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언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요,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장님은 앞길을 볼 수 없으며, 나아갈 방향을 모른다. 또한 절름발이는 걸음걸이에 어려움을 겪는다.1)
그렇다면 종교에 절실히 요구되는 과학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현대과학에 방점을 둔다면 “과학이란 우주라는 이 복잡계(카오스)가 그 가장 밑바닥에 감추고 있는 질서의 기본단위(프랙털)2)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3)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적 홀로그래피4)의 메커니즘 속에는 프랙털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고 지적한다.
프랙털은 주로 수학이나 현대물리에서 사용하는 용어이지만, ‘어떤 궁극적 실재가 다면적인 양상을 드러내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프랙털적 원리’보다 더 적합한 용어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프랙털의 원리를 활용하여 궁극적 실재가 구현되는 양상을 밝히려고 한다. 프랙털(fractal)은 이미 과학계에서 상용화된 원리로서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 널리 응용되고 있다. 따라서 대순사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수학적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적용되는 부분이 커지는-그만큼 과학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몇몇 현대물리학자들은 “신은 수학자이다.”5)라고 말한다.
대순의 ‘인존’사상에서는 인간이 신(神), 천지(天地)와 같은 위상을 갖는다. 하지만 그 종합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사상이다. 특히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는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보여줄 공산이 크다. 유일신을 신봉하는 입장에서는 인간의 위격(位格)이 신과 동격(同格) 혹은 그 이상일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접근법을 통해, 신(神)과 천지(天地)의 프랙털이 인간이고 천지신명의 프랙털이 우리의 마음[인존(人尊)]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프랙털의 원리(영원철학의 홀라키, 홀론)를 적용하여 대순사상의 궁극적 실재의 종합적 성격을 밝히는 것이 본고의 주된 취지다. 이에, 세계의 거의 모든 고등 종교의 공통적 핵심 교의에 해당하는 영원철학으로 대순사상의 궁극적 실재를 파악하려 한다. 따라서 대순사상의 다면성, 종합성을 언급하려면 그 비교 대상으로서 세계 종교의 그것을 설정하고 구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에 따라 본고 Ⅱ장에서는 세계 주요 종교들을 열거해 보고 각각의 종교가 표명하는 궁극적 실재의 모습이-표면적으로 보기에-상이(相異)함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 사상가들, 철학자들, 사색가들이 채택한 보편적인 종교관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는 일치한다. 그래서 Ⅲ장에서는 영원철학에 나타난 궁극적 실재 일치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Ⅳ장에서는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일치ㆍ회통할 수 있는지’ 대순사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Ⅱ. 세계 주요 종교의 궁극적 실재
종교를 분류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경전의 유무나 신의 숫자, 지역에 따라 나누기도 하고, 계통이나 형태6) 혹은 신념7)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기준으로서 일반적인 분류 중의 하나는 세계종교를 인격신교와 비(非)인격신교로 나누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모든 종교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궁극적 실재를 i)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존재로 상정(想定)하는 종교 ii) 내재적이며 비인격적 존재로 상정하는 종교로 대분한다.
오강남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 종교 갈등의 원인은 표층종교에 있지 심층종교에 있지 않다. 심층을 보지 못하는 각 종교들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표층차원의 인식이 문제의 핵심이다. 본고의 목적은 종교 갈등의 근원적 원인 즉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각 종교들의 상이한 인식을 해소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분명히 해 둘 것은, 이 논의는 표층종교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식에 대한 것이지, 심층종교의 그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종교는 신의 초월을 강조하는 표층, 초월과 동시에 내재를 주장하는 심층을 함께 가진다. 물론 이로 인해 영원철학은 성립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종교들의 경우 표층이 심층보다 상대적으로 더 두꺼운 것이 사실이다. 이에, 세계 주요 종교를 둘로 나누어 보면 다음 <표 1>과 같다.
종교분류는 상당히 예민하고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 표층의 종교를 염두에 두고 여느 종교를 어떤 한 유형으로 분류했을 때, 당장 해당 종교는 심층종교의 입장에서 반박을 할 수 있다.8) 하지만 종교문제의 발단은 심층종교가 아니라 표층종교에 있으므로, 문제를 해소하려면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표층차원의 인식을 염두에 두고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 주요종교를 선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다. 어떤 종교가 세계 주요 종교라고 할 수 있는지는 학자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다. ‘왜 우리 종교가 주류 종교에서 제외되었는가?’라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 어떤 기준이나 준거를 제시해도 설정 기준 자체에 대한 논박이 가능하다. 이에 본고에서는 단순하게 신도의 숫자9)와 궁극적 실재를 초월적ㆍ인격적인 존재로 상정하는 종교와 내재적ㆍ비인격적 존재로 상정하는 종교로 구분한다.10)
일반적으로 서양에서의 신(神)은 인격적, 외재적ㆍ초월적인 존재로 상정되는데 반해, 동양에서 말하는 공(空), 불성(佛性), 리(理), 도(道)와 같은 존재는 비인격적이며 내재적 존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i)에는 신은 오직 하나라고 주장하는 나나크(Nānak)의 시크교(Sikhism), 기독교(Christianity),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유대교(Judaism), 이슬람교(Islam), 바하이교(Baha'i faith)11), 일본의 신도(神道)12) 그리고 힌두교(Hinduism)13)가 속한다. ii)에는 유(儒, Confucianism), 불(佛, Buddhism), 도(道, Taoism)는 물론이고, 인도의 자이나교(Jainism)14)가 이에 속한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에 따르면, 신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신이란 인간의 유한성에 내포된 질문에 대한 답이다.”15)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념의 차이는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간극(間隙)의 정도를 얼마나 큰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에서도 독일의 낭만주의(18C말~19C 중엽)에서와 같은 범신론을 찾아볼 수 있지만, 한자경의 지적처럼, 그들의 “궁극적 하나(일자)는 결국 신에게 돌아가며, 신과 인간의 차이는 끝까지 남겨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16)이다. 아울러 김상일은 인격신에 대한 신앙과 비인격적 존재의 조화에 있어서 “한국과 같은 그러한 화합은 찾기 힘들다.”17)고 지적한다. 이처럼 한국 근대에 출현한 대순사상에서는 신과 인간의 간극이 사라지고, 궁극적 실재는 인격적, 초월적, 비인격적, 내재적 존재라는 다면적 양상을 보인다. 도표에서 보듯이 영원철학과 대순사상은 i)과 ii)를 아우른다는 특징을 갖는다.
Ⅲ. 영원철학의 궁극적 실재 일치론
프랙털(fractal)은 우리말로 “자기 닮음성” 또는 “자기 유사성(類似性)”이라고 한다. 프랙털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 전체와 부분이 유사한 형태를 갖는다. 둘째, 프랙털은 비규칙적, 비대칭적 구조이다. 셋째, 프랙털은 규칙성과 비규칙성, 단순성과 복잡성, 다양성과 일관성 등등의 대조적인 특성들이 상보적으로 공존한다. 넷째, 위상공간에 나타나는 어트랙터(attrator)는 프랙털 특성을 갖는다.18)
중요한 것은 프랙털의 세계는 단지 ‘모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에 있어서도 공통분모를 지닌다는 데 있다. 자기 닮음성의 프랙털 구조는 전체적인 동식물이나 사물에서도 나타나고, 모든 인간의 몸의 구조는 물론이고 결국 생각도 동일하다는 것이다.19) 겉으로 보기에 서로 다른 언어, 피부색, 다양한 삶의 문화를 보일지라도 늘 동일한 모습으로 짜여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해석은 일찍이 영원철학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자아초월심리학자이자 세계철학자 켄 윌버(Ken Wilber)가 말하듯이,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모든 사람은 몸의 뼈 206개, 심장 하나, 신장 두 개, 사지(四肢)를 지닌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 영역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정신의 심층(深層)구조에는 보편적인 능력이 있고, 이 능력이 이구동성으로 보편적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경험이 내면적 형태로 감수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단순한 사적 지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20)고 역설한다. 예컨대 ‘수학’과 ‘논리학’의 경우 우리는 그것들이 종교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눈에 의해 내적으로 보여 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들이 공적 중요성이 결여된 사적인 환상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수학적 지식은 동등한 훈련을 받은 수학자들에게는 공개된 지식이듯이, 이와 유사하게 명상적 지식 역시 동등하게 훈련받은21) 명상가 모두에게는 공개된 지식”22)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학적 명제의 진위를 검증할 때 우리는 감각적 명료성이 아니라, 정신적 명료성에 의존한다. 즉 명제의 진위는 물질적 감각이 아니라, 내적 경험의 일관성에 의거한다. 이것이 ‘과학적 검증’의 의미이다. 그래서 수학, 논리학, 심리학 같은 학문들을 우리는 ‘과학’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검증해 온 지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우주에는 손전등으로 탐험할 수 있는 동굴이 과연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23)
요컨대, 존재의 영역은 편의상 물질(물리학), 생명(생물학), 마음(심리학), 영혼(신학), 정신(신비주의)의 5개의 영역으로 분류된다. 이것이 이른바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라는 도식인데, 존재의 사슬의 각 단계는 그 앞의 단계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포함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24)
켄 윌버는 그것을 “홀론(holon)”25)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Holon’의 어원은, 그리스어 ‘holos(전체)’에 ‘on(부분)’이 붙은 복합명사이다. 그래서 홀론은 ‘부분적 전체’,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그 자체로는 완결된 전체이지만, 동시에 보다 큰 것의 부분이며 요소라는 의미”26)이며 모든 존재는 부분과 전체의 속성을 함께 갖는다(프랙탈)27)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주만물은 홀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절대적 의미의 부분이나 전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바꿔 말하면, ‘전체를 부분의 집합’으로 보는 소위 환원주의(Reductionism)’는 부정되며, 세계가 계층적으로 등급화되어 있다고 파악한다. 영원철학자들은 우주가 홀론(holon)의 계층(hierarchy) 구조이기에, 홀라키(holarchy)라고 지칭한다. 모든 상위의 홀론은 하위의 홀론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지칭하기 위해 쓰는 말이 홀라키다.
이것이 바로 영원철학의 중심 내용에 해당한다.28) 소위 존재의 대연쇄(大連鎖) 혹은 존재의 대둥지(Great Nest of Being)는 여러 개의 동심원과 비슷하게 각 상위 차원이 하위 차원을 감싸고 포섭하는 존재의 양상을 표현한다. 영원철학자들은 지난 3천여 년 동안 이 대둥지의 일반적 수준에 관해서-수준을 몇 개로 나눌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범문화적 일치를 보였다는 것이다.29)
<그림 1> “존재의 대둥지”에서 보듯이, 우주 만물은 근원적으로 평등하고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상대적인 차이ㆍ계층적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물질ㆍ마음ㆍ영이라는 세 가지 수준을 말할 수도 있고, 물질ㆍ몸ㆍ마음ㆍ혼ㆍ영과 같이 다섯 가지, 혹은 그 이상으로도 제시할 수 있다.
이렇듯, 이러한 전체와 부분의 순환 구조적 관계는 우주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우주 전체가 전체인 동시에 부분과 연결되는 소위 ‘관계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기에, 홀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홀론은 물질, 생명은 물론이고, 정신영역에까지 확대된다. 이미 영원철학자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에게 이러한 발상은 참신(斬新)한 것은 아니다.
불교의 『범망경(梵網經)』에서는 “한 꽃마다 백억 국토요, 한 국토에 한 석가니, 이렇듯 천백억이, 노사나불(盧舍那佛)의 근본 몸이로다”30)라고 하여, 일체가 하나고 하나가 일체(一卽一切 一切卽一)인 관계를 말한다. 『화엄경』에서도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또 일체 속에 하나가 있다(一中一切多中一)”31)고 말한다.
또한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인물들 … 이들의 업적은 공통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은 자연의 ‘보편성(universality)’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이런 사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 우주가 한 잔의 와인 속에 들어 있다’라고 표현하였다.”32)
<그림 1>33)은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 1919~2016)의 『잊혀진 진리: 세계종교들의 공통 비전』과 켄 윌버의 『모든 것의 이론』에서 제시하는 존재의 대둥지이다. 이 그림은 휴스턴 스미스가 인정하고 채택한 것으로 세계 주요 종교들의 공통적 교의라고 할 수 있다. 아래쪽 방향의 화살표(↓)는 자아의 수준이 신체(身, Body), 마음(心, Mind), 혼(魂, Soul)과 영(靈, SPIRIT)의 수준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위쪽 방향의 화살표(↑)는 실재의 수준을 나타내며, 역시 신ㆍ심ㆍ혼ㆍ영에 각각 대응하는 육생(陸生, Terrestrial)ㆍ매개물(Intermediate)ㆍ천체(Celestial)ㆍ무한(INFINITE)으로 나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그림 1>을 바탕으로 세계 주요 종교들의 교의에 따라 해당 내용을 표시해 보면 다음 <그림 2>34)와 같다.
이 그림은 세계 주요 종교들이 존재의 대둥지에 부합되는 교의들을 –표현은 다르지만-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의 하단은 <그림 1>과 마찬가지로 신(身)ㆍ심(心)ㆍ혼(魂)ㆍ영(靈)에 해당되는-자아의 수준(개체차원)의-종교들의 교의를 나타낸 것이고, 상단은 물질, 중간물(매개물), 천공(天空, 천체), 그리고 무한에 해당되는-실재의 수준(세계차원)의-종교적 이념ㆍ주의를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의 실재의 수준(Levels of Reality, 궁극적 현실) 가장 바깥쪽 동심원을 보면 힌두이즘의 ‘아무런 속성도 없는 브라흐만(Nirguna Brahaman)’, 불교의 ‘궁극적이고 비(非)개념적인 열반 법신(Shunyata Nirvana Dharmakaya)’, 중국 종교들의 ‘언표(言表) 할 수 없는 도(道, Unspeakable Tao)’, 유대교의 ‘신령(神靈)의 세계(World of Emanation)’, 기독교의 ‘신성(부정(否定)의 신학35))[Godhead(apophatic)]’, 그리고 이슬람교의 ‘드러나지 않는 지고(至高)의 힘[hawiyyah ghalb(unmanifested) izzah(sovereign power)]’이 있는데, 이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를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36) 주지하듯이, 비교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세계의 모든 종교, 의식, 신들은 동일(同一)한 초월적 진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37)한다.
영원철학의 선도자 역할을 해 온 슈온(Frithjof Schuon, 1907~1998)은 종교를 ‘현교적(顯敎的, exoteric)’인 것과 ‘비교적(秘敎的, esoteric)’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현교적이란 종교의 ‘형식(form)’을 이르는 말로써 건물ㆍ교리ㆍ제도ㆍ사제 같은 것이며, 비교적인 것은 종교의 ‘본질(essence)’로서 내적ㆍ신비적 영성 같은 것을 의미한다. 비교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는 종교간의 관계를 수평적이라고 보지만,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외양적인 것(顯敎)과 내밀한 것(祕敎)은 수직적인 것으로 보아, 슈온의 사상을 다음 <그림 3>과 같이 표현한다.38) 그림에서 보듯이, 종교들의 현교적인 형식만을 보면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그 비교적인 것 즉 본질적인 면모에 주목하고 이를 추구하게 되면 종교들은 초월적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슈온에 따르면, “종교들이 비교적이 되면 아무런 차이도 없이 통일될 수 있다”40)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세계 각각(各各)의 종교들이 상정하는 궁극적 실재가 실상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불선 포(包)삼교적인 우리의 풍류도(風流道)는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불리듯이, 그 비교적(秘敎的) 성격을 잘 드러낸다.
그래서 김상일은 세계 주류 종교들의 초월적 통일을 가능케 하는 상위 개념으로서 종교의 본질(비교적 성격)을 잘 함축하고 있는 풍류도를 제시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이 풍류도의 근대적 재현(再現)이 바로 대순사상이다. “근본을 다시 찾고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이치에 의해 풍류도적 특성이 한국 근대에 대순사상[동학]으로 다시 나타난다.41)
風流酒洗百年塵42)
‘바람 풍(風)’은 우리말의 ‘신(神)바람 났다’, ‘신명(神明)났다’는 말처럼, 신도(神道)를 상징한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는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하니 왈(曰) 풍류(風流)”라고 하였다. 즉 현묘지도가 풍류인 것이다. 『전경』에서는 “신도(神道)로써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玄妙) 불측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43)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의 실내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로서의 현묘지도 즉 풍류도는 폐해지고 열교(裂敎)로서의 선(仙), 불(佛), 유(儒)가 시대(時代) 순(順)으로, 차례대로 등장한다.44)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45)
시성(始姓)이 풍씨(風氏)인데 풍류도인 신선의 비의(秘義)를 깨친 자(者)의 성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맥이 끊어지고 풍류도의 본질이 은폐되므로 풍씨가 사라지고 강씨가 시성으로 등장한다.46) 다시 말해, “상제는 원시반본하는 때라서 강씨 성으로 탄강하셨으며 인간 세상에 원시성이었던 풍성(風姓)이 15대에 대가 끊겨서 다음으로 강씨가 원시성이 되어 강씨로서 일을 맡게 된 것이다.”47)
Ⅳ. 대순사상에 나타난 궁극적 실재의 프랙털적 양상
대순사상에서는 다양한 궁극적 실재에 대해 언급한다. 기존의 도(道), 상제(上帝), 무극(无極), 태극(太極)은 물론이고, 천지(天地)와 신명(神明), 지기(至氣)까지 실로 다양한 궁극적 실재의 개념들이 등장한다.48)
대순진리회 포정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 우주(宇宙)가 우주(宇宙)된 본연법칙(本然法則)은 그 신비(神秘)의 묘(妙)함이 태극(太極)에 재(在)한바 태극(太極)은 외차무극(外此無極)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리(眞理)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대순=원=무극=태극’이며, 대순이 곧 태극으로서 서로 동치(同値)적 관계에 놓여있다.
익히 아는 바대로 태극은 우주 만물이 생성, 전개되는 근원으로서 그 근원이 되는 어떤 실체라고 보기도 한다.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따르면, 태극은 우주 만물의 이치로서, 또한 우주의 궁극적 존재로서 동정(動靜)이 지극하면 음과 양을 생성하고 다시 양이 변해 음을 합하여 오행을 생성한다. 이 다섯 가지 기운이 펼쳐지면 네 계절[四時]이 행해진다. 포정문에서도 “이 태극(太極)이야말로 지리(至理)의 소이재(所以載)요. 지기(至氣)의 소유행(所由行)이며 지도(至道)의 소자출(所自出)이라. 그러므로 이 우주(宇宙)의 모든 사물(事物) 곧 천지일월(天地日月)과 풍뢰우로와 군생만물이 태극의 신묘한 기동작용(機動作用)에 속하지 않음이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즉 태극은 지극한 이치가 실려 있는 곳, 지극한 기운을 운행시킬 수 있는 곳이며, 지극한 도는 바로 이 태극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존 종교에서는 대체로 궁극적 실재의 일면만을 얘기하는데, 영원철학과 대순사상은 그 모든 측면을 회통(會通)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궁극적 실재에 대한 대순사상의 형이상학적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존재의 대둥지로 나타내면 <그림 4>와 같다. 이 그림은 <그림 1>, <그림 2>와 마찬가지로 하단은 자아의 수준(개체차원)이고, 상단은 실재의 수준(세계차원)으로, 대순사상의 교의를 나타낸 것이다.
먼저, 개체차원에서는 육신(肉身) → 혼ㆍ백(魂ㆍ魄)ㆍ정혼(精魂)49) → 신ㆍ귀(神ㆍ鬼)50) → 영(靈)ㆍ선(仙)ㆍ신인(神人)51)ㆍ인신상제(人身上帝)로 나타나고, 상단은 정(精) → 신명(神明)ㆍ신장(神將) → 대신명(大神明)ㆍ신성(神聖)ㆍ불(佛)ㆍ보살(菩薩)52) → 도(道)ㆍ무극(無極)ㆍ태극(太極)ㆍ지기(至氣)53)ㆍ구천상제(九天上帝)ㆍ미륵불(彌勒佛)54)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그림의 실재의 수준과 자아의 수준 가장 바깥쪽 동심원을 보면 진아(眞我, 靈ㆍ仙)는 도(道), 곧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55)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도(道)가 곧 나요, 내가 곧 도(道)라는 경지(境地)를 정각(正覺)하고 일단(一旦) 활연관통(豁然貫通)하면 …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곡진이해(曲盡理解)에 무소불능(無所不能)”56)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을 통해 『전경』에 나타난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제의 기이한 행적들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57) 실재의 차원의 구천상제는 피와 살을 지닌 인간, 즉 개체 차원의 인신상제(人身上帝)로 탄강하신 것이다.58) 또한 실재의 수준에서는 도(道)와 무극(無極), 태극(太極), 구천상제(九天上帝), 지기(至氣), 미륵불(彌勒佛) 등등의 궁극적 실재가 회통하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이에 “상제께서 하루는 공우에게 말씀하시길 ‘동학 신자는 최 수운의 갱생을 기다리고, 불교 신자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예수 신자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나, 누구 한 사람만 오면 다 저의 스승이라 따르리라’고 하셨도다.”59)
프랑스의 고생물학자이자 예수교 신부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95)’은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체험을 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60)라고 말한다. 주지하듯이 그는 과학의 언어를 사용해서 우주의 바탕에 대해 논한다. 한 마디로, 우주는 ‘수없이 많은 여럿(多)’이 ‘하나(一)’의 ‘조직’을 이룬 것이다. 모든 물질을 쪼개 나가면 계속 작은 알갱이로 나누어지지만, 쪼개고 나눌수록 물질은 ‘원래 하나’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우리의 몸이-세포 분열로 인하여-수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개체로 나타나듯이, 그러면서도 각각의 세포는 개체로 전환될 수 있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기초는 ‘여럿’과 ‘하나’ 그리고 그것들을 조직화시켜 주는 ‘에너지’, 이렇게 세 가지61)라고 본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과 우리의 삶의 방식에서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62)
김상일은 프레게(Gottlbo Frege, 1848~1925)63)의 수학적 논리를 통해 “인간이 신에 포섭되나 종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보여주려”64) 하였다.
‘10보다 작은 양의 정수(positive whole number less than 10)’ … 그런데 문제는 이 개념 자체는 양수도 아니고, 정수도 아니고, 10보다 작지도 않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생긴다.
… ‘10보다 작은 양의 (홀수인) 정수’에는 9, 7, 5, 3, l의 다섯 가지 숫자뿐이다. 그러나 ‘정수임’ 속에는 무한대의 숫자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10보다 작은 양의 정수’라는 ‘개념’은 자기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수’라는 개념 속에 종속된다. 전체로서의 ‘개념’이 도리어 자기 속의 부분에 종속되는 현상이 생긴다. 그런데 ‘10보다 작은 양의 정수’ 속에는 ‘정수임’이란 속성이 포함되어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부분의 전체에 대한 대(大)반란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분이 도리어 전체를 포섭하는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을 프레게는 이처럼 논리적으로 증명했다.65)
여기서 ‘10보다 작은 양의 정수’는 대상(對象)이고, ‘양수임’, ‘정수임’, ‘10보다 작은’은 ‘속성(屬性)’이다. 그런데 ‘속성은 대상에 포섭되지만 종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요지다.
만약에 기독교처럼 인간[부분]이 신[전체]에 의해 포섭되는 존재라면 이른바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세상에 악(惡)이 존재하는 이유를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데서 찾는다면, 자유의지를 부여한 신의 책임 또한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A형 논리66)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기에 신에 포섭되는 존재다. 신에 포섭된 인간 존재에게 악행의 책임을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마저도 신의 피조물이기에 신 스스로 허용한 자유의지를 탓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자유의지에 따라 생긴 인간의 타락(Fall)은 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결국 신정론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김상일은 E형 논리67)에서 찾는다.
인간은 신에게 포섭은 되지만,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수학자 프레게는 논리학을 통해 발견했다는 것이다. 19C말의 수학자 G. 칸토어(Georg Cantor, 1845~1918) 역시 부분과 전체가 같다68)는–자연수 전체 집합이 짝수 전체 집합과 같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당시 수학계를 놀라게 했으나, A형 논리를 따르던 당시 수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기독교 전통 속에서도 도미니크파의 신학자였던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 1260~1327) 같은 신비주의자들은 이런 E형 논리를 사용했다. 그는 ‘인간’이 곧 ‘신’이라고 하여 이단시되었다. “인간과 같이 내재하며 함께 고통받는 신에 대한 이해는 곧 신과 인간이 서로 되먹임하는 관계에 있는 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69) 실로 인류 역사는 A형 논리와 E형 논리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 전체를 동서로 나누고, A형 vs E형 논리로 갈라져 전개되는 양상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5>70)와 같다. 이 그림을 보면, 같은 것이 같은 것 속에서 갈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양단적(兩端的) 프랙털 현상71)이다.
인도와 중국의 신화 등에서는 A형 논리가 설 자리가 없다. 다시 동북아시아 신화의 논리에서 볼 때에 모두가 E형 논리적이다.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다시 부분이 되어 되먹임하는 ‘통논리(通論理, trans-logic)’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통논리적 성격은 동양문화 전반에 걸쳐 하나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통논리적이라 하더라도 카오스 이론에서처럼 되먹힘의 정도와 횟수가 또한 문제가 된다. 부분과 전체가 되먹임하는 현상이 많아질수록 부분과 전체가 같아지는 홀론(Holon) 현상은 더욱 철저하게 만들어진다. 도가의 ‘도(道)’, 힌두이즘의 ‘범(梵)’, 그리고 불교의 ‘무(無)’ 같은 개념들이 모두 부분과 전체의 되먹힘에 의한 홀론을 실현하자는 데 있으며, 그 되먹힘의 정도에 따라 같은 동양사상이라 하더라도 차이가 생긴다.72)
이렇듯 김상일 역시 홀론(Holon) 현상을 언급하면서, 도가ㆍ불교ㆍ힌두교의 도(道)ㆍ불(佛)ㆍ범(梵) 같은 핵심 개념들은 홀론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같은 동양사상이라 하더라도 ‘전체 ⇄ 부분’의 되먹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렇다면 대순사상은 어떠한가.
김 송환이 사후 일을 여쭈어 물으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사람에게 혼과 백이 있나니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어 후손들의 제사를 받다가 사대(四代)를 넘긴 후로 영도 되고 선도 되니라. 백은 땅으로 돌아가서 사대가 지나면 귀가 되니라’ 하셨도다.73)
이에 따르면, 인간은 곧 신적(神的) 존재다. 반면에, 신과 인간은 음양 프랙털 관계[☯]로서 인간이 신적 존재라면, 신(신명)은 인격적 존재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신(神)ㆍ신명(神明)ㆍ신장(神將)과 같은 모든 신적 존재는 인격성(人格性)을 전제로 한다. ‘신명’이라는 용어는 인간과 대칭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 다분히 인격화된 것이다.74) 이런 사실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림 7>과 같다. 그리고 이것 또한 프랙털 양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계층 구조형 다이어그램(diagram)으로 표시하면 <그림 8>과 같다. 이 그림들을 보면, “같은 것이 같은 것 속에서 갈라진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서양의 주류 종교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에 대한 불경일 것이다.
II장 <표 1>에서 궁극적 실재를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존재로 상정하는 종교”들 대부분은-논리적ㆍ과학적ㆍ경험적 검증에 의거하는-홀론의 실현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전경』에서는 개체가 궁극적 실재에 포섭(包攝)은 되지만 종속(從屬)되지 않는 홀론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75) ‘전체 속의 부분’, ‘부분적 전체’인 홀론은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한 사람의 품은 원한으로 능히 천지의 기운이 막힐 수 있으며”76) 실제로 한 사람의 원한이 상제의 천지공사를 멈추는 작용도 한다.
상제께서 기유(己酉)년에 들어서 매화(埋火) 공사를 행하시고 四十九일간 동남풍을 불게 하실 때 四十八일 되는 날 어느 사람이 찾아와서 병을 치료하여 주실 것을 애원하기에 상제께서 공사에 전념하시는 중이므로 응하지 아니하였더니 그 사람이 돌아가서 원망하였도다. 이로부터 동남풍이 멈추므로 상제께서 깨닫고 곧 사람을 보내어 병자를 위안케 하시니라. 이때 상제께서 “한 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천지 기운이 막힌다”고 말씀하셨도다.77)
이 역시 궁극적 실재를 초월적 존재로 상정하는 서구 주류 종교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자아초월심리학 분야의 창시자로 꼽히는 스타니슬라프 그로프(Stanislav Grof, 1931~)는 켄 윌버가 영원철학의 기본 교리를 묘사한 것처럼78), 우리 인간의 본성은 신적(神的)이며 우리 자신은 우주의 창조 원리와 동일하다고 강변한다.79)
대순사상에서는 ‘천지(天地)’가 궁극적인 실재의 자연적 측면으로서 표현된다. 천지는 생명의 터전이자 우리 존재의 근원이다.80) 또한 삼계(三界)는 천ㆍ지ㆍ인에 신명의 측면이 결합되어 신명의 세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삼재(三才)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천지뿐만 아니라 인간이 신명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점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81)
이와 같이 천지의 프랙털이 인간82)이라면, 인사(人事)의 문제는 천지를 개조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83)
이와 같이 삼계공사는 ‘천지(도수) → 신도(신명) → 인사(민생)’의 순차(順次)에 따른다. 단지 인사의 문제라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천ㆍ지ㆍ인(天地人) 삼계가 서로 통하지 못하여84) 이 세상에 참혹한 재화가 생기는”85) 것이며, “삼계가 착란하는 까닭은 명부의 착란에 있으므로 명부에서의 상극 도수를 뜯어고쳐야”86)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급했듯이 인간은 신에 포섭되지만, 종속되지 않는 존재이다.87) “우주 대원(宇宙大元)의 진리가 도이며 도는 사람만이 깨달아 닦을 수 있으므로”88) ‘인존(人尊)’도 가능한 것이다. “해인(海印)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의 장중(掌中)에”89) 있으며, 그래서 천지가 평안하게 되는 것도 천지를 어지럽게 하는 일도 나로부터 비롯된다.90)
‘인존(人尊)’은 단순하게 인간을 존중하자는 차원을 넘어선다. 여기서 “‘존(尊)’의 의미는 고대로부터 인간이 숭배해왔던 신적인 대상을 내포한다. 즉 인존은 단순한 인간존중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가치에 신격(神格)을 부여한 것”92)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신을 받들어 왔듯이, 이제 인간을 떠받드는 시대가 될 것93)이라고 보는 것이 바로 인존의 이념이다. 다시 말해 “‘인존’은 인간에게 신명성이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인격적 주재로서의 궁극적 실재와 소통하는 인간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신과 인간이 본래부터 하나라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94) 즉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음양(陰陽)의 관계로, 음과 양은 하나의 태극(太極)을 이루는 두 양상이 되듯이, 음과 양으로 비유되는 신과 인간은 하나의 존재에 대한 두 양상으로 이해된다.
신이 있고 인간이 있다. 신은 음이고 인간은 양이다. … 신명은 사람을 기다리고 사람은 신명을 기다리니, 음과 양이 서로 합하고 신과 인간이 서로 통한 이후에 하늘의 도가 이루어지고 땅의 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신의 일이 이루어진 연후에 인간의 일이 이루어지며, 인간의 일이 이루어진 연후에 신의 일이 이루어진다.95)
도(道)가 음양이며 음양이 이치이며, 이치가 경위며 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96)
상제께서 을사(乙巳)년 봄 어느 날 문 공신에게 “강 태공(姜太公)은 七十二둔을 하고 음양둔을 못하였으나 나는 음양둔까지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97)
즉 신과 인간은 음양 프랙털의 관계98)로서, 음양합덕(陰陽合德)의 원리에 따라야만 조화와 상생을 이룰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신인조화이며 이를 통해 인존이 실현되는 것이다.99)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100)는 것이다.
마음은 귀신의 중요 기관이고, 문호이며, 도로이다. … 내 마음의 추기, 문호, 도로는 천지보다 크다.101)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마음은 하나의 원리로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자리를 탐내지 말며 편벽된 처사를 삼가고 덕 닦기를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그리하면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히리라”102)는 것이다. 예컨대,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다”103)는 것이다. 반면에, “의뢰심과 두 마음을 품으면 신명의 음호를 받지 못한다.”104) 이조 개국 이래 벼슬을 한 사람들은 모두 정(鄭)씨를 생각하였는데, 남의 신하로서 이심(二心)을 품었기에 이것이 곧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그것이 곧 역신(逆神)이라고 한다.105) 즉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면 신명들의 호위를 받으며 (일국의) 명부(冥府)가 되기도 하지만, 두 마음을 품으면 역신이 된다.
이처럼 인존은 마음을 닦아서 실현되며, 이는 신명과의-음양 프랙털-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앞서 삼계(三界)와 마찬가지로 천존과 지존, 그리고 인존에는 신격이 부여되어 있다. 천지뿐만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극치는 “인간의 가치에 신격(神格)을 부여함”으로써 실현된다고 보는 것이 대순사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Ⅴ. 결어
종교 간의 반목, 대립, 갈등은 기본적으로 신앙의 대상인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단적으로, 궁극적 실재가 사실상 같은 것이라면, 갈등은 종식될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전통지혜인 영원철학은 그것이 용어상의 차이일 뿐, 실제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순사상에서도 다양한 궁극적 실재가 나타나는데, 그것들의 의미 또한 영원철학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대순사상에서는 궁극적 실재라고 불리는 여러 개념들[상제, 신(神), 신명(神明), 무극, 태극, 도(道), 지기(至氣) 등]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어떻게 하나의 실재가 다면성의 양상을 보이는지 설명한다. 이를 위해서 현대 과학의 프랙털의 원리를 원용하였다.
영원철학의 홀라키(홀론)는 인류가 3,000~6,000년 간 축적해 온 과학이론의 기초 모형이자 거의 모든 고등 종교 교의의 핵심 축(軸)에 해당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홀라키의 타탕성은 현대과학의 프랙털에 의해 다시 한 번 입증되고 있다. 만약 홀론이 실제 현상에 부합되는 이론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존립해 온 세계의 대부분의 고등종교, 전통철학, 현대과학의 기초적인 교의적ㆍ이론적 토대는 일거에 붕괴된다.
요컨대, 대순사상에 나타난 다양한 궁극적 실재는 프랙털(fractal)적 양상을 보인다.106) 신(神)의 프랙털이 혼백(魂魄)을 지닌 인간이며, 천지(天地)ㆍ삼계(三界)의 프랙털이 소우주 인간이다. 그리고 천지신명(神明)의 프랙털이 인간의 마음으로 나타나며, ‘인존(人尊)’으로 대변(代辯)된다. 다시 말해 본고에서는 독창적인 대순의 인존사상 역시 - 인간의 마음[心]으로 인존이 가능하므로 - 홀론[프랙털] 이론으로 설명 가능함을 밝혔다.
언급했듯이, 여러 종교 간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궁극적 실재의 성격을 밝히는 일은 매우 긴요(緊要)하다. 영원철학은 영적 체험주의에 기초해서, 각 종교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가 사실상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순사상에서는 그 다양한 궁극적 실재들이 서로 어떻게 회통할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종교 간의 갈등, 반목,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