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중세에 동아시아에서는 ‘고승전(高僧傳)’이 지속적으로 저술되었다. 고승전은 불교사상 및 불교문화사 연구의 자료로 널리 활용되는 불교사서이면서 불교문학인데,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마명보살전(馬鳴菩薩傳)』, 『수천태지자대사별전(隋天台智者大師別傳)』처럼 한 사람의 전기만 서술한 별전(別傳)과 『비구니전(比丘尼傳)』, 『고승전』처럼 여러 사람의 전기를 그러모아 엮은 집전(集傳)이 있다. 본고에서는 집전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고승전이 주요한 불교사서로 자리잡은 것은 6세기 초 중국 양(梁)나라의 혜교(慧皎, 497~554)가 『고승전』(14권)을 저술하면서부터다. 혜교는 불교가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널리 퍼진 과정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려고 갖가지 역사서와 지리서 들을 두루 열람하고 식견이 뛰어난 선배들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그리하여 후한 명제의 영평 10년(67)부터 양 천감 18년(519)까지 무릇 453년간 활동한 고승 5백여 명을 가려 뽑아 그들의 공덕과 행업에 따라 크게 열 갈래로 나누었다. 첫째는 역경이며, 둘째는 의해, 셋째는 신이, 넷째는 습선, 다섯째는 명률, 여섯째는 유신, 일곱째는 송경, 여덟째는 흥복, 아홉째는 경사, 열째는 창도인데,1) 이른바 십과(十科)다.
십과는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86?)이 고안한 기전체(紀傳體)의 ‘열전(列傳)’을 본떠서 만든 것이지만, 그 세부 항목들은 혜교가 말한대로 고승들의 덕행이나 행업에 따라 설정된 것이어서 불교사 및 불교문화의 여러 실상을 잘 보여준다.2) 십과는 불교사서를 위해 마련된 최초의 체재다. 『고승전』이 불교사서로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고승전』이 불교사서의 전형이 되기 위해서는 후대에 이 십과의 의의를 인정하고 계승해야 했다. 특히 『속고승전(續高僧傳)』(645년), 『송고승전(宋高僧傳)』(988년), 『대명고승전(大明高僧傳)』(1617년) 등이 그런 구실을 한 것으로 인정된다.3) 유교사서(儒敎史書)인 정사(正史)나 단대사(斷代史)처럼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과라는 형식과 그 특징에 중점을 두면, 『속고승전』과 『송고승전』 사이에, 특히 7세기 중반부터 8세기 말 사이에 다양한 고승전들이 저술된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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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고승전(續高僧傳)』(30권, 645), 십과, 도선(道宣), T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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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5권, 690), 십과, 법장(法藏), T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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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10권, 706), 팔과, 혜상(慧詳), T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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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법보기(傳法寶紀)』(1권, 713), 계보, 두비(杜朏), T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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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1권, 713), 계보, 정각(淨覺), T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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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법화전기(法華傳記)』(10권, 750), 십이과, 승상(僧詳), T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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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1권, 774), 계보, 작자 미상, T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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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림전(寶林傳)』(10권, 801), 계보, 지거(智炬), B144)
『속고승전』에 이어 『화엄경전기』부터 모두 일곱 종의 고승전이 백여 년 사이에 잇달아 편찬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다. 이는 7~8세기가 중국 불교가 가장 융성하고 중국 불교 특유의 종파들이 성립되던 시기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위의 목록에서 『속고승전』 외에 십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셋, 십과에서 벗어나 계보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 넷이다. 본론에서는 『속고승전』에서 십과가 어떻게 정형화되었는지, 어떤 특성을 갖는지 먼저 살핀다. 이어 십과의 변형이나 파격을 보여주는 고승전들을 고찰하면서 그 체재의 변화와 특성을 차례로 밝힌다. 이를 통해 7~8세기의 불교사적 전개나 그 양상이 각 고승전의 저술 및 체재에도 반영되어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Ⅱ. 역사서로서 정형화 : 『속고승전』
도선(道宣)은 혜교의 『고승전』을 이어 『속고승전』을 저술했다. 도선은 혜교의 전기에서, “『고승전』이 완성되자 온 나라에 전해져 참으로 귀감이 되었다”5)고 썼다. 『고승전』이 어떤 점에서 귀감이 되었는지도 『속고승전』의 서문에서 밝혔다. “회계의 석혜교는 『고승전』을 편찬해 색다른 책을 새롭게 내놓으면서 체재와 글쓰기에 일관성을 갖추었는데, 자세하게 사실을 고증한 것이 볼 만하고 표현의 화려함과 질박함에는 근거가 있다.”6) 체재와 글쓰기, 사실 고증, 표현 등을 거론한 데서 『고승전』이 역사서로서 귀감이 된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선은 “그러나 오와 월의 승려들은 그러모아 엮었으나 위와 연의 승려들은 간략하게 서술했으니, 이는 넓게 보면서도 꼼꼼하지 못한 것이다”7)라고 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혜교는 남조(南朝)와 북조(北朝)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에 남조의 양나라에서 활동했으므로 북조의 자료들까지 수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혜교 자신이 몇몇 불교사서에 대해 “각각 한 지방만을 다루었으며, 예와 지금의 일을 꿰뚫지 못했다”8)고 비판했다는 점에서 도선의 비판 또한 적절하다. 이는 결국 도선이 『속고승전』에서 그러한 결함을 보완하려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뛰어난 선배 고승들을 찾아 두루 묻기도 하고, 수행자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직접 눈으로 하나하나 살피기도 하고, 집전들을 비교하며 검토하기도 했다. 남조와 북조의 국사(國史)들에 덧붙어 있는 아름다운 언행들, 외진 곳의 비석들에 새겨진 훌륭한 덕행들에서 그 지조 있는 행실을 모아 그 도량과 지혜를 드러냈으니, 번다한 말은 줄여 간결하게 하고 소박한 일을 두루 늘어놓아 옛사람의 좋은 점을 잇고 참된 스승의 덕이 후대에 알려지도록 했다.9)
도선이 중국의 전 지역을 아우르는 고승전을 저술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잘 드러난다. 이는 불교사의 실상을 충실하게 기술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도선이 고승전을 역사서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인식은 『고승전』의 십과를 수용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도선은 양(502~557)나라 초부터 당나라 정관 19년(645)까지 144년간 중원과 변방 곳곳에서 활동한 고승들을 찾아내 정전에 340명, 부전에 160명을 실었고, 그들을 십례(十例)로 나누었다.10) 십례는 곧 십과를 가리킨다. 그는 또 “이제 가장 뛰어난 덕을 가려내 각 편에 따라 비슷한 것들을 모으면서 이전의 전기에서 서술한 것들과 널리 퍼진 일반적인 사례들을 요모조모 견주고 따지며 진실로 법식에 따라 두루 검토했다”11)고 썼다. 이는 ‘이전의 전기’ 곧 『고승전』만이 아니라 다른 사례들까지 참조해 『고승전』의 십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 했음을 의미한다.12)
실제로 『속고승전』의 십과는 『고승전』의 십과와 좀 다르다. 기본틀은 유지하면서 수정하고 보완했기 때문이다. 첫째 「역경」, 둘째 「의해」, 셋째 「습선」, 넷째 「명률」, 다섯째 「호법(護法)」, 여섯째 「감통(感通)」, 일곱째 「유신(遺身)」, 여덟째 「독송(讀誦)」, 아홉째 「흥복(興福)」, 열째 「잡과(雜科)」 등이 그것이다. 『고승전』의 십과 가운데 다섯 과목이 『속고승전』에서 바뀌었다. 「신이」는 「감통」으로, 「망신」은 「유신」으로, 「송경」은 「독송」으로 바뀌었고, 「경사」와 「창도」는 합쳐져 「잡과」가 되었다. 「유신」과 「독송」은 과목의 명칭만 달라진 경우다. 「신이」와 「감통」은 비슷해 보이지만, 「신이」가 신통력을 지니고 이적을 일으킨 고승에 무게중심을 둔 것과 달리 「감통」은 그런 이적에 대한 중생의 반응이나 감응을 더 중시한 것이다.13) 「잡과」는 곧 ‘잡과성덕(雜科聲德)’의 줄임말로, “갖가지 방식으로 목소리의 덕을 베푼 고승들을 입전했다”는 뜻이다. 『고승전』의 「경사」와 「창도」가 대중에게 경전의 내용과 의미를 소리로 들려준 고승들을 입전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하나로 묶은 것이다.14)
이렇게 단순히 과목의 명칭만 바꾸었거나 과목의 내용이 달라져서 명칭을 바꾼 경우 외에 아주 새롭게 추가된 것이 “불법을 지킨다”는 뜻의 「호법」이다. 호법은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된다. 하나는 불교를 탄압하고 위협하는 외부 세력으로부터 불교계를 지킨다는 뜻으로,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560~578 재위)가 폐불(廢佛)을 단행한 일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불교계 내의 그릇된 행태나 폐단을 바로잡아 불교를 지킨다는 뜻으로, 불교 교리를 곡해하며 대중을 기만하는 사이비 승려들이 대거 등장한 일을 가리킨다. 둘 다 불교가 융성해지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벌어진 심각한 사태인데, 도선은 특히 불교계 내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해 「호법」을 두었다.15)
『속고승전』 권30에서 도선은, “세간의 삼사(사기·한서·후한서)는 권수가 4백여 권이며 게다가 생각할 만한 스승이 있다. 어찌 불문의 역사서 몇 질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행실이 뛰어난 이가 있으면 본보기가 되는 스승으로 삼을 수 있으므로 곧바로 붓을 들어 엮으며 그 유형을 새롭게 넓혔다”16)고 썼다. 여기서 “유형을 새롭게 넓혔다”고 한 말은 역사서에 걸맞게 십과를 수정하고 보완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도선이 수정하고 보완한 십과는 『송고승전』과 『대명고승전』 등에서 그대로 수용되었을 만큼 정형화된 것이었다.17)
도선은 혜교의 십과를 이어받으면서도 불교사의 실상을 더욱 잘 보여주는 방향으로 수정하고 보완했다. 『고승전』에서는 십과가 고승 개개인의 행업을 분류하면서 불교사적 사실도 보여주도록 고안된 체재였는데, 『속고승전』에서는 불교사서의 체재라는 특성을 더 뚜렷하게 갖추면서 정형화되었다. 도선은 『속고승전』을 통해 “참된 스승의 덕이 후대에 알려지도록”18) 하는 집전을 넘어 역사서로서 고승전의 성격을 더 강화했다.
Ⅲ. 고승전의 두 가지 변형
『속고승전』이 나온 뒤 7세기 말부터 8세기 중엽까지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혜상(惠詳)의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 승상(僧詳)의 『법화전기(法華傳記)』 등이 잇달아 나왔다. 이 세 고승전을 통해 십과의 체재가 어떻게 변형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고찰하기로 한다.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3조로서 화엄교학을 최종적으로 체계화하고 널리 선양해 화엄종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그가 690년 전후에 완성한 고승전이 『화엄경전기』(5권)다.19) 『속고승전』 이후에 저술된 첫 고승전에 해당한다. 『화엄경』이라는 특정 경전을 내세우며 화엄종의 종파적 성격을 명시하고 있어 『속고승전』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데, 그 체재나 서술 내용은 어떠한지 살펴보겠다.
『화엄경전기』의 체재를 먼저 보자. 권1에는 「부류(部類)」, 「은현(隱顯)」, 「전역(傳譯)」, 「지류(支流)」, 「논석(論釋)」 등이 있고, 권2와 권3은 「강해(講解)」이며, 권4에는 「풍송(諷誦)」과 「전독(轉讀)」이 있고, 권5에 「서사(書寫)」와 「잡술(雜述)」이 있다. 열 개의 과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서 「전역」, 「강해」, 「풍송」, 「전독」 등 네 과목은 각각 『속고승전』의 「역경」, 「의해」, 「독송」, 「잡과」에 해당한다. 나머지 여섯은 아주 새로운 과목이다. 「강해」가 『화엄경전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부류」, 「은현」, 「지류」, 「잡술」 네 과목에는 『화엄경』 및 관련 경전, 나아가 중국에서 저술된 화엄교학의 기본적인 문헌 등이 서술되어 있다. 「부류」는 『화엄경』에 상본(上本)·중본(中本)·하본(下本) 세 부류가 있었고 그 가운데 하본 10만게(十萬偈) 48품(四十八品)만이 현재 전해진다는 내용을, 「은현」은 『화엄경』 텍스트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지류」에서는 『60화엄』과 『80화엄』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전하는 화엄 관계의 경전을 열거했고, 「잡술」에서는 『화엄경』의 신앙을 돕거나 『화엄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초보적인 저술들을 나열했다. 이 네 과목에는 화엄종의 교리적 토대가 기술되어 있고, 고승의 전기는 나오지 않는다.
고승들은 「전역」에 3명, 「논석」에 2명, 「강해」에 17명, 「풍송」에 11명, 「전독」에 8명, 「서사」에 6명 등 여섯 과목에 47명이 입전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저자인 법장이 직접 찾아낸 고승이 대략 17명이고 전거를 알 수 없는 고승이 7명인데, 나머지 절반에 가까운 23명은 『고승전』과 『속고승전』에 전거를 두고 있다. 특히, 『속고승전』에 의거한 고승이 20명이다. 이는 법장이 『화엄경전기』를 저술하면서 『속고승전』을 크게 참조하면서 그 십과의 영향도 받았음을 보여주는 점이다.
「전역」에는 『화엄경』을 한역하는데 기여한 고승들의 전기가 실려 있다. 「논석」에서는 고승들을 앞세웠으나 인도와 중국에서 저술된 화엄 관계 주석서들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강해」에서는 화엄철학을 해석하고 강설하는데 탁월한 고승들의 전기를 싣고 있다. 그 말미에는 24명의 법명이 나오는데, 『화엄경』을 깊이 이해했으나 “『화엄경』의 해석과 강설을 전업으로 하지 않고 상서로운 일도 없었던”20) 법사들이다.
「풍송」에서는 『화엄경』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잘 외워서 신이한 일을 일으킨 이들의 전기를, 「전독」에서는 경전 전체를 독송하거나 일부를 거듭 읊조림으로써 상서로운 일을 일으킨 이들의 전기를, 「서사」에서는 『화엄경』을 필사함으로써 신령한 일을 일으킨 이들의 전기를 각각 실었다. 이 세 과목에는 고승들과 함께 거사 5명, 비구니 1명이 포함되어 있다. 고승이든 아니든 그들 모두 『화엄경』을 통해 신이(神異)나 감통(感通)을 경험했다.
법장은 『화엄경전기』의 체재를 『속고승전』처럼 십과로 하면서도 상당한 변화를 주었다. 『속고승전』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은 「역경」, 「의해」, 「독송」, 「잡과」 등이다. 이 네 과목에는 경전의 번역, 해석, 암송, 독송 등에 뛰어난 고승들이 입전되어 있다. 『속고승전』의 나머지 과목들은 경전들과 직접 관련되어 있지 않다. 이로써 법장이 네 과목만 중시한 까닭이 분명해진다. 『화엄경』 중심의 고승전을 저술하려 했기 때문이다.
『화엄경전기』의 십과를 그 서술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법장의 의도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십과 가운데 마지막 「잡술」을 포함해 첫째 「부류」에서 여섯째 「강해」까지 모두 일곱 과목들은 『화엄경』과 화엄철학에 관한 과목들이다. 이는 『화엄경전기』가 화엄종의 역사보다는 종파의 근본 교리, 곧 화엄철학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특성은 또 다른 관점에서 십과를 볼 때도 두드러진다. 『화엄경전기』에서 「부류」와 「은현」, 「지류」, 「잡술」 등 네 과목은 『화엄경』의 내력과 이 경전에서 파생된 문헌들을 다루고 있다. 이 넷은 고승들이 아닌 『화엄경』이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화엄경』의 전기’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나머지 여섯 과목들은 『화엄경』을 깊이 이해하고 체화함으로써 갖가지 상서롭거나 신령한 일을 일으킨 고승들이 서술되어 있다. 이는 ‘『화엄경』이나 화엄철학의 화신(化身)들의 전기’라 할 수 있다. 『속고승전』의 십과가 역사서의 체재로서 정형화되었다면, 『화엄경전기』에서는 철학적 성격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십과가 변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홍찬법화전』(10권)과 『법화전기』(10권)는 둘 다 제목에 『법화경(法華經)』을 내걸고 있어 천태종의 입장에서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21) 『홍찬법화전』은 706년 즈음에 편찬되었으며, 찬자는 혜상(惠詳, 또는 慧詳)이다. 그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22)
『홍찬법화전』의 체재는, 첫째 「도상(圖像)」(권1), 둘째 「번역(飜譯)」(권2), 셋째 「강해(講解)」(권3), 넷째 「수관(修觀)」(권4), 다섯째 「유신(遺身)」(권5), 여섯째 「송지(誦持)」(권6~권8), 일곱째 「전독(轉讀)」(권9), 여덟째 「서사(書寫)」(권10) 등 팔과(八科)다. 「송지」가 세 권으로 분량이 가장 많고, 나머지 과목들은 각각 한 권씩이다. ‘송지’는 경전을 잘 받아 지녀서 독송한다는 뜻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을 줄인말인데, 왜 이 과목의 비중이 가장 클까?
먼저 「강해」와 「전독」, 「서사」부터 보자. 『화엄경전기』에도 그대로 나오는 과목들이다. 그러나 『화엄경전기』를 본떴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 고승전의 체재가 각각 십과와 팔과라는 점도 다르고, 세 과목의 용어도 특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강해’는 해설, 해석 등의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었고, ‘전독’과 ‘서사’도 불가에서 흔히 쓰던 일반명사였다. 무엇보다도 저술 시기로 볼 때 혜상이 『화엄경전기』를 참조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고승전』과 『속고승전』의 십과를 바탕으로 팔과를 구성했을 공산이 크다.
혜상은 「강해」에 12명의 고승들을 수록하면서 길장(吉藏)과 관정(灌頂) 등 7명을 『속고승전』의 「의해」, 「습선」, 「흥복」, 「명률」 등에서 끌어왔다. 「수관」에는 혜사(慧思)와 지의(智顗), 지조(智璪) 세 고승의 전기를 실으면서 역시 『속고승전』의 「습선」에 실린 전기를 그대로 옮겨왔다. 「유신」은 『고승전』의 「망신(亡身)」, 『속고승전』의 「유신」과 같은 과목인데, 12명 가운데서 3명은 『고승전』에, 3명은 『속고승전』에 각각 전거를 두고 있다. 가장 많은 전기가 실려 있는 「송지」의 경우에도 『속고승전』에서 대거 옮겨와 실었다. 혜상이 일부 내용을 보태거나 빼기는 했으나, 문체와 내용 모두 두 고승전과 대동소이하다. 이는 팔과가 두 고승전의 십과를 변형시킨 체재임을 의미한다.
『홍찬법화전』에는 『고승전』과 『속고승전』에 없는 과목이 둘 있는데, 「도상」과 「서사」다. 「도상」은 그림과 불상을 제목에 내건 과목으로, 『법화경』과 인연 있는 사찰, 누각, 법당, 탑, 그림 등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시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을 마치 인물의 전기처럼 다루고 있다. 물론 그런 대상들과 관련이 있는 고승이나 재가자 들의 전기도 사이사이에 기술되고 있으나, 그림이나 불상 따위 물질적인 것들이 핵심이다. 이런 물질적인 것들은 『법화경』이 구체화된 일종의 화신(化身)으로 여겨지기 십상인데, 이에 더해 그림 속 풍경이 기이하게 변화하면서 실물처럼 보인다든지23) 불상에서 사리가 나온다든지24) 하는 신령한 일이 일어나면 신앙의 대상으로 중시된다. 「도상」의 이야기들은 법화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홍찬법화전』에서는 이런 「도상」이 첫 번째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화엄경전기』에서 『화엄경』 자체에 대해 서술한 「부류」와 「은현」을 처음에 둔 것과 대비된다. 『화엄경전기』의 두 과목이 화엄종의 교학 곧 화엄철학에 중점을 두었다면, 『홍찬법화전』의 「도상」은 법화신앙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법화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또 다른 과목이 「서사」다. 경전을 베껴 쓰는 일이 『고승전』과 『속고승전』의 전기들에도 가끔 나오지만, 과목으로 설정되지는 않았다. 『화엄경전기』에도 「서사」가 있으나 입전된 인물들에서 큰 차이가 있다. 『화엄경전기』에서는 여섯 명의 전기 가운데 거사가 두 명인데, 『홍찬법화전』에서는 모두 열아홉 명 가운데 거사가 무려 열세 명이다. 거사의 비중이 높은 것은 재가자들 중심으로 법화신앙이 발달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전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모두 열두 명 가운데 일곱 명이 황제나 관료, 서민 등 재가자다.
「도상」과 「서사」 이외의 여섯 과목은 『고승전』 및 『속고승전』의 과목들과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번역」은 「역경」과 동일한 과목으로, 『법화경』의 전부나 일부, 또는 관련 문헌을 한역한 고승들의 전기를 싣고 있다. 「강해」는 「의해」와 동일하고, 「송지」는 『고승전』의 「송경」 또는 『속고승전』의 「독송」과 유사하며, 「유신」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수관」은 “관법을 닦는다”는 뜻으로서, 그 관법은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는 천태교학의 관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관법은 『속고승전』의 「습선(習禪)」에서 말하는 선정(禪定)과는 아주 다른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수관」에서는 「습선」에 기술된 전기의 내용을 대폭 줄여서 옮겨 실었고, 관법과 관련된 내용도 「습선」의 전기들보다 훨씬 빈약하다. 이는 천태교학, 즉 철학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신앙의 측면을 더 강조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홍찬법화전』을 이어 나온 『법화전기』(10권)는 750년 즈음에 승상(僧詳)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화엄경전기』나 『홍찬법화전』보다 4~50년 뒤에 저술된 셈이다. 『법화전기』의 체재를 보면, 첫째 「부류증감(部類增減)」(권1), 둘째 「은현시이(隱顯時異)」(권1), 셋째 「전역연대(傳譯年代)」(권1), 넷째 「지파별행(支派別行)」(권1), 다섯째 「논석부동(論釋不同)(권1), 여섯째 「제사서집(諸師序集)」(권2), 일곱째 「강해감응(講解感應)」(권2~권3), 여덟째 「풍송승리(諷誦勝利)」(권3~권6), 아홉째 「전독멸죄(轉讀滅罪)」(권7), 열째 「서사구고(書寫救苦)」(권7~권8), 열한째 「청문이익(聽聞利益)」(권9), 열두째 「의정공양(依正供養)」(권10) 등 십이과(十二科)다. 앞의 열 과목이 『화엄경전기』의 십과와 거의 같고, 과목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두 글자씩을 덧붙였다. 『홍찬법화전』보다 『화엄경전기』의 십과를 바탕으로 하면서 새로 두 과목을 추가한 체재인데, 십이과의 내용과 성격도 『화엄경전기』와 비슷할까?
승상은 “이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들을 애써 모아 엮으면서 뒷사람들의 신심을 일으키거나 북돋기 위해 열두 갈래로 구분했다”26)고 하면서 십이과를 설정한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보고 듣는 이들이 쉽게 깨닫기를 바라서 문장을 꾸밈 없이 속되게 했고, 후세 사람들에게 신심이 전해지도록 사실을 엄격히 조사해 실상을 드러냈다”27)고도 말했다. 『법화전기』를 저술한 목적이 읽는 이들이 쉽게 깨닫도록 하는 것과 후세 사람들이 신심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 두 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은 자신의 힘으로 수행해서 얻는 자력문(自力門)이고, 신심은 불보살을 믿고 의지하는 타력문(他力門)이다. 이렇게 자력문과 타력문을 동시에 지향했다는 것은 타력문에 중점을 둔 『홍찬법화전』을 보완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체재와 서술 내용은 타력문, 곧 신심을 일으키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앞의 다섯 과목이 실려 있는 권1에는 『법화경』 및 관련 문헌들의 연원과 한역 과정, 주석서 등에 대한 내용과 함께 『법화경』의 핵심 철학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권2의 「제사서집」에는 혜관(慧觀)의 <법화종요서(法華宗要序)>, 혜원(慧遠)의 <법화경서(法華經序)>, 승조(僧肇)의 <법화번경후기(法 華翻經後記)> 등 일곱 편의 서문을 모아 두었으므로 『법화경』의 철학이 좀 더 자세하게 나온다. 그리고 권2~권3의 「강해감응」에는 법화사상의 해석과 강설에 뛰어난 고승들의 전기가 실려 있다. 이렇게 권1에서 권3까지 집중되어 있는 일곱 과목들은 아무렇게나 나열된 것이 아니라 『법화경』의 물질적 존재에서 시작해 그 철학적 해석과 의미로 이어지도록 배열되어 있다.
그런데 법화사상과 직접 관련된 부분은 권2와 권3뿐이다. 더구나 해석과 강설을 전면에 내세운 「강해감응」조차 ‘감응(感應)’을 중시하고 있다. 가령, 천태교학을 대성한 지의의 전기를 보자. 그 분량이 『속고승전』의 12분의 1, 『홍찬법화전』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강설한 내용은 거의 없이 『법화경』을 강설하자 일어난 신이한 일만 길게 서술되어 있다. 강해(講解)보다 감응에 방점을 둔 것이다. 이 과목의 나머지 전기들도 어슷비슷하다.
「강해감응」이 이러하다면, 철학보다 신앙의 성격이 더 뚜렷한 뒤의 다섯 과목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가장 비중이 큰 「풍송승리」(권3~권6)는 과목의 명칭에서 “『법화경』을 잘 외면 빼어난 이익이 생긴다”는 뜻인데, 실제로 전기마다 영험한 일들이 빠지지 않고 서술되어 있다. 더 주목할 점은 『홍찬법화전』에서 관법과 관련된 「수관」에 실린 혜사와 지조의 전기가 『법화전기』에서는 「풍송승리」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전독멸죄」는 “전독을 통해서 죄업을 사라지게 한다”는 뜻의 과목이고, 「서사구고」는 “『법화경』을 필사함으로써 고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과목이며, 「청문이익」은 “『법화경』을 잘 들으면 큰 이익이 있다”는 뜻의 과목이다. 마지막의 「의정공양」에서도 『법화경』을 외우며 소신공양(燒身供養)한 이들이 일으킨 신이한 일들이 주요 내용이다. 이는 『법화전기』가 철학이 아닌 신앙을, 자력문이 아닌 타력문을 강조하는 고승전임을 말해준다.
『법화전기』는 체재에서 『화엄경전기』의 십과를 그대로 수용했으나, 『화엄경전기』처럼 철학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홍찬법화전』처럼 신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고승전의 편찬에서 화엄종은 철학을, 천태종은 신앙을 지향하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차이는 두 종파의 철학적 토대나 수준의 차이보다는 두 종파의 지향이 사뭇 달랐음을 보여줄 뿐이다.
Ⅳ. 고승전의 이중적 파격
가장 중국적인 종파라 할 수 있는 선종(禪宗)에서도 고승전이 편찬되었다. 713년 즈음에 『전법보기(傳法寶紀)』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가 저술되었고, 대략 774년에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가 나왔으며, 이어 801년에 『보림전(寶林傳)』이 나왔다. 흔히 ‘선종사서(禪宗史書)’로 불리는 이 고승전들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고찰한다.28)
『전법보기』(1권)는 당나라 때 두비(杜朏)가 저술했다.29) 두비는 책명에 ‘기(紀)’를 썼는데, 이는 기전체(紀傳體)의 ‘본기(本紀)’를 의도했다는 뜻이다. 두비가 서문에 부친 시에도 그런 뜻이 밝혀져 있다. “‘본기’를 저술하는 것은 이렇게 번갈아 전한 법을 밝히기 위해서다. 부디 미래 사람들 모두 붓다의 지혜를 활짝 열기 바란다.”30)
제왕의 역사를 기술하는 본기에서는 제왕의 계보, 곧 왕통(王統)이 기본틀이다. 두비도 “번갈아 전한 법을 밝히기 위해” 『전법보기』를 저술한다고 했으니, 왕통과 같은 것을 중시했음이 분명하다. 서문을 보면, “이 진여문은 마음에 눈뜨고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서로 전했을 따름이다. … 스스로 깨달아 지혜로 관찰하는 것이지, 남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31)고 해서 ‘자각(自覺)’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깨달은 이들이 불법의 계보, 곧 법통(法統)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크나큰 깨달음을 서로 이어받은 이들은 (그 깨달음을) 이미 마음에서 얻었으므로 말소리에 담을 여지가 없다. 거기에 어찌 언어나 문자가 끼어들 여지가 있겠는가! 저 지극한 경지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작은 것을 가리켜 큰 것을 알게 해주어야 마땅하다. … 이런 까닭에 이제 간략하게 계통을 세워서 달마로부터 전법을 서로 이어간 이들을 차례대로 드러내고는 『전법보기』 한 권을 만들었다.32)
깨달음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태라 말이나 글로는 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깨달음의 경지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그 실마리를 알게 해주려고 전법의 계통을 세우는 방식으로 『전법보기』를 저술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두비는 보리달마(菩提達摩)에서 시작해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법여(法如), 신수(神秀)까지 각각의 전기를 차례로 기술했다.
보리달마에서 신수까지는 그야말로 ‘사자개도(師資開道)’ 곧 스승이 제자에게 깨달음을 열어준 기연(機緣)이 골자가 된다. 따라서 그 기연의 바깥에 있는 인물들은 『전법보기』에 실릴 수 없다. 두비 자신도, “달마 이후로 수당 때에 이르기까지 높디높은 현묘한 이치를 깨닫고 깊디깊은 원돈의 경지에 이른 이가 어찌 세상에 없었겠는가만은, 서로 전수한 것이 아니어서 따로 열전을 두어 싣는다”33)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이는 법통에 따라 단선적으로 또는 직선적으로 한 세대에 한 사람의 전기만 싣겠는다는 선언이다. 그리하여 모두 일곱 명, 다시 말해 7대의 전기만 수록되었고, 권수도 적어 한 권이다.
『전법보기』는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단일한 계보를 기본틀로 삼았고, 이로 말미암아 『속고승전』의 십과나 그 뒤의 변형들과 완전히 다른 체재의 고승전이 되었다.34) 이렇게 체재가 계보화된 것은 선종의 교리와 그 종파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 기대어 자기 학설의 우위를 주장하던 교종의 종파들과 달리 선종은 언어와 문자 자체의 한계를 인식하고 경전이나 스승에 기대지 않은 채 스스로 깨달아야 함을 교리로 내세웠다. 그 새로움 또는 낯설음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불교계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으나, 8세기에 들어 교세가 확장되면서 차츰차츰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35) 그렇게 되자 선종의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내세울 필요가 절실해졌고, 그에 따라 선종의 교리와 법통에 걸맞은 ‘계보형’의 고승전, 즉 ‘열전’보다 ‘본기’에 가까운 고승전이 저술되었던 것이다.
두비가 『전법보기』를 저술하고 있을 때, 정각(淨覺) 또한 『능가사자기』(1권)를 저술하고 있었다.36) 시기적으로 볼 때, 두 저자는 서로 모른 채 저술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체재는 거의 동일하다. 정각은 제목에 ‘능가(楞伽)’와 ‘사자(師資)’ 두 용어를 썼는데, 『능가경』 전통 속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한 양상을 서술하려 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1대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 394~468) → 2대 보리달마 → 3대 혜가 → 4대 승찬 → 5대 도신 → 6대 홍인 → 7대 신수 → 8대 보적(普寂) 외 4명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정하면서 대대로 법등(法燈)을 전한 이들의 전기를 실었다.
『능가사자기』도 『전법보기』처럼 한 권이지만, 실제 분량에서는 『능가사자기』가 두 배 이상이다. 『전법보기』에서는 사승 관계를 중심으로 선승의 행적을 간략하게 서술한 반면에, 『능가사자기』에서는 인물의 행적은 거의 생략한 채 깨달음을 얻은 기연, 입전 인물의 철학적 언설, 경전에서 인용한 글 등을 대거 기술했기 때문이다. 『전법보기』가 역사서의 면모를 잘 갖추었다면, 『능가사자기』는 철학서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내용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구성 또는 체재를 계보화한 점은 공통된다. 이는 선종이 스승에서 제자로 직접 법을 전하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을 핵심으로 하는 종파임을 말해준다.
『역대법보기』(1권)는 774년 즈음에 저술되었으며, 저자는 알 수 없다. 앞의 두 고승전에서 드러났듯이 선종에서는 이미 계보를 중시하고 있었으므로 『역대법보기』 또한 그 점을 따랐다. 다만, 계보화의 성격에서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어 주목된다.
석가여래께서 멸도한 뒤, 법안을 마하가섭에게 맡기셨고, 가섭은 아난에게 맡겼으며, 아난은 말전지에게 맡겼고, 말전지는 상나화수에게 맡겼으며, 상나화수는 우파국다에게 맡겼고, 우파국다는 제다가에게 맡겼으며, … 마나라는 학륵나에게 맡겼고, 학륵나는 사자비구에게 맡겼으며, 사자비구는 사나바사에게 맡겼다. … 사나바사는 우바굴에게 맡겼고, 우바굴은 수바밀다에게 맡겼으며, (수바밀다는) 승가라차에게 맡겼고, 승가라차는 보리달마다라에게 맡겼다. 서역에서는 29대이며, 달마다라를 빼면 28대다.37)
『부법장경(付法藏經)』38)의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인데, 『전법보기』와 『능가사자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서역 조사들의 계보다. 현재 전하는 『부법장경』에서는 3조가 말전지가 아닌 상나화수이며 조사들의 계보도 23조 사자비구까지만 나온다. 위 인용문에서는 사자비구가 24조다. 이는 『역대법보기』의 저자가 실제로는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의 계보를 따르면서 『부법장경』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달마다라선경』의 계보와도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약간 다르다.39)
그런데 『역대법보기』에서는 위의 계보만 던져놓고, 실제 본전에서는 보리달마를 제1조로 삼아 서술을 시작했다. 보리달마 → 혜가 → 승찬 → 도신 → 홍인 → 혜능(惠能)으로 계보가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역시 홍인의 제자인 지선(智詵)에서 시작되는 지선 → 처적(處寂) → 무상(無相) → 무주(無住)의 계보가 이어진다. 특이한 것은 무주의 전기가 전체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마치 무주의 어록을 엮으면서 역대 조사들의 계보를 앞에 덧붙인 형국인데, 이는 무주의 이전 행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주는 본디 무상의 제자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거사인 진초장(陳楚章)의 법통을 이었다가 나중에 혜능의 법통을 이은 자재(自在)의 제자가 되었고, 이윽고 촉(蜀) 땅으로 가서 무상의 법문을 이어받았다.40) 이렇게 두 번이나 법통을 바꾸었다는 것은 무주가 본래 무상의 적통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정통 계보의 바깥에 있었던 무주의 흔적을 지우고 본래부터 그 법통의 정당한 계승자였음을 추인 받으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 『역대법보기』일 공산이 크다. 그렇게 보면, 무주는 선종의 축소판처럼 여겨진다. 선종도 오랫동안 불교계에서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가 중심부로 진입한 뒤에 종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계보형의 고승전을 편찬했기 때문이다.
『역대법보기』는 선종의 고승전에서는 처음으로 서역 28조사의 계보를 선보였다. 이 계보는 『전법보기』와 『능가사자기』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역대법보기』 또한 전기를 보리달마로부터 기술했다. 당시에는 이 계보를 허구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교사서라 할 고승전에 이런 허구적 계보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801년에 지거(智炬)는 『보림전』(10권)을 편찬했다. 본디 제목은 『쌍봉산조후계보림전(雙峯山曹侯溪寶林傳)』이다. 이 『보림전』은 조사선(祖師禪)의 성립과 관련된 선종사서로 중시되고 있는데, 서천 28조의 계보가 본전(本傳)에 자리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41) 그 점을 중심으로 『보림전』을 살펴보겠다.
『보림전』은 명대(明代) 이후에 사라졌다가 20세기 초반에 일본과 중국에서 발견되었으며, 권1~권5, 권6, 권8 등 일곱 권만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체재의 특성을 살피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역대법보기』에서는 서천 28조의 계보를 제시하기는 했으나, 그 조사들의 전기를 두지는 않았다. 『보림전』에서는 계보와 함께 전기들도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고 전법게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먼저 계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대가섭장 결집품(大迦葉章結集品) → 제2조 아난장 중류적멸품(阿難章中流寂滅品) → 제3조 상나화수장 항화룡품(商那和修章降火龍品) → 제4조 우파국다장 화삼시품(優波毱多章化三尸品) → 제5조 제다가장 선수화품(提多迦章仙受化品) → 제6조 미차가장 제촉기품(彌遮迦章除觸器品) → 제7조 바수밀장 범왕문품(婆須蜜章梵王問品) → 제8조 불타난제장 백광통관품(佛陀難提章白光通貫品) … → 제23조 학륵존자장 변난기품(勒尊者章辯難氣品) → 제24조 사자비구장 변주품(師子比丘章辯珠品) → 제25조 파사사다장 분의감응품(婆舍斯多章焚衣感應品) → 제26조 불여밀다장 변독룡지품(不如密多章辨毒龍地品) → 제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 →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摩) → 제29조 가대사장 단비구법품(可大師章斷臂求法品) → 제30조 승찬대사장 각귀시화품(僧璨大師章却歸示化品)
『역대법보기』의 계보에서 보이던 3조 말전지가 빠지고 상나화수가 3조로 되어 있는데, 이는 『부법장경』의 것과 동일하다. 다만, 『보림전』에서는 7조에 바수밀이 들어가 『부법장경』과 다르고, 나머지 24조까지는 『부법장경』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달마다라선경』과도 일치하지 않는 면이 많다. 이는 지거가 독자적으로 계보를 만들려 했음을 의미한다.42) 무엇보다도 지거는 『보림전』에서 동토(중국)의 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서천의 조사들에 관한 전기들까지 본격적으로 기술했다. 『역대법보기』와 달리 이 허구적 계보를 역사적 사실로 다루었다는 뜻이다.
위의 계보에서 또 주목할 점은 조사들의 이름에 ‘장(章)’을 붙이고 그 조사의 대표적인 행적을 명시하며 ‘품(品)’을 붙인 일이다. 29조 혜가의 경우에 ‘가대사장 단비구법품(可大師章斷臂求法品)’이라 했다. ‘단비구법’은 “팔을 자르면서 법을 구하다”는 뜻이다.43) 이러한 품은 『60화엄경』의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이나 「입법계품(入法界品)」, 『법화경』의 「신해품(信解品)」이나 「화성유품(化城喩品)」 따위를 떠오르게 하며, 『법화전기』에서 과목의 명칭을 「전독멸죄(轉讀滅罪)」, 「서사구고(書寫救苦)」라 한 것과도 흡사하다.
계보에 따라 전기를 서술하면서 각 조사의 이름 뒤에 그의 각별한 품행 하나를 명시한 것은 확실히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단비구법’뿐 아니라 “화룡을 항복시키다”는 뜻의 ‘항화룡(降火龍)’이나 “흰 빛이 꿰뚫고 지나가다”는 뜻의 ‘백광통관(白光通貫),’ “구슬로 (이치를) 풀어내다”는 뜻의 ‘변주(辯珠)’ 따위를 보면, 마치 후대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처럼 느껴진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선종의 입장에서 그 종파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체재를 갖추려 애쓴 결과로 볼 수 있겠다.
『보림전』은 석가모니 세존, 그리고 마하가섭부터 27조까지 서천(인도) 조사들의 전기를 상세하게 기술했을 뿐 아니라 전법의 게송들이 전해진 일도 서술해 서천의 조통(祖統, 조사들의 법통)을 역사화했다. 그리고 보리달마를 통해 그 법통이 중국으로 전해져 혜가 이후의 조사들에게 이어진 일들도 자세하게 서술해 중국의 선종이 붓다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후대 선종에서 정설로 여기며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 서천27조설과 동토6조설이 확립되었다. 중요한 것은 인도 및 중국의 법통이 『보림전』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법보기』와 『능가사자기』에서 계보에 따라 동토의 조사들을 서술한 데서 시작해 『역대법보기』를 거치면서 상상력이 더 보태지고 구체화된 결과로 보인다. 전기들의 내용이 더 풍부해지거나 정제된 것도, 사실보다 허구가 점점 더 많아진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선종의 고승전, 곧 선종사서가 역사서임에도 문학작품으로 간주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Ⅴ. 맺음말
7세기에서 8세기까지 중국 불교는 아주 융성했으며, 후대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칠 주요 종파들도 등장했다. 이 시기에 불교사서라 할 고승전 또한 대거 저술되었다. 모두 여덟 종의 고승전이 전하고 있는데, 편찬 시기에 따라 또 종파에 따라 각기 체재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불교사의 전개와 맞물려 있음이 밝혀졌다.
도선은 불교사 전체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불교사서를 지향하며 『속고승전』(645)을 저술했다. 『고승전』에서 마련한 십과를 역사서에 걸맞게 수정하고 보완함으로써 체재의 정형화를 이루었다. 정형화된 십과는 후대에 『송고승전』(988), 『대명고승전』(1617) 등이 정사처럼 계승하기도 했으나, 당장 7세기 말부터 여러 종파에서 독자적인 고승전을 편찬하면서 변형해 활용하기도 했다. 화엄종의 『화엄경전기』(690년?)는 십과 체재지만, 이 십과는 『속고승전』과 달리 화엄철학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향으로 변형된 것이었다. 천태종의 『홍찬법화전』(706년?)과 『법화전기』(750년?) 또한 변형된 팔과와 십이과를 체재로 삼았는데, 이 둘은 외형상 차이가 뚜렷함에도 법화신앙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요컨대, 『속고승전』에서 역사서로서 성격이 강화된 십과가 화엄종의 고승전에서는 철학적 성격을 갖는 쪽으로, 천태종의 고승전들에서는 신앙적 성격이 강조되는 쪽으로 변형된 것이다.
선종에서도 고승전을 잇달아 편찬했는데, 화엄종이나 천태종과 달리 경전에 의거하지 않고 수행자가 스스로 깨닫는 자각(自覺)을 요체로 하면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직접 전수하는 사자상승을 중시했다. 이러한 교리적·종파적 특성은 고승전의 편찬에도 반영되었다. 『전법보기』(713년?)와 『능가사자기』(713년?), 『역대법보기』(774년), 『보림전』(801년) 등이 계보화된 체재를 갖춘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네 고승전이 차례로 저술되는 동안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계보에서 허구적인 서천(인도) 조사들의 계보가 덧붙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법통이 확립되었다. 둘째는, 계보가 점점 허구적 성격을 띠면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한 서술이 줄고 철학적인 내용의 발언들과 게송들로 채워져 역사서보다 철학서의 면모를 더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7~8세기에 편찬된 고승전들은 대체로 종파 불교의 발달과 궤적을 같이하고 있었다. 종파마다 교리의 핵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강조하는 바가 철학이냐 신앙이냐 아니면 깨달음이냐에 따라 고승전의 체재가 달라졌는데, 체재의 성격은 그 종파의 지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고승전들에 나타난 체재의 형식과 특성은 후대의 고승전 편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중국에서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월남 등에서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 다양한 고승전들을 편찬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각국의 고승전들이 시대마다, 나라마다 어떤 체재를 갖추고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비교하며 연구할 필요가 있다. 본고의 논의는 그런 통시적 연구 및 비교 연구의 시작점으로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