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대순사상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방법론(methodology)1)이 갖추어져야 한다. 신생 학문의 경우 독자적인 연구방법이 부재하여 인접학문의 방법론을 빌어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키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성학문의 안정된 체계를 사용할 때 얻을 수 있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타학문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과 맥락이 다른 만큼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틀에 억지로 끼워 넣는 환원주의적 오류로 본연의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부정적 측면도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대순사상 자체의 연구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시도된다. 그리고 그 분야는 종교관에 천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순사상 연구의 방법론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삼교(三敎)와 삼도(三道)를 바라보는 증산 상제의 시각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2) 증산 상제가 남긴 유일한 친필 경전인 『현무경』에서 선ㆍ불ㆍ유를 언급하고 다시 관왕3)이라고 하는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만일 관왕이라는 것이 모든 종교를 회통할 수 있는 경지라면,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 앞에 놓인 선ㆍ불ㆍ유를 무엇으로 보느냐가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다시 말해 선ㆍ불ㆍ유를 제도화되고 물상화된 종교4)들로 보는지 아니면 그것들이 발생할 수 있는 원리적 측면으로 보는지의 여부가 관건이 된다. 즉, ‘삼교’관왕(三敎冠旺)이라고 하면 세 개의 종교만을 회통하는 논리이며, ‘삼도’관왕(三道冠旺)이라고 하면 세 개의 도(道) 혹은 원리로 수렴할 수 있는 수많은 종교들을 회통하는 논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또 하나의 문제제기는 삼도관왕의 차원에서 불도적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다. 이것은 증산 상제가 기성의 종교전통들을 단순히 혼합했는지 아니면 스스로의 기준으로 그것을 재정립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부여했는지 여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일 불도와 관련된 증산 상제의 언설이 기성의 종교전통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면 그의 사상이 ─ 그리고 그에게서 비롯된 한국의 자생종교들이 ─ 종교 혼합주의(syncretism)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견해를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새로운 안목과 창조적 융합의 노력이 엿보인다면 그러한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관왕이라는 경지를 가설로 설정하는 데 있다. 선ㆍ불ㆍ유에 대한 증산 상제의 시각에서 관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가 구체적인 성과를 보일 때, 대순사상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5) 또 불교학의 범위는 매우 넓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된 세부적 비교 연구에도 한계가 있다. 물론 그동안 진행되어 온 연구 성과도 참조할 수 있다.6) 그러나 그간의 연구는 대순사상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를 가려내는 데 역점을 두었고 대순사상의 가치를 밝히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 연구는 불교학의 관점보다는 대순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 차원에서 접근하므로 대순사상의 관점에서 본 종교로서의 불교와 종교적 원리로서의 불도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대순사상과 삼도 그리고 불도
대순사상에는 유불선에 대한 중층적 개념이 녹아있다. 유불선을 제도화되고 물상화된 실체로 여기기도 하고, 어떤 원리나 형이상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 맥락들도 등장한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근대라는 시기는 동양전통의 ‘도(道)’와 ‘교(敎)’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 수입된 ‘종교(Religion)’까지 가세하여 종교적 현상들을 둘러싸고 전통 개념과 신생 개념이 뒤섞여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유불선을 말하는 ‘삼도(三道)’는 한국의 근대 시기 민족 종교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는 술어로 그 이전 시대에는 ‘삼도’라는 표현보다는 ‘삼교’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왜 ‘삼도’라는 표현이 19세기에 비롯되어 한국 신종교를 중심으로 출현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 원리적인 맥락의 유불선은 ‘도’ 혹은 ‘삼도’로, 제도화된 유불선은 ‘교’ 혹은 ‘삼교’로 가정하기로 하자.7)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의 몇 가지가 있다.
중국 전통철학에서 도는 하나의 핵심 범주이다.8) 시대를 풍미한 여러 학파들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도라는 범주에 부여하였다. 장립문은 선진시대부터 진한ㆍ수당ㆍ송원 그리고 명청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철학사에 나타난 이러한 도의 의미를 고찰하고 그것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9) 요컨대 그들은 본체, 본질, 법칙, 과정 그리고 사회윤리나 도덕규범 등을 최종적으로 도에 귀결시켰다.
류승국은 공자의 도(道)를 밝히면서 그것을 원리적인 성격의 도로 파악한다. 종래의 도는 구체적인 일상용어로 사용하였던 데 비해 공자는 원리적인 의미로 새롭게 제창했다는 것이다.10) 그 근거로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를 든다. ‘일’은 무상의 원리로서 만물을 관지하면서도 만물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며, 인과의 법칙이 아니라 인과의 법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경험적 자아에 내재하면서도 생리적ㆍ심리적인 인간이 아니요, 인간이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는 근거인 ‘천성(天性)’을 가리킨다는 것이다.11) 따라서 이때의 ‘천’은 형이상자이며, 만물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리이자 원형을 의미한다 하겠다.
장석만은 개항기 한국사회가 일본을 통해 유입된 종교(religion)개념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 개념으로서의 교와 도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교는 ‘가르침’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특정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12) 도는 ‘길’ 혹은 ‘삶의 방식’이라는 뜻으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군자 및 성인이 되기 위한 방법’ 혹은 ‘무위자연의 삶의 방식’ 혹은 ‘불로장생의 방법’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도 개념과 앞서의 교 개념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내용의 서로 다른 측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도 개념에 보다 높은 가치가 부여되고 있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13)
조성환은 ‘교’라는 중국적 지(知)의 양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착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한대(漢代)에 유가(儒家)의 사상이 유교로 국교화가 되고, 동진시대에 불도가 ‘교’로 채택되어 불교가 되며, 5세기 천사도가 교로 채택되어 도교가 되면서 삼교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제자백가 시대의 여러 사상 중 하나였던 유가는 맹자와 자사가 공자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순자가 성인의 가르침에 의한 백성들의 도덕적 교화라는 ‘교학(敎學)사상’의 골격을 세운 뒤 이것이 한대(漢代)의 제도와 결합되어 유교의 국교화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교’는 성인지교(聖人之敎)로서 국가가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공식적인 가르침(teaching)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14)
전통적인 ‘교’의 개념은 19세기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메이지 시대(1869~1912) 일본은 서구 유럽의 ‘Religion’에 대한 번역어로 ‘종교’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사용한 ‘종교’의 개념과 근대 한국의 지식인들이 사용한 ‘종교’의 개념은 질적으로 다르다. 박광수는 1860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약 100여 년간을 근대국가체계를 수립하려는 일본 정부와 이에 저항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 운동을 전개한 한국 민중이 ‘국가신도’와 ‘민중종교’라는 상반된 종교유형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대립한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15)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일본은 천황 중심의 군국제로 나아가게 되고 이러한 천황제 지배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의 전통종교인 신도를 국교화하여 국가신도를 탄생시킨다. 여기서 신도는 전통적인 ‘교’의 위치에 서고, 불교와 기독교는 ‘Religion’으로서의 ‘종교’ 위치에 서며, 국가 체제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종교들은 ‘유사종교’의 범주에 넣어 단속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즉 서구적 ‘종교’의 개념이 온전히 쓰이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변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조선에서는 근대적인 종교 개념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능화(1869~1943)는 일본 정부의 ‘공인종교-유사종교’의 범주를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종교의 동등한 가치를 인정하였다.16) 그는 『백교회통』(1912)의 머리말에서 “세상에 묵직한 종교만도 수십 종을 헤아릴 정도가 되어 있으며 또 한국인이 만든 종교도 적지 않으니,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이 한 가지 씩의 교를 만나게 될 날도 있을 것이다.”17)라고 하면서, 도교, 불교, 신선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교, 바라문교, 태극교, 대종교(大倧敎), 대종교(大宗敎) 그리고 천도교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할 때 당시 한국에서는 ‘교’가 ‘종교(Religion)’로 전이되면서 더 이상 삼교가 아닌 종교 일반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그 시기의 한국의 종교가들은 (삼교가 아닌) 삼도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수운 최제우(1824~1864)는 동학에 대해 ‘이 도는 유ㆍ불ㆍ선 삼도를 겸하여 나온 것이다’18)라고 하였다. 이것은 수운이 최시형(1827~1898)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로, ‘최선생 문집 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 기록된 말이다. 이 책은 정확하게 누가 집필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해월의 지도 아래 편찬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일부 김항(1826~1898)은 다음과 같은 ‘무위시(无位詩)’를 지어서 ‘삼도’를 밝혔다.
道乃分三理自然
도가 셋으로 나누어짐은 이치상 자연스러운 것이니
斯儒斯佛又斯仙
이에서 유가 나오고 불이 나오며 또 선이 나오는구나
誰識一夫眞蹈此
누가 알겠는가 일부가 진정 이 셋을 다 겪은 줄을
无人則守有人傳
사람이 없으면 지킬 것이요 있으면 전해주리라19)
여기서 ‘도’는 유ㆍ불ㆍ선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무위(无位)’의 위치에 있는 근원처를 말한다.20) 유ㆍ불ㆍ선을 삼도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도에서 셋으로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삼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증산 상제는 선ㆍ불ㆍ유가 천지에서 기인함을 밝히고 있는데,21) 여기서 천지는 형이하의 물리적 우주가 아닌 형이상의 궁극적 실재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천지는 ‘천지대도(天地大道)’22)나 ‘천도(天道)’23) 혹은 ‘대도(大道)’24)의 다른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로되 도가 있고(曰有道) 도에는 덕이 있으며 덕에는 변화가 있고 변화에서 육성함이 있고 육성함에는 창생이 있고 창생은 억조에 이르며 수많은 창생은 추대를 원하는 이가 있고 그러한 사람으로 요임금이 있으니 이것으로 기초 동량은 종결된다.25)
증산 상제는 ‘도’를 천하의 기초가 되는 동량을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항목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때의 ‘도’는 형이하의 개념이라기보다 형이상적인 최상위 개념으로 봐야한다. 또 증산 상제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와 서도가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26) 각각의 도는 문화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즉 도(道)는 하나의 단일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 문화의 바탕이 된 서도 역시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등이 있으므로 특정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조정산(1895~1958) 도주는 「각도문(覺道文)」에서 유ㆍ불ㆍ선을 ‘대도(大道)’라 명명한 바 있다.27)
19세기는 ‘종교’ 발견의 시대였다. 서양은 제국주의를 통해 동양을 비롯한 비서구의 여러 종교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러한 현실은 막스 뮐러(1823~1900)로 하여금 ‘종교학(Science of religion)’이라는 학문을 태동케 했다. 그런데 다양한 종교를 바라보고 그것을 이해해 보겠다는 발상은 과연 서양에 국한된 일이었을까? 동아시아 역시 서양을 만났고 다종교와 마주쳤는데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나름의 시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능화가 백교의 회통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견지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여러 종교를 이해하고 회통하기 위한 시도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회통 주장 못지않게 이전에 한국의 종교가들 역시 꾸준하게 이러한 시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증산 상제는 선ㆍ불ㆍ유를 각각 포태, 양생, 욕대와 대응시키고 그 다음 관왕을 배치하여 그것을 회통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만일 관왕이라는 것이 선ㆍ불ㆍ유를 회통할 수 있는 경지라면, 앞에 놓인 선ㆍ불ㆍ유를 동양 전통의 ‘교’나 서양의 ‘Religion’으로서의 개별종교로 봐야할 것인가? 만일 이것이 개별종교를 의미한다면 관왕이라는 경지는 단순히 동양 전통의 삼교만을 회통하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하지만 백교의 시대에 삼교만을 회통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에 걸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때의 선ㆍ불ㆍ유는 동양전통의 삼교가 아닌 새로운 차원 즉, 서양에서의 종교학의 태동과 걸맞은 동양적 종교학으로 정초할 수 있는 ‘삼도론(三道論)’의 출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삼도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전통을 발생시킬 수 있는 종교적 원형이라 볼 수 있다.28) 따라서 삼도는 삼교가 포함됨은 물론 백교가 발화될 수 있는 문화의 정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삼교는 동아시아적 한계가 있는 용어이다. 19세기 이후로는 동ㆍ서양이 만나서 문화적 충돌이 일어나는 시대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전통들을 모두 통틀어 봐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종교를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이로써 모든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삼도의 개념이 요청된다. 즉 삼도론은 동ㆍ서양의 제 종교를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삼도론은 동양과 서양의 종교를 포괄적 원리로 말하기 위한 관점이지 동아시아의 삼교 전통을 강조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교가 고대 동아시아 전통에서 유래한 고유의 표현인 반면, 삼도는 동서 문명의 충돌시기에 등장하는 종교회통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논하는 불도는 바로 이러한 삼도론의 맥락에 있다. 따라서 불도란 제도화되고 물상화된 특정 종교로서의 ‘불교’의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종교들을 범주화할 수 있는 원리이자 근거이며 원형이라는 관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 하겠다.
Ⅲ. 대순사상에 나타난 불도ㆍ불교문화
대순사상에서 불도와 불교를 명확히 구분 짓기는 어렵다. 다만 이 장에서는 『전경』 전반에 걸쳐 언급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불도 혹은 불교문화적인 의의를 고찰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여러 불교문화 중 신앙의 문제가 불교 전통 안에서도 존재한다. 불교가 비록 이성적 전통에서 출발했으나 민간 중심의 기복적 문화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흐름이다.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불과 보살은 타력신앙의 대상이 되며29) 이들의 본원력에 의해 정토신앙이나 미륵신앙과 같은 이상사회가 펼쳐지기도 한다.
실상 초기불교에서 보살30)은 성불하기 전 석가보살 한 명뿐이었다.31) 그러나 대승불교에 이르러 보살의 개념은 확대된다. 대승경전 중에 하나인 『반야경』의 주석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따르면, ‘보리’는 ‘불도(佛道)’, ‘무상지혜(無上智慧)’로, ‘살타’는 ‘중생’, ‘큰 마음’, ‘용기 있는 마음’으로 해석하여, ‘보리살타’는 ‘무상의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큰 마음을 내고, 다른 사람도 무상의 도를 내게 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32) 이것은 보살의 개념이 단지 석가모니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하는 자’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리 즉, 깨달음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아니라 반야공관(般若空觀)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보살의 이념이 바로 반야바라밀다33)인 것이다. 대승보살은 서원(誓願)34)에 의해 탄생한다. 범부의 원은 대개 이기적 욕망이지만, 보살의 그것은 보리심에 근거한 이타적 서원이다. 범부의 이타행은 연민의 분별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차별적이고 상대적이지만, 보살의 이타행은 보리 즉 반야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무차별적이다.35)
보살은 수없이 많이 있으며 이 세상뿐만 아니라 십방세계(十方世界)의 곳곳에 살며 활동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를 위하여 열반을 구하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을 돕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佛) 역시 삼세십방(三世十方)에 수없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제불(諸佛)은 우주의 각방(各方)에서 보살들과 함께 정토를 이루며 거기서 살아 활동하고 있는 존재들로 간주된다.36)
대순사상에도 여러 불ㆍ보살이 등장한다. 증산 상제는 종도들에게 석가모니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었고,37) 아미타불38)과 관세음보살39) 그리고 문수보살40)이 천지공사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좀 더 분명한 사실은 불ㆍ보살이 구천상제가 대순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 41)
불ㆍ보살은 혼란에 빠진 신명계와 진멸지경에 처한 인류를 방관하지 않고 구제하기 위해 삼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존재로서의 구천상제에게 호소하여 결국 상제가 대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자비를 본원력으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불ㆍ보살의 이념이 대순사상에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륵신앙에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상제께서 어느 날에 가라사대 「나는 곧 미륵이라.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육장금신(六丈金神)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셨도다.42)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彌勒佛)이 출세하리라.43)
석가모니가 출세하여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연후 정법, 상법시대를 지나 말법시대가 오면 미륵이 출세하여 성불하고 용화회상(龍華會上)을 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 미륵신앙이다.44) 증산 상제는 ‘자신이 곧 미륵’이라 하였다. 미륵이 출세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처럼 상제가 그 역할을 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미륵의 의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증산 상제는 “동학 신자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고, 불교 신자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예수 신자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나, 누구 한 사람만 오면 다 저의 스승이라 따르리라.”45)고 하였듯이 미륵은 상제의 존재 이해를 위한 불교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절에서는 증산 상제가 소승불교의 핵심 교리인 윤회와 해탈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대순사상에서는 ‘전생’을 말하므로 기본적으로 윤회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어느 날 금곡이 상제를 정중하게 시좌하더니 상제께 저의 일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청원하였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九十세가 넘어서 입적하리라」 하시니라.46)
증산 상제의 49일간 불음불식 공부를 지켜 본 대원사 주지 박금곡은 증산 상제에게 신이한 능력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일을 물어보게 된다. 증산 상제는 금곡의 전생이 월광대사였고 그 업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대원사로 오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할 일은 대원사의 낡고 헌 곳을 손질하고 고치는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문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선천에는 백팔 염주였으되 후천에는 백오 염주니라.47)
후천에는 또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도 조화로써 창생을 법리에 맞도록 다스리리라. 벼슬하는 자는 화권이 열려 분에 넘치는 법이 없고 백성은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을 것이며 병들어 괴롭고 죽어 장사하는 것을 면하여 불로불사하며 빈부의 차별이 없고 마음대로 왕래하고 하늘이 낮아서 오르고 내리는 것이 뜻대로 되며 지혜가 밝아져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시방 세계에 통달하고 세상에 수ㆍ화ㆍ풍(水火風)의 삼재가 없어져서 상서가 무르녹는 지상선경으로 화하리라.48)
백팔 염주에서 백오 염주로 숫자가 변화하는 상징성과 관련된 여러 해석들이 있을 수 있다. 그 해석들은 모두 선천에서의 자연환경이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후천의 모습과 연결 지어 설명된다. 예를 들면, 선천에서 인간을 괴롭히던 수ㆍ화ㆍ풍의 삼재가 후천에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것에서 삼의 변화를 설명하기도 하고, “병들어 괴롭고 죽어 장사하는 것을 면하여 불노불사”하는 후천의 모습이 12연기설과 관련하여 생ㆍ노ㆍ사가 없어지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염주를 번뇌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또 후천에서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어진다”고 하였으므로 번뇌의 제거와 그로 인해 도달하는 해탈의 맥락에서 백오 염주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번뇌의 유무와 깊은 관련이 있다. 마음에 번뇌가 남아 있다면 인간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번뇌가 제거되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궁극의 경지인 열반에 들게 된다. 그래서 ‘열반(nirvāna)’이란 번뇌를 ‘불어서 끈(吹滅)’ 고요한 상태인 것이다. 번뇌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탐ㆍ진ㆍ치(貪瞋癡)라는 불선근(不善根) 혹은 삼독심(三毒心)이다. 따라서 열반은 탐ㆍ진ㆍ치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49) 여기에 후천이라는 세상을 백팔 염주가 아닌 백오 염주라는 종교적 상징물로 대신해 후천의 사람들이 어떤 경지 속에서 살아가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본다. 백팔이란 숫자는 불교교리에서 나타난 여러 개의 법수(法數) 중 하나이며,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번뇌를 백팔 개로 나누고 있다.50) 그리고 그 중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가 바로 탐ㆍ진ㆍ치이다. 탐은 욕심이며, 진은 분노이며, 치는 어리석음이다. 치는 또한 미망(迷妄)이며 무명(無明)이므로 아라한이 넘어서야 할 가장 마지막 번뇌이기도 하다.
증산 상제는 이미 ‘오백 나한’51)과 ‘적멸’52)을 언급함으로써 탐ㆍ진ㆍ치의 번뇌를 끊어낸 아라한과 그 경지인 열반적정이라는 불교의 궁극의 경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종도들에게 장차 도통이 있음을 수시로 말해왔다.53) 도통이나 해탈은 각 종교의 궁극적 경지에 해당한다. 서로 수행의 방법은 다르지만 수행의 결과 도달하는 궁극의 경지는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고 할 때, 후천의 이상세계에서는 탐ㆍ진ㆍ치의 소멸이 모든 인간이 누릴 마음상태임을 이 세 개가 빠진 백오라는 숫자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전경』에는 여러 명의 승려가 등장한다. 그러나 크게 두 인물이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 명은 증산 상제와 교류한 박금곡이고 다른 한 명은 조선 중기 인물인 진묵이다. 금곡과의 인연은 매우 인상 깊다. 왜냐하면 증산 상제가 처음 천지공사를 펼칠 때와 처음으로 의법(醫法)을 베풀 때 모두 금곡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상제께서 신축(辛丑)년 五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 가셔서 그 절 주지승 박 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 간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불음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셔서 四十九일이 지나니 금곡이 초조해지니라. 마침내 七월 五일에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으시고 방 안에서 금곡을 불러 미음 한 잔만 가지고 오라 하시니 금곡이 반겨 곧 미음을 올렸느니라.54)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는 신축년 겨울에 시작하나 그 해 오월에 먼저 대원사에서 49일간 불음불식 공부를 단행한다. 증산 상제가 대원사 공부에서 천지대도를 연 것은 이후에 있을 천지공사를 위한 준비단계였을 것이다. 이러한 공부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공부할 장소를 마련하고 공부 내내 그 곁을 지켰으며 공부를 마치고 나서 여러 필요한 일들을 도운 대원사 주지 박금곡의 역할은 매우 컸을 것이다. 또 금곡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이경오의 괴상한 병을 알리기도 했다.55) 증산 상제는 그의 병을 낫게 하였는데 이것은 상제가 펼친 최초의 의법이었다. 이후 증산 상제의 수많은 치병 활동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증산 상제가 살아생전 가장 가깝게 교류한 승려가 금곡이었다면, 과거의 승려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은 바로 진묵대사일 것이다. 진묵은 매우 다양하게 증산 상제의 언설에 등장한다. 그리고 증산 상제는 진묵을 불도의 종장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먼저 진묵과 관련된 설화를 살펴보면, 북두칠성을 칠 일만에 숨긴 일56)과 김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을 빌렸는데 이것을 길 가에서 다 읽고 모두 외운 일57) 등이 있다. 이것은 모두 진묵의 신이한 능력이 당시 전라도 지역에 회자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상제는 진묵의 죽음을 신화적인 이야기로 변화시킨다. 이것은 기존 설화에서 제공하지 않는 상제만의 이야기로 그 상징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진묵은 천상의 묘법을 인세에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봉곡에게 참혹히 죽은 후 원을 품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을 이끌고 서양에 가서 그곳의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다고 한다.58) 진묵의 사망은 1633년인데, 이 당시의 서양은 중세 암흑기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적 각성이 일어나는 시기였으며, 이후 18세기에 계몽주의 문화가 꽃피우게 된다. 진묵의 죽음과 유ㆍ불ㆍ선 도통신의 이동 그리고 그 역사(役事) 시점이 서양 문명의 발전사와 미묘하게 교차됨을 보여준다. 그리고 증산 상제는 서양으로 옮겨갔던 진묵을 다시 초혼하고 그와 함께 서양으로 건너간 도통신들을 다시 불러들여 고국을 상등국가로 만들려는 공사를 이어간다.
박금곡과 진묵대사는 조선에서 그리 주목되지 않았던 승려였다. 아니 그 당시 불교 자체가 비주류에 속했다. 그러나 증산 상제는 민중 속에 살아 숨 쉬는 이러한 종교적 인물들과 교류하고, 생명력을 불어 넣어 소외된 민중과 함께 천지공사를 이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약하고 가난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자를 쓰는 상제의 뜻이 담겨있다 하겠다.
불교 사찰은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와 도주 조정산의 50년 공부에 자주 등장하고 또 의례의 공간으로도 활용되는 중요한 장소이다. 증산 상제는 송광사(松廣寺)에 방문한 적이 있으며, 대원사(大院寺)에서는 49일간 불음불식 공부를 행하기도 했다. 또 금산사의 미륵과 자신을 자주 연관시키는 등 금산사와 관련된 일화들도 많으며, 부안의 개암사(開岩寺)에서 개벽과 관련된 천지공사를 행하기도 했다.
정산 역시 주로 공부 수행의 장소로 사찰을 이용했다. 그가 공부했던 사찰은 전주의 대원사를 비롯하여 청도 적천사, 공주 동학사, 하동 쌍계사, 동래 마하사, 합천 해인사 등 여러 곳이 있다. 그런데 증산 상제와 정산께서는 왜 유독 불교사찰에서 천지공사와 관련된 여러 일들을 진행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 공간적 신성성(神聖性)이다. 사찰은 종교적 의례의 공간이므로 신성하고 정화된 장소라 할 수 있다. 천지공사의 성격 역시 일종의 종교적 의례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출입과 활동이 제한된 신성함이 보존된 장소가 필요함은 당연하다.
둘째, 사찰 내 공간에 대한 활용이 용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기간 구도가 가능하려면 독립적인 공간 확보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종교공간과 주거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종교공간으로는 예불 같은 의식이나 축원이 이루어지는 법당이 있으며, 주거공간으로서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인 요사(寮舍)가 있다. 그러나 외부인이 법당에서 불교 외의 다른 의식을 진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공부는 요사와 같은 공간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후기 일부 사찰에서는 부의 축적과 그 부에 대한 사제(師弟)간에 세습이 일어나 승려 개인의 사유재산이 형성되고 이로 말미암아 생활공간도 독립되는 별방제(別房制)가 유행하게 되며 이에 따라 다양하고 복합적인 공간인 대형요사가 발달한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승려와 신도가 함께 계(契)를 조식하는 사찰계(寺刹契)가 절정에 달한다. 이러한 사찰계 활동 역시 법당과 같은 종교적 공간이 아닌 대중적 개방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대형요사가 확대 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59) 사찰 내 요사의 확대는 개인적인 구도나 참선과 같은 종교적 활동에 적합하므로 증산 상제와 정산과 같은 외부인이 구도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공간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을 매우 용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셋째, 사찰은 천지공사의 의례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적합한 장소이다. 증산 상제는 일찍이 대원사에서 49일간의 불음불식 공부를 행하였다. 이어서 도주 조정산은 증산 상제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50년 동안 공부를 이어나가며 상제의 도수를 몸소 실천한다. 특히 정산은 대원사의 백일 도수를 마치고 바로 그곳이 상제가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인데,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당신이 풀었음을 밝히기도 한다.60) 이렇게 증산 상제와 정산으로 이어지는 천지공사의 연속성은 그 공부장소의 연속성에서도 보여 진다.
Ⅳ. 대순사상의 불도관 특징
앞 장에서는 대순사상에 녹아있는 전통 불교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증산 상제가 당시의 불교문화를 충분히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상제는 기성불교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방식으로 그 고유한 불도관을 피력하기도 한다. ‘불지형체’나 ‘불지양생’ 그리고 ‘불도의 종장’을 선택하는 이유 등이 그러하다. 여기서 그 의미들을 규명해보기로 한다.
형체(形體)는 불도의 정수(精髓)로 불교 문화의 바탕이 된다.62) 형체는 일반적으로 ‘물건의 외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의미로 불교를 해석할 때 난감한 점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모든 상(相)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의 문제는 선종, 그리고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이다.63) 또한 일체개공(一切皆空)이며 유식무경(唯識無境)인데, 보이는 현상, 그것도 구체적인 외형이 불도의 정수라고 한다면 이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형체’라는 것이 불도의 정수라면, 이것은 불교사상의 발달과정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한자로서의 ‘체(體)’는 매우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의 구성은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으로 되어 있는데, 이중 삼대가 체ㆍ상ㆍ용(體相用)의 구조를 나타낸다. 또한 송대(宋代) 이학의 본체론이 불교의 사유양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점64)도 이 체라는 글자를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 중에 하나이다. ‘형(形)’의 경우, 『역경』 「계사」상에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에서 한자로서의 형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나광은 여기에 나타난 형의 의미를 크게 질(質)ㆍ기(器)ㆍ상(象)으로 정리한다.65) 결국 ‘형’은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범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형과 체를 분리해서 본다면,66) 이것은 현상(現相, appearance)과 실재(實在, reality)라는 존재론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67) 이것을 전제로 형체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진행해보자.
길희성은 인도철학의 근간을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실재의 세계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라 본다.68) 인도철학이 베다에서 우파니샤드로 이행되면서 브라흐만(Brahman)은 제의에 쓰이는 기도나 주술적인 의미에서 점차 우주의 근원적인 원리 또는 현상 세계 배후에 있는 통일적 실재라는 철학적인 의미로 발전해간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궁극적 실재가 인간에게 본질로서 내재되어 있다는 아트만(ātman, 自我) 사상이 성립된다. 이것은 진리 탐구의 방향이 외계에서 내적 자아로 향하는 혁명적인 전환이었다.69) 현상적 자아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이지만 참 자아인 아트만은 영원히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실체로 존재한다. 반면 붓다는 이러한 실체론적 사유를 부정하고 무아론(無我論, anātman)을 주장한다. 자아는 오온(五蘊)일 뿐이고 오온은 연기(緣起)의 산물이므로 인간은 자체의 자성(自性)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난 인연화합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자경은 이것을 실체론적 사유와 연기론적 사유의 대립으로 말한다.70)
그런데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현상과 실재라는 ‘형체’의 관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유아론(有我論)은 실체를 인정하므로 이러한 사유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여겨진다. 반면 붓다는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무아론을 펴고 또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모두 부정한다. 그렇다면 붓다의 사유는 형체적 사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두 가지 이론 모두 실재에 대한 궁극적 견해를 밝힌 것이다. 다시 말해, 유아론은 실재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존재론적 사유이며, 무아론은 실재의 실체를 부정한다는 면에서 역시 존재론적 사유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둘 사이의 공통된 사유방식, 즉 현상의 배후에 실재 여부를 생각하는 ‘형지체(形之體)’로서 같다는 것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에서도 보면 “형지언체(形之言體)”라고 하여 ‘형이라는 것은 체를 말한다’고 하였다.71)
이러한 실재에 대한 주장은 중관학파에 이르러 차원을 달리한다. 두 견해는 초기불교를 지나 부파불교 시절에 이르러 유아론 계열의 상캬-베단타 측과 무아론 계열의 아비달마 측 사이에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대립을 지속한다.72)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 같은 두 주장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에 의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무르띠에 의하면, 용수는 유아론과 무아론 모두 이성이 만들어 낸 독단론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이성은 경험세계가 주 무대이기 때문에 실재의 세계를 생각할 때 모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의 세계는 인간의 사고(思考)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실재란 일자(一者)도 아니고 다자(多者)도 아니다. 유아(有我)도 아니고 무아(無我)도 아니다. 실재란 언제나 있는 그대로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발생이나 쇠멸 등을 망상한다. 무지한 자들은 그런 망상에 탐닉하지만 실재란 그런 갖가지 개념 조작을 완전히 떠난(Śūnya,空한) 즉, 생각을 초월해 있으며 오직 불이(不二)의 지혜 − 절대 그 자체인 반야 − 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우리는 공성(空性)을 현상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의 법성(法性)과 같은 또 하나의 이론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절대란 경험성을 떠나 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현상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지만 생생한 의미에서는 실재로서의 현상성에 내재하거나 현상성 그 자체와 동일하다. 두 차원의 진리 즉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는 이제(二諦)의 구분이 강조된다.73)
용수는 중관(中觀)을 통해 논의의 방향을 실재의 세계로부터 그 실재를 개념화하고 분별하는 인간의 이성으로 돌린다. 공성(空性)은 ‘실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다.74) 그 실재는 단ㆍ상ㆍ유ㆍ무(斷常有無)의 분별이 아닌 오직 중관의 지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개념으로부터 해방된 지성에 의해 반성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바로 반야이다.75) 따라서 실재는 어떤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깨달음(반야)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형체(形體)를 형이체(形而體)라고 하지 않고 형지체(形之體)라 보는 이유는 그것이 자칫 이원론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의 체’라 함은 서로 분리된 이원의 세계가 아니라 마치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관계처럼 불이(不二)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를 불이의 중(中)으로 관(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이다.76)
중관학파에 이어 등장하는 유식학파와 여래장 사상은 다시 현상과 실재 세계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다. 유식사상은 일체의 현상을 마음의 작용으로 본다. 외계 사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에 의해 관념화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오직 식(識)만이 실재한다. 그리고 여래장 사상의 경우, 그 마음이 바로 여래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두 사상은 모두 보이는 현상 세계 배후의 실체인 마음에 대한 논의이다.
인도불교는 중국문화에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77) 서구문화와 조우하기 전 동아시아적 사유는 유교와 도가사상을 포괄하는 중국적 사유와 불교로 대표되는 인도적 사유의 거대한 교직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와중에서 중국은 초월과 형이상학이라는 불교의 장점을 받아들인다.78) 인도의 불교는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쇠퇴했지만 불교의 비중국적인 사유79)는 중국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신유학이다. 아서 라이트는 11세기에 부활된 유교가 불교사상을 흡수했다고 말한다. 그는 주희의 경우 불교를 적으로 간주했지만 당시를 지배했던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불교가 제시한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그에 대한 비불교적 답을 해야 했다고 보고, 그의 새로운 사상체계 내에 형이상학과 심리적인 관념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공자나 동중서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80)
성리학의 이기(理氣) 불상리(不相離)ㆍ불상잡(不相雜)과 이선기후(理先氣後)ㆍ이주기객(理主氣客)의 논리체계는 화엄학의 이사무애법계관(理事無礙法界觀)과 유사한 사유형식이다.81) 이사무애법계는 현상[事]과 진리[理]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하고 융합하는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의 세계는 체성(體性)이 공적(空寂)하고 온갖 잘못으로부터 단절된 본체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이사무애’는 본체와 그것이 나타나는 현상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음을 말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분화된 기가 이합 집산하는 가운데 태극으로서의 리가 본질로 존재하게 된다는 본체론과 논리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82)
화엄의 ‘리’는 단순한 본체론의 성격을 넘어 현상과 유리될 수 없는 본체를 역설한다. 이러한 ‘리’의 측면은 송대 리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유가에서는 당시까지도 ‘리’의 의미가 형이상학적으로 고도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현상 속에서의 본체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 이러한 것을 볼 때, 송대 리학을 통해 ‘리’의 담론이 폭발적으로 발전한 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83)
권선향은 송대 리학과 시공간적으로 인접해 있던 불교에서의 체용론이 리학 체용론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인도적 사유인 불교가 중국불교의 체용론에 영향을 주었고 이것으로 인해 리체(理體)를 등장시켜 결국 리학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중국불교의 체용론은 승조와 『대승기신론』 그리고 화엄학을 그 논거로 삼는다. 승조는 중론의 진제와 속제를 각각 체와 용으로 이해했으며, 체와 용의 불이성(不異性)을 주장했지만, 절대적인 반야를 상정하여 상대적인 체에서 절대적인 체로 나아갔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이문(一心二門)을 통해 체용이 하나의 근원을 갖는 서로 다른 두 측면으로 제시한다. 『대승기신론』의 체용론은 화엄종과 선종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대승기신론』의 일심을 화엄에서는 본연의 성(性)으로 보아 성이 그대로 법계의 만상임을 나타낸다. 체인 성이 그대로 일어난 것이 용이며 이것이 그대로 법계이다. 체인 리는 법계의 이치이며, 용인 사는 법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체용론은 결국 주희에게 영향을 끼친다. 주희의 이일분수(理一分殊)는 그의 불교비판에도 불구하고 화엄의 영향을 보여준다.84)
본체론적인 사유방법은 중국불교에 하나의 공식처럼 등장한다. 천태종에서의 본체는 ‘실상(實相)’이며, 화엄종은 ‘법계’ 혹은 ‘여래장자성청정심’이고, 선종은 ‘심본체(心本體)’, 그리고 법상종은 ‘진여’ 또는 ‘아뢰야식’이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을 봤을 때, 인도로부터 중국에 이르는 불교사상은 형지체(形之體)라는 사유를 근간으로 하는 일종의 변주곡으로 볼 수 있다. 변주곡이란 기본이 되는 음계가 있고 이것을 변형시켜 나가는 악곡이다. 변화되는 속에서 그 원형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유지된다. 여기서 기본이 되는 음계는 바로 형지체의 사고다. 불교사상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론은 각기 그 내용은 다르지만 형식에 있어서 언제나 현상과 실재라는 두 겹의 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재에 대한 논의는 과연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논의하기로 하자.
증산 상제는 ‘불지형체’에 이어 ‘불지양생’으로 기성 종교계에서는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불도를 표현하고 있다. ‘불지형체’가 불도의 사유방식이라면 왜 이러한 사유방식이 필요할까? 더 나아가 불도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인간 자아의 성숙을 위해서이며, 둘째 인간[知人]의 존재론적 근거인 궁극적 실재에 대한 깨달음(인식)을 위해서이다.
천지는 일월이 없으면 빈껍데기요, 일월은 알아주는 이(知人)가 없으면 빈 그림자일 뿐이다.85)
일이 마땅히 왕성하게 됨은 천지에 달린 것이지 반드시 사람에게 달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사람을 낳고 사람을 쓴다.(故天地生人 用人)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지가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쓰이지 못한다면 어찌 인생이라고 할 수 있으랴.86)
인간은 천지의 계획에 의해 탄생한 존재다. 천지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한갓 빈껍데기나 그림자일 뿐이다. 즉 사람이 없으면 천지는 그 존재 가치를 잃는다. 그러므로 천지가 사람을 낳고 천지가 원하는 일에 쓰고자 한다. 그러나 사람을 낳고 사람을 쓰기까지에는 지난한 교육의 과정이 필요하다.
천지가 쓰는 것은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 밖에 없다.87)
천지의 허무를 받았으니 선(仙)은 포태에 해당하고, 천지의 적멸을 받았으니 불(佛)은 양생에 해당하며, 천지의 이조를 받았으니 유(儒)는 욕대에 해당한다. 관왕은 허무 적멸 이조를 모두 거느린다88)
천지는 만물을 포ㆍ태ㆍ양ㆍ생ㆍ욕ㆍ대ㆍ관ㆍ왕ㆍ쇠ㆍ병ㆍ사ㆍ장의 방식으로 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에는 선으로 포태시키고, 불로 양생하며, 욕대인 유로 키워서, 관왕의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쓴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왕의 경지는 선이라든가 불, 유와 같은 어떤 것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다만 그것에 대한 설명을 ‘허무 적멸 이조를 모두 거느린다’89)고 할뿐이다. 관왕은 선ㆍ불ㆍ유를 포괄적으로 이끄는 종교적 경지를 나타낸 것이라 본다. 이렇게 ‘불지양생’은 포태에서 출발하여 관왕으로 이어지는 우주적 성장의 맥락에서 그 상징성을 찾을 수 있다. 양(養)은 태아가 어머니의 배 안에서 자라는 모습이고, 생(生)은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90) 이것은 흡사 신성(神性)에 의해 탄생한 인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천지의 허무를 바탕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해내기 시작한 신성을 선(仙)으로 보았을 때,91) 선 다음 단계에 위치한 불은 이러한 신성에서 분리된 인간을 위해 필요한 단계임을 짐작케 한다. 즉, 신성인 어머니로부터 떨어져나간 인간은 홀로 자립하기 위해 자아의 성장이 가장 우선시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내적 성숙은 불(佛)의 존재이유가 될 만하다.
인간의 내적 성숙을 위해 어떠한 사유방식을 키워나가야 하는가? 그것은 앞 절에서 논의한 ‘불지형체’의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실재에 대한 우파니샤드의 사유와 이러한 사유 방법을 문제 삼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대승불교의 성립과정에서 우리는 인간 사유의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 붓다는 인식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존재론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다. 붓다는 철저히 인식기관에 포착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실재와 질문들을 거부했다. 용수는 이것을 이어받아 인간 이성이 실재의 문제를 거론할 때 독단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았고, 이러한 양극단의 형이상학적 갈등을 공으로 회통하고자 했다. 독단에 대한 비판은 둘 사이의 이견을 회통할 수 있는 사유방식인 변증법적 사유의 초석이기도 했다.92) 무르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세상에 붓다가 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상서로운 기회다.”93)
천지는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종교적 사유의 원형인 선ㆍ불ㆍ유의 근거이기도 하다. 천지의 계획에 의해 탄생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 근거인 천지를 알아주는 이(知人)로서 성장해야 한다. 인간의 본체론적 사고는 보이는 현상 세계 배후의 실재의 문제를 고민하게 하고 궁극적 실재에 대한 사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인 천지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현상과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이 내면으로부터 철저히 각성하는 데서 가능하다. 따라서 ‘불지양생’에서 보이는 불도의 특징은 모든 만물이 형상에 치우치지 않고 어떤 궁극적 실재로서의 본체를 간직하고 저마다 탄생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진묵대사가 불도의 종장이 된 이유는 ‘불지형체’와 ‘불지양생’의 맥락과 전혀 다른 이유에서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불도의 정수와 상관없고, 그러한 정수의 존재론적 의미와도 관계없는 사람을 불도의 종장으로 임명했다면 증산 상제의 불도관은 일관성이 없는 종교적 습합주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현무경』에는 진묵대사의 일이 몇 가지 단어로 나열되어 있다.
耳目口鼻 聰明道通 震黙大師 性理大全 卷八十94)
증산 상제는 진묵대사를 성리대전과 이목구비 총명도통의 두 가지와 연결 짓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상징하는 바가 바로 증산 상제가 진묵대사를 불도의 종장으로 지목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필자는 성리대전을 종교적 회통의 결과물로, 이목구비 총명도통을 반야의 깨달음으로 각각 대응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전경』에서 성리대전과 연관된 진묵설화는 다음과 같다.
… 진묵(震默)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 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니라. 봉곡은 …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사람을 보냈도다. … 그 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는지라. … 진묵은 내가 외울 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 편을 모두 읽는도다. … 95)
그런데 『전경』과는 다소 다르게 초의선사가 지은 『진묵조사유적고』에는 ‘『성리대전』’이 아니라 ‘『주자강목』’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왜 그것이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서지학적 논쟁이 아니라 이러한 차이가 바로 증산 상제가 강조하는 부분이며, 그 안에서 풍기는 종교적 상징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리학은 불교의 사유체계와 고대 유학 전통이 회통되어 이룩된 산물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성리학의 내용을 가려 뽑은 『성리대전』 역시 그 상징성을 계승한다고 본다.
진묵의 회통정신과 그 실천은 『전경』의 몇 구절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진묵이 죽은 후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했다96)고 하는데 여기서 도통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거느리고 간 것은 동양의 ‘모든 도통신’97)이며, ‘모든’은 ‘유불선’98)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진묵의 신격이 유불선을 회통하는 경지가 아니라면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갈수는 없었을 것이다.
증산 상제는 진묵설화의 상징성을 통해 인간은 인류의 갈등 상황을 초래하는 모든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99)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이목구비 총명도통’이라는 경지로 구체화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진묵설화에서 진묵의 행적은 그에게 범상치 않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시해법(尸解法)을 시현한 것100)과 가난한 아전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과정에서 북두칠성을 숨긴 일101) 그리고 『성리대전』을 길 가던 중에 읽고 모두 외운 일102) 등은 그 도통의 경지를 방증하는 것이라 본다.
증산 상제는 ‘수천지지적멸(受天地之寂滅) 불지양생(佛之養生)’이라 했다. 적멸은 일체의 상을 여읜 상태다.103)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듯104) 번뇌에서 번뇌가 나온다. 번뇌라는 마음의 장애가 사라지면 완전히 투명해지고 바로 이 경지에서 마음과 천지(실재)와의 구별이 사라진다. 천지는 이성과 실재가 일치하는 불이(不二)의 경지, 일체의 생각을 초월한 반야의 경지, 진리[體] 그 자체의 자리, 거기서 인간을 길러낸다. 즉 천지는 진리의 본체 자리에서 인간을 양생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진묵은 종교적, 이념적 갈등 상황을 극복하고 회통할 수 있는 사유의 깊이와 모든 분별 망상을 제거해 진리 그 자체를 직관할 수 있는 반야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그는 대순사상에 따르면 불도의 정수를 고스란히 실천한 전형(典型)적인 인물인 것이다.
Ⅴ. 맺음말
한국은 삼국시대 이래로 ‘삼교(三敎)’의 영향아래 놓여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삼교’라는 표현과 함께 ‘삼도(三道)’라는 술어가 한국의 자생 신종교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왜 그들은 기성의 ‘삼교’ 대신 ‘삼도’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일까? 학계에서는 지금껏 그 이유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본다.
‘삼도’가 쓰인 정황은 서구 제국주의와 더불어 맞이하게 된 다종교 시대와 관련이 있다. 이능화는 이를 백교(百敎)라고 부를 정도였다. 조선의 종교가들은 백교를 회통하고자 노력했다. 이능화는 불교를 중심으로, 김일부는 ‘무위(无位)’의 경지로, 수운은 동학으로, 그리고 증산 상제는 관왕의 경지로 회통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감안한다면, ‘삼도’는 더 이상 ‘삼교’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없다. 삼도는 삼교뿐만이 아니라 백교를 유형화할 수 있는 범주로 봐야 한다.
따라서 대순사상의 불도관이라고 하면, 제도적 종교문화의 면모뿐만 아니라 그 원형적 모습까지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증산 상제는 승려와 교류하고 사찰을 공부의 장소로 택하면서 불교문화를 향유했고, 소승불교의 교리와 대승불교의 불ㆍ보살 신앙으로 종도들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불지형체’, ‘불지양생’, ‘불도종장’을 말하면서 불도라는 새로운 범주에 대한 정체성을 부여했다. 대순사상에서는 이 세 가지가 ‘불도’라는 하나의 범주를 완성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불지형체’에서 ‘형체’는 불도의 정수이며, 동시에 ‘형지체(形之體)’라는 사유방식을 뜻한다. 이 형지체의 사유방식이 정수가 되어 세계의 여러 문화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불교사를 통해 현상과 실재라는 사유의 형식이 그리 간단하게 성립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지 않음[無記]으로써 이성의 이율배반적 성향이 있음을 드러냈고, 용수는 이성이 만들어 낸 실재에 대한 견해를 모두 부정[空]하고 반야의 경지를 내세워 변증법을 체계화했다. 무르띠는 붓다야 말로 변증법의 창시자라 주장한다.
‘불지양생’은 포태양생욕대관왕으로 전개되는, 인류의 진보라는 우주론적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양생’은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더 이상 신성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 자아를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인도적 사유와 그 토대에서 발화한 불교는 실재에 대한 탐구의 방향을 외계에서 자신의 의식으로 돌렸다. 우리는 불교사를 통해 본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룩된 인간 사유의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 인류가 관왕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에 대한 내적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현무경』에서 진묵은 ‘『성리대전』’과 ‘이목구비 총명도통’과의 연관 속에 놓여있다. 성리학은 불교의 본체론과 고대 유학 사상이 회통되어 탄생했고 그 결과물인 『성리대전』 역시 그 정신을 이어받는다. 진묵이 ‘유불선의 도통신을 거느린다’는 설화 역시 유불선을 회통하는 진묵의 경지를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진묵의 내적 상태는 이목구비 총명도통, 즉 반야의 경지라 보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상징성이 진묵을 불도의 종장으로 내세운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상에서 볼 때 대순사상의 불도관 연구는 대순사상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관점을 제기하고 있다. 즉 대순사상의 위상은 불도나 불교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불도가 지닌 ‘형체’ 혹은 ‘양생’의 특징을 하나의 축으로 한 관왕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종교현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모습의 불교를 불도의 원리 하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