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문제 제기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 악을 막으려 하지만 하지 못한다면 무능한 것이다. 만약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다면 악의적이다. 신은 악을 막을 수 있고 또 막을 의지가 있는가? 그렇다면 악은 왜 있는가?”1) 종교학에서 이 문제는 신정론(神正論=辯神論, Theodicy)으로 불린다. ‘theodicy’는 그리스어 ‘theos’(God)와 ‘dikē’(justice)의 합성어로서 라이프니츠(Gottfried W. Leibniz, 1646~1716)가 만든 것이다. 신정론은 신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동정심이 있다는 사실, 전지전능하여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모순되지 않고 공존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2)
신정론 문제를 대순진리회 세계관 내에서 다룰 수 있을까? 사실, 모든 종교가 신정론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종교는 서양의 유대교ㆍ기독교ㆍ이슬람이다. 이들은 선하고 도덕적이며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강조하기 때문에 고통을 유발하는 악을 내버려 두는, 혹은 내버려 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유일신의 처지와 정의로움을 옹호하고자 한다. 만약 이들이 나름의 적절한 답안을 내어놓지 못한다면 유일신의 존재 가치는 훼손될 수밖에 없기에, 이들에게 있어 신정론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3) 이들과 달리 다신론 종교전통 혹은 인간을 중점으로 삼는 종교전통은 유일신에게 악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4) 이들은 고통의 원인을 악으로만 돌리지도 않고, 유일신의 책임으로만 돌리지도 않는다. 그들의 설명 방식은 다양하다.5) 따라서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유일신 종교전통의 신학 범주를 넘어서기 위해 신정론 문제를 일반화시켰다. 즉, 베버는 고통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를 악 이외에 좀 더 넓은 범주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신정론 문제를 규정했다.6) 그 결과, 각 종교가 고통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피고, 그것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각 종교의 특징을 드러내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 세계관 속에서 신정론 문제를 전개해보는 작업도 의미가 있다. 비교의 지평에서 대순진리회의 고유한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행 연구로는 두 가지를 조명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증산 종단 전체의 신정론을 살핀 김항제의 연구다. 그는 피터 버거(Peter L. Berger, 1929-2017)의 합리적-비합리적 신정론 유형 분류7)를 참고하여 한국 신종교의 신정론을 ‘종말론적 신정론’이라고 규정하였다. 김항제는 증산 종단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상세계의 건설에 인간의 역할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성사재인(成事在人)의 종말론적 신정론’을 갖는다고 말한다. 한국 신종교들은 종말의 지연으로 인해 신정론 유형에 변화를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증산 종단들도 증산 사후 일본 식민지가 끝나도 종말이 오지 않았기에 종말론적 신정론이 내세적 신정론으로 변화되어야 하나, 증산 종단 내부의 폭발적 분열로 인해 신정론을 적절하게 바꾸지 못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8)
김항제의 연구는 한국 신종교의 신정론과 증산 종단들의 신정론을 다룬 선구적인 것이라는 연구사적 의의를 가진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는 특정 종교전통의 신정론을 단일한 신정론 유형으로 한정한다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의 종교전통에 적용되는 신정론 유형은 복수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정론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단수가 아닌 복수의 신정론들이 동원된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의 자유의지 남용으로 악과 고통이 발생했다는 자유의지 신정론, 타인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고통을 겪는 고난의 종(the suffering servant)ㆍ자유의지 신정론ㆍ교육 신정론, 그리고 교류 신정론, 종말 신정론, 배상 신정론 등이다. 이들에 대한 개별 설명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9) 마찬가지로, 증산 종단들의 신정론, 특히 대순진리회의 신정론도 종말론적 신정론 혹은 내세적 신정론이라는 하나의 단수 형태로 기술되지 않는다. 여러 신정론들이 시대별로 중층적ㆍ중첩적으로 작동하는 복잡한 구조를 갖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둘째는 김항제의 연구가 증산 종단들의 개별 사례를 모두 살피는 작업을 생략하였다는 점이다. 대체로 한국 신종교 연구는 계열별로 분류된 것들을 묶어서 일괄적으로 기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시도가 의미가 있으려면 무엇보다 개별 교단들에 대한 정확한 정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김항제의 경우처럼 증산 종단의 신정론을 기술하려면, 당연하게도 증산과 관련한 개별 종단들의 신정론들을 먼저 파악하고 그 연후에 그들을 종합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것을 생략하고 증산 종단들이 모두 하나의 공통된 목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진행되는 일괄 기술은 실제의 종교현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증산 종단들은 교리와 경전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그들의 사상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므로, 그들의 모습을 하나로 담아낼 때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는10)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이 글이 증산 종단 전체의 신정론 대신,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으로 범위를 한정하려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국 신종교를 기술할 때 그 전체의 특징, 혹은 신종교 가운데 어느 특정 계열의 특징을 묶어서 일괄 기술하는 것을 바람직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개별 교단이 대개 소수 종교이므로 개별 교단을 하나하나 다루기보다는 여럿을 한 데 묶어 다루는 것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 그리고 개별 교단 연구는 호교론에 치우칠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는 소수 종교들의 개성을 탈각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무시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개별 교단 연구가 반드시 호교론적인 것도 아니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판적인 시각에서의 연구 자료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에릭 샤프(Eric J. Sharpe)와 로버트 윌켄(Robert Wilken)이 신학과 종교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종교학이 설 자리가 없다고 강조하였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11) 현대 종교학의 관점은 ‘종교(religion)’에서 ‘종교들(religions)’로, 다시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으로 옮겨지고 있고,12) 심지어 ‘종교하기/종교화(religioning)’로 변화해야 한다13)는 주장까지 대두되는 상황이다. 이 개념들은 서구 근대의 ‘릴리지온(religion)’ 개념 논쟁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즉, 릴리지온의 틀 속에서 종교와 종교현상, 종교문화를 설명하려고 했던 기존의 관행을 극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등장한 개념들이 ‘종교들’, ‘종교적인 것’, ‘종교하기/종교화’라는 것이다. 현대종교학의 이런 흐름은 종교에 대한 메타 담론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더 나아가 종교현상을 교리나 신앙을 넘어선 포괄적인 영역에서 보다 다양하게 포착하려고 한다. 특정한 하나의 종교 혹은 특정 계열의 종교에 대한 메타 담론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의 배경도 여기에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검토할 선행 연구로 차선근의 것이 있다. 그는 ‘고통을 겪는 참혹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신명들의 청원으로 최고신이 이 세상에 왔다’는 점을 들어 대순진리회가 고통 문제로부터 출발한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는 고통이 4종류, 총 9개의 모델로 유형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4) 특히 그는 대순진리회가 고통의 원인을 상극으로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덩어리 개념으로 보는 데 그친다면 고통의 실제 원인과 책임 문제, 해결책이 간과될 위험이 크다고 강조했다. 즉, 고통에 대한 설명에는 상극이라는 대전제를 두면서도, 각 구체적 상황에 따른 개별 원인 파악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15) 차선근의 연구는 고통의 원인과 책임 문제를 정교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가 신정론으로 이어지려면, 기존 신정론의 영역에서 고통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먼저 밝혀야 한다. 그가 말한 ‘상극’이라고 하는 틀이 대순진리회만의 고유한 관점이므로 ‘상극’을 이용하지 않고 고통을 설명하는 다른 종교들과의 비교가 어렵고, 또한 그의 연구에서의 상극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개로 구분되어 쪼개어진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이 이 글을 출발시키는 동력원이다. 글의 순서는 Ⅱ장에서 신정론을 구성하기 위한 틀을 먼저 구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Ⅲ장에서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을 기술하는 것으로 한다.
Ⅱ. 활용 도구와 접근 방법
이 글은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을 기술할 때, 이미 제시되어있는 각 종교의 신정론들을 ‘재활용’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기존의 신정론 유형들을 활용하여 그들을 짜깁기하거나, 또는 개념을 ‘변형’ㆍ‘추가’하는 방식으로 대순진리회 신정론을 표현하겠다는 말이다. 비교의 지평에서 어떤 종교적 개념들이 대순진리회 신정론의 바탕을 구성하고 있는지 쉽게 드러나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을 기술하기 위해 활용할 각 종교의 신정론들부터 열거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버거는 가장 합리적인 신정론을 카르마-삼사라 복합체(karma-samsara complex)로, 가장 비합리적인 신정론을 신비주의 신정론으로 두고, 그 사이에 천년왕국설(종말론적) 신정론ㆍ이원론적 신정론ㆍ기독교적 신정론 등을 하나씩 열거하는 방식으로 신정론들을 설명했다.16) 이 신정론들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기준으로 분류된 것들이어서 가치 평가적이라는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기독교와 불교, 힌두교 등의 주장을 담아내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버거의 것과 더불어 기본 자료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린(Green, Ronald M.)과 케슬러(Kessler, Gary E.)가 각각 정리한 것들이다. 그린은 린제이 존스(Lindsay Jones)가 편집한 “Encyclopedia of Religion”에서, 케슬러는 “Studying Religion: An Introduction Through Cases”에서 신정론에 대한 각 종교의 주장들을 정리하였다.17) 이들의 분류는 각 종교 내부에서 고통을 설명하는 논리에 따라 설정된 것으로서, 종교학 기초교재로 활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버거와 그린, 케슬러의 설명은 서로 겹치는 것도 있고 빠뜨린 것도 있으며, 용어에 차이가 있는 것도 있다. 이들을 모아서 정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 각각은 각 종교에서 주장하는 신정론의 내용을 기준으로 분류한 것이며, 버거와 같은 합리성ㆍ비합리성이라는 가치 기준은 배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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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원적 신정론(Dualistic theodicy): 선과 악의 두 동등한 초인적 힘이 경쟁 중이어서 아직 그 승부가 나지 않아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한다.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이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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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종말 신정론(Eschatological theodicy): 비록 지금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지만, 최후의 심판이 닥치면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고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는다. 기독교, 이슬람, 대승불교 일부, 카고 컬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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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내세적 신정론(Afterlife theodicy): 생전의 고통과 악에 대한 처벌 및 보상은 사후 내세에서 이루어진다. 기독교, 대승불교(예를 들어 지장신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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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카르마 신정론(Karma theodicy): 고통과 악을 겪는 이유는 전생에 지은 카르마의 인과관계 때문이다. 힌두교, 불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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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배상 신정론(Recompense theodicy):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죄에 대한 처벌로서의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도교(예를 들어 『태평경』의 冤結과 承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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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자유의지 신정론(Free will theodicy):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의지로써 그것들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며 신은 악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 기독교(주로 히브리 성서 이전), 이슬람, 유교, 도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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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영혼 성장 신정론(Soul-making theodicy)ㆍ교육적 신정론 (Educative theodicy): 신은 인간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성장을 유도하기 위해서 고통과 악을 만들어내었다. 기독교, 이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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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참여 신정론(Theodicy of participation): 가족이나 국가 같은 대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더 큰 가치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 참여하는 중이기 때문에, 내가 겪는 고통과 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유교, 수피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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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교류 신정론(Communion theodicy): 고통과 악은 신과 직접적 관계를 맺게 해주려고 존재한다. 기독교, 이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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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신비주의 신정론(Mysticism theodicy): 신성한 존재와의 합일을 추구하므로 악과 고통은 하찮게 여겨야 한다. 주로 신비주의 전통의 종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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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변화 혹은 과정 신정론(Change or Process theodicy): 신은 전능하지 않아서 모든 고통과 악을 통제할 수 없다. 단지 그것들이 가능한 한 작아지도록 유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과정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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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악의 존재 부정 신정론(Theodicy of denying the existence of evil):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힌두교(샹카라), 기독교(Mary Baker Eddy)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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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포기 신정론(Theodicy of submission)ㆍ유예 신정론(Deferred theodicy): 악과 고통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기에 설명을 포기한다. 기독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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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항의 신정론(Theodicy of protest): 그 어떤 신정론이라고 하더라도 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므로 인정할 수 없고, 다만 악과 고통의 존재에 대해서 신에게 항의해야 한다. 기독교(Elie Wiesel) 등.
글의 분량을 고려하여 각 신정론에 대한 짧은 설명만을 달았다. 자세한 내용은 버거와 그린, 케슬러의 자료를 참고하기 바란다.
각 종교는 위와 같은 신정론들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관점을 설명한다. 기독교를 예로 들면, 그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장들은 각각 ① 이원적 신정론, ② 종말 신정론, ③ 내세적 신정론, ⑤ 배상 신정론, ⑥ 자유의지 신정론, ⑦ 영혼 성장 신정론, ⑨ 교류 신정론, ⑪ 변화 혹은 과정 신정론, ⑫ 악의 존재 부정 신정론, ⑬ 포기 신정론, ⑭ 항의 신정론 등으로 표현된다.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을 기술한다면, 위와 같은 신정론들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혹은 기존의 개념을 변형ㆍ추가해야 한다. 대순진리회의 사상을 설명할 때 다른 종교의 신학이나 교학을 활용하는 것은 이해의 편이성은 있으나, 그것만으로 대순진리회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8)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그 전에 먼저 지적할 사항은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은 각 시대에 따라 논의를 달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증산은 삼계를 개벽시키고 지상선경을 이룩하는 천지공사를 시행하였다는 것이 대순진리회의 신앙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이전 세상을 선천, 이후 세상을 후천으로 구분하지만, 실제로는 선천과 후천 사이에 비교적 짧은 시간대인 과도기를 더 추가하여야 대순진리회 세계관에 대한 적확한 설명이 가능하다. 과도기는 증산의 천지공사가 시행되고 후천으로 이행되어 나아가는 시간으로서, 해원시대인 해원기(解冤期), 병겁(病劫)이 닥치는 병겁기(病劫期), 세상의 점진적인 변화 끝에 급작스럽게 펼쳐지는 대변혁기인 개벽기(開闢期)로 이루어진다. 대순진리회의 선천, 과도기, 후천에 대한 세계관은 각기 다르다.19) 그렇다면 대순진리회의 신정론도 각 시대에 따라 다르게 스케치 되어야 한다. 고정적이고 정형화된 하나의 시각에 의존하기보다는, 전체의 과정과 흐름을 포착해 낼 수 있는 유동적인 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선천과 과도기의 핵심 신정론을 구분하여 살펴보고, 거기에 덧붙여 더 적용해야 하는 신정론들을 추가로 파악하도록 한다.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후천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신정론을 논할 필요가 없다.
Ⅲ. 기존 신정론 유형으로 대순진리회 신정론 표현하기
대순진리회는 우주 만물의 관계망을 강조한다. 그 관계망은 상생과 상극으로 엮어진다. 상생은 돕고 살리는 것이요, 상극은 억제하고 누르는 것이다. 『전경』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세상인 선천은 상극의 지배를 받았다. 그 때문에 원한이 쌓였고 오랜 시간이 흐르자 세상은 참혹한 재앙을 맞이했다고 한다.20) 그러하다면, 대순진리회 신정론을 다룰 때 악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상극의 문제로 대치하여 기술되어야 한다.
첫째, 악이 선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면, 상극은 상생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는 왜 우주 운행의 법칙을 상생과 상극으로 설명하는가? 다시 묻자면, 대순진리회는 왜 우주가 상생과 상극의 관계 법칙 속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고 주장하는가? 이것은 만물 각각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대순진리회 내부 교설인 도서역(圖書易) 변천 과정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대순진리회를 창설한 박우당(朴牛堂, 1917-1996)이 1956년에 작성한 『태극도통감』에 따르면, 우주는 ‘탄생[봄] → 성장[여름] → 성숙[가을]’의 단계를 밟는다고 한다. ‘탄생’에 해당하는 것은 용마(龍馬)ㆍ하도(河圖)ㆍ희역(羲易)의 태호복희 시대, ‘성장’에 해당하는 것이 신구(神龜)ㆍ낙서(洛書)ㆍ주역(周易)의 우임금 및 주문왕(周文王) 시대, ‘성숙’에 해당하는 것이 곧 도래할 후천 이상향의 세계라는 것이다.21)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우주는 발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만물 역시 스스로 성장과 발전을 도모해야 함이 생의 기본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경우로 한정하면, 대순진리회 세계관으로 볼 때 인간 출생 목적은 자신과 가문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신계로부터 부여받은 특수한 임무를 인계에 펼치기 위해서, 또는 징벌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22) 이 역시 크게 보면 성장ㆍ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증산은 복을 받거나 하늘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먼저 고통부터 잘 참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여러 번 전한 적이 있다.23) 이 발언은 성장과 발전에 일정한 상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 위한 배경으로는 상생만이 아니라 상극도 필요하다.24) 예를 들어, 앞으로 걸어서 나아가는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면의 마찰력이 필요하다. 마찰력이 거의 없는 빙판은 걸어가기도 힘들고, 일단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통제도 불가능하다. 적당한 마찰력이 있는 바닥 면이라야 걸어서 나아갈 수도 있고 그것을 의지로써 다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마찰력은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는 힘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방해가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통제도 가능하다. 상극 역시 이와 같다. 만물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적절한 상극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 상극은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악이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선에 대비되는 개념인 악은 그 자체로 나쁜 것, 그릇된 것, 잘못된 것, 더러운 것으로 도덕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상극은 그 자체로는 도덕적 문제를 갖지 않는다. 우주의 운행 법칙 속에서 상생과 짝패로 존재하면서 성장과 발전을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극은 악과 곧바로 등치될 수 없지만, 필요악(必要惡, necessary evil)과는 가까운 개념일 수 있다. 필요악 역시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차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25) 다만 상극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지배로 인해 원한이 발생하고 그것이 풀리지 못한 채 누적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혼란을 가져다주는 동인(動因)이었다, 즉 극심한 고통과 악의 발생 원인이었다는 것이다.26)
셋째, 대순진리회는 상극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가혹하게 만든 또 다른 요인으로 신(신명)들의 착란(錯亂)을 주목하는 것 같다. 이 유추는 ‘명부의 착란에 따라 온 세상이 착란하였다’는 증산의 발언이나, “삼계가 착란하는 까닭은 명부의 착란에 있으므로 (상제께서는) 명부에서의 상극도수를 뜯어고치셨도다.”는 『전경』 서술로부터 나온 것이다.27) 명부(冥府)는 사후세계일 수도, 사자(死者)를 심판하는 저승의 법정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증산의 발언 행간으로부터 신명에게 나름의 착란이 있었고, 그것이 세상이 혼란스럽게 된 핵심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이상의 논의들을 모아 묶어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만물은 성장과 발전을 위해 상극과 상생의 관계를 갖도록 만들어졌다. 상극은 고통을 만들어내지만 성장과 발전을 위한 더 큰 가치를 구현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필요악과 유사한 개념이었다. 상극은 짝패인 상생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좋았겠지만 현실은 상극의 지배로 흐르는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발생한 원한은 풀리지 못한 채 누적되었으며, 명부의 신명들도 종종 착오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결과 세상은 엄청난 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이 선천시대의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볼 수 있는 신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정리해두었던 신정론들을 활용하여 여기에 이름을 붙여보도록 하자. 대순진리회는 고통과 악을 상극으로 설명한다. 상극은 상생과 짝패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원적 신정론을 떠올릴 수 있다. 다만 상생과 상극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극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로아스터교나 기독교, 이슬람이 선과 악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이원적 신정론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이 글은 대순진리회 선천 신정론의 특징을 살리기 위하여, 이원적 신정론에 ‘상극’을 덧붙여서 ‘이원적 상극 신정론(Dualistic Sanggeuk Theology, Dualistic Theodicy of Mutual Contention)’이라는 용어를 제안해본다.
상극이 우주의 성장ㆍ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은 영혼 성장 혹은 교육적 신정론을 주로 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상극이 상생과 조화하면서 성장과 발전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다면, 세상은 참혹한 지경에 빠질 리가 없었다. 신명의 착란과 실수도 세상의 혼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참상은 계획ㆍ설계된 것도 아니었고, 성장과 발전이라는 큰 그림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영혼 성장 신정론을 대순진리회 선천 신정론의 핵심축으로 삼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장과 발전이 전무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 부분적으로는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글은 ‘이원적 상극 신정론’을 큰 흐름으로 놓고, 영혼 성장 신정론을 일부 적용하는 것으로 대순진리회의 선천 신정론을 구성할 수 있다고 본다.
대순진리회는 증산이 천지공사로써 우주의 법칙과 운행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천지공사가 시행된 후부터 후천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과도기에는 선천과 다른 신정론을 생각해야 한다. 세계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가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
첫째, 대순진리회의 세계관에 의하면, 최고신은 신명의 하소연에 따라 인간으로 강세하여 삼계를 개벽시키는 천지공사를 시행하였고, 그에 따라 후천 이상세계가 열린다. 특히 개벽의 대변혁 순간에는 최고신인 증산이 48신장을 늘어세우고 이 땅에 내려와 신명을 포함한 만물을 심판하며, 그 결과 참된 자는 복을 얻어 장생을 누리지만, 거짓된 자는 영원히 멸망한다고 한다.28) 선천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극과 고통이 개벽시대에 벌어질 ‘대심판’으로 바로 잡힌다면, 이는 종말론적 신정론에 가깝다.29) 종말론적 신정론은 비록 지금 악이 횡행하더라도 결국에는 선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심판의 날에는 악한 사람들이 벌을 받고 선한 사람들이 상을 받는다고 강조한다.30) 대순진리회는 ‘종말’보다 ‘말세’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종말은 완전한 끝, 말세는 현시대의 종식이지만 완전한 끝은 아니라는 어감을 가진다는 이유 때문이다.31) 다른 종교와의 비교가 목적이었으므로 대순진리회가 선호하는 ‘말세’라는 용어보다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말’이라는 용어를 활용하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러나 ‘말세’든 ‘종말’이든 어느 용어를 선택하더라도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과도기의 대순진리회 신정론을 ‘말세론적 신정론’으로 부르기로 한다.
둘째, 증산이 천지공사를 마련해 놓은 이후 우주는 상생의 길을 걸어가도록 재조정되었으며, 그러한 시대에서 만물은 각자 자기의 의지에 따라 해원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32)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신명들과 인간들 역시 해원을 한다. 신명ㆍ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복수나 분풀이 또는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등의 부정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 승화된 긍정적인 방법, 즉 악을 선으로 갚아주며, 천한 사람을 우대해주고, 덕을 닦으며 사람을 올바르게 대우하고,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해원을 도모할 수도 있다. 당연히 부정적인 해원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것이고, 긍정적인 해원은 좋은 결과를 낳을 것[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33)]이라는 게 대순진리회의 설명이다. 이것이 바로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한다.34) 그렇다면 과도기에 존재하는 일정한 분량의 상극과 고통은(모두는 아니다) 신명ㆍ인간의 부정적인 해원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극복은 긍정적인 해원 방법으로써 이루어지며, 나아가 개벽 심판이 그 모든 것을 바로 잡는다. 따라서 과도기의 대순진리회 신정론은 해원 및 대심판 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천지공사 이후부터 개벽 이전까지 과도기의 대순진리회 신정론은 대심판, 말세론, 해원 관념을 주 내용으로 한다. 다른 종교들과의 차별성은 ‘해원’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도교나 무속 등에도 ‘해원’이 있고, 그들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배상 신정론의 한 사례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대순진리회의 ‘해원’은 그 규모나 주체에서 기존의 ‘해원’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기존 해원 관념의 주체가 망자이고 분풀이를 위주로 하며 당대(當代)를 그 시대적 배경으로 삼지만, 대순진리회에서 해원은 망자와 생자, 동물, 민족, 국가, 신명까지 그 범위가 넓고, 상생이라는 윤리적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후천이라고 하는 이상향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35) 기존의 신정론을 그대로 사용해서는 대순진리회의 고유한 색채를 드러낼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은 대순진리회의 과도기 신정론으로 기존 신정론인 말세론적 신정론에 ‘해원’을 덧붙여서 ‘말세론적 해원 신정론(Eschatological Theodicy in Resolution of Grievances)’이라는 용어를 제안하고자 한다.
한편, 과도기에도 선천의 몇몇 신정론들이 여전히 작동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과도기는 우주가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기간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상극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 상극은 앞서 언급한 신명ㆍ인간의 부정적인 해원으로 인해 나타난 게 아니라, 선천부터 이어 내려온 것이다. 개벽이 전개되면 상극이 완전히 사라지고 상생만이 존재하겠지만 아직은 과도기이다. 가까운 장래에 상극이 소멸할 운명이라는 점 때문에, 밤의 끝인 새벽이 가장 춥듯이 과도기의 상극 위세가 선천에 비해서 더 클 수도 있다. 물론 이원적 상극 신정론은 우주의 법칙과 그 잘못된 운행에 책임을 묻는 것인데, 그 상극 편중의 운명은 이미 천지공사로써 심판ㆍ결정되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천지공사의 결과가 완전히 드러나기 이전이기 때문에, 이원적 상극 신정론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주류는 말세론적 해원 신정론이고, 이원적 상극 신정론과 영혼 성장 신정론은 그에 차례로 종속되는 것으로 보면서 경우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도식화한 게 <그림 1>이다.
지금까지 선천 그리고 개벽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이원적 상극 신정론’, 영혼 성장 신정론, ‘말세론적 해원 신정론’을 적용할 수 있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이 외에도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더 있다고 해야 한다.
그 까닭은 첫째, 고통의 원인으로 상극만 강조하면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에 인간 책임 문제를 소홀히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고통 사례들도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대순진리회가 말하는 상극을 프리즘으로 투영시키면 그 안에는 다양한 양상의 상극들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기에, 그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36) 그렇다면 ‘이원적 상극 신정론’과 일정한 관련성을 갖는 몇몇 신정론들을 추가로 더 적용해야 한다.
둘째, 과도기에는 ‘말세론적 해원 신정론’을 적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개벽시대에 대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개벽 이전에도 심판과 처벌이 있다.37) 당장의 처벌을 가능하게 하는 상극은 먼 미래의 심판과 처벌에 의존해야 하는 ‘말세론적 해원 신정론’으로는 해명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과도기에도 ‘말세론적 해원 신정론’ 이외에 또 다른 형태의 신정론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 글은 앞에서 제시해 두었던 신정론들 가운데,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들을 더 추출할 것이다. 『전경』에는 대략 9개의 고통 모델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들은 책임 소재와 그 정도, 고의성 여부 등에 따라 세분된 형태인데, 크게 보면 태풍이나 지진과 같이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자연적 상극, 전쟁이나 차별 등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도덕적 상극,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을 가능케 하는 상극, 의를 실현하거나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 등으로 분류된다고 한다.38) 이를 하나씩 들여다보자.
첫째, 가뭄, 지진, 화산폭발, 태풍, 홍수, 질병, 한명(限命)은 선천에 존재했고, 과도기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 자연적 상극은 앞에서 기술했던 ‘이원적 상극 신정론’을 적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상극은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나, 그 법칙이 지배하는 형태가 되자 과도한 자연재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둘째, 『전경』에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상극이 다수 보인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권력 다툼, 도적질, 또는 잘못된 사회 관습이나 제도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39) 이 상극들은 선천에도 과도기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상극의 존재 혹은 편중이라고 하는 전제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원적 상극 신정론’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친다면 인간의 책임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 고통들은 인간 혹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의지로써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자유의지 신정론도 적용해야 한다. 한편, 이들로부터 어떤 교훈을 추출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영혼 성장 신정론은 적용할 수 없다.
셋째,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은 『전경』에도 종종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큰 죄를 지어 천벌로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것과 병으로 고통받은 끝에 잉태를 못하게 된 것이다.40) 선천에도 과도기에도 나타나는 이 처벌을 가능케 하는 상극을 설명하려면 배상 신정론을 적용해야 한다. ‘이원적 상극 신정론’은 그 배경 담론으로 활용된다.
유념할 사항은 “전명숙(전봉준)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 그리고 “죄는 남의 천륜을 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나니, 최익현이 고종(高宗) 부자의 천륜을 끊었으므로 죽어서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볼지어다.”라는 증산의 발언이다.41) 그러니까 대순진리회는 사후 심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개벽시대에는 ‘대심판’이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대심판 이전에도 심판이 있다. 대심판은 결정적 순간에 내려지는 최종적인 것이고, 전명숙과 최익현의 사례에서 보듯이 개벽 이전까지는 사후 명부에서의 심판이 지속된다는 게 대순진리회의 시각인 것으로 이해된다.42) 인간의 잘못은 명부 심판으로 처벌받는다는 사실은,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내세적 신정론이 적용 가능함을 의미한다. 대순진리회의 경전에 근거했을 때 대순진리회는 윤회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43) 그러므로 심판의 효력이 윤회를 통해서도 발휘되는 경우도 존재할 것이고, 그때는 카르마 신정론을 적용해 볼 수 있다.
넷째, 『전경』에는 의를 실현하거나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밝히고 있다. 동래부사 송상현의 절사(節死)나 49일간 떡을 한 시루씩 찌는 정성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다.44) 이 경우에는 더 큰 가치를 구현한다는 참여 신정론, 성장을 도모한다는 영혼 성장 신정론, 신과의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나간다는 교류 신정론 등을 적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기술을 모두 정리하면, 중층적이며 시대별로 다르게 읽어야 하는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을 <그림 2>와 같이 그릴 수 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설명해본다: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악과 고통의 문제는 상극의 문제로 대치되어 기술된다.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은 선천, 그리고 천지공사 이후부터 개벽 직전까지 후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만 논의할 문제이다. 후천에는 상극이 없기에 고통이 존재하지 않고, 신정론도 논할 필요가 없다. 선천과 과도기의 신정론은 각각 다르게 조명되어야 한다. 우주는 최고신이 전체적인 법칙을 주관하고, 실제 세부 운영은 하부 신명들이 담당하는 시스템으로 되어있었다. 우주의 운행에 있어서 만물은 상극과 상생이라고 하는 법칙을 갖도록 만들어졌다. 상생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 상극은 서로가 서로를 극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천은 상극이 지배하는 시기였다. 그 이유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가치를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상극은 결코 악의적인 의도에서 마련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상극은 본래 나쁘고 잘못된 것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상극의 지배가 오래 지속되자 상극으로 인해 발생한 원한이 풀리지 못하고 누적되었고, 우주의 법칙을 운용하던 명부의 신명들도 종종 착오와 실수를 일으키곤 했다. 이것이 점점 심화되자 세상은 엄청난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상의 상황을 ‘이원적 상극 신정론’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신명들로부터 우주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음을 보고받은 최고신은 우주의 실정을 살펴본 뒤 증산이라는 한 인간으로 강세하였다. 그가 천지공사를 시행하면서 개벽은 예정되었고 그에 따라 과도기가 시작되면서 신정론도 다르게 묘사된다. 그것은 개벽 때 대심판을 받는다는 사실, 그로써 신명ㆍ인간을 포함한 모든 악한 존재들은 소멸하고 지상에 천국이 열린다는 사실, 개벽이 도래하기 전까지 각자가 해원을 시도한다는 사실을 주 내용으로 한다. 이것을 ‘말세론적 해원 신정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은 이상 2개의 신정론을 핵심으로 삼으면서, 상황에 따라 영혼 성장 신정론, 자유의지 신정론, 배상 신정론, 내세적 신정론, 카르마 신정론, 참여 신정론, 교류 신정론 등을 중첩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Ⅳ. 닫는 글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는 신정론으로 악의 기원이나 신의 책임 문제를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인 악의 해결은 도모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관념적 차원을 넘어 행동과 감정의 차원에서 악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악의 존재에 대한 사변적ㆍ논리적 답변 대신, 악에 대항하고 비탄과 탄식의 행동을 유발하는 답을 찾으라는 것이다.45)
그의 말을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에 대입해보면, 다소 다른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최고신이 악의 문제, 즉 상극의 문제에 대해 직접 말하고 그에 대한 처방까지 제시했다는 것, 그리고 인간들에게 해원상생의 실천으로써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독려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최고신은 왜 악을 내버려 두는가?’ 하는 물음이 대순진리회에서는 ‘최고신이 상극을 말살시킨다고 했으니 이를 믿고 상생을 적극 실천하면 된다’는 식으로 변형되기 때문에, 대순진리회 신학 체계에는 물음과 해답, 그리고 실천 행동적 요령까지 이미 제시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신정론은 인간이 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이라면, 대순진리회의 신정론은 신이 직접 물음을 던지고 답하며 그 결과까지 제시하는 것으로 그려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정론이 최고신에 대한 신앙을 회의적으로 만드는 데 기능할 가능성이 높은 데 비해서, 대순진리회의 경우에는 신정론이 최고신 증산에 대한 신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김항제는 한국 신종교들이 예정되었던 개벽의 지연 때문에 신정론에 일정한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대순진리회의 경우에는, 개벽의 지연으로 인한 신정론의 변화가 당장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보는 데다가, 그 과도기에 벌어지는 사회적 모습들이 인류 역사에서 인간들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순진리회 도인들은 이러한 급변들이 증산의 천지공사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급변이 계속되는 한, 개벽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굳건할 것이고, 그 믿음은 신정론의 변화를 한동안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글을 닫으면서, 대순진리회의 신정론과 관련된 향후 숙제들을 더 언급해두려고 한다. 개론 수준을 넘어 각 신정론들 사이의 관계와 그들의 연결망이 그려내는 상극과 고통을 정밀하게 묘사해내는 것, 특히 그것이 차선근이 제안한 9개의 고통 모델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분석하는 것, 아울러 사례를 통해 다른 종교의 신정론들(악에 대한 설명, 종류와 원인, 대응 등을 포함하여)과 비교하는 것 등이 앞으로 남겨진 숙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있다. 그것은 상극이 상생과 ‘짝패’를 이루는 우주의 운행 법칙이라면 후천에도 계속 존재해야 마땅한데, 왜 후천에는 상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이 문제 풀이 역시 다음 숙제로 미루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