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언
본 연구는, 정읍 출신 사상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 1909)이 이루어낸 증산사상(甑山思想)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지역적 영향원(影響源)으로서의 정읍지역 농악1)·마을굿2)/당산제의 증산사상에의 영향 관계를, 증산사상 관련 자료들과 정읍지역 농악·마을굿/당산제 관련 자료들의 관련 양상을 통해 고찰해 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어떤 사상가의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그가 생장한 지역의 자연 인문 환경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영향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사상적 영향원들 중에는 그 사상가가 태어나 성장하고 살다간 지역의 종교적 토대로서의 민속제의(民俗祭儀) 및 민속예능(民俗藝能)도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증산사상과 같이 그 사상적 성격이 매우 민중적인 경향이 강한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민중적인 사상은 그 사상이 형성된 지역의 민속제의 및 민속예능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민속제의 및 민속예능은 민속사상의 중요한 토대가 되고, 그러한 민속사상은 민속적 성격이 강한 사상가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증산 강일순의 종교적 사상 속에는 ‘해원(解冤)-상생(相生) 사상’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상의 전통 종교적 근원은 바로 우리 민족의 근원적 종교인 무교(巫敎)/샤머니즘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3) 이 무교/샤머니즘은 바로 정읍지역의 전통 마을굿인 당산제 및 농악과도 매우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연행되어 왔다는 점에서, 증산사상과 정읍지역 당산제와의 어떤 긴밀한 연관성을 암시받을 수가 있다.
당산제 및 농악과 증산사상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살펴 논의한 연구는 현재 연구사에서 보이지 않고 있다.4) 그러나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증사사상과 무교사상 및 무교사상이 깊이 침윤되어 있는 정읍지역의 전통 당산제 및 농악과는 매우 긴밀한 영향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전제에 입각해서, 본 연구는 증산이 태어나 살면서 자신의 사상을 성숙시켜 나아간 정읍지역의 전통 민속 제의인 당산제, 적어도 증산의 생존 당시에도 그 전승이 전승 현장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전승의 역사가 오래된 정읍지역 당산제들의 전승 현황을 조사 정리한다. 그리고 그 전승의 내용 및 제의적 절차·방식 등을 파악하고, 그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전승되어온 농악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논의한다. 그리하여 증산사상 관련 자료들과 정읍지역 당산제 및 농악과의 구체적인 관련성 양상을 검토 분석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할 것 한 가지는, 본 논의가 증산사상 자체와 정읍 당산제 및 농악과의 직접적인 관련 양상의 논의가 아니라, 증산사상 관련 자료들과 정읍지역 당산제 및 농악 관련 자료들의 관련 양상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Ⅱ. 증산사상 관련 자료들에 나타난 당산제 및 농악 관련 자료들5)
그러면, 먼저 과연 증산사상의 근저에는, 당산제 및 농악과 연관지을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들이 실제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보인다.
① 일곱 살 되시던 정축년(丁丑年)에 농악(農樂)을 보시고 문득 혜각(慧覺)이 열리셨으므로 장성(長成)하신 뒤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시되 농악은 흔히 구경하시니라.6)
② 하루는 걸군(乞軍)이 들어와서 굿을 친 뒤에, 천사(天師)께서 부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시고 친히 장고를 들어 메고 노래를 부르시며 가라사대 “이것이 곧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才人)이요 너는 천하 일등 무당(巫黨)이라.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巫黨)의 집에 가야 살리라.” 하시고, 인하여 부인에게 무당도수(巫黨度數)를 정하시니라.7)
③ 상제께서 백지에 “걸군굿 초란이패 남사당 여사당 삼대치”라 쓰고 “이 글이 곧 주문이라. 외울 때에 웃는 자가 있으면 죽으리니 조심하라” 이르시고 “이 글에 곡조가 있나니 만일 외울 때에 곡조에 맞지 않으면 신선들이 웃으리라” 하시고 상제께서 친히 곡조를 붙여서 읽으시고 종도들로 하여금 따라 읽게 하시니 이윽고 찬 기운이 도는지라.8)
④ (보천교에서는) 행사만 있으면, 농악을 최고로 쳐서 항상 농악을 하였다. 보천교 본부 안에는 농악 치배들이 기거하는 집이 따로 있었다. 이 집에서는 소고·대포수 및 여러 치배들이 상쇠한테 ‘아침 문안’을 드렸다.
농악인은 당시 조선 13도 사람이 다 왔다. 그래서, 치배들은 조선 13도 치배들 중에서 제일 잘 하는 명인들만 뽑아서 하도록 하였다. 상쇠는 함양 사람이 하였고, 대포수는 제주도 사람이 제일 잘 웃겼다. 열차만 오면 사람들이 정읍역에서 내려 빽빽이 길에 늘어서서 대흥리로들 걸어왔으며, 대흥리에 오면 이 큰 굿을 구경하고 감동하였다.9)
⑤ 농악에서 ‘도둑잽이’라는 것이 보천교 농악에서 나왔다. 이것은 아군이 적군을 포위해서 적군의 ‘도둑’이 훔쳐간 굿물/악기를 다시 찾고, 적군의 대장을 처단하는 일종의 군사놀이다. 이 놀이를 내가[월곡 차경석의 자제 차용남 옹] 어린 나이에 늘 보았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 큰 장관을 이루곤 하였으며, 이를 보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곤 하였다.10)
⑥ 또 말씀하시기를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고 하셨도다.11)
이 자료들 중에서 ①은 당산제의 가장 기본 필수 요건이 되는 ‘농악’을 증산이 5살 때 마을에서 처음 보고는, 다른 굿은 즐겨하지 않았으나 농악은 평생 즐겨 했다는 기록인데, 정읍지역에서 당산제를 행할 때에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필수적 요건이 바로 농악이었다. 증산의 생존 당시에는 농악이란 것이 오늘날과 같이 전문 농악단에 의해서 전문-무대예술로 보여지는 이른바 보여주기식 ‘연예농악’ 형태가 아니라,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마을굿 즉 당산제 형태나 전통 마을 세시풍속 현장에서 주기적으로 연행되던 것이었다. 예컨대, 정읍농악이 오늘날과 같은 무대예술 연예농악 형태로 발전한 것은 정읍 대흥리 보천교(普天敎) 농악 이후부터라는 제보의 기록도 있다.12) 그러므로, 이 ①의 기록 자료는 증산사상과 정읍지역 당산제 및 농악과의 관계를 논의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기본적 단서 자료가 될 수 있다.
②의 자료는 증산사상과 농악과의 관계를 매우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자료이다. 왜냐하면, ‘걸군(乞軍)’이란 ‘걸립패’ 곧 마을-공동체의 공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정초에 이른바 ‘걸립굿’을 치면서 자기 마을이나 다른 마을로 굿13)(농악)을 치러 다니는 농악패 구성원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자료를 보면, 이 ‘걸군’ 곧 걸립굿을 치는 농악패가 집안으로 들어와 걸립굿을 친 다음, 증산 자신도 걸군들과 같은 식으로 친히 장구를 치고 굿노래를 부르며, 고수부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고는, “이것이 곧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才人)이요 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라.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 가야 살리라.”라는 의미심장한 비유적 발언을 남기고 있다. 그 결말은 더욱 더 의미심장하여, “인하여 부인에게 무당도수를 정하였다.”는 것이다. 고수부에게 ‘무당도수’를 정했다는 것은 고부인을 우리나라 전통 마을들에서 정초에 마을굿[洞祭]를 행할 때, 이런 곳을 돌아다니며 굿을 하는 무당과 동일시하는 서민/민중사회의 최고 제의적 지위를 부여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 두 ①, ② 인용문에서 우리는 마을굿과 관련해서 증산이 강조한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농악을 평생 동안 매우 중시하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본인의 사상적 비전과 ‘농악패/걸군’과 긴밀한 친연성을 강조하면서, 본인이 추구하는 굿/비전이 이 걸군악/농악과 같은 계통의 ‘천지굿’이라 명명했다. 그러한 본인의 사상/비전의 방향을 무당 재인의 길과 연관시켜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지굿’은 주지하다시피 무당굿/무교에서 하는 굿 절차 혹은 굿 종류 중의 하나이기도 하며, 역사적으로는 멀리 부족국가시대 마한의 신성지역인 ‘소도(蘇塗)’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 ‘천군(天君)’의 제천 행위와 같은 계통의 굿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증산은 이처럼 자기의 새 시대 비전을 우리의 전통 마을굿과 같은 ‘대동굿’ 전통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14)
③의 자료는 상제께서 백지에 “걸군굿 초란이패 남사당 여사당 삼대치”를 써서 주문을 외우게 하는데, 이들은 풍물을 치고 다니던 유랑 예인집단으로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계층들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이들을 위로하여 해원공사를 하는 것으로 보이나, 본래 이들은 이들이 세상을 다스리던 시대의 ‘군장(君長)’의 역할을 했던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었다.
④의 자료는 일제강점기에 정읍 대흥리에서 증산사상을 실현하고자 창시되었던 초기 종교인 보천교(普天敎)가 한창 융성할 당시에, 이 종교의 성지 대흥리 보천교 본부에서 농악을 새롭게 재창조한 보천교 제의악인 ‘보천교 농악’에 관한 내용이다. 이것은 정기적으로 매일 연행할 당시의 상황에 관한 보천교 지도자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의 자제 차용남 옹의 제보를 기록한 자료이다.15) 이 자료는 당산제에 필수적인 연행 레퍼토리인 농악을 보천교에서 채용하여, 이를 보천교 종교악으로 새롭게 재창조해 나아간 과정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본 논의의 주요 자료로서의 자격이 부여될 수 있다.
⑤의 자료는 농악이 보천교의 종교악으로 재창조된 이후, 연극적인 ‘도둑잽이굿’을 농악 판에 도입하여 정읍농악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본 연구의 관련 자료가 될 수 있다.
⑥는 농악이 연행되는 동제나 두레굿 판에서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는 글자를 쓴 깃발을 들고 다니고 있다는 내용이다.
Ⅲ. 증산사상 관련 정읍지역 농악·당산제 자료들
정읍지역에서 현재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는 주요 마을굿인 당산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입암면 연월리 신월마을 당산제
② 영원면 장재리 백양마을 당산제
③ 신태인읍 우령마을 당산제
④ 북면 오류리 원오류마을 당산제
⑤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마을 당산제
⑥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당산제
⑦ 산외면 목욕리 솟대제
⑧ 옹동면 매정리 내동마을 당산제
이상에서 현재 전승되고 있는 지역과 과거 정읍지역에서 행해졌던 전반적인 당산제 양상을 종합해 보면 정읍지역 당산제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논자가 정읍지역 마을굿의 전승현황을 종합적으로 조사·정리해 본 자료16)에 의하면, 정읍지역 당산제의 전승 현황은 다음 <표 1>과 같다.
상기 <표 1>에서 정리된 전승 현황을 본 논의의 주제와 관련시켜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확인해낼 수 있다.
첫째, 모든 당산제에는 농악을 그 필수요건으로 갖추고 있다.
둘째, 과거 상당수의 당산제의 경우에 무당굿이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 남녀가 서로 대등하게 겨루되, 그 결과는 여성 쪽이 반드시 승리하는 쪽으로 귀결되는 남녀-줄다리기가 대부분 당산제 속에 포함되어 있다.
넷째, 이 당산제를 주도하는 주체상으로 보자면, 남성형·여성형·양성형 등으로 구별되는데, 이 중에 남성들이 제사를 주관하는 경우 13개 마을, 여성들이 제사를 주관하는 경우도 12개 마을이나 된다. 남녀-공동으로 거의 대등하게 참여하는 경우가 10개 마을이며, 나머지는 불명확하다.
다섯째, 이런 사례들에 비해, 전북 동부-산간지역 마을굿의 경우에는 마을굿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극도로 제한되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하는데,17) 정읍지역의 당산제의 경우, 여성들의 참여를 극도로 제한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유교식으로 지내기 이전에는 여성 주도로 제를 지내는 경향이 더 컸을 것으로 사료된다.
Ⅳ. 자료들의 비교를 통한 증산사상과 정읍지역 당산제와의 상관관계
이러한 정읍지역 당산제의 특성들은 증산사상과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앞의 Ⅱ장에서 제시한 바 있는 증산사상 관련 자료들과 Ⅲ장에서 제시한 정읍지역 당산제 및 농악 자료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먼저, 여기서 다시 Ⅱ장에서 제시한 증산사상 관련 자료들과 Ⅲ장에서 찾은 정읍지역 당산제 및 농악 자료들의 특성을 서로 관련시켜, 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표 2>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상의 <표 2>에서 정리한 증산사상과 정읍지역 당산제의 상관관계를 분석·해석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양자 사이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첫째, 정읍지역 당산제에는, 전통적으로 농악이 그 필수 요건으로 수반되고, 예전에는 정읍의 농악이 당산제와 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연행되었으며, 증산이 본인의 생존 당시에 자신의 고향에서 볼 수 있었던 정읍농악은, 바로 이와 같이 정읍지역 당산제와 관련하여 연행되던 농악으로 파악된다.
둘째, 증산이 정읍 당산제를 보았던 시기에는 농악·당산제·무당굿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여, 많은 당산제들에 있어서 무당을 불러다가 당산제의 당산굿을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증산은 어릴 때부터 당산제와 농악과 무당굿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체험적으로 파악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만일 증산이 이처럼 농악·당산제·무당굿18)의 긴밀한 상호관계가 이루어지는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 살았다면, 이런 많은 농악·당산제·무당굿 관련 비유와 체험 자료들은 증산사상 관련 경전이나 조사 자료들에 나타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셋째, 증산은 농악·당산제·무당굿과의 깊은 친연관계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19) 그가 나중에 성장하여 그의 사상을 수립할 때에, 농악패가 자신의 거주 장소로 들어오자 이 걸궁패/농악패의 굿을 ‘천지굿’, 자기 자신을 ‘일등재인’, 그리고 고부인/여성을 ‘천하 일등 무당’이라 재명명하고서는,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개혁적인 사상을 비유적으로 설파하여, 앞으로 사람들은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 가야 살리라.”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비유어법과 제의적 연행(演行)은 바로 고수부에게 ‘무당도수’를 정하는 장면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러한 증산의 사상적 변혁과 제의적종교적 수행은, 곧 그가 태어나 자란 정읍지역의 마을굿·농악·무당굿의 종교-제의적 연행에 깊은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이를 통해서 어느 정도 밝혀진다. 즉, 그의 ‘후천개벽’ 사상은 그가 태어나 자란 정읍지역의 농악·마을굿/당산제·무당굿의 제의적-연행적 토대와 깊은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넷째, 증산의 이러한 사상적 방향은 이 정읍지역 당산제에서 연행되는 ‘줄다리기’와도 깊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즉, (정읍지역) 당산제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줄다리기20)를 행하는데, 그 줄다리기의 연행방식이 성인 남성편과 여성편으로 나누어, 세 번을 겨루되 반드시 여성편이 이기도록 관행화 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편이 이기게 함으로써, 여성의 생명-탄생적 창조성을 활용하여, 마을 주민들의 풍년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인데, 이러한 여성편향적 놀이구조는 증산사상의 개혁적 지향성과 같은 지평을 취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다섯째, 또한 정읍지역 당산제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당산제가 그 제사-행위 자체를 여성들이 주도하여 수행하는 경우가 12곳이나 발견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 사례들 중에서 특히 태인면 오류리 원오류 마을의 경우는 대단히 도전적-도발적이며 ‘역성-혁명적易性革命的’21)이다.
즉, 이 마을의 당산제는 이른바 ‘단속곳제’라고도 하는데, 음력 2월 1일날 마을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풍물패/농악패가 단속곳을 입고 머리에 치마를 뒤집어쓰고, 풍물을 울리며 마당밟이를 한 다음, 마을 동구에 있는 당산에 제물을 차려 놓고, 무당을 불러다가 비손을 하도록 하는 제를 지낸다.22)
이러한 당산제의 연행방식은 일반적인 유교적-남성적 마을굿 제의 연행방식과는 대조적인, 그야말로 기존의 유교적-남성적 우월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태도를 실제로 자신들의 마을굿에 구현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증산이 걸군굿-무당굿을 ‘천지굿’으로 재창조하고, 이를 통해서 여성-중심의 후천개벽사상을 구현하고자 한 방향과, 이러한 정읍 당산제와 거의 같은 방향성을 지향하는 혁신적인 방향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증산사상은 정읍지역 당산제의 사상적 지향성과 그 연행방식을 그 중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여섯째, 현장 조사에 의하면,23) 증산의 증산사상을 처음으로 본격화한 종교인 정읍 대흥리 보천교에서는 농악을 일종의 종교-연행으로 채용하여, “행사만 있으면, 농악을 치도록 하고, 보천교 본부 안에 농악 치배들이 기거하는 집이 따로 있었으며, 이 집에서는 소고·대포수 및 여러 치배들이 상쇠한테 ‘아침 문안’을 드렸고, 그 치배들은 당시 조선 13도 사람이 다 왔기에, 이 보천교 농악의 치배들은 조선 13도 치배들 중에서 제일 잘 하는 명인들만 뽑아서 하도록 하였다.”는 조사 기록이 있다. 이것은 바로 증산사상의 종교화 과정에서도, 실제로 농악이 종교-연행의 중심을 이루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농악의 증산종단-종교연행화 과정은 바로 증산이 “다섯 살 때에 천사께서 마을에서 농악을 보시고 혜각이 열리시어, 다른 굿은 즐겨하지 아니하시었으나, 농악은 평생 즐겨 하시었다.”라는 농악의 체험과 깊은 영향관계를 입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일곱째, 또 한 가지 증산사상이 종교화한 보천교의 농악에서 처음으로 ‘도둑잽이굿’이 나왔다는 제보는 훗날 정읍농악에 그와 관련된 실제적인 ‘도둑잽이굿’ 전승자료를 남겨 놓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증산 강일순의 증산사상(甑山思想)과 그 사상의 실천으로서의 증산종단은 정읍지역 당산제 및 이와 관련된 정읍지역 농악 및 무당굿과 깊은 상호관계가 있으며, 이런 면에서 볼 때 증산사상 및 증산 관련 종교들은 정읍지역의 농악·당산제·무당굿을 그 중요한 제의적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음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
Ⅴ. 증산사상과 정읍농악과의 상관관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증산은 “일곱 살 되시던 정축년(丁丑年)에 농악(農樂)을 보시고 문득 혜각(慧覺)이 열리셨으므로 장성(長成)하신 뒤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시되 농악은 흔히 구경하시니라.”라는 『대순전경』의 기록에서와 같이, 아주 어릴 때부터 농악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관심은 훗날 그가 ‘증산사상’을 수립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었다는 것은 앞장에서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런데, 실제로 정읍농악과 증산사상 및 증산종단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를 자세히 논의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본 장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앞장에서 논의한 주요 관련 사실은 다음 같은 기록들이다.
① (보천교에서는) 행사만 있으면, 농악을 최고로 쳐서 항상 농악을 하였다. 보천교 본부 안에는 농악 치배들이 기거하는 집이 따로 있었다. 이 집에서는 소고·대포수 및 여러 치배들이 상쇠한테 ‘아침 문안’을 드렸다.
농악인은 당시 조선 13도 사람이 다 왔다. 그래서, 치배들은 조선 13도 치배들 중에서 제일 잘 하는 명인들만 뽑아서 하도록 하였다. 상쇠는 함양 사람이 하였고, 대포수는 제주도 사람이 제일 잘 웃겼다. 열차만 오면 사람들이 정읍역에서 내려 빽빽이 길에 늘어서서 대흥리로들 걸어 왔으며, 대흥리에 오면 이 큰 굿을 구경하고 감동하였다.24)
② 농악에서 ‘도둑잽이’라는 것이 보천교 농악에서 나왔다. 이것은 아군이 적군을 포위해서 적군의 ‘도둑’이 훔쳐간 굿물/악기를 다시 찾고, 적군의 대장을 처단하는 일종의 군사놀이다. 이 놀이를 내가 어린 나이에 늘 보았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 큰 장관을 이루곤 하였으며, 이를 보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곤 하였다.25)
이 조사 기록들의 내용을 종합해서 농악과 보천교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해낼 수 있다.
첫째, 보천교에서는 농악을 일종의 종교-연행으로 채택하여 중요한 공연 종목으로 상시로 연행하였다.
둘째, 이에 따라 보천교 본부 안에는 농악 치배들이 기거하는 집이 따로 있어서, 이 집에서 농악 치배들이 상쇠를 중심으로 일종의 위계질서를 이루고 기거하였다.
셋째, 이에 참여하는 농악인들은 전국 13도의 치배들을 망라하여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을 선발하였다.
넷째, 이들이 공연하는 큰굿은 전국에서 모여든 당대의 이른바 ‘600만 교도’들에게 큰 감동과 각광을 받았다.
다섯째, 이 보천교 농악에서 오늘날 호남농악에 전승되고 있는 ‘도둑잽이굿’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그 내용은 아군이 적군을 포위해서 적군의 ‘도둑’이 훔쳐간 굿물/악기를 다시 찾고, 적군의 대장을 처단하는 일종의 군사놀이 형태였다.
이러한 보천교 농악에 관한 조사 기술 내용은 결국 우리에게 농악에 관한 다음 세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첫째, 보천교에서는 그 당시까지 전승되어오던 정읍지역의 농악을 기초로 하여, 전국의 농악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였다.
둘째, 이러한 과정에서 보천교 농악은 정읍농악을 기본 토대로 하면서 거기에 전국 농악의 장점들을 아울러 융합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그 이전의 전통농악과는 다른 매우 독자적인 우리나라 ‘근현대농악’을 이룩하게 되었다.
셋째, 이렇게 이룩된 보천교농악은 특히 이 정읍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농악, 곧 호남우도농악 및 호남좌도농악에까지 전파적인 영향력을 미치었다.
이렇게 계승·전파되어 나아간 보천교 농악, 특히 그 중에서도 이른바 ‘도둑잽이굿’은 이후에 호남농악, 예컨대 정읍농악·김제농악·부안농악·임실농악·남원농악·진안농악 등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26) 물론, 그 반대의 영향 곧 기존의 농악들에 존속하고 있던 ‘도둑잽이굿’이 이러한 보천교 종교 연행에 영향을 미친 것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날의 정읍농악에서는 이 ‘도둑잽이굿’이 가장 자세한 형태로 계승되고 있음을 이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바로 그 정읍농악에 전승되고 있는 ‘도둑잽이굿’ 관련 기록 자료 중에서 ‘대포수’와 ‘상쇠’가 서로 주고받는 일종의 연극적인 대화인 이른바 ‘대포수 재담’이란 것이다.
상 쇠:술영수!
앞치배:예−잇!
상 쇠:성안 성내에 도적이 들었으니 각향 치배 다 모이랍신다.
앞치배:예−잇
상 쇠:각향 치배 다 모였습네?
앞치배:예−잇!
상 쇠:다 모였으면 일초 이초 제지하고 단삼초 후에 행군하라!
앞치배:예−잇!
나발수:나발을 세 번 분다.
상 쇠:다 모였으면 행군하라! (이 때, ‘늦은풍류가락’을 내어 친다.)
대포수·창부:(이 때 대포수와 창부는 벌벌 떨면서 자기의 진중을 빙빙 돈다.)
상 쇠:(나발을 2~3미터 앞으로 옮겨 놓는다.)
대포수·창부:(나발을 보고 다가가 그것에 대고 몇 번이나 절을 한 다음, 그것을 어루만지다가 나발을 훔쳐가지고 자기의 진중으로 돌아가, 다음과 같이 서로 잘난 체를 하면서 위세를 부린다.)
대포수:야, 이 작은 놈아!
창 부:예− 아구지27)
대포수:야, 이놈아! 이것 좀 잘 살펴봐라!
창 부:(나발을 들어 입으로 분 다음에 스스로 놀라 도망친다.)
대포수:야, 이놈아! 그게 무엇인데 그렇게 놀래느냐? 이리 가져와라!
창 부:(나발을 대포수에게 가져다준다.)
대포수:(손에 든 총을 땅에 놓고 창부로부터 나발을 받는다. 자기의 볼기를 툭탁치며) 옳다. 이놈아! 인제 알았다. 이게 이놈아, 암행어사가 쓰던 통청관이다. (그리고 자기가 쓴 상모를 벗어서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나발을 머리 위에 쓴다.)
창 부:(대포수에게 쫓아가) 아구지, 나도 인제 알았소. 나 좀 주시오.
대포수:(나발을 창부에게 준다.)
창 부:(나발을 받아들고) 아구지, 이것은 통테 둥굴테입니다. (하고는 나발의 부는 쪽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나발 중간을 잡고 나발 끝을 땅에 대고 주위를 한 바퀴 돈다.
상쇠진영:(그러는 순간, 상쇠 진영 쪽에서 농악을 울리고 잡색 진영으로 쫓아 들어간다.)
대포수·창부:(나발을 그 자리에 놓고 지가 진영으로 들어가 은신한다.)
상쇠진영:(다시 제자리로 물러난다.)
상 쇠:(나발을 가지고 와서 일초·이초·삼초 분다.)
창 부:(종이쪽지를 한 장 가지고 대포수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구지, 편지 왔습니다.
대포수:오냐, 이놈아. 어디서 왔느냐?
창 부:아구지, 집에 손님이 왔어요.
대포수:응, 그래. 죽 끓여 줬냐, 밥 끓여 줬냐?
창 부:죽 끓여 줬어요.
대포수:야, 그 일은 시키지 않어도 잘 했다. 가만히 있거라. 편지부터 읽어보자. 합천 해인사라. 고창 선운사라. 장성 백양사라. 금구 금산사라. 강원 금강산 팔만 이천봉 팔만 구암자라. (상쇠 진중을 향해) 야, 이놈들아. 평양감사가 점심을 먹자고 편지를 보냈구나. 이놈들아, 나 바빠서 못 간다고 해라.
(이 때, 상쇠 진영 치배들 전원이 굿소리를 크게 내며 대포수 진영을 향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간다.)
상 쇠:부안진지!
상쇠진영:예-이!
대포수:부안진지, 부안진지? 아니, 부안 원님이 좋겠다!
상 쇠:수수적자!
상쇠진영:예-이!
대포수:수수적자, 수수적자? 아니, 상모꼭대기가 좋겠다!
상 쇠:관기정착!
상쇠진영:예-이!
대포수:관기정착, 관기정착? 아니, 니 애비 족보가 좋겠다!
상 쇠:이천금고!
상쇠진영:예-이!
대포수:이천금고, 이천금고? 아니, 가야금 거문고가 좋겠다!
상 쇠:군법유수!
상쇠전영:예-이!
대포수:군법유수, 군법유수? 아니, 동네 동장이 좋겠다!
상 쇠:만인일심!
상쇠진영:예-이!
대포수:만인일심, 만인일심? 아니, 한 마음 한뜻이 좋겠다!
상 쇠:고두수명!
상쇠진영:예-이!
대포수:고두수명, 고두수명? 아니, 만백성들이 좋겠다, 이놈들아!
(이 때에, 대포수 진영이 굿판 중앙으로 달려 와서 굿판 중앙에 방울진을 치면, 상쇠 진영이 굿소리를 크게 울리며 대포수 진영을 원진으로 포위한 다음 같은 청령을 한다)
상 쇠:술령수!
치배들:예-이-!
상 쇠:장군의 용맹과 성군의 덕택으로 도적을 잡았으니, 승전고를 울리랍신다!
북 수:(북을 세 번 친다.)
(이 때에 영기수가 대포수의 상모를 영기의 삼치창으로 꿰어 들어 높이 치켜든다.)28)
이 상쇠와 대포수가 주고받는 연극적인 재담 내용은, ‘도둑잽이굿’을 할 때에 굿패가 아군패-상쇠패[상쇠를 대장으로 하여 앞치배들로 이루어진 굿패]와 적군패-대포수패[대포수를 중심으로 하여 뒷치배/잡색들로 이루어진 굿패]로 나누어져, 아군패가 성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적군패가 성안으로 몰래 숨어들어와 아군의 수령 상쇠의 쇠/꽹과리를 훔쳐가자, 아군패가 적군패를 포위한 다음에, 적군패 대장인 대포수와 아군패 대장인 상쇠가 서로 주고받는 재담이다.
이런 재담을 주고받다가, 대포수가 뱃속에 상쇠의 쇠를 감춘 것을 알고 그것을 다시 되찾고, 대포수의 머리를 상징하는 대포수의 상모를 삼지창으로 꿰어서 높이 치켜들어 적군패의 외침을 처단하는 것으로 이 ‘도둑잽이굿’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오늘날 정읍농악에 전승되고 있는 ‘도둑잽이굿’ 내용을 보면, 앞의 보천교 농악에 관한 조사기록에서 “농악에서 ‘도둑잽이’라는 것이 보천교 농악에서 나왔다. 이것은 아군이 적군을 포위해서 적군의 ‘도둑’이 훔쳐간 굿물/악기를 다시 찾고, 적군의 대장을 처단하는 일종의 군사놀이다.”라는 보천교 교주 월곡 차경석의 자제인 고 차용남 옹의 제보 내용과 전체적으로 일치함을 알게 된다.
이런 자료들의 확인을 통해서, 우리는 보천교 농악이 오늘날의 정읍농악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보천교 농악의 ‘도둑잽이굿’이 오늘날의 정읍농악을 비롯하여 타 지역 농악에까지 전승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Ⅵ. 결어
본 연구는 증산사상의 민속적 성격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일차적 논의로서, 증산사상과 관련된 자료들과 정읍지역 당산제 및 농악 관련 자료들의 구체적인 관련 양상 파악에 그 초점이 있다. 이에 따라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읍 출신 사상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 이루어낸 증산사상(甑山思想)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지역적 영향원(影響源)로서의 정읍지역 농악·마을굿/당산제와 증산사상의 영향 관계를, 증산사상 관련 자료들과 정읍지역 농악·당산제 관련 자료들의 관련 양상 분석을 통해서 고찰해 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본 고에서는, 이 두 영역의 자료들의 상호관계를 연관 지어 논의하는 방향으로 내용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어떤 사상가의 사상은 그가 태어나 성장한 지역의 문화민속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둘째, 증산이 태어나 자라고 나중에 자신의 증산사상을 이룩해 나아간 중심 지역은 정읍지역이다.
셋째, 정읍지역 당산제에는 전통적으로 농악이 그 필수 요건으로 수반되고, 정읍의 농악은 이 당산제와 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연행되었다.
넷째, 증산이 본인의 생존 당시에 자신의 고향에서 볼 수 있었던 농악은 바로 이와 같이 정읍지역 당산제와 관련하여 연행되던 농악으로 파악된다.
다섯째, 증산이 정읍 당산제를 보았던 시기에는 농악·당산제·무당굿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여, 많은 당산제들에 있어서 무당을 불러다가 당산제의 당산굿을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증산은 어릴 때부터 당산제와 농악과 무당굿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체험적으로 파악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관련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증산의 이러한 정읍지역의 농악·당산제 및 무당굿에의 체험은, 자신의 해원-상생사상을 표현하는 비유적 어법에서, 걸궁패/걸립굿패의 굿/농악을 ‘천지굿’이라, 자기 자신을 ‘일등재인’, 자신의 고수부/여성을 ‘천하 일등 무당’이라 재명명하는 과감한 개벽적 사상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비유어법과 제의적 연행(演行)은 바로 고부인에게 ‘무당도수’를 정하는 장면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일곱째, 증산의 이러한 사상적 방향은 남성편과 여성편으로 나누어 세 번을 겨루어 반드시 여성 편이 이기도록 관행화 되어 있는 정읍지역 당산제의 ‘줄다리기’ 관행의 여성중심적 경향성을 활용하여, 자신의 ‘증산사상’의 근원적 토대로 삼고 있다는 점도 확인이 된다.
여덟째, 특히, 정읍지역에서 여성들이 주도하여 수행하는 당산제 특히 태인면 오류리 원오류 마을의 경우와 같이, 기존의 남성주도형 당산제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매우 도전적-도발적인 당산제인 이른바 ‘단속곳제’와 같은 당산제는, 그의 증산사상의 변혁적 지평을 형성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아홉째, 한편, 증산이 체험한 정읍지역 농악에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농악을 매우 중시하는 사상적 경향성을 나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사상을 종교화한 초기 종교인 정읍 보천교에서는 농악을 일종의 종교제의악으로 채용·재창조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고 있음도 확인이 되며, 이는 훗날 정읍농악뿐만 아니라, 호남농악 및 근현대 우리나라 농악 전반에 걸친 지대한 영향으로 확장·심화되어 나아갔음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해온 우리 전통 민속예능, 특히 정읍지역의 농악·무속·당산제와 같은 민속예능들을 통해서 가장 민중/서민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여성의 위상을 새롭게 재정립한 증산사상의 음양합덕의 토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민속예능들의 전통이 박제화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 사상 개척의 토대로서의 의의와 가치도 매우 큰 것임을 깨닫게 한다. 오늘날 우리 민족 혹은 동아시아 종교사상의 새로운 비전으로 부상해 있는 ‘증산사상’ 속에, 이처럼 그가 생장한 정읍지역의 민속예능의 전통이 그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정읍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아직까지도 전승되고 있는 농악·무속·당산제/동제/마을굿의 전통이 그 사상사적 지평에서도 결코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앞으로, 본 고에서 확인하고 논의한 사항들은 ‘증산사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모멘트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본고는 증산사상과 전통 민속예능들과의 연계성 연구를 위한 토대연구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시론적 고찰이다. 앞으로 본 연구를 근거로 해서, 이러한 방향의 연구를 좀 더 심도 있게 진행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에 관한 좀 더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논의들이 해당 학계에서도 더욱 더 활성화 되어질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