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본 논문은 대순사상(大巡思想)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헤겔의 노동(勞動, Arbeit) 개념을 통해 개념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순사상에 대한 연구 주제 가운데 ‘천지공사’는 특히 그 신비적 내용과 초과학적 성격으로 인해 인문적으로 접근하기에는 다소 난해하고 까다로운 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대순사상에서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의 강세와 강세 이후 증산으로서 행한 그분의 천지공사는 피할 수 없이 중요한 대순사상의 한 축으로 그 사건이 가진 존재론적 성격에 대한 개념적이며 논리적 해석의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한 해석이 없으면 천지공사는 종교적 신화의 틀 안에 갇히게 된다. 따라서 천지공사를 개념적으로 해석하여 인문적 소통의 장 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철학사가 보여주는 사유의 맥락을 짚고 그 가운데 동일한 주제를 찾아 그 논의 가운데 가장 적합한 개념을 방법론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비록 천지공사의 신비적인 내용이 물리적 인식과 일반적 논리를 벗어날지라도 천지공사를 다룰 수 있는 인문적 주제의 공간을 찾아 그 논의의 연장 속에서 해석해나간다면 그것은 객관적 공간에서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정당한 인문적 방법론이라 판단된다.1) 그러한 인문적 방법론의 발견은 대순사상 연구 발전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성과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천지공사에 대한 대순사상 전문 연구자들의 선행연구 결과를 분석하면 크게 하나의 패턴으로 정형화할 수 있다. 천지공사의 내용이 가진 상징적 의미들을 분석하여 대순진리의 근본 사상과 대응시키는 것이다. 현재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이며 모범적인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 방식이 천지공사에 담겨진 사상적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라면 본 논문은 천지공사라는 행위가 가진 존재론적인 양태를 분석하는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연구 방식은 천지공사의 상징성을 분석하면서 대순진리의 근본 사상에 다가서는 것이므로 천지공사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다룬 주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그러한 점에서 이전 논문의 연구성과와는 차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은 그의 『종교철학』에서 “학문적 관점은 종교적 관점의 필연성에 대한 서술이다. 더구나 이것은 제약적ㆍ외적 서술이라기보다 절대적 필연성에 대한 서술이다.”2)라고 하여 절대자로서의 신(神)에 대한 이해는 필연성에 기반한 개념적 접근이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렇듯이 절대자와 그가 행한 행위는 학문 특히 철학적 개념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그 파악과 분석에 대한 정당성을 가늠하고 확보할 수 없다. 현상을 넘어선 곳에 있는 이와 그의 행위를 현상적 논리로 분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주제는 대순사상의 천지공사를 철학적 개념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대순사상의 종교적 신비성을 이러한 학술적 천착을 통해 객관적 공론의 장으로 개방하는 것을 거시적 목적으로 삼는다.
Ⅱ. 헤겔의 노동 개념과 절대자의 노동 개념의 발생
근대에 있어 노동은 인간 개체의 자유와 함께해온 개념이지만 근대 이전의 노동은 속박과 종속의 의미를 가진다. 상극(相剋)적 대립의 체제에서 노동은 피지배자의 몫이었고 그에 따라 노동은 필연적으로 위계와 억압을 수반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 The unmoved mover)로서의 절대자는 자신은 운동하지 않으면서 타자를 운동하게 만드는데 이것을 볼 때 선천의 형이상학적 구조에서 인간은 노동의 대상이며 인간 사이에서도 계급적 당위에 의해 노동의 양과 강도가 달리 부과되었다. 절대자를 중심으로 그에 가까운 인간일수록 부동(不動)에 가까운 것이다. 즉 절대자 아래에 있는 인간에게 있어 노동의 정도는 인간과 그 절대자 사이의 거리를 표상하는 것이다.
서구사상의 두 근본 축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전통에서 노동의 격은 낮고 부정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활동을 그 질적 가치에 따라 삼등분하고 위계를 둔 것도 그러한 전통과 연관된다. 그는 가장 상위에 테오리아[지적 활동, 觀照] 그 다음에 프락시스[윤리적 활동]를 두었으며 가장 하위에 포이에시스[제작과 노동 활동]를 두었다. 포이에시스의 범주에 속하는 노동은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노예 활동에 불과했다. 또한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더라도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원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여성에게는 출산의 고통이, 남성에게는 식량 획득의 노고가 주어지는데 이러한 전통적 신화의 코드로부터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3)
결국 인간계의 실존적 삶을 지속하는 행위 자체가 노동의 범주 속에 귀속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에덴동산이라는 절대계에서 이탈한 사건을 원죄로 보았으므로 실존계는 죄로부터 기인한 모순과 결핍의 세계가 된다. 그 세계에 빠진 사건으로부터 노동이라는 대가(代價)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절대자는 천상(天上)에 있으므로 권위와 권력을 가지게 되고 인간은 그 아래에 있으므로 노동에 대한 복종과 억압의 조건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헤겔이 완성한 근대적 인식에 의해 노동은 오히려 인간의 지위를 격상시킨다. 헤겔의 노동 개념은 정신의 주체적 원리와 물질적 대상계와의 소통을 통해 소외(疏外)로부터의 해방을 안고 있다. 헤겔에 의하면 노동은 인간이 소외의 구속으로부터 탈피해 자신의 정체(正體) 즉 무한적 삶의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가능케 한다.4)
특히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노동을 통한 노예의 성장이 정태(靜態)적 형식의 계급 구도를 파기하고 노예는 주인을 상위에 둔 속박적 관계에서 자립성을 획득하게 됨을 말한다.5) 인간에게 있어 주인과 노예의 위계를 결정하는 중심은 바로 절대자인 신(神)이며 이 신을 중심으로 계급이 형성되었는데 노동은 이러한 정태(靜態)적 구도를 동태(動態)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절대자는 하강하고 인간은 상승하며 그러한 서로의 경계가 무너지면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로 평등의 개념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평등은 대상과 대상 사이의 존재론적 균형(均衡)과 합일(合一)을 지향한다.
노동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된 시점은 시장경제와 산업 환경을 생리로 한 근대에 있다. 그러한 현상은 사회 이데올로기와 보편성을 지향하는 학문적 근거를 통해 더욱 발전했다. 인간 주체의 자유가 근대의 근본 주제이며 노동은 그것의 실현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라고 본 헤겔은 노동에 대한 논의에 있어 우선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의 측면에서 노동을 다룬다. 자연에 대한 종속을 노동을 통해 극복하고 자연으로부터 물리적 자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에서 헤겔은 물리적 자립성이 인간 해방을 목적으로 한 노동의 중요한 계기이면서도 이것이 가진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획득하는 것이 점점 더 증가하고 인간이 자연을 더욱더 예속하면 할수록, 인간 자신은 더욱 저급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6)라고 했으며 또한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전에는 자연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고 하여 노동이 가진 참다운 본질을 물리적 차원에서 정신적 차원으로 격상시킨다.7)
헤겔이 말하는 자기 자신의 주인은 곧 인륜 공동체를 이루는 주체로서의 개체적 인간이다. 노동을 통한 자기 외화의 생산물은 그것의 교환을 통해 인륜 사회를 구성한다. 생산물은 개인적 주체의 분신(分身)으로 교환을 통해 타자에게 전이되며 이것의 관계망을 통해 사회가 존립한다. 따라서 교환을 통해 노동의 산물이 순환하고 여기에서 소통과 인정(認定)의 개념이 발생한다. 동시에 상호주체적인 공동체의 형성 속에서 변증법은 주체의 완결에 적용되고 노동은 주체와 객체를 매개하는 역할로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헤겔의 노동은 인간의 욕망과 그 충족 사이를 중화하는 기능을 하며 개별의지와 보편의지를 통일하는 매 순간의 계기로 존재한다. 노동은 주체의 자유와 인륜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근대적 과제 가운데 ‘소외화(Entäußerung)’와 그 지양(止揚)을 향한 ‘수양(修養, Bildung)’이라는 의미로 더욱 심오해진다. 수양으로서의 노동은 생산물을 통해 자신의 내면성을 외화(外化, Entäußerung)하고 외화된 결과물을 철저히 인식하여 의식 내부의 부정성을 거치도록 한다. 부정성(否定性, Negativität)을 거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정신의 완정성 속으로 복귀(復歸)하여 참된 절대성을 회복한다.8)
근대 이전의 전통적 시각에 있어 노동은 계급 규정의 잣대였다. 노동은 단지 제작 활동[포이에시스]으로서 재료의 물질성에 종속되며 목적을 위해 형상을 재료 속에 주입하는 것에 불과했다. 노동을 단지 물질적인 활동으로 보려는 인식으로 인해 노동을 전담하는 이는 비주체적이며 비자율적인 계층으로 위치된다. 헤겔은 이러한 노동에 대한 전통적 인식을 전복하여 노동은 단순한 물질적 산물을 생산하는 행위가 아닌 자기 외화를 극복한 무한성 회복의 계기로 해석한다. 이것은 곧 노동이 가진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변환시킬 수 있는 개방적 힘을 의미하며 노동은 곧 상승의 계기로서의 수행이 된다.9)
헤겔의 사상이 고ㆍ중세의 계층적 패러다임을 해방한 스피노자의 존재론적 계보를 잇는 만큼 그의 노동도 그러한 해방의 가능성에 집중되어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그가 설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말해주듯 인간은 노동이라는 주체적 행위 속에서 자신의 껍질을 파기하는 기회 즉 자신을 외화하여 대상에게 자신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으로 자기 주체성을 실현한다.10) 고ㆍ중세에서는 절대자를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의 정도가 계층적으로 정태화 되어 하나의 견고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헤겔의 근대적 노동 개념은 그 구조를 전복하는 힘을 가진 것이다.
구조를 전복한다는 것은 각 개체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임을 아는 것이며 주체는 곧 자기 내부에 무한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근원으로 유한성 가운데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드러냄의 역능이 곧 노동이다. 노동의 본질을 그러한 것에서 찾고 노동을 통해 내면적 운동을 지속하는 속에서 인간은 주체로서 완성되며 이러한 완성된 주체가 이뤄낸 인륜 공동체가 바로 대립의 이음새 없이 하나 된 완전한 공동체인 것이다.
이렇듯 노동에 대한 인식의 격상은 인간이 지배자의 명령을 단순히 이행하는 것이 아닌 인간 내부에 있는 절대성을 통해 스스로 주체적 행위를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은 인간 내부에 숨은 절대성에 조금씩 다가가게 하여 그와의 합일적 상승을 가능케 한다. 여기에서 절대성이란 고ㆍ중세적 초월적 존재가 인간 의식 속에 이념으로 내재화된 상태이며 이것은 초월의 단절로부터 내재적 연속으로의 전회(轉回)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절대성과 실존성의 합일 가능성이 개방된 것이다. 이러한 정황들을 볼 때 노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러한 개념적 전개는 절대자의 실존계 강세와 그 후의 천지공사라는 종교적 사실을 분석하는 틀로서 충분히 기능할 만하다. 절대자의 실존계 강세는 곧 절대성의 현실적 실현의 가능성을 열고, 그의 천지공사는 그 절대성 실현의 모본(模本)이 되는데 이 모든 절대자의 행위 과정은 인간 주체의 궁극적 자유 실현의 측면에서 노동의 개념으로 해석 가능한 것이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헤겔이 말한 노동은 계급적 대립으로부터 인간 개체의 주체성 회복과 해방적 공동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노동은 행위와 생산물과 같은 구체적 산물을 형성하는 것인 만큼 인간계 즉 실존계의 개념이다. 무언가를 형성한다는 것은 형성의 주체가 사고하고 의지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현상계라는 시공간의 좌표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적 사건이다. 따라서 절대자에게 노동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하나는 절대자가 인간계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궁극목적으로서의 자유의 이념 실현이 노동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통해 최고신의 인간계 강세와 천지공사의 노동적 특성을 개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로 증산의 두 가지 명칭을 통해 절대자의 인간계 현현(顯顯)을 통한 노동의 발생원리를 살펴보자. 대순사상에서 절대자 즉 최고신을 표현하는 호칭은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이다. 구천대원조화주신11)은 ‘구천에 계시는 가장 으뜸이며 근본이 되는[大元] 조화주 하느님[造化主神]’이라는 의미12)로 이 호칭이 표현하는 절대자의 특성은 절대성과, 전지전능의 지배력, 최고의 존재론적 위치이다. 최고신(最高神)의 이러한 특성은 부동의 원동자로서 자신은 절대성과 근원적 중심을 유지하며 그 하부에 상대적 세계를 두는 상하 수직적 패러다임에 기인한 절대자의 특성이다. 문자 그대로 ‘부동(不動)’이란 노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원동자(原動者)’란 노동하는 존재자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상하 구도에서는 상하 수직적 위계가 설정된다. 노동에서 멀어질수록 절대성을 보존하며 노동의 양이 많을수록 절대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므로 하부 위치로 분류된다. 이러한 부동의 원동자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므로 그것을 운동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리고 운동하면서 운동시키는 것은 중간적이므로, 운동하지 않으면서 운동시키는, 영원하고, 실체이고, 활동인 어떤 것이 있다.”13)라고 설명한 바와 같이 부동의 원동자는 절대자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의 관념이다. 절대성과 상대성이 분리되면서 계급이 구성되고 실체는 운동하지 않음으로써 절대성을 유지하므로 실체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고 그 하부 구조의 존재자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므로 현상적 존재자가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 다시 말해 절대자를 중심으로 대립의 관계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양상은 선천 상극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인데 이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한 요구가 곧 선천 상극의 억압과 대립에 상대되는 자유와 해방 가운데 있다.
요컨대 고전적 사유 속에서의 절대자는 이념계 속에 초월해 있으며 현상적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단지 절대성의 파편적 현현(顯顯), 즉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그림자를 현상 속에 펼칠 뿐인데, 이러한 절대자의 탈노동적인 측면은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布德文)」에 “나 역시 이 세상에 끼친 공(功)이 없어 너를 이 세상에 내보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려 하노니 … .”14)라는 구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공(功)’이라는 한자어 속에 ‘일[事]’이라는 의미가 있고 세상에 대해 그러한 공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때 선천(先天)의 절대자에게는 현상적 노동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대순사상에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패러다임의 전환 시점을 신성 ‧ 불 ‧ 보살의 호소에 의한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의 강세에서 찾을 수 있다.15) 절대계와 상대계의 형이상학적 변환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전환은 가장 거대한 규모의 변혁이다. 이 변혁에 의해 구천대원조화주신으로부터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라는 절대자의 새로운 명칭이 발생한다.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성을 상대계로 떨어뜨리는 것이 분명 괴롭기 한량없는 일이지만16) 상극에 의해 진멸지경에 빠진 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세계의 패러다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절대자가 부동(不動)의 원동자로부터 동(動)적 원동자로 전환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자에게 노동의 계기가 발생함을 의미한다.
한편, 절대자에게 현상적 노동이 발생하는 원인은 상극으로부터 상생으로의 전환 즉 억압과 대립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이념계의 요구에 있다. 절대자는 무모순성에서 모순성으로 자신을 하강시키는 것으로 인계라는 현상성 속에서 자신의 절대성을 그대로 발현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며 그 발현은 곧 현상성 속의 절대성 구현과 일치한다. 이것은 절대자 자신의 논리적 숙명으로 절대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를 현상 속에서 유지하는 것이면서 실존계의 인간은 인간의 몸을 가진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성을 유지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 절대성을 사상적 전수를 통해 전이 받는 계기가 된다. 절대자와 인간이라는 양자의 입장과 출발은 다르지만 지상신선실현이라는 궁극적인 지점에서는 결과적으로 동일해진다고 볼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신의 절대성과 인간의 상대성이 서로 합일되는 인존(人尊)의 개념이 나타난다. 절대자는 현상계에서 자신의 절대성을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노동의 개념이 발생하고 그 노동이 인간에게 전해지면서 인간계 전체가 절대성에 동화되는 것으로 절대자와 인간의 노동은 완성된다. 그것이 상극의 패러다임을 상생으로 바꾸는 과정이며 신과 인간이 모두 성공에 이르는 형이상학적 구도이며 천지공사는 이러한 절대자의 노동의 양태가 된다. 절대성과 상대성의 상호대립을 상생으로 이끄는 첫 번째 요소가 절대성이 상대계로 하강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발생하는 절대자의 노동이 세계를 상생의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근원적 행위가 된다.
Ⅲ. 절대자의 노동으로서의 천지공사
절대자의 지상 강세 이후 노동은 인간의 조건, 더 정확히는 인존의 조건이 되었다. 『전경』 교법 1장 61절에 “글도 일도 않는 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벗어난 자이니 쓸 데가 없느니라.”라는 구절은 인존의 조건으로서의 노동에 대한 절대자의 말씀이라고도 해석해볼 수 있다. 절대자에게 노동이 존재론적 필연성으로 부과되면서 노동은 자유와 해방17)이라는 인간 완성의 조건으로 형식과 양의 차이에 의한 계층적 구별을 벗어나 누구에게나 평등한 본질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현상계에 내려온 절대자와 인간의 노동은 그 출발점에서 존재론적 차이를 가진다. 강세한 절대자의 노동은 천상의 절대성을 지상에 그대로 내려주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면 인간의 노동은 그 절대성을 전이 받아 상승하고자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단지 출발의 차이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내림과 받음의 일치 가운데 신(神)과 인간의 경계가 사라지며 이것이 인존(人尊)이며 지상신선(地上神仙)의 실현이다. 절대자와 인간이 매개적인 관계로 있다가 노동을 통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면서 매개는 일체화로 전환된다.
지상에서 절대자의 절대성 회복은 이념계와 자연계 그리고 인간 실존계라는 삼계의 완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천지공사는 이 세 축의 완전성을 향해 진행되었다. 선천에서는 이념계가 실재성의 지위를 가지면서 유한계로서의 자연 세계와 인간 실존의 지위는 비실재성의 위치에서 끊임없는 시간적 부유(浮游)의 결핍적 순환을 겪었다. 그런데 이념계의 절대자가 자연계와 인간 실존계에 하강해서 천지공사의 노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은 자연계와 인간 실존계의 동시적인 상승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천지인(天地人) 삼계를 매개라는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직접적이며 합일된 관계를 만들어낸다. 개벽은 그 최종적 결과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 된다.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고 김 형렬에게 말씀하시고 그 중의 명부공사(冥府公事)의 일부를 착수하셨도다.
『전경』 공사 1장 3절의 본 인용문을 보면 신도(神道)로부터 원을 푼다고 했으며 이것은 이념계에 수직적으로 종속된 지계와 인계의 매개 관계를 상호소통의 관계로 변화시킨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冤)이란 매개의 근본 원인이며 원이 풀린다는 것은 매개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념계가 매개로 인해 자신과 차별화된 지계와 인계에게 자신의 절대성을 전이시키는 과정이 바로 천지공사이다.
위 『전경』 예시 8절은 소통과 균등의 부재를 세계 참화의 원인으로 지적함과 있으며 소통과 균등이라는 삼계의 개벽을 예시 5절18)과 예시 7절19)에서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삼계가 서로 통하게 하고 신명이 사람에게 드나들게 하며,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 모두에게 운을 붙여 쓴다.’는 것은 곧 소통과 균등으로서의 해법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리고 절대자의 노동은 화천[化天, 죽음]20)을 통해서 완성된다. 헤겔은 “개인 스스로가 끝내 도달하는 보편적인 모습이 ‘죽음’이라는 순수한 존재(das reine Sein,der Tod)이다.”21)라고 한 바 있는데, 순수한 존재란 어떤 대상이 가진 본래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본질이 완전히 구현되는 순간이 죽음이라는 노동 가운데 있다면, 절대자가 지계와 인계에 자신의 절대성을 회복하여 전이의 계기를 마련하는 실존적 노동이 천지공사라는 과정을 거쳐 절대자의 마지막 노동으로서의 죽음을 통해 완결되는 것이다. 증산이 화천하면서 그 호칭이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에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바뀌는 것을 보면 그 호칭 안에 천계(天界)와 지계(地界) 그리고 인계(人界)가 절대성 가운데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22)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노동으로써 삼계는 상극적 대립에서 벗어나 상생의 화평을 향한 즉자적인 준비가 완결되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노동이 대자적인 입장에서 완결될 때 지상신선과 지상천국의 즉자대자적 현실화에 도달한다.
절대자의 노동 목적이 지상에서 자신의 절대성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노동 목적은 절대자의 절대성 내지는 무한성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 양자는 즉자(卽自)와 대자(對自) 또는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놓이며 즉자대자 또는 체용합일을 다음의 단계로 두게 된다. 절대자의 노동 목적을 정각(正覺)하고 노동의 수양과 실천을 거친 인간은 절대자와의 매개를 극복하고 순수한 통일의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천지공사의 노동적 취지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사업(事業)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된다. 대순진리회의 종단사업의 내용이 천지공사의 틀 안에서 기초 지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포덕(布德) ‧ 교화(敎化) ‧ 수도(修道)’, ‘구호자선사업 ‧ 사회복지사업 ‧ 교육사업’의 항목들을 볼 때 덕과 가르침을 펼치고 자신을 도야[Bildung]하는 것은 절대성과의 합일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포덕(布德)에서의 덕(德)은 증산의 대순하신 진리를 세계에 전이시키는 것이며 교화와 수도의 내용 또한 그것을 근본으로 한다. 포덕천하(布德天下)는 곧 절대성(絶對性)의 전이(轉移)를 통한 세계인의 주체적 균등성으로서의 해방과 자유의 실현이다. 절대자가 인간의 몸으로 자신의 절대성을 천지공사로써 회복하고 인간은 그것을 사업의 형태를 통해 계승해 자신의 절대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또한, 『주역』 「계사전」에서도 이러한 사업으로서의 인간의 노동에 대한 존재론적 서술이 담긴 대목을 찾을 수 있다.
건괘와 곤괘 그것은 역(易)이 가진 것이다. 건괘와 곤괘의 배열 가운데 변화의 역이 이루어진다. 건괘와 곤괘가 해체되면 바로 그 때문에 역을 헤아리지 못하고 역을 헤아릴 수 없다면 바로 건괘와 곤괘가 그쳐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구체적 양태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이치라 하고 양태로 드러나는 것을 기물이라 한다. 새롭게 되어 그 새로 됨을 구축하는 것을 변(變)이라 하며, 그 변화를 추진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변혁의 펼침을) 내세워 세상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사업(事業)이라 한다.23)
이것은 하늘의 무한성과 땅의 유한성24)이 서로 교차하는 것이 변화의 근본이며 이 양자의 관계가 연역의 대전제로서 위치할 때 현실의 구체적 사실들을 분석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현실적 창조의 기본 원리라는 뜻이다. 건괘로 표상되는 형이상의 추상적 형상이 곤괘로 표상되는 형이하의 질료와 어우러지면서 ‘변(變)ㆍ 통(通)’ 이라는 현실 세계의 구체적 현상들이 형성되어 펼쳐지므로 건곤 ‧ 무한과 유한 ‧ 형이상과 형이하 사이의 연결 과정을 아는 것이 곧 현실 세계를 판단하는 방법이다. 또한 그 판단으로부터 현실 세계의 창작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케이아[entelecheia, 현실태]나 칸트의 판단력이 바로 이러한 실존적 작용을 지칭하는 것이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만들어낸다는 것은 곧 무한과 유한을 잇는 것이며 이것이 곧 노동의 본질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는 『주역』의 서술 구조이며 따라서 변과 통이 가지는 원리적 위치는 곧 현실태 혹은 판단력의 원리적 위치와 일치한다. 그리고 세상의 인간을 위해 그 원리를 베푸는 것으로서의 사업은 그 판단력이 이념 실현을 목적으로 하므로 절대자의 노동에 대응하는 인간의 노동이 된다.
앞선 논의에 근거하면 천지공사는 절대자가 자신의 본질로서의 절대성을 현상계에 실현하는 노동적 행위이다. 그러한 천지공사에는 일종의 근본 형식이 있는데 그 형식은 증산의 사상이 집약된 대순진리회의 종지(宗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정의된 근본 형식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인간은 절대자의 노동과 자신의 노동을 일치시키는 범형(範型)을 가지게 된다.
음양합덕(陰陽合德)ㆍ신인조화(神人調化)ㆍ해원상생(解冤相生)ㆍ도통진경(道通眞境)의 종지(宗旨)를 살펴보면 자유와 해방, 소통과 균등과 같은 개념들과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음양합덕의 항목부터 살펴보자면, 음양합덕은 가장 큰 대립 범주의 소통과 합일을 의미한다. 음(陰)과 양(陽)은 존재와 인식을 형성하는 가장 큰 범주이다. 모든 존재와 인식은 음과 양의 구분으로부터 전개된다. 현상계에 있는 모든 존재자는 크게 음과 양으로 구분되며 인간의 인식도 음과 양의 방식으로 사물을 구분하여 인지한다.
그런데 구분은 대립을 구성하며 대립은 곧 원(冤)을 낳는다. 그럼으로 천지공사는 우선 음양(陰陽)으로 분리된 세계와 인식 가운데 그들의 해원(解冤)으로부터 이루어진다.25) 따라서 존재와 인식의 원(冤)인 음양의 대립에서 기인했으므로 음양의 상생으로써 존재와 인식의 화평을 이룰 수 있다.26)
음양합덕이 존재와 인식의 원리로서 논리학적 영역이라면 신인조화는 그 원리 하에 있는 구체적인 음양합덕의 실현영역이다. 신(神)은 음(陰)이고 인간은 양(陽)인데 후천의 음양합덕으로 신과 인간의 덕이 하나로 일치한다.27) 앞선 논의에서 절대자의 자기 회복과 인간의 절대성 구현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과 이 일치의 상태가 인존(人尊)이라고 한 말이 신인조화의 이러한 측면을 설명한다.
해원상생은 자아를 정태(靜態)적으로 규정짓는 경계로부터의 해방과 그 결과로서의 자유이다. 원(冤)은 개념적으로 구속이다. 그것의 원인이 안이든 밖이든 원은 자아와 타자의 대립을 이어가는 계기이다. 구속은 존재의 운동을 제한하여 하나의 고정된 자기규정에 속박되게 한다. 원은 구속의 틀로서, 원을 가진 존재자는 그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과 타자를 분리하며 그 분리된 관계 속에 자신을 고착화하려고 한다. 서양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들뢰즈가 ‘재현의 굴레’라는 표현으로 일의적 존재성 즉 존재자의 본래성을 속박하는 굴레가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이라고 했는데28), 이 재현이 바로 자기규정이다. 존재자의 자유는 이러한 굴레로부터의 해방에서 온다. 원(冤)이 정태(靜態)화 하는 자아의 대립적 규정의 굴레를 벗으면 근원(根源)적 존재를 회복하며 그 회복의 상태가 상생(相生)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해원상생은 자기규정을 벗고 운동성을 구현한 상태인 것이다.
음양합덕 ‧ 신인조화 ‧ 해원상생이 결과를 향한 논리적 조건의 측면에 가깝다면 도통진경은 그 조건에 의해 도달하게 되는 결과 즉 경지(境地)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도(道)에 통한 참된 경지는 곧 절대성과의 합일 내지는 자유와 해방이 실현된 사태(事態)이다. 이 항목에서 주목할 점은 절대자의 노동의 목적이 이념계의 절대성을 실존계에 실현하고 인간에게 그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사실이다. 선천 상극 세계에서는 모순과 대립에 의해 이념계의 절대성이 그 상태 그대로 실존계에 구현될 수 없었다. 그런데 절대자의 노동에 의해 절대성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의미로 실존계에 구현되는 것이다.
종지는 대순진리회의 교의(敎義)적 근본 지향점을 말한다. 분석한 종지의 내용을 통해서 이 종단이 지향하는 교의는 절대자의 노동을 네 가지 항목으로 개념화한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종지로 삼고 절대자의 노동 형식을 계승하여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대순사상의 수양을 절대자의 자기 회복으로서의 노동의 형식을 종지를 통해 실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지를 근본 형식으로 두고 수양으로서의 노동을 거치는 것으로 인간은 추체험(追體驗)을 통해 절대자의 노동을 계승해 궁극적으로는 그와의 일치를 이룬다.
Ⅳ. 결론
근대적 완성을 향한 헤겔의 철학적 목적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주체성과 개체적 완성이라는 취지가 있다. 그것은 자유(自由)와 해방(解放)이며 인간이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해방을 이루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절대성(絶對性)을 구현했다는 말과 일치한다. 절대성을 구현한 인간은 결국 신(神)적 속성을 그대로 실현한 인간이다. 헤겔은 인간이 정신(精神)의 힘으로써 절대지(絶對知)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그 가능성을 논증했으며 그 과정 가운데 수반되는 행위 전체를 노동[Arbeit]이라고 표현했다. 고ㆍ중세적 노동이 피지배자의 지배자의 명령에 의한 기계적 행위였다면 헤겔의 노동은 인간 주체가 자신의 절대성을 회복하려는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고양(高揚)과 수양(修養)의 과정이다. 헤겔은, 이것이 정신(精神)이라는 신(神)적 소양을 품부(稟賦) 받은 인간의 고유한 가능성이라고 근대적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인계(人界)로 하강한 절대자의 천지공사를 헤겔이 말한 노동의 개념을 통해 해석했다. 물론 헤겔은 절대자의 입장이 아닌 인간의 측면에서 논의를 개진한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이 실존계에 절대성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이라는 점과 그 힘의 근거를 인간 주체 내부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증산의 천지공사를 노동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데 별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구천대원조화주신이 인간의 몸으로 지상(地上)에 왔다는 것은 노동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리고 증산의 노동적 활동은 지상을 향한 자신의 절대성 구현을 목적으로 하며 그러한 구현은 천지공사라는 대역사를 통해 진행되었고 실존(實存)의 인간에게 그 노동이 계승되며 인간을 통해 천지공사의 노동은 완결되는 것이다.
한편 논의 과정 중에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과 노동의 종결을 통해 얻은 신인조화의 모범으로서의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의 존칭이 가진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논의도 심층적인 연구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구천대원조화주신이었을 때는 노동의 개념이 발생하지 않았고 이념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만물을 움직이다가 인신 강세의 시점으로부터 노동의 개념이 발생했다. 절대자의 노동은 단순한 주술이 아니며 무한성(無限性)과 유한성(有限性)을 합치시켜 그 양자의 합일(合一)적 생성(生成)을 지상계에 실현하고자 하는 인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절대자의 노동의 형식은 대립된 모든 것의 상생(相生) 즉 음양합덕(陰陽合德)ㆍ신인조화(神人調化)ㆍ해원상생(解冤相生)ㆍ도통진경(道通眞境)의 종지(宗旨)로 범주화 된다.
절대자의 노동은 실존 가운데 자신의 무한성을 구현하는 것이며 인간의 노동은 실존화된 절대자의 무한성을 배워 자신에게 전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상신선 실현과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대순진리회의 목적으로 표현된다. 인간의 노동은 절대성을 향한 오름의 운동이며 절대자의 노동은 유한계를 향한 내림의 운동이다. 이것의 합치가 곧 인존(人尊)이며 이것을 위해 천지공사가 필연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헤겔의 노동(勞動, Arbeit)의 개념은 천지공사를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데 대한 가장 근접적인 철학 개념이다. 헤겔 체계의 특성은 절대자의 본질과 절대자의 현현(顯顯)으로서의 현실 사이의 관계를 폭넓고 면밀한 관점에서 설명하는 힘이 있다. 헤겔이 “철학(哲學)은 곧 신학(神學)이며 신학에 대한 몰두이다. 신학에 몰두하는 철학은 그 자체가 곧 예배이다.”29)라고 한 말도 그런 것에 연유한다. 아울러 그의 사상체계에는 절대성의 지상 현현이라는 변증법적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지평도 함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대순사상의 미개척된 영역을 철학적으로 분석할 적절한 틀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철학적 분석에서의 미개척 영역인 천지공사에 대해 절대자의 노동이라는 개념적 분석을 가할 수 있는 실마리를 헤겔의 노동 개념이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서 연구방법으로 중점적으로 끌어들였다.
필자는 헤겔의 노동 개념을 통해 증산의 천지공사를 개념적으로 해석한 본 논문이 대순사상에 대한 개념적 연구를 위한 하나의 활로가 되어 앞으로의 대순사상 연구가 세계 사상사의 객관적 공간에서 소통 가능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연구를 개진했다. 또한 대순사상의 세계화에 있어 이러한 학술적 공론을 형성하는 것은 대순사상 연구자의 필수적인 과제이므로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또한 근대성 담론에 대한 서구 철학의 주류 속에 대화의 장을 요청할 수 있는 방법을 헤겔에게서 찾았다는 점과 반대로 헤겔 연구에 있어서도 대순사상을 통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연구의 성과로 생각한다. 아울러 이러한 상호 작용으로 대순사상의 세계화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