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종교는 교조와 그의 교리를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되면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는데, 이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이 흔히 말하는 ‘기적’ 곧 교조의 이적이다. 교리가 혁신성과 합리성을 띤 철학의 성격을 보여준다면, 이적은 전통성과 비합리성이 강한 문학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중도(中道)’를 표방하면서 정교하고 체계적인 진리를 내세운 불교 또한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사실 불교에서는 기적이나 이적과 관련된 특유한 용어가 존재했다. 육신통(六神通), 줄여서 신통(神通)이 그것이다. 산스크리트로 ‘아비즈냐Abhijñā’이며 팔리어로 ‘아빈냐Abhiññā’를 한자어로 번역한 용어다. ‘직접적인 지식’이나 ‘고도의 지식’ 또는 ‘상식을 넘어선 지식’으로 풀이되는 신통은 본디 붓다와 보살들이 지니고 있다고 하는 초인간적이고 초월적인 능력이다. 수행이나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신통은 교조인 붓다와 그 제자들, 후대 인도의 불교도들 그리고 동아시아의 불교도들에게 동일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요컨대 불교에서 신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인식은 시대적으로 사뭇 달랐다는 말이다. 이는 방대한 경전들과 논서들의 창작과 유포를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 전혀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조차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판이니, 신통이라는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달리 해석되고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해석의 변화는 인도에서 주로 쓰인 신통이 동아시아에서 ‘신이(神異)’로 또 ‘감통(感通)’으로 대체되거나 혼용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신통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많지 않으며, 있다고 해도 대개 불교의 핵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불교는 워낙 복잡하고 체계적인 철학을 내세우면서 깨달음이나 지혜를 통한 해탈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인식을 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신통이나 신이를 부차적인 문제로 제쳐두게 했다. 이런 경향과 달리 베르나르 포르는 신통을 비롯한 초자연적 요소들이 불교의 ‘기본적인 것들’에 속한다고 지적하며 중요하게 다루었다.1) 이는 매우 가치 있는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최근에 김한상이 비록 초기 불교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신통의 철학적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논한 바 있다.2)
이들 연구 외에 불교의 신통이나 신이에 대한 연구로서 주목할만한 사례는 여전히 드물며, 동아시아 불교로 한정하면 더욱 드물다. 무라카미 요시미(村上嘉實)가 혜교(慧皎)가 편찬한 『고승전(高僧傳)』의 신이에 대해 개관하고,3) 이영석과 안순형이 『고승전』의 「신이」편을 중심으로 신이 행적의 의미를 함께 고찰한 바 있을 따름이다.4) 『비구니전(比丘尼傳)』의 신이담(神異譚)을 검토하면서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비구니의 역할을 논한 손진의 연구가 있고,5) 감통에 대해 검토한 번바움(Birnbaum)의 연구도 참조할 만하다.6) 그러나 이들 연구는 모두 특정한 텍스트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고, 신통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신통이나 신이 모두 초인간적이고 초월적인 능력과 그 능력으로 일으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런 능력은 고대 신화에서 신들이나 영웅들이 태어나면서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불교를 비롯한 보편종교가 등장한 뒤에는 교조를 비롯해 고승이나 성자 들이 그런 능력을 지녔다고 하며 대체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 전한다. 이런 신통에 대해서는 네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첫째, 누가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가? 둘째, 그 능력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셋째, 누구에게 그런 능력을 쓰는가? 넷째, 그 목적은 무엇인가?
본고에서는 신통이 역사적으로, 특히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변화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따라서 인도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중심으로 검토할 것이다. 먼저 ‘신통’에 대한 이해의 기준으로 삼기에 적합한 붓다의 인식을 초기 문헌 『장아함경』 권16의 「견고경(堅固經)」을 통해 살핀다. 이어 마명보살(馬鳴菩薩, 아슈바고샤)이 불교 서사시이자 붓다의 전기문학인 『불소행찬(佛所行讚)』에서 표현한 신통을 살핀다.7) 『불소행찬』은 인도에서 창작되고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므로 다루기에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다음으로 동아시아의 저술들, 특히 고승전에 나타난 신이와 감통에 대해 고찰한다.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519년)과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649년)을 차례로 살핀다. 두 저술은 신통 대신에 각각 신이, 감통을 썼다. 이는 신통에 대한 중국적 변용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승전』을 통해 ‘신이’를, 『속고승전』을 통해서는 ‘감통’을 자세하게 살핀다.8) 찬녕(贊寧)의 『송고승전(宋高僧傳)』(988년)은 『속고승전』을 그대로 따랐으므로 여기서는 굳이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신통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불교사의 전개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밝히려 한다.
Ⅱ. 붓다의 신통
『장아함경』의 「견고경(堅固經)」은 신통에 대한 붓다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준다. 장자의 아들 견고(堅固)가 붓다에게 물음을 던지는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제목이 「견고경」이다. 붓다가 나난타성(那難陁城)의 파바리엄차 숲에 있을 때, 장자의 아들 견고가 예배하고 이렇게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제 모든 비구들에게 ‘만일 바라문, 장자의 아들, 거사 들이 오거든 신족(神足)과 상인법(上人法)을 나타내 보이라’고 하십시오.”9) 여기서 말하는 신족이 곧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이며, 흔히 말하는 신통이다. 상인법 또한 여느 사람을 뛰어넘는 법을 가리키므로 역시 신통을 의미한다.
견고는 똑같은 간청을 두 번이나 했고, 붓다는 “나는 결코 비구들에게 바라문이나 장자, 거사 들을 위해 신족과 상인법을 보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서 말없이 고요히 도를 생각하고 만약 공덕이 있으면 스스로 숨겨야 하며 잘못이 있으면 스스로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친다.”10)라는 말로써 두 번 모두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에 견고는 “다만 이 나난타성은 국토가 풍요롭고 인민들은 기세가 불길 같습니다. 만약 이곳에서 신족을 나타낸다면 이익이 많을 것이며 부처님과 대중이 도화(道化)를 크게 넓힐 수 있습니다.”11)라며 자신이 왜 간청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런 견고의 간청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신통에 대한 인식과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주목할 점은 비구들이 신통을 보여줄 수 있다고 견고가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비구들의 신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일까? 붓다의 발언을 통해 비구들이 신통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았으리라고 본다면, 직접 보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왜 그런 인식을 하고 간청했을까? 당시 인도인들은 고행자나 수행자는 신통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고 또 보았기 때문이다.12) 견고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위대한 수행자로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제자라면 당연히 신통을 갖추었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이는 신통이 고행자나 수행자가 얻는 능력 가운데 하나였음을 의미한다.
견고의 간청에서 엿볼 수 있는 또 한가지는 신통의 효과다. 견고는 신족을 나타내면 많은 이익이 있을 것이라 하면서 도화(道化) 곧 불도의 교화를 크게 넓힐 수 있다고 했다. 즉, 견고는 신통이 아직 붓다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믿음을 주거나 일으키는 데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아마도 신통으로 대중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당시의 관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생각이 달랐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신통을 보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한적한 곳에서 고요히 도를 생각하며 공덕이 있더라도 숨기도록 가르친다고 했다. 이는 먼저 깨달음을 구하고 해탈에 이르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세 가지 신족이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신족이고, 둘째는 관찰타심(觀察他心)이며, 셋째는 교계(敎誡)다.”13) 여기서 신통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셋 가운데서 신족과 관찰타심은 신통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데, 붓다가 제자들에게 하지 않도록 가르친 것이 바로 이 둘이다. 반면에 가르치고 타이른다는 뜻의 교계처럼 신통인지 의아하게 여겨지는 이 능력만 인정하고 중시했다. 먼저 신족부터 살펴보자.
장자의 아들아! 비구는 한량없는 신족을 익혀 한 몸을 바꾸어 무수한 몸을 이루기도 하고 무수한 몸을 도로 합해서 한 몸이 되게 한다. 멀든 가깝든 산과 강과 바위 벼랑 따위를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자재하게 마치 허공을 다니듯이 다닌다. 허공에서 결가부좌를 하니 마치 나는 새와 같고, 땅속을 드나드니 마치 물속을 드나드는 것과 같으며, 물위를 걷는 것은 마치 땅을 밟듯이 하고, 몸에서 연기와 불을 뿜으니 마치 큰 불더미 같으며, 손으로 해와 달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선 채로 범천에도 이른다.14)
위의 묘사는 불교의 문헌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적들인데, 이런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바로 신족이라고 했다. 육신통 가운데 신족통(神足通)과 동일하다. 이로써 보면, 신족이라는 용어는 넓게는 모든 신통을, 좁게는 신족통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족이 일으키는 이런 이적들은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15) 이미 인도에 신통을 부리는 수행자들이 존재했다면, 그들이 이런 이적들을 먼저 보여주었을 것이다. 위에서 묘사한 이적들도 그 연장선에서 나왔을 공산이 크며, 이적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을 수 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런 점이 붓다가 이 신족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이기도 했다.
「견고경」에서는 위의 이적을 본 사람이 아직 믿음이 없는 장자나 거사에게 이에 대해 말하면, 그들은 도리어 “나는 구라주 주문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신통 변화를 나타내고 또 선 채로 범천에 이를 수 있다고 들었다.”16)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구라주 주문으로도 가능한 이적이라는 말이니, 전혀 새롭지도 않고 대수롭지도 않다는 뜻이다. 이러하다면 교화의 효과는 거두기 어려울 뿐더러 붓다와 그 가르침의 우월성과 독창성은커녕 어떠한 변별력도 차이성도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 붓다가 견고에게 “저 믿지 않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어찌 헐뜯고 비방하는 말이 아니겠느냐?”17)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관찰타심에 대해서도 붓다는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 관찰타심은 “다른 중생이 속으로 생각하는 법을 관찰해 [그들이] 숨어서 몰래 한 짓을 모두 다 아는 능력”18)이다. 이는 육신통 가운데서 타심통(他心通)과 같다. 그러나 이 관찰타심도 믿음이 없는 장자나 거사들에게 말해봐야 “건타라주(乾陁羅呪) 주문이 있어 남의 마음을 잘 관찰해 숨어서 몰래 한 짓도 모두 다 안다.”19)라는 비방만 초래할 뿐이라고 붓다는 말했다.
이로써 붓다가 왜 견고의 간청을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했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알려져 있던 주문으로도 행할 수 있는 이적이라면 붓다 자신이 깨달은 ‘중도’의 진리를 전혀 전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화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교계(敎誡)를 중시한 것과 관련이 있다.
만일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 세상에 나타나면 십호를 구족하고 모든 하늘ㆍ세상사람ㆍ마구니ㆍ야마천ㆍ사문ㆍ바라문들 가운데서 스스로 증득하고 남을 위해 설법하는데, 그 말은 처음과 중간, 끝이 다 참되고 바르며 뜻이 맑고 깨끗하며 범행이 다 갖추어져 있다. 만약 장자나 거사가 그 말을 들으면 거기서 믿음을 얻고 믿음을 얻으면 관찰하며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집에 있으면 갈고리와 쇠사슬이 이어져 있어 범행을 청정하게 닦을 수 없다. 이제 차라리 수염과 머리를 깎고 삼법의를 입고 출가해 도를 닦는 게 낫다.” 그는 모든 공덕을 갖추고 나아가 삼명(三明)을 성취해 모든 어둠을 없애고 크나큰 지혜의 밝음을 일으킨다.20)
교계를 신통이라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스스로 증득해서 범행을 다 갖추는 궁극의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전제로 하므로 신통이 분명하다. 단순한 신통이 아니라 불교에 특유한 신통이다. 이 교계는 모든 번뇌를 다 없애고 다시는 육도에 태어나지 않음을 깨달은 경지인 누진통(漏盡通)에 해당한다. 신족통과 타심통, 천이통, 천안통, 숙명통 등 오통(五通)은 비구들도 습득할 수 있고 붓다 당시의 다른 수행자들도 습득할 수 있는 신통이라면, 누진통은 붓다가 되는 능력이므로 오통과는 다른 차원의 신통이다. 이 누진통에 대응되는 교계만을 붓다가 비구들에게 가르쳤다고 한 것은 믿음을 얻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천과 수행으로 나아가 깨달음을 얻게 함이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교계는 “부지런히 힘쓰며 한적한 곳에서 홀로 즐거이 지내며 오롯한 마음으로 잊지 않음으로써 얻어진다.”21)고 했다. 견고가 처음 간청했을 때 붓다가 비구들에게 가르친다고 했던 그것이다. 그런 수행을 한결같이 지극하게 한다면, “모든 어둠을 없애고 큰 지혜의 밝음을 일으켜”22) 깨달은 이, 곧 붓다가 된다. 그래야만 누구를 상대하든 자유자재로 가르치고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견고경」에서 붓다는 세 가지 신통을 거론하면서 신족과 관찰타심은 제쳐두고 오로지 교계만을 진정한 신통으로 인정했다. 교계는 내적인 변화를 일으켜 깨달음을 얻도록 해주지만, 신족과 관찰타심은 깨달음은커녕 교화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이 지혜를 얻어 해탈에 이르는 일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신통에 대한 이런 붓다의 견해는 초기 불교의 엄격한 수행 자세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붓다가 입멸하고 6백여 년이 지난 뒤, 이미 불교가 보편종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을뿐만 아니라 여러 부파들이 형성되고 대승불교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창작된 작품이 『불소행찬』이다. 모두 28품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이 아주 초기의 전승들만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마명보살이 창작하던 기원후 2세기 초의 상황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여기서 다루게 될 신통의 문제에서도 그 점은 드러날 것이다.
『불소행찬』에서는 「견고경」에서 거론된 신족, 관찰타심, 교계 세 가지가 두루 나온다. 물론 이 가운데서 교계가 가장 비중이 높다. 먼저 「견고경」에서 붓다가 유일하게 인정한 교계를 보자. 아래는 15품인 「전법륜품」의 일부다.
彼率愚騃心 그들은 어리석은 마음 그대로
不信正眞覺 바르게 참으로 깨친 이 믿지 않았네.
…
如來卽爲彼 여래께서는 곧 그들을 위해서
略說其要道 긴요한 도리 간략히 말씀하셨네.
愚夫習苦行 어리석은 사람은 고행을 익히고
樂行悅諸根 쾌락 좇는 이는 감관을 기쁘게 하지.
…
如以水燃燈 물을 가지고 등불을 켜려 해도
終無破闇期 끝내 어둠을 깨뜨리지 못하는 것처럼
疲身修慧燈 몸을 지치게 해 지혜의 등불 닦아도
不能壞愚癡 어리석음을 무너뜨릴 수 없느니라.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중생을 제도하려고 세속으로 돌아왔을 때 이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고행자를 만났다. 다섯 고행자는 고행이야말로 진정한 득도의 길이라 믿으면서 중도를 선택한 붓다를 도리어 타락한 수행자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붓다를 마주하고서도 믿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붓다는 그들에게 긴요한 도리, 곧 고행의 폐단과 바른 수행에 대해 일깨워주려고 위에서처럼 말하며 “나는 이미 두 극단을 떠나/마음에 중도를 지녔나니”23)라며 중도로써 깨닫고 해탈에 이르렀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 가르침을 듣고서 다섯 고행자는 차례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교계가 신통임을 입증한 것이다.
16품인 「병사왕제제자품(甁沙王諸弟子品)」에는 세속의 쾌락을 맘껏 즐기던 장자의 아들 야사(耶舍)가 등장한다. 야사가 한밤에 숲을 돌아다니며 “괴롭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붓다는 “여기에 안온한 곳이 있나니/열반은 지극히 맑고 시원하며/적멸은 모든 번뇌를 떨어내니라.”24)라고 가르쳤다. 이에 야사는 거룩한 지혜가 활짝 열리면서 귀의했고 곧이어 붓다의 설법을 듣고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25) 이 또한 교계의 신통을 보여준 장면이다.
『불소행찬』은 붓다의 일생을 따라서 진리의 문제를 주로 다루므로 교계가 일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점에서는 「견고경」에서 교계만을 중시한 붓다의 인식을 그대로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붓다 입멸 뒤 수백 년이 흘렀으므로 변화가 없을 수 없었다. 「견고경」에서 부정되었던 신족과 관찰타심이 묘사되고 있는 데서 그런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아래는 19품인 「부자상견품(父子相見品)」에 나오는 대목이다.
神足昇虛空 신족으로 허공에 떠올라
兩手捧日月 두 손으로 해와 달 받들고
遊行於空中 공중을 두루 돌아다니며
種種作異變 갖가지 기이한 일 지었네.
或分身無量 혹은 한량없이 몸을 나누고
還復合爲一 도로 합쳐서 하나가 되며
或入水如地 혹은 물을 땅인 듯이 밟고
或入地如水 혹은 땅속을 물인 듯 들며
石壁不礙身 석벽도 그 몸을 막지 못하고
左右出水火 몸 좌우에서 물과 불 내었네.
자신의 뒤를 이어 훌륭한 왕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했던 아들이 갑자기 출가해 크나큰 실망감을 느꼈던 정반왕이다. 그는 여전히 슬펐기에 다시 아들을 보아도 서먹하기만 했다. 그런 마음을 알아챈 붓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일깨워주려고 위에서처럼 신족을 보였다. 작품에서는 이를 “먼저 오묘한 신통을 나타내어/왕의 마음을 기쁘게 했나니”26)라고 표현했다. 신통은 위로이면서 기신(起信)이었으니, 곧 붓다는 “허공의 연꽃 자리에 앉아/왕을 위해서 법을 설하셨다.”27) 이렇게 『불소행찬』에서는 신족이 믿음을 일으키는 방편으로 쓰였다.
신족에 더해 붓다가 관찰타심으로 교화한 일도 여러 차례 나온다. 「병사왕제제자품」에서 붓다는 고행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가섭(迦葉)과 그 제자들을 교화했다. 그 뒤 병사왕이 세존을 뵈려고 왔을 때, 가섭의 무리가 붓다를 따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병사왕과 그 권속들은 모두 의아하게 여기며 궁금해했다.
붓다는 관찰타심으로 병사왕과 그 권속들의 마음을 읽고서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고 또 믿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가섭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에 가섭은 자신이 교화된 내력을 간결하게 아뢰었는데, 이로써 그들의 의문은 풀렸다. 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적절하게 대응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어야만 관찰타심의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견고경」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신족과 관찰타심이 『불소행찬』에서 적극 활용되고 있음은 가섭이 신족을 보이는 것에서도 입증된다. 붓다는 관찰타심으로 병사왕 일행에게 믿음을 일으키게 한 뒤에 가섭에게 이렇게 권했다. “너 대사는 여기 잘 왔구나./갖가지 법을 잘 분별해서/훌륭한 도를 따랐으니/이제 대중 앞에서/너의 훌륭한 공덕을 내보여라.”28) 여기서 훌륭한 공덕은 곧 신족을 가리킨다. 이에 가섭은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갖가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몸에서 구름과 비를 내고 천둥 번개로 천지가 흔들리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었다.29) 이 이적은 「견고경」에서 붓다가 신족에 대해 묘사한 것 그리고 앞서 붓다가 부왕에게 보인 양상과 대동소이하다. 이는 신족의 이적이 매우 정형화된 것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붓다가 직접 신족과 관찰타심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섭에게도 권했다는 점이다. 가섭은 “그런 뒤에 신통을 거두고서/세존의 발에 예를 표하고는”30) 이렇게 아뢰었다. “이 일을 행하라는 분부 받잡고/할 일을 이제 다 맞쳤습니다.”31) 「견고경」에서는 분명히 제자들에게 신족과 관찰타심으로 교화하는 일을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했는데, 여기서는 붓다가 나서서 권유했다. 물론 이는 붓다의 인식이 변해서가 아니다. 당시 불교도들의 통념이 표현된 것이며 마명보살이 이를 수용한 결과다.
『율장』에 이미 붓다가 가섭의 삼형제를 신족으로 교화한 일과 비구들이 신족을 드러낸 사례들이 나온다. 이는 분명히 붓다의 본뜻에 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장』에는 또 “비구들이여, 상인법과 신통은 재가자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보여주는 자는 악작(惡作)을 짓는 것이다.”32)라는 규정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율장』의 이런 모순은 신통에 대한 오랜 통념이 끈질기게 지속되면서 불교 속으로 파고들어 자리잡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불소행찬』에서 신족과 관찰타심을 긍정한 것도 그 영향과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마명보살은 『불소행찬』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라야 신통을 얻어서 쓸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비구들이 신족을 쓰는 일에 대한 붓다의 경고를 오롯이 따랐음을 의미한다. 물론 가섭도 신족을 보여주지만, 그 또한 붓다에 견줄 만큼 깨달음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신통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는 「견고경」보다 더욱 길고 자세하게 서술했다. 속세에서 마음이 떠나는 3품 「이욕품(離欲品)」부터 깨달음을 얻는 14품 「아유삼보리품(阿惟三菩提品)」까지의 내용이 그것이다.
신통의 주체와 신통을 얻는 과정에 관한 한, 『불소행찬』은 「견고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견고경」과 다른 점은 신족과 관찰타심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깨달음이나 해탈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믿음을 일으켜 귀의할 수 있도록 교화하는 것 또한 신통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 교화를 위한 신통이 허용됨으로써 믿음을 갖지 못한 자도 신통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등이다. 이는 붓다 입멸 뒤에 일어난 자연스러운 변화이기도 하다. 신통을 자유자재로 보여줄 수 있는 붓다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제자가 된 비구들이 대신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불소행찬』에서 붓다를 대신해 신통을 보여준 가섭은 바로 그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Ⅲ. 고승의 신이와 감통
혜교의 『고승전』(14권)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고 확산된 내력을 자세하게 서술한 일종의 불교사서(佛敎史書)다. 『고승전』은 고승들의 행적과 공덕에 따라 열 가지로 나누었는데, 이를 십과(十科)라 한다. 「역경(譯經)」, 「의해(義解)」, 「신이(神異)」, 「습선(習禪)」, 「명률(明律)」, 「유신(遺身)」, 「송경(誦經)」, 「흥복(興福)」, 「경사(經師)」, 「창도(唱導)」 등이다. 중국을 통해 불교가 전래된 동아시아 각국에서도 이 체재에 따라 독자적인 고승전을 마련했다. 십과 가운데서 「신이」가 바로 신통을 보여준 고승들의 전기를 모은 편목이다. 먼저 십과를 둔 의의에 대해서는 혜교가 이렇게 밝혔다.
지혜와 이해로 정신을 열면 도는 무수한 사람을 아우른다.[역경ㆍ의해] 감응에 통달해 알맞게 교화를 하면 강포한 자가 누그러진다.[신이] 생각을 가라앉히고 선정에 들면 공덕이 무성해진다.[습선] 율법을 널리 떠받치면 행실을 삼가서 맑고 깨끗해진다.[명률] 형체를 잊고 몸을 버리면 뽐내며 잗달던 사람이 마음을 고친다.[유신] 진리의 말씀을 노래하고 외면 귀신과 사람 모두 기뻐한다.[송경] 복을 심고 선을 일으키면 부처님이 남긴 모습을 전할 수 있다.[흥복]33)
지혜와 이해로 정신을 연다고 하는 불교의 핵심은 「역경」과 「의해」 두 편과 관련이 있다. 불교의 교리는 경전이 담고 있었으므로 중국인들은 먼저 한문으로 번역해야만 했다. 『고승전』에서 첫 번째에 「역경」을 두고 두 번째에 「의해」를 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역경」과 「의해」는 각각 「견고경」에서 말한 교계(敎誡)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에 해당한다. 『고승전』 또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감응에 통달해 알맞게 교화한다’는 ‘통감적화(通感適化)’를 거론했는데, 이는 「신이」편을 두고 한 말이다. ‘통감’은 사람들의 정서와 감정적 반응을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신통을 펴더라도 ‘적화’ 곧 ‘알맞은 교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교는 ‘신통(神通)’이라 하지 않고 ‘신이(神異)’라고 했다.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신통이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만을 나타낸다면, 신이는 그 능력이 보여주는 비일상적인 면, 즉 이상(異常)하고 기이(奇異)한 면을 아울러 나타낼 뿐이다.
그렇다면, 『고승전』에서는 누가 어떤 신이를 보이는가? 책명에서 드러나듯이 신이의 주체는 고승이다. 이제 어떤 신이들이 나오는지 살펴보자. 『고승전』의 권9와 권10이 「신이」편인데, 권9에서 분량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고승이 있다. 불도징(佛圖澄)이다. 그는 서역(西域) 사람이며,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진(晋)나라 회제(懷帝) 때인 310년에 중국 낙양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신비한 주문을 잘 외워 귀신을 부릴 수 있었으며, 삼씨로 짠 기름을 연지와 섞어 손바닥에 바르면 천리 밖의 일도 손바닥이나 마주한 얼굴을 보듯이 환히 알았다.”34)고 한다. 귀신을 부리는 것은 육신통 가운데 신족통에 해당되고, 천리 밖의 일을 보는 것은 천안통에 해당한다.
이 밖에도 불도징은 다양한 신이를 나타냈다. 그릇에 물을 담고 주문을 외워 눈부신 연꽃이 피어나게 한 일, 고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준 일, 심지어 죽은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한 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알려준 것, 다른 사람의 마음과 은밀한 행동을 알아챈 일 등등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등 다양한 신통을 보여주었다. 이런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화상은 신통력이 있다’[和上神通]고 말했고, 권력자들조차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겼다. 그런데 불도징은 민중을 상대로 하기보다는 주로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적을 보였다. 불교는 외래 종교였기 때문에 권력층이 인정하고 용인해야만 교화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35) 물론 가끔 병든 민중을 고치기도 했으나, 주로 하지는 않았다.
권9의 나머지는 단도개(單道開), 축불조(竺佛調), 기역(耆域) 등의 전기로 채워지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중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주는 신이를 보였다. 신이의 대상은 관리와 승려, 속인들 등 다양했으며, 신이로써 이들을 교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 축불조와 기역은 사나운 범을 길들이고 부리는 이적도 보였다. 아마도 당시 중국에 호환(虎患)이 적지 않아 대중이 범을 무서워한 사실과 관련이 있는 신이로 여겨진다.
권10에서도 고승들의 다양한 신이가 서술되어 있다. 병자를 치유하거나 예언하는 이적뿐만 아니라 과거의 절터나 다른 사람의 전생을 아는 이적, 화장을 해도 시신이 타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유지된 이적, 몸을 여러 곳에서 드러내는 이른바 ‘분신(分身)’의 이적 등이 고루 나온다. 그런 능력을 시험하는 권력자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신이에 탄복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신이로써 교화를 했다는 말이다.
『고승전』의 고승들은 「견고경」과 『불소행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이들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중국이 인도와 문화, 관습, 정서 등에서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베다의 전통이 오래 이어지면서 인격화한 다양한 신들의 능력과 행위가 찬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신통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으면서 바라문들을 비롯한 수행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36) 반면에 중국에서는 그런 신들이 부재했으며 “장생과 불사의 존재”인 신선 그리고 다양한 연금술을 선보인 도교를 통해서 비로소 초자연적인 능력들이 강조되었다.37) 『고승전』의 신이에는 이런 도교적 영향이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38)
그런데 고승들은 어떻게 해서 이런 신이들을 보여줄 수 있었는가? 어떻게 신통력을 갖출 수 있었는가? 고승들 가운데는 왕실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이들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는 평민이거나 출신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이었다.
불도징은 “어려서 출가해 맑고 참되게 배움에 힘써 경전의 수백 만 자를 외우고 그 의미도 잘 이해했다.”39)고 하고, 축법혜(竺法慧)는 성품이 바르고 계율을 어기는 법이 없었으며 “걸식을 할 때마다 새끼로 짠 걸상을 갖고 다니면서 한적하고 너른 길에 펼치고 앉았다.”40)고 한다. 불도징은 경전을 통해 지혜와 신통을, 축법혜는 바른 행위와 선정(禪定)으로써 신통력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고승들은 「견고경」에서 붓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대로 수행하고 실천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안혜칙(安慧則)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한결같지 않았으나, 여느 사람들과 달리 탁월했다.”41)고 하니, 별다른 배움이나 수행이 없이 신통을 지니게 된 것처럼 보인다. 석담곽(釋曇霍)은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을 했으며, 늘 무덤 사이나 나무 밑에 머물렀다.”42)고 하므로 붓다가 야단쳤을 고행을 실천한 셈이다. 그럼에도 늘 신통력을 써서 중생을 교화했다고 한다. 서역 출신인 섭공(涉公)은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하며 기운을 마시고, 오곡은 먹지 않았다.”43)고 해서 도교의 양생술과 흡사한 방식으로 수행을 했다. 특이한 방식으로 신통력을 얻는 것은 대체로 중국의 관습이나 문화가 끼친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신통’과 ‘신이’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굳이 ‘신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쓴 까닭은 붓다가 말한 신통과는 다른, 이른바 중국화된 신통과 이적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혜교는 권10의 말미에 「신이」를 둔 이유를 밝힌 ‘논(論)’을 썼다. 그 서두에서 “신묘한 도로써 펼치는 교화는, 뽐내는 자나 강한 자를 억누르고 업신여기거나 오만하게 구는 자를 꺾으며 흉함과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고 티끌세상의 어지러움을 푼다.”44)고 했다. 뽐내는 자, 강한 자, 업신여기는 자, 오만한 자, 흉한 자, 날카로운 자 들은 모두 외래 종교인 불교를 대하는 중국인들의 태도를 은근하게 표현한 말들이다. 불교가 전래될 때, 중국에도 유교를 비롯한 갖가지 사상들과 도교라는 종교가 이미 있었다. 오랜 역사와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어서 중국인들에게 익숙해 있을 뿐더러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더구나 중국인들은 자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며 자신들만 진정한 문화를 향유한다면서 주변의 모든 나라를 오랑캐로 취급했을 정도다. 그러니 서역에서 전해진 불교를 쉽사리 믿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임은 당연하다.
무릇 이치에서 귀하게 여기는 바는 도와 합치하는 것이고, 사물에서 귀하게 여기는 바는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방편은 영원한 진리와 반대되더라도 도와 합치되어 쓰임을 이롭게 해서 일을 이루게 된다.45)
『고승전』은 「견고경」과 『불소행찬』에서는 전혀 거론되지 않고 묘사되지도 않았던 신이들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이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고승들이 갖은 노력을 다했다는 뜻이다. 대부분 불교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이들, 즉 황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과 매우 다른 처지의 사람들에게 낯설고 난해한 불교 교리를 곧바로 들려준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일단 신심을 일으켜야 하는데, 이에는 신이보다 효과적인 방편이 없다. 위에 나오듯이 혜교도 그런 방편이 진리와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이는 교계를 중시한 붓다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럼에도 혜교는 ‘신이’를 중시해 십과에서 세 번째에 배치했고, 갖가지 신이를 두루 보여주었다. 외래 종교인 불교를 꺼리는 마음이 앞설 중국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한 권도(權道)였던 것이다. 진리와 반대되더라도 도와 합치된다고 말한 뜻이 거기에 있다.
도선의 『속고승전』(30권)은 『고승전』(14권)보다 130여 년 뒤에 저술되었다. 『고승전』은 67년부터 518년까지 450여 년 동안 활동한 고승들을 실었다. 『속고승전』은 불과 130여 년 동안 활동한 고승들을 실었음에도 권수가 두 배 이상 늘었다. 이는 그 사이에 불교 교단의 급격한 팽창과 교세의 확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수백 년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남북조 시대를 수나라가 종식시켰으나 곧 멸망하고, 이어 당나라가 들어섰다. 이 정치적ㆍ사회적 격변 속에서 불교는 중국인들의 귀의처가 되어 그 지위가 확고해졌다. 불교의 급속한 위상 변화는 『속고승전』의 십과 체제에서도 나타났다.
『고승전』에서는 「역경」과 「의해」에 이어 「신이」가 자리했고 그 비중도 상당히 높았다. 그런데 『속고승전』에서는 「역경」(권1-권4)과 「의해」(권5-권15)는 그대로인 채 그 뒤를 「습선(習禪)」(권16-권20)과 「명률(明律)」(권21-권22), 「호법(護法)」(권23-권24) 등이 이었고, 그다음에 「감통(感通)」(권25-권26)이 배치되었다. 『고승전』의 「신이」가 「감통」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고승전』에서 「신이」 뒤에 있던 「습선」과 「명률」이 앞서고 분량도 「감통」과 비슷하거나 더 많아졌다. 게다가 『고승전』에 없던 「호법」이 새로 생겨서 역시 「감통」 앞에 놓였다.
「습선」과 「명률」, 「호법」이 「감통」보다 앞에 놓인 것은 ‘교화’보다 수행과 득도가 더 중시되었다는 뜻이다. 불교의 기본적인 수행 지침인 삼학(三學)으로 말하자면, 「역경」과 「의해」는 ‘혜(慧)’에 해당하고, 「습선」은 ‘정(定)’에, 「명률」은 ‘계(戒)’에 해당한다. 「호법」은 삼학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다. 이들 편목에 견주면, 「감통」은 교화에 치중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대체 불교사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기에 도선은 편목 구성을 바꾸고 ‘신이’를 ‘감통’으로 바꾸었을까?
먼저 ‘감통(感通)’의 뜻부터 살펴보자. ‘신이(神異)’가 ‘신통으로 보인 이적’을 뜻한다면, ‘감통’은 그런 이적에 ‘느낌이 일어 마음이 통했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신이’가 신통력을 지닌 고승의 입장을 나타낸다면, ‘감통’은 고승이 교화하고자 하는 대상인 중생이나 대중의 반응 또는 감응을 중시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의미는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도선은 ‘감통’이라는 용어로 대체했을까?
상말(像末)에는 사람들이 경박하게 다투므로 법도 무너지고 지리멸렬해지는데, 신통력은 고요히 흘러서 감통이 거의 끊어졌다. … 요즘 세상의 우매한 풍속은 지나치게 허황한 데로 마음이 쏠려서 가끔 신령한 현상을 말할 때 심하게 꾸미기도 하는데, 그 근거를 꼼꼼하게 따져보면 미혹과 간사함에 빠져 있다. 이로 말미암아 요망하고 괴이한 말들이 숲의 나무처럼 많고, 시비하는 논의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다.46)
불교에서는 붓다의 입멸 뒤에 그 가르침과 실천과 깨달음이 온전히 전승되느냐에 따라 처음 5백 년을 정법(正法) 시대라 하고, 그 뒤로 1천 년의 시기를 상법 시대, 그다음을 말법(末法) 시대라 한다. 말법 시대는 정법이 사라진 시대로, 극도로 타락한 혼란기다. 상말은 상법 시대가 곧 끝나고 말법 시대가 도래할 시기다. 아마 6~7세기를 도선은 그런 시대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불법이 무너지고 지리멸렬해진 것은 시대의 혼란 때문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불교의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면서 이에 편승해 이른바 ‘사이비(似而非)’ 승려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불법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신이한 일들을 꾸며내 대중을 미혹에 빠뜨리고, 요망하고 괴이한 말들이 난무하며 시비를 따지는 논의가 들끓게 되었다는 말이 그런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결국 불교의 융성이 부작용을 키웠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참된 고승이 자취를 감추어 ‘신통력이 고요히 흐르는’ 지경이 되어 대중이 감통할 기회도 사라졌다는 말이다.
이미 『고승전』에서 보았듯이 신이는 믿음을 일으키도록 교화하는 데에 치중했다. 도선도 신이는 “처음의 믿음을 도탑게 해주려고 광명을 나타내 중생에게 내려준”47) 것이라고 말했다. 광명을 나타낸다는 표현은 곧 신이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신이가 대중을 미혹하는 ‘거짓된 것’이 되어 ‘참된 감통’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면 참된 감통을 살릴 길은 무엇인가? 감통은 고승의 신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일 뿐이다. 따라서 신이가 참되어야 하는데, 이는 곧 고승의 인식이나 수행, 태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감통」편에 처음 나오는 늑나만제(勒那漫提)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늑나만제는 천축 출신의 승려로서 원위(元魏, 471∼553) 때에 낙양 영녕사(永寧寺)에 머물고 있었다. 늘 낙양성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멀리 숭산(崇山)의 소실봉까지 가서 땔감을 구해오는 것을 본 그가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백성들이 이렇게 땔나무를 지고 다니며 고생하는구나. 내가 잠시 두 산을 당겨서 낙수(洛水) 가에 눕혀서 사람들이 넉넉하게 나무를 벨 때까지 기다렸다가 되돌려 놓고 싶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한낱 술수일 따름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잘못 알고 나를 성인으로 여길 수도 있어 감히 하지 못하겠다.48)
늑나만제의 말에는 신통을 더 이상 정서에 호소하는 방편으로 쓰기 어렵다는, 자칫 대중을 미혹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불교가 널리 신앙되는 종교가 된 상황임을 감안하면, 적절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이」든 「감통」이든 굳이 둘 필요가 없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감통」편의 새로운 신이들이 대답을 해준다.
석초달(釋超達)은 무고를 당해 수레바퀴에 목이 매달린 채 갇혔다. 혼자 힘으로는 살아날 길이 없음을 알고 오로지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그러자 한밤중에 문득 수레바퀴가 사라지더니 그를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간신히 달아났는데, 말을 탄 자들이 그를 뒤쫓아 와 가까워졌을 때 초달은 다시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으므로 달아날 수 있었다. 승명(僧明)도 죄없이 잡혀 오랏줄에 묶였는데, 관세음보살을 염해서 달아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관세음보살을 염해서 일어난 신이는 많다.
여겨서 눈여겨 볼 점은 초달과 승명 등 고승들이 신통을 발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이는 관세음보살이 일으켰고, 그것은 초달과 승명 등의 평소 수행과 지극한 마음이 관세음보살에게 전해진 결과였다. 여기서 왜 ‘신이’가 아닌 ‘감통’으로 바뀌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보살의 감통을, 나아가 붓다의 감통을 끌어내는 고승들을 모아 놓은 곳이 「감통」편이었던 것이다. 앞서 사이비 승려들을 거론했는데, 그들이 대중을 현혹시킬 수는 있어도 결코 관세음보살의 감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보살들의 감통을 이끌어내려면 승려든 속인이든 참된 신심으로 올바른 수행과 실천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감통」편에서 신통의 주체와 대상은 각각 누구인가? 얼핏 보면, 관세음보살로 여겨진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 아무런 계기나 연유도 없이 신통을 보이지는 않는다. 반드시 수행이 청정한 승려가 지극한 마음으로 불러야만 감통한다. 따라서 「감통」편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견고경」과 『불소행찬』, 『고승전』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점이다. 요컨대 감통의 뜻대로 쌍방이 통해야만 신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고승전』에 범을 길들이는 고승들이 여럿 등장한다는 말을 앞서 했다. 『속고승전』에도 범이 등장하지만, 사뭇 달라졌다. 석승림(釋僧林)의 전기에 나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승림은 퇴락한 절에 갔다가 하는 수 없이 맨땅에 앉았다. 그때 범 한 마리가 승림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는 눈을 내리깔고 승림을 주시했다. 이에 승림은 범을 위해 법을 설했다. 범은 한참 있다가 떠났다고 한다.49)
『고승전』에서는 고승이 신통력을 지녔다는 표지로서 범이 고분고분하게 굴었는데, 그런 범의 행동은 마치 도교의 도사를 따르는 것과 흡사했다. 그러나 승림은 범에게 불법을 설했고 그 덕분인지 범이 해꼬지를 하지 않고 떠났다. 불교적 색채가 더해졌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신이의 주체가 승림인지 불법 자체인지 애매하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신이이든 감통이든 승림이 불법을 충실하게 따랐음을 증명하는 표지로 해석된다는 사실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일곱 구의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는] 법당의 문은 늘 열려 있었으나 날짐승도 길짐승도 감히 들어오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러므로 영유 스님이 불상들을 기리며 “감응하여 [이적이] 일어나니, 참으로 곁가지가 없구나!”라고 하였으니, 신통은 가만히 드러나고 이치는 예사로움과 거리가 멀다는 말이 아니겠는가!50)
법당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어떤 짐승도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승림의 범과 달리 불법에 감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이나 감통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저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면 불도에 합당하게 수행하고 지극하게 마음을 낸다면 그가 누구이든, 승려가 아닌 속인이라도 감통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석승융(釋僧融)의 전기에 그 실마리가 있다.
승융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귀신들을 없애거나 물리친 행적을 보인 고승이다. 독경과 불도를 실행함으로써 귀신의 변괴가 사라지게 하거나 꿈에 나타난 귀신 병사들을 관세음보살을 염함으로써 물리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전기에 다음 일화가 나온다. 도적들의 습격으로 남편은 달아나고 부인은 붙잡히는 일이 생겼다. 그 부인은 길에서 만난 승융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는데, 승융은 부인에게 “오로지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시오. 다시 다른 도를 믿을 건 없소이다.”51)라고 일러주었다. 부인은 그 말대로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그 덕분에 몸을 옭아매고 있던 나무들이 풀어졌고, 닫혀 있던 옥문이 열려서 달아날 수 있었다. 게다가 헤어진 남편도 만났다. 이 모두 신이인데, 주체와 대상은 부인과 관세음보살이다. 승융은 단순한 매개자 역할만 했다.
이 밖에도 고승이 아닌 속인이 신이와 관련된 사례는 더 있다. 「감통」편에서는 고승의 범행(梵行) 곧 청정한 수행과 정진으로 신이가 일어난다고 한 인식이 확장되어 고승에 버금가는 신심과 실천을 하는 속인도 신이의 주체이자 감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는 불교가 승려들 중심에서 속인들까지 포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의의가 있다. 나타난 이적은 주로 신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목적은 청정한 수행과 지극한 신심을 북돋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Ⅳ. 마무리
초인간적이고 초월적인 능력을 보이는 신통은 이적을 일으키는 힘으로서 거의 모든 종교에서 주요한 구실을 해왔다. 불교에서는 교조인 붓다로부터 후대의 성자들, 고승들이 그런 신통을 지닌 존재로서 숭앙되기도 하고 기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신통은 역사적으로 용어에서나 의미에서 변화를 겪어 왔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변화를 고찰함으로써 불교사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파악하고자 신통의 주체와 대상, 유형, 목적 등을 분석했다.
『아함경』의 「견고경」에서 붓다는 신족, 관찰타심, 교계 세 가지 신통을 말했다. 신족과 관찰타심이 널리 실행되고 있던 신통이어서 붓다의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는 방편으로 적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붓다는 청정한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이라야 보일 수 있는 신통인 교계만을 용인했다. 교계는 붓다의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지닐 수 있는 신통으로서 누진통에 해당한다.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중도를 펴기 위해서는 교계가 가장 적절한 신통이었던 것이다.
불교가 이미 인도 사회에 뿌리를 내린 뒤에 창작된 『불소행찬』에서는 교계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면서 신족과 관찰타심도 믿음을 일으키고 깨달음을 이끄는 방편으로 묘사되었다. 신통의 주체가 붓다 또는 붓다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라는 점과 여전히 교화보다 깨달음을 위해 신통을 보인다는 것은 그 동안 불교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교화에 치중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소행찬』에서 신통은 하나에서 셋으로 늘어나는 데서 그쳤다면, 중국에서도 훨씬 다양하고 많아졌다. 용어에서도 의미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고승전』에서는 ‘신이’라 했고, 『속고승전』에서는 ‘감통’이라 했다. 이적을 일으키는 주체 또한 고승들로, 다시 속인들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 중국의 사회적ㆍ문화적ㆍ관습적 특수성에서 비롯되었다. 즉, 외래 종교인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변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승전』에서 신이가 신분에 관계 없이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속고승전』에서는 감통의 대상으로 승려들이 되었다. 『고승전』이 교화를 중시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면, 『속고승전』은 교세의 급속한 확장이 빚어낸 사이비 승려들의 횡행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승전』에서는 신이의 목적이 교화였던 반면에 『속고승전』에서는 승려들의 청정한 수행과 여법한 행실의 회복이 목적이 되었다. 특히 『속고승전』에서는 고승뿐만 아니라 속인까지도 감통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어 주목된다. 요컨대 중국에서 신이와 감통은 불교의 외적인 확산에서 내적인 확립으로 전환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신통은 초월적인 능력이고 대중에게 정서적으로 호소하는 것이라고만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정치와 사회, 문화, 관행 등 현실적인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 의미와 목적, 심지어 대상까지 변화해 왔던 것이다. 물론 본고에서 그 변화를 충분히 다 밝혀내지는 못했다. 또 동아시아의 불교사에 한정하더라도 신이가 중국 내의 도교와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동아시아 각국에서 신이의 수용과 변화는 어떠했으며 어떻게 같고 다른지 등도 고찰해야 한다. 후속 과제로 남겨두기로 하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