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서로 다른 배경이지만, 동학 인내천과 대순사상 삼요체는 상관연동을 이르고 있다. 니니안 스마트(Roderick Ninian Smart, 1927~2001)는 종교현상학에서 주목할 인물이다. 그의 공헌은 종교차원에 대한 비교 분석틀을 제공한 점에 있다. 그의 다차원적 종교구조는 ‘세계관 분석’ 이론으로 통합되었다. 특히 그의 세계관 분석은 종교현상학의 핵심을 이룬다. 후설 현상학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종교현상을 인간의 경험으로 조망한 데 특색이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동학 인내천과 대순사상 삼요체 비교분석에 있어 니니안 스마트의 종교현상학 방법이 유용하다. 이는 양자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성회통을 꾀할 수 있다.
아울러 동학 인내천과 대순사상 삼요체에 관해 비교분석을 꾀함으로 종교문화 인식에 나타난 영성 지평 융합을 꾀할 수 있다. 그의 종교현상학 분석은 『성스러움의 차원 : 세계의 신념 분석(Dimensions of the Sacred: Anatomy of the World’s Believes, 1996)』에서 보다 구체화 된다.1) 그는 처음에는 종교의 여섯 차원 분석을 위해 전체의 장을 할애했지만, 그 후 두 차원을 추가했다. 추가 차원은 종교의 정치 차원과 종교의 경제 차원이었다. 그런데 종교의 정치 차원은 효과 위주로 짧게 언급했고, 종교의 경제 차원은 그 효과마저 철저히 분석되지 않았다. 이에 신뢰수준 차원은 종교의 아홉 차원으로, 교리 또는 철학 차원, 의례 또는 실천 차원, 신화 또는 서사 차원, 경험 또는 정서 차원, 윤리 또는 법적 차원, 사회 또는 조직 차원, 예술 또는 물질 차원, 그리고 정치 차원, 경제 차원이다.
이처럼 1968년, 여섯 차원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1989년, 일곱 차원, 1996년, 아홉 차원으로 확장이 되었다. 아울러 종교현상은 역사 현상이지만 역사를 벗어나 질서를 구축하게 되는 범 역사 차원으로 교리, 신화, 윤리 차원으로 한정된다. 동학 인내천과 대순사상 삼요체는 근대 이후 종교현상으로 신화 차원을 전제하지 않기에, 교리 차원과 윤리 차원이 핵심적 분석 대상에 해당된다.
먼저 동학 인내천은 윤리 또는 법적 차원과 상관한다. 윤리 차원은 개별적 행동과 상관하고, 윤리강령은 공동체를 규제하는 법적 차원으로 자리매김한다. 종교는 제도화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눈에 띄는 규범적 차이가 있다. 이 경우 법적 차원은 행동반경을 상당히 제약하는 경향이 있기에, 스마트는 도덕 차원의 여러 원리가 종교 전통에 녹아들어 가서 다양한 형태의 규범적 행동 동기 유발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2) 이에 윤리 차원과 법적 차원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동학의 인내천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교리는 신앙과 의식이라는 상징 언어를 통해 드러나기에 지적 통찰력을 드러낸다. 교리체계는 체계로 짜인 일련의 교리로 구성된다. 또한 교리는 동일 주제를 설명하거나 인과 차원에서 상호 관련을 맺는다. 종교 교리를 관할하는 종교 지도자에 따라 경직된 조직으로 강화하기에 사회 전체 맥락에서 파악하고 이해하려면 철학 차원을 함께 살릴 필요가 있다.3)
철학적 태도 기능으로 교리는 실존적이며 철학 메시지를 함축함으로 교리와 생활 경험 차이를 해소하게 된다. 또한 철학적 기술 기능으로 초월과 일상을 기술함으로 인식론적 이해를 확장한다. 그리고 철학적 화해 기능으로 모순을 해결하고 적응을 위한 촉진제 역할을 감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기능들을 조망할 때, 교리적 차원과 철학적 차원을 병행하여 살펴봄으로써 대순사상 삼요체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현상학에서 항목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관한 언급을 종교현상에 대한 내면적 이해라면, 그 밖일 것들과 연결 맺도록 관련 사항을 언급함은 외면적 설명이다. 이처럼 윤리 법적 차원의 인내천 동학과 교리 철학적 차원의 대순사상 삼요체를 상호 비교 분석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영성회통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동학 인내천
수운은 한울님 모심의 시천주(侍天主)를 표방하고, 해월은 한울님 양육의 양천주(養天主), 그리고 의암은 한울님 실현의 체천주(體天主)를 나타냈다. 이를 통해 동학은 인내천 사상을 갖추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도성입덕의 윤리 차원으로 한울님 실현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했다. 한울님 실현은 인간의 본성과 상관하며 우주의 ‘한’ 생명에 대한 윤리 실천과 연동한다. 인간은 한울님의 신성 자각으로 만유 근원에 대한 성실과 공경, 믿음을 갖추게 된다. 수운은 도성입덕을 위한 ‘성경신’을 동학 정신으로 풀이하면서 이 길로 도성입덕(道成立德)으로 보았다. 성경신은 수운의 사상으로 생명 본체 작용을 신령과 기화로 풀기에 회통을 이룬다.
이처럼 도성입덕을 이루는 윤리 차원에서 인내천 구현의 성·경·신을 고찰할 수 있다. 수운은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많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별로 다른 도리가 없고 성·경·신 석 자이니라.”5)고 하여 한울님 모시는 윤리적 실천으로 성·경·신을 강조했다. 해월도 수운의 도를 잇고, “우리의 도는 오직 성·경·신 세 글자에 있느니라. 만일 큰 덕(大德)이 아니면 실로 행하기 어려운 것이요 성·경·신에 능하면 성인이 되기가 손바닥 뒤집듯 쉽다.”6)고 했다. 동학의 인내천에 이르는 도성입덕의 성·경·신은 대덕(大德)을 지닌 자가 능히 실천하고, 그 실천으로 말미암아 성인(聖人)을 이루어 인내천의 자기실현을 구현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수운이 말하려는 성(誠)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운은 “정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겠거든 나의 마음이 잃어지지 않았는지를 헤아려 보라”7)고 풀이했다. 한울님 모심의 마음 지킴으로 정성이 이루어진다. 마음 지킴의 도리로서 한울님을 정성으로 마음속에 모실 수 있다. 정성으로 한울님을 모시면 한울님과 자신의 심신이 일치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를 경험하고, 만사지(萬事知)를 성취하게 된다. 또한 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영부(靈符)를 받아 그것을 불사약(不死藥)으로 생각하여 스스로 먹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권유했다. 그런데 먹는 사람에 따라 효험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는 먹는 자의 정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울님에 대한 지극정성이 없으면 영부(靈符)도 그 효능을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정성이 지극해야 한울님이 감응하고 한울님 모심의 정성과 공경이 쌍두마차를 이루어야 그 지극함을 유지한다. 수운은 “공경(敬)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겠거든 잠시라도 사모하고 우러러보는 ‘모앙심(慕仰心)’을 늦추지 말라.”8)고 하며 잠시도 잊지 말고 한울님 공경의 자세로 마음을 새롭게 일깨우는 것을 ‘경(敬)’이라 했다. 한울님을 공경하는 마음은 자나 깨나 긴장되고 깨어있는 상태이다. “일일 시시 먹는 음식 성경이자(誠敬二字) 지켜내어 한울님을 공경하면 자아시(自兒時) 있던 신병(身病) 물약자효(勿藥自效) 아닐런가.”9)하며 지속적인 공경을 강조했다.
해월의 한울님 양육에서도 한울님을 공경함은 사람을 공경하라는 말과 상관연동을 이룬다. 해월은 사람 공경하기를 한울님 공경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으로도 경을 사용했다. 여기서 경천(敬天)은 경인(敬人)으로 나타나고, 또한 한울님은 만사 만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기에 만사 만물 모두 한울님 아님이 없다. 결국 경천은 경물(敬物)에 이른다고 할 것이다.
특히 수운은 먼저 믿고 그다음 성과 경을 다하라고 주문했다. 이를 통해 시천주에 대한 올바른 실천이 확고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어서 수운은 믿음(信)에 대하여 이같이 풀이하면서, 실천에 ‘믿음(信)’을 두었으니, 성이나 경보다 믿음으로 모심(侍)의 선행(先行)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성경신’을 제대로 갖춤으로써 마침내 도성입덕에 이른다고 보았다.
“대개 이 도(道)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 정성이 된다. 신(信)의 글자를 풀어보면 사람의 말이란 뜻이니 사람의 말 중에는 옳고 그름이 있다. 그 중에 옳은 말은 취하고 그른 말은 버리되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정해야 한다. 한 번 작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신(信)이니 이같이 닦아야 그 정성을 이루느니라. 정성(誠)과 믿음(信)은 그 법칙이 멀지 않다. 사람의 말로 이루었으니 먼저 믿고 뒤에 정성하라.”10)고 하였다.
이같이 성·경·신의 실천은 인내천을 지향한다. 아울러 인내천으로 도성덕립(道成德立)하고 도덕군자(道德君子)가 될 것으로 간주하였다. 특히 수운은 인간이 한울님 소산으로 여기며, “한울님이 사람 낼 때 녹(祿) 없이는 아니내네.”11)라고 했다. 이를 통해 인간이 한울님 소생(所生)으로 간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수운은 인간 운수와 재질(才質) 등은 한울님이 정해주신 것이니 인간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까지 했다. 그는 “재질(才質)을 가졌으면 나만 못한 재질이며 만단 의아(疑訝) 두지마는 한울님이 정(定)하시니 무가내(無可奈)라 할 길 없네.”12)라며 자신이 처한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만사 만물을 한울님 소산으로 보았다. 세상사를 운명론적으로 본 것이라기보다, 지극정성의 실천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는 “지각없는 이것들아, 남의 수도(修道) 본을 받아 성지우성(誠之又誠) 공경(恭敬)해서 정심수신(正心修身) 하였어라.”13)하며 당부했다. 아울러 “은덕(恩德)이야 있지마는 도성입덕 한 가지는 정성이요 다른 한 가지는 사람이라.”14)고 하였다. 여기서 사람이 매사 성심을 다하면 도성입덕 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수운이 성경으로 도성입덕 하는 근거는 한울님 모심에 있다. 자신의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다른 먼 곳에서 한울님을 찾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한울님을 찾으라고 했다. 이는 수운의 영성 체험,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15)이라는 말씀에도 나온다. 사람이면 누구나 한울님 모시는 존재라는 깨달음에 근거, 모신 한울님을 마음에서 찾아서 자신을 갈고닦으라고 권유했다. 이것이 비로소 인간이 한울님으로 성화하는 인내천의 도리라고 할 것이다.
한울님으로 성화된 인간은 도성입덕으로 ‘인내천(人乃天)’의 자기실현에 도달한 존재이자 도성입덕의 결정체라고 할 것이다. 사람이 인내천의 새 인간으로 거듭나면, 그 마음이 한울님 마음이기에 자신의 마음을 자기가 믿고 공경하고 따름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도성입덕 자기실현 인간으로 전환이 된다. 특히 자기실현의 인내천을 구현하려면 심적 바탕, 수심정기를 실천해야 한다. 도덕 실천에 있어 수심정기는 체(體)가 되고, 인의예지는 용(用)이 된다. 수도자가 수심정기를 하지 못하면, 그는 기초 계명도 지킬 수 없고, 도성입덕을 이룰 수도 없다. 해월 또한 “수심정기 네 글자는 천지가 쇠퇴하고 끊어지게 되는 기운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다.”16)고 하여 인간과 우주가 일기(一氣)로 내면으로 소통하는 관계를 중시했다.
동학에 있어 수심정기(守心正氣)는 기화지신(氣化之身)의 살아 생동하는 혼(魂)을 불러일으키는 실천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수심정기 못하면, 내유신령(內有神靈)과 외유기화(外有氣化)에서 발생하는 기화지신(氣化之神)이 작용하지 않기에 하눌임 모심이 어려워지고 스스로 한울님으로 재탄생하는 인내천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이처럼 수운은 한울님 체험을 근거로 주문(呪文) 수행을 중시했다. 그는 주문을 강령 주문과 시천주 본 주문으로 나누어 방법을 제시하고 시천주 본 주문을 심학(心學)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한울님 모심의 시천주는 지극한 마음으로 한울님을 자신의 마음속에 모셔 자신을 성화(聖化)하는 길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13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 하며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不忘其意) 하였으라”17)
그런데 수운은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의 8자 강령 주문을 실천함으로써 신체에 기화지신의 생혼(生魂)을 일으킨다고 했다. 수운이 말하는 마음은 기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마음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운이 뿌리가 되고 몸통이 되어야 한다. 영(靈)이 기(氣)를 만나면 살아 움직이는 ‘영기(靈氣)’가 되고, 마음이 기운을 만나면 생동하는 심기(心氣)로서 한울님을 모시며, 신(神) 또한 기운을 만나야 신기(神氣)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수운은 21자 주문해석에서 기의 성격과 역할을 풀이하면서 이같이 언급하였다.
기는 무슨 일에나 간섭치 아니함이 없고 무슨 일에나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그러나 형용할 수 있을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나 보기는 어려우니18)
그는 기(氣)를 영(靈)과 동일시하고, 우주 만사에 개입하여 주체적으로 작용하지 아니한 곳이 없음을 강조했다. 수운이 언급한 기(氣)는 세상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활기이며 생명에 내재하는 우주 생성의 ‘근원자(根源者)’이다. 이에 해월 또한 ‘기(氣)’를 중시하면서 마음과 기운에 대해 이같이 풀이하였다.
기운이 마음을 부리는가, 마음이 기운을 부리는가? 기운이 마음에서 나는가, 마음이 기운에서 나는가? 화(和)해 나는 것은 기운이요 일을 쓰는 것(用事)은 마음이니, 마음이 화하지 못하면 기운이 그 도수를 잃고, 기운이 바르지 못하면 마음이 그 궤도를 이탈하나니, 기운을 바르게 하여 마음을 편하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여 기운을 바르게 하라.19)
해월도 기(氣) 일원으로 ‘마음은 기운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마음과 기를 구별치 않고 우주 생성 근원을 혼연한 일기(一氣)로 중시하고, 기운 속에는 영(靈)이 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는 동학이 평등주의 가치를 표방하면서 전통유교의 ‘이기(理氣)’ 위계질서를 비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로써 이 세상에 만연하지만, 내면의 기(氣)로서 신을 믿을 수 있고, 그 신과 혼연일체를 이루는 인내천의 자기실현을 통해 윤리적 차원의 도성입덕의 성취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인내천은 수심정기의 법적 차원을 수반하는데, 이는 수심법(守心法)과 정기법(正氣法)으로 나뉜다. 니니안 스마트는 윤리적 차원과 달리 법적 차원은 사회규범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20) 수운은 기와 마음의 관계를 ‘기체심용(氣體心用)’으로 파악하였으며, 지기(至氣)를 우주 만유 생성 원인으로 간주하였다. 개체기운이 지기(至氣)와 합쳐질 때, 천덕성인(天德聖人)을 이루어 인내천을 성취한다.
먼저 수운의 수심법은 자신 기운을 천지 근본 기운, 지기(至氣)와 합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수운은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면, 한울님 성품을 거느릴 수 있고 한울님 가르침을 받아 자연스러운 가운데 변화할 수 있다”21)고 하여 마음을 굳게 지키는 수심(守心)법과 기운을 바르게 하는 정기(正氣)법으로 나누어 천심(天心)과 하나를 이루게 됨으로써 인내천의 인간 성화(聖化)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 마음은 후천 마음으로 ‘기체심용(氣體心用)’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신의 기운을 지기(至氣)와 일치시켜 한울님 마음으로 거듭나는 인내천에 방점을 둔다. 후천 마음은 수심으로 정기(正氣)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기화지신(氣化之神)으로 ‘천령(天靈)’을 받아 시천주하고, 천심을 오심(吾心)으로 지킨다고 할 것이다.
해월의 수심법은 양천주를 위한 마음 지킴으로써 내 몸에 받아들인 하늘을 가만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양육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어려운 것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수심정기(守心正氣)22)라고 규정하고, 잠잘 때도 능히 다른 사람출입을 알고, 능히 다른 사람이 말하고 웃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경지를 이루어야 된다고 했다.23) 해월은 천지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그것을 굳게 지킴을 강조했는데, 의암도 이러한 기일원론을 고수했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잠시라도 마음을 정맥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수심이요, 그 방법은 일용행사 간에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고 삼단(三端)을 서로 어김없게 하는 것이다.24)
또한 의암은 정맥(精脈)과 삼단(三端)에 대해, 사람은 음양이기(陰陽理氣)가 응하여 화생한 것으로 부모 포태로부터 이룬 것이며, 태어나면 기운을 접하고 기운을 접하면 사지가 움직이고 귀와 눈이 열려 동정을 갖추는데, 마음과 성(性)과 정(精)의 삼단에서 정(精)은 “몸의 지령(體之至靈)”25)이라고, 주장하였다. 의암은 삼단을 말하면서 마음은 기운, 성품은 바탕, 그리고 정(精)은 ‘뇌골폐부(腦骨肺腑)’ 인체 곳곳에 있는 것으로, 사람 움직임에 대해 마음이 먼저 발동, 정(精)을 움직이고 정이 발동,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26)
의암은 수심법으로 마음이 잠깐이라도 정(精)과 맥(脈), 그리고 혈(血)에서 떠나지 않음으로, 마음이 신(神)이요 신(神)은 기운(氣運)이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음양의 합덕으로 체(體)를 갖춘 것이 성(性)이요 ‘밖으로 영이 접(外有接靈)’하고 ‘안으로 강화하는 것(內有降化)’이 마음”27)이라고 하여, 마음이 비록 기에서 만들어지더라도 ‘영기(靈氣)’로서 작용하여 한울님 말씀이 내재한다고 보았다. 결국 의암은 한울님을 체화하는 ‘체천주(體天主)’ 관점에서 심·성·정 삼단의 조화를 강조하고, 삼단의 주재(主宰)가 마음이기에 마음 단속으로 수심을 한다고 했다. 그는 한울님 나라를 땅에 구현하는 체천주 통해 수심 가치를 강조했다고 할 것이다.
수심정기의 또 다른 법적 차원은 정기법(正氣法)이다. 수운은 한울님 모심에 앞서 한울님 영기(靈氣)를 받을 수 있도록 강령주문(降靈呪文)의 8자를 활용함으로써 기화지신(氣化之神)을 얻게 된다고 했다. 수운은 한울님의 도와 운은 동학이나 서학이나 같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이치에 있어 서로 다르다고 했다.
서양인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자기 몸만을 위하여 빌 뿐이다. 몸에는 기화지신이 없고 학에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형식은 있으나 자취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주문이 없는지라. ‘도는 허무한데 가깝고 학은 한울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다름이 없다고 하겠는가!’28)
이처럼 수운은 동학의 특이성으로 기화지신(氣化之神)이라면서도, 기독교인들의 몸(身)에는 ‘氣化之神’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는 ‘강령의 법(降靈之法)’으로 ‘외유기화 내유신령’을 깨닫지 못하여 한울님을 자기 몸에 모시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그들에게 한울님 가르침이 없다고도 했다. 수운은 지극정성으로 강령주문과 한울님 주문을 외워 한울님 ‘영기(至氣)’ 받고 기화지신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랐다. 지극한 정성으로 주문 외워 항상 한울님을 생각하면, 기화지신은 몸에 머무르지만, 잠시라도 생각이 주문과 한울님으로부터 떠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오직 강령주문을 사용하여 밖으로 ‘강령지기(降靈之氣), 안으로 ‘강화지교(强化之敎)’를 이루어야 ‘기화지신’으로 한울님을 각자 마음에 모시면서, ‘각자불이(各者不移)’ 수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심을 하는 생명은 각자를 사적 차원으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바꿀 수 없는’ 공(公)적 가치와 상통시킨다.29) 여기서 공사상통(公私相通)이 이루어지면 공사(公私) 상통하는 ‘한’의 영성 작용이 원만하다고 보았다.
또한 ‘접령강화(接靈降話)’로 ‘기화지신’을 이루어야 한울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고, ‘접령강화’로 기화지신을 이루되 정기법으로 나아가야 한울님 모심이 수월해진다고 했다. 한울님을 모시되 한울님 마음으로 한울님 기운을 바르게 펼치는 것이 정기법의 요체이다. 한울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정기법을 실천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수운은 영성 체험을 통한 한울님 모심과 수심정기를 강조하면서, ‘접령강화(接靈降話)’와 수심정기(守心正氣) 법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한울님 모심을 제대로 성취할 수 있었다.
바른 기운 속에 바른 마음이 깃들기에, 정기(正氣)는 한울님을 내 마음에 깃들이게 하는 법이다. 법적 차원에서 수심정기는 한울님 믿음을 마음에 굳게 지키고 한울님 모시는 ‘성경신’ 자세를 다잡아 인내천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이는 도성입덕(道成立德)으로 나아가는 마음 바탕을 이룬다. 수운은 “인의예지는 옛 성인이 가르친 것이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다.”30)고 말하며 동학의 근본수행 요체로서 삼았다. 동학은 한울님과 내면 소통하기에, 니니안 스마트는 동학을 무속으로 보지 않고 변화를 창조적으로 제어한다고 인식하였다.31)
그는 동학이 한국 전통과 서학 주제들 결합에 주목하고 퀘이커교를 연상시킨다고 보았다. 그가 동학과 퀘이커교를 유사하게 본 근거는 마음에 내재하는 신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학은 전통적인 유불(儒佛)만으로 역사 혼란으로부터 한국인을 구하기에 부족하기에 새로운 형태의 종교이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울러 니니안 스마트가 보기에 동학의 가르침에는 유교 덕목과 불교 윤리, 도교 신념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면서, 유교의 사회차별, 불교와 도교의 사회 금단현상을 동시에 비판했기에 종교현상 이해에 있어 판단중지에 묶여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32)
동아시아의 전통 개념과 달리, 동학의 신은 범신론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거주할 수 있기에 만인은 신성하며 평등하다고 보았다. 이는 동학의 인본주의와 평등주의 원천을 이룬다. 이로써 많은 추종자가 부패한 지방정권과 증가하는 일제 영향력에 저항하면서 동학농민혁명(1894~1895)에 가담했다. 그 결과 동학교도들은 종교박해를 경험한다. 수운과 해월은 처형당했다. 그런데도 이 운동은 살아남아 제3대 교주, 의암 손병희(1861~1922)의 주도로서 1905년, 천도교로 바뀌었다.
동학의 신은 인간과 내면으로 소통하는 지기(至氣)이다. 동학은 ‘서학’과 대조를 이루는 데, 동학에서 바라보는 서학의 신에 대한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뿐이라고 했다. 그들의 종교는 공허에 가깝고, 그들 가르침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주님을 향한 것은 아니라고까지 했다. 수운이 보기에 서학은 하늘의 길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에 도성입덕에 이를 수 있는 윤리적 차원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결국 수운은 서학이 지상 중심이고 이기적이며 신에 대한 무례함까지 내포한다고 말하면서 동학의 우월적 영성을 강조했다. 1860년, 천주가 수운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는 서학 대신 자신에게 신비한 부적과 주문을 전했음을 강조했다. 이처럼 동학 정신은 존엄한 인간은 한울님을 모시면서, 양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땅을 한울님 나라로 만들어 인내천을 체화시키려는 도성입덕 개벽 정신이다.
Ⅲ. 대순사상의 삼요체
대순사상은 상제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여 천지공사를 설정함으로 수천 년간 쌓인 원한을 해소하고 새로운 후천 세계를 만든 것에서 비롯한다. 도주 조정산은 1925년, 무극도를 창도하면서 상제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상제로 봉안하고, 신앙 대상·종지·신조 그리고 목적의 교리체계를 확립했다. 대순신앙 신조는 안심·안신·경천·수도의 사강령과 성(誠)·경(敬)·신(信)의 삼요체로 이루어져 있다.
대순사상 성경신은 교리적 차원으로 무자기(無自欺), 철학적 차원으로는 무위이화(無爲而化)와 상관연동을 이룬다. 또한 심신은 침착하고 잠심(潛心)하여 상제를 가까이 모시면서, 정신을 모아 단전에 연마하고 영통 목적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일념을 스스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잊지 않고 지성으로 봉축한다.33)
대순사상 성경신은 교리상으로 무자기를 토대로 하며 무위이화의 철학적 차원으로 이루어진다. 성(誠)은 언(言)과 성(成)을 합해 말한 바를 이루게 함으로, 한결같이 상제 모시는 마음 자세이다. 또한 성은 거짓 없고 꾸밈없이 한결같이 상제님을 받드는 것이다.34) ‘성’은 부족함을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인데, 이 사례를 본다.
박 공우의 아내가 물을 긷다가 엎어져서 허리와 다리를 다쳐 기동치 못하고 누워 있거늘 공우가 매우 근심하다가 상제가 계신 곳을 향하여 자기의 아내를 도와 주십사고 지성으로 심고하였더니 그의 처가 곧 나아서 일어나느니라. 그 후 공우가 상제께 배알하니 웃으며 가라사대 “내환으로 얼마나 염려하였느냐” 하시니라. 또 박 공우가 큰 돌을 들다가 허리를 상하여 고생하면서도 고하지 않았더니 하루는 상제를 모시고 길을 가는데 갑자기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너의 허리를 베어버리리라” 하시더니 곧 요통이 나았도다.35)
이처럼 상제에 대한 정성을 지켜내면 치병하고 집안 우환도 없어진다. 또한 동학 시천주 수련을 통해 상제를 꿈에서 본 그대로 자신 앞에 나타난 모습에 김경학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영성 회통을 깨달았으니, 이 또한 정성으로 말미암는다.
김 경학이 일찌기 동학에 가입하여 三개월 동안 시천주의 수련을 하던 중에 어느 날 꿈에 천상에 올라 상제를 뵈온 일이 있었노라. 상제께서 어느 날 “네 평생에 제일 좋은 꿈을 꾼 것을 기억하느냐” 하시니 경학이 상제를 천상에서 뵈옵던 꿈을 아뢰었도다. 그리고 그는 상제를 쳐다보니 상제의 지금 형모가 바로 그때 뵈옵던 상제의 형모이신 것을 깨달으니라.36)
“그대 아내는 성심이 풀려서 떡이 익지 않아 매우 걱정하고 있으니 내 앞에 와서 사과하게 하라. 나는 용서하고자 하나 신명들이 듣지 아니하는도다”고 이르시니라. 주인이 아내에게 이 분부를 전하니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사랑방에 나와 상제께 사과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시루를 열어보니 떡이 잘 익어 있었도다. 부인은 이로부터 한결같이 정성을 들여 四十九일을 마치니 상제께서 친히 부엌에 들어가셔서 그 정성을 치하하시므로 부인은 정성의 부족을 송구히 여기니 상제께서 부인을 위로하고 “그대의 성심이 신명에게 사무쳤으니 오색 채운이 달을 끼고 있는 그 증거를 보라”고 하셨도다.37)
지극정성으로 상제께서 자신에게 정한 운수를 받아 누릴 것을 말한다. 인간사는 정성이 근원 하니, 정성을 다하는 여부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그 정성으로 천지 대운도 받을 수 있다. 상제는 일심 정성으로 변함이 없었던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과 항일 애국 지도자, 최익현에 대해 국가 충성심과 민중 사랑을 칭송하고 그 넋을 위로했다. 「대순지침」에서 밝힌, ‘경(敬)’은 ‘예의범절을 갖추는 처신’이다.38) ‘경’은 경건하며, 항상 떨리는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신명에 대해 외경 자세를 잃지 않음으로 자나 깨나 상제를 믿으며 잊지 않는 영세불망(永世不忘)으로 공경한다. ‘경’으로 임하면 타인도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이를 지성봉축(至誠奉祝)으로 말하는 데, 그것에는 변함없고 양면이 없기 때문이다.39)
김덕찬도 상제권능 체험하지 못해 거만하다 공경 회복사례로써 이같이 드러난다.
김 덕찬이 상제를 대함이 항상 거만하나 상제께서는 개의치 않으시고 도리어 덕찬을 우대하시더니 하루는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공사를 행하실 때 크게 우레와 번개를 발하니 덕찬이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하려 하니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죄 없거늘 어찌 두려워하느뇨.” 덕찬이 더욱 황겁하여 벌벌 떨고 땀을 흘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이후에는 상제를 천신과 같이 공경하고 받들었도다.40)
상제께서 말씀하셨지만, 바쁜 마음으로 거부하다가 술을 마시면서 밭에 부운 볍씨가 그대로 그릇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보고 상제를 경대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안 필성(安弼成)이 못자리를 하려고 볍씨를 지고 집을 나서려는데 상제를 뵈었도다. 상제께서 “쉬었다 술이나 마시고 가라”고 말씀하셨으되 필성이 사양하는지라. “못자리를 내기에 바쁜 모양이니 내가 대신 못자리를 부어주리라” 하시고 지게 위에 있는 씨나락 서너 말을 망개장이 밭에 다 부으셨도다. 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못하고 앉아서 주시는 술을 마시면서도 근심하였도다. 주모가 들어와서 씨나락은 가지고 온 그릇에 그대로 있는 것을 알리는도다. 필성은 이상히 여겨 바깥에 나가 뿌려서 흩어졌던 씨나락이 한 알도 땅에 없고 그대로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전보다 한층 더 상제를 경대하는도다.41)
대순사상 삼요체 하나인 ‘신(信)’도 신앙에서 출발하는 데, 이는 인간 인격을 결정하는 척도이다. 「대순진리요람」에서도 ‘신’을 이같이 풀이하고 있다.
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僻)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經過)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42)
이처럼 일관성 있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 알아차리는 자각이 전제된다. 자각을 통한 믿음으로 확신을 두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부정할 수 있다.43) 의심하지 않는 절대 믿음을 대순사상에서는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한 후에 어김없이 내년의 농사를 위해 곡식의 종자를 남겨두는 것에 비유한다. “나의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니 잘 믿으라.”44)라고 하여 상제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상제를 믿으면, 하늘도 오히려 두려워한다.
보라. 선술을 얻고자 十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그의 성의로 하늘에 올림을 받은 머슴을. 그는 선술을 배우고자 스승을 찾았으되 그 스승은 선술을 가르치기 전에 너의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하니라. 그 머슴이 十년 동안의 진심갈력(盡心竭力)을 다한 농사 끝에야 스승은 머슴을 연못가에 데리고 가서 “물 위에 뻗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물 위에 뛰어내리라. 그러면 선술에 통하리라”고 일러 주었도다. 머슴은 믿고 나뭇가지에 올라 뛰어내리니 뜻밖에도 오색 구름이 모이고 선악이 울리면서 찬란한 보련이 머슴을 태우고 천상으로 올라가니라.45)
이처럼 개인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상제의 천지공사를 믿고 따르면서 동참을 중시한다. 그런데 믿음에 있어 막연하고 무계획적이면,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이에 믿음에 있어 자신의 역량을 살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목표를 이룬 후에도 더 높은 목표를 세우면서 단계적으로 정성을 다해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기약과 한도의 원칙’이다.46) 믿음이 전제될 때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대순사상의 이상적 인간상은 무자기의 도통 군자로서 신인조화(神人調化)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신과 인간이 화합하여 새 가치를 창출함으로 ‘신사가 성공하고 인사가 성공하며, 인사가 성공하고 신사가 성공함’이다.47) 상제 신앙으로 사심을 버리고 예법에 합당하게 한다.48) 이로써 자신도, 남도 그리고 상제마저 기만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대순사상은 상제 신앙을 전제로 한다. 종교현상의 철학적 차원은 무위이화와 연결된다. 대순사상에서의 ‘성’은 상제를 모시는 인간의 마음자세로서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무자기’로 끊임없이 조밀하고 틈과 쉼이 없이 늘 자신의 부족함을 두려워하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마음가짐에 대한 상제 응답에 관하여 전경에서는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 사의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라고 한다. 무위이화로써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진다. 『도덕경』에서는 ‘무위이민자화(無爲而民自化)’라고 하여, ‘내가 일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무욕하면 저절로 질박해진다.’49)고 말하며 무위와 무욕을 강조한다.
도를 따르되 함부로 자신의 의도를 개입시키는 인위적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절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위적 제도가 아닌 무자기의 덕성 함양으로 이치에 맞게 이룸을 뜻한다. 전경에서 무위이화는 상제께서 정하신 도수에 의거 신명이 용사하고 이에 따라 새 기틀이 열린다. 이는 인간의 삶에 신명이 함께 작용하기에 인간계와 신명계가 상호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림과 상관한다. 상제께서 천지공사를 통해 상생의 천지 대도를 열어 놓았으며, 신명계의 구조와 질서를 바로잡았기에 신도로써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전제된다.
또한 무위이화의 철학적 차원은 생장염장 사의에도 무위이화 속성이 담겨 있기에 성경신 삼요체로 일관하여 무자기의 양심을 지켜나가면 무위이화 방식의 상제 덕화(德化)로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신심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개 신심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마음먹은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을 일으켜 신심마저도 상실하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성패 여부에 상관치 말고 그 믿음을 일관대로 유지해야 함을 뜻한다. 무위이화 마음가짐으로 대순사상 성경신 삼요체를 잘 지키면, 천지 도수에 따라 작위나 인위, 삿됨이 없이 끊임없이 각자 맡은바 몫을 제대로 수행하여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기에 이렇게 명시한다.
우리 도(道)는 신도(神道)임을 누차 말하였으나 깨닫지 못함은 신도와 인위적(人爲的)인 사도(邪道)를 구별하지 못한 까닭이다.50)
성경신 실천을 복 받기 위한 도구로 억지로 하다 보면, 자연스럽지 못해 그르칠 수 있으니,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상제 덕화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풀리게 된다. 아울러 ‘무위이화’는 덕의 실천과 연동되어 있다. 도덕경에는 도가 잃어졌을 때, 덕이 뒤를 잇게 한다는 의미로 ‘실도이덕(失道以德)’이라고 한다. 도의 대칭이 덕이 아니라 도가 잃어졌을 때, 덕을 실천하라는 뜻이라고 할 것이다. 선한 자를 선하게 여길 것이며 선하지 못한 자도 선하게 여길 것이니 이것이 덕스러운 선이다. 어떤 대상을 상위적 대립으로 갈라치기 하는 것이 아니라, 덕을 두터이 품어 대립과 투쟁에서 벗어나 상생과 조화로 이끈다는 내용이다.
이 조화가 있는 곳에 밝은 일상이 회복된다. 무자기의 마음가짐은 하늘의 도와 같아 활줄을 당기는 방향과 화살이 나가는 방향이 상반됨을 받아들인다. 높은 자를 낮게 하며, 낮은 자는 높이며, 있는 자의 것을 빼앗아 부족한 자를 채워 준다. 성경신을 ‘실천하면 실천하는 태도’로 담담하게 살며, 어진 덕의 삶으로 황홀한 도의 경지에 이른다. 성경신을 유위법에 묶여 실천하기보다 철학적 차원을 살려 무위를 실천함으로써 주위에 덕을 베풀고 상생 문화를 이룰 수 있다.
특히 무위이화는 동아시아 전통에서 철학 차원을 제시하고 있고 대순사상에서도 이를 중시하고 있다. 무자기(毋自欺)로 행하되 행한 것에 대한 집착을 여의게 될 때, 천지신명들이 상제께서 짜 놓은 도수에 따라 작위나 인위, 삿됨 없이 각자 많은 일을 수행함을 말한다. 인위적이지 않고 개인 차원의 사(私)와 거짓 차원의 사(邪)가 배제된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진리로 돌아가는 것은 천지신명이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존재로 천지공정(天地公廷)에 임하기 때문이다.
유월 어느 날 밤에 도적이 백 남신(白南信)의 친묘를 파고 두골을 훔쳐 가는 일이 발생하자 김 병욱이 사람을 보내어 상제께 이 소식을 아뢰었다. 상제께서 촛불을 밝히시고 밤새우기가 초상난 집과 같이 사흘을 지내시고 난 후 남신에게 “두골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한적한 곳에 거처하되 다른 사람의 왕래를 끊고 기다리면 처서 절에 그 도적이 두골을 가져오리라”라고 전하게 하시었다.
남신은 백운정(白雲亭)에 거처하면서 명을 좇으니라. 七월에 접어들면서 친산의 아래 동리의 어른이 마을 사람들과 상의한 끝에 친산 밑에 사는 사람으로서 굴총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마을 사람들이 두루 찾고 그것을 찾는 사람에게 묘주의 상을 후하게 주기로 결의하였느니라. 마을 사람들이 각방으로 찾는 도중에 두골을 가지고 마을 어른을 찾는 동리 한 사람이 나타난지라. 그 어른이 이 사람을 데리고 백운정에 있는 묘주를 찾으니라. 그날이 곧 처서절이었도다. 그런데 두골을 찾았다는 자가 도적의 누명도 벗고 상도 탈 욕심으로 동리의 어른을 찾았도다.51)
이처럼 상제 신앙에는 무자기 성경신을 교리 차원에서 부각한다면, 무위이화 성경신은 철학 차원에서 강조된다. 결국 일을 성취하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작위나 삿됨이 없는 신도로써 이루어진다. 이에 자연의 은총도 18세기 이후 서양에서 말하는 자연계 은총이 아니라 자기에 알맞게 스스로 이룬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이처럼 물질계 자연이 아니고 무자기의 도를 성경신으로 실천하면, 신도(神道)에 의해 스스로 알맞게 이룬다. 이것이 바로 동양의 철학적 차원에서 무자기의 도에 따른 자유자재한 모습을 무위이화로 강조함이다.
아울러 무위이화는 주관과 객관, 상제와 인간의 거리를 많이 좁혀 포일(抱一) 사상을 고취하는 연유가 된다. 서양 종교와 달리 대순사상은 포일의 도통진경으로 성경신이 작용한다. 대순사상 삼요체의 성경신은 ‘포일(抱一)’의 조화의 소임 이외에 형평 작용을 함께 나타낸다. 신도는 마치 휘어잡은 활과 같아서 활줄을 당기는 방향과 화살이 나가는 방향이 상반됨과 같이, 높은 자를 낮게 하며, 낮은 자는 높인다. 하면서 하지 않는 무위로 살아야 비로소 도통진경을 이루어 마침내 황홀한 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Ⅳ. 인내천과 삼요체의 상관연동
동학사상 성경신은 종교현상으로서 윤리적이며 법적 차원, 대순사상 성경신은 종교현상으로서 교리적이며 철학 차원에서 양자의 차이를 드러낸다. 동학사상 성경신이 도성 덕립을 중시하여 한울님 모심에서 인내천의 자기실현으로 결실을 맺는 인간의 성화(聖化)가 중심이라면, 대순사상 성경신은 상제 신앙에 초점을 두고 영통 목적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며 지성으로 소정 주문을 봉송하는 믿음으로 상제하감(上帝下監)에 따른 천지신명 보살핌의 무위이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상관관계에서 드러나는 무극 안의 내면소통과 상제 향한 초월소통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수운은 한울님 모심의 시천주(侍天主)를 표방하고, 해월은 한울님 양육의 양천주(養天主), 그리고 의암은 한울님 실현의 체천주(體天主)로 이어져 동학은 인내천 사상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도성입덕 윤리 차원으로 한울님 실현을 이 땅에 구현한다. 한울님의 실현은 내면소통으로 우주 본성을 지키는 동시에 우주의 ‘한’ 생명에 대한 자각적 실천이 윤리 차원으로 드러난다. 이에 인간은 한울님 신성에 대한 내면소통을 통해 만유 근원에 대한 성실과 공경, 그리고 믿음을 갖는다. 수운은 도성입덕의 성경신을 동학 정신으로 풀이하고, 내면소통으로 무극대도 도성입덕(道成立德)을 성취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동학은 마음을 굳게 지키는 ‘수심(守心)’과 기운을 바르게 하는 ‘정기(正氣)’로 한울님 가르침을 받아 자연스럽게 천심과 내면 소통을 이루어 인간이 성화(聖化)될 수 있음이다. 그런데 수운이 지키려는 마음은 후천의 마음이었다. 수운은 ‘기체심용(氣體心用)’ 관점에서 내면 소통으로 자신의 기운을 지기(至氣)와 일치시켜 한울님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거듭날 것을 주문했다. 수심법에 따른 실천은 마음을 정기(正氣)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기화지신(氣化之神)에 의한 내면 소통으로 천령(天靈)을 받는 시천주가 이루어지고, 한울님 마음의 천심을 자신의 오심(吾心)으로 받들어 지키는 것이 인내천 성경신의 요체라고 할 것이다.
바른 기운 속에 바른 마음이 깃든다고 볼 때, 동학의 정기(正氣) 법은 내면소통으로 한울님을 내 마음에 깃들게 하는 법으로, 한울님 모심의 첩경을 이룬다. 이에 법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수심정기법’은 한울님 믿음을 내면소통으로 마음속에 굳게 지키고 한울님을 모실 수 있는 마음 자세를 다잡아 현재 마음을 갈고 닦으며 기운을 올바르게 지켜 자신을 인내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이는 수도의 최고 목적, 도성입덕(道成立德)으로 나아가는 마음 바탕을 형성한다.
반면에 대순사상은 천지공사 주체로서 초월소통의 상제 신앙에 기반을 두어 상제덕화가 온 누리에 골고루 미칠 때, 성경신으로 포덕천하가 이루어지고 무자기의 양심이 깊어 감에 따라 지상 선경이 보다 빨리 성취되고 무위이화가 일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음이다. 상제의 무한 무량의 덕화가 구현됨으로 복록성경신, 수명성경신, 천지성경신이 초월신앙에 대한 응답으로 온 누리에 미쳐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더라도 친절히 대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며, 스스로 겸손한 무자기 미덕을 갖춘다. 특히 『전경』에서 무위이화는 상제께서 정하신 도수에 따라 초월 신명이 함께 용사하고 이에 따라 새 기틀이 열린다고 한다.
인간의 삶 속에 초월 신명이 함께 작용하기에 인간계와 신명계는 초월소통으로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천지공사 주체로서 상제에 대한 신앙으로 소통하며 이미 이루어진 천지공사를 확인하면서 상생의 천지 대도에 동참한다. 이를 통해 바로잡힌 신도로써 무자기의 양심을 회복한 초월 소통으로 모든 일이 일상에서 원만하게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꾸준히 증장시킨다. 대순사상 삼요체 무위이화 철학 차원은 초월소통을 이루는 성경신을 일상으로 살린다. 교리적 차원에서 무자기의 양심을 지켜가고, 철학 차원에서 무위이화 방식의 상제 덕화로 일을 풀어감으로써 신심을 돈독히 유지할 수 있다. 대순사상 삼요체는 초월소통에 따른 무위이화 생활화로 자신의 무자기를 판단하는 양심으로 삼되 일상성패 여부에 상관치 않으면서 초월소통으로 일관하게 상제신앙을 무자기(毋自欺)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한다.
동학 인내천에서는 도성입덕의 윤리 차원과 수심정기의 법적 차원을 제시함으로써 ‘본래 마음을 잘 지키고, 각자에게 주어진 기를 바르게 실천하는’ 내면소통 주문을 이어간다. ‘본래 마음’은 하늘로부터 품부(稟賦)를 받은 마음으로, ‘잘 지키는 것’은 내면소통을 위한 주문과 심고(心告)로서 실천한다. 수심정기를 행할 때 내면소통 주문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이다. 경건하게 한울님 모시는 주문을 활용함으로써 지기(至氣)로서 내면으로 소통하며 한울님이 기화(氣化)한 자아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성경신으로 믿으며 ‘만사형통을 기원한다.
말하기를 ‘나에게 신령스런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모양은 태극(太極)이며, 또 다른 모양은 태극이다. 나의 이 신령스런 부적을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구하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상제 위하도록 가르치면 너 역시 길이 오래 살고 세상에 덕을 펴게 되리라’52)
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았다. 동학의 영부는 음양대대(陰陽待對)를 이루는 태극의 ‘이(二)’와 ‘음양중(陰陽中)’ 통일을 이루는 ‘궁궁(弓弓)’ 삼(三)이 내면소통 묘합으로 작용한다. 이(二)와 삼(三)은 일종의 ‘한’의 묘합(妙合)으로 내면소통 무궁 조화를 일으킨다고 믿는다. 특히 이(二)와 삼(三) 사이에 알 수 없는 ‘불연기연’(不然其然) 묘합이 작용함으로 영부를 믿는다. 아울러 음양대대(陰陽待對) 인식 질서가 ‘유(有)’의 태극이라면, 음양대대로 인식할 수 없는 미지 세계는 ‘궁궁’의 무극(無極)이다. 동학의 ‘궁궁’은 예측하기 어려운 미묘한 무극으로서, 신명의 대도를 내면소통으로 살려서 조화 세계로 이어간다.
이처럼 내면소통 조화를 이루어 동학은 영성 세계를 펼친다. 수운의 조화 세계도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조작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며, 주문의 내면소통 조화는 음양화합 ‘충화지기(沖和之氣)’이다. 천지, 귀신, 음양의 ‘무위이화’(無爲而化) 인내천이 이루어지기에 동학의 지상천국을 이 땅에 열고자 염원한다. 동학 선경은 현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믿기에, 한울님 덕은 천지의 합덕(合德)으로 드러난다.
또한 해월은 양천주를 통해 삼경 사상을 표방하였는데, ‘삼경’은 ‘경천(敬天)’, ‘경인(敬人)’, 그리고 ‘경물(敬物)’이다. 공공인격 함양에서 경물(敬物)이 그 꼭짓점을 이룬다. ‘경물’에서 ‘물’(物)은 생명을 살리는 한의 ‘물적 존재(物的 存在)’를 말한다.53) 동학 한울님은 타계의 초월 존재가 아니며, 신명의 빛을 통해 내면소통으로 비추는 명암상통(明暗相通)의 ‘영성 인본주의’로 작용하기에 인간존엄에 대한 믿음을 표방한다. 동학 한울님은 인간 내면에 내재하면서 만물을 감싸는 포월(包越)의 존재이다.54) 존재론적 불안에서 신명을 지향하고, 타락한 자기 본위에서 벗어나 성경신 내면소통으로 인간존엄을 회복하려는 뜻이 인내천에 담겨 있다.
내면소통으로 말미암아 성경신이 지극하고 신명계가 감응함으로 성의를 다해 성경신에 충실하고, 초월소통에 따른 천지신명 가호까지 받는다. 동학에서 인간은 내면 성품으로 한울님을 섬기기에 하늘처럼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알아차림을 중시한다. 동학의 인간존엄은 ‘공과 사’의 갈등 문제를 질서와 혼동의 상반상생(相反相生)으로 아우르기에, 이질 변수를 매개하는 진폭이 크게 나타났다. 신명계·인간계 매개의 교호작용은 내면소통으로 증폭되어 현상 변화를 수반한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해월신사법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事人如天)’. 여러분들을 보니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가 많으니 한심한 일이요.55)
인간존엄은 동학 인내천과 대순사상 삼요체 사이에서 삼투연동을 이루어 타자를 배려하며 자타의 공공행복을 중시하고, 상호 호혜 실천을 가능하게 하였다. 역사적으로 동학사상은 ‘참동학’의 대순사상으로 이어지면서, 동학 신자 간에 회자되었던 ‘대선생(代先生)’의 참 모습이 제대로 드러남으로써 양자 사이 이질감을 극복하고 삼투연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내면소통 인간존엄은 초월소통 인존사상과 활연관통함으로 내면과 초월은 그 이원적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존엄의 궁극 이치를 살릴 수 있게 된다. 역사적으로 1860년 음력 4월 5일, 수운은 경이로운 천상문답(天上問答) 영성 체험을 하였는데, 『전경』에서는 동학의 천상문답에서 언급한 상제가 구천상제 자신임을 이렇게 밝혔다. 내면소통 지기(至氣)는 초월소통 당체(當體), 상제와 만남으로 삼투연동에 따른 인간존엄 가치를 이 땅에 구현한다.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56)
Ⅴ. 맺음말
동학 인내천은 시천주, 양천주를 통해 한울님을 모시고 한울님을 양육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으며, 체천주에 이르러 한울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려는 목표를 설정, 이 땅에 한울님 나라를 세우고 펼치는 동학 길이 되었고, 그것이 인간존엄 구현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1860년에서 1905년까지 45년 동안, 동학 염원이 상제 천지공사 9년에 집약되어 수평적 음양합덕(陰陽合德) 경지, 수직적 신인조화(神人調和) 경지로 나아가 세계의 묵은 원한을 해소하고 함께 서로를 살리는 해원상생(解冤相生) 단계에 이르러서 인존시대(人尊時代)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는 공사(公私)가 공공(公共)으로 회통하고 상생하는 천지공사 완수 단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는 내면소통과 초월소통도 원만하게 영성으로 회통한다. 이에 상제께서도 시천주 염송이 헛되지 않음을 이렇게 밝혔다.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57)
신명과 인간은 내면소통으로 긴밀한 ‘상추상응(相推相應)’ 관계를 형성한다. “마음이란 귀신에게 있어서 추기요 문호요 도로이다. 추기를 여닫으며 문호를 들락날락하며 도로를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신이다.”58) 내면소통은 상제 신앙에서 나타나듯 초월소통으로 이어지면서 명암상통을 이루어 영성으로 회통한다. 동학 양천주에서 강조한 인간존엄, 대순사상의 성경신 삼요체에 따른 인존시대 구현이 영성 회통 단계에 이르러 내면소통의 음양합덕뿐만 아니라 초월소통의 신인조화로까지 그 외연을 넓혔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순사상 삼요체는 동학 성경신을 포용하고 확장하였다. 결국 동학 인내천과 대순사상 삼요체는 인간존엄 구현으로 천부경 ‘한’의 영성 작용에 근거하여 상관으로 삼투연동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