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본 논문은 암서 조긍섭(曺兢燮, 1873~1933)1)과 면우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심론에 대한 해석을 고찰함으로써 이들의 이론적 차이를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국유학사는 16세기 퇴/율 이후, 영남학파(퇴계학파)와 기호학파(율곡학파)라는 양대 산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이들 학파 내에서 내부적 분화현상이 나타나는데, 영남학파에서는 정재·한주학파가 대표적이며 기호학파에서는 화서·노사·간재학파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2) 이들 학파를 형성하게 되는 사상적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心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에 있다. 금장태 역시 정재학파와 한주학파를 당시 영남학파의 두 갈래 큰 흐름으로 해석한다. “19세기에 퇴계학파의 한 갈래는 퇴계의 정통학맥을 계승한 안동권의 정재(유치명)와 그 문인 서산(김흥락)의 흐름이요, 다른 한 갈래는 정재의 문인이자 ‘리’철학의 입장을 강화하여 심즉리(心卽理)설을 제기한 성주의 한주(이진상)와 그의 문인 면우(곽종석)의 흐름이다.”3)
곽종석이 이진상의 수제자이니 한주학파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조긍섭은 만구(이종기)·사미헌(장복추)·서산(김흥락) 등 여러 선생에게서 수학함에 따라 학파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임종진의 “조긍섭은 이종기·장복추·김흥락 및 곽종석을 큰 어른으로 공경하는데 조금의 소홀함이 없었으나, 특히 김흥락과의 관계를 중시한 것 같다”4)라는 내용과, 금장태 역시 조긍섭의 학문적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김흥락의 학맥에 연결시키고5), 또한 조긍섭의 둘도 없는 친구인 문박(文樸)의 아들이자 조긍섭에게서 글을 배운 문진채(文晋采)의 “조긍섭은 김흥락에 연원한다”는 말에 근거할 때6), 조긍섭을 김흥락의 문인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이로써 조긍섭은 정재(유치명)의 재전제자에 해당하니 정재학파의 일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성리학적 특징으로는 16세기 사단칠정론과 18세기 인물성동이론으로 전개되면서 개념적 분석의 정밀함을 추구하던 관심에서, 보다 구체적 행동원리를 근거지을 수 있는 心 개념에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사단칠정론의 ‘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인물성동이론의 ‘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에서, 그 정과 성을 실현하는 주체인 ‘심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 논의가 확대된다. 이에 따라 심을 리로 볼 것인지(心卽理), 기로 볼 것인지(心是氣), 리와 기의 합으로 볼 것인지(心合理氣) 등으로 뚜렷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19세기에 전개된 심설논쟁의 요지이다.
특히 심설논쟁과 관련하여 19세기 퇴계학파의 흐름은 정재학파의 십합이기(心合理氣)와 한주학파의 심즉리(心卽理)의 두 줄기로 구분된다. 이렇게 볼 때, 조긍섭과 곽종석의 심론에 대한 해석은 결국 정재학파와 한주학파의 이론적 차이를 밝히는 일이라 하겠다.
조긍섭은 17세(1889) 때 당시 영천(고령)에서 강학하고 있던 곽종석을 찾아가서 태극·성리 등의 문제에 대해 질의한다. 이때 이미 44세였던 곽종석이 ‘몇 백년만에 나올 수 있는 인재’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조긍섭 역시 곽종석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挽詞)에 따르면, “총각 때 처음으로 모시고서 가슴 열고 마음껏 말하였지. 천인(天人)의 깊은 이치를 탐구하고 왕패의 근원을 변별하였네. 처음이 달랐으나 끝내 무엇이 해되랴. 길을 잃어 아직 이리 어둠 속인걸. 이제부터 누가 날 아껴주랴. 우두커니 천지 향해 서있누나.”7) 비록 두 사람의 학문적 견해는 달랐지만, ‘이제부터 누가 날 아껴주랴’라는 말처럼 곽종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간적인 교유는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이후 조긍섭은 회봉(하겸진)·중재(김황)·성와(이인재) 등 곽종석의 문인이자 한주의 재전제자들과도 활발히 교유한다.
무엇보다 조긍섭과 곽종석은 심에 대한 입장 차이로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암서집』 권7-8에는 곽종석에게 보낸 편지 10편이 실려있고, 『면우집』 권85에는 조긍섭에게 보낸 편지 14편이 실려있다. 본문에서는 이들의 내용을 중심으로 조긍섭과 곽종석 심론의 이론적 차이를 확인한다.
조긍섭과 곽종석의 심론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임종진이 「한주학파의 성리학에 대한 심재 조긍섭의 비판」에서 이들 심론의 내용을 짧게 소개하고 있으며,8) 최석기는 경학적 관점에서 명덕(明德)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9) 최근에는 곽종석의 인심도심론10)·사단칠정론11)·인물성동이론12)과 같은 심성론 전반에 대한 연구가 점차 소개되고 있으나, 심론에 대한 세부적 분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선행연구와 구분하여 본문에서는 조긍섭과 곽종석의 심론에 대한 세부적 분석을 전개한다.
Ⅱ. 암서 조긍섭의 심론
조긍섭 심론의 특징은 십합이기(心合理氣)에 있다. 심의 주재로서 리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작용으로서 기의 역할과 지위를 인정하자는 입장이다. 기가 있어야 리가 내재할 수 있고 심의 주재도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에서에 조긍섭은 ‘심합이기’의 관점에서 ‘심즉리’를 주장하는 곽종석을 비판한다.
먼저 조긍섭은 ‘심합이기’의 관점에서 심과 성을 둘로 분명히 구분한다. 이것은 곽종석이 ‘심즉리’의 관점에서 심과 성을 하나로 해석하는 것과 구분된다.
리는 물과 같고 심은 우물과 같으니, 지금 우물이라는 것을 물이 땅 속에 있는 명칭이라고 말한다면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다만 이것으로써 바로 우물이 곧장 물이라고 하면 옳지 않다. 비록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물이 우물되는 것은 물을 버려서는 안 된다.13)
조긍섭은 성과 심의 관계를 물과 우물의 관계에 비유한다. 성은 물과 같고 심은 우물과 같다. 우물이라는 것은 물이 땅 속에 있는 명칭이니, 우물이 우물되는 것도 반드시 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물이 곧장 물이라고 해서는 안 되니, 왜냐하면 우물은 어디까지나 땅 속에 있는 물이기 때문이다. 우물이 곧장 물이 아니듯이, 심 역시 곧장 성(리)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심에는 물에 해당하는 성과 땅에 해당하는 기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물의 본질은 땅이 아니라 땅속의 물이듯이, 심의 본질은 기가 아니라 기속의 성이 된다.
이처럼 우물과 물을 구분해야 하듯이, 심과 성도 구분해야 한다. ‘심과 성을 구분한다’는 것은 심에서의 기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심은 리(성)와 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때 기는 리를 태우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조긍섭은 성을 태우는 바탕으로서의 기의 역할에 주목한다.
살피건대, 기가 바탕이 되고 리가 실제로 부여되는 것이 바로 심이 되는 것이다. 대개 <리와 기>두 가지는 있으면 일시에 함께 있으니, 바탕이 심이 되고 리가 깃들어있는 다른 물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14)
심은 리와 기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때 기는 리를 싣는 바탕이 되고 리는 기 속에 부여되는 이치이다. 리와 기는 있으면 일시에 함께 있으니, 바탕이 되는 기와 깃들어있는(부여되는) 리가 두 물건이 아니다. 이처럼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니, 심을 말하면 리(성)와 함께 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심에서는 응당 기의 역할을 배제해서는 안 되니, 곽종석처럼 심을 곧장 리로써 해석하는 ‘심즉리’의 주장은 옳지 않다.
이어서 조긍섭은 심을 곧장 리라고 해서는 안 되는 구체적 이유를 설명한다.
가만히 보건대, 예로부터 학술이 어긋난 것은 석씨와 양명의 부류처럼 대부분 심을 성으로 인식하는데 있다. 대개 보고 듣는 것은 심이고 총명의 법칙은 성이며, 지각은 심이고 인·의·예·지의 덕은 성이다. 음란하게 보고 잡되게 들으며 어지럽게 지각하는 것을 심이라고 말한다면 옳지만, 성이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성과 합하여 말한다면 성은 진실로 심의 본체이다. 그러나 심에 갖추어진 리라고 말한다면 옳지만, 일률적으로 심이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예를 들어 맹자가 논한 사단지심(四端之心)과 같은 것은 어찌 성정의 체용을 지극히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측은지심’이라 말한 것은 기해지심(忮害之心, 해치는 마음)과 상대됨을 밝힌 것일 뿐이고, ‘수오지심’이라고 말한 것은 탐매지심(貪昧之心, 탐내는 마음)과 상대됨을 밝힌 것일 뿐이다. 만약 심을 성으로 여긴다면, ‘해치는 것’도 성이며 ‘탐내는 것’도 성이니 옳겠는가.15)
석씨나 양명(왕수인)의 학문이 유가와 다른 것은 심을 성으로 인식하는데 있다. 석씨나 양명이 심을 곧장 성으로 인식하는 것과 달리, 유가는 심과 성을 분명히 구분한다. 예컨대 주자가 심을 체(성)와 용(정)으로 구분하고 ‘성’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리라고 하여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 것이라면, 양명은 심의 전체를 리와 일치시켜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한다.16) 결국 곽종석이 심을 리로 해석하는 것은 석씨나 양명의 이론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은 심을 곧장 리가 아니라, 리와 기가 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성=리라면, 심은 리+기이다. 이로써 이치·법칙에 해당하는 성과 달리, 심에는 기의 작용(역할)이 수반된다. “보고 듣는 것은 심이고 보고 듣는 법칙은 성이며, 지각은 심이고 인·의·예·지의 덕은 성이다.” 결국 조긍섭은 보고 듣는 이목기관이나 생각·사려와 같은 지각작용을 모두 기에 근거지어 설명하는데, 이것은 곽종석이 심의 지각을 리로써 해석하는 것과 구분된다.
또한 성과 심의 관계를 선악의 개념으로 설명하면, 성은 순선무악하나 심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왜냐하면 심에는 순선무악의 리(성)뿐만 아니라 유선유악(有善有惡)의 기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란하게 보고 잡되게 들으며 어지럽게 지각하는 것을 심이라 말한다면 옳지만, 성이라 말한다면 옳지 않다.” 결국 심에는 리와 기 또는 선과 악이 함께 있으니 순선무악한 성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이러한 심을 체용의 관계로 해석하면, 심의 체는 성이고 심의 용은 정이다. “성은 진실로 심의 본체이다.” 성은 심속에 갖추어진 리이지 곧장 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심에 갖추어진 리라고 말하면 옳지만, 일률적으로 심이라고 말하면 옳지 않다.”
이때 심의 용은 정이니, 맹자의 측은·수오·사양·시비지심과 같은 사단지심이 그것이다. 다만 맹자가 말한 사단지심은 모두 “성정의 체용을 지극히 말한 것이니” 즉 리가 발한 것이니, 모두 선만 있고 불선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심에는 리와 함께 기가 있으니, 이때 측은지심은 <남을 해치는>기해지심과 상대하여 말한 것일 뿐이고, 수오지심은 <남의 것을 탐내는>탐매지심과 상대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심에는 <선한>측은지심과 수오지심뿐만 아니라 <불선한>기해지심과 탐매지심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곽종석처럼 심을 곧장 성으로 여긴다면, 심의 해치거나 탐내는 것과 같은 불선한 것도 성이 되니 옳지 않다.
이에 조긍섭은 양심과 같은 선한 심이라도 성과는 분명히 구분된다고 강조한다.
제가 생각건대, 양심이 비록 선하지만 또한 심이니, 성인과 어리석은 자는 진실로 있고 없거나 많고 적음의 구별이 있다. 성은 리일 뿐이니, 요순이 어찌 일찍이 조금이라도 더하였겠으며, 걸주가 어찌 일찍이 털끝만큼이라도 모자랐겠는가.17)
양심이 비록 선하지만, 성이 아니라 심일 뿐이다. 심에는 리와 함께 기가 있으므로(성이 아니므로) 비록 양심이라도 성인과 어리석은 자의 구별이 없을 수 없으니, 예컨대 성인이 양심이 있거나 많다면, 어리석은 자는 양심이 없거나 적다. 그러나 성은 다만 리일 뿐이니, 비록 요순과 걸주라도 다르지 않으니, 예컨대 요순이라고 리가 많거나 걸주라고 리가 적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곽종석이 양심을 그대로 성과 일치시켜 해석하는 것과 분명히 구분된다.
먼저 조긍섭은 심에서의 기의 역할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저는 일찍이 망령되이 “심에 있는 기는 마땅히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하니, 그 처음은 허령한 정상(精爽)으로 리와 합하여 본체를 이루는 것이고, 그것(심)이 발용함에 혹 리를 실어 행하는 것이 있고 혹 스스로 발하여 리가 타게 되는 것이 있으며, 그 말단은 또한 능히 리를 가려서 스스로 작용하고 리를 멸하여 스스로 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문하(곽종석)께서 지적한 것은 다만 맨 마지막의 한 부분이니, 설령 기의 비천한 것을 살피고 기록하는데 부족할지라도 혹 크게 공정하고 지극히 공평함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18)
조긍섭은 심에서의 기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로 허령한 정상(精爽)의 기이니, 이때의 기가 리와 합하여 심의 본체(리)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가 말한 “심은 기의 정상이다”19)라는 뜻이다. 기가 허령한 ‘정상’이라야 심의 본체를 이루니, 곽종석의 말처럼 심이 곧 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곽종석은 심의 허령함을 그대로 기가 아니라 리로 해석한다.
둘째로 리는 반드시 기를 타고 발하니, 심이 발용할 때에 기가 리를 싣거나 태워서 실행하는 것이다. 이때는 바탕으로서의 기에 해당한다. 리가 싣거나 타기 위해서는 먼저 기가 있어야 하니, 굳이 선후를 묻는다면 기선이후(氣先理後)가 된다.
셋째로 말단(찌꺼기)의 기이니, 이때의 기는 리를 가리거나 멸하여 해치는 것이다. 예컨대 “다만 음양·오행의 기가 하늘과 땅 가운데 흘러들어 빼어난 것이 사람이 되고 찌꺼기는 사물이 된다. 빼어난 것 가운데 빼어난 것은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며, 빼어난 것 가운데 찌꺼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불초한 사람이 된다.”20) 결국 성인·현인과 달리, 어리석고 불초한 사람이 있는 것은 말단의 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세 가지 기 가운데 곽종석이 말한 것은 맨 마지막 부분에 해당된다. 이 때문에 조긍섭은 비록 “기의 비천한 것을 살피고 기록하는데 부족할지라도” 즉 마지막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더라도, 곽종석의 해석이 매우 공정하거나 공평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기에는 ‘찌꺼기의 기’뿐만 아니라, ‘허령한 기’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조긍섭의 기에 대한 해석이 곽종석보다 더 폭넓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조긍섭은 첫째 부분, 즉 허령한 ‘정상’의 기가 있기 때문에 심의 지각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생각건대, 수·화·목·금·토는 기의 바탕과 같다. 거슬러 올라가면 또 이른바 음양이라는 것이 있으니, 음양의 허령함(靈)이 귀신이 되며, 주자도 지각을 기의 허령한 것으로 여겼으니, 기에 허령한 지각이 있음은 결코 숨길 수 없다. 이 허령한 지각은 비록 리에 의지하여 신묘하게 작용하지만, ‘리에 의지한다’는 것으로써 기에 전혀 지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21)
기의 바탕은 수·화·목·금·토 오행이고, 오행으로 분화되기 이전으로 소급해가면 음양이라 한다. 여기에서 조긍섭은 ‘음양의 기’와 ‘음양의 허령한 기’를 주자의 말에 근거하여 분명히 구분한다. 주자에 따르면, “음양이 아직 귀신이라 말할 수 없으나, 음양의 허령한 것은 바로 귀신이다.”22) “귀신은 음양의 허령한 것이다.”23) 즉 허령한 기가 귀신(神)이 되며, 이러한 귀신의 신묘한 작용이 바로 지각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허령한 지각은 비록 리에 의지하여 신묘하게 작용하지만, ‘리에 의지한다’는 것 때문에 기에 전혀 지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주자 역시 지각을 기의 허령한 것으로 여겼으니, 기에 허령한 지각이 있음은 결코 숨김 수 없다.” 결국 심의 지각은 허령한 기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곽종석은 리에 의지하여 신묘한 작용이 있으므로, 허령한 지각을 그대로 리로써 해석한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의 심에 대한 해석은 결국 지각을 ‘기로 볼 것인지 리로 볼 것인지’의 문제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이에 조긍섭은 사람의 ‘신명’을 허령한 기로써 해석한다.
사람의 신명(神明)은 진실로 기를 독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氣)와 지(志)가 신(神)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기는 진실로 신령한 곳이 있고, “담연히 허명(虛明)하다”라고 하였으니 기는 진실로 밝을 때가 있거늘, 오히려 문하(곽종석)께서는 유독 꿈틀거리고(蠢然) 부지런히 움직이는(矻然) 것을 기로 여기고, 음양이 엉기어 움직이는 것을 정신으로 여기니, 어찌 이런 것이 있음을 볼 수 있겠는가.24)
주자에 따르면, “심은 사람의 신명이니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25) 사람의 신명은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으니 “진실로 기를 독차지하지 않는다” 즉 전적으로 기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조긍섭은 사람의 신명을 ‘허령한 기’로 해석한다. 이러한 신명, 즉 허령한 기의 작용이 바로 지각이다.
조긍섭은 그 이유를 주자의 말에 근거지어 설명한다. 주자의 “지(志)와 기(氣)가 신(神)과 같다”26)거나 “담연히 허명(虛明)하다”27)라는 말에 따르면, 기에는 진실로 신령한 곳이나 밝은 때가 있다. 그런데도 곽종석은 “유독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것을 기로 여기고, 음양이 엉기어 움직이는 것을 정신으로 여기니” 즉 운동·작용하는 거친 것만을 기로 여기니, “어찌 이런 것이 있음을 볼 수 있겠는가” 즉 기에 신령한 곳이나 밝은 때가 있음을 보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어서 조긍섭은 심에서의 ‘허령한 기’의 역할을 재차 강조한다.
사람의 온몸은 기로써 바탕을 이루고 리가 각각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목·간·폐의 기는 기의 거친 것이기 때문에 그 리 또한 한쪽으로 치우칠 뿐이다. 심이라는 몸은 다만 기로는 다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특별히 ‘허령’으로 말하였고, 리는 지극히 신묘하여 허령으로도 말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대개 심이 비록 만 가지 변화를 주재하지만, 실제는 또한 사람의 한 몸이다. 오직 <심이>기의 허령함을 얻었기 때문에 리를 온전히 갖출 수 있을 뿐이고, 그렇지 않다면 <심에>갖추어진 리는 이·목·간·폐와 같을 뿐이니, 어찌 만 가지 변화를 주재할 수 있겠는가. 리의 허령함을 논할 것 같으면, 이·목·간·폐가 갖춘 것도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유독 심만 그러하겠는가. 그렇다면 먼저 기를 말하고 뒤에 리를 말하는 것은 말의 형세가 마땅히 이와 같다.28)
조긍섭은 심을 심장의 하나로써 사람 몸의 일부로 해석한다. 이것은 곽종석이 심을 본체개념으로 해석하는 것과 구분된다. 예컨대 “사람의 몸은 기로써 바탕을 이루고 리가 각각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기가 형체를 이루면 리가 또한 부여된다는 뜻이다. 다만 사람의 몸에서 이·목·간·폐의 기는 ‘거친 것’이니, 이때는 리 또한 거친 기에 가려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러나 이·목·간·폐와 달리, 심은 다만 “기로는 다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즉 기로서는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기 중에서도 신령하고 밝은 기라는 의미에서 ‘허령’이라 한다. 반면 리는 지극히 신묘하여 “허령으로도 말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즉 허령으로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허령’은 어디까지나 기의 허령한 것이므로 리에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곽종석이 ‘허령’을 그대로 리로써 해석하는 것과 구분된다.
이처럼 조긍섭은 심에서 ‘허령한 기’의 역할을 강조한다. 심이 비록 온갖 변화를 주재하지만, 실제는 사람의 한 몸이다. 심이 사람의 한 몸으로써 온갖 변화를 주재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기의 허령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결국 심이 허령한 기를 얻어야 리를 온전히 갖출 수 있으며, 만약 심이 허령한 기를 얻지 못하고 거친 기를 얻으면, 리 역시 거친 기에 가려서 온전히 갖추어지지 못한다. “심이 어찌 온갖 변화를 주재할 수 있겠는가.” 심이 온갖 변화를 주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기가 허령해야 한다. 그래야 주자의 말처럼 “심이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29) 이 때문에 “먼저 기를 말하고 뒤에 리를 말하는 것은 말의 형세가 마땅히 이와 같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조긍섭은 심의 지각은 기의 허령함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심은 기의 허령함에 리가 갖추어진 것일 뿐이니, 그 주재하는 것은 진실로 리이지만 그것이 능히 지각하고 능히 작용하는 것은 요컨대 기를 벗어나는 것이 없다. 지금 잡기(雜氣)나 합기(合氣)로써 대략적으로 심과 성을 하나로 여기고, 또 “<심이>곧 리라고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 심이 본래 선한 줄을 알지 못하고 장차 그 진망(眞妄)이 서로 섞인 것을 본심으로 여긴다”라고 하였는데, 긍섭은 또한 장차 “<심이>곧 리라고 범범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이 심에 불선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장차 그 진망이 서로 섞인 것을 본심으로 여긴다”라고 할 것이다.30)
곽종석이 심에서의 리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조긍섭은 심에서의 기의 역할을 강조한다. 리가 기 속에 갖추어진 것이 심이니, 심에는 리와 기가 함께 있다. 이때 주재하는 것은 리이지만, 심이 지각하고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기의 역할이니 “요컨대 기를 벗어나는 것이 없다.” 심의 지각작용은 전적으로 기의 역할이지 리의 역할이 아니다. 이 때문에 조긍섭은 심에서 기의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심을 리로만 해석하는 곽종석에 대해 “잡기(雜氣)나 합기(合氣)로써 대략적으로 심과 성을 하나로 여긴다”라고 비판한다. 심과 성은 하나가 아니라 둘로 구분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심에는 주재와 달리 지각작용에 해당하는 기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곽종석은 왜 심을 리로써 해석하는가. “만약 <심이>곧 리라고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심이 본래 선한 줄을 알지 못하여 장차 심에 진망(眞妄, 선악)이 서로 섞여있는 것을 본심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곽종석이 심을 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쉽게 선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면, 다른데서 구할 필요 없이(수양공부가 필요 없이) 본래부터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선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이 때문에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과 선한 심이 나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조긍섭처럼 ‘심에 진망(선악)이 섞인 것을 본심으로 여긴다면’, 순자의 성악설처럼 망(妄, 악) 또한 본심으로 여기게 되므로 매우 위험하다.
반면 조긍섭은 심을 리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심이>곧 리라고 범범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이 심에 불선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장차 그 ‘진망’이 서로 섞인 것을 본심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조긍섭이 심을 리라고 말해서 안 되는 이유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에 불선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심에 불선이 있음을 알면, 사람들의 주관적·자의적인 판단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에는 리와 기가 함께 있으니, 반드시 심의 본체만을 리로 삼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곽종석이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심을 리로 해석한 것이라면, 조긍섭은 ‘심에 불선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심을 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조긍섭은 곽종석의 해석이 양명이나 불교처럼 자칫 사람들의 주관적 판단이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대로 수양공부로 이어지는데, 곽종석이 본심(선)을 잘 확충해나갈 것을 강조한다면, 조긍섭은 불선한 마음을 변화시켜나갈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양명과 주자의 공부 방법상의 차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Ⅲ. 면우 곽종석의 심론
곽종석 심론의 특징은 심즉리(心卽理)에 있다. 심에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심이 심다울 수 있는 것(심이 한 몸을 주재할 수 있는 것)은 리 때문이니 심은 리가 되어야 한다. 이에 곽종석은 ‘심즉리’의 관점에서 ‘심합이기’를 주장하는 조긍섭을 비판한다.
조긍섭이 심과 성을 둘로 구분하는 것과 달리, 곽종석은 심과 성을 하나로 해석한다.
심과 성은 참으로 한 물건이지만, 성은 오로지 적연하여 고요한 것을 가리키고, 심은 동정을 관통하여 두루 유행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심이 성에 비하면 약간 자취가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 구분은 다만 이와 같을 뿐이니, 주자가 말한 “지나치게 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그러하다. 이단이 인식하는 심과 같은 것은 바로 정신과 영혼의 작용을 성으로 인식한 것이니, 만일 의리의 본심을 성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바로 정자와 주자<와 같은> 여러 선생의 뜻이다.31)
심과 성은 본래 한 물건이다. 다만 성은 오로지 적연하여 고요한 것만을 가리키고, 심은 동정을 관통하여 두루 유행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말할 뿐이다. 예컨대 심은 오장의 하나인 심장(心臟)과 달리(이때는 기이다),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32)거나 “심의 기관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33)는 것으로써 본래부터 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주자가 말한 “심은 성에 비하면 약간 자취가 있으나, 기에 비하면 자연히 또한 신령하다”34)라는 뜻이다. 물론 심이 형상이 없는 성과는 다르지만, ‘기에 비하면 신령하므로’ 심을 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주자는 “<심과 성이>분별이 없을 수 없지만, 또한 지나치게 둘로 나누어 말해서는 안 된다”35) 즉 조긍섭처럼 심과 성을 둘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또한 곽종석은 이단(불씨)의 심이 정신과 영혼의 작용을 성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유가의 심은 ‘의리의 본심(本心)’을 성으로 삼은 것이요 이것이 바로 정자와 주자의 뜻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곽종석이 말하는 심은 정신과 영혼과 같은 기(지각)의 작용이 아니라, ‘의리의 본심’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곽종석은 조긍섭처럼 심과 성을 둘로 구분하면, 부여되는 리가 성이므로 심에는 결국 기만 남게 된다고 비판한다.
<심에>갖추어진 리를 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심은 다만 혈기의 기관일 뿐이다. 이와 같이 말하면 과연 진실로 타당한가. 내가 말하기를, 성을 합하여 말하면서 심의 본체가 바로 성이라고 말하면 옳지만, 일률적으로 성은 심의 통체(統體)라고 말하면 옳지 않으니, 어떠한지 모르겠다.36)
조긍섭에 따르면, 성은 진실로 심의 본체로써 심에 갖추어진 리이므로 곧장 심이라고 말하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심에는 리와 함께 기가 있으니, 곽종석처럼 심을 리라고 말하면 심에서 기의 부분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곽종석은 심에 갖추어진 리를 곧장 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이때의 심은 다만 혈기의 기관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 심에는 성 부분이 빠지고 기만 남기 때문이다. 결국 심은 기가 되므로(心是氣) 옳지 않다.
따라서 심과 성을 ‘합하여 말하면서(하나로 말하면서)’ 심의 본체는 성이라고 하면 옳지만, 다만 일률적으로 성은 심의 통체(統體, 총괄하는 전체)라고 말하면 옳지 않다. 심속에 성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심의 본체는 성이 되지만, 심의 전체를 곧장 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심이 곧장 리가 아니라 심의 본체가 리라는 말이니, 이것은 조긍섭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곽종석은 심이 심다울 수 있는 것은 심의 본체 때문이니, 결국 심을 리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조긍섭과 달리, 곽종석은 심에서의 성(리)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곽종석은 “만약 심으로써 성을 삼으면 해치고 탐내는 것도 또한 성이다”라는 조긍섭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생각건대, 맹자가 말한 심은 하나도 잡기(雜氣)의 심에 미친 적이 없고 오로지 사람의 성정 위에 나아가 그 본연의 양심을 가리킨 것이니, 바로 성을 논하면서 반드시 요순을 칭한 것과 같다. 사단지심(四端之心)은 곧바로 사람이 모두 이 진심(眞心)을 가지고 있음을 말할 뿐이고 이 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배척하였으니, 어찌 일찍이 해치고 탐내는 것으로 피아(彼我)를 세우고 상대를 점하여 저것도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겠는가. 지금 맹자의 본의로써 구해보면, 그 해치는 자를 보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탐내는 자를 보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 아닌 것인데, 사람의 마음으로 허락하겠는가. 만약 본심을 논하지 않고 심이 불선(不善)에 흐르는 것까지 총괄해서 말하면, 방벽·사치도 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본성을 논하지 않고 성이 기욕(氣欲)에 빠진 것까지 겸하여 말하면, 해치고 탐내는 것도 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37)
심은 리와 기가 합쳐진 것이지만, 맹자가 말한 심은 기를 섞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정(性情) 위에 나아가 그 본연의 양심만을 가리킨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맹자께서 성선(性善)을 말하되, 말마다 반드시 요순을 칭하였다”38)라는 뜻이다. 주자에 따르면, 성은 사람이 태어날 때에 하늘에서 부여받은 이치이니 지극히 선하여 악이 없다. 그러므로 중인과 요순이 처음에는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다만 중인은 사욕에 빠져서 그 성을 잃었으나 요순은 사욕의 가려짐이 없어서 그 성을 꽉 채울 뿐이다. 이 때문에 맹자께서 늘 ‘성선’을 말하면서 반드시 요순을 칭하여 실증한 것이다.39)
따라서 맹자의 사단지심, 즉 측은·수오·사양·시비지심은 사람이 모두 이 진심(眞心 또는 본연의 양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으로써 이러한 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배척한 것이지, 예컨대 측은지심과 상대되는 기해지심(忮害之心)이나 수오지심과 상대되는 탐매지심(貪昧之心)과 같은 것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맹자의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40)라는 말에 근거하면, 해치는 자는 사람이 아니고 탐내는 자는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결국 해치거나 탐내는 자는 사람이 아닌 것이니 “어찌 사람의 마음으로 허락하겠는가.” 즉 ‘기해지심’과 ‘탐매지심’과 같은 것은 진정한 사람의 마음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긍섭이 사람의 마음에도 기해지심과 탐매지심이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조긍섭의 심은 기와 섞거나(雜氣) 기와 합하여(合氣) 말한 것이지만, 곽종석의 심과 성은 모두 기와 섞거나 합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심의 본체(본심)나 본연지성을 말한 것이다. 만약 기와 섞거나 합하여 말하면, 즉 “본심을 논하지 않고 심이 불선(不善)에 흐르는 것까지 총괄해서 말하면”, 방벽·사치도 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본성을 논하지 않고 성이 기욕(氣欲)에 빠진 것까지 겸하여 말하면”, 해치고 탐내는 것도 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기해지심’과 ‘탐매지심’과 같은 것은 맹자의 본뜻이 아니니, 조긍섭의 주장은 옳지 않다.
조긍섭이 심에서의 기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 기의 역할 중의 하나로써 지각작용을 말하는 것과 달리, 곽종석은 심에서의 리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 리의 역할 중의 하나로써 지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각 역시 기가 아니라 리가 된다.
이에 곽종석은 조긍섭이 말하는 지각은 형기의 작용이지 심의 지각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것은 바로 형기가 작용한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심으로 여겼으니, 감히 묻건대 이것이 ‘심이 곧 기’라는 뜻과 다름이 있는가. 나는 일찍이 주재가 심이라는 것은 들었으나 작용이 심이라는 것은 듣지 못했으니, 그대의 말은 혹 근거가 있는가. 정자는 “눈과 귀는 보고 들을 수 있으나 멀리할 수 없는 것은 기가 유한하기 때문이며, 심은 멀고 가까움이 없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눈·귀와 심은 각각 주관하는 바가 있으니, 어찌 똑같이 한 기관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보고 듣는 것은 얕고 막히는 곳이 있으나 심의 신명(神明)은 헤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 심이 <눈과 귀의>보고 듣는 것과 그 구별이 이와 같은데, 지금 바로 보고 듣는 것을 심으로 여기니, 우매한 제가 당혹스럽다.41)
곽종석은 보고 듣는 작용과 심의 지각을 분명히 구분한다.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것은 다만 형기의 작용일 뿐이다. 조긍섭은 이러한 형기의 작용을 곧장 심으로 여겼으니, 그렇다면 “심이 곧 기라는 뜻과 다름이 없으니” 결국 심은 곧 기가 된다.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것은 형기(기)의 작용이지, 곽종석이 말하는 지각이 아니다. 곽종석이 말하는 지각은 보고 듣는 것과 같은 형기의 작용이 아니라, 주재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곽종석은 “주재가 심이라는 것은 들었으나 형기의 작용이 심이라는 것은 듣지 못했다”라고 비판한다.
이에 곽종석은 형기의 작용과 심의 지각이 다른 구체적인 사례를 정자와 주자의 말에 근거지어 설명한다. 정자(정호)에 따르면,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으나 멀리할 수 없는 것은 기가 유한하기 때문이며, 심은 멀고 가까움이 없다.”42) 눈과 귀가 보고 듣는 것은 형기의 작용이므로 한계가 있으나, 심은 혼연한 하나의 이치(리)로써 동정을 관통하므로 안과 밖(內外), 멀고 가까움(遠近), 정밀하고 거침(精粗)이 없다. 그러므로 이 둘은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기의 작용이고, 후자는 리의 작용이다.
주자 역시 耳目의 기관과 심의 기관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이목의 기관이 곧 심의 기관이라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 이목과 심은 각각 주관하는 것이 있으니, 어찌 똑같이 한 기관이 될 수 있겠는가. <눈과 귀가>보고 듣는 것은 얕고 막히는 곳이 있으나, 심은 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다.”43) 눈과 귀는 먼 것을 보고 들을 수 없지만 심은 어떠한 막힘이 없다. 이 때문에 이목의 기관과 달리, “심은 신명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물을 주재한다.”44) 이처럼 눈과 귀가 보고 듣는 ‘형기의 작용(기)’과 ‘심의 지각(리)’은 그 구별이 이와 같이 다르지만, 조긍섭은 이들을 모두 심의 지각으로 해석하니 옳지 않다.
이 때문에 곽종석은 심의 허령함을 리로써 해석한다. 이것은 조긍섭이 심의 허령함을 기로써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심이 기의 허령함이면, 심은 기이고 갖추어진 리는 더부살이 하는 사람이다. 더부살이 하는 사람이 어찌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지각할 수 없으면 장차 무슨 도리로 주인이 되겠는가. 조작·운용하는 것은 본래 기이지만, 심의 허령함이 과연 작용하는 것이겠는가. 주자가 “허령은 본래 심의 본체이니 어찌 형상이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면재(횡간)가 “이 심의 리가 밝고 어둡지 않은 것은 그 허령한 지각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허(虛)는 이 리가 형체가 없음을 말한 것이고 령(靈)은 이 리가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한 것인데, 일체를 기라는 것으로 해당시키면, 이것은 아마도 리와 기를 합하는 <심의>종지가 아닐 것이다.45)
조긍섭의 말처럼 심의 허령함이 기라면, 이것은 심이 곧 기라는 말이다. 심이 곧 기라면, 심에 갖추어진 리는 주인이 되지 못하고 더부살이 하는 사람이 된다. “더부살이 하는 사람이 어찌 주인이 되겠는가.” 심이 주인이 되려면, 심의 허령함이 기가 아니라 리가 되어야 한다. 심이 허령해야 지각할 수 있고, 지각할 수 있어야 주인이 될 수 있다. “지각할 수 없으면 장차 무슨 도리로써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결국 심이 주인이 되려면 지각할 수 있어야 하고, 지각할 수 있으려면 심이 허령해야 하니, 이때 심의 허령함은 기가 아니라 리가 된다.
또한 조긍섭의 말처럼 조작·운용하는 것은 본래 기이지만 “심의 허령함이 과연 작용하는 것인가” 즉 심의 허령함은 작용·운용하는 기가 아니다. 이에 곽종석은 주자와 황간의 말에 근거하여 심의 허령함을 기가 아니라 리로써 해석한다. 예컨대 주자에 따르면, “허령함은 본래 심의 본체이니 … 어찌 형상이 있겠느냐.”46) 허령함은 심의 본체이니 기가 아니라 리이다.
또한 황간에 따르면 “이 심의 리가 밝고 어둡지 않은 것은 그 허령한 지각 때문이다.” 심이 허령하기 때문에 지각이 가능하다. 이때 ‘허’는 이 리가 형체가 없음을 말한 것이고 ‘령’은 이 리가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니, 결국 심의 허령함은 리가 된다. 그렇지만 조긍섭처럼 “일체를 기라는 것으로 해당시키면” 즉 심의 허령함을 기라고 하면, 결국 심에는 기만 있게 되니, “이것은 심이 리와 기를 합하는 종지가 아니다.” 심은 리(허령함)와 기(바탕)가 합한 것이며, 이때 심의 허령함(리) 때문에 지각이 가능하다. 이것은 조긍섭이 심의 허령함을 곧장 기의 지각작용으로 해석하는 것과 구분된다.
이 때문에 곽종석은 ‘리에는 지각이 있으나 기에는 지각이 없다’고 강조한다.
리로서는 지(智)의 명칭이 있고, 기로서는 다만 수·화·목·금·토일 뿐이니, ‘리에는 지(知)가 있으나 기에는 지(知)가 없다’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물며 ‘기무지(氣無知)’ 세 글자는 선현이 이미 말한 것이지, 내가 감히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정신이 기인 것도 다만 음수(陰水)가 응취하고 양화(陽火)가 활동한 것일 뿐이니, 빼어난 기가 모이면 리가 의뢰하여 그것을 신묘하게 하기 때문에 또한 영각(靈覺)할 수 있을 뿐이다. … 리로써 그것을 신묘하게 함이 있지 않으면 어찌 영각이 있겠는가.47)
리에는 지각이 있으나 기에는 지각이 없다. 왜냐하면 리에는 인·의·예·지에 해당하는 지(智)의 명칭이 있으나, 기는 다만 수·화·목·금·토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혼백이 기가 되는 것도 다만 “음수(陰水)가 응취하고 양화(陽火)가 활동한 것일 뿐이다.” 즉 기의 작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에는 지각이 없다(氣無知)’라는 말은 선현이 이미 말한 것이지, 내가 감히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따라서 음양·오행의 기로는 지각할 수 없고, 오직 리가 그것(심)을 신묘하게 함으로써 지각할 수 있다. “빼어난 기가 모이면 리가 의뢰하여 그것을 신묘하게 하기 때문에 또한 영각(靈覺,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조긍섭의 말처럼 빼어난 기가 곧바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리의 신묘함이 가해짐으로써 비로소 지각이 가능하다. 결국 심의 지각은 <조긍섭처럼>허령한 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리가 심을 신묘하게 한 결과이다. “리로써 그것을 신묘하게 함이 있지 않으면, 어찌 영각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주자의 “지각(知)과 같은 것은 심의 신명이 온갖 이치를 신묘하게 하여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48)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심의 지각은 기가 아니라 리가 된다.
이어서 곽종석은 리의 지각은 기의 작용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성은 곧 리이고 발하여 정이 되니, 정은 바로 이미 움직인 성이다. 애초에 성이 변하여 기가 되는 것이 아니니, 성과 정은 다만 하나의 리일 뿐이다. 정의 기틀이 전환하여 의(意)가 되고, ‘의’가 향하여 정해져서 지(志)가 되니, 또한 다만 하나의 리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칭해져서 기를 타고 유행한다는 이유로 곧 지목하여 운동·작용하는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각과 사고는 바로 이 심의 신묘함으로 온갖 이치를 구별하고 만사(萬事)를 재단하는 것이니, 어찌 꿈틀꿈틀 운동하고 부지런히 작용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 가만히 보면 귀하의 뜻은 심의 리가 발하는 곳에 대해서도 모두 운동·작용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처리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와 같다면 그 리라는 것은 성이 적연할 때에 한번 자리를 잡은 외에는 모두 관통하여 작용을 이룰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49)
성은 리이고 발하여 정이 되니(性發爲情) 성과 정은 하나의 리일 뿐이다. 이때 정은 성이 움직인 것(발한 것)이지, 성이 변하여 기가 된 것이 아니다. 만약 조긍섭처럼 심의 리가 발하는 것을 모두 기의 운동·작용으로 이해하면, “리라는 것은 성이 적연할 때에 한번 자리를 잡은 외에는 모두 관통하여 작용을 이룰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리가 심에 부여되어 한번 성이 된 이후에는 어떠한 성의 역할도 없으니, 그렇다면 성이 발하여 정이 될 수도 없다. 이것은 퇴계(이황)가 이발(理發)을 인정한 것처럼, 성의 실재적인 발동을 인정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성이 발하여 정이 되니 성과 정은 하나의 리일 뿐이다. 또한 “정의 기틀이 전환하여 의(意)가 되고, ‘의’가 향하여 정해져서 지(志)가 되니, 다만 하나의 리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칭해져서 기를 타고 유행할 뿐이다.” 정(情)·의(意)·지(志) 역시 모두 리가 발한 것으로써, 다만 기를 타고 유행하는 과정에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불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기를 타고 유행한다는 이유 때문에 리를 곧바로 운동·작용하는 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비록 기를 타고 유행하지만 모두 리가 발한 것이니, 기가 아니라 리라고 해야 한다.
지각과 사고 역시 이 심의 신묘함이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萬事)를 재단(주재)하는 것이니 “꿈틀꿈틀 운동하고 부지런히 작용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다.” 즉 기의 운동·작용과는 분명히 구분된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곽종석은 조긍섭이 “심의 리가 발하는 곳에 대해서도 모두 운동·작용하는 것으로 처리하려고 한다”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곽종석이 말하는 심의 지각은 무엇인가.
주자가 지각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말한 곳(偏言)이 있으니 예컨대 『맹자집주』「고자」에서 가리킨 것이 이것이고, 총괄해서 말한 곳(統言)이 있으니 예컨대 “리와 기를 합하면 곧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 이것이며, 오로지 말한 곳(專言)이 있으니 예컨대 이른바 ‘지각은 지(智)의 일이고’ 이른바 ‘지각은 심의 덕이다’는 것이 이것이다. 진실로 지각의 실질은 지(智)에 있으니 정신·혼백을 그 몸으로 간주할 수 없다. … 지금 그대의 편지에는 지각을 작용의 물건에 해당시키고 인·의·예·지를 그 법칙으로 삼으니, 주자의 뜻과 다르지 않는가.50)
곽종석은 주자가 말한 지각이 편언(偏言)·통언(統言)·전언(專言)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고 설명한다. 첫째 ‘편언’한 것은 바로 『맹자집주』 「고자(상)」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에 이 성이 있지 않음이 없고 또한 이 기가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기로써 말하면 지각·운동은 사람과 사물이 다르지 않은 것 같으나, 리로써 말하면 인·의·예·지를 품수받은 것이 어찌 사물이 얻어서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51) 이때의 지각은 눈과 귀가 보고 듣는 것과 같은 형기의 작용에 해당한다.
둘째 ‘통언’한 것으로는, 예컨대 ‘지각은 심이 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가 하는 것인가’라는 제자의 질문에, 주자가 말하기를 “오로지 기가 아니고 먼저 지각의 리가 있다. 리는 지각하지 못하니, 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고 리와 기가 합하면 지각할 수 있다.”52) 이때의 지각은 리와 기를 합한 것에 해당한다.
셋째 ‘전언’한 것으로는, 예컨대 “지각은 본래 지(智, 지혜)의 일이다.”53) 지(智)는 인·의·예·지 사덕의 하나이니, 인(仁)이 심의 덕이듯이54) ‘지’ 역시 심의 덕이 된다. “지각은 바로 심의 덕이다.”55) 이때의 지각은 ‘지의 일’이나 ‘심의 덕’에 해당한다.
이처럼 곽종석은 지각을 세 가지로 구분하지만, 그럼에도 “진실로 지각의 실질은 지(智)에 있으니 정신·혼백을 그 몸으로 간주할 없다.” 즉 지각의 실질은 정신·혼백과 같은 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의 일’이나 ‘심의 덕’과 같은 리에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조긍섭이 심의 지각을 정신·혼백과 같은 기의 작용으로 해석한 것과 구분된다. 이 때문에 곽종석은 조긍섭이 “지각을 작용의 물건(기)에 해당시킨다”고 비판한다.
또한 곽종석은 조긍섭이 기의 작용을 심의 지각으로 보았기 때문에 ‘심즉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귀하(조긍섭)가 심을 작용하는 물건을 여겼기 때문에 ‘심즉리’의 설에 대한 의심이 이와 같으니, 어지럽고 우활한 것이다. 만약 주재의 신묘함을 알면 혹 이런 <의심이>없을 수 있다.”56) 조긍섭이 곽종석의 ‘심즉리’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심의 지각을 작용하는 물건(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심에는 지각과 같은 기의 작용이 있으므로 곧장 리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곽종석은 조긍섭과 달리 심의 지각을 리로써 해석하니, 리의 신묘한 주재에 의해 심의 지각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곽종석은 “주재의 신묘함을 알면 이런 의심이 없을 수 있다” 즉 조긍섭이 주재(리)의 신묘함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Ⅳ. 결론
조긍섭과 곽종석 심론의 이론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심과 성은 하나인가 둘인가. 조긍섭은 십합이기(心合理氣)의 관점에서 심과 성을 둘로 구분한다. 심은 리와 기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때 성=리라면 심=리+기이다. 예컨대 우물이 곧장 물이 아니듯이, 심 역시 곧장 성(리)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심에는 물에 해당하는 성과 땅에 해당하는 기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물의 본질은 땅이 아니라 땅 속의 물이듯이, 심의 본질은 기가 아니라 기 속에 있는 성이 된다. 이때 심의 본질(리)을 강조한 것이 바로 곽종석의 심즉리(心卽理) 해석이다. 조긍섭 역시 곽종석과 마찬가지로 심의 본질을 리로써 해석한다.
그렇지만 비록 심의 본질이 ‘리’라고 하더라도, 이때 리를 실현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이니, 곽종석처럼 심을 곧장 리로써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선악의 개념으로 설명하더라도, 성은 순선무악하나 심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곽종석처럼 심을 곧장 리로써 해석하면, 심에 있는 해치거나 탐내는 불선한 마음까지 성으로 간주될 수 있으니 옳지 않다.
반면 곽종석이 ‘심즉리’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심에 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곽종석도 기가 없으면 리를 실현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게다가 ‘형상이 없는 성과 달리, 심에는 자취가 있다’라고 하여, 심과 성의 차이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심과 성을 지나치게 둘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조긍섭처럼 심과 성을 둘로 구분하면, 결국 심에는 성 부분이 빠지고 기만 남아 심이 곧장 기가 되기 때문이다(心是氣). 또한 ‘해치거나 탐내는 불선한 마음도 성이 된다’는 조긍섭의 비판에 대해서도, 사단지심(四端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맹자의 말에 근거하여 해치거나 탐내는 자는 이미 사람이 아니므로 그 마음을 논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한다.
둘째, 심의 지각은 기인가 리인가. 심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지각작용이다. 조긍섭이 심의 지각을 기로써 해석한다면, 곽종석은 심의 지각을 리로써 해석한다. 심이 사람의 한 몸이지만(심장의 하나) 온갖 변화를 주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심은 어째서 온갖 변화를 주재할 수 있는가. 조긍섭에 따르면, 심이 온갖 변화를 주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기가 허령해야 한다. 심의 기가 허령해야 기 속에 내재하는 리 역시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萬事)를 주재할 수 있다. 만약 기가 허령하지 못하면(거친 기라면), 리 역시 거친 기에 가려서 온갖 이치를 갖추지 못하므로 결국 만사를 주재할 수 없다.
또한 심의 지각 역시 ‘허령한 기’에 의해 가능하다. 여기에서 조긍섭은 기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허령한 정상(精爽)의 기, 둘째 리를 싣거나 태워서 그것을 실현하는 기, 셋째 리를 가리거나 해치는 찌꺼기의 기가 그것이다. 조긍섭은 이들 중에서 특히 ‘허령한 기’에 주목하는데, 이때 허령한 기의 작용이 바로 심의 지각작용이다. 결국 심에는 기에 해당하는 지각작용이 있으므로 곽종석처럼 심을 곧장 리로써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곽종석 역시 심이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를 주재할 수 있는 것은 심의 허령함 때문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조긍섭과 달리, 곽종석은 심의 허령함을 리로써 해석한다. 그렇다면 심의 지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리로써 그것(심)을 신묘하게 함이 있지 않으면, 어찌 영각(靈覺, 지각)이 있겠는가.” 심에 리의 신묘함이 가해짐으로써 지각이 가능하다. 심의 지각은 조긍섭의 말처럼 허령한 기의 작용이 아니라 ‘허령한 리’가 그것(심)을 신묘하게 한 결과이다. 이렇게 볼 때, 곽종석은 지각과 주재를 모두 심의 허령함(리)에 근거지어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곽종석이 심의 지각을 편언(偏言)·통언(統言)·전언(專言)의 세 가지로 구분하지만, 지각의 실질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지(智)의 일’이나 ‘심의 덕’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조긍섭이 지각을 정신·혼백과 같은 기의 작용으로 해석한 것과 구분된다. 따라서 곽종석은 조긍섭이 심의 지각을 기의 정신작용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심즉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볼 때, 조긍섭이 심의 지각을 기의 허령함으로 해석한다면, 곽종석은 심의 지각을 리의 허령함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론의 이론적 차이가 현실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무엇보다 곽종석이 심을 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쉽게 그 선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따로 수양공부가 필요 없이 나에게 있는 선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반면 조긍섭이 심을 리라고 말하는데 반대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에 불선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심에 불선이 있음을 알면, 양명이나 불교처럼 사람들의 주관적·자의적인 판단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심에 불선함이 있으므로 선하게 변화시키는 수양공부가 필요하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의 심론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결국 수양공부와 같은 실천으로 이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그대로 한말(韓末)의 위정척사·항일의병·독립운동의 이론적 근거로 이어진다. 예컨대 곽종석처럼 심을 곧장 리로 해석할 경우, 심이 리의 위치로 격상되어 스스로 도덕적 주체자가 되므로 당시 국권상실에 항거하는 항일운동에 주체적 결단과 강한 실천력을 발휘하는데, 예컨대 일제의 침략을 각국의 공관(公館)에 호소하기도 하고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장서(長書)를 보내어 독립의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반면 조긍섭처럼 십합이기(心合理氣)로 해석할 경우, 심이 곧 리가 아니므로(심에 不善이 있으므로) 객관적 표준인 성을 따라야 하는 수동적 성격을 띠게 되므로 당시 현실에 능동적 참여보다는 입산자성(入山自靖)하여 저술과 강학과 같은 소극적 형태의 사회실천을 전개한다. 이에 금장태는 “한말 성리학의 학맥으로 항일의병운동에 가장 강력한 입장을 취한 것은 심을 리로써 해석하는 기호의 이항로·기정진 학맥과 영남의 이진상 학맥이라 할 수 있다”57)라고 평가한다. 이것이 바로 19-20세기에 심에 대한 해석을 두고 정재·한주·화서·노사·간재학파 등 학파적 분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