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증산 순례길 제언

김진영 1 ,
Jin-young Kim 1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
1Adjunct Professor,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Corresponding Author : Kim Jin-young, E-mail : staci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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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Oct 22, 2018; Accepted: Dec 15, 2018

Published Online: Dec 31, 2018

초록

순례는 거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전통적으로 외적으로는 성스러운 장소로, 내적으로는 정신적인 목적과 내적 이해를 위한 종교적 여행으로 정의되어왔다. 하지만 오늘날 순례와 종교 관습 간의 관계는 추상적 차원의 거의 모든 종류의 여행, 심지어는 연차휴가와 같이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여행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의 순례자들은 많은 다양한 이유로 여행을 시작하므로, 순례는 사실상 역사적인 성소에 신앙을 목적으로 한 방문으로 그 의미를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순례를 관광의 일부로 간주하려는 시각이 문화콘텐츠나 관광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실용학문 분야에서 대두하고 있다. 순례를 종교적 제의로서가 아니라 종교관광으로 분류하려는 시도가 빈번한데, 그것은 산업적 측면에서도 매력적인 시장이기 때문이다. 순례를 경제적 가치의 측면에서 바라보려는 시각은 결과적으로 종교를 세속주의(secularism)의 조류 속에 포함하는 행위이며 한국에서 걷기 열풍을 타고 유행처럼 번져가는 ‘길’의 경험과 순례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순례길의 경험이 던져주는 종교성(religiosity)을 포함한 고귀한 인간 정신은 자칫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 논문은 순례의 내적 의미를 추구하고 변화와 개인적 성장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정신의 이동 통로이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대순진리회의 지고신인 강증산의 순례길 개발을 제언하고자 한다. 증산 순례길은 단순히 장소의 성스러움을 만나기 위한 여행으로, 그리고 종교적 기억과 회상의 공간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성지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거나 분류할 필요가 있다.

ABSTRACT

The concept of pilgrimage is a phenomenon that appears in almost every major religion. It is traditionally defined as religious travel to a sacred external place for spiritual purposes and introspection. However, there are many different relationships between pilgrimages and religious customs, including excursions through abstract dimensions and regular journeys such as annual holidays. Because modern pilgrimages are taken for a variety of reasons, they are not limited to faith-based historical locations. Thus, many scholars also perceive pilgrimages as an increasing part of the general industry of tourism. These journeys are now studied in a diverse range of fields (e.g., ethnography and tourism). In this way, pilgrimages have created a new market from an industrial perspective. This economic analysis has resulted in secular interest. Pilgrimages can now be taken by gil (walkways), which have gained tremendous popularity. Thus, religiosity and humanity as they are embraced through pilgrimages are now receiving outside influences. This study therefore is aimed at generating suggestions for developing the pilgrimage routes related to Kang Jeungsan (i.e., the Supreme God of Daesoon Jinrihoe). These proposed Jeungsan routes are not simply restricted to religious activities or nostalgia, nor are they exclusively concerned with encountering holiness. To realize this idea, it is necessary to reconsider the concept of a sacred space.

Keywords: 후기 세속주의; 순례; 성지; 산티아고 순례길; 증산; 대순진리회
Keywords: Post-secularism; Pilgrimage; Sacred Site; Camino de Santiago; Jeungsan; Daesoon Jinrihoe

Ⅰ. 머리말

인류의 역사는 이동(movement)의 역사라 할 만큼 인류의 발전은 끊임없는 이동을 통해 실현되어왔다. 길은 이동의 정점에 서 있고 인류는 이동의 수단으로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길들을 만들고 걸어왔다. 그러나 길은, 김치완의 지적처럼, 공간 좌표 속에서 두 개의 상이한 지점을 연결하는 물리적인 선(線)으로 표현되지만 그 속에는 변화라는 시간성을 내포하며,1) 변화는 물리적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과 같은 추상적 의미를 동시에 내재한다. 길을 통한 물리적 이동으로서 순례는 바로 형이상학적인 인간 정신의 변화를 목적으로 한 의식적, 무의식적 제의 행위인 것이다.

순례는 인구 이동의 가장 오래된 형식 중 하나로서 거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전통적으로 순례는 “외적으로는 성스러운 장소로, 내적으로는 정신적인 목적과 내적 이해를 위한 종교적 이유로부터 결과하는 여행”으로 정의되어왔다.2) 하지만 오늘날 순례와 종교 관습 간의 이와 같은 관계는 논거가 빈약한 것처럼 보여 종교적 여행으로서의 순례라는 용어는 현대적 의미에서는 추상적 차원의 거의 모든 종류의 여행, 심지어는 연차휴가와 같이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여행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3) 비록 역사적으로 순례자는 종교적인 동기를 품고 성지로 향해가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현대의 순례자들은 많은 다양한 이유로 여행을 시작하므로, 순례는 사실상 역사적인 성소에 신앙을 목적으로 한 방문으로 그 의미를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순례를 관광의 일부로 간주하려는 시각이 관광학을 중심으로 한 실용학문 분야에서 대두하고 있다. 순례를 종교적 제의로서가 아니라 관광의 하위 개념인 종교관광으로 분류하려는 시도가 빈번한데, 그것은 산업적 측면에서도 매력적인 시장이기 때문이다.4) 전 세계적으로 ‘종교 여행’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부문 중 하나로 매년 3억~3억5천만 명이 종교유적지를 방문하고 있다.5) 이는 순례가 경제적 측면에서 한 지역이나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순례를 경제적 가치의 측면에서 바라보려는 이런 시각은 결과적으로 종교를 세속주의(secularism)의 조류 속에 포함하는 행위이며 한국에서 걷기 열풍을 타고 유행처럼 번져가는 ‘길’의 경험과 순례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순례길의 경험이 던져주는 종교성(religiosity)을 포함한 고귀한 인간 정신은 자칫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비록 특정 성지 또는 성소로의 순례가 종교성이 약화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종교성을 발산하고 있으며, 타 종교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에게는 역사적 맥락 또는 원기나 기개를 기르는 등의 심신 활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논문은 대순진리회의 지고신(the Supreme God)인 강증산의 순례길 개발을 제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종교가 현대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이론적으로 검토해 종교와 순례(길)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제시할 것이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분석을 통해 순례길의 존재 의의를 실증적으로 설명하고 ‘증산 순례길’ 개발의 이론적 토대로 삼을 것이다.

Ⅱ. 종교와 순례

콩(Lily Kong)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네 가지의 큰 변화, 즉 점증하는 도시화와 사회적 불평등, 환경 파괴, 인구의 노령화, 인류 이동의 증가로 인해 종교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이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6) 전 지구적인 변화와 종교 문제와의 관련 속에서 발생하는 가시적인 갈등은 종교의 역할을 위축시키고,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이성중심 사회는 종교의 영향력을 축소하게 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버마스(Jurgen Habermas)에 의하면, 사회학자들의 이런 가설은 오랫동안 반론이 없었던 그럴듯한(plausible) 세 가지 이유에 의존한다. 첫째,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모든 실증적인 상태와 사건을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계몽화된 사람은 신(god) 중심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고, 둘째, 사회의 하위체계의 기능적 분화로 교회와 기타 종교 기관들은 법, 정치, 민생, 교육, 과학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구원의 수단을 관리하는 기능으로 스스로를 제한함으로써 종교를 사적 영역으로 전환하여 공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를 거쳐 후기 산업 사회로의 이동은 평균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복지와 사회 보장으로 이어져 삶의 위험성 감소와 존재론적 안전의 증가로 종교만이 인간의 통제가 불가능한 우연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전의 믿음을 약화시킨다.7)

그러나 사회가 현대화될수록 종교가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 즉 세속주의 이론은 세속(the secular)과 신성(the sacred)의 변증법을 잘못 해석해왔다. 종교는 여전히 사회 전반에 걸쳐 세속화된 사회의 삶에서 자신의 “자리”(position)를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8) 근대성(modernity)이 비록 조직적인 제도화된 종교의 사회적 의의와 역할을 손상하여 종교가 사적 영역에 국한된 채 공적 영역으로부터 주변화되었을지라도 종교에 대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9) 종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자양분의 커다란 한 축으로서 의미를 다시 채워 넣고 있는 “정신적 진공 상태”의 후기 세속주의(post-secular) 사회로 이행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의 종교적인 관심은 전통적인 믿음의 개념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믿음과 실천은 교회나 종교 공동체의 제의, 관습, 전통과 같은 기준을 통해 종교 활동을 판단하지만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개인적이며 사적인 신앙과 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영적 다원성(spiritual plurality)”이다.10) 후기 세속주의 시대의 종교성은 종종 제도화된 종교의 기대와 의무에 기초한 신앙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존재, 의미, 실현이라는 문제와 더 관련된 개별적이고 사적인 신앙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후기 세속주의 사회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채 정신의 문제에 새롭게 공개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회로 정의되며, 조직적이고 규범적인 종교로부터 자기중심적인 경험론적 정신으로의 이동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11) 세계적으로 점증하는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영성(spirituality)의 의미로 사회의 고통과 개인의 역경에 위안을 제공하는 틀을 구축함으로써 개인적 성장의 표현으로 인식될 수 있고, 사람들은 개별성이라는 더 강력한 의식을 허용하는 종교의 요소들을 선호하게 되었다.12)

그렇다면 종교를 개인적인 정신의 문제로 이해하려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왜 순례를 떠나는가? 순례의 동기에 관한 수많은 연구 속에서도 터너(Victor Turner)의 연구들은 ‘커뮤니타스’(communitas)와 ‘역치성’(liminality)의 범주에 따라 순례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는 기독교 순례의 철저한 분석을 통해 종교적 동기의 순례자는 구조(structures)로 가득 찬 일상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채 순례라는 제의적 행위를 통해 다른 순례자들 속에서 어느 지점에도 속하지 않는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순례라는 신성한 여행을 감행하는 과정은 일상의 세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행태의 상호작용(커뮤니타스)이 일어나는 경계(역치성)로 순례자를 이동시킨다. 구조적인 속성이 제거된 채 수평적인 동등한 전체와 개별화된 인간들 간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관계인 커뮤니타스 속에서 ‘타자(the other)’는 형제가 되고 신념 체계를 공유하는 특정한 인류애를 경험하게 된다.13) 결론적으로 터너는 순례의 동기로 종교를 기반으로 한 이와 같은 개인적 변형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학자들은 세속적 갈등이 순례에 내재하고 있으며 순례의 동기 또한 구조적인 틀 속에 넣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빌루(Yoram Bilu)는 커뮤니타스의 “평등과 동질감(equality and congeniality)의 이데올로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순례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낼지라도, 순례 참가자들을 실증적인 데이터 중심으로 연구해 보면 파벌주의와 갈등 역시 현저히 드러나 결국 순례자들은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역할 관계로 분절된다고 말한다.14) 이드(John Eade)는 주변부에 위치한 신성한 중심으로의 이동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커뮤니타스라는 터너의 설명은 대단히 다른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서 발견되는 “복잡성과 이종성”(complexity and heterogeneity)을 잘못 전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5) 콜먼(Simon Coleman) 또한 커뮤니타스는 순례에 대한 실증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순례의 담론을 이상화하는 것으로 순례는 서로 경쟁하는 종교적 담론과 세속적인 담론 둘 다를 수용할 수 있는 “드넓은 공간”(capacious arena)으로 해체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16)

또한 종교와 같이 하나의 구조적 틀로 순례를 분석한 터너 식의 해석은 동기 면에서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최근 학계의 일관된 견해이다.17) 기독교에서 전통적인 순례가 “강한 종교적 동기”18)로 수행되었음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지만 오늘날의 순례자들에게 종교가 본질적으로 동기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1,140개의 표본을 인터넷으로 수합하여 8개 항목으로 분석한 아마로(Suzanne Amaro)외 2인에 따르면, ‘정신적 동기’, ‘새로운 경험’, ‘자연과 스포츠’, ‘문화적 동기’, ‘새로운 사람이나 장소와의 만남’,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종교적 동기’, ‘약속/전통 이행’의 순으로 나타나, 종교적 동기는 7번째에 불과하였으며 동기 또한 다양함을 드러냈다.19) 또한 닐슨(Mats Nilsson & Mekonnen Tesfahuney), 빌러카(Helena Vilaca), 오비도(Lluis Oviedo, Scarlett de Courcier & Miguel Farias), 머리(Michael Murray), 스미스(Alison T. Smith), 린세드(Gisbert Rinschede), 이건(Kerry Egan) 등 다수의 학자들은 설문조사, 데이터 분석, 직접 참여 등의 실증 연구를 통해 순례 동기의 다양성을 입증하였다.

순례에는 종교적 제의를 따르거나 내적 인식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정신적인 동기와 길을 기반으로 한 여행이라는 세속적 동기라는 “참여의 이중성”(duality of participation)이 있다.20) 여행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순례길을 따라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마을, 도시의 다양한 세속 시설―호텔, 식당, 카페, 기념품 상점 등―을 거치는 동안 순례자의 관광객으로서의 시선은 종교적인 헌신과 결합한다. 이제 순례는 관광이 된다. 전통적인 순례는 정화, 회개, 숭배, 치유와 관련이 있지만 전적으로 종교적인 의미만을 갖던 시기에서조차도 순례자들은 방랑벽, 기분전환, 호기심, 탐험과 같은 더 세속적인 욕망의 충족을 위해 순례를 떠났다.21) 순례와 관광, 순례자와 관광객이라는 엄격한 이분법은 여행에 대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계관에는 적합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순례가 다양한 여행 동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성지로의 여행은 일반적인 관광과 유사성을 띠며 세속적인 장소(음악가나 작가의 생가 등)로의 여행 또한 종교적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관광객과 순례자는 그 역할이 쉽게 바뀔 수 있어 관광객은 독실한 순례자의 역할로, 순례자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탐닉하는 관광객의 역할로 전이할 수 있다.22) 성과 속은 독점적인 범주로 여겨지기보다는 역동적인 변화가 가능한 매우 다양한 성과 속의 조합을 갖는 “연속체”(continuum)며,23) 순례는 이와 같은 순치 가능성의 양면성을 함의한다.

종교의 탐색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종교 기관이나 종교 전통을 뛰어넘는 콘텍스트로 확대되어 왔다. 이런 의미에서 슈넬라와 팔리브(Tatjana Schnella and Sarah Palib)는 “묵시적 종교”(Implicit Religion)라는 범주 속에서 순례의 의미에 접근한다. 그들에 의하면, 묵시적 종교는 개인이 자신의 믿음, 행동, 경험이라는 개인화된 방식을 통해 신성한 인물과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신성이라는 세속을 초월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24) 즉, 순례는 종교적 이유이든, 세속적 이유이든 간에 순례자 개인의 경험을 통해 신성을 경험케 하는 묵시적 종교성을 내포한다. 해석을 기다리는 “텅 빈 기호”(empty ciphers)로서25) 순례는 세속이 던져주는 삶의 역경, 고단함, 무관심 속에서 묵시적으로 종교적 제의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 체계를 경험하게 한다.

이 시점에서 순례라는 제의적 행위 속에 반드시 포함하는, 한국에서는 자주 간과되고 있는 ‘걷기’의 중요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순례를 오비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가변적인 정체성(flexible identities)을 재정의 하려는 과정”26)으로, 벡스테드(Zachary Beckstead)는 “개인의 변형 가능성”27)으로, 미카엘슨(Lisbeth Mikaelsson)은 “정신적 치유”28)로, 닐슨은 “내적 평화와 정신적 의미의 탐색”29)으로, 로페즈(Lucrezia Lopez)는 “정신적 목표의 탐색”30)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이들 학자들의 비유는 순례가 필연적으로 ‘걷기’의 고통을 수반하는 ‘목적’ 중심이라기보다는 ‘과정’ 중심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순례길 여행자들이 견디는 걷기의 고통은 다른 순례 행위의 시련과 더불어 상징적인 속죄로 해석될 수 있다는 머리의 주장처럼,31) 스스로가 택한 순례에는 종교적이든, 정신적이든, 세속적이든 간에 다차원적인 동기와 다양한 궤적이 있을지라도 이런 여행은 지리적이며 상징적인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상당한 노력에 의해 통합된다. 내적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체험에 우선권을 주어야 하며, 걷는 과정 속에서 순례자의 종교와 정신과 관련된 믿음과 가치는 이동하고 진화한다. 인간의 가장 나약한 특징 중 하나인 희망을 찾는 “삶의 더 깊은 존재론적 외침”에 대한 답은 걷기라는 고군분투 속에서 생겨난다.32)

한국에서의 순례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가? 아마도 용어가 갖는 모호성이나 광의성으로 인해 ‘성지’를 결합한 ‘성지순례’라는 용어로 특정화하여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도 자체는 순례의 세속화를 경계하려는 의도겠지만 실제로 행해지는 성지순례는 순례 속에 내재된 ‘걷기’의 고통과 같은 과정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학계의 태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권봉헌은 순례를 “관광 상품”33)의 개념으로, 안양규와 오정근은 “방문”34)으로, 김정희와 박은숙은 “보상을 목적으로 한”35) 거룩한 지역으로 가는 여행으로, 김신혜는 심지어 “트레킹 코스”36)로 설명하기까지 한다. 특정 장소(성지)에 ‘갔다 오다’ 또는 ‘방문하다’와 같은 태도는 심리적 변화를 촉발하는 촉매로 ‘성지’ 또는 ‘성물’을 둘러보는 단순 행위로 순례를 제한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며, 결과적으로 ‘과정’이 생략된 ‘목적’만이 중요한 일반적 의미의 세속 관광과 구별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통수단 자체가 걷기나 말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육체의 사용이었으므로 순례 자체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37) 그렇기 때문에 순례는 신성한 행위로 경외 시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가 현대에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성지순례가 일정 부분 종교성을 함양하는 데 기여할지라도 종교 또는 정신의 세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므로 종교관광이나 종교문화답사로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인류는 처음에는 독단적인 종교의 절대성, 그 다음에는 세속적인 이성 중심의 과학적 세계관, 이제는 깊은 영적 교감을 추구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종교적 참여는 줄었지만 이것이 세속주의로 인한 종교의 직접적인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윌킨스-라플램(Sarah Wilkins- LaFlamme)은 과거보다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제도권 종교 안에 있는 것으로 식별될지라도 늘어나는 “종교 속에 있으면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religious nones) 속에는 종교적이며 정신적인 믿음에 대한 다층적인 관심이 남아있음을 발견하였다.38) 종교와 무관할지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경험과 삶 속에서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들을 찾고 있다. 순례는 그런 방법들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중세에 만들어져 현대에 더욱 빛을 발휘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떻게 종교적 제의로, 또 그것을 뚫고 넘어서는 정신적 표현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다루도록 하겠다.

Ⅲ. 산티아고 순례길

현대인들은 이성의 실패를 목도하고 근대성에 대한 환멸의 분위기 속에서 새롭게 세계를 해석할 대안을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고, 이로 인해 현재의 자신을 던져버림으로써 삶의 목적이나 방향성 또는 삶의 새로운 동력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을 절박하게 필요로 한다.39) 이런 의미에서 순례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제의의 전형”이며, 순례자는 자신을 일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명상의 공간”을 제공받게 된다.40) 따라서 순례는 부패해가는 사회의 영향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깨달음, 내적 평화, 또는 궁극의 구원을 탐색하는 정신적 여행으로 비유될 수 있다. 순례가 오늘날 전통적인 종교적 제의 행위에서 이탈하였을지라도, 오랜 세월을 간직한 성소는 여전히 정신을 탐색하는 사람들에게 “자석”과도 같기 때문에 현재 전 세계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41) 길, 즉 ‘걷기’를 기반으로 한 순례자 또한 급격한 증가세에 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일본의 시코쿠 88사찰 순례길(四國遍路), 메카 순례길, 인도 바라나시 순례길 등이 대표적이며,42) 이들의 공통점은 종교성을 기원으로 한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순례가 종교성과 정신성의 결합이라는 주장에 기초하므로 이번 장은 더 이상 기독교 순례길로만 인식되지 않는, 세계인의 순례길로 자리 잡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스페인어로는 El Camino de Santiago, 영어로는 The Way of Saint James로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 북부 도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의 대성당으로 가는 성지 참배길을 말한다. 스페인의 전설에 따르면, 예수 사후 그의 12제자가 세상으로 흩어진 후 그 중 한 명인 대야고보(St. James the Greater)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스페인 갈리시아(Galicia) 지역으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그의 이름이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산티아고라는 도시명이 탄생하였다. 서기 44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 대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맞았고, 그의 제자 2명이 그의 시신을 은밀히 운구하여 배편으로 갈리시아의 항구 도시 이리아 플라비아(Iria Flavia)로 보내 인근 숲에 비밀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잊혀져있던 그의 무덤은 813년과 820년 사이에 숲 속에 사는 양치기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에 이리아 플라비아 주교는 무어인들에게 대항한 기독교인의 상징으로 그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예배당을 지었는데, 그것이 현대의 산티아고 대성당의 유래가 되었다.43)

950년경에는 최초의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하였고,44) 12세기 초에는 디에고 겔미레스 대주교(Archbishop Diego Gelmirez, 1100~1140)의 열정적인 독려로 로마와 예루살렘과 더불어 대표적인 중세 순례지의 하나로 자리잡았다.45)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절정기로 매년 15만~50만여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하였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즈음해서는 순례자 수가 상당할 정도로 감소하였으며, 그 후 20세기 이전까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46) 20세기에는 자동차나 비행기와 같은 기계화된 교통수단의 발달로 산티아고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도보나 말을 이용하는 순례자들의 수는 오히려 감소하였으나, 최근 30년 사이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도보 순례자는 1985년 1,245명이었던 것이 2000년에는 272,703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47) 이 중세 기독교 순례길의 강력한 부활은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의 산티아고 시 방문, 1985년 산티아고 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1987년 산티아고 순례길의 유럽문화길(European Cultural Route) 공인, 1989년 세계청소년의 날(World Youth Day) 개최, 1993년 산티아고 순례길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을 계기로 더욱 확대되었다.48)

표 1. 산티아고 순례자 수
985-199449) 1998-200750)
연도 순례자 연도 순례자
1985 2,491 1998 30,126
1986 N/A 1999 154,613
1987 2,905 2000 55,004
1988 3,501 2001 61,418
1989 5,760 2002 68,952
1990 4,918 2003 74,614
1991 7,274 2004 179,944
1992 9,764 2005 93,924
1993 99,436 2006 100,377
1994 15,863 2007 11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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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유럽 전역을 연결하는 거미줄처럼 복잡한 육상 및 해상 접근로로 발전하였다. 많은 작은 길들이 있었지만 <그림 1>의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순례자들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네 도시인 파리(Paris), 베즐레이(Vezelay), 르퓌(Le Puy), 아를(Arles)로 모여들었고, 이곳에서 피레네 산맥(the Pyrenees)을 넘어 소위 ‘프랑스 길’(Camino Frances, French Way)의 시작점인 프랑스 남서부의 셍쟝삐에드뽀흐(St. Jean Pied de Port)에 집결하였다. 프랑스 길은 스페인의 유서 깊은 관광 도시 팜플로나(Pamplona), 부르고스(Burgos), 레온(Leon)을 거쳐 산티아고에 이르는 약 800km 길이를 자랑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두 번째로 유명한 길은 ‘은의 길’(Via de la Plata, Silver Route)로 비교적 최근(20세기)에 공인되었는데 원래는 이슬람 지배 하에서 기독교도들이 택하였던 순례 코스였다. 프랑스 길처럼 세월의 흐름 속에 순례자 숙소, 교회 등이 세워졌고 순례자들은 카세레스(Caceres)의 산티아고 기사단(Knights of Santiago)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긴 약 1,000km에 달하는 이 루트는 프랑스 길보다는 마을 등의 주거 시설이 덜 밀집한 채 주로 텅 빈 긴 시골길로 구성되어 있어 힘겨운 코스로 알려져 있으며 순례자들 또한 이용이 적은 편이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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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 *출처: Michael Murray, 앞의 글,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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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순례자들은 종교에 상관없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가장 유명한 출발지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에서 순례자에게 축복을 내리는 저녁 미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순례를 시작한다.52) 순례를 시작한 사람들은 매일 평균적으로 25km를 걸은 후 순례자 숙소 또는 지정된 장소에서 출발 전 가톨릭교회가 발행하는 순례자 수첩(credencial)에 도장을 받게 되며, 도보나 말을 이용한 경우 최소 100km, 자전거를 이용하는 경우 200km 이상을 여행한 후 산티아고 대성당의 순례자 사무국이 발행하는 순례 완수 증명서인 콤포스텔라(Compostela)를 받게 된다. 이때 콤포스텔라를 받는 과정에서 “진짜” 순례자와 단순 관광객을 구별하기 위해 완주자는 순례 동기를 질문받게 되는데, 종교적 또는 영적 동기가 아니라고 대답할 경우 순례완수를 입증하는 다른 종류의 인증서인 서티피카도(certificado)를 받게 된다.53)

순례의 과정에서 한 가지 눈에 띠는 사실은 타종교 또는 무종교인, 심지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톨릭교회가 독점하려 한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교회가 제공하는 활동과 시설을 상당 부분 수용한다.

예를 들어, 순례 시작 전의 저녁 미사, 순례 완수 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한낮 미사, 교회 부속 무료 순례자 숙소, 그 숙소에서 거행되는 크고 작은 미사, 무료 공동 저녁 식사와 저녁 기도 모임, 콤포스텔라 등이 그것이며, 순례길을 걷는 동안에도 수많은 기독교 상징물과 마주한다.54) 그렇다면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중세 기독교 순례를 감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카미노(Camino)라고 불리는 “길 자체에 부여된 깊은 의미”,55) 즉 길을 따라 걸으면서 얻게 되는 경험이 적어도 “목적지 자체만큼이나 중요하기”56) 때문일 것이다.

사실, 길은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하지 않고도 경험할 수 있으며, 목적지는 길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도달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한국의 여행자 문학을 분석한 최인호는 “책이나 화면에서 본 낭만적인 길이 도보여행자 스스로 맞닥뜨리는 현실로 다가왔을 때는 괴리감, 당혹감, 배신감의 형태로 전환”된다고 말한다.57)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실상 낭만, 즐거움, 산책, 기분전환이 아니라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는 고통을 수반하는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길은 단순한 이동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영적 이동의 목적이 된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에서는 산티아고 순례의 완성은 대야고보의 중보(intercession)와 순례자가 지은 죄의 삼분의 일을 사함 받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고행일 수밖에 없었다.58) 비록 현대의 순례자 대부분이 죄의 사면과 용서를 목적으로 순례길에 오른 것이 아닐지라도 걷기, 육체의 물리적 고통, 여행을 계속할 것이라는 스스로에게 내린 명령을 통해 “자아를 재해석”한다.59) 오늘날 산티아고 순례가 유럽에서 정신 지향적 순례의 전형적인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순례자들이 자신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걸었다”(walked it)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대해 신성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60) 반 더 비크(Suzanne van der Beek)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1)더 단순한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의 표출이며 2)순례자가 마주치거나 목격하는 모든 것은 의미를 지닌다는 ‘범결정론’(pan-determinism)이 스며들어 있고 3)순례자들 간에 일상에서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가능하며 4)자연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 치유가 일어나는 자연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그 특징을 네 가지로 서술하였다.61) 이러한 특징을 투출하게 하는 것이 바로 ‘걷기’인 것이다.

Ⅳ. 증산 순례길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의 거의 모든 종교나 종단에서는 순례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는 세속성을 경계할 목적으로 순례를 성지순례라는 용어로 변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순례의 대상은 성스러운 공간이나 물건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공간과 물건 속에 깃든 신성성은 사람에 따라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 유명인의 기억의 장소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용어 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순례는 필요조건의 하나로 개인이 신이나 신성한 형상을 마주하러 가는 공간인 성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강증산(1871∼1909)을 우주의 최고신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라 존칭하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순진리회는 성지를 타 종교와는 다른 ‘독특한’ 독자적인 기준과 범위에 따라 다소 협소하게 규정함으로써 순례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지는 않다.62)

대순진리회는 전국 5곳의 도장―경기도 여주본부도장, 강원도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경기도 포천수도장, 서울 중곡도장, 제주도 제주수련도장―만을 성스러움을 발현하는 성지로 규정하며, 교조 증산의 생가나 그가 천지공사를 행하였던 동곡약방이나 대원사 등은 과거에는 성스러운 장소였지만 현재는 더 이상 성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도장 내의 증산을 위시한 15신위 신명들이 봉안되어 있는 영대(靈臺)에는 신명들이 응기하고 있는데, 이곳으로부터 신성이 발현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63) 이와 같은 성지의 정의는 ‘쓰임’이라는 기능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역사, 문화, 예술 등과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의 접근이 상당 부분 고려되지 않은 결과이다.

디건스(Justine Digance)는 성지는 세속이 시간을 뛰어넘어 신성으로 변형되는 장소로서 세속의 시공간이 신성한 영역에 길을 내주는 공간으로 정의되며 그런 장소는 “정신적인 자성”(spiritual magnetism)을 발산한다고 말한다.64) 더욱이 정신적인 자성은 성소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모인 사람들, 성소로의 여행,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마을이나 도시에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성은 특정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콘텍스트 내에서 상상되고, 정의되고, 표현된다.65) 그렇기 때문에 교단의 교리라는 권위에 의한 정의는 제한적 의미를 담아낼 가능성이 짙다. 이런 점은 “상제님과 도주님의 종적이 남아 있는 여러 곳을 돌아봄으로써 신앙심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는 목적”66)으로 실시되고 있는 대학생 ‘성지’순례에서도 확인된다. 1989년 ‘대학생 성지순례’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순례는 2012년부터는 ‘대학생 종교문화답사’라는 명칭으로 변경 실시되고 있는데,67) 이는 ‘성지’라는 용어의 사용이 부적절하다는 종단 차원의 결정에서 비롯된다. 용어의 변경이 비록 ‘올바름’을 찾아가려는 교리에 의한 시도일지라도, 산티아고 순례길의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 안의 대야고보 시선이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소’로서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성지는 복잡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지를 도장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간으로서의 성지와 수도자들의 도심을 고취시키고 대순진리회의 종교ㆍ역사적 공간으로서의 성지로 확대 분류하자는 허남진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68)

또한 『대순지침』에서 도장은 성역(聖域)으로서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여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처럼,69) 성지로서 도장은 순례지가 아닌 참배지로 인식된다. 어떤 의미에서 성지순례를 종교문화답사로, 도장으로의 순례를 도장 참배로 부르는 것이 올바를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순례는 ‘걷기’라는 또 다른 필요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지는 걷기의 육체적 고통을 통하여 순례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순례자는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는 없을지라도 낮의 육체적 리듬 속에서 코헨(Erik Cohen)이 말하는 이른 바 “중심”(center)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순례자에게 이 중심이 바로 궁극의 의미를 발현하기 때문이다.70) 따라서 순례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성지의 개념을 허남진 식으로 분류하든, 아니면 새로운 용어의 차용을 통해 차별화하든, 그 장소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증산의 발자취는 온전한 세속적 관점에서도 신성을 발현한다. 서구 근대성이 유입되던 시기에 인간 증산은 기존 유교적 사회 체계의 불합리성과 모순에 혁신적 변화를 꾀하려 하였다. 그의 반상의 철폐, 남녀차별의 혁파, 부의 재분배, 인간사회의 폭력 해법은 조선이라는 특수성을 상기할 때, “혁명적” 발상에 다름 아니다.71) 따라서 사상가로서, 철학가로서, 혁명가로서, 한국 신종교의 효시로서의 증산의 흔적은 역사적 가치 면에서도 탁월하다. 대다수 지자체가 소위 ‘지역개발’ 또는 ‘지역발전’의 기치 아래 문화원형의 발굴을 통한 콘텐츠 개발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의 존재는 세속적 가치 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신앙이 아닌 세속의 관점에서도 증산의 흔적은 ‘성소’로서 기능할 수 있으므로 순례의 궁극적인 목적을 종교적 측면에서 “신앙심을 공고히 하고 종교 활동을 확대시키는 것”72)으로 제한할 수 없다. 후기 세속주의 사회에서 신앙과 정신, 종교와 세속이라는 이분법은 증산이 남긴 물질적 흔적과 공간의 순례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우주 최고신으로서 또한 역사적 인물로서 증산의 삶 자체는 이동의 의미에서 순례와 닮아 있다. “…서양(西洋)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셔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스스로 세상에 내리기로 정하신”73) 증산은 끊임없는 걷기 속에서 대순사상을 세상에 전하였다. 『전경』 속에서 증산의 크고 작은 지역으로의 무수한 이동을 발견할 수 있는데, 아래의 <그림 2>에서처럼 한 번의 이동 거리는 보통은 30리(약 12km)였고74) 거의 대부분은 종도(들)를 대동하였다.75) 증산의 이동은 대부분 목적을 지닌 걷기의 방식이었고 종도의 대동은 걷기의 과정 속에서 종도와 그 목적을 공유함으로써 “광구천하의 뜻”76)을 펼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다녀간 곳, 그가 머문 곳, 그가 천지공사를 행한 곳은 함께 한 종도에게는, 대순진리회 수도인에게는, 더 넓게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삶과 경험의 변화를 제공할 수 있는 순례길 어딘가에 있는 터너가 말한 역치성의 공간으로서 커뮤니타스를 형성한다.

증산 순례길은 단순히 장소의 성스러움을 만나기 위한 여행으로, 그리고 대순진리회의 종교적 기억과 회상의 공간으로 한정할 수 없다. 그 길은 내적 의미를 추구하고 변화와 개인적 성장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신의 이동 통로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지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거나 분류할 필요가 있으며, 순례는 차를 타고 목적지에 내려 성스러운 대상을 둘러보는 편안한 관광이 아니라77) 걷는 동안 이루어지는 심고의 시간이라는 순례의 제의적 성격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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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증산의 이동 실례 *출처: 『대순회보』 118,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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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맺음말

근대는 계몽으로부터 출현해 종교, 전통, 권위보다는 과학과 이성으로 설명되고 연구되는 세계를 촉발하였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과학과 이성의 주장이 첨예해질수록 그것의 객관성은 의심받게 되었고 종교나 과학 그 권위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하였다. 그것은 개인적 경험, 다원주의, 진실의 다중성을 강조하는 사회로 인류를 이끌고 있고, 그 속에서 콕스(Harvey Cox)의 주장처럼 인류는 영성을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하는 데 관심을 두는 “정신의 시대” 속에 살게 되었다.78) 정신의 강조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의 피폐를 의미하며, 이로 인해 개인은 정신적 경험을 통한 치유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움직임은 우리의 모든 경험과 우리 삶의 일상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데, 움직임이 더 습관적이 되는 것은 바로 낯선 환경인 여행 속에서이며 움직임 자체와 그 새로운 환경이 관계를 형성할 때 사유(reflection)는 슬며시 고개를 든다.79) 성지로의 숭고한 여행인 순례는, 그것의 동기가 종교적이든 다른 사적 동기이든, 성지가 발산하는 신성성과 고독한 걷기의 고단함으로 사유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한다. 성지의 신성성이 처음에는 목적이었을지라도 순례가 정신의 치유를 행사하는 것은 성지로 가는 ‘과정’ 속에서이며, 육체의 습관적 움직임은 정신의 움직임으로 전화한다. 자아는 익숙한 일상의 공간에서 출발해 성지까지 걸어가는 기나 긴 시간 속에서 미지의 다양한 콘텍스트에 의해 자기 속의 다양한 자아를 발견하고 경험하고 풍요로워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정신적 치유가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걷는 동안 영혼 속의 고통에 자아를 개방하는 점진적 과정인 것이다.

프레이(Nancy Frey)는 순례가 개인적 상처나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문제들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정신의 회복 또는 변형을 통해 과거를 정비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도록 사람들을 자극한다고 말한다.80) 그렇기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비롯한 많은 순례길이 세계 각지에서 부활하고 있고 순례자는 “포스트모던 인류의 상징”81)으로 간주된다. 순례가 다양한 이유나 의도로 행해지며 다중의 활동을 수반해 어쩌면 전통적인 의미의 용어로는 담아낼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순례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여전히 종교 속에서 행해지며 종교를 포함하는 정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증산 순례길은 대순진리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증산이 예시한 후천시대로의 이동은 우주 만물이 공유하는 가치이고 증산 순례길이 비록 세속의 의미로 퇴행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야를 열고 바라보면 증산의 품속에 안겨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지는 복잡한 맥락 속에서 사멸하고 부활하며 변형된다. 성지를 도장으로 한정하는 미시적 시야가 비록 대순사상의 정수로서 바꿀 수 없는 진리일지라도 그것은 창생을 깨우치고 인도하려는 증산의 수많은 움직임을 찰나의 시간으로 가두어 놓을 수 있다. ‘성지’라는 용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해석되었으므로 또 다시 재정의될 수 있다. 도장이 참배의 공간이라면 증산이 걸었던 길은 순례의 공간일 수 있다. 우주를 대순하고 한반도를 주유하고 종도들과 걸으며 천지공사를 행한 것은 닫혀있는 한반도와 세계 사람들에게 정신의 개벽을 알리려는 증산의 힘겨운 외침이고 현대인은 증산 순례길에서 그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이제 증산의 발자취를 따라 단 하루 정도의 코스라도 내 두 발로 직접 걸어보는 것은 어떠한가?

Footnotes

8. 같은 글, p.19.

10. 같은 글, p.21.

18. 암브로시오(Victor Ambrosio)는 과거에는 교회 자체가 신앙을 더 깊이 있게, 더 풍부하게 경함하도록 순례를 장려하였다고 말한다. Victor Ambrosio, “Sacred Pilgrimage and Tourism as Secular Pilgrimage”, in R. Raj & K. Griffin, eds., Religious Tourism and Pilgrimage Management: An International Perspective (Wallingford, UK: CABI, 2015), p.131.

37. 중세 서구 기독교 순례를 분석한 구본식에 따르면, “여행의 대부분은 걸어서 갔다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짐승을 탔으며 그 짐승의 대부분은 당나귀였다. 순례객들은 여행의 이러한 조건에다 자기들만의 고유한 순례 실천 사항을 결정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행을 실천하였고 수도자들은 그 고행이 더 심했다.” 또한 “중세의 순례자는 사실적으로 가난하기도 하였고 또 고행도 해야 했기 때문에 걸었으며, 그 중에서 맨발로 걷는 이도 있었다.” 구본식, 「가톨릭교회의 성지 순례(기원과 중세기의 순례 중심으로)」, 『현대 가톨릭사상』 27 (2002), p.60, p.73.

38. Sarah Wilkins-LaFlamme, “How Religious Are the Religious “Nones”? Religious Dynamics of the Unaffiliated in Canada”, Canadian Journal of Sociology 40:4 (2015), p.478.

41. 매년 3백~5백만 명의 이슬람교들은 메카로 가는 하지(Haji: 메카로 가는 이슬람 순례)를 떠나며, 5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프랑스 루르드(Lourdes)에, 대략 2천8백만 명의 힌두교 순례자들이 갠지스 강을 찾고 있다. N. Collins-Kreiner, 앞의 글, p.441 참조.

42. 일본의 시코쿠 88사찰 순례길은 88개 천년 고찰을 차례로 참배하는 총 길이 1,200㎞의 순례길로, 도보로는 약 40일~60일이 소요되며 연간 15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3천년 순례 역사를 자랑하는 인도 바라나시 순례길은 갠지스 강 중류에 위치한 인도 최고 성지인 바라나시(Varanasi)로 가는 순례 코스를 말하는데, 많은 힌두교들이 갠지스 강물로 몸을 씻어 신성함을 받고자 인도 전역에서 몰려든다. 김신혜, 앞의 글, pp.55-57; 최화열, 박연옥, 윤병국, 「슬로우 투어리즘에 대한 탐색적 연구: 도보길과 제주올레걷기축제를 사례로」, 『관광연구저널』 29-2 (2015), pp.176-177.

50. Helena Vilaca, 앞의 글, p.147.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국(Pilgrim’s Reception Office)은 2000년도 통계에는 순례자 수를 272,703명으로 적시하였다. 2000년은 가톨릭의 성년(Holy Year)이었기 때문에 수치의 급격한 증가를 기록했지만, 실제로 부정 순례자(산티아고 순례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과 같이 부정한 수단을 동원한 사람들)를 제외하면 그렇게 많지는 않아 통계상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53. Lisbeth Mikaelsson, 앞의 글, p.264.스페인 팜플로나(Pamplona) 소재 나바라 대학(Universidad de Navarra)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인접한 여러 대학과 제휴를 맺고 각 대학에서 순례자 도장을 받고 완주한 학생들에게는 별도의 완수 증명서(La Compostela Universilaria)를 수여하고 있는데, 2003년 10월 시작한 이후 2012년 10월까지 47개국 대학 순례자 약 32,000명에게 이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Michael Murray, 앞의 글, p.69 참조.

69.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지침』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84), IV. 처사의 모범(본보기) 2장 3절.

71. 윤기봉, 「증산사상에서의 근대성 해석 문제: 계급제도의 붕괴와 부의 재분배를 중심으로」, 『종교교육학연구』 34 (2010), p.144; 김현우, 이경원, 「민족종교에 나타난 한국 정신문화의 원류」, 『한국철학논집』 52 (2017), p.274.

75. 『전경』에는 1909년 정월 최창조의 집을 혼자 방문한 기록을 제외하고는 늘 종도를 대동하였다. 『전경』, 행록 5장 9절-10절 참조.

77. 셉(Tina Sepp)은 산티아고 순례자들 간에도 계층구조가 형성되어 걷는 자만을 “진짜” 순례자로 간주하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가짜” 순례자, 방랑자, 관광객 등으로 분류되고 경계된다고 말한다. Tina Sepp, 앞의 글, pp.22-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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