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여는 글
내정(內庭)이란 대순진리회의 도장 건물들 가운데 하나다. 이곳은 대순진리회의 창설자인 도전 박우당이 기거하며 집무하는 장소다. 대순진리회 도인들은 도전이 강증산-조정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종통을 계승했다고 신앙한다. 대순진리회 헌법에 해당하는 『도헌(道憲)』에 의하면 ‘도전(都典)’이란 중앙종의회나 포정원ㆍ정원ㆍ종무원ㆍ감사원 위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관(機關)이며, 정산 도주로부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여 대순진리회를 대표하고 영도(領導)하며 대순진리회에 대한 운영 전반을 감독ㆍ지시한다.1) 내정은 바로 그러한 도전이 거주하는 건물이니, 대순진리회의 전반적인 감독과 운영ㆍ통솔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도장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은 신앙의 대상 구천상제를 비롯한 15신위(神位)가 봉안된 신전(神殿)이면서 치성ㆍ강식(降式) 등 대순진리회의 핵심적인 종교활동 중심지인 영대(靈臺), 그리고 구천상제 외 여러 신명을 모신 봉강전(奉降殿)과 대순성전(大巡聖殿)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내정은 구천상제나 천지신명을 모시고 있는 건축물은 아니다. 하지만 대순진리회에서 내정은 선박의 조타실과 같이 종단의 나아갈 바를 정하기에 제반 사항의 결정과 통솔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그 중요도가 높다.
그런데 종단 내부에는 내정이라고 하는 명칭이 어떤 도교 경전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경전의 실체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이 글은 이 문제에 주목하여 내정의 전거로 알려진 문헌이 존재하는지를 추적하고, 그 문헌에서 ‘내정’이라고 하는 용어가 가지고 있었던 원래의 내용과 문맥을 고찰하고자 한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이 글은 Ⅱ장에서 ‘내정’이라는 용어의 출처를 찾고 그 소재 문헌을 밝힐 것이다. Ⅲ장에서는 ‘내정’의 출전 문헌의 발간 경위와 위상을 고찰하며, ‘내정’이라는 용어가 가진 여러 문맥을 분석할 것이다.
이 글은 단순한 문헌 발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몇 가지의 의미를 더 지닌다. 첫째, 대순진리회에서 종통은 ‘도의 생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하지만2) 아직 이와 관련한 연구는 완료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도전의 위상과 의미를 정립하는 것이다.3) 현재 대순진리회가 종통을 구성하는 ‘도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정립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 글이 목적하는 내정 고찰은 이에 대한 하나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는 데에서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대순진리회를 영도ㆍ통솔하는 도전이 기거하는 장소가 왜 내정이라는 명칭을 가지는지, 그 내정이라는 용어가 어떤 내용과 맥락을 담고 있는 것인지 탐구하는 일은 이것에 접근하는 하나의 추가적인 통로를 더 제공해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대순진리회와 도교와의 친연성은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한 연구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대개 다루어지곤 하는 연구 주제들은 신선 개념, 술법, 해원(解冤), 윤리, 이상세계 등이었다.4) 그러나 이들 가운데 여조신앙(呂祖信仰)과의 관련성을 다룬 것은 없다. 또 도교 수행의 핵심인 내단술(內丹術)이 대순진리회의 어느 지점에서 언급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연구도 부족하다. 이 글은 명대 이후의 근현대 도교, 그 가운데서도 여조신앙과 난단도교(鸞壇道敎)가 대순진리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특히 여조(여동빈)가 강조하는 수화교구(水火交媾)의 내단 수행이 ‘내정’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것이다. 내단학과 대순진리회의 접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이 글이 갖는 의의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대순진리회는 그 역사가 백 년이 넘어가지만,5) 아직 그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종단사가 발간된 적이 없다. 현대 한국종교에서 대순진리회가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면 종단사 발간은 시급한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분규와 더불어 무엇보다 자료 확보의 문제 때문이다. 내정의 문헌 근거를 밝히는 이 글의 작업은 대순진리회 종단사 기술에 필요한 하나의 자료를 구축하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Ⅱ. ‘내정(內庭)’의 문헌 출처
내정(內庭)은 ‘궁궐 안쪽’이라는 뜻이다.6)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의 실록에도 궁궐의 안을 내정으로 표기했던 사례를 종종 확인할 수 있다.7) 1758년에 발간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기록, 즉 성복제(成服祭)를 마친 후 ‘병조(兵曹)는 제위(諸衛: 왕실 종친 등으로 구성된 군사들)를 통솔하여 내정(內庭)과 외정(外庭)의 동쪽과 서쪽 및 내문(內門)과 외문(外門)에 군사를 벌여 세운다’8)는 서술은 내정이 궁궐 안, 외정이 궁궐 밖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내정이 단순히 궁궐 안이라는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궁궐 안에는 임금이 살고 임금은 나라를 통치하기 때문에, 내정은 곧 정사(政事)와 통치를 상징하는 개념이기도 했다. 그 유래는 삼천 년 전의 주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에는 삼조(三朝)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임금이 대궐 안에서 정사(政事)를 보는 장소인 내조(內朝), 임금이 정사를 보거나 휴식을 취하는 곳인 연조(燕朝), 신하들이 궁 밖에서 정사를 보는 곳인 외조(外祖)였다.9) 삼조 중에서 내조와 연조, 즉 임금이 일상 정무(政務)를 살피고 기거하는 곳은 내조(內朝)로 통칭되었으며,10) 이 내조가 바로 내정(內廷) 혹은 내정(內庭)이었다.11)
이처럼 내정(內庭=內廷)은 구중궁궐의 깊숙한 안쪽 공간이면서 동시에, 임금이 거주하고 정사를 돌보는 곳이다. 이 의미는 종통을 계승하고 종단을 통솔ㆍ감독ㆍ운영하는 도전이 머무는 건물의 명칭이 내정인 것과 부합한다.
그런데, 내정은 별도의 문헌적 근거가 있다는 이야기가 종단 내부에서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필자가 이 사실을 처음 전해 들은 것은 1991년 혹은 1992년 정도로 기억한다. 당시 부산에서 ○○방면의 수임선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는 여동빈의 종조가 쓴 책에 ‘구사(龜蛇)12)는 반내정(蟠內庭)하고 오토(烏兎)가 배일월(拜日月)이라’는 구절이 대순진리회 내정의 문헌 근거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근거 문헌이란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또 구체적인 내용과 뜻은 어떤 것인지를 들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2004년 5월, 필자는 대순진리회의 원로 임원들로부터 내정이라는 용어가 여동빈을 신선으로 만든 종조의 계서에 적혀있는 ‘구사는 반내정하고 옥토는 대일월하고’란 글귀에서 유래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서적에는 ‘용법구도(用法求道: 법을 쓰고 도를 구함)이면 구도불란(求道不亂: 도가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음)이라. 이도구선(以道求仙: 도로써 신선을 구하고자 함)이면 선역심이(仙亦甚易: 또한 신선되기가 쉽다)’란 글귀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듣게 되었다.
내정의 출전이라고 알려진 여동빈 종조의 계서란 어떤 책을 지칭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필자는 2008년 5월 원로 임원들을 재차 인터뷰하였다. 그때 또다시 들은 이야기는 내정이라는 명칭이 ‘여동빈을 신선으로 만든 종조의 계서’ 속에 든 글귀 ‘구사 반내정 옥토 대일월’로부터 유래했다는 것, 그 문헌의 제목이 계서(戒書)란 것 외에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는 것과 그 문헌을 잃어버려 찾을 수 없다는 것, 그 문헌에는 ‘用法求道 求道不亂 以道求仙 仙亦甚易’라는 문구가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여동빈을 신선으로 만든 종조란 종조(鍾祖), 즉 여동빈의 스승인 종리권(鍾離權)을 가리킨다. 도교에서는 종리권과 여동빈을 각각 종조(鍾祖)와 여조(呂祖)라고 부르고, 이들을 묶어서 종려(鍾呂)라고 하며, 이들이 전한 내단술을 종려금단도(鍾呂金丹道)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종리권이나 여동빈 혹은 이 둘을 묶은 종려를 저자로 하는 서적들을 뒤진다면, 내정의 전거가 되는 문헌이 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필자는 종리권ㆍ여동빈(종려)을 대표하는 3권의 서적인 『영보필법(靈寶畢法)』ㆍ『종려전도집(鍾呂傳道集)』ㆍ『서산군선회진기(西山群仙會眞記)』13)를 비롯하여, 『고효가(敲爻歌)』,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 『여조황학부(呂祖黄鶴賦)』, 『여조정기가(呂祖鼎器歌)』, 『여조백자비(呂祖百字碑)』, 『여조사삼니의세설술(呂祖師三尼醫世說述)』, 『여조진경가(呂祖真經歌)』, 『여조비원춘단사(呂祖泌園春丹詞)』, 『순양연정부우제군기제진경(純陽演正孚佑帝君既濟真經)』, 『파미정도가(破迷正道歌)』 등 여러 자료를 두루 훑었으나 내정이 등장하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출처를 확인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곳은 바로 『여조전서(呂祖全書)』 속에 휘집(彙集: 종류에 따라 묶음)되어 있었던 『전팔품선경(前八品仙經)』의 「오행단효 품제이(五行端孝品第二)」편에서였다. 거기에는 내정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었다(<그림 1> 참조).
위 인용문 가운데 보이는 ‘오토결중곡(烏兎結中谷) 구사반내정(龜蛇盤內庭)’이라는 글귀는 필자가 1991(1992?)년에 처음 들었던 ‘구사반내정(龜蛇蟠內庭) 오토배일월(烏兎拜日月)’, 2004년과 2008년에 재확인했던 ‘구사반내정 옥토대일월’과 다르다. 그러나 필자는 위 인용문의 글귀가 구전되어 온 내정의 출전인 것으로 판단했다. 그 이유는 오래전의 기억을 전달하는 과정에 글자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정’이라는 용어를 담은 문헌에 ‘用法求道 求道不亂 以道求仙 仙亦甚易’라는 글귀가 들어있다는 원로 임원들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정’이라는 글귀를 싣고 있다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문헌에는 반드시 이 문구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조전서』 속에는 『여조전서수진전도집(呂祖全書修真傳道集)』이라는 묶음의 경전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논진선 제일(論真仙第一)」편에는 이 문구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그림 2> 참고).
呂祖曰: 鬼仙固不可求矣, 天仙亦未敢望矣. 所謂人仙, 地仙, 神仙之法, 可得聞乎?
鍾祖曰: 人仙不出小成法, 凡地仙不出中成法, 凡神仙不出大成法. 此三成之數, 其實一也. 用法求道, 道固不難. 以道求仙, 仙亦甚易.
여조(여동빈)가 말했다: 귀선(鬼仙)은 진실로 구하기 어렵습니다. 천선(天仙) 역시 감히 바랄 수 없습니다. 이른바 인선(人仙)ㆍ지선(地仙)ㆍ신선(神仙)이라는 단계에 이르는 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종조(종리권)가 말했다: 인선(人仙)이란 소성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무릇 지선(地仙)은 중성법을 벗어나지 않고, 신선(神仙)은 대성법을 벗어나지 않는다.14) 이 세 가지 성법은 실제로는 하나다. 법을 쓰고 도를 구하면 도는 진실로 어렵지 않다. 도로써 선(仙)을 구하면 선(仙)(에 이르는 것이) 역시 매우 쉬운 것이다.
한두 글자의 불일치를 감안하더라도, 『여조전서』는 ‘用法求道 求道不亂 以道求仙 仙亦甚易’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이것은 『여조전서』가 내정의 전거임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다.
물론, 이 글귀는 『여조전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문구는 「논진선 제일」편에 실린 것이고 「논진선 제일」편은 『종려전도집』에도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종려전도집』 역시 이 문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종려전도집』에는 ‘내정’이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내정’이라는 단어를 포함하면서도 ‘用法求道 求道不亂 以道求仙 仙亦甚易’까지 담고 있는 문헌은 오직 『여조전서』 뿐이다.
『여조전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었던 ‘신병가약(身病可藥) 심병난의(心病難醫)’의 출전이기도 하다. 도전은 “여동빈도 ‘몸의 병에는 약이 있으나 마음의 병은 고치기 어렵다(身病可藥 心病難醫)’라 하였고 … 마음이 내 몸을 좌우한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훈시를 내린 적이 있는데,15) 여기에서 여동빈이 말했다고 하는 ‘신병가약 심병난의’는 오직 『여조전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그림 3> 참고).
道心要堅, 存心要實, 若不堅不實, 則有外魔糾纏, 縱於道有緣, 亦多生障礙.
論琴訓, 喬以恕云 : “琴之爲道, 皆具伭妙! 但鼓奏之時, 心要靜曠, 氣要和平, 指要安閒, 不著於身, 不著於物, 不著於境, 並不著於琴. 默出此心, 與太虛打成一片, 則隨指所奏, 皆爲太古之音! 若徒搬弄新聲, 悅人聽聞, 便靡曼淫褻, 去琴道遠矣!”
身病可藥, 心病難醫. 外魔可降, 內魔難制. 誤信妖言, 頓生妄想, 妄想生因, 因生障礙, 障礙不已, 遂有魔頭. 魔久住舍, 廼肆簸弄, 使之夢想, 顛倒錯亂, 或起恚恨, 或興咒詛, 或毀正道, 或恣邪說, 大則亡家, 小則滅性, 縱能悔悟, 旋復迷惑, 如是等爲, 無有終極.
我悲衆生, 爲作醫王, 療其心病, 服其內魔. 心病既除, 無所身病, 內魔克凈, 外魔焉侵. 若不攻心, 病入膏肓. 魔熾於內, 外魔孔彰. 汝等靜思, 可以偕臧.
도심(道心)은 견고함을 요구하고, 존심(存心)은 충실함을 요구한다. 만약 견고하지 않고 견실하지 않으면 외마(外魔)에 구애됨이 있으니 설령 도에 인연이 있더라도 지장이 대거 생긴다.
금(琴: 거문고)의 뜻을 논하며 교이서(喬以恕)가 이렇게 말하였다: “금(琴)이 도(道)를 이룸은 다 현묘함을 갖추었기 때문일진저! 다만, 연주할 때는 마음이 고요하고 밝아야[靜曠] 하고, 기(氣)는 화평해야 하며, 손가락[指]은 편안해야만 한다. 일신에 나타내지 않으며, 외물에 나타내지 않고, 외경에 나타내지 않으면, 금(琴)에도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을 묵묵히 내어서 태허(太虛)와 더불어 한 조각(의 소리)을 이루어낸다면[打成], 손이 가는 데 따라 연주되는 것이 모두 태고의 소리가 되는 것이라! 만약 한갓 새로운 소리나 희롱하여 타인의 이목을 즐겁게 하려고 한다면, 화려하고 음란하여 금(琴)의 도와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몸의 병에는 약이 있으나 마음의 병은 고치기 어렵다. 외마(外魔)는 제거할 수 있지만, 내마(內魔)는 제거하기 어렵다. 요망한 말을 잘못 믿으면 망상이 갑자기 생기고, 그 망상은 원인을 만들어 장애를 생성하니, 장애가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마두(魔頭)가 된다. 마가 오래 머물러 희롱을 자행하고 몽상(夢想)을 일으키게 하여, 엎어지고[顛倒] 착란하여 때로는 분노와 원한을 일으키고, 때로는 저주를 일으키며, 때로는 정도(正道)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때로는 사설(邪說)을 자행하니, 크게는 집안을 망치고 작게는 천성을 잃게 된다. 설령 뉘우치고 반성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미혹되어 그와 같은 행위를 (반복하여) 끝이 없게 된다.
나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의왕(醫王)을 세워서 그 심병(心病)을 치료하게 하고 그 내마(內魔)를 다스리게 하였다. 마음의 병이 제거되고 나면 몸의 병도 사라지게 되고, 내마가 평정되고 나면 외마도 물러나게 된다. 만약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병이 가슴 속 깊이[膏肓] 들어가고, 마가 내부에서 번성하면 외마가 크게 드러나게 된다. 너희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라. 그러면 가히 좋아질 수 있을 것이다.
위 인용문은 『여조전서』 속에 들어있는 경전들 가운데 『함삼어록(涵三語錄)』의 내용 중 일부다. 도전은 여기에 등장하는 ‘신병가약(身病可藥) 심병난의(心病難醫)’를 인용하여 훈시하고 있다. 이로 볼 때 도전 역시 『여조전서』의 존재와 내용을 알고 있었으며, 그 가치와 신빙성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조전서』는 어떤 문헌인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여조전서』 속에 묶인 경전들 가운데 『전팔품선경(前八品仙經)』은 ‘내정’이라는 단어를 어떤 내용과 맥락 속에서 말하고 있는가? 다음 장에서 이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Ⅲ. 『여조전서』의 ‘내정’이 가진 맥락
여조 즉 여동빈(呂洞賓)의 출생 연도는 796년 혹은 798년이라고 하고 638년이라는 말도 있는데, 대개는 당나라 후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승 종리권[鍾祖]을 만나 도를 얻고, 서안 남쪽의 종남산(終南山)16) 등지에서 두루 수도한 끝에 강서성 여산(麗山)17) 선인동(仙人洞)에서 신선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승천하지 않고 속세에 남아 백성을 모두 구제하여 천상계에 오르도록 돕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다.
그 후 여동빈은 몰래 속세에 나타나 백성의 소원을 들어주며 도를 구하는 자에게 신선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믿어졌다.18) 이 때문에 그는 점점 인기가 올라가 북송 시절인 1119년에는 묘통진인(妙通眞人)으로 봉해졌고, 원나라 시절인 1269년에는 순양연정경화진군(純陽演正警化眞君)으로, 1310년에는 순양연정경화부우제군(純陽演正警化孚佑帝君 또는 純陽孚佑帝君)으로 칙봉(勅封) 받았다. 이때부터 여동빈은 순양부우제군 혹은 부우제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우(孚佑)’란 『서경』 「탕고편(湯誥篇)」에서 따온 것으로 ‘백성을 도와준다[上天孚佑下民]’는 뜻이다.19) 백성을 제도하고 신선술을 가르치며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동빈은 지금도 중국에서 관우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숭배 대상이며, 중국의 각 도관에서는 여동빈의 생일로 알려진 음력 4월 14일이 되면 그를 기념하는 성대한 의례[齋醮科儀]를 개최한다.
중국 도교사에서 여동빈이 갖는 위상과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오늘날 중국 도교의 8할 이상을 차지하는20) 전진교(全眞敎)가 숭상하는 오조(五祖) 가운데 한 명이 여동빈이라는 점에 있다. 전진교의 창시자 왕중양(王重陽, 1112~1170)을 가르친 스승 가운데 한 명도 여동빈이었다고 하며, 왕중양과 여동빈을 포함하여 유해섬(劉海蟾), 종리권, 동화제군(東華帝君) 다섯 명은 전진교의 종조[全眞五祖]로 알려져 있다.21)
전진교가 여동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왕중양의 스승이라는 사실 외에도, 심(心)과 기(氣)를 동시에 닦아야 한다는 성명쌍수론(性命雙修論)을 뚜렷하게 부각하고 내단술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점 때문이다.22) 성명쌍수에서 성(性)과 명(命)에 대한 설명은 종교마다 다르다. 도교의 경우는 대개 성(性)이 인간의 정신ㆍ의식ㆍ심성(心性)ㆍ이성(理性)ㆍ신(神)을 의미하고, 진의(眞意) 혹은 진신(眞神)이라고도 불리며, 인간의 정수리와 하늘[天]에 해당한다고 본다. 도교 내단학에서 신(神)은 외재적 존재인 신명(神明)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가리키는 개념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명(命)은 생명ㆍ형체ㆍ형(形)을 의미하고, 원정(元精) 혹은 원기(元氣)라고도 불리며, 인간의 배꼽과 땅[地]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명(性命)은 천지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성(性)을 닦는 것은 심신(心神: 마음과 정신)을 닦는 것이며, 명(命)을 닦는 것은 정기(精氣)를 닦는 것이고, 성과 명을 동시에 닦음[性命雙修]으로써 천지와 하나가 된다고 본다.23) 여동빈은 이러한 내단학 이론을 구축한 인물로 인정받기에, 중국 도교사에서 그 위상이 높다.
둘째는 백성 곁에 머물면서 수시로 나타나 그들을 ‘부우’하는 신선으로 숭상되는 대표적인 존재가 여동빈이라는 점에 있다. 중국에는 여덟 명의 신선[八仙]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이 있고, 이 신선들은 희극이나 설화의 소재로 종종 등장하는 등 인기가 높다. 이 가운데서도 백성 구제라는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신선이 바로 여동빈이다. 원래 신선은 세속의 일에 관계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여동빈은 백성 옆에서 그들과 같이 호흡하며 어려움을 도와주는 신선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여동빈이 대순진리회와 만나는 접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술한 대로 여동빈은 민중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웠고 백성을 구제하며 신선술을 가르치고 소원을 들어주는 일을 한다고 믿어졌다. 증산은 이를 인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의 일은 여동빈(呂洞賓)의 일과 같으니라. 그가 인간의 인연을 찾아서 장생술을 전하려고 빗장사로 변장하고 거리에서 이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흰 머리가 검어지고 굽은 허리가 곧아지고 노구가 청춘이 되나니 이 빗 값은 千냥이로다고 외치니 듣는 사람마다 허황하다 하여 따르는 사람이 없기에 그가 스스로 한 노구에게 시험하여 보이니 과연 말과 같은지라. 그제야 모든 사람이 서로 앞을 다투어 모여오니 승천하였느니라.”24)
증산이 해원을 위주로 세상을 개벽하는[天地公事] 종교활동을 하던 당시에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를 ‘광인(狂人)’이라 불렀다.25) 이에 증산은 자신이 하는 일을 여동빈의 경우와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 일화는 그가 여동빈의 백성 구제와 신선술 전수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셋째는 백성을 ‘부우’하는 구제자로서의 여동빈 신앙이 송ㆍ원ㆍ명ㆍ청을 거치며 민간에 널리 유행하면서 여조(呂祖) 난단도교(鸞壇道敎)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그 신앙이 여조(呂祖) 강계신앙(降乩信仰)이며,26) ‘내정’을 실은 『전팔품선경』 등의 저서들을 모아 『여조전서』가 편찬된 것도 이 신앙 때문에 가능했다. 이 역시 여동빈과 대순진리회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접점이다.
강계신앙의 강계(降乩)란 부계(扶乩), 부란(扶鸞), 부기(扶箕), 기선(箕仙), 강필(降筆)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것은 강신술(降神術)의 일종으로서, 복숭아나무(혹은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Y자(혹은 T자) 모양의 붓[계필(乩筆) 혹은 난필(鸞筆)이라 한다]을 모래판[沙盤] 위에 두고, 특정한 신을 부르면 그 신이 내려와 붓을 움직여 문자 혹은 그림을 그림으로써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이다.27) 흔히 이 강신술은 중국의 대표적인 측간 귀신[廁神] 자고(紫姑)로부터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28) 자고는 원래 산서성 지사의 첩이었는데 본처의 질투를 받아 정월 15일에 변소에서 살해를 당했으며, 천제는 이를 불쌍히 여겨 자고를 측신으로 삼았고, 이로부터 중국에는 5~6세기 남조(南朝)부터 정월 보름이 되면 여성들이 측간에 자고의 인형을 만들어놓고 그를 불러내 점을 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29) 명청대 지식인들은 이 풍습의 자고 인형을 계필(乩筆)로 바꾸고, 그 붓에 자고를 비롯한 여러 신이 내려오게 하여 붓을 움직이도록 유도함으로써 계시[乩語]를 받는 방식으로 비밀스러운 지식을 쌓았다.30)
이런 강신술은 중국 광동성과 복건성, 대만 등지에서 지금도 성행하고 있다.31) 세계 곳곳에는 이와 유사한 강신술이 여럿 존재한다. 조선 후기의 이규경(李圭景, 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붓이 신을 받아 저절로 움직여 그림이나 글씨를 써내는 필점(筆占)에 대해 적은 바 있고,32) 민속에도 강신을 통해 점을 치는 ‘춘향이놀이(춘향각시놀이)’33)란 것이 있었다. 현대 일본과 한국 청소년들 사이에 잘 알려진 ‘분신사바’34)와 ‘여우창문(狐の窓)’35), ‘손님대접’36), ‘구석놀이’37), 그리고 유럽 집시들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심령 대화술 ‘위저 보드(Ouija Board)’38),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 있는 ‘찰리찰리 챌린지(Charlie Charlie challenge)’39)도 강계와 유사한 강신술의 일종이다.
중국에서 강계는 명ㆍ청을 거치면서 종교단체를 구성하여 하나의 신앙으로 발전한다는 데에 중요한 특징이 있다. 원래 중국의 강계는 자고가 내림하여 비밀스러운 사실을 알려주는 형태였으나, 명말 청초부터 몇몇 중국 지식인들은 자고 외의 다른 신이나 신선들의 강림을 유도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이 현상을 ‘수경천교(垂經闡敎)’ 또는 ‘비란행화(飛鸞行化)’라고 부른다. 이럴 때는 대개 그 강림하는 신이나 신선을 숭상하는 신앙공동체가 결성되곤 했다. 그 단체를 계단(乩壇), 난단(鸞壇), 선당(善堂)이라고 하며, 근현대 중국에 교세를 확장했던 일관도(一貫道), 동선사(同善社) 등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대개 난단도교(鸞壇道敎)로 알려져 있다.40)
명말 청초에 강계를 통해 초청된 신선들 가운데 한 명은 여동빈이었다. 그를 신앙하는 일단의 지식인들은 강계로써 그를 초청하여 가르침을 받고 경전을 만들었다. 이로써 여동빈이 강계로써 가르침을 전했다고 하는 경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경전들은 여동빈이 비란강시(飛鸞降示)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는 신앙, 즉 여동빈 강계신앙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41)
‘내정’이라는 용어를 실은 『전팔품선경』은 이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전팔품선경』은 여동빈이 난단의 계필에 내림하여 계시로써 전해주는 방법인 강계로 전한 경전인 것이다. 대순진리회의 원로 임원들은 ‘내정’의 출전이 종조의 ‘계서’라고 하였고 그 계서란 ‘戒書’라고 하였는데, 실은 강계 혹은 부계로 전해진 서적이라는 의미에서 戒書가 아니라 ‘乩書’가 아니었나 싶다. 강계나 부계는 부란(扶鸞)으로도 불리기 때문에 계서(乩書)는 난서(鸞書)라고도 불린다. 여동빈의 계서(혹은 난서)들에는 여동빈 즉 여조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그 스승인 종조도 같이 출현하여 가르침을 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대순진리회의 원로 임원들이 ‘여동빈을 신선으로 만든 종조의 계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게 아닌가 한다.
『전팔품선경』과 『여조전서』는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전팔품선경』의 「합각팔품선경원서(合刻八品仙經原序)」에 의하면,42) 명나라 말기인 만력 17년(1589)부터 천계(天啓) 6년(1626) 사이에, 중국 광릉(廣陵)의 만점(萬店) 집선루(集仙樓)43)에서 여동빈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여 부계(강계)를 통해 여동빈으로부터 「태극화육 품제일(太極化育品第一)」과 「오행단효 품제이(五行端孝品第二)」를 받았다고 한다. ‘내정’은 이 두 계서 가운데 「오행단효 품제이」에 실려 있다. 그러니까 ‘내정’이라는 용어는 1589년부터 1626년 사이에 광릉 만점 집선루에서 여동빈의 계시로 출현했다는 뜻이다.
또 금릉(金陵, 난징) 지역에서 「성제도인 품제삼(誠悌導引品第三)」과 「정충시교 품제사(正忠示教品第四)」, 비릉(毘陵, 강소성 창저우시[常州市]) 지역에서 「신보달도 품제오(信寶達道品第五)」, 신주(信州, 강서성 상라오시[上饒市]) 지역에서 「보정고명 품제육(保精固命品第六)」과 「기합현원 품제칠(氣合伭元品第七)」, 임강(臨江, 강서성 린지앙진[臨江鎭]) 지역에서 「신화무위 품제팔(神化無爲品第八)」이 여조 신앙인들에 의해 각각 계서로 저술되었다. 이러한 8종의 계서는 순서가 없는 것이었으나, 여조 신앙인들은 그 계서들에 1품에서 8품까지 순서를 달아서 하나로 모았고, 그 묶음집을 『태상여조개천황극증진합벽동묘선경(太上呂祖開天皇極證眞闔闢洞妙仙經)』이라고 불렀다. 이를 간단히 줄여서 『팔품선경』(혹은 『팔품경』)이라고 한다. 이 합본이 완성된 시기는 1626년 이후부터 1700년대 초기 사이다.44)
그런데 또 다른 여조 신앙인인 서태극(徐太極)이 『팔품선경』을 『전팔품선경(前八品仙經)』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임강 지역에서 강필로 받았던 『여조부우연정경화선설수선증진환단비묘선경(呂祖孚佑演正警化宣說修仙證眞還丹祕妙仙經)』이라는 긴 이름의 경전을 『후팔품선경(後八品仙經)』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45) 『후팔품선경』은 진위 논란에 휩싸여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차차 그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지금은 처음의 합본집인 『팔품선경』을 『전팔품선경』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 외에도 또 다른 지역의 여조 신앙인들이 여동빈의 계서를 더 만들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작업이 청나라 강희 18년(1679)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강희 41년(1702) 사이에 호북성 강하현[江夏縣城, 武漢市 武昌區] 함삼궁(涵三宮, 또는 涵三壇, 涵三道院이라고도 함)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46) 이들이 강필로 받은 계서가 『함삼어록(涵三語錄)』이었고, 이 서적에 도전이 여동빈을 인용하여 훈시했던 ‘신병가약(身病可藥) 심병난의(心病難醫)’가 실려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명대 후기부터 청대 사이에는 여동빈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강필로 여조의 가르침을 담은 도교 경전들을 만들고 있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여동빈을 흠모하고 있던 유체서(劉體恕)란 사람이 등장하여 광릉 만점의 집선루와 강하의 함삼궁을 비롯하여 호북 무창(武昌)의 옥황각(玉皇閣), 소주(蘇州)의 옥단(玉壇), 호주(湖州)의 운소정사(雲巢精舍)와 운이초당(雲怡草堂), 송강(松江)의 옥청단(玉清壇) 등지의 여조를 신앙하는 도교 단체[呂祖乩壇]를 두루 방문하여 계서들을 휘집(彙集)하고, 또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던 여동빈의 일부 서적까지 추가하여 건륭 9년인 1744년에 32권 본의 『여조전서』를 처음으로 간행하였다.47) 실제 출판은 여기에 불교 서적인 『선종정지(禪宗正指)』가 부록으로 1권 추가된 33권 본 형태였다. 『여조전서』의 출판에 참여한 이들은 유서체 외에도 황성서(黃誠恕), 유윤성(劉允誠), 유음성(劉蔭誠) 등이었는데, 이들은 여동빈을 신앙하는 유가의 지식인들이었다.48)
유체서 등에 의해 1744년에 처음 간행된 『여조전서』는 1775년에는 64권 본으로 그 분량이 늘어나 재간행되었다. 그 후에는 다시 18권 본의 『여조전서종정(呂祖全書宗正)』이라는 이름으로 소주 지역에서 세 번째로 발행되었다가(간행년 미상), 가경 8년(1803)에 북경의 여조신앙 난단도교 교단인 각원단(覺源壇)의 장여포(蔣予蒲, 1756~1819)가 16권 본으로 해서 동명(同名)의 『여조전서정종(呂祖全書正宗)』을 또 간행하였다.49) 김윤수는 장여포의 16권 본 『여조전서정종』이 간행된 시기가 1803년이 아니라 1801년이며, 서적의 이름도 『여조전서종정집성(呂祖全書宗正集成)』이라고 말한다.50)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1744년 최초 발간 이후 『여조전서』는 단독으로 혹은 총서(叢書)에 흡수된 상태로 여러 차례 간행된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여조전서』는 1744년의 32권 본, 1775년의 64권 본, 36책의 『장외도서(藏外道書)』 가운데 7책에 들어가 있는 형태(32권 본), 20책의 『중화속도장(中華續道藏)』(1982) 가운데 19번째(32권 본)와 20번째 책(64권 본)에 들어가 있는 형태51)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여조전서』는 일부가 발췌되고 다른 경들과 뒤섞여 출판되기도 했다. 함풍 원년(1851)에 간행된 『여조휘집(呂祖彙集)』이 하나의 사례인데, 이 문헌의 권7과 권8은 ‘내정’의 전거인 『전팔품선경』이고, 권29는 ‘신병가약 심병난의’의 출전인 『함삼어록』이다.
『여조전서』를 기본으로 한 여동빈 서적 모음집 출판은 한국에서도 이루어졌다. 고종 연간에 서울을 중심으로 강계로써 경전을 만들어 활동했던 무상단(無相壇)52)의 도사 청련자(淸蓮子) 유운(劉雲, 1821~1886)53)이 1881년에 32권 본의 『여조전서』 일부와 도교 자료들을 편집하여 8권 분량의 『중향집(衆香集)』54)을 간행하였던 것이 그 한 사례다. 『중향집』의 권3에는 ‘내정’의 전거 『팔품경』(『여조전서』의 『전팔품전경』)이, 권5에는 ‘신병가약 심병난의’의 전거 『함삼어록』이 수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순진리회의 내정 명칭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문헌에는 ‘用法求道 求道不亂 以道求仙 仙亦甚易’라는 문구를 실은 「논진선 제일」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여조휘집』과 『중향집』에는 이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문헌은 대순진리회의 원로 임원들이 언급했던 서적들이 아니다. 이 문구를 포함하면서 ‘내정’의 출전 『전팔품선경』, 그리고 ‘신병가약 심병난의’의 출전 『함삼어록』을 동시에 수록한 문헌은 오직 『여조전서』뿐이다. 대순진리회의 내정 명칭과 관련이 되는 문헌을 『여조전서』로만 보아야 하는 이유다. 다만 『여조전서』라도 출판 형태가 다양하여, 어떤 판본으로 언제 출판된 『여조전서』가 직접적인 전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중국 도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정받고 영향력이 큰 『여조전서』는 1744년에 처음으로 간행된 32권 본이라는 점,55) 중국에도 64권 본보다 32권 본의 출판이 더 많았다는 점, 국내 유통 고서를 수집ㆍ보관하는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인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에 소장된 『여조전서』 3종 가운데 2종이 32권 본이라는 점56)을 감안하면, 대순진리회의 내정과 관련이 있는 문헌은 32권 본의 『여조전서』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여조전서』 가운데 『전팔품선경』이 있었고, 『전팔품선경』 속의 「오행단효 품제이」에는 ‘내정’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전팔품선경』은 인간이 내단(內丹)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는 과정을 8개의 단계[八品]로 설명한 것이다. 그 두 번째 단계[二品]는 오행단효(五行端孝)를 설명한 「오행단효 품제이」다. ‘단효(端孝)’란 예의(禮儀) 바른 효행(孝行)을 뜻하고, ‘오행단효’란 인체 내에서 수화를 포함하는 오행의 움직임을 단련하여 단(丹)을 만들 때는 반드시 먼저 효를 행해야만 함을 의미한다.
「오행단효 품제이」 속에 들어있는 ‘내정’의 문맥을 파악하려면, 그 전체 내용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글의 분량 문제를 고려하여 「오행단효 품제이」의 전체 원문과 해석은 부록으로 옮기고, 여기에서는 줄거리만 풀어본다: ‘(여동빈이 말하기를) “나는 도를 구한 끝에 드디어 신선이 되어 백성을 구제하며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늘로부터 눈먼 중생을 제도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기(氣)를 보존하고 정(精)을 기르고 신(神)을 지켜 진(眞)을 깨쳐야 신선의 세계에 올라가건만, 그러나 여기에 관심이 있는 중생이 얼마나 되랴! 그래도 중생을 위해 그 방법을 알려주리니, 무릇 허망함에 빠지지 말고 명(命, 腎, 水)과 성(性, 乾)을 구하고 정기신(精氣神)을 굳건히 단련하라. 원기(元氣)가 나뉘어 양의(兩儀)가 되고 이로부터 모든 변화가 일어나니, 오행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오행은 곧 성(性)ㆍ정(情)ㆍ기(氣)ㆍ신(神)이고, 그 변화의 도는 수화(水火)의 변화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몸 안의 수화(水火)를 연단(鍊丹)하여 성(性)과 정(情)을 다스리면 기(氣)와 신(神)을 얻는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신선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인도(人道)를 실천해야만 한다. 어버이는 거북과 뱀이 서로 휘감듯 둘러[龜蛇盤旋] 포태(胞胎)하여 나의 육신을 낳아 기르고 성(性)과 정(情)을 건네준 분들이니 건곤(乾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먼저 어버이를 공경하고 그 은혜에 보답해야만 한다. 몸 안의 수화(水火) 두 기운을 순환시켜 인체의 오행을 단련하기에 앞서, 먼저 효를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五行端孝]. 그렇지 않다면 뇌부(雷府)로부터 벼락을 내리는 형벌이 있을 것이다. 이제 중생들은 유불도 삼교(三敎)의 법이 서로 다른 게 아님을 깨닫고, 내가 전하는 수련법을 지극히 하여 장생(長生)을 이루도록 하라.” 여동빈은 이와 같은 말을 마치고 나서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된 주문[咒=呪]을 낭랑히 읊고 수레에 몸을 실어 하늘로 올라갔다’.
‘내정’은 여동빈이 가르침을 준 뒤에 하늘로 오르기 직전 읊었던 오언절구의 주문 속에 있다.
即說咒曰, 北一天地精, 普化於萬靈, 乾坤能轉軸, 龍虎潛眞蹤, 六魔以消盪, 三元景燦明, 烏兎結中谷, 龜蛇盤內庭, 遊行超宇宙, 掌握回死生, 驅掣雷電光, 鬼怪悉潛形, 敢有違逆者, 劈體如纖塵, 慧光所照處, 災厄悉和平, 敬受而誦讀, 名奏於天宮.
그러고는 곧 주문을 읊었다. “북일(北一)은 천지의 정수여서 온갖 영(靈)들이 두루 화(化)하도록 한다. 건곤은 능히 축(굴대)을 돌리니, 용호(龍虎)는 참된 종적[眞蹤]에 잠겨 드는구나. 육마(六魔)는 그로써 소탕되어 삼원(三元)57)의 경관이 찬란하도다. 까마귀와 토끼[烏兎]는 가운데 골짜기[中谷]에서 모이고, 거북과 뱀[龜蛇]은 내정(內庭)에서 휘감는다. (이들이) 움직이고 나아감은 우주를 뛰어넘는 것이요, (이들이) 손에 쥔 것은 죽음과 삶을 돌리는 것이다. (이들이) 몰아서 끌어당기는 것은 번갯불이니, 귀신과 요괴는 모두 숨어버리게 된다. 감히 (귀신과 요괴가) 거역한다면 몸을 쪼개어버리기를 산산이 부서진 티끌처럼 하리라. 지혜의 빛이 이르는 곳마다 재앙은 사라지고 모두가 다 화평해지리라. 공손히 받들어 읊어 읽으니, 이름이 하늘의 궁궐에 도달하는 도다.”
이것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째 부분은 ‘北一天地精, 普化於萬靈’이다. 북일(北一)은 북두칠성일 수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북방의 일(一), 혹은 태일(太一)의 천존이 거주하는 자미원의 중심 북극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북일로부터 이(二)가 나오고 삼(三)이 나와 만물이 자라나니58) 온갖 영(靈)들이 화함을 얻는다는 것이 첫째 부분의 내용이다.
둘째 부분은 ‘乾坤能轉軸, 龍虎潛眞蹤, 六魔以消盪, 三元景燦明, 烏兎結中谷, 龜蛇盤內庭’이다. 위 인용문의 해석을 표면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신령한 동물들인 용과 호랑이[龍虎]가 웅장한 발걸음을 뽐내면서 마(魔)들을 쫓아내고, 까마귀와 토끼[烏兎]는 가운데 골짜기[中谷]에서, 거북과 뱀[龜蛇]은 안뜰[內庭]에서 자리를 잡은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전팔품선경』에서 이 신수(神獸)들은 천상의 궁궐을 지키는 존재라기보다는 내단 수련의 상징물로 묘사되는 존재들이다. 중곡이나 내정 역시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음양ㆍ심신(心神)ㆍ일월ㆍ수화의 어울림이라는 수화교구(水火交媾)의 경지나 상태를 상징한다. 즉, 내단술을 표현한 것이 둘째 부분의 내용이다.
셋째 부분은 ‘遊行超宇宙, 掌握回死生, 驅掣雷電光, 鬼怪悉潛形, 敢有違逆者, 劈體如纖塵, 慧光所照處, 災厄悉和平, 敬受而誦讀, 名奏於天宮’이다. 이 내용은 용호ㆍ오토ㆍ구사가 이리저리 다니면서 우주를 뛰어넘고 생사를 주관하니 귀신과 요괴가 사라지고 재앙이 없어진다는 것이니, 곧 수화교구의 내단술을 통하여 각종 마를 물리치고 신선으로 화함을 상징한다.
우리의 관심은 ‘내정’의 내용과 맥락을 파악하는 데 있으므로, 이 세 부분 가운데 둘째에 집중해야 한다. 다음 절에서 이를 들여다보자.
도교의 수행은 신선이 됨을 목표로 하는데, 여기에는 외단(外丹) 즉 불사의 약[丹藥]을 먹는 방법과 내단(內丹) 즉 인체의 기를 단련하여 몸 안에서 스스로 단(丹)을 만드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외단법에서 단약은 납과 수은을 주요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잘못 만들고 잘못 복용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 실제로 당태종을 비롯한 많은 황제와 지식인들이 단약을 먹고 수은 중독으로 사망하였다.59) 이런 부작용으로 인하여 당 후기부터 송대로 넘어가면서 도교의 수행은 내단법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 시기는 여동빈이 수행하여 신선이 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때와 일치하는데, 전술한 대로 여동빈은 종리권과 더불어 내단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를 짧게 살펴보자면, 종리권과 여동빈은 인체의 심장을 화(火)로, 신장을 수(水)로 간주하고, 그 두 개의 화기(火氣)와 수기(水氣)가 왕복하고 사귀어야 장생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심(心)은 리(離: ☲)ㆍ양룡(陽龍)ㆍ주사(朱砂), 신(神)은 감(坎: ☵)ㆍ음호(陰虎)ㆍ연(鉛: 납)이라고 한다.60) 용(龍: 靑龍)은 동방 목에 해당하는데 목은 화를 생하므로 인체 내의 용은 화(火)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호(虎: 白虎)는 서방 금에 해당하는데 금은 수를 생하므로 인체 내의 호는 수(水)를 상징한다.61) 이런 이유로 내단학에서 용호(龍虎)는 인체 내의 수화(水火)를 의미하고, 이 두 기를 뽑아내 돌리며 형(形)ㆍ기(氣)ㆍ신(神)을 차례로 단련하고 도(道)와 합하면 도를 이룬다[道成]고 한다. 이를 위해 종리권과 여동빈은 심신(心神)과 수화(水火)가 교구(交媾: 서로 어울림)하는 원리를 비롯한 여러 기초 이론을 고안해내었다.62)
앞 절 인용문에서 보듯이 용호(龍虎)에 뒤이어 등장한 오토(烏兎)가 모이는 곳이 ‘중곡’이고, 구사(龜蛇)가 휘감는 장소가 ‘내정’이다. 그러나 ‘중곡’과 ‘내정’은 인체 내의 특정 부위나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인체 속에서 수화를 단련함으로써 내단을 이루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먼저 ‘오토결중곡(烏兎結中谷)’을 살펴보자. 오토(烏兎)는 일월(日月)인 음양을 상징한다.63) 즉 까마귀[烏]는 일(日) 속에 감추어진 음(陰)이며[日中之陰] 혼(魂)이고[日魂玉兔脂], 토끼[兎]는 월(月) 속에 감추어진 양(陽)이며[月中之陽] 백(魄)이다[月魄金烏髓]. 그러므로 까마귀와 토끼[烏兎]가 한 데 자리를 잡아 어울리면 혼백을 능히 제어할 수 있다고 한다.64)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까마귀와 토끼는 가운데 골짜기에서 모인다[烏兎結中谷]’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운데 골짜기인 중곡은 일월인 음양이 모여 합해짐, 곧 음양합덕(陰陽合德)을 상징한다.
대순진리회에서 중곡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것은 도전 박우당이 부산 감천의 태극도장을 떠나 서울에 새로운 도장을 건립한 장소의 이름도 ‘중곡(中谷)’이라는 것이다. 그 새로운 도장은 용마산 배꼽바위 밑에 자리를 잡았으며 지금은 중곡도장(中谷道場)으로 불린다. 풍수로 보면 중곡도장은 여인이 아이를 낳는 은밀한 곳[中谷]의 형상을 한 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중곡도장 바로 위에 배꼽바위가 있다), 음양론에서 여인은 음에 해당하므로 그 터도 음의 기운을 갖는 것으로 본다. 주변의 지세는 신령스러운 말이 음의 터를 감싸 안는 형국이고, 말[午]은 양(陽)을 상징한다. 따라서 음(陰)인 중곡을 양(陽)인 말이 껴안고 어린 생명을 뱃속에 품고 있는 모양의 길한 땅으로 이해된다.65) 이것을 용마포태혈(龍馬胞胎穴)이라고 부르고,66) 이러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새로운 인재들이 무수하게 출현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문무를 겸비한 관원들이 끊임이 없이 나오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부귀공명을 얻는 자손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알려져 있다.67) 이처럼 중곡도장은 풍수로 볼 때 음과 양이 결합된 형국 위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것은 여동빈이 음양이 결합하는 상징을 ‘중곡’이라고 말한 것[烏兎結中谷]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다음으로 ‘구사반내정(龜蛇盤內庭)’을 살펴보자. 구(龜) 거북은 수를, 사(蛇) 뱀은 화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거북과 뱀이 합친다[龜蛇合體]는 것은 수와 화가 사귐으로써[水火交媾]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68) 구사만이 아니라 용호도 수화를 상징한다. 『여조전서』에는 수화를 상징하는 용호와 구사가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들이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그 가운데 몇 개만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는 황아(黃芽: 鉛의 정화로서 금단을 이루게 할 재료)를 낳고, 화로는 단사(丹砂: 汞)를 만든다. 음양은 오채(五彩: 오행)를 불리고, 수화(水火)는 삼화(三花: 精氣神)를 제련한다[水火煉三花]. 솥 안에 龍이 虎를 내려오게 하고, 항아리 안에 龜가 蛇를 풀어놓는다[鼎內龍降虎, 壺中龜遣蛇]. 공이 이루어지면 속세를 벗어나게 되니, 자연히 즐거운 연하(煙霞: 신선 세계)가 있게 된다.69)
하늘은 원기(元氣)를 낳아 삼재(三才: 陰ㆍ陽ㆍ中和)로 변하니, 음양이 교감하여 성태(聖胎: 金丹)를 맺는다. 龍虎가 순행하니 음귀(陰鬼: 불사를 방해하는 陰)가 나가고, 龜蛇가 역행하니 화신(火神: 장생을 이루는 純陽)이 온다. 영아(嬰兒: 金丹)는 날마다 취해지는 것으로 황파(黃婆: 精氣 운행을 다스리는 意念)의 정수이고, 타녀(奼女: 정제된 수은)는 때때로 거두어지는 것으로 백옥(白玉: 純陽)의 잔이라. (수련을) 성공하면 자연히 신선 세계에 머물게 되는데, (이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며 윤회하며 산다.70)
소위 성(性)이라는 것은 목이며 홍(汞: 수은)이며 神이며 화이며 龍이며 蛇이다. 소위 정(情)이라는 것은 금이며 연(鉛: 납)이며 精이며 수이며 虎이며 龜이다. 비유해서 말하겠다. 神이 精을 돌리니 精은 氣로 변한다. 금으로 목을 다스리니 목이 재(材)가 된다. 龍을 휘몰아 虎를 쫓으니, 龍虎가 서로 사귄다. 이로써 心이 身을 감싸 안으니, 心身이 합쳐서 크게 평안해진다. 이로써 情은 性으로 돌아오고, 性情은 화합하여 편안해진다. 이로써 鉛은 汞으로 돌아오고 鉛汞은 친밀해져 떨어지지 않는다. 이로써 龜는 蛇와 이어져 龜蛇가 휘감아 두른다[龜蛇盤旋].71)
용호와 구사가 모두 수화를 상징하지만, 대개 내단술에서 용호는 인체 내의 수화가 서로 화합하여 들어가는 진입 과정과 그 이후의 단계를 지칭하고, 구사는 수화의 화합이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어 완성된 단계를 지칭한다는 데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여동빈이 말한 ‘구사반내정(龜蛇盤內庭: 구사가 내정에서 휘감는다)’은 내단학에서 구사로 상징되는 인체 내의 수화가 만남을 이룬 모습 혹은 그 경지를 ‘내정’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동빈은 까마귀와 토끼의 만남[烏兎結]인 음양의 만남을 ‘가운데 골짜기[中谷]’이라고 한 데 대비하여, 거북과 뱀의 만남[龜蛇盤]을 ‘안뜰, 안쪽 정원[內庭]’으로 읊었다. 음양과 만남과 수화의 만남은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중곡[가운데 골짜기]과 ‘내정[안뜰]’은 상징적 의미로서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안뜰인 ‘내정’이 구사합체(龜蛇合體)의 수화교구이므로, 이것은 여동빈이 말한 현관(玄關=玄牝)이나 장백단(張伯端)이 말한 신기혈(神氣穴)과 상응한다. 현관과 신기혈은 신선이 되기 위해 감리(坎離), 즉 수화의 정기를 인체 내에서 반드시 만나게 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체 내의 특정한 부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수화교구 자체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72)
현관과 신기혈 외에, 단을 단련하는 단전(丹田) 역시 수화교구를 나타낸다.73) 단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내단학은 이것을 인간의 몸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째는 머리 부분(혹은 양미간)의 상단전(上丹田)으로서 뇌를 의미한다. 이 속에는 높은 산봉우리가 있고 그 한가운데 호수가 있으며, 호수 속에는 9개의 방[九宮]을 가진 궁궐이 있고 거기에 니환구진(泥丸九眞)이라는 아홉 진인(眞人)이 산다고 한다. 둘째는 가슴 부위인 중단전(中丹田)으로서 그 속에는 일월(두 가슴)이 걸려있고, 일월 사이에 구름(폐)이 덮여 있으며, 그 구름 밑에 붉은 궁전(심장)이 하나 놓여 있고, 궁전 앞에는 황정(黃庭: 비장)이 있어 여러 의례가 이루어지며, 황정에서 나가면 큰 창고(위장)가 하나 놓여 있고, 그 너머로 숲(간장)이 있다고 한다. 셋째는 배꼽 아래인 하단전(下丹田)으로서 그 속에는 역시 일월(신장)이 걸려있고 그 주변은 기해(氣海)라고 불리는 어마어마한 기의 바다가 펼쳐져 있으며, 그 안에서 거북[龜]이 유유히 헤엄친다. 바다 한가운데는 곤륜산(배꼽)이 솟아 있으며 그 끝은 명문(命門)으로서 생기의 근원이자 생명이 들어오는 문이다.74) 그러니까 여동빈의 ‘내정’은 현관 및 신기혈과 아울러 이러한 세 개의 단전까지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대순진리회의 단전과 비교될 수 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의하면, 수도(修道)는 마음과 몸을 침착(沈着)하고 잠심(潛心)하여 상제를 가까이 모시고 있는 정신(精神)을 모아서 단전(丹田)에 연마하여, 영통(靈通)의 통일을 목적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일념(一念)을 스스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잊지 않고 지성으로 봉축(奉祝)하며, 정해진 주문을 봉송하는 것이다.75) 즉, 대순진리회에서 단전은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를 영시(永侍)하는 정신을 모으고 연마하는 곳이다. 여동빈의 ‘내정’은 단전으로서 수도를 상징하고, 대순진리회의 단전도 수도를 상징하지만, 대순진리회의 경우 최고 존신인 상제에 대한 신앙이 극도로 강조되고 있다는 데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Ⅳ. 닫는 글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에서 줄거리를 순서대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명말 청초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백성을 구제하고 신선술을 가르쳐준다는 여동빈을 신앙하던 일단의 유가 지식인들이 강계(降乩) 또는 부계(扶乩)로 불리는 강신술로써 여동빈을 응하게 하여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경전으로 만들고 있었다.
2) 대략 1589년부터 1626년 사이에, 중국 광릉(廣陵) 만점(萬店)의 집선루(集仙樓)에서 여동빈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여동빈으로부터 ‘오토결중곡(烏兎結中谷) 구사반내정(龜蛇盤內庭)’이라는 문구가 든 경전을 강계로써 받아 「오행단효(五行端孝)」라고 이름하였다. ‘龜蛇盤內庭’은 구사(龜蛇: 水火의 상징)가 내정에 얽혀있다[盤內庭]는 뜻으로서, 수화(水火)의 교구(交媾)로써 신선의 자리에 오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내단 수련은 나에게 육체와 성정(性情)을 갖추게 해 준 부모에게 효를 극진히 할 때 가능하다고 한다. 구사의 얽힘[龜蛇合體]을 통해 수화의 만남과 그 경지를 상징하는 내정은 신선으로 화(化)하는 모습과 그 경지, 현관, 신기혈, 단전(丹田) 등과 두루 연관되는 용어다.
3) 1626년에서 1700년대 초기 사이에 「오행단효」과 더불어 총 8개의 여동빈 경전들이 하나로 묶여 1품에서 8품까지 순번을 지정받았고, 그 합본은 『팔품선경』(혹은 『팔품경』)이라고 불렸다. 「오행단효」는 『팔품선경』에서 두 번째인 2품의 목차를 차지하였다.
4) 서태극이 여동빈의 다른 계서를 『후팔품선경(後八品仙經)』으로 채택하면서 원래의 『팔품선경』은 『전팔품선경』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5) 1679년에서 1702년 사이에 호북성 강하현[江夏縣城]의 함삼궁(涵三宮)에서 여동빈으로부터 강계로써 ‘신병가약(身病可藥) 심병난의(心病難醫)’를 포함하는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를 경전으로 만든 것이 『함삼어록(涵三語錄)』이었다.
6) 1744년에 유체서(劉體恕)는 여동빈을 신앙하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전팔품선경』, 『후팔품선경』, 『함삼어록』 등 여동빈의 여러 계서 경전들을 묶어 간행하였으니, 그것이 32권 본의 『여조전서』였다. 여기에는 ‘烏兎結中谷 龜蛇盤內庭’을 수록한 「오행단효」(『전팔품선경』의 두 번째 목차), 그리고 ‘身病可藥 心病難醫’를 수록한 『함삼어록』이 포함되었다.
7) 그로부터 『여조전서』는 명칭과 판본이 일부 바뀌면서 다양한 형태로 출판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의 판본이 한국에 유입되어 대순진리회에 영향을 주었다.
핵심만 요약하자면, 대순진리회 내부에서 내정의 전거라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문헌은 실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헌은 여동빈이 강신하여 강계를 통해 가르침을 전한 난서(鸞書) 혹은 계서(乩書)인 『여조전서』의 『전팔품선경』 「오행단효」이며, 그 바탕에는 여동빈이 백성을 구제하고 신선술을 가르쳐준다는 여조신앙과 비란행화(飛鸞行化)의 난단도교, 효행을 강조하는 인도사상(人道思想), 그리고 수화 교구의 내단술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대순진리회에서 도전이 기거하는 건물인 내정이 여동빈의 내단학 맥락을 담은 ‘내정’과 완전히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순진리회의 내정과 여동빈의 ‘내정’ 사이에 접점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여동빈의 백성 구제 서원이 포덕천하와 구제창생이라는 대순진리회의 이념과 어울린다는 점, 수화 교구로써 신선 등극을 상징하는 용어가 여동빈의 ‘내정’이었다는 것은 대순진리회의 목적 가운데 하나인 지상신선(地上神仙) 실현76)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 여동빈이 효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온 게 ‘내정’인데 대순진리회도 효 윤리를 인도(人道)이면서 동시에 수행론과 구원론의 중대한 요소인 것으로 강조한다는 점77) 등일 것이다.
이 글은 내정의 전거와 맥락을 설명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내정의 원래 맥락이 여조신앙과 난단도교 그리고 효행 강조와 내단술이라면, 여동빈의 효와 대순진리회의 효는 어떻게 같고 다른지, 여동빈의 수화 교구 및 정기신 단련은 대순진리회의 주문 봉송과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중향집』을 간행ㆍ유포하는 등 여조신앙 전파에 적극적이었던 조선 후기 민간 도교(이를테면 무상단)가 대순진리회와 혹 어떤 접점을 가진 것은 아닌지 등을 기술하는 것 등이 이 글 뒤에 쌓여있는 숙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