 우주관에서 봤을 때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붕괴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이 원을 품게 되었다는 입장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의 포원에 대한 원인을 알았다면 자연에 대한 해원도 가능할 것이다. 그 포원의 이유가 ‘상호의존성의 붕괴’라면, 해원은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서 붕괴된 ‘상호의존성을 회복’시키면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 방법은 종교적 의례에서 찾을 수 있다.

의례는 자연과 인간이 밀착하는 가장 성스러운 시간이다. 대순진리회의 수도 방법 중 하나인 공부(工夫)48)는 종교학적으로 의례에 해당한다. 각 방면의 수도인이 참여하는 이 공부는 도장 내 일정한 장소에서 지정된 방법으로 지정된 시간에 주문을 송독하는 것이다.49) 공부는 시학(侍學)과 시법(侍法)으로 구분되고 각 공부반은 하루에 36명씩 들어가며 24시간을 맡는다. 시학은 5일 마다 초강식, 15일마다 합강식을 올리고 45일이 되면 봉강식을 행한다.50) 우당은 시학공부는 “자리 공부”이며 “1년 12달, 24절후와 72후를 사람이 맡아 지켜나가는 것”51)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도통을 신과 인간의 관계 맥락에서 “과거에는 신을 땅에 봉했는데 이제는 신봉어인(神封於人)이다. 신인상합(神人相合)이 되면 그것이 도통이다. 시간과 계절을 신이 맡아서 잘하니 우리도 시간을 믿고 계절을 믿는 것이다. 앞으로는 사람이 맡는다.”52)라고 하였다.

자연은 시간 속에서 만물을 변화시킨다. ‘일월무지인허영’에서 ‘일월’은 단순히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의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자연의 시간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천지가 많은 일을 하지만 그것은 결국 생장염장(生長斂藏)53) 혹은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에 해당할 뿐이다.54) 우당은 이 공부에 대해 ‘자연의 시간’을 ‘인간이 맡는 자리’ 공부라고 하였다. 자연의 시간을 공간화해서 자연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공부에 참여한 사람이 지정된 방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지정된 시간을 정확히 지키며 한 자의 주문도 틀리지 않으려고 성심성의를 다 하는 모습은 한 치도 빈틈없이 물려 들어가는 자연의 순환성, 주기성, 시간성을 지키고 따르려는 화해의 몸짓이다.55) 공부의례에서 인간이 자연을 향한 해원상생의 실천을 엿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회복되어 상호의존성을 복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2. 도통에 의한 보은상생과 상호의존성의 완성

인간이 천지에 보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천지생인용인의 우주관에 따르면, 천지는 무작정 인간을 낳은 게 아니라 천지의 일에 쓰려고 인간을 낳았다. 인간이 천지에 보은하는 방법은 이러한 천지의 계획에 부흥하는 것이다. 천지의 일에 쓰이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 일에 어울리는 수준으로 변화해야 한다. 천지의 계획과 인간의 변화는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일까?

상제께서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 서신(西神)이 사명하여 만유를 재제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 만물이 가을 바람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성숙도 되는 것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오.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그러므로 신의 위엄을 떨쳐 불의를 숙청하기도 하며 혹은 인애를 베풀어 의로운 사람을 돕나니 복을 구하는 자와 삶을 구하는 자는 힘쓸지어다”라고 말씀하셨도다.56)

천지가 곧 성공을 하는데 그 때는 개벽의 시기다. 그런데 개벽이 인계에서 펼쳐지는 양상은 거짓된 자의 멸망과 참된 자의 성공이다. 천지의 성공은 인간의 성공에 달렸고 이를 위해 인간은 참된 자로 성숙되어야 한다. 대순진리회에서는 수도를 통해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며 이것이 기틀이 되어 도통이라는 종교적 경지에 도달한다고 본다.

종교에서 의례는 그 종교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중요한 행위 중 하나다.57) 대순진리회의 공부 의례 역시 종단의 목적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앞 절에서 보았듯 우당은 이 공부를 ‘신봉어인(神封於人)’과 관련된 것으로 언급한다. 신봉어인이란 ‘신이 인간에게 봉해진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과 인간이 서로 합해지는[相合] 경지로 곧 ‘도통’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통을 하게 되면 선천에서 신이 하던 일을 인간이 맡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명의 권한을 행사하여 자연의 특정한 부분을 맡아서 지배하고 운용하는”58) 후천의 인간, 즉 인존을 말한다.

개벽의 시대에 인격적으로 성숙된 인간이 도통하여 천지의 일에 쓰이게 될 때 천지는 비로소 성공한다. “도통천지보은(道通天地報恩)”59)이란 인간이 도통하는 게 천지에 대한 보은상생임을 말한다. 인간이 도통해서 천지의 일에 쓰이는 인존이 되면 천지가 지녔던 ‘용인(用人)’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고, 이것은 천지의 입장에서 성공이며 인간의 입장에서는 보은이 된다.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실천한 인간이 개벽의 때에 신인상합이라는 근본적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 대순사상의 주장이다. 그 변화를 생태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또 분리될 수도 없다는 생태적 본성을 지닌 인존으로 다시 태어난다. 인간이 인존이라는 생태적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날 때 비로소 자연과 영원한 상호의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음말

생태론은 인간을 생태적 인간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현실에 직면한 생태계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류는 근대적 인간이 주도한 서구 문명에서 생태적 인간이 주도하는 생태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 상생생태론은 자칫 인류의 공멸을 부를지 모를 생태 위기 앞에서 종교적 언어로 세상에 생태적 영감을 불어넣고자 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은 증산이 한국 땅에서 처음 펼친 ‘해원상생’이다.

윤리의 언어로 인식되어 왔던 상생을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 ‘상호의존성’이라는 생태학의 언어를 빌려왔다. 생태학에서의 상호의존성은 개체들 간에 부정적 결말을 이끌어내는 관계까지 아우른다. 생태학적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에서 개체와 개체 사이에 발생하는 원을 상수(常數)로 인식해야만 상생은 생태론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

상생의 의미를 생태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위해서는 ‘포원이 없는 상호의존성’이라는 전제로부터 대순사상에 녹아 있는 천지와 인간,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체계적으로 구성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천지생인용인의 우주관에서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는 것”이라는 선언은 천지가 자신의 내재적 가치를 포기해서라도 인간과 상호의존을 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땅의 이치와 하늘의 은혜를 발견하는 지인으로 나아갔으며 이것은 곧 인간이 삼계 내 존재임을 인식한 것이다. 이로써 천지와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성립한다. 근대적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과 분리하며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외쳤다. 이러한 인간의 교만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지른다. 이로써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성은 붕괴되었고 천지생인용인의 뜻이 좌절되어 천지는 포원하게 된다.

증산이 내어놓은 ‘상생의 도’를 생태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천지와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에 끊어진 상호의존성을 다시 잇는 해결책이다. 그리고 이때의 상생은 구체적으로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의미한다. 공부는 자연의 시간을 공간화 하여 자연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며 화해하는 관계의 장을 상징한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도통천지보은’에서 천지의 성공은 곧 인간의 성공에 달렸음을 알 수 있다. 수도를 통해 도통이라는 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이 보은상생의 실천이며 신인상합이라는 도통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선천에서 신명이 하던 일을 인간이 맡게 되는 데 이것은 천지가 인간을 쓰려고 한 원대한 꿈이 실현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천지는 성공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태적 본성을 지닌 인존으로 변화할 때 그 어떤 원도 발생시키지 않고 자연과 영원한 상호의존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상생생태론에서의 상생은 자연과 인간이 상호의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영원히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이념이자 실천이다.

Notes

1) 유기쁨, 「생태주의와 종교연구 : 흐름과 전망」, 『종교문화연구』 9 (2007), p.56.

2) “상제께서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척(慼)이 없어야 잘 산다는 말이다. 남에게 원억(冤抑)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나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의 신명이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 등등의 말씀은 해원상생의 윤리를 생활화하여 실천토록 하신 것이다.” 대순진리회 교무부, 『포덕교화기본원리 Ⅱ』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3), p.8.

3)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13판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교법 3장 12절. (『전경』 구절은 이후 장과 절만을 표기함)

4) 교법 1장 56절.

5) 차선근은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을 ‘상생생태론’으로 명명하였다.(차선근, 「대순진리회 생태론 연구서설 : 상생생태론」, 『대순사상논총』 35 (2020), p.317) 본 연구는 차선근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하지만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6) 린 화이트는 기독교가 지구상에 나타난 종교 가운데 가장 인간중심적인 종교이며 그것은 유대-기독교의 창조설에서 유래하였고 결국 애니미즘을 무너뜨림으로써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자연을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Lynn White,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155 (1967), p.1205.

7) 페터 쿤츠만 외, 『철학도해사전』, 여상훈 옮김 (파주: 들녘, 2016), p.22.

8) 생태계는 생태학 연구의 기본 단위로 영국의 식물학자 탠슬리가 1935년 생물적 구성요소와 무생물적 구성요소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용어다. 물질적 순환과 에너지의 흐름을 통하여 생물과 환경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송인주, 「생태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에코포럼 엮음, 『생태적 상호의존성과 인간의 욕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6), p.183.

9) 이도원, 「생태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에코포럼 엮음, 『생태적 상호의존성과 인간의 욕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6), pp.24-25.

10) 김종욱, 「불교생태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에코포럼 엮음, 『생태적 상호의존성과 인간의 욕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6), p.64.

11) 같은 글, p.65 참조.

12) 차선근, 「기독교와 대순진리회의 종교윤리 비교연구 :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40 (2022), p.57 참조.

13) ‘상생 개념’을 ‘상호의존’이라는 생태적 범주에서 다룬 논의는 이경원의 연구가 있다. 그는 상생을 생물학에서 사용되며 생태주의자들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공생’과 비교하였다. ‘생명체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공생과 상생이 유사하나 상호관계에 있어서 근원적 일체감의 자각, 상대의 성취를 위한 적극적인 조력이라는 점에서 상생 개념의 차이를 강조한다. (이경원, 『대순진리회 신앙론』 (서울: 문사철, 2012), pp.236-240) 본고는 상생생태론의 기초를 세운다는 취지에서 생태학적 개념인 상호의존성으로 상생의 의미 규정을 시도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

14) 교법 3장 19절.

15)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진리회요람』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p.8.

16) 교법 3장 12절.

17) 교법 3장 15절.

18) 공사 3장 8절.

19) 행록 2장 15절.

20) 김남준, 「생태중심주의에서 내재적 가치 논쟁 : 도덕과 교육내용으로서 생태중심주의 분석과 제언」, 『윤리교육연구』 54 (2019), p.63.

21) 신이라는 권위 위에 인식과 도덕의 기초를 두었던 중세적 질서는 사실과 가치를 엄격히 분리하는 근대적 사고에 의해 붕괴된다. 중세적 사고에서 사실이나 지식은 신의 권위에 의한 것이므로 이미 그 안에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즉, 종교적 세계 자체가 거대한 가치 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신이 사라진 사실의 세계는 어떠한 당위적 가치도 있을 수 없다. 수많은 지식이 있더라도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도출되지 않는다. 서구 근대 윤리학은 윤리를 지탱해주던 신의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인간의 합리성을 근거로 도덕을 근거 지을 원리를 구축하고자 한 일련의 노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길희성, 「현대 윤리학의 위기와 상호의존의 윤리」, 『서강인문논총』 11 (2000), pp.51-59 참조.

22) 교운 2장 21절 참조.

23) 예시 30절 참조.

24) 생태학에서의 상호의존성을 선천의 상호의존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후천의 상호의존성으로 통용될 수 없다. 선천의 상호의존성은 포원이 발생하지만 후천은 무상극지리(無相克之理)의 세계이므로 원이 발생되지 않는다. 따라서 후천의 상호의존성은 포원이 없는 상호의존인 것이다.

25) 교법 1장 56절.

26) 생태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와 그것을 둘러싼 비생물권의 관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장석길, 「지속가능성 개념에서 자연, 환경, 생태의 의미」, 『환경철학』 33 (2022), p.127.

27) 박이문, 『환경철학』 (서울: 미다스북스, 2002), pp.45-84 참조.

28) 이재돈,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엮음, 『생태문명 생각하기』 (서울: 크레파스북, 2018), p.19.

29) 같은 책, p.28.

30) 교법 3장 47절, “事之當旺在於天地 必不在人 然無人無天地 故天地生人 用人 以人生 不參於天地用人之時 何可曰人生乎.”

31) 박호상, 『자연의 인간, 인간의 자연』 (서울: 후마니타스, 2012), p.46.

32) 교법 2장 56절.

33) 차선근, 「대순진리회 생태론 연구서설 : 상생생태론」, pp.309-315.

34) 『회남자』, “사방상하왈우(四方上下曰宇) 고왕금래왈우(古往今來曰宙).”

35) 김귀만, 「대순사상의 우주론 연구」,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4 (2017), p.290 참조.

36) 공사 1장 3절.

37) 김귀만은 천계, 지계, 인계를 그 특성에 따라 구분하면서 그 배후에 모두 신명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귀만, 앞의 글, pp.299-308.

38) 교운 1장 30절.

39) 『서경』, 「요전」, “寅賓出日 平秩東作.”

40) 같은 책, “寅餞納日 平秩西成.”

41) 교운 1장 9절.

42)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천존, 지존 등은 봉신 개념에 의해 신명이 삼계를 거주처로 삼아 주어진 사명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삼계는 신명이 가득 차 있는 천지를 말하며, 천지는 넓은 의미의 자연이다. 교법 3장 2절, 교법 2장 56절 참조.

43) 교운 1장 17절 참조.

44)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존재성을 생명이라고 봤을 때, 그것은 ‘천지의 은혜’ 혹은 ‘자연의 은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행위는 인간에게 생명을 준 천지의 은혜를 죄악으로 갚는 것이므로 배은에 해당한다. 이로써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이라는 종교적 행위가 요청된다. 허남진, 「대순사상의 생태적 사유와 통합생태론」, 『대순종학』 1 (2021), p.77 참조.

45) 『대순진리회요람』, p.8 참조.

46) 차선근, 앞의 글, pp.318-319.

47) 같은 글, p.317.

48) 『대순진리회요람』, p.18, “수도는 공부와 수련과 평일기도와 주일기도로 구분한다.”

49) 같은 책, p.18.

50) 5일은 1후이며, 1후가 세 개 모이면 1절후다. 따라서 1년은 72후, 24절후로 구성된다.

51) 「도전님 훈시」 (1991. 7. 6).

52) 같은 글. 덧붙일 것은 반드시 공부에 참여해야만 도통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공부이지만 공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다 똑같이 운수를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53) 교법 3장 27절.

54) 제생 42절, “天地之用 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而已.”

55) 김귀만, 「생태위기와 수도」, 『대순회보』 254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22), pp.43-45 참조.

56) 예시 30절.

57) 《불교평론》, 「종교에서 의례의 의미와 기능」 (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5, 2024. 1. 2. 검색).

58) 차선근, 앞의 글, p.315.

59) 예시 88절.

【참고문헌】

1.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13판,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2.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진리회요람』,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3.

대순진리회 교무부, 『포덕교화기본원리 Ⅱ』,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3.

4.

「도전님 훈시」 (종단내부자료)

5.

『書經』

6.

『淮南子』

7.

길희성, 「현대 윤리학의 위기와 상호의존의 윤리」, 『서강인문논총』 11, 2000. http://uci.or.kr/G901:A-0001485881

8.

김귀만, 「대순사상의 우주론 연구」,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4, 2017. http://uci.or.kr//I410-ECN-0101-2018-228-001666918

9.

김귀만, 「생태위기와 수도」, 『대순회보』 254,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22.

10.

김남준, 「생태중심주의에서 내재적 가치 논쟁 : 도덕과 교육내용으로서 생태중심주의 분석과 제언」, 『윤리교육연구』 54, 2019.

11.

김종욱, 「불교생태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에코포럼 엮음, 『생태적 상호의존성과 인간의 욕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6.

12.

박이문, 『환경철학』, 서울: 미다스북스, 2002.

13.

박호상, 『자연의 인간, 인간의 자연』, 서울: 후마니타스, 2012.

14.

송인주, 「생태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에코포럼 엮음, 『생태적 상호의존성과 인간의 욕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6.

15.

유기쁨, 「생태주의와 종교연구 : 흐름과 전망」, 『종교문화연구』 9, 2007. http://uci.or.kr//G901:A-0002448135

16.

이경원, 『대순진리회 신앙론』, 서울: 문사철, 2012.

17.

이도원, 「생태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에코포럼 엮음, 『생태적 상호의존성과 인간의 욕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6.

18.

이재돈,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엮음, 『생태문명 생각하기』, 서울: 크레파스북, 2018.

19.

장석길, 「지속가능성 개념에서 자연, 환경, 생태의 의미」, 『환경철학』 33, 2022. http://uci.or.kr//G901:A-0010794542

20.

차선근, 「대순진리회 생태론 연구서설 : 상생생태론」, 『대순사상논총』 35, 2020.

21.

차선근, 「기독교와 대순진리회의 종교윤리 비교연구 :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40, 2022.

22.

페터 쿤츠만 외, 『철학도해사전』, 여상훈 옮김, 파주: 들녘, 2016.

23.

허남진, 「대순사상의 생태적 사유와 통합생태론」, 『대순종학』 1, 2021.

24.

Lynn White,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155, 1967.

25.

《불교평론》https://www.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