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현대사회를 다원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현실은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나 가치들의 수평적 공존이나 조화로움을 보여주기보다는 적대적 대립관계로 표면화되어 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관용과 조화라는 비폭력성에 근거해 있기보다는 지배라는 폭력성에 근거해 있다. 적과 동지, 선과 악이라는 적대적 대립 구도 속에서 자행되는 ‘타자’(남)에 대한 폭력적인 동화(同和)와 배제의 태도는 다원주의적 정치적 현실에서 우리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타자’는 ‘나’와의 대등한 대화의 한 축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자기성을 확보하거나 확증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순사상, 특히 대순사상의 철학적 원리인 음양합덕(陰陽合德)의 해석적ㆍ실천적 틀로서 기능하는 대대성(對待性) 원리와 만난다. 유아론적 사고가 ‘완성된 ‘나’’에서 출발하여 ‘타자’를 대상화 내지 도구화한다면, 대대성 원리는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태도를 제공한다. 대대성 원리는 존재론적으로 ‘완성된 ‘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나’의 자기성을 확보할 수 있고 확장할 수 있다는 논리에 기초해 있다. ‘나’라는 존재의 자기성은 이미 충만한 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대순사상의 대대성 원리에 대한 기존 논의는 동양적 맥락의 국지성, 특히 음양론적 접근에 머물러 있다. 서양철학과 대비되는 틀 속에서 서양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물로서 대대성 원리가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성은 한편으로 서양철학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현대서양철학의 흐름은 서양 근대의 유아론적 사고방식에 대한 자기반성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대서양철학의 현상학적 조류는 ‘타자’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이원론적 대립관계의 틀 속에서 대대성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상반응합(相反應合)이라는 대대성 원리 그 자체의 의미를 탈구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필자는 대순사상의 대대성 원리에 대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어울림을 모색하고자 한다. 특히, 필자는 현상학자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의 ‘살(flesh)’개념에 주목한다. 그의 ‘살’은 ‘나’와 타자라는 이원화된 틀 속에서 ‘나와 타자와의 근원적인 연루(involvement)’를 추동시키는 모태이다. 그래서 ‘살’적 존재로서의 ‘나’는 ‘보면서(타자를 보는 주체) 보여지는(타자에 의해서 보여지는 객체) 이중적인 지위’ 속에서 구성되어지는 애매하고 불충만한 존재이면서, 타자와의 부단한 상호교류를 통해서만 ‘나’의 자기성을 완성해 가는 그런 존재이다. 이처럼 그의 ‘살’개념은 서양 근대철학에서 배제되어 왔고 소외되어 왔던 ‘타자’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복원함으로써, 우리에게 ‘타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대순사상의 대대성 원리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을 통하여 대대성 원리에 대한 동ㆍ서양적인 어울림을 모색하고자 하는 본 논문은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첫 번째는 음과 양의 근원적인 연루이다(2장). 본 장에서는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해석을 벗어나 개체성보다는 ‘관계의 존재론적인 우선성’을 강조하는 대대성 원리에 대해서 탐구한다. 두 번째는 ‘서로 마주보는’ 대대 관계의 의미생성의 역학이다(3장). 여기서는 음과 양이 어떻게 응합(應合)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 즉 ‘서로 마주봄’이라는 대대적 관계의 이중적인 운동성에 대해서 고찰한다. 세 번째는 음양 대대의 상보성이다(4장). 여기서는 음양 대대의 이중적 운동성의 두 축인 ‘나’와 타자의 실존적 의미를 규명함으로써 음과 양의 이중적 운동성에 의해서 생성되는 의미가 음양 대대의 상보성로 귀결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Ⅱ. 음과 양의 근원적인 연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관계개념은 이미 주어진 혹은 고정된 의미를 지닌 이것(陽, 나)과 그것(陰, 타자)이 관계의 양 축으로 하여 서로 연계되거나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일상적인 관계개념의 틀 속에서 우리는 이미 주어진 이것(혹은 그것)의 의미론적 경계를 확보하거나 확증한다. 일상적인 관계개념은 관계 그 자체를 통해서 이것(혹은 그것)의 내적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자기성을 확보 내지 확증한다. 이것의 입장에서 그것은 항상 객체로서, 그것의 입장에서 이것은 항상 객체로서만 놓여져 있다. 이런 점에서 일상적인 관계개념은 관계의 상대방을 대상화하는 논리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일상적인 관계개념 속에서 기술될 수 있는 대상화의 논리로서 배제(exclusion)와 포섭(subsumption)을 제시한다. 한편으로, 배제의 논리는 이것과 그것 간의 배타적인 관계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이것의 자기성을 확보 내지 확증하는 것을 말한다. 배제의 논리는 나의 삶의 경험적인 총체성과 타자의 삶의 경험적인 총체성을 배타적으로 위치시킴으로써 나의 자기성을 확보 내지 확증한다. 이는 타자의 삶과의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관계 속에서 나의 경험적인 자료를 체계화한다.1) 다른 한편으로, 포섭의 논리는 이것과 그것 간의 상호인정(inter-recognition)의 관계 속에서 그것의 인정을 통한 이것의 자기정당성을 확보 내지 확증하는 것을 말한다.2) 물론, 포섭의 논리가 타자에 대한 인정을 전제하지만 포섭의 논리 역시 배제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쪽의 입장(이것)에서 또 다른 한 쪽(그것)은 자기정당화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대대성 원리는 일상적인 관계개념과는 다르게 관계개념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역전시킨다. ‘상대가 존재함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가 존재한다’’3)라고 하는 대대적 관계는 개체성보다는 ‘관계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강조한다. 이미 고정된 의미를 지닌 이것과 그것이 있고 이들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관적인 관계의 틀 속에서만 이것과 그것은 그 각 각의 의미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서 이것의 의미는 그것의 존재를 전제할 때에만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특정한 사물이나 개념을 대대적 관계 속에서 본다는 것은 이것에 대한 고유한 속성에 대한 탐구와 이러한 탐구에 근거한 다른 것들(그것들)과의 비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또 다른 한 쪽(그것)과의 상관적 관계 망 속에서 이것(혹은 그것)의 의미를 규정하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관계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보이는 것’(陽)과 ‘보이지 않는 것’(陰)이라는 이원화된 구도 속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대립적이거나 모순적인 관계의 두 요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이자 짝으로서 기술된다. 존재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이자 짝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각 각의 개별성을 띤 채로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면서 서로 결부되어 서로를 발현시킨다는 뜻이다.4) 그래서 ‘보이는 것’이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보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보이는 것’과 짝을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이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마치 존재 속에서 현전과 부재가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안과 겉이다.
우리는 대대성 원리의 이러한 ‘관계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음양상합(陰陽相合)5)에서도 읽을 수 있다. 『전경』에는 ‘음양상합’을 “음양이 서로 합한 후에는 변화의 길이 있다”(陰陽相合然後 有變化之道也)라고 기술함으로써, 음과 양의 관계가 새로운 존재에로의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제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는 단순히 『전경』에 기술된 문자풀이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대대성 원리의 기본적인 속성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음과 양은 상호 연관된 혹은 상호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짝으로 제시되고, 이러한 상호관계 속에서 음과 양은 그 각 각의 개별적인 의미를 지닌다. “세계를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상대짝’으로 이대별(二大別)한 다음, 그것들의 상대적 소장(消長)이 생생불기(生生不己)하면서 세계라는 유기적인 정합체를 이루어 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연역적 바탕이 되어 음양설은 여러 가지 기타의 체제로 인신(引伸), 부연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음양설은 음과 양이 어우러져서 이루어내는 유기체적 정합성이 핵심개념이다.”6)
이처럼 대대적 관계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이해가 ‘이것과 그것과의 근원적인 연루(involvement)’를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근대 서양철학의 유아론적 사고가 이것을 위한 그것의 수단화를 지향한다면, ‘관계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강조하는 대대성 원리는 이것에 대한 그것의 존재론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7) 이제 세계에 대한 의미는 독백적 자아의 선험적 이성에 의해서 혹은 우리 신체의 경험적 귀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와의 근원적인 연루’라는 틀 속에서 표면화되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경향성(inclination)8)에 기초해 있다. 다시 말해서 타자에 대한 부정은 결국 ‘나’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나’와 타자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틱나한(N. H. Thich)의 『평화로움』에서 기술된 ‘풀과 땅’이라는 시는 ‘이것과 그것의 근원적인 연루’라는 대대적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대대적 관계로서의 풀과 땅은 상대방의 존재 없이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성립할 수 없다. 풀은 땅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을 키워가고, 땅은 풀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을 더욱 비옥하게 한다. 풀은 마침내 땅으로 돌아가고, 다음해 봄이 되면 땅은 새로운 풀을 생성시킨다. 풀과 땅은 대대적 관계로서 서로 마주하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서 서로 변화하는 상생(相生)적 관계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정음정양(正陰正陽)’의 형식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억음존양(抑陰存陽)’10)이 이미 주어진 혹은 고정된 의미의 음과 양의 수직적이고 배타적 관계를 상징화한 표기라면, ‘정음정양’은 ‘이것과 그것의 근원적인 연루’라는 대대적 관계의 형식을 상징화한 표기이다. 이미 주어진 혹은 고정된 의미로서의 음과 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어울림’ 속에서만 의미가 생성된다는 대대적 관계는 음과 양의 존재론적인 수평성, 즉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동시에 함께 있다’라는 ‘일음일양(一陰一陽)’11)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Ⅲ. ‘서로 마주보는’ 대대관계의 의미생성의 역학
대대성 원리가 ‘음과 양이 서로 감응함으로써 조화되고 합일(合一)된다’는 ‘상반응합’(相反應合)적 사고라고 할 때14), 음과 양의 상호 감응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며, 이러한 상호 감응으로 형성되는 합은 어떤 형태이며, 그리고 음과 양의 상호 감응을 추동시키는 힘의 출처(sauce)는 무엇인가? 이 세 가지의 물음은 관계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전제로 하는 대대적 관계의 의미생성의 역학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의미생성과 관련된 음과 양 간에 이루어지는 운동형태에 대한 분석,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생산되는 의미의 형태에 관한 분석, 그리고 이러한 운동을 유발 내지 추동시키는 모태(matrix)에 대한 분석으로 구체화된다.
관계의 한쪽은 바라보는 자(주체)로서 관계의 또 다른 쪽은 보여지는 자(객체)로서의 지위를 가진 일반적인 인식론적인 틀은 의미나 가치의 생성에 있어서 관계의 양 축이 상호 감응하기보다는 바라보는 자인 주체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보여지는 자로서의 객체는 단지 주체에 의해서 판별되어지는 대상일 뿐이다. 여기서 주체는 항상 투명하고 자명한 존재로서 세계에 대한 의미나 가치의 판단자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데카르트(L. Descartes), 칸트(I. Kant), 헤겔(F. Hegel)의 주체는 세계에 대한 판단자로서 주체 내적인 오류 내지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 자기충만한 보편적인 존재자이다.15)
반면에 ‘서로 마주보는’ 관계로서의 대대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론적인 틀을 벗어난다. ‘서로 마주보는’ 관계로서의 대대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이중적인 운동성에 놓이게 한다. ‘이것’은 ‘그것’을 보고 있지만 가역적으로 ‘그것’ 또한 ‘이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관계 속에 놓여 진 이것(혹은 그것)은 보면서(주체) 동시에 보여지는(객체) 이중적인 위치에 놓여져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이것’과 ‘그것’의 이중적인 운동성을 지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운동으로 기술한다.
보는 것이 시선의 촉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보는 것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존재의 질서에 등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보는 자는 그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서 이방인일 수 없다. … 보는 것은 다른 봄이라는 안감으로 덧대어져 있다. 그 다른 봄이란 밖에서 본 나 자신, 즉 보이는 것의 중심에 위치한 채로 어떤 장소로부터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또 다른 누군가가 바라볼 때의 나 자신이다.16)
그래서 ‘서로 마주보는’ 대대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어지는 의미는 이것(주체)의 일방적인 능력에 의해서 구성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그것과의 교차 속에서 구성된다. 이것은 주체로서 그것을 보고 있지만 가역적으로 그것에 의해 보여진 이것(객체화된 이것)을 동시에 보고 있는 것이다. ‘보면서 보여지는’ 이러한 이중적인 운동성 속에서 의미가 생성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그것)의 의미는 ‘주관적인 이것(그것)’에 그것(이것)에 의해서 보여진 ‘객관화된 이것(그것)’이 제약(constraint)하는 형태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마주보는’ 대대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의미는 관계의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힘에 의해서 이끌려서 생성되는 것17)이 아니라,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一陰一陽)18) 이것(陽)과 그것(陰) 간의 교역(交易) 속에 생성된다.
메르로-퐁티는 이것과 그것 간의 교역을 이것과 그것 간의 얽힘(entanglement), 교차(intersection), 혼합(mixture)으로 기술하고 있다. “내가 반성에 의해 보편적인 정신으로 나아가고자 함은 … 나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얽혀있음으로부터, 나의 지각장이 다른 사람들의 지각장과 교차됨으로부터, 나의 지속이 다른 사람들의 지속과 혼합됨으로부터 그 동기를 얻는다. … 내가 반성의 길을 갈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내가 타자들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이 매순간마다 나의 반성을 생육시킨다.”19)
이것과 그것 간의 교차로서 의미가 생성된다면, 의미로서의 합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는가? 메를로-퐁티는 이것과 그것의 교차로서의 합을 이것과 그것이 일정한 거리두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상호 맞물림으로 기술하고 있다.20) ‘이것과 그것의 교차’를 상호 맞물림으로 기술한 이유는 ‘이것과 그것의 교차’가 이것과 그것의 완전한 일치로서의 융합(unification)을 의미하는 것21)이 아니라 이것과 그것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분리된 채로 상호 교차적인 형태로 부터 오는 접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견 ‘차이 속의 동일성’22)이라는 말이 이러한 교차적 접점을 잘 표현한 은유라 할 수 있겠다.
합의 형태가 이것과 그것의 완전한 일치가 아니라 교차적 접점이라는 점에서, 개별자로서의 음과 양은 그 각각 속에 상대편의 타자성을 품고 있다. ‘음 속에 양’(陰中陽), ‘양 속의 음’(陽中陰)이란 바로 이를 지시한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보이는 것’의 개별성은 엄밀히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안감으로 둘러싸여 있고, 거꾸로 ‘보이지 않는 것’은 실제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23)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자의 개별성이란 실은 개별 존재자의 고유한 속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이중적인 운동성 속에서 생성되는 교차적 접점, 즉 음과 양의 혼합 내지 뒤섞임 속에서 생성된다.
이러한 합의 형태에 대한 예를 우리는 계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사전에서는 양과 음을 대표로 하는 건(乾)과 곤(坤)을 제시하면서 세계를 천지(天地)의 교합(交合)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마치 자식을 잉태하는 부모처럼 천지는 세계를 생성하는 부모처럼 비유되며, 이 천지의 교차적 결합으로 세상의 만물이 산출되고 존재한다.24) 여기서 우리는 6개의 괘(간괘(艮卦), 태괘(兌卦), 진괘(震卦), 손(巽卦), 감괘(坎卦), 리(離卦))가 건과 곤의 교차로서 형성된다는 점과 이러한 교차로서 형성된 6개의 괘는 음과 양의 혼합과 뒤섞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불(離)과 물(坎)은 순양과 순음의 효(爻)가 아니라 양효(陽爻)와 음효(陰爻)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을 상징하는 리괘(離卦)는 두 양 사이에 음을 품고 있고, 반대로 물을 상징하는 감괘(坎卦)는 두 음 사이에 양을 품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의 따뜻함과 밝음의 성질을 순양으로 생각하지만 불을 상징하는 리괘는 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양으로, 물을 상징하는 감괘는 양의 기운을 내부에 품고 있는 음으로 괘의 형상을 이룬다.25)
그렇다면 ‘이것과 그것 간에 이루어지는 이중적인 운동성’을 추동시키는 모태는 무엇인가? 『주역』에서는 이것을 태극(太極)이라고 명명하였고, 메를로-퐁티는 이를 ‘살’(flesh)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주역』에 따르면, 거대한 유기체인 우주는 생명의 현상으로 제시된다.26) 생명의 현상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역동적으로 반복되고 전개되는데, 이것이 변화이다.27) 존재의 본연의 모습은 이처럼 생명의 변화로 상징화된다. 그런데 생명의 전개로서의 존재의 변화는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과 원리가 있고, 일정한 구조 속에서 정합적으로 원리가 확장되어 나아간다.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고, 태극은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으며, 팔쾌는 길흉(吉凶)을 정하고, 길흉은 대업(大業)을 낳는다.28)
여기서 태극은 음양 대대라는 존재의 원리의 한 측면을 내재하고 있다.29) 양의, 사상, 팔괘 모두는 그 구조의 복잡성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 엄밀하게 보자면 음과 양에 다름 아니다. 특히, 사상과 팔괘는 음양 대대의 틀 속에서 작동하는 음과 양의 이중적인 운동성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태극은 생명 변화의 원리로서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一陰一陽) 음과 양의 이중적인 운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태극은 역유태극(易有太極)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음과 양의 이중적인 운동성을 추동시키는 질료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30) 단지 태극이 존재의 원리만을 지칭하는 상징이라면, 실제적으로 생명의 변화(易)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존재의 원리에 이것을 운반하는 물질적인 에너지가 수반되었을 때에만, 생명의 변화는 일정한 구조의 틀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현상화될 것이다.31)
메를로-퐁티의 ‘살’의 존재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이원적 분화 속에서 존재를 사유하려고 하며, 이러한 본래적인 것의 이원화를 존재의 운동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보이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될 수도 있고, 양쪽을 지지하며, 양쪽을 풍부하게 하는 조직이다. 그래서 ‘살’은 사물이 아니라 잠재성, 가능성, 사물들의 ‘살’인 것이다.”32) 이같이 ‘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살’에 속하고, ‘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어주고 통일시키는 것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서 ‘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에 이루어지는 분화(分化, differentiation)와 증식(增殖, proliferation)을 추동시키는 모태로서 세상 모든 존재자들의 변화를 이끈다. 이런 점에서 메를로-퐁티는 ‘살’을 존재의 요소(element)로서 기술한다.
살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며, 실체도 아니다. 살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물, 공기, 흙, 불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사용했었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요소라고 하는 오래된 용어가 필요해 보인다. 요소는 일반적인 것, 시공간적인 개체와 관념의 중간에 놓여있는 것, 존재스타일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서라면 어디에서든 발견되는 존재 스타일이 중요한 일종의 육화된 원칙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살은 존재의 요소를 말한다.33)
특히, 존재의 요소인 ‘살’에 의해서 추동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에 이루어지는 증식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에 이루어지는 상반응합의 구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요소인 ‘살’에 의해서 추동되는 증식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상호 감응하면서 상호 맞물리는 형상에 대한 상징어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살’의 증식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에 이루어지는 이중적인 운동성이라는 존재의 원리와 이러한 원리를 추동시키는 질료적 이미지를 다 같이 함유하고 있다.
이같이 태극과 ‘살’은 공히 음(보이지 않는 것)과 양(보이는 것)이라는 이원화된 분화 속에서 생명 변화의 원리와 질료적 이미지를 다 같이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태극과 ‘살’은 음과 양 간에 이루어지는 이중적인 운동성이라는 존재의 원리와 이러한 원리를 추진시키는 힘을 다 같이 내포하고 있다. 물론 ‘살’개념은 태극보다는 실증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살’개념의 정립은 형이하(形而下)적인 지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경험에 대한 새로운 발견(나는 단지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바라보면서 바라보아진 자가되는 이중적인 운동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Ⅳ. 음양 대대의 상보성
3장의 분석이 음양 대대의 의미생성의 역학에 관한 것이라면, 본 장은 이러한 운동의 역학에 의하여 생성되는 의미의 실존적 의미를 규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음양 대대의 두 축인 ‘나’라는 존재의 실존적 의미와 타자라는 존재의 실존적 의미를 규명함으로써, 음양 대대의 이중적 운동성에 의해서 생성되는 의미가 음양 대대의 상보성34)으로 귀결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필자의 이런 방식은 음양 유행(‘살’의 분화)과 음양 대대(‘살’의 증식)의 교차적 분석, 즉 음양 분화에 대한 분석을 전제로 한 음양 대대의 의미에 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앞선 3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음과 양의 대대적 관계 속에서 세상의 만물들이 생성되어졌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이 ‘음 속의 양’(陽中陰), ‘양 속의 음’(陰中陽)이라는 형태로 구성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상 만물들이 ‘음 속의 양’, 양 속의 음‘이라는 형태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이 김형효의 표현처럼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애매한 존재임을 인지시킨다.35) 다시 말해서 ‘나’라는 존재의 현실태는 자기전개(自己展開)나 자기현현(自己顯現)이 가능한 오류가능성이 없는 완성된 형태의 존재가 아니라, ‘나’ 속에 타자성이라는 부정성을 품고 있는 결핍된 존재, 그래서 자기전개나 자기현현이 가능하지 않은 불충만한 존재로 제시된다.
존재자의 실존적 양태가 그 한 가운데 타자성으로서의 부정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자는 충만한 즉자일 수 없다. 똑같이 우리는 이 부정성을 실재하는 존재에 대비되는 무(無)로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이 부정성은 존재에 속하는 존재 내적인 부정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존재는 부재를 내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현존인 것이다. 이로써 존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 혹은 ‘야생적 존재’인 것이다.36)
‘나’라는 존재의 실존적 양태가 결핍된 존재이고 자기완성을 위한 자기전개를 할 수 없는 불충만한 존재라면, ‘나’라는 존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나’의 결핍의 흔적인 타자를 표면화할 수밖에 없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존재의 요소인 ‘살’의 분화 운동으로 설명한다. “‘살’은 보이는 차원에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특정한 경험적인 관계로 표면화된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특정한 경험적인 관계는 나와 타자와의 공동참여를 전제한다. 한편으로 ‘살’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특정한 경험적인 관계의 보이지 않는 차원을 내적으로 함유함으로써, ‘살’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열어서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부정성, 보이지 않는 차원을 계속해서 현상화한다.”37)
『정역』에 기술된 ‘土極生水 水極生火 火極生金 金極生木 木極生土’의 원리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물극(物極)이라는 조건 하에서 음과 양 간의 상호전화(物極必反)가 이루어진다는 이 원리는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 ‘일음일양’의 음양 유행적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한동석은 이러한 ‘오행변극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행의 상극원리는 土克水, 水克火, 火克金, 金克木, 木克土인데, 이것은 土水火金木은 본질적으로 水火金木土를 克한다는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土極生水 水極生火 火極生金 金極生木 木極生土’라는 것은 비록 土克水의 과정에 있어서도 그 極에 달하게 되면 極이 변하여 生이 되기 마련이요, 水克火의 과정에서도 그 極에 달하게 되면 極이 변하여 生이 되고 火克金의 과정에서도 그 極에 달하게 되면 極이 변하여 生이 되고 金克木의 과정에 있어서도 그 極에 달하게 되면 極이 변하여 生이 되고 木克土의 과정에서도 그 極에 달하면 極이 변하여 生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38)
이처럼 타자의 존재가 ‘나’의 내적인 결핍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래하는 것이라면,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기존의 대립이나 모순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기존의 모순개념이 완전하게 주어진 A에 대한 비A가 모순이고, 대립의 경우에는 완전하게 주어진 A에 대한 상반적인 관계로서의 B라면, 여기서의 타자는 ‘나’의 객관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A가 전적으로 A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흔적(trace)으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자는 ‘나’라는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증거로서 혹은 ‘나’라는 존재의 실정성(positivity)에 대한 한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가령, 우리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라는 짝을 대립적 관계로서만 이해해 왔다. 개인의 권리로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와 사적인 삶보다는 공동체적 삶을 중요시 여기는 공동체주의는 분명 대립적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사회주의나 공동체주의 출현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우리에게 이들이 자유주의의 내적 불완전성을 증거하는 한계적 담론임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18~19세기 형식적인 평등에 기초하여 공동체적 삶보다는 사적인 삶을 지향하는 자유주의의 헤게모니화가 통시적인 차원에서 생성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흔적들, 즉 부의 극심한 양극화에 의한 비참한 노동자들의 삶과 공동체의 공동감 상실에 의한 개인들의 아노미 현상 등은 사회주의(socialism)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라는 타자 출현의 물질적 토대가 된다.
‘나’에게 있어 타자가 ‘나’의 내적 한계를 증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타자는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반성적 자료의 역할을 한다. ‘나’의 결핍의 흔적인 타자의 존재는 ‘나’의 삶에 대한 부단한 의문과 물음을 제기케 하는 물질적인 토대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반성과 물음은 데카르트(R. Descartes)나 칸트(I. Kant)의 자기충만한 주체와는 결별한 ‘결핍된 주체’에 의해서 행하여진다. 투명하고 선험적인 의식에 기초하여 실행되는 반성이나 회의가 아니라 결핍된 주체로서의 ‘나’와 그런 결핍의 한계를 증거하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행하여지는 반성과 회의인 것이다. 이러한 반성과 회의는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一陰一陽) 음과 양의 이중적인 운동성 속에서 보여주는 음양 대대의 상호제약에 다름 아니다.
안영(晏嬰)의 다음의 문구는 이러한 결핍된 주체와 그러한 결핍을 증거하는 타자와의 상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군이 가(可)하다고 한 바에 부(否)가 있으니 신하가 그 부를 드려 그 가를 이루며, 군이 부하다고 한 바에 가가 있으니 신하가 그 가를 드려 그 부를 제거합니다. 그래서 정치가 화평하게 되어 충돌이 없어지고 민심이 다투지 않게 됩니다. … 그런데 지금 양구거는 그렇지 아니하니, 군이 가라고 한 바에 거도 또한 가라고 하며, 군이 부라고 한 바에 거도 또한 부라고 합니다. 마치 물에 물탄 듯 하니 누가 먹겠으며, 비파와 거문고가 한 가지 소리만 내는 것 같으니 누가 듣겠습니까.39)
위에서 언급된 ‘가’와 ‘부’의 관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립적인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언급된 ‘‘가’하다고 한 바에 ‘부’가 있다’는 이 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의 ‘부’는 ‘가’의 반대로서의 ‘부’가 아니라 ‘가’를 완전한 ‘가’로서 정립할 수 없는 증거로서의 ‘부’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핍된 ‘가’와 이것의 증거로서의 ‘부’와의 대화적 관계 속에서 ‘가’는 한 층 더 자기완결성에 도달한다. 이처럼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서로를 전복(overturn)하려는 적대(antagonism)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보완해 주는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40)
이러한 음양 대대의 상보성은 팔괘도 상에서 보여주는 괘들의 배열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천지가 자리를 정하고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하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부벼 일으키며 물과 불이 서로 쏘지 아니하며 팔괘가 서로 섞인다.41)
위의 문구는 복희선천팔괘의 기초로 기술되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천지(天地) 산택(山澤) 뢰풍(雷風) 수화(水火)는 그 각 각 건곤(乾坤) 간태(艮兌) 진손(震巽) 감리(坎離)의 괘상(卦象)이다. 괘체(卦體) 그 자체를 살펴보면 음과 양의 구성이 완전하게 정반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동시에 서로 서로 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괘들의 대대적 배열 속에서 이괘와 대대적 관계에 있는 저괘는 이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이 둘의 이중적인 운동성으로서의 교차는 서로의 한계를 보완해 준다.
음양 대대의 상보성에 대한 위의 기술을 통해서, 필자는 올바른 음과 올바른 양이라는 정음정양(正陰正陽)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2장에 기술된 정음정양이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一陰一陽) 음양 대대의 이중적 운동성을 위한 음과 양의 형식적 측면에 대한 기술이라면, 음양 대대의 상보성은 우리에게 정음정양이 음양 대대의 이중적인 운동성을 위한 질적인 측면, 즉 타자(남)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문제를 제기한다. 서양 근대의 유아론이 타자(남)를 대화의 상대편으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배제나 지배의 대상으로 규정한다면, 음양 대대의 상보성을 위한 정음정양은 타자(남)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태도에 기초해 있다. 타자(남)는 ‘나’의 완전성을 입증하기 위한 혹은 방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의 결핍을 증거하고 나의 결핍을 보완해 주는 고맙고 은혜로운 존재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순진리회 훈회(訓誨)는 타자(남)를 고맙고 은혜로운 존재로서 인식하고 대우하라는 규범체계에 다름 아니다. ‘언덕을 잘 가져라’, ‘마음을 속이지 말라’, ‘척을 짓지 말라’,‘은혜를 저버리지 말라’, ‘남을 잘되게 하라’42)라는 훈회의 내용은 타자(남)지향적인 규범적 태도와 연결된다. 타자(남)를 나와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설정하느냐, 아니면 나의 결핍을 증거하고 그래서 나의 결핍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존재로서 인식하고 대우하느냐는 매우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타자(남)를 나와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관계로 위치지우는 것은 나와 타자(남)와의 관계를 화해불가능한 관계로 전환시키는 반면, 타자(남)를 나의 결핍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나의 결핍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으로서 타자(남)를 위치지우는 것은 나와 타자(남)와의 관계를 화해가능한 관계로 전환시킨다.
Ⅴ. 결론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타자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파고드는 타자의 시선을 인식한다. 타자의 슬픔을 보면서 ‘나’도 같이 즉발적으로 슬퍼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타자는 항상 우리의 곁에서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나’에 대한 타자의 이러한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타자와의 거리두기를 행한다. 단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질적인 것으로서 아니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나에게 있어 타자는 나의 주변을 맴도는 귀찮은 존재이거나 경쟁의 대상일 뿐이다.
왜 우리는 우리에게 항상 결부된 것으로 다가오는 타자를 이렇게 대우하는가? 무의식적으로 다가오는 타자에 대한 의식적인 거리두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필자는 ‘나 중심적인’ 서양 근대의 유아론적 사고방식에 그 원인을 돌리고 싶다. 서양 근대의 유아론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표면화되는 다층적인 경험들 중에서 사랑과 같이 아무런 목적이나 조건 없이 다가오는 ‘나와 타자와의 어울림’을 철저히 배제시킨다. 단지 이 입장은 이러한 경험을 일상적 삶 속에 한 번씩 나타나는 신기루처럼 여긴다.
이처럼 서양 근대의 유아론은 타자와의 거리두기 속에서 나와 타자가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에 몰두한다. 하지만 이 입장은 타자를 여전히 나와 상관없는 이질적인 것으로만 취급하기 때문에 이 입장에서 기술되는 나와 타자와의 평화로운 공존 가능성은 잠정협정(modus vivendi)일 가능성이 높다. 나와 타자 간의 극한적인 투쟁이 남긴 흔적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서 제기되는 나와 타자와의 협력적 상호관계는 특정한 국면의 도래와 함께 나와 타자는 또다시 아(我)와 피아(彼我)의 극한적 투쟁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대순사상의 대대성 원리는 아무런 목적이나 조건 없이 다가오는 ‘나와 타자와의 어울림’을 ‘근원적인 것’(the fundamental)으로 여긴다. 이 원리는 애초부터 ‘나’라는 관념이나 ‘타자’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 유아론에 대한 이 뒤집기 식 사고방식은 세상의 모든 개념을 ‘나와 타자와의 근원적인 연루’ 속에서 찾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칸트의‘ 도덕적 판단’이 ‘나’라는 존재의 도덕적 자율성에 근거해 있다면, 대대성 원리는 나에게 무의식으로 파고드는 타자의 시선이나 타자와의 정서적인 어울림(가령 惻隱之心)을 우리의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신체의 생리적 욕구에 대한 경계는 ‘나’라는 존재의 자율적인 도덕적 판단에 의해서 획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근원적인 연루 속에서 획정된다.
또한 대대성 원리는 ‘나’라는 존재의 자기완성을 타자와 관계 속에서 찾는다. 서양 근대 유아론적 사고방식이 자기전개나 자기현현이 가능한 충만한 ‘나’에서 출발한다면, 대대성 원리는 ‘나’를 애매하고 결핍된 존재로서 본다. 결핍된 존재로서의 ‘나’에게 타자는 나의 결핍을 증거하는 존재인 동시에 나의 결핍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존재이다. 결핍된 ‘나’와 ‘나’의 결핍을 증거하는 타자와의 상호 맞물림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자는 나의 삶을 귀찮게 하거나 방해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나의 자기완성을 이끄는 고맙고 은혜로운 존재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나와 타자와의 적대적인 대립관계를 화해가능한 관계로 전환시킨다. 타자를 나와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로서 인식하느냐, 아니면 나의 결핍을 증거하고 그래서 나의 결핍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존재로서 인식하느냐는 매우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타자를 나와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관계로 위치지우는 것은 나와 타자(남)와의 관계를 화해불가능한 관계로 전환시키는 반면, 타자(남)를 나의 결핍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나의 결핍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으로서 타자를 위치지우는 것은 나와 타자(남)와의 관계를 화해가능한 관계로 전환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