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일반적으로 종교의 대사회적 역할과 활동은 두 가지 면에 토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종교적 교리를 통해 사회에 만연(蔓延)된 도덕적 병폐들을 고쳐 건강한 사회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둘째는 민간의 생활현장에서 어려운 민생을 돕기 위해 종교적 이념에 의거해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순(大巡)사상에서는 강증산(姜甑山, 1871. 9. 19.~1909. 6. 24)1) 성사(聖師)2)의 종통(宗統)을 전수(傳授)받은 조정산(趙鼎山, 1895. 12. 4.~1958. 3. 6)3)의 종교적 활동과 사회적 복지활동이 주목된다. 이는 전대의 강증산의 가르침을 펴는 조정산의 50년간(1909. 4. 28.~1958. 3. 6)의 ‘포교공부(布敎工夫)’를 통해서 그 기원(基源)과 토대가 이루어졌으며, 강증산의 천지공사(1901~1909)를 구체화하여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4)해 나가는 조정산의 종교적 활동은 진멸에 처한 인류사회를 위한 각고(刻苦)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조정산의 구세제민의 종교적 활동은 포교공부를 통해 강증산이 짜놓은 도수를 풀어나가는 면과 직접적으로 민(民)의 삶의 현장에 애착을 갖고 현장에서 함께 하며 그들의 생활을 증진시켜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현장에서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면도 중요하지만 토대적 부분으로서 조정산이 공부에 의해 종교적 교리를 정립시켜 종교의 신앙체계를 갖추는 일은 종단의 근간을 세우는 일로 구세제민에 있어서 필요하며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류사회를 위한 조정산의 종교적 활동을 좀 더 세분화하면 위의 첫째 부분은 구세(救世)에 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제민(濟民)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순사상을 볼 때 구세와 제민은 중요한 용어로 핵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조정산의 포교 50년 공부는 이후 종통을 전수(傳授) 받은 박우당(1917. 11. 30.~1995. 12. 4)이 1969년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를 창설해서 기본사업 및 삼대 중요사업을 실행해 구세와 제민의 대사회적 종교활동을 가시화해 나갔음을 역사적으로 알 수 있다. 즉 거시적으로 보아 기본사업은 구세로, 3대 중요사업은 제민으로 관련되며 대순진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근간이 되어 현재 실천 실행되고 있다.
강증산 성사의 사상을 계속 이어 인세에서 펼칠 존재에 대한 면으로 천부적인 차원에서 강증산에서 조정산으로, 다시 조정산에서 박우당으로 이어진 종통(宗統)이 연원(淵源)으로 무엇보다 중요하게 강조되는 강증산 성사(聖師)의 사상에서 강증산의 종통을 전수받은 조정산의 신앙체계를 세우기 위한 강증산과의 긴밀한 교감은 강증산은 물론이고 조정산의 구세제민의 목적을 이루는 데 천부적 요건으로 중요하다. 나아가 이는 조정산의 종통을 전수받은 박우당 대(代)에 와서도 구세제민의 대의(大義)와 대업(大業)을 이루는 규범과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천부적 연원에 의한 종통전수와 강증산과 조정산의 양산도(兩山道)의 원리를 근간으로 삼아 이글은 구세제민에 대한 논지를 다음의 두 가지 면에 바탕하여 전개하였다. 첫째, 대순사상에서 종교의 대사회적 역할을 대표하는 용어로 ‘구세제민’에 주목해서 그 의미를 도주(道主)인 조정산의 포교활동을 중심에 두고, 강증산과의 관계 속에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1969)」5)의 소의(所依)경전인 『전경(典經)』, 「교운(敎運)」편(編) 2장의 기록을 따라 찾아보았다. 둘째로 조정산이 강증산 성사와 양산도(兩山道)의 원리에 있음에 기저하여 조정산의 포교공부를 고찰하였음을 밝혀둔다.
조정산의 구세제민은 1909년 4월 28일6)로 부터 1917년 2월 9일7)까지 9년 간의 개인적 수행 외에 가장 중요한 종교적 행적은 입산(入山)공부 등을 통한 스스로의 자각(自覺)만이 아닌 강증산 구천상제(九天上帝)의 현화(現化)하에 주도(主導)되어 이루어진 조정산의 ‘감오득도(感悟得道)’로부터 시작되었다8)는 면이 특질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에 의한 득도를 통해 입산공부 상태에 있었던 조정산이 천부적인 연원의 맥을 따라서 구세제민의 길을 알게 되고, 그 방법을 또한 강증산이 밝힌 ‘금산사 미륵불의 양산도의 원리’와 ‘포교 50년 공부’의 과정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조정산을 감오득도케 하기 위해 강증산이 조정산의 공부실에 현화(現化)하고, 조정산이 신적(神的) 상태의 신인(神人)인 강증산을 만나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느껴 깨달아 득도하였는데, 이를 대순사상에서는 조정산의 감오득도(感悟得道)라 명명(命名)하고 있다. 감오득도는 득도(得道)에 감오(感悟)가 더 있다. 그러면 조정산은 무엇을 느껴 깨달은 것인가. 그것은 신인(神人)인 강증산의 천부적인 선택으로 강증산을 감(感)하여 전대(前代)의 강증산의 구세제민을 위한 천지공사(天地公事, 1901~1909)의 행적과 관련된 깨달음(悟)을 얻어 도들 득한 것이다.
또 주목되는 것은 이 감오의 순간에 강증산은 조정산에게 ‘기도주(祈禱呪)’를 주었다. 기도주는 ‘시천주(侍天主)’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천주(天主)를 모신다’는 의미이다. 즉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9)이며 ‘구천상제(九天上帝)’인 강증산을 모시면서 비로소 조정산의 빌고 비는 구세제민이라는 기도의 소원(所願)이 이루어져 간다는 것이다. 또한 기도주만이 아니라 당시 23세였던 조정산의 소원은 사람을 많이 구하라는 태을주(太乙呪)와도 천부적으로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루며 ‘구세제민’이 성취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1917년 2월 10일(陰)에 만주 봉천에서 일어난 조정산의 감오득도 관련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며 구세제민에 대해서 이글은 강증산으로부터 종통(宗統)을 전수받은 조정산의 종교적 활동을 특히 「교운」편 2장에 나타난 강증산이 조정산과 관계한 내용에서, 첫째 강증산의 신인(神人)으로의 출현, 둘째 강증산이 조정산에게 계시한 내용 등을 중심으로10) 장(章)을 구성하여 구세제민의 양상과 의의를 고구(考究)해 보았다.
또한 부가적으로 이글은 강증산에 의한 조정산의 득도와 곧 이어 이루어진 귀국과 안면도, 황새마을 등에서의 득도 후의 주요 행적에도 주목하며, 조정산의 종교적 활동에 나타난 종교의 대사회적 역할들을 구세제민을 위한 과정으로 보아 기술하였다. 나아가 이는 조정산으로부터 박우당으로 종통이 전수되며 현재 「대순진리회」의 기본사업인 ‘포덕(布德), 교화(敎化), 수도(修道)사업’ 및 3대 중요사업인 ‘구호자선(救護慈善)사업·사회복지(社會福祉)사업·교육(敎育)사업’11) 등과 관련하여 그 역할의 면을 포덕, 교화, 수도사업과 관련해서는 첫째로 구세제민의 토대적 부분으로서 강증산을 계승한 조정산의 신앙대상 및 교리와 연관된 활동으로12), 구호자선사업·사회복지사업·교육사업은 둘째로 조정산의 민(民)을 위한 대사회적 사회사업활동의 직접적인 실천과 상관지어 살펴보았다. 즉 토대적 부분의 종교적 활동은 구세제민을 위한 무극도 창도,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 후의 태극도 창설에 의한 신앙(信仰) 체계(體系)를 세우는 면으로서, 대사회적 실천은 민(民)의 삶의 현장에 직접적으로 관계하여 구세제민을 실천한 면으로 관련지어 고찰해보았다.
이와 같은 논의를 위해 이글은 특히 조정산이 감오득도한 1917년부터 1958년까지의 약 40년간의 대사회적 종교활동으로 강증산의 조정산에 대한 계시 및 조선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상황 등을 함께 고려하였으며, Ⅱ장에서는 조정산의 종교적 활동이 강증산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토대적 관점에서 강증산이 신인(神人)으로 조정산에게 나타나 조정산을 ‘감오득도’케 한 내용을 중심으로 조정산의 구세제민을 위한 포교공부의 행적들을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강증산이 조정산에게 내린 계시(啓示)의 내용을 따라서 신앙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조정산의 구세제민의 포교공부를 무극도 창도와 관련해서 찾아보았다. Ⅳ장에서는 일제강점기 후 해방 정국(政局)에서 종교적 활동을 재개한 조정산의 공부와 그 이전인 을축년(1925)에 있었던 대사회적 사회사업의 실천의 면을 살펴보았다. 주요 자료인 「교운」 2장은 구천상제의 천지공사의 운세(運勢)하에서 종통(宗統)을 계승한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인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 趙哲濟, 1895~1958)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다. 「교운」 2장은 상제의 교운(敎運)공사에 따른 1장 내용에 이어져 구천상제의 ‘포교 50년 공부’라는 천지공사에 따른 도주의 다양한 도수(度數)에 의한 50년간 공부의 행적(行蹟)이 주(主)를 이루고 있다.13)
Ⅱ. 강증산에 의한 감오득도(感悟得道)에 기원(起源)한 조정산의 구세제민
‘양산도(兩山道)’는 강증산과 조정산의 연원(淵源) 및 종통(宗統) 전수(傳授)의 상관성을 나타내는 말이며 강증산의 천지공사라는 종교적 행적 속에서 이루어진 천부(天賦)의 종통계승 관련 중요한 상징적 용어이다.
또 상제께서는 때로 금산사의 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하시고 세속에 있는 말의 양산도와 비유하기도 하셨도다.14)
양산도는 자의(字義)만 보면 두 산(山)의 도로 인세에서의 호칭인 강증산의 증산(甑山), 조정산의 정산(鼎山)이 두 산이 되고, 이는 증산으로부터 정산으로 순차적으로 종통이 전수되며 이루어지는 도라는 것이다. 금산사 미륵금불과 관련해서 증산은 미륵불 격(格)으로, 정산은 미륵불을 바치고 있는 솥(鼎) 격으로 모악산(母岳山) 금산사 삼층전 내에 미륵불과 솥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면 진표율사가 강증산이 강세하기 약 1,100여 년 전인 766년에 솥 위에 미륵불을 봉안한 것인데, 이미 역사적으로 삼국시대부터 강증산에게서 조정산으로 연맥되는 관계성이 양산도로 진표율사에게 내린 계시를 통해 사실화되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한편 강증산은 구천상제로서 지상에 내려와 먼저 이 금산사 미륵불에 30년간을 머물렀는데 양산도의 원리는 인세에서 1909년 조정산의 봉천명(奉天命)이후 1917년 감오득도에 의해 강증산에서 조정산으로 종통이 전수 되고, 강증산이 화천한 후에는 종통을 전수 받은 조정산이 다시 솥 위의 미륵불 격이었던 강증산을 인세에서 새롭게 도가적 도통을 위해 도교적 존신격으로 명명하여 인세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1925년 조정산이 창도한 무극도(无極道)에서, 선경(仙境)을 이루고 신선으로 출세한다는 강증산을 신앙의 대상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확정 봉안한 일과 상관된다. 이것은 양산도의 원리에 의해 강증산으로부터 조정산으로 종통 전수가 확정된 면모를 보여준다.
다음으로 이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구세제민과 관련해서 보면, 강증산이 강세(降世)해서 천지공사(天地公事, 1901~1909)를 거행한 행적은 광구천하라는 구세제민의 의미가 있음을 아래 자료에서 볼 수 있다. 강증산의 구세제민과 관련해서 다음 두 개의 구절을 보기로 한다.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고 김 형렬에게 말씀하시고 그 중의 명부공사(冥府公事)의 일부를 착수하셨도다.16)
원일이 자기 집에 상제를 모시고 성인의 도와 웅패의 술을 말씀 들었도다. 그것은 이러하였도다. 「제생 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재민 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화민 정세하리라. 너는 이제부터 마음을 바로 잡으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 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17)
위에서 순서대로 구절을 보면 ‘후천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진다’는 후천선경에서 구세(救世)로, 세계의 민생을 건진다는 말을 제민(濟民)으로 볼 수 있다. 또 두 번째 인용문에서 ‘제생의세’는 제생(濟生)은 제민(濟民)으로, 의세(醫世)는 구세(救世)라는 말로 볼 수 있다. 즉 선천(先天)의 상극(相克)으로 인한 원한을 해원상생(解冤相生)으로 선경(仙境)을 만들어 제민(濟民)하겠다는 것과 제생의세(濟生醫世)의 이념 하에 성인의 도에 의해 상생의 도로 화민(化民)하고 정세(靖世)하겠다는 주장은 모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정신인 것이다.
이처럼 위의 예문을 풀이해서 보면 강증산 사상의 근간은 ‘구세제민’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교운 2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선명히 기록되어 있다.
성골이 옮겨진 후 十五일이 되니 상제께서 구세 제민하시고자 강세하신 날이 되니라. 이날 재실에 모여 치성을 올린 후에 도주께서 「시시묵송 공산리 야야한청 잠실중 분명조화 성공일 요순우왕 일체동(時時黙誦空山裡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이라」 말씀하셨도다. 그러나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느니라. 그들 속에 권 태로·이 상우·이 우형이 끼어 있었도다. 이들은 재실에서 매일 밤낮으로 치성을 올리고 공부하시는 도주의 시종을 들었도다.18)
위에서 강증산의 성골(聖骨)을 옮기고 맞이한 음력 9월 19일 강증산의 강세일(降世日)에 대해 ‘구세제민(救世濟民)하시고자 강세(降世)하신 날’로 표현하여 강증산의 강세의 목적이 ‘구세제민’의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적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강증산의 종교적 행적을 대표할 수 있는 성구(成句)인 ‘구세제민’의 토대 위에 이루어진, 1917년 음력 2월 10일의 신인으로 현화(現化)한 강증산 성사에 대한 조정산의 ‘느껴 깨달음(感悟)’이며, 이는 조정산의 감오득도로 정의된다. 따라서 강증산에 의한 조정산의 감오득도는 강증산이 1909년 화천한 후 9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구세제민을 이루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연차적으로 조정산의 구세제민을 위한 포교공부에 대한 신인(神人)으로서의 강증산의 행적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정산의 감오득도 후 행적들은 조정산이 강증산의 종통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강증산이 행한 구세제민을 맞춰 순차적으로 수행되는 종교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이제 구세제민이라는 대사회적 종교활동의 토대위에서 1917년부터 조정산이 화천(化天)한 해인 1958년까지 감오득도 후 약 40여 년의 조정산의 종교적 활동기간을 구세제민과 관련해서 순차적으로 요약해서 보기로 한다. 먼저 강증산으로부터 조정산으로의 구세제민의 연차적 전개는 본원적으로 교운 2장의 내용에서 특히 1917년 2월 10일의 강증산이 신인으로 나타나 조정산과 만나며 준 계시, 그리고 이후의 계시를 통한 교감(交感)이라는 면을 주축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계시의 틀 안에서 강증산의 신인으로서의 조정산과의 만남, 선돌부인이 강증산이 생시에 작성한 봉서(封書)를 조정산에게 전달하여 이루어진 조정산의 강증산과의 만남, 강증산의 조정산에 대한 계시를 통한 만남 등이 된다.
강증산의 종교적 행적인 천지공사는 광구천하(匡救天下) 즉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활동이다. 이에 강증산의 종통을 계승한 조정산의 생애도 구세제민의 대업(大業)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것으로 아래 자료(교운 2장 5절)에 기록되어 있다.
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19)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20)
도주께서는 경술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 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 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21)
조정산의 1909년부터 시작된 입산수도 등의 행적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구세제민의 활동이었다. 조정산은 1895년 12월 4일(陰) 경남 함안군에서 탄강하였는데 조부(祖父)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며 국가의 운세가 기울자 분사(憤死)하였다. 이후 부친은 독립운동을 위해 1909년 고국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이곳에서 조정산은 부친의 민족애에 의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파란곡절(波瀾曲折)의 생애를 마주하게 된다. 이에 영향받은 조정산은 무엇보다 제국주의 세력의 동점(東漸)으로 동아시아 전체가 초유(初有)의 대혼란에 빠진 상황 속에서 혼돈과 위기의 동양과 조국을 구하기 위해 조정산은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위해 입산(入山) 공부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조정산의 만주에서의 입산공부의 아홉 번째 해가 되어 조정산의 구세제민의 길이 바야흐로 열리게 된다. 인세(人世)에서 강증산이 1909년 6월 24일 화천한 후 9년이 지난 뒤에 조정산과 강증산 성사(聖師)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고국이 아닌 1917년 2월 10일 이역 땅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였다. 이 만남은 1909년 인세에서 화천(化天)한 강증산이 신인(神人)의 모습으로, 조정산은 인간의 모습으로 만난 것이었다. 이 만남은 강증산이 화천하기 약 2개월 전에 있었던 1909년 4월 28일의 조정산의 ‘봉천명(奉天命)’도 그렇지만 강증산이 먼저 천지공사(天地公事)로 짜놓은 천부적(天賦的) 만남이었으며 강증산은 조정산이 품은 구세제민의 큰 뜻을 이미 알고 조정산의 공부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주께서는 九년의 공부 끝인 정사년에 상제의 삼계 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感悟)하시도다.22)
도주께서 어느 날 공부실에서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한 신인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 제민(救世濟民)하리라」고 말씀하시기에 도주께서 예(禮)를 갖추려 하시니 그 신인은 보이지 않았으되, 그 글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도다.23)
그런데 조정산이 받은 주문은 동학(東學)을 창도(創道)한 최제우가 1860년 상제(上帝)로부터 받았던 것으로 당시 주문을 받았던 최제우는 유교의 전헌(典憲)에 빠져 얻었던 능력을 잃고 관군에게 잡혀 1864년 순교하게 된다. 이에 상제였던 강증산은 자신이 직접 강세하여 세상을 구원하게 되며 강증산은 천지공사를 9년간 시행하고 자신은 동학의 ‘대(大)선생 갱생(更生)’에 대비되는 대(代)선생으로서 자신의 참동학의 가르침을 펼쳐 미래 지상천국인 후천선경(後天仙境)이 이루어지면 다시 인세에 신선의 몸으로 온다는 출세(出世)를 말하고 화천하였다.
그리고 1909년 화천한 후 9년 뒤인 1917년에 구세제민을 소원하며 공부하던 조정산에게 신인(神人)으로 나타나 기도주(祈禱呪) 주문을 주게 된다. 이를 통해 구세제민을 목적으로 천지공사를 처결했던 강증산은 천부적 종통계승자인 조정산에게 조정산이 소원(所願)하던 ‘구세제민(救世濟民)’에 대한 방법과 길을 열어 주게 된 것이다. 그 방법이 주문(呪文)이라는 글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보면 강증산 사상에서 주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24) 주문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예는 2년 뒤에 강증산이 인세에서 생시에 작성한 봉서의 형식으로 전해진 글(文)을 통해 강증산과 조정산의 종통에 의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면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1917년 2월 10일 조정산 앞에 신인(神人)의 모습으로 나타난 강증산을 통해 조정산은 1871년 강세하여 1909년 화천(化天)했던 강증산이 이미 천지인 삼계(三界)를 대순(大巡)한 진리를 느껴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조정산이 받은 주문은 기도주(祈禱呪)이다. 이 기도주는 맨 앞에 천주를 모신다(侍天主)는 의미가 있다. 즉 기도(祈禱), 빌 기(祈), 빌 도(禱)에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천주를 모심으로부터 구세제민이 시작된다는 면이 가장 긴요한데, 이는 구천상제인 강증산 성사를 모시기 시작하면서 모든 이의 기도가 실현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내용의 글을 통해 강증산은 조정산에게 구세제민의 시원(始元)과 출발을 열게 해준 것이다. 그리고 조정산의 강증산과 관련된 신비로운 체험은 1917년 2월에 있었던 일회의 감오득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이어져서 계속적으로 조정산은 강증산의 계시(啓示)를 받게 된다. 바로 감오득도에 이어서 기록된 첫 번째 계시는 만주 봉천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태인에서 강증산을 찾으라는 것25)이었다. 그러므로 1917년 2월 이후의 조정산의 구세제민을 이루기 위한 포교공부의 행적은 1871년 9월 19일에 조선에 강세하여 9년간 천지공사를 행하고 화천한 강증산의 주요 천지공사의 행적지를 몸소 직접 찾아가며 강증산의 구세제민의 대의를 조정산이 이루어가는 종통 계승자26)로서의 광대도(光大道), 승대덕(承大德) 홍대업(弘大業)27)이라는 봉교(奉敎)와 포덕(布德)의 위업인 것이다. 강증산이라는 과거 인물의 소망이 타계를 초월해서 현실에 신적 존재로 나타나 인간을 만나 소망을 이루어 나가는 구조이다. 이는 조정산이라는 현실의 인간이 신적 존재의 과거의 생애를 만나 그 이상을 동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진 스토리텔링이다. 신적 존재의 가르침안에서 구원의 능력을 얻고 이를 통해 신적 존재의 의지를 현실에 발현시켜 나가는 모티프이다.28) 다음 장에서는 감오득도에 이어 이루어진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계시와 관련해서 이루어진 조정산의 고국에서의 행적을 살펴보며 그 의미들을 양산도(兩山道)의 원리 안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Ⅲ. 강증산과의 양산도에 따른 구세제민(救世濟民)인 조정산의 무극도(1925) 창도
이장에서는 감오득도 이후 강증산이 조정산에게 준 첫 번째 계시를 중심으로 여타 계시를 함께 살피며 구세제민의 양상을 보기로 한다. 강증산의 천지공사에 토대하여 Ⅲ장 이후 이 글에서 보고자 하는 두 가지 면은 다음과 같은 점에 관계된 것이다.
첫째, 강증산의 고국으로 돌아가 태인(泰仁)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계시에 따라, 태인에서 행한 조정산의 행적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이전에 조정산이 봉천에서 태안(泰安)에 도착하여 계시를 또 받아 이루어진 행적들도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 1909년 강증산의 화천 이후 이루어진 1910년 한일합방은 강증산의 천지공사인 일본(日本) 해원공사와 연관된다. 포교 50년 공부에서 1917년 4월29)부터 1945년 8월 15일(양)까지의 약 28년간의 기간은 일제치하의 조정산의 포교공부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을 지배했다. 이에 강증산의 일본에 대한 공사는 대략 1945년에 마쳐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36년간의 기간은 조정산의 포교 50년 공부에서 70%에 해당하는 상당히 긴 기간이다. 이에 조정산 공부의 많은 부분이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는데 1941년에 무극도장을 일본의 강압으로 폐쇄당한 것은 인덕(仁德)도수에 따른 일본 관련 공사의 대표적 실례이다.
이장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다음 장에서는 해방 이후인 1945년 8월 15일부터 1958년까지의 조정산의 행적을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조정산이 감오득도한 후 태인으로 가기 전까지 조정산의 포교공부와 관련해서 1917년부터 1925년까지 약 9년간 다음과 같은 행적이 있게 된다.
먼저 조정산이 태인에서 중요한 종교적 활동을 하기 전의 행적에서 구세제민의 과정을 보고 이어서 태인에서의 조정산의 행적을 보기로 한다. 조정산이 태인에 이르기 전까지의 종교적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17년 4월에 고국으로 가던 조정산이 탄 배가 폭풍(暴風)이라는 연고(緣故)로 서산 태안(泰安)에 닿게 된다. 조정산은 자신이 폭풍 때문에 도착한 태안은 강증산이 가리킨 곳이 아님을 판단하고 주변의 섬 ‘안면도(安眠島)’로 다시 옮기게 된다. 그 섬은 지명으로 보아 크게 편안하다는 의미가 있는 태안에 속한 섬이고 그 이름이 안면(安眠)이다. 편안한 잠을 잔다는 뜻이다. 일면의 비유(譬喩)로 보아 다시 찾은 고국의 이곳에서 조정산은 그가 소원하던 세상을 크게 편안히 할 수 있는 구세제민의 시작을 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이가 동방에서 태양이 솟아 올라 아침을 열고 하루를 시작해서 저녁이 오면 편안히 안심(安心)과 안신(安身)으로 잠들어 쉴 수 있는 섬에서 진인(眞人)의 행적을 열어가게 되는 것이다. 먼저 조정산은 태안 창기리에서 이정률을 만나고 정당리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여 공부하였다.
한편 무오년(1918) 가을에 조정산은 득도 후 강증산의 계시를 두 번째로 받는다. 그것은 ‘김제 원평에 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정산은 태인에 가기 전에 앞서 구천상제인 강증산에게 치성을 올리고 원평을 거쳐 동곡(銅谷)약방에 가게 된다. 여기에서는 동곡약방의 의미가 중요하다. 동곡약방은 약방이라는 특성처럼 상징적으로 온 세상에 만연된 병폐와 병을 고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신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조선을 포함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고질적인 악습과 허례 및 허식 등을 치유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소병(小病) 및 대병(大病)들을 고쳐 유도(有道) 및 무병(無病)세상을 이룩하여 구세제민하겠다는 강증산의 의지가 표상화된 곳이다. 또 이곳에서는 ‘단주수명(丹朱受命)’ 및 약장(藥欌) 관련 공사도 이루어진 장소이다. 조정산이 원평을 거쳐 동곡약방에 가게 된 것은 종통계승자로서 구세제민과 긴밀한 동곡약방에서 이루어진 강증산의 천지공사의 맥을 맞춰 무병세상을 만들어 구세제민을 하겠다는 목적의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후 1918년 시월에 조정산은 모악산 대원사(大院寺)30)에 이르러 “개벽 후 후천 5만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 시구”라 하였으며 몇 달간 대원사에 머물렀다. 이러한 만주 봉천으로부터 태안에 도착한 후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은 강증산 성사와의 교감을 통한 강증산의 인세에서의 생애 속에 이루어진 천지공사의 성지(聖地)에 대한 조정산의 답찰(踏察)과 안찰(按察)이며 이는 신인인 강증산과의 계시를 통한 교감에서 이루어진 강증산의 성적(聖蹟)을 알아가는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1925년 태인에서 이루어진 조정산의 행적이 있기 이전에 감오득도나 계시는 아니지만, 강증산의 화천 후 조정산의 강증산과의 종통계승에 의한 천부적인 만남은 감오득도시의 만남과 다른 방식인 강증산이 생시에 적어 준 글을 통해 1919년에 다시 한번 이루어진다. 그것은 강증산이 생시(生時)에 친필로 기록한 ‘봉서(封書)’를 누이 동생에게 주고 이후 이글이 강증산의 누이동생을 통해 조정산에게 전달되고 봉서의 글을 통해 강증산의 가르침을 조정산이 접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신인(神人)으로 만나 직접 ‘주문(呪文)’을 주던 것과는 다르지만 생시에 강증산이 기록한 글을 조정산에게 준 것에서 문(文)을 통해 교감이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봉서는 이미 강증산이 생시에 누이동생에게 정월 보름에 을미생(乙未生)31)이 찾아오니 그에게 봉서를 전하라고 했는데, 조정산이 강증산으로부터 감오득도한 2년 뒤인 1919년 음력 정월 보름에 강증산의 누이동생을 찾아오고 강증산의 봉서를 전해 받게 된다. 이러한 여합부절의 면은 강증산이 화천하기 전부터 이미 천지공사시에 조정산을 천부적인 종통계승자로 정하였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 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 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도다.32)
봉서를 받은 후 조정산의 활동을 보면 강증산의 성적과 관련된 금산사(金山寺) 방문 후 백종일(百種日) 관련 가르침, 둔궤(遁櫃), 성골(聖骨) 등에 관한 것과 여러 도수를 본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강증산이 화천한 뒤 강증산과 조정산의 교감(交感) 및 인편(人便) 전수(傳受)에 의한 만남을 표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번호 | 조정산이 강증산으로부터 받은 것 | 만남의 방법 | 강증산이 전해준 것 | 장소 | 절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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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삼계(三界) 대순(大巡)의 진리 감오득도(感悟得道) | 신인(神人) 강증산의 현화(現化)에 의한 계시 | 주문 (기도주)33) | 만주 봉천 조정산의 공부실 | 7 | 계시34)에 의한 교감(交感) |
2 | 태인(泰仁)에 가서 나를 찾으라 | 계시 | 신인(神人) 강증산의 말 | 만주 봉천 조정산의 공부실 | 8 | |
3 | 김제(金堤) 원평(院坪)에 가라 | 안면도 정당리 느락골(우일재) | 10 | |||
4 | 봉서(封書)의 글 | 사람35)을 통한 생시의 강증산의 글 전달 | 봉서 | 정읍 마동 (김기부의 집) | 13 | 인편(人便) 전수(傳受) |
한편 조정산은 강증산으로부터 감오득도한 후 여러 해 동안 강증산의 계시에 따른 명(命)을 행한 뒤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게 된다.
도주께서 통사동(通士洞) 재실에서 어느 날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今不聞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 하시고 다시 추종하는 여러 사람들을 앞에 모으고 무극대운(无極大運)의 해원상생 대도(解冤相生大道)의 진리를 설법하시어 도(道)를 밝혀 주셨도다.36)
도주께서 이 상우를 데리고 부안 변산(扶安邊山) 굴바위에 이르러 이곳에서 공부하시면서 상제의 대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법하시니라. 이에 따르고자 하는 무리 二百이 넘었도다.37)
자신이 펼치는 도가 강증산의 해원상생(解冤相生)사상에 토대한 무극대운(无極大運)의 도임을 밝히게 된다. 이 무극의 대운을 맞춰 조정산은 무극도라는 종단을 만드는 행적을 해나가게 된다. 이러한 조정산의 설법은 구세제민의 본질과 대의(大義)를 전해가는 대사회적 활동이다. 조정산은 도주(道主)로서 자신의 도가 강증산 구천상제가 대순하여 이룬 해원상생의 대도(大道)임을 밝혀 종통계승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이상세계를 이루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조정산은 강증산이 제작하게 한 둔궤(遁櫃)를 찾아 공부하였으며38), 강증산이 천지신명을 심판한 대원사(大院寺)에 응기되어 있는 기운을 풀기도 하였다.39) 또 강증산 구천상제의 성골(聖骨)을 통사동 재실로 가져왔으며 여러 도수 공부를 하였다.
한편 무극(无極)의 대운이 열림과 함께 조정산은 1923년 기존 선천에서의 훌륭한 인물 및 종교의 탄생을 통해 이루어진 가르침의 전개를 밝혀 선천시대의 일부인 4617년 동안의 가르침(敎)의 전개를 시기별로 밝혀 요약하였다. 이는 태인에서의 조정산의 행적인 1925년 무극도 창도를 하기 전에 과거역사적 인물과 종교의 출현을 가르쳐준 것이고, 이 훌륭한 인물과 종교의 출현은 시운을 따라 인세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며 ‘포태(胞胎), 양생(養生), 욕대(浴帶)’라는 싸이클이고 각각 천지(天地)의 허무(虛無), 적멸(寂滅), 이조(以詔)를 받아 진행된 과정을 보인 것이다. 즉 조정산은 1923년 전교(傳敎)를 내려40) 무극대운의 출현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밝힌 것이다.
이제 태인 관련 계시를 보기로 한다. 교운 2장을 보면 태인 관련 기록은 1924년부터 기록으로 나타난다. 앞장에서 조정산을 1917년 2월 감오득도케 하고 주문을 주어 구세제민의 길을 제시한 일과 함께 다음으로 보인 강증산의 조정산에 대한 천명(天命)은 두 달 뒤인 1917년 4월 계시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는 두 번째로 구세제민의 방법을 조정산에게 알려준 것이 된다.
그 후에 도주께서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그 주문을 송독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으시니 이때 도주께서 이국땅 만주 봉천에 계셨도다.41)
강증산은 1917년 2월에 감오득도 후 만주(滿洲) 봉천(奉天) 지역에서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기도주를 송독하고 있던 조정산에게 이제 고국 땅 ‘태인(泰仁)’에 가서 나(강증산)를 찾으라고 계시(啓示)하였다. 이는 태인이 구세제민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 지역이므로 강증산이 조정산에게 봉명(奉命)하여 그곳에 가서 강증산을 찾는 종교적 활동을 수행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앞 Ⅱ장에서도 보았지만, 양산도에 따라 강증산과 조정산으로 이루어지는 도를 세우라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금산사 미륵불은 거대한 솥(鼎) 위에 봉안되어 있다. 이에 대해 강증산은 미륵불을 양산(兩山)의 도(道)라고 하였다. 양산(兩山)은 두 산이라는 뜻으로 이는 강증산(姜甑山)과 조정산(趙鼎山)의 명칭에 산(山)이 들어가 있는 관계를 말한다. 즉 증산과 정산의 두 산의 도이다. 이는 강증산의 강세와 천지대도의 가르침을 다시 조정산이 종통을 받아 펼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세제민을 위해 강증산은 천지공사를 하였고 조정산은 강증산을 이어서 구세제민하고자 50년 동안 공부(工夫)를 한 것이다. 증산에서 정산으로 종통이 전수(傳授)되며 구세제민이라는 목적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이에 강증산은 천부적 종통계승자인 조정산을 통해 구세제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입산공부를 하던 조정산에게 신인(神人)으로 나타났고, 이때 강증산이 조정산을 득도시킨 것은 강증산이 목표로 하는 구세제민을 조정산을 통해 이루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금산사 미륵불과 솥의 양산의 관계를 맞춘 도인 양산도의 원리를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구세제민을 이루기 위한 양산도의 원리는 태인(泰仁) 관련 강증산의 계시와도 상관된다. 그 양상은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이 솥위에 서 있는 것을 따라 솥 격인 조정산이 태인에서 미륵불 격인 강증산을 인세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하고 교리 내용을 밝혀 무극도(无極道, 1925)를 창도하게 된 것과 상응된다.42) 이를 통해 금산사 미륵불과 솥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인세에서 미륵불격인 강증산과 솥격인 조정산이 인간의 모습으로 탄강하여 사람의 이름으로서 양산도를 이루게 된 것을 말한다. 즉 양산도에 따라 금산사 미륵금불로서의 인세에서의 39년간의 강증산의 생애와 9년간의 천지공사가 있었고 이제 강증산의 화천 후에는 미륵불을 받치고 있는 솥에 해당하는 종통계승자로서 옥황상제의 위격으로 조정산의 위상을 인간 세상에서 펼쳐 이루어가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륵불과 솥이 연계되어 있듯이 강증산의 9년간 천지공사를 이은 조정산의 50년간의 포교공부 도수가 펼쳐져서 미륵불과 함께 솥에 해당되는 조정산의 인세에서의 종통계승자로서의 위업을 이루어가는 면모가 이제 도수에 따라 전개됨을 보여준 것이 된다.
이는 특히 1925년 태인 도창현43)에서의 무극도 창도로 가시화됨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무극도는 당시 일제강점하의 민중의 아픔을 포용하며 구천상제의 삼계 대순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진리로 우주와 세계, 신명과 인간을 통찰하여 모순과 비리, 재화와 참극이 난무하는 20세기 초반에 진멸의 세상을 뜯어 고쳐 인류의 이상향인 도가 통하는 진경(眞境)을 만들고자 새로운 금불문(今不聞) 고불문(古不聞)의 도를 이루고자 활동했었다.44) 증산과 정산의 양산도가 바로 조정산이 1925년 을축(乙丑)의 해에 강증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하여 이루어진 무극도인 것이다. 이에 태인(泰仁) 관련 계시는 조정산의 무극도 창도하에 이루어진 신앙대상 확정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는 구천상제를 신앙대상으로 정하고 조정산, 박우당으로 이어진 종통의 맥을 따라 수도인이 수행하여 도가적 도통을 이루는 것이 무극도 창도의 하나의 의미가 된다. 도가에서 존신적 위치에 있는 구천상제를 인간들에게 도를 열어준 신앙대상으로 하여 수행을 통해 지상천국의 지상신선이 될 수 있다는 무극도의 교리는 신선 선녀들이 사는 선경에서의 인간의 도가적 완성을 내포하고 있다.45) 또한 이는 일만이천의 도통군자가 세상에 출현하여 구세제민을 실천해 간다는 것이다.
이후에 조정산이 무극도를 창시(創始)한 태인도장은 1941년 일제 치하에서 종교단체해산령으로 일본 총독부에 기증되었다. 이로써 강증산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고 종지, 신조, 목적 등을 역사 속에 밝혔던 무극도는 해산되고 조정산은 고향 회룡재를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하게 된다.
도주께서 기유년부터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다하시니 신도의 무리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니라. 그러나 일본이 이차대전을 일으키고 종교단체 해산령을 내리니 도주께서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으시고 인덕 도수와 잠복 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고 하셨도다. 이 선포 후에 도장은 일본 총독부에 기증되니 도주께서는 고향인 회문리로 돌아가셨도다.46)
도주께서는 고향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도수에 의한 공부를 계속하셨고 종도 몇 사람이 왜경의 눈을 피하면서 도주를 도우니라. 도주께서는 회문리에 마련된 정사 회룡재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두루 다니면서 수행하셨다.47)
현재 대순진리회의 기본사업인 포덕, 교화, 수도사업에서 포덕이 있는데, 위에서 포덕(布德)이 제민의 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또 1935년에 2차 대전이 일어나고 1941년에 도장이 일본 총독부에 기증된 것은 강증산이 천지공사로 처결한 일본 관련 공사와 상관된다. 강증산이 제새시에 천지공사로 처결한 이 일본의 해원이 조정산 대에 와서 풀어져 조정산의 도수에 따른 공부로 일본의 해원이 이루어져 감을 볼 수 있다. 강증산은 일본 관련 해원공사를 처결하며 일본에게 인(仁)은 줄 수 없다고 하였다.48) 일본이 종교단체 해산령을 내려 강증산을 봉안했던 무극도장(1925)까지 폐쇄되고 종교시설물을 일제에 주어야 했던 것은 대순진리회의 신앙사(信仰史)에서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25년부터 17년 동안 강증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 이루어지던 신앙의 고난기로 1941년에 일제는 구천상제를 믿는 신앙까지도 다 빼앗아간 것이 된다.49) 이는 ‘인덕(仁德)’도수와 ‘잠복(潛伏)’도수로 조정산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여기에서 조정산이 종교적 신앙활동을 하던 성소(聖所)인 무극도장이 일제에 의해 해산된 것은 강증산 천지공사의 일본해원에 따른 것이다. 이후 일본 관련 공사의 도수가 끝나고 있게 될 조선독립을 기다리며 인덕도수에 의해 큰 덕을 베푼 것이 된다. 이는 생시에 강증산이 말한 일본의 삼한(三恨)이 풀리게 하는 일50)과 상관성을 갖는다.
이와 같은 종통 계승자로서 조정산의 강증산과의 교감하에 이루어진 50년간의 종교적 활동은 모두 전(全)지구적 지상천국이라는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 초석과 토대를 이루는 헌신적 노력이며 구세(救世)의 숭고한 행적이 된다. 이러한 조정산의 50년간의 공부가 있었기에 세계는 강증산 구천상제가 이루고자 하는 구세제민된 후천지상선경(後天地上仙境)이라는 인류사회의 이상세계에 더욱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신앙체계를 세운 조정산의 태인에서의 행적은 여러 도수에 따른 공부를 진행해가며 구세제민의 초석을 세우기 위한 일대 전기가 되기에 강증산이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고 했음을 엿볼 수 있다. 무극도 창도에 이어 조정산은 도주로서 도를 깨닫는 각도(覺道)와 관련된 문인 각도문(覺道文)을 말하고 다시 1928년 포유문(布喩文)을 전하였으며, 육정신장을 응기시키는 도술적인 행적을 행하기도 하였다.
Ⅳ. 해방51) 후 조정산의 구세52)의 종교적 활동과 제민(濟民)사업의 실행
강증산의 천지공사에 의한 일본 관련 공사는 조정산의 50년 포교공부기인 1945년 조선의 해방과 함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고국의 해방에 이어 1948년 부산에 도(道) 본부를 설치하고 조정산은 종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장에서는 조선의 해방 후 국내외 상황이 달라진 정국하에 조정산의 행적에서 구세제민의 양상과 전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마하사에서의 불상이 고개를 숙인 공부, 혼란한 세계의 정국(靖國)을 위한 황극신(皇極神) 공사지인 만동묘(萬東廟) 방문, 해인(海印)과 뇌성보화천존의 의미 훈시, 수도인들의 시학 및 시법 공부 방법완성, 박우당으로의 종통의 전수(傳授) 등이다.
먼저 조정산은 부산의 마하사(摩訶寺)라는 절에서 수행하였는데 이는 법당의 불상(佛像)이 고개를 숙인 이적(異蹟)이 일어난 공부로 조정산이 생시에 강증산이 짜놓은 도수를 풀어나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주께서 기축년 겨울에 동래 마하사(摩訶寺)의 방 한간에서 정화수 스물네 그릇을 받들고 四十九일을 한 도수로 정하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이 광석(李光石)이 대웅전에서 도주를 위해 발원 염불을 올리니라. 四十九일이 거의 될 무렵에 도주께서 승려와 시종자에게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고 물으시므로 그들이 달려가 보니 불상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도다. 도주께서 四十九일을 다 채우신 새벽에 공부실 위에 학이 울며 날아가고, 시종자에게 그동안 모아 놓은 글씨 종이를 태우고 그 재를 시냇물에 띄우라고 이르시므로 시종자가 그대로 하니 시냇물에 무지개가 서는도다.53)
도주께서 마하사에서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시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느니라. 도주께서 그 자리에서 少年才氣拔天摩 手把龍泉幾歲磨 世界有而此山出 紀運金天藏物華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의 상제의 글귀를 외우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 나가노라」고 말씀하셨도다.54)
위의 한시(漢詩)는 강증산이 생시에 말한 두 편의 한시를 재구성해서 조정산이 읊은 것으로 조정산의 재주와 기운은 뛰어나며, 이제 때에 맞아 도주(道主)로서 강증산의 천지공사를 이어 포교공부로 구세제민을 실현해나감을 비유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조정산의 공부는 강증산의 종통을 받고 조정산이 공부를 통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밝힌 것이다. 이 공부에서 불상이 고개를 숙였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구천에 강증산에게 구원을 하소연했던 불교적 불 보살들이 조정산의 49일 동안의 공부에 응답하였다는 상징적 의미이며, 조정산이 종통 계승자로서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나가노라’고 한 것처럼 강증산이 재세시에 짜놓은 도수를 풀어나가는 연원에 따른 종통계승자의 위치에 있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조정산은 명나라의 신종(神宗, 毅宗 포함)을 기리기 위해 충북 괴산 청천(淸川) 화양동(華陽洞)에 소재한 만동묘(萬東廟, 1704)를 찾게 된다. 이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유언에 따라 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만든 것으로 강증산이 혼란한 세상을 바르게 하려고 청나라의 광서제(光緖帝, 1871~1908)에게 응해 있는 황극신(皇極神)을 조선에 옮겨온 장소이다.55) 조정산의 이곳에의 방문은 조정산이 황극신 공사와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적56)이다. 혼란한 세상을 바르게 한다는 황극신의 위상을 생각할 때 강증산의 천지공사를 도주(道主)의 위치에서 조정산이 일본의 해원이 끝나 그들이 조선 땅에서 물러간 뒤 도수가 바뀌어서 이제는 조정산이 그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됨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열리는 무극대운에 따라 무극도에 이어 태극도를 창설한 도주(道主)로서 조정산은 강증산의 신격위의 일부인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의 의미를 상세하게 풀며, 바다의 이치57)와 연관된 ‘해인(海印)’과 관련 수도인의 도통(道通)에 대해서 알려주기도 하였다.
도주께서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날에 여러 종도들을 모아 놓고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우주 삼라 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해도 진인(海島眞人)이란 말이 있느니라. 바닷물을 보라. 전부 전기이니라. 물은 흘러 내려가나 오르는 성품을 갖고 있느니라. 삼라 만상의 근원이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하느니라. 하늘은 삼십 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천상의 전기가 바닷물에 있었으니 바닷물의 전기로써 만물을 포장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58)
또 조정산은 동학사(東鶴寺)에 가서 신명들을 해원해주는 공부를 하였는데 이렇게 조정산이 신명계와 관련된 해원을 처결했다는 것은 포교공부를 하며 도수를 풀어 나가는 가운데 조정산의 소정의 권능이 발현되는 면모를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종통계승자로서 전대 강증산이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서 49일간 행한 신명 심판을 이어, 종통계승자로서 신명 해원으로 신명계의 도수를 풀어나가는 조정산의 위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서 조정산은 지리산 쌍계사(雙溪寺)에서 7일간 공부를 하고 ‘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59)라는 한시(漢詩)를 들려주었는데 쌍계사에서의 공부에 지리산(智異山)이 그 공부에 응감했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도주로서 수도인들의 공부 법방(法方)에 대해 말하여 후천의 조판하에 수도인들이 도통에 이르는 길을 설법해 제시해주었다.
이처럼 조정산의 행적은 해방 후에 강증산의 천지공사의 도수를 풀어나간 위치였으며 이는 강증산의 화천 이후 지상에서의 ‘포교오십년공부종필’이라는 천지공사에 따른 행적이었다. 이는 모두 ‘엄친(嚴親)의 파란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공부에 진력하셨다60)’라는 내용에 나타나듯이 구세제민이라는 사자성어로 요약된다.
다음으로 조정산의 화천(化天)과 함께 종통은 다시 박우당(朴牛堂, 陰1917. 11. 30.~1995. 12. 4) 도전(都典)에게 전수(傳授)되어 강증산과 조정산의 구세제민의 대의(大義)가 계속적으로 실현되어 갔다. 조정산의 박우당에의 종통계승의 주요 장면들은 다음과 같다.
도주께서 다음 해 二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 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도다.61)
박 한경은 도전이 된 후에 지방의 일로 며칠 다녀오기를 도주께 청하였으되 허락을 얻지 못하였도다.62)
도주께서 정유년 十一월 二十一일 자시부터 무술년 三월 三일까지 도장에서 불면 불휴하고 백일 도수를 마치시니라. 五일에 심히 괴로워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늦었도다」고 이르시니라. 도주께서 이튿날 미시에 간부 전원을 문밖에 시립케 한 후 도전 박 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고 「오십 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부르시더니 화천하시니라. 무술년 三월 六일 미시요 양력으로 一九五八년 四월 二十四일이오. 수는 六十四세로다.63)
이후 종통을 계승한 박우당은 1969년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를 창설하여 3대 기본사업을 통해 양산도(兩山道)에 맞춰 강증산 천지공사와 조정산의 포교 50년공부의 근간으로서의 대체(大體)를 따르는 대업을 실천해나갔다. 또 삼대 중요사업을 통해서는 국민의 현장 실생활에 다가가 도움을 베풀어나갔다. 이는 앞 대의 강증산과 조정산의 구세와 제민의 대사회적 종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실생활 속에 가시화해 나간 행적이 된다. 한편 조정산의 종통을 전수받은 박우당은 조정산이 수도인들의 공부로 제정(制定)한 시학(侍學), 시법(侍法)공부65)를 신미년(1991)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여주본부도장에서 실행하고 있다. 이는 강증산이 자신의 천지대도는 강원도 고성(高城) 등에 걸쳐있는 금강산(金剛山)66) 일만 이천봉을 응기하여 일만 이천의 도통군자(道通君子)로 창성한다67)는 내용을 따라 구세제민을 행할 전인적(全人的) 존재인 도통군자의 실현을 이루려는 중요한 행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상의 천지대도의 진리와 무극도(无極道, 1925), 태극도(太極道, 1948),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1969)를 통한 교화, 포덕, 수도사업으로 이어지는 구세제민의 면과 또 다른 한 측면으로서의 조정산의 실천적 구세제민의 활동은 사회적으로 구세제민의 의미를 전하고 구세제민의 천지공사를 행한 강증산의 계시를 맞춰 가며, 1925년 조정산 자신이 직접 대사회적으로 민(民)의 생활과 관련해서 종교적 사회사업을 실천해 나간 일이 된다.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 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三百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 그러나 두 섬의 네 곳에서 뜻을 이룩하고자 하셨으되 심한 풍랑으로 두 곳은 뜻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 후 일본(日本) 마상 회사(馬上會社)가 성과를 거두게 되었도다. 안면도의 二十만 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鹽田)은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도다. 도주께서 제민 사업을 돕는 한편 안면도 창기리에 있는 재실 홍일우(洪一宇)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이때에 서산읍의 사람 이 동만(李東萬)이 도주를 가까이 모셨도다.68)
위에서 조정산이 현장에서 토지의 해원(解冤) 및 민(民)이 잘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구제하고자 개척의 제민(濟民)사업을 실행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안면도와 원산도의 두 섬에 간사지를 개척하는 것으로 진업단과 2만원 및 곡물도 투입되었다. 농지(農地)와 염전(鹽田)을 통해 민의 삶이 구제되었음을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는 강증산과 양산(兩山)의 도(道)로서 조정산이 강증산의 구세제민의 대의를 맞춰 행한 각종의 종교적 활동의 대지(大志)를 토대로 이루어진 사회사업 활동이었다. 이 사회사업 활동은 강증산의 제민(濟民) 및 화민(化民)69)의 정신과 여합부절이 되는 행적이 된다.
Ⅴ. 맺음말
양산도(兩山道)의 원리를 기저로 본문에서 논의한 조정산의 구세제민을 위한 대사회적 종교활동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구세제민을 위해 강증산 구천상제를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하고 종단을 창설하며 강증산이 짜놓은 도수를 풀어 천지대도의 대체(大體)를 사회적 활동을 통해 인세에 정립한 데 있다. 이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는 말과 같이 응원(應元)이며 시원(始原)인 강증산의 구세제민의 강세 목적을 따라 50년 공부를 통한 대사회적 종교활동이 조정산의 포교공부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강증산의 일본해원 공사가 1945년까지 조정산의 포교공부에 작용하고 있다.
둘째, 1917년 4월에 강증산은 득도한 조정산에게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고 하였는데, 이는 구세제민과 관련해서 특별한 어떤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계시이며 이는 강증산의 신앙대상화를 의미한다. 이후 조정산은 태인에 가서 1925년에 종단 무극도(无極道)를 설립한다. 무극도는 신앙단체이다. 신앙단체는 신앙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조정산의 행적을 보면 태인에 강증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할 도장을 지은 것으로 대표된다. 도장의 건립과 함께 조정산의 구세제민 활동은 사회적으로 구세제민의 천지공사를 행한 강증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정해 종교적 체계에 따른 단체를 구성하여, 대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행하게 된다. 이는 모두 구세제민을 위한 신앙체계의 정립과 관계되며, 이에 무극도 창도는 조정산이 구세제민하기 위한 중요한 요건이 되고 이것은 양산도의 원리로 보면 상징적으로 금산사의 미륵불격에 해당되는 강증산이 종통계승자로 정한 인물을 미리 1917년에 득도케 하여 금산사 미륵불밑의 솥(鼎)격에 해당되는 조정산이 다시 미륵불격에 해당되는 강증산이 어떤 신격위인가를 인세에서 종단이라는 형태를 통해 대사회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정립한 행적이 된다. 이에 금산사 미륵불의 양산도의 원리를 따라 강증산과 조정산의 양산도가 인간 세상에서 무극도를 통해 가시화된 것이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계시의 암시적 의미가 현실세계에 표상화된 것이 된다. 즉 양산도의 원리가 현 인간세상에 본격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일이 현재 금산사 미륵불 아래 있는 솥 격에 해당하는 조정산의 1917년 득도 후 이어진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고 한 계시를 통해 무극도가 창도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셋째, 조정산 자신이 직접 사회적 현장에 다가가 숭고한 강증산의 제민(濟民) 및 화민(化民)의 정신을 실천한 면에 있다. 이는 조정산이 사회에 근본이 되는 천지대도를 세워나가며 구세제민의 요체를 세운 것과 함께, 창생의 삶의 현실을 목도(目睹)하고 대사회적 활동을 실현함이다. 이러한 1909년부터 시작된 조정산의 숭고한 종교적 활동에 의한 인류사회의 구원을 위한 의지는 강증산의 전(全) 천하적 구세제민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강증산의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시원(始原)과 본(本)으로 한 천지대덕(天地大德)의 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