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범속한 일상생활은 어떻게 가치와 의미로 충만한 삶이 될 수 있는가? 평범한 ‘속’(俗; the profane)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성’(聖; the sacred)으로 질적으로 변화될 때 일상생활은 성화(聖化)된다. 성스러움의 라틴어 어원인 ‘사케르’(sacer)가 본래 ‘구별한다’(to divide)는 뜻을 지니고 있듯이, 다른 것들과 질적으로 구별된 것은 성스러운 것이고, 구별되지 않은 것은 범속한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의 성화는 일반적인 평범한 행위들과 구별되는 특정한 실천(practice)을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성스러운 삶을 구현하는 실천적 행위가 세속적이고 일상적 행위와 종교적이고 의례적인 행위로 분명하게 다른 영역으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유교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예’(禮)는 제사처럼 일상적 행위와 구분되는 별도의 종교적 영역의 의례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행위의 수행적 기능(performative function)을 주목하는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 행위 중에서 특정한 행위가 특정한 맥락 속에서 성스러운 가치[德]를 드러내는 예(禮)는 그러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는 비례(非禮)와 구분된다.1)
이러한 실천은 일상적 행위가 특정한 맥락(context)과 긴밀하게 결합해서 다른 행위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면서 이루어지는데, 이를 ‘의례’(ritual)라고 부른다. 의례적 행위(ritual behavior)가 성스러운 것은 일반적 행위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의례의 정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지만, 학문적으로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2) 서구 의례이론에서 ‘의례’는 일반적으로 ‘반복적이고(repeated), 성스러우며(sacred), 정형화되고(formalized), 전통적이며(traditional), 지향적인(intentional) 행위’로 취급되고 있다.3) 특정한 시간에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거룩한 것이나 가장 의미있는 것과 연관되어 성스러우며, 인사하거나 무릎을 꿇는 등 일정하게 잘 변하지 않는 동작으로 구성되어 정형화되고, 고대의 역사나 신화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기에 전통적이며, 특정한 이유와 의미를 의식하여 실행된다는 점에서 지향적인 것이다. 요컨대, 의례적 행위는 일반적 행위와 구별되는 독특한 방식(mode)의 행위로서, 일반적 행위와 달리 대체로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 행해지거나 일정하게 정형화, 구조화, 표준화되어 그 실천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다.4) 따라서 의례는 일상적 행위와 구별되어 참여자들에게 상징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성스러운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행위를 일반적인 행위와 구별된 의례로 만드는 차별화된 실천이 특정한 가치를 구현할 때 그것을 ‘의례화’(ritualization)라고 부른다.5) 의례화란 신에 대한 예배나 조상에 대한 제사처럼 일상적 행위와 별도로 구별되는 종교적 행위가 의례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일상적 행위라도 그것이 성당이나 가묘처럼 특정하게 구별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면 일상적 행위가 의례화되는 것이다. 예컨대, 일상생활에서 남에게 인사를 드릴 때 절하는 것은 일상적인 행위이지만 그러한 절이 가묘라는 성스러운 공간에서 이루어지거나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수행되면 그러한 실천은 의례화된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특정한 행위를 의례화하는 의례적 맥락의 초점이 된다.
나아가 특정한 행위의 실천은 동일한 사람들은 중심과 주변, 정점과 저변으로 구별하여 일정한 사회적 위계질서를 구성하기도 한다. 의례의 참여자는 구체적인 자세와 동작을 동반하는 의절(儀節)을 통해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지위와 상태를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한다. 인류학자 라파포트(Roy A. Rappaport)에 의하면, ‘의례’(ritual)는 ‘의사소통의 양식’(a mode of communication)으로서, 의례를 실천하는 사람의 현재적 지위와 상태를 표현하는 ‘자기지시적 메시지’(self-referential messages)를 전달한다.6) 예컨대, 특정한 예를 행할 때 당(堂) 위에 있는 사람과 아래 있는 사람은 사회적 위상이 다르며, 조상의 봉사(奉祀) 대수는 신분에 따라 차별화되기 때문에 봉사 대수를 보면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례화 양상은 인간적 차원의 차별화된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 사족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소학(小學)』의 규범적 모델(model)을 수용하여 시간, 공간, 인간의 특정한 의례적 맥락에서 정형화된 실천을 반복함으로써 일상생활을 의례화하는 독특한 유교문화의 양상을 선보였다. 특정한 시간, 장소, 관계에 따라 특정한 행위들을 정형화해서 반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유교적 가치를 구현했고 그에 따라 일상생활을 성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의례화 양상은 유교적 가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효과적으로 실현하여 조선시대 사족의 일상생활을 성화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예교화(禮敎化)가 진행되었다.7)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사족(士族)들이 시간, 공간, 인간의 차원에서 일상생활을 의례화하는 중요한 몇 가지 양상들을 검토함으로써 일상생활을 성화하는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삼간(三間) 분석은 『주역(周易)』의 삼재(三才)인 천지인(天地人)을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의례 분석의 세 차원으로 설정한 것이다. 특정한 행위가 의례화되는 것은 특정한 시간, 공간, 인간의 의례적 맥락에 따라 실천적으로 수행된다. 이를 실천적 의례이론이라고 부른다.8) 이런 관점에서는 일반적 행위라도 특별하게 구분된 장소인 성소(聖所)에서 이루어지거나 특정한 시간에 실천되거나 특정한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수행될 때 의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선비들의 일상생활이 유교적으로 의례화되는 양상을 검토하기 위해서 사족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의례적 맥락을 제사라는 특정한 의례에 국한하지 않고 세수, 인사, 독서, 강학 등의 다양한 일상적인 행위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의례화 양상의 특징을 포착하기 위해서 시간, 공간, 인간의 세 가지 차원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유형의 사례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시간적 차원에서는 『소학(小學)』의 의례화된 실천을 통해 유교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양상과 더불어 일과(日課)의 시간적 의례화 양상을 분석할 것이고, 공간적 차원에서는 서원이나 서숙의 강회(講會)에서 이루어지는 잠명(箴銘)의 독송(讀誦)과 상징적 의절(儀節)을 통해 공간적 의례화 양상을 탐구할 것이며, 인간적 차원에서는 주로 가묘(家廟)의 설립과 연계된 『가례(家禮)』의 실천에 따라 제사나 독서의 의례화된 실천이 선친(先親)과 선사(先師)에 대한 경건한 의식[敬]의 무의식적 심화로 전개되는 양상을 다룸으로서 아버지와 스승이 가족과 유림의 상징적 중심이 된다는 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Ⅱ. 일상생활의 시간적 의례화 : 『소학』의 의례화된 실천과 일과의 의례화
조선시대 사족들은 『소학』에서 모범(model)으로 제시하는 규범적 행위들을 특정한 상황에 맞게 반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성리학적 가치를 깊이 내면화(internalization)하였다. 그리하여 다양한 주석서, 번역서, 연구서를 편찬하고 간행할 만큼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중에서도 돋보일 만큼 『소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한편,9) 『소학』의 공부를 토대로 삼아 일상 속에서 예의 체득과 체현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개인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조선시대 문집들의 행장(行狀)이나 유사(遺事)에서 이러한 양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소학』의 실천은 사족들의 일상생활에서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소학』의 실천은 15세기 후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정(李楨, 1512~1571)이 편찬한 『경현록(景賢錄)』에 의하면,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릴 만큼 『소학』의 규범에 따라 ‘율기(律己)의 조행(操行)’에 철저하였다.10) 실제로 그는 평소에 늘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날마다 『소학』과 『대학(大學)』 책을 강송(講誦)하면서 삶의 규범으로 삼았다. 또한 육경(六經)을 탐색하고 성경(誠敬)을 힘껏 지켰으며, 존양성찰(存養省察)의 개인적 수양을 ‘체’(體)로 하고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사회적 실천을 ‘용’(用)으로 삼아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르기로 마음먹었다. 그에 따라 30여 년 동안 첫닭이 울면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해서 가묘(家廟)에 알묘(謁廟)한 뒤에 대부인(大夫人)에게 문안했으며, 서재로 나와서 소상(塑像)처럼 꿇어앉아서 학자들에게 치심(治心)의 요령을 강론하고, 젊은이들에게 하학(下學) 공부를 말하고 어른들에게는 의리(義理)를 강론하였으며, 저녁에는 다시 문안을 드리고, 밤이 깊어서 강론을 파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듯 김굉필은 『소학』을 철저히 내면화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일정한 방식으로 일상생활을 의례화했으며, 이러한 조행은 조선시대 내내 선비들이 따라야 할 모범적인 전형이 되었다.11) 특히 ‘율신제행’(律身制行)의 의례화된 실천은 시간적 차원에서 정형화된 일과(日課)의 리듬을 반복하는 양상을 뚜렷하게 구현했다. 의례화의 관점에서 보면, 먼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몸을 씻는 행위는 위생과 청결 문제가 아니라 몸을 깨끗이 씻어서 정화(purification)하는 의례적 실천이 될 수 있으며, 의관을 정제하는 행위는 패션의 문제가 아니라 경건한 몸가짐[持身]의 재계(齋戒)를 통해 하루를 준비하고 일상생활을 의미있게 만드는 의례적 실천이다. 이어서 돌아가신 조상을 배알하고 살아계신 부모님께 문안(問安)하는 행위는 일반적인 인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교문화의 관점에서 조상-부모-나-후손으로 계승되는 혈연적 유대의 전승을 확인함으로써 일상생활이 개인의 단편적인 삶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시간적 연속성을 되새기고 ‘불후’(不朽)의 문화적 생명을 이어가는 의식적 행위로 승화된다. 한 개인의 행동은 조상과 후손을 포함한 가문의 역사를 빛나게 할 수도 있고 어둡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의식한 선비는 심신(心身)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적절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실제로 소상처럼 꿇어앉아서 공부하고 교육하는 단정한 자세(posture)와 절제된 몸짓(gesture)의 올바른 몸가짐은 자연스럽게 경건한 마음을 자아낸다.
그리하여 의례화된 실천은 단순한 일회적 행위에서 멈추지 않고 반복적 실천을 통해 경건한 의식을 자연스럽게 강화하게 된다. 실제로 김굉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율신제행’의 의례화된 실천은 몸의 ‘의관정제’로부터 시작해서 마음의 ‘지경’(持敬)을 거쳐서 ‘존양성찰’(存養省察)의 ‘수신’(修身)으로 연결되고, 이어서 제가-치국-평천하의 ‘치인’(治人)으로 확장될 수 있다.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손을 씻고 머리를 빗고 옷을 입고 띠를 맨 다음 부모의 침소로 나아가서 기운을 낮추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따뜻한지 차가운지 편안한지 아닌지를 여쭙는다. 어두워지면 침소로 나아가서 그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그것이 따뜻한지 서늘한지를 살핀다. 한나절 동안 모시고 받들 적에는 늘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얼굴을 공손하게 하여 공경의 자세로 응대하고 좌우로 나아가 봉양하며 그 정성을 남김없이 다한다. 나가거나 들어올 적에는 어김없이 절하고 하직하며 절하고 뵈어야 한다.12)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의하면, 실제로 16세기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통해 자신의 심신(心身)을 경건하게 다스리는 ‘수신’에서 시작해서 ‘사친’(事親)을 근간으로 하는 가족관계를 거쳐 ‘치인’으로 확장했다. 그는 얼굴 표정, 목소리 톤, 대화 태도, 몸가짐 자세 등이 경(敬)과 성(誠)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의례화했으며, 그러한 수신의 덕을 부모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 관계와 사회적 관계로 확장했다. 특히 ‘교기질(矯氣質)’을 통해 문화적 습속을 갱신하는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실천의 노력을 강조했으며, 그에 따라 ‘마음 → 몸 → 가족 → 사회’로 확장되는 예교(禮敎) 문화의 정립을 체계적으로 구축함으로써 일상을 성화(聖化)하려고 했다.13)
이러한 흐름은 내면의 ‘예의(禮義)’를 몸의 구체적인 의절(儀節)로 체현하되 반복적으로 실천하여 사회적 ‘예속’(禮俗)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외면화’(externalization)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14) 이러한 문화적 관습은 사회적 공감대를 통해 자율적인 예교(禮敎) 질서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소학』과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체득과 체현은 수기에서 치인으로 확장되는 사회적 외면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 성리학자들은 개인의 수양과 자발적 예의 실천을 제도의 타율적 규율보다 상대적으로 강조했다.
그런데 예의 실천은 이러한 외면화에서 그치지 않고, 성왕(聖王)의 ‘제례작악’(制禮作樂)을 통해 예제(禮制) 혹은 예법(禮法)으로 객관화되고 제도화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의 제정과 시행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제와 예법은 사회적 제도이자 문화적 규범으로서 다시 개인의 몸과 마음을 타율적으로 규율하는 ‘내면화’(internalization) 작용을 통해 사회에서 개인으로 환류(feedback)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제와 예법을 익히는 공부는 물론 그러한 규범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행태를 사회적으로 규제하는 작용도 내면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흐름은 조선 후기에 객관적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실학자들의 논의와 제도개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예는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외면화와 내면화의 문화적 환류 체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소학』의 실천을 통한 내면화의 양상은 조선 후기에도 면면히 계승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예컨대, 18세기 후반 호남(湖南)의 소론(少論)을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명이었던 동강(桐岡) 이의경(李毅敬, 1704~1778)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실하고 경건하게 삶을 성화하고 ‘율신제행’을 통해 일상생활을 의례화했던 모범적 사례였다. 그는 엄격한 자기 규율과 공손한 타자 배려의 실천을 통해 일가와 향촌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면서 선(善)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자율적 예교(禮敎)의 외면화 방식을 실현했다. 그리하여 날마다 정결의례와 심신 재계 후에 조상이나 성인을 만나는 의례로 시작하여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경건한 자세로 앉아서 자기를 지키고 지성(至誠)으로 남을 배려하는 ‘장덕군자(長德君子)’로 칭송받았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가묘를 배알하고 집에서 성상(聖像)을 봉심(奉審)했는데, 삭망(朔望)에도 그렇게 했으며, 서실(書室)에 물러나 앉아서 서책을 공경스럽게 마주하여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집안에서 거처할 때에는 엄격하고 예(禮)가 있었으며 남과 교제할 때에는 공손하고 의(義)를 좋아해서, 친척들과 고을 사람들이 그분을 ‘장덕군자(長德君子)’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15)
언제나 새벽마다 틀림없이 띠를 매고 가묘를 배알하고, 물러 나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앉아서 서책을 공경스럽게 마주하면서도 싫증 내는 기색을 잠깐이라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공자(孔子)의 진상(眞像)을 봉심하는 것은 사문(師門)에서 전수하는 것인데, 매달 초하룻날 첨배(瞻拜)하여 갱장(羹牆)의 사모하는 마음을 펼쳤다. 집안에서는 화목함을 모범으로 삼고, 자손들은 삼가 힘쓰는 것을 규율로 삼으니, 고을에서 교화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철에 길가에서 얼거나 굶주려서 죽을 위기에 있는 자를 보면 전대를 끌러서 돈을 내어주어서 몸을 돌볼 수 있도록 보호해주었다. 여관에서 도둑질하는 아이를 보면 방으로 들여서 지성(至誠)으로 가르침을 베풀어서 마침내 선량하게 만드는 것이 마치 왕언방(王彦方)의 교화와 같았다. … 이것이 그가 자신을 지키고 행실을 제어하는 대략이다.16)
특히 『가례』의 보급에 따라 가묘를 건립한 조선의 사족들은 가묘를 통해 삶의 근원인 조상신을 의식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하듯이, 아침마다, 계절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특정한 때마다 주기적으로 가묘를 참배했으며, 출입시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가묘에 아뢰는 알묘(謁廟)를 실천했다. 이에 따라 가묘는 삶을 성화시키는 의례적 중심공간이 되었다. 이의경은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참배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생물학적 근원을 반복적으로 상기하는 의례화 과정을 통해 하루를 경건하고 거룩하게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존재의 문화적 근원인 공자의 진상 혹은 성상을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봉심(奉審)하고 첨배(瞻拜)했다.
매일 아침 혹은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의 가묘 참배가 가통(家統)을 전승하는 의례라면,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의 공자상(孔子像) 봉심과 첨배는 도통(道統)을 상기하는 의례였다. 따라서 가묘의 참배와 공자상의 첨배의 주기적인 반복은 각각 생물학적 생존의 근원인 조상과 문화적 생활의 근원인 스승을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되새김으로써 일상생활을 성화하는 의례화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일상생활의 시간적 의례화 중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성리학적 수양 공부를 위한 일과의 의례화 양상이다. 세계종교의 시간적 의례화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먼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거룩한 성소(sacred place)를 상실해서 그 거룩한 공간에서 했던 의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유대교나 기독교는 공간을 시간으로 대체하기 위해 전례력(典禮曆; annus liturgicus; liturgical calendar)을 강화했는데, 유월절(踰越節), 부활절(復活節), 성탄절(聖誕節) 등처럼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날을 해마다 주기적으로 기념하는 상징적 의례를 시간적으로 의례화하는 경우가 있다.17) 다음으로, 이슬람(Islam)의 다섯 기둥(arkān al-dīn) 중 해뜨기 직전, 정오, 오후 4시경, 해진 직후, 잠자기 전 등 매일 5번씩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쌀라(Ṣalāh)의 경우처럼 자연적인 시간을 일정하게 분절하여 시간적으로 의례화하는 행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사족들은 주로 후자의 모델에 따라서 시간적 의례화를 진행했다. 그리하여 해마다 특정한 절기에 거행하는 세시풍속을 따랐지만, 조선 후기에는 하루를 12개의 시간 단위로 분절한 다음에 성리학적 수양 공부를 위해 일과를 면밀하게 의례화하기도 했다. 예컨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하학지남(下學指南, 1784)』 「일용(日用)」편, 도산(道山) 윤최식(尹最植, ?~?)의 『일용지결(日用指訣, 1880)』, 최동익(崔東翼, 1868~1912)의 「재거일용이십오수(齋居日用二十五首)」 등은 일상생활을 하루 12시진(時辰)별로 구분된 일과로 구성한 성리학적 일일지침서들이다.18) 실제로 일과의 시간적 의례화 양상을 담은 이러한 일일지침서들은 조선에서 18세기 이후 20세기까지 확산되었다.
조선 후기에 일부 사족들이 일과를 12시진별로 구분한 것은 본래 명대(明代)의 정우문(程羽文, 1644~1722)의 『청한공(淸閑供)』 「이육과(二六課)」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육과」는 풍부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취미를 향유했던 명대 강남(江南) 지역의 소비문화를 반영했는데, 사상적으로는 양주(楊朱, B.C.440?~B.C.360)의 ‘전성보진(全性保眞)’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하루동안 12시간별로 청취(淸趣)의 문화적 취미를 향유하고 양생(養生)의 휴식과 건강의 증진을 지키는 청복(淸福)의 실현을 추구했다.19) 실제로 「이육과」에서는 청복의 향유와 양생의 실현을 위해 일정한 시간마다 향을 피워서 정신을 맑게 했고, 조식(調息)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저녁의 묵좌(默坐)로 하루를 마무리했으며, 잠자리에서는 고치(叩齒)와 도인(導引) 등의 도교적 양생법을 실천했고, 독서(讀書)하는 서목도 시무(時務) 파악을 위한 역사서 외에는 유교 경전이나 성리서(性理書)가 아니라 대체로 『능엄경(楞嚴經)』, 『남화경(南華經)』, 『주역(周易)』처럼 불교, 도교, 유교의 양생론적 수행과 연관되는 책들이었다.20)
한편,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이운지(怡雲志)』 「연한공과(燕閑功課)」와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사시십이시청취변증설(四時十二時淸趣辨證說)」 등처럼 19세기 실학자들이 편찬한 유서(類書)들에는 「이육과」가 그대로 수용되었다.21) 다만 조선 후기 사족의 주류였던 성리학자들은 일과를 12시진으로 분절하는 것만 수용했으며, 대체로 문화적 취향 향유나 양생론적 건강과는 무관하게 성리학적 수양과 실천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이육과」가 취향과 양생의 시간적 의례화라면, 조선 후기의 일일지침서는 성리학적 수양 공부의 시간적 의례화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의 일일지침서들은 대체로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 정제, 부모님 문안, 가묘 알묘 등으로 이어지는 일과 순서대로 김굉필 이후 정형화된 아침 일과를 계승하고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간 단위로 적절한 예를 실천하고 공부하는 행위들을 통해 경건한 심신을 유지하는 의례화를 추구했다. 특히 1880년에 영남의 도산서당(道山書堂)에서 간행된 『일용지결』은 수양을 중심으로 12시진으로 구분하여 이루어지는 성리학자들의 일과(日課) 공부를 극명하게 잘 표현했다.22)
실제로 『일용지결』은 기상, 새벽 문안, 의관 정제, 가묘 참배, 정좌 독서로 시작하는 ‘율신제행’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특정한 행위들을 시간별로 더욱 면밀하게 분절하고 심화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용지결』은 제1장 매상(昧爽)의 입지경신(立志敬身), 제2장 일출(日出)의 독서궁리(讀書窮理), 제3장 식시(食時)의 존양성찰(存養省察), 제4장 우중(禺中)의 충치확충(充治擴充), 제5장 일중(日中)의 박학문장(博學文章), 제6장 일질(日昳)의 척이단(斥異端), 제7장 일포(日晡)의 관성현(觀聖賢), 제8장 일입(日入)의 정가(正家), 제9장 황혼(黃昏)의 처세(處世), 제10장 인정(人定)의 정력지요(定力之要), 제11장 야반(夜半)의 몽매지험(夢寐之驗), 제12장 계명(鷄鳴)의 신지효(新之效)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각각 입지(立志), 궁리(窮理), 조심(操心), 주경(主敬),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천선(遷善), 독행(篤行), 근독(謹篤), 계신(戒愼)에 해당한다.23) 요컨대, 조선 후기 일일지침서들은 성리학적 수양과 실천의 시간적 의례화라고 할 수 있다.
Ⅲ. 일상생활의 공간적 의례화 : 강회의 상징적 강학 의절과 잠명의 독송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족 집안에서는 가묘가 공간적 중심이었다. 가묘는 일상생활이 살아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조상과 함께 연계되는 삶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상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고 후손들에게 불명예의 멍에를 지우지 않기 위해서 사족들은 함부로 살지 않고 조심스레 행동했다. 집안의 성스러운 공간적 중심이 가묘였다면 국가의 성스러운 공간적 중심은 종묘(宗廟)였다. 공동체의 위기를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위기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종묘가 국가의 공간적 중심인 것은 분명하다.
한편, 문화적 차원에서 사족 사회의 공간적 중심은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 서원(書院), 서숙(書塾) 등의 강학공간이었다. 선비[士]는 기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묘를 중심으로 하는 의례화 양상은 앞서 검토했으므로, 여기에서는 강학(講學) 공간을 중심으로 공간적 의례화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조선시대 강학 활동은 서울의 성균관(成均館)과 지방의 향교(鄕校)라는 국립학교 외에도 지방의 사립학교인 서원(書院)이 있었다. 이 기관들은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이나 사당(祠堂)이라는 선현(先賢) 제향(祭享) 공간, 명륜당(明倫堂)이나 강당(講堂)이라는 학생 교육 공간 및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포함하는 기숙 공간, 기타 유식(遊息)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식 교육기관들은 제향공간을 갖추고 있었고, 석전(釋奠)이나 향사(享祀)의 공식적인 제사 의례도 있었다. 이에 비해 향촌에서 사적으로 운영하던 서숙(書塾), 서재(書齋), 서당(書堂) 등의 교육기관에는 이러한 제향공간이 없었다. 다만 향교와 서원은 물론, 서숙, 서재, 서당 등에서도 강학활동과 더불어 그와 연관된 강학 의례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그러한 강학 의례는 강화되고 심화되었다.
특히 강학활동을 위해 정식으로 모이는 강회(講會)에서는 교육공간을 중심으로 스승인 강장(講長) 혹은 숙사(塾師)와 제생(諸生) 또는 제생(諸生) 상호 간에서 일정한 위치 배치와 특정한 행위 실천을 포함한 강학활동의 의례화가 뚜렷하게 진행되었다. 강학의 상징적 공간 구성이 교육공간의 공간적 의례화라면, 그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의절(儀節)이 의례화된 실천은 인간관계의 의례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서원과 서숙의 공간적 의례화 정도는 지역과 학파와 가문과 운영 주체의 방침에 따라 다양하지만, 서원을 비롯한 교육공간이 선현에 대한 향사를 통해 선현(先賢)들이 구현했던 유교적 가치[德]를 주기적으로 되새기면서 내면화하는 교육-의례의 중심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선현들을 모시는 사당과 강당은 의례와 교육의 측면에서 일종의 큰 바위 얼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서원을 비롯한 교육공간에서는 매월 삭망일의 삭망분향례(朔望焚香禮), 매년 정월초 5일의 정알례(正謁禮), 청명(淸明)일의 묘제(墓祭) 등을 비롯해서 다양한 선현 향사가 실행되었으나, 영남 남인(南人)과 기호 서인(西人) 사이에는 의례화 양상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24) 실제로 영남지역 남인계 서원에서는 서원 향사 중에 재계를 하면서 경독(敬讀)을 의례화했다. 특히 경독은 「백록동규(白鹿洞規)」, 「사물잠(四勿箴)」, 「경재잠(敬齋箴)」, 「심잠(心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을 차례로 했고, 향사에서 축문(祝文)을 낭독한 뒤에는 「도동곡(道東曲)」이라는 악곡(樂曲)을 낭송했다. 그리하여 남인계 서원의 효시가 되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경우에는 향사에 앞서 3일간 재계하는 동안 경독을 실천했으며, 행례(行禮) 중에는 악장(樂章)을 낭송했다. 이에 비해 서인계 서원에서는 삭망분향례시 강회를 진행하는 특징이 있었으며, 노강서원(魯岡書院)의 사례처럼 강회의 후반부나 향사례를 마친 뒤에 「백록동규」를 비롯한 학규를 낭송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서원 향사 외에 교육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거재(居齋)나 강회(講會) 등 강학활동도 의례화된 실천의 양상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조선의 서원이나 서숙 혹은 서당 등에서 거재, 강회, 통독(通讀)할 때 유생(儒生)들의 일과(日課)는 대체로 아침 기상, 식전(食前) 독서, 상읍례(相揖禮), 조식(朝食), 경독, 알묘(謁廟), 개별독서/통독/제술(製述), 귀가 시 응강(應講) 혹은 배강(背講), 파재(罷齋) 시 수창시(酬唱詩), 향사례(鄕射禮) 혹은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25) 학생들은 아침에 씻고 의관을 갖춘 뒤 단정하게 앉아서 독서를 하다가 식당에 가서 상읍례를 행한 뒤에 아침 식사를 했으며, 식사 후에는 조사(曹司)가 「백록동규」, 「이산원규(伊山院規)」, 「학교모범(學校模範)」,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 중에서 서원에 따라 달리 지정된 학규(學規)나 규범(規範)을 경독하면 유생들이 경청했다. 다만 영남의 남인계 서원들이 주로 주자(朱子)의 「백록동규」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이산원규」를 주로 경독의 텍스트로 삼은 반면, 서인계 서원들은 주자의 「백록동규」와 율곡 이이의 「학교모범」이나 「은병정사학규」 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독이 끝나면 사당에서 알묘를 한 뒤에 서재에서 독서나 통독을 진행했으며, 그 성과를 점검하기 위해 임강(臨講)이나 배강(背講)을 시행했다. 강회나 거재 등을 마칠 때에는 수창시, 향사례 혹은 향음주례 등을 실행했다.
이러한 양상은 선현의 사당을 중심으로 학문을 배우는 서원이라는 공간에서 다른 공간에서는 하지 않는 특정한 의절들을 행한다는 점에서 공간적으로 차별화된 의례화의 실천이지만, 일정한 시간적 순서에 따른다는 점에서 강학활동의 시간적 의례화라는 측면도 함께 나타난다. 이는 기독교의 예배와 비슷하다. 기독교의 예배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데, 예배시에 신앙의 신조(信條)를 담은 사도신경을 외우고 교독문을 외우면서 시작해서 기도, 설교, 찬양 등을 거쳐서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고 나서 성도(聖徒)의 교제(koinonia)를 하듯이, 서원이나 서숙의 강학 의례는 상읍례 이후 「백록동규」, 「이산원규」, 「학교모범」 등처럼 유교적 신념과 공부의 방향 맟 목표를 설정한 학규나 규범을 낭송하는 경독으로 시작해서 알묘와 독서/통독 등을 거쳐서 시(詩)를 주고받거나 술을 주고받는 예(禮)로 마무리한다. 서원이나 서재 등에서 열리는 강회에서 이루어지는 경독이 기독교의 예배에서 사도신경이나 교독문에 해당한다면, 알묘는 기독교의 기도에 견줄 만하고, 독서나 통독은 기독교 예배의 말씀 선포와 설교에 대응하며, 수창시, 향사례, 향음주례 등은 기독교의 성도의 교제에 상응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강회의 의례화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화되고 심화되었다. 예컨대, 19C말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1910) 사이에 생존했던 경주(慶州)의 유학자 자봉(紫峯) 정석호(鄭錫祜, 1840~1906)의 「강회정읍례도(講會庭揖禮圖)」와 「홀기(笏記)」는 교육공간의 상징적 공간 구성과 강회 의절의 의례화 정도가 고도로 극대화된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정석호는 1882년 별시(別試)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에 가던 중에 괴질(怪疾)이 유행한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과거(科擧) 응시를 단념한 뒤에 고향에서 향린(鄕隣)의 아동들을 가르치고 향음주례에 빈(賓)으로 참여하는 활동을 하면서 향촌 사족들의 강회를 위한 예를 연구하고 주도적으로 이끌었다.26) 정석호가 제시한 「강회정읍례도」와 실제로 제생들이 여러 차례 습행(習行)했던 「홀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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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반수(班首)들이 각각 제생(諸生)들을 인솔해서 차례로 나아가고, 양반의 반수들은 서로 향해서 읍(揖)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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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은 수종(首從)이 덕(德)의 문(門)으로 들어가고, 서반은 수종이 도(道)의 길[路]을 걸어가서, 차례로 초립위(初立位)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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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의 반수가 “행원자이(行遠自邇), 승고자비(升高自卑)”를 송(誦)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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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의 반수가 “욱솔이정(勗率以正)”이라고 송(誦)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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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의 반수가 권내(圈內)의 동주(東註)인 “성경인의(誠敬仁義), 이저건곤(已著乾坤)”를 송한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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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의 반수가 권내(圈內)의 서주(西註)인 “고명배천(高明配天), 박후배지(博厚配地)”를 송한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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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兩班)의 반수들이 제생들을 인솔해서 절선(折旋)한 뒤에 재립위(再立位)까지 가서, 차례대로 서서 서로 향해 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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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의 반수가 “면면순순(勉勉循循), 물망물조(勿忘勿助)”를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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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의 반수가 “영과이진(盈科而進), 성장이달(成章而達).”을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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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반수들이 제생들을 인솔하되 또 절선(折旋)해서 진립위(進立位)까지 가서 주신(周身)해서 서로 향하여 읍(揖)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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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의 반수는 “사희현(士希賢), 현희성(賢希聖), 성희천(聖希天).”을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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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의 반수는 “하학인사(下學人事), 상달천리(上達天理).”를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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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반수들이 제생들을 인솔해서 인보(引步)하여 주선처(周旋處)로 나아가서 다시 상읍(相揖)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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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의 반수가 권외(圈外)의 동주(東註)를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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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의 반수가 권외의 서주(西註)를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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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반수들이 제생들을 인솔하여 주선(周旋)해서 초립위까지 나아가서 서로 향하여 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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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의 반수가 “천리인사(天理人事), 동조공관(同條共貫).”을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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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의 반수가 “군자준도이행(君子遵道而行), 반도이폐(半途而廢), 오불능이의(吾不能已矣).”을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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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반수들은 제생들을 인솔해서 앞처럼 절선(折旋)하여 행하되 재립위(再立位)에 이르러 서로 향하여 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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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 반수가 ‘이우보인(以友輔仁), 이선상관(以善相觀).’을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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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 반수가 ‘자왈(子曰), 종일불식(終日不息), 종야불매(終夜不寐), 이사무익(以思無益), 불여의학야(不如學也).’를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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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반수가 제생들을 인솔하고 또 절선(折旋)하여 행하되 진립위에 이르러 차서대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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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장(講長)과 반수와 제생들은 모두 상읍(相揖)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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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법(讀法)이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독송(讀誦)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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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의 반수는 ‘위산구인(爲山九仞), 공휴일궤(功虧一簣)’를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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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의 반수는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취일보(進取一步)’를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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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반수들은 제생을 인솔해서 차서대로 승당(升堂)하고, 동서반(東西班)은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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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의 반수는 『논어(論語)』 「구사(九思)」를 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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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의 반수는 『예기(禮記)』 「구용(九容)」을 송한다. 이어서 개강(開講)을 청한다.
정석호의 「강회정읍례도」와 「홀기」는 『주역(周易)』의 괘상(卦象)과 『예기(禮記)』의 의절(儀節)을 결합시켜서 의례 공간을 상징적으로 의례화하는 한편, 인간 관계의 질서를 표상하고 유교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행위의 실천으로서 의절을 의례화하는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공간적 차원에서는 서원 강당의 상징적 의례화가 이루어졌고, 인간적 차원에서는 의절의 의례화가 구현되었다.
첫째, 「강회정읍례도」30)는 강회의 공간을 인간이 따라야 할 우주적 질서[道]와 그것을 본받아서 실천하는 인간의 가치[德]가 천인합일(天人合一)하는 양상을 상관적 사유(correlative thinking)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상했다. 실제로 그림 왼쪽의 ‘행도로(行道路)’와 오른쪽의 ‘입덕문(入德門)’은 각각 서반(西班)과 동반(東班)으로 분화된 제생들의 움직임을 통해 그러한 표상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아울러 당(堂) 위의 중앙에 강장(講長)이 자리하고 좌우로 집례(執禮)와 독법(讀法)이 위치하며, 당 아래에는 반수(班首)ㆍ제생(諸生)ㆍ조사(曹司) 등이 차례대로 자리하는 것은 인간적 차원의 위계질서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또한 『중용(中庸)』을 인용해서 하늘에 짝할 만한 고명(高明)함과 땅에 짝할 만한 박후(博厚)함을 제시한 것은 천도(天道)와 인덕(人德)을 조응시킨 것이며,31) “성경인의(誠敬仁義), 이저건곤(已著乾坤)”이라는 표현도 인간의 덕목을 우주의 질서를 반영한 것으로 연계하여 설명한 것이다.32)
둘째, 천인합일의 세계관은 당 아래의 제생들이 배열하는 위치와 움직이는 의절의 동선을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공간적 상징과 의절의 실천을 결합시키는 의례화 양상을 선보였다. 예컨대, “바깥의 동그라미(◯)는 하늘을 상징하고 안의 네모[□]는 땅을 상징한다. 둥글게 도는 것[周旋]은 컴퍼스[規]에 맞추고, 꺾어서 도는 것[折旋]은 굽자[矩]에 맞춘다.”33)라고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론적 표상과 주선(周旋)과 절선(折旋)의 의례적 행동의 동선과 유기적으로 연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초립위(初立位), 재립위(再立位), 진립위(進立位) 순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초립위에서 재립위로 나아갈 때와 재립위에서 진립위로 나아갈 때는 반듯하게 꺾어서 도는 절선의 의절을 행한 반면, 진립위에서 초립위로 되돌아갈 때에는 주선의 의절을 실행했다. 따라서 이러한 의절의 실천은 하늘과 땅의 덕을 체득하고 체현하는 의례화된 실천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주역』에서 천택리(天澤履) 괘의 뜻과 ‘정(井)’괘와 ‘손(巽)’괘의 형상을 본뜨고 그것과 『예기(禮記)』 「악기(樂記)」와 「옥조(玉藻)」편의 의절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제생삭망지강습(諸生朔望之講習)의 의례화를 구성했다.34) 먼저, 제생들이 움직이는 의례적 행로(行路)와 위치 설정은 『주역(周易)』의 ‘정(井)’괘와 ‘손(巽)’괘의 글자 두 글자의 형상을 구현했다. 그림 중앙의 주[中註]에 의하면, 『주역』의 괘 중에서 ‘정’과 ‘손’ 두 글자에서 취하여 저절로 폐형(蔽形)을 이루는데, “하늘이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것은 은하수[河漢]를 상징하고, 땅이 사방(四方)으로 네모난 것은 사해(四海) 좌우(左右)를 상징하며, 각각 구획(九畵)을 한 것은 구주(九州)와 구하(九河)를 상징한다. 대개 정(井)은 바름[正]이고, 손(巽)은 따름[順]이며, 폐(蔽)는 분별[辨]이다. 바르고 따르며 분별하는 것[正順辨]이 예(禮)의 대절(大節)이다.”35) 여기서 예의 대절로 적시된 바름[正], 따름[順], 분별[辨]은 의례 참여자들이 상징적으로 구현하는 우주적 질서와 인간의 덕목들과 조응하면서 유교적 가치들을 의례화된 실천을 통해 깊이 내면화하게 만든다. 또한 진퇴읍양(進退揖攘)의 구체적인 몸짓, <채자(采齊)> 음악에 맞추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진행, <사하(肆夏)> 음악에 맞추어 당에 올라가는 행위 등을 통해 음악이 리듬과 연계되는 정형화된 몸짓들 역시 유교적 가치를 반복적으로 깊게 체득하고 체화하는 의례화 양상이다.36)
넷째, 강회 정읍례에서는 지금까지 설명한 상징적 함의를 지닌 의절들을 진행하면서 강회의 개강(開講)에 앞서 집례가 먼저 창(唱)을 하면 제생들이 따르는 방식으로 다양한 잠명류(箴銘類) 문구들을 텍스트로 삼아 경독을 실천했고, 경례(敬禮)의 후반부에는 독법이 「백록동규」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독송(讀誦)했으며, 『논어(論語)』 구사(九思)와 『예기(禮記)』 구용(九容)을 구송(口誦)함으로써 잠명류의 활용을 극대화했다.37) 이러한 의례화 양상들은 짧은 잠명의 운율에 맞추어 심오한 진리와 실천적 몸짓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상징적 의절로서 주목할 만하다.
17세기부터 조선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문회(文會)와 향약(鄕約)을 중심으로 하는 향회(鄕會)를 통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고 유교적 사회질서를 재구축하는 노력을 경주했다. 이 과정에서 강회의 강학활동은 이러한 노력을 구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가운데서도 잠명의 독송은 강학활동의 의례화로서 효과적인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서원이나 서재에서는 성현의 화상(畫像)을 봉심하고 첨배하거나 성현의 지혜가 응축된 잠명을 강당(講堂) 벽 위에 걸어두거나 주기적이고 반복적으로 구송하는 양상이 도드라졌으며, 후대로 갈수록 그러한 양상은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매달 초하루에 연경서원(硏經書院)에서 모이거나 선사재(仙査齋)에서 모인다. 성현의 잠계(箴戒)를 강당 벽 위에 걸어두고 북쪽 벽 아래에 어른의 자리를 마련하여 모당 선생과 낙재 선생이 나란히 앉으면, 여러 학생들은 앞으로 나와 배례를 하고, 이어서 3면으로 나누어 서서 서로 향하여 읍례를 한다. 자리를 정하여 앉으면, 유사가 소리를 내서 「백록동규」와 「학교모범」을 한 번 읽는다. 직월이 학생들의 선악을 기록한 장부를 나와서 올리면, 선한 자는 장려하고 권면하며 악한 자는 혼내고 가르친다. 그 뒤에 여러 학생들이 각각 읽은 책을 갖고 나와서 진강한다. 강을 할 때에는 반드시 단정하게 손을 맞잡고 바르게 앉되 서로 돌아보며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성현의 글과 사학(史學)이 아니면 강(講)을 허락하지 않는다. 연고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면 사유를 적어서 유사를 통해 스승에게 알리도록 한다.38)
매달 초하루나 보름날마다 여러 생도들과 더불어 연경서원이나 선사재에서 모이거나 분암이나 동학암에 모이기도 하면서 경의(經義)를 강론하였으며, 학령(學令) 12조를 기록해서 좌우에 걸어두었는데, 매일 아침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강당으로 나와 앉으면, 여러 생도들이 들어와서 스승에게 절하고 서로 인사하는 예(禮)를 했고,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과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을 강하고 나서야 물러났다. 초저녁에도 그랬다.39)
예컨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과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을 중심으로 연경서원(硏經書院), 선사재(仙査齋), 영모당(永慕堂) 등 서원이나 서재에서 모여서 강회를 진행했던 조선 후기 대구의 문회는 실제로 대구지역의 유교적 사회질서를 새롭게 정립했다. 위 인용문을 살펴보면, 제생들은 스승들에게 배례(拜禮)를 하고 제생 상호간에는 상읍례를 함으로써 유교적 인간관계의 위계질서를 구축함과 동시에 성현의 화상을 첨배하거나 「백록동규」, 「학교모범」, 「사물잠」, 「경재잠」 등의 학령(學令)이나 잠명을 강당 벽 위에 걸어두거나 반복적으로 구송하는 의례화 양상이 뚜렷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유교적 이념과 사회질서는 자연스럽게 심신에 스며들고 배양되었다. 특히 유교 경전 공부를 통해서 전달되고 잠명의 강송을 통해서 체득되는 유교적 이념이 우주와 인간의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경전적 메시지’(canonical messages)를 전달한다면, 스승과 제자의 수직적 배례와 제생 상호간의 수평적 상읍례는 그러한 질서 속에서 각자 자기의 의례적 위치를 보여주는 자기지시적 메시지(self-referential messages)를 발신하면서 예교(禮敎)질서를 강화하고 지속하게 된다.40)
이러한 양상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특정 지역이나 학파를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특히 그 탁월한 효과로 인해 후대로 갈수록 확장되고 심화되었다. 예컨대, 영남 남인계 서원을 대표하는 소수서원에서는 본래 주자의 「백록동규」와 퇴계의 「이산원규」를 경독의 텍스트로 삼았으나, 18C 후반에 「경재잠」과 「숙흥야매잠」 등이 추가되었으며, 근기 서인계 서원들에서는 「백록동규」 외에도 율곡의 「학교모범」, 「은병정사학규」, 『격몽요결』 등을 주로 경독했다.41)
한편, 강학활동을 할 때 잠명류를 활용하는 양상 중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8세기 후반 일군의 청년 학자들이 서학서(西學書)를 통해 천주교를 연구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개최했던 주어사(走魚寺) 강학회(講學會)에서 강회의 시간적 의례화와 연계해서 잠명의 강송(講誦)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점이다. 조선 후기 근기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신서파(信西派) 소장학자들은 청(淸)나라로부터 들어온 서학서를 통해 서양의 천주교를 접하고 연구하는 강학회를 불교 사찰에서 열었는데, 전통적으로 유교나 불교의 경전을 배울 때 일정한 음악적 운율에 맞추어 구송한 것과 비슷하게 강학회 참석자들이 잠명을 특정한 시간에 맞추어 함께 소리내어 합송(合誦)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기록에 의하면, 근기 남인 성호학파 중 신서파 소장학자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이 지은 강학회 규정에 따라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뒤 「숙야잠」을 강송했고, 해 뜨는 아침에는 「경재잠」을 강송했으며, 한낮인 정오에는 「사물잠」을 했고, 해지는 저녁에는 「서명」을 강송했는데, 이 규정을 잘 준수함으로써 ‘장엄각공(莊嚴恪恭)’의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했다.42) 좌장인 권철신과 더불어 그 후배들인 김원성(金源星, 1758~1813), 권상학(權相學, 1761~?), 이총억(李寵億, 1764~1822),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이벽(李檗, 1754~1785) 등은 주어사에 함께 모여서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등 하루의 시작부터 태양의 운동에 따른 시간적 영역을 넷으로 분절하고 심지어 한밤중에 등불을 밝힌 채 유교 경전과 서학서를 연구하고 토론했다.43)
이렇듯 장엄하고 경건한 형식의 주어사 강학회는 하루 일과 중에서도 특정한 시간대에 맞추어 서로 다른 잠명류를 유기적으로 연계해서 강송했다. 이러한 의례화 양상은 심신을 재계하고 절제하는 엄숙한 경건주의적 흐름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이들은 송대(宋代) 진백(陳栢)의 「숙흥야매잠」과 주자(朱子, 1130~1200)의 「경재잠」과 「사물잠」, 장재(張載, 1020~1077)의 「서명(西銘)」 등을 선정했다. 이 잠명들은 모두 의관을 정제한 채 엄숙하고 절제된 몸가짐으로 대월상제(對越上帝)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경건한 자세를 실천할 것을 견지하였다. 또한 당시 강학회에서 연구하고 토론했던 서학서들은 『천주실의(天主實義)』, 『영언여작(靈言蠡勺)』, 『칠극(七克)』 등처럼 잠명류의 지혜문학과 상통한다. 따라서 이 강학회는 불교 사찰에서 유교적 잠명을 강송하면서 천주교의 지혜문학을 토론함으로써 특정 종교를 넘어서는 보편적 영성이 드러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Ⅳ. 일상생활의 인간적 의례화 : 제사와 독서의 의례화된 실천과 경(敬)의 무의식적 심화
앞서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특정한 공간이 강학활동의 성스러운 중심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러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특정한 의절(儀節)의 실천은 인간관계의 의례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공간만 중심과 주변, 정점과 저변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구별된 공간에서 의절을 실행하는 인간관계도 중심과 주변, 정점과 저변의 사회적 위계질서를 구성한다. 예컨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父]나 종자(宗子), 스승[師], 임금[君] 등은 각각 집안과 가문, 학교와 사회, 왕조와 국가라는 공동체의 인간적 중심이자 정점으로서 사회적 위계질서를 구성한다. 그리하여 아버지, 스승, 임금은 가묘, 문묘, 종묘에서 주기적인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앞서 서원을 비롯한 강학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스승과 제자의 인간관계를 의례화하는 양상을 일정하게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에서는 제사와 독서라는 구체적 행위가 가문과 유림이라는 인간 공동체의 의례적 중심으로서 아버지와 스승의 위상을 무의식까지 뿌리를 내릴 정도로 의례화하는 양상을 검토할 것이다.
조선시대 사족들은 제사와 독서의 실천을 통해서 예(禮)의 심리적 자세인 경(敬)을 깊이 내면화했다. 유교적 의례를 대표하는 제사는 지극히 절제되고 정형화된 몸짓으로 구성된다. 기복양재(祈福禳災)를 추구하는 무속적 굿의 열광적 모습과는 달리 유교적 제사는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의례적 기억과 보답으로서 흥분이나 열광을 극도로 절제하여 지극히 경건하다. 그런데 제사를 하기에 앞서 ‘산재(散齊) 7일, 치재(致齊) 3일’이라 하여 7일동안 밖으로 몸가짐을 가다듬고 다시 3일 동안 안으로 조상을 위해 마음을 집중하는 과정을 통해 심신을 정결하게 만드는 재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제사를 정성스럽고 경건하게 준비하는 재계의 의례화 양상은 제사 후에도 여전히 경건한 자세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일상을 거룩하게 만든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사족들은 『소학』의 수양과 더불어 『가례』의 의례적 실천을 철저하게 실행했다. 특히 매달마다 반복되는 삭망(朔望)의 참례(參禮)와 매년 계절별로 실행되는 사시제(四時祭)를 정기적으로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한 정기적 반복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된 의례적 경건성은 무의식까지 스며들어 제사를 전후로 하는 시점에 꿈에서 돌아가신 선친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내면화되었다.
예컨대, 17세기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은 삭망의 참례와 시제를 철저하게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가묘(家廟)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재계 과정이나 조상의 선영(先塋)을 배소(拜掃)했을 때 혹은 과거시험 발표를 전후로 해서 선친의 꿈을 집중적으로 꾸었다.44) 김령의 일기인 『계암일록(溪巖日錄)』에 의하면, 김령은 병으로 고열, 오한, 통증, 호흡곤란 등이 심한 상황에서도 건강을 돌보지 않고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철저하게 재계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이처럼 강렬한 의례적 경건성은 결국 무의식까지 스며들어서 생생한 꿈을 만들었다. “마치 조상신이 실재하는 것처럼 제사를 지낸다”고 한 『논어(論語)』의 표현45)처럼, 재계의 경건성은 꿈의 생생함을 통해 의례의 현실성까지 빚어내는 효과도 있었다.46) 이는 선친의 제사를 준비하는 의례화된 실천이 의례적 대상에 집중하는 경건성[敬]을 강화하면서 무의식까지 침투하여 생생한 꿈으로 재현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이 선친에 대한 제사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선비는 기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강학과 관련하여 선사(先師)에 대한 존경이 사무치면 그 역시 무의식적으로 심화될 수 있었다. 예컨대,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의 『매원일기(梅園日記)』는 독서일기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독서에 대한 기록을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남겼다. 특히 그는 『상서(尙書)』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비롯한 책을 집중적으로 독서하는 시점에 돌아가신 선사(先師)에 대한 꿈을 꾸었다.47) 강학과 독서는 스승을 통해 배운 것이기 때문에 집중적 독서 시기에 선사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김령과 김광계의 일기 기록에서 먼저 주목할 만한 부분은 꿈의 대상이 각각 선친과 선사로 국한되어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이 다른 인물들에 대한 꿈을 꾸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일기에는 각각 선친과 선사에 대한 꿈만을 기록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꿈을 꾸는 시기가 각각 선친에 대한 제사나 배소의 의례를 준비하는 시점과 집중적인 강학 시기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사와 독서가 의례화된 실천으로서 집중적으로 실행될 때 강화된 의례적 경건성이 무의식적으로 투사되어 제사와 강학과 관련하여 선친과 선사에 대한 꿈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들은 인간적 차원에서 일상생활의 의례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Ⅴ. 맺음말
조선시대 사족들은 시간, 공간, 인간의 차원에서 일상생활을 의례화함으로써 삶을 성화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는 세 가지 차원에서 일상생활을 성화하는 의례화된 실천을 통해 구성되었다.
첫째, 시간적 차원에서는 『소학』을 수용하고 철저하게 ‘율신제행’의 의례화된 실천으로 구현함으로써 유교적 가치를 내면화했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 후기에 가서 성리학적 수양 공부를 위한 일과(日課)의 의례화를 지향하는 다양한 일일지침서의 등장을 초래했다.
둘째, 공간적 차원에서는 서원이나 서숙에서 열리는 강회의 상징적 강학 공간 구성과 더불어 그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의절의 의례화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또한 경독의 확대와 잠명의 독송을 통한 강학활동의 의례화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셋째, 인간적 차원에서는 주로 『가례』의 실천에 따라 가묘와 연계된 제사나 강학활동과 연관된 집중적 독서를 통해 구현된 의례화된 실천이 경건한 의식[敬]을 강화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심화해서 선친(先親)과 선사(先師)에 대한 꿈으로 투사되기도 했다. 선친과 선사는 각각 집안의 가묘와 서원의 사당을 통해 주기적으로 기억될 만큼 인간적 차원에서 상징적 중심의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었는데, 그들이 꿈으로 나타날 만큼 제사와 독서가 의례화된 실천으로 심화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족의 일상생활은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삼간(三間)의 차원에서 삶을 성화하는 의례화된 실천을 통해 유교적 가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는 분석의 효율성을 위해 삼간을 각각 따로따로 분석했지만, 실제로는 이 세 가지 차원이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연계되어 작동한다. 예컨대, 가묘에서 모시는 선친에 대한 제사는 가묘라는 의례적 공간에서 선친과 효자(孝子)의 인간적 관계가 기일(忌日), 삭망일(朔望日) 등 특정한 시간적 계기에 제사라는 의례적 실천을 통해 온전하게 의례화될 수 있었으며, 서원이나 서숙에서 이루어지는 정읍례(庭揖禮)는 사당 혹은 강당이라는 의례적 공간에서 선사(先師) 혹은 숙사(塾師)와 제생(諸生)의 인간적 관계가 강회나 집중 독서의 시간적 계기에 경독이나 잠명의 독송을 통해 심층적으로 의례화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유교문화를 온전하고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의례화를 구성하는 시간적 계기, 공간적 장소, 인간적 관계를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심화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연구는 향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