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언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가장 기본적인 근본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물론이고 과학이나 우리의 일상에서 던지는 모든 물음은 이 하나의 근본 물음을 향해 있다.1) 하지만 그 어느 시대도 인간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견해가 현대만큼 불확실하고 혼란스럽지 않았다.2) 이에 수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나 자신을 알 수 없는데, 내 밖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기를 모른다면 단순한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토로(吐露)하는 것이다.
고래로 소위 성인ㆍ현자, 종교인, 사상가들, 인류의 영적 스승들, 과학자3)에 이르기까지 이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매진해 왔고, 이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를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영국의 소설가 헉슬리4)는 제도화된 종교들의 표면상의 교리는 아주 명백하게 다르지만, 모든 그들의 신학에서, 공유된 정리(order)와 같은 공통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5) 그는 “모든 주요 종교들이 그들의 신비적 전통을 통해 전파해 온 초월적 본질로서 규정한 이것을 영원철학이라고 부른다. 헉슬리는 영원철학이 태곳적부터 내려온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한다.”6)
그런데 서양 근대철학을 종합한 인물로서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칸트 역시 그 물음에 천착(穿鑿)한다. 즉 그는 자신의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두었다. 그의 저작에는 많은 의문과 답변이 나타나 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칸트 이후, 인간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이해하는 방식은 대부분의 경우 칸트가 시도했던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순사상의 인간관을 구명(究明)하는 선행 연구들은 칸트가 설정한 인간학의 범주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인간관을 중심으로 영원의 철학에서 성인ㆍ현자, 사상가들이 정립한 주요 개념들을 살펴보고, 영원의 철학의 인간관이 대순사상의 인간관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또한, 대순사상(영원 철학)의 인간관이 칸트가 인간학에서 제기했던 물음에 어떤 답변을 줄 수 있는가를 구명한다. 이렇게 영원한 철학을 근거로 대순사상과 서구의 그것을 비교해 보면, 대순사상의 특징이 극명(克明)하게 드러날 수 있다.
언급했듯이, 영원의 철학은 온 인류의 영적 스승들, 성인이나 현자들, 그리고 사상가ㆍ과학자들이 보편적으로 채택해 온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영원 철학의 인간관이 대순사상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대순사상의 범인류적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다.
Ⅱ. 선행연구와 칸트 인간학의 범주
대순사상의 인간관에 관한 선행연구는 적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접근법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연한 체계를 갖추고 일정한 범주 내에서 인간관을 고찰한 연구는 드물다. 교리 체계를 정립하려면 정돈된 프레임(frame) 하에서 인간에 대한 규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가장 최근의 연구로는 고병철(2017)의 「대순진리회의 인간관」이 있는데,7)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들을 전체적으로 요약, 검토하고 있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고병철의 논문은 한국종교사의 맥락에서 대순사상의 인간관을 파악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선행연구들을 개관하고 있다. 먼저, 대순의 인간관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이 처음에는 경전 해석과 심리학적 접근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철학적 접근과 교육적 접근, 그리고 타종교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다변화됐다고 말한다.8) 하지만, 향후 대순의 인간관의 설명 요인들을 좀 더 다양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하면서, 6개의 요인들을 활용해 보자고 제안한다. 6개의 요인이란 ①인간의 기원 ②인간 구성 요소 ③사후 인간의 상태 ④현실 인식 ⑤삶의 목표 ⑥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말하는데,9) 이를 편의상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인간의 기원-인간의 구성 요소-사후 인간의 상태’와 ‘인간의 현실 인식-삶의 목표-목표 도달 방법(‘선천-후천’의 구도)’이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은 (칸트가 사용하는 용어로) 전자는 ‘사변적 관심’, 후자는 ‘실천적 관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은 『칸트의 논리학: 강의를 위한 교본』에 등장하는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물음이 나온다.
이러한 세계 시민적 의미에서의 철학의 장(場)은 다음 물음들로 펼쳐진다. 1)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知識) 2)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4)인간은 무엇인가? 첫 번째 물음은 형이상학이, 두 번째 물음은 도덕이, 세 번째 물음은 종교가, 그리고 네 번째 물음은 인간학이 답한다. 그러나 근거에서 볼 때 이 모든 것들은 인간학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세 가지 물음은 마지막 물음에 관계하기 때문이다.10)
여기서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철학을 보면, 철학은 네 가지 영역(형이상학, 윤리ㆍ도덕, 종교, 인간학)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우선 “인간의 지식(知識)은 전재자(前在者)라는 가장 폭넓은 의미의 자연에 관계하고(우주론), 행동은 인간의 행위이며 인간의 인격성과 자유에 관계하고(심리학), 희망은 지복(至福)인 불멸성을 즉 신과의 합일을 목표로 한다(신학).”11)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네 번째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다른 모든 물음의 궁극적인 귀결(歸結)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지식ㆍ도덕ㆍ종교에 관한 세 가지 과제를 정리하는 것이 바로 인간학이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은 방법상 ‘비판철학’, 내용상으로는 ‘인간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칸트 자신은 그의 전(全) 저작을 통틀어 ‘인간은 ~이다.’라고 한 마디로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않는다. 칸트의 마지막 저서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12)은 말 그대로 이 세상의 행복을 얻기 위해 영리함을 추구하는 실용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이 저서에서 칸트는 인간의 실천적 자기 경험에 대해 논하지만, 완전하고도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13) 이에 대해 란트만은 “수영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동용 장난감 대야를 내 주는 격”14)이라고 비유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인간학은 심리학적ㆍ민속지학적(民俗誌學的) 인간학에 불과했다.15)
다만, 그의 저작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초판 서문에서 인간을 “자유로운,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자신의 이성에 의해 스스로 자신을 무조건적인 법칙에 묶는 존재자”라고 규정한다. 이와 같이 칸트는 인간의 이성의 실체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물음을 던졌으며,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기본적인 전제하에 그 물음의 답을 얻으려 한다.
문제는, 칸트가 던진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엄밀히 말해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 칸트가 가진 세 가지 근원적 관심들은 인간을 자연의 존재자로서 본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계시민적 의미로 파악하고 던진 물음들이다.16) 그래서 칸트의 “이성의 모든 관심들” 속에는 영혼, 자유, 신이라는 주제가 등장하지 않지만, 이것들에 접근하기 위해 사변의 길을 걷는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이성론자들은 사변적 관심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사변적 관심에만 매달리다 보면, 이성의 보다 근본적인 관심들을 외면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칸트 역시 이런 문제점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사변이성이 선험적 사용에서 귀착하는 최후 의도는 세 대상에 상관하는 일이다.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가 그것”17)이며, “사람들이 순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논구에 있어서, 이성이 갖추어야 할 모든 준비 작업은 사실에 있어서 오직…세 가지 과제에 관계하고 있다.”18)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靈魂)이나 의지의 자유(自由), 신(神)은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의 한계 내에서의 이성의 인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우리의 이성은 이 세 가지를 절실하게 추구한다는 것이다.19) 우선, 인간은 자유(自由)에 입각해서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창조해 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과 자유는 최상의 가치를 지닌다. 더불어,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의 힘으로는 성취 불가능한 최고선을 지향하는데,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도덕적 믿음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영혼이 불멸해야 하고,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20)
또한 언급했듯이, 칸트는 이성의 모든 관심은 상기(上記)한 세 가지 물음에로 집약된다고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이성의 모든 관심들”은 세 물음들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데, 그 ‘하나’란 칸트의 네 번째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철학적 인간학]이다.
이렇게 보면, 고병철의 6가지 요인은 칸트의 철학적 인간학의 범주(3가지 과제와 3가지 물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의 대순사상의 인간관에 관한 연구들은 칸트가 설정한 인간학의 테두리[요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먼저, ‘인간의 기원’이라는 주제는 ‘신(神)’21)과,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는 ‘의지의 자유’22) 문제와,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라는 주제는 ‘영혼’23)이라는 이성의 대상에 각각 대비된다. 또한, ‘인간의 현실 인식’의 문제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주제와,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의 문제는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에 유비(類比)되며, 그리고 ‘인간 삶의 목표’는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비된다.
Ⅲ. 영원철학의 유래와 대순(영원)사상의 인간관
헉슬리는 그의 『영원한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24) 서문에서 영원 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영원철학은 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써, 이것은 물질ㆍ생명ㆍ마음의 세계에 본질적인 신성한 실재(divine Reality)를 인식하는 형이상학이며, 신성한 실재와 유사한, 혹은 동일한 무엇인가를 인간의 영혼에서 찾아내는 심리학이고,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것과 동시에 초월하고 있는 바탕을 아는 것을 인간의 궁극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으로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온 보편적인 것이다.”25)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변함없는 공통적 지혜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가 형이상학으로, 생명과 마음을 포함해서 모든 사물들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신(神)이라고 불렀던 하나의 신성한 실재(實在)가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실재에 대한 기본적 견해다. 두 번째는 심리학으로, 각 개인의 영(靈)은 신성한 실재와 동일시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정체성은 전통적으로 신(神)이라고 불렀던 그 신성한 실재인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윤리학인데, 사람들의 최종적인 목적은─모든 사람들의 삶은 그 최종 목적을 향하여 움직여 가는데─우리가 전통적으로 신(神)이라고 불렀던, 모든 존재에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바탕이 되는 그 신성한 실재를 생생하게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다.26)
이 용어의 연원을 추적해 보면, 이미 중세 때 이탈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Agostino Steuco, 1497~1548)가 자신의 저서 『De perenni philosophia』(1540)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여러 학설이 표면적으로는 모순되고 대립될 수 있으나, 본질적인 면에서 “철학 그 자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류의 학문[철학]”이라는 의미에서 ‘구원(久遠)의 철학’ 즉 ‘영원한 철학’이라고 부른다. 신(新)스콜라철학자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철학의 기초를 다졌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재정립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가 그 중심에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 학파’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며, 토마스학파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토마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는 도미니크파(派)의 신학자로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신이 탄생한”는 사상을 고집하여 교황으로부터 이단 내지 위험한 사상으로 단죄(斷罪) 받는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신비적 체험(體驗)’을 역설하는 데 있다. 라이프니츠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성적으로 본질적인 문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으며, 또 철학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기에, 철학을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라고 정의 내린다. 나아가 헉슬리(1945)는 개인들이 체험(體驗)을 통해 알게 된 궁극적 실재를 시대와 문화적 맥락에 따라 각기 달리 표현한 것이 여러 종교의 전통이 되었다고 파악한다. 그래서 그의 『영원의 철학』 첫 장의 첫 제목은 ‘그대가 그것이다(Tat tvam asi).’라는 힌두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단적으로, 영원 철학은 동서양의 위대한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전통지혜의 핵심을 일컫는다. 고래(古來)의 전통적 지혜27)로서, 또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불변하는 지혜로서 영원철학은 궁극적 실재에 관해서 어떤 공통된 견해를 나타낸다.
서구의 비전(秘典)을 연구하는 존 홀만(J. Holman)은 영원의 철학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 즉 1)초기 밀교(Esotericism) 2)전통주의(traditionalism) 3)신지학 4)기타 비전 학파들인데, 다시 1)초기의 비전에는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헤르메스의 비전신앙이 있고, 4)기타 비전 학파들에서는 기독교 신지학, 유대교 신비주의(Kabbalism), 연금술(alchemy)을 소개한다.28)
이렇게 영원철학은 다양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그 요지는 간략하게 한 마디로 서술될 수 있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사물ㆍ생명ㆍ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원적 세계인데, 이러한 다원적 세계는 그 근본이 되는 일원적인 신성한 실재(divine Reality)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인간은 이 ‘신성한 근본(divine Ground)과 결합하는 앎’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 앎에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본은 논증적인 사고로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며, (특정 상황에서) 인간에 의해 직접 경험되고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절대(Absolute)이며…(그 앎은) ‘자아29)를 잃어서’, 말하자면, 신(神)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만 오는 앎”30)인 것이다. 그래서 헉슬리는 “근본에 대한 직접적인 앎(Direct knowledge)은 합일(合一)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으며, 합일은 오직 ‘그것’으로부터 ‘그대’를 분리하고 있는 장벽인 이기적인 에고를 없앰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31)고 말한다. 그래서 신에 대해 알려면, 직접적ㆍ직관적으로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원의 철학이 역사적으로 공식화한 모든 진술에서 다음의 점은 자명하다. 인간 삶의 목적은 명상 혹은 신을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자각하는 것이고, 행위는 그런 목적의 수단이라는 것,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명상을 가능하게 하는 한에서 타당하다는 것, 적어도 소수 명상가의 존재는 어떤 사회의 안녕을 위해 필요하다는 진술이다.32)
경험적인 합일을 통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자각의 결론은 무엇일까.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사람들은 자신과 세계, 존재의 본질에 관해서 어떤 공통된 견해를 보여 왔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가시적인 세계ㆍ물질계는 유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초월하는 현실 즉 신성한 실재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신적(神的) 실재’라고 할 수 있는데, ‘물질계는 그것을 초월하는 현실의 그림자’라는 생각이 거의 모든 종교의 공통된 기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적 실재가 궁극적 현실이다. 인격적 신을 상정하는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등에서는 마땅히 신이 궁극적 현실이 되고,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도 공(空)이나 무(無)가 궁극적 현실로 간주된다. 따라서 영원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궁극적 실재의 의미는 동서양이 서로 다르지 않다. 즉 신(神)이나 도(道), 혹은 불성(佛性)이나 천(天)은 모두 물질계를 초월하는 실재로서 궁극적 실재로 간주된다.33)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 역시 자연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질적 측면과 궁극의 현실에 통하는 영혼, 예지(叡智)의 측면을 갖는다. 비교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는 “위에서 그러하듯 아래에서도 그러하다.”34)는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한 명구(名句)를 인용하면서, 실재(實在)의 수준이 육지-매개물(Intermediate)-천상(天上)-무한(신)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자아의 수준 역시 이에 대응하는 육체-마음-혼(soul)-영(spirit)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35) 헉슬리는 “인간의 본성은 마음과 몸뿐만 아니라, 영(spirit)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는 시간과 영원, 육체적 생명으로서의 인간과 신성이라는 두 세계사이의 경계선에 살고 있다는 사실, 사람은 그 자체로는 공(空)이지만, 신으로 둘러싸인 공(空), 신이 결여된, 만약 원한다면 신이 될 수 있고36) 신으로 가득하다는 사실”37)에 주목한다. 육체는 항상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영은 항상 영원하다. 또한 마음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마음은 스스로를 어느 정도 육체와 관련시키지만, 힘이 있고, 원한다면 그 영을 경험하고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있으며 영을 통해서 신성한 근본과 동일시할 수 있는 인간존재의 법칙을 따르는 양면성을 지닌 창조물이다.”38) 즉 마음은 스스로를 영(spirit)과, 나아가 신성한 근본(divine Ground)과 동일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영과 같은 차원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영은 항상 영원히 있었던 채로 변함없이 있지만,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항상 영과 동일시한 채로 남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어떤 때는 영원하지만, 다른 때는 시간 안에 존재한다.’39)는 진술에서 ‘나(I)’라는 단어는 마음(psyche)을 지칭하는 단어로40), 영(spirit)과 동일시하면 시간성에서 영원으로 가고, 스스로 신체(body)와의 동일시를 선택하거나 동일시하게 되면 자발적인 혹은 비자발적인 필요성에 의해 다시 영원에서 시간성으로 넘어간다.”41)고 하였다. 때문에 ‘마음이 동일시하는 대상이 무엇이냐?’ 즉, ‘마음(나)이 동일시하는 대상이 신체인가? 아니면 영인가?’가 매우 중요해진다. 따라서 영원의 철학에서 가장 어렵지만 최선의 길은 인식주체인 나(마음)와 인식의 대상을 동시에 신성한 근본(divine Ground)으로 이끄는 것이다.42) 이를 위해서는 갑작스럽거나 갑작스럽지 않은 감정(heart)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감각과 지각하는 마음(mind)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그리스인들이 메타노이아(metanoia)로 불렀던 전면적이면서도 급격한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43) “요약하면, 고된 수행(修行)은 자기의지, 사리사욕, 자기중심적 생각, 기대(wishing)와 추측(imagining)을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다.”44)
대순사상에서도 역시 인간을 기본적으로 크게 몸과 마음, 영혼을 가진 3중의 존재로 본다. 『전경』 「권지」편에서 “상제 가라사대 ‘그 병자가 얼굴이 못생김을 일생의 한으로 품었기에 그 영혼이 지금 청국 반양(淸國潘陽)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니45) 어찌하리오.’”46)라고 하였다. 여기서 병자[인간]는 몸(얼굴이 못생김)과 마음(일생의 한으로 품음), 그리고 영혼(가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함)으로 구성된다. 또한 병자의 마음의 동일시 대상은 몸(신체)이었다.
따라서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음은 일신(一身)을 주관(主管)하며 전체(全體)를 통솔(統率) 이용(理用)”47)하며, 마음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몸48)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은 비단 몸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귀신의 중추기관(樞機)이고, 문호이며, 도로이며…내 마음의 추기, 문호, 도로는 천지보다 크다.”49) 『전경』 「제생」편에서는 “술값을 천천히 치르려고 생각하더니 별안간 복통을 일으키는지라. 그제서야 마음을 돌리고 꼭 갚으리라 결심하니라. 복통도 가라앉아 술값을 바로 갚았도다.”50)라고 하였다. 즉 마음의 현상(마음을 돌이킴)에 따라 몸(복통이 가라않음)이 변하는 것이다. 나아가 마음먹기에 따라 그에 따른 기운이 따라들고, 신명의 용사(用事)까지 달라진다. 『전경』 「교법」편에 “마음을 깨끗이 가져야 복이 이르나니 남의 것을 탐내는 자는 도적의 기운이 따라들어 복을 이루지 못하나니라”51) 하였고, “남의 자격과 공부만 추앙하고 부러워하고 자기 일에 해태한 마음을 품으면 나의 신명이 그에게 옮겨”52) 간다는 것이다.53)
Ⅳ. 칸트 인간학의 범주로 본 대순사상(영원철학)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자(동물)도 아니고 무한자(신)도 아니다. 흔히 ‘유한한 인간’이라는 말처럼, 인간을 무한자인 신과 대조적으로 유한자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인간은 사물세계, 대상세계를 초월하는 마음54)을 가지고 있다. 칸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물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에55) 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전체 창조물에 있어서 사람들의 의욕하고,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한낱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이성적 피조물은 목적 그 자체이다. 인간은 곧 그의 자유의 자율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 법칙의 주체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어떤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무생물-식물-동물-인간-신이라는 존재의 하이어라키(hierarchy)56)에서 신에 가장 가까운 상위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양극성을 가진 단일체”, “영과 육이라는 양극성을 가진 단일체”이며, 칸트의 인간관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가능적 무한자”이다.57) 중요한 것은 “칸트가 인간을 유한자와 무한자의 중간으로 보았다고 할 때의 무한은 현실적 무한”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현실적 무한’이란 “완료된 전체로 간주되는 무한”58) 즉 자기 충족적, 자기 완결적, 자존적인 ‘신적인 무한’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유한과 현실적 무한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59) 이렇게 칸트가 인간을 무한성과 유한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본 것은 그의 인간관이 기독교적 인간관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불가피하게 인간 자신은 스스로를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60)
다시 말해 칸트의 기본 생각은, 인간이 그 스스로 분별한 것만(분별지), 즉 인간 자신에 의해서 객관화된 현상에 대해서만(현상지) 객관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61) 그러니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지기 이전의 실재 즉 인간을 누가 알겠는가(절대지). 오로지 인간을 창조한 신만이 알 수 있다. 신이 아닌 인간은 비록 마음(정신)을 지닌 가능적 무한자일지언정 자신을 인식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렇게, 인간 자신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이 정신적 존재’라는 데에 기인한다. 주지하듯이,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1928)는 그의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에서 인간을 물리적ㆍ화학적ㆍ생명적, 그리고 정신적인 존재로 보았다. 즉 셸러에게,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원리는 이념의 사고와 본질 내용의 직관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정신과 의욕을 포함하는 새로운 의미의 정신(精神)이다. 이러한 정신 작용의 중심이 인격(Person)인데, “인격은 사물과 같은 대상이 아니라62), 그 자신이 오로지 작용을 수행하는데서만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일적 일자(一者)로서의 하나님은 셸러에게는 작용하는 개별 인격들의 전체로서의 총체인격(總體人格, Gesamtperson)에 해당하고, 대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과 마찬가지로 역시 작용할 뿐인 것이다.”63)
이런 이유로, 칸트는 인간과 신(神)에 대해 알기 어렵다고 보았다. 비록 인간은 대상세계를 초월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분별의 대상으로 삼은 것만을, 즉 현상만을 인식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사물과 같은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인격(人格)’, 총체인격에 해당하는 ‘신(神)’을 어떻게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64) 그래서 그의 인간학에는 물음만 있었을 뿐, 그에 대한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철학에서는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인간의 본성을 직관하는 본래적 자각(自覺)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나 자체로 인식하는 것, 나의 본성을 직관하는 견성(見性)과 같은 것은 칸트에게는 없다. 초월적 자아의 직관에 해당할 만한 ‘지적 직관’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초월적 자아의 인식이 가능하자면 우리의 일상적인 감성적 직관과는 구분되는 지적 직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는 일상적ㆍ경험적 의식 방식을 넘어서는 특별한 인식능력 내지 자각능력을 활성화하기 위한 실천 수행 내지 마음공부를 강조해 왔다.65)
마찬가지로 동양철학, 동양 종교 전반을 아우르는 영원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직관할 수 있는 인식능력 혹은 자각능력이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보았다.66)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의 특별한 자각능력은 인간의 본성까지도 직관할 수 있는 것일까. 과학철학자 에르빈 라슬로(Ervin Laszlo)는 “전통적이고 비서구적인 사람들은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비록 그 답이 관찰과 실험보다는 직관을 토대로 했지만”67)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러한 영적 측면 혹은 차원에 대한 조사도 과학의 범주 안에 든다”68)고 한다. “현실의 물리적 측면과 마찬가지로 이 측면 또한 인간 경험의 증언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69)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에 관한 영원의 철학자들의 증언은 무엇인가. “영원의 철학의 주창자들은 인간은 어떤 형태이든 신체, 마음(psyche), 영(spirit)으로 구성된 일종의 삼위일체 구조라고 단언”70)하고 있는데, 여기서 ‘영(靈)’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는 신성한 근본 영(the divine Spirit)과 유사하거나 실제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헉슬리는 베륄(Bérulle)71)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천사, 동물, 공(a void), 세계, 신으로 둘러싸인 무(a nothing), 신의 결여, 신이 될 수 있고, 신으로 충만한 존재, 만약 원하기만 한다면.”72)
이처럼 개개 인간의 영은 신성한 근본 영과 유사하거나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이 갖춰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 안의 신성을 살리지 못한다. “태양빛이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닿을 수 없듯이, 신으로부터 무한히 흘러나오는 빛에 대해서도 눈을 감음으로써 사람들은 분노와 어둠 속에 있다.”73)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철학은 자기중심적(ego74))인 자아와 참자아(Self)를 철저하게 구분한다.75) 에고(ego)는 외부의 것들은 객체, 자신은 주체로 구분한다. 하지만 신성한 근본바탕 안에서 모든 것은 하나며, 개별적 자아는 소멸된다.
헉슬리의 『영원철학』의 「자아 이해(Self-Knowledge)」편에서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76)는 “그대(인간)는 그대가 아닌 것이다. ‘나는 곧 나(I am)다.77)”라고 하며. 로이스부르크78)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왔고, 유랑(流浪) 중이다. 우리들 애정의 잠재력은 신을 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유랑 상태를 감지한다.”고 말한다.79) 신(神)과 다르지 않은 인간 자신을 실체(實體)가 없는 것으로 지각해야 하며, 신성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이러한 지식과 실상을 알게 되면 영적 진보가 일어난다.
대순사상에서는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摘示)하고 있다. “사람에게 혼과 백이 있나니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어 후손들의 제사를 받다가 사대(四代)를 넘긴 후로 영도 되고 선도 되니라. 백은 땅으로 돌아가서 사대가 지나면 귀가 되니라.”80) 즉 인간의 혼은 사후에 신(神)이 되고, 영(靈)도 되며 선(仙)도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백(魄)이 귀(鬼)가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혼(백)과 신(神) 사이에 근원적인 경계가 없고81), 인간이 곧 신으로 지칭(指稱)된다. 다만, 인간의 몸[그릇]에 ‘생명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정기(精氣)가 담기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기는 극히 쉬운 일이라. 몸에 있는 정기를 흩으면 불티가 사라지듯이”82) 되고, 몸에 있는 정기만 다시 합(合)하면 살게 된다.83)
이에, 일찍이 장병길(1989)은 인간을 “심령신대(心靈神臺)를 기대로 뼈ㆍ살ㆍ오장육부를 갖춘 존재, 혼과 백이 있는 존재, 정ㆍ신ㆍ기(精ㆍ神ㆍ氣)의 삼기(三奇)를 가진 존재”84) 등으로 보았다. 이경원(2011)은 인존(人尊)85)을 인간의 본질로서 파악하고 이상적 인간상이 바로 인존이라고 한다.86) 또한 다른 저작87)에서도 인간의 물적 배경과 정신적 배경이 되는 것이 각각 천지와 신명이고, 양자를 매개하는 심(心)이 인간의 본질이며, 역시 인존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파악한다. 이외에도 많은 선행 연구들은 대체로 후천에는 인간이 우주의 주체 즉 인존(人尊)이 된다는 점을 대순사상의 주축을 이루는 개념, 혹은 대순사상 인간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로 들고 있다.88) 더 나아가 김대현(2016)은 인간의 신적 가능성(?)의 실현은 존재론적 의미와 인식론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즉, “실존하는 인간을 통해 신적 존재(being)의 참모습(?)이 실현”되며 아울러 “신적 인식이 발현된다”는 것이다.89)
하지만, 전술했듯이 칸트는 존재의 하이어라키에서 인간을 신에 가장 가까운 상위의 존재로 보았지만, 신적인 무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순의 인존사상처럼, 신적 존재가 실존하는 인간을 통해 현실에 구현된다는 상정(想定)은 그에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인간관은 기독교적 인간관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순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신적 인식이 가능한 존재다. 영원의 철학에서도 ‘마음과 인식의 대상을 동시에 신성한 근본[신(神), 도(道), 궁극적 실재]으로 이끄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칸트의 첫 번째 물음,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Was kann ich wissen?, 지식)”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천주(天主)를 모시면 조화가 정해지고 영원히 잊지 않으면 만사를 알게 된다.” 『전경』에서는 “‘이것을 외우면 구세 제민(救世濟民)하리라’…그 글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도다.”90) 단, 만사지(萬事知)의 선행 조건은 천주(상제)를 모시는(侍) 행위 즉 수행(修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지혜가 밝아지는 후천에서는 모두가 초월적 지혜를 지닐 것이다. 그래서 『전경』에서는 “신천지에서는 집집마다 오래 살아 수명이 길어지며 일월처럼 밝게 만사(萬事)를 알게 된다.”91)라고 하였다. 또한 “후천에는…지혜가 밝아져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시방 세계에 통달”92)한다고 하였다. 즉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 지혜를 갖는다. 칸트는 감성의 영역에서 모든 내용을 지워버리면 ‘시간과 공간’93)이라는 형식(frame)이 남게 된다고 했지만, 대순사상에서는 이마저도 뛰어넘는다.
그러면 칸트가 던졌던 두 번째 물음,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Was soll ich tun?, 도덕)”에 대한 대답도 대순사상에서는 명백하다. 앞서 『전경』 「교운」편에 ‘시천주(侍天主)를 외우면(천주를 내 안에 모시면) 구세 제민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영원철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통합심리학자이자 세계철학자 켄 월버(Ken Wilber, 1949~)는 영원한 철학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요지는) ‘우리가 죄와 분리와 이원론의 세계, 즉 타락과 무지(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내면에서 발견되는 영적인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와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 즉 해탈의 길이 존재하기에, 그 길을 끝까지 간다면94) 윤회, 혹은 깨달음, 내면의 영적 존재를 체험할 수 있고, 죄와 괴로움이 끝나는 최상의 자유를 성취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는 종내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95)고 요약한다. 자비심의 실천과 행동은 깨달음에 근거한 행동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모든 존재가 최상의 해탈을 얻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자비에 바탕을 둔 사회적 행동으로 귀결(歸結)된다.”96)는 것이다. 비록 칸트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Was soll ich tun?)”라고 하여 당위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지만─우리가 취할 수 있는 여러 행위들을 열거할 수 있지만─이원론의 세계가 곧 환상의 세계임을 간파하는 각자(覺者)의 행위는 자연스레 이기심[에고] 없는 타인에 대한 봉사로 이어질 뿐이다. 깨달음에 근거한 행위는 에고(ego)를 없애고 실재(實在)하지 않는 괴로움을 타인에게서 덜어주는 일로 압축된다.97) 그리고 타인에 봉사하는 행위는 곧 자기 자신(진아)에게 봉사하는 것이 된다. 모든 존재는 똑같은 대아(大我), 똑같은 법신(法身)이기 때문이다.98) 다시 말해 영원의 철학에서,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정체성은 전통적으로 ‘신(神)’[도(道), 궁극적 실재]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영혼ㆍ자유ㆍ신(神)을 초월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이성이 갖추어야 할 모든 준비 작업이 이 세 가지 과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은 이들을 절실하게 추구하지만, 우리 경험의 한계 내에서 우리 이성의 인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즉 칸트는 신과 영혼의 문제가 우리 삶의 영역에서는 중요하지만, 학문과 지식의 영역에서는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순사상(영원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영혼ㆍ자유ㆍ신[道]’은 인간 존재의 내재적 본질이다. 그래서─상기한 것처럼─윌버는 “우리 내면의 영적 존재”, “최상의 자유 성취”를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종내(終乃)에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고 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다원적 세계이지만, 그 모두는 그 근본이 되는 일원적인 신성한 근본(divine Ground) 즉 도(道)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각 개인의 영(靈)은 신성한 실재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개별적 자아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으면 사회적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의 철학에서 우리 인간의 최종 목표는 이 ‘신성한 근본[도(道)]과 결합하는 앎’이며, 이 앎은 근본바탕[道]으로부터 우리[인간]를 분리하고 있는 장벽인 이기적인 에고를 없앰(자비심)으로써 달성된다.
이것을 대순 사상에서는 간명하게 나타낸다. 즉 “도(道)가 곧 나요, 내가 곧 도(道)라는 경지에서 심령(心靈)을 통일(統一)하여 만화도제(萬化度濟)에 이바지”99)한다고 나와 있다. 즉 ‘나는(인간은) 곧 도’라는 경지에 올라 심령을 통일하며100)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여기서 ‘만화도제’의 사전적 의미는 ‘끝없이 변화하는 미혹한 세계에서 중생을 구제하여 인도하는’ 사회적 행위다. 결국,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의 경지(境地)를 정각(正覺)하고101) 나의 심령을 구하며, 사회적으로는 만화도제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칸트는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Was darf ich hoffen?, 종교)”라는 물음을 던진다. 칸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물(대상)세계를 초월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월적 존재”라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을 유한자와 무한자의 중간으로 간주하여, “가능적 무한자”라고 한다. 즉 인간은 신(현실적 무한자)이 아닌 것이다. 기본적으로 칸트의 인간학에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전제되므로, 신이 만든 존재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이 신이 된다는 생각은 아예 꿈꿀 수조차 없다.
하지만, 영원철학에서 모든 인간의 궁극 목적은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것과 동시에 초월하고 있는 바탕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신적(神的) 실재’가 궁극적인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신성한 실재[道, 神]와 동일한, 혹은 유사한 무엇인가를 인간의 영혼에서 찾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근본에 대한 직접적인 앎은 오직 합일(合一)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신인조화(神人調和)’102)를 도모한다. 대순사상에서는 “서전 서문(書傳序文)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하고 대학 상장(大學上章)을 되풀이 읽으면 활연 관통(豁然貫通)한다.”103)고 하였다. 여기서 ‘도(道)에 통하고, 활연 관통하는’ 것은 곧 ‘도통진경(道通眞境)’에 이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은 인간개조를 통한 지상신선실현(地上神仙實現)104)을 희망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성한 실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전경』에서는 “도를 닦은 자는 그 정혼이 굳게 뭉치기에 죽어도 흩어지지 않고 천상에”105) 오른다고 한다.
요컨대, 칸트는 기존의 단순한 ‘이성적 인간관(이성을 지닌 동물)’에서 벗어나 인간을 ‘이성적 존재’이자 ‘초월적 존재’, ‘가능적 무한자’로 보았다. 나아가 대순사상(영원철학)에서의 인간은─언급한 헉슬리의 영원철학의 정의(定義)106)와 『전경』에 나타난 인간관107)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ㆍ초월적 존재, 가능적 무한자이며 동시에─‘현실적 무한자(神)’와 다르지 않다.108)
결국, 칸트가 자신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인간관의 전제(前提)가 영원의 철학, 대순사상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역으로, 인간이 “궁극의 현실에 통하는 영혼, 예지(叡智)의 측면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바랄 수 있는지, 확장된 외연(外延) 속에서 답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Ⅴ. 결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철학은 물론이고 과학이나 일상에서도 가장 궁극적으로 해명해야 할 물음 중의 하나로 꼽힌다. 수천 년 동안 많은 철학자들이 나름의 견해를 제시했지만, 상이한 관점의 다양성만을 확인했을 뿐 서로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 일치하는 결론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서양 근대 철학을 종합한 칸트 역시 자신의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인간을 규명하는 데 두었다. 그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다른 모든 물음의 궁극적인 귀결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저작 어디에서도 인간 존재를 규명하지 못한다. 인간의 영혼이나 의지의 자유, 궁극적 실재인 신(神)을 초월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비록 이들 주제가 우리 삶의 영역에서는 중요할지라도, 학문과 지식의 영역에서는 다룰 수 없다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마음[心]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초월적 존재이지만, 무한자인 신(神)과는 엄연히 다른 유한한 존재이다. 이에, 인간은 인간 자신이 분별한 것, 즉 대상에 대해서만 객관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간 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는 신이라고 생각한다. 칸트에게,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성적 존재이다. 나를 나 자체로 인식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인식능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칸트는 인간 자신을 미지의 존재로 남겨 놓는다.
반면에, 대순사상은 칸트의 물음에 직설적인 답을 갖는다. 대순사상에서의 인간의 궁극적인 정체성은 바로 신(神)이며, 따라서 인간은 특별한 지각 능력을 갖는다. 그리고 수련을 통해 이 특별한 지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깨달음의 정수(精髓)를 간추린 것이 바로 영원철학이며, 그 요지는 대순사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양자의 요지(要旨)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바로 대순사상의 초월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