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시작하는 말
잘 살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바람이리라. 그러나 아쉽게도 그 바람은 바람처럼 우리 곁을 스쳐지나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바람을 바라면서 또 행위 한다. 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 이 바람을 이룰 수 있는 ‘길(Weg)’은 과연 있을까? 현시대의 인간들은 그 바람을 과학기술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 같다. 그들은 과학기술의 성과를 철저히 믿고 그 성과가 자신의 바람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과연 잘 살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학기술 문명을 이끄는 주체가 아니라 그것의 노예, 아니 과학기술의 수단 내지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맹위를 떨치는 이 시대에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은, 아니 천지만물은 이용 가능한 ‘부품(Bestand)’이 되어 에너지를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있고 도처에서 주문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산천초목ㆍ동물과 식물ㆍ이끼와 바위 등이 어우러져 비밀스럽고 시원적인 생명의 존재 연관을 가진 자연은 그러한 연관을 잃고 단지 지구촌을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에너지원으로, 지구촌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산업화한 식량 생산과 식품가공(食品加工, food processing)의 커다란 창고로, 레저 산업을 위한 관광 및 휴양과 유흥의 장소로 여겨져 이곳저곳에서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으며, 인간 또한 산업 자원 인력, 노동 인력, 교육 상품, 박수 부대 등등으로 도처에서 주문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1) 이에 과학기술 문명이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이 현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피곤함을 호소하고 있다.
사실 과학기술 문명을 이끌고 있는 기술의 본질은 위험하다. 현대기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놔두지 않고 닦달하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고유함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단지 여기저기서 주문 요청되어 요리되고 조리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기술의 본질이 위험하고 더 위험한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인간다움을 변형시킨다는 점이다.2) 그러니까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 방식을 바꾸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과학기술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시대의 존재론적인 실상이다.
이런 실상을 뭐라고 해야 할까? 세계의 황폐화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를 훤히 열면서 존재해야 할 본래 그 자리인 ‘고향(Heimat)’, 즉 모든 존재자가 존재해야 할 본연(本然)의 자리인 고향이 사라진 실상이다. 그래서 현시대는 고향상실의 시대이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각각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도우면서 어깨동무하고 노는 ‘상생’이란 발붙일 수 없으며, 우리의 바람 또한 이루어질 수 없음은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시대의 인간들이 신봉하는 과학기술은 잘 살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을 충족시켜 줄 수 없으며, 우리의 바람 내지는 희망 또한 이루어줄 수 있는 길은 아니리라.
그런데 한국의 신종교 중 하나인 대순진리회에서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이라는 종지(宗旨)를 통해 원한이 쌓이는 상극의 시대인 선천을 마감하고 ‘원을 풀고 서로 잘 사는’ 상생의 시대이자 선경인 후천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3) 이때 이것은 ‘원을 풀고’ ‘서로 (잘) 산다’라는 ‘해원상생’을 통해 잘 살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을 풀고 서로 잘 살고자 하는 ‘해원상생’은 세계의 황폐화를 걷어내고 잘 살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바람을 실현해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그러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해야 할 본연의 자리에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원상생’이라는 것을 대순사상 내지는 대순진리회에서는 단지 가치론적이고 윤리적인 이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4) ‘종교’ 사상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해원상생을 그렇게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론적 근거를 따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다. 특히 ‘상생’의 근거를 말이다. 사실 ‘상생’의 존재론적 근거 내지는 토대가 드러나면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상생의 윤리적인 이념도 더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상생의 이념을 실천하라는 것보다는 세계란 이미 상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존재론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상생의 이념을 실천하라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순사상에 따르면 ‘해원상생’에서 ‘해원’의 목적은 서로 잘 살고자 하는 ‘상생’에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상생의 존재론적 근거를 드러내는 것은 더욱 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를 통해 상생이 필요한 이 시기에 대순사상의 윤리적인 이념인 ‘상생’의 가치 또한 높아질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상생’의 존재론적 근거를 무엇을 통해 드러낼 것인가? 한평생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면서 존재사유(Seinsdenken)를 전개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통해 드러내도록 할 것이다. 물론 이때 필자는 대순사상 내지는 대순진리회에서 말하는 ‘해원상생’에 주목하면서 그 근거 내지 토대를 드러내도록 할 것이다. 이를테면 하이데거가 그의 존재사유 내지는 존재물음에서 전개하고 있는 ‘사방-세계(Geviert-Welt)’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그리고 ‘거주하기(Wohnen, 거주함)’를 통해 대순사상 내지는 대순진리회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이념인 ‘상생’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말하자면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넷’의 하나로 포개짐이 상생적으로 펼쳐지는 ‘사방-세계’, ‘욕구’라는 특징을 가진 ‘표상적 사유’를 벗어나 ‘사방-세계’에 진입하는 ‘초연한 내맡김’이라는 인간의 태도, ‘초연한 내맡김’에 의해 ‘사방-세계’에 진입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중히 보살피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인 ‘거주하기’ 등을 통해 ‘상생’의 토대를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그러한 것들은 다 존재론적인 지평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으로서 대순사상 내지는 대순진리회에서 말하고 있는 윤리적인 이념인 ‘상생’을 이해하는데 좋은 토대가 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존재에 대한 사유는 이미 근원적인 윤리학’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5)
Ⅱ. ‘해원상생’의 의미
『대순진리회요람』에 따르면 대순진리회의 종지(宗旨)는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이다.6) ‘종지’란 종단의 핵심사상, 즉 교의(敎義)를 말하는 것이므로 ‘해원상생’은 대순진리회의 핵심사상 중 하나이다.7) 그래서 ‘해원상생’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아 정리하기도 거론하기도 힘들 정도이다.8)
물론 ‘해원’과 ‘상생’으로 이루어진 ‘해원상생’은 말 그대로 ‘원(冤)을 풀고 서로 (잘)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원’은 ‘원을 푼다’는 말이며, ‘상생’은 ‘서로 (잘) 산다’는 말이다. 그러나 ‘원을 푼다’고 할 때, 그 ‘원’은 도대체 무슨 ‘원’이며 그 ‘원’을 어떻게 푼다는 것일까? 그리고 ‘서로 (잘) 산다’라는 ‘상생’은 무엇을 말할까?
우선 ‘원’의 사전적 의미는 원통하고 억울한 ‘원한(怨恨)’, 즉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여 원망과 한이 응어리진 마음’이다. 이때 이러한 마음은 잘못이 없는데 잘못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원통해서 가슴에 맺힌 마음을 말한다. 우리에게 원통하고 한이 맺힌다는 것은 잘못을 저질러서 그 잘못에 대한 죄값을 치루었을 때 맺힌 마음이 아니라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잘못 없는 죄값을 치루었을 때 응어리진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해원’은 ‘잘못이 없는데도, 아니 없었는데도 잘못된 죄값을 치룬 것에 대한 원망과 한이 응어리진 마음을 푼다’는 것이다.9) 대순사상에 따르면 ‘만고의 원한을 푸는 것이다’.10) 그러나 그 ‘마음’은 어찌 생겼으며,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
원망과 한이 응어리진 마음은 대순사상에 따르면 ‘상극(相剋)’ 때문에 생긴다. 그것도 선천에서 말이다. ‘선천에서는 인간과 사물,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극에 지배되어’ 그러한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순사상은 그러한 마음이 천ㆍ지ㆍ인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는 상도(常道)를 잃고 온갖 재화(災禍)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다고 여긴다.11) 사실 상극이란 존재하는 어떤 것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맞서거나 충돌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충돌 속에서 원한이 생길 것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인 상극은 ‘상도’를 잃고 있는 것이리라. 말하자면 세상의 ‘틀’이 잘못된 것이리라. 또한 이러한 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그 틀에 속박되어 자유로운 주체로 행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때 인간에게는 원한이 쌓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원한은 ‘상도’를 잃고 있는 세상의 ‘틀’에 의해 나타난 것이리라.
이렇게 원망과 한이 응어리진 마음인 ‘원’이 이미 ‘상도’를 잃고 있는 ‘틀’이자 상극에 지배받고 있는 ‘틀’에서 생긴다면, 만고의 ‘원을 푼다’는 해원은 우리의 삶을 옥죄면서 우리를 자유롭게 행위 하지 못하게 하는 기존의 ‘틀’이자 상극에 지배되어 있는 ‘틀’에 대한 해체이리라. 사실 그런 틀이 해체된다면, 그 틀에서 생기는 원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틀’에 대한 해체의 ‘길’인 ‘해원’이 대순사상에서는 어떻게 펼쳐지는가?
‘천지공사(天地公事)’이다. 누가 천지를 공사한다는 말인가? 대순사상에서 말해지고 있는 신앙의 대상이자 상제인 증산이다.12) 이때 증산은 유한한 인간의 힘을 넘어선 초월적이면서도 무한한 힘을 행사하는 자이자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자이다. 이러한 증산이 상극에 지배되어 있는 틀을 해체하고 ‘삼계공사(三界公事)’를 행해 천ㆍ지ㆍ인을 새로 만든다는 것이다. ‘개벽’ 말이다13) 물론 이러한 천지공사는 그러한 틀을 해체한다는 의미에서는 ‘해원공사(解冤公事)’이다. 선천은 상극에 의해 원한이 가득 찬 세계인데,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개벽은 해원공사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쌓이고 쌓인 모든 원한의 응어리를 풀고 앞으로는 결코 원한이 쌓이고 맺히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 바로 해원공사라는 말이다.
이러한 해원공사를 통해 드러난 세계는 선경인 후천이다. 선경은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서 비유적으로는 경치가 좋고 그윽한 곳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때 이 선경은 인간이 상극이 지배하고 있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움을 구가할 수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리라. 더군다나 증산이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14)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후천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함과 자유로움을 펼치면서 존중받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후천은 인간이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 서로를 존중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아니 인간이 상생하는 원래의 관계가 드러나는 시대라는 말이다. 더불어 인간과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이 함께 상생하는 것을 말한다. 후천에서는 천ㆍ지ㆍ인이 개벽되어 상극 상태가 아니라 “상생의 도”15)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천을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니 후천에서 중요한 원리는 ‘상생’이리라. 그러나 ‘상생’이란 무슨 말인가? 일단 ‘상생’은 말 그대로 ‘서로 (잘)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인간만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자가 살아가고 있고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상생은 인간끼리의 상생만은 아니리라. 물론 상생을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화합하고 도우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이 서로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16) 그러나 인간과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자,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어깨동무하고 잘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리라. 다시 말해 천ㆍ지ㆍ인의 조화로운 상태 내지는 서로 서로 살리는 실상을 ‘상생’이라고 이해하면 되리라. ‘상생의 도’란 ‘후천인 선경을 만드는 것’17)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면서 서로 서로 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순사상에서는 이러한 해원과 상생을 한 묶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해원 따로 있고, 상생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대순사상에서는 해원을 통해 상생이 따라오는 것으로 여긴다. 해원이 원인이고 상생이 결과라는 말이다. 해원의 목적은 상생이라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앞에서 보았듯이 대순사상에서는 세계를 선천과 후천으로 구분하는데, 이때 선천은 어떤 것들이 화합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상극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후천은 선경 세계로서 상극 때문에 나타난 ‘원’이 사라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잘 사는 상생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것은 대순사상에서 후천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상생만이 존재하는 선경세계이자 후천에는 어떻게 이를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앞에서 본 증산의 천지공사, 삼계공사, 해원공사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배규한은 “증산은 ‘해원공사-삼계공사-천지공사’라는 종교적 실천행위를 기제로 삼아 해원상생의 법리를 삼계의 실천윤리로 적용하고 선천의 상극시대를 후천의 상생시대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증산의 해원공사는 해원상생의 실현과 선경건설의 인과론적 방법이자 실행기제로서 작동한다.”18)고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해원상생’을 대순사상에서는 하나의 실천 ‘이념’ 내지는 ‘영원한 평화 사상으로 나아가는 방법론’으로 설정하고 있다.19) 여기에서 이념 내지는 방법론은 거의 윤리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사실 ‘해원공생(解冤共生)’이라고 하지 않고 ‘해원상생’이라고 한 것도 ‘공생’과 ‘상생’이라는 낱말의 의미 때문에 그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20)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원을 풀고 서로 서로 잘 사는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측면 말이다. 물론 해원상생이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말해지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해원상생은 증산의 천ㆍ지ㆍ인 공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고로부터 내려온 모든 원이 풀리고 상생의 후천이 이루어지는 세상의 개벽을 말하기 때문이다.21) 그럼에도 ‘해원상생’을 말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을 윤리적인 지침 내지는 윤리적인 이념, 종교윤리의 실천 이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2)
그런데 대순사상의 ‘해원상생’을 윤리적인 이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해원상생의 근거를 존재론에서 도출할 수 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앞에서 보았듯이 ‘존재에 대한 사유는 이미 근원적인 윤리학이다’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윤리적인 이념이 존재에 대한 사유를 통해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윤리학은 존재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원상생’에서 ‘해원’도 중요하지만 필자의 고려 대상은 당연히 ‘상생’이다. 필자는 ‘상생’이 이루어지면 ‘해원’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생’의 존재론적 의미를 이해하면 ‘해원’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말하면 ‘상생’의 존재론적 근거 내지는 토대가 드러나면 ‘해원’의 윤리적 가치가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Ⅲ. ‘상생’의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사방세계’와 ‘초연한 내맡김’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상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극과 반대되는 개념이다.23) 그런데 누차 말하듯이 대순사상에서 선천의 재앙과 원한 요인은 상극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극과 반대되는 이념 내지는 개념인 상생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상극에서 상생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때 상생은 천ㆍ지ㆍ인의 조화로운 상태,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상생이야말로 상극으로 인해 빚어진 모든 원한과 참상 내지는 재앙을 벗어던지고 후천의 영원한 평화와 낙원을 이루기 위한 전제가 되는 지배원리인 것이다.24) 따라서 대순사상에서 선천을 지배하는 원리는 상극이요, 상생은 후천을 지배하는 원리인 것이다.
상생은 후천의 선경 또는 영원한 평화와 낙원을 이루기 위한 원리이다. 원리란 보통 사물이나 현상의 근본이 되는 이치를 말한다. 아니 세상을 이끄는 이치이다. 그래서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상생은 개벽된 세계인 후천의 원리이자 이념이다. 이에 이경원은 대순사상의 상생 이념의 특징을 ‘현대문명의 미래로서 후천 세계의 지배원리가 됨, … 오늘날 인류가 희망하는 영원한 평화의 지도이념이 될 수 있음’으로 정리한다.25) 사실 타자를 해치지 않고 서로 살리는 상생을 통해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대순사상에서 말하고 있는 상생의 이념은 후천의 원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영원한 평화 이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상생의 이념이 이러한 것이라면, 상생의 이념은 이경원이 말하듯이 과거 선천에서 지녔던 낡은 가치관을 바꾸어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할 뿐만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사고로 전환하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관계론이 될 것이다.26) 이때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시각을 넘어 진정한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본질적인 사고로 전환해서 그 사고에 입각해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고에 입각해서 세계를 바라볼 때 새로운 세계 내지는 후천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 사실 ‘서로 (잘) 산다’라는 상생이란 관계론적인 용어이다. 나 홀로 있을 때 말해질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상생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존재자가 서로 힘입으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상보적 관계, 즉 상생은 나만 사는 것도 아니고 너만 사는 것도 아닌, 모두가 함께 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27)
그러나 이러한 상생적인 관계론을 우리는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일단 필자는 이것을 위해 인간의 존재방식을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원래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 상생의 관계론 내지는 상생의 토대가 드러날 수 있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 (잘) 산다’28)는 ‘상생’에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그냥 서로 도움을 주면서 산다는 말일까? 우선 우리가 고려하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서로 (잘) 산다’에서 ‘산다’는 것이다. 이때 ‘산다’는 것는 ‘거주(Wohnen, 거주함)’29)이다. 즉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방식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방식인 거주함은 ‘보살핌’이다. 왜 그럴까? 하이데거의 『강연과 논문(Vorträge und Aufsätze)』 속에 있는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Bauen Wohnen Denken)」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것을 살펴보기로 한다.30)
우리가 ‘거주함’이라고 번역하는 독일어는 ‘보넨(Wohnen)’이라는 낱말이다. 그런데 이 ‘보넨’은 “고트어 ‘부니안(wunian)’”에서 유래하는데, 이때 그것은 “머물러 있음, 즉 체류하고 있음”을 뜻한다.31) 그렇다면 거주함의 본래 의미는 ‘머물러 있음 또는 체류하고 있음’이리라.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머물러 있음 또는 체류하고 있음을 인간이 어떤 곳에 정착해서 사는 것인 ‘거처’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부니안(wunian)’은 “평화로이 있음 … 평화 속에 머물러 있음”인데, 여기에서 “평화라는 낱말은 자유로움, 즉 das Frye를 의미”하고, “fry는 해악과 위협으로부터 [어떤 것을] 보호함, … 즉 보살핌”을 뜻하기 때문이다.32)
‘부니안’에서 유래하는 ‘보넨(Wohnen)’이라는 거주함은 ‘보살핌’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보살핌은 대개 어떤 것을 진정한 마음으로 해악과 위협 상황으로부터 보호하고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보살핌은 우리가 “어떤 것을 처음부터 그것의 본질 안에 그대로 놓아둘 때, 즉 우리가 어떤 것을 오로지 그것의 본질 안으로 되돌려놓아 간직할 때, 즉 우리가 자유롭게 함이라는 낱말에 상응해서 그것을 울타리로 둘러쌀(einfrieden, 보호막으로 감쌀) 때 일어난다.”33) 말하자면 보살핌은 우리가 존재하는 어떤 것의 고유함을 침해하지 않고 그 어떤 것을 그것의 본질 안에 놓아두면서 간직하고 보호막으로 감쌀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생은 자유로운 영역(평화로운 영역) 내지는 자유로운 구역 안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거주함이란 “각각의 것을 그것의 본질 안으로 소중히 보살피는 Frye 안에, 즉 자유로운 구역 안에 울타리 쳐진 채 머물러 있음”34)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주함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거주함은 자유로운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음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유로운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인간은 그 영역에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그대로 놔두면서 해악과 위협으로부터 보살핀다. “거주함의 근본 특성은 보살핌”35)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주함은 ‘자유로운 영역’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그것의 본질 그대로 놔두는 우리의 태도, ‘자유로운 영역’ 안에서 존재하는 어떤 것을 보살피면서 그 자유로운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인간의 존재방식이리라.
‘거주함’에 대한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우리가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상생’을 ‘일단’ 자유로운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보살피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이에 ‘상생’을 인간이 실천해야 할 하나의 윤리적인 이념 내지는 영원한 평화이념으로 받아들일 때, 그 이념은 존재론에서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순사상에서 ‘상생’을 윤리적이고 가치론적 의미로 받아들일 때, 그것의 근거를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잘) 산다’는 ‘상생’에서 ‘산다’는 것은 ‘거주하기’로서 이러한 거주하기는 ‘자유로운 영역’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 자신으로 그대로 놔두면서 보살피고 보호하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대순사상에서 ‘상생’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함께 사는 방식, 서로 존재하는 방식’,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방식’, ‘천ㆍ지ㆍ인의 조화로운 상태’이다. 그런데 ‘서로 (잘) 산다’는 ‘상생’에서 ‘산다’는 것은 ‘거주하기’이고, 이 거주하기는 어떤 것을 그 자신으로 놔두면서 소중히 보살피는 것을 말하며, 그러한 보살핌으로서의 거주하기는 ‘자유로운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상생’의 토대는 ‘자유로운 영역’이 되리라. 다시 말해 상생적인 관계론은 ‘자유로운 영역’에서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천ㆍ지ㆍ인의 조화로운 상태’ 내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를 살리는 방식’인 상생의 토대는 보이지 않지 않는가?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관계론’은 보이지 않지 않는가?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런데 이런 상생의 토대와 관계론도 ‘자유로운 영역’에서 드러난다. ‘자유로운 영역’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럴까?
‘자유로운 영역’은 사실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세계’란 도대체 무엇일까?36) 존재자들의 총체인가? 우리의 인식론적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세계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자들의 총체 내지는 하나의 객관적 전체가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서양의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주관적으로 표상된 어떤 지평 내지는 표상적 사유의 대상도 아니다. 세계란 ‘자유로운 영역’, ‘회역(Gegnet, 會域)’, ‘훤한 밝힘(Lichtung)의 장’, 존재하는 모든 것이 훤히 밝혀져 놀이하는 장소이다.37) 아니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인간’ 넷이 하나로 포개져 자신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비추면서 노는 장소, 이 넷과 연관된 모든 존재자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상생하는 놀이터이다. 왜 그럴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내-존재’, ‘세계 안에 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은 당연히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갈 때, 표현된 ‘이 땅 위에서’는 ‘이미’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인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땅 위에서’라는 표현엔 ‘땅’이 속해있고, 땅은 우리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 아래에 있으며, 하늘과 땅은 자신 속에 ‘신적인 것들’을 품고 있으며, 죽을 자들인 인간은 다른 인간과 함께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이 넷은 각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통일성으로부터 … 하나로 속한다.”38)
여기에서 일단 우리의 주목 거리는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 넷이 ‘하나로 속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넷이 ‘하나로 속한다’는 것은 넷 각각이 ‘상호 공속적인 연관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서로 서로 속해있음(ein Zu-einander-Gehören)’39),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는 ‘공속(함께 속해있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넷이 각각 따로 존재한 후 서로 결합하는 관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속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넷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땅은 하천, 암석, 식물 그리고 동물을 돌보고 보호하면서 건립하며 떠받치고 있는 것, 즉 자양분을 공급하며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이다.” “하늘은 태양의 운행, 달의 진행, 별들의 광채, 한해의 계절들, 낮의 빛과 여명, 밤의 어두움과 밝음이며, 날씨의 은혜와 험함이며, 구름의 노닐음, 에테르의 푸른 천공이다” “신적인 것들은 신성을 눈짓하는 사자(使者)들이다.” “죽을 자들은 인간들이다.”40)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넷’이 함께 속해있다는 것은 이 넷이 ‘하나로 포개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넷이 하나로 포개져 있음이 바로 ‘사방(Geviert)’이다.41) 물론 하나로 포개져 있는 이 넷은 사방 안에서 그냥 포개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서로 다른 셋과 관계 맺으면서 ‘논다(spielen)’.42) 이때 논다는 것은 그 넷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펼치면서도 하나로 포개짐 속에서 서로 다른 셋의 본질을 “비춘다.”43)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 넷은 사방 안에서 서로 서로를 비추면서 논다는 것이다. 그런데 넷 각각이 이렇게 서로를 비추면서 놀 때 다른 셋이 훤히 드러나게 된다. “넷 각각은 … 다른 셋의 각각에게 자신을 건네며 놀이”44)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 놀이를 “넷의 각각이 펼쳐주는 합일의 받침대에 입각[의존]해서 각각을 신뢰하게 해주는 놀이”45)이자 사방의 ”거울-놀이”, 그리고 이 “거울-놀이”를 세계라고 말한다.46) 따라서 세계는 ‘사방-세계’이다.
그렇다면 세계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자들의 총체 내지는 하나의 객관적 전체가 아니리라. 세계는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 넷이 각각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각각 다른 셋을 비추는 ‘거울-놀이’이자, 넷의 하나로 포개짐에 의존해서 서로를 신뢰하는 놀이, 그리고 그러한 놀이를 통해 넷이 어우러지면서 순환하는 ‘윤무’이다.47) 그런데 이렇게 넷이 하나로 포개짐에서 훤히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세계의 세계화’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세계는 세계화한다(Welt weltet).”48)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는 ‘사물의 사물화’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사물(Ding)이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설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사물’을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모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지 독일어는 ‘모아들임’을 ‘사물(thing)’이라고 하기 때문이다.49) 이것을 하이데거는 하나의 사물인 ‘단지(der Krug)’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단지는 무언가를 담는 것이다. 이때 단지는 우리가 보듯이 하나의 ‘사물’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모아들이는 것이 사물이라면, 단지라는 사물엔 무언가가 모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안에 시원한 술이 담아져 있다면, 이때 단지 안에는 ‘땅’과 ‘하늘’이 모아져 있을 것이다. 술은 물과 뗄 수 없는 것이며, 물은 하늘과 땅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술은 ‘죽을 자들’인 인간에겐 그의 괴로움을 일시적이나마 해소시켜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 술은 축성, 즉 신에 대한 헌주일 수도 있는데, 이때 ‘신적인 것들’이 신성을 통해 인간에게 눈짓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물인 단지에는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라는 넷이 하나로 포개진 채 모아들여져 머물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땅과 하늘, 신적인 것들과 인간’ 넷이 하나의 사물인 단지 안에 하나로 포개져 머물고 있다면, 단지라는 사물은 ‘사방’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넷의 하나로 포개짐인 사방은 ‘거울-놀이’를 하는 것으로서 넷이 자신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 각각 다른 셋을 비추면서 훤히 드러나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단지라는 하나의 사물에는 ‘사방-세계’가 훤히 드러나고 있으리라. 즉 세계가 세계화하고 있는 것이리라.50)
‘상생’이란 ‘서로 (잘) 산다’이다. 서로 잘 산다는 것은 서로가 다른 것을 해치지 않고 보살피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거주하기인데, 이 거주하기는 보살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인간 이외의 것들에게도 적용하면 서로 잘 산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보살피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바로 앞에서 본 ‘자유로운 영역’인 ‘사방-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대순사상에서 윤리적인 이념으로 말하고 있는 ‘상생’의 토대 또는 모든 존재들의 관계론은 ‘사방-세계’이리라. 사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상생의 도’는 ‘사방-세계’의 ‘세계화’이다. 그 세계화에서는 각각이 다른 것과 상생하는 것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화에서는 해원이 필요없다. 아니 그런 세계는 이미 해원된 개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상생하고 있는데 해원이 과연 필요할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앞에서 본 세계가 바로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세계이다. 그래서 그 세계에서는 인간의 반목과 원한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단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서로 어울리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살피는 것만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존재자도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펼치기만 된다. 따라서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상생의 이념은 ‘사방-세계’에서 그 토대를 볼 수 있으리라.
한편 ‘상생’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고려해야 하는 것은 ‘함께 산다’고 할 때 ‘함께’가 우선이냐 ‘산다’가 우선이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빗대어서 말하면 ‘함께 속해있음’에서 ‘함께’가 우선이냐 ‘속해있음’이 우선이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함께 속해있음’의 의미는 앞에서 보았듯이 어떤 둘이 있다고 할 때, 그것들이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 속해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어떤 둘이 분리된 각각의 요소로 존재한 후 서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속해있음을 후자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실 그럴 때 상생이 참된 상생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51)
‘함께(Zusammen)’와 ‘속해있음(gehören)’으로 구성된 ‘함께 속해있음’은 ‘함께’를 강조해서 파악될 수도 있고, ‘속해있음’을 강조해서 파악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함께 속해있음’을 ‘함께’로부터 파악한다면, 이 경우 ‘속해있음’은 ‘함께’의 질서 속에서 정돈되어 있음을, 즉 다양성의 통일성 속에 설정되어 있음을 말한다.52) 그러나 ‘함께 속해있음’을 이런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어떤 둘을 두 개의 분리된 각각의 요소로 간주한 후, 하나를 다른 하나와 결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어떤 것과 어떤 것의 함께 속해있음’을 ‘함께’로부터 파악한다면, 이것은 어떤 것과 어떤 것의 ‘함께’를 하나의 병렬적인 관계로 표상하는 것으로서 어떤 하나의 것으로부터 혹은 어떤 다른 하나의 것으로부터 정리 정돈하면서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53) 하지만 ‘함께 속해있음’을 ‘속해있음’으로부터 파악한다면, 이 경우 ‘함께’를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속해있음’으로부터 규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속해있음’의 의미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첫 번째의 어떤 것이 두 번째의 어떤 것에 ‘속해있음’과 ‘동시에’ 두 번째의 어떤 것이 첫 번째의 어떤 것에 ‘속해있다’는 이중적인 사태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이 경우는 어떤 것과 어떤 것이라는 분리된 두 개의 각각의 요소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속해있음’ 안에 내재하는 두 가지의 ‘본질 연관’을 뜻한다. 따라서 어떤 것과 어떤 것이 ‘함께 속해있다’는 것을 ‘속해있음’으로부터 파악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어떤 것과 어떤 것의 ‘함께 속해있음’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상호공속적인 연관관계는 어떤 것 둘이 저 홀로 각각 먼저 존립한 후 그 둘이 필요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이 이미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순사상에서 말해지고 있는 ‘서로 (잘) 산다’라는 ‘상생’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은 ‘상’을 강조해서 ‘생’을 말할 것이 아니라 ‘생’을 통해 ‘상’을 파악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야 진정한 상생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을 통해 근원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어 ‘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로 앞에서 본 ‘사방-세계’에서 드러나고 있다. ‘사방-세계’에서는 ‘속해있음’을 통해 ‘함께’가, 즉 ‘생’을 통해 ‘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이 넷은 따로 따로 존재하다가 결합하는 ‘함께’, 즉 ‘상’을 통해 ‘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원래 ‘근원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음’, 즉 서로 서로 ‘생’을 통해 ‘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넷과 연관된 모든 존재자들도 따로 따로 존재한 후 상(결합)을 통해 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서로 서로의 ‘생’을 통해 ‘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천ㆍ지ㆍ인의 조화로운 상태, 또는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방식인 ‘상생’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리라.
‘서로 (잘) 산다’라는 ‘상생’의 토대는 ‘자유로운 영역’인 ‘세계’, 즉 ‘사방-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상생만이 춤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대개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자기가 아니라 다른 것에서 선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고유한 자기가 아니라 “세인-자기”54)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택한다면, 이때 인간은 ‘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살아갈 때, 무슨 일이 발생할까?55) 그때 인간은 자기 이외의 타인 및 사물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보살피는 삶, 그러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의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고 배려하면서 상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단성’이 요구되는데, 이 결단성이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에선 ‘초연한 내맡김’으로 드러난다.56)
대순사상에 따르면 선천 시대는 상극이 지배하는 시대로서 원한과 재앙이 판을 치고 있는 세계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시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본래 있어야 할 그 자리인 고향이 상실된 시대, 그리고 신이 사라진 궁핍한 시대이다. 이것은 인간이 서양의 형이상학적인 사유, 즉 욕구(Wollen)라는 특징을 지닌 표상적 사유, 모든 존재자를 우리 앞에 세워서 ‘요리 조리’를 하고 처리하는 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 고향으로 가고자 하는 태도, 상실된 신이 자신의 자리에 들어서게 하는 일이야말로 필요하고도 필요한 일 중 하나이다. 물론 대순사상에서는 상제가 개벽을 통해 후천을 만들고 인간은 그것을 따르면 될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개벽된 세상에서 인간이 존중받는 시대가 되려면, 인간은 선천시대의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 자유로운 영역인 세계에 진입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간은 개벽된 후천에서도 선천시대에 사는 인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자유로운 영역 안에 진입해서 새로운 인간, 상생하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을 통해서이다. 말하자면 ‘자신을 해방시킴(Sichloslassen)’과 ‘자신을 관여시킴(Sicheinlassen, 자신을 들어가게 함)’의 ‘동시성’, 즉 동시적 ‘ … 하게 함( … lassen)’에 의해서다.57) 그런데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표상적 사유라면, 이것은 표상적 사유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자유로운 영역’이자 ‘세계’인 ‘회역(Gegnet, 會域)’에 자신을 관여시키는 것을 말하리라.58) 다시 말하면 초연한 내맡김은 표상적 사유로부터 벗어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자가 서로 만나 어울려 놀이하는 ‘회역’에 들어가 그 회역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초연한 내맡김이 이러한 것이라면, 인간은 우선 표상적 사유를 특징짓고 있는 ‘욕구’를 단념해야 할 것, 즉 의욕하지 않아야(비-욕구)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회역’에 자신을 관여시켜 거기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물론 욕구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초연한 내맡김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도 어렵다. 우리가 보듯이 인간 대부분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에 매몰되어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 속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삶의 방식에서는 모두 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본래적인 실존 내지는 자유로운 영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초연한 내맡김의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서만 상생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초연한 내맡김은 표상적 사유의 특징인 욕구로부터 떠나거나 혹은 욕구를 단념하는 태도이며, 이러한 단념 혹은 ‘비-욕구’를 철저히 지킴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놀이하고 있는 ‘자유로운 영역’인 ‘회역’으로 들어가 그 속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욕구 내지는 욕망의 영역을 내던지고 천지만물이 자신의 모습을 찬연하게 드러내면서 서로 서로 어울리면서 놀고 있는 자유로운 영역이자 세계인 회역으로 들어가 그 회역에 머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역에 진입한 인간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회역에서 인간은 어떻게 거주할까?59) 그의 상생의 모습은 무엇일까?
회역에 진입한 인간은 ‘사방’ 안에 거주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인간은 “사방을 그것의 본질 속으로 소중히 보살피는 방식으로”60) 거주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땅을 구원하는 한에서” 거주하고, “하늘을 하늘로서 받아들이는 한에서” 거주하고, “신적인 것들을 신적인 것들로서 기다리는 한에서” 거주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죽음으로서 흔쾌히 맞이할 능력을 … 사용하도록 이끄는 한에 있어서” 거주한다.61) 즉 인간은 “땅을 구원하는 가운데, 하늘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가운데,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가운데”62) 거주한다.
첫째, 인간이 땅을 구원하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땅’은 앞에서 보았듯이 땅과 관련된 모든 것을 ‘돌보고 보호하면서 건립하는 것’이고, ‘구원한다’는 것은 ‘땅을 그것의 고유한 본질에로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 그래서 ‘땅을 착취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복종하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63) 따라서 인간이 ‘땅을 구원하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땅을 땅의 고유한 본질에로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 그러면서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인간이 하늘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하늘’은 앞에서 보았듯이 하늘과 관련된 ‘태양과 달의 운행, 별들의 빛남, 사계절의 변화 등’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늘과 관련된 어떤 것이 스스로 내보이는 것에 ‘응대함’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하늘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하늘이 스스로 자신을 내보이는 것, 이를테면 해와 달의 운행과정 및 별들의 궤도, 또는 사계절의 변화 등에 응대하는 것을 뜻한다.
셋째, 인간이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신적인 것들’은 앞에서 보았듯이 하늘의 모습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신성의 영역으로부터 신들의 말을 인간에게 눈짓하는 사자(使者)들이고, ‘기다린다’는 것은 신성을 눈짓하는 그런 사자들의 소리없는 음성에 ‘관여한다’는 것, 즉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신이 사자들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신성의 거룩한 눈짓에 자신을 내맡기는 태도를 말한다.
넷째, 인간이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죽을 자들’은 누구인가? 인간이다. ‘죽는다(sterben)는 것은 죽음을 죽음으로 수용할 수 있음을 말하는데, 인간만이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동물은 죽음을 죽음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단지 끝날(verenden) 뿐이다’.64) 그리고 ‘인도한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른 인간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을 도외시하지 않고, 그 이웃들이 고유하고 본래적인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소중히 보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넷은 이 넷과 연관된 다른 존재자와 긴밀한 연관관계에 있다. 이를테면 앞에서 보았듯이 사물이 무언가를 모아들인다고 할 때, 그 모아들인 것은 결국 사방과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을 모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연한 내맡김을 통해 자유로운 영역인 회역에 진입한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친밀한 관계, 어깨동무하고 노는 ‘서로’일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모든 존재자의 “존재의 목자”65)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자를 해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것들은 서로 이웃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역에 진입한 인간이 ‘땅을 구원하는 가운데, 하늘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가운데,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중히 보살피면서 거주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이다. 대순사상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후천의 낙원에서 상극을 벗어던진 상생의 이념 내지는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아니 ‘상생의 도’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방식일 것이다.
Ⅳ. 맺는말
본래 근원적인 세계는 ‘사방-세계’이다.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이라는 넷이 하나로 포개져 자신들의 모습을 훤히 드러내는 세계, 서로 어울려 ‘거울-놀이’하는 세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넷은 또한 자신들과 연관되어 있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만나 관계 맺으면서 어울려 놀이하는 장소, 어깨동무하고 노는 곳, 본래 있어야 할 그 자리이다. 아니 자유로운 영역, 회역, 고향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이란 어떤 자일까? 당연히 지구의 주인이 아니며 다른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앞에 세워 닦달하고 에너지를 내놓으라고 주문 요청한다. 세계는 황폐화될 수 밖에 없고, 이런 황폐화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본래 있어야 할 그 자리인 고향은 있을 수 없다. 서로 함께 살아야 할 상생의 자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그의 고향 메스키리히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땅과 하늘 사이에 아직도 인간의 평안한 거주하기가 있을까요? … 인간이 언제나 그 땅에 머무르면서 토속적으로 풋풋하게 살아가는 그런 고향이 있을까요?66)
답은 무엇인가? 고향이 없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평안히 거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잘 사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잘 산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방식대로 사는 것, 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상에서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이러한 실존에서 ‘상생’이란 있을 수 없다. 본래적인 자기가 아니라 ‘세인-자기’로 살아가는 인간은 언제나 ‘격차’ 속에서 시달리기 때문이다.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상극이 지배하는 원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상생’이다.
대순사상에 따르면 ‘상생’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방식’, ‘천ㆍ지ㆍ인의 조화로운 상태’로서 후천시대, 개벽한 새 시대의 원리이다. 그런데 이것을 대순사상에서는 상제가 만들어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상생을 윤리적인 이념으로 내세우면서 실천하라고 한다.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사실 ‘상생’은 고향, 자유로운 영역, 회역, ‘사방-세계’에 있던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다. 굳이 원리라고 표현한다면, 고향에 있지 못한 자들에게 고향에 있고자 하는 원리, 상극의 원리에 지배받고 있는 인간에겐 거기에서 살아야 할 원리이다. 사실 고향은 에너지를 내놓으라고 도처에서 닦달당하는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뽐내면서 본래 있어야 할 자유로운 영역,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어깨동무하고 노는 장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모습을 훤히 드러내는 훤한 밝힘인 열린 장, 존재하는 모든 것이 친밀하게 만나 이웃 관계로 존재하는 회역,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 넷이 하나로 포개져 ‘거울-놀이’하는 ‘사방-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향인 세계가 원래 ‘자유로운 영역’이자 ‘사방-세계’라면, 이 세계에서는 ‘상생’만이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상생’은 여기에서 나타나고, 상생의 토대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순사상에서 말해지고 있는 가치론적이고 윤리적인 이념인 상생의 근거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하나의 질문을 던지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후천 세계가 도래하면 ‘상생’이 이루어질까? ‘상생’이 이루어져 있어 ‘후천 세계’가 도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