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인도에 기원을 둔 불교는 중국에 전래된 뒤로 동아시아에서 보편종교의 구실을 했다. 이는 불교사서인 고승전(高僧傳)이 동아시아 각국에서 지속적으로 저술된 데서도 확인된다. 중국에서 양(梁)의 혜교(慧皎, 497~554)가 처음 『고승전』을 저술한 뒤로 『속고승전(續高僧傳)』(649), 『송고승전(宋高僧傳)』(988), 『대명고승전(大明高僧傳)』(1617) 등이 계속해서 편찬되었다. 한국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이 『고승전』을 지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215) 일부가 지금까지 전하는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도 고승전의 성격을 띤다. 일본에서도 『원형석서(元亨釋書)』(1322),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1702) 등 다양한 고승전이 저술되었다.1)
고승전 저술의 역사에서 혜교의 『고승전』이 첫머리가 되는 까닭은 ‘고승전’이라는 명칭을 처음 쓴 데도 있지만, 이후의 고승전들에서 기본적으로 따르는 십과(十科) 체재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고승전’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은 『삼국유사』와 『원형석서』가 고승전에 포함되는 까닭도 이 십과를 기본으로 한 데에 있다.2) 고승전 자체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일부인 ‘열전(列傳)’에 해당하지만, 십과라는 체재를 통해 불교사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고승전』의 십과는 후대의 고승전 저술에서 크거나 작은 변화를 겪었다. 고승전이 불교사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불교사에서 일어난 변화에 따라 또는 저자의 인식에 따라 십과의 형태나 의미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고승전』에서 정립된 십과는 『속고승전』에서 곧바로 변형을 겪었고, 『대명고승전』에서는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또 불교사의 추이에 따라 각 과목(科目)의 의미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네 고승전의 십과를 각각 분석해서 비교한다면, 저자의 인식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나아가 십과에 불교사의 어떤 변화가 담겨 있는지를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의 네 고승전을 통시적으로 비교해서 논의한 경우는 아직 없었다. 이시이 슈우도오(石井修道)가 『대명고승전』에서 일어난 십과의 붕괴를 거론하면서 선종 교단의 등장과 연관지어 설명한 연구가 있을 뿐이다.3) 중세 내내 고승전 저술의 전통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통시적 고찰이나 비교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각 고승전이 특정한 시기의 불교사를 반영하는 ‘불교사서’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주로 전기집으로 이해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된다.4) 고승전이라는 명칭, 십과라는 공통된 체재 등이 그런 인식을 강화한 측면도 있다. 따라서 고승전은 불교사서로 다루어야 마땅하며, 특히 다각도로 비교했을 때 각각의 특성과 의의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본고는 그런 연구의 필요성에서 출발해 그 타당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다.
본고에서는 네 고승전의 십과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 그 형태와 의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통해 저자들의 인식을 밝히려 한다.5) 따라서 저자의 주장이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는 ‘서문’6) 그리고 각 과목의 말미에 서술된 ‘논(論)’을 중점적으로 분석한다. 먼저 『고승전』에서 십과가 마련되는 과정과 특성을 살피고, 이어 『속고승전』과 『송고승전』에서는 십과의 형태가 어떻게 변하고 그 의미는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고찰한다. 그리고 끝으로 『대명고승전』에서 일어난 십과의 붕괴를 다룬다.
Ⅱ. 십과(十科)의 정립 : 『고승전』
혜교의 『고승전』(14권)은 한(漢) 명제(明帝) 때인 영평(永平) 10년(67)부터 양(梁) 천감(天監) 18년(519)까지 대략 453년 동안 활동한 고승(高僧)들을 싣고 있다. 본전(本傳)에 257명, 부전(附傳)에 243명, 모두 5백여 명에 이른다. 혜교는 이들을 “그 공덕과 업적을 펼쳐서 크게 열 개의 갈래로 나누었다.”7) 열 개의 갈래는 역경(譯經), 의해(義解), 신이(神異), 습선(習禪), 명률(明律), 망신(亡身),8) 송경(誦經), 흥복(興福), 경사(經師), 창도(唱導) 등이며, 이른바 십과(十科)다.
혜교가 처음부터 십과를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과목인 「창도」의 ‘논(論)’을 보면, “고승전을 처음 지을 때, 본래는 팔과(八科)로 전기를 이루려 했다. 그러나 경사와 창도 두 부문에서 뛰어난 이들을 찾고 보니, 비록 도에서는 끄트머리가 되지만 속인들을 일깨우므로 내세울 만했다. 그리하여 이 두 갈래를 더해 ‘십’이라는 수를 이루었다”9)라고 썼다. 이는 처음에 「역경」에서 「흥복」까지 여덟 과목을 설정했다가 뒤늦게 ‘경사’와 ‘창도’를 더해서 ‘십과’ 체재를 마련했다는 말이다. 권14의 「서록(序錄)」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불법이 동쪽 땅으로 흘러든 것은 대개 연이어 번역한 공훈에 말미암았다. 어떤 이는 사막과 산들을 넘어 건너왔고, 어떤 이는 커다란 파도를 타고 떠왔으니, 모두 불도를 따르느라 제 몸을 잊고 불법을 널리 펴느라 목숨을 버린 것이다. 진단(震旦, 중국)은 오로지 이에 힘입어 밝게 열렸으니, 이 공덕은 숭상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책의 첫머리에 두었다.[역경(譯經)] 지혜와 해석으로 정신을 열면 불도는 무수한 사람을 아우른다.[의해(義解)] 신통과 감응으로 알맞게 교화하면 강포한 자가 누그러진다.[신이(神異)] 생각을 가라앉히고 선정에 들면 공덕이 무성해진다.[습선(習禪)] 율법을 널리 밝히면 행실을 삼가서 맑고 깨끗해진다.[명률(明律)] 형체를 잊고 몸을 버리면 뽐내며 잗달던 사람이 마음을 고친다.[망신(亡身)] 진리의 말씀을 노래하고 외우면 귀신과 사람들 모두 기뻐한다.[송경(誦經)] 복을 심고 선을 일으키면 남은 형상을 전할 수 있다.[흥복(興福)] 무릇 이 여덟 과목(의 고승들)은 그 자취가 같지 않고 그 교화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든 덕은 사의(四依)를 본받았고, 공은 삼업(三業)에 있었다.10)
팔과를 설정한 까닭과 의의를 밝힌 뒤에 “무릇 이 여덟 과목은”이라고 말한 데서 본래는 팔과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서록」이 「경사」와 「창도」 두 과목을 추가하기 전에 이미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록」에서는 위의 글에 앞서 분명히 ‘십과’의 명칭을 전부 나열했다. 그럼에도 「경사」와 「창도」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추가하지 않은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애초에 ‘팔과’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경사」와 「창도」를 덧붙이기로 했을까? 『고승전』의 전반적인 지향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전에 먼저 팔과의 특성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처음의 팔과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을 뼈대로 한 체재다. 「역경」은 불교의 교리를 담은 경전들을 번역하는 데 이바지한 고승들을, 「의해」는 그 경전들에 담긴 심오하고 미묘한 진리를 풀어 밝히기 위해 애쓴 고승들을 각기 다루고 있다. 붓다의 지혜를 전하는 경전 그리고 그 지혜의 해석과 관련되므로 둘 다 혜학(慧學)에 해당한다. 이어 「습선」은 ‘선정(禪定)’에 뛰어난 고승들을, 「명률」은 율학(律學)에 밝은 고승들을 싣고 있으므로 각각 정학(定學)과 계학(戒學)에 해당한다. 삼학이 불교 수행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당연해 보인다.
나머지 네 과목도 삼학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신이」는 신통력으로 이적을 나타내는 데 뛰어난 고승들이 실려 있는데, 혜교는 「습선」의 ‘논(論)’에서 “네 가지 지혜와 여섯 신통력은 선정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11)고 했다. 따라서 「신이」는 삼학 가운데 ‘선정’과 직접 관련된다. 「망신」은 자신의 몸을 짐승들에게 내주거나 분신공양한 고승들을 다루고 있는데, 혜교는 “굉장한 지혜와 통달한 견해가 있어 자기를 버리고 남들을 바라본다”12)고 했다. ‘망신’은 ‘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뜻이다. 「송경」의 고승들은 경전을 끊임없이 외우면서 그 뜻을 새기므로 역시 ‘지혜’와 잇닿아 있다. 「흥복」은 복을 일으키는 불상과 불탑 등의 인연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혜교가 그 ‘논’에서 “불도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지혜를 근본으로 하고, 지혜는 반드시 복덕을 기반으로 한다. 비유하자면 새가 두 날개를 갖추어야 천 길 위로 솟아오르고, 수레에 두 바퀴가 있어야 천 리를 한달음에 내달리는 것과 같다”13)고 말한 데에 드러나 있듯이 「흥복」 또한 ‘지혜’와 관련이 깊다.
이렇게 팔과는 삼학과 그 확장으로 볼 수 있는 과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삼학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깨달음과 해탈을 구하는 자리행(自利行)이다. 그런데 위의 「서록」에서 보았듯이 팔과의 의의를 ‘교화’나 ‘중생 구제’에 두고 있다. 이는 이타행(利他行)에 중점을 두었다는 뜻이다. 대승불교이기에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혜교는 「역경」의 고승들이 “불법을 전하고 경전을 널리 폄으로써 비로소 중국을 교화했다”14)고 썼다. 또 「서록」에서도 밝혔듯이 「의해」는 무수한 사람을 아우르고, 「신이」는 강포한 자가 누그러지게 하며, 「망신」은 잗달던 사람이 마음을 고쳐 먹게 하고, 「송경」은 귀신과 사람들을 모두 기쁘게 만든다고 했다. 「흥복」 또한 불탑과 불상을 통한 교화를 목적으로 한다. 심지어 자리행의 성격이 아주 강한 「습선」과 「명률」에서조차 교화가 강조되었다. 「습선」에서 혜교는 “선정의 작용은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신통력에 속해 있다”15)고 했다. 신통력은 이적을 일으키는 힘이다. 실제로 「습선」에는 선정에 뛰어난 고승들이 갖가지 신이들을 일으켜 교화를 펼친 행적들을 서술했다.16) 「명률」 또한 율행(律行)과 율학(律學)에 뛰어난 고승들을 다루지만, 그들이 주로 한 일은 속인들의 마음을 얻어 불도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렇게 ‘삼학’을 기본으로 한 팔과는 ‘교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렇다면, 속인들을 일깨우는 데 의의가 있다며 「경사」와 「창도」를 추가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경사(經師)」와 「창도(唱導)」는 권13에 「흥복」과 함께 배치되었다. 분량으로 보자면, 그리 비중이 높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이 있다.
「경사」에는 전독(轉讀)에 뛰어난 고승들이 실려 있다. 전독은 법언(法言)을 노래하거나 읊조리는 인도의 범패(梵唄)에서 비롯된 방식으로,17) 경전의 내용을 가락 있는 소리로 읊조리는 일이다. 혜교가 ‘논’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번역되었으나, 범어의 울림은 전해지지 않았다”18)고 말했듯이 본래 법언, 곧 붓다의 설법은 운율을 갖추고 있었다.19) 그러나 한문은 범어와 언어적 성질이 전혀 달라 번역으로는 본래의 운율을 살려낼 수 없었다.20)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전독이었다. “가락을 짓는 데에 일정한 기준은 없었으나 장구(章句)를 잘 나누고 잘랐으므로 (소리가) 곱고 아름다우면서도 또렷했다”21)고 한 석도혜(釋道慧)처럼 「경사」의 고승들은 경전의 편장(篇章)을 나누고 곡조를 붙여서 암송해 대중에게 들려주었던 것이다.
혜교는 또 “범패를 들으면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다. 몸이 지치지 않고, 기억한 것을 잊지 않으며, 마음이 느슨해지거나 게을러지지 않고, 가락 있는 소리가 허물어지지 않으며, 모든 천신들이 아주 기뻐한다”22)고 썼다. 범패를 모방한 것이 전독이므로 전독을 듣는 이로움을 열거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몸이 지치지 않으면서 잘 기억하고 또 마음을 늘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전독의 효과는 경전을 읽을 능력이나 여가가 없는 대중, 특히 고된 생업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힘들게 법회에 참석한 하층 민중에게는 더없이 컸으리라 여겨진다. 이로써 보면, 전독은 사부대중 누구나 경전, 곧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송경」에서 배제된 사람들, 특히 여성들과 하층 민중까지 교화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경사」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경전을 읽을 줄 알고 욀 줄 아는 승려들조차 그 내용을, 그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를 이해하거나 깨닫는 일이 지극히 어렵고 힘든데, ‘전독’을 듣고 기억하는 것만으로 알고 깨닫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마련된 것이 「창도(唱導)」다. 이는 “경사들의 전독에 관한 일은 앞 장에서 내보였다. 그러나 그 모두 깨달음을 즐기며 때맞게 풀어내서 삿됨을 뽑고 믿음을 세워야만 한 푼이라도 일컬을 만한 일이 생긴다. 그러므로 『고승전』 말미에 이어놓았다”23)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혜교는 “창도란 무릇 불법의 의리(진리)를 드러내 가르쳐서 대중의 마음을 열어 이끄는 것이다”24)라고 했다. 「경사」가 경전의 내용을 널리 대중에게 알린 고승들을 입전했다면, 「창도」는 경전의 의미를 맛보게 해서 마음을 열게 하는 데 힘쓴 고승들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혜교는 “창도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네 가지인데, 목소리, 말솜씨, 재주, 박식함 등이다25)”라고 했는데, 대중의 마음을 일으키고 적절한 말을 때맞게 하며 아름다운 표현을 종횡으로 구사하고 경전과 논서, 사서(史書) 따위에서 자유로이 인용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26) 이는 「경사」와 마찬가지로 신분과 근기가 다른 모든 대중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가령 출가한 다섯 무리(비구·비구니·식차마나·사미·사미니)를 위해서라면 절실하게 무상(無常)을 말해주어 간곡하게 참회하도록 해야 한다. 군왕과 장자 들을 위해서라면 세속의 책들도 아울러 끌어와 아름답게 말을 엮어야 한다. 불법과 거리가 먼 범부와 서민들을 위해서라면 사물을 가리키고 형상을 지으며 보고 들은 것을 곧바로 이야기해야 한다. 산과 들에 사는 민중을 위해서라면 비근한 언사를 써서 죄가 될 일을 멀리하도록 해야 한다.27)
『고승전』의 체재는 처음에 ‘팔과’였다가 나중에 ‘십과’를 이룬 것이었다. 팔과는 자리행보다 이타행에, 수행보다 교화에 치중한 체재였는데, 「경사」와 「창도」가 더해지면서 그런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고승의 수행보다 교화한 공덕을 주로 서술하고 강조했음은 각 과목의 전기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혜교는 『고승전』을 저술하면서 처음으로 십과 체재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십과를 통해 교화를 강조했다. 이는 처음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는 교화가 우선될 수밖에 없다는 혜교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인데, 실제 그러했던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도 있다.28)
Ⅲ. 십과의 변화와 지속 : 『속고승전』과 『송고승전』
혜교의 『고승전』은 도선(道宣, 596~667)이 저술한 『속고승전』(30권)으로 이어진다. 도선은 양(梁)나라 건국에서부터 당의 정관(貞觀) 19년(645)까지 대략 144년 사이에 활약한 고승들 가운데 340명을 본전에, 160명을 부전에 실었다. 고승들의 수는 『고승전』과 같으나 활동 기간이 3분의 1이니 거의 세 배나 증가한 셈이다. 이는 이 기간에 불교가 더없이 융성했음을 말해주는데, 앞서 『고승전』에서 살펴보았듯이 수많은 고승들이 교화에 힘쓴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속고승전』의 십과에는 그런 융성이 도리어 불교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속고승전』의 십과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역경(譯經)」(권1~4)이고, 두 번째는 「의해(義解)」(권5~15)이며, 세 번째는 「습선(習禪)」(권16~20)이고, 네 번째는 「명률(明律)」(권21~22)이며, 다섯 번째는 「호법(護法)」(권23~24)이고, 여섯 번째는 「감통(感通)」(권25~26)이며, 일곱 번째는 「유신(遺身)」(권27)이고, 여덟 번째는 「독송(讀誦)」(권28)이며, 아홉 번째는 「흥복(興福)」(권29)이고, 열 번째는 「잡과(雜科)」(권30)다.”29) 기본적으로 『고승전』의 십과를 따르고 있으나, 시대가 달라진 탓인지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고승전』과 비교하면, 「신이」는 「감통」으로, 「망신」은 「유신」으로, 「송경」은 「독송」으로 바뀌었고, 「경사」와 「창도」는 합쳐져 「잡과」가 되었으며, 「호법」이 새로 추가되었다.
『속고승전』의 십과에서 먼저 주목할 부분은 추가된 「호법」이다. 도선은 십과를 나열한 뒤에 “「호법」 한 과목은 바른 그물에서 벼리에 해당하며, 반드시 여러 전기들의 서술에 붙어서 어떤 것이 공적인지 아닌지를 알게 해준다”30)라며 특별히 「호법」만 거론했다. 바른 그물은 곧 불법을 가리키며, 벼리에 해당한다는 것은 불법을 지탱하는 축이라는 뜻이다. 도선은 그런 축이 곧 ‘호법’이라 하면서 다른 과목의 고승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고도 했고 또 과목으로도 설정했다. 이렇게 ‘호법’이 중요해진 것은 불교가 어떤 위기에 직면했음을 의미한다. “지키는 일은 삿됨을 바로잡는 데 있으며, 삿됨이 바로잡히면 바야흐로 믿음의 뿌리가 열린다”31)고 하고 또 “「호법」 한 과목은 이미 무너진 정강(正綱, 불교의 본령)을 세운다”32)고도 한 「호법」의 ‘논’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면, 불교가 맞닥뜨린 위기는 무엇이며, 삿됨을 바로잡고 이미 무너진 정강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도선은 “원위(元魏, 386~534) 때 삿됨을 존중하자 담시가 그 강포한 방해를 제압한 일은 이전의 『고승전』에 뚜렷히 드러나 있고 … 북주(北周, 557~581) 무제(武帝)는 노자의 무리만 편들고 넓혔다”33)고 해서 두 차례의 폐불(廢佛) 사건을 거론했다. 원위 곧 북위(北魏) 때의 법난(法難, 446~452)은 태무제(太武帝)가 도교를 신봉하며 불교를 탄압한 사건인데, 이는 『고승전』 권10의 <석담시(釋曇始)>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북주의 법난은 574년에 무제가 불교를 금한다는 조칙을 내리며 벌어진 사건이다. 후자의 법난에서는 도교 또한 금지되었으나, 도선은 법난의 뒤에 장빈(張賓)이라는 도사가 있다고 보았으므로 역시 도교가 법난의 요인인 셈이다.34)
그렇다면, 삿됨은 도교를, 위기는 법난을 가리키는가? 두 번의 법난은 각각 7년, 5년 정도 이어졌을 뿐이다. 게다가 도선이 “불교의 도가 동쪽으로 와서 세상에 널리 퍼졌다고 일컫지만, 그 번영과 무성함으로 따지자면 양(梁)나라와 제(齊)나라 때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35)고 말했듯이 남조(南朝)에서는 여전히 번성했으며 곧이어 천하를 통일한 수(隋)나라에서도 불교 진흥책을 썼기 때문에 결정적인 위기가 외부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36) 앞서 ‘호법’과 관련해 도선이 “무너진 정강을 세운다”고 한 발언을 감안하면, 오히려 원인은 불교 자체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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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금 사람들은 장구(章句)에 집착해 얄팍한 해석을 퍼뜨리며 도리어 온갖 번뇌를 심을 뿐, 청정한 업을 짓지 못하고 있다. 생사를 초월하는 가르침의 뜻이 어찌 그러한 것이겠는가? 설법대로 행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는 것, 이것이 참으로 (불교의) 종지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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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요즘 선정을 배우는 자들은 함부로 풍속을 교화하려다가 세속의 견해에 똑같이 매여 붓다의 자취를 흐리면서 가벼이 여긴다. 색에서 공을 밝히지만 이미 말들이 마음에 차 있고, 어지러운 데에 몸을 두고 고요해지려 하지만 참으로 몸은 번거롭기만 하다. 그리하여 신령한 작용은 응대하는 말에서 사라지고, 선정의 형상은 입술에서 썩어간다.38)
① 은 「의해」의 ‘논’에 나오는 대목이다. 『속고승전』 30권에서 「의해」는 권5에서 권15까지 열한 권이다. 「역경」이 네 권, 「습선」이 다섯 권, 「명률」이 두 권이니, 「의해」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경전의 ‘의리 해석’에 몰두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지만, 소수의 고승들이 고승전에 실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훨씬 많은 수의 승려들이 ‘의리 해석’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길로 또는 그릇된 길로 나아갔음을 암시한다. ① 은 그런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② 는 「습선」의 ‘논’에서 끌어온 대목인데, 선정을 잘못 배우고 행하는 이들의 행태를 서술하고 있다. 본래 고요한 곳에 머물며 오로지 마음에 집중해야 하는 선정은 참으로 어려운 수행이다. 그럼에도 이를 쉽게 여기는 승려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습선」은 「의해」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데, 이 또한 선정을 곡해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반증한다.
불교의 기본인 삼학 가운데 혜학(慧學)과 정학(定學)만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 「습선」에서 도선은 말법 시대에는 “선정과 지혜의 길은 끊어져 세간에 계율만 널리 편다”39)라고 했는데, 「명률」을 보면 계율조차 올바로 실행되지 않았던 듯하다. 도선은 “아! 계율은 불법의 생명이어서 널리 펴면 그 생명이 온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널리 펴려 하지 않아 정법이 이에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깊이 슬퍼할 일이로다!”40)라고 탄식했다. 나아가 “세상에는 계학(戒學)에서 헤매는 자들이 네 부류 있다”41)고 하면서 하나하나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 계율의 문제가 아주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삼학이 곡해되면 수행도 그릇되어 어떠한 공덕도 짓기 어렵다. 「잡과」는 『고승전』에서 아주 중시한 「경사」와 「창도」를 합친 것인데, 도선은 경사와 창도를 하는 승려들이 “듣는 사람이 깨쳤는지 헷갈렸는지는 알지 못한 채 일시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만 귀하게 여긴다”42)고 하며 역시 당시의 행태를 비판했다. 자리행이 부실한 승려의 이타행이 초래하는 후과를 꼬집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승전』에서 혜교가 뒤늦게나마 중요하게 여겨서 덧붙인 「경사」와 「창도」를 도선이 하나로 합친 까닭도 ‘교화’보다 ‘수행’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작용한 결과로 여겨진다. 「유신」에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목이 있다.
성인의 가르침을 과목으로 정리한 데에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다. 참으로 애착은 망상에서 일어나는데, 망상을 알면 애착이 좇을 바가 없어진다. 그런데 내심으로 돌아가 잡도리할 줄 모르고 바깥의 사물을 깎아내느라 헤맨다.43)
지혜를 갖추지 못하면 망상에서 비롯된 애착에 끌려다니면서 헤맨다는 것은 불교의 기본 교리다. 이를 도선은 십과와 관련해서 말했는데, 그것은 각 과목의 근거가 되는 공덕은 모두 올바른 수행과 실천으로 갖춘 지혜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미혹된 승려들이 정법을 무너뜨리고 불교를 위기에 빠뜨린 상황을 깊이 인식한 데서 나온 발언이다.
『속고승전』에 입전된 고승들의 활동 시기는 양나라에서 당나라 초기까지다. 이때는 불교가 매우 융성하던 시기다. 『고승전』의 십과에서 혜교가 강조했던 고승들의 ‘교화’가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시기에 불교는 날로 번성하면서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선은 그런 번성 안에서 꿈틀대는 위기를 감지했다. 수행과 교리의 기본인 삼학이 부실해지고 곡해되면서 시류에 영합해 대중을 기만하는 사이비 승려들이 대거 등장한 사실을 주목한 것이다. 도선이 『속고승전』에서 「호법」을 새로 마련하면서 삼학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다룬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요컨대 『속고승전』의 십과는 불교의 외적 확산보다 내적 토대의 구축을 중시해 수행, 즉 올바른 교리의 이해와 실천에 방점을 찍고 있다.
『속고승전』을 잇는 『송고승전』(30권)은 찬녕(贊寧, 919~1001)의 저술이다. 여기에 수록된 고승은 본전에 532명, 부전에 125명, 모두 657명이다. 입전된 고승들의 8, 9할이 불교가 번성한 당나라 때 승려라는 점과 『속고승전』 저술로부터 350여 년이 흐른 점을 감안하면, 의외로 적은 수다. 그만큼 엄정하게 선별해서 수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송고승전』의 십과는 명칭과 순서 모두 『속고승전』을 그대로 따랐다. 체재의 형식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셈이다. 그렇지만, 십과의 의미나 의의에서도 『속고승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각 과목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달라진 데서 어떤 변화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속고승전』에서는 「의해」가 열한 권으로 전체의 3분의 1을 넘었고, 그 다음으로 「습선」이 다섯 권, 「역경」이 네 권이었다. 반면에 『송고승전』에서는 「의해」가 네 권으로 대폭 줄었으며, 「습선」이 여섯 권으로 가장 비중이 높아졌고 그 다음으로 「감통」이 다섯 권이다. 「감통」이 『속고승전』에서는 두 권이었다. 따라서 『송고승전』에서는 「습선」과 「감통」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찬녕은 「서(序)」에서 각 과목들의 성격을 사구게(四句偈)로 표현했는데, 「습선」에 대해 “수행이 지극해 생각이 없어지니, 선과 악이 모두 없어진다. 없어야 할 게 없으니, 한결같이 안락하다”44)라고 했다. 지극한 수행은 선정이 깊어진 상태를 말하는데, 그 결과가 ‘무념(無念)’ 곧 “생각이 없어짐”이라 했다. 이런 무념은 전통적인 선정(禪定), 다시 말해 삼학(三學)의 정학(定學)에서는 거론되지 않던 개념이다.
본래 선정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수행이다. 이런 선정은 혜학(慧學) 곧 지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체가 되어야 한다. 온갖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고요해진 상태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하는데, 열반이 지혜의 완성을 가리킨다면 적정은 선정으로 이룬 고요함이요 평안함이라 할 수 있다. 『속고승전』에서 「습선」의 ‘선(禪)’도 이런 선정이었다. 도선이 “참으로 고요한 데서 마음을 구하면 흐트러진 마음을 쉽사리 거두게 되고, 마음을 거두기 때문에 해탈할 수 있다”45)고 한 것이나 “저 선정과 지혜의 임무를 살펴보면, … 어지러움에서 벗어남은 선정의 일이며, 이치와 관련된 번뇌는 지혜의 일이다. (선정과 지혜는) 두 수레바퀴가 굴러 먼 길을 가는 것과 같고, 진제와 속제가 함께 노니는 일과 같다”46)고 한 것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선정의 의미가 『송고승전』에서는 사뭇 달라진다. 찬녕은 「습선」의 ‘논’에서 “범어로 선나는 중국말로 염수(念修)다. 대상에 따라 생각하되 생각이 없음이고, 하루종일 닦으나 닦음이 없는 것이다”47)라고 했다. 선정이 범어로 선나(禪那, dhyāna)이며 중국어로는 염수임을 밝혔다. 염수의 염(念)은 초기 불교에서 확립된 사념(四念) 또는 사념처(四念處)를 가리키는데,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을 관찰하는 명상법이다. 이는 선정에 담긴 본래의 뜻이다. 그런데 곧이어 찬녕은 무념(無念)과 무수(無修) 곧 ‘생각이 없음’과 ‘닦음이 없음’이 선정이라고 했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데, 사실은 선정의 의미가 중국화되면서 나타난 역설적 표현이다.
찬녕은 선정이 중국화되었음을 아주 자세하게 서술했다. 달마가 중국에 와서 수행자들이 이름과 형상에 매여 “손가락만 보고서 달은 잊고, 고기를 잡고서도 통발에 집착하며, 오로지 경전 외기와 마음 닦기만 공덕이 된다고 여기고 자기자신이 곧 부처임을 믿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서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립문자”(直指人心, 見性成佛, 不立文字)를 제창했다고 썼다.48) 이 세 구절은 곧 당대에 등장한 선종(禪宗)의 핵심 교의로서, 경전 중심의 교종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선정에서 벗어난 선종의 독자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어서 “경전에서는 자세하게 가리키는데, 자세하게 가리킴은 곧 점수(漸修)다. 견성성불이란,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청정해 처음부터 번뇌가 없으며 무루지성(無漏智性)을 스스로 다 갖추고 있음을 돈오(頓悟)하는 것이다”49)라고 한 데에도 선종의 종지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이때 양무제가 알아보지 못했고 위 땅 사람들도 존중하지 않았으므로 (달마는) 소림에서 벽을 마주하고 좌선했는데, 혜가만이 정신적으로 교감했다. … 혜가는 승찬(僧璨)을 낳고, 승찬은 도신(道信)을 낳았다. 도신 아래에서 두 가지가 나왔으니, 하나는 홍인(弘忍)이고 다른 하나는 법융(法融)이다. 법융은 우두종(牛頭宗)이다. 홍인은 신수(神秀)와 혜능(惠能)을 낳았다. 혜능이 도신의 의발을 전하니, 마치 제후가 자손들에게 종묘의 제기를 나누어준 것과 같다. 그 뒤로 이 종파는 아주 융성했다.50)
위의 글은 찬녕이 「습선」의 ‘논’에서 서술한 선종의 계보다. 앞서 언급한 선정의 의미 변화와 더불어 생각해 보면, 『송고승전』의 「습선」은 『속고승전』과 동일한 과목의 명칭을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전통적인) 선정을 익히다”가 아니라 “(선종의) 선을 익히다”라는 의미로 바뀐 것이며, 이는 선종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송고승전』에서 갑작스럽게 비중이 높아진 「감통」은 또 어떠한지 살펴보자. 찬녕은 혜교가 『고승전』에서 처음 「신이」라는 과목을 세운 뒤에 도선이 그것을 바탕으로 변통한 것이 『속고승전』의 「감통」이라 했다.51) 『송고승전』에서는 이 명칭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랐는데, 「습선」처럼 의미 변화가 있었을까?
먼저 찬녕은 “『역경』으로 불법을 전하는 일은 믿음을 내게 한다. 「의해」와 「습선」은 깨닫고 알게 한다. 「명률」과 「호법」은 수행하고 실천하게 한다. 「신이」와 「감통」은 과위(果位)를 증명해준다”52)라고 했다. 여러 과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셈인데, 이전의 고승전에서 더 나아간 견해다. 「습선」을 두고 깨달아 알게 해준다고 한 것은 앞서 살펴본 ‘선정’의 의미 변화와 일맥상통한다. 마찬가지로 「신이」와 「감통」을 모두 깨달아 얻은 경지를 증명해주는 과목으로 본 것도 상당한 의미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본래 『고승전』에서 「신이」는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속고승전』에서 「감통」은 올바른 수행과 실천의 필요로 설정되었다.53) 그럼에도 두 고승전 모두 신통력은 선정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송고승전』에서는 ‘감통’을 깨달아서 이른 경지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주체와 대상이 함께 감응하여 통하니, 그렇다면 이승(성문과 연각)의 깨달음으로 감통하지 못할 게 없다”54)고 한 것과 “지혜의 문이 열리는 곳, 바로 거기에서 육신통이 생긴다”55)고 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육신통이 곧 갖가지 신이를 일으키는 힘임은 두 말할 것 없다.
찬녕은 ‘감통’을 선정이 아닌 지혜와 연결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감통」의 비중이 대폭 높아졌다는 것은 고승들이 보여준 신이(神異)가 아주 많아졌다는 뜻이다. 이는 불교도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유교나 도교 쪽에 의심과 의혹을 더하게 할 빌미가 될 수 있다. 찬녕이 「감통」의 ‘논’을 “단약이 이루어져 운수를 바꾸므로 복용하면 신선이 된다. 지혜가 단련되는 공부를 하면 깨달음의 경지를 증명하는 경험을 한다”56)는 말로 시작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도교의 이적과 불교의 신이가 유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높고 낮음에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누군가가 물었다. “감통은 괴이함에 가깝다는 말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괴이하다면 괴이하나, 사람들의 일상 밖에 있다. 참으로 범부들이 괴이하다고 느끼는 것에 가깝다면, 그것은 이치에 어긋나고 도리를 저버린 무리의 짓이리라! 이 (불법의) 괴이함은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도 없으니, 겨우 그 언저리에 이를 수 있을 따름이다. … 신선은 수련으로 괴이함을 이루고 귀신은 저절로 괴이함이 되는데, 불법으로 일어난 괴이함은 이것들과 다르다. 왜 그런가? 무수한 겁을 지나면서 정법에 기대어 수행을 지극히 하면, 무루과위(無漏果位, 번뇌 없는 깨달음의 경지) 속에서 신통을 부리는 일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런 괴이함이 바른 괴이함인 줄 알라.”57)
『송고승전』에서는 『속고승전』의 십과를 그대로 이었지만, 형식상의 지속과 달리 내용과 의미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또한 각 과목에 대한 인식이 더욱 정교해지고 체계화되었다. 찬녕이 「서」에서 보여준 십과에 대한 사구게에서도 그 점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불교사가로서 찬녕의 탁월한 식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이는 고승전 저술이 거듭되면서 그 체재인 십과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속고승전』에서 보여주듯이 불교의 융성 속에서 간과되고 소홀해진 교리 이해와 올바른 실천이 강조되면서 토대가 탄탄해진 결과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다. 선종이라는 독창적인 종파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습선」과 「감통」 모두 ‘지혜’ 곧 ‘깨달음’을 강조했는데,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다. 찬녕은 「서」에서 「역경」은 “성인의 경지에 들게 한다”(通凡入聖)고 했고 「유신」은 “번뇌로 더러운 몸을 금강신으로 바꾼다”(以穢漏體, 迴金剛身)고 했으며, 「잡과」는 “불승을 환히 드러낸다”(光顯佛乘)고 했다. 심지어 「흥복」에서도 “복이란 모든 성인의 섬돌을 오르는 것이다”58)라고 했다. 깨달음 또는 그것을 통한 성불이나 해탈은 불교의 본래 목적이므로 『송고승전』에서 그러한 점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의 『고승전』과 『속고승전』의 십과에서 강조한 바와 견주어 보면, 그저 당연하게만 볼 수 없다. 더구나 불교의 교리 체계는 방대해서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강조하는 바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고승전 저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저자의 인식과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송고승전』의 십과에서 비로소 해탈을 가능하게 하는 깨달음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59) 불교는 오로지 성불이나 해탈을 지향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송고승전』에서 그 점을 명확하게 제시하려 했다는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Ⅳ. 십과의 붕괴 : 『대명고승전』
『대명고승전』(8권)은 여성(如惺)이 1617년에 완성했다. 북송(北宋)부터 명대까지 고승들을 수록했는데, 본전에 138명, 부전에 71명으로 도합 209명이다. 『송고승전』 이후로 630여 년이 흐른 뒤의 저술이고 송대에 불교가 아주 번성했다는 사실, 그리고 “(명이 건국된 뒤로) 불교가 당과 송보다 더 흥성했다”60)는 여성 자신의 표현을 감안하면, 권수와 고승들의 수가 너무 적다. 전체 구성도 「역경」과 「해의(解義)」, 「습선」 세 과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체재로만 보자면, 십과가 붕괴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십과의 붕괴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여성이 저술 과정을 서술한 데에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다.
여성은 「서(敍)」에서 “육조의 여산 혜원, 당의 도선 율사, 송의 찬녕 등이 각각 승사(僧史) 및 고승전을 약간 수찬했다”61)고 썼다. 그가 ‘고승전 저술’의 전통을 인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달마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종지를 전하면서 선종이 나타나 불교사가 일변했다고 한 뒤에 “노나라가 한 번 변하면 도에 이른다고 할 만하다”62)라고 했다. 송대(宋代) 이후로 불교사가 선종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도원(道原) 선사를 필두로 학사 양대년(楊大年), 부마 이준욱(李遵勗) 등이 여러 전등록을 각각 저술했다. 우리 명조(明朝)에 들어서 성조(成祖, 영락제) 황제께서 정무로 바쁘신 여가에 승사와 전등록들 가운데서 신령하고 기이한 자취를 보인 이들을 가려내게 하시고 따로 ‘신승전’이라 하셨으니, 이 또한 몇 권으로 되어 있다.63)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거론되고 있다. 하나는 전등록(傳燈錄) 저술이다. 전등록은 선종에서 그 역사와 계보를 보이기 위해 기록한 선종사서(禪宗史書)다. 전등록 저술은 도원이 1004년에 편찬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30권)에서 시작되었다. 『경덕전등록』 편찬에 참여한 이가 양대년(974~1020)이다. 이준욱(?~1038)은 1029년에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30권)을 편찬한 인물이다. 『송고승전』(988년)에 이어 곧바로 두 권의 전등록이 저술되었으니, 당시 선종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송고승전』의 「습선」도 이런 상황을 일정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송대의 전등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불국선사(佛國禪師) 유백(惟白)이 1101년에 『건중정국속등록(建中靖國續燈錄)』(30권)을, 오명(悟明)이 1183년에 『연등회요(聯燈會要)』(30권)를, 승려 정수(正受)가 1204년에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30권)을 차례로 편찬했다. 보제(普濟, 1178~1253)는 1252년에 이 다섯 전등록을 종합한 『오등회원(五燈會元)』(20권)을 내놓았다. 송대는 그야말로 전등록 저술의 전성기였다.64) 여성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홍무(洪武, 1368~1398) 연간에 거정(居頂)은 『속전등록(續傳燈錄)』(36권)을 편찬해 이 전통을 이었다.
위의 글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은 1417년에 『신승전(神僧傳)』(9권)이 편찬된 일이다. 여기에 실린 신승들 208명은 한대(漢代)부터 원대(元代) 초기까지 걸쳐 있다. 이는 『신승전』이 통사(通史)이며, 고승전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대 초기에 송대의 전등록 저술을 이은 『속전등록』이 편찬된 사실을 아울러 고려하면, 여성이 보기에 고승전 저술의 전통은 거의 단절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여성이 뒤늦게 『대명고승전』을 저술했어도 십과 체재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여성이 굳이 의도했다면, 『송고승전』을 이어 십과 체재를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십과의 체재를 그대로 유지한 『보속고승전(補續高僧傳)』(26권)이 명하(明河, 1588~1641)에 의해 숭정(崇禎, 1628~1644) 연간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보속고승전』에서는 송대부터 명대까지의 고승들 621명(본전에 548명, 부전에 73명)의 전기가 실려 있다. 체재나 고승들의 수 등 여러 면에서 『송고승전』을 잇는 고승전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양·당·송의 세 고승전과 더불어 일컬어지는 것은 『대명고승전』이다. 그것은 『보속고승전』이 형식상으로는 고승전 저술의 전통을 이었지만, 불교사적 변화와 전환을 적실하게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고승전』에서 사뭇 달라진 십과를 명칭과 의미 모두 그대로 이어받아 쓴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반면에 『대명고승전』에서는 쇠퇴해 가는 불교의 실상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대명고승전』의 「역경」에는 본전 1명, 부전 2명으로 단 세 명이 입전되어 있다. 이에 대해 여성은 「역경」에서 “역경의 왕성함은 구마라집과 실차난타 등이 활약한 육조와 성당보다 더한 때가 없었다. 그러나 오대와 북송 때가 되면서 점점 줄었다. … 원나라 세조 때에 이르러 중화와 이민족이 일통되면서 비로소 역경의 임무가 되살아났다. 그렇지만 우리 명조에 들어서 홍무와 건원 이후로 삼장(三藏)이 꽤 넉넉해져 섭마등 같은 이가 오지 않게 되었으므로 이 「역경」의 사례도 그쳤다”65)고 썼다. 그는 『원사(元史)』에서 간신히 찾아낸 인물로 「역경」을 채웠다. 이는 ‘역경’의 역사적 추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합당하게 과목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보속고승전』의 「역경」에는 송대에서 명대까지 본전 14명, 부전 3명이 실렸는데, 그들의 공덕이 과연 「역경」에 실릴 정도인지는 의문이다.
여성은 또 명대 초기에 『신승전』이 저술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감통」을 두지 않았고, 불상이나 불탑을 통해 복을 짓고 선업을 닦도록 이끄는 「흥복」도 두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소리로써 대중에게 경전을 전하는 「잡과」 또한 두지 않았다. 이렇게 십과 가운데 일곱 과목을 생략한 것은 이미 불교가 토착화된 지 오래였으므로 그런 과목들이 더 이상 의의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명고승전』의 십과 붕괴는 저자인 여성의 불교사 인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여성은 「역경」과 더불어 「해의」와 「습선」을 그대로 두었다. 불교의 교리는 본질적으로 심오하고 미묘하므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승려들이 있는 한,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밖에 없다. 여성이 「해의」를 둔 이유다. 또 송대 이후로 불교의 전반적인 쇠퇴 속에서도 선종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으므로 「습선」을 둔 것도 당연하다. 물론 「습선」의 권수와 입전된 고승들의 수는 『송고승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선종 또한 교세가 날로 약화되고 있었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상 『대명고승전』은 고승전 저술이 역사적 의의를 이미 다하고 그 자리를 전등록 편찬이 대신한 뒤에, 심지어 전등록조차 더 이상 역사적 의의를 갖지 못하는 때에 편찬되었다. 실제 불교는 원대(元代) 이후로 쇠퇴했고, 신유학과 도교에 밀려난 상황이었다. 여성 자신도 「서」에서 “(송대 이후로) 승사와 전등록 등의 편찬 소식이 없다”고 탄식했다.66) 그럼에도 여성은 고승전 저술의 전통을 이어 『대명고승전』을 편찬했다. 이는 불교사의 추이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래도록 유지되어 왔던 십과 체재의 붕괴를 여실하게 보여주면서 불교사의 실상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불교사가로서 엄정한 역사인식을 갖추었다고 말할 만하다.
Ⅴ. 마무리
혜교는 『고승전』의 「서록」에서 이전의 갖가지 승전(僧傳)과 승사(僧史) 들을 거론했는데, 대체로 체계를 갖추지 못했을 저술들이었다. 그가 십과(十科)를 구상해서 체재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십과로 말미암아 고승전이 온전한 불교사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승전』을 이어 『속고승전』, 『송고승전』 등이 차례로 편찬되면서 고승전 저술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십과 체재는 큰 틀에서는 유지되었으나, 세부적으로는 고승전 저자의 인식에 따라 변형되거나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그 점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고승전』에서 혜교는 이름만 높은 승려가 아니라 덕이 높은 승려를 입전시키려는 의도에서 알맞은 체재를 갖추느라 고심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역경」에서 「흥복」까지 팔과(八科)를 구상했다가 부족함을 깨닫고 「경사」와 「창도」를 더해 십과를 갖추었다. 이 십과를 통해 혜교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널리 퍼지는 과정에서 ‘교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승들 또한 교화에 치중했음을 잘 보여주었다. 혜교의 십과는 『속고승전』에서 다소 변형되었다. 특히, 두드러진 것이 새로 설정된 「호법」이다. “불법을 지킨다”는 뜻의 이 과목에서는 불교의 위기를 읽을 수 있는데, 실제로 『속고승전』에서는 「호법」을 비롯해 거의 모든 과목들에서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도타운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혜교가 중시했던 「경사」와 「창도」가 하나로 묶여 「잡과」가 된 것도 교화보다 수행을 중시한 도선의 인식에 말미암은 것이다. 혜교가 교화를 중시하고 도선이 수행을 강조한 것은 불교사적 전개에서 볼 때, 꽤 타당한 인식이며 실제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불교는 외래종교로서 중국인들에게는 아주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것이 뻔하다. 따라서 교리의 전달보다 불교의 효용을 보여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점이 혜교의 교화 중시로 나타났으리라 생각된다. 실제로 교화를 중시한 덕분에 불교는 황실과 귀족들의 옹호로 교세를 확장하며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적인 팽창으로 말미암아 밖으로는 법난을 초래했고 안으로는 질적인 토대의 부실을 불러왔다. 이리하여 불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는데, 이 위기를 예리하게 인식하고 위기의 해결에서 큰 공덕을 세운 인물들을 실은 것이 『속고승전』이라 할 수 있다.
『송고승전』에서 찬녕은 『속고승전』에서 변형된 십과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과목들의 의미는 사뭇 달라졌다. 찬녕은 각 과목들을 통해 일관되게 지혜를 중시하고 깨달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해탈과 성불이라는 불교 본래의 목적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는 당대(唐代)에 화엄종, 법상종, 선종 등의 종파들이 대거 등장해 불성(佛性)과 깨달음의 철학을 편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송고승전』이 저술된 뒤로는 「습선」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선종의 시대가 열렸고, 불교사서의 편찬에서도 전등록이 주류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 고승전 저술의 전통은 거의 단절되었는데, 뒤늦게 여성이 『대명고승전』을 편찬했다. 『대명고승전』은 시대착오적인 저술로 폄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과 「해의」, 「습선」 세 과목만 남겨 두고 나머지 과목들을 없애는 과감한 선택을 한 데서, 즉 십과의 붕괴를 체재에서 그대로 드러낸 데서 역설적으로 여성의 뛰어난 역사인식을 읽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종 중심의 불교계 및 불교의 전반적인 쇠퇴 또한 여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이 『대명고승전』의 의의라 평가할 수 있다.
네 고승전의 저자들이 십과 체재를 통해 보여준 것은 각각 달랐다. 교화, 수행, 지혜 또는 깨달음, 불교 쇠퇴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중국 불교사의 전개를 어느 정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다양한 주제로 각 고승전의 내용을 더 심도 있게 분석하고 비교해야만 저자들의 인식과 의도가 적절했는지, 불교사의 흐름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이런 세부적인 비교 연구는 과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