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초기 인류는 매일 밤 불가에 앉아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삶과 고통을 공유하곤 했다. 그들을 치유하고 삶에 영감을 투사한 이야기들 대부분은 영웅과 영웅적 리더의 위업에 관한 것이었다.1) 숱한 영웅신화가 세계 곳곳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웅 이야기는 초기 인류에게 두려움을 완화시키고 희망을 싹트게 했으며 살아갈 힘과 회복력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그들을 심오하게 변형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 이야기는 친사회적 행동을 묘사하는 단순한 글 이상으로 이성적인 분석에 저항하는 ‘초이성 현상’을 나타냈고, 그런 초이성 현상은 고통, 희생, 의미, 사랑, 역설, 신비, 신, 영원으로 가득 찬 채 선과 악의 영원한 싸움을 의미했다.2) 이와 같이 구전을 통해 전해진 영웅과 영웅적 삶은 브레이(Bray)의 주장처럼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인간 사회의 상상력과 발전에 진화의 측면에서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3)
영웅과 영웅적 행동은 인간 삶의 정점을 나타낸다.4)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동이 영웅적 행위(heroism)이며 그런 최고의 삶을 살아간 사람에게 인류는 아낌없이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찬사해 왔다. 영국 스코틀랜드 철학자 칼라일(Thomas Carlyle)이 “사회는 영웅숭배에 기초한다”고 말한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5) 칼라일은 영웅숭배의 감정보다 더 고귀하고 축복받은 감정은 인간의 마음 속에 없다며 영웅숭배는 “모든 진실한 인간”이 “자신보다 높이 있는 것을 진정으로 경외함으로써 자신을 더 높아지게 하는”, 자아를 비옥하게 하는 촉매라고 생각했다.6) 하지만 비록 영웅이라는 단어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을지라도7) 시대와 공간에 따라 의미하는 바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8)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의미 변화는 선택받은 소수의 도덕적 엘리트 집단에서 평범한 사람 모두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며, 그래서 현대 사회는 장군이나 군왕, 심지어 신적 존재와 같은 ‘위대한 사람’인 ‘위인’에서 자신의 환경을 초월하여 평범에서 비범한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평범한 시민도 영웅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9) 이처럼 영웅 개념이 정적이지 않은 이유를 고설즈와 앨리슨(Goethals & Allison)은 인간의 인지구조과정에서 설명한다.10) 인간의 심리적 욕구가 영웅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 즉 욕망이 시간 속에서 변화하듯 영웅과 영웅적 리더에 대한 선호도도 변화하는 이른바 “자니 카슨 효과”(Johnny Carson Effect)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11) 이 두 연구자는 85명을 대상으로 한 실증연구에서 실험 참가자들이 건강문제가 있었을 때는 건강을 극복한 사람을, 우울증을 겪었을 때에는 우울증을 극복한 사람을 영웅으로 생각했고, 특별한 문제를 겪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연령이 늘어감에 따라 영웅이 바뀌었음을 발견하였다.
마이어(Meier)는 영웅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되지만 영웅의 원형은 바뀌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2) 영웅 이미지는 한편에서는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은 권위적인 인물을 나타낼 수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와 같이 인종 해방 신화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웅 이야기가 “나만큼이나 우리”에 관한 것이라는 씰(Seal)의 주장처럼13) 영웅을 논할 때는 거의 항상 사람이든, 제도와 같은 유형의 존재이든 제거하거나 소거해야 할 대상으로 대립적 타자의 존재를 당연시 해왔다.14) 다시 말해, ‘나 또는 우리 대 적(適)’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이 영웅의 원형 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최근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입구에 설치된 독립전쟁 영웅인 홍범도 장군 흉상의 철거 및 이전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듯15) 영웅은 역사적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회집단들에 의해 특정 이익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왜곡되고 악용·이용되었다.16)
현대에 이르러 희생과 대립적 타자를 기반으로 한 영웅의 원형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는 영웅이 특정 제도와 결합하거나 제도를 위한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한정될 때, 폭력과 파괴의 속성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어 존재 의의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해 보면 영웅을 칭송하는 기사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현대에도 영웅은 칭송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 영웅은 더 이상 민족이나 국가를 배경으로 타자를 제거하는 존재만을 가리키지 않고 다양해지고 있다.17) 예를 들어, 「‘묻지마 범죄’ 막은 시민 영웅」이나 「사람 탄 차 빠졌다, 태풍 속 바다 뛰어든 영웅」이라는 언론 기사에서처럼,18)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도 영웅으로 칭송되는 사람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영웅이 인류 역사에서 칭송이 된 본질적인 이유가 ‘살림’이었다면, 현대사회의 영웅은 과거보다도 온전하게 그 원형에 있어서 파괴나 폭력이라는 부차적 속성에서 벗어나 ‘살림’, 즉 상생이라는 본질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19)
영웅은 일반적으로 긍정적, 친사회적 현상으로 개념화되어 영웅과 영웅 숭배의 파괴적 측면, 더 나아가 광기는 도외시되었다.20) 이에 본 연구는 해원상생의 대순사상을 토대로 영웅의 파괴적 속성을 살펴보고 현대의 변화하는 영웅상을 기초로 증산이 추구하자고 했던 상생으로서 ‘살림’의 측면에서 영웅의 특성을 탐색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는 2장과 3장에서는 증산의 언설을 분석하여 전통적인 영웅관을 도출하고 영웅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 볼 것이며, 4장에서는 현대의 영웅이 증산이 예시한 상생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Ⅱ. 증산과 전통적인 영웅관
많은 사람이 영웅을 위인과 동일시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점은 사전에서 극명하게 나타내는데, 영웅은 ‘사회의 이상적 가치를 실현하거나 그 가치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위인은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뛰어난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두 단어를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웅을 위인과 동일시하면서 역사의 발전적 힘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사람은 칼라일이다. 그는 인류의 문명화 과정이 소수의 뛰어난 개인의 사상과 행동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이뤄낸 역사는 위인들의 역사이다”라고 말하며 “하늘에서 번개처럼” 나타난 이들 위인은 신, 예언자, 사제, 문학가, 왕의 모습으로 많은 사람의 숭배의 대상이어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21) 베버(Weber)도 칼라일과 유사하게 평범한 개인에게는 불가능한 “천부적” 자질로서 카리스마를 지닌 위인을 영웅으로 생각했다.22) 베버에 의하면, 영웅으로서 카리스마적 리더는 “고통, 갈등, 열정으로부터 태어난다”.23) 즉, 위기의 시대에 나타나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인물이 영웅이었다. 칼라일도, 베버도 영웅은 역사와 사회에 변혁적 힘을 가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웅을 역사발전의 힘으로의 인식은 『전경』에서도 발견된다. 증산은 영웅을 “바둑판을 가히 운전”하는 사람으로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광정(匡正)”하여 “천하를 평정”하는 행위를 영웅적 행동으로 인식하였다.24) 요컨대, 영웅소일대중화(英雄消日大中華)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25)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중국 당태종 이세민,26) 관우,27) 동학농민혁명을 선도한 명숙 전봉준28)과 수운 최제우,29) 독립운동에 헌신한 손병희30)와 최익현,31) 안중근32) 등이 이런 영웅의 기준에 해당하는 인물로 『전경』 속에 거론되고 있다. 증산에게 영웅적 행동이란 구시대의 혁파나 제도의 개혁과 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며 영웅은 그와 같은 대의명분을 희생적 삶으로 반응하는 인물이었다.33)
‘천하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리적 힘이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그래서 증산에게 영웅은 다음의 언설에서처럼 “만고의 명장”, 즉 장수라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하루는 종도들이 상제의 말씀을 좇아 역대의 만고 명장을 생각하면서 쓰고 있는데 경석이 상제께 “창업군주도 명장이라 하오리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그러하니라” 말씀하시니라. 경석이 황제(黃帝)로부터 탕(湯)·무(武)·태공(太公)·한고조(漢高祖) 등을 차례로 열기하고 끝으로 전 명숙을 써서 상제께 올리니 상제께서 그에게 “전 명숙을 끝에 돌린 것은 어찌된 일이뇨” 물으시니 경석이 “글을 왼쪽부터 보시면 전 명숙이 수위가 되나이다”고 답하였도다. 상제께서 그 말을 시인하시고 종도들을 향하여 “전 명숙은 만고 명장이라. 백의 한사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도다”고 일러 주셨도다.34)
무장을 영웅의 조건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조선 시대의 지배적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장령 임징하(任徵夏)는 나라를 바로 세우는 여섯 조목을 담아 영조에게 상소했는데, 이는 증산의 영웅관과 시사하는 바가 유사했다.
… 신이 생각건대, 전하께서 오늘 하실 도리는 … 반드시 옛날의 영웅과 같은 군주로서 나라를 창업하여 후손에게 전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를 회복한 자를 스스로 기약하실 것이며, 소소하게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지키면서 구차하게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마소서. 그러나 신이 또 생각건대, 오늘 전하는 창업군주에 비하여 더욱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창업군주는 반드시 영웅호걸과 같은 인사들과 함께 티끌 속에서 여러모로 힘쓰며 서로 격려하고 분발시켜서 공적을 세웠으므로, 그 뜻을 넓이기 쉽고 그 공적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잠저(潛邸)에 거처하시어 한 사람의 사대부와도 서로 왕래하지 않아서, 서로 익숙한 사람은 환관이나 희첩(姬妾)이 아니면 액정서의 하례(下隷)나 궁속(宮屬)이니, 그 뜻이 어떻게 스스로 넓어질 수 있겠습니까.35)
임징하의 상소에서 영웅과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나라를 창업하여 후손에게 전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를 회복한 자”이다. 이런 개념은 영웅을 장수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증산이 지은 손병희의 만사에서는 “지충지의군사군”(知忠知義君事君), 즉 충과 의를 바탕으로 한 임금에의 충성이 영웅의 요체로 언급된다.36) 임금이 나라와 등가의 가치로 인식되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면, 임징하의 영웅과 증산의 영웅은 거의 같은 인식체계를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영웅은 결기와 과감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운 창업군주로서의 영웅과 그 군주를 따라 구시대를 청산하거나 현 시대의 질서를 보호하는 데 기여한 장수로서의 영웅으로 귀결된다. 영웅이 장수로 각인된 데에는 새로운 시대를 열거나 현재의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힘, 그것도 위험 감수(risk-taking) 유형으로서의 남성적 힘과 물리력이 무엇보다도 요구되기 때문이다.37) 영웅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태도는 전쟁을 연결고리로 한 “전사”의 이미지로 굳어졌다.38) 이후 국가적 환란의 극복이 당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였던 일제 강점기와 6.25때도 마찬가지 관점이 유지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영웅의 조건을 무인으로 한정하였고,39) 박은식은 영웅을 “나라의 방패와 창”이라고 말했다.40)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부는 을지문덕, 김유신, 이순신, 전봉준 등의 “상무적”(尙武的) 영웅들을 한국사의 자랑스러운 지도자로 내세웠다.41) 이런 전통이 지속되며 현재까지도 영웅에게는 물리적 용기로서의 ‘용맹’과 ‘물리력’ 그리고 죽음 등의 자기희생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게 되었던 것이다.
Ⅲ. 영웅의 어두운 일면
최익현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강력한 항일투쟁을 천명하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의병군을 조직했다. 하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한 그의 의병군은 결국 패하고 그는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일본은 그를 한편에서는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가했다. 일본의 정신적, 육체적 압박에도 그의 항일의지는 꺾기지 않았고 결국 대마도에 구금되어 낯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42) 최익현이 영면했다는 소식을 접한 증산은 그의 의병활동에 대해 천지신명이 크게 움직인 것은 오로지 그 “혈성”, 즉 일심에 감동한 데 있다고 평가하며 만장(輓章)을 지어 위로했다.43) 영웅적 행동의 목적성에 대한 증산의 이런 관점은 영웅의 제일의 특징을 “목적의 고귀함”(nobility of purpose)에 두는 서구 영웅학자들의 관점과 동일하다.44)
하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남성적 용기와 힘은 파괴적 속성을 동반한다. 예컨대, 그리스의 아킬레스(Achilles)를 영웅의 관점에서 분석한 커리(Curry)에 의하면, 사람들이 아킬레스를 전쟁 영웅으로 기억할 때, 그가 모두가 두려워하는 엄청난 폭력(violence)을 휘두르는 강자라는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45) 즉, 그가 전쟁터에 나서는 순간 적뿐만 아니라 아군도 그의 승리를 뒷받침하는 데 희생된다는 것이다.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처럼, 히틀러와 같은 악행을 저지른 자들 중 일부는 적어도 처음에는 많은 추종자들에 의해 그의 유대인 학살을 영웅적인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프랑코와 에프씨뮤(Franco & Efthimiou)는 영웅적 리더십과 악행적 리더십 간의 경계가 허약해 영웅적 행동의 부정적이며 어두운 측면에 대한 의도적인 탐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46) 더 나아가, 폭력에 의존하는 영웅 개념을 통해 영웅 착오 패러독스(hero fallacy paradox)를 개념화한 포우프(Pope)에 의하면, 악당은 자신을 영웅으로 인식하여 자신의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47) 목적이 아무리 고귀해도 누군가의 희생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면 그 목적의 고귀함은 희석되어 원(冤)을 쌓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반, 파괴, 야만성”이 무장 또는 무인으로서의 전통적인 영웅에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커리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48) 이와 같은 영웅의 파괴적 속성 때문에 영웅과 사이코패스는 “같은 유전 줄기의 가지”라는 릭켄(Lykken)의 주장에 설득력을 제공한다.49)
증산 또한 영웅을 긍정적 개념으로만 접근하지는 않았다. 증산은 “지난 선천 영웅시대는 죄로써 먹고 살았다”고 말한다.50) 영웅이 대중화에 힘쓰는 동안 세상 사람들은 떨어진 바둑돌과 같아지기 때문이다.51) 다시 말해, “재민 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억조창생을 죽이는” 길과 통해 있기 때문이다.52) 그런 의미에서 영웅은 한편으로는 “난을 짓는 사람”이 되며 그로 인해 “무고한 생민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53) 이에 덧붙여 증산은 종도들에게 “전쟁사를 읽지 말라”고 주문했는데, “전승자의 신은 춤을 추되 패전자의 신은 이를 갈기” 때문이다.54) 영웅이 존경받고 영웅의 위대한 행동이 파괴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는다는 순기능과 비교하면 역설적이다. 예를 들어, 신라의 화랑은 원광법사가 만든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라는 세속오계를 통해 신라의 영웅으로 키워졌다. 무분별한 살인을 금하는 살생유택은 신라 왕실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살인을 정당화하는 계율로 작용하기도 했다.55)파괴의 콘텍스트 내에서 생명의 보호라는 역설이 영웅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56) 이 때문에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을 출간하며 영웅을 통시적 원형, 즉 원질신화(monomyth)에 기초해 긍정성 속에서 영웅 연구를 개척했던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조차도 어느 한 지역의 영웅은 그 영웅이 정복한 사람들에게는 적일 수도 있다며 영웅의 취약성을 인정하기도 했다.57)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사한 러시아 병사는 그를 죽이기 위해 보낸 우크라이나 병사만큼이나 러시아에서는 영웅이다. 고설즈와 앨리슨(Goethals & Allison)은 영웅적 행동이 “관찰자의 시선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58) 사람들은 각기 다른 영웅을 경애한다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어느 한 개인의 영웅은 다른 사람에게는 몹시 싫은 사람일 수 있다. 간디, 킹 목사, 링컨처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웅도 그들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이들은 암살당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스마이쓰(Smyth)의 주장처럼 영웅이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모호할 수도 있다.59) 영웅이 커다란 도덕적, 문화적 가치의 지표라는 주장60)과는 무색하게 리더십 학계에서는 영웅적 리더십이 전제적이고, 위계적이며, 비참여적이고, 의존성을 유발한다며 반대를 표명하며 탈영웅적 리더십 이론을 체계화하고 있다.61)
영웅은 관찰자의 동기와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사회적 구성체이다.62) 영웅은 “기억과 국가”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전사자(戰死者)의 애도를 통해 민족주의를 강화시켜 왔다.63) 예를 들어, 신라의 관창은 15세에 계백에 의해 전사했다. 계백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그의 시신을 신라에 보냈다.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에 자극되어 분전해 백제군을 격파했다. 무열왕은 관창의 전공을 높이 기려 급찬(級滾)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64) 그간 영웅에 대한 인식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 많은 적군을 물리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의 장수에게 초점화되어 있었다.65) 게다가, 그 장수가 전쟁터에서 전사한 경우에는 그 위상이 훨씬 강화되었다. 하지만 전투에서의 영웅적 행동과 힘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는 얼굴도 모르는 적에게 가한 폭력뿐만 아니라 영웅 자신이 겪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장막이기도 하다.66) 다시 말해, 영웅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인식으로 포장되었다. 그 죽음은 젊은이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경축과 영광의 사회적 제의를 통해 화려하게 수식되어 왔으나 영웅 또한 누군가의 자식, 부모, 형제이기도 하다. 다음은 <적벽가>의 ‘죽고 타령’의 한 부분이다.
기맥히고, (화)살도 맞고, 창에도 찔려 앉어 죽고, 서서 죽고, 울다웃다 죽고, 맞어 죽고, 애타 죽고, 성내 죽고, 덜렁거리다 죽고, 복장 덜컥 살에 맞어 물에게 풍 빠져 죽고, 바사져 죽고, 찢어져 죽고, 가이없이 죽고, 어이없이 죽고, 무섭게 눈빠져 서(혀)빠져 등터져 오사급사(誤死急死) 악사(惡死) 몰사(沒死)허여 다리도 작신 부러져 죽고 …
영웅들의 ‘그 위대한 행위’ 뒤에는 적과 아군, 그리고 영웅 자신을 죽음으로 떠나보내며 슬픔에 몸부림쳤을 가족들의 “원과 고통”이 감추어져 있다.67) 울맨(Ullman)의 지적처럼, 어쩌면 사회는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죽음을 신성화하고 그 집단적 기억으로써 영웅을 이용해왔는지도 모른다.68)
Ⅳ. 상생의 영웅을 향하여
증산은 웅패[영웅]가 천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며 “상생의 도로써 화민정세”하고 “호생의 덕”을 쌓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고 밝힌다.69) 그러면서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라며 전봉준이 조선 명부를 관장케 된 데에는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 즉 도덕적 선(善)이 크게 작용한 데 있다고 언설하였다.70) 선천 영웅시대가 죄로써 먹고 살았기 때문에 후천 성인시대는 “선으로써 먹고 살리라”라고 예시했던 것이다.71) 증산은 영웅이 의를 행하는 사람은 분명하나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파괴적 속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비록 후천이 영웅이 아니라 성인의 도로 작동하는 세계이기는 하나 “이제는 인존시대”라는 증산의 언설이 암시하듯 후천으로 개벽하는 과정에는 의에 기반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72) 그렇다면 인존시대를 맞아 영웅은 파괴적 속성을 덜어내고 도덕성을 구현하는 인물이 될 수는 없을까?73)
현대 영웅학자들은 영웅을 자신에게 가해질 수 있는 부정적 결과나 위험과는 상관없이 보상을 기대하지 않은 채 타인의 행복(welfare)을 이루는 데 목표를 두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74) 캠벨은 “영웅은 자신보다 큰 어떤 것에 자신의 삶을 쏟아 넣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75)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죽일 필요는 없다. 지하철 영웅들에 대한 빈번한 언론 보도만 봐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미국 뉴욕시에서는 2013년 한해에만 151명의 사람이 지하철 플랫폼에서 떨어져 진입하는 열차에 치여 사망하였고 이런 일은 매년 반복된다. 그렇지만 요청을 받지도 않았는데도 선로에 떨어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선로로 뛰어든 사람 또한 적지 않다. 그들 대부분은 영웅적 행동 이후에는 미디어의 보도나 보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걸어서 사라지고 이후로는 다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76) “인간에 대한 연민과 생명에 대한 인본주의적 태도”가 아니라면 이런 위험을 감수한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다.77) 이들 ‘지하철 영웅’에게서는 과거의 무인과 같은 전통적인 영웅에게서 발견되는 파괴적 속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들이 어쩌면 증산이 예시한 인존시대를 구현하는, 상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일부에서는 영웅의 소멸 또는 쇠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비판은 사회 구조가 공고해짐에 따라 영웅이 쇠퇴할 것이라며 사회발전론 속에서 영웅의 감소를 설명한 베버의 주장과는 별개로,78) 종종 민족주의에 기댄,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정치 권력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79) 정치 권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거나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그 속에서 많은 영웅이 탄생하고 사라졌다. 최근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한가운데서 누군가는 영웅으로 칭송된다. 하지만 앞서 현대 리더십학계가 더 민주적인 리더십론을 지향하는 가운데 탈영웅적 리더십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비록 전쟁이 끊이지 않더라도 서구에서는 전투에서의 사상자 발생 억제를 군 작전의 우선순위로 자리잡아가는 이른바 ‘탈영웅적’ 전쟁을 지향한다.80) 이 때문에 영웅의 지표로 인식되곤 했던 무공훈장의 수훈자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영웅의 감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프리스크(Frisk)는 인간의 평등성과 존귀함에 대한 열정이라는 민주주의의 신념이 작용한 결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81) 다시 말해, 남을 죽이고 나를 죽이는 종래의 영웅관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민주국가의 병사들은 평화의 수호자와 자유의 전사로 전형적으로 묘사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군 영웅은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에서 군 폭력의 수단을 적법화한다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매우 높은 희생정신을 통해 정치권력의 지지를 받고 찬사되던 전사로서의 전통적인 영웅은 환영(幻影)이라는 인식으로까지 변화되고 있다.82)
그래브너(Graebner)는 영웅의 유형이 다양화하고 있을 뿐 소멸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극단적인 힘과 나약함의 경멸로부터 탄생한 종래의 영웅관에서 “평범한 영웅”의 개념이 영웅 원형에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83) 그래브너의 인식은 프랑코 외(Franco et al.)가 영웅의 유형을 종래의 군인 등의 무용 영웅(martial hero) 외에도 시민영웅과 사회영웅으로 유형화한 데서도 쉽게 이해되며,84) 우리나라에서도 단순히 봉사자나 선행자마저 영웅이라는 인식이 확장적으로 나타나고 있다.85) 한편, 1904년 하윅 광산(Hawick Mine) 폭발 사고에서 인명 구조에 힘쓴 평범한 시민들의 헌신적 노력을 계기로 예외적일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살리거나 살리려고 시도한 사람을 영웅으로 치하하기 위해 카네기가 설립한 카네기 영웅 펀드(Carnegie Hero Fund)는 이제 우리 사회가 동료 인간을 불구로 만들거나 살상하는 “야만의 영웅”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데 진력하는 “문명의 영웅”을 경외하고 책임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86) 그런 문명의 영웅, 즉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데 강조점이 주어진 영웅이 상생의 영웅이며, 그런 의미에서 영웅은 인간의 취약함을 인지하고 흔히 ‘시민영웅’으로 불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상의 평범한 사람으로 그 개념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프랑코 외는 이들 시민영웅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영웅으로 인식하고 있으며,87) 타인의 감정, 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기초로 영웅을 10가지로 유형화한 고설즈와 앨리슨은 이들을 “투명 영웅”(Transparent Hero)으로 칭하였다.88) 이들 시민영웅은 적어도 또다른 원을 쌓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적일 뿐만 아니라 영웅 소멸론의 무위를 방증하는 근거인 셈이다. 앨리슨 외(Allison et al.)는 유명하거나 근육질이거나 재능 있는 사람, 또는 땅에 떨어진 지갑을 주워주는 행동처럼 “좋은” 행동으로 간주되는 행동을 한 사람에게 영웅 칭호를 부여하는 현대의 흐름은 “영웅에 대한 현대인의 갈증”이 얼마나 깊은지를 반영한다고 말한다.89)
다른 인간에 대한 연민(compassion)은 인간종의 생존에 진화론적 구성요소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목격하고는 돕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감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90) 상생의 영웅적 행동은 연민 또는 공감이 발현한 결과이다. 하지만 최익현의 혈성이나 동학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주장은 처음에는 연민에서 비롯되었으나 파괴가 동반됨으로써 상생으로 향하지 못한 채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는 결과를 가져왔다.91) 이 때문에 증산은 무작정 영웅을 우리 사회에서 유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성인의 바탕으로 닦고”,92) 즉 창생을 향한 “연민”에 두면서도 “무고한 생민의 생명”을 살필 것을 요구하였다. 대순사상에서 상생은 실천윤리93)로서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연민에서 비롯된 영웅적 행동은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할 수 있다.94) 이제 영웅도 상생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Ⅴ. 맺음말
증산은 자신을 따르는 종도들에게 “용력술”과 “축지술”을 배우지 말라고 주문했다. 미래에는 기차와 배[윤선], 그리고 비행기[운거(雲車)]가 인간의 힘을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95) 올리너(Oliner)는 영웅적 행동이 “비범한 인물의 독점적 영역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주장한다.96) 프랑코와 짐바르도(Franco & Zimbardo) 또한 이른바 “영웅적 행동의 일상성” 개념을 통해 영웅적 행동이란 일상적이며 평범한 사람 누구나가 행할 수 있다고 피력했으나97) 실제로 위기 상황에서 영웅적 행동을 하는 사람은 드물뿐더러 무인과 같은 물리적 힘에 기반한 남성으로 제한할 수 없다. 예컨대, 홀로코스트에서 영웅적 구조에 참여한 사람은 아무리 많아도 “나치 점령 하의 전체 인구 중 0.5%”가 채 되지 않았고, 그 중 절반이 여성으로 추정되었다.98) 이와 같은 사실은 남성적 힘, 용맹, 적을 죽이는 능력, 임기응변의 재능 등 초인적 또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로 영웅을 한정해왔던 종래의 인식을 허문다.99)
현대의 영웅은 파괴가 아닌 살림을 통해 상생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에 이르러 영웅의 의미는 육체적 용기와 명성에서 도덕 윤리(virtue ethics)의 육체적 또는 사회적 표현으로 그 초점이 이동하고 있다.100) 이는 어쩌면 증산이 언설한 인존시대를 맞아 인간이 해원과 상생을 자각하고 이를 영웅 속에 투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해원상생은 맺힌 원(冤)을 풀고 서로 잘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01) 종래의 영웅처럼 남을 죽여 나 또는 우리를 살리는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며 영웅은 무한한 긍정적 가치를 지닌, “나라와 민족을 최상위 가치로 삼는 구국의 애국자”로 신봉됨으로써102) 그 이면에 도사린 파괴적 속성이라는 어두운 일면은 도외시되었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진 시민영웅처럼 현대의 영웅은 더 이상 대립적 타자로서 누군가를 죽이고 제거해야 하는 적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영웅이 칭송되어 왔던 근본 이유가 사람이든, 민족[국가]이든, 제도든 ‘살림’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설령 적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죽여 상생을 이룰 수는 없지 않은가.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경성크리처』의 여주인공 한서희가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리자 일본 누리꾼들이 악성 댓글을 달며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고 국내 언론은 한결같이 일본 누리꾼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103) 아마도 상생이 발현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증산은 재세하는 동안 상생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현대의 영웅도 이제 존재 이유로서 ‘살림’, 즉 ‘상생’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에도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