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들뢰즈 사상의 탈주적 모험과 역설적 은유는 그의 철학 체계의 깊은 힘임과 동시에 유혹이다. 그의 저술적 표현에서 드러난 그러한 특성들은 들뢰즈에 대한 다양한 오해를 낳은 이유이기도 했다. 때로는 탈근대적 반항아로 때로는 철학적 유행몰이의 한 트렌드로 인식되는 경향이 그러한 오해의 모습들이다. 또는 바디우가 『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 사상 내부에는 ‘플라톤적이며 금욕주의적’인 성격이 숨겨져 있다고 한 것과 같이 반은 타당하며 반은 오해인 견해가 있을 것이다. 바디우는 들뢰즈가 다루고 있는 일자의 속성이 플라톤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으로 들뢰즈를 플라톤주의의 전복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1) 일자가 가진 고전적 역량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들뢰즈 체계가 발 담그고 있는 체계의 영역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비롯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적은 그러한 오해들 너머에 있을 법한 들뢰즈 체계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보고자 하는 시도에 있다. 들뢰즈 저술을 처음 접할 때 텍스트의 표현은 베일에 가린 세계처럼 많은 것을 숨겨놓은 듯하고 신기루처럼 다가서기 힘든 그런 이질감이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텍스트 곳곳에 해석의 키워드들을 장치해 두고 여러 해석의 관문들을 열고 들어오기를 손짓한다. 그것은 마치 청바지 붓다의 랩 설법을 듣는 기괴한 느낌 가운데 오는 고전적 깨달음의 희열을 약속하는 손짓일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그 키워드들을 탐색해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 탐색의 주요 척도를 칸트에 두고자 한다. 칸트의 선험철학 체계는 철학사 중심의 위치에 버티고 있다. 어떠한 체계로의 변용도 용이할 만큼의 넓은 폭과 가능성을 품고 있으면서 당시 계몽주의의 이념에 맞추어 치밀하게 조율되어있는 체계이다. 칸트 체계의 그러한 잠재력과 변용의 관용도는 그가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체계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특성에 기반하여 들뢰즈의 시간론을 연구한 키스 W. 포크너의 경우는 칸트 체계로부터 들뢰즈를 해석해 나가기 시작했지만 감성계와 지성계 사이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출발하는 그의 연구는 칸트 체계로부터 역류하는 들뢰즈 체계의 본원적인 위치점을 드러낸 연구는 아니다.
본 들뢰즈 연구도 칸트로부터 출발하지만 포크너의 연구와 다른 점은 칸트 체계로부터 들뢰즈의 역류가 시작되는 본원적인 위치점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들뢰즈가 칸트 체계를 역류하고자 할 때, 그 역류의 공간은 바로 칸트의 선험철학 체계에서 경험주의 영역에 해당하는 인식능력의 영역이다. 들뢰즈는 이 영역 내부로 침투하여 그 깊은 곳에 숨겨진 심연의 힘을 현상계로 끌어올린다. 이것으로부터 들뢰즈의 체계는 시작된다.
역류의 시작점은 다름 아닌,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학에서 다루어지는 ‘순수이성의 이상’이다. ‘순수이성의 이상’은 들뢰즈의 역류를 거치면서 그의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 그 자체(difference in itself)와 대자적 반복(repetition for itself)의 생성운동’으로 변양된다. 본 연구의 주요 과제는 들뢰즈 체계의 형성 배경을 이 시점으로 파악하고 칸트의 ‘순수이성의 이상’과 들뢰즈의 역류작업을 통한 변용으로서의 ‘차이 그 자체와 대자적 반복의 생성운동’ 사이의 일치를 검토해보는 것이다. 나아가 역류가 전개되는 과정을 추적해봄으로써 그 역류의 끝에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주의 체계에 도달하는 메커니즘을 확인해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칸트 체계의 ‘순수이성의 이상’으로부터 역류한 끝에 도달하게 되는 체계가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주의라는 주장에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Ⅱ. 들뢰즈 체계의 주요 특성들
칸트로부터의 역류를 추적하기 전에 우선 들뢰즈 체계의 주요 특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체계의 주요 특성들 속에 역류의 흔적들이 묻어나 있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 머리말에는 놓칠 수 없는 그 흔적의 주요 골자들이 산재해 있다. “삶의 과제는 차이가 분배되는 공간에 모든 반복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2) 이 명제는 들뢰즈 체계의 근본 취지이며 이 속에는 이것을 근거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의식적 역량에 대한 들뢰즈의 입장도 동시에 담겨 있다. 생의 과제가 수행되는 공간은 실존의 의미들이 발생하는 관념의 공간이다. 이 공간 속에서 유한성은 그 껍질을 깨고 관념 속으로 흡수된다. 관념에 대한 이러한 망아적 주체의 권리에 근거하여 들뢰즈는 유한적 경험을 무한적 경험에 일치시킨다. 그것은 헤겔식의 매개가 아니다. 부정을 매개로 한 유한자와 무한자의 매개 생성 운동으로서의 진무한(das wahrhafte Unendlichkeit)과도 다른 무매개적 운동이다.3) 이 운동이 바로 ‘차이가 분배되는 공간에 공존하는 모든 반복’이다.
들뢰즈 체계의 중심 개념으로서 차이와 반복은 칸트 체계에서 볼 때 순수이성의 ‘이상’에 해당하는 심급의 개념이다. 차이와 반복은 각기 분리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며 칸트의 초월적 변증론에서 다루는 순수이성의 이상이 들뢰즈 체계로 넘어올 때 가지게 되는 두 가지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차이와 반복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인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를 즉자적 차이(difference in itself)라고 표현하며 반복은 대자적 반복(difference for itself)이라고 표현했다. 즉차적 차이는 ‘이상(Ideal)’4)이 가진 총체적 있음, 포괄적 가능성, 일의적 일자성을 일컫는다. 반면 대자적 반복은 ‘이상’이 가진 전개적 운동성을 나타낸다.5) 차이와 반복이라는 말 자체가 이 양자의 일체적 생성을 말하는 하나의 목소리인 것이다. 들뢰즈 체계의 특성상 대자적 반복은 헤겔적 대자와 다르다. 헤겔적 대자는 생성의 두 요소인 존재와 무의 부정적 관계에 따른 운동성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대자적 반복에서의 대자는 부정이 아닌 긍정이다. 이 긍정의 역량은 헤겔적 모순의 전(全)시간적 내용물을 무매개적으로 끌어들여 순차적 시간성을 와해한 최소 단위 항의 전개양상이다.
서론에서는 반복과 차이가 되고 결론에서는 차이와 반복이 된다. 이 자체가 차이와 반복의 생성을 묘사한 것이다. 그 사이에 즉자적 차이와 대자적 반복이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즉자와 대자 간의 순차적 위계가 있다. 즉자로부터 대자로 그리고 그 양자의 종합이다. 들뢰즈에게는 ‘반복과 차이’, ‘차이와 반복’과 같이 순차적 위계와 매개가 없다. 모두 동시적이며 어떤 것도 상위일 수 없다.6) 이 두 요소가 이루어내는 생성의 운동은 의식의 심연 가운데 숨어 있을 때는 감성계와 예지계의 구분 가운데 의식의 위계를 구성하는 동일자로서 군림했었다. 이 동일자를 중심으로 뻗어 나오는 수목형의 대자적 전개가 재현의 형식이다. 숨어서 군림하는 ‘동일자’와 표면 위로 떠올라와 자신의 권력을 분배하는 ‘차이와 반복’, 이 둘은 같은 심급이지만 자신의 위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자신이 가진 총체적 역량의 분배 범위가 달라진다. 자신을 최상위 또는 최고 근원에 둘 때, 그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그 역량의 분배가 주어지지만, 자신을 표층 내지는 하층에 강림하게 할 때 그 역량의 분배는 차등과 역량의 손실 없이 그대로 옮겨진다. 따라서, 현상하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동일자는 재현으로서의 그 세계를 자신의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부정하고 파기하여 자양분으로 섭취하고 즉자적 차이는 부정과 파기 없이 그 자신이 자양분이자 생산물이다.7)
들뢰즈 체계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식의 내용물에서 판타지와 현실의 구분이 탈색된다는 것과 그 탈색의 근거를 칸트로부터 얻는다는 데 있다. 경험주의 인식체계가 가진 객관적 기준의 부재를 오히려 인식에 대한 주체적 권리라는 장점으로 바꾸고 그것을 힌트로 칸트 체계의 선험성의 객관적 토대를 역류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판타지는 곧 풍요로운 현실이 된다. 이것이 들뢰즈 체계의 중요한 특성이다. 칸트 체계에서 인식은 감각의 촉발로부터 감성적 인식의 질료를 얻음으로써 작동하는데, 그 질료가 구체성을 얻기 위해 여과되는 첫 번째 틀이 시간과 공간이다. 칸트 인식 체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순수형식은 감성적 인식의 질료 내부에 파고들어 순차적 배열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칸트의 인식 체계는 실재 세계 즉 경험적 세계와 인식의 선험적 형식 간의 긴장 관계 사이에 놓이게 된다. 실재 세계의 유한성에 대해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감성계에 의해 칸트 체계는 순수이성의 이상이 경계를 넘어 위로 오를 수 없도록 근저에 묶어두게 된다. 들뢰즈는 묶여있는 이 영역에 대한 권리를 자신의 체계 내부에서 확보하고 초월적 경험주의 체계에 이르게 된다.
Ⅲ. 역류의 시작점
주저 『차이와 반복』의 ‘차이 그 자체(difference in itself)’라는 제목의 장에서 들뢰즈는 칸트 체계의 역류를 짐작케 하는 표현들을 비교적 자세히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번개는 검은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오려 하지만, 결국 그 하늘을 같이 끌고 가야만 한다. 이는 마치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바탕이 바탕이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 플라톤주의자들에 따르면 일자(一者)가 아닌 것은 자신을 일자와 구별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자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에서 결코 벗어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형상은 자신을 질료나 바탕과 구별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별 자체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형상들은 재상승하는 이 바탕 안에 반영될 때 모조리 흩어져 버리고 만다. 그 바탕은 스스로 밑바닥에 머물러 있는 순수한 미규정자이기를 그쳤다. 하지만 그 형상들도 상호 공존적이거나 상보적인 규정들로 머물러 있기를 그친다. 재상승하는 바탕은 더 이상 밑바닥에 남아 있지 않고 자율적인 실존을 얻는다. 이 바탕에 반영되는 형상은 더 이상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추상적인 선이다. 바탕이 표면으로 올라올 때, 인간의 얼굴은 분해된다. … 괴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이상야릇한 규정들을 집적하거나 동물을 중층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바탕을 상승하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8)
위의 텍스트는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 체계를 파악하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이자 칸트 체계로부터의 역류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순수한 미규정자이기를 그친 바탕’과 ‘바탕의 상승’ 그리고 ‘자율적인 실존을 얻은 바탕과 괴물’과 같은 표현들은 들뢰즈 체계 전체의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단어는 ‘바탕’이다. 플라톤의 ‘일자’와 칸트의 ‘순수이성의 이상’은 세계와 의식의 심연에 위치지어진 미규정자를 나타낸다면, 바탕은 어떠한 위치지어짐도 없는 상태의 미규정자를 나타내기 위해 들뢰즈가 선택한 개념이다. 들뢰즈는 이 바탕의 위치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체계가 형성됨을 알았던 것이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실체와 현상의 관계는 플라톤에서부터 출발해서 스피노자를 거쳐 헤겔에 이르렀다. 실체와 현상 간의 차등적 위계(hierarchy) 구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이라면 그 거리를 좁혀 하나로 만들려는 비계급적 구도는 스피노자로부터 출발해서 헤겔에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실체와 현상의 위계적 구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철학 체계는 변양된다.
그런데, 들뢰즈의 문제의식도 그러한 형이상학적 구도의 연속선에 있지만 그가 취한 방식은 형이상학이 아닌 인식론적 방식이다. 형이상학적 구도에서는 실체와 현상의 거리가 아무리 가까워져도 세계의 유한적 기억은 그대로 각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각인이 명확해야 명확한 부정이 성립하며 그것을 매개로 실체와 현상 사이의 운동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들뢰즈는 그러한 매개된 운동보다 더 살아있는 운동을 구상하게 되는데 이 운동을 구현할 수 있는 체계는 형이상학이 아닌 인식론인 것이다.9) 그리고 그 출발은 경험주의와 칸트의 선험철학 체계이다. 형이상학에서는 선행 실체와 현상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더라도 동일성과 부정 그리고 동일성으로의 복귀라는 매개를 피하기 어렵다. 늘 선행실체를 중심으로 부정이 그 둘레를 돌고 있는 구도가 된다. 높낮이의 문제는 해소되더라도 매개의 끈이 흉터로 남아 생성 내부에 일종의 순차성과 정형성의 기억을 품게 된다.10) 또한 부정과 파기를 통해 운동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남는 것은 헐벗고 빈곤한 추상적 개념뿐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경험주의에 주목하며 칸트로부터 구체적인 인식론적 전략을 구상한다. 들뢰즈는 우선 학적 체계에 있어 경험주의의 인식론적 가능성을 인지하고 이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거꾸로 경험론은 이제까지 결코 보거나 듣지 못했던 지극히 광적인 개념 창조를 시도한다. 경험론은 개념의 신비주의, 개념의 수학주의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경험론은 개념을 어떤 마주침의 대상으로, 지금-여기로 다룬다. 그보다는 오히려 결코 다 길어 낼 수 없는 것들, ‘지금들’과 ‘여기들’이 항상 새롭고 항상 다르게 분배되는 가운데 무궁무진하게 생겨나는 어떤 에레혼(Erewhon)인 것처럼 개념을 다룬다고 해야 한다. 개념들은 사물들 자체, ‘인류학적 술어들’을 넘어서 있는 자유롭고 야생적인 상태의 사물들 자체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경험주의자뿐이다.11)
들뢰즈의 이 말은 경험주의가 가진 학적 체계의 회의주의적 특성을 오히려 장점으로 전환하는 내용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자유로운 개념의 창조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신이나 실체로부터 기반하는 학적 체계의 전통적 권위는 인간 의식의 주체성을 희석시킨다. 따라서, 들뢰즈 체계는 가장 인간다운 또는 가장 인간에게 가까운 체계로서의 경험주의에 주목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흄의 경험주의을 통해 경험주의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흄은 또한 매우 독특한 경험주의의 입장을 보여준다. 그의 경험주의는 일종의 미완의 공상 과학(science-fiction)의 영역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우리는 흄에게서 마치 공상 과학에서처럼 다른 창조자에 의해 제시된 허구적이고 기묘한 어떤 낯선 세계의 인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러한 세계란 이미 우리의 세계이며 또 이때의 다른 창조자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예감을 받는다.12)
이와 같이 들뢰즈는 조심스럽게 경험주의가 가진 회의주의적이며 비합리주의적 중심이탈을 철학 체계 성립에 중요한 장점으로 이용하려 하는 것이다. ‘미완의 공상 과학’, ‘우리의 세계, 새로운 창조의 주역으로서의 우리 자신’이라는 표현은 경험주의의 영역이 가진 인식 체계의 미완적 특성을 인식에 대한 창조적 권리의 장으로 역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경험주의로부터는 이러한 창조적 권리의 확보를 마련하는 데까지만 수용한다. 원자론과 관념연합론이라는 흄의 인식론은 정신의 물리학 내지는 관계의 논리학으로13) 들뢰즈 체계에서 ‘차이 그 자체’와 대응할 수 있는 개념이 부재하다. 따라서 들뢰즈는 경험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그것과 대응할 수 있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칸트의 선험철학에 눈길을 두게 된다.
경험주의로부터 인식의 창조적 실험의 권리를 확보하고 다시 칸트로 이행한 들뢰즈는 칸트로부터의 역류를 모색한다. 경험주의적 연합론에는 없는 칸트의 ‘순수이성의 이상’이 왜 역류의 시작점이 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나는 제3종의 궤변적 추리를 따라, 대상들 일반을-그것들이 나에게 주어질 수 있는 한에서-생각하는 조건들의 전체로부터 사물들 이란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조건들의 절대적인 종합적 통일성을 추리한다. 다시 말해, 한낱 초월적 개념으로써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물들로부터, 초험적 개념을 통해서도 역시 알지 못하는, 그것의 무조건적인 필연성에 관해서 나로서는 아무런 개념도 가질 수 없는, 모든 존재자 중의 존재자를 추리한다. 이 변증적 이성추리를 나는 순수이성의 이상이라고 부를 것이다.14)
이성은 이 이념을 단지 모든 실재성이라는 개념으로 사물들 일반의 일관적 규정의 기초에 두었을 뿐 이 모든 실재성이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고, 그 자신이 하나의 사물을 이룰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 하나의 사물이란 순전히 지어낸 것으로, 이것으로 우리는 잡다한 우리의 이념을 한 특수한 존재자로서의 한 이상 안에 개괄하고 실재화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권한이 없다. 그 뿐 아니라 도무지 그러한 가정의 가능성을 곧바로 받아들일 권한조자도 없다. 또한 도대체가 그러한 이상으로부터 유출하는 모든 결과물들은 사물들 일반의 일관적 규정-이를 위해서는 이념만이 필요했는데-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에는 조그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15)
위의 두 인용문은 칸트의 순수이성의 이상이 가진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의 하나는 순수이성의 이상은 이성의 변증적 추리의 극단에서 형성되는 단일체, 모든 가능성의 총괄이며 미규정자이다. 또한 표상 불가능하며 형이상학적 일자와 동등한 심급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이상은 지어져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에서 최고존재자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의 근원으로 선행하는 것인데 반해 동일한 심급이면서도 순수이성의 이상은 지어져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위치가 정반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초월적 원형, 초월적 이상이라고도 하는 칸트 순수이성의 이상은 변증적 이성추리에 의해 인식의 끝에 형성된 초월적 설정이다. 이념보다 더 객관적 실재성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이것은 감관에서 출발해서 지성으로 나아가 이성의 가장 끝자락에서 형성된다.16)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회란 이처럼 현상의 뿌리로부터 생겨난 본체적 열매라는 뒤집어진 구도이다.
순수이성의 이상은 인식의 심연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인식 전체의 통일을 유지할 때 인식에 표면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고 단지 인식의 토대로서 보이지 않는 근거로 숨어 있다. 형이상학이 실체와 같은 존재론적 원형으로부터 출발해 우유성을 가진 현상을 설명하게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식에 있어 실재적인 것은 경험적 감각이고 오히려 순수이성의 이상은 인식의 끝에 위치하여 인식을 종결한다. 동일한 심급인 순수이성의 이상과 존재론적 실체가 각 철학 체계의 환경에 따라 그 성격이 확연히 달라진다.
칸트가 “이성은 인식의 일체 내용을 도외시하되, 그러나 또한 실재적인 사용도 있어서, 이때는 이성 자신이 감관에서도 지성에서도 얻어온 것이 아닌 일정한 개념과 원칙들의 근원을 자기 안에 갖는다.”17)라고 한 것은 경험주의적 관념연합론과 원자론이 갖지 못한 근원성 형성에 대한 인식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나 흄에게 있어서나 인식은 반듯이 감각을 뿌리로 하고 인식의 산물을 그 열매로 한다. 흄에게 있어 그 열매의 생산과정은 객관성이 없지만, 칸트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 입장에서는 칸트와 흄의 이 두 가지 특성 모두가 수용되어야 할 요소이다. 흄으로부터는 관념 형성의 공상적 모험에 대한 권리를 칸트에게 있어서는 그 모험의 가장 큰 심연의 영역을 취한다.
이러한 순수이성의 이상에 대한 논의를 보고 이 ‘이상’이 칸트 체계의 심연에서 눌러져 있다가 인식의 표층으로 상승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순수이성의 이상의 성격은 다른 양태로 변용될 것이다. 그 변용된 모습이 바로 ‘차이 그 자체’ 그리고 ‘대자적 반복’이 될 것이다. 이것은 숨어 있던 모든 총체적 가능성이 운동에 이른 상태이다. 칸트에게 있어 이것은 혼돈이자, 무질서라면 들뢰즈에게 있어 이것은 아름다움이자 최선의 질서이다. 바디우가 들뢰즈 체계를 숨겨진 플라톤주의자라는 해석이 바로 이 지점에서 연유한다. 플라톤적 일자가 가진 총체적 역량과 차이와 반복의 역량이 같은 심급 하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이 역량은 오로지 의식의 산물이며, 따라서 표출의 양상이 다르게 드러나는 것이다. 현상을 파기하면서 드러나는 일자의 순결함과 현상을 그대로 끌어안고 드러나는 차이와 반복의 괴물과 같은 이미지는 분명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칸트 순수이성의 이상이 표층으로 상승한 결과에 대해 들뢰즈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형상들은 재상승하는 이 바탕 안에 반영될 때 모조리 흩어져 버리고 만다. 그 바탕은 스스로 밑바닥에 머물러 있는 순수한 미규정자이기를 그쳤다. 하지만 그 형상들도 상호 공존적이거나 상보적인 규정들로 머물러 있기를 그친다. 재상승하는 바탕은 더 이상 밑바닥에 남아 있지 않고 자율적인 실존을 얻는다. 이 바탕에 반영되는 형상은 더 이상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추상적인 선이다. 바탕이 표면으로 올라올 때, 인간의 얼굴은 분해된다. … 괴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이상야릇한 규정들을 집적하거나 동물을 중층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바탕을 상승하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18)
위 텍스트를 보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심연에서 웅크리고 있던 근원이 표층으로 상승하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핵심어를 추려보면, ‘재상승하는 바탕’, ‘밑바닥에 머물러 있는 순수한 미규정자’, ‘바탕의 상승과 형상 와해’,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추상의 선’, ‘재상승하는 바탕이 얻는 자율적 실존’인데, 들뢰즈의 의도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표현들이다.
바탕의 상승과 그 전개 과정에서 벌어지는 양상과 그 결과가 짧은 단락 속에 함축되어 있다. 심연의 바탕이 가진 상승의 권리는 경험주의에 기반한 들뢰즈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그 바탕의 개념은 상승하지 않은 상태에서 볼 때는 칸트 체계의 ‘순수이성의 이상’이다. 이것의 상승 과정에서 칸트 체계가 겪게 되는 첫 번째 변양이 바로 형상들 즉 지성 범주와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도식의 파괴이다. 그러한 진통을 겪으면서 상승한 그 ‘이상’은 이제 미규정자로서의 이상이라 하지 않고 자율적 실존을 얻은 바탕, 즉 차이와 반복이 된다. 심연에서 운동의 가능성을 내부에 끌어안은 채 잠자고 있던 총체적 단일체가 실존적 자유를 얻을 때의 상태를 들뢰즈는 ‘괴물’, ‘시뮬라크르’. ‘가면’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따져 볼 때, 들뢰즈 체계가 칸트 체계로부터 역류한 시점은 분명 ‘순수이성의 이상’이라고 하는 인식의 심연이다. 들뢰즈는 심연의 공포를 뚫고 침잠하여 이 거대한 역능과 만나고 이것의 상승에 대한 인식의 역발상과 그것의 실현을 감행했다. 그 거대한 힘을 수면 위로 올리는 광적인 사유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Ⅳ. 역류의 전개와 그 끝점
들뢰즈의 체계 형성에는 두 가지 지향점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철학 체계가 가지는 실존적 기능성이며, 나머지 하나는 공통감각과 능력의 일치라는 인식 체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두 개의 문제의 우선성을 따진다면 들뢰즈 입장에서는 실존적 기능성이며 또한 이것의 해결은 자연스럽게 다음 문제의 해결로 이어진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사실상 두 번째 문제보다 첫 번째 것이 더욱 철학의 본질에 가까운 문제이다. 앞선 논의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삶의 과제는 차이가 분배되는 공간에 모든 반복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19)라는 그의 정언적 발언은 그의 철학이 출발하는 뿌리이며 그의 체계가 근거하는 기저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순수이상의 이상’의 상승 가능성을 예감하고 어두운 전조를 통해 상승의 조짐을 보인 것은 그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해법이 되었다. 이제 그 상승의 과정 속에 벌어지는 전개의 모습과 그 끝점의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심연에 숨어 있던 순수이성의 이상이 상승의 조짐을 보일 때, 이것은 어두운 전조(前兆)가 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칸트 체계의 개념이 들뢰즈 체계로 넘어와 변양의 지평을 예시하는 조짐을 말한다. 칸트 체계에서는 공통감각과 능력들의 일치 문제를 숭고미를 통해 해소하고자 했지만 이것이 억견이 되는 이유는 순수이성의 이상이 심연에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유 저 너머에 있는 신기루와 같은 이상은 칸트 체계의 인식 영역에서는 오히려 말단과 같은 것이었다.
‘이상’ 앞에서 형상은 임시적 분별일 뿐이다. 가변적이며 임의적이라는 의혹에 늘 시달릴 수밖에 없는 분별적 형상, 어떤 근거로서도 형상들은 억견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힘들었다. 칸트는 숭고미를 통해 소극적 상상력이 감성 안에서 이념을 현시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불일치의 일치라는 모호한 생성의 의도만을 전달한다. 따라서, 바탕의 상승을 통해 현실과 이상의 동시적 생성, 선험적 형식이 아닌 경험 자체로부터 그 생성이 드러나는 초월적 경험주의 체계를 들뢰즈는 추구한다.20)
칸트가 순수이성의 이상을 설명할 때, “파생적 존재는 근원적 존재를 전제하고, 따라서 근원적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원적 존재가 많은 파생적 존재들로부터 성립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서 근원적 존재라는 이상은 또한 단일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 없겠다.”21)라는 내용을 보자. 이것은 근원은 잡다한 요소의 단순한 합이 아니며 파편적 존재의 근거로 있으며 이것은 단일한 성격을 가진 총체적 근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파생적 존재의 합이 근원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은 공통감각과 능력의 일치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파생적 존재의 합이 근원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공통감각과 능력의 일치의 근거를 찾을 때 파생적 인식 결과의 자유로운 이동, 즉 일치와 불일치 사이의 운동 속에서 이념의 현시를 엿보고자 하는 방식도 억견에 그칠 수 있다는 사실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 들뢰즈는 파생적 결과물들의 ‘일치와 불일치 운동’을 통해 단지 근거를 엿보는 소극적 방식이 아닌 총체성을 가진 근원 자체를 위로 감성계로 끌어올릴 때, 근거의 역할이 성립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들뢰즈가 어두운 전조로부터 바탕의 상승을 조감하고 그것을 심연으로부터 실제로 끌어올릴 때, 그 거대한 이상의 역능이 부리는 공포의 몸짓은 순차적 시간 형식과 결합한 형상들을 파괴하면서 서서히 상승한다. 들뢰즈가 칸트에 관해 쓴 논문 「칸트 철학을 요약해 줄 수 있을 네 가지 시적인 경구에 대하여」를 보면 그 상승 과정에 변양되는 칸트 체계의 주요 양상을 소개한다. 논문에서는 칸트 체계의 형식 전도 가능성과 그 전개의 조짐이 내부에 있다고 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칸트가 발견한] 이 같은 모든 능력의 착란적 실행은 이제 미래의 철학을 정의하게 된다. 즉 불일치로서의, 일치하지 않는 일치로서의 새로운 음악과 시간의 원천이 있게 되는 것이다. 칸트와 관련해서는 분명 자의적이지만, 현재와 미래를 위해 칸트가 우리에게 남긴 것과 관련해서는 결코 자의적이지 않은 네 가지 경구를 우리가 제안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22)
논문에서 형식 전도의 핵심은 시간의 형식이다. 들뢰즈는 시간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 정의를 통해 전도되는 시간관은 인식과 세계를 바라볼 새로운 시각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순차적 시간의 와해는 ‘자아, 실천이성, 판단력’의 전 영역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칸트가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의 표상은, 그것이 어떠한 유래를 가지든 간에-그것을 일으키는 것이 외물의 영향이건 내적[심리적] 원인이건 간에, 현상으로서의 표상이 선천적인 유래를 가지건 경험에서 유래하건 간에-모두가 심성의 변양(變樣)으로서의 내감(內感)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인식은, 심성의 변양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감의 형식적 조건에 종속한다. 즉 시간에 종속한다.”23)라고 말했듯 인식의 모든 종합과 통일은 첫 번째로 시간의 형식 속에서 제한받는다. 따라서 그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시간의 본질을 제 성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칸트 철학을 요약해 줄 수 있을 네 가지 시적인 경구에 대하여」는 ‘순수이성의 이상’이 심연으로부터의 역류와 상승의 가능성에 관한 들뢰즈의 이야기이다. 들뢰즈가 보여주는 그 가능성의 전개 과정과 그 끝의 모습에 대해 ‘네 가지 시적 경구’를 통해 따라가 보자. 들뢰즈는 첫 번째 경구로서 “탈구된 시간(out of joint)"을 이야기한다. 이것으로부터 들뢰즈는 직관의 순수형식으로서의 칸트적 시간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연다. 들뢰즈는 시간 그 자체를 영원하지 않은 것의 형식, 변화와 운동의 불변의 형식이며 자율적인 형식이라고 한다. 이로써 들뢰즈는 이러한 자율적인 시간의 형식을 칸트가 발견하고 창조해야 할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하며24), 칸트적 직관의 형식에 대한 변양을 창조성의 권리로써 확고히 한다. “이처럼 더 이상 시간은 자신이 측정하는 운동에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 반대로 운동이 자신의 조건을 이루는 시간에 관련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순수이성비판』 속에 나타난, 칸트에게서 보이는 최초의 거대한 뒤집음이다.”25) 칸트가 말한 직관의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영속성, 연속성, 동시성의 양태로써 운동의 순차적 흐름을 직조한다.
이러한 시간의 양태들이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통해 자율적 형식으로 정의되면 자율적 형식으로서의 창조적 시간은 인식의 모든 영역에 심각한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우선 주체의 해체가 일어난다. “나는 타자이다.”라는 랭보의 경구로써 들뢰즈는 자율적 시간의 형식 속에서 해체되기 전의 칸트 체계의 주체를 이야기하고자 하다. 칸트 체계에서의 자아는 현재, 과거, 미래의 순차적 시간의 흐름 속에 선후의 차등적 분배 가운데 일정하게 변화하고 분열한다. 또한 이 분열하는 자아를 종합하는 나가 있다. 이 양자, 시간의 형식 속에서 수동적으로 분열되는 자아와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나는 끊임없이 둘로 양분되고 또한 꿰매어지는 가운데 주체의 상(象)은 견고해진다.26) 즉, 주체 내부에 규정 대상으로서의 자아(moi)와 규정 활동을 하는 나(je)의 반성적 작용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분열적 전개는 시간의 영속성 속에 틀 지워져 그 흐름의 물살에 속박된다. 시간의 순차적 형식에 의해 주체는 자신을 하나의 형태로 고착화하고 운명이라는 직조된 굴레를 스스로에게 씌운다.
『실천이성비판』에 있어서도 도덕 법칙은 『순수이성비판』의 순수 형식으로서의 시간에 종속된다.27) 칸트에게 도덕 법칙은 텅 빈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으므로 법칙은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으며 행위를 통해 시간의 형식 속에서 그 흔적만 엿보인다. 들뢰즈가 “따라서 우리는 유죄이되 필연적으로 유죄인 우리의 마음과 육신 속에 새겨진 법칙의 자국을 통해서만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죄의식은 시간의 실을 [『실천이성비판』의 차원에서] 되풀이한 도덕적 실과 같은 것이다.”28)라고 했듯, 칸트 도덕 법칙의 내용 없는 형식은 시간 너머에 있는 원형으로서 시간적 사건 가운데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자취만 남길 뿐이다. 이와 같이, 들뢰즈는 칸트의 도덕 법칙이 내용 없는 형식인 이유가 정언명제 그 자체가 원리와 현상 간의 생성을 담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단, 그 생성이 순차적 시간성 속에 연관 지워져 있음은 칸트 체계가 가진 보이지 않는 이면에 대한 단초이다.
“일치하지 않는 일치(accord discordant), 바로 이것이 『판단력비판』의 위대한 발견이자, 칸트가 행한 마지막 뒤집음인 것이다.”라고 했듯 들뢰즈는 『판단력비판』으로부터 시간에 대한 칸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한다. “따라서 더 이상 『판단력비판』은 감성적인 것(le sensible)을 공간과 시간 속의 대상에 결부 가능한 질처럼 고려하였던 순수이성비판의 미학[즉 감성론]이 아니다. … 파토스 속으로 감성적인 것 자신을 전개시켜가는 미학, 시간을 시간 자신의 분출 속에서 취하는 미학, 시간의 실과 시간의 현기증이라는 근원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꿰뚫어 볼 미학으로서 곧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미학인 것이다. 또 더 이상 『판단력비판』은 시간의 질서를 규제된 관계 속에서 자아를 나에 관련시켰던 『순수이성비판』의 촉발이 아니다.”29) 이렇게 칸트는 그의 삼비판서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파토스의 영역에서 시간의 순차성을 와해한다. 들뢰즈는 『판단력비판』에서의 이러한 칸트 미학에 대해 창조자의 메타-미학이라는 표현을 쓰며30) 또한 변증법적인 개념화에 가까이 갔다고31) 해석한다. 칸트는 능력들이 가진 고유한 역량들이 각 영역별에 따라 지위를 갖게 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그 능력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각자의 가능성을 마음껏 발산하게 만든다. 칸트 체계의 특성은 이와 같이 인식, 욕구, 감정의 세 영역을 기능적으로 나누어 각 영역별로 작동 방식을 달리 했다. 감정의 영역에 이르러 드디어 그는 숭고미를 이야기하고 이성과 상상력의 일치를 이야기한다. “이성과 상상력은 오로지 긴장의 한복판에서만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일치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일치하지 않는 일치이며, 고통 속의 조화이다.”32) 이렇듯, 『판단력비판』에 이르러 칸트는 앞의 경우와 다른 전혀 창조적 긴장의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인식의 영역에서 칸트는 시간을 순차적으로 규정하고 그 과정에서 거대한 단일체인 ‘순수이성의 이상’은 판도라의 상자에 갇히게 되었다. 오성의 권한 하에 설정의 형식으로 파생된 ‘순수이성의 이상’은 다시 실천의 영역에서 칸트가 다시 끌어온 신과 그리고 그 권위 하에 정립된 주체에게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능력은 투쟁을 통한 불일치의 일치라는 고된 창조의 관계를 유지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시간의 창조적이며 자유로운 형식이 능력들 전체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어두운 전조, 텅빈 형식, 균열과 같은 것을 통해 능력들 전체가 하나의 목소리를 표층으로 울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역량을 품고 있는 단일체인 ‘순수이성의 이상’을 상승하게 만드는 것이다. 칸트는 능력들이 조합되는 각 단계마다 그 단계에 걸맞는 목소리를 내게 만들었고 그 목소리의 힘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다. 들뢰즈가 말한 바탕의 상승에 대한 기대는 그 힘들의 완전한 하나 됨에 있다.
바탕의 상승이 일어나면, 표층에서는 강도와 가면이 재현과 표상을 대신한다. 이것이 바탕 상승의 결과로서 그 끝에서 드러나는 들뢰즈 체계의 특성이다. 거대한 힘이 저 심연에서 꿈틀거리고 서서히 위로 상승할 때, 그것은 공포일 수도, 희망일 수도 둘 다일 수도 있다. 상승의 과정에서 파괴되는 것들에게는 칸트적 공포가 될 것이며 파괴 이후에 자유와 평등을 얻는 이들에게는 들뢰즈적 기쁨이 될 것이다. 들뢰즈의 ‘가면’은 그 기쁨을 감추고 있고 ‘강도’는 그 기쁨의 색깔을 드러낸다.
‘강도와 가면’은 ‘순수이성의 이상’이 어두운 전조를 거쳐 표면 위로 상승한 그 끝의 모습이다. 칸트적 방식과는 다른 ‘상상력과 이성의 일치’가 들뢰즈에게서 실현된 것이다. 칸트의 일치가 불일치의 일치, 역설적 조화 내지는 고통 속의 조화라면 들뢰즈의 일치는 ‘순수이성의 이상’이 상승한 결과로서의 ‘일치 그 자체’이다. 모든 능력들의 투쟁이 없어진 능력 그 자체의 투쟁 없는 일치 가운데에는 바로 이 ‘순수이성의 이상’이 기거하고 있는 것이다.
Ⅴ. 맺음말
경험주의자 흄으로부터 칸트가 받은 영향력과 들뢰즈가 칸트로부터 받은 영향력은 서로 닮아 있다. 칸트가 흄에게서 받은 경험주의적 영향은 합리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칸트가 이전 체계와 전혀 다른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회의 철학적 체계를 수립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경험주의가 가진 인간 중심적 철학적 코드는 고대의 소피스트 프로타코라스가 말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를 연상케 한다. 이것이 칸트를 통해 합리주의와 묘한 동거를 함으로써 칸트의 선험철학 체계가 수립되었다.
칸트의 철학 체계가 인식론을 중심으로 펼쳐져 요청의 형식으로 합리주의 전통을 잇는 것은 계몽주의의 완성자로서의 현명한 전략이었다. 그로부터 주체의 주관적 권리 이것은 모든 것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말미암게 만드는 계몽주의적 이념 자체로 등장한다. 경험주의의 관념적 유희를 계몽주의적 이념 가운데 조율한 것이 칸트의 체계이며 들뢰즈는 바로 이 체계가 가지고 있는 현대적 응용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경험주의의 영향을 받은 칸트가 경험주의적 주체가 가진 객관성 부재의 맹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합리주의적 방식으로 보완하고 객관적 체계를 구축했다면, 들뢰즈는 그 구축의 기반을 역이용하여 그 구축이 가진 인식의 총체적 체계를 뒤집는 방식을 선택한다. 칸트 체계의 이면, 마치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달의 어두운 면을 통찰하고 그 면을 드러냄으로써 들뢰즈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체계와 조우하게 된 것이다.
만일 초월론 철학의 가장 위대한 창의성이 시간의 형식을 본연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면, 순수하고 텅 빈 이 형식은 이제 다시 불가피하게 죽은 신, 균열된 나, 그리고 수동적 자아를 의미하게 된다. 물론 칸트는 이런 창의성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는다. 즉 신과 나는 실천적 차원에서 부활하게 된다. 심지어 사변적 영역에서조차 새로운 형식의 동일성, 능동성을 띤 종합적 동일성을 통해 그 균열은 곧바로 메워진다.33)
들뢰즈가 칸트 체계를 비집고 들어간 지점은 바로 위의 텍스트이다. 초기 칸트가 경험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이 바로 시간의 형식을 주체의 권한에 두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이것으로부터 칸트가 출발한 점에 대해서 창의적이라고 평가했다면 체계의 전개 과정에서 주체가 취한 시간의 성격이 규제적이며 순차성을 띤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며 이 비판과 함께 새로운 철학 체계를 향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다.
경험주의로부터 인식의 권리를 가져온 칸트가 경험주의가 축조하지 못한 거대한 인식적 힘을 구축하고 들뢰즈는 그 구축의 역량을 변용하는 것이다. 그것을 필자는 역류라고 표현했으며 그 역류의 대상은 칸트의 ‘순수이성의 이상’이었다. 칸트가 인식 체계를 축조하는 가운데 얻게 된 최고의 힘이 바로 이곳에 농축되어 있다. 다만, 칸트에게 이것은 심연에서 잠자고 있어야 할 대상이며 또는 가상이다. 들뢰즈가 주목한 힘이 바로 ‘순수이성의 이상’이 가진 거대한 힘이었던 것이다.
표층을 절대성으로 물들이는 이 거대한 힘이 칸트에게는 풀려나서는 안 되는 카오스적 야수였다면 들뢰즈에게는 세계를 해방할 자유 그 자체의 힘이었다. 이것은 고대의 붓다가 인도 전통 사상과의 투쟁 끝에 보여 준 자유와 해방 그리고 스피노자적 평등과 평화의 진리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적 표현이 가진 이 새로운 국면을 활용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이전 철학 체계의 역량을 모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삶의 과제는 차이가 분배되는 공간에 모든 반복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34)는 그의 철학적 취지가 보여주듯, 들뢰즈의 주체는 풍요로운 환영, 그리고 그 환영이 가진 바로 잡힌 실재성은 주체의 고유한 권리이자 과제가 된다. 칸트가 의식의 심연 속에 ‘순수이성의 이상’을 가두어둘 권리가 있었다면 들뢰즈에게는 풀어둘 수 있는 권리도 있는 것이다. 청바지 입은 붓다의 설법, 인도 수행자의 가부좌를 튼 들뢰즈의 입담, 이 모두가 곧 차이와 반복의 권리 행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