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인도의 민족주의자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한 나라의 위대성과 도덕의 발전은 동물을 대하는 방식으로 판단될 수 있다”며 동물의 처우와 민족의 위상을 동일한 가치 체계 내에서 설명한 바 있다.1)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동물의 복지 문제는 더 이상 특정 국가나 민족에 한정되지 않은 채 전 세계적 현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도덕적 관점에서 동물의 처우를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동물학대금지를 넘어 동물복지를 강제하는 법률적 조치를 점차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반려동물 소유자는 100%에 가까운 수치로 자신들의 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혼전문 변호사들은 강아지 양육권이 자녀 양육권만큼이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토로한다.2) 우리나라도 2012년 기준 전체 가구의 17.9%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동물병원의 수가 매년 증가추세일 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을 위한 전용 극장과 공원 설립이 빈번해지고 있고 장묘시설에 대한 관심 또한 급상승하고 있다.3) 또한 동물의 처우 문제는 반려동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농장동물, 실험실동물, 야생동물 등 인간이 아닌 동물(non-human animals) 전체로까지 확대되어 도덕적, 법률적 논의의 단초로 작용하고 있다.
동물의 처우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었을지라도 그 이면에는 여전히 무수한 동물들이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동물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키울 능력을 넘어 과도하게 사육함으로써 오히려 고통으로 내모는 애니멀호딩(animal hoarding)의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으며,4) 닭들 상당수는 일생동안 A4용지 2/3 공간 속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으며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살찌워지고 있고,5) 미국의 한 조사에 의하면 단순히 원치 않거나 건강이나 생활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가족’이라고 주장하던 반려동물이 숫자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유기되고 있다.6) 우리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사실 이런 생각은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채,7) 그들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존재 가치가 부여되고 있다.
동물 처우에 관한 이와 같은 인간의 양면적 태도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사회적 이슈의 하나로 본격화되었다. 1975년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은 철학 및 사회학적 측면에서 동물복지 연구를 가히 폭발적으로 이끌었고, 곧이어 등장한 톰 레건(Tom Regan)은 동물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와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볼 것을 주장하였다. 비록 이들이 학파로서 하나의 집단을 대표하지는 않을지라도 동물에게 적어도 일정한 “고유 무게”(intrinsic weight)가 부여되어야 하고 우리 인간에게 동물에 대한 일정한 책임이 있음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충분하였다.8) 더 나아가, 최근에는 인간의 반성적 사유를 뛰어넘어 직접행동을 주장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이 출현하는 가운데, 동물 문제는 정치운동의 중심으로 나아가 탄원이나 평화적 피켓시위, 때에 따라 협박이나 재물손괴와 같은 폭력적 양상으로까지 비화하고 있다.9)
동물 처우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는 현재로는 하나의 목소리로 모아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 있는 생명체이고 그래서 인간의 고통만큼이나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동일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10) 이에 따라 동물복지가 “건전한 과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윤리적 의무”의 문제라는 롤린(Bernard E. Rollin)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담보한다.11) 윤리가 최근까지도 인간과 관련되는 독점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동물의 위상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연결되는 데에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전통적 관점에 도전하는 종교적 논의는 상대적으로 미미하였다.12)
한국 신종교의 효시이자 대순진리회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증산 강일순(이후 증산으로 표기)은 선천의 낡은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의 후천개벽사상을 설파하고 이를 위한 실천윤리로서 해원상생을 주창하였다.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는 원을 풀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해원상생은 유기적인 것으로 “타자와의 윤리”를 전제한다.13) 이때 ‘타자’는 인간과 신명으로 제한되지 않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의 윤리적 관계도 해원상생의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50년 사이 동물의 처우 문제가 사회적 이슈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윤리적 측면에서 이미 동물해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런 배경 속에서 본 논문은 대순사상의 해원상생론을 동물해원의 관점으로 확장해 현대 서구 중심의 동물복지론과의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Ⅱ. 서양 전통과 증산의 동물 인식
서구의 인본주의적, 기독교적 전통에서 동물은 오랫동안 인간보다 분명히 열등한 존재로 여겨져 왔으며 윤리의 관점에서 주체라기보다는 객체로 취급되어왔다.14)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2~322 BC)는 자연의 구성체로서 하등생물과 고등생물의 관계를 사다리 구조로 이해하였다. 그는 인간과 동물 둘 다 감각을 지녔을지라도 인간만이 이성적 능력을 지닌 것으로 인식하였는데, 이에 따라 동물을 인간의 식량, 노동력, 의복, 도구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15) 다시 말해, 이성을 지닌 인간이 자연의 사다리 맨 위에 자리함으로써 동물을 비롯한 자연계의 모든 존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 전통 역시 비슷한 맥락을 유지하였다. 성경의 창세기편이 인간의 동물 지배(dominion)를 명시하는 것처럼,16) 인간은 창조과정에서부터 우주의 중심 존재로서 동물을 비롯한 다른 피조물들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세계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인간만이 영성을 가진 채 정신과 물질세계를 장악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을 다른 차원의 존재로 생각하였고 그에 따라 동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처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17) 물론 인간의 동물 지배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일지라도 인간의 동물 착취를 완전히 정당화한 것은 아니며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잠언 12장 10절)에서처럼 덫에 걸리면 구조하고 상처를 입으면 치료하고 배고프거나 갈증이 나면 물과 음식을 제공하라며 연민과 친절로써 동물을 대할 것을 주문하였다.18) 즉,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는 동물 학대를 피하고 자비로써 대하라는 것이지만 인간의 동물 지배 원리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동물의 생명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이성을 결여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중차대한 권리를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9) 따라서 동물은 식량, 반려, 운송, 노동, 여가 등등의 인간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동물 인식은 중세 이탈리아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신의 섭리에 의해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동물 이용을 허용하였으므로 인간의 목적을 위해 살생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20)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받은 그의 신학 또한 창조의 계층 구조 모델을 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동물이 영혼과 이성을 결여해 피라미드 하단에 위치해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지배하에 놓여 도덕적 지위를 누리지는 못한다는 점에는 공감했을지라도 인간의 동물 학대는 반대하였다. 그것은 동물을 학대하게 되면 인간 간의 학대를 자극할 것이며 반대로 동물에게 동정과 연민을 베풀면 다른 인간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21) ‘동물 자신의 관점이 배제’된 이와 같은 창조론적 해석에 기초한 아퀴나스의 인간중심주의 철학은 계몽주의 시대로까지 이어졌다.
중세에 이어 근대 초기 사상에서도 동물이 살아 있는 감각 있는 생명체라는 관점은 무시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극단으로 끌고 갔다. 그는 영혼이 부여된 인간과는 달리 동물은 ‘자동기계’(automata)에 지나지 않아 고통을 느끼는 것을 포함하여 일체의 의식 상태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22) 다시 말해, 동물은 진정한 발화, 이성, 감성, 영혼, 고통 감지 등을 결여한 복잡한 기계에 불과하며 동물의 울부짖음은 기계인형이나 다른 유형의 기계에서 나는 삐거덕 소리와 동일한 것으로 단지 반사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자의식(self- consciousness) 여부를 통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였다. 그에게는 자의식만이 윤리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물이 자의식이 아닌 의식, 즉 감각만을 지녀 도덕적 사고에 부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만이 목적이며 동물은 단지 도구적 가치만을 지니게 되며 인간은 동물에 대하여 “간접 의무”(indirect duties)만을 진다는 것이었다.23) 칸트가 동물의 고통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는 구별되지만 동물을 인격체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칸트는 인간의 동물학대에 반감을 피력했는데, 그 이유는 아퀴나스처럼 동물에게 가한 잔인성이 인간을 대하는 과정에서도 생성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에게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 의무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고 인간의 도덕성 함양이 더 중요한 명제였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동물이 진지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한 것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 철학자들이 출현하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서였다. 공리주의자들은 도덕의 범위를 모든 감각 있는 존재로 확장함으로써 인간만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는 뿌리 깊은 전통에 도전하였다. 예를 들어,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고대 법학자들이 동물의 이익을 소홀히 하였고 그 결과 동물이 “사물의 범주”로 퇴락하게 되었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동물이 인간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과 괴로움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서 “동물이 추론할 수 있는지 또는 말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24) 또한 그의 제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773~1836)도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행위가 정당화된다면 공리주의의 유용성의 원리가 갖는 도덕성은 영원히 비난받게 될 것이라며 고통의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을 공동의 도덕적 범주 속에 넣어 강조하였다.25) 벤담도, 밀도 동물에게 괴로움을 유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비로소 동물이 인간의 윤리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서구 사회의 철학 및 종교 전통이 동물 처우와 관련하여 윤리를 발화시켜왔지만 그 윤리는 최소화된 것으로 사회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40, 50년 전까지만 해도 동물학대금지가 동물 처우에 관하여 사회적으로 발화된 “유일한 도덕원리”였으며, 동물의 복지 또는 행복에 관한 논의 대부분은 개인의 몫이었다.26) 비록 벤담의 단호한 호소가 1824년 세계 최초의 동물학대방지법인 ‘딕 마틴 법’(Dick Martin’s Act)을 제정토록 유인하고 ‘동물친구학회’(Animals’ Friend Society)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하는 등 실천적 성격으로 변화하는 데 기여했을지라도 동물 착취를 고통의 관점에서 관조하는 데 머물러 있었다.27) 더욱이, 기독교 성경의 텍스트가 동물에 대하여 자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동물에게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동물 지배가 실천 윤리로서 책임과 의무를 동반한다는 사실은 소홀히 되었다.28)
반면에,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와 같은 동양의 종교 전통은 모든 생명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29) 이들 종교는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와 관련하여 두 가지 개념을 강조하는데,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비폭력 또는 비살생(ahiṃsã)과 모든 생명체의 윤회(samsara)가 그것이다. 예들 들어, 붓다(Buddha)는 동물을 도살하는 직업을 비난하고 제자들에게 가죽옷을 입지 말라고 가르치는 등 동물에게 해를 입히는 일체의 행동을 금하였으며 할 수 있으면 위험에 처한 동물을 도울 것을 주문하였다.30) 이런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육신은 영혼을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며 인간의 영혼은 곤충이나 포유동물 등의 다른 형태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윤회설로부터 연유한다. 이처럼 동양의 종교전통은 인간과 동물 간의 절대적 경계를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인간과 동물은 그 입장이 뒤바뀔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였다.31)
동양의 종교전통이 상호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동물에게 도덕적 의의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전통적 관념보다 진일보한 것일지라도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실천윤리로 발전하는 데에는 그 힘이 미약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서구 사회가 최근 반세기 동안 한편에서는 무수한 동물복지 이론을 쏟아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주장과 이론을 실천 또는 반영한 입법 활동이 동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적 개념이나 사상이 그 기저에 윤리적 실천성이 자리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영향력은 저감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증산은 동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가? 『전경』에는 동물과 관련하여 크게 세 가지 관점이 제시된다. 첫째는 제의적 측면으로 증산이 선제를 위해 쇠머리를 사용한 것처럼32) 돼지, 소, 닭, 개, 양, 가물치 등 각종의 동물이 천지공사에 직ㆍ간접적으로 제의의 구성요소로 사용되었다.33) 두 번째는 인간의 이익과 관련되는데, 폐병을 앓던 김낙범의 아들을 닭으로 치유한 것처럼(제생 22절) 인간의 병든 몸을 치료하거나 보양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 동물이 인식되었고 그 반대로 모기나 빈대처럼 인간 삶에 해로울 경우 후천에서는 그 존재 가치가 부정되었다.34) 셋째, 동물이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학대를 금하고 공생 또는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으로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지 않는 “호생의 덕”(행록 1장 11절)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35)
증산이 제의 행위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이용했다는 점은 외형상 인간의 동물 지배라는 서구의 전통적 동물관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록 증산이 제의적 측면과 인간과의 관계적 측면에 동물을 이용한 것에 대하여 그것의 정확한 구체적인 이유를 분석해 내는 것이 사실상 거의 대부분 불가능하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동물 지배를 동물 이용의 기본 원리로 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증산이 인세에 강림하여 각종 천지공사를 행한 것은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 재화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어 “세계의 민생”을 구해내는 데 있었고(공사 1장 3절), 이를 위한 각종 공사에 동물이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증산이 동물을 한편에서는 신명을 위한 제물로,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삶을 위한 도구로 이용했을지라도 그 근본 의도는 상극이 지배된 세상에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여 상생의 도로써 후천의 선경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점이 인간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둔 서구적 관점의 인간의 동물 지배와는 시작점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하겠다. 또한 예들 들어, 장성원의 아기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비별(飛鼈)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할 때 “금수도 또한 생명”이고 “어류도 또한 생명”이어서 부득이 전깃줄로 옮기는 공사를 시행한 것과 같이(제생 31절), 동물 학대를 금하고 호생의 덕을 실천하라는 증산의 윤리적 명제도 동물이 비록 불가피하게 희생 또는 이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불필요한 행위를 제한함으로써 인간의 동물 지배에 타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동물이 인간보다 낮다거나 동등하다거나와 같이 피라미드 형태의 단선적 구조 속에서 그 위상을 파악하는 것은 역할의 측면에서 전체론적인 우주적 관점을 고려하게 되면 중요성이 감소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상호 유기적 존재들로서 우주를 구성한다고 해도 각자의 역할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상을 척도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비교하기보다는 우주의 최고신이 부여한 각자의 역할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더 큰 의의를 지니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은 위상이 완전히 동등한 것이 아니라서 유기적인 그물망 속에서 관찰되어야 한다는 차선근의 주장처럼,36)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인간의 이익을 기저로 한 동물 지배 원리로는 합리화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 종은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선천의 혼란을 키워온 인간이 스스로가 유발한 부정적 결과에 책임 있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결과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한정할 수 없고 인간 대 자연, 더 좁게는 인간 대 동물이라는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역할은 명확해진다. 인간이 동물에게 가한 잘못은 인간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물 또한 이 우주의 구성체라는 인식 속에서 인간이 풀어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Ⅲ. 현대 서구 동물복지론과 증산의 동물해원
지난 반세기 동안 서구 사회는 학생인권운동, 페미니즘, 성소수자권리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등 일련의 눈부신 사회 윤리 운동을 급진척시켜왔다. 그중 하나가 동물의 처우에 대한 의미심장한 강조로 단순한 운동 차원을 뛰어넘어 법적 구속력까지 지니게 되었다. 또한 학문적 차원에서 동물복지학이 비록 상대적으로 신학문일지라도 이에 관한 연구 논문 수는 지난 20년 동안 눈에 띌 정도로 증가하였고 이런 연구의 상당 부분은 입법 활동의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37) 더 나아가, 북미와 유럽 전체 국가에서 동물복지 친화적 식량 생산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유럽 9개 국가를 상대로 한 어떤 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물복지표시 정보(labelling)가 소비자의 구매 행위에 영향을 미칠 만큼 동물복지는 이제 개인윤리에서 사회적 실천윤리로 인식되고 있다.38) 이와 같은 동물복지에 관한 서구 사회의 사회적, 학문적 관심은 그만큼 늘어난 대중적 각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종족을 유지하고 보존하고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타 생명체들을 때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이용해왔다. 이와 같은 독점적 지배력은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성적 사유능력이 중점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그것이 인간의 동물 지배에 완전한 이유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동물 지배를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여 온 서구적 전통이라 하더라도 서구 현대 사회는 동물이 인간과 함께 생태계의 한 축을 구성하는 공생 관계를 부인하지 않으며 지구의 모든 유기 생명체가 각 종의 특성에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해왔다는 진화론적 관점 또한 각 종의 고유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에 속하면서 정신지체의 유아나 혼수상태의 환자처럼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도덕 원리에 의해 존중되는 반면에, 동물은 어떠했는가? 서구사회가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해왔지만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반대하는 사람 상당수는 종차별(speciesism)에는 눈을 감은 채 윤리적 기준을 동물에게로 확장하지 않는다. 서구에서 이에 대한 반성론으로 나타난 것이 피터 싱어를 중심으로 한 동물복지론39)과 톰 레건 중심의 동물권리론이다.
서구에서 동물의 처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동물에게 긍정적 복지를 제공하는 필요충분조건은 동물의 생산성에 근거하였다. 즉, 인간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동물에게 긍정적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40) 하지만 생산적 가치로 동물복지를 논의하는 것은 충분한 먹이, 깨끗한 물, 양호한 거처만 제공하면 괜찮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물의 감정을 고통으로 제한했음을 의미했다. 이후 동물복지는 동물의 주체적 감정 경험, 육체적 건강, 종의 습성에 따른 자연스런 삶의 방식 외에 놀이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대되었고,41) 이런 확장에 기념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1975년 피터 싱어가 발표한 『동물해방』이었다.
동물윤리에 대한 현대적 논쟁을 촉발시킨 『동물해방』에서 싱어는 쾌락(pleasure)과 고통(pain)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서 감각능력을 지닌 유정체(sentient being) 모두는 보호되어야 하는 이익(interest)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42) 예들 들어, 소나 말과 같은 동물들은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익을 가지며 그래서 다른 종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유정체가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낀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그 고통이나 즐거움을 무시하거나 다른 존재의 그것들과 동일하지 않다고 여길 일체의 도덕적 정당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차별은 도덕적으로 인종차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차별적 행위로 동물의 이익과 인간의 이익은 동일한 차원에서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자신이 속한 종의 우월성으로부터 파생하는 다른 종에 대한 차별로 정의되는 싱어의 종차별 주장은 동물을 인간의 소유물로만 인식하던 종래의 관행에 일대 경종을 울렸다. 그의 영향으로 동물복지의 기준점이라 할 수 있는 소위 ‘동물복지 5대 자유’(Five Freedoms of Animal Welfare)가 1979년 영국의 농장동물복지위원회에 의해 도입되는 가운데 비로소 ‘동물복지’라는 현대적 개념이 사회 저변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다.43) 이로써 동물의 복지는 육체적 상태뿐만 아니라 정신적 상태를 포함하므로 건강(fitness)과 행복감(sense of well-being) 둘 다를 함축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싱어의 주장이 비록 인간의 동물에 대한 종래의 인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일지라도 동물이 처한 문제를 완전하게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공리주의적 관점으로서 동물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주장 속에는 감각능력이 기준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44) 개나 말과 같은 고등동물이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어 복지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겠지만 감각능력이 ‘불분명’한 동물을 복지의 경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제약이 뒤따른다. 더욱이, 동물복지는 동물의 주관적 경험보다는 인간의 경험, 즉 인간이 설정한 육체적, 심리적 기준을 잣대로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사실상 동물복지는 인간에게 “위임”된 것으로 동물 자신의 경험보다는 인간의 경험이 우선시된다.45) 따라서 동물복지를 인간복지와의 관련성 속에서 개념화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물의 삶보다는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행위이며 이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의 이용을 허용할 수 있음을 내포한다.46)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동물운동단체들이 ‘동물복지 5대 자유’를 슬로건으로 내세우지만 단체의 목적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할 뿐 통제 또는 절제된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동물의 ‘이익’을 실체적 차원에서 보장하지는 않고 있다.47)
동물에 대한 사회적 윤리는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공리주의적 개념에 의해 정의될 수 없는데, 그것은 고통이라 불리는 단일한 축을 따라 두려움, 외로움, 지루함, 고립, 사회적 상호 작용 단절 등과 같은 도덕적으로 관련된 의식 상태를 계량화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48) 결국 싱어의 동물복지 관점은 동물을 인간의 이익과 관심 아래 두고 인간의 보호 대상으로 취급하는 인간중심적 사고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진정성 상당 부분이 상쇄될 수밖에 없었다.49) 이러한 비판 속에서 인간이 이익을 가져다주는 살아있는 동물을 이용한다면 그 동물에게 져야할 의무가 있으며 동물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유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일정한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소위 ‘동물권리론’이 톰 레건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50)
동물의 권리에 대한 서구 학계의 인식이 비록 한 세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을지라도 현대적 논쟁으로 이끈 사람은 미국의 철학자 레건이었다.51) 그는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점을 옹호하기 위해 한 살이 넘는 포유동물을 예로 들며 그들에게도 일정한 기억, 인식력, 신뢰, 욕망, 선호, 목표를 향한 행동, 지각력, 감정, 미래 의식, 심리적 정체성 등 자기인식(self-awareness)의 의사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과 ‘동등한 고유 가치’(equal inherent value)를 지닌 ‘삶의 주체’(subjects-of-a-life)라고 주장한다.52) 다시 말해, 우리가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개인이 비록 낮은 지능을 보유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여전히 기초적인 의식과 심리활동의 삶의 주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동물에게도 그런 인식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고유 가치를 지닌 모든 개체는 인간이든 아니든 존중으로 대해야 하는 동일한 도덕적 권리를 지니며, 도덕의 대리자로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동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그는 “개체(동물)가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권리를 보호할 힘을 상대적으로 적게 가질수록 그들의 권리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 우리는 그들을 대신해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ㆍㆍㆍ 그러므로 타자의 기본권에 대한 존중은 조력을 제공할 분명한 의무를 포함한다.”고 말하며 동물이 자신들의 권리를 이해하고 주장할 수 있는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누려야 할 도덕적 권리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주문하였다.53)
동물복지론자들이 동물의 감정, 그중에서도 특히, 고통에 맞추어 복지의 개념을 전개하였다면, 동물권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고통 자체는 중심 제재가 아니었다. 예들 들어, 동물 도살 시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한 동물복지론자들의 어떠한 노력도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 무기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동물은 고유 가치를 지닌 삶의 주체로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취급되어야 하며 인간의 유용성 여부가 그들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54) 따라서 동물권의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 PETA처럼 현대의 동물권 주장자들은 동물이 고유한 불가침의 권리를 갖는다면서 사냥, 독성실험, 식용, 교육, 연구 등에 동물을 이용하는 행위가 착취 행위이며 그래서 그러한 일체의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55) 또한 일부의 급진론자들은 직접 행동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주장에 미온적이거나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향해 방화, 모피 의류에 페인트 살포, 기물파손, 그라피티 제작, 무차별적 전화와 이메일 협박, 웹사이트 해킹, 건조물 침입과 절도, 불안감 조성 등의 폭력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56) 그렇기 때문에 동물권 운동은 대중적 인기나 지지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무지하고, 잘못 이해한 철학을 수용하고, 설득력이 부족하거나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57)
서구의 동물복지론과 동물권리론은 비록 지향점을 달리하고 있더라도 동물의 처우에 관한 새로운 인식에서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이 두 관점은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그것은 윤리가 실천적이기 위해서는 “현실이라는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58) 따라서 동물을 자연 또는 환경에서 유리한 채 전체로서가 아닌 개체로서 접근하는 동물복지론자와 동물권리론자의 주장에 함몰하게 되면 오히려 생명 공동체의 통합성에 문제를 야기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멸종위기종의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을 포획하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허조그와 골든(Herzog & Golden)은 동물복지를 지향하던, 아니면 동물권리를 지향하던, 동물활동가들이 동물 이용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도덕적 직관(moral intuition)에 있어서의 근본적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59) 동물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동물을 이용하되 어떻게 최대의 복지를 제공할 것인지, 아니면 동물 이용 자체를 완전히 포기해야 할 것인지, 서구의 동물의 도덕적 위상에 관한 논의는 갈등을 유발하는 가운데 현재로는 풀 수 없는 “명백한 희망 없는 상황”60)에 봉착해 있다.
자연의 한 구성체가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다른 구성체를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바꾼다는 생각은 충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 인간은 선별의 방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 종에 절대적인 통제력을 행사해왔다. 동물에게 가한 유전자 조작이 아마도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유전공학이 보편적 학문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또는 “사실상”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61) 이런 행위는 동물의 관점을 완전히 배제한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서구의 동물복지론이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상호성의 원리, 즉 인간과 동물의 입장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일정 수준 고려되어야 한다. 동물 또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텔로스(telos)로 부른 생물학적, 심리학적 특성의 욕구와 관심을 지닌 존재62)이며 그들에게도 일정한 ‘마음’이 있기(행록 2장 15절; 행록 4장 34절)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존할 권리, 학대받지 않을 권리, 행복하게 살 권리를 주장하는 현대의 동물복지 목소리는 생명에 대한 “근원적” 존중을 지향하는 대순사상의 동물해원63)과 긴밀한 관계성을 유지한다.
증산은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며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우고자 천지공사를 시행하였다(공사 1장 3절). 원한이나 원망과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서 원(冤)이 쌓여 파멸 지경에 다다른 이 세계를 원의 해소를 통해 모두가 잘 사는 후천의 지상천국건설을 피력하였던 것이다.64)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명, 자연과 신명 등 대대하는 우주의 모든 존재가 원한을 풀고 같이 살아가자는 것, 보다 쉽게 말하자면, 만물이 서로를 위하고, 이해하고, 아끼고, 용서하면 자연스럽게 평화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65) 그런 의미에서 해원상생은 지극히 ‘단순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단주(丹朱)에게서 시작된 원은 그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공사 3장 4절)라는 증산의 언설처럼, 원의 영향력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매우 파괴적”이다.66) 그런데 해원은 인간의 원을 푸는 것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이미 원이 온 우주 속으로 확장한 상태이며 천지인 삼계로 대별되는 세계의 모든 존재가 상호 역동적으로 얽혀있는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67) 다시 말해, 세계는 하나의 전체 또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각 부분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배규한은 해원공사의 범위를 신명계, 인간계, 지계라는 삼계 전체로 설정하였고, 이경원은 『전경』을 분석하여 신명, 국가, 제도, 관습, 지기, 금수 등으로 보다 세분화하였다.68) 해원상생이 전체론적, 전일적, 또는 유기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해원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이 그 대상일 수밖에 없으며 분명히 동물에게도 그 문이 열려있다. 증산이 대원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방을 나선 때는 우주 만물을 해원시켜 상생의 도가 펼쳐지는 천지개벽을 위한 공사를 시작하려할 때인데, 그 순간 인간보다 이를 먼저 안 각종 새와 짐승이 모여들어 해원을 구하였다(행록 2장 15절). 동물에게도 해원은 절실한 문제였고,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천지공사가 완전할 수는 없다.
동물에게 해원은 어떤 것인가? 이경원은 동물이 천적으로부터 안위를 유지하고 생존을 위한 먹고 마시는 본능적 욕구를 자연 속에서 채우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의 한계가 원으로 환원되어 그 원을 풀고자 하는 것이 동물 해원이라고 설명한다.69) 이경원의 주장은 동물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이 동물 종 자체에서 유발되는 근원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싱어 계열의 동물복지와는 결이 다를지라도 동물의 원이 실제로는 자연법칙이 유발하는 측면보다는 인간이 촉발시킨 측면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문명의 시작과 더불어 자연법칙의 허용 기준을 뛰어넘어 동물의 생존 자체마저 완전히 통제하려 하였다. 사실, 동물이 겪는 무수한 어려움은 종 자체의 근원적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이 유발한 문제가 더 큰 것임을 부인할 수 있다.
동물의 원 상당 부분은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며 그래서 인간이 동물에게 쌓은 원은 인간 스스로 풀어야 한다. 그것이 해원상생이 작동하는 상호성의 원리이다. 윤재근은 세계의 모든 존재가 상생의 원리에 따라 공생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 대해 직접적 의무를 지니는 윤리적 객체라고 주장한다.70) 그러나 인간의 독점적 개념으로서 윤리는 동물의 관점을 반영하여 동물의 위상을 고민하는 상호성의 원리로 나아가는 데에는 그 힘이 미약하였다.71) 동물복지의 문제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해야 하는” 윤리적 의무의 문제라는 롤린의 주장처럼,72) 동물해원은 인간의 윤리적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전경』 교법 2장 56절은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라며 후천의 인간상과 태도를 제시한다. 사실 이 구절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인존시대라는 거창한 문구보다는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라는 실천적 지침이다. 배규한은 인간의 존엄성이 극대화되는 시대로 인존시대를 추론하지만73) 마음을 부지런히 않는다면 이루기 어려운 신기루일지 모른다. 인존시대의 핵심은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에 있는데, 예를 들어 “지금은 해원시대니라 ㆍㆍㆍ 양반의 인습을 속히 버리고 천인을 우대하여야 척이 풀려 빨리 좋은 시대가 오리라”(교법 1장 9절)처럼 실천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지극히 ‘단순한’ 해원상생의 실천윤리는 상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동물과 마주대할 때에는 한없이 ‘어려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우주의 다른 구성체들과의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세계 전체에 대한 자각이 인간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74) 그래서 “모사재천 성사재인”(교법 3장 35절)의 인존시대에 우주 진행 과정의 주체로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의 역할이 더욱 필요해지며,75) 무엇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사”(교법 3장 24절)가 중요해진다.
인간, 동물, 식물 등 우주의 모든 구성체는 각기 맡은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은 각각의 존재를 식별케 한다. 각각의 존재는 각자의 역할을 소화할 때, 다시 말해 각자의 역할에 막힘이 없을 때 세상이 평화로울 것이라는 역할에 기초한 전체론적 사고 체계가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의 동물복지 주장을 ‘막힘’을 뚫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동물이라는 우주의 특정 개체에 집중함으로써 그 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막힘의 해소는 각자의 역할이 다른 대대하는 존재들 간의 상호성의 원리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상호성의 원리가 내재된 해원을 동물 문제에 적용시켜야 하는 이유이다.
이경원은 해원상생이 사회복지의 진정한 실천이념이라고 주장한다.76) 인간 간의 문제를 풀기 위한 실천윤리로서 해원상생은 인간과 동물 간의 문제를 풀기 위한 동물복지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동물에게 쌓은 원은 인간이 풀어야 하며,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역할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동물해원은 현 단계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과제처럼 보인다. 대순사상에 인간해원을 위해 복지의 개념이 도입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모색ㆍ실행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동물해원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추상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제 동물해원을 실천적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때이다. 동물해원은 후천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래서 간과할 수 없는 인존시대를 준비하는 우리 인간의 역할이다.
Ⅳ. 맺음말 : 동물복지를 넘어서
동물의 처우에 관한 서구의 오랜 철학적, 종교적, 사회적 논의 또는 논쟁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각국보다 앞서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차별을 폐지하고 인간에게만 적용되던 복지의 개념을 동물에게도 적용한 동물복지론이 탄생하였고, 최근에는 동물의 지위를 권리의 주체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동물권리론자들의 목소리가 동양보다는 한층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제 서구사회에서 동물은 실천적 윤리의 주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그것의 파장은 서양을 넘어 동양으로까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각 방송사가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고정 프로그램으로 편성할 만큼 미디어에는 동물이 홍수를 이루고, 동물 관련 법률의 제정 및 개정이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수의학과는 동물의학과로, 수의사는 동물의사로, 가축병원은 동물병원으로, 대학의 축산학과는 동물자원학과 등으로 명칭 변경이 빠르게 시도되고 있는 것처럼,77) 동물은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동물에 대한 논쟁이 강해질수록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 또한 만만치 않게 증가하고 있다. 예들 들어, 미국의 유명한 명사 패리스 힐튼(Paris Hilton)이 3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에어컨과 샹들리에가 구비된 강아지 집을 지었다는 언론보도78)는 밤이슬을 피할 거주 공간이 없어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노숙자에게는, 하루 벌어먹기도 힘든 일용직 노동자에게는 분노 자체이다. 이런 극단적 행위가 종차별을 금지하고 동물에게 권리를 부여한 결과라면, 그래서 그런 행위가 정당하다면, 이에 대한 반감 또한 상승할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종차별 금지나 동물권에 기초한 서구의 동물복지는 “윤리적, 지적, 철학적 가시밭”79) 일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서구 동물복지론이 배태하는 사회적 갈등은 아마도 구조적 결함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동물복지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종차별 금지가 인간의 동물 지배를 기저로 인간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서구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 종의 완전한 평등성을 주장하는 동물권리론은 인간의 존재 이유에 위협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처우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서구의 이 두 이론은 상호 충돌이 예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에 다양한 의견 분출을 시사하고 때에 따라 동물복지 자체에 거부감마저 생성케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항상 평화를 주장하라. 너희들끼리 서로 싸움이 일어나면 밖에서는 난리가 일어나리라.”(교법 1장 53절)라는 증산의 가르침처럼, 비록 서구의 동물복지론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동물과 동물 간의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라 하더라도 ‘복지’나 ‘권리’를 넘어서는 다른 뭔가가 필요하다.
차선근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인간, 동물, 식물, 신명 등의 모든 대상과 상생을 모색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동물 등의 타자를 함부로 착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선제적으로 동물이 가진 원을 풀고 더 이상 원한을 갖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주장한다. 더불어 그는 동물해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상생을 목표로 삼아 상생하는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80) 그렇다면 상생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방법이 무엇인지 특정할 수 없다면 ‘실천’은 사실상 불가능할뿐더러 자칫하면 인간이 동물해원의 주체라기보다는 방관자로 전락할 위험성이 뒤따른다.
최근 서구를 중심으로 동물의 처우에 관한 논의가 급진전하고 있다. 그것은 일견 인존시대를 맞아 인간의 자유의사에 따른 능동적인 창조적 노력일지 모른다. 서구의 동물복지론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역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록 제한적일지라도 동물해원의 성격과 일견 맥락을 같이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동물해원과 관련된 연구만 보더라도 본 주제가 아닌 부차적 주제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제한적이며 정지윤ㆍ윤기봉과 김진영의 견육 식용 문제에 관한 연구를 제외하면 동물해원의 실천성을 주장하는 연구는 거의 없다.81)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있는 현대의 동물복지론이 동물해원의 올바른 방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담지하는 실천적 가치는 동물해원의 관점에서 살펴볼 여지가 충분하다. 현대사회에서 동물복지에 함축된 생명윤리가 개인 윤리이기 이전에 법의 체계 속으로 편입될 만큼 ‘실천적’ 강령으로서의 공동체 윤리이기 때문에,82) 이제 동물해원의 실천성이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