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역사학계의 시대 구분에 따르면, 조선 후기는 18세기부터 시작해 조선 왕조의 몰락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민중사상’이라고 명명되는 다양한 사상과 실천이 나타난다. 이 시기 민중사상에는 『정감록』과 같은 비기류에 의한 ‘해도기병설’과 ‘남조선신앙’이 실천되거나, 미륵신앙과 같은 기복신앙을 통한 ‘미륵하생’을 기원하는 실천들이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민중사상은 모두 변혁을 바라는 민중들의 염원이 투영된 모습으로 신앙되거나 실천되었다. 특히 『정감록』류의 비결들은 왕조교체를 바라는 역성혁명사상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투영되어 있었다.
『정감록』은 그 핵심 내용이 풍수와 도참에 기반하여 국가의 흥망성쇠를 예언한 책이기에 도교적 요소를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풍수와 도참은 방술 혹은 술수로 분류되어 도교의 주요한 사상이 되었다. 중국의 역사에서 주나라 후반에 공자에 의해 유가의 합리주의가 성립하고, 한대에 이르러 국가 통치 이념으로 유가가 채택되자, 방술로서 풍수와 도참은 도교의 사상으로 수용되었다.1)
일반적으로 풍수라는 것은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을 정하고, 발복(發福)을 위한 공간을 찾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풍수는 이러한 의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풍수는 새로운 공간과 세계, 미래의 공간을 창조하는 사유와 밀접하다. 조선의 한양 천도와 같이 왕조의 도읍지 천도에는 반드시 풍수사상을 적용한다. 이는 한 왕조가 새롭게 시작하거나, 기존의 왕조가 천도를 하거나 간에 풍수를 적용해 도읍지를 선정하는 것은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창조이자, 미래의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는 사유와 밀접하다. 따라서 풍수를 국운에 적용하면, 국가의 흥망성쇠를 예언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 도참 역시 미래에 대한 예언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하도’와 ‘낙서’처럼 미래의 징험을 예측하는 그림이나 문서2)를 말한다. 이러한 도참의 그림과 문서를 통해 국가의 운명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정감록』이 풍수와 도참에 기반한 책이기에, 이들 풍수와 도참이 절망으로부터 구원의 메시지를, 역성혁명을 통해 미래국토의 희망적 표상으로 만들어 낸 민중들의 신앙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3) 민중사상으로서 『정감록』은 이러한 풍수와 도참사상이 주요한 내용이고, 이는 도교 사상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철종 때부터 도교서들이 번역되기 시작하고, 고종 때에는 국가의 국역사업으로 도교서들이 반역, 간행된다.4) 민중들 사이에 도교적 요소가 가득한 『정감록』류의 비기 읽기5)와 그 비기들을 통한 왕조의 교체와 새로운 조선[남조선]을 세우리라는 신앙이 만연한데, 도교서들이 국가사업으로 번역된다는 사실 사이에는 모종의 모순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모순이란 왕조의 몰락과 교체를 바라는 민중사상은 그 핵심 사상으로 도교적 이미지와 사유를 축으로 하는데, 국가의 존망을 앞에 둔 고종은 도교서들을 국가사업으로 번역, 간행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고종에 의해 국역사업으로 번역된 도교서들이 선서(善書)류6)와 보권(寶卷)류7)임에서 이 모순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중국의 경우 이들 선서와 보권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민란과 변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선서와 보권에 모역(謀逆)의 설이 없더라도, 말겁을 예언하거나 돌림병과 기근, 화적떼의 재앙을 예언한 것이 적지 않기에, 이들 책들은 민중들의 모역을 조장하고 있었다.8)
그렇다면 민중사상을 도교적 사유에 기초한 역성혁명의 사상이라고 할 때, 선서와 보권을 국역 보급한다는 것은 불난데 기름을 붓는 꼴이 아닐까?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Ⅱ. 남조선 신앙과 도교 이미지
앞에서 언급한 모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민중사상을 다룰 필요가 있다. 민중사상의 연원을 추적하면, 크게 두 가지로 그 연원을 잡을 수 있다. 하나는 『홍길동전』에 그려진 이상사회인 율도국의 이미지와 영ㆍ정조시기부터 심화된 삼정문란과 그로 인한 민란과 변란들이다.
영ㆍ정조시기 무수한 민란과 변란이 발생하는데도 조선이라는 국가가 이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어 결국 민중사상을 형성하였고, 이 민중사상이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른 하나는 탐관오리의 토색질로 민생이 파탄 나는 상황이 극에 달한 것이다. 또한 반상의 신분제도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명분의식에 사로잡힌 양반들이 백성들에게 과도한 토색질을 함으로써 일어난 양반과 일반 백성들 간의 반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난리를 원하는 민중들의 바람9)은 각종의 유언비어로 일어나 동에서 말하면 서에서 화답하는 상황들이 있어났다.10) 민중들은 삼정문란과 탐관오리, 양반의 토색질을 견디지 못해 유망민이 되어 명화적이 되거나 섬으로 들어가 해적단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11) 이들의 사유에는 조선을 멸망하고 새로운 조선을 세우려는 강력한 염원이 싹튼다.
새로운 조선을 세우려는 염원은 민중사상을 형성하고, 그 민중사상에서 몇 가지는 민중 신앙으로 구체화된다. 이들 민중 신앙에서 대표적인 것들은 세 가지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정감록』의 사상이 발전한 ‘남조선 신앙’이다. 남조선은 미래의 조선으로 민중의 바람이 투영된 국가이다. 둘째는 ‘미륵신앙’이다. 미륵불은 민중들의 사상에서는 메시아의 신격을 갖게 되고, 미륵불에 의해 구현되는 용화세계는 이상사회로 민중을 이끌었다. 셋째는 일부 김항(一夫 金恒, 1826~1898)이 제시한 『정역』의 사상과 『정역』으로 구성되는 ‘후천개벽신앙’이다. 일부의 역학은 선천역에 의해 구성된 사회적 체제와 가치체계를 완전히 뒤집는 개벽을 그 특징으로 하는데, 이러한 후천개벽 사상이 민중들이 염원하던 이상사회와 완전히 일치한다.
『정감록』은 민중들의 염원이 구체화된 비결서로 영조 15년에 처음으로 왕조실록에 실린다.12) 『정감록』의 내용은 정씨 진인에 의한 역성혁명이 필연적이며, 이는 정진인이라는 메시아의 출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감록』의 역성혁명의 필연성은 진인이 해도(海島)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 현재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는 ‘해도기병설’의 논리로 구체화된다.13) 진인이 바다의 섬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 조선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운 이상사회는 바로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의 형태로 이어진다. 여기서 조선이라는 왕조는 역도(曆度)의 운수가 다한 왕조를 의미하고, 진인에 의해 새롭게 세워진 왕조가 ‘남조선’이다. 이 남조선은 민중의 메시아인 정진인에 의해 민중의 힘으로 세울 이상 국가이자 민중의 바람으로 이룩된 나라인 것이다. 『정감록』이 그토록 민중들에게 신앙화 되고, 정진인에 의해 새조선이 세워진다는 신앙이 지속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주역』의 논리에 기초한 후천개벽사상도 변란의 주요 이론이다.14) 후천개벽사상은 김일부의 『정역』에서 그 논리를 찾을 수 있다. 『정역』에서 황극(皇極)정신이 후천개벽의 주요 입안처이다. 『정역』에서 황극은 “‘오직 임금만이 극을 세우고 복을 펴던’ 선천의 황극과 달리, 사람이면 누구나 선천의 태극을 넘어서 황극으로 진출하게 되는 것으로, 황극은 군왕만이 거처할 수 있는 특수한 자리가 아니며, 자신의 완성을 이룬 자, 즉 도덕군자라면 누구나 황극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임금이 아니라 완성된 인간이면 누구나 황극에 처할 수 있다”는 역성혁명의 사상이 된다. 선천의 역생도성(逆生倒成)의 논리가 후천의 도생역성(倒生逆成)으로 바뀌어15) 천하의 질서가 모두 바뀌고 동시에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히며, 선천의 역에는 유불선 삼교로 구분되지만, 후천의 역에서는 역의 이치가 유(儒)도 되고 불(佛)도 되며, 선(仙)도 되는 것으로 본다. 후천역의 전개는 모든 사회적 구조와 질서가 완전히 역전되고, 사회적 가치 역시 역전되는 개벽의 시대가 열린다는 사상이다.16)
개벽은 단순히 왕조가 바뀐다는 의미가 아니다. 개벽은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새롭게 창조된다는 의미이다. 시간과 공간이 새롭게 창조되듯이 새로운 가치관에 따른 사회구조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벽은 선천시대의 계급적 질서와 신분질서가 와해되고 전혀 새로운 문화가 정립되는 다시 말해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것이다.
조선 후기 민중사상을 세 축을 모두 받아들인 동학농민전쟁은 개벽을 이루고자 시도한 전쟁이었다. 동학농민전쟁 시기에 보이는 다양한 참언과 비기의 내용은 민중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동학 혁명을 현장답사와 다양한 취재를 통해 소설로 형상화한 송기숙의 『녹두장군, 전봉준』에는 동학이 추구하는 세계가 잘 묘사되어 있다.
동학은 이 세상에 수없이 흘러 다니는 참언을 모두 한 손에 뭉쳐서 거머 줘버렸다. 정감록, 미륵사상, 그리고 남조선사상, 남해진인설, 그런 것을 모두 그 비결하나로 다 싸서 지금 동학도들이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바로 그것은 백성을 움직이는 요술방망이다.17)
동학교도들에게 개벽은 인류의 최고 이상향이 건설되며 천하는 하나의 세계가 되어 한 가족이 될 것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개벽에 대한 동학교도의 말을 옮겨와 보자.
지금 우리가 사는 이런 시상을 선천세계라고 하고 다음에 올 시상을 후천세계라고 하는디유. 후천개벽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고 그로코 뒤바뀌는 개벽을 한다는 소리가 아니구유, 이 시상이 바뀌는디 크게 한번 바뀐다는 소리라는 구먼유.
후천세계는 어떤 시상이냐먼유, 그런 시상이 되면 양반상놈이 없고 종도 없고 주인도 없고, 사람이면 다 같이 똑같은 사람으로 한울님같이 서로 받들고 부자도 없고 가난뱅이도 없이 똑 같이 잘사는 그런 시상이라는 구만유.18)
조선 후기에 민중사상은 도교적 요소가 적지 않고, 민중운동의 주체들은 신선술이나 장생술에 가탁해서 민심을 모았다고 한다. 민중운동의 주체들은 선인이나 신인들이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점을 전파하면서, 축지술이나 둔갑술 등을 이용하였으며, 이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도인이나 진인으로 이해되었고 한다.19)
Ⅲ. 『홍길동전』과 야담에 보이는 도교적 요소
필자는 조선 후기의 민중사상의 한 축은 최초의 한글 소설인 허균(1569~1618)의 『홍길동전』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판단한다. 『홍길동전』은 당시 민중들의 열망과 부합해 홍길동을 영웅시하였는데, 이는 『홍길동전』이 서얼의 철패와 신분제에 대한 문제제기만이 아닐 것이다. 홍길동이 보여주는 다양한 도교의 도술들, 그리고 이상사회인 율도국 등이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다.20) 민중들이 그리는 이상사회인 율도국의 이미지가 민중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7세기의 『홍길동전』이 18, 19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의 수많은 명화적들이 스스로 홍길동의 후예라고 자처21)하거나, 저자거리에서 홍길동의 명예를 걸고 싸움22)을 하였다는 기록들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조선 후기에 삼정문란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거나 섬으로 들어가 명화적이 되거나 변산적이 된 사람들의 경우에서 “해도기병설”이나 남조선사상이 발현하는 것도 『홍길동전』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주지하다시피 홍길동은 도사였다. 『홍길동전』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가 도사임을 확인하는 내용이 나온다. 대략 그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오색찬란한 구름이 뭉게뭉게 서리고 명아줏대 지팡이에 관을 쓰고 학처럼 흰옷을 입은 신선이 나타난다. 그가 길동에게 “인간 세상 재미가 어떠하더뇨? 이제 함께 가자”고 하고 뿅 사라지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홍길동 내외가 신선이 되었다고 생각한다.23)
이렇게 보면 홍길동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 명화적의 두목 노릇을 하다가, 민중들이 그린 이상사회인 율도국을 세워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고는 다시 신선의 세계로 간 도사이다.
홍길동이 도사인 것은 분신술을 자유자재로 하고, 둔갑술을 부리며, 축지법을 쓰며, 심지어는 구름을 타고 바람을 일으키는 등 전조가 있었다.
그런데 홍길동이 도사이든 신선이든 간에,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자는 뜻에서 활빈당을 만들어 부자들과 탐욕스러운 관리의 재물을 빼앗는 짓을 한 것을 보면 분명 도적떼 두목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도적의 두목으로서 홍길동의 이미지가 조선후기와 말기에 산적들의 도적질을 정당화한 논리로 쓰였다고 본다. 『홍길동전』에는 남의 재물을 빼앗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어떻게 남의 재물을 빼앗으면서 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이런 의문은 초기 도교의 생각을 살펴보면 풀린다. 초기 도교 중에 태평도라는 종교집단이 있다. 이들은 『태평경』이라는 책을 남기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재물을 천지의 것이고 천지가 이 재물로 사람을 기르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천지가 그 사람의 집을 사용해 재물을 모아 둘 곳으로 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 재물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천지의 것이라고 본다. 그 사람이 왕이라고 해도 그 재물은 그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재물은 곧 천지와 중화가 소유하는 것으로써, 공동으로 사람을 기르는 것이다. 이 집은 단지 우연히 모아 둘 곳을 마련한 곳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창고 안의 쥐는 항상 혼자서 충분히 먹지만 이 큰 창고의 곡식은 본래 그 쥐 혼자만의 소유가 아닌 것과 같다. 나라 창고의 돈과 재물은 본래 오로지 한 사람만을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자들 모두가 당연히 그곳에서 취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지해서 마침내 예로부터 홀로 그 재물을 당연히 자기가 소유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이 바로 만 호의 가정이 (재물을) 옮겨 맡겨둔 곳으로 모두 마땅히 여기에서 입고 먹는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24)
재물이 천하의 것이고, 국가의 창고에 있는 돈과 재물도 백성들 가정에서 옮겨 맡겨 둔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자들이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또 『태평경』에는 어떤 사람이 우연히 좋고 부유한 땅을 만나 천지의 재물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을 으슥한 방에 쌓아 두고 곤궁한 사람들이 와서 구하려고 해도 욕하면서 문전 박대하며 주지 않으면, 하늘과 원한을 맺게 되며 땅과 증오가 생기게 되며 사람과는 더 큰 원수가 된다고 본다.
만약 홍길동이 재물을 천지가 모든 사람을 고루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자들의 재물은 천지가 그에게 맡겨 놓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그가 도적떼의 두목으로 부자들과 탐욕스러운 관리의 재물을 훔치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을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홍길동은 정말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일까? 아마 홍길동은 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홍길동전』 이후에 수많은 홍길동의 후예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홍길동의 후예들도 명화적이거나 녹림당으로 도적질을 하면서 재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구야담』 권5에는 녹림당 두목이 부잣집 주인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재물이란 천하 사람들 모두의 것이오. 재물을 쌓아 두는 사람이 있으면 쓰는 사람이 있고,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라. 주인 같은 사람은 쌓아 두는 사람이요 지키는 사람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쓰는 사람이요 가져가는 사람이라 할 터이지요. 줄어들면 자라고 차면 기우는 변화는 당연한 이치라, 주인장 역시 이런 이치 속에 한낱 기생하는 셈이지요, 어찌 자라나기만 하고 줄어들지 않으며 차기만 하고 기울어지지 않겠소.25)
녹림당 두목의 말은 마치 『태평경』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는 듯하다. 홍길동과 홍길동 후예인 도적떼들은 재물이 국가의 것이든 부잣집의 것이든 천하사람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홍길동은 함경도 감영의 재물을 빼앗고 해인사의 재물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동학에서 말하는 후천개벽의 시대에서 그리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 동학에서는 밥에서 동등함이 후천개벽의 시대라고 말한다.
동학시상이 되면 가난맹이나 부자는 으째서 없어지냐 하면 그 이치는 이렇구만유. 사람은 속에다 한울님을 뫼시고 기신게 우리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나 마찬가지고, 우리가 밥을 묵는 것도 한울님을 봉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유, 그런디 그런 귀한 밥을 어떤 사람을 배가 터지게 묵고 어떤 사람은 굶고 그러면 쓰것이유, 사람이 굶는 것은 한울님이 굶는 것이나 마찬가진디 한울님이 굶으면 안 되는 것지유. 그래서 한울님을 봉양하는 재산은 똑 같아야 쓴다는 것이지라. 동학 시상이 되면 그래서 상놈이나 양반이나 종이나 주인이 다 없어져 불고 가난뱅이나 부자도 없어 불고 다 똑같이 공평하게 산데요. 이것이 후천개벽이라는 구만유.26)
『홍길동전』에서 또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도적들의 근거지인 산채이다. 『홍길동전』에는 오곡백과가 무르녹은 넓디넓은 벌판에 수백 채의 집이 빼곡한 곳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마을 한 복판에서 낭랑한 풍악이 울리고 사람들은 풍악에 맞추어 즐기며 떠들썩하다. 그리고 그 산채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팔도강산에서 모여 와 사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치 딴 세상을 그려놓은 듯하다. 이 산채는 국가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독립된 공간에 자율적으로 형성된 이상적 공동체로 보인다. 두령을 뽑는 방식도 매우 민주적으로 보인다. 바윗돌을 들어서 두령을 뽑는 방식이다. 『홍길동전』에 묘사된 산채는 종교적인 색채가 보이지 않지만 세상과 단절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고, 평안한 삶을 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산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녹림객유치심상사」(『청구야담』 권7)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깊은 산속에 철옹성같은 성을 짓고 인가가 줄을 잇대고 늘어섰고, 시전(市廛)들이 연이어 늘어선 곳으로, 지도에도 없는 곳이자 조정의 관할 밖에 위치한 곳으로 동서남북을 유랑하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마음 놓고 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어 일군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홍길동전』과 홍길동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그린 짧은 글들에서 하나같이 보이는 공동체는 세상의 그것과 다르다. 세상의 공동체는 성리학적 질서에 따라 신분이 철저하게 구분되며 온갖 부세와 노역에 시달리지만 이들 공동체에는 그러한 일이 없다.
명화적과 녹림당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이들 공동체는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 1600년대만 하더라도 국가의 수탈이 미치지 않거나 덜한 지역으로 유망한 유민들이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섬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국경지역으로 대거 이동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산간지대로 몰려들어 화전을 일구거나 공동체를 꾸린 유민들을 ‘입작(入作)’이라고 불렀으며, 섬으로 옮겨간 유민들을 ‘입도(入島)’라고 불렀다. 심지어는 함경도 국경지역에 몰려든 유민의 수가 너무 많아 해당 지역에 읍을 설치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다.27)
18세기가 되면, 농지에서 유리된 농민, 신분해방을 위해 도망한 노비, 광산노동자들, 부세를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었던 자들까지 명화적이 되었다. 이들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산악지대나 도서지방에 근거지를 두고서 한번 움직일 때 기본적으로 3, 4백명씩 떼를 지어 관부를 습격하거나 양반과 토호들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주로 근거지로 삼은 곳은 강원도 산악지대, 평안도 폐사군(廢四郡) 지역28), 함경도 안변, 전라도 변산 주변 등이고, 이들 중에는 섬지방의 도적들과 같이 연계되어 있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견주어 보면, 『홍길동전』의 산채와 야담들의 산채는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홍길동전』에서 사람대접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표현과 야담에서 동서남북으로 유랑하던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명화적을 구성하던 유망한 농민, 노비, 광산노동자, 승려 등으로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홍길동전』에서 읽어 낼 것은 율도국에 관한 것이다. 홍길동은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섬으로 가 포악한 왕이 다스리는 율도국을 정복하고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것이다. 왜 홍길동은 바다의 섬으로 가서 이상사회를 세웠을까? 『홍길동전』의 영향으로 유민들이 섬으로 대거 도망했을까? 18세기 이후에 유행하는 해도기병설의 영향일까?
우선 해도기병설은 『정감록』의 내용이다. 『정감록』에는 진인이 해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현재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 즉 이상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정감록』은 저술 연대가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초기부터 반조선왕조를 상징하는 내용과 구조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그렇다면 『홍길동전』은 이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정감록』의 영향을 받았다면, 율도국에서 군사를 훈련하여 조선을 공격하는 내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내용이 없으므로, 『정감록』의 해도기병설과는 일단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섬을 선택했을까? 허균이 『홍길동전』을 쓸 당시에도 명화적은 존재했고, 유민들이 섬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허균이 변산반도에서 반란을 꿈꾼 것과 연관시켜 보면, 홍길동이 율도국에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당시의 유민들이 섬으로 이주하는 것, 변산에서의 귀향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Ⅳ. 왕조의 위기와 도교 소환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오두미도를 신봉한다는 것을 들은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에 도사와 천존상(天尊象)을 보내고 『노자』를 강의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제3권 「보장봉로(寶藏奉老)」조 624년). 이로부터 도교는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전래되어 삼국시대와 발해, 조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왔다. 물론 관방 종교로서 도교는 조선 중종(中宗, 재위 1507~1544년) 때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할 때까지 우리 역사에서 국가진호(國家鎭護)의 역할을 하는 종교로서 유지되었다.
도교가 국가진호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도교신봉과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면 당연해 보인다. 고구려의 오두미도 신봉은 7세기의 고구려가 국가의 존망을 걸고 외교를 전개하던 정세와 무관하지 않고,29)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에서 도교의 전쟁 신(戰神)인 관운장30)과 뇌신(雷神)을 소환한 것도 그러하다. 구한말 고종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도교서들이 번역 간행, 유포된 것도 국가의 존망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일어났다.
관성제군의 등장은 명나라 원군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이와 관련된 연구들이 많아 언급을 생략하지만, 뇌신의 경우와 구한말의 도교서 국역사업은 논의할 필요가 있다. 뇌신은 임진왜란 당시 정승을 지낸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에 의해 호출된 것이었다. 정탁은 전란 당시 좌찬성으로 선조를 호종하여 의주에 이르렀고, 분조(分朝)후에는 광해군을 호종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임란당시 왕의 최측근에서 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사람이다. 박종천(2016)의 연구31)에 따르면, 정탁의 『약포선조유묵(藥圃先祖遺墨)』(보물 제494-8호)은 임진왜란시기에 저술된 책으로, 그 내용은 첫째, 전쟁의 피해를 피하는 주술과 의학적 처방 둘째, 전쟁 수행을 위한 부적과 작법 셋째, 신장(神將)과 신병(神兵)을 제련하는 법술로 구성된다고 한다.
박종천의 분석에서 뇌신과 관련된 내용들로는 신장과 신병을 부리는 부적들과 전쟁과 관련된 뇌부의 신장들을 소환하는 부적, 그리고 이들 부적들의 구성과 효능에 대한 내용과 뇌신을 인간의 몸에 붙여서 신병으로 제련하는 도교의식 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는 하늘을 다스리면 전쟁을 담당하는 외부의 모든 신장들을 소환하는 뇌법과 그것을 시행하는 의식들, 부적 등을 통해 전쟁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의도들이 결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적들을 등에 붙이고 전쟁에 나섰던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상황도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32)
박종천은 정탁의 글이 임진왜란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명나라 장수들이나 인사들이 지니고 있었을 병가류, 술수류, 도교류 자료들과 내용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정탁이 이들로부터 이러한 도교의 병법, 주문과 부록, 기문둔갑 등의 자료를 선별하여 기록하였을 것으로 본다.
정탁의 『약포선조유묵(藥圃先祖遺墨)』과 관련하여 덧붙일 내용이 있다. 정탁이 도교의 도술들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명청 교체기에 다수의 도사들이 조선으로 망명한 사실과도 관련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왜 사이의 전쟁만이 아니라, 명까지 참여한 국제적인 전쟁이다. 그 결과 명나라는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다. 전쟁은 그 자체로 참혹한 일이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인적인 교류와 문화적 교류가 일어난다는 점도 사실이다. 이 인적 교류와 문화적 교류에는 상당수의 도사들이 조선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는 사실이 포함된다.
다수의 명나라 도사들이 조선으로 망명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들로는 이재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증보해동이적보(增補海東異蹟補)』33)과 조여적(趙汝籍, 생몰미상)의 『청학집(靑鶴集)』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증보해동이적보』에서는 ‘명나라 친왕인 도사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어떤 사람을 만난 기록’34)과 ‘조선으로 도망 나온 자가 많았다’라는 기록과 ‘민응성(閔應聖)이라는 사람이 명나라 도류(道流)들의 병법(兵學)의 법을 배워 다른 사람에게 전하였다’는 기록35)이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청학집』에서는 양운객(楊雲客)의 제자인 중국인 조현지(曹玄志)가 그의 셋째 아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증보해동이적보』 ‘성거사(成居士)’조 기사를 가져와 보자.
중국인들이 비분에 차, 조선인을 만나면 반드시 이전시대의 문장과 서화, 율역, 산수, 음양성명에서 태을, 기문, 육임 및 일체의 도검비법에 이르기까지 음으로 서로 전수하였다. 또 그 사람들이 한반도로 도망한 자 역시 많았는데, 구결을 전하면서 ‘도가와 병가는 애초에 모두 노자에서 나왔는데 청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치 않는다.36)
이 인용문에서 도사가 전한 율역과 음양성명, 태을, 기문, 육임, 도검비법, 구결 등은 도교의 주요 술수들이다. 이처럼 임진왜란과 명나라의 멸망은 도사들의 조선으로 망명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도사들에 의해 도교의 법술이 조선에 전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구한말에 고종에 의해 주도된 도교서의 국가 국역 사업 역시 국가진호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게 된 상황에서 민간도교서들을 대량으로 번역하고 간행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고종의 도교서 국역사업은 그 선택된 도교서의 성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나는 관성제군의 영험기를 중심으로 한 책들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도교의 책들이다. 『과화존신(過化存神)』37), 『남궁계적(南宮桂籍)』38), 『삼성훈경(三聖訓經)』39), 『각세신편팔람(覺世新編八鑑)』40), 『관성제군오륜경(關聖帝君五倫經)』41), 『관성제군명성경(關聖帝君明聖經)』42)등 고종 연간에 출간된 이들 언해서들에는 모두 관성제군과 관련된 편명이 있거나 관성제군과 관련된 독립된 책들이다. 다른 하나는 유교의 윤리와 도교의 신앙이 결합되어 인과응보의 관념으로 인간의 화와 복이 결정된다는 식의 도교권선서이다. 『태상감응편도설언해(太上感應篇圖說諺解)』43), 『공과신격언해(功過新格諺解)』44) 등의 책들은 도교의 권선서의 전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이다.
그렇다면 고종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이들 책들을 간행과 보급을 통해 국가의 안녕을 바랐을 것이다. 도교는 원래 국조의 안녕을 바라는 성격을 가진 종교였다. 도교는 제초나 부록이라는 의례를 통해 국가의 안녕과 유지를 기원하는 역할을 해 왔다. 다른 하나는 도교의 대부분의 권선서들은 관성제군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관성제군이라는 충의와 절의의 무장에 기대의 국가의 안위를 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고종은 1883년에 관우를 모신 북묘를 건립한다. 그 이유를 “황실을 보호하고 관왕의 충의를 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고종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자신이 건립한 북묘에 피신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지켜줄 관우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황제의 자격으로 1902년에 관우를 관제로 높이고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로 고종의 도교서 국역사업은 국가의 안위를 위한 의도가 분명함을 알 수 있다.
Ⅴ. 맺음말
구한말의 급변하는 정세가 도교적 실천들을 꺾어 놓았지만, 고종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추진된 선서의 번역과 보급은 구한말 이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민간에서 행하였던 ‘용왕멕이’,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고 소지를 하는 의례45), 섣달 그믐날(경신일)에는 잠을 자지 않는 풍습, 부뚜막제사 등으로 남아있다. 용왕멕이는 도교의 수관신46)에 대한 제사이고,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한 것은 도교의 성수신앙47)이며, 부뚜막 제사는 조왕신48)에 대한 제사이고, 섣달 그믐날의 수경신49)은 도교의 의례이다.
이제 이 글 서두에서 제기한 ‘모순’을 해명해 보자. 고종이 번역 보급한 선서와 보권류는 청대 민란의 원인이 된 것들이었다.50) 이와 관련해 청대 인물인 황육편(黃育楩)의 『파사상변(破邪詳辨)』은 선서와 보권을 중심으로 변란이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삿된 경전 사십 여종[邪經四十餘種]”에는 어느 것에서도 모역(謀逆)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敎)를 배우면 반드시 모역(謀逆)에 이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모역(謀逆)의 근원은 민중을 모으는 것[聚衆]에 의해서이다.”라고 하고, “민중을 모으는 것[聚衆]의 근원은 삿된 경전[邪經]에 의한다. 그래서 삿된 경전[邪經]에는 모역(謀逆)의 것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아도 모역(謀逆)은 저절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51) 그럼에도 고종은 이들을 번역 보급하였다. 이는 고종이 이들 도교서의 성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 고종 자신이 도교를 신봉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