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강증산의 ‘개벽’과 새로운 문명*

허남진 1 , **
Nam-jin Heo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1Research Professor, The Research Institute of Won-buddhist Thought, Wonkwang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 Heo Nam-jin, E-mail : heonj73@naver.com

© Copyright 2019,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30, 2019; Revised: Jun 02, 2019; Accepted: Jun 15, 2019

Published Online: Jun 30, 2019

초록

본 연구는 강증산의 개벽사상을 문명론적 관점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말 개화기 동아시아 문명권의 위축과 물질문명을 앞세운 서구 열강의 동점은 문명적 충격 속에서 새로운 문명전환을 촉발하는 동인으로 작용했다. 척사파와 개화파와 다르게 근대한국 개벽종교 역시 서구 근대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과 새로운 문명론을 제시하는 등 개벽파의 일정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특히 강증산은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여 조화문명과 상생문명을 제시했으며, 이성 중심의 서구적 근대를 비판하면서 신인공공(神人公共) 문명을 제시했다.

증산은 서구 근대문명이 확산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상하 귀천, 남녀차별, 정치부패, 지배층의 착취와 외세의 침략 등 사회 내외의 사회모순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에게 새 문명의 건설을 선언했다. 증산은 물질 중심주의와 인간소외 등을 비판하고 그러한 병폐들로부터 민중들을 구제하는 제생의세 실천으로 이어졌고 개벽을 주장했다. 이것은 묵은 하늘에 대한 청산을 통한 새 하늘 선언이며, 조화와 통합, 살림을 지향하는 새 문명을 건설하려는 노력의 표출이었다.

증산이 지향한 새로운 문명은 상생의 도에 의해 운행되는 사회이고, 인간이 신과 같은 존귀한 존재로 대접받는 인존의 시대로 집약된다. 증산이 구상한 새로운 문명은 동서양의 사상과 문명을 통합하는 조화문명((調和文明)이며, 신인공공(神人公共)의 문명이었다. 또한, 증산의 삶은 민중들의 삶을 구제해 주기 위한 제생의세(濟生醫世)의 삶이었다. 이후 무극도ㆍ태극도의 상생 운동 역시 증산이 지향한 문명 건설을 위한 노력이었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look at the concept of Gaebyeok as used by Kang Jeungsan (姜甑山) from a civilizational perspective. The combination of East Asian civilization during the period of Korea’s port-opening and the subsequent inflow of Western powers with material civilization all at the forefront in the late Joseon Korea, served as the driving force for a new civilizational transition. Unlike the Chuk-sa Party and the Gae-hwa Party, modern Korean religions that emphasized Gaebyeok also responded to Western civilization and suggested a new view of civilization. Kang Jeung-san, resisting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presented a civilization built upon mutual beneficence while criticizing Western civilizations which centered on reason.

Amid this process of the spread of modern Western civilization, Jeungsan declared the construction of a new civilization to the people who were negatively impacted by various social factions, such as class and gender discrimination, political corruption, exploitation via political corruption, and the inflow of Western powers. Jeungsanist Thought developed criticisms of materialism and human alienation, and this resulted in the claim of Gaebyeok. This was an expression of efforts to build a new civilization that aimed to harmonize, integrate, and thrive.

The new civilization envisioned by Jeungsan was that of a society run according to mutual beneficence, and it can be summarized as a ‘Civilization of Harmonious Union’ that integrates philosophical thought and civilizational models of both East and West. This could also be referred to a ‘Civilization of Public-commons and Harmony between Divine Beings and Human Beings (神人公共).’

The life of Jeungsan was a life spent in the service of curing the world to save the lives of humanity. Since then, his ‘movement of mutual beneficence’ as observed in Mugeuk-do and Taegeuk-do were also efforts to build the new civilization envisioned by Jeungsan.

Keywords: 강증산; 개벽; 문명; 조화문명; 신인공공문명; 상생문명; 조정산; 무극도; 태극도; 대순진리회
Keywords: Kang Jeungsan; Gaebyeok; Civilization; Civilization of Harmonious Union; Civilization of Public-commons and Harmony between Divine Beings and Human Beings (神人公共); Civilization of Mutual Beneficence; Jo Jeongsan; Mugeuk-do; Taegeuk-do; Daesoon Jinrihoe

Ⅰ. 머리말

계몽적 이성이 근대를 이끌어 간 핵심적 주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계몽적 이성에 기초한 서구 근대성은 인간 이성의 비판적 힘 내지 주체성의 원리를 밝혀 주었고, 인류에게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와 함께, 기본적 인권, 개인의 존엄,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한 시민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독점과 빈부격차, 제국주의와 세계전쟁, 인간소외와 자연파괴 등의 부작용도 초래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서구적 근대화 과정이 직면하게 된 병리적 현상의 위기적 상황인식에서 최근 서구 사회에서 동아시아가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실은, 서구 중심적 근대성 기획이 실패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울러 신자유주의,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대항계몽주의 등으로 명명되는 오늘날 ‘대안’이라는 수식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는 서구 근대성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미완의 과제라는 의미이며,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당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변혁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대안적 이념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말 개화기 중국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온 동아시아 문명권의 위축과 물질문명을 앞세운 서구 열강의 동점 즉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문명적 충격은 새로운 문명전환을 촉발하는 동인이 되었다. 조선 사회에서 이러한 서구에 의해 촉발되고 강요된 서구적 근대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척사파, 개화파를 중심으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문명화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그들은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면서 도덕적 문명론을 제시했지만 여전히 봉건적 성격을 내포하는 등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1) 근대한국 개벽종교2) 역시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과 새로운 문명론을 제시하는 등 일정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독자적인 깨달음과 시대적 통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제시한 것이 근대한국 개벽종교의 개벽사상이다. 즉 근대한국 개벽종교는 서구 문명을 통찰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기획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상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개벽’은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문명론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이후 증산)은 서구 근대문명이 확산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상하 귀천, 남녀차별, 정치부패, 지배층의 착취와 외세의 침략 등 사회 내외의 사회모순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에게 새 문명의 건설을 선언했다. 증산은 물질 중심주의와 인간소외 등을 비판하고 그러한 병폐들로부터 민중들을 구제하는 제생의세 실천으로 이어졌고 개벽을 주장했다. 이것은 묵은 하늘에 대한 청산의 선언이며, 조화와 통합, 살림을 지향하는 새 문명을 민중과 함께 건설하려는 노력의 표출이었다.

지금까지 증산의 개벽사상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진척을 보인다. 기존연구의 방향을 크게 나누어 보면 증산의 사상적 내용에 분석, 증산종교의 전개와 성격 등이 주류를 이룬다. 본 논문 역시 그 가운데 증산의 사상적 내용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기존 연구와 차별성을 부여한다면 증산의 개벽사상을 문명사적 의의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3)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논문은 근대한국 개벽종교의 큰 계보를 이루고 있는 증산의 ‘개벽’을 문명사적 시각을 통해 서구 문명과 만남 속에서 증산이 서구 문명을 어떻게 인식하였고 어떠한 극복의 전망을 제시했는지를 분석하고, 어떠한 문명을 구상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대표적인 증산종교인 무극도(無極道)ㆍ태극도(太極道), 대순진리회의 상생운동을 통해 새 문명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운동을 엿보고자 한다.

Ⅱ. 강증산의 새로운 문명

1. 증산의 ‘문명’ 인식

근대한국 개벽사상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수운은 기존의 사회질서는 그 운이 다했고, 이제 새로운 운수가 펼쳐질 것이라 주장했다. 수운은 무위이화를 강조하면서 개벽을 향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강조되는 시천주를 통한 도성덕립(道成德立)을 강조했다. 이러한 수운의 개벽사상은 이돈화를 통해서 인간 중심의 ‘인문개벽’이라는 측면으로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의 3대 개벽으로 체계화되었다.4)

증산에 이르러서는 해원과 상생의 문제가 강하게 부각된다. 증산은 동학농민혁명을 직접 목격하고, 무고한 민중의 희생을 보면서 새로운 차원의 방법을 고민하였고, 증산의 천지공사는 해원과 상생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평화적인 비폭력의 방법으로 이룩하려는 화민정세(化民靖世)작업으로 요약된다.

또 가라사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黃帝)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란하였도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 그러므로 최 제우(崔濟愚)는 작란한 사람이요 나는 치란하는 사람이니라. 전 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5)

위의 구절은 증산 자신이 소란을 다스리면서 개벽을 이룰 것이라고 표현한 내용이다. 증산은 “최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였다.”는6) 등 동학으로 시작된 개벽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개벽의 방안을 제시했다. 증산은 수운은 ‘동세(動世)’를 자신은 ‘정세(靖世)’를 맡았다고 하였으며[化民靖世], 김지하는 이 표현에 개벽을 첨가하여 ‘동세개벽’과 ‘정세개벽’으로 수운과 증산의 개벽을 설명하였다.7)

증산의 ‘개벽’은 ‘묵은 하늘’을 혁신하고 인간 생활에서 선천의 도수가 어긋난 것을 바로 잡아 ‘새로운 하늘’의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증산의 개벽은 삼계의 운행질서를 뜯어고침으로써 선천시대를 끝내고 후천시대 즉 새로운 세계를 여는 작업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은 단순한 개혁이 아닌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세계의 운행질서를 근원적으로 뜯어고치는 대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벽사상에 기초하여 구체화된 새로운 문명은 상생의 도에 의해 운행되는 사회이고, 인간이 신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대접받는 인존의 시대로 집약된다. 증산의 천지공사는 다양하게 진행되었는데, 우선 문명과 관련된 공사를 통해 증산이 제시한 새로운 문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단 증산은 서구 문명을 이마두가 문운(文運)을 열었고, 문명신에 의해 이룩된 문명으로 보았지만 서구 문명의 세속주의, 물질중심주의 태도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하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증산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보장되는 새로운 문명을 약속하며, 그러한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포함한 서구 문물(文物)의 수용도 필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증산은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8)라고 자신의 강세 이유를 밝히면서 서양문명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서양문명은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여 ‘죄악을 저질러’, ‘신도의 권위가 떨어지고’,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등 물질에 치우친 서구 문명의 폐해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이처럼, 증산은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지만 물질에 치우친 문명의 폐단으로 신도의 권위가 추락하였다고 물질 중심의 서양문명을 비판한다.

당시 개화파는 서구 근대문명을 문명화의 전범으로 상정하고 과학기술문명을 수용하여 그들처럼 되고자 했기 때문에 서구 근대문명의 침략성을 비판할 수 있는 준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증산은 물질에 치우친 현실이 문제였기 때문에 서구 물질 중심 문명에 대한 경계 및 극복과 함께 정신문명의 진작을 통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조화로 변혁된 문명을 이루고자 하였다.9) 그래서 그의 천지공사는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주지한 바와 같이, 증산은 서양 문물 자체는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 도구로 이용되고 있지만, 민중의 현실적 해방을 위한 물적 기초로서 의의가 있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즉 증산에게 서양의 문물 그 자체는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며, 새로운 세상에 살 모든 민중이 노역과 고통을 절감해줄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서구 문명을 물질중심 문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증산의 문명론이다. 전통 문명의 개념은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유학적 의미가 결부되기 시작했으며 조선 시대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당시 문명개념은 유학적 교화의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10) 이후 일본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에 의해 서양의 ‘civilization’이 ‘문명개화’라는 용어로 번역되면서 문명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190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서 문명론의 전개에서 흥미로운 점은 문명을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으로 구분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서양문명의 핵심을 물질문명으로 보고 물질의 문명이 부강의 기초로 인식되면서 물질문명의 추구를 촉구하는 논지들이 등장하였다.11) 이러한 물질중심의 문명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정신문명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결국, 이 당시 문명론은 문명을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당시 문명은 서구 문명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되었지만 구분된 문명개념에서는 서양문명은 대개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상호가 1926년에 집필한 『증산천사공사기』에는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天上)의 모든 묘법(妙法)을 본밧아네려 지하(地下)에 벳펏나니 서양(西洋)의 모든 문물(文物)은 천국(天國)의 모형 것이니라. 이마두(利瑪竇)가 서양(西洋)을 개벽(開闢)하야 천국(天國)을 건설(建設)하랴 하되 그 문명(文明)은 도로혀 인류(人類)의 상잔(相殘)을 조장(助長)케 되니라.”12)로 기술되어 있었지만, 1929년에 발간된 『대순전경』 초판부터 “이 문명(文明)은 다만 물질(物質)과 사리(事理)에 기예(技藝)를 정극(精極)하엿슬이오”13)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사회에서 진행된 문명비판론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증산이 지향한 새로운 문명은 무엇인가?

천(天)이 이기예(以技藝)로 여서인(與西人)하여 이복성인지역(以福聖人之役)하고 천(天)이 이조화(以造化)로 여오도(與吾道)하여 이제서인지악(以制西人之惡)이니라14)

위의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서양은 물질문명으로 무기를 만들어 성인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동양을 정복하였지만, 증산은 조화(造化)의 도로 서양문명의 악폐를 제압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서양문명은 기예(技藝)로 표현되고 동양의 문명은 조화(造化)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즉 물질문명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어하고 운용하여야 할 정신적인 부분을 조화시켜 그 폐해를 제압하겠다는 것이다.

2. 증산의 ‘새로운 문명’
1) 조화문명(調和文明)

증산의 서양 물질중심 문명에 대한 비판은 물질주의적 가치와 도구적 자연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에 있다. 증산은 문명의 결함을 상극의 법칙에 지배된 인간 마음과 무도(無道)로 보고 있다. 그래서 증산은 새 문명의 모델로 이기적인 배타성이 아닌 공동체적 협동으로, 공격적 지배성을 조화로, 타자와의 갈등이 아닌 평화적 공존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마음을 닦고, 도를 이룰 것을 당부한다.

구체적으로 증산이 건설하고자 한 새로운 세계는 ‘도를 이루고’, ‘덕을 세우는’ 도성덕립(道成德立)의 문명이며, 그 세계에서의 상등국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 평가되지 않고 도성덕립의 가치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을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덕군자가 동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증산은 큰 병은 무도(無道)에서 나오며, 큰 병의 약으로는 안심(安心)과 안신(安身)이라고 보고, 충(忠), 효(孝), 열(㤠)이 없어진 세상이 병들어 있다고 보고 있다.16) 요약하면, 도가 세워져야 모든 질서와 체계가 바르게 정립되고 충ㆍ효ㆍ열이 바로 잡혀야 인간과 신명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따라서 행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 그러므로 우리는 개벽하여야 하나니 대개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17)

증산은 당시 서구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도는 전통사상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도서기론의 입장이 아닌 선천의 도가 아닌 조화와 상생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의 창조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특히 증산은 유교에 대해 ‘부유(腐儒)’라고 하였으며,18) ‘유교의 폐습’19), ‘서교는 신명박대가 심하여’20)로 표현하는 등 당시의 종교를 비판한다.21) 또한 “묵은 하늘은 사람을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었도다.”22), “이 세상에 전하여 오는 모든 허례는 묵은 하늘이 그릇되게 꾸민 것이니”23)에서 ‘묵은 하늘[묵은 세상]’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담겨있다. 결국 증산의 ‘개벽’은 새로운 도로 새 질서를 이루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것을 계승함[述]이 아닌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새로운 도의 창조[作] 즉 후천 도덕으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그가 제시한 새로운 도는 광제창생을 위한 ‘상생(相生)의 도(道)’이다.

증산이 제시한 도는 기존 전통사상뿐만 아니라 서구 사상까지 궁극적 가치들을 두루 조화하여 통섭(統攝)한 개념이다.24) 증산은 당시 사회의 판도가 넓어지고 일이 복잡하게 된 오늘날은 각 종교의 진액을 걷어 모아 새롭게 통일시키지 않고서는 당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증산의 천지공사는 신명계, 인간계, 자연계 즉 삼계의 기존 운행질서를 새롭게 개편하는 작업으로 성인들이 만든[作] 문화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새롭게 재창조[作]했다. 증산은 당시의 모든 사상과 문화의 진액을 뽑아 새 문명을 건설하자고 외쳤으며, 새 세상을 이루기 위해 전통사상의 창조적 통합을 강조한 것이다. 증산의 이러한 창조적 통합의 목적은 새 문명의 건설에 있는 것이며, 천지공사는 상극의 도에 갇혀 살아온 생명의 원과 한을 풀고 인류의 생명 살림의 길로 인도한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족속들은 각기 자기들의 생활 경험의 전승(傳承)에 따라 특수한 사상을 토대로 색다른 문화를 이룩하였으되 그것을 발휘하게 되자 마침내 큰 시비가 일어났도다. 그러므로 상제께서 이제 민족들의 제각기 문화의 정수를 걷어 후천에 이룩할 문명의 기초를 정하셨도다.25)

상제께서 모든 도통신과 문명신을 거느리고 각 민족들 사이에 나타난 여러 갈래 문화(文化)의 정수(精髓)를 뽑아 통일하시고 물샐틈없이 도수를 짜 놓으시니라.26)

위의 구절에서 증산은 문화는 다른 환경 속에서 전승된 사상을 토대로 이룩된 것이며, 각각의 사상들이 지역적 경계를 허물어지게 되어 대립과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문화의 정수를 걷어 조화(調和)시켜 통일된 사상과 가치관을 새 문명의 기초로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새 문명의 기초를 통해 ‘조화문명’을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조화문명은 서양과 동양, 사람과 자연, 사상과 사상,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를 뛰어넘어 전 인류가 하나로 사는 상생 문명으로 해석될 수 있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제각기 사상이 엇갈려 제각기 생각하여 반목 쟁투하느니라. 이를 없애려면 해원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고 천지의 도수를 조정하여야 하고 이것이 이룩되면 천지는 개벽되고 선경이 세워지리라」 하셨도다.27)

상제께서 각 처에서 정기를 뽑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강산 정기를 뽑아 합치시려고 부모산(父母山)의 정기부터 공사를 보셨도다. 「부모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이니라. 회문산에 二十四혈이 있고 그 중에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이 있고 기변(碁變)은 당요(唐堯)가 창작하여 단주를 가르친 것이므로 단주의 해원은 오선위기로부터 대운이 열려 돌아날지니라. 다음에 네 명당(明堂)의 정기를 종합하여야 하니라. 네 명당은 순창 회문산(淳昌回文山)의 오선위기형과 무안(務安) 승달산(僧達山)의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과 장성(長城) 손룡(巽龍)의 선녀직금형(仙女織錦形)과 태인(泰仁) 배례밭(拜禮田)의 군신봉조형(群臣奉詔形)이니라. 그리고 부안 변산에 二十四혈이 있으니 이것은 회문산의 혈수의 상대가 되며 해변에 있어 해왕(海王)의 도수에 응하느니라. 회문산은 산군(山君), 변산은 해왕(海王)이니라」 하시고 상제께서 그 정기를 뽑으셨도다.28)

증산은 이러한 조화문명 건설을 위해 지운(地運) 통일의 필요성도 주장한다. 김탁은 증산의 정기를 뽑는 공사를 모악산과 회문산을 중심으로 명당 기운을 합치고 천하의 기운을 합치고 천하의 산하 대운을 모으는 천지공사로 해석한다. 주지한 바와 같이, 각 나라나 민족은 그 고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문화를 발전시켜 왔는데, 각기 다른 지역에서 성장한 문화가 만나면서 갈등이 발생되어 상극의 극한 상황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의 지운을 통일하고 조화시켜야만 한다고 본 것이다. 그 방법은 천지공사를 통해 천하의 모든 지역이 하나가 되고, 언어 및 풍속이 하나가 되어 민족과 지역의 차별이 없어지리라는 것이다.29)

이상과 같이 증산은 인간이 서로 분쟁을 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의 입장에서 시비를 가리는 데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여러 문화를 조화시키는 조화문명을 주장하고 있다.

2) 신인공공(神人公共)문명30)

증산의 개벽은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위한 신도의 회복31)이었으며, 그가 지향한 문명 역시 신과 인간의 공동주체에 의해 건설해 가는 문명이다. 증산은 신명보다 인간을 더 높여 인간이 신명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신명공사를 했는데, 이는 인본사상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켜 인간의 존엄성이 중시되는 시대의 도래를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증산이 제시한 이상적 인간은 도통군자이다.32) 증산은 “도통은 이후 각기 닦은 바에 따라 열리리라”33), “나는 마음을 닦은 바에 따라 누구에게나 마음을 밝혀 주리니”34),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주면 되려니와 도통 될 때에는 유불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35) 같이 도통의 방법은 신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도통신과 관련 속에서 도통이 이루어짐을 제시한다.

선천에는 모사(謀事)가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되 이제는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는 재인이니라.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는 재인이니라.”의 의미는 무엇인가? 증산에게 신과 인간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상호 영향을 미치는 관계이다. 따라서 신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일에 관여할 수 없고, 신은 인간과의 협력에 의해서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명들이 어떠한 일을 계획하더라도[謀事] 인간과 함께 할 때에만 그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成事]이다. 또한 모사(謀事)를 천이 주관한다는 의미는 묵은 하늘이 아닌 새 하늘의 이치[天理]를 근본으로 삼고 모사를 해야 성사(成事)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사의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졌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천리의 도에 맞는 행동과 마음이 선행해야 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일대 전환의 필연적 요청에 주저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36) 이는 인간혼을 일깨우려는 종교적 가르침으로서, 증산은 민(民)을 새 문명 건설의 주체로 자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산의 천지공사는 새 세상을 열기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고 그 새 세상을 건설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산의 기본 사상은 신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 즉 증산이 제시한 새 문명은 신과 인간의 합일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37) 현재 대순진리회에서는 인존을 ‘신인조화(神人調化)’로 표현하며 인존은 천지인 삼계의 우주적 관점에서 신인조화를 통해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신인조화는 ‘신과 인간의 합일[신인합일(神人合一)]’, ‘신과 인간이 함께 이루어나간다[신인공공(神人公共)]’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38) 신인조화(神人調化)에서의 ‘조화(調化)’는 조화(調和: 서로 잘 어울리게 함)와 조화(造化: 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의 합성어로, 만물을 조화(造化)시키는 이치 또는 그 이치를 주관하는 신(神)적 존재와 어울려 만물을 주관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 조화(調化)의 정점은 사상적인 조화를 넘어서 신과 인간과의 조화가 핵심이다. 결국, 증산의 새 문명은 신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인 것이다.39)

바로 이 점에서 천인공공(天人公共) 사상이 나온다. 천인공공에서 ‘공공(公共)’은 “모두와 함께한다”라는 의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천인공공은 사람이 하는 일이 곧 하늘의 뜻이고, 하늘이 하는 일이 인간의 뜻이라는 의미이지만 사람은 천도를 알고 천도의 도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늘의 뜻을 깨달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늘의 용인(用人)으로서 성사재인이 된다는 원리이다.

위와 관련하여 증산은 교정일치(敎政一致) 문명을 지향한다. 증산의 “옛적에 신성(神聖)이 입극(立極)하여 성ㆍ웅(聖雄)을 겸비해 정치와 교화를 통제 관장(統制管掌)하였으되 중고 이래로 성과 웅이 바탕을 달리하여 정치와 교화가 갈렸으므로 마침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진법(眞法)을 보지 못하게 되었느니라. 이제 원시반본(原始返本)이 되어 군사위(君師位)가 한 갈래로 되리라.”40) 내용은 서구 근대의 정치와 교화의 분리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재민혁세(災民革世)하는 웅패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증산은 “마음은 성인의 바탕으로 닦고 일은 영웅의 도략을 취하여야 되느니라.”41) 처럼 성웅의 겸비를 주장한다. 증산에게 요순(堯舜)은 성인의 마음과 영웅의 도략을 겸비해서 정치와 교화 모두를 행한 존재로 인식된다. 즉 성과 웅은 체용관계로 어느 한 가지로서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42) 따라서 성웅 겸비는 증산의 이상적 인간상의 제시로 볼 수 있지만, ‘위세나 형벌’ 대신 ‘조화’로 세상을 통제하고 관장하는 문명의 제시로 볼 수 있다. 즉 생명을 구제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성인의 정치[濟生醫世]로 다스리는 성인시대 즉 ‘성인문명(聖人文明)’으로 해석할 수 있다.43)

Ⅲ. 상생문명운동

1. 증산의 ‘상생’

증산이 행한 천지공사의 목적은 선천의 상극지리(相克之理)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내어 후천을 상생지리(相生之理)로 개벽하여 새 문명을 건설하는 데 있다.44) 그러므로 증산의 천지공사는 선천의 사회적 모순이 만연한 낡은 질서를 개벽하고 상생과 조화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기 위한 종교적 행위였다. 천지공사는 삼계를 아우르는 공사라는 점에서 삼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유기체적 관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45) 상극과 그로 인해 발생한 원(冤)을 세상이 혼란하게 된 근본 원인으로 파악한 증산의 핵심 과제는 원(冤)을 풀어내고 상생을 구현하여 개벽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제생 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재민 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화민 정세하리라. 너는 이제부터 마음을 바로 잡으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 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46)

위의 구절에서 증산은 웅패의 술로 인해 발생된 현실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상생의 도로 화민정세(化民靖世)하는 것이 개벽이며, 마음을 바로 잡아 남 살리기[好生]의 덕을 쌓을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증산이 주장하는 새 문명은 ‘살림’이 중심이 되는 새 세상이다. 증산은 상생을 “남 잘되게 하는 것” 즉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47)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증산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남 잘되게 하는 공부’라고 강조하고,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를 쌓아야 한다.”는 증산의 말은 상생의 기본적인 이념이 ‘살림’에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상생은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합치되는 원리로서 남 잘되게 하는 것이 바로 내가 잘되는 즉 봉공(奉公), 이타의 협동 원리인 것이다.48) 증산은 마음을 잘 고치고, 홀로 잘되기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이타적인 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생은 이타적 생활을 요구하는 새 생활의 윤리인 것이다. 이처럼 증산이 제시한 새 문명은 서로 살리고 협동하여 원한을 풀어버리는 상생의 시대인 것이다.

증산은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이는 척이 없어야 잘 된다는 말이라. 남에게 억울한 원한을 짓지 말라. 이것이 척이 되어 보복하나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신명은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49), “마음과 입과 뜻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죄를 조심하고 남에게 척을 짓지 말라”50), “이제 말세를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천지 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51) 등과 같이 척을 짓지 말라고 강조한다. 증산은 ‘남 살리기’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한을 풀어야 하고,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상대를 사랑해야 하고, 내가 입은 작은 은혜라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새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해원과 상생, 보은이라는 실천방안의 제시이다.52) 따라서 해원과 상생은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2. 대순진리회의 상생운동

대순진리회에 따르면,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1895~1958, 이후 정산)는 증산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종교체험을 통해 증산에게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고 만주에서 귀국하여 1925년에 전북 구태인(舊泰仁) 도창현(道昌峴)에 도장을 세우고 태극도(太極道)의 전신인 무극도(無極道)를 창도하였다. 정산은 무극도를 창도하고 아래와 같이 주요교리를 선포하였다.

종지(宗旨)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

(陰陽合德 神人調化 解冤相生 道通眞境)

신조(信條)

사강령(四綱領)∙∙∙ 안심(安心)ㆍ안신(安身)ㆍ경천(敬天)ㆍ수도(修道)

삼요체(三要諦)∙∙∙ 성(誠)ㆍ경(敬)ㆍ신(信)

목적(目的)

무자기(無自欺) 정신 개벽(精神開闢)

지상 신선 실현(地上神仙實現) 인간 개조(人間改造)

지상 천국 건설(地上天國建設) 세계 개벽(世界開闢)53)

무극도의 교리개요를 담고 있는 위의 내용은 새 문명 건설의 이념과 실천방법론 등 새 문명의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새 문명의 방향성을 기초로 해서 정산은 당시 도장주변의 땅을 개간하여 본부 직영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으로 경비와 식량을 자급하게 하였고, 자급 자족적 공동체 운동을 전개했다.54) 무극도에서 주목되는 운동은 진업단(進業團) 활동이다. 정산의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상생운동은 바로 민중구제를 위한 진업단(進業團)의 활동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전에는 진업단의 창설과 활동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어 진업단의 생생한 면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종단의 현지조사자료와 경전에 나와 있는 내용을 참고로 하여 상생운동으로서 진업단의 의의를 읽어보고자 한다.55)

『전경』에 따르면, 1925년경 정산은 진업단을 조직하였는데, 주요 목적은 빈곤한 신도들이 노동생활을 통해 안심(安心)을 구하고, 생활의 안정을 얻어 수도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고 제민(濟民)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조직된 진업단은 개간사업, 수리사업, 삼림벌채, 광산채굴 등 여러 가지 사업에 신도들을 알선(斡旋) 종사케 하였다.56)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정산의 진업단 창설의 목적은 산업을 장려하고 교단의 생활안정을 위한 경제적 기초 마련, 그리고 당시 민중 구제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구체적 방법이 수리, 황무지 개간과 간석지 개척인 것이다.57)

이후 진행된 안면도와 원산도 지역에서의 간석지 개척은 정산의 대표적인 상생운동이다. 정산은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 두 섬에 간석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간석지 개척에는 진업단과 당시 현금 2만 원,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3백 석이 지원되었다. 1932년 그동안 진행된 측량과 설계를 바탕으로 충남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석지 간척사업을 착공했고, 안면도의 이십만 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을 통해 민중을 구제하게 된다. 이러한 진업단 활동은 『태안군지』와 『안면도지』에서도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안면도 창기리는 대대적인 간척사업이 이루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창기 4리 쌀개라는 곳이다. 이 마을은 야산을 개척하면서 안면도 3대 간척지의 하나로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많은 쌀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쌀개, 미개, 미포로 불렀다고 한다.58)

그렇다면 진업단 활동은 어떠한 이념적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증산이 제시한 남 잘되기라는 상생 이념의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다음의 구절을 통해서도 진업단 활동의 이념을 찾을 수 있다.

이해 가을 어느 날 상제께서 안 내성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고 밖으론 공사를 받드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 안으론 선령의 향화와 봉친 육영을 독실히 하여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시도다.59)

위의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증산이 제시한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고 밖으론 공사를 받드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은 ‘진업(進業)’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진업을 통해 사회에 봉공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60) 그러므로 진업단 활동은 단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성격도 있지만, 사회적 봉공의 의미가 담겨있다. 한편 증산은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면서 모든 직업은 귀천이 없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직업관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글도 않고 일도 않는 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벗어난 자이니 쓸 데가 없느리라.”61) 또한 “선천에 안락을 누리는 자는 후천에 복을 받지 못하리니 고생을 복으로 알고 잘 받으라.”고62) 지적하면서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증산의 가르침은 현실의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정산은 1948년 부산 보수동(寶水洞)에 도장을 건설하고 1950년 교명을 ‘태극도(太極道)’로 개칭하게 된다. 1963년 6월 12일부터 시행된 사회단체등록령에 따라 태극도를 종교단체로 등록하면서 태극도 『도헌』과 규정(規定)을 제정했고, 그해 10월 20일에 태극도를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1955년 신도가 급증하자 부산 감천동(甘川洞)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때부터 태극도는 상생운동의 하나로 교육 사업, 구호 자선사업, 의료사업 등 다방면으로 제생의세를 실천한다. 사회교육사업은 천덕공민학교 운영 보조였으며, 구호 자선사업은 병원주택건립, 주택보조, 도로포장, 하수구시설, 위생분뇨시설, 공동우물 보조, 문화계몽 보조 등으로 확인된다.63) 1966년 『태극도 안내서』에서 당시 구호사업으로 작은 규모였지만 (準)구호의원인 감천의원을 운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64) 특히 감천의원은 환자들에게 약값하고 실비만 받으면서 운영되었다. 1966년 당시 진료비 미수금이 십만여 원이었으며, 감천의원을 무료 종합병원으로 운영해보자는 홍보문은65) 당시 의료사업 역시 상생 또는 제생의세 실천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남을 잘되게 함은 상생대도(相生大道)의 기본원리(基本原理)요 구제창생(救濟蒼生)의 근본이념(根本理念)이라. 남을 위해서는 수고(手苦)를 아끼지 말고, 성사(成事)에는 타인(他人)과의 힘을 합(合)하여야 된다는 정신(精神)을 가져 협동생활(協同生活)에 일치(一致) 협력(協力)이 되게 하라66)

대순진리회는 우당 박한경의 종통계승의 흐름에서 1969년에 창설되었고, ‘해원상생’을 사회적 이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이념을 토대로 1972년 종단의 3대 사업으로 구호자선사업, 사회복지사업, 교육사업을 정하고 ‘상생운동’이라는 슬로건으로 구제창생을 위해 사회적으로 실천하고 있다.67) 특히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제시된 ‘남을 잘되게 하라’의 내용은 상생대도, 구제창생, 협력으로서 구체화되고 있다. 따라서 ‘남을 잘되게 하라’에 담겨있는 이념은 상생, 살림[창생], 공존, 협력으로 확장되고 있고, 증산이 제시한 ‘봉공의무’의 실천을 중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무극도ㆍ태극도의 상생운동은 당시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공공성의 실천이며 결국 오늘날 대순진리회의 ‘상생운동’은 증산의 상생 이념을 기반을 두어 이루어진 것이며, 사회참여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증산의 개벽과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증산이 지향한 새 문명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증산은 하늘, 땅, 인간세계라는 삼계의 질서나 변화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전개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천지도수 혹은 운도라 지칭했다. 이와 같은 운도에 따라 지금까지의 과정은 ‘선천’으로, 앞으로 전개될 세계를 ‘후천’으로 구분했고, 당시를 선천과 후천이 교역하는 개벽이 시기로 보았다. 그는 운도의 조정을 ‘개벽’이라고 정의하고,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운도의 조정 작업을 ‘천지공사’라고 했다. 따라서 증산의 개벽은 삼계의 운행질서를 뜯어고침으로써 선천시대를 끝내고 후천시대 즉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증산의 개벽에 담겨 있는 새 문명은 이성 중심의 서구 문명화가 아니었다. 그는 묵은 하늘을 개벽하고 새로운 도를 통해 서구와 다른 새로운 문명을 지향했다. 그는 민중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천지의 운도를 직접 고쳐 새로운 세상을 여는 후천개벽을 이 땅에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그 실현 주체를 만민으로 설정하고 자격과 책임을 강조하는 등 근대적 시민의식을 강조했다.

증산은 서구 문명에 대한 통찰을 통해 평화와 상생의 새 문명론을 제시했다. 프래신짓트 두아라(Presenjit Duara)는 동아시아 새문명 전략은 억압된 문명의 전통 내에서 찾았고, 호전성에 대립하는 평화성, 물질적인 것에 대립하는 정신적인 것 등 서양의 대립물을 통해 찾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등가관계가 확립된 후에 이항대립을 종합하거나 조화시킴으로서 서구 문명에 대한 자신의 반대에 권위를 부여시켰고 동양의 정신이 서구 물질주의와 균형을 이루면서 근대성도 구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68) 증산 역시 서구의 물질중심문명과 상극에 대립되는 상생을 주장하면서 새문명론을 제시했다는 점은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대응 혹은 대안문명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문명 혹은 대안 문명은 상생의 도에 의해 운행되는 ‘상생문명’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상생은 빈부, 강약, 귀천의 차별이 없는 사회적 상생과 국가의 경계로 인한 차별도 없는 완전한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 상생의 의미가 담겨있다. 따라서 증산이 구상한 새로운 문명은 동서양 문명과 사상을 통합하는 조화문명을 추구했으며, 신인공공문명을 지향했다. 이상과 같이, 증산의 개벽은 조화문명, 신인공공문명, 상생문명을 지향하면서 인류문명을 근원적으로 반성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살림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증산의 ‘개벽’은 태생적으로 공공성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당시 현실에 대한 변혁적 응답 즉 공공성에 관한 요청에 기인한다. 증산의 삶이 민중들의 삶을 구제해 주고자 하는 제생의세(濟生醫世)의 삶이었듯이, 무극도ㆍ태극도 그리고 대순진리회는 봉공의무를 위래 상생운동을 실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했듯이, 최근 서구 사회에서 서구적 근대성 기획의 실패를 인정하고 동아시아가 하나의 대안으로 인식하고 있듯이, 현재는 서양 근대문명의 한계와 위기가 깊게 드리우고 있는 시기이며, 새로운 문명의 전환이 시기이고 하다. 사회적 모순과 세계질서의 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인류문명의 모델을 만드는 데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공동체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시대적 요청 속에서 증산의 개벽사상 혹은 새로운 문명의 지향은 새로운 문명전환을 위한 지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증산이 강조한 ‘상생’은 소외와 양극화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여기에서 대안이자 미래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증산을 포함한 근대한국 개벽종교의 새로운 문명모색과 관련하여 충분한 논의의 자리를 요청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Footnotes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NRF-2016S1A5B8914400)

1) 노대환, 「1905-1910년 문명론의 전개와 새로운 문명관 모색」, 『유교사상문화연구』 39 (2010), p.383.

2) 동학 이후 등장한 자생적인 근대 종교운동은 일반적으로 중립적인 개념인 신종교로 지칭한다. 필자가 사용하는 ‘개벽종교’는 수운 최제우,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 개벽사상을 공유하는 신종교를 범주화시킨 용어로 다른 일반 신종교와 구분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3) 증산의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인식과 비판에 대한 연구는 고남식, 「서세동점과 동아시아 사상의 대응논리-강증산의 신도사상을 중심으로」, 『아시아고대학』 49, (2018); 노길명, 「한국 근대 사회변동과 증산종교운동」, 『한국종교』 20 (1995); 노길명, 「‘근대’의 충격에 대한 증산의 인식과 대응」, 『증산사상연구』 22 (2000); 황정용, 「동서합덕문명과 증산사상-그 의의와 책임에 대한 소고」, 『증산사상연구』 9 (1983)등 있다. 또한 강증산의 개벽사상에 과한 문명사적 시각에서 설명하려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이항령의 「대순종지의 문명사적 의의」(『대순사상논총』 6, 1998), 「대순신조의 문명사적 의의」(『대순사상논총』 12, 2001)는 구체적으로 강증산의 개벽사상의 문명사적 의의를 조명한 대표적인 논문이다. 그는 사고의 대전환이 개벽사상이며, 개체의 대립성과 투쟁성을 강조하는 서구사상에 대하여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보고 그 종합체의 일체성, 협동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문명사적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증산의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논의되었고, 증산이 지향한 문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되지 못했다.

4) 이돈화, 『신인철학』 (서울: 일신사, 1983) 참조.

5) 『전경』, 교법 3장 30절.

6) 같은 책, 교운 1장 9절.

7) “촛불정신을 어떻게 계승ㆍ확대할 것인가 -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육임제의 의미와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남”, 《프레시안》 2008. 8. 4.

8) 『전경』, 교운 1장 9절.

9) 고남식, 앞의 글, pp.213-220.

10) 노대환, 『문명』 (서울: 소화, 2010), pp.51-58.

11) 같은 책, pp.182-183.

12) 『증산천사공사기』 (서울: 상생사, 1926), p.10.

13) 『대순전경』 초판 (서울: 동화교회도장, 1929), 9장 11절.

14) 『대순전경』 6판 (서울: 동도교증산교회 본부, 1965), 6장 160절.

15) 김형기, 「후천개벽사상에서의 제국주의 인식」, 『동아시아문화연구』 35 (2001), pp.213-214.

16) 『전경』, 행록 5장 38절.

17) 같은 책, 공사 1장 2절.

18) 같은 책, 교운 1장 6절.

19) 같은 책, 교운 1장 9절.

20) 같은 책, 교운 1장 66절.

21) 같은 책, 교운 1장 17절.

22) 같은 책, 공사 1장 11절.

23) 같은 책, 교법 1장 18절.

24) 최치봉, 「대순사상에 나타나는 조화사상(調和思想)」, 『대순회보』 164,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4).

25) 『전경』, 교운 3장 23절.

26) 같은 책, 예시 12절.

27) 같은 책, 공사 3장 5절.

28) 같은 책, 공사 3장 6절.

29) 김탁, 「증산교 상생사상의 특성과 전개과정」, 『신종교연구』 13 (2005), pp.272-273.

30) ‘신인공공’ 표현은 ‘천인공공(天人公共)’와 유사한 개념으로 김태창이 단군신화를 공공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하늘과 인간이 함께 공공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金泰昌, 『ともに公共哲学する-日本での新』, 東京: 東京大学出版会, 2010, p.301). 필자는 ‘신인조화’의 말을 빌려서 신과 인간이 함께 혹은 의존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로 사용해 보았다.

31) 고남식은 “증산이 지향한 문명을 ‘신도적(神道)적 문명’토대로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조화(調和)로 해석했다. 그는 신도의 회복은 인(仁)과 의(義)를 통한 도덕성 회복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인의가 인간적 차원만이 아닌 신계와의 상관성 속에서 정립된다고 설명하다. 즉 신도적 문명을 신인상통(神人相通)의 차원”으로 해석한다. 결국 신도적 문명론은 신도의 원리로 도덕적 풍요를 지닌 인간이 새 시운(時運)을 만나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는 사회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변혁적 논리가 담겨있다. 고남식, 앞의 논문, pp.232-236.

32) 고남식, 「최수운과 강증산의 도가적 요소 비교」, 『도교문화연구』 49 (2018), p.172.

33) 『전경』, 교운 1장 33절.

34) 같은 책, 교운 1장 34절.

35) 같은 책, 교운 1장 41절.

36) 류병덕, 「민족적 민중종교의 향방」, 『증산사상연구』 13 (1987) p.273.

37) 이경원, 「강증산의 신종교적 영성과 도덕적 비전」, 『신종교연구』 21 (2009), p.196.

38) 노길명, 「대순사상의 신인조화와 사회변혁」, 『대순진리학논총』 3 (2008), p.94.

39) 최치봉, 앞의 글; 대순진리회 교무부, 「신인조화 인존의 실현」, 『대순회보』 66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7).

40) 『전경』, 교법 3장 25절.

41) 같은 책, 교법 1장 23절.

42) 이은희ㆍ이경원, 「대순사상의 요순관」, 『대순사상논총』 31 (2018), pp.104-106.

43) 같은 글, pp.107-110.

44) 김탁은 증산의 상생을 화합, 일치, 화해, 용서, 통일, 포용, 공생, 조화, 평등, 협동, 행복, 만족, 평화, 살림으로 비유한다. 김탁, 앞의 글, p.258.

45) 이종란, 「증산사상의 철학적 특징」, 『인문학연구」 54 (2017), p.36.

46) 『전경』, 교운 1장 16절.

47) 같은 책, 교법 1장 2절.

48) 홍범초, 『증산교개설』 (서울: 창문각, 1982), pp.100-101.

49) 『전경』, 교법 2장 44절.

50) 같은 책, 교법 3장 4절.

51) 같은 책, 예시 17절.

52) 김탁, 앞의 논문, pp.284-285.

53) 『전경』, 교운 2장 32절.

54) 종단역사연구팀, 「무극도 진업단과 개간지」, 『대순회보』 178, pp.40-47 참조.

55) 진업단은 『전경』 (1974), 『진경』 (1989), 『조정산 전기』 (1992), 『증산교사』 (1977), 『조선의 유사종교』 (1935), 『경성일보』 (1936. 7. 16.), 『동아일보』 (1936. 1. 18.)에 기술되어 있으나 가장 구체적으로 서술된 자료는 태극도에서 발간한 『진경』이다. 하지만 『진경』의 서술보다는 전경이 더욱 빠른 기록이므로 『전경』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진경』에는 진업단이 1928년에 조직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전경』에는 이미 1925년에 그 초기적 형태가 존재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56)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조선의 유사종교』, 최길성ㆍ장성언 옮김 (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1), p.271; 『전경』, 교운 2장 35절 참조.

57) 1930년 봄에는 각처의 진업단을 불러 두 개의 단으로 나눈 다음 1개 단 3백여 명을 함경북도 무산으로 보내고 1개 단 200여 명은 북만주 모란강 근처의 삼림으로 보내어 벌채에 종사하게 하여 많은 실적을 올리게 된다. 1932년에 정산은 교단 자금으로 금광 70여 구를 출원하여 전주군 이서면 사금광과 충북 음성군 무극광산을 채굴하기도 했다. 이러한 진업단 활동을 통해서 무극도는 교단의 경제적 능력을 향상시켰고, 황무지 개간과 간석지 개척을 위한 기본 자금을 축적하게 된다. 『진경』, 3장 99절ㆍ105절ㆍ113절.

58) 태안군지편찬위원회, 『태안군지 5권 지명과 마을이야기』 (충남: 태안군청, 2012), p.345.

59) 『전경』, 행록 4장 44절.

60) 『전경』에서는 공사로 표현되어 있지만 『대순전경』에는 봉공으로 표현되어 있다. 증산은 공사라는 용어를 공적인 일로 주로 사용하였고 천지공사라는 용어도 여기에서 기원한다. 『전경』의 이 구절에서의 공사는 『대순전경』의 봉공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그 뜻이 명확해진다. 『대순전경』 6판, 3장 54절, “안내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농사를 힘써 밖으로 봉공의무(奉公義務)와 안으로 선령제사(先靈祭祀)와 제가양육(齊家養育)의 일을 힘써 몸을 잘 닦을 지어다 하시니라.”

61) 『전경』, 교법 1장 61절.

62) 『대순전경』 6판, 6장 36절.

63) 『태극도월보』 2 (1967), p.14.

64) 『태극도 안내서』 (1966), p.12.

65) 『태극도월보』 2 (1967), p.16.

66) 『대순진리회요람』, p.20

67) 『대순지침』, p.99.

68) 프래신짓트 두아라, 『주권과 순수성: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 한석정 옮김 (서울: 나남, 2008),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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