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본 연구는 대순진리회1)의 ‘포덕’2) 개념의 특징을 해명하는데 목적을 둔다. 대순진리회의 ‘포덕’이라는 용어는 동양 전통의 포덕이라는 용어와 중첩되면서, 그에 대한 이해에서 다소간의 오해를 야기한다. 다시 말해, 전통적 사유에 익숙한 일반인들에게 대순진리회의 ‘포덕’, ‘덕’ 개념은 유교적 덕 개념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유교적 문화에 익숙한 대중들은 대순진리회의 포덕과 덕 개념을 도덕적 차원에서 이해하게 하거나, 유교적 개념을 대순진리회가 전용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 노자의 ‘덕’ 개념과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을 비교하더라도 비슷한 문제를 노정할 수 있다. 노자에서 ‘덕’ 개념은 개별 존재자의 합목적성을 잘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때의 덕은 상생과 상생의 조건을 만드는 것까지 포함한다. 노자의 덕이 상생의 의미를 갖는다면,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이 상생이라는 궁극적 가치를 향해 귀결되는 점에서 유사 개념 혹은 유사 이해를 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대순진리회의 ‘포덕’ 혹은 ‘덕’ 개념은 동양 전통 사상의 덕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대순진리회에의 ‘포덕’ 혹은 ‘덕’은 그 전제가 ‘해원’과 ‘보은’이기 때문이다. 대순사상의 진리는 해원과 보은을 통해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해원’과 ‘보은’에 대한 해명과 이해를 전제해야만 대순진리회의 ‘포덕’ 혹은 ‘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의 ‘해원(解冤)’은 강증산의 천지공사를 통해 모든 원이 상생으로 풀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를 본받은 수도인들의 ‘척’을 푸는 종교적 실천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며 ‘보은(報恩)’은 증산의 천지공사에 대한 보답으로 도주 조정산이 종통(宗統)을 확립하여 진법을 세우고 교단을 형성한 포교오십년공부와 이를 기반으로 한 수도인들의 증산에 대한 신앙과 수도를 포함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의 ‘포덕’은 강증산의 천지공사(1901~1909)와 조정산의 오십년 공부(1909~1958), 그리고 두 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신앙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신도들의 종교적 실천을 의미할 것이다. 이 말은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이 동양전통 사상에서의 덕과는 차원이 다른 덕 개념이자, 종교 신학적 용어임을 추측케 한다.
다른 하나는 대순진리회의 입도식에 사용되는 녹명지의 기록에 의하면 강증산을 해원신으로, 그리고 강증산의 유지를 계승하여 현재의 대순진리회를 존재하게 한 조정산을 보은신으로 신앙하는 점에서, 해원과 보은은 종래의 전통적 사상에서 말하는 덕과 전혀 다른 차원의 덕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대순진리회의 포덕에 대한 선행연구들은 조태룡(1983)3), 남광우(1991)4), 김정태(1998)5), 주현철(1999)6), 차선근(2012)4) 등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들 선행연구들은 대순진리회의 종교 신학적 관점에서 ‘포덕’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에서는 동양 전통의 포덕 개념과의 비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동양 전통적 사유에 익숙한 필자를 비롯한 대중들은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을 동양 전통의 이론적(episteme) 덕이거나 실천적(phronesis) 덕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필자 역시 이 글을 쓰기 전에 그러한 오해를 했다. 하여 이 글에서는 동양 전통 사상의 덕과 대순진리회의 덕을 비교해서, 어떤 다름이 있는지를 밝히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또한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이 갖는 특징도 드러내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양의 덕을 공자가 사용하는 덕과 노자가 사용하는 덕 개념에 한정해 일별해 보고, 이를 기초로 대순진리회의 ‘포덕’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글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주나라의 종교 의례로서 덕이 어떻게 유가로 전유되면서 도덕적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를 해명하고, 3장에서는 덕이 어떻게 억압의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고, 이를 노자가 어떻게 비판하면서 새롭게 덕의 의미를 정의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선행적으로 이러한 정지작업을 한 이후 해원과 보원으로서 포덕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동양 전통의 덕 개념에 대한 정지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대순진리회의 포덕과 포덕의 궁극적인 결과인 상극이 사라진 상생의 개념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순진리회에서 사용한 충, 효, 예 등의 덕목들이 전통 사상의 덕목들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해원상생의 진리로부터 연역되어져 나온, 그래서 재정의된 덕목들임이 해명될 것이다.
Ⅱ. 종교적 의례로서의 덕, 그리고 유교에서 덕 개념의 전유
동양 전통 사상에서 ‘포덕’이라는 용어는 성인(聖人)인 왕에 의해 은혜가 베풀어지는 정치적 행위를 의미한다. 성인인 왕이 예악과 형벌을 제정8)하고, 이 예악과 형벌이 완벽하게 시행되는 정치적 실현을 덕치라고 정의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전장(典章)과 예악(禮樂), 형벌(刑罰)이 적절하게 시행된 상태인 덕치(德治)를 의미한다. 물론 왕의 시혜를 포덕이라고 표현할 때, 국가의 창고를 열어 흉년을 구휼하는 행위로도 사용된다.
이와 달리 대순진리회의 포덕은 해원과 보은을 통한 상생의 대도를 전하고 구현하는 것9)이다. 그렇다면 동양 전통 사유에서 포덕과 대순진리회의 포덕은 개념적 정의에서 최근류(종차)를 달리하는 전혀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대순진리회의 포덕은 종교적 의미에서 정의된 개념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말해, 동양 전통의 포덕 개념은 정치적 행위와 실천을 의미한다면,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은 강증산의 천지공사에서 비롯된 종교적 실천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의 분석을 잠시 미루고, 동양 전통사상에서 덕 개념을 정리해 보자.
동양 전통적 사유에서 덕(德)이란 의미는 그 시초에는 천명(天命)을 수수할 수 있는 자질을 의미했다. 유덕자(有德者)가 천명을 수수한다는 논리는 덕이라는 개념의 최초 의미가 종교적인 의례를 조심스럽게 삼가 실천할 수 있는 자질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덕이란 신과 왕을 매개하는 종교적 개념이자, 종교적 의례였다.
큰 무당으로서 왕10)이 천명을 수수하는 종교적 의례에서 요구되는 것이 경덕(敬德)이었다.11) 종교적 의례로서 ‘경덕’은 『상서(尙書)/주서(周書)』 소고(召誥)편12)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정복하고 새 도읍을 낙읍(洛邑)으로 정하고서 교제사와 사제사를 지내면서 “경덕보민(敬德保民), 이덕배천(以德配天)”이라는 명제를 천명한다. 이 명제가 제시되는 상황을 『상서/주서』 소고편에서 확인해 보면, 화자인 주공(周公)은, 주나라가 천제(天帝)의 명, 그러니까 천명을 받을 수 있었던 조건이 경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새 도읍인 낙읍으로 천도를 하고, 교제사와 사제사라는 종교적 의례를 주관하면서 주나라는 경덕을 유지하여 천제의 명을 받았으며, 천제는 백성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는 원망을 듣고, 이에 주나라에게 천명을 주었다13)고 선언한 것이다.
이 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나라의 창업자들은 천제를 신앙하는 다양한 제사에서 경덕의 자세를 유지하여 천명을 받아 만민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14) 다른 하나는 천명을 백성의 뜻으로 재해석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천제에 천명에 보답하는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천제로부터 천명을 수수하는 것과 천명에 보답하는 전 과정에서 ‘덕’이 중심축으로써 기능을 한다.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이덕배천(以德配天)”이었다. 그러므로 “경덕보민(敬德保民), 이덕배천(以德配天)”이라는 명제는 천명을 수수할 수 있는 자격이 바로 제왕의 자격이고, 제왕은 경덕(敬德)을 통해 천제와 소통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종교적 의례에서 요구되는 태도와 자질의 의미인 경덕이, 천자나 왕이 갖추어야 할 품성이나 자질을 의미15)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덕의 개념은 천자의 품성이나 자질의 의미에서, 천자의 통치 행위로 그 의미가 확대되어 간다. 천자의 통치 행위가 바로 교화이고, 이 교화에는 시혜의 의미가 첨가된다.16) 왕이 베푸는 시혜에는 전장(典章)과 예악(禮樂), 형벌(刑罰)과 같은 제도와 규범의 제정과 시행, 흉년의 구휼까지를 포함하는 덕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천제의 명을 수수 받는 종교적 의례의 실천에서 요구되던 덕은 이후 덕치라는 개념으로 정치적 의미로 전환된 것이다.
물론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덕의 개념은 왕의 전유에서 유가의 전유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을 이루어낸 인물이 공자이다. 공자는 사(士)집단17)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런 공자가 국가의 전장(典章)과 예악(禮樂), 역사를 편찬해 낸다. 물론 그는 스스로를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술이불작(述而不作)”18)하는 사람임을 내세우면서 왕을 대신해 전장과 예악과 형벌, 역사 등의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편찬 작업들은 덕을 유가의 전유물로 이해하게 했다.19) 공자의 “술이부작”이라는 선언은 주나라의 천자로부터 제후국에 이르는 대일통(大一統)사상이 무너지면서, 왕화(王化)가 시행되지 못한 상황에서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자신이 담지하겠다[吾從周]는 선언인 셈이다.
이러한 선언으로부터 공자는 관방(官方)의 전적(典籍)과 교훈(敎訓)들을 자신의 말로 가져오고, 천자의 명에 의해 사관이 작성해야 하는 천자의 고유한 권한인 역사를 편찬하거나, 예악의 정리를 전담하는 실천을 보인다. 공자의 이러한 저술 행위는 사(士) 계급에는 전혀 맞지 않는 월권행위에 해당한다.20) 우리는 공자를 ‘소왕(素王)’이라고 칭하는 것을 안다. 이 소왕이라는 칭호는 공자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부여된 것이다. 하지만 소왕의 소(素)는 왕의 지위가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왕이 아니면서 왕 노릇을 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임계유에 따르면, 이러한 공자 신화화는 송나라에 이르러 공자를 “알인욕(遏人慾), 존천리(存天理)”를 한 성인이라든가, “천인성성(踐仁成聖)”을 완성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금욕주의 실천을 하면서 깨달음을 완성한 승려로 묘사되기에 이른다.21)
어쨌든 공자는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를 소인유(小人儒)와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공자가 스스로를 소인유와 구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신이 유(儒) 계급이지만, 소인유와 다른 유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 계급 중에 ‘유’는 부자나 귀족의 예(禮)를 자문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이 자문 역할로 생계를 유지했다. 공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사(士)로서 유(儒)는 “집을 나와서는 귀족인 공경(대부)을 섬기고, 집에 들어가서는 부형을 섬기며, 상례에는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22)는 존재였다. 이에 대해 임계유는 공자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을 때는 부자나 귀족의 상장례를 도와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말한다.23)
공자의 말에서 “상례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에 주목해 보자. 공자로부터 학습되고 연습된 예24)는 공자의 제자들에 의해 『예기』라는 책으로 집대성된다. 그런데 『예기』 49개 편 전체의 내용 대부분은 상장례에 관한 기록이다. 결국은 공자가 소인유를 거부하고 있지만, 공자를 비롯한 유가들의 내원은 부자들과 귀족들의 상장례는 돕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하급 사(士)인 것이다.25)
유라는 사 계급의 이러한 성격을 보여 주는 내용을 묵자(墨子)에서 찾을 수 있다. 묵자가 유자를 비판한 내용에서도 유자가 상장례를 주관한 집단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묵자는 유자를 상가 집의 개[부자집에 상이 나면, 유자들은 큰 소리로 기뻐하며 “이번일로 옷과 밥을 얻겠다.”라고 말한다]26)라고 하거니와, 상례를 주관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에 상례가 엄격하고 장기적이어야만 했다고 본다. 그래야만 유(儒)의 수입이 는다.
유는 귀족들에게 복무하는 무(巫), 사(史), 축(祝)에 속하는 사(士) 중에서도 축관(祝官)에서 분파되어 나온 무리이다.27) 우리가 제사에서 축문을 읽어서 조상신을 강림케하는 사람을 축관이라고 하듯이, 축은 종교적 의례나 상례에서 강신을 주관하는 사(士) 계급에서도 낮은 계급에 속했다.28)
어쨌든 공자의 월권행위는 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왔다. 공자는 덕을 군자29)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재해석해 낸다. 덕 개념을 전유한 공자와 공자의 이념을 따르는 유가에 이르러서 덕 개념은 군자의 자질을 의미하고,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이제 덕 개념은 유교의 핵심 이념이 되어, 유학은 덕성을 해명하고 덕성을 높이며, 덕성을 함양하는 이론적 체계로 구성되게 된다. 『중용』의 “존덕성이도문학(尊德性而道問學)”30)라는 문장이나, 『대학』의 “명명덕(明明德)”31)이라는 문장은 이러한 유교가 어떻게 덕 개념을 전유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때 유가들이 덕을 전유하면서, 유교의 이론적 토대로 삼은 것을 철학사에서는 덕의 내재화32)라고 부른다. 덕의 내재화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오는 전거들은 『시경』33), 『춘추좌씨전』34)과 『상서/주서』35) 등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이들 전거들은 천자들이 경덕한 자세로 제사할 때, 불려진 시와 그 제사 의례에서 행한 경덕으로부터 부여되는 천명을 말한 구절들이다. 이 내용 역시 사 집단이 전유할 내용이 아니다. 이러한 천자의 종교적 의례의 내용을 사 집단이 소유하고, 전유한 사례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예기(禮記)/예운(禮運)』에는 이를 비판하면서, “복을 비는 말들을 기록한 글을 종축과 무사가 간직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이는 나라의 정치를 혼란하게 하는 것이다(祝嘏辭說, 藏於宗祝、巫史, 非禮也, 是謂幽國).”라고 한다. 여기서 종축(宗祝)은 천자의 종교적 의례를 전담하던 유(儒) 집단이고, 무사(巫史)는 무와 사를 겸직한 관리를 의미한다.
유가들은 이들 자료에서 천명 혹은 천도가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되었으며, 이것이 『중용』과 『대학』에서 덕성 혹은 명덕으로 발현되었다고 본다. 아울러 이들 자료에서 천명 혹은 천도라는 것이 만물의 법칙이자, 사람으로서의 바른 품성으로 부여되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예의와 위의의 법칙이라고 해석해 낸다. 이러한 해석은 덕이라는 개념이 유가에 의해 완전히 도덕적 의미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의 포덕을 유가에서 말하는 덕의 내재화와 도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강증산은 광구천하36)를 위해 삼계 개벽공사를 보시고37), 해원을 근본으로 하여 신명을 조화하시고38), 상극의 우주 도수를 상생으로 바꾸시고39), 신분의 차등을 타파하여 원한을 없게 하시고40), 등이 『전경』에 기술되어 있다. 기술된 바에 따르면 강증산의 덕은 우주의 전면적인 개편을 전제한 것에서부터 정립된 덕으로 이해되는 반면에 공자의 덕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공자는 일개의 사 계급으로서 봉건적 귀족 계급의 의식을 체현하여 이를 전유한 사람이다. 그리고 봉건시대에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덕이라는 개념은 상극의 원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과 공자의 덕 개념은 상충되는 점이 적지 않다.
Ⅲ. 억압으로서 덕과 노자의 상생으로서의 덕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주나라가 천명을 수수하는 종교적 의례에서의 ‘경덕’이 공자로부터 도덕적 덕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유가는 덕이 구현된 사회를 덕치(德治) 혹은 왕도(王道)가 구현된 사회라고 하거니와 이러한 사회를 구현하는 주체를 성인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덕에 대해 가장 비판적 입장을 취한 이가 노자이다. 노자는 덕과 덕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일련의 덕목들에 대해, 이것들이 분쟁과 싸움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덕을 제정한 성인과 그 성인의 말씀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인의 지혜와 인의가 질곡의 수갑이자 차꼬라고 본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왜 노자와 장자는 덕과 그 덕으로부터 연역되어 나온 인의예지라는 규범 혹은 예법이 정말 민중들에게 수갑을 채우는 일이자 목에 차꼬를 채우는 일이라고 본 것일까? 설마 도덕적 규범, 혹은 그 규범을 어겼을 때 가해지는 형벌이 민중들에게 생체권력(bio-power)으로 작동되었기에, 그것을 수갑이자 차꼬라고 한 것일까?
이 질문을 대답하기 위해서는 주나라의 사회적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나라로부터 춘추시대 초기까지의 사회 공동체는 경제와 종교를 같이하는 공동체(commune)였다. 이 공동체를 ‘공사(公社)’41)라고 불렀다. 공사에서 ‘공(公)’은 토지를 아홉 구획으로 구분하는 정전제(井田制)에서 가운데 토지를 공전(公田)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왔다. ‘사(社)’는 기본적으로 토지신을 제사하는 사당을 의미했지만, 공사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조상신, 또는 그 공사가 위치한 지역을 수호하는 지역신까지를 신앙하는 종교적 사당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으로서 공사는 중국 고대에서 관리가 주관하는 제사, 특히 천지와 여러 신들을 제사하는 장소42)라는 의미를 지니다가 정전제를 기초로 한 경제공동체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공사의 경제 시스템으로서 정전제는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뉜다. 공전은 그곳에서 나온 수확물로 그 공동체의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이지만, 나머지 8개의 사전도 귀족들의 소유였다.43) 주나라에서부터 춘추시대 초기까지는 대부분의 제후국에서 정전제를 유지44)하고 있었기에, 민중들은 정전제에 묶여있는 농민이거나 노예였다. 물론 종교적으로도 민중들은 귀족들의 사당에 매인 상태였다. ‘공사’라는 공동체에서 이 공동체를 주관하는 사람은 제후국의 대부들인 공(公)과 경(卿)에 해당한다. 공과 경이 전토(田土)와 복록(福祿)을 주관하며, 사방의 신뿐만 아니라, 토지신과 전조(田祖: 신농씨)의 제사를 주관했다.45) 정전제의 경제 공동체에서도 토지의 소유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것이었다. 이 국가의 토지를 귀족들이 농민과 노예의 노동력을 통해 경영하면서 공전의 수확량을 국가에 세금으로 내고, 복록으로 받은 전토인 사전을 통해 경제 공동체이자 종교 공동체를 지배했다.
이러한 공사에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예법이었다. 이 예법은 계급적 신분을 결정하는 예와 법으로 작동했다. 공사에서의 일상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기록이 『논어/향당편』이다. 『논어/향당편』에서 공자의 일거수일투족과 언행, 음식을 먹는 것과 옷을 입는 것, 마을에서 언행과 조정에서 언행, 식사의 모습, 사당에 들어갈 때의 언행 등이 영화처럼 묘사되어 있다. 『논어/향당편』은 가장 낮은 귀족 계급인 사가 일상에서 취해야 할 예법을 그려낸 것이다.
공자가 향당에서 행했던 언행이 당시의 예법을 모두 보여 준 것은 아니다. ‘예의(禮儀) 300, 위의(威儀) 3,000”이라고 규정된 예법은 더 복잡했을 것이다. 이러한 예법을 준수하는 것은 귀족이든 일반 백성이든 그들의 몸에 생체권력으로 작동해 자신들을 구속하는 억압기제로 작동했을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서 노자와 장자의 덕과 예에 대한 비판을 검토하면, 그들이 덕과 예를 비판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덕과 예란 당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생체권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와 장자가 덕과 예를 수갑이자 차꼬라고 말한 것이다.
이제 노자가 말하는 덕의 의미를 말해보자. 노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덕을 말할 수밖에 없다. 노자가 말하는 덕은 억압 기제가 될 수 없다. 그 덕은 살리는 덕, 상생하는 덕의 의미를 지닌다.
노자는 군주가 덕을 베풀면 그것이 바로 억압이라고 한다. 그래서 군주는 자신의 기준이 없는 사람으로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46)고 말한다. 그러려면, 군주는 도대체 전장(典章), 예악(禮樂), 형벌(刑罰)과 같은 제도와 규범을 제시하지 않거나47) 아예 그러한 행위를 할 줄 모르는 사람48)이어야 한다. 그리고 기존에 있었던 전장, 예악, 형벌과 같은 제도와 규범을 없애는 사람이어야 했다.49) 그리고 제도와 규범을 창조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것을 교육하는 제도와 학문도 없애는 사람이어야 했다.50) 군주가 제도와 규범이라는 덕을 만들 수 없는 존재이고, 기존의 제도와 규범을 없애는 일은 종국에는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공동체[無棄人]”51)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군주는 자신 스스로가 습관화한 덕마저도 텅 비게 만들고 오직 도만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했다.52)
그러면 만물은 자발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 교화하고, 안정되며 다스려진다. 이것이 노자의 현덕(玄德)이다. 노자는 백성들의 자발성(voluntary general)에 기초한 공동체에서 형성된 덕만이 덕일 수 있다고 보았다.
최상의 덕은 덕이 아니어서 덕이 있고,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아서 덕이 없다. 최상의 덕은 의도나 목적이 없어 무(無)로써 행위하고, 낮은 덕은 의도나 목적이 있어 유(有)로써 행위 한다. 최상의 인은 의도나 목적을 갖지만 무(無)로써 행위하고, 최상의 의는 의도나 목적을 갖고 유(有)로써 한다.53)
너무나 유명한 <덕경>의 첫 경문이다. 이 경문에서 노자의 덕에 대한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노자가 생각한 덕(최상의 덕)이란 덕이 아니다. 그래서 덕이 있다. 그렇다면 노자가 생각한 덕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덕은 아닐 것이다. 이 문장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의도나 목적이 없는, 무(無)로써 행위 하는 것이다. 무로써 행위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로써 행위 하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덕을 알 수 있다. 이는 『도덕경』 51장에서 갈피를 잡을 수 있다.
이 내용에서 덕은 규범의 의미로서 덕목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덕은 ‘기르는 것’이다. 텃밭에서 작물을 길러보면, 그 작물이 가진 성질을 따라야만 제대로 기를 수 있다. 그 작물의 성질을 위배하여 인위적으로 농약이나 비료를 더하면 그 작물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거나 죽는다. ‘기르는 것’은 철저하게 그 작물의 속성을 따라야 한다. 노자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사물을 따른다[인물지성(因物之性); 순자연(順自然); 순물(順物)].’는 구절들이 ‘덕이 바로 기르는 것이자, 사물에 복종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개별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 자신의 합목적성에 따라 생겨나고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개별자의 합목적성을 따라야 한다. 도와 덕이 생성하고 기르지만, 만물 역시 형체를 이루고, 상황과 조건에서 자신을 완성한다. 이렇게 보면 지상의 생명체가 나서 자라면서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응원하고 지키는 것이 덕의 역할이다.
봄에 씨앗이 땅에서 발아하여 대지를 뚫고 솟아올라 꽃피우고 열매 맺으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열매 맺는 그 힘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생명체의 삶을 그리스에서는 ‘Physis(솟아오름)’라고 보았다.
생명체의 그 힘은 타자들에 의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힘은 개별자 고유의 것이다. 노자는 개별자의 고유한 힘이 정상적으로 발생하고 전개될 수 있도록 해주면[도생지(道生之), 덕축지(德畜之)], 개별자는 자신의 합목적성에 따라 무엇인가로 이룩되고 그 완성은 상황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물형지(物形之), 세성지(勢成之)]. 다른 하나는 도와 덕이 생성하고 기르지만, 소유하지 않고 기대지 않고, 통제하지도 않는 것이다.
노자는 기존의 규범, 제도, 가치로서의 덕을 없앨 때만이, 이 솟아오름으로서 덕, 만물이 모두 가지고 있는 자신의 합목적성으로서의 덕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만물들의 저절로 그러함을 응원하지 통제하지 않는 것이 덕이다.
결국 노자는 공사에서 사람들에게 수갑과 차꼬로 작용한 예와 법을 제거하고, 백성들의 자발성에 기초한 규범을 만들며, 이를 따르는 것이 백성들의 덕이 온전히 발휘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노자가 말하는 덕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발성(voluntary will)에 기인한 자유로서의 덕을 의미한다. 이 자발성에 기초한 공동체는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사회이고, 개인들은 자신의 합목적성에 따라 자신의 삶을 구현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자의 덕은 ‘상생’이라는 용어에 적합해 보인다.
그렇다면, 노자의 상생으로서 덕은 대순진리회의 포덕과 내용적으로 공통점이 있을까? 『대순지침』에 따르면, 포덕이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두 원리를 실천함을 의미한다.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두 원리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포덕이 제시되고 있고, 해원과 보은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생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에서 정의하는 포덕의 핵심은 해원과 보은을 통해 상생이 구현된 세상을 이루거나, 혹은 덕이 구현된 상생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생’이라는 개념만 놓고 보면, 노자가 말하는 공동체와 대순진리회의 포덕 목표가 동일해 보인다. 하지만 상생을 축으로 놓더라도, 노자의 덕 개념과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은 궁극적으로 전제를 달리하기 때문에 ‘유사한 개념이다 혹은 같은 개념이다’고 볼 수 없다.
노자의 덕은 개별자의 합목적성을 최대로 발휘하는, 그들의 자발성이 최대로 발휘되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논리로 제시된 것이다. 이에 비해 대순진리회의 덕은 해원과 보은의 진리를 구현하여 상생을 만드는 진리로서 제시된 것이다. 이는 종교적 진리로부터 상생을 추구하는 포덕 개념과 사회정치적 실천으로서 현덕을 주장하는 논리로 서로 구별해 볼 수 있다.
Ⅳ. 해원과 포덕
대순진리회에서 정의하는 ‘포덕’의 개념은, 첫째 “덕을 널리 폄(상제님의 도를 알리는 일)”이고, 둘째 “포덕은 해원상생ㆍ보은상생의 양 원리인 대도의 이치를 바르게 알려 주는 것이다. 즉 상제님께서 광구천하(匡救天下)와 광제창생을 위해 하신 9년간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널리 알려 지상낙원의 복을 받게 하는 일이다.”54)라고 한다.
위의 정의에 따르면, 첫 번째의 정의는 종교에서 말하는 전도 혹은 선교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문제는 둘째의 정의이다. 둘째의 정의는 대순진리회라는 종교의 핵심 사상으로, 이는 강증산의 천지공사를 통해 이룩되는 지상선경의 도래와 천하를 광구하고 창생을 광제하려고 하는 강증산의 덕을 널리 알리는 일이다. 여기서 두 번째 정의에 따르면, 강증산이 행한 천지공사를 통하여 광구천하와 광제창생하기 위하여 현실세계에서 반드시 구현하여만 하는 구체적 실천의 진리로써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강증산이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행한 천지공사로 인해 상생의 우주 법리가 운행하는 후천 선경이 도래한다는 대순진리55), 이 진리에 근거하여 창생을 널리 구하기 위해 포덕을 할 때 덕을 펴는 종교적 원리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이어야만 한다고 이해된다.
『전경』의 내용에 따르면, 강증산이 선천의 상극 우주 법리를 바꾸는 삼계공사를 행하고, 이 삼계공사의 결과로 상생의 도가 구현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계공사는 강증산이 인간으로서 신명계를 상대로 행한 일이지만, 이 공사로 인하여 앞으로 오는 세계에 상생의 도가 구현되는 후천 선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상생의 의미는 “선천세계에는 모든 사물이 도의(道義)에 어그러지고 원한이 맺히고 쌓여 그것이 마침내 삼계의 재앙으로 가득 차 진멸의 위기에 처한 세계”56)를 구제하는 법리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진리를 구현하기 위하여 “상생법리(相生法理)는 남 잘되게 하는 것이 곧 나도 잘 되는 길임을 자각(自覺)케 하신 협동의 원리이기 때문에 공존공영(共存共榮)의 평화의 윤리(倫理)”57)로서 제시되었다.
공존공영의 평화 윤리라는 개념은 크게는 선천 세계의 상극을 해소하는 진리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또 다른 상극을 발생시키지 않는 진리임을 도인들이 이해하는 것을 전제한다. 이 진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상에서 타인에게 척을 지지 않고 협동하는 삶의 실천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종교적 진리를 일상에서 구현하는 윤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포덕을 대순진리회의 진리는 전하는 것이라는 의미로만 한정하면, 다시 말해 첫 번째 정의로만 이해하면, 이는 ‘포덕’이라는 용어를 쓸 필요가 없다. 여타의 종교처럼 포덕이 아닌 ‘전교’ 혹은 ‘전도’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순진리회는 전교의 내용을 포덕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교의 종교적 실천을 포덕이라고 정의하는 점에서 여타의 종교와 다른 신학적 이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의 정의에 따르면, 포덕이라는 개념은 작게는 대순진리회의 대도(진리)를 전도하는 종교적 포교의 의미를 갖는 것이 될 것이고, 크게는 해원과 보은이 이 세상에 실천되어 상극이 해소되고 상생의 이념이 실현된 후천 지상선경을 이루는 종교적 실천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포덕 개념의 정의를 구성하고 있는 용어들에 ‘해원’과 ‘보은’, 그리고 ‘상생’을 그 내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도의 의미만으로, 포덕 개념을 한정할 수 없다.
포덕을 통한 상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지상선경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해원(解冤)과 보은(報恩)이 선결조건이다. 『대순지침』에 따르면, 해원은 ‘척’을 푸는 일이고, 척이 풀린다는 것의 의미는 나와 상대방의 척이 풀어짐으로써 상생을 이루고, 이는 남을 잘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와 상대방의 척이 풀어짐은 나와 상대방의 사회적 관계나 그 관계로 발생한 마음속의 억울함이라는 상극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는 척을 해소하는 종교적 실천을 대순진리회 도인들에게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포덕은 척을 해소하여 남을 잘되게 함으로써 상생을 이루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를 신앙하는 도인과 일반인의 관계에서도 척을 풀어내는 해원은 해원과 보은을 통해 상생으로 귀결하는 진리가 전제된 인간관계의 원리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척을 푸는 해원의 주체가 도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도인들은 강증산이 말하는 해원상생의 진리를 체득하고, 대인간 관계에서 척을 푸는 종교적 실천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해원이 ‘남 잘되게 함으로써 자신이 잘되는’ 상생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순진리회의 포덕은 강증산의 광구천하와 광제창생의 뜻을 실현하는 해원 진리를 전제할 때만이 성립되는 종교적 실천이다. 이 전제 없이 인간관계에서 척을 해소하는 해원만으로는 포덕이라고 할 수 없다. 강증산의 광구천하와 광제창생의 해원 진리로부터 인간관계에서의 척을 해소하는 해원이 도출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포덕일 수 있다.
이는 강증산이 말하는 해원의 진리를 전제로 삼아, 그 진리를 인간관계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연역되어야만 논리적으로도 참이다. 만약, 강증산의 천지공사에서 보이는 전우주적 해원 진리를 전제로 삼지 않고, 인간관계에서만 해원을 생각한다면, 이는 다른 종교와 구별되지 않을 것이며, 일상의 윤리와도 구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에서도 타인이 잘 되기를, 행복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다른 종교에서 행하는 그 기도와 인간관계의 해원은 그 목적에서 구분될 수 없다. 또한 일상에서 우리는 타인의 복을 바란다. 그래서 덕담을 주고받으며 그가 하는 일을 돕기도 한다. 해원의 진리를 전제로 삼지 않으면, 이러한 유덕한 행위와 대순진리회의 포덕은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포덕’의 종교적 실천문제에서 요구되는 윤리, “공존공영(共存共榮)의 평화의 윤리(倫理)”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포덕의 실천에는 충ㆍ효ㆍ예58), 삼강오륜59) 등의 덕목들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이들 덕목들은 유교적 덕목들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이들 덕목이 전통 동양의 사상을 단순히 계승한 것이라면, 이 덕목들이 수갑과 차꼬로 생체권력이 된 내용이 있으므로, 대순진리회의 해원의 논리와 맞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덕목들이 상극이 해소되어 상생의 사회인 지상선경에서 창조된 것이라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단초가 되는 것이 “대순진리회의 교리는 유교나 불교와 하등의 관계없는 해원상생지리(解冤相生之理)인 우주 자연의 법리(法理)이다.”60)는 문장이다. 다시 말해 전통 사상과 전혀 다른 진리인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종지가 조정산에 의해 새롭게 제시되었고, 이는 유교나 불교와 전혀 다른 진리임을 암시하는 내용을 『전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61)
건곤의 위치를 바로잡는 공사로부터 지상선경이 구현되었다면, 이 사회를 유지하는 규범들 역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이는 해원상생이라는 전제로부터 도출된 규범들을 의미할 것이다. 해원상생이라는 전제로부터 도출된 규범들이 비록 유교적 덕목과 같은 명칭을 같이 하는 용어이지만, 그것은 다른 진리에 의해 재창조된 것이어야 한다. 재창조의 원리는 『포덕교화기본원리』의 “충ㆍ효ㆍ예도가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진리이니 이것으로서 수도(修道) 수행(修行)의 훈전(訓典)을 삼고”62)라는 말에서 찾아진다. 이 문장에서 충ㆍ효ㆍ예도를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전통 사상의 충, 효, 예도와 전혀 다른 정의임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예만을 들어 비교해 보자. 전통 사상에서 ‘충’은 “진기지위충(盡己之謂忠)”63)이라고 정의되거니와 이는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다함의 의미이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의 ‘충’은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상의 진리가 발현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이들 규범들이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진리로부터 도출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즉 대순진리회의 충ㆍ효ㆍ예라는 덕목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위해서만 작동되는 덕목들임이 해명된다.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이 구현되어 이룩된 후천선경에서도 자연스럽게 국가나 사회가 만들어지지만, 그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는 덕목들은 상생을 위해 실천되는 덕목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덕목들의 핵심 내포는 대순진리회의 법리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덕목들도 상제님의 진리로부터 도출되어 나온 규범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이해해야만, 전통적 덕과 대순진리회의 덕을 구분할 수 있다. 전통적인 덕은 계급적인 차등을 전제한 예와 법, 그 신분과 음양 차등에 따른 구분을 기초로 한 덕이다. 이는 다시 말해 적서와 존비, 귀천과 억음존양, 남녀의 불평등을 전제한 규범이자 덕목이었다. ‘예(禮)’라는 말이 ‘나누다(分)’, ‘구분 짓다’, ‘차별하다’64)라는 뜻을 가지듯이 전통의 규범과 덕목은 상극의 원리에 따라 제정된 것이자, 강요된 것이다.
이에 반해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에서의 윤리적 덕목들은 해원을 통해 건곤을 바로 세워 나가기 위하여 나온 새롭게 세워진 윤리이다. 대순진리회의 포덕과 교화에서 충ㆍ효ㆍ예도 강증산의 진리로부터 도출된 규범들이라는 말이다.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진리로부터 도출된 윤리적 덕목들은 ‘합덕(合德)’, ‘조화(調化)’, ‘상생(相生)’을 전제한 윤리이다. 이 윤리는 분별 짓는 윤리, 차별하는 윤리와 정반대의 윤리이다. 이 윤리는 차별의 윤리가 아니라 공존하는 윤리로 새롭게 창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순진리회의 교리는 유교나 불교와 하등의 관계없다”고 한 도전 박우당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Ⅴ. 맺음말
필자는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이 전통의 덕 개념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것이라고 오해해왔다. 이러한 오해는 전통 사상의 덕 개념으로 대순진리회의 포덕을 이해한 때문이다.
우선 이러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전통 사상에서 덕 개념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의미였는지, 그것이 유교에서는 어떤 의미였는지, 노자에서는 어떻게 비판되며 새롭게 덕을 제시하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정리를 통해 전통 사상에서 덕은 주나라가 천제로부터 천명을 받아 국가를 소유하는 과정에서 행해지던 종교적 의례와 그 의례의 진행을 의미하다가, 공자에 의해 도덕적 의미의 덕목, 규범으로 전환되었음을 살폈다. 이러한 도덕적 덕목과 규범은 노자에 의해 생체권력으로 비판받고, 노자에 의해 개인의 합목적성에 따른 살림 혹은 살아냄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이와 달리 대순진리회의 덕과 전통 사상의 덕은 전혀 다른 이론적 신학적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순진리회의 덕 개념은 강증산의 해원공사와 그 해원공사로부터 해소된 상극, 그 상극이 해소되어 상생이 이루어진 후천선경의 진리를 실천하고 구현하는 덕이다. 따라서 대순진리회의 포덕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전제할 때만이 성립하는 개념이자, 포덕의 종교적 실천도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실천에서 발생하는 하위의 덕목들도 전통 사상의 덕목들이 아니다. 즉 전통 사상에서 사용하는 충ㆍ효ㆍ예의 개념이 아니라 강증산의 천지공사에서 도출된 충ㆍ효ㆍ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대순진리회의 덕목들은 차별의 상극적 덕목이 아니라, 건곤이 새롭게 정립된 상태에서 그 우주적 법리에서 도출된 합덕(合德), 조화(調化), 상생(相生)을 내용으로 하는 윤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대순진리회의 ‘포덕’ 개념은 대순진리회의 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원리적 차원과 그 원리적 차원의 실천에서 전교와 수행에서 모두 요구되는 종교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양 전통의 덕 개념이 아니라 강증산의 대도 진리를 지상에 구현해 가는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실천으로서 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종교적 진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