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인간’은 그동안 ‘동물’ 혹은 ‘신(神)’과 차별적인 존재로 정의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정의는 ‘기계’와 다른 존재로 정의해야 하는 시대에 와 있다. 인류의 역사상 혁명적인 전환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4차 산업혁명시대’ 혹은 ‘포스트휴먼시대’ 등으로 불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인류에게 축복(Utopia)을 가져다줄지 혹은 재앙(Dystopia)을 가져다줄 지는 아무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의 한 특징으로 ‘모호성’을 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큰 변혁의 시기를 겪을 때마다 새로운 사상 혹은 종교가 출현하여 인류를 이끌어왔다. 중국의 경우 주(周)나라가 붕괴하고 춘추 전국시대가 도래하였을 때, ‘어떻게 하면 혼란된 세계를 안정시킬 수 있을까?’하는 우환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상가가 출현하여 소위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또한 구한말 한국사회는 봉건왕조가 몰락해 가고 근대 산업사회가 출현하는 과도기에서 총체적인 혼란이 야기되었는데, 이 때 수많은 신종교가 출현하여 민중들의 삶을 이끌어나갔다. 우리가 직면한 4차 산업혁명의 시기 또한 새로운 철학과 종교 사상이 출현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생각된다.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하여 클라우스 슈밥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760~1840년경에 걸쳐 발생한 1차 산업혁명은 철도 건설과 증기기관의 발명을 바탕으로 기계에 의한 생산을 이끌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제2차 산업혁명은 전기와 생산 조립 라인의 출현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1960년대 시작된 제 3차 산업혁명은 반도체와 메인프레임 컴퓨팅(1960년대), PC(1970년대와 1980년대), 인터넷(1990년대)이 발달을 주도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컴퓨터 혁명’ 혹은 ‘디지털 혁명’이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다양한 정의와 학문적 논의를 살펴봤을 때, 우리는 제 4차 산업혁명의 시작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디지털 혁명을 기반으로 한 제 4차 산업혁명은 21세기의 시작과 동시에 출현했다. 유비쿼터스 모바일 인터넷, 더 저렴하면서도 작고 강해진 센서,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이 제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이다.1)
슈밥이 정의하고 있는 1차에서 4차 산업혁명의 구체적인 시기는 우리사회와 다소 차이를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사회에도 4차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학계에서도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종교는 어떠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라 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그리고 지능로봇의 출현으로 만약 인간 삶의 수많은 영역이 기계와 로봇으로 대체되는 사회가 출현한다면, ‘인류에게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소외된 인간의 증가로 인해 종교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증가할 것인가?’ 하는 점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4차 산업혁명의 모호한 성격과도 관련된다.
‘혁명’이란 ‘개벽’과 같이 인류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준비가 없는 개인과 집단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4차 산업혁명’에 큰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금 젊은이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현저하게 떨어져 있고, 거기에 인구 감소가 지속되고 있어서 ‘지금과 같은 종교가 과연 미래사회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종교계 일부에서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본 연구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진입한 현 상황을 고려하여, ‘대순진리회의 주요한 교리를 어떻게 재해석하여 변화된 환경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논의는 물론 종단 내부의 연구자들이 해야 하고, 종단의 정책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만 종교학자로서 ‘4차 산업혁명시기에 한국종교가 어떠한 대응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고, 여기에서는 한국 신종교의 대표적 종단의 하나인 대순진리회의 교리와 관련하여 일차적인 논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순진리회의 4대 종지의 하나인 ‘해원상생’의 이념에 입각하여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을 진단하고자 한다. 즉 4차 산업혁명의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도출하고, 부정적인 소외 - 갈등적인 요소를 치유할 방법론으로서 해원과 상생의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토대로 ‘대순사상과 시대정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낼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 것을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의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 대순진리회의 종지와 그 가운데 해원상생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규명하고, 이를 새로운 4차 산업혁명시대를 염두에 두고 그 보편적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철학과 종교의 측면에서 불변(不變)과 변(變)의 의미를 함께 살려야 한다. 즉 불변적 요소로서 해원상생의 진리성을 논해야 하지만 동시에 시대에 따른 변의 요소로서 해원상생의 의미를 재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종교학적 차원에서 4차 산업혁명시대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4차 산업혁명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인간의 생활과 의식에 어떠한 변화를 몰고 올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4차 산업혁명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소외와 갈등의 요소를 종교학적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한다. 즉 해원과 상생의 대상으로서 새롭게 제기된 소외와 갈등, 원한과 대척의 지점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셋째, 위의 작업을 통하여 드러난 원한과 대척의 지점을 범주화하고 이러한 소외와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해원상생 이념의 필요성을 고찰하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원리에 의하여 소외와 갈등이 치유될 수 있는 지를 밝히고자 한다.
Ⅱ. 대순진리회의 종지와 해원상생 이념의 재해석
한국의 신종교는 1860년 동학의 창도 이후 성립하였으며, 그 경제적 바탕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단계 위에 있었다. 해방 이후 성립한 수많은 신종교 또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와 봉건왕조, 제국시대, 민주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과 변화과정을 겪어왔다. 이에 따라 신종교의 교리와 그에 대한 해석도 이러한 정치ㆍ경제적 토대와 맞물려 있다.
대순진리회 또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는 1969년 우당 박한경에 의하여 창도되긴 하였지만, 그 주요 교리는 증산 강일순과 정산 조철제 당시에 성립된 것이어서 그 정치ㆍ경제적 토대는 다른 신종교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의 교리 체계는 크게 종지(宗旨)와 신조(信條)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순진리회요람』에는 교리의 개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음양합덕(陰陽合德)ㆍ신인조화(神人調化)ㆍ해원상생(解冤相生)ㆍ도통진경(道通眞境)의 대순진리(大巡眞理)를 종지(宗旨)로 하여, 성(誠)ㆍ경(敬)ㆍ신(信)의 삼법언(三法言)으로 수도(修道)의 요체를 삼고, 안심(安心)ㆍ안신(安身)의 이율령(二律令)으로 수행(修行)의 훈전(訓典)을 삼아 윤리도덕(倫理道德)을 숭상(崇尙)하고,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하여 인간개조(人間改造)와 정신개벽(精神開闢)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ㆍ구제창생(救濟蒼生)ㆍ보국안민(輔國安民)ㆍ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建設)을 이룩한다.2)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대순진리회의 교리는 4대 종지를 근본으로 하여, 삼법언 및 이율령으로 수도의 요체를 삼고, 포덕천하(布德天下)ㆍ구제창생(救濟蒼生)ㆍ보국안민(輔國安民)ㆍ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建設)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중 핵심적인 교리는 ‘4대 종지’에 있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시대에 있어서는 이 4대 종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그 지평의 확대 및 적용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라 있다.
‘음양합덕’이란 성향이 서로 다른 음과 양이 각기 가지고 있는 덕을 합하여 새로운 조화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음양이 서로 합해져서 상생(相生)의 덕(德)으로 만물이 생육된다. 음양은 각각 정음(正陰) 정양(正陽)으로 일음(一陰) 일양(一陽)이 된다. 음양합덕은 음과 양이 보완관계로 기능하여 조화로운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3) 여기에서 음과 양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서로 다른 양태를 상징한 것으로서 모든 존재는 움직이는 양적인 요소와 정지하고 있는 음적인 요소가 결합하여 이루어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음과 양의 구체적인 양태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양한 재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경원은 음양의 양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수(水)ㆍ화(火)에 대해서 말하면 수는 음이 되고 화는 양이 되며, 하늘에 있어서 해[日]는 양이 되고 달[月]은 음이 되며, 사람에 있어서 남자는 양이 되고 여자는 음이 된다. 인간과 신(神)의 관계에 있어서는 인간은 양이라면 신은 음이 된다. 한 인간에 있어서도 육체가 양이라면 정신은 음이다. 그리고 인류가 살고 있는 지리적 환경에 있어서도 서양이 양이라면 동양은 음이다. 방향에 있어서도 왼쪽이 음이라면 오른쪽은 양이다. 인류 문화에 있어서 과학이 양이라면 종교는 음이다. 인생에 있어서 말하자면 삶이 양이라면 죽음은 음이다.4)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음양합덕의 교리가 불변(不變)적 요소라면 구체적인 음과 양의 양태는 변(變)의 요소로서 새로운 환경에 따라 그 해석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인조화’란 후천세계의 인간의 변화된 모습을 말한다. 즉 신과 인간을 음과 양의 관계로 설정하고 합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은 진리의 척도이며 인간은 그 진리에 합치할 수 있는 존재라고 전제하며, 신과 인간의 화합과 조화를 추구하는 사상이다.5) 『전경』에서는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6)고 밝히고 있다. 이는 신인조화가 인간이 중심이 되어 신과의 조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시대적 특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있어서는 ‘신(神)의 역할을 기계가 대신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은 서양의 창조주로서의 신이라 할 수 있다. 즉 빅데이터를 통하여 인간보다 더 뛰어난 정보와 해석을 기계가 획득하고 있고, 망각과 죽음의 운명 앞에 있는 인간보다 영원한 기억을 소유하는 기계가 이전의 ‘신’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는 ‘신’의 자리에 ‘기계인간(포스트휴먼 혹은 트랜스휴먼)’이 자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시대에 있어서 신인조화의 이념은 ‘기계인간(포스트휴먼)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그 해석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대순진리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신인이 조화된 인간으로서 ‘인존(人尊)’의 중요성이 새롭게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도통진경이란 ‘도(道)를 통한 참다운 경지’라는 의미로 대순사상의 이상향을 함축한 표현이다. 도통은 인간의 이상이고, 진경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완전히 조화를 이룬 이상을 뜻한다. 이는 정신과 물질의 조화, 현실과 이상의 합치라고 할 수 있다.7) 대순진리회에 있어서 도통진경은 궁극적 이상의 세계를 표현한 말로서 증산상제의 천지공사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는 세계이자,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에서 말하는 ‘도통진경’ 혹은 ‘후천선경’의 이상사회가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전개될 미래사회의 모습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인가?’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빠르게 전개되고 있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지금 인류는 예상치 못한 혼돈에 빠져 있다고 해고 과언은 아니다. 인간 생활의 많은 영역을 로봇이 대신하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그러한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고 인간의 정체성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4차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기존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많은 편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증산상제의 천지공사에 의하여 해원상생의 후천세계가 예정되어 있다는 대순진리회의 종교적 믿음과 우리 앞에 구체적으로 도달해 있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의 모습 사이에서, 교리의 재해석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도통진경의 진리성에 대하여 이경원은 “첫째는 근원성이며 둘째는 다원성, 셋째는 창의성, 넷째는 통일성이다.”라고 말한다.8) 여기에서 근원성이란 도통진경의 교의에서는 모든 신앙의 근원이 하나로 귀일한다는 데 근거하며, 원시반본(原始返本)이란 말로 나타난다고 말한다.9) 다원성이란 유ㆍ불ㆍ선 삼교가 하나로 화합되고 동ㆍ서 문명이 하나로 조화된 세계를 말하고 있다.10) 창의성이란 이전의 사상과 달리 대순진리가 구천상제의 강림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 기반하고, 상제의 권능에 의하여 실현되어지는 신천지를 이끌어간다는 사상이라 말한다.11) 통일성이란 모든 종교나 이념의 갈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사상적 근거로서,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을 회복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12)
위에서 살펴본 이경원의 도통진경에 대한 해석에 따르면, 근원성과 창의성은 불변적 요소라고 보여 진다. 그러나 다원성과 통일성에 있어서는 재해석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즉 다원성에 있어서는 인간과 과학의 조화, 인간과 포스트휴먼(기계인간)의 조화를 추구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또한 통일성에 있어서도 인간 혹은 인간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4차 산업혁명으로 도래할 사회의 제반 문제를 회통 조화시킬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끝으로 ‘해원상생’에 대하여 살펴보자.13) 대순진리회의 4대 종지 중 ‘해원상생’에 주목하는 이유는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해원상생이며, 또한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있어서도 ‘해원’과 ‘상생’이 인류의 주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 예견하기 때문이다.
해원상생은 관계를 갖고 있는 존재와 개체 간에 생긴 원한을 해소하고 상대가 잘 되도록 도와준다는 윤리적 이상을 뜻한다. 모든 존재계가 음양합덕이 되고 또 인간이 신인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극의 질서가 사라지고 상생의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야 한다. 선천의 상극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선 해원이 이루어져야 하며, 해원을 통하여 상생이 이루어지게 된다.14)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종교들은 비록 간이(間易)하지만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이념을 제시해 왔다. 유교에서 인(仁)은 ‘충서(忠恕)’로 표현한다. 즉 자기의 중심을 세우고 온 마음을 바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충(忠)이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여 하고,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않는 것이 서(恕)이다.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를 주장하는데,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같이 기뻐하는 것이 ‘자(慈)’이고 다른 사람과 같이 슬퍼하는 것이 ‘비(悲)’이다. 기독교의 ‘사랑’ 또한 자신과 같이 널리 인간을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대순진리회의 ‘해원상생’ 또한 ‘척을 짓지 말라’는 해원과 ‘남을 잘되게 하라’는 보원을 통해 상극의 세계를 넘어 상생의 세계를 건설하는 인류보편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일찍이 논자는 「해원상생과 그 현대적 의의」를 통하여 그 해석의 지평이 현대사회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즉 ‘인간학으로서 해원상생’, ‘종교 간의 평화이념으로서 해원상생’, ‘사회윤리로서의 해원상생’이 그것이다.15)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념의 진리성과 보편성에 기인하지만, 시대와 환경에 맞게 끊임없이 재해석을 통하여 그 해석의 지평을 확대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있어서 ‘해원상생’의 이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논자는 위의 논문 ‘인간학으로서 해원상생’에서, ‘대순사상에 있어서 인생관의 핵심은 인존(人尊)사상’16)이라고 정의하고, ‘해원이란 일체의 원(冤)을 해소한 인간’17)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인존’이란 미래사회에 있어서도 영원한 불변적 가치라 할 수 있지만, ‘해원’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등장하는 원(冤)을 해소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구체적인 원의 대상은 변화할 수 있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즉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사회의 모습을 예견하여 인존의 불변적 가치 위에서 새로운 ‘원’과 ‘척’에 대한 요인을 분석하고, 이를 해원할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종교 간의 평화이념으로서 해원상생’에서는 ‘구천상제가 강림한 역사적 의의가 동ㆍ서 모든 문명을 돌아보고 후천의 새로운 문명 출발지로 이 땅을 선택하였다는 점과, 타문명 타종교에 대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서 평화로운 관계를 형성하고자 함에 있다.’18)고 제시하였다. 아울러 증산상제가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주의의 입장이 아닌 다원주의의 입장에 서서 해원상생의 새로운 종교윤리를 제시하였음을 밝혔다.19) 이러한 대순진리회의 종교 간의 평화 상생의 이념은 4차 산업혁명시대에 존재하게 될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종교윤리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순진리회의 핵심교리인 4대 종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와 포스트휴먼시대의 도래에 있어서 새로운 재해석의 필요성이 요청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불변(不變)과 변(變)의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재해석이 필요한 부분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는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으며, 구체적인 논의는 앞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Ⅲ. 4차 산업혁명시대의 특징과 소외와 갈등의 요소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에서 인공지능이 승리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1997년 IBM이 만든 슈퍼컴퓨터인 딥 블루(Deep Blue)가 당시 체스 대회에서 세계 챔피언이었던 게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를 꺾었고, 컴퓨터 프로그램인 왓슨(Watson)은 2010년에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서 최장기 우승자인 켄 제닝스(Ken Jennings)를 이겼다.20) 그리고 2016년 3월에 5번 열린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국에서 결국 알파고가 4대 1로 승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인간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로봇화, 자동화, 인공지능화 될 것으로 예측된다. 클라우스 슈밥은 “4차 산업혁명은 ‘단순히 기기와 시스템을 연결하고 스마트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훨씬 넓은 범주까지 아우른다.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에서 나노기술, 재생산에너지에서 퀀텀 컴퓨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거대한 약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기술이 융합하여 물리학, 디지털, 생물학 분야가 상호 교류하는 4차 산업혁명은 종전의 그 어떤 혁명과도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고 말한다. 또한, 슈밥은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ㆍ경제ㆍ사회 체제를 재고해 볼 필요성이 큰데 반해, 전 분야에 걸쳐 요구되는 리더십의 수준이 낮으며, 4차 산업혁명이 제공할 기회와 도전의 기틀을 형성하고 일관성을 갖춘 긍정적이고 보편적인 담론이 부재하다고 지적한다.21)
한편 3차와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개념에 점차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미 상용화되는 심장, 신장을 비롯한 다양한 인공장기 등을 장착한 인간은 본래의 생물학적인 조건을 넘어서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더욱 가속화되기 때문에 보다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바로 ‘포스트휴먼(Post Human)’이라고 칭한다.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기술(또는 기계)의 융합으로 나타나는 미래의 인간상을 일컫는 말로 정보통신기술, 인지과학, 나노기술, 바이오공학의 발달로 인간과 기계가 합쳐짐으로써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이러한 사회를 ‘포스트휴먼사회’라고 한다. 이에 따라 국내외에서는 이와 관련된 연구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어 다양한 논문과 저술 등의 연구 성과들이 나타나고, 특히 학계에서는 2015년에 ‘한국포스트휴먼학회’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이미 2015년부터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준비를 해왔으며, 그 결과로서 『제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 지능정보사회 중장기 종합대책』22)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의 효과로서 지능정보기술의 활용을 통해 삶의 편의성과 안전한 생활환경 등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양극화 심화, 분쟁증가, 개인정보 유출, 인간 소외 등”의 ‘역기능’도 또한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3)
사실상 이러한 문제인식은 이미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지적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3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극명하게 일어나 다양한 논의들이 선행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최초의 산업혁명 바탕에는 이른바 전문적인 과학적 ‘지식(知識)’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과학혁명’이라고도 칭해지고, 이러한 과학혁명에 맞추어 경제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과학이 출현하였으며, 이를 통칭하여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d society)’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기반사회는 또한 여전히 ‘인간소외’로부터 ‘환경재해’ 등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에 따라 인문학에서는 지식기반사회를 ‘지혜(智慧)’에 기반을 두는 ‘지혜기반사회(Wisdom-based society)’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다양한 포럼과 학회의 주제로 논의를 진행해 왔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한편 ‘포스트휴먼’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심각한 철학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인간과 기계가 고도로 결합되었을 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상당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한국포스트휴먼학회’에서 법학과 인문학, 로봇공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논의하는 까닭도 이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출현은 현재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인간의 고유영역으로 여겨지던 예술분야에 진출하여 작곡과 회화를 하는가 하면, 의학의 분야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수술을 하고, 많은 분야에서 빅데이터를 이용하여 상담을 하고 있으며, 군사의 부분에서는 드론이 군인들이 하는 일을 대신하고 있고, 무인자율주행차가 등장하고, 환자들의 돌봄이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공지능과 로봇의 출현이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역작용 또한 심각한 데에 문제가 있다.
윤사순은 “나의 ‘두뇌를 복제한 로봇’에 ‘자아의식’이 깃든다면 그 때 ‘나의 정체성’은 어찌되나? 나의 전체를 복제한 로봇이 생길 때 나라는 인간의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변별하나? 혼란의 극치가 따로 없다. 이런 해악을 피하기 위한 요청적 자각이 ‘인공지능 연구자의 윤리’를 지정해야 한다는 각성의 주된 동인이다.”라고 말한다.24) 실제로 2004년 ‘일본 후쿠오카 세계로봇 선언’에서는 ‘차세대 로봇은 인간과 공존하는 파트너가 될 것, 차세대 로봇은 인간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보조할 것, 차세대 로봇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 구현에 기여할 것’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25) 또한 2010년 새롭게 출범한 ‘한국정보화진흥원(NIA)’은 ‘세계 최고의 ICT 전문기관’을 표방하며, ‘ICT로 미래 지능화 시대 선도’, ‘지속가능한 정부혁신 지원’, ‘ICT 융합으로 경제ㆍ사회 혁신’, ‘함께 성장하는 디지털 문화’, ‘친한국 글로벌 시장 개척’ 등의 5대 전략목표 및 전략과제를 제시하고 있다.26) 이와 같이 미래사회에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을 가진 이 단체에서도 인공지능이 가져올 피해에 대비하여 6대 윤리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미래신호 탐지 기법으로 본 인공지능 윤리 이슈」라는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공지능 6대 윤리 이슈’27)를 밝히고 있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안전성과 신뢰성, 프라이버시 침해, 기술 오남용’의 경우 시급성이 중대하며, 그 다음으로 ‘책임성’의 부재가 있으며, 인간의 고유성 혼란과 초인적 지능에 대한 공포감과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와 포스트 휴먼사회에 있어서 새롭게 등장할 소외와 갈등의 요소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요소를 제시할 수 있겠지만, 종교적 영역과 관련된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문제만을 제시하고 한다.
첫째, 노동에 있어서 인간의 소외이다. 미래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일자리의 대부분을 기계가 대체할 것이라 예견된다. ‘미래의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람 한 명과 개 한 마리만 있으면 된다.’는 농담이 있다. 개는 아무도 기계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필요하고, 사람은 개를 키우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4차 산업혁명이 엄청난 일자리의 변화를 몰고 올 것을 예상하는 말이다.
2016년 ‘세계 경제포럼’은 인공지능으로 인해 앞으로 5년간 약 5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즉 일자리 200만개가 새로 생겨나지만, 대신 710만개가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28) 이러한 전망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인간이 종사하는 대부분의 직업이 기계(로봇)로 대체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찍이 맑스가 자본에 의한 노동의 소외를 밝힌 바 있지만, 미래사회에 있어서 노동의 소외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을 하지 않고 연금과 로봇세에 의존하여 연명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학자도 있다. 노동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존재이유를 찾았던 인류에게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하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라지지 않을 직업군도 많이 존재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뚜렷한 직업이 없이 놀고먹는 사회가 도래할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와 같이 미래사회의 인류가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면, 삶의 궁극적 관심이라 할 수 있는 종교에 대한 요청이 예견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미래 인류가 요구하는 종교는 기존의 종교와는 다른 형태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인간의 정체성의 혼란이다. 그동안 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에서 존재했고, 신과 동물과의 차별성으로 인하여 그 정체성이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기계와 인간이 결합하여, 인간이 기계화 되고 기계가 인간화 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당연히 인간의 정체성에 크나큰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포스트휴먼에 대하여 이종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스트휴먼, 그것은 첨단 기술들이 2050년 쯤 성공적으로 융합하여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하면 탄생할 존재이다. 즉 인간의 생물학적 몸은 도태되고, 첨단 기술에 의하여 완전히 성능이 증강된 인간 이후의 존재자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 오면 진화의 방향은 기술에 의해 조정된다. 그리고 미래는 자연적 진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진화의 국면으로서 기존의 과학 혹은 철학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가 펼쳐진다. … 지능을 가진 미래의 생명체는 인간을 전혀 닮지 않으며, 탄소기반 유기체는 기타 과잉 유기체와 혼합될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은 탄소기반 시스템뿐만 아니라 우주여행과 같은 상이한 환경에 보다 유리한 실리콘 및 기타 플랫폼에 의존할 것이다.29)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미래사회에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경계는 동물과 신을 대신하여 비인간의 영역에 포스트휴먼 나아가 트랜스휴먼30)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 앞으로 인간의 신체는 로봇에게 자신의 기능을 떠넘기고 무력하게 될 것이며, 인간의 정신은 인공지능에게 떠맡기고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래할 미래에 인간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창익은 미래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미 서서히 인간은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있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 기억이 잡다한 정보의 일차적인 저장 매체였던 과거에 노인은 삶의 지혜가 응축된 존재였을지 모르지만, 이제 네이버니 구글에 무엇이든 물어 보면 되는 시대에 노인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완견이 주인에게 자식보다 더 친밀감을 선사한다면, 도대체 아이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기계가 인간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굳이 왜 인간이 글을 써야 하는가? 일정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생물학적으로 한 명의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보다는 성능 좋은 컴퓨터 한 대를 구매하는 편이 낫다면, 우리가 굳이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을까? (후략) 31)
미래사회의 기계는 많은 영역에서 분명히 인간을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일까? 어쩌면 정체성의 혼란은 인간의 존재이유를 더 강하게 묻게 할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셋째, 인간 대 포스트휴먼의 대립과 갈등이다. 미래의 컴퓨터는 우리의 몸에 이식되는 컴퓨터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미래의 컴퓨터는 의식이란 과정을 통하여 인간과 하나가 되면서 인간 내부에 침투해서 오히려 컴퓨터가 인간을 자신의 일부로 흡수하여 포스트휴먼으로 자신을 변신시키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도래한다면 인간과 포스트휴먼과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 것일까?
이종관은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달리 여러 가지 물리적 기반을 바꾸어가며 자신의 삶을 지속할 수 있고, 지능 또한 자신의 지적능력을 여러 가지 상이한 물리적 기반의 컴퓨터에 업로드시켜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렇게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두뇌의 활동과 기억이 운명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자신의 생체를 떠나 다른 물리적 기반의 컴퓨터로 옮겨질 수 있다면, 설령 그 몸이 생물학적 수명을 다해 소멸한다 해도 인간은 다른 컴퓨터로 자신의 삶을 업로드 하여 영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32)
그런데 만약 이러한 포스트휴먼의 미래사회가 도래한다면 기존의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에 공존과 대립이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의 출현을 긍정하면서 인간과의 공존과 나아가 포스트휴먼으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인간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새롭게 출현한 포스트휴먼에게 두려움과 공포 내지 이질감을 나타낼 수도 있다. 결국 인간 대 포스트휴먼의 대립과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철학적 종교학적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Ⅳ. 해원상생의 원리를 통한 소외와 갈등의 치유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휴먼사회의 담론을 이끌어가고 있는 주된 인물들은 과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는 미래사회가 과학의 발달을 기본 동력으로 하여 전개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서구는 근대 산업혁명을 통한 현대의 과학기술을 주도하면서 과학의 발전이 인류를 행복하게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과연 과학의 발전이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근현대 서구의 인문학에서 조차 비판적인 견해를 지속해 왔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에 있어 우리는 ‘동양의 종교와 사상은 어떠한 역할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동양의 종교와 사상이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한다면, 포스트휴먼 사회가 진행될수록 동양 인문학은 결국 박물관에나 전시될 과거의 유물로 전락해버릴 위험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동양의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유가(儒家)에서는 자연의 이법(理法)으로부터 궁극적인 가치규범을 ‘천(天)’으로 도출하여 인간과의 관계, 즉 ‘천인지제(天人之際)’를 논구하여 전체적인 사상체계를 구성하였고, 나아가 인간과의 관계를 ‘인(仁)’의 실현으로 강조하여 그로부터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할 ‘윤리’를 도출하고 있다. 도가(道家) 역시 ‘자연’으로부터 ‘도(道)’를 도출하여 그 자연에 그대로 순응하는 ‘무위(無爲)’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집중하여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우주만법이 서로 상의상관(相依相關)적인 존재로서 파악하여 궁극적인 이법을 제시하여 그에 대한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로부터 동양의 종교는 이미 2천여 년에 가까운 역사를 ‘인간’과 ‘인성’에 대한 깊은 담론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는 책의 제목과 같이 동양의 인문학에는 이미 미래사회에 필요한 ‘인간’과 ‘인성’, 그리고 행복한 삶에 대한 성찰과 제시가 제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서부 히말라야에 있는 라다크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태적 지혜를 통해 천 년이 넘도록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서구식 개발 속에서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즉 우리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은 개발 이전의 라다크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33)
사실상 동양 인문학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부터 ‘인성’과 ‘윤리’, ‘행복한 삶’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존재하고 있다. 이른바 “인간이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하는가?”라는 네 가지 영원한 물음은 필연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 나아가 물질의 변화가 정신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우리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등의 심각한 철학적 탐구를 진행하였고, 각 시대에 있어서 그 상황에 맞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시대정신인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휴먼사회’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동양의 종교와 사상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의 교리에 있어서 다가올 미래의 모습은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인의 말씀은 실도(實道: 正道)와 권도(權道)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강림한 증산의 말씀은 주로 그가 생존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호서지역과 호남지역의 민중들을 향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경』 속에 나타나는 많은 말씀은 일종의 ‘권도’로써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말씀은 ‘실도’에 입각하여 새로운 재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해원상생’의 교리 또한 그 근본적 원리는 불변적 요소이지만, 구체적인 해원의 대상과 상생의 방법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해석이 가능하며, 적극적인 재해석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해원상생은 ‘인존(人尊)’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음양이 합덕 되고 신인이 조화된 새로운 시대의 ‘인간상’을 증산은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인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존’이란 단순하게 인간만이 존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포용하고 아우르는 품성을 지니고 있기에 진정으로 인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존’에 입각해 보면, 미래사회에 도래할 ‘노동에서의 인간소외’와 ‘인간의 정체성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추후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전개해야 할 것이다.
우선 ‘노동에서의 인간소외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오랜 기간 노동을 통하여 삶을 영위해 온 인간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존의 노동을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상실감에 기인한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함으로 인하여 가져올 노동에서의 소외는 기계에게 그동안의 노동을 넘겨주고 새로운 인간의 놀이 문화를 적극적으로 창조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인간 소외의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드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제도의 변혁을 통하여 기계가 대신하는 노동으로 인한 재화를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도록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인존을 위주로 전개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종교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다. 증산은 서양의 기계문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서양 사람이 발명한 문명이기를 그대로 두어야 옳으냐 걷어야 옳으냐」고 다시 물으시니 경석이 「그대로 두어 이용함이 창생의 편의가 될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니라. 그 말을 옳다고 이르시면서 「그들의 기계는 천국의 것을 본 딴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또 상제께서 여러 가지를 물으신 다음 공사로 결정하셨도다.34)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증산은 서양의 기계문명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이를 수용하여 인간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인존의 입장에서 인간 소외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35)
다음으로 ‘인간의 정체성 혼란’의 문제 또한 기존의 인간이 동물과 신 사이에 존재하던 지점에서, 인간과 포스트휴먼(기계인간)으로 존재하게 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의 존엄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기계적으로 환원됨으로 인하여 가지게 될 정신적 아노미 현상 또한 증산이 제시한 음양이 합덕 되고 신인이 조화된 인간상에 입각하여, 인존의 정신이 바로 정립된다면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인간 대 포스트휴먼의 대립과 갈등’의 문제는 해원상생의 이념이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대목이다. 증산 상제는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36)하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가 해원과 보원의 길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해원’과 ‘상생’은 후천시대 인간이 살아가야할 정도(正道)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롭게 전개될 인간 대 포스트휴먼의 관계는 그 갈등의 상황을 분석하고 이를 비판하는 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원과 상생의 길을 모색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 종교인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즉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에 있어서 새로운 인간의 출현에 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해원과 상생 그리고 인존의 방향으로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와 포스트휴먼 사회의 본격적인 도래를 앞두고 ‘해원상생’의 이념을 중심으로 하여 대순진리회 교리의 재해석과 그 지평을 확대해야 함을 살펴보았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의 각 영역에 있어서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휴먼시대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종교계에 있어서도 그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대순진리회 또한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한 특징은 ‘모호성’에 있다. 즉 4차 산업혁명의 효과로서 지능정보기술의 활용을 통해 삶의 편의성과 안전한 생활환경 등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양극화 심화, 분쟁증가, 개인정보 유출, 인간 소외 등”의 ‘역기능’도 지적되고 있다. 또 포스트 휴먼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과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해소할 새로운 이념의 필요성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증산 상제는 앞으로 도래하는 시대가 ‘인존(人尊)시대’라고 밝혀주었다. 이는 기술 과학의 혁명을 인간이 주도하고 인간이 통어하며 인간을 위해 진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산업혁명’의 핵심은 ‘지식’을 기반으로 삼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식기반사회’에서 발생하였던 ‘인간소외’와 ‘양극화 심화’ 및 ‘환경파괴’ 등의 문제는 여전히 발생할 수 있고 그 정도가 심해질 수 있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시대의 진입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 대안을 제안해줄 종교적 역할이 새롭게 대두된다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의 4대 종지 가운데 하나인 ‘해원상생’은 이제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이념으로 정착되었다. 원한과 갈등의 요소를 제거하고, 대립이 아닌 상생과 조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이념은 보편적 도덕원리로서 정당성을 확인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원상생의 이념이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시기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종단적이나 사회적으로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진행되는 ‘4차 산업혁명’ 역시 철저하게 ‘지식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4차 산업혁명의 흐름을 결코 거역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인류의 번영과 행복,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선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양극화 심화, 인간의 정체성의 상실, 분쟁증가, 개인정보 유출, 인간 소외, 직업상실 등의 ‘역기능’이 출현하면서, 인간사회에는 또 다른 원한과 대립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역기능을 어떻게 최소화하여 인존의 시대에 맞게 인류의 행복을 증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순진리회가 주장하는 ‘인존’과 ‘해원상생’은 여전히 중요한 종교적 이념으로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