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대순진리의 해원(解冤)사상에 대한 해체(解體)론적 이해: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론을 중심으로

김대현 1 , *
Dae-hyeon Kim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성균관대학교 박사
1Ph.D., Department of Eastern Philosophy, Sungkyunkwa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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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Sep 16, 2021; Revised: Nov 17, 2021; Accepted: Dec 09, 2021

Published Online: Dec 31, 2021

국문요약

‘해체(解體, déconstruction)’는 현대철학을 특징짓는 속성의 하나인 창발성(創發性, emergent property)을 유도하는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 탈피를 거듭하여 개체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낳고 이로부터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에 이르러 근대라는 역사적 방점 하에 철학의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하지만 철학은 근대마저도 그러한 해체를 통해 그 이상의 가능성을 바라보고자 했다.

근대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인문적 완성으로 신과 인간의 묘한 동거를 꿈꾼다면 현대철학은 해체를 통해 그마저도 거부한다. 플라톤류의 고전적 형이상학은 절대자를 중심으로 순치된 안정된 체계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신과 종교를 토대로 할 수밖에 없고 인간의 자율성 또한 신 아래의 자율성일 뿐이다.

현대철학은 해체를 통해 인간 본연의 목소리로부터 철학을 시작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형이상학에 종속된 인식론이 아닌 인간 실존으로부터의 인식론을 구축하고 자유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해체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그렇듯 해체 또한 인간의 자유라는 근대적 화두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해체와 인간의 자유는 결국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몸인 것이다.

묘하게도 종교적 신앙성과 전통적 보수성을 주된 색채로 할 것만 같은 대순사상은 현대적 창발성을 가지고 있다. 대순사상을 창시한 증산이 활동하던 한국의 시기는 역사를 해석하는 예리한 시각이 있는 이들에게는 보물과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외세에 의한 답습이 아닌 주체적 문제의식 가운데 새로운 세상과 인간의 자유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강렬한 염원에 의한 사상적 활동이 펼쳐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국의 자생적 창발성이 낳은 비권력적 사상이 바로 흔히 말하는 한국 근대의 신종교인 셈이다. 그 가운데서 대순사상은 참동학으로서 증산의 명맥을 잇고 증산이 남긴 해원의 개념 속에서 근대를 넘은 현대의 가치를 현실 가운데 펼치고자 한다.

대순사상의 해원은 근대를 넘은 현대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철학의 해체와 상통한다. 해원은 첫째로 단주로부터 발현된 인간 실존의 원초적 억압에 따른 근본 원(冤)의 해소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 대순사상의 해원은 인존이라는 해원적 실존을 중심으로 천지인 삼계의 해원을 아우른다.

데리다의 해체가 인간과 사회 내부에 잠재된 보이지 않는 구조와 속박의 틀을 드러내고 그것을 파기하는 것으로부터 억압을 풀고 인간의 근본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 것은 대순사상의 해원이 천지인 삼계를 휘감고 있던 근본 억압을 풀어 삼계의 대립을 상생으로 개방하고자 한 점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Abstract

‘Déconstruction’ is a system of thought that induces the emergent property that characterizes contemporary philosophy. The tradition of ancient Greek philosophy evolved over and over again, giving rise to the Renaissance and Enlightenment. It seemed to have reached its end under the historical perspective of modernity. However, contemporary philosophy wanted to see more possibilities through the deconstruction of modern philosophy.

If modern philosophy dreams of a strange cohabitation between God and man with the humanistic completion of Plato’s philosophy, modern philosophy rejects even that through deconstruction. Although Plato’s classical metaphysics is a stable system centered around the absolute, it is ultimately based on God and religion. Under that system, human autonomy is only the autonomy bestowed by God.

Contemporary philosophy is one of the results of efforts that try to begin philosophy from the original human voice through deconstruction. Instead of epistemology dependent on metaphysics, they wanted to establish epistemology from human existence and realize the best good that would set humans free through deconstruction. As such, it is no mistake to say that deconstruction is also an extension of the modern topic of human freedom. Deconstruction and human freedom act as one body in that the two cannot be separated from each other.

Oddly enough, Daesoon Thought, which seems to have religious faith and traditional conservatism as main characteristics, has an emergent property that encompasses modern and contemporary times. The period of Korea, when Kang Jeungsan was active and founded Daesoon Thought, has an important meaning for those who have a keen view of history. Such individuals likely think that they have found a valuable treasure. This is because that period was a time when ideological activities were conducted due to an intense desire to discover the meaning of human freedom and envision a new world without copying the ways of the West. Instead they looked to face internal problems and raise people’s awareness through subjectivity.

In other words, the subtle ideas created by Korea’s self- sustaining liberalism often take the form of what is commonly called new religions in modern times. Among these new religions, Daesoon Thought, as a Chamdonghak (true Eastern Learning), aims to spread a particular modern value beyond modern times through the concept of Haewon (the resolution of grievances) that was proclaimed by Jeungsan.

The Haewon espoused in Daesoon Thought is in line with the disbandment of modern philosophy in that it contains modernity beyond modern times. First, Haewon means to resolve the fundamental resentment of human existence, which arose from Danju’s grievance. Secondly, Haewon in Daesoon Thought encompasses the Haewon of the Three Realms of Heaven, Earth, and Humanity centers on a Haewon-esque style of existence called Injon (Human Nobility).

Haewon in Daesoon Thought can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as Derrida’s philosophy of Deconstruction. Modern deconstruction attempts to expose the invisible structures and bonds within human society and attempt to destroy them. In a similar way, Haewon endeavors to resolve the conflicts among the Three Realms by releasing the bonds of fundamental oppression that hinder the Three Realms of Heaven, Earth, and Humanity.

Keywords: 해체; 차연; 해원; 상생; 인존; 자유; 평등; 평화
Keywords: déconstruction; différance; haewon; sangsaeng; injon; freedom; equality; peace

Ⅰ. 서론

본 연구의 목적은 대순진리의 ‘해원사상’을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을 통해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원사상에 관한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주로 인간의 정서적 ‘한(恨)’과 그에 따른 윤리 도덕적 선(善)을 다루는 주제가 다수였다. 본 연구주제는 대순사상의 주요 개념을 좀 더 철학적이며 개념적인 측면에서 천착하고자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을 분석의 틀로써 활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학술적 입장에서 대순사상의 현대적 실험성을 부각하는 계기로서 작용할 것이라 보여진다.

대순사상 연구의 발전에 대해 이러한 작업이 가지는 의의는 대순사상의 현대적 특성을 발굴하여 현대와의 대화를 유도하는 데 있다. 대순사상은 시대와 역사적 요구에 대한 사상적 반응으로 유럽과 영미 사상이 보여준 현대적 반향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화권의 영향 하에 있던 한국의 사상이 현대성과 독자성을 가지고 발현된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될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체가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유와 평화이며 해체의 보편적 대상은 구조이다. 해원이 지향하는 것도 또한 자유이자 영원한 평화이며 해원의 대상은 인간의 의식과 세계를 구속하고 있는 원(冤)이다. 이러한 대순사상과 자크 데리다의 지향점을 중심으로 양자를 묶고 그 실현 방식으로서의 해원과 해체를 비교분석하는 것을 방법론으로 한다.

사상은 시대에 대한 반향이다. 그래서 하나의 사상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해원은 선후천이라는 방식으로 역사를 나눈 것의 근거이고 해체는 근대와 탈근대라는 방식으로 시대를 나눈 것의 근거이다. 근대에 대한 비판은 도구적 이성,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형이상학적 구조에 있고 선천에 대한 비판은 원과 허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동일한 맥락이 있다. 여기에서부터 공통분모를 모색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사상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공간에서 담론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하다. 개념의 공간은 곧 소통의 공간이다. 사유와 언어의 색채가 달라도 무색무취의 개념적 공간에서는 소통이 가능하다. 특히나 종교적 언어는 색채가 강하다. 그 색채만 강조하면 사상적이며 대중적인 공감을 이끌기 어렵다. 본 연구는 그런 점을 깊이 감안하여 해원사상이 가진 메타논리적 특성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해체론과 해원사상의 사상적 배경

1.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

플라톤류의 전통적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적 체계에 의한 수직적 구조에 따른 사회 정치적 계급 형성의 문제, 존재자의 결핍의 문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 인간의 우생학적 차등의 문제를 발생했다. 포스트모던적 입장에서 볼 때 근대철학은 그 비판과 해방성에도 불구하고 그 기조에 있어 형이상학적 보수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해체론의 형이상학적 해체의 방향은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냉소에 있는 것이다.

철학사에서 이러한 해체론은 현대의 전유물인 것만은 아니다. 철학사 전체를 조감해 보더라도 보편주의ㆍ정신ㆍ이성이라는 철학적 전통과 개체주의ㆍ육체ㆍ감정이라는 비주류적 성향의 대치 구도 가운데 해체는 늘 있어왔다. 예를 들어 서양철학의 근본 뼈대를 형성했던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절대주의가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대립했던 양상 가운데도 해체론의 맹아가 발견된다.1) 물론 소피스트의 사상 자체가 현대의 해체론이 가진 창발적 운동성과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플라톤 식의 절대주의가 양산하는 표상성과 전체성에 대해 충돌하는 양상만큼은 충분히 현대적 창발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해체론은 세련된 체계를 통해 하나의 트렌드를 구축하게 된다. 니체를 위시하여 후설ㆍ하이데거ㆍ들뢰즈ㆍ데리다와 같은 이들은 기본적으로 해체가 가진 자유와 해방 그리고 창발(創發)의 역능을 인정하고 그것을 그들 철학의 기조로 삼았다. 니체는 기독교의 일원론적 체계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며 인간 개체로부터 신성을 발견하고 자유를 얻고자 했다. 이것은 플라톤적 일원론과 대치했던 소피스트들의 다원성과 어느 정도 유사한 행태를 가진다.

한편, 해체가 가지는 전통에 대한 대항적 성향에 대해서 편견과 오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 흔히 해체를 막연히 자유분방하고 종잡을 수 없는 혼돈과도 같은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적어도 현대의 해체론에 대한 커다란 오해이자 결례라고 할 수 있다. 해체라는 것은 오히려 전통 철학과의 저항 가운데 전통의 가치를 재해석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가 강하다. 다시 말해 전통을 버리는 것이 아닌 전통이 가지는 가치를 현대로 끌어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만큼은 소피스트가 정치적으로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극적으로 대립했던 양상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체한다는 것은 형이상학과 전혀 관계없는 것에 토대를 세우고 그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의 기원으로 회귀하여 형이상학의 본성과 역사를 되짚어보며 그 본질과 가치의 훼손을 점검하고 훼손의 원인으로서의 억압과 왜곡을 걷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에서 형이상학 자체가 부정되거나 그 본질적 가치가 말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그 재건에 힘쓰는 것이다.2) 하이데거에 따르면 해체란 형이상학의 근원에 있으면서 형이상학에 감추어져 있는 시작의 법칙을 다시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형이상학적 근원에 대한 시원적이고 참된 관계를 회복하는 절차이다.3)

구조주의의 한계로부터 그 극복을 위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범형적 시도가 포스트-구조주의를 낳았다면,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구조주의의 이분화된 기본 명제의 근본으로부터 그 문제 의식을 갖고 그 논의를 가속화했다. 데리다는 1966년 10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비평의 언어와 인문과학(The language of criticism and science of man)’이라는 기조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서 인문과학의 언술 행위에 있어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se of human science)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플라톤을 전통으로 한 서구 형이상학과 구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포스트-구조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데리다의 주장에 따르면 구조주의에는 근본적으로 구조나 기호라는 개념에 의미가 파생되는 중심이 현전(presence)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구조나 기호의 내부에는 구조나 기호들 사이에 통일성과 조직성을 근거해주는 확정된 근원(origin)ㆍ명제화된 진리(truth)ㆍ단일한 목적(telos), 독단적 절대(absolute)가 현존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환상(illusion)과 자취(trace)이자 대체물(substitute)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를 대상으로 한 데서 잘 확인할 수 있는데 그에게 있어 의미화(signification)로서의 음성과 문자 모두는 로고스적 중심이 결핍으로 드러난 결과인 것으로 이해된다.4) 로고스적 중심에서 음성과 문자가 가진 본래적 의미는 음성과 문자로부터 독립되며, 음성과 문자의 유희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구조나 기호 사이들에 통일성과 조직성을 형성해주는 중심, 즉 고정된 근원, 진리, 목적, 절대의 현존을 해체한다. 그것을 통해 표층의 기호와 구조는 단일한 중심으로부터 해방되어 그 스스로 내부의 생성운동을 통해 유목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기표와 기의의 상호 조직성 가운데 의미를 형성하거나 의미 형성의 중심 가운데 순치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 텍스트의 의미는 기호 내부의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생성적 정의에 의해, 또는 그 정의가 포괄하고 있는 다른 기호들에 의해 끊임없이 유목하고 창발하는 특성을 가진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기존 질서 체계의 내부로 침투해서 절대적 진리로서 왕관을 쓰고 있던 고정된 중심 맥락을 파기하는 것이다. 그 중심 맥락이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두 모순 테제를 해체를 통해 생성의 운동으로 재조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데리다의 이러한 전략은 미셀 푸코가 그의 광기론에서 이성의 권위 하에 비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소외되고 탄압되었던 광인을 재인식시켜 이성과 비이성의 모순성을 드러낸 가운데 이 양자 간의 생성적 통합을 시도한 것과 유사하다.

데리다의 해체를 표현하는 개념으로서의 반복은 글쓰기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대상의 표면적 모방을 통한 텍스트의 나열 반복이 아니다. 반복되지만 반복의 그 순간순간은 늘 새로운 것으로 나아간다. 근원적 원리는 조직화 위계화 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반복을 통해 수없이 현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해체 가운데서 실존으로서의 현재는 시간의 순치성을 넘어선다. 순치적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시간 가운데 현존하며 텍스트 내부에 무한생성하는 의미 가운데 기호적 차이를 형성하고 지연작용인 차연을 통해 내적 충만함을 유지한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있어 기호는 결핍된 표층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기호는 반복과 차연을 통해 그 겉면이 파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5)

데리다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텍스트의 통합으로 보고 있으므로 고립적인 존재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텍스트는 서로 교차한 상태로 무한 확장하는 통일적 특징을 지니는 것을 기본 전제로 지속적인 상호작용 내지는 상호텍스트성으로 그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상호텍스트성이란 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사이의 상호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다른 텍스트를 병행, 인용하는 가운데 기존의 상부 구조인 이분법적 방식을 파기하고 모순되어 닫혀 있던 양자 간의 열린 구조를 제시한다.6)

요컨대, 해체적 입장에서 데리다가 가장 비판을 가하는 것이 구조주의다. 구조주의의 이분법적 사유 체계와 패러다임은 차연에 의한 의미의 불확정성을 억압한다. 그러한 사고의 틀을 모든 텍스트 분석에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기표는 하나의 결핍이자 벽이 될 뿐이다. 구조주의자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가설적 틀이 정밀성을 가질 수는 있어도 데리다의 입장에서 이것은 근본적 가능성에 대한 억압이고 통제일 뿐이다.

2. 대순진리의 해원사상

해원사상은 대순진리회의 신앙의 대상인 증산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해원이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는 상생의 원리로 운행하는 후천이다. 인간과 우주 만물이 지닌 원(冤)을 모두 풀어서 상극의 감정이 발생하지 않는 궁극적 경지가 상생인 것이라 수 있다. 따라서 상생은 해원과 더불어 후천을 지배하는 주된 원리이며 이상향이다.7)

그가 후천선경을 열기 위해 인세에 하강하여 천지를 뜯어고친 천지공사의 주요 원리도 이 해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8)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에 인해서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리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 기록의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

『전경』의 공사 3장 4절을 보면 해원은 영원한 평화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단주의 원을 통해 보여지듯 해원은 단순히 일상적 감정의 해소를 넘어 인류사 전체를 지배해온 중추적 대립 감정의 해소라 할 수 있다.9)

이상의 맥락을 볼 때, 해원은 영원한 평화와 관련이 있고 선천에서 지속적 평화가 불가능했던 원인이 중추적 대립 감정으로서의 근본 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립 감정이란 곧 상극이라 할 수 있고 원을 맺음으로써 상극의 구조는 고착화되어 세계는 평화로부터 멀어져 온갖 참화와 전쟁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해원은 오랜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요구된 억압과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요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억압으로 인해 실존의 주체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 즉 상극의 가치관에 지배된 것이다. 따라서 대순진리의 해원사상은 기나긴 역사 가운데 생성돼 온 개인 실존의 상극적 감정의 근본을 해소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증산은 그 뿌리를 단주의 원으로부터 찾았고 해원공사도 그로부터 시작했다.

이경원의 연구에 의하면 해원이념의 주요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인간주체성의 재발견ㆍ우주적 종교진리의 출현ㆍ상생을 통한 가치실현’이라는 이 세 가지가 그 개요이다. 먼저 인간 주체성의 재발견10)은 인간의 자유와 본성회복과 관련된다. 인간의 욕망을 자유롭게 발휘하게 하는 것으로써 자아의 발견을 유도하고 자기실현의 자율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해원시대’는 억압과 차별로부터 개인을 해방하여 개인의 자율적 성장과 자유 그리고 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해원 이념에서 해원은 인간 주체에 대한 성찰과 깊이 관련되는 것이다.11)

다음으로 우주적 종교진리의 출현은 대순진리에서의 해원사상이 근원적 차원에서의 해법을 요청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의 우주적 차원이란 천지인 삼계가 모두 해원의 필수적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12) 형이상학적 신도 물리적 자연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인간 또한 독단적인 권위로써 중심에 서지 않는 천지인 삼계의 존재 진리의 중심이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우주적 차원의 해원이다.13)

끝으로 상생을 통한 가치실현에서 해원사상은 상생의 원리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것이다. 해원 사상은 궁극적으로 대립과 투쟁이 없는 상생을 지향한다. 인간과 우주 만물이 원이라는 구조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억압의 감정 없이 서로를 일체감으로 대할 수 있는 경지가 해원에 의해 도달하는 상생의 단계이다. 해원과 상생은 서로 유기적 관계로 상생은 해원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로써 해원상생은 후천을 여는 대순진리의 중추적인 개념으로 독창성을 가지게 된다.14)

증산의 천지공사에 대한 내용 가운데 공사 3장 5절은 해원사상의 주요 목적에 대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또 상제께서 가라사대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제각기 사상이 엇갈려 제각기 생각하여 반목 쟁투하느니라. 이를 없애려면 해원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고 천지의 도수를 조정하여야 하고 이것이 이룩되면 천지는 개벽되고 선경이 세워지리라」 하셨도다.

해원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고 천지의 도수를 조정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볼 때 해원은 경계를 두고 서로 대립하는 대상들 사이의 소통과 조화를 목적으로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주의 원이 인간 실존의 보편적 원한 감정으로 해원의 대상으로서의 원의 메타 심리학적 측면이라면 이 구절에서의 원은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에 의한 인류 사이의 반목 투쟁으로 원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말한다. 지기 사이의 경계로 인한 대립이 인류 사이의 기질과 성격에 차이를 만들어 원을 형성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볼 때 해원사상은 데리다의 해체가 가지는 전통 형이상학의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인류학적 구조가 엮어낸 개체들 사이의 대립적 요소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이것의 해소를 통해 생성(生成, becoming)적 일체감을 형성하여 영원한 평화와 자유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맥락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양 사상의 체계가 가지는 범위가 대순사상의 경우 언어의 영역에 특성화된 데리다의 체계보다 그 영역의 폭이 넓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개체들 사이에 맺힌 불협화음의 원인을 대립성과 상극으로 보고 이것을 일의성(一意性, univocité)으로 조화15)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Ⅲ. 해체에서의 구조와 해원에서의 원

1. 해체에서의 구조

구조주의는 그 과학적 접근 방식으로 실존주의가 지배하던 낭만적 트랜드를 와해하고 새로운 철학적 사조로 나타나게 되었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구조화된 역사, 구조화된 의식을 고발한다. 구조주의의 과학적 패러다임은 인식론의 정형성을 물리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고 진정한 자유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

해체주의는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다시 철학을 재건하고자 했고 그 문제의식의 중심에는 구조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해체주의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구조주의적 접근법 자체를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하나의 한계로 해석하며 새로운 철학으로의 도약지점으로 삼는다. 해체주의가 구조주의를 비판하는 지점은 구조주의적 사고 틀 내부에 있으며 구조주의자들이 남겨둔 모순을 지적하는 것에 있다. 즉 구조 자체인 것이다.

구조는 정형화된 테제들 사이의 조직화이다. 그 조직화의 가장 심장부에 있는 것이 바로 이분법이다. 이분법은 구조의 극단에 있으면서 이율배반적 특성을 가진다. 양자가 다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동일한 기능을 한다. 존재와 무의 모순은 그 대표적인 이율배반의 예가 된다. 구조주의는 이것을 통해 세계와 인간의 의식 그리고 언어의 생리를 규정짓는다.

그런데 이 이율배반을 지양하지 않으면 결국은 양자 사이에 계급과 높낮이가 발생한다. 경계로서의 기능은 확실하지만 그 경계에 의해 모든 영역에는 위계와 선후의 차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본체와 현상 사이의 위계 문제도 매우 유서 깊은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이었다. 본체는 영원불변하는 실체이며 현상은 생멸하는 허상으로 주로 본체는 현상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중국의 음양오행설이 남존여비의 근거로 작용한 경우도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구조주의 인류학의 대표자인 레비-스트로스는 인류가 자연 상태로부터 문화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 문화의 핵심부에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라는 테제를 설정해두었다고 분석했다. 근친상간의 금기를 통해 친족의 체계가 서기 시작하고 이것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이 정해진다. 즉 개체의 정체성은 근친상간의 금기에 의한 친족체계를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해체주의가 해체를 통해 근친상간의 금기를 파기하고 그 반대의 것을 옹호한다는 것이 아니다. 해체주의는 개체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인식론적 자유의 문제와 관련된다. 구조주의는 생물학적으로는 생존과 관련되고 사회 정치적으로는 권력과 계급의 문제와 연관된다. 해체주의는 이 위선을 파기하고 위선이 가리고 있던 본래의 진리와 자유를 끄집어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진리 그 자체의 모습을 자각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주의의 지향점에 의해 이 사조는 세 가지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 첫째, ‘인간주체’에 대한 재성찰의 결과로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근대의 합리적 주체를 해체하여 욕망의 주체로부터 주체와 객체를 이분화하지 않도록 재건했다는 점이다. 신적 권위에 이끌리던 세계관에서 벗어난 르네상스 이후 개인은 역사 문화적 지배를 벗어나 지적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데카르트에 이르러 합리주의적 인간 주체의 개념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해체주의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만 보는 인간에 대한 이들의 관점에서 벗어나 합리적 주체성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거의 소멸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욕망하는 주체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둘째, 표상화된 추상성의 권위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이항 대립 또는 이분법을 거부한다는 것이 이것과 관련이 있다. 실체의 추상성을 표상화 하면 결국은 이항 대립에 이르게 된다. 이항 대립 상태에서는 두 요소 중 어느 하나에만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는데 데리다는 이것을 당위적으로 참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추상을 통해 다다른 두 개의 대립자는 사실 서로가 서로를 안고 있는 상태로 있는데 이것을 표상화할 때 서로 분리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분법적 사고는 진리를 왜곡하는 당위적 거짓에 의한 사유의 틀에 지나지 않게 된다. 데리다를 위시하여 리오타르 또한 근원적 실체와 같은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나 ‘그랜드 내러티브(grand-narrative)’에 대한 맹신의 붕괴를 강조하며,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류의 거대 서사에 대한 설득력이 희박하다고 주장했다.16)

셋째, 이성의 도구로서의 언어의 표상적 기능을 부정하고 미학적 유희적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일대일의 종속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둘은 끊임없는 분화와 결합의 생성 운동을 반복할 뿐이다.

이와 같이 구조의 해체에 대한 데리다의 입장을 살펴보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통 서구철학의 로고스중심주의적 전통이 가진 억압성을 이항 대립에서 찾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항 대립은 대순사상으로 볼 때 일종의 상극의 분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서구 철학이 보여준 말과 문자의 이분법적 대립 구조를 통해 억압과 억압이 반전되는 상극의 구조를 보여준 것이다.

2. 해원에서의 원(冤)

해원에서의 원은 선천의 모든 불행, 불상사의 원인이다.17) 원의 사전적 의미는 굽다ㆍ무실의 죄ㆍ원한, 앙심ㆍ오랜 죄업ㆍ오랜 업ㆍ세속에서의 원ㆍ속이다 등의 뜻이다.18) 사전적 의미를 볼 때 선천의 불상사의 원인으로서의 원에 가까운 의미는 원한ㆍ오랜 죄업 세속에서의 원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원의 자의를 분석해 보면 굴레에 갇힌 토끼의 심정과 관련이 있다. 하나의 생명이 굴레에 갇혀서 자신의 자유를 잃고 구속된 상태이다. 여기에서의 굴레와 구속은 인문적 의미로서 깊은 심도를 가진다. 구속은 단순히 타자의 행위에 대한 물리적 구속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나아가 하나의 존재자가 자신의 본래성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 상태로도 볼 수 있다.

굴레는 존재자를 통제하고 구속하는 일종의 구조일 것이다. 이 구조 속에 억압된 개인은 무엇보다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부정적 감정이 선천 세계의 대립과 투쟁을 야기하는 최상위의 감정상태라고 할 수 있다. 원에 의해 발생하는 개인적 감정은 연쇄반응을 가지며 하나의 개인에 그치지 않고 천지인 삼계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대립적 감정임과 동시에 개인을 본성으로부터 유리하여 표층적 자아에 머물도록 구속하는 심리적 족쇄가 된다.

따라서 대순진리의 해원이념에서 원은 단순히 일상 감정에 속한다고 볼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인간을 지배하여 선천 시대의 삼계 전체를 지배해온 실존의 중추적 감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19) 원은 행위를 유발하는 감정적 원동력으로서 그것이 세계 전체를 이끌어온 보편적이며 실존적인 힘으로서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원의 감정은 개인 감정이 아닌 단주의 원이라는 원초적 불씨로 시작하여 오늘날의 세계를 진멸 지경으로 몰게 된 세계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개인의 원은 그 자체에서 그치는 감정이 아닌 또 다른 원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감염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원은 심리학과 원, 형이상학과 원, 선천 역사와 원과 같은 관계 설정이 가능한 범주적 개념이다. 대립과 상극, 위계에 의해 생겨나는 형이상학적ㆍ시공간적이며 사회ㆍ인간학적인 경계와도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원이 선천 역사를 가동해온 하나의 동기라는 점이다. 이경원이 원을 중추적 감정이라고 한 점은20) 해원의 대상으로서의 선천 역사의 부정적 원동력으로서의 원이 가진 대표성 내지는 근본성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지공사를 해원을 위주로 한 증산의 의도는 후천의 영원한 평화와 자유의 세계를 위한 천지운행의 구조를 대전환시키고자 한 것이다. 대전환이라는 말처럼 완전히 다른 성격의 세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이전 세상이 가진 원리에 대한 안티테제에 의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포원에 대해 반대되는 해원인 것이다. 대상들 사이의 원이 풀리면 서로 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서로가 일체로서 존재하게 되므로 반목 쟁투가 사라진다. 이러한 이유로 증산이 해원을 위주로 한 천지공사는, 데리다가 음성과 문자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여 양자 간의 통일21)로써 텍스트의 잠재된 의미를 개방하려고 했듯이 천상과 지하ㆍ신명과 신명ㆍ인간과 인간ㆍ인간과 여타의 모든 사물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서로가 하나로서 조화되도록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Ⅳ. 해체와 차연 그리고 해원과 상생

1. 해체와 차연(差延, différance)

데리다의 해체론에서 차연을 빼놓을 수 없다. 차연은 차이의 시간ㆍ공간적 연속 내지는 지속성을 표현하기 위한 그의 조어로 후기구조주의의 생성적 사유의 모범을 보여주는 거대한 개념이다. 그는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의 전통을 형성한 이성 중심 철학의 전통을 해체했는데 그 해체의 원리가 바로 차연이다. 데리다의 차연은 감각과 이상의 대립구조에 저항한다.22)

전통적인 대립 (이원) 구조를 저항하는 체계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차연이다. 이 차연은 두 개의 차이와 두 개의 알파벳을 지녔고, 이원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으며, 일반적 의미에서, 문자도 음성도 아니며, 한 시간 정도 여기 여러분들과 문자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는 본인을 함께 있게 하는 이상한 공간으로써, 말과 문자 사이에서, 말과 문자가 각기 다른 것이라는 우리의 환상을 자주 다시 확고히 해주었기에, 여태 한번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문자가 지닌 이 소리 없는 친근함을 뛰어넘는다.23)

위 데리다의 텍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차연은 이원 구조를 파기하며 문자와 음성 사이의 관계 설정을 재정립한다. 문자와 음성 사이의 이원적 대립 외에도 선과 악, 참과 거짓, 현상과 본질,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이원 구조의 바로 이면에 사태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데리다의 해체는 바로 이 같은 이항 대립의 구조가 가진 물상화를 파기하고 차연을 통해 해체의 전략으로 전환한다.

차연은 기호의 공시성과 통시성의 동시적 현존을 나타내고자 한다. 공시성 가운데서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 문제를 통시성 가운데서는 한 기호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적 잠재성을 포괄하고 이것의 잠재적 의미를 한정하지 않고 지연시킨다. 여기서 ‘차연’은 구조주의의 ‘차이’의 개념과 상반된다. 차연은 데리다가 전통 형이상학의 기원적이며 고유적인 특성을 뒤집은 사유이며 차이는 전통 형이상학의 구조 체계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차연의 논리를 통해 음성과 문자 간의 대립을 넘어서게 만든다.

이 차연이 감각이나, 심지어 소리와 빛보다도 절대적으로 선행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를 들어 소리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 이 둘 사이에 자연적인 서열관계가 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니겠는가? 문자 이미지는 보여지는 그 자체가 아니며, 소리 이미지는 들리는 그 자체가 아니다. 음성에만 완벽한 통일성이 있고, 문자에는 없다고 전제해온, 음성과 문자와의 차이[서열], 즉 음성의 완벽한 통일성, 혹은 음성의 완벽한 통일성이라고 전제해왔지만, 실은 이것을 점령하고 이것보다 선행해 존재하는 차연이 만든 음성 속의 차이는 들리지 않는다.24)

이러한 데리다의 서술을 볼 때 음성과 문자 간의 대립과 서열은 곧 차연의 무한성과 잠재성에 한계를 정하는 것과 같고 양자를 차연을 통해 균질화하는 것은 의식의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것으로 볼 때, 기표의 상위에서 군림한 초월적 기의는 기표와의 대립 가운데 얻어낸 권력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대립이 가져오는 한계를 극복할 때 기표와 기의 모두가 서로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이 방법론을 데리다는 차연에서 찾은 것이다.

해체는 구조주의가 내세우는 이항대립이 결국은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하는 것을 기점으로 상징체계에 고착화된 의미와 구조를 씌우는 것이 권력적 허구임을 고발한다. 데리다의 해체는 서양 사상 체계 내부의 이데올리기성을 제거함과 동시에 숨겨져 있던 서양 철학의 가능성을 개방하고 있다. 그 가능성은 차연에 따른 의미의 지속적 팽창, 불확정성, 즉 텍스트로부터 하나의 우주를 발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요컨대, 해체는 원형성의 회복, 본래의 것에 대한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 구조라는 것은 원형성을 속박하는 틀이며 속박은 곧 대립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차연은 곧 그 차꼬를 푸는 열쇠와 같다. 구조주의가 억압의 현실을 드러냈다면 데리다의 후기구조주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전망했다고 볼 수 있다. 대순사상의 선천 또한 억압의 요소가 있으며 이것에 대한 해방의 의미로 해원의 원리가 요청되었다고 연관지어볼 수 있다.

또한 해체가 본체와 현상, 기표와 기의의 거리 좁히기와 관련이 있듯이 해원은 천상과 지하의 거리 좁히기와 연관이 있다. 『전경』에 천상과 지하의 경계에 대한 구절이 있다.25) 천상이 초월적 기의라면 지하는 기표에 해당할 수 있다. 이 양자의 대립으로부터 경계의 개방을 통한 상생에서 데리다의 차연을 발견하게 된다. 본래성과 완전성은 오직 대립자들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좁혀진 상태이므로 해원과 해체의 논리적 서사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해원과 상생(相生)

해원과 상생이 대순사상의 이념적 가치를 내재한 만큼 대순사상 연구자들은 여러 견해를 들어 분석의 결과를 내보였다. 해체와 차연의 개념 구조와 유사한 맥락을 가진 견해와 관련하여 살펴볼 만한 몇 가지 대표적인 연구 결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항녕은 대순사상의 해원사상에 대해 동체의식에 근원하는 정화의 정신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정화’란 천지만물의 일체성을 회복하는 작용을 말한다. “어느 한 곳이 막히면 전체가 막혀 천하의 순환이 어렵기 때문에 그 막힌 곳을 뚫어서 전체를 정화시키면 천하가 통정되어 순환이 잘 된다.”는 통정과 순환의 의미로써 해원과 상생의 사상을 풀이한다. ‘동체의식’은 각각의 대상이 서로를 하나로 인식하는 의식인데 원은 동체의식을 분리의식으로 유도한다. 따라서 해원은 동체의식을 회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기재인 것이다.26)

최동희는 칸트(1724~1804)의 세 가지 관계 구도인 실체관계(實體關係)ㆍ인과관계(因果關係)ㆍ상호관계(相互關係) 가운데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봤을 때 가장 고양된 관계가 상호관계인데, 이것은 후천이 지향하고 있는 자유와 평등의 인간관계와 관련된 개념이므로 이 ‘상호관계’를 ‘해원상생’ 측면으로 해석하고 있다.27)

이경원은 해원의 의미를 인간에게만 국한된 감정이 아닌 ‘인간계와 신명계의 모든 원과 한을 푼다는 대의(大義)’ 가운데서 찾고 있으며 ‘서로를 잘 되게하기 위해 힘쓰는 관계’를 상생으로 보고 있다. 상생은 반목ㆍ쟁투, 억압ㆍ차별이 없고 인간과 신명 사이의 모순과 불평등의 상극 원리를 넘어서 서로가 일체를 이루어 세계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해원상생은 인간만이 아닌 ‘인간계와 신명계의 모든 원한을 풀어 상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체와 조화의 이념’이다.28)

잔스촹은 해원상생의 핵심을 인간과 우주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라 보고, ‘해원’에 대해서는 인간과 우주의 기운 사이에서 소통을 막은 원을 푸는 것이라고 했다. 해원을 통해 막혔던 우주의 기운이 순환하며 인간 사회가 완전한 통합적 교류의 상태를 이룬다고 보았다. 또 해원은 ‘상생’을 지향하는데 상생이란 인간들의 조화로운 사회적 모습이다. 조화로운 사회적 모습을 이루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대도(大道)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29)

이상의 선행연구를 토대로 볼 때, 해원과 상생은 소통과 조화, 순환, 일체감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선천이 포원에 의한 상극의 세상이었다면 후천은 해원에 의한 상생의 세상이다. 포원은 대상과 대상 사이의 거리를 고착화하고 공생 내지는 대립의 상태를 유지하지만 해원은 대상과 대상의 벽을 허물고 일체가 되게 하여 소통과 조화ㆍ순환이라는 상생을 가능케 한다.

한편, 종지의 측면에서도 해원과 상생을 분석해볼 수 있다. 해원과 상생의 합성어인 해원상생은 대순진리회의 핵심 개념을 표현한 종지에 속한다. 음양합덕(陰陽合德)ㆍ신인조화(神人調化)ㆍ해원상생(解冤相生)ㆍ도통진경(道通眞境)의 이 네 종지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성이 있다. 그것은 대립자들의 일체와 소통이라는 특성이다.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에 의한 결과가 도통진경으로 해원을 통한 대립자의 일체를 통해 도달하는 정신적 경지라 할 수 있다. 도통진경은 도(道)에 통한 참된 경지이며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차연의 상태이다.30)

또한 대순진리의 종지로서 이 네 가지는 모두 후천의 조건이다. 여기에서 해원상생을 위시한 종지는 네 가지 개념적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 네 가지는 근원성ㆍ다원성ㆍ창의성ㆍ통일성이다.31) 도통진경의 네 가지 개념적 특성이 해원상생의 개념적 특성이기도 한바 해원을 통해 도달하는 상생의 세계는 이 네 가지 원리를 통해 운행하는 세계이다. 다시 말해 원에 의해 막혀 있던 상극의 원리가 해원을 통해 상생의 원리로 화하게 된 세상이 후천 세상이다. 따라서 근원성ㆍ다원성ㆍ창의성ㆍ통일성은 상극에 의해 선천에는 실현되지 못했던 존재론적 원리로서 원의 해소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이 가지는 특성에서 대리보충ㆍ다원성ㆍ생성ㆍ지연성ㆍ이중회기는 해원에 따른 상생의 특성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차연은 일정한 미궁을 형성하여 그 내부에서 경계 아닌 경계를 생성한다. 해체론에서의 경계란 현상과 본체 사이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반전, 기원과 말단의 동시적 가시화, 대립적인 것들 간의 동거와 같은 비물리적 테두리이다. 이러한 경계는 차연이 내적으로 특정한 경계를 구성함과 동시에 그것의 외적 발산에 있어서는 그 구조를 스스로 파기하고 재생산을 반복한다.32) 이러한 유의 생성 운동은 대립물의 동시적 실존에 의한 운동으로 대립물의 일체성에 기반한 상생 작용과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Ⅴ. 결론

이상으로 데리다와 대순사상의 해체와 해원의 개념을 비교 분석하여 보았다. 데리다의 해체와 대순사상의 해원은 그 적용 범위가 서로 다르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대상과 대상 간의 막혀 있던 경계를 허문다는 기본적인 지향점에서는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데리다는 기호와 이념 간의 해체를 통해 언어의 본래적 가능성을 개방하고자 했으며 대순사상의 해원은 천지인 삼계ㆍ신명과 신명ㆍ인간과 인간ㆍ인간과 만물 사이의 경계를 해원을 통해 개방하여 지상천국 건설ㆍ지상신선실현이라는 세계와 인간의 본래적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했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를 통해 남은 빈자리를 채운 것은 차연이다. 차연은 완전히 고른 분배를 유도한다. 그것이 내재성의 균등 즉 평화의 내적 원리이다. 하나의 중심이 그 하부의 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대순사상의 해원도 그러한 점에서는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원은 선천의 대립을 조장해왔다. 원한은 나와 타자의 분리를 고착화했고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낳았다. 증산은 후천에는 제왕의 기운을 걷는다고 했다.33) 제왕의 기운을 걷고 인존을 통해 인간 개체 내부에 심령신대를 세움으로써 각자가 율법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유목한다.

해원은 영원한 평화를 목적으로 한다. 영원한 평화는 양 대상 사이의 완전한 상생에 의해 가능하다. 그래서 해원은 해체론의 관점에서 개체의 표상을 파기하여 본래적 자기를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우주 또한 영원성과 한계성에 대한 시공간의 이율배반에서 벗어날 것이다. 개체와 개체 사이의 표상적 대립이 없는 차연적 흐름에 의해 서로가 구분될 뿐이다.

표상적 대립에 의한 평화는 늘 불안한 상태의 불완전한 평화이다. 대립이 없는 완전한 혼연일치에 이른 개체들이 이루는 평화야말로 완전한 평화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증산이 말한 영원한 평화는 이러한 상태의 평화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대순사상의 현대성은 한국의 근현대가 참동학을 중심으로 독자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사상, 그리고 종교적 가능성의 산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국은 오랜 역사 동안 중국의 문화권 가운데 있으며 소중화로서 문화적 종속하에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혁명 이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전통 문화의 탄압에 몰두하면서 중국의 고유한 정신 유산의 명맥을 현대적으로 재승화하는 노력에는 부진할 시기 한국의 대순진리회는 증산의 참동학을 계승ㆍ발전시켜 민중을 매개로 새로운 사상을 전하고 이로써 소중화에서 대중화로의 길을 열었다.34)

그래서 한국의 현대가 낳은 대순사상은 세계사상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증산의 일대기 자체는 하나의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종교 현상이지만 이것은 형이상학적 메타포이기도 하다. 절대자의 인신 강세와 천지공사의 현상 그것은 유럽의 현대철학 그 가운데서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그려낸 자유와 해방성의 이상적 메타포들과 유사한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메타포들은 그 자체로 따로 두고 볼 때는 서로가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개념의 영역에서는 묘한 동질감을 두고 서로 어울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대순사상의 개념적 분석과 서양 현대 사상과의 비교 연구는 대순사상의 현대적 독자성을 드러내고 한국적 가치의 세계적 인정이라는 목표를 향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 속에서 사건으로서 보여준 증산의 메타포들에 대한 주석이 종교적인 측면에만 치우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인문적 측면에만 치우치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이 양자의 균형 있는 연구를 통해 대순사상의 진면목이 학문과 종교의 양자 모두에서 통일적으로 드러날 것이라 예상해 본다.

그러한 통일성을 향한 연구방법이 바로 메타포들에 대한 양자택일적 접근이 아닌 해체적 접근 또는 상생적 접근일 것이다. 종교적 진리와 인문적 진리가 해체와 해원으로 그 경계를 열고 차연으로써 상생으로써 어우어러질 때 진리는 개념과 현실의 일치를 이룰 것이라 여겨진다.

Notes

1) 조규형, 『해체론』 (파주: 살림, 2013), p.16.

2) 김상환, 「데리다의 해체론」, 『인문과학』 74 (1996), p.18.

3) 같은 책.

4) 휴 J. 실버만, 『데리다와 해체주의 : 철학과 사상』, 윤호병 옮김 (서울: 현대미학사, 1988), pp.37-38.

5) 이광래, 『해체주의란 무엇인가』 (서울: 교보문고, 1989), p.99.

6) 존 레웰린, 『데리다의 해체주의』, 서우석ㆍ김세중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1988), p.102.

7)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서울: 문사철, 2013), p.152.

8) 같은 책, p.141.

9) 같은 책, p.143.

10) 여기에서 주체성의 재발견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주체는 해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표상적 경직성과 직조된 자유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해체론의 주체는 근대적 주체의 그러한 점을 경계하고 주체성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거부한다. 이것은 주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주체성이라는 표현 하에 왜곡된 주체성을 원형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주체성의 재발견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 억압의 틀을 해소하고자 한 해원의 개념에서 볼 때 타당할 것이라고 추론한다.

11)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p.148.

12) 같은 책, p.149.

13) 해체주의가 말하는 탈중심은 절대성이 특정한 대상에 독점되는 것을 부정한다. 그것은 억압과 경직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심이 특정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해방될 때 오히려 절대성이 현현할 수 있다는 것이 해체주의의 논리이다.

14)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p.152.

15) ‘생성과 일의성’은 들뢰즈와 함께 데리다의 차연이 가진 중요한 본질이다. 조화라는 표현이 후기구조주의의 입장에 걸맞는 표현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증산의 입장에서 조화는 상생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며 상생의 개념 속에는 조화와 함께 생성과 일의성도 포괄된다. 증산에게 있어 현실 속에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는 개벽 또는 지상천국도 상생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상생이 가진 창발적 힘은 충분히 후기구조주의적 개념인 ‘생성과 일의성’으로 표현 가능하다고 본다.

16) 박수경, 「반미술로서 개념미술에 관한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pp.15-16.

17) 『전경』, 공사 3장 4절,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에 인해서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리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 기록의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

18)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pp.142-143.

19) 같은 책, p.143.

20) 같은 책.

21) 통일 내지는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다루면서 사용하기에는 매우 신중해진다. 해체주의가 비판하는 통일성은 일종의 획일성이다. 해체주의가 지향하는 탈중심성, 탈표상성은 이러한 통일이 지니는 획일성이 순수한 힘을 억압하는 것으로 본다. 본 연구에서는 증산사상을 논의하면서 다루는 통일 또는 통일성의 개념은 획일성을 뜻하는 것이 아닌 그 상위의 무한자의 순수한 힘이 가진 역능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해체주의가 무조건적인 와해와 맹목적인 해방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체주의가 무한자의 통일적 역능은 해방적 원체험이므로 해체하지 않는 것이다.

22) 자크 데리다, 『해체』, 김보현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2020), p.122.

23) 같은 책, p.122-123.

24) 같은 책, p.117.

25) 『전경』, 교운 1장 9절, “상제께서 어느 날 김 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26) 이항녕, 「대순사상의 우주사적 의의」, 『대순사상논총』 1 (1996), pp.9-24.

27) 최동희, 「해원상생의 새로운 이해」, 『대순사상논총』 4 (1998), pp.291-293.

28) 이경원, 「해원상생의 의미와 천지공사」, 『대순사상논총』 4 (1998), p.549.

29) 잔스촹, 「대순사상의 인문정신과 인류평안의 이념」, 『대순사상논총』 21 (2013), p.223.

30) 김상환, 「데리다의 해체론」, 『인문과학』 74 (1996), p.9, “데리다의 차연은 『도덕경』에 나오는 도(道)만큼 신비롭다.”

31)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p.178.

32) 김상환, 「데리다의 해체론」, 『인문과학』 74 (1996), p.17.

33) 『전경』, 예시 27절, “「만국 제왕의 기운을 걷어 버리노라」고 말씀하시더니 이상한 기운이 제왕의 장엄한 거동의 모양을 이루고 허공에 벌여 있더니 사라지는도다.”

34)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 사이에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되었고, 비슷한 시기 한국의 대순진리회는 증산의 대순진리를 근간으로 1969년 박우당 도전에 의해 창건되어 증산의 대순진리를 전하는 참뜻으로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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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환, 「데리다의 해체론」, 『인문과학』 74,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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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해체』, 김보현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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