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문제의식의 실타래
인간은 자연의 무한한 벽을 절실하게 체감하고 삶의 현실을 참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한계를 불가피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삶과 죽음의 원초적 문제는 명운(命運)의 굴레와 같은 인간의식 속에 자리잡았다. 명운의 불가항력성과 예측불가능성 속에 인간의식의 세계는 종교, 과학 및 철학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교를 만들었고 자연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과학을 만들었다. 종교와 과학의 바탕에는 인간의 신념이 깔려있다. 신념은 인간의 사고를 거쳐 철학의 사유를 낳았다. 철학은 종교의 의식이나 과학의 지식에서 잉태되어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성장하였다. 종교, 과학, 철학 및 이들의 관계는 인간의식의 세계를 이해하는 필수불가결한 영역이 되었다.
조선의 근대사회에 접근하는 과정도 인간의식의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당시에 시대적 과제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련 속에 전통의 관념과 서구의 문물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근대의식의 마차를 떠받들어 굴러가는 양립가능성의 두 바퀴는 봉건주의에 대한 도전과 제국주의에 대한 응전이었다. 도전과 응전의 이념적 통로는 서구에서 유입된 사회진화론이었다. 사회는 생물체가 진화하는 방식처럼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의 과정을 거쳐 문명사회가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부국강병과 민족생존의 이념적 발전사관으로 진화하였다. 적자생존은 부국강병의 원천이 되었으며 자연도태는 민족생존의 방편이 되었다.1)
본고에서는 조선의 근대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신종교의 성격과 그 세계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신종교의 사상 중에 특히 대순사상에 주목하고 그 중심적 논제로서 개벽의 관념과 그 선험주의적(先驗主義的)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대순사상은 동학, 천도교 등의 신종교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개벽의 역학적(易學的) 관념과 연관한 세계관을 지닌다. 개벽의 관념은 당시에 사회진화론의 발전사관과 맞물려 시대나 사회의 획기적인 전환을 상징하며 선천과 후천의 역학적 용어와 연관하여 활용되어 왔다.
이른바 선험주의의 노선은 시계(視界), 세계(世界) 및 경계(境界)의 삼중의 영역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시계는 주체가 세상을 내다보는 시야의 범위와 거리의 대상이다. 세계는 주체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구획짓는 시공간적 대상이다. 경계는 세상의 시공간적 계기에 따라 형성되는 주체와 객체의 통합적 대상이다. 이들의 입체적 차원에서 삼라만상의 스펙트럼을 투사하는 세계의 실재가 접근될 수 있다. 세계의 실재는 인식론적 시계, 존재론적 세계 및 가치론적 경계가 입체적으로 구성해내는 인간 삶의 체험적 과정이다. 대순사상에서 이러한 과정은 역학적 사유의 맥락에서 천하대순(天下大巡)의 시계를 확보하고 천지공사(天地公事)의 세계를 설정하며 후천개벽(後天開闢)의 경계에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들의 연결고리는 후천의 개벽과 같은 시공간적 제약 속에 우주의 무궁무한적(無窮無限的) 시공간성을 체득하는 선험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노선 속에서 현실적 삶은 자체의 유한한 생명력을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으로 확충될 수 있다.
기존의 연구성과2)와 관련하여 신종교 전반에 걸쳐 개벽의 논제에 관한 연구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순사상의 개벽에 관해 역학적 사유를 천착한 본격적 연구는 없는 것 같다. 제목이나 주제나 논제에서 본 논문은 이들의 연구와 이미 차별화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연구는 대체로 개벽의 용어를 구사하여 대순사상의 성격이나 강령을 밝히는 데에 치중한다. 본고에서는 대순사상에 관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것으로서, 특히 천지개벽의 역학적 논법 속에 후천개벽의 선험주의적 노선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Ⅱ. 천지개벽의 역학적(易學的) 사유와 선험주의적 세계관
동아시아의 지역에서 자연은 인식의 대상이자 의식의 원천이다. 자연은 물질, 생명, 흐름 등이 함께 어우러지는 생명의 유기적 연결망이다. 이러한 연결망에는 열렸다가 닫히는[開闔] 호흡의 생명력이 자생적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생명력의 흐름에 대한 인식의 시계 속에 삼라만상의 스펙트럼이 펼쳐진 세상의 다면체적 경계이다. 이러한 세계의 실재는 자연계에서 일정한 통일적 질서의 계통으로 인식한 결과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로는 우주, 자연 및 천지가 있다. 우주3)는 인간의 의식적 차원에서 시공간적 관념이다. 그것은 시간의 무궁성(無窮性)과 공간의 무한성(無限性)으로 특징짓는다. 자연은 삼라만상의 생명연결망이다. 천지는 삼라만상 존재의 바탕이다. 자연과 천지는 인간의 현실적 삶에서 시간의 제한성과 공간의 한계성을 지닌다. 이러한 시공간적 제약 때문에 이들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누적에 따른 경험적 세계의 또 다른 명칭이 된다. 그러므로 천지의 틀은 자연의 생명력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 현상으로서, 자연의 생태계에서 생명이 호흡하는 개벽의 과정으로 특징화된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프리즘 속에 선재해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의 실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지는 어떻게 접근될 수 있는가? 그것은 『주역』의 세계관에서 개벽의 열린 세계와 관련된다. 천지의 틀은 개벽의 용어로 특징화된다. 개벽은 혼돈(渾沌)의 상태에서 일정한 질서로 확장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혼돈은 삼라만상이 아직 형형색색으로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이것이 각양각색으로 분류될 수 없는 혼란한 상태는 아니다. 개벽은 이러한 혼돈의 상태로부터 각종의 현상으로 질서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서괘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과 땅이 있고 그런 다음에 만물이 생성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것은 오직 만물일 뿐이다.4)
여기에서 삼라만상의 존재와 그 활동은 천지의 틀 속에 진행된다. 모든 생명체는 천지가 열리는 순간에 존재하게 된다. 생명의 생성은 시간성의 흐름으로 표현되는 반면에, 생명의 존재는 공간성의 전개로 표현된다. 세계는 인간을 포함한 만사삼라만상이 다양하게 형성되고 변화하는 자연의 현상계이다. 세계의 실재는 개벽의 연속적 계기의 경험 속에 존재한다.
천지의 개벽은 생명의 질서의식에 대한 직관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천지의 틀 속에 생명력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주기적 질서를 인식하였다. 생명의 축이 진행되는 질서의 구동력은 인간에게 삶과 죽음의 굴레로 받아들여진다. 삶과 죽음의 굴레는 흐르는 시간성으로 표현되며 그 굴레가 움직이는 일련의 일정한 궤적은 점유하는 공간성으로 표현된다. 천지의 틀 속에 개벽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의 실재(reality)에서 우주의 본원, 삼라만상의 시작과 끝, 공동체의 집단의식, 사회의 진화, 인간의 역사, 역사의 인식 등이 논의될 수 있다.
천지의 개벽은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는 『주역』에서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의 상관성에서 설명된다. 건괘와 곤괘의 관계는 자연계에서 삼라만상의 유기적 연결망에 접근하는 통로이자 천지의 틀에 대한 정보의 상징적 출입구이다. 「계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러러 하늘의 문양을 쳐다보고, 구부려 땅의 이치를 살피므로 어둡고 밝음의 연고를 안다. 처음을 본원으로 하고 끝으로 되돌아가므로 삶과 죽음의 설을 안다.5)
여기에는 천문과 지리에 대한 인간의 통찰력의 결과들이 담겨있다. 인간은 천지의 구조 속에 자연계가 진행되는 과정과 그 위계적 질서를 고찰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삶과 죽음의 굴레를 통해 세계의 실재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자연계의 생명은 순환하면서 영원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여 태어났다가 소멸한다. 세계의 실재(reality)에서는 시간이 공간을 열고 공간은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굴레 속에 인간은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에 유한한 생명력을 투입하여 생명정신의 고답적 차원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세계에서 그 체험의 과정에서 인간은 생명의 이치와 그 질서의 법칙을 파악하는 모종의 기미(幾微)를 터득한다. 인간은 현재의 현실에서 과거의 사례를 거울로 삼아 미래의 기대를 바라보는 주체적 활동을 할 수 있다.
역학적 사유에서 보자면,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모든 존재의 본원과 이로부터 파생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표현된다.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있는 원래 혼돈(渾沌)의 상태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난 것이 세계의 실재이다. 이 세계는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현상의 세계이다. 이는 무질서의 상태에서 질서의 상태로 나아가는 일종의 개벽이라는 질서화의 과정과 맞물려있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서 삼라만상은 외부로부터 창출된 산물이 아니라 천지의 틀 속에서 진행되는 신진대사와 세대교체를 특징으로 하는 일련의 유기적 과정이다.6) 이러한 의미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속가능한 실재의 세계는 천지창조(天地創造)의 과정이 아니라 천지개벽(天地開闢)의 과정이다. 천지의 개벽은 변화나 개혁의 기점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선사에서 역사로, 신화에서 계몽으로, 혼돈에서 문명으로, 선천에서 후천으로, 전통에서 개혁으로 나아가는 특정의 계기가 담겨있다. 그러므로 개벽에 대한 인식은 삼라만상의 스펙트럼이 펼쳐진 세상의 다면체적 경계, 즉 세계의 실재를 조망하는 역학적 관점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세계의 변화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는 무형의 영역에서 유형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과정과 관련된다. 이러한 과정은 전통적으로 우주의 원기(元氣)가 본연의 혼돈적 상태에서 분화되는 과정과 관련된다. 한대(漢代)에 도참(圖讖)계열의 문헌으로 평가받는 『역위』에서 이러한 과정은 사태설(四太說)로 설명된다. 우주의 본원 혹은 세계의 근원은 천지가 개벽되기 이전의 상태를 지니는데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의 단계로 설명될 수 있다.7) 태역에서 태소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은 끊임없이 낳고 낳는, 생명력이 발휘되는 원기의 흐름으로서, 무궁한 시간성과 무한한 공간성을 지닌 우주의 생명력이 작용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주의 원초적 상태, 즉 삼라만상의 현상 이전의 원기는 혼륜(渾淪)의 상태로 표현된다. 「건착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氣, 形狀, 바탕이 갖추어져 있지만 아직 떨어져있지 않았으므로 渾淪이라고 말한다. 혼륜이란 삼라만상이 서로 섞여 구성되지만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말한다.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따라가도 얻지 못하므로 易이라고 말한다. 易에는 형체와 울타리가 없다고 말한다.8)
이러한 상태의 단계는 원초적 기운, 잠재적 형상 및 안정적 바탕을 갖춘 통일적 상태에 있으나 아직 천지의 현상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이다. 여기에서 혼륜의 상태는 태역, 태초, 태시, 태소의 생성과정 속에 있다. 이들의 과정은 인간 경험 이전의 비현상의 원초적 성격을 지닌다. 여기에서 생명의 경험적 존재는 태역(太易)의 질서의식, 즉 원기(元氣)의 자생적 생명력에 따른 우주의 질서에 관한 선험주의의 역학적 사유에서 고려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원기(元氣)의 본원과 그 기화(氣化)의 과정은 천지가 개벽하는 과정이다. 우주의 부분으로서 천지는 시간의 한계성과 공간의 제한성을 지닌다. 천지의 개벽은 자연의 현상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공간의 전개를 특징으로 한다. 천지의 개벽은 삶과 죽음의 굴레 속에 삼라만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공간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자연계의 생명현상들에서 생명력의 율동이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삼라만상의 입체적 과정이다. 인간의 삶에서 세계의 실재는 천지의 틀에서 인식된다. 세계의 실재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천지의 개벽은 역학적 사유의 맥락, 즉 선험주의(先驗主義, pre-experientialism)의 노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선험주의라는 말은 서양의 학문이나 철학의 용어와 다르다. 그것은 시간상 혹은 순서상 앞선 경험이 존재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의식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이는 세계의 실재에서 경험상에서 체득하는 직관적 체험성을 지닌다. 여기에서 ‘선험적(pre-experiential)’이라는 표현은 비경험적인 의미로서의 초험적 혹은 초월적이라는 말과 다르며, 태생적 의미로서의 선천적이라는 말과도 다르다. 그것은 특정의 일이나 상황을 처리하기 전에 미리 체험하는 것이다.9) 본고에서 말하는 선험주의의 관념은 서양철학의 선험주의(transcendentalism)의 관념과 전혀 다르다.10) 서양의 선험주의는 현실적 경험을 넘어서는 초험성(超驗性)을 가리킨다. 이는 God의 관념을 전제로 하는 천지의 창조를 내용으로 한다. 반면에 본고에서 말하는 선험주의는 앞선 경험성의 현실적 세계의 실재에 바탕을 둔 천지의 개벽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므로 선험주의는 천지의 시공간적 제약 속에 앞선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것에 대한 확신이나 믿음을 가리킨다.
선험주의는 시공간적 제약의 세계에서 시공간적 무궁무한의 우주를 직관적으로 체험하는 성격을 지닌다. 여기에는 직관적 체험에 의한 인식의 대상, 즉 우주, 천지, 자연 등으로 구체화되며 세계의 실재는 이들의 관계 속에 이해된다. 특히 천지의 개벽은 삶의 과정을 통해 직관적으로 터득하는 경험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경험적 과정이 삼라만상의 창조적 과정이다. 그것은 천지가 창조되는 과정이 아니다. 천지의 창조는 세계의 실재를 주재하는 비경험성의 인식론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발전사관의 진화론적 흐름 속에 천지의 시공간적 제약 속에 앞선 경험의 누적을 통한 선험주의적 차원을 지닌다.
선험주의는 시간상 혹은 순서상 앞선 경험이 존재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의식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것은 세계의 실재에 대한 직관적 체험성을 특징으로 한다. 생명은 존재의 살아있는 존재의 표상이다. 생명은 전통적으로 생기(生氣), 정기(精氣) 등과 같은 기(氣)의 맥락에서 접근된다. 그렇다면 생명의 선험주의적 차원에서 대순의 원리는 자연계라는 유한한 세계의 실재 속에 인간의 존속을 어떻게 고양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역학적 사유의 선험주의의 차원에서 세계는 끊임없이 낳고 낳는 원기(元氣)의 생명력과 그 흐름 속에 있다. 그것은 천지의 틀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완결되지 않는 지속가능한 과정이다.
Ⅲ. 천하대순(天下大巡)과 존재론적 시계
19세기 말기에 조선은 근대사회의 길목에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국권을 수호하고 민중을 보호해야 하는 절박한 시대적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자각의식 속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사회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민생의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사회적 계급을 기반으로 하여 개인적 고충이나 사회적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운동이 동학운동(1894년)이다. 이 운동을 계기로 하여 이른바 신종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11) 그것은 민족, 민권 및 민생이라는 삼중의 노선에서 역사적 보편성과 시대적 포용성을 특징으로 한다.
동아시아의 지역은 서구열강의 세력이 침투해오는 절박한 상황에서 기존의 전통적 세계관이 시대적 요청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해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한 이론이 사회진화론이다. 근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사회진화론을 서구와 다른 시각에서 수용하였다. 즉 사회진화론을 약소민족이 서구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통로로 생각하였다. 즉 사회진화론을 통해 역사의식의 중요성이나 진보적 성향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사회진화론은 서구열강이 동아시아의 국가들을 침범하기 위한 이론적 논거가 되었지만 역으로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발전사관의 차원에서 부국강병과 민족생존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에서 적자생존의 법칙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의 원리로 삼았던 반면에 자연도태의 방식을 배격하여 민족생존의 수단으로 삼았다.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배척이라는 양면성에서 봉건주의가 제국주의로, 미개사회가 문명사회로 진화하기 위한 도전이자 응전의 양상을 시사적으로 엿볼 수 있다.
신종교의 세계관은 현세주의적, 구세주의적, 경세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진정한 인간상은 근대적 의미의 진화론적 맥락에서 자유와 평등의 이상적 모습을 지향하였다. 신종교는 민족종교 혹은 민중종교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조선사회가 근대의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여 고취시킨 민족의식의 산물이다. 당시에 조선은 중국처럼 사회진화론의 발전사관 속에 전통의 중건(重建)과 근대의 전환(轉換)과 같은 양단의 칼날에 직면해있었다. 전통의 중건은 반제국주의에 따른 민족의 계몽을 고양하는 역사적 사명감에 달려있다면 근대의 전환은 반봉건주의에 따른 민생의 계도와 민중의 교화를 도모하는 시대적 절박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근대화의 과정에서 민족주의의 동귀(同歸)와 국가주의의 수도(殊途)를 통합하는 대동사회를 지향하였다.12)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근대사회는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하여 신종교를 통한 민중의 사회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신종교의 세계관에서 대순사상은 조선사회의 근대의식에 접근하는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천하대순(天下大巡)의 시계 속에 개벽의 논법을 활용한다. 개벽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천지의 개벽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인류의 멸망과 같은 말세의 종말과 대비되는 용어이다. 여기에는 세상을 계몽하는 취지가 반영되어 있다. 우선, 강증산은 조선사회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제각기 소원에 따라 부족함이 없이 받들어 줄 것이므로 도인들은 천하사에만 아무 거리낌 없이 종사하게 되리라.13)
천하대순의 차원에서 보면, 조선사회는 신명이 발휘되고 소원이 잘 이루어지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는 조선사회를 미개의 사회에서 문명의 사회로 개화시킬 최적의 장소로 지정한다. 그러므로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 .14)
이러한 근대화의 과정은 부국강병과 민족생존의 시대적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시대적 사명감을 전면에 내세워야했다. 당시에 민중의 사회개혁운동은 이러한 노선에서 진행된다. 신종교가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서 개혁의 실천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출세주의(出世主義)의 종교적 차원을 넘어 입세주의(入世主義)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근대적 신종교의 개혁성은 시대적 압박감과 역사적 사명감에 따른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다. 그는 진화론적 문명관이 조선사회에 끼친 악영향을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지적한다.
…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 .15)
여기에는 조선사회가 근대화되는 과정에 직면했던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로 대변되는, 전통의 관념과 서구의 문물 사이에 대립과 충돌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있다. 이는 역사적 인식이나 사회적 의식의 차원에서 조선과 서구의 이분법적 관계로 환원된다. 이러한 이분법적 의식 속에 강증산이 조선사회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신종교가 근대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이유이자 근거이다.16)
이러한 배경 하에 대순의 진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특히 대순의 성격은 대순사상의 강령을 이해하는 전제가 된다. 대순의 세계는 인간이 천지의 개벽과 그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우선, 대순은 천지의 틀 속에 삼라만상의 조화(造化)를 두루 포용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는 생명의 원융관통적(圓融貫通的) 성격, 즉 완전성, 통일성, 원만성, 포용성 등이 반영되어 있다.17) 이러한 원융관통의 관념은 천지의 개벽과 관련하여 건괘와 곤괘의 상관성으로 표상되는 생명공동체의 의식적 차원을 지닌다. 삼라만상의 조화는 건괘와 곤괘의 통합적 차원, 즉 건곤의 광대한 생명력으로 표상된다. 「계사전」에서는 다음과 말한다.
무릇 건은 그 고요함에서 전일하고 그 움직임에서 곧으므로 크게 낳는다. 무릇 곤은 그 고요함에서 닫히는 것이고 그 움직임에서 열리므로 넓게 낳는다.18)
건(乾)은 정(靜)의 둥글한 속성과 동(動)의 수직적 속성을 지닌다. 반면에 곤은 정의 닫히는 속성과 동의 열리는 속성을 지닌다. 건괘는 원형의 하늘과 같은 형상의 인상에 착안한다.19) 반면에 곤괘는 네모형의 땅과 같은 형체의 양상에 착안한다.20) 건과 곤은 자연의 생명력과 관련하여 원형과 네모형의 유비적(類比的) 양상에서 크고 넓은 속성을 연역해낸 것이다. 그러므로 건곤의 광대성(廣大性)은 자연의 생태계에서 천지의 틀 속에 형성된 생명공동체의 의식적 차원을 반영한다.
대순의 세계관은 상제가 삼계(三界)의 순환적 과정에 참여하고 천하를 순회하는 활동과 관련된다. 천하대순(天下大巡)의 활동에는 천지의 개벽 속에 삼라만상의 조화가 진행되는 인식론적 내용을 지닌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굴레처럼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실적 삶을 직시한 결과이다. 특히 천지개벽의 선험주의의 차원에서 대순의 세계는 현실의 시공간적 제약이 지닌 실유(實有) 혹은 존유(存有)의 세계이지 가공의 비현실적 허무(虛無) 혹은 허공(虛空)의 세계는 아니다. 이러한 차원 때문에 천하대순은 민족이나 민중의 기대와 희망을 갈구하는 원융관통의 의식적 문제와 관련된다.21) 그 속에서 대순의 진리는 시공간적 제약성을 지닌 유한의 세계에서 무궁무진한 시공간성을 지닌 무한의 경계를 체험하는 인간의식의 차원을 지닌다.
대순사상에서 개벽은 선험주의적 차원에서 체험하는 노선을 특징으로 한다. 천지의 개벽에서 개벽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공간이 전개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대순의 진리에서 개벽은 인간이 선천의 주관성을 넘어서 후천의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개벽의 발전사관에서 보자면, 과거의 흔적은 현재의 진행을 만들고 미래의 전망은 현재의 진행으로부터 보장된다. 개벽에 관한 대순의 진리에서 보자면, 현재는 지나간 과거를 품고 다가올 미래를 바라다보면서 진행하는 삶의 과정을 지향한다. 여기에서 천지개벽이 지닌 역학적 사유의 단면을 알 수 있다. 사시와 음양의 방식에 따라 자연의 이법이 작동하며 천지의 틀 속에 삼라만상의 조화(造化)가 진행된다. 이러한 천지개벽의 원리는 『주역』의 세계관에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주역』은 세계의 축소판, 천지의 복제판, 우주의 도상으로 은유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계의 자생적 율동[生生不息]과 호흡을 함께하며 생명의 본성에 따라 주체적 자각의식[自强不息]을 갖는다. 인간은 인생의 굴곡진 여정(旅程)에서 생명의 이치를 이해하고 생명의 가치를 터득함으로써 자연스레 생명공동체의 의식을 공유한다. 이러한 경험의 세계에서 인간은 존재의 필연성을 체득하고 가치의 당위성을 터득한다. 대순의 세계관에는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상제가 천계(天界), 지계(地界), 인계(人界)의 삼계(三界)를 주재하고 천하를 순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선험주의의 신념 속에 불가역적(不可逆的) 삶을 가역적(可逆的) 세계로 고양시킨다. 인간의 삶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연관성은 선험주의의 인식과 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삶의 여정에서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연속선상에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역사를 간직한다는 의미에서 과거의 현재이며 미래의 역사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미래의 현재이다. 이러한 세계의 실재 속에서 인간은 자아실현의 목표를 추구한다.
천하대순(天下大巡)이라는 말은 천지의 틀에 따른 천하의 질서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천지의 틀에는 천문과 지리의 총체적인 경험이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틀에 입각하여 형성된 천하의 질서의식은 지리의 공시성(共時性)과 역사의 통시성(通時性)을 통해 자연의 실물적 시야에서 인문의 관념적 시선으로 확장된 결과이다. 이른바 천하는 세계의 또 다른 명칭으로서 세계의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대순의 용어는 그 속에 삼라만상의 조화를 두루 포용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는 생명의 원융관통적 성격, 즉 완전성, 통일성, 원만성, 포용성 등이 반영되어 있다.22) 이러한 원융관통의 관념은 천지의 개벽의 맥락에서 접근되며 선험주의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 .23)
여기에서는 주목할만한 점은 천하의 대순, 삼계의 개벽, 선경의 경지, 동학의 정신, 도통군자의 선구자 등이다. 대법국의 천계탑은 서양의 문물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강증산은 천계탑이 정신성이 부족한 일종의 환상임을 인식한다. 서양의 물질문명이 민생을 망가뜨리고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는 적자생존이나 자연도태의 국제적 상황을 절실하게 체험한다. 천하를 두루 순회하여 천·지·인의 삼계의 영역을 개벽하여 선경의 이상사회를 계몽하고자 민생을 계도하고 민중을 교화하기로 결심한다. 더 나아가 그는 동학의 정신을 넘어 대순사상을 중건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다.
…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 … .24)
여기에서 갱생이라는 말에도 개벽의 과정과 관련된다. 그는 동학의 교주를 대신할 위대한 인물임을 자처한다. 이른바 대선생(代先生)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조선의 억압된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 개벽의 강령을 수행할 도통군자의 선구자적 역할을 떠맡고자 한다. 그의 임무는 바로 천리(天理)의 이법에 따른 신도(神道)의 계몽을 모색한다. 그는 동학의 개혁운동으로 촉발된 근대의식 하에 전통의 계승적 중건(重建)과 근대의 합리적 전환(轉換)을 모색하였다. 전자가 반제국주의의 흐름에서 민족계몽의 역사적 사명감과 관련되는 반면에 후자는 반봉건주의의 흐름에서 민생계도나 민중교화의 시대적 절박감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대순의 관념은 선험주의의 차원에서 우주의 이법에 따른 세계를 주재하는 본체로서의 능력과 관련된다. 그것은 주재의 능력에서 보면 세상을 구제하는 상제의 관념과 관련된다. 강증산이 직면했던 조선의 사회상에서 민생이나 민중의 원한은 근대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장기간 흐름 속에서 누적된 것이다. 현재는 단순히 삶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열린 공간 속에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용하는 시간의 연속적 흐름 속에 있다. 인간은 과거의 누적을 통해 현재의 진화를 거듭하며 미래의 발전을 도모한다. 천하대순의 시계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Ⅳ. 천지공사(天地公事)와 인식론적 세계
동아시아의 세계관에서 천지는 인간의 삶 속에 세계의 실재(reality)를 인식하는 틀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생명의 연결망 속에 세계의 객체와 일정하게 관계맺는다. 자연계에서 생명의 활동은 열렸다가 닫히고 닫혔다가 열리는[開闔] 일련의 자생적 과정과 같은 통일적 질서를 지닌다. 그것은 시간의 순환과 공간의 대칭을 특징으로 한다. 즉 신진대사와 세대교체의 과정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유동성과 그에 따라 확장적으로 전개되는 공간의 점유성을 지닌다. 자연의 시공간적 생명력을 통해 인간은 삶과 죽음의 굴레 속에 명운(命運)의 자의식을 갖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특정의 합목적적 가치를 부여한다.
우선, 강증산은 천지공사에 관한 취지와 포부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따라서 행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그것을 비유컨대 부모가 모은 재산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얻어 쓰려면 쓸 때마다 얼굴이 쳐다보임과 같이 낡은 집에 그대로 살려면 엎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불안하여 살기란 매우 괴로운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개벽하여야 하나니 대개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 나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 … .25)
이른바 천지공사는 1901년부터 1909년까지 9년간 지속되었다. 그는 천지공사 이전에 존재하는 선천의 세계와 그 이후에 존재하는 후천의 새로운 세계를 구분한다. 특히 후천의 개벽으로서 선경의 경지는 천지공사가 이루지면 바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경은 원래 언제든지 실현될 수 있는 것이지만 시의적절한 시대가 도래해야 가능한 것이다. 천지공사는 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이 순차적으로 개벽의 길에 따라 진척되어야 민생이나 민중에게 재난이나 재해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공사가 완공되면 천지의 급격한 대변혁이 일어날 것임을 역설한다. 이 대변혁이 바로 개벽이고 특히 후천의 개벽이라고 부른다.26) 이는 천지공사가 바로 인간의 삶을 위한 현세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일이란 것은 마땅히 왕성히 천지에 있다. 반드시 인간에게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다. 그러므로 천지는 인간을 낳아 쓴다. 인간으로 태어나 천지가 인간을 쓰는 때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찌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27)
천지공사가 인간의 삶의 문제라면 그것은 우주의 조화원리에 따른 천·지·인의 삼계의 공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 … .28)
선천의 시대에는 상극의 원한이 쌓여 멸망의 길로 치닫는다. 반면에 후천의 시대가 도래하면 상생의 협력을 통해 공존공영(共存共榮)의 평화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원(解冤)과 보은(報恩)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개벽의 내용을 설명한다.
상제께서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 서신(西神)이 사명하여 만유를 재제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 만물이 가을 바람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성숙도 되는 것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오.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그러므로 신의 위엄을 떨쳐 불의를 숙청하기도 하며 혹은 인애를 베풀어 의로운 사람을 돕나니 복을 구하는 자와 삶을 구하는 자는 힘쓸지어다」라고 말씀하셨도다.29)
인간은 천도(天道)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도의 규범에 맞게 주체적 신념을 가져야 비로소 민생의 교화나 민중의 계도를 실천할 수 있다. 세상의 교화나 계도는 신도(神道)의 강령과 관련된다. 특히 성인은 천도를 본받고 인도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구현할 수 있다. 「단전」에서는 관괘(觀卦)의 괘사를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의 신묘한 도를 살피고 사시가 어긋나지 있으니 성인이 이로써 신묘한 도로써 가르침을 베푸니(神道設敎) 천하가 굴복한다.30)
성인이 천도의 질서를 관찰하고 춘하추동의 현상적 방식을 체득하면 앞선 경험에서 터득한 교훈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마침내 천하의 세상을 통치할 수 있다. 특히 명운의 양립가능성, 즉 불가항력성과 예측불가능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의 실재에서 이른바 신도설교(神道設敎)31)의 취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규범적 강령으로서, 인간은 개벽의 질서의식을 체험하고 이를 통해 삶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도설교의 규범은 단순히 천도를 파악하는 수단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 속에 백성을 교화하고 세상을 계도하는 원칙인 셈이다. 온전한 인격체의 인간은 신도의 소통방식을 통해 교화와 계도를 수행하고 삶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인도의 질서의식 속에 문명사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현세주의적 취지가 있다.
다른 한편, 대순의 사상에서는 세계의 실재에서 본체의 궁극적 지향성은 일치한다. 그러나 본체가 분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신(神)의 관념은 진행하는 방식에서 다르다. 성리학의 본체론적 방식에서 신은 음양의 작용이나 작동을 가리킨다. 즉 본체가 발현하는 현상적 방식을 가리킨다. 반면에 대순의 사상에서 신의 관념은 본체가 발현하는 주재의 능력을 가리킨다. 전자가 본체의 대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후자는 본체의 주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그 양자는 삼라만상의 조화방식, 즉 분화의 과정에서 주재하는 주체가 존재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다르게 접근된다. 성리학의 논법에서는 파생의 과정에서 품수의 대상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대순의 논법에서는 품수의 주재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자의 경우에 세계의 실재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중요하다면 후자의 경우에 세계의 실재가 어떻게 온전하게 창출되는가의 과정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모든 생명의 실재성이 있으면서도 모든 실재의 생명성도 있다.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에 인해서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리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 기록의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32)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원한이 맺힌 근원을 찾아 해소할 수 있는 그 해소를 혼돈의 상태에서 문명사회로 나아가는 기점으로 본다. 그 해소의 과정은 이미 단초가 존재하며 천지의 순환적 흐름을 가로막아 종말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가 순에게 왕위를 선양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들인 단주의 원한을 야기시켰던 역사적 사건을 거론한다. 이른바 후천의 개벽은 해원의 상생, 궁극적 선경, 공공의 조화와 같은 가치론적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에는 말세의 부도덕한 세상을 마감하고 민생의 계도나 민중의 교화를 통해 다음 세대에서는 민생이나 민중을 위한 선경을 맞이하려는 취지를 지닌다. 이러한 선경의 경지에 관해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33)
무위이화는 천리(天理)와 같은 자연의 주기적 순환의 이법에 따른 후천의 개벽을 이해할 수 있는 용어이다. 이 말에는 선경에 도달하는 방법이 드러나 있다. 천지공사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역동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종합적으로 표현하면 상제덕화를 베풀어 신도에 입각하여 노력과 실천의 무위이화를 통해 천지공사를 시행하여 민생을 계도하면 개벽의 길을 열어야 비로소 상생의 궁극적 목표인 선경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선경의 차원에서 강증산은 역사의 주체로서 조선민족이 인과적 결정론을 넘어 주체적 선택론에 치중해야 함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 역사란 과거, 현재, 미래가 연속되는 시간의 연속적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인간사회는 앞선 경험의 누적을 통해 진행된다. 이러한 선험주의적 차원에서 보자면, 과거의 오래된 역사적 원한이 쌓이면 천지가 꽉 막히어 결국에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원한을 해소하는 것이 장차 미래로 나아가야 할 전제조건이 된다. 이른바 해원공사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형성되는 근대의식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다.
V. 후천개벽(後天開闢)과 가치론적 경계
어느 사회이든지 간에 자체의 고유한 개별성이나 독자성을 갖고서 외부의 지역과의 교류 속에 혼종(混種)과 창신(創新)의 역동적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는 항상 원류로서의 구심력과 그에 따른 전파의 원심력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는 주관의 불확정성의 실질을 객관의 확실성의 법칙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불확정성을 지니는 한편, 인간의 주관적 한계를 넘어 합리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확실성을 지닌다. 불확정성과 확실성의 관계는 서로 모순되지만 인간의 신념에서 해소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해소는 인간의 삶에서 최종적으로 완전히 성취되거나 완결될 수 없다.
삼라만상이 생성, 변화, 소멸의 과정은 무질서의 혼돈에서 질서의 체계로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삼라만상은 천지의 틀 속에서 진행된다. 천지의 틀은 전지전능하게 만들어내는 창조34)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실재에서 끊임없이 전개되는 개벽의 문제로 귀착된다.35) 그 개벽을 통해 삼라만상이 생성, 변화, 소멸의 창조적 과정이 진행된다.
천지의 개벽과 연관하여 대순의 진리에서 후천의 개벽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천지의 개벽과 후천의 개벽은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가? 그 결과로서 대순의 진리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천지개벽은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관한 문제라면 선험주의의 맥락에서 자각과 실천의 문제로 설명될 수 있다. 천지개벽의 문제가 인간의식의 차원에서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의 논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선천은 인간의 주관적 영역에 해당되고 후천은 인간 주변의 객관적 영역에 해당된다. 「문언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인이란] 하늘보다 앞서도 하늘이 어긋나지 않으며, 하늘보다 뒤에 있어도 하늘의 때를 받든다.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하물며 귀신에게 있어서야?36)
세계의 실재는 인간이 생명력의 자생적 율동[生生不息] 속에 주체적 자각의식[自强不息]을 갖고서 살아가는 현실적 삶의 과정이다. 그 속에는 선천의 주관적 시간과 후천의 객관적 시간이 중첩되어 흘러간다. 선천의 영역이 인간의 주관적 의식과 관련되는 반면에 후천의 영역은 자연의 객관적 법칙과 관련된다. 인간의 삶은 자연의 객관적 법칙에 따라 인간의 주관적 의지를 발휘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삶의 과정에서 인간은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시간을 보듬고 미래의 시간을 기대할 수 있다.
천지의 현상세계와 그 개벽의 과정은 선천과 후천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선천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지닌 필연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후천은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른 합리적으로 개척하는 자유로운 삶을 특징으로 한다. 선천과 후천의 구분은 세계의 실재를 인식하는 경계, 즉 선사와 역사, 신화와 계몽, 혼돈과 문명, 전통과 개혁 등의 경계를 대변한다. 특히 후천의 개벽이란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 세상을 계몽하거나 계도하는 관문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의 주체적 삶의 활동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성은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것인가? 여기에 시간의 흐름에 관한 결정론과 선택론이 있다. 결정론은 후천의 객관적 영역과 관련되는 반면에 선택론은 선천의 주관적 영역과 관련된다. 후천의 영역에서는 사건들의 연속선상에서 시간의 일정한 추세나 경향이 결정된다. 선천의 영역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써 시간을 선택한다. 인간의 삶은 주위의 환경에 따라 주체적 의지가 발휘되는 결과이다. 그것은 인간이 후천적 상황 속에 선천적 역량을 발휘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선천의 영역과 후천의 영역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과정 속에 인간 삶이나 사회의 방향이 선택되거나 결정된다. 시간의 결정론은 시간의 선택론을 전제로 하며 후자를 통해 실현되는 반면에, 전자는 후자에 의거하여 그 속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삶의 과정에서 인간은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시간을 보듬고 미래의 시간을 기대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선천의 주관적 시간과 후천의 객관적 시간이 중첩되어 흘러간다. 인간의 삶은 선천의 영역과 후천의 영역이 함께 어우러지는 과정 속에 방향이나 추세가 선택되거나 결정된다.
이러한 시간성의 여정에서 천지의 개벽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와 연관하여 대순의 진리에서 후천의 개벽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천지의 개벽과 후천의 개벽은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가? 그 결과, 대순의 진리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후천개벽에서 선험주의적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과업을 객관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후천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와 상대적으로 선천은 주관적인 의식의 영역에 해당한다. 강증산 자신은 후천의 영역에서 개벽을 통해 민생을 계도하고 민중을 계도해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후천의 개벽은 계몽이나 계도를 위한 통로로서, 해원을 통한 상생의 창발적 길로 표현된다. 삼라만상 사이에 생겨나는 대립, 갈등, 충돌의 양상을 넘어 해소, 해결, 조화의 국면으로 나아가는 공평무사의 선경을 지향한다. 이들의 창발적 관계에서는 해소, 협동, 화해의 긍정적 관계뿐만 아니라 대립, 갈등, 충돌의 부정적 관계조차도 조화나 화합의 더 높은 통합적 차원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관계에서 상생의 방식을 통해 인간사회가 발전할 수 있으며 변화의 세계 속에 세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삶의 상생적 통로를 모색해볼 수 있다.
민생, 민권 및 민중의 가장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할 현세적인 사상적 지주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조건 속에 신종교가 등장하였다. 신종교가 민생의 시대적 절박함, 민중의 현실적 절실함 등의 문제의식에서 등장한 것이라면, 대순사상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해소하려는 기대와 희망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시속에 말하는 개벽장은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비겁에 쌓인 신명과 창생을 건지는 개벽장(開闢長)을 말함이니라.37)
천지인의 삼계의 개벽은 인간의식의 차원에서 시공간적 과정, 즉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공간이 전개되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유한성을 넘어 현실의 변혁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삼계공사는 곧 천·지·인의 삼계를 개벽함이요 이 개벽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따라 하는 일이 아니고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예전에도 없었고 이제도 없으며 남에게서 이어받은 것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다만 상제에 의해 지어져야 되는 일이로다.38)
여기에서 상제는 주재의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후천의 개벽을 주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개벽은 선험주의적 차원에서 근대의식상 역사의 혁명적 전환으로 진화되었다. 상제가 주재하는 천지공사는 삼계를 개벽하는 공적이다.
후천의 개벽은 문명사회의 관문으로서 민생의 계도와 민중의 교화를 내용으로 한다. 선천은 주관적 아집이나 집착과 같은 사사로운 의식의 영역을 가리킨다. 후천은 사회적 집단을 운영하는 실천적 사고의 영역을 가리킨다. 특히 후천의 역역에는 사회적 실천에 따른 사회의 발전을 전제로 한다. 대순사상에서는 선천과 후천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 .」39)
선천의 영역에서는 상극(相克)의 방식에 따라 진행되므로 사회심리적으로 원한의 풍조가 삼계에 가득 채워진다. 천지의 틀을 유지하는 자연의 이법이 무너지고 온갖 재난이 생겨나 말세의 지경이 이르게 되었다. 천지의 괘상(卦象)으로 설명하자면, 窮-變-通-久의 세계에서 窮-變의 단계에서 태괘(泰卦) 40)의 형국에서 비괘(否卦) 41)의 형국으로 바뀌면서 천지의 대순환적 과정이 끊어지게 된다.
이러한 선천의 운행에서는 천지의 구조가 뒤집어진 현상에 따라 사회의 모순과 투쟁이 극렬하게 발생하고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방식으로 왜곡된 악순환의 진화론적 과정이 진행된다. 우주의 가을로 넘어간다는 것은 지구가 정원 궤도로 회복함을 의미하며, 이때 비로소 상생(相生)의 세상이 바로 후천의 선경에 해당한다.
이러한 과정은 사회가 열려진 체계에서 닫힌 체계로 전환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시사한다. 태괘는 열린 사회에서 정당성과 합당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조화하는 방식을 잘 시사한다. 반면에 비괘의 내용은 닫힌 사회에서 폐단과 불협화음이 만연하게 되는 방식을 잘 시사한다. 강증산은 특히 비괘의 형국처럼 내우외환의 조선사회라는 것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장기적으로 볼 때 결국에 태괘의 형국처럼 열린사회로 향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다.
역학적 사유의 차원에서 보자면, 세계의 실재는 생명력의 자생적 율동[生生不息]이 작동하는 과정 속에 주체적 자각의식[自强不息]을 갖고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다. 인간의 삶이란 선천의 주관적 영역과 후천의 객관적 영역이 중첩되는 활동이다. 역사의 맥락에서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 욕구나 의지를 발휘하거나 합리적인 객관적 추세를 따르는 경향이 있어왔다. 이러한 주관성과 객관성은 선천과 후천의 관계를 통해 논의될 수 있다. 역사의 정당성이나 합당성은 객관적 후천 속에 주관적 선천을 발휘하는 과정이다. 세계의 실재는 자연의 객관적 법칙과 인간의 주관적 의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삶의 방향을 맞추어갈 때 현재의 삶에서 과거의 역사를 보듬고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해석에서 결정론은 선택론을 전제로 하며 선택론을 통해 실현되는 반면에, 선택론은 결정론에 의거하여 그 제한 속에서 진행된다.
어떠한 사회이든지 간에 전체는 반드시 다원적인 개체화를 이끌며 다원적인 개체는 반드시 충돌과 화해(和諧)의 과정을 거쳐서 충돌이 조화로 승화되고 조화가 새로운 전체를 형성한다. 새로운 전체는 새로운 가치를 고양하여 새로운 사회나 문화를 창조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선험주의의 차원에서 세계의 실재를 바라보는 그의 근대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면서 이를 조선사회에 변용하는 취지를 지닌다. 천하대순(天下大巡)의 원융관통적 세계에는 사회진화론의 노선 속에 문명사관(文明史觀) 혹은 진보사관(進步史觀)이 스며들어 있다.
선험주의적 차원에서 보자면 천지의 개벽은 시공간성의 제약을 지닌 현실적 삶에서 인간의 개조와 같은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천지의 개벽은 자연계에서 생명의 연결망 속에 생명의식을 고양하는 역학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혼돈의 상태에서 천지의 개벽으로 나아가는 체험의 시공간적 과정에서 생명의 율동은 생명체의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특징으로 한다. 시공간적 제약성을 지닌 생명의 율동, 즉 삶과 죽음의 굴레 속에서도 인간 삶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과정에서 자각의식을 형성하여 신도설교(神道設敎)의 가치지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대순진리의 목적은 현실적 삶의 시공간적 제약 속에 인간 자신이 스스로 성찰하는[自强不息] 참다운 인간으로의 개조를 통해 세계의 개벽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천지의 개벽은 세계의 실재를 시공간적 계기로 경험하는 방식이다. 자연계에서 모든 생명체는 감응의 방식을 통해 자생적 생명력을 끊임없이 발휘하며 유기적인 통일적 질서를 형성한다. 생명은 생명체의 본질 혹은 본성으로서, 생명력의 자생적 흐름으로 표출되며 생명활동의 역동적 과정을 진행한다.42) 생명의 관념에는 유기체의 통일적인 연관체계를 특징으로 하는 존재론적 차원이 있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주기적 굴레 속에 그 경계선 너머를 바라보며 자신의 유한한 생명력을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으로 확충하였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을 자연계에 투영한 의식의 산물이 바로 후천개벽이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생명이 율동하는 시공간의 제약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 사실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터득하고 체득하였다. 인간은 자연계에 대한 경외(敬畏) 혹은 우환(憂患)은 특히 천지의 개벽과 같은 시공간적 계기 속에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한다. 이러한 반성적 자각 때문에 인간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며 삶과 죽음의 물리적 굴레를 넘어서 후천개벽의 현세적 경계를 추구하였다. 이 경계에서야 비로소 인간은 물리적 생명으로서의 존재를 넘어서 정신적 생명의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한 생명력에서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을 만끽하고자 하는 것이다.
후천의 개벽은 인간의 삶에서 인간의 개조와 같은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천지의 개벽은 자연계에서 생명의 연결망 속에 생명의식을 고양하는 역학적 사유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혼돈의 상태에서 천지의 개벽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역학적 사유의 선험주의적 차원에서 보자면, 생명력의 관계망으로부터 인간 삶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적 의식을 형성하여 도덕적 가치를 모색한다. 이는 민생을 계도하고 민중을 교화하는 취지에서 세계의 전환을 도모하는 개벽의 세상과 같은 열린사회를 지향한다. 따라서 후천의 개벽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개조의 지향성에서 대순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른바 후천의 개벽은 현대적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혹은 시공간의 전환에 해당한다. 천지의 개벽은 역사시대의 전환과 관련되고 후천의 개벽은 역사시대의 변혁과 관련된다. 천지의 개벽이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의 계기를, 혼돈에서 문명의 개화로의 전환을 함축한다면 후천의 개벽은 역사의 근대적 전환으로서의 문명의 진보를 함축한다. 전자가 존재와 가치의 관계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후자는 사실과 가치의 관계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 양자는 모두 문명사회의 가치론적 지향성을 지니지만, 전자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문명적 개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후자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근대적 개혁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Ⅵ. 문제해결의 실마리
조선사회에서 근대의식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현실적 시련 속에 민생을 계몽하고 민중을 교화하는 과정에서 싹튼 것이었다. 당시에 당면한 문제는 서구의 세력이 유입됨에 따라 기존의 전통적 질서관이 어떻게 사회 전반에서 야기되는 급박한 요청이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조선의 근대사회에서 서구사상의 수용과 배척이라는 양단의 칼날은 민족의 도전과 응전의 시금석이 되었다.
대순사상의 진리는 우주의 무한성을 현실의 유한성에 투영한 결과이다. 즉 삶과 죽음의 주기적 굴레 속에 그 굴레의 경계선 너머를 바라보며 자신의 유한한 생명력을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으로 확충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라 민족, 민생 및 민중의 현실적 삶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三界의 개벽과 그에 따른 천지공사는 초월적 세계를 동경하거나 이상적 사회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세적 종교의 모습 속에 개벽의 선험주의적 노선을 따라 반봉건주의적 혹은 반제국주의적 민족의식이나 계급의 평등사상을 지향한다.
특히 후천의 개벽은 대순사상의 진리를 통해 새로운 근대적 계기를 마련하여 조선의 민족이 통합하여 민생과 민중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를 지닌다. 사회진화론이 논법으로 설명하자면, 민족 전체는 반드시 민중을 이끌며 민중들은 충돌과 화해의 역동적 과정을 거치면서 개별적 충돌이 민생의 조화로 승화되어 민족 전체를 발전시키며, 민족 전체는 민중의 자유의지와 평등의식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고양하여 새로운 조선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대순사상의 진리는 민생을 계도하고 민중을 교화하는 현실적 인식의 종교적 차원을 지닌다.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보자면,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삶에 누적되고 미래의 전망은 현재의 삶으로부터 연속된다. 개벽의 과정은 대순의 진리를 향해 천하대순(天下大巡)의 존재론적 시계를 확보하고 천지공사(天地公事)의 인식론적 세계를 설정하며 후천개벽(後天開闢)의 가치론적 경계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이들 삼중의 영역의 연결고리는 우주의 무한한 시공간성을 천지의 틀 속에 후천의 시공간적 개벽으로 경험하는 역학적 사유의 맥락, 즉 선험주의적 노선을 특징으로 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한 생명력에서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을 만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대순사상은 후천의 개벽과 같은 선험주의적 통로를 통해 현실적 삶을 극복하고 선경(仙境)과 같은 자각의식의 경계를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자면, 대순사상은 초월적 관념의 세계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적 세계에 참여하여 실천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출세주의적(出世主義的) 경향보다는 적극적인 입세주의적(入世主義的)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후천의 개벽으로 특징짓는 대순사상의 진리에는 유토피아(Utopia)의 이상적 염원이나 디스토피아(Dystopia)의 현실적 혐오보다는 앞으로 희망과 기대를 갈구하는 넥스토피아(Nextopia)의 미래적 조망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