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 연상(聯想)을 통한 설명의 한계
북어, 그리고 명주실, 복조리, 소코뚜레 등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과거부터 집이나 가게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1) 이들 장식물2)에는 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온다는 주술적 기능이 기대되어 왔지만, 정작 왜 하필 이런 물건들이 주물(呪物)로 선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기존의 민속학적 해석들은 북어의 생김새, 명주실의 긴 실 모양, 복조리의 용도, 소코뚜레의 기능 등을 근거로 이들의 주물로서의 의미를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해당 사물에 대해서 사람들이 연상 가능한 개념들에 기반하고 있어서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사후적인 의미 해석의 가능성을 불식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 해당 사물의 문화적 선택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 거의 없다.
가령 북어가 주술적 의미를 갖게 된 이유를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는 “큰 머리와 입, 밝은 눈, 많은 알, 떼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는 북어(명태)는 그 신성함의 상징으로 인해 예부터 사람들에게 천신과 교감할 수 있는 제물”로 쓰이게 되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3) 그런데 이런 설명은 다른 물고기가 아니라 왜 북어여야 했는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명주실의 경우 항간에서 “긴 실과 같이 오래 살기(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한다.4) 실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연상이긴 하지만 다른 실이 아니라 명주실인 이유로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또 ‘일이 술술 풀린다’는 의미도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 또한 작위적인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복조리는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서 “조리는 쌀을 이는 기구인데 그 해의 행복을 쌀알과 같이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풍속으로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다.5) 조리로 우리가 연상할 법한 것을 말하긴 하나 다른 기구가 아닌 조리가 선택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소코뚜레의 경우는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 액막이 주물로 사용되는 이유를 “코뚜레가 억센 소를 꼼짝 못 하게 무서운 힘을 발휘하듯 감히 잡귀가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라고 추정한다.6) 소의 힘이 귀신을 막을 정도라는 것인데, 연상에 근거한 추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본고에서는 이들 주물이 ‘액막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복(財福)을 비는’ 뜻에서 선택된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북어를 비롯한 위의 주술적 장식물은 모두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경제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물건들이다. 북어는 부식으로서, 그리고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녔고, 명주실과 복조리, 소코뚜레 역시 농경사회에서 재산 혹은 재화의 의미를 갖는 대상(명주실) 혹은 그런 대상과 연결된 물건(복조리-쌀, 소코뚜레-소)이다. 이들 물건이 지닌 경제적 중요성이 상징적, 주술적 의미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물고기가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명태가 가진 사회경제적 특성에 주목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문화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할 때, 그 행동의 의미는 상상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그 행동의 1차적 동기는 사람들의 의식 상에서 표상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 왜라는 질문은 원인을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유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왜 그러한 문화적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답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의미로서의 이유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는 대개 ‘사회적 정당화’를 위해서 고안된 설명일 가능성이 크다.7) 가령 성스러움이라는 개념은 문화적으로는 종교적 체험, 초월적 존재와 관련해서 설명되지만, 이 문화적 개념이 행동 면역 체계/감염병 회피 행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최근의 연구를 통해서 조명되고 있다.8)
두 번째로 문화적 행동과 그 의미는 문화생태 환경이 바뀌면서 변화한다. 특정한 문화생태 환경에 적합한 문화적 관습은 문화생태 환경이 바뀌면 대체로 사라진다. 몇몇 살아남는 관습은 새로운 문화생태 환경에 적합한 양식으로 변화하게 되고, 그러한 행동의 의미도 그에 걸맞게 수정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가령 핼러윈의 ‘trick or treat(장난칠까, 아니면 대접해 줄래)’ 놀이는 그 행동의 의미가 통상 공동체의 친목을 다지는 의식이나 아이들의 놀이 관습 정도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을 찾아가 보면 고대 켈트족의 사우인(Samhain)과 만나게 되는데, 해가 바뀌는 시기 죽은 자들이 출몰한다는 관념이 있었고, 그들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재액을 막기 위해 귀신 분장을 하고 연극적으로 귀신 쫓기를 하는 관습에서 그러한 놀이문화가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9)
세 번째로 사회경제적 특성이 장식용 주물로 다른 물고기가 아닌 북어가 선택된 문제를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가 ‘건조된 상태’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고 있다.10) 물론 이것도 중요한 요인(기능적 적합성)이지만, 이것만으로 북어 선택 문제가 말끔하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최초에 누군가 선택했더라도 많은 사람이 주물 장식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의 민속으로 변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문화적 유행을 가능하게 한 문화생태적 조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손쉽게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는 조건과 ‘재화로서의 사회적 가치’라는 조건을 따져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적으로 물고기가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같이 고려할 수 있다. 횡문화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고려할 때, 북어가 주술-종교적 의미를 갖게 된 1차적 이유를 다른 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재화로서의 상징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기존의 상징론(액을 막는 형태적 특성 - 큰 눈과 입)은 이미 주물 장식으로 사용된 이후에 덧붙여진 설명일 가능성이 높다. 북어가 제물로 쓰이는 이유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설명은 표상될 수 없는 1차적 동기를 지시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다른 물고기도 아닌 북어가 출입구의 주술적 장식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문헌연구와 비교민속학적 접근, 진화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의 분석을 종합하는 방식을 취했다. 우선 조선 시대 북어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비변사등록』, 『각사등록』 등의 관찬 사료와 『임하필기』, 『오주연문장전산고』, 『하재일기』 등의 개인 기록물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 문헌은 17~19세기에 걸쳐 북어의 어획, 유통, 가격, 상징적 의미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들이다. 아울러 고대 그리스, 로마, 중국, 인도, 유대 문화권의 문헌 기록과 선행연구들을 참고하여 물고기 상징체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비교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민속 신행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 글은 문화의 기능적 적응 측면에 주목하는 문화생태학적 접근과 직관적 추론에 의한 문화 현상의 출현을 설명하는 진화인지적 관점을 접목하여 분석의 틀로 삼았다.11) 이를 통해 주술적 장식물의 선택이 인간 보편적 직관에 기반하면서도 당대의 경제 환경에 영향받은 문화적 적응 현상임을 밝히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구는 진화인지적 관점의 비교 민속 연구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글은 한국 민속 신행(信行)의 인류 수준의 일반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동시에 다루는 논의라고 할 수 있다.
Ⅱ. 조선 시대 북어의 사회경제적 특성
명태는 한랭성 어종으로 현재 한국의 근해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유통되는 명태는 오호츠크해 등의 바다에서 원양어업으로 잡거나 러시아와 일본 등지에서 수입하고 있다고 한다.12)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한반도 일대의 수온이 상승해서 한랭성 어종인 명태가 동해안까지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13)
조선 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명태어장 분포를 역사 기록을 토대로 정리한 바를 보면,14) 함경북도에서 강원도로 내려왔다가 다시 함경도로 올라가는 모양새이다(<그림 2> 참고). 해당 기록은 명태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전에 쓰인 ‘무태어(無泰魚)’15)와 ‘명태’가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비변사등록』, 『각사등록』 등의 기록에 근거해서 표시한 것이다.
한랭성 어종인 명태가 조선 북부, 특정 시기에는 조선 중부 동해(삼척 등지)에서 잡힌 이유는 이른바 ‘소빙기(小氷期)’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6) 이 시기 동안 기온 하강으로 해수면 온도가 낮아지고 해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한류성 어종인 명태의 회유 경로와 산란장에 변화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이상기후 기사들이다.17) 기사 빈도가 17~18세기에 높았다. 또 이 시기 각종 국가 기록물에서 명태가 잡히는 지역(함경도, 삼척 등)과 명태 어획량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18)
한 사례를 살펴보자면, 『비변사등록』의 영조 4년(1728년) 음력 4월 18일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장교에게는 대구어(大口魚), 군졸에게는 명태(明太)를 주었는데, 이는 오랫동안 준수하여 오던 품수(品數)이므로, … .19)
군졸에게 호궤(犒饋)20)하는 기준을 말하는 바에서 장교보다 많은 군졸들에게 명태를 주었고, 그 기준이 정해진지 오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대구가 상대적으로 귀한 어물이고 명태는 흔했기 때문에(어획량도 많은데, 유통량도 많음) 군졸의 사기진작 식품이 될 수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세기 기록에서는 직접적으로 어획량이 상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유원은 『임하필기(林下筆記)』(1871)에서 명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물고기가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지게 되었는데, 북어(北魚)라고 불렀다. … 내가 원산(元山)을 지나다가 이 물고기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오강(五江, 지금의 한강 일대를 말함)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21)
많이 잡힌 명태가 조선 팔도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추가적으로 몇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했다. 명태가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하며,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유통망이 존재하고, 명태가 생물이기 때문에 운송 중에 부패하지 않도록 가공되어야 한다. 기록에 따르면, 17~18세기에 걸쳐 자연재해가 많았는데, 특히 북쪽 지역(관서, 관북, 해주)의 기근이 심각하여 이를 타계하기 위해 명태와 쌀의 무역 활성화 대책이 논의되었다.22) 그리고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 후기에 국가의 유통 확대 정책과 상업 활동이 맞물리면서 함경도의 유통망이 확장되고 장시가 발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23) 이러한 기록들로 볼 때, 명태의 상업적 가치, 유통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명태는 동건법으로 가공되어 유통되었다. 다만 가공법 발달의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명태의 유통과 가공법 발달이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24)
유통된 명태는 상품으로서의 가치 말고도 다른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물물교환 시장에서 명태가 준화폐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19세기 말 북어가 궁녀들의 급료로 제공된 사례가 있다. 급료에 쓰인 물품은 상궁은 쌀, 콩, 북어였고, 상궁의 시녀는 쌀과 북어였다.25) 아울러 북어로 대소사의 부조를 치르는 경우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하재일기(荷齋日記)』(1891~1911)에서 북어로 부조하였다는 기록을 10여 건 이상 확인할 수 있다.26) 이러한 기록에 근거해서 볼 때, 북어는 단순히 식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준화폐로서 ‘재물’의 척도로 생각될 여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특성을 갖는 데에 명태라는 물고기의 식품으로서의 맛과 같은 품질보다도 양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리고 동건법으로 부패의 위험 없이 보관·유통되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만족되었기 때문에 방방곡곡의 많은 사람에게 저렴하게 공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재물로서의 상징성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 시대에 쌀이 식량이자 화폐처럼 통용되었다는 것과 비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쌀만큼의 화폐로서의 특성이 강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19세기 말 당시 북어 1마리의 가격은 얼마쯤일까? 『하재일기』에 나온 북어 구매 기록을 근거로 보면,27) 북어 1마리에 약 3전(0.3냥)으로 계산할 수 있다. 1891년 2월, 3월, 10월에 쌀 구매 기록도 나와 있는데,28) 쌀 1말을 대략 23냥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연구들에서 제시하는 쌀 1말의 가격과 차이가 꽤 난다.29) 1890년대 경북 경주 등지의 기록에는 쌀 1섬(10말)이 6냥으로 기록되었다는 지적도 있다.30) 『하재일기』를 기준으로 계산하면(주30 기사 참고), 북어는 1마리에 약 2,000원 정도로 볼 수 있다. 쌀값을 기준으로 한 추정이라 부정확할 수 있는데, 다른 연구의 1냥 가치로 보면, 북어 1마리가 9,000원 혹은 15,000원으로 계산될 수 있다(주29 참고).
북어의 가격을 생각해 본 것은 비싼 식품이라면 주술적 장식물로서 제약이 생겨 많은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너무 고가라면, 많은 사람들이 제물이나 주술적 장식물로 선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북어변증설(北魚辨證說)”을 보면 이런 설명을 볼 수 있다.
일반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을 포(脯)로 만들어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선비가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으면, 또한 제기를 북어로 채웠다. 북어는 값은 싸지만 귀하게 쓰였다.31)
북어가 저렴해서 누구나 제물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유득공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4권(1792~1793)에서는 무당의 굿에서 쓰이고 있던 상황을 전하고 있다.
팔도 점방의 반찬과 술안주로나 황량한 마을에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푸닥거리할 때 이 물고기를 쓰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그 쓰임새가 넓다.32)
18세기 후반 기록, 19세기 기록에서 북어가 종교적 맥락에서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값싼 재료’이며 구하기 쉽다는 것이 이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 배경 요인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만 주술적 장식물로 사용된 바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성으로만 본다면, 준화폐로 쓰이고, 충분히 값이 싸게 많은 양이 유통되었던 시기에 북어가 주술적 장식물로 널리 활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너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웠다면, 많은 사람이 종교적 도구로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러한 주술-종교적 풍속이 하나의 민속문화로 포착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Ⅲ. 세계의 물고기 상징과 일반적인 원초적 상징성
북어의 주술적 상징성이 경제적 가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물고기가 풍요와 재산의 상징으로 여겨졌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물고기 상징체계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확인하고, 북어의 주술적 의미가 갖는 보편적 토대와 지역적 특수성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어는 풍요와 다산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마른 상태, 눈 등이 훨씬 더 주술적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되고 있지만,33) “머리도 크고 알이 많아 훌륭한 아들을 많이 두고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34) 공교롭게도 알을 떠올리며 다산을 떠올리는 경우는 대체로 많은 어류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35)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렇게 물고기를 경제적 풍요의 상징으로 보는 관념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그러한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물고기는 다산, 성적 능력, 남근 등으로 묘사되었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는 점성술을 다루는 책 『천문학』Astronomica에서 물고기자리에서 태어나는 사람을 물고기처럼 다산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3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물고기를 다산과 연관지어 설명했다.37)
풍요라는 주제는 빈번하게 물고기를 사용하여 표현되었다. 디오니소스는 물고기 모양의 배 위에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그림 3>). 디오니소스의 그림과 비슷하게 고대 바빌로니아의 최고신 마르둑은 “풍요의 배”를 타고 축제 행렬에 참가하는 것으로 그려졌다고 한다.38) 마르둑은 『에누마 엘리시』에서 티아마트를 물리칠 때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려진 바 있다. 이 그물이 종종 새 잡는 그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를 보면, 티아마트의 이름이 바다를 뜻하고 마르둑이 수메르 문헌에서 어부와 새사냥꾼으로 묘사되는 엔릴로부터 최고신의 지위를 이어받는다는 점, 티아마트를 물리치고 그의 몸을 갈랐을 때 티아마트가 물고기에 비유되는 점 등 『에누마 엘리시』 텍스트 상에서 마르둑은 ‘어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39) 이것은 ‘풍요’의 성징성이 부여된 마르둑이 물고기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수메르 신화에서 엔릴이 그물을 사용하여 어부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지만(주39 참고), 물고기와 연관된 신격은 엔키/에아였다.40) 그리고 엔키신은 ‘다산의 신’이었다. 수메르 문화에서 물고기는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다산과의 관련성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최초의 인간을 ‘낚시꾼’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를 수메르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기독교의 ‘아담’을 연상시키는 아다파(Adapa)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아다파가 하늘의 신 아누가 주는 ‘불사의 선물’을 거절하여 인류가 필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아다파는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41) 이는 인류 초기 역사에서 문명과 어업의 밀접한 관련성을 생각해 보게 해 준다. 다른 한편으로 원초적 식량 자원으로서의 물고기의 위상을 환기시킨다.
고대 인도에서도 물고기는 다산과 풍요와 관련되었다. 인더스 계곡의 고고학 유적에 대한 발굴을 통해서 물고기가 인더스 계곡 문명 사람들의 식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물고기는 분명히 인더스 계곡 전통의 생존 경제(subsistence economy)의 중요한 부분”].42) 낚싯바늘, 테라코타 그물추 등의 유물과 도자기에 새겨진 그림을 통해서 인더스 강 유역에서 어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물고기 모양의 장신구나 징표도 확인할 수 있다.43) 현대 남아시아에서는 비슈누 신의 한 아바타인 마츠야(Matsya)가 하반신이 물고기인 어인(魚人)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 남아시아의 여러 종교에서 물고기가 길조 동물 중 하나로 여겨지며, 풍요와 다산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44)
중국에서도 물고기는 풍요를 상징한다. 특히 ‘남다, 넉넉하다’는 뜻의 여(餘)와 중국어 발음이 비슷하여, 새해에 하는 덕담 중에 ‘年年有魚(nián nián yoǔ yú)’가 있는데, ‘年年有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일 년 내내 풍요롭게 사세요”).45) 동음이의어이기만 해서 풍요와 물고기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물고기가 풍요와 연관되었다. 중국의 옛 문헌에서 ‘물속에 물고기가 많으면 그 해는 풍년이다’라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46) 고대 근동이나, 이집트, 유럽, 인도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물고기는 풍요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생식력, 다산, 성기 등 성적인 상징성도 가지고 있었다.47)
이렇듯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물고기가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공통되게 나타난 것은 물고기가 식량자원으로서 지녔던 경제적 가치에 근원 한다고 볼 수 있다. 풍요로움의 관념이 물고기에 투사된 것은 물고기가 먹거리로서, 생계 수단으로서 가졌던 중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구 문화에서 물고기 상징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기독교의 ΙΧΘΥΣ(익투스)일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신의 아들, 구원자’(Ἰησοῦς Χρῑστός Θεοῦ Yἱός Σωτήρ)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단어가 공교롭게도 ‘물고기’라는 말이 되었기에 물고기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거나 성서에 그려진 예수의 세례, 예수 제자들의 직업, 예수의 기적(오병이어)과 관련성 때문에 기독교인의 증표가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혹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인 박해를 피해 비밀 엠블럼으로 사용되면서 기독교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는 설도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익투스의 기원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48) 관련 연구자들은 기독교적 물고기 상징 코드가 가깝게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코드에서,49) 멀게는 고대 근동의 물고기 상징체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50)
기독교에서 물고기 상징은 성서 텍스트의 기록이나 초기 기독교의 역사 때문에 상당히 복잡한 의미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상징론이 전개되기 이전에 기독교에서 물고기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생각하는 데에 초기 사례가 도움이 될 것이다. 2세기 말 또는 3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프리기아(Phrygia)의 아베르키우스 비문은 기독교적 ‘물고기’ 사용의 가장 초기 사례로 언급되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믿음이 나를 어디든지 인도했고, 어디에서나 샘물에서 나온 거대하고 깨끗한 물고기를 음식으로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를 성스러운 처녀가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믿음)는 친구들이 항상 먹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그것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훌륭한 와인을 가졌고, 그것을 빵과 섞어서 주었기 때문입니다.51)
그 다음으로 꼽히는 사례는 2세기 말에서 4세기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갈리아의 오텅(Autun)의 펙토리우스 비문이다. 물고기가 언급되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친구여, 부(富)를 주는 지혜의 끊임없이 흐르는 물로 당신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시오. 성도들의 구세주의 꿀처럼 달콤한 음식을 받으세요. 배가 고프면 손바닥에 쥔 물고기를 드십시오. 내가 갈망하는 물고기로 만족을 가져다 주십시오, 주 구세주여.52)
기독교의 상징적 의미(예수, 구원자, 성찬례 등)가 덧붙여져 있지만, 이러한 기독교적 상징 코드가 물고기에 대한 생존 경제의 원초적 산물로서의 문화적 코드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문화적 바탕이 없었다면 이러한 비유가 이해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 문화의 물고기 상징론과도 친연성이 높아 보인다.
유대 문화에서 물고기는 중요한 식량으로 등장하며, 한 해의 행운과 성공을 기원하며 먹는 음식이었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풍요와 다산을 상징했다.53) 알을 많이 낳아서 다산을, 눈을 항상 뜨고 있어서 신의 감시를 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졌다는 설명도 볼 수 있다.54) 또 특기할 만한 것은 액을 막아주는 효과가 물고기에 있다고 여겨졌다는 점이다. 3세기에 활동한 랍비 요세(Yose b. Chanina/Jose bar Hanina)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바닷속의 물고기처럼 물이 그들을 덮고 악한 눈(evil eye)이 그들을 지배할 수 없듯이, 요셉의 후손들에게도 악한 눈이 지배할 수 없습니다.55)
사안(邪眼, evil eye)과 물고기의 연결을 정당화하는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이다. 그런데 유대 문화 외에도 사안을 막는 주물과 물고기가 관련된 경우를 볼 수 있다(<그림 8>). 게다가 사안은 단순히 미신적인 저주 관념이 아니라 나름의 경제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주술적 관념이기 때문에 사안과 물고기의 관련성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재산 보호 제도가 미비한 사회에서 나름대로 재산을 지키기 위한 문화적 행동 전략으로서 적응적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되는 사안 믿음56)에 원초적 부의 표상인 물고기가 연결되어, 물고기를 주술-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데에서 경제적 동기가 더 기본적이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 여러 문화권의 사례를 통해 물고기 상징체계에는 보편적 경향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권을 막론하고 물고기는 식량과 재화의 원초적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이런 상징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종교적, 주술적 관념으로 전환되었다. 물고기가 풍요와 부를 상징하게 된 것은 생존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의도적이기보다는 직관적 추론(intuitive inference)에 가까웠을 것이다.57) 이처럼 물고기 상징론에 내재한 횡문화적 보편성은 북어가 한국에서 주술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Ⅳ. 주술 장식물의 사회경제적 특성과 기능적 적합성
이 장에서는 북어 외의 주술 장식물로 사용된 복조리, 소코뚜레, 명주실의 사례와, 주술 장식물이 되지 못한 조기와 키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북어와 마찬가지로 풍요와 재복의 상징으로 기능한 사물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추론해 봄으로써, 앞서 제시한 설명 방식의 적용 가능성을 타진해 볼 것이다. 이어서 경제적 가치를 지녔으나 주술 장식물로 사용되지 않은 사물들의 사례를 통해, 주술적 상징성의 성립에 작용하는 다른 요인들을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북어를 다뤘던 것처럼 다른 주술 장식물을 다루기보다는 이 장의 논의의 목적에 맞는 수준에서만 각 사례들을 검토할 것이다. 이로써 북어가 주술 장식물로 선택된 데에는 경제적 중요성이라는 필요조건과 더불어 다른 제약 조건들이 관여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앞서 북어의 사례를 통해 주술 장식물의 선택이 그 사물의 사회경제적 중요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관점이 북어 외의 다른 주술 장식물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검토하기 위해, 이 절에서는 복조리, 소코뚜레, 명주실 등의 사례를 간략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각각의 사물이 지녔던 경제적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고, 그것이 주술적 상징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론해 봄으로써 북어의 사례에서 도출된 가설의 신뢰성을 보강하고자 한다.
‘복조리’리는 쌀을 일어 돌을 골라내거나 물기를 뺄 때 쓰는 도구인 조리를 ‘복을 가져오는’ 주술적 상징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조리 선택의 이유를, 한 해 동안 가정에 복이 가득하고 흉한 것은 걸러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신년에 집 입구에 걸어 놓는 것이라고 설명한다.58) 혹은 “행복을 쌀알과 같이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풍속”으로 설명하기도 한다.59) 이러한 주술적인 문화적 행동의 이유에 대한 설명이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특성을 고려할 때, 조리라는 도구가 쌀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복을 표상하기에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식량’을 대표할 수 있는 곡식은 쌀이었다. 게다가 쌀은 화폐경제가 완전히 정착되기 이전까지 물물교환 시장에서 화폐처럼 쓰였다. 세금을 쌀로 내기도 했고, 급료의 지불 수단이기도 했다. 경제적 풍요를 복이라고 상상할 때, 전근대 사회에서 그것을 표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쌀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주술적 장식물로 쌀을 선택할 수는 없으니, 쌀과 인접한 것이 그것을 대신 표상하는 것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소코뚜레의 주술적 상징성이 “코뚜레가 억센 소를 꼼짝 못 하게 무서운 힘을 발휘하듯 감히 잡귀가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설명되는 한편 “장사하는 집에 거는 코뚜레는 …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의미도 있다. 소는 집안의 큰 재산으로서 부의 상징이며, 그 재산을 코뚜레가 꽉 잡아주어 가게가 번창하게 될 것이라고 본” 때문이라고 <한국민속대백과>에 설명이 되기도 한다.60) 실상 소코뚜레의 사회경제적 특성이 조명되었는데, 다만 ‘장사하는 집’에 국한되어 재복(財福)의 기원이 부차적인 것으로 서술되었다. 과거 농가의 재산 1호였던 소와 관련된 소코뚜레가 가게에서만 부의 상징이 될 리는 없다. 소가 사용한 코뚜레를 가정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예는 민속신앙 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남 순천시 낙안면 창녕리 기정마을에서는 장삿집이나 살림집에 재수가 좋으라고 쇠코뚜레를 건다. 이때 반드시 소의 코에 걸었던 것이어야 한다.61)
소코뚜레는 현재 조사된 바로 보면, 액막이로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두드러진다. 게다가 실제로 코뚜레로 사용한 것이 아닌 액막이용으로 별도로 만들어진 것이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향성은 소를 키우는 집이 줄어든 현대 사회에서 그 문화생태적 환경에 맞추어진 변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액막이 상징성이 더 호소력 있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더 이상 소가 가정의 재산 1호가 아니기에).
명주실의 경우 앞서 보았듯이 실이라는 형태에 주목해서 주술적 상징성을 설명하곤 하는데, 이런 설명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다른 실이 아니라 왜 명주실인가를 설명할 수 없다. 경제적 맥락을 고려하면 보다 투명하게 명주실의 주술적 상징성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농가의 주요 부업 중 하나였던 양잠업은 누에를 길러 고치를 얻고, 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과정을 통해 명주를 생산하는 산업이었다. 농한기에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부업으로서, 농가 경제에 보탬이 되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어나 복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주실이 주술적 장식물로 선택된 것은 그것이 일반 사람들의 삶과 생계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에 재복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여겨지기 쉬웠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명주실의 경우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북어와 명주실이 빈번하게 짝을 이루어 사용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의미론적 설명은 북어나 명주실의 상징성을 반복하는 수준 이상의 답을 내놓기 어렵다. 사회경제적 특성을 고려할 때, 몇 가지 가능한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북어와 명주실이 구하기 쉬웠다는 점, 명주실을 통해서 북어를 매달기가 용이했다는 점, 두 대상 모두 재복과 액막이 기능이 기대될 수 있었던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습의 확산과 유지에는 의미론적 설명이 기여했을 것이고, 북어에 명주실을 묶어 놓는 형태가 그 기능적 목적이 상실되어도 문화적 관성으로 유지되면서 북어와 명주실을 짝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현대의 간략화된 차고사에서 명주실은 사라지고 북어와 술만 사용되거나 술만 이용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그림 10>), 제물 확보의 용이성, 경제성, 그리고 기능성은 제물 선택의 중요한 기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비슷한 조건에서 어떤 대상은 주술적 장식물이 되고 어떤 대상은 되지 않는지를 조금 더 생각해 보기 위해서 북어와 대비해서 볼 수 있는 조기, 복조리와 대비되는 키를 검토하고자 한다.
북어를 다루면서 언급되었던 조기(주35)는 주술적 장식물의 경제적 기원 문제를 검토할 때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던져준다. 서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조기는 한반도 한강 이남 서부 쪽의 주요 어족 자원으로 제사 음식으로 사용되는 주요 어물 중의 하나다(주35 참고). 북어처럼 경제적 가치(풍요)를 지니기 때문에 주술-종교적 상징성을 비슷하게 가질 수 있지만, 왜 주술적 장식물로 쓰이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명태를 말린 것이 북어듯이 조기를 말린 것이 굴비인데, 굴비가 주술적 장식물로 사용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바짝 말린 북어에 비해서 염건법으로 말린 굴비62)가 상대적으로 보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주물(呪物)로서 오래 걸어두기에 부적합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풍요를 표상할 수 있다고 해도 주술 장식물이 되기 위해서는 장식물로서의 기능적 적합성이 요구된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얼마나 구하기 쉬웠는지, 가격은 어땠는지 등도 주술 장식물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쌀과 관련해서 조리만큼이나 많이 사용하는 생활 도구라면 ‘키’를 떠올릴 수 있다. 키의 경우 조리처럼 주술적 장식물이 되지 못했는데, 직접 쌀과 닿지 않아서일까? 키는 곡식 낟알을 쭉정이와 분리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껍질을 벗겨낸 쌀을 이는 조리와는 그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쌀과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키는 과거에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를 벌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민속신앙과 관련이 되는데, ‘정초에 키를 까불면 복이 달아난다’고 믿어진다는 등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환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풍요와 관련된 점치기 풍속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결정적인 모습은 아니다.63) 키의 활용 방식, 활용하는 공간 등 다양한 요소들이 이러한 상징론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주술 장식물로서 비교해 본다면, 실제 키질을 하는 생활 도구로서 입구 위에 걸어 놓기에 적합한 크기는 아니라는 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두 대상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풍요의 상징성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해서 주술적 장식물로 다 선택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장식물로서의 기능적 측면도 제약 요소일 수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장에서 검토한 여러 사례들은 북어에 적용된 설명 방식의 개연성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주술 장식물의 선택에 관여하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경제적 가치라는 토대 위에서, 상징체계로의 전환 가능성, 장식물로서의 기능적 적합성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북어가 주술적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에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으나, 여기에 더해 물질적 속성도 주요한 변수였음을 이 장의 논의는 보여주고 있다.
Ⅴ. 결론
본 논의는 주술적 장식물 중 일부, 특히 북어의 경우 사회경제적 특성이 그 주술적 상징성의 1차적 근거임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조선 시대의 상황, 물고기 상징의 횡문화적 일반성에 근거해서 주술-종교적 상징성이 식량-풍요/부라는 연결을 통해서 주목되어 주술적 장식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의가 그 관계의 1차적 특성을 증명했다고 볼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주요 주술적 장식물들도 경제적 풍요를 표상하는 데 적합성이 있었다는 점, 다른 문화권에서도 그러한 연상이 일반적이었음을 고려하면,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잠정적으로 주술적 장식물, 특히 북어를 사용하는 풍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행운의 주물 → 액막이 주물’로 확장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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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경제적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북어를 걸었다. 그러므로 행운, 재복을 기원하는 것이 그 주술적 상징성의 1차적 특성이다. (다만 이것이 ‘의도적 선택’은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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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액을 물리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왜 이 물건을 집에 걸어 놓는 것인가’를 사회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2차적으로 추론한 상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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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북어의 사회경제적 상징성이 변화하면서 2차적 특성이 문화적으로 더 적합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는 식량·재화의 가치를 상실)
①의 단계와 ②의 단계를 시간적 선후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행동의 1차적 동기가 의식에 잘 표상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①은 직관적 수준64)에서 작동하고, 행동의 의미를 설명하는 수준에서는 ①과 ②가 동시적으로 표상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행운을 비는 것은 재액을 막는 것과 거의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다(ex. 말편자65)). 다만 거의 동시적인 연상 작용의 결과라고 하더라도 왜 그러한 대상들이 주술적 도구가 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우선적 요인은 여러 정황상 풍요로서의 행운의 상징성으로 판단된다.
이 글에서는 북어가 주술적 장식물로 사용된 배경에 경제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음을 논증하고자 했다. 북어가 상품이자 화폐로서 지녔던 경제적 가치가 주술적 상징체계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민속신행의 물질적 토대를 조명할 수 있었다. 나아가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물고기가 풍요와 재복의 상징으로 기능해 온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북어 부적 사용 관행에 내재한 보편성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한국의 북어 부적 신앙은 고유한 특수성 또한 지니고 있다. 어류가 주술적 의미를 획득하는 경향은 범문화적으로 나타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물고기가 선택되며 그 상징체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각 사회의 생태환경과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북어가 부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선시대 북어의 생산, 유통, 소비를 아우르는 독특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전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어 주물 사용 관습은 물고기 숭배라는 보편적 틀 안에서 한국 고유의 문화생태적 특성이 반영된 민속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논의는 여러 보완할 부분이 남아있다. 이 글이 문화적 행동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문화적 행동의 지속과 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변화된 시대적 조건이 민속 신앙 행동 양상이나 그 의미론을 어떻게 바꾸는지, 주술 장식물 사례로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보완 연구를 기약해야 할 것 같다. 또한 이 연구는 기록물에 의존하여 현상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어 실제 민속 현장에 대한 관찰이 이루어지지 못한 한계가 있다. 지역적 편차나 문화 변동의 양상 등을 보다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지조사와 구술사 연구 등이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향후 이러한 현장 연구를 통해 주술적 장식물을 둘러싼 민속 신행의 실제를 총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발전적인 보완이 필요한 부분 중 특히 중요한 문제가 있다. 문화생태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주술적 장식물을 거는 풍속에서 지역적 편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본 논의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 심일종은 제수 음식을 논하는 맥락에서 ‘통북어권’을 말한 바 있는데,66) 주술적 장식물 사용 풍속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북어, 명주실, 소코뚜레, 복조리는 행운과 액막이를 모두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대체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소코뚜레가 많이 쓰이는 지역, 북어와 명주실을 많이 쓰는 지역의 편차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관련 자료를 축적할 수 있다면, 문화생태적 분석이 좀 더 심도를 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미 주술적 장식물을 집에 거는 풍속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논의의 초점이 과거의 주술 장식물이 아니라 ‘지금은 어떤 새로운 주술 장식물이 유행하고 있는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문화적 행동의 지속이라는 문제는 문화적 적합성을 고려해야 한다.67) 하나의 사물로부터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다양할 수 있는데, 시대에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표상은 달라질 수 있다. 민속신앙도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 관습이 시대가 변화하면서 사라지기도 하고, 전혀 다른 요인 때문에 유지되기도 한다.68)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민속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전환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생태적 환경을 고려해서 민속문화를 살펴보게 된다면, 민속문화가 꼭 과거와 전통에 갇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민속문화에 대해서도 ‘현재형’을 말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미래형’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