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홍만종(洪萬宗)은 우리나라 역대 인물 가운데 단군을 비롯하여 영이(靈異)한 사적을 보인 38인의 인물들을 모아 『해동이적(海東異蹟)』을 저술한다. 조선조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거론된 인물 가운데 김시습(1435~1493)1)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한국 도교사 맥락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치한다. 아울러 그들이 광견적 성향의 소유자임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익(李瀷)이 「해동악부(海東樂府)」 「광노행(狂奴行)」에서 매번 세상을 도피하는[逃世] 뜻을 품었고, 이에 연산군이 ‘광노(狂奴)’라고 한 정희량(鄭希良)의 광적인 행동을 참조하면 그렇다는 것이다.2)
조선조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광견(狂狷) 성향을 보인 인물들은 대개 도가 혹은 도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심취한 공통점을 보인다. 이런 점은 이규경(李圭景)이 우리나라 도교 관련 저서 및 인물들을 개략적으로 밝힌 것을 통해 알 수 있다.3) ‘이적(異蹟)’이라 할 때의 ‘이’자에는 공자가 말하지 않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관한 것을 언급하는 것, 유가의 예법지상주의를 부정하면서 명교(名敎)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것, 유가가 허탄(虛誕)하다고 부정하는 ‘불로장생’의 신선되기를 추구하는 삶,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을 추구하는 유가 입장에서 봤을 때 실사(實事)적 하학처보다는 고원함의 상달처를 추구하였다는 평가가 담겨 있다. 양명학 경향이 강했던 명대 문장가인 도륭(屠隆, 1543~1605)은 『홍포(鴻苞)』 「변광(辨狂)」에서 ‘광자’를 ‘선광자(善狂者)’와 ‘불선광자(不善狂者)’로 분류한 바가 있다. ‘선광자’는 ‘마음은 광이지만 행동은 광이 아닌 것[心狂而形不狂]’으로, ‘불선광자’는 ‘행동은 광이지만 마음은 광이 아닌 것[形狂而心不狂]’으로 각각 분류한 다음, 보다 구체적으로 ‘심광(心狂)’, ‘형불광(形不狂)’, ‘형광(形狂)’, ‘심불광(心不狂)’ 등으로 구분한다.4) 조선조에서 ‘이적’을 보인 인물들은 대부분 ‘형광’보다는 ‘심광’쪽에 가까운데, ‘형광’이면서 동시에 ‘심광’의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을 거론하자면 김시습을 들 수 있다.
본고는 김시습의 삶과 사유를 ‘형광’과 ‘심광’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김시습에 관한 기존 연구물은 김시습의 시와 『금오신화(金鰲新話)』 등을 분석한 문학 쪽의 연구물이 많다.5) 철학 쪽에서는 성리학과 도교에 관한 것이 있다.6) 문학관의 입장에서 김시습의 삶과 사유를 광자 성향에 관해 개괄적으로 논한 것은 있지만, 본고처럼 광자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장왕불반’과 ‘괴력난신’이란 두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되 ‘심광’과 ‘형광’ 성향의 광자정신을 분석한 것은 거의 없다고 본다. 이런 점이 본고가 갖는 차별점이다.
Ⅱ. ‘장왕불반(長往不返)’의 삶과 광기
조선조 역사에는 많은 신동이 나타난다. 신동 가운데에서도 공식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신동’이라 불리운 인물은 김시습이다. 허목(許穆, 1595~1682)이 「청사열전(淸士列傳)」에서 김시습에 관해 기록한 것을 보자.
노릉(魯陵[=단종])이 손위(遜位)하게 되자, 김시습은 ‘책을 모두 불태우고’ 그 길로 집을 떠나 승려가 되어 속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김시습은 큰 명성을 일찍 얻었으나 세상의 변고를 만나 하루아침에 은둔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 ‘미친 척[佯狂]’하고 숨어 살면서 괴팍하고 기이한 행적으로 괴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치세에 있으면서 ‘자신의 몸만 깨끗이 하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은 수치이고, 난세에 있으면서 ‘세상을 떠나 멀리 가는 것은 선’이라 여긴 것이다. 결연히 ‘오랫동안 속세를 벗어나 돌아오지 않고’ 유명한 산천을 두루 다녔다. … 성종 때에 환속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벼슬하라고 권유하자 응하지 않고 방랑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대로 놀고 자기 뜻대로 하였다. … 혹자는 “아무런 욕심이 없이 세상 밖[방외(方外)]’을 노닐었고, 기기(氣機)의 운행과 변화에 관한 술법을 통달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직접 ‘자화상’을 그리고서 찬하기를, “너의 형체는 지극히 용렬하고 너의 말은 너무도 어리석으니, 너는 구렁에 버려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7)
일단 윗글에서 김시습은 화가가 아니면서 자화상<그림 1>을 그렸다는 것에 주목하자.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 자화상을 모두가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예술사에서 자화상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존감 표출’, ‘자의식 표출’, ‘작가의 내면 표출’ 등의 행위에 속하며, 때론 ‘풍부한 자아 인식의 산물’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그리는 사람은 최대한 잘 그리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화상을 통해 김시습처럼 자신을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조 ‘광기어린 화풍’을 보인 대표적인 화가인 최북(崔北)이 권력을 가진 세도가의 압력을 단연코 거부하고 자신의 눈을 송곳으로 찌른 당당한 모습을 그린 애꾸눈 자화상<그림 2>이 하나의 예다.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비하한 것은 실제로 자신을 비하하고자 한 면도 있지만, 그런 점보다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사는 부조리한 시대를 자화상의 자기비하를 통해 표현하곤 한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로라 커밍은 자화상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특별한 수단’이라고 정의한다.8) 김시습의 자기 비하의 자화상은 바로 김시습 자신이 살던 시대의 부조리한 사회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자기 질책과 반성이 담겨 있다. 동시에 자신을 낮추는 것을 통해 도리어 타인을 질시하고 비하하는 의미도 있다. 이런 자기 비하 자화상을 그린 것 하나만으로도 김시습의 광기를 짐작할 수 있다.
유학자들은 책과 금(琴)은 큰 일이 없으면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수양하곤 하였다. 김시습이 유학자들이 중시한 ‘책’을 불태워버렸다는 것은, 책 읽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포기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아울러 유가 성인이 지향하는 삶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연한 마음도 담겨 있다. 김시습의 이런 마음은 벼슬에 응하지 않는 것과 ‘방외’를 추구하는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김시습의 ‘양광’, 괴이한 행동, 방외적 삶, 속세와 관계를 끊어버리는 이른바 ‘장왕(長往=長往不返)’ 등과 관련된 내용은 광자를 규정하는 행동거지의 전형에 속한다. 이산해(李山海)는 김시습의 광기어린 삶을 평가할 때 ‘장왕불반’과 ‘유가의 예법과 명교를 버리고 선문으로 바꾼’ 이후의 광적인 행적과 연계하여 기술한 적이 있다.
김시습은 자기 생각을 깊이 간직한 채, 아예 ‘자연으로 길이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고[長往不返]’, 명교(名敎)를 버리고 선문(禪門)에서 모습을 바꾸어 병이 든 자처럼 하거나 ‘미친 자처럼 행동하여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한 것’은 또한 무슨 의도였을까. 그가 평소에 남긴 소행을 살펴보면, 시를 지어 놓고도 울고, 나무를 조각해 놓고도 울고, 벼를 베어 놓고도 울고, 재[嶺]에 오르면 반드시 울고, 갈림길에 임하면 반드시 울었다. 한평생 간직했던 그의 은미한 뜻을 비록 쉽게 엿볼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요지는 모두 평이함[平]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시를 지을 때에는, 성정에 근본을 두고서 음영(吟詠)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에 단련이나 수회(繡繪)를 일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문장이 이루어졌으니, 장편이나 단시가 나오면 나올수록 더욱 군색하지 않았다. 간혹 ‘극도로 우수에 젖어들고, 강개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거나 응어리진 가슴을 풀 수 없을 때’는 반드시 문자로 나타내서 붓 가는 대로 휘두르기도 하였다.9)
김시습의 행적과 관련된 ‘장왕불반’은 흔히 도사들이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는 ‘유세(遺世)’10), ‘망세(忘世)’적11) 삶을 뜻하는 것인데, 정주이학을 추숭하는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으로 본다. 예를 들면, 장현광(張顯光)이 사회적으로 성인이 설파한 중정인의(中正仁義)를 실현하고 수기를 통한 치인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장왕불반’의 삶을 부정적으로 말한 것이 그것이다.
혹시라도 과거 시험에 스스로 얽매이지 아니하여, 산림에 은둔하고 강호에 거처하며 몸소 농사를 짓고 성시에 은둔한 자들은 간혹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나, 저들은 마침내 청고(淸高)함을 숭상하고 현적(玄寂)함을 사모하였다. 그리하여 숨어 궁벽한 것을 깊이 찾아 지나치게 괴이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고,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인륜을 어지럽혀 ‘영영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는 자’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지키는 것을 도리의 지극함으로 여겨서, 끝내 절개만을 지키는 선비나 유교의 종지에 어긋나는 모든 사교(邪敎=左道]로 돌아감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성현의 인의ㆍ중정함과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큰 사업[修己治人]을 알지 못하니, 어찌 이들을 ‘참된 유학자[眞儒]’라 이를 수 있겠는가?12)
과거 시험에 스스로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유가가 지향하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삶은 때론 산수자연을 벗 삼고 때론 인간관계를 단절하고자 하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이같은 선택은 유가가 지향하는 ‘중정인의’ 및 ‘수기치인’을 통해 타자와 관계 맺고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을 추구하는 자기희생적, 이타주의적인 삶에 맞는 도리는 아니다. 자신의 한 몸만을 깨끗하게 지키는 개인주의적 차원에 머물러버린다는 문제가 있는 행위로서, 오로지 절개만을 지키는 선비가 되거나 혹은 ‘좌도’에 머무는 매우 잘못된 선택에 해당한다. 따라서 참된 유학자라면 ‘장왕불반’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런 견해는 유학을 종지로 하는 경우 자주 나타난다. 즉 ‘장왕불반’이 중행의 도에 맞지 않거나13) 혹은 그 행동이 ‘결륜난신(潔身亂倫)’ 차원으로 귀결되면 부정적으로 보았다.14) 장현광의 이상과 같은 발언은 유학자가 지향하는 삶은 어떠한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유학자들도 상황에 따라 ‘장왕불반’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흔히 ‘처한 시대와 세상을 걱정하면서 탄식하는[우시탄세(憂時歎世)]’15)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장왕불반’을 선택한 것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은둔의 삶에 깃드는 것[서둔(棲遁)]’을 택하고자 한 선비가 ‘내가 있고 물이 흐르는 자연[계산(溪山)]’의 ‘심벽처(深碧處)’를 택한 다음 ‘장왕불반’의 종적을 스스로 기탁하는 경우가 그것이다.16) 즉 산수 간에 정자나 누대를 지은 상태에서 지어진 ‘기문’을 보면 ‘장왕불반’을 추구하고자 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오래 떠나 돌아오지 않으면서’ 한 정자에서만 머무른다면 우리 백성은 어찌할 것인가. 비록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때라는 것을 알고 풍진 세상을 벗어나는 것’은 참된 선비의 뜻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의 거취에 어찌 참견하리오.17)
이처럼 ‘장왕불반’을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는,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인물이 여전히 유가적 삶을 견지하면서 상황에 따라 은일적이면서 탈속적 삶을 살아가는 경우다. 유학자들에게 ‘장왕불반’을 하더라도 ‘신독(愼獨)’, ‘毋不敬(무불경)’, ‘사무사(思無邪)’, ‘무자기(毋自欺)’ 등으로 상징되는 경외(敬畏)적 삶과 예법이 지배하는 삶을 충실하게 살다가 산수 자연을 벗삼아 ‘음풍농월’하는 쇄락(灑落)적 삶을 추구할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18) 따라서 어떤 한 인물이 ‘장왕불반’을 선택하는 경우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가 하는 전반적인 정황을 심도 있게 접근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다.
김시습의 ‘장왕불반’에는 당시 조선조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자 한 깊은 뜻이 있었다. 이유태(李惟泰)는 김시습은 ‘장왕불반’을 통해 홀로 충성과 절개를 지켰다는 점에서 백세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19) 즉 김시습은 ‘장왕불반’을 통해 도리어 유학자들이 지켜야 할 충성과 절개의 본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역설이다. 김시습의 ‘장왕불반’을 이해할 때는 이런 시각에서의 이해가 요구된다. 이산해가 던진 ‘왜 김시습이 미친 자처럼 행동하여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는가’하는 의문점에 대한 해답은, 바로 김시습 자신이 살던 시대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었다. 이런 분석을 통해 보면, 김시습의 광기어린 행위를 단순 ‘미친 짓’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다른 차원의 이해가 요구된다. 김시습을 ‘양광(佯狂)’이라 규정한 것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이밖에 김시습이 다양한 상황에서의 절제되지 않은 ‘울부짓는 것[哭]’과 같은 거침없는 감정 표출은 유가의 중화미학에 근간한 ‘원이불로(怨而不怒)’와는 거리가 먼 행위다. 아울러 ‘극도로 우수에 젖어 들고, 강개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응어리진 가슴을 풀 수 없을 때’라고 할 때의 ‘극도로’, ‘강개한 것’, ‘응어리진 것’ 등과 관련된 다양한 감정 표출도 중화미학에 근간한 ‘온유돈후(溫柔敦厚)’한 감정 표현과 거리가 멀다. 이처럼 김시습은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토로하였는데, 그런 광기어린 진솔한 감정표현은 그의 거침없는 호방하면서도 담대(膽大)한 ‘시어’에서도 잘 나타난다.
먼저 「방언(放言)」이란 제목의 시를 보자. 상당히 긴 시인데 핵심적인 것만 보자.
한 알 좁살같은 몸 가지고
다시 어찌 마음이 심한한가
백년도 한번 숨 쉴 시간
만사는 오히려 바쁘기만하다
얻고서는 잃을까 두려우니
어찌 주공과 공자를 숭상할 겨를이 있겠나
… 중략 …
사람됨이 성품이 방만하여
일 마다 너무 나태하다.
산 뜬 달에 촛불 있고
솔바람에 관현악이 있다
한가한 중에 여러 권 책 읽으며
목마르면 일곱 주발의 차를 마신다
마음은 마땅히 이러한 즐거움에 놀아야지
어느 겨들에 좋고 나쁜 것을 견주리오
… 중략 …
사람들 억지로 맞고 보냄이 정말 싫어
이 몸을 뽑아내서 푸른 산골짜기에 누웠다
시비와 영욕이 내게 무슨 소용일까
솔바람 불어와 홰나무 그늘 꿈을 깨운다
오랫동안 안개와 노을에 머물며
도토리 주워 음식 만들어 아침저녁 보낸다
돌 평상에 베개 높이 베고 편안하게 자는데
꿈속에라도 속세의 길로는 날아가지 않으리라.20)
일단 ‘방언’이란 시 제목에 주목하자. ‘방’자는 흔히 ‘광방(狂放)’, ‘방일(放逸)’ 등과 같이 유가의 예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할 때 주로 사용된다. 공자가 정나라 소리는 감정을 제멋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정나라 소리는 내친다[방정성(放鄭聲)]’21)라고 하듯이 유가의 시각에서 볼 때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 등을 배척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멋대로 지껄인다는 ‘방언’은 감정의 절제됨과 온유돈후함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가장 경계하는 말투에 해당한다. 부질없는 인생사에 웃고,22) 산수 간에 몸을 기탁하면서 일생동안 공명에 관심이 없었던23) 김시습은 「방언」에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를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토로한다. 유가는 ‘택선고집(擇善固執)’을 통해24) 시비와 선악을 분명하게 가리고자 한다. 그 평가에는 중용을 기준으로 한 상대적 평가라는 점이 담겨 있는데, 김시습은 그런 상대적 평가에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한다. 「양주환심(佯酒歡甚)」에서는 “날 때부터 내치는 삶과 등한한 삶을 즐기면서, 세간의 명예와 이익을 상관하지 않았다.”25)라 하기도 한다. 유가는 ‘입신양명’을 통한 영예로움을 추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때론 잘못되면 욕됨을 당하는 삶을 산다. 그것은 모두 유가가 지향하는 ‘명도구세(明道救世)’를 실천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밝음과 어두음의 양면성이다. 하지만 김시습은 시비와 영욕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방관하는 자세를 보인다.
유가는 아울러 인간관계의 조화로움을 꾀하고자 한다. 하지만 김시습은 산에 사는 삶을 통해 인간관계를 단절하는 은일적 삶을 지향한다. 독서를 하고 차를 마시다가 때론 술을 거나하게 마신 다음26) 돌 평상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자면서 절대로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다. 특히 주공과 공자를 숭상할 겨를이 없다는 도발적인 발언이나 「감회(感懷)」에서 ‘경서와 역사책으로 배 채우지 말고, 재주와 명예 헛되이 몸만 괴롭히니, 베개 높이 베고 잠잘 생각이나 하라는 것’ 등을 말하는데,27) 이런 발언 등 ‘명도구세’를 추구해야 하는 유가 선비상에 비추어 본다면 용납될 수 없는 사유와 몸가짐이다. 이처럼 은일을 지향하면서 때론 ‘방약무인’한 행태를 보이고 아울러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삶의 방식에는 일정 정도의 광기가 서려 있다. 「대언(大言)」이란 제목의 시에서는 광기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푸른 하늘에 낚시대 던져 큰 자라 낚으니
하늘과 땅, 해와 달이 내 손 안에 담겨 있었다
하늘 밖 구름 위 나는 따오기 거느리고
산동의 세상 덮던 세상 호걸 손바닥에 쥐었다
삼천 진토 부처 세계에 다다르고
만리에 성난 고래 같은 물결 삼켜버렸다
돌아와 인간 세상 좁음을 헛되이 비웃으니
팔백 가운데 고을에 다만 하나의 터럭이었다고.28)
인간 세상을 떠나 천상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황당무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시어 하나하나가 ‘대언’에 딱 맞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마치 ‘구름 기운을 타고 비룡을 몰아 사해 밖에 노닌다’고 한 광자 ‘접여(接輿)’가29)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천계의 세상에서 노닐다가 인간 세상에 돌아와 보니 이 인간세계가 얼마나 좁은지를 알겠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하나의 기준을 통해 시비선악을 가리고 서로 다투면서 사는 삶이 좁은 소견머리의 소산임을 말해준다. 다만 「대언」에서 말한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인지를 따져보면 실현성이 문제가 된다는 점은 주희가 광자를 규정한 ‘지향하는 뜻은 지극히 높지만 실천이 안된 것[志極高而行不掩]’이란 것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대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대언’이라기보다는 ‘광언(狂言)’에 속하는데, 그 광언같은 황당무계함 속에 광기가 듬뿍 담겨 있다. 맹자는 ‘광자’를 규정할 때 그 속성으로 ‘지대(志大)’와 ‘언대(言大)’를 거론한다.30) ‘방언’, ‘대언’ 등과 같은 시의 제목만을 봐도 ‘지대와 언대’로 말해지는 광자적 풍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지대’와 ‘언대’의 또 다른 표현은 바로 ‘방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김시습의 광기 어린 행태에 대해 이이(李珥)는 선조의 명을 받고 지은 전기에서 “‘마음은 유교에 있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하니[심유적불(心儒迹佛)]’ 시속(時俗)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이에 ‘일부러 광태’를 부려,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31)라고 기술하고 있다.
사실 김시습은 그런 혼탁한 시대에 얼마든지 타협하고 살 수도 있었지만, 김시습은 거부하고 이른바 생육신의 길을 택한다. 그 생육신의 실천적 모습은 광기어린 삶으로 나타났다. 즉 광기어린 삶은 때론 ‘장왕불반’의 삶, 탈속적 삶을 살면서 세상을 질시하는 거친 발언과 대담하고 원대한 포부를 펼친 것, 거짓된 미친 짓 등과 같은 행동거지로 나타났다. 유가의 눈으로 볼 때 이런 김시습의 행동거지는 ‘심광’이면서 ‘형광’에 속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심광’과 ‘형광’의 몸짓에는 부조리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었다.
Ⅲ. ‘색은행괴(索隱行怪)’로 평가된 삶과 광기
‘심광’과 ‘형광’의 몸짓은 색은행괴라는 차원으로 이해되는 경향과 아울러 정욕 긍정으로 나타난다. 조선조 역사에서 진리인식에서 열린 사유를 보인 대표적인 인물 중 한사람인 박세당(朴世堂)은 김시습을 ‘특립독행(特立獨行)’이런 점에서 평가한다.
더구나 청한자(淸寒子=김시습)와 같이 참으로 옛날 이른바 ‘특립독행’하여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돌아보지 않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32)
김시습의 ‘특립독행’, ‘장왕불반’ 및 기타 유가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괴이한 행동거지에 대해 스스로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서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일탈의 행동을 하는 인물 이른바 청광(淸狂)으로 일컬어질 것이라고 읊은 적이 있다.
자연에 노니는 게 버릇이 되다보니,
입신양명 출세하는 꿈일랑은 잊은 지 오래.
방학이라 책 팽개치고 노는 어린애처럼,
격구장 말처럼 신나게 뛰어다녔지.
나막신 신고 온 산 후비고 다니니,
떠오른 시상 읊자 초가에 가득 차네.
후세 사람들이 응당 나를 비웃겠지.
천지 사이의 한 ‘맑은 미치광이[淸狂]’라고.33)
군자가 되려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유가 성인의 말씀이 담긴 배움을 다 내 팽개치고, 과거를 보는 것은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이제 나를 옭아매는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니 남의 눈에 의한 평가를 신경 쓰는 ‘신독’의 삶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이에 들로 산으로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면서 자연과 하나 되니 시상이 절로 떠오른다. 그 시상을 읊으니 한 두편이 아니다. 이같은 생활이 버릇이 되자 유가가 추구하는 입신양명은 저만치 멀리 있다. 김시습은 자신의 이런 행동거지를 보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난 자신의 맑은 삶을 ‘청’이라 할 것이요, 자신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광이라 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진단하고 있다. 김시습의 이같은 ‘청광’을 후대에는 노장사상에 심취했던 유몽인(柳夢寅)이 ‘화광동진(和光同塵)’하지 못한 삶과 처신에다 적용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지난번 유몽인에 대한 「신설판부(伸雪判付)」에서 단종의 여러 신하들 중에 특별히 김시습을 거론한 것은 이유가 있다. 유몽인은 이조 참판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자신의 빛을 숨기고 세속과 어울렸다[和光同塵]’면 무슨 벼슬인들 하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흉론(兇論)인 폐모론(廢母論)과 의견을 달리하여 명리를 헌신짝처럼 던지고 기꺼이 산수 사이에 자신을 맡겨 시에 능한 승려 및 깨달은 승려와 여름 겨울을 함께 지냈다. 유몽인의 이같은 행동은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속세를 떠나 영원히 돌아가지 않고자 맹세한[傲世逃俗, 永矢不歸]’ 김시습 ‘청광’의 본색이다.34)
이상은 비록 유몽인의 행적을 말한 것이지만, 이같은 유몽인의 행적을 김시습이 행한 이른바 ‘장왕불반’에 해당하는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속세를 떠나 영원히 돌아가지 않고자 맹세하였다’라고 한 ‘청광’과 비유하여 말한 것을 참조하면, 김시습은 후대에 ‘청광’으로 이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김시습의 ‘청광’을 유가의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말하면, 김시습은 ‘(중용의 도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은미한 것을 찾고, 현실에 맞지 않는 괴상한 일을 행하는[색은행괴(索隱行怪)]’한 인물에 해당한다. 김시습에 대한 후대 평가에서 주목할 것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평가인데, 서로 다른 평가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중용』11장에서 ‘색은행괴’에 대해 ‘중용’을 기준으로 하여 비판한 적이 있다.35) 김시습에 대해 그가 ‘색은행괴’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이황과 같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부정적으로 보는 정주이학을 추숭하는 유학자들에게서 나온다.
매월[=김시습]은 특별한 일종의 기이한 인물로 ‘색은행괴’의 무리에 가까운데, 만난 세상이 마침 그러하여 드디어 그의 높은 절개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가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글이나 『금오신화(金鰲新話)』같은 것을 보면 아마 ‘높은 소견과 원대한 식견[고견원식(高見遠識)]’을 지나치게 인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36)
이황은 김시습의 높은 절개를 평가하는 것 같지만 속내는 그것이 아니다. 김시습의 높은 절개는 시대가 만든 것이라는 식으로 평가한 것은 결국 김시습의 행동거지를 평가 절하한 것에 속한다. 이황은 특히 『금오신화』에 대해서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홍석주(洪奭周)는 ‘일이 옛것을 스승하지 않는 경우’, ‘말한 것이 선왕의 전훈(典訓)을 본받은 것이 아닌 경우’와 더불어 ‘색은행괴하는 것’ 등을 이단으로 지목한 적이 있다.37) 홍석주의 논의를 따르면 김시습은 결국 이단의 부류에 들어가게 된다. 이황의 평가를 참조하여 말하면, 김시습이 공자가 말하지 않은 ‘괴력난신’과 ‘색은행괴’를 소설화 한 것이 『금오신화』다. 『금오신화』라고 할 때의 ‘신(新)’자에는 기본적으로 공자가 말하지 않은 ‘괴력난신’에 해당하는 내용 및 유가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광기어린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금오신화』에는 유가의 중화미학이 지향하는 ‘온유돈후’함이나 “정에서 펴되 예의에 그쳐야 한다[發乎情, 止乎禮義].” 등에서 벗어난 ‘색은행괴’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예를 보자.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와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서는 한바탕 꿈을 통해 이승의 인간이 귀신, 용왕 등 이른바 환상의 캐릭터들과 만난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김시습은 이같은 『금오신화』를 쓰고 난 다음 읊은 시38)에서 “한가히 인간에서 보지 못한 글을 짓는다.”, “풍류스러운 기이한 이야기를 낱낱이 찾아본다.”라고 한다. 그런데 『금오신화』를 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浦記)」 등에 보이는 당시 나라의 국가의 무능함과 군주의 혼매함이다. 김시습은 「만복사저포기」에서는 “지난번에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왜놈들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생민들을 노략질하니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하였습니다. 우리 친척과 종들도 각기 서로 흩어졌었습니다.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소녀의 몸이라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깊숙한 규방에 들어 앉아 끝까지 정절을 지켰습니다.”라고 기술한다.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에서는 “신축년(1361년)에 홍건적이 서울을 점거하자 임금은 복주(福州)로 피난 갔다. 적들은 집을 불태워 없애버렸고,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잡아먹었다. 부부와 친척끼리도 서로 보호하지 못했고 동서로 달아나 숨어서 제각기 살길을 찾았다.”라고 기술한다.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에 따른 불행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백성들의 고난을 기술한 것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위정자에 대한 직간접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유가의 예법에서 벗어난 인간의 정욕에 대한 진솔하고도 긍정적인 기술을 보자. 특히 유가예법지상주의에서 가장 문제시 하는 여성에게 보이는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정감 표현을 눈여겨보자. 「이생규장전」에서는 최랑이 이생에게 “다음날 규중의 일이 누설되어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제가 혼자 책임을 떠맡겠습니다.”라 하고, 부모님에게는 “저 혼자 생각해보니 남녀가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인정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합니다”라 한다. 「만복사저포기」에서는 여인이 양생에게 “어버이께 여쭙지 못하고 시집가는 것은 비록 예법에 어그러졌지만”이라 한다. 「취유부벽정기」에서 시녀가 홍생에게 “저희 아가씨께서 모시고 오라 하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여성들이 자신들의 남성에 대한 욕망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점은 유가의 예법에서 볼 때 매우 음란한 행위로서 용납할 수 없는 부적절한 행위에 속한다. 이상 『금오신화』에 담긴 유가가 제시한 질서와 법도에서 벗어난 ‘괴력난신’적 요소와 진솔한 정욕 표출에 대한 긍정에 담긴 사유를 단순히 허황되고 괴이한 이야기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그것에는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유가의 예법과 질서에 의해 질곡당한 삶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황처럼 김시습을 비판하면 김시습이 지향한 사유는 상당히 왜곡되어 이해될 수 있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김시습은 주희가 ‘광자’를 평가할 때 규정한 ‘지극고이행불엄(志極高而行不掩)’39) 차원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높은 소견과 원대한 식견[高見遠識]’40)을 가진 인물에 해당한다. 이런 점은 이이가 행한 김시습에 대한 평가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황과 달리 선조의 명으로 「김시습전」을 쓴 이이는 김시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김시습은)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 하니, 그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굳이 ‘명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 그는 절의를 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해와 달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이는 나약한 사람도 용동하게 되니, ‘백세의 스승이라 한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애석한 것은, 김시습의 영특한 자질로써 ‘학문과 실천’을 갈고 쌓았더라면, 그가 이룬 것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41)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한 자질’을 소유한 인물이지만 유가의 예법을 무시하고 학문과 실천에 문제가 있다는 이른바 ‘실천성 결여’에 대한 지적은 이른바 ‘지극고이행불엄’ 차원에서 평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식의 평가는 유가차원에서 광자를 평가할 때 주로 적용된다.42) 이이는 이런 문제점이 있지만 결론적으로 ‘절의를 세우고 윤기를 붙들어 맨 것’ 등을 통해 ‘백세의 스승’이라 극찬한다. 이이같은 인물이 김시습을 ‘백세의 스승’이라 극찬한 것은 조선조 전체 역사를 통해볼 때 자주 볼 수 있는 발언은 아니라고 본다.43)
시대상황에 따라 김시습이 영특한 자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애석함을 토로하기는 하지만, 이이같은 대유학자가 이같이 과찬하다 보니 김시습을 ‘만세사표(萬世師表)’인 공자와 비교하는 인물도 있었던 모양이다. 맹자는 “성인은 백세의 스승인데, 백이, 유하혜가 그들이다.”44)라고 한 적이 있다.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윤춘년(尹春年)을 평가하되 윤춘년이 김시습을 극찬한 것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이이는 “춘년은 사람됨이 경망하며 그 학문이 심히 잡박하여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들을 주어모아 스스로 자랑하며, 스스로 도를 얻었다”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면서, 그가 “김시습은 동방의 공자다. 공자를 못 보면 열경[悅卿= 김시습의 字]을 보면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을 문제 삼는다. 이이는 “윤춘년이 김시습에게 취한 것은 모두 속설로 전하는 괴상한 사적들로서 사실은 김시습의 일이 아니었다.”45)라고 하여 김시습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취할 것을 말한다. 이이가 김시습에 대해 ‘백세의 스승’이라 하지만 ‘공자’라고 한 것까지는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조선조를 대표하는 두 유학자가 김시습에 대해 서로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린 것은 그들의 철학과 이단관이 기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두 대유학자의 서로 다른 평가는 실상 김시습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조 이단관의 역사를 보면, 정도전(鄭道傳)은 「심리기삼편(心理氣三篇)」에서 리(理)[=유가], 기(氣)[=도가], 심(心)[=불가]로 구분하되 최종적으로 ‘리유심기(理諭心氣)’를 주장하면서 벽이단론(闢異端論)을 펼쳐 조선조 유학자들의 벽이단론의 서막을 연다. 이황은 리(理)의 ‘불물어물(不物於物)’의 사유와 ‘리귀기천(理貴氣賤)’, 극존무대(極尊無對)의 ‘리우월주의’를 펼치면서 노불(老佛)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런 사유에서는 기로서 이해되는 노장사상은 전혀 용납될 수 없고, 김시습을 ‘색은행괴’하는 인물로 평가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비해, 이이는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와 ‘이기지묘(理氣之妙)’를 주장하는데, 이런 사유는 정도전이나 이황이 노불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사유와 차별화된다. 즉 리를 유학으로 볼 수 있다면 기에 해당하는 노장은 무조건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의 경우는 왕명에 의해 쓴 것이기에 칭찬할 수밖에 없는 점도 있었겠지만, 조선조에서 최초로 『노자』에 대한 일종의 주해서 성격을 갖는 『순언(醇言)』을 저작하고, 아울러 ‘이기지묘(理氣之妙)’를 주장한 이이 입장에서는 김시습의 광기어린 행위를 일정 정도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이에 이이는 김시습을 ‘겉으로는 불자지만 속으로는 유자[심유적불(心儒迹佛)]’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런데 이황처럼 유가의 시각에서 김시습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하면 할수록 김시습이 그만큼 광기어린 삶을 살았음을 반증한다.
조선조 역사를 볼 때 한 인물의 행적을 ‘색은행괴’로 평가한 것은 많지 않다. 김시습이 이황에 의해 ‘색은행괴’로 평가받은 것은 도리어 그의 광기어린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색은행괴’로 평가받은 이런 점을 진리인식 차원으로 말하면, 유불도 삼교에 통달한 김시습은 어떤 하나의 사유를 진리라고 여기지 않은 자유로운 심령과 열린 진리관을 견지한 인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김시습은 ‘청광’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이가 김시습이 영특한 자질로써 ‘학문과 실천’을 갈고 쌓았더라면 이룬 것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한 것은 전형적인 광자의 행태였다.
Ⅳ. 나오는 말
정주이학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에서도 조선조에는 몇몇 광자적 삶을 산 인물들이 있다. 조선조에서 광자적 삶을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는 인물들에 대해 허목(許穆)은 세상의 변고를 당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은둔하면서 깨끗한 삶을 산 인물들이 있었는데, ‘성인’은 그 몸을 깨끗함에 맞게 하고 세상을 등진 것이 권도에 맞는 사람인 경우는 허여하였다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청사열전(靑士列傳)」을 쓴 적이 있다.46) 김시습, 정희량(鄭希良), 정렴(鄭𥖝), 정작(鄭碏), 정두(鄭斗) 등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들은 유가의 시각에서 보면 모두 기이한 인물들에 속한다. 이른바 광자들로서,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노장사상이나 도교에 매우 심취하거나 혹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이황에게는 ‘색은행괴’한 인물로 평가받았고, ‘장왕불반’하는 삶을 살면서 스스로 ‘청광’이라 일컬은 김시습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이가 김시습을 ‘심유적불’이라 규정하지만 김시습의 한국도교사에서의 위상을 고려하면 도교를 추가하여 이해할 필요도 있다.47)
이처럼 조선조 유학자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때론 ‘청광’이라 말해지는 김시습은 조선조 역사에서 보기 드문 ‘형광’이면서 아울러 ‘심광’의 삶을 산 인물이었다. 심광은 ‘대언’과 ‘방언’을 통해 표출되거나 혹은 『금오신화』와 같은 ‘괴력난신’이 담긴 저서를 통해 표현되었다. ‘형광’은 유가의 ‘원이불노’ 차원의 삶을 거부하거나 혹은 유가가 지향하는 예법지상주의와 ‘명도구세’의 삶을 거부하는 ‘방외’적 차원의 광방한 행동거지로 나타났다. 그 ‘형광’과 ‘심광’의 삶에는 김시습의 당시 시대적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겨 있었다. 유불도 삼교 및 승(僧)과 속(俗)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던 김시습의 자유로운 영혼과 광기어린 삶은 조선조에서 정주이학이 득세하기 전이지만 조선유학사를 볼 때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이가 김시습이 영특한 자질로써 ‘학문과 실천’을 갈고 쌓았더라면 이룬 것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한 것은 전형적인 광자의 행태로서 김시습을 평가한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김시습의 ‘광자’ 성향을 다루는데 더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김시습이 『이소』를 읽고 통곡했다는 점과 관련된 동아시아 문화상에 나타난 이런 계통 조류에 대한 배경적 인식과 영향 관계에 대한 체계적 언급, 중국역사에 나타난 죽림칠현의 혜강, 완적, 유령 등의 방달한 행위와 관련된 ‘광자’ 적 성향이 김시습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하는 것, 조선 전기 유가에서도 도교 수련을 행하고 분방한 기질을 발휘한 인물들[예컨대 화담 서경덕 계통 및 단학파]이 적지 않았던 조선 전기 사상적 기풍 속에서 형성된 문화적 조류의 존재와 연관된 사유 등도 김시습의 광자적 성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이런 점은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