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진묵(震默, 1562-1633)은 법호(法號)이고 법명(法名: 法諱)은 일옥(一玉)이다. 진묵은 7세에 출가해서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오랫동안 주석하고 그 후 변산 월명암, 진산 태고사 등에서 수도하였고, 세간에 많은 이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진묵의 이적을 제대로 소개한 글은 없었는데, 1850년(김기종 서문) 초의(艸衣, 1786~1866)가 편찬한 『진묵조사유적고(震黙祖師遺蹟攷)』가 간행되어 비로소 진묵의 여러 이적이 문서의 형태로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진묵의 이적은 호남을 중심으로 민중에서 널리 유행되었는데, 그래서 강증산과 원불교의 소태산에 의해서도 진묵의 이적의 일부분이 채택되었다.
이 글에서는 한국불교와 대순사상의 공통분모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진묵설화(진묵의 이적)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진묵조사유적고』의 진묵설화와 『전경』의 진묵설화를 비교하고자 한다. 이 두 책에는 진묵설화라는 공통점이 나타나지만, 동시에 차이점도 보이고 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 차이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울러 검토하고자 한다.
진묵에 관한 연구가 학계에서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상적인 측면에 국한해서 살펴보면, 한기두1), 류병덕 외2), 김방룡3), 박윤호4), 차차석5), 원정근6) 등의 연구성과가 있다. 그렇지만,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 나타난 진묵설화의 차이점을 밝힌 연구성과는 김방룡의 「증산교와 진묵도사」 이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7) 여기서는 김방룡의 연구성과를 수용하고 나아가 그 지평을 더 확대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의 진묵설화의 차이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검토하기 위해서 종교학의 대가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의 신화이론을 활용하고자 한다. 물론 신화를 분석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이 두 계열의 진묵설화에 차이점이 생기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엘리아데의 신화이론이 가장 유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엘리아데의 신화이론 가운데서도 신화에는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역사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다는 주장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는 신화에는 사실이 아닌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신화가 의미 없는 것이 아니고, 그 사실이 아닌 부분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신화에서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에는 기억력의 쇠퇴도 하나의 원인이 되지만, 전달자의 가치관이 투영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면, 한국불교의 진묵설화와 대순사상의 진묵설화에서 차이점이 생기는 것도 단순히 기억력의 쇠퇴에 그 원인을 돌릴 것만이 아니고, 한국불교의 가치관과 대순사상의 가치관이 투영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논지의 전개를 위해서 엘리아데의 신화이론을 김현자의 저서에 의거해서 간단히 소개한다. 엘리아데는 설화를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참된 이야기로서 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민담, 전설, 우화 등과 같이 신성성(神聖性)이 없는 이야기다. 참된 이야기로서 신화는 ‘살아있는 신화’이고, 이 ‘살아 있는 신화’란 신적(神的) 행위를 모방하는 것을 의미하고, 신적(神的) 존재가 활동했던 신화적 시간과 공간을 지금 이곳에서 다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신화’는 언제나 종교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숭배의례와 관련되어 있고, 이러할 때 신화는 허구가 아니고 탁월한 진실이 된다.8)
나아가 엘리아데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신화적 원형으로 변형시키는 것 속에서 ‘역사에 대한 저항의식’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루마니아의 민속학자 콘스탄틴 브레일로우(Constantin Brailoiu)는 루마니아의 마라무레슈라는 마을에서 비극적 사랑을 내용으로 한 어떤 발라드(중세말기 유럽에서 형성된 짤막한 이야기 민요체)를 채록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약혼한 한 젊은이가 산의 요정의 마법에 걸렸다. 결혼을 며칠 앞둔 날 질투에 불탄 요정은 이 젊은이를 높은 바위 꼭대기에서 떨어뜨렸다. 다음날 목동들이 나무 아래에서 젊은이의 시체와 모자를 발견하고는 마을로 운반해왔다. 그의 약혼녀는 죽은 약혼자 앞에서 신화적 은유로 가득 찬 장송의 비가를 노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브레일로우는 이 이야기가 언제 일어났는지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았는데, 마을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라고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좀 더 조사해보니까 겨우 4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발라드의 주인공인 약혼자가 아직 살아있었다. 이 약혼자에게 들은 이야기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저녁 젊은 약혼자는 벼랑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곧장 죽지 않았고, 그의 비명이 산을 울릴 정도이어서 마을사람들이 마을로 데려왔다. 마을로 운반된 뒤에 이 젊은이는 죽었다. 장례식 때 그의 약혼녀는 마을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통상적으로 하는 비탄을 반복했을 따름이다. 물론 이 비탄에는 산의 요정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었다는 것이다.
브레일로우가 이 사실을 마을사람에게 알려주자, 그들은 늙은 여인이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큰 슬픔이 그녀의 혼을 거의 빼놓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신화였고, 실제의 이야기는 오히려 곡해된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런 사실에 기초해서 ‘신화적 시간 속으로 주기적으로 복귀하는 것’과 ‘집단 기억 속에 역사성이 없는 점’에는 ‘역사적 시간’ 또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저항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저항’에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가 있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재방식이라고 엘리아데는 주장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바라는 것이 이 신화 속에 투영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신화를 통해서 그 신화를 만든 사람의 사고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9)
Ⅱ. 불교의 진묵설화에 나타난 사상
진묵사상에 관한 연구는 앞에서 소개하였지만, 논의의 전개를 위해서 일부 내용을 다시 소개한다. 김방룡은 진묵의 사상을 ‘① 선(禪)사상, ②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사상, ③ 소요유(逍遙遊) 사상, ④ 석가모니의 화신불, ⑤ 효(孝)사상’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고,10) 원정근은 진묵의 사상을 ① 석가모니의 화신(진묵대사의 진면목, 대승불교, 소승불교 비판), ② 지극한 효심과 우애, ③ 대장부의 참자유로 구분해서 설명한다.11)
필자는 선행연구성과를 일부분 수용하고 그 바탕 위에 논의를 더 진전시키고자 한다. 여기서는 『진묵조사유적고』에 나타난 진묵의 사상을 다음의 4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한다. 그것은 첫째 석가모니의 화신불, 둘째 무애행의 정신, 셋째 선교일치의 정신, 넷째 유불일치의 정신이다. 그러면 순서대로 살펴본다.
『진묵조사유적고』의 서문에서 초의는 “우리나라의 진묵대사는 명종의 시대에 태어났으니 곧 석가모니 부처의 응신(應身: 화신)이다.”라고 하였다.12) 그리고 또 다른 『진묵조사유적고』의 서문에서 김기종(金箕鐘)도 진묵대사가 석가모니 부처의 응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묵대사는 여래의 응신으로서 선(禪)과 교(敎)를 수행하였으니 [봉곡선생과 진묵대사는] 모두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다.”13)
또한 진묵은 사냥꾼들이 소금이 없어서 노루고기의 육회(肉膾)를 먹지 못하는 것을 알고서 시자에게 소금을 보냈는데, 이 일에 감동한 사냥꾼들이 진묵이 사람을 살리는 부처[活人之佛]라고 찬탄하고 있다. 그 자세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진묵이 시자를 불러서 봉서사 남쪽에 있는 부곡(婦谷)으로 소금을 전달하라고 하였다. 시자가 “누구에게 전달합니까?”라고 물었고, [진묵은] “가다보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어찌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고 하였다.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산봉우리를 넘어서 계곡으로 내려갔는데, 사냥꾼 몇 사람이 이제 막 노루고기로 육회(肉膾)를 만들어 놓고서 소금이 생각이 나서 [육회를] 먹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시자가 그들 앞에 소금을 가져다주니, 모두 기뻐하면서 “이것은 진묵[玉老: 一玉의 노장]이 우리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부처가 계곡마다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분(진묵)을 말하는 것이다.”고 말하였다.14)
진묵이 석가모니의 화신불이라는 것은 『진묵조사유적고』의 다른 설화에서도 나타난다. 진묵이 7세에 출가하였는데, 그는 봉서사에서 옹호단(擁護壇)에 향을 피우는 소임을 맡았다. 그러자 밀적신장(密迹神將: 부처를 호위하는 신장)이 일을 주관하는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우리는 부처를 호위하는 신(神)인데, 어떻게 부처에게 예(禮)를 받겠는가 하며, 향을 피우는 소임자를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15) 여기서도 진묵의 석가모니의 화신불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또 청량산(淸凉山) 목부암(木鳧庵)에 있는 16나한이 항상 진묵과 함께 있으면서 시봉하였다는 내용도 있다.16) 나한이 진묵을 시봉하였다는 것은 바로 진묵이 화신불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진묵이 한 사미(沙彌)와 함께 길을 갔는데, 이 사미는 가볍게 물을 건넜는데, 진묵은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 때 진묵은 이 사미가 나한이고, 나한의 장난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서, 나한에게 대도(大道)를 알지 못한다고 꾸짖는 게송을 지었다. 여기서도 나한을 꾸짖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진묵의 나한 그 이상의 존재(화신불)라는 것을 시사한다.17)
또한 대둔사(大芚寺)의 어느 승려가 대원사(大元寺: 大院寺)에 있는 진묵에게 신력(神力)에 의해서 4년 동안 공양을 드렸고, 진묵은 대원사의 여러 승려에게 “대둔사는 7대 동안 액운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18) 또 1622년에 전주부(全州府)의 송광사(松廣寺)와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진묵을 불상을 만드는 데 증명법사로 모셨는데, 진묵은 직접 가지 않고 주장자와 염주를 보내어서 증명법사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무위사의 화주승(化主僧)이 진묵의 당부를 어기자 갑사(甲士: 갑옷을 입은 병사)의 처벌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19) 여기서는 진묵이 신이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불교의 맥락으로 보자면, 이런 신이한 일이 생긴다는 것은 진묵이 부처, 곧 화신불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대원사의 승려가 진묵에게 탁발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진묵은 다른 승려에게 모여서 공양을 하자고 하고, 시자 기춘(奇春)에게 공양하려는 승려의 발우들에 바늘 하나를 집어넣도록 하였다. 진묵은 이 바늘이 국수로 변하여 식사를 하였지만, 다른 승려는 그대로 바늘이어서 공양을 할 수 없었다.20) 이 설화에서는 대원사의 승려들이 진묵이 석가모니의 진신(眞身)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진묵의 설화 속에서는 진묵이 화신불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또는 나한에게 명령을 하거나 꾸짖을 수 있는 존재, 또는 신이한 힘을 가진 존재라고 묘사하고 있다. 진묵이 나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면 진묵이 부처, 곧 화신불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진묵이 신이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불교의 맥락에서 읽는다면 그가 부처, 곧 화신불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애행(無礙行)은 겉으로는 불교계율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불교계율에 부합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애행은 외형의 행위는 계율을 어긋나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의 세계는 계율에 부합하는 것이다. 『진묵조사유적고』에는 진묵의 무애행이 소개되어 있다.
진묵은 소년들이 물고기를 잡아서 만든 고기국을 먹었는데, 이는 불교의 육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긴 것이 된다. 왜냐하면, 육식을 하면 살아 있는 생명을 살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묵은 물가에서 살아있는 물고기를 다시 배설해내는 신통을 나타내었다. 이는 실제로는 살생을 통해서 만든 고기국을 먹은 것이 아니라 그 물고기를 살려내 것이 되었다. 이것이 무애행에 속하는 것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묵이 길을 가던 차에 많은 소년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서[川獵] 계곡에서 고기를 삶고 있었다. 진묵이 끓는 솥을 내려다보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좋은 물고기들이 죄 없이 끓는 솥에 삼기는 고통을 당하는구나!”고 하였다. 한 소년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선사는 물고기국을 먹겠습니까?”고 하니, 진묵이 “나는 잘 먹지.”라고 하였고, 소년이 큰 그릇[沙鑼]을 진묵에게 주고 다 먹도록 하였다. 진묵은 동(銅)으로 된 그릇을 들어서 입에 대고 남기지 않고 한꺼번에 먹었다. 이에 많은 소년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부처는 살생을 경계했는데, 물고기국을 먹다니 어찌 승려다운 처신이겠습니까?”고 하였다. 진묵은 “[물고기를] 죽인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지만, [물고기를] 살리는 것은 나의 몫이다.”고 하고, 마침내 옷을 벗고 물을 등지고 배설하였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빛 비늘의 고기가 항문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 물고기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마치 봄의 물결을 타고 내려가는 것 같았고 [은빛 비늘을] 번쩍이면서 수면위에서 어지럽게 뛰놀았다. 진묵이 고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랑스런 고기들아! 이제부터는 멀리 강과 바다에서 노닐면서 먹이를 탐해서 다시 끓는 솥에 삼기는 고통을 당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소년들이 탄복하고 그물을 거두고 돌아갔다.21)
또 진묵은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고 곡차라고 하면 마셨는데, 이것도 무애행에 포함된다. 무애행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행위의 외형보다 내면의 세계가 중요한 것인데, 진묵은 외형으로는 술을 마시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곡차를 마시는 것이다. 그에 관한 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묵은 오히려 술 마시기를 좋아했는데, 그런데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말하면 마시지 않았다. 어떤 승려가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술을 거르고 있었는데 술향기가 진하게 나서 강렬한 향기[芳烈]가 사람을 취하게 하였다. 진묵이 주장자를 짚고 가서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거르는가?”하니, 그 승려는 “술을 거릅니다.”라고 하였고, 진묵은 조용히 돌아왔다. 조금 뒤에 [진묵은] 다시 와서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거르는가?”하니, 그 승려의 대답은 앞과 같았고, 진묵은 돌아갔다. 잠시 뒤에 [진묵이] 다시 와서 같은 질문을 하니, 그 승려는 끝내 곡차라고 대답하지 않고 또한 술을 내린다고 답하였다. 진묵은 마침내 [곡차를 마실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러자 갑자기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철봉으로 술을 거르는 승려를 때렸다.22)
김기종은 『진묵조사유적고』의 서문에서 진묵이 선(禪)과 교(敎)를 수행했다고 말하고 있다.23) 이러한 내용은 그의 설화에서도 확인된다.
진묵이 월명암(月明庵)에 살았을 때에 『능엄경』을 읽었는데, 마침 능엄삼매(首楞三昧)에 들어가서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 바람 때문에 창문이 닫히었고, 그로 인해 진묵의 손가락에 부딪쳐서 피가 났는데도 진묵은 그것도 모른 채 능엄삼매에 들어갔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선교일치의 정신이 나타난다. 『능엄경(楞嚴經)』은 경전이고 이 경전을 읽는 것은 교(敎)에 속하는 것이고, 이 경전을 읽기는 하지만 글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삼매(능엄삼매)에 들어간 것은 선(禪)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화 속에서 진묵의 선교일치의 정신이 잘 나타난다. 이 내용에 대해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묵이 일찍이 변산(邊山)의 월명암(月明庵)에서 살았다. 승려들이 모두 가을의 탁발을 위해서 나갔고 다만 진묵이 시자와 함께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자에게 기일(忌日)이 있기 때문에 [시자는] 속가로 가야만 하였다. [시자는] 우선 재를 지내는 음식[齋供]을 마련해서 탁자 위에 두고 [진묵에게] 아뢰기를 “공양드리는 물품[供具]은 여기에 있으니 때가 되면 스스로 재를 올리세요.”라고 하였다. 그 때 진묵은 방장 안에서 창문을 열고 앉아있었다. [진묵은] 손을 문지방에 두고서 『능엄경』을 읽었다. 시자가 다음 날 암자로 돌아오니 진묵은 어제의 모습 그대로 앉아있었다. 바람이 불어 문짝이 손가락에 부딪쳐서 피가 났는데도 [진묵은] 손을 치료할 것을 잊어버리고 경전을 읽는 것이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탁자 위의 재를 지내는 음식도 이전처럼 있었고 재를 드리지 않았다. 시자는 절을 드리고 밤 동안의 안부를 물었는데, 진묵은 “너는 제사에 참석하지 않고 빨리 왔구나!”라고 말하였다. [이는 진묵이] 능엄삼매(首楞三昧)에 들어가서 밤이 이미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24)
앞에서 진묵이 능엄삼매에 들어서 하룻밤이 지나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말했는데, 다음의 설화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다. 그것은 승려들이 탁발을 하기 위해 한 달 이상 절을 비웠는데, 그 기간 동안에 진묵은 선정에 들어서 얼굴에는 거미줄이 쳐있었고 무릎사이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묵이 일찍이 상운암(上雲庵)에 주석하였다. 빠른 걸음을 하는 승려들이 식량을 탁발하기 위해 멀리 나갔다가 한 달이 지나서 돌아왔다. 진묵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쳐있었고 무릎 사이에는 먼지가 쌓여있었다. 진묵을 위해서 먼지를 털고 거미줄을 제거하고서 이름을 말하면서 절을 드렸다. 진묵이 “그대들이 돌아오는 것이 어찌 이렇게 빠른가?”라고 하였다.25)
그리고 진묵은 입적할 때에 선문답의 내용을 주고받았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석가모니 부처의 그림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곧 부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이 단순히 부처의 화신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이 곧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는 조동종의 동산양개(洞山良介, 807~869)가 스승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과 나눈 선문답 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다. 동산이 운암과 작별하면서 묻기를 “스님께서 입적한 뒤에는 사람들이 나에게 ‘그대는 스승의 진면목을 아직도 생각해낼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답해야 합니까?”하니 운암이 한 동안 잠자코 있다가 “바로 이것이라네.”라고 대답하였다. 동산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바로 이것이다’라는 스승의 말을 참구하였다. 뒤에 동산은 냇물을 건너다가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이것’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26) 동산은 수면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스승의 진면목이자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은 것이고, 진묵은 그것을 석가모니의 진면목이자 자신의 진면목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시자는 그 그림자는 진묵의 것이라고 대답하였고, 그러자 진묵은 그대는 나의 거짓된 몸을 보고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眞身)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서는 이 육체 그대로 부처의 진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시자는 그러한 안목이 없어서 보이는 현상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진묵이 입적할 때의 내용을 더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묵이 어느 날 목욕하고 머리를 깎고[淨髮], 옷을 갈아입고 주장자를 끌며 문을 나섰다. 계곡을 따라 가다가 주장자를 세우고 물을 마주보면서 서서 손으로 물속의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의 그림자이다.”고 하니, 시자는 “이것은 화상의 그림자입니다.”고 하였고, 진묵은 “너는 다만 나의 거짓된 몸[假]을 알 뿐이고 석가모니의 진신[眞]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주장자를 메고 방에 들어가서 다리를 포개서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제자를 불러놓고 말하기를 “나는 입적하고자 한다. 너희들이 묻고 싶은 대로 물어라.”고 하니, 제자는 “화상이 입적한 지 백 년 뒤에는 종승(宗乘)은 누구를 계승한다고 하겠습니까?”고 물었고, 진묵은 말없이 침묵하였다가 “어떤 종승(宗乘)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였다. 제자가 다시 가르침을 달라고 청을 하니, 진묵은 마지못해서 말하기를 “명리를 추구하는 승려[名利僧]이긴 하지만 청허휴정(淸虛休靜)의 계보에 속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편안하게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72세요 법랍은 52세이니 곧 계유년(1632) 10월 28일이다.27)
『진묵조사유적고서』에서 김기종은 진묵이 불교의 승려이지만, 유교의 행실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묵이 봉곡선생과 교류하였고(이 부분은 뒤에 서술할 예정임), 진묵이 입적했을 때 봉곡선생이 애도하였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다.
봉곡선생이 [진묵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승려는 이름이 불교이지만 행실은 유교였다.”고 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다음은 김기종의 말이다] 오호라! 승려 가운데 유교의 행을 갖춘 사람이 거의 드물지만, 진묵은 이것[불교와 유교]을 겸하였다. 그러므로 진묵이 생존했을 때에는 [봉곡선생이] 함께 교류하였고, 진묵이 입적했을 때에는 [봉곡선생이] 그를 위해서 [앞에 소개한 것처럼] 애도하였으니, 봉곡선생의 한 마디 말의 무거움은 오히려 진묵의 명성을 길게 남기는 것이구나.28)
진묵은 출가하였지만, 자신이 머무는 절 근처에 노모를 모시고 봉양하였고, 어느 여름철에 노모가 모기로 인해 고생을 하자 산신령에게 부탁을 해서 모기를 내쫓았다고 한다. 또한 진묵이 어머니의 장례 때에 지은 제문에는 간절한 효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효심은 진묵이 출가한 승려이지만, 유교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가지고 실천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한다.
진묵은 왜막촌(倭幕村)에서 노모를 봉양하면서 자신은 왜막촌 뒤에 있는 일출암(日出庵)에 머물렀다. 여름철에 [진묵의]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고생을 하자, 진묵은 산신령에게 부탁을 해서 모기를 내쫓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 한 마을(왜막촌)에서는 모기로 인한 고통이 없다고 한다. [진묵의] 어머니가 돌아가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祭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胎)중에서 10개월 있었던 은혜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무릎 아래에서 3년 동안 길러준 것을 아직 잊을 수 없도다! 만 세 위에 다시 만 세를 추가해도 자식의 마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거늘, 백 년의 인생에서 백 년조차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어머니의 수명이 어찌 그리도 짧습니까? 하나의 표주박으로 길 위에서 탁발하는 이 승려는 이미 말할 것도 없고, 비녀 꽂고 규중(閨中)에서 아직 결혼하지 못한 어린 여동생이 어찌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제단(祭壇)에 오르고 그리고 제단에 내려와서 [제사를] 마치고는 승려들은 각자의 방으로 찾아가고, 앞산과 뒷산은 첩첩히 쌓여있으니, [어머니의] 혼백은 어느 곳에 돌아가렵니까? 오호라 슬프구나!” 그리고 나서 [진묵은] 만경(萬頃)의 북쪽에 있는 유앙산(維仰山: 일명 祖仰山 또는 行舟山)29)에 돌아가서 장례를 치렀는데, [그 산소를] 청소하고 [술을] 붓는 사람은 번번이 농사가 잘되었다. 그래서 근처의 마음사람과 먼 곳의 마을사람이 뒤질 것을 두려워하며 앞을 다투어 [산소에 예를 드렸고]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제단의 영역[封域]이 분명하고, 향불[香火]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30)
Ⅲ. 대순사상에 나타난 진묵설화의 관점과 불교의 진묵설화와의 비교
앞에서 『진묵조사유적고』의 진묵설화에 나타난 사상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화신불, 무애행, 선교일치의 정신, 유불일치의 정신으로 정리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묵은 화신불, 곧 부처가 세상에 몸을 나타낸 존재라는 것이다. 대순사상에서는 진묵설화는 천지공사와 해원상생에 활용된다. 이것이 『진묵조사유적고』의 진묵설화의 사상적 내용과 가장 큰 다른 점이다.
이러한 다른 점은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서 같은 주제의 진묵설화 속에서 다른 점이 등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김봉곡과 진묵이 서로 교류하는 내용이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 소개되는데,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지만, 『전경』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나쁜 것으로 묘사된다.
또 전주에 사는 한 아전이 진묵에게 도움을 청해서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났다는 내용이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 소개되어 있는데,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진묵이 나한에게 명령을 하는 존재 곧 화신불이라는 점이 나타나는 데 비해서, 『전경』에서는 북두칠성을 감추는 진묵의 신이한 능력이 강조되고, 진묵이 화신불이라고 묘사되지 않는다.
『전경』에서는 이 화신불의 이미지를 수용해서 진묵을 불교의 종장(宗長)으로 삼는다. 이는 진묵이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 어느 날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 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震黙)을 불교(佛敎)의 종장(宗長)으로, 주 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
또한 『전경』의 다른 대목에서도 진묵이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선도, 불교, 유교의 법술에 차이점이 있고, 선도가 제일 뛰어나고 그 다음 불교, 마지막이 유교라고 말하고 있다.
지나간 임진란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에 불과하고, 진묵(震默)이 당하였으면 석 달이 넘지 않고, 송 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 달에 평란하였으리라. 이것은 다만 선ㆍ불ㆍ유의 법술이 다른 까닭이니라. 옛적에는 판이 좁고 일이 간단하므로 한 가지만 써도 능히 광란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되 오늘날은 동서가 교류하여 판이 넓어지고 일이 복잡하여져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혼란을 능히 바로잡지 못하리라.
그리고 『전경』에서 진묵의 설화는 천지공사와 해원상생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앞에 소개한 『진묵조사유적고』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진묵은 김봉곡에 의해 몸을 잃게 되어 죽은 뒤에 원(冤)을 품었는데, 강증산은 이 진묵을 해원시키고 선경(仙境)의 건설, 곧 천지공사에 활용한다고 말한다. 이 내용에 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진묵(震默)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 봉곡(金鳳谷)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冤)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이제 그를 해원시켜 고국(故國)으로 데려와서 선경(仙境) 건설에 역사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31)
그리고 『전경』의 다른 대목에서 강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했는데,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아무도 몰랐는데, 진묵을 초혼(招魂)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32) 만약 진묵을 초혼한 것이라면, 여기서도 천지공사를 하는 데 진묵이 활용된 것이다.
『전경』과 『진묵조사유적고』에 김봉곡(金鳳谷, 1575~1661)33)과 진묵이 서로 교류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개 비슷하지만, 『전경』과 『진묵조사유적고』에서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전경』에서는 김봉곡이 원래부터 시기심이 많았고 그래서 그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진묵에 대해 시기심을 품었다는 것에 비해서,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김봉곡과 진묵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면, 먼저 『전경』의 내용부터 살펴본다.
상제께서 전주 봉서산(全州鳳棲山) 밑에 계실 때 종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니라. 김 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강한지라. 진묵(震默)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 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니라.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이고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불법을 크게 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사람을 보냈도다. 그 하인이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 한 권씩을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가니라. 그 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는지라. 그 말을 듣고 진묵이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는도다. 진묵은 내가 외울 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 편을 모두 읽는도다. 그것이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더 시기하였도다.34)
『진묵조사유적고』에도 앞에 언급한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렇지만 앞에 소개한 『전경』의 내용에서는 김봉곡의 시기심이 강조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진묵의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진묵조사유적고』에 따르면 진묵은 유교(『강목』35))의 내용도 달통한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묵은] 만년에는 항상 봉서사(鳳棲寺)에 머물렀다.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봉곡(鳳谷)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의 유현(儒賢: 경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이었다. [진묵은] 봉곡선생에게 『강목』을 빌렸는데 바랑에 넣고 짊어진 채로 갔다. [이 때] 봉곡선생은 사람을 시켜 [진묵의] 뒤를 따라가서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진묵은] 걸어가면서 [책을] 펴서 읽었는데, [『강목』의] 한 권을 손으로 꺼내서 다 읽고는 땅에 버리고 다시 [『강목』의] 한 권을 꺼내서 [다 읽고는] 땅에 버렸다. 이와 같이 해서 봉서사의 문에 이르렀을 때에는 [『강목』의 책을] 땅에 모두 버렸는데, [진묵은] 돌아보지도 않고 [봉서사로] 들어갔다. 다른 날에 봉곡선생이 진묵에게 “책을 빌려서 땅에 버린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진묵은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을 잊어버리는 것이요.”라고 답하였다. 봉곡선생이 [『강목』의] 편(篇)마다 어려운 대목을 거론하였는데, [진묵은] 환하게 모두 알고 있었다.36)
그런데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전경』의 내용과는 달리 김봉곡과 진묵의 관계가 나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이는 앞의 2장 4절 유불일치의 정신에서 언급하였듯이, 김봉곡은 진묵이 입적하였을 때 애도하였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37) 또한 김봉곡은 진묵에게 음식을 보내주었고, 진묵은 김봉곡의 집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진묵의 이미지를 유교의 내용을 통달하고 또한 당시의 뛰어난 유생(김봉곡)에게 대접을 받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봉곡 선생이 어린 여종에게 진묵대사에게 반찬을 보내도록 하였는데, 중간쯤에서 [어린 여종이] 진묵이 허공을 바라보면서 배회하다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여종은 진묵의 앞에서 심부름을 받은 내용을 알렸다. 진묵이 “너는 아이를 낳고자 하는가?”라고 물었고, 여종은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진묵이 “그대가 복이 박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너는 돌아가서 봉곡선생에게 내가 갈 것이라고 말하라.”고 말하였다. 여종이 돌아가서 [그 말을] 전했다. 봉곡선생이 [진묵을] 기다렸는데 이미 도착할 시간인데도 아주 늦게 도착한 것을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어찌해서 오는 것이 늦었습니까?” 진묵이 “우연히 한 조각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는데, [이것이] 서쪽 끝에서 흘러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장 만나기 어려운 기운이어서 [그 기운에 적합한 사람에게] 넣어주려고 하였는데, 그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기운이] 흩어져서 상서롭지 못한 곳으로 흘러갈 것을 걱정해서 허공 바깥으로 멀리 몰아내었습니다. 그래서 오는 것이 자연히 늦어졌을 따름입니다.”38)
또한 진묵의 대자유의 경지를 노래한 게송(시)이 전하고 있는데, 이것도 김봉곡과 진묵이 교류할 때 나온 게송일 것이라고 초의는 추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김봉곡과 진묵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진묵이 일찍이 게송을 읊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으며, 달을 촛불로 삼고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크게 취하여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니, 긴 소매에 곤륜산이 걸릴까 하노라.” 살피건대(초의의 주석) 진묵과 봉곡선생이 시(詩)의 운(韻)을 맞추어 시를 지은 것이 많다고 하는데, 세월이 점점 오래되면서 [그 시들이] 흩어져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39)
그렇지만 『전경』에서는 김봉곡과 진묵의 관계는 좋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김봉곡은 진묵이 시해(尸解: 육체에 혼백이 빠져나온 상태)한 몸을 태워 없애서 진묵이 자신의 몸에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그로 인해 진묵은 김봉곡의 후손이 호미를 들고 일을 해야 할 것이라는 일종의 저주를 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후에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八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써 인도국(印度國)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곧 입적(入寂)하니라.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 중임을 알리니라. 봉곡이 그럼 방에 찾을 것이 있으니 말하면서 방문을 열려는 것을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도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하나니라」고 말하면서 마당에 나뭇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라. 상좌가 울면서 말렸으되 봉곡은 도리어 꾸짖으며 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태우느니라.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 상좌가 자기 스님의 소리를 듣고 울기에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 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끝까지 그런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 갔도다.40)
이상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서는 전주에 사는 한 아전이 진묵에게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부탁해서 그 일을 해결했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개 비슷하지만, 『전경』과 『진묵조사유적고』에서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진묵이 나한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이고 이는 진묵이 부처의 화신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것인 데 비해서, 『전경』에서는 북두칠성을 감추는 진묵의 신이한 힘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진묵조사유적고』의 설화에는 진묵이 부처의 화신이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그래서 진묵은 자신이 직접 그 아전의 일을 돕지 않고 나한에게 명령을 내렸고, 나한은 진묵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부에 숨어있는 아전이 있었는데, [이 아전이] 평소에 진묵과 좋은 관계였다. [이 아전은] 수백 량의 관물을 사사롭게 소비하고 장차 도망하고자 하였다. [그는] 진묵에게 와서 말씀을 드렸는데, 진묵은 “관물을 소비한 것으로 인해 도망하는 것이 어찌 남아의 일이겠는가? 다만 집에 돌아가서 몇 말의 쌀을 준비하고 다시 이 절에 와서 나한에게 공양하면 장차 좋은 도리가 있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아전이 [집으로] 가서 [진묵의] 가르침대로 [쌀을 준비해서] 왔다. 진묵은 시자에게 [아전이 가지고 온 쌀로] 밥을 만들어서 나한에게 공양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나서 [진묵은] 아전에게 “전주부 가운데에 혹시 비어있는 관직 자리가 있는가?”라고 물었고, [아전이] “감옥의 형리(刑吏) 자리가 비어있는데, [이 자리는] 너무 [수입이] 박하고 재미도 없습니다.”고 답하였다. 진묵은 “재미없다고 말하지 말라. 빨리 가서 [형리의 아전을] 맡겠다고 자청하라. 그러나 30일을 넘지 않기를 바라네.”고 하였다. 아전이 돌아가자 진묵은 주장자를 가지고 나한당에 들어가서 나한의 머리를 순서대로 3번 때리고서 말하기를 “모 아전의 일을 잘 돕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 밤에 나한이 그 아전의 꿈에 나타나서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가 구하는 것이 있으면 마땅히 우리(나한)에게 곧장 와서 말할 것이지 어찌 진묵대사에게 부탁해서 우리를 수고롭게 하는가? 너의 소행으로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 옳은 것이지만 진묵대사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너의 일을 봐주기는 하지만 후에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아전이 [나한의] 도움이 있을 줄 알고 감옥의 관리가 될 것을 자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감옥의 송사가 많이 생겨서 죄인이 감옥에 가득 차서 [감옥의 관리가 된지] 30일 안에 부족한 관물을 다 채우게 되어 다른 관리에게 자리(감옥의 관리)를 양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 감옥의 관리는 뇌물을 요구한 죄로 체포되었다.41)
그에 비해, 『전경』에서는 앞에 소개한 것과 같은 주제의 내용을 전하고 있지만, 강조하는 점이 다르다. 『전경』에서는 진묵이 북두칠성을 7일 만에 모두 숨겨서 나라에서 사면령을 내리게 했다는 신이한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진묵이 나한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 곧 부처의 화신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전경』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 형렬은 상제를 모시고 있던 어느 날 상제께 진묵(震黙)의 옛일을 아뢰었도다. 「전주부중(全州府中)에 한 가난한 아전이 진묵과 친한 사이로서 하루는 진묵에게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을 물으니 진묵이 사옥소리(司獄小吏)가 되라고 일러주니 아전은 이는 적은 직책이라 얻기가 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으나 그 후에 아전은 옥리가 되어 당시에 갇힌 관내의 부호들을 극력으로 보살펴주었나이다. 그들은 크게 감동하여 출옥한 후에 옥리에게 물자로써 보답하였다 하나이다. 그리고 진묵은 밤마다 북두칠성을 하나씩 그 빛을 가두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여 七일 만에 모두 숨겨버렸다 하나이다. 태사관(太史官)이 이 변은 하늘이 재앙을 내리심이니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시어 옥문을 열고 천의에 순종하사이다 하고 조정에 아뢰오니 조정은 그것이 옳음을 알고 대사령을 내렸다 하나이다.」
이 말을 상제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그러하였으리라. 내가 이를 본받아 한 달 동안 칠성을 숨겨서 세상 사람들의 발견을 시험하리라」 하시고 그날 밤부터 한 달 동안 칠성을 다 숨기시니 세상에서 칠성을 발견하는 자가 없었도다.42)
이상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묵조사유적고』의 내용 | 진묵은 나한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이다. 이는 진묵이 부처의 화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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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의 내용 | 북두칠성을 감추는 진묵의 신이한 능력이 강조된다. 나한에게 명령을 내리는 측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
Ⅳ. 결론
이 글에서는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의 진묵설화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그 내용을 차이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2장에서는 『진묵조사유적고』에 나타난 진묵의 사상을 검토하였다. 선행연구성과를 일부 수용하고 그 위에 필자의 견해를 새롭게 추가한다. 그래서 진묵의 사상은 다음의 4가지 항목으로 구분한다. 첫째, 석가모니 화신불이다. 『진묵조사유적고』의 서문에서 초의는 진묵은 석가모니의 응신(화신)이라고 하였고, 이러한 내용은 진묵이 나한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또는 나한을 꾸짖거나 하는 내용, 또는 진묵의 신이한 이적에서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추론된다.
둘째, 무애행의 정신이다. 무애행은 외형적으로는 계율을 어긴 것처럼 보이는 행위를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계율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진묵은 소년들이 권하는 고깃국을 먹었는데, 이는 살생의 계율을 어긴 것이다. 왜냐하면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살생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묵은 육식을 하였지만, 곧 바로 항문으로 살아있는 물고기를 배설하였다. 이는 겉으로는 육식을 해서 살생을 방조한 셈이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물고기를 살려낸 것이고, 그래서 무애행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진묵이 술을 마신 설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셋째, 선교일치의 정신이다. 『진묵조사유적고』의 서문에서 김기종은 진묵이 선(禪)과 교(敎)를 수행했다고 말한다. 이는 진묵이 『능엄경』을 읽으면서 능엄삼매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능엄경』을 읽는 것은 경전을 읽는 것이므로 교(敎)에 속하고, 그렇지만 삼매에 들어갔으므로 이것은 선(禪)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묵의 선사상은 진묵이 자신의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석가모니의 그림자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이 화신불이라는 것을 말했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자신이 그대로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넷째, 유불일치의 정신이다. 김기종은 『진묵조사유적고』의 서문에서 진묵이 불교의 승려이지만 유교의 행실을 갖추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는 진묵이 자신이 머무는 절 근처에 노모를 봉양하고 노모를 위해서 산신령에게 부탁해서 모기를 몰아내었다는 설화에서 확인된다. 이 설화에서 진묵의 효심(孝心)을 확인할 수 있고, 이 효심은 진묵이 그의 어머니 장례 때에 지은 제문(祭文)에서 잘 나타난다.
3장에서는 『전경』에 나타난 진묵설화의 관점을 살펴보고,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서 공통된 주제의 진묵설화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우선, 『전경』의 진묵설화에서는 진묵을 천지공사와 해원상생에 활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대순사상의 진묵설화에 대한 관점이다. 앞에서 『진묵조사유적고』에 나타난 진묵의 사상을 4가지로 정리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묵이 화신불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전경』에 수용되어 진묵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종장(宗長)으로 자리매김 된다.
이러한 『전경』의 관점은 동일한 주제의 진묵설화라도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근거가 된다. 진묵과 김봉곡은 서로 교류하였는데,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진묵과 김봉곡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김봉곡은 진묵이 입적하였을 때 애도하였고, 진묵과 김봉곡이 서로 시를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에 비해, 『전경』에서는 김봉곡이 진묵을 시기하였고, 그래서 진묵의 육체를 불태워서 결국 진묵을 죽게 만든다. 『전경』에서는 이로 인해 진묵이 한(恨)을 품었고, 강증산은 진묵의 한(恨)을 풀어주고 선경(仙境)을 건설하는 데 참여하도록 한다.
또 전주에 사는 한 아전이 진묵에게 부탁해서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난 내용이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 소개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강조하는 점이 다르다.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진묵이 나한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이고 이는 진묵이 화신불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에 비해, 『전경』에서는 북두칠성을 감추는 진묵의 신이한 능력이 강조되고 있고, 강증산은 진묵의 신이한 능력을 넘어서는 더 큰 신이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전경』에서는 진묵보다 강증산이 더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서 진묵의 설화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또한 이러한 차이점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엘리아데의 신화이론을 빌리고자 한다. 엘리아데는 신화를 ‘살아있는 신화’와 ‘신성성이 없는 신화’로 구분하고, ‘살아있는 신화’에 의미를 둔다. 또 그는 신화에는 ‘역사에 저항하는 의식’이 있다고 지적한다. 신화에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단순히 민간기억의 감퇴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신화의 전달자의 가치관이 투영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아데의 신화이론에 따르면, 신화는 신화를 전달하는 사람의 희망사항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엘리아데 신화이론을 통해서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서 진묵설화의 차이점이 생기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계의 『진묵조사유적고』에서는 불교의 가치관(석가모니 화신불, 무애행의 정신, 선교일치의 정신, 유불일치의 정신)이 투영된 진묵설화가 전승되었고, 대순사상의 『전경』에서는 대순사상의 가치관(천지공사와 해원상생)이 반영된 진묵설화가 전승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묵설화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동시에 강조하고자 내용에서 서로 차이점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글에서는 불교와 대순사상에는 진묵설화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또한 동시에 그 진묵설화의 내용에 차이점이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고, 그를 통해서 거시적으로 볼 때 불교와 대순사상에 진묵설화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미시적으로 볼 때, 같은 주제내용의 진묵설화에도 차이점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