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황건적(黃巾賊)의 봉기는 후한(後漢)을 붕괴시킨 대표적인 사건이었고 황건적 봉기의 자양분이 되었던 유민 발생의 궁극적인 원인이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등 무능한 황제와 환관 탓이라는 서술이 일반적인 통사적 견해이다. 필자는 『후한서』를 읽으면서, 단순히 두 황제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했다. 후한 중기의 화제(和帝) 시기부터 빈발하기 시작한 자연재해 및 강(羌)의 반란과 재정, 유민(流民) 문제라는 누적된 문제가 결국 후한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선행연구를 검토하면 영제 시기의 정치 문제1)와 관작(官爵) 매매,2) 자연재해,3) 질병,4) 유민(流民),5) 자연재해와 도교 교단의 관계6)를 다룬 연구가 있다. 그러나 영제 시기 재정과 자연재해 또는 반란, 유민과의 관계를 다룬 연구는 적다. 후한 재정 문제는 재정제도,7) 국가 재정과 제실(帝室) 재정의 관계,8) 중앙재정과 지방재정,9) 중앙정부의 재정 장악과 배분,10) 군사비 추산,11) 재정위기와 봉록 미지급12)을 다루었다. 일부 연구는 자연재해·전염병과 종교(道敎), 유민과 도교 등의 관계를 논증했지만, 후한말 자연재해, 전염병, 종교, 유민, 재정의 상호관계를 논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필자는 외척의 발호, 청류파(反宦官派)와 환관 세력의 정쟁으로 후한의 붕괴를 설명하는 정치적 해석에서 벗어나 후한말 재정과 자연재해·전염병, 강의 반란, 유민 발생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후한의 붕괴를 재해석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후한말부터 누적된 재정위기가 영제 시기 황건적의 난과 그 전제가 되었던 유민 발생에 영향을 주었음을 밝히려고 한다. 아울러 황건적 봉기 평정 이후 낙양궁(洛陽宮)의 화재와 이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영제와 환관의 사욕과 수탈이 후한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논증한다.
2장에서 황건적의 봉기와 만성적인 재정 파탄의 관계를 검토한다. 먼저 영제 시기 발생한 관작 매매의 원인을 재정 파탄과 관련지어 살펴보고, 양사 등 신하들이 제기한 유민 대책과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영제의 결정이 황건적의 봉기를 초래했음을 검토한다. 3장에서 황건적의 봉기를 진압한 다음 해에 발생한 낙양궁 화재 이후 궁전 재건을 빙자한 증세와 매관매직의 가정(苛政)이 유민의 발생과 영제말 전국적 봉기로 확대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Ⅱ. 황건 봉기 이전 재정 파탄과 ‘유민(流民) 대책’
후한 중기에 시작된 자연재해와 전쟁, 반란13)은 영제 재위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1>에서 정리한 건녕원년(168)~광화원년(177) 자연재해와 전쟁, 반란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후한 중기 이후 간헐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선령강(先零羌)이 건녕(建寧) 2년(169)에 평정되었다. 단양(丹陽)·회계(會稽)·익주군(益州郡)·강하(江夏)·합포(合浦)·교지(交阯) 등지에서 한인(漢人) 또는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선비(鮮卑)가 9차례 후한의 변경을 침입하였다. 반란은 평정되었지만, 선비의 북변 침입을 막기 위해 군대를 배치하는 등 전쟁비용이 증가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표 1>에서 대규모 재정지출을 초래할 사건은 보이지 않는다. 희평(熹平) 6년(177)에 대규모 가뭄과 7주의 메뚜기 피해14)는 재정수입 감소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속한서』 「오행지」에 따르면 이해를 전후로 선비가 30여 회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15) <표 1>에서 영제가 즉위했을 때부터 광화원년(光和元年, 177)까지 「효영제기(孝靈帝紀)」에 기록된 선비의 침입은 9회에 불과하다. 이는 최소 21회 이상 선비의 침입 기록이 누락되었음을 뜻한다. 희평 6년(177)에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 하육(夏育)과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郎將) 전안(田晏),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郎將) 장민(臧旻)이 남흉노(南匈奴) 선우(單于) 등을 이끌고 선비를 공격했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1/3의 군사들만 돌아왔다. 이때 대사농(大司農)이 관할하는 경용(經用)이 부족하여 군국(郡國)에서 곡식을 징발하여 군량으로 공급하였다.16) 경용, 즉 재정수입이 부족했기 때문에 지방에서 징발한 군량은 실제로 각 지방에서 임시로 부과한 세금이었을 것이다.17)
중앙정부의 재정 또는 중앙과 지방의 재정수입이건 이 시기 재정 궁핍의 조짐은 건녕원년(建寧元年, 168) 시월,19) 희평 3년(174),20) 희평 4년(175),21) 희평 6년(177)22) 투옥되었으나 재판이 끝나지 않은 죄인에게 겸(縑)을 내고 속죄할 수 있도록 한 조치에서 발견된다. 이는 감옥 관리 비용의 감소와 재정수입 확보, 특히 후자 때문에 실시한 조치였을 것이다.
재정수입의 감소 요인도 있었다. 희평 4년(175) 재해가 발생한 군국(郡國)에 전조(田租) 징수액의 절반을 징수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상해가 4/10 이상이면 전액 면제하였다.23) 이해 사월에 7개 군·국에서 수재를 겪었고,24) 유월에 홍농(弘農)·삼보(三輔)에서 벌레 피해가 있었다.25) 이 두 기사에서 11개 군·국에서 거둘 수 있는 절반 이상의 전조 수입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영제가 다음 해인 광화원년(178)에 서저(西邸)를 열고 공공연히 관직 매매를 시도한 이유는 중앙정부의 재정수입 부족 때문이다. 즉 관내후(關內侯)·호분(虎賁)·우림(羽林)은 납입하는 전(錢)의 액수에 따라 임명되었고, 공경(公卿) 벼슬도 거래되었다. 삼공(三公)은 1천만 전, 구경(九卿)은 5백만 전이었다.26) 또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따르면, 이천석(二千石)은 2천만 전, 사백석(四百石)은 4백만 전을 납부해야 했고 적임자는 1/2 또는 1/3을 내고 관리가 될 수 있었다.27) 여기에서 이천석은 태수(太守)나 상(相)을 지칭하고, 현령(縣令)은 천석(千石), 현장(縣長)은 사백석(四百石) 또는 삼백석(三百石)이었으므로28) “사백석(四百石)”은 현장(縣長)을 가리켰을 것이다. 『속한서』 「오행지」1 복요조에 따르면 어사를 보내 서저에서 매관하도록 했고 관내후가 되려면 500만 전을 내야 했으며 현령·현장도 현의 규모에 따라 값을 매겼다.29) 여기에서도 현령·현장이 언급된 것을 보면 “사백석”은 현장을 지칭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매관(賣官)의 대상은 삼공·구경 등 조정 대신뿐만 아니라 이천석(태수·상)·현령·현장 등 지방관, 호분·우림 등 친위부대의 병사까지 다양하였다. 삼공의 매관 총액은 3천만 전, 구경은 4,500만 전, 태수·상(이천석)은 19억 6,000만 전30)이었다. 이 세 부류의 관직 매매로 20억 3,500만 전이었다. 또 순제 시기 현(縣)·읍(邑)·도(道)·후국(侯國)은 1,180개인데,31) 사백석, 즉 현장의 매매가 4백만 전으로 계산하면 47억 2천만 전이다. 현령의 매매가가 현장의 매매가보다 높기 때문에 이 수치는 최소치이다. 즉 영제는 조정의 삼공과 구경, 지방관인 태수·상·현령·현장의 관직을 팔아 최소 67억 5,600만 전 이상의 수입을 거두었다. 이는 후한시대 세조(稅租) 1년분인 60여억 전보다 많은 액수이다. 지방관인 태수·상·현령·현장이 2천만 전 또는 4백만 전을 내고 군·국과 현에 부임하면 본전과 적정 이익을 얻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즉 광화원년(178) 매관·매작은 관리들의 공공연한 수탈을 공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4년 후인 광화 5년(162)에 공경이 천거한 자사(刺史)와 이천석이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인물들이었고 태위(太尉) 허역(許戫)과 사공(司空) 장제(張濟)가 화뢰(貨賂)를 받고 환관(宦官) 자제와 빈객(賓客)이 탐오(貪汙)해도 처벌하지 않고 불문에 부쳤다.32) 이는 중앙과 지방관의 가정(苛政)을 이어져서 수탈에 견디지 못해 유망한 유민들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33)
1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연재해와 영제의 매관매직, 관리들의 가렴주구 때문에 유민이 대량으로 발생하였고 상당수는 병을 치료해주는 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 등 도교 교단에 귀의하였고,34) 결국 태평도 교주 장각(張角)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문제에 앞서 후한의 유민 안무 정책을 살펴보자.
광무제(光武帝) 이후 역대 황제들은 유민을 안무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예컨대 명제(明帝) 영평(永平) 3년(60) 이월,35) 영평 12년(69) 오월,36) 영평 17년(74),37) 영평 18년(75) 사월,38) 영평 18년(75) 시월,39) 장제(章帝) 건초(建初) 3년(78) 삼월,40) 건초 4년(79) 사월,41) 화제(和帝) 영원(永元) 8년(96),42) 영원 12년(100) 삼월,43) 원흥원년(元興元年, 105) 십이월,44) 영초(永初) 3년(109) 정월,45) 안제(安帝) 원초원년(元初元年, 114) 정월,46) 순제(順帝) 영건원년(永建元年, 126) 정월,47) 영건 4년(129) 정월,48) 양가원년(陽嘉元年, 132) 정월49) 등 모두 15회나 걸쳐 백성들에게 작(爵)이나 물자를 하사할 때 호적에 등록하기 원하는 유민들에게 작 1급을 주었다. 특히 화제 영원 6년 삼월 경인일(94. 5. 6)에 반포한 조서에서 유민이 지나가는 군·국에서 유민을 구휼하고, 판매자에게 조세를 거두지 못하게 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1년의 전조와 갱부(更賦)를 면제한다고 천명하였다.50) 유민들의 거래에 상거래에 과세하는 규정과 달리 세금 징수를 면제하는 우대 정책이었다.51) 1년의 전조와 갱부를 면제라는 유인책을 통해 유민들의 귀향도 권장하였다. 영원 12년(100) 이월에 재해를 입은 군민(郡民)들에게 종자와 식량을 제공함과 동시에 환과고독(鰥寡孤獨) 등과 군·국 유민들에게 피지(陂池)에서 물고기를 잡아 소식(蔬食)에 도움이 되도록 허락하였다.52) 당시 방죽과 못의 생산물에 세금을 거두었기 때문에 유민들과 환과고독 등 사회적 약자에게 세금을 내지 않고 물고기 등을 잡아 굶주리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영원 14년(102) 사월에 장액(張掖)·거연(居延)·돈황(敦煌)·오원(五原)·한양(漢陽)·회계(會稽) 6군 유민 중 하빈(下貧)에게 곡식을 진대하였다.53) 영원 15년(103)에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는 유민에게 지나는 곳에서 식량을 주고 질병이 있으면 의약을 지급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자는 강요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54) 안제 영초원년(107) 십일월에 사예교위(司隸校尉)와 기(冀)·병(并) 2주 자사에게 유민의 귀향을 권고하고 원하지 않으면 강요하지 말라고 하였다.55) 영초 2년(108) 이월에 광록대부(光祿大夫) 번준(樊準)과 여창(呂倉)을 기주(冀州)와 연주(兗州)에 파견해 유민에게 품대(稟貸)하라고 지시하였다.56) 이러한 유민 대책이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호적 등록을 원하는 유민에게 작 1급을 주는 순제 시기까지, 유민의 생계 도모, 면세, 귀향, 품대 등의 조치는 안제 때까지 실시되었다. 그런데 순제, 환제(桓帝), 영제는 재정수입 부족으로 제후왕(諸侯王)이나 열후(列侯), 이민(吏民) 등에게 조(租)나 현물을 빌려야 하거나 매관·매작의 방법으로 부족분을 채워야했기 때문에 유민들을 도울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특히 영제 시기 자연재해로 발생한 이재민이나 유민들을 구휼하지 않았거나 못했다. 이는 자연재해로 재정수입이 감소하였고 후한 중후기 이민족의 침입 또는 반란 때문에 재정이 황정(荒政)을 감당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57) 그 결과 자연재해와 가렴주구에 시달린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유민이 되었고, 태평도의 교주 장각에게 몰렸다.58) 백성들이 의술이 뛰어난 장각의 아우 장량(張梁)·장보(張寶)에게 모여든 것도 당시 전염병의 만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59)
그런데 당시 후한 조정은 장각의 불온한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장각이 무리를 모으고 있을 때 사도 양사(楊賜)는 부하인 유도(劉陶)와 논의하여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전에 황건수 장각 등이 좌도(左道)를 주지하며, 대현(大賢)이라 칭하여 백성을 속이자, 천하 사람들은 어린애를 업고 물건을 지고 그에게 귀부했다. 이때 사도 양사는 사도연 유도에게 ‘장각 등이 사면되었으나 후회하지 않고 점점 늘어나 퍼져서 지금 주군에 명령을 내려 체포하려고 하면 다시 많은 사람이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나 술렁거려 갑자기 재앙을 만들까 두렵다. 자사·이천석에게 엄한 명령을 내려 유민들을 가려 뽑아 각자 본군으로 돌아가도록 호송하여 장각의 당을 고립시키고 약화 시킨 이후 그 거수(渠帥)를 주살하면 수고롭지 않고도 가히 평정할 수 있다.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유도는 ‘이는 손자(孫子)가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라고 말하는 계책이며, 계략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술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양사는 황제에게 보고하였다.60)
위의 인용문에서 장각 등은 이전에 투옥되었다가 사면을 받았고 사도 양사는 이미 장각이 위험인물임을 알아채고 제거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양사는 직접 장각 일당을 체포하면 그를 따르는 무리가 소동을 일으킬 것이므로 먼저 장각의 지지세력인 유민들을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장각의 힘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제시하였다. 위에서 유도는 상관 양사의 말에 동의했다고 했는데, 『후한서』 「유도전」에는 유도가 봉거도위(奉車都尉) 악송(樂松), 의랑(議郞) 원공(袁貢)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고 기록하였다.61) 두 기사를 종합하면, 사도 양사 이외에도 사도연 유도, 봉거도위 악송, 의랑 원공 등 장각의 난을 예상하고 대책을 세운 관리들이 있었다. 이들의 제안대로 먼저 유민들을 본적에 안치했다면 황건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제는 이러한 제안을 듣지 않았고 결국 장각은 신도들을 규합하여 봉기를 일으켰다.62) 후한 중기 이후 누적된 자연재해, 전쟁, 반란으로 고갈된 재정 문제와 영제 자신이 초래한 매관매직 때문에 발생한 유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더라도 유민들의 귀향을 추진했다면 황건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
황건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영제는 중평원년(184) 이월에 발 빠르게 대처했다. 우선 삼월에 황후의 오빠인 하진(何進)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해 친위부대를 거느리고 낙양(洛陽)을 지키게 했다. 이어서 낙양 주변에 함곡(函谷), 태곡(太谷), 광성(廣城), 이궐(伊闕), 환원(轘轅), 선문(旋門), 맹진(孟津), 소평진(小平津) 등 8관(關)63)을 설치하고 각 관에 도위(都尉)를 두어 방어를 맡겼다.64) 황보숭(皇甫嵩)과 주준(朱儁)은 오월에 영천군(潁川郡) 장사현(長社縣)에서 두목 파재(波才)와 재차 격돌하여 크게 승리했다.65) 유월에 남양태수(南陽太守) 진힐(秦頡)이 황건적과 싸워 두목 장만성(張曼成)을 참하는 전과를 올렸다.66) 황보숭과 주준은 같은 달에 서화현(西華縣)에서 여남군(汝南郡)의 황건적을 격파했다. 승전보를 들은 영제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황보숭에게 동군(東郡)의 황건적을 토벌하게 하고, 주준에게 남양군의 황건적 토벌을 맡겼다.67)
기주에서 분전한 노식(盧植)은 황건적을 연달아 격파한 끝에 광종현(廣宗縣)에서 장각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환관 좌풍(左豐)의 모함을 받아 포상은커녕 관직을 빼앗기고 감옥에 갇혔다. 대신 동탁(董卓)이 부임했지만 반란군을 이기지 못했다.68)
반면 황보숭은 팔월에 동군 창정(倉亭)에서 황건적을 격파하고 두목 복이(卜已)69)를 사로잡았다. 시월에 광종현에서 황건적을 물리치고 장각의 동생 장량을 붙잡았다. 황보숭은 장각의 무덤을 파내어 그의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황보숭은 십일월에 하곡양(下曲陽)에서 황건적을 격파하고 장각의 아우 장보를 참했다.70) 이로써 황건적의 구심점은 모두 제거되었다. 주준은 같은 달에 남양군의 치소 완현(宛縣)을 되찾고 황건적의 두목 손하(孫夏)를 참하여 황건의 난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Ⅲ. 중평(中平) 2년 낙양궁(洛陽宮) 화재의 후과(後果)
비록 황건적의 봉기는 1년도 되지 않아 진압되었지만, 이 때문에 전국에서 기근에 시달렸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상황에 이르렀다.71) 황건적의 봉기가 평정된 후 영제는 근신하며 음식과 구마(廄馬)를 줄였으나72) 영제의 태도를 바꾸게 할 사건이 일어났다. 황건적의 봉기를 진압한 다음 해인 중평(中平) 2년 이월 기유일(185. 3. 28)에 남궁(南宮)의 대화재가 일어나 반달 동안 계속되었다.73) 이때 영대전(靈臺殿), 낙성전(樂成殿)과 가덕전(嘉德殿), 화환전(和驩殿)이 불탔다.74) 영제는 농지 1무(畝)에 10전을 내라고 명령했는데,75) 이는 궁전 수축을 위한 증세였다.76) 영제 시기 전국의 농토의 면적은 알 수 없지만, 『후한서』 장회태자주에서 인용한 『제왕세기(帝王世記)』에 따르면 가장 가까운 시기인 충제(沖帝) 본초원년(本初元年, 146)의 간전(墾田)이 6,930,123경(頃) 38무였다.77) 1경이 100무이므로 장부상 693,012,338무에서 6,930,123,380전을 징수할 수 있었다. 당시 중앙정부 1년 세조(稅租)가 약 60여억 전이었으므로, 6,930,123,380전은 당시 1년치 세조(稅租)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속한서』 「군국지」에서 인용된 『제왕세기』에 따르면 환제 영수(永壽) 2년(156) 16,070,906호(戶), 50,066,856구이고, 간전도 증가하였다.78) 따라서 이때 거둔 돈은 6,930,123,380전보다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건의 봉기 때문에 백성의 사상자 수가 절반을 넘었다는 『속한서』 「오행지」의 기록79)이 옳다면 납세자의 절반이 죽어 산술적으로 거둘 수 있는 조세는 6,930,123,380전의 절반에 불과했을 것이다. 반면 약 69억원을 미리 책정하고 거두려고 했다면, 인구 감소로 실제 백성들의 부담이 배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후한서』 卷78 「환자·장양전」에서 이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다음 해 남궁에서 화재가 났다. 장양(張讓)과 조충(趙忠) 등은 영제에게 전국 농토에 10전을 징수하도록 명령을 내려 궁실을 수리하자고 꼬드겼다. 태원(太原)·하동(河東)·적도(狄道) 제군(諸郡)80)의 재목과 문석(文石)을 징발하고 제군부(州郡部)에서 경사(京師)로 수송하게 하였다. 황문상시(黃門常侍)는 제때 수송하지 못한 자들을 엄히 꾸짖고 강제로 싼 가격에 사고 고임(雇賃)을 1/10로 지불한 후에 다시 환관(宦官)에게 뇌물을 주었으니 다시 바로 받지 못하고 재목은 모두 썩어서 궁실은 여러 해 동안 완성되지 않았다. 자사·태수는 다시 사조(私調)를 늘려 징수하니 백성들은 신음하였다. 거둬들인 것은 모두 서원(西園)으로 운반하였고, ‘중사(中使)’라고 칭하며 주군(州郡)을 협박하여 대부분 뇌물을 받았다. 자사·이천석, 무재(茂才)·효렴(孝廉)의 임명 때 모두 조군수궁전(助軍守宮錢)을 요구하여 대군(大郡)은 2-3천만 전, 나머지는 각각 차등이 있었다. 관(官)이 되려는 자는 모두 먼저 서원에 이르러 정한 가격을 낸 후에 부임하였다. 전을 모두 내지 못한 자는 자살하는데 이르렀다. 청렴을 지킨 자는 관이 되지 않기를 청했으나 모두 강제로 취임하였다.81)
남궁에 화재 발생하자 장양과 조충이 농지에 10전을 걷어 궁실을 수리할 것을 영제에게 권하였다. 『후한서』 「육강전」에서 영제가 동인(銅人)을 주조하려고 했으나 국용(國用)이 부족하여 민전(民田)에 1무에 10전을 거두려고 했다고 기록했으나 수재와 한재 때문에 곡식이 상하여 백성들이 가난하고 고통스러웠다고 기록하였다.82) 이 기록에서 민전에 추가로 걷은 돈이 주로 동인(銅人) 주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술적으로 농민들이 100무, 즉 1경의 토지를 경작했다고 하면 1,000전의 세금을 더 내야 했다. 속(粟) 1곡(斛)을 100전이라고 한다면, 10곡(석), 200전이라고 하면 5곡(석)의 곡물을 더 내야 했다. 한대에 100무의 토지에서 200석을 거둔다는 연구83)에 따르면, 1/30의 전조는 6.7곡이므로 10곡 또는 5곡은 전조의 0.5배 또는 거의 같은 양을 부가세를 더 내야 했다. 중장통(仲長統)은 비옥한 농토 1무에 3곡을 거둘 수 있다고 썼다.84) 이 경우 100무를 경작하는 농민은 전조로 생산물의 1/30을 납부했으로 300곡의 1/30인 10곡을 내야 했다. 그런데 1,000전에 해당하는 5~10곡을 더 징수당했으므로 전조의 50%~100%를 더 내야했다. 따라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또 궁전 건축을 위해 태원·하동·농서(狄道) 제군(諸郡)의 목재와 문석을 징발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이 가격을 깎고 고임(雇賃)을 1/10만 지불하고 물자를 환관이 가로챘다. 덕분에 궁실이 여러 해 동안 완성되지 않았다. 가렴주구는 환관만 자행하지 않았다. 자사와 태수가 사조(私調)를 더 거두게 되어 백성들의 원망이 커졌다. 또 자사와 이천석, 무재·효렴 임명 때 군사비와 궁전 수리를 위한 재물을 독촉하였다. 대군(大郡)은 2~3천만 전, 나머지는 차등으로 내도록 하였다. 관직 매매는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진서』 「식화지」에서도 1절에서 검토한 『후한서』 「환자·장양전」의 인용문과 유사한 기사를 실었다. 정위(廷尉) 최열(崔烈)은 500만 전을 내고 사도에 임명되는 등 공경 이하 관직을 팔았으며 이천석(태수)의 정가는 2천만 전이었다.85) 따라서 『후한서』 「환자·장양전」의 인용문처럼 자사와 이천석(태수·상), 무재·효렴 뿐만 아니라 사실상 대부분의 관직을 매매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후한서』 「최인전부열전」에 관작 매매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이 보인다.
영제 때 홍도문(鴻都門)을 열어 매관작(賣官爵)의 방문을 내걸었는데, 공·경·주군(의 지방관), 아래로는 황수(黃綬)에 이르기까지 각각 차등이 있었다. 부자는 먼저 돈을 내고 빈자는 관청에 도착한 후 정가의 배를 납부하거나 상시(常侍)와 아보(阿保)를 통해 벼슬을 얻었다. 이때 단경(段熲)·번릉(樊陵)·장온(張溫) 등은 비록 공근(功勤)과 명예가 있었으나 모두 먼저 재물을 바치고 삼공의 벼슬에 올랐다. 최열은 부보(附寶)를 통해 5백만 전을 내고 사도가 될 수 있었다.86)
위의 인용문에서 영제가 홍도문에서 관작을 팔았다고 기록하였다.87)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단경·번릉·장온이 광화원년에 삼공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단경은 희평 2년(173) 오월에 태위에 임명된 후88) 같은 해 십이월에 해임되었다.89) 또 광화 2년(179) 삼월에 다시 태위에 임명된 후90) 같은 해 사월 신사일(6. 1)에 중상시(中常侍) 왕보(王甫)와 함께 하옥되어 죽었다.91) 즉 단경은 광화원년에 삼공의 최고 지위인 태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번릉은 중평 5년(188) 오월에 태위에 임명된 후92) 같은 해 유월에 해임되었다.93) 이때는 광화원년이 아니라 토지세를 추가로 징수한 중평 2년 이후였다. 장온은 중평원년(184)에 사공에 임명되었다가94) 다음 해(185) 팔월에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어95) 북궁백옥(北宮伯玉) 토벌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중평 3년에(186) 다시 태위에 임명된 후96) 다음 해(187) 사월에 면관되었다.97) 두 번째 태위 임명은 중평 2년 이후였다. 즉 단경은 광화원년 매관 때 태위에 임명되어 이때 뇌물을 바치고 삼공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번릉과 장온은 중평 2년 이후 태위에 임명되었다. 최열은 중평 2년 이월에 정위에서 사도로 승진하였다.98) 이때 5백만 전을 지불하고 사도의 벼슬을 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최열은 중평 3년(187) 사월에 태위에 임명되었다.99) 『후한서』 「최인전부열전」에는 언급이 없으나, 이보다 늦은 중평 3년 태위에 임명된 장온과 중평 5년 태위에 임명된 번릉이 관직를 돈과 재물을 주고 샀으므로, 최열이 태위 벼슬도 돈이나 재물을 주고 샀음이 분명하다.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 조숭(曹嵩)도 환관들에게 뇌물을 주고 서원전(西園錢) 1억 전을 내고 태위에 임명되었다.100) 조숭은 중평 4년 십일월에 대사농에서 태위로 승진했다가101) 중평 5년 사월에 면직되었다.102) 장회태자주에 따르면, 태위 임명 전에 대사농(大司農)과 대홍려(大鴻臚)를 역임했는데, 세 관직 모두 재물을 바치고 임명되었다.103) 또 영제는 중평 6년(189)에 양속(羊續)을 태위에 임명하려고 하여 환관을 보내 동원예전(東園禮錢) 1천만 전을 납부하도록 제촉하였으나 양속이 거부하자 태위 대신 태상(太常)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기 전에 죽었다.104) 시중(侍中)에서 경조윤(京兆尹)으로 전출된 유도는 수궁전(修宮錢) 1천만 전을 내야 했고 매직(買職)을 부끄러워하여 병을 핑계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105) 이러한 예에서 최소 중평 6년까지 삼공과 구경, 지방관(京兆尹)의 벼슬을 사고팔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관작 매매의 대상이 “공경·주군 이하 황수(하급 관리)까지 차등이 있었다”라는 구절은 사실상 모든 관직을 매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또 관직 매매 때 내는 돈 또는 재물은 서원전, 동원예전, 수궁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금액도 벼슬에 따라 다양하였다. 최열이 시가보다 낮은 5백만 전으로 사도 벼슬을 샀고, 양속은 태위 임명에 필요한 1천만 전을 납부하지 않았던 예에서 삼공의 정가는 1천만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 「환자·장양전」에서 대군의 태수 임명에 2~3천만 전이고 나머지는 금액에 차등이 있다고 밝혔다.106) 『진서』 「식화지」에서 이천석(태수)의 정가는 2천만 전이라고 명시하였다.107) 거록태수(鉅鹿太守) 사마직(司馬直)이 새 관직에 배수(拜授)될 때 3백만 전을 감액한 예108)에서 가격을 깎아주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경조윤에 임명된 양속이 1천만 전을 냈으므로 이천석의 매매 가격의 평균은 2천만 전으로 볼 수 있다. 삼공의 정가인 1천만 전, 이천석의 정가인 평균 2천만 전은 광화원년의 매관 정가와 유사하다. 앞에서 삼공, 구경, 이천석(태수·상), 사백석(현장)의 매관 비용이 최소 67억 5,600만 전 이상이라고 추산하였다. 이는 일부 관직에 해당하므로 실제 매관으로 거둔 수입은 훨씬 많을 것이다.
태수나 상에 임명되고도 이 돈을 내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도 생겼고,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벼슬살이하지 않게 해달라고 애걸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였다. 후한시대 봉록과 매관 가격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속(粟) 1곡을 100전이라고 계산하면,109) 삼공의 연봉은 42만 전, 이천석의 연봉은 14.4만 전, 사백석의 연봉은 6만 전이었다. 즉 관직 매매 가격은 이천석 연봉의 48배, 사백석 연봉의 67배이다.110) 이 연구에서 계산하지 않았지만, 삼공의 연봉은 42배이다. 만약 1곡을 200전이라고 계산하면 삼공은 24배, 이천석은 24배, 사백석은 33.5배이다. 곡물과 동전의 비가에 따라 배수는 달라지지만, 최소 20배 이상이므로 관직을 산 후 본전을 뽑으려면 가혹하게 백성들을 수탈해야 했다. 거록태수 사마직이 “백성의 부모가 되었으나 도리어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뺏으며 세상의 평판을 구하는 것이니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병을 핑계로 벼슬길을 사양하였다. 영제가 사직을 허락하지 않자 결국 사마직은 낙양 북쪽의 나루터인 맹진(孟津)에서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111) 사마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황제에게 뇌물을 바치고 부임한 태수와 현령, 현장들도 원금을 회수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별도의 세금을 부과하며 백성들을 쥐어짰다. 황건적이 격파된 후 군현에서 무겁게 조세를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부패가 심했다. 이에 조정에서 자사와 태수·상을 내쫓고 청렴하고 능력있는 관리를 뽑기 위해 가종(賈琮)을 기주자사(冀州刺史)에 임명하니 과다하게 착복한 관리들이 인수를 버리고 도망갔다.112) 이 기사에서 기주의 지방관들이 중평 2년 증세 이후 백성들을 수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법률에 규정된 세금 이외에 궁전을 짓느라 1무당 10전, 1경을 경작할 경우 1천 전의 세금을 추가로 내야 했다.
1절과 2절에서 살펴본 1무당 10전의 증세, 관직 매매로 거둔 최소 수입이 136억 8,612여만 전으로 2년치 세조(稅租)에 해당한다. 영제는 서원에 만금당(萬金堂)을 만들고 사농(司農)의 금·은·비단을 끌어다 저장하였다. 그리고 하간국(河間國)에 있는 옛 후가(侯家)에 거대한 저택을 만들었다. 환관들도 각자 궁실에 비견될만한 저택을 지었다.113) 영제가 동인을 주조하려고 했다.114) 다음 해 구순령(鉤盾令) 송전(宋典)이 남궁의 옥당(玉堂)을 건축하였고 액정령(掖庭令) 필남(畢嵐)이 창룡(倉龍)·현무궐(玄武闕)에 동인을 4열로 세웠으며, 사종(四鐘)을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사출문전(四出文錢)을 주조하였다.115) 후궁 수천여 명의 의식(衣食)의 비용이 하루에 수백 금(金)에 달하였다.116)
황제부터 노골적인 가렴주구와 관직매매를 자행하여 지방관의 수탈이 더해지니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중평 5년(188) 이후로 추정되는117) 『장사동패루동한간독(長沙東牌樓東漢簡牘)』의 「중평오년후임상수령신숙상언형남빈우군구문서(中平五年後臨湘守令臣肅上言荊南頻遇軍寇文書)」에 따르면 임상수령(臨湘守令) 숙(肅)의 상언(上言)에 형남(荊南), 즉 형주(荊州)의 남부 4군(무릉·장사·영릉·계양)에서 전란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추고(芻稾)로 추정되는118) 조다(租茤)와 법부(法賦)를 해마다 체납하여 창(倉)에 미(米)가 없고 고(庫)에 전·포(錢布)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향리들은 사령(赦令)을 통해 조부(租賦) 감제(減除)를 반대하였다.119) 백성의 시각에서 해석하면 장사군(長沙郡)의 백성들은 잦은 전란 등으로 각종 조세를 납부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이 곤궁했다. 반면 관리들은 당시 장사군의 창고에 미(米)와 전·포가 없는 재정수입 감소 때문에 계속 조세를 징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수탈 때문에 백성들의 경제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유민의 수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궁전이 불타서 백성들에게 1무당 10전의 부가세를 부과하자마자 흑산적(黑山賊) 장우각(張牛角) 등 10여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고120) 삼월에 북궁백옥 등이 삼보 등을 침입하였다.121) 앞에서 추산한 것처럼 1무당 10전의 부가세가 전조의 50~100%에 해당했으므로 결코 가벼운 세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같은 달부터 관직 매매가 시작되어 최열이 5백만 전을 내고 사도 벼슬을 얻었으니 관직을 산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반란은 우연이 아니라 토지에의 증세와 매관매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 해에 더 많은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중평 3년(186) 이월에 강하군(江夏郡)의 병사 조자(趙慈)가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 진힐을 살해하였다.122) 같은 해 시월에 무릉만(武陵蠻)이 반란을 일으켰다.123) 중평 4년(187) 이월에 형양적(滎陽賊)이 중모령(中牟令)을 살해하였다.124) 유월에 어양(漁陽) 장순(張純)과 장거(張舉)가 반란을 일으켜 유(幽)·기(冀) 2주를 침입하였다.125) 영릉군(零陵郡)의 관곡(觀鵠)이 구월에 평천장군(平天將軍)을 자칭하고 계양군(桂陽郡)을 공격하였다.126) 십이월에 휴도각호(休屠各胡)가 반란을 일으켰다.127) 중평 5년(188) 휴도각호가 서하태수(西河太守) 형기(邢紀)를 살해하였다.128) 이월에 황건 여적(餘賊) 곽태(郭太) 등이 서하군 백파곡(白波谷)에서 봉기하여 태원(太原)·하동(河東) 2군을 침입하였고,129) 사월에 여남갈피(汝南葛陂) 황건이 군현을 점령하였다.130) 같은 해 유월에 익주황건(益州黃巾) 마상(馬相)이 자사 치검(郗儉)을 죽이고 천자(天子)를 자칭했으며 파군태수(巴郡太守) 조부(趙部)를 살해하였다.131) 구월에 남흉노 선우가 반란을 일으켜 백파적(白波賊)과 함께 하동군을 공격하였다.132) 시월에 청주(青州)와 서주(徐州)의 황건이 다시 일어나 여러 지역을 공격하였고133) 파군판순만(巴郡板楯蠻)이 반란을 일으켰다.134) 중평 5년(188) 파군황건(巴郡黃巾)이 반란을 일으키자 판순만도 반란을 일으켰다.135) 십일월에 양주적(涼州賊) 왕국(王國)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우장군(右將軍) 황보숭(皇甫嵩)이 구하러 갔다.136)
이상의 16회의 반란은 『후한서』 「효영제기」의 기록이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지만 중평 2년 중세 이후에 황건적을 토벌했던 기사가 보인다. 예컨대 양속은 두무(竇武)가 제거된 후 10여 년 금고(禁錮)되었다가 당금(黨禁)이 해제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여강태수(廬江太守)에 임명되었다.137) 『후한서』 「효영제기」에 따르면, 당금 해제는 중평원년의 일이다.138) 양속은 백성들을 모아 양주(揚州) 황건적을 격파하고 안풍적(安風賊)도 격파하였다.139) 영제가 중평 6년(189)에 그를 태위에 임명하려고 하였다.140) 따라서 양주 황건적과 안풍적이 활동한 기간은 양속이 여강군을 떠난 중평 6년 이전이다. 여강적(廬江賊) 황양(黃穰) 등 10여만 인이 4현을 점령하자 여강태수에 임명된 육강(陸康)이 여강적을 격파하였고 헌제(獻帝) 즉위 후 효렴(孝廉)과 계리(計吏)를 조정에 보냈다.141) 따라서 여강군의 봉기는 중평 연간 내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비(劉備)도 영제말에 교위(校尉) 추정(鄒靖)을 따라 황건적을 토벌하여 안희위(安喜尉)에 임명되었다.142) “영제말”은 중평 연간에 해당한다. 교위 추정의 황건 토벌은 중평 2년 이후의 일일 것이다. 또 원문에 “州郡各舉義兵”라고 표기했는데, 중평원년 토벌에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무장들이 활약했으므로, ‘의병’은 황건 잔당이 활동한 중평 2년과 3년 이후에 활동했을 것이다. 초평 2년(191) 태산군(太山郡)에 침입한 황건적이 30만이었다. 태산태수(太山太守) 응소(應劭)는 황건적과 싸워 이긴 후 생구(生口)·노약(老弱) 1만여 인을 생포하였다.143) 여기서 노약자는 병사가 아니라 황건적을 따라다닌 일반 백성 또는 유민일 것이다. 초평 3년(192)에 청주황건(靑州黃巾) 100만이 연주(兗州)로 침입했는데, 조조(曹操)가 청주황건을 격파한 후 30여 만의 항졸과 남녀 100여만 구가 항복하였다.144) 남녀 100여만 구는 황건적을 따라다니는 유민이었다. 흑산적과 황건적의 수가 30만 또는 100만 이상인 것은 군사뿐만 아니라 고향을 떠난 유민들이 합류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숫자였을 것이다.145) 이밖에 무릉만이 중평 3년(186)에 무릉군을 침입하였으나 주군에서 격파하였다.146) 반란을 일으킨 시기를 보면 무릉만의 반란도 영제의 착취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장사동패루동한간독(長沙東牌樓東漢簡牘』)』에 같은 해 좌부권농우정연(左部勸農郵亭掾) 하상(夏詳)이 도적 당뇨(唐鐃) 등과 부딪힌 기록이 있다.147) 이 도적도 가렴주구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다.
Ⅳ. 결론
후한 영제 중평원년(184)에 황건의 봉기는 천재와 인재가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영제 시기 각종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유민 대책이 부실했고 영제가 유민들을 귀향시켜야 한다는 양사와 유도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황건의 봉기가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또, 영제 개인의 각박한 성정과 공감 부족보다 화제 이후 만연한 자연재해와 강의 반란, 이 때문에 발생한 재정수입 감소와 재정지출 증가의 누적된 결과였다. 안제 영초 3년(109), 순제 영화 6년, 환제 영수원년(155)과 연희 4년(161), 연희 5년(162), 연희 5년(162), 영제 희평 4년(175)과 광화원년(178) 매관매직이나 왕(王)·후(侯)·민(民)의 조(租)나 재산의 대여, 봉록 삭감 등의 조치에서 후한 중후기 재정 파탄 현상이 확인된다.148) 자연재해와 강의 반란으로 인한 군사비 지출의 증가는 재정 악화로 이어졌고 이는 황건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황건의 봉기는 1년도 되지 않아 진압되었으므로 황건의 봉기 자체가 후한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평 2년(185) 이월 기유일(185. 3. 28)에 남궁에 대화재와 궁전 재건을 위한 전 1무당 10전의 증세, 공개적이고 강제적인 매관매직 장려, 이에 기생한 환관의 수탈이 백성들을 곤경에 몰아넣어 후한 붕괴를 초래하였다. 후한 조정이 황건의 봉기를 진압하여 잠시 안정되었던 정국은 증세와 매관매직, 이로 인한 관리들의 수탈 때문에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따라서 황건의 봉기와 달리 천재보다 인재로 봐야 할 것이다.
헌제 초평원년(190) 유사(有司)의 상주로 공덕이 없다는 이유로 화제·안제·순제·환제 네 황제의 묘호를 없앴다.149) 게다가 영제도 묘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화제 이후 모든 황제가 묘호가 없어졌다. 통사나 개설서에서도 외척과 환관이 발호했던 화제 이후 후한의 쇠망이 시작되었다고 서술하였다. 여남원씨(汝南袁氏)와 홍농양씨(弘農楊氏)를 비롯한 소위 명문 출신 관리들도 ‘유사’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화제 등을 보필한 이들의 조상들도 책임이 있었다. 강제이건 자발적이건 중평 2년 이후 관리가 된 사람들은 매관매직의 공범이었고 모든 책임이 영제와 환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책임을 영제 또는 화제 이후 황제 전부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고 이들의 주장이 『후한서』와 『삼국지』를 거쳐 통사와 개설서까지 실리게 되었다. 본고는 후한말 동란의 원인이 만성적인 자연재해, 강의 반란으로 인한 군사비 급증, 재정의 악화라는 구조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주장하여 기존의 시각을 수정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