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1968년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epetition)』에서 존재들의 위계와 분배문제를 논하면서 처음으로 소개한 노마드(nomade, 유목민) 개념을 차용하여 자크 아탈리(Jacques Atalli)가 소개한 Homo nomad(유목하는 인간)는 1971년 지오바니 토토라(Giovanni Tortora)를 거쳐 1994년 독일의 클라우스 바데(Klaus. J. Bade)(1994)의 저서 『Homo migrans: Wanderungen aus und Deutchland(호모 미그란스 : 독일 안팎으로의 이주)』를 통해 ‘이주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현재 발전하고 있다.1)
인류사에서 이주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20세기 이후 급속한 세계화와 다문화 환경,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대중화, 정보의 지식과 확산, 삶의 질 향상 욕구 등은 과거보다 훨씬 더 국제 이주 수요를 만들고 확대, 재생산한다. 이라크, 시리아전쟁, 유고, 아프칸 내전과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분쟁에서 발생한 이주와 난민은 글로벌 시대 초국적 이주 증가에 큰 몫을 하고 있다. UN의 집계에 따르면 2015년 전세계 이주민2)은 2억 4400만 명으로 21세기가 시작된 15년 사이만 41%나 증가하였다. 그 중에서도 강제이주민의 수는 6530만 명으로 해마다 증가 추세이며, 지구촌 인구 113명 중 1명은 난민이거나 난민신청자, 국내 실향민이다. 이렇듯 현대의 초국적 이주상황에서 호모 미그란스의 발생은 피할 수 없는 조류임에도 난민에 대한 한국의 인정률(2018년의 경우 1.9%)은 유럽(43.2%)과 비교할 때 매우 낮을 정도로 난민에 대한 수용성이 엄격하며 배타적이다. 이는 이주민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제도적 차이가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주민이 자의든 타의든 타향살이를 시작할 때 현지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기제 가운데 중요한 것이 종교이다. 종교는 세계관의 핵심으로서 이질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며 안정감을 제공해 주고, 새롭게 이주해 간 사회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가 이주민의 적응 기제와 관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종교와 이주 및 다문화사회의 관련성 연구는 종교단체의 복지사업이나 선교(포교) 활동에 대한 분석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타자로서 새롭게 등장한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새로운 이주사회에서 요구되는 환대의 규범은 어떠한 형태를 갖춰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 주로 주인(host)의 관점에서 던져지고 정주자의 입장에서 답해왔다.
한국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모든 것이 연결된 보다 지능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른바 초연결(hyper-connected)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재정의하고, 모든 존재의 공존과 상생에 주목한다. 이러한 시대사조가 현대 사회의 대표적 특징인 사회 현실의 복잡성, 가치체계의 다양성, 사회문화의 다층성과 결합하여 포스트휴먼시대를 연출할 때, 우리 사회는 정박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이방인을 만들어낼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3)
이제 포스트휴먼시대를 맞아 새로운 성찰의 일환으로 손님이자 이주민의 관점에서 타자의 권리는 어떠한가? 자신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는 타자의 완전한 권리로 환대를 다룰 수 있는가? 정주자와 이주민이 동등한 호혜성의 가치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가? 종교다원사회를 사는 한국 종교와 종교인은 어떤 자세로 이주민의 종교와 이주민을 마주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필요한 때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궁구의 하나로 본 연구에서는 종교사상적 측면에서 초국적 시대를 살아가는 호모 미그란스에 대한 환대에 주목한다.
환대(Hospitality)란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이방인(타인, 손님)에 대하여 다정하고 관대한 수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방인의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해 개방적인 마음가짐으로, 이방인을 따뜻하고 친밀하며 포용적으로 맞이함을 말한다.4) 따라서 환대는 이방인(타인, 손님)의 권리일 수도 있고, 정주자(주인)의 의무일 수도 있으며, 이방인과 정주자가 함께 공유하고 실천해야 하는 세계시민의 윤리일 수 있다.
글로벌 시대 호모 미그란스를 위한 환대와 관련하여 종교적 측면에서의 관심은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Hans Kűng)5)이 “종교간 평화 없이 국가 간 평화도 있을 수 없다(There can be no peace among nations unless there is peace among religions)”는 평화촉구 메시지에 대해 2007년 라마단이 끝날 때인 10월 13일 138명의 무슬림 지도자, 성직자, 학자들이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의 말(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이라는 공개서한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종교(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공통 기반과 이해를 바탕으로 환대의 확대를 응답한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6)
초국적 시대를 맞아 이주현상을 회피할 수 없는 글로벌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시대적 징표(signum temporis)를 인식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와 종교인의 실천적 테제로 환대에 주목할 때 우리의 관심은 대순사상의 ‘양심(良心)’을 조망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대순사상은 서세동점의 시대에 자생한 한국의 민족종교이며 현재 사상적 체계가 구축 중(becoming)이므로 사상의 진보성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대순사상의 인간관에 바탕이 되는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며, 인성의 본질이므로 이타성에 기반한 환대의 윤리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자 ‘공동선(commune bonum)’의 자세를 종교의 역할과 기능으로 볼 때, 대순사상의 양심 개념은 인존, 무자기, 해원상생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문화사회를 위한 대순사상 관련 연구를 종설하면, 먼저 원리적 측면에서 윤재근은 다문화사회에서 있어 상생을 위한 제언7)에서 증산이 말한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조화로써 법리에 맞게 다스려지는 평화로운 지상선경”을 언급하면서 대순사상이 지닌 상생의 이념을 기조로 사회적 통념의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김의성은 대순사상의 선민의식이 기독교적 선민의식이 아니라 민족적 주체의식을 바탕으로 다문화의 조화성으로 재해석하면서 다원주의적 윤리를 모색하였다.8)
실제적 측면에서 모춘흥은 탈북민 문제를 중심으로 ‘프레카리아트’와의 상생을 위한 환대의 정치로 대순사상의 해원상생 개념을 활용하여 실천적 사유를 전개하였다.9) 또한 조용기와 윤기봉은 증산이 말한 천하가 한집안이라는 공동체주의를 바탕으로 대순사상이 신한류 측면에서 한국의 문화를 국내외로 전하는 문화의 전달자로 보았다.10) 정지윤은 대순진리회의 사회사회 실천과 관련하여 대순진리회가 3대 기본사업(포덕, 교화, 수도)을 가장 우선시하는 대신 사회복지나 교육활동을 파생적인 것으로 여겨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과 함께 지역 특성에 부합하는 사회복지의 실천을 예시(예: 포천 지역회관 중심의 외국인 복지사업)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사회복지의 실천을 제안하였다.11)
그런데 이들 관련 연구는 대순사상을 종합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주요 개념 위주로 분석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대순사상의 체계성을 부각하지 못한 한계가 나타났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초국적 이주현상에 대해 대순사상의 양심을 기반으로 환대의 종교사상을 고찰하여 대순사상의 진보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Ⅱ. 초국적 이주 현상에 대한 환대의 종교사상 탐색
국제이주기구(IOM)에서는 이주(migration)를 “국경을 넘었거나 혹은 특정 국가 내에서 사람이나 집단이 이동하는 것. 그 기간과 구성, 원인에 상관없이 어떤 형태의 인구이동이든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그 결과 국내외 이주를 포함한 전 세계 이주민의 수는 현재 10억 명에 이르고 있으며, 윌리엄 스윙(William L. Swing) IOM 사무총장의 말처럼 이주는 21세기 메가트랜드이다.12)
한국 사회 역시 초국적 이주사회를 이루고 있는데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외국인유학생이라는 3대 초국적 이주민 그룹뿐 아니라 이주배경청소년, 난민 등과 같은 소수 이주민까지 다양하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출입국통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전체 인구 대비 체류외국인 비율(수)은 2017년 4.21%(2,180,498명)에서 2019년 4.87%(2,524,656명)로 매년 증가하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2021년에는 3.79%(1,956,781명)로 감소하였다. ② 주요 국적별 체류외국인 현황을 살펴보면 한국계 중국인을 포함한 중국이 42.9%(840,193명)를 차지하고 있으며, 베트남 10.7%(208,740명), 태국 8.8%(171,800명), 미국 7.2%(140,672명), 우즈베키스탄 3.4%(66,677명) 순이다. ③ 2021년 말 기준 국내 유학생은 163,699명으로 전년 대비 6.7% 증가하였다. ④ 2021년 말 기준 결혼이민자는 168,611명으로 전년 대비 0.01% 증가하였다. ⑤ 2021년 말 기준 영주자격(F-5) 체류외국인은 168,118명으로 전년 대비 4.5% 증가하였다. ⑥ 2013년 난민법 시행 이후 난민신청 건수는 매년 급증하였으나, 2020년 초부터 확산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외국인의 입국이 제한됨에 따라 난민신청 건수는 2019년에 비해 2년 연속 감소하였다.13) 코로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민자와 유학생 수의 증가는 포스트팬데믹 시대에 초국적 이주민의 수적 증가를 쉽게 예견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K-Pop과 한류 열풍, 일본 보다 높은 한국의 국가경쟁력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계속 점증할 초국적 이주민과 관련하여 한국사회는 많은 이주민들이 사회적 무관심, 오해와 차별 나아가 혐오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않은 채 사회적 소수로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일부 이주민 집단에 대한 적대감의 누적은 심각한 사회 갈등을 낳을 수 있다. 이러한 사회문제를 선순환적 접근으로 해결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본 장에서는 글로벌 시대 한국사회에서 초국적 이주와 난민현상에 대하여 종교별 대응 양상을 배타성, 포용성, 다원적 인식의 세 가지 분석틀을 통해 먼저 조망하고 환대의 관점에서 비평하고자 한다.
먼저 이주민에 대한 종교별 대응으로 한국 사회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배타적 인식을 살펴보면, 배타성(exclusion)이란 혈연적 또는 종교적 순혈주의에 근거하여 이방인인 타자를 ‘우리’의 공간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소극적으로는 이민자 유입을 거부하거나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는 행동을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적극적으로는 소수자의 배척 또는 집단 추방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14)
구체적인 국내 사례를 살펴보면, 이주민의 종교에 대한 포용성은 매우 미흡한 수준으로, 이슬람 사원 건립을 놓고 일부 지역주민들이 내세운 ‘소음, 악취, 슬럼화’ 주장의 사례, 가톨릭 신앙을 가진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의 종교 활동을 반대하는 불교가정 사례, 나아가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된 개신교의 반대 등 작게는 가족 간 문제, 크게는 사회 내 갈등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15)
배타성을 기반으로 한 종교적 인식은 소수자를 적대적인 대상으로 인식하여, 적극 개종시키는 방식을 취하는 태도로 한국 개신교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인의 태도는 타자에 대한 편협함과 경멸, 교만의 독단적 요소를 담고 있다. 이러한 대응방식이 극단적으로 표면화되면 ‘이슬람포비아’ 현상으로 나타난다.16) 이진구는 한국 개신교의 이슬람포비아현상을 “한국 선교계의 위기의식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한국 선교계의 일부 세력이 상실된 ‘선교의 동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보았다.17) 이러한 배타적 인식은 이주민을 적대적 대상으로 상정하여 혐오와 공포를 유발하기 때문에 다문화사회에서는 지양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주민에 대한 종교별 대응으로 포용적 인식을 살펴보면, 포용성(tolerance)이란 타자에 대해 관대함을 말하는데, 우리의 공간 안에서 타자인 이방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존재함을 적극적으로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포용은 베푸는 자에 의해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는 자의성의 한계가 있다. 포용은 힘의 비대칭성에서 주로 이루어지므로 시혜자의 자의적 처분에 의지하게 된다는 점에서 불안정하며 주체 중심적 윤리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18) 종교와 관련된 포용적 인식은 이주민을 보살핌의 대상으로 인식하여 인권, 복지, 공동체, 축제와 이벤트에서 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인 국내 사례를 살펴보면, 천주교 대전교구 이주사목부의 모이세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 공동체는 2003년 시작된 이주사목으로 천안과 대전모이세로 분리, 운영되고 있는데 천안모이세의 경우 베트남, 필리핀 2개 민족을 중심으로 동티모르, 케냐, 몽골, 미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1,000여 명이 천안을 중심으로 당진, 홍성, 서산, 신합덕, 서천, 대천 7개 지역에 자국 사제가 찾아가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또한 대전모이세는 필리핀, 베트남 중심으로 대전, 금산, 논산, 세종 4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목할 점으로는 첫째, 각 민족 자국 사목자와 협조자가 함께 함, 둘째, 그 민족의 고유 전례와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함, 셋째, 센터 중심이 아닌 이주민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서비스임, 넷째, 이주민 자국어를 통한 교회사업, 사회사업 두 가지 서비스를 제공함 등이다.19) 특히 농어촌 지역의 경우, 신자의 고령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20~30대 이주민 청년들의 참여로 교회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주민에 대한 종교별 대응으로 다원적 인식을 살펴보면, 인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정(recognition)은 우리의 공간 속에 정체성을 달리 하는 타자인 이방인이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한 채 존재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포용이 타자의 정체성을 못 견뎌 하면서도 내색 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인 반면, 인정은 타자의 정체성과 존재성에 대하여 긍정적 평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인정은 상대에 대한 존재감의 인정일 뿐 타자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정체성과 타자의 정체성이 공존해도 괜찮다는 태도이긴 하지만 나의 정체성과 타자의 정체성은 별개이므로 서로 섞이는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이질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공존으로 이어질 수 있다.20)
구체적인 국내 사례를 살펴보면, 한국종교연합의 경우, 해마다 ‘다문화가정과 함께하는 종교문화캠프’를 개최하고 있다. 이 캠프는 다문화가족의 아동청소년이 주로 참여하여 한국의 전통 관례와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적응을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종교간 대화를 통해 이웃 종교의 이해를 심화하고 있다.21) 석왕사의 경우, 20여 년 전부터 경기도 부천지역 외국인 노동자를 지원해 오면서 국가별로 고유 명절을 축하하는 문화 활동을 진행하여 왔다. 일례로 지난 2022년 9월 11일에는 제24회 틸러가무니 축제를 개최하여 내란의 고통에 신음하는 미얀마 출신 이주자들이 함께 모여 향수병을 달래고 이를 통해 이주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이주민과 내국인과의 소통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인식은 모두 주체 중심의 윤리관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주체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언제든 철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평화의 정착 윤리로는 제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에 초국적 시대 한국의 다문화사회가 겪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호모 미그란스를 대하는 우리의 종교적 태도와 사상은 환대의 실천을 요구한다.
환대를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학자로 포스트모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Jacqes Derrida)는 9·11 테러와 같은 지구적 테러리즘을 완전히 해체하고 세계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무조건적인 환대의 윤리에 근거한 정치신학적 구상을 제시했다. 데리다는 지구적인 테러리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대하지도 초대받지도 않은 모든 이, 즉 낯선 이방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환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데리다는 이를 ‘초대(invitation)’의 환대라는 말 대신 ‘방문(visitation)’의 환대라 불렀다.22) 데리다에 따르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있고, 낯선 이방인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수 있는 열린 종교야말로 시대적 징표임을 설파하였다.23)
그런데 데리다가 주장한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해 이념적, 사상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실천적으로 과연 완전히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24)
무조건적 환대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 … 또한 이 순수한 환대라는 개념이 어떤 법적 지위나 정치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환대를 사유해보지도 않는다면 …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관념, 다시 말해, 초대받지 않고도 당신 삶으로 들어오는 그(녀)에 대한 관념을 갖지도 못할 것이다.
데리다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환대라는 타자 윤리학의 이념이 실천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현실의 경험을 성찰하는 준거로 유지되어야 하며 이념적, 사상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25) 무조건적, 절대적 환대의 사상은 현실 속에서 환대의 실천이 지향해야 할 바를 자극함으로써 현실 비판적 대안으로서의 가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는 주변의 외국인을 대할 때 조건적 잣대로 평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익숙하지 않은 용어이기는 하지만 외국 이주민을 대할 때 금융업이나 IT업과 같이 고소득 전문직에 속하는 외국 이주민은 ‘데니즌(denizen)’이라 부르는 반면 3D업종에 종사하는 이주민을 ‘마지즌(margizen)’으로 차별해서 부르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조건적 응대는 주로 법적, 제도적 장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대, 정치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고 유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소수자 또는 이방인 집단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으며 불평등한 수혜적 관계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에 조건적 환대를 넘어 무조건적 환대를 지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데리다는 칸트의 고전적 세계시민주의의 한계를 대신하는 무조건적 환대에 기초한 새로운 이념으로 새로운 세계시민주의, 즉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고 낯선 이방인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새로운 세계로 ‘도래할 민주주의(democracy-to-come)’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소수자나 이방인 집단과 같이 비대칭적 관계에 있는 타자에 대해 무조건적, 절대적 환대를 어떻게 실천할 건인가? 이에 대해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환대가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주창하면서 환대의 실천이 어려운 것은 소속된 공동체(작게는 가족에서 크게는 국가 단위에 이르기까지)의 안정감을 거스르는 행위, 즉 정체성의 동요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환대의 실천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야 할 문턱은 탈안정화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도 이전에 이방인이었다는 ‘상징적 기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이방인 됨을 인식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인 역시 개항시기인 1875년 중국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1880년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거나, 1900년대 초반 하와이 노동이주,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본으로의 이주와 같이 반강제적으로 고향과 고국을 떠난 역사적 사실이 우리도 한때 예외 없는 이방인이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우리도 이방인이었다는 집단 무의식을 통찰하는 단계를 지나면 우리는 이방인을 우리 자신처럼 적극적으로 대우하는 환대에 도달할 수 있다. 귀속 안정성의 위협을 겪으면서 실천한 환대는 인간과 삶에 대한 시야를 확장하고, 깊게 하기 때문이다.26) 그런 점에서 최진우는 타자를 대함에 있어 ‘자아의 확장’을 시도하는 태도로 환대를 보았으며, 이러한 환대 과정에서 우리와 타자는 ‘공생의 관계’에 진입하는 것으로 보았다.27) 그런데 환대의 지향점이 공생의 관계를 지향한다는 점은 정치학적 관점에서 나름 타당한 분석일 수 있으나 종교적으로 볼 때는 한 단계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공생(共生)은 서로 다른 생물이나 존재들이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며 함께 살아가는 소극적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른바 공생은 단순히 함께 사는 행위인 셈이다. 이에 비해 상생(相生)은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두 가지 또는 여럿이 서로 의존하고 삶을 나눔으로써 화합을 지향하며, 공생에 비해 더 포괄적, 적극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심리학자인 매슬로우(A. Maslow)가 인생의 목적으로 초기에 자기실현을 주장했다가 노년에 이르러 자기초월로 발전시킨 것처럼 환대의 목적 또한 단순히 함께 사는 공생 관계를 넘어 서로 삶을 나누고 발전하는 상생의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종교의 역할과 환대의 종교사상은 중요하게 부각된다. 특히 한국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로,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이방인을 이웃이라는 공생적 관계를 넘어 형제, 자매라는 상생적 관계로 환대의 의미를 발전시키는 사회적 통념의 전환이 요청된다.
이를 위해서는 이주민에 대한 종교별 대응으로 배타적 인식을 지양하고, 포용적, 다원적 공생 인식을 넘어 상생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며, 나아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 이에 다문화사회에 있어 상생적 인식 전환의 출발점으로 대순사상을 주목한다. 주지하다시피, 대순사상은 19세기 말 증산 강일순에 의하여 연원된 종교사상이다. 증산은 한국 근대 사회의 여명기에 우리 사회가 겪었던 격동의 시기를 체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종교사상을 주창한 종교가이다. 증산은 종래의 원한을 풀고 어떠한 원한도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이끄는 적극적 이타행이자 대타적 가치관인 ‘상생’을 강조하였다.28)
이러한 상생의 이념적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대순사상에서 강조하는 사람의 행동 기능을 주관하는 ‘마음’29)에 주목하며, 이러한 마음이 항상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여야 하는데 그 중심이 바로 ‘양심(良心)’이다. 요컨대, 모든 행동의 주관자인 마음이 양심의 상태를 지님으로써 항상 마음을 안정하게 하는 ‘안심(安心)’의 종교사상은30) 무조건적 환대에 대한 상생의 이념적 가치를 탐색하는 출발점으로 충분하다고 하겠다.
Ⅲ. 환대의 사상으로서 대순사상의 ‘양심’ 고찰
세계화는 타자화 현상을 낳는다. 타자화는 배제, 차별, 억압을 낳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갈등과 혐오현상을 유발하며, 때로는 물리적 충돌의 악순환을 야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타자화를 극복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타자화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본 연구에서는 대순사상의 ‘양심’을 중심으로 환대의 종교사상을 탐색하고자 한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유사 이래 동서양의 수많은 사상가, 종교인과 철학자뿐 아니라 보통 사람까지 궁구한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사람들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을 뜻하거나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이나 의지, 생각 또는 의식이나 정신을 나타낸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마음을 헬라어로 Ψυχη(프쉬케)라 하며, 정신, 영혼, 생명, 호흡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자어로는 심장을 형상화 한 것이 마음 심(心)자이며, 한글로 마음은 용비어천가(1447년)에 따르면 ᄆᆞᅀᆞᆷ으로 표기되어 심장(心臟)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고 한 것이나 중국 속담에 “범을 그리는데 가죽을 그리기는 쉬워도 뼈는 그리기 힘들다(画虎画皮难画骨)”는 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다고 단정적으로 설명하거나 쉽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의 삶만큼 역동적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마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은 다양하게 있어왔다. 어떤 경우는 몸과 구별되는 정신으로, 어떤 경우에는 물질이나 몸의 일부분으로서의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마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마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관념론과 유물론, 정신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와 같은 이원적 마음의 이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인간의 마음이 가진 심층성, 복합성,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 가진 종교적 마음은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대순사상을 기반으로 인식 주체로서 종교적 마음에 관한 논의를 진행시켜 양심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인들은 실생활에서 ‘마음 먹다’, ‘마음이 가는 대로’라고 하면서 마음이 정신 활동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고, ‘마음을 다스리다’, ‘마음을 속이다’라고 하면서 마음이 정신 활동의 대상인 객체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대순사상에서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주체와 객체 개념을 동시에 사용한다.31) 대순사상의 마음관을 대표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경』(행록 3장 4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비와 이슬을 박하게 베풀면 반드시 만방에 원한을 낳게 되며, 땅이 물과 흙을 박하게 베풀면 반드시 만물에 원한이 생기게 되며, 인간이 덕행과 교화를 박하게 베풀면 반드시 만사에 원한을 사게 된다. 하늘의 베풂과 땅의 베풂, 인간의 베풂은 모두 마음에 달려있는 바이다. 마음이란 것은 귀신의 추기요, 문호요, 도로이다. 추기를 개폐하여 문호를 출입하며 도로를 왕래하는 신은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으니, 선한 것은 본받고 악한 것은 고쳐야 한다. 내 마음의 추기와 문호와 도로는 천지보다도 더 크다.32)
이에 따르면 대순사상의 세계관에서 마음은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천지인의 중추가 마음이라는 점이다. 즉 하늘의 베풂, 땅의 베풂, 인간의 베풂 이 세 가지가 모두 마음에 달려있으며 어느 것 하나도 마음이 부족하면 만사에 원한을 낳는다는 주장이다. 원한이 쌓여 적원(積冤)을 이룬다면 상극의 세상을 이루니 세상을 구하고 지상선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해원상생은 우주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우주적 측면에서 해원상생은 증산의 천지공사로 인해 만고로부터 내려온 오래 전의 원이 풀려나가고 상생의 후천이 이룩되는 천지의 대변화를 말한다. 인간적 측면에서 해원상생은 각자 묵은 원을 풀고 상생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는 베풂의 실천을 뜻한다.33) 따라서 해원상생을 통해 천지인의 중추인 마음의 베풂을 실천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둘째, 신명이 드나드는 통로가 마음이라는 점이다. 마음이 ‘신명’이 드나드는 도로로 비유되는 것은 마음이 ‘신명’을 드러내는 기관이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마음의 본질은 ‘신명’과 다른 속성의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신명’은 마음에 오가며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49일 동안 떡을 쪄서 정성을 드렸던 한 여인의 마음이 ‘신명’에게 사무쳐서 오색 채운이 달을 끼고 있는 현상을 만들었다는 일화는 마음이 ‘신명’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34)
요컨대, 대순사상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주체와 객체 개념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은 선과 악을 분별하고 궁극적인 선을 달성하는 일도 인간이 지닌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자각하고 이 세계에 선을 실현해 나가는 주체로서 인간성을 회복한다면 그 가치의 위대함이 천지에 비견될 수 있다.
또한 마음이 천지의 근원이 되고 또한 인간존재의 본질이 되고 있음을 『전경』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마음이 본체로 자리 잡고 있으므로 모든 천지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 또한 천지현상과 더불어 마음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천지와 신명세계의 근원에 해당하는 마음을 본체로 해서 파악할 때 비로소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본다.37)
이러한 마음은 인간에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바로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이다.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요,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되는 욕심이다.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言語) 행동(行動)은 마음의 표현(表現)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良心)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私心)은 물욕(物慾)에 의(依)하여 발동(發動)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原來) 인성(人性)의 본질(本質)은 양심(良心)인데 사심(私心)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을 감행(敢行)하게 됨이니 사심(私心)을 버리고 양심(良心)인 천성(天性)을 되찾기에 전념(專念)하라.38)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양심은 인간 삶의 본연적 상태이다. 천성 그대로의 삶이란 허욕에 이끌리기 이전의 순수한 상태이다. 이 상태는 도리에 지극한 마음, 즉 도심(道心)이다. 따라서 양심을 발휘하는 것이 도심에 이르는 길이다.
한편, 대순사상에서 사심은 곧 욕심으로 욕심은 인간의 원대한 가능성을 속박하며 고립시킨다. 그러한 고립은 근원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인간의 힘을 사물화한다. 사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고립되어 자기 외부의 대상을 극(剋)하는 상태의 마음이다.39)
그렇다면 양심과 사심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가? 대순사상에서는 양심은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고 그 잠재적 가능성의 발현을 근원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인존으로서의 인간 주체가 발휘할 수 있는 양심은 어떤 과정으로 나타나는가? 『대순진리회요람』에는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40)고 설명하였다. 즉 양심의 본체인 ‘무자기(無自欺)’ 수행을 통해 사심을 버리고 인성의 본질인 천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대순사상 에서 무자기란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뜻으로 『대순진리회요람』 훈회(訓誨)의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은 천지신명을 속이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천지가 다 아는 행위로 그릇됨의 원인이다. 즉,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고 진실하면 해원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해원상생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상생적 입장에서 무자기는 당위로 제시된다.
무자기는 타인 및 신계에 대한 앎과 진실성의 토대라는 측면에서 개인윤리 이상이다. 무자기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거짓의 나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 남을 이해하게 되면 미움이 사라진다는 측면에서 상생윤리를 지향한다. 즉 자신에게 진실하면 상대와의 관계에서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가정과 이웃의 화목으로부터 세계의 평화로 확장되어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무자기는 해원상생의 이념에 기초하여 공공윤리 차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다문화사회의 실천윤리에 정초함을 발견할 수 있다.
『대순지침』에 따르면, ‘척(慼)을 짓지 말고 남을 잘 되게 하여 해원상생 대도의 윤리를 실천하라’41)는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강조하며, 상생윤리의 생활화를 위해 ‘이웃과의 상부상조로 화합을 이룩하라’42)는 지침에서는 이웃과 더욱 친화를 두터이 하여 이해와 관용을 베풀 것이 상생의 진리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생이념을 지닌 대순진리의 관계적, 공동체의 관점이 보강될 때 무자기에 기반한 해원상생의 실천윤리가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정신개벽으로 발전할 수 있는 논거를 확인할 수 있다.
본 절에서는 증산이 서세동점의 시기에 내세운 개벽사상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특히 초국적 이주현상으로 등장한 다문화사회의 평화와 조화를 위해 대순진리회의 종교사상이 어떤 체계성과 연관성을 구축하고 있는 가를 확인하기 위해 대순진리회의 주요 종교 체계 - 종지, 신조, 목적, 훈회, 수칙 - 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순진리회의 종지(宗旨)는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이다. 이 중 해원상생은 원한을 풀고 서로 도우며 같이 살아감을 의미하므로 다문화사회의 평화를 구축하는 데 직접적 종지가 될 수 있다.
신조는 신앙생활에서 가져야 될 믿음의 조목으로 사강령(四綱領)과 삼요체(三要諦)로 되어 있다. 이중 사강령은 안심(安心), 안신(安身), 경천(敬天), 수도(修道)이고, 삼요체는 성(誠), 경(敬), 신(信)이다. 사강령 중 안심은 마음의 자세를 양심에 바탕을 두고 안정시킨다는 의미이므로 정신적 측면에서 공동의 복리를 추구하여 바람직한 세상을 구현해 나간다는 차원에서 다문화사회의 실천 덕목이 될 수 있다.
목적에는 무자기를 바탕으로 한 정신개벽, 전인적 완성을 이루는 인간개조로 지상신선실현(地上神仙實現),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와 관련하여 변화된 세계개벽으로의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이 있다. 이 중 인간이 내적으로 정신을 개벽하여 진실된 경지에 이르는 무자기는 상생윤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훈회는 첫째, 마음을 속이지 말라. 둘째,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 셋째, 척을 짓지 말라. 넷째,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 다섯째, 남을 잘 되게 하라의 다섯 항목이다. 이 중 다문화사회에 직접적 관련이 있는 계율은 다섯째, 남을 잘 되게 하라로 볼 수 있다. 남을 잘 되게 함은 이타적 상생주의의 발로이다. 특히 증산이 수운의 동학을 언급하면서 하층민에 속하는 상인과 천인을 잘 되게 해주었다는 언급은 기득권과의 타협적 상생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하며 소외된 계층을 위해 이타적 상생을 발휘하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43)
수칙 다섯 가지 가운데 다문화사회의 조화를 위해서는 넷째, 언동(言動)으로써 남의 척을 짓지 말며 후의(厚意)로써 남의 호감(好感)을 얻을 것이오. 남이 나의 덕(德)을 모름을 괘의(掛意)치 말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대순진리회의 종교사상은 종교 원리적(theoria) 체계성을 구축하고 있다. 이를 다문화사회를 상징하는 무지개를 바탕으로 도식화하면 <그림 1>과 같다.
나아가 실천적(praxis) 측면에서도 “도인은 훈회 및 수칙을 진실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훈회와 수칙을 준행하여 수도의 목적 달성에 전념하여야 한다. 도인은 훈회와 수칙을 준수하여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44)고 지행합일을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대순사상의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며, 인성의 본질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자 공동선(commune bonum)의 자세를 종교의 역할과 기능으로 볼 때, 대순사상의 양심 개념은 인존, 무자기, 해원상생과 연결될 수 있으며, 대순진리회의 종교사상은 이주민을 위한 환대의 윤리에 적합한 시상적 진보성을 도출할 수 있는 근원이 될 수 있다.
Ⅳ. 맺음말
환대의 의미를 어원적으로 분석해 보면, 환대를 뜻하는 ‘hospitality’는 적대감을 뜻하는 ‘hostility’로 합성어인 ‘host(이방인)-pet(힘)’과 같은 뿌리이다. 즉 불확실한 타자인 이방인은 힘을 가진 위협적 존재이면서도 궁금하고 매혹적인 존재이다. 우리말에 다른 곳에서 찾아오는‘손(客)’을 높여서 ‘손님’이라 부르고, 유교적 실천덕목으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라고 해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긴 전통이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살던 1970년 때까지도 대부분의 집에서 소중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그 시절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었지만 환대의 가치가 더 중요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울수록 타자에 대한 수용과 배려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타자인 손님 그 중에서 이주민과 함께하는 환대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초국적 시대 호모 미그란스인 한국 사회의 이주민들이 경험하는 환대의 수준과 질은 어느 정도일까? OECD 23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주민 환대지수 비교에서 201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하위권 수준(21위)이며, 특히 소통·문화 영역에서는 이주민 환대 수준이 최하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이주민 환대의 속성 가운데 수평성과 공생성에 비해 탈경계성의 발현이 매우 미흡함을 말해준다. 이러한 결과는 무엇보다도 소통·문화 영역에서 환대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 긴요함을 일깨워준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초기의 이민청 설립에서 현재 재외동포청 설립으로 정부조직 개편을 논의하는 시점에서 이주민을 위한 정책적 고려는 포용이나 인정을 넘어 환대의 시선 - ‘For’가 아닌 ‘With’의 시선 - 이 적극 요구된다고 하겠다.
본 연구는 초국적 시대를 맞아 이주현상을 회피할 수 없는 글로벌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시대적 징표를 인식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와 종교인의 실천적 테제로 환대를 탐색할 때, 대순사상의 ‘양심’을 중점적으로 조망하였다. 대순사상의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며, 인성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먼저, 초국적 이주 현상에 대한 환대의 종교사상을 탐색하기 위하여 종교별 대응 양상과 사례를 배타성, 포용성, 다원적 인식의 세 가지 분석틀을 통해 조망하고 환대의 관점에서 비평하였다. 연구결과, 한국 사회의 종교적 인식은 주로 주체 중심적 윤리관에 입각하고 있으므로 평화의 착근(着根)을 위한 실천 윤리로는 제한점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데리다가 언급한 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있고, 낯선 이방인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열린 종교의 모습을 탐색하였다. 아울러 환대를 타자를 대함에 있어 ‘자아의 확장’을 시도하는 태도로 보고, 종교적으로 자아의 확장은 공생의 관계를 넘어 상생의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도출하였다.
나아가 타자화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대순사상의 ‘양심’을 중심으로 이주민과 함께하는 무조건적 환대의 종교사상을 탐색하였다. 대순사상에서 마음은 천지의 근원이 되고 또한 인간 존재의 본질이 되고 있다. 즉 인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마음은 인간에게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양심’과 ‘사심’이다.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요,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되는 욕심이다.
그렇다면 양심과 사심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대순사상에서 양심은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고 그 잠재적 가능성의 발현을 위해 근원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 즉 마음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를 통해 사심을 버리고 인성의 본질인 천성을 되찾는 것이다. 나아가 척을 짓지 않고 남을 잘되게 하려는 해원상생의 이념은 개인윤리를 넘어 공공윤리 차원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생이념을 지닌 대순사상에서 관계적, 공동체의 관점이 보강될 때, 무자기에 기반한 해원상생의 실천윤리가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정신개벽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다문화사회를 위한 대순사상의 진보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기존의 선행연구가 주요 개념 위주로 분석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대순사상의 체계성을 부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음을 먼저 지적하였다. 그리고 대순진리회의 주요 종교 체계 - 종지, 신조, 목적, 훈회, 수칙 - 를 중심으로 다문화사회의 평화와 조화를 위해 대순진리회의 종교사상이 어떤 체계성과 연관성을 구축하고 있는 가를 확인한 결과, 종지에서는 ‘해원상생’을, 신조에서는 ‘안심’을, 목적에서는 ‘무자기’를, 훈회에서는 ‘남을 잘되게 하라’를, 수칙에서는 ‘후의로써 호감을 얻어라’를 추출하여 지행합일적 종교사상 체계를 구축하였다.
요컨대, 다문화사회의 조화와 평화를 지향하는 대순진리회의 종교사상은 초국적 이주시대에 이주민을 위한 환대의 윤리에 적합한 사상적 진보성의 체계로 발전시킬 수 있음을 탐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