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현대의 문명은 인간실존의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이는 현대문명의 본질이 물질적 가치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모든 현실적 가치의 기준은 물질성이며, 물질성이 추상화된 표준은 바로 자본이 된다. 자본은 결국 돈(금전, Money)이다. 우리가 고귀한 존재 또는 존엄한 가치라고 믿어 온 정신적 활동 그리고 영혼의 위안과 안식(安息) 등은 물질적 가치의 획일화라는 도도한 물결에 씻기어 간다. 철학적 사유의 지평에서 보자면, 정신적 요소들과 물질적 요소들이 일원적인 관계이든지 이원적 관계이든지 상관없이 두 요소의 영역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문화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이 두 영역의 조화와 균형이 깨지면 사람은 소외(疏外)를 경험하게 된다. 소외는 인간 존재가 지니는 근원적 의미의 상실과 연관되며, 사회·문화적 기제(機制)에서는 개체의 중독현상으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므로 중독의 현상은 근원적으로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생을 정합적으로 탐구하는 철학적 차원의 이해를 요구한다.
중독의 의미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문화적 배경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분류가 가능하다. 통상적인 어휘 사전에 기초하여 중독이 지닌 의미를 분류하자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1) (1) 기본적 의미로서, 음식물이나 약물 따위의 독성으로 인해 신체에 이상이 생기거나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사인(死因)으로 수은 중독을 지적하는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2) 사회적 의미로서, 술이나 마약 따위를 계속적으로 지나치게 복용하여 그것이 없이는 생활이나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박과 술에 중독이 되어 사회적 삶을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3) 사상적 의미로서,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샤머니즘을 신봉하여 무격(巫覡)의 주술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합리적 판단을 상실하거나, 인터넷 게임과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심신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해 온 인간의 삶은 획일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 역동적 양상들을 보인다. 그러므로 역동적 삶이 빚어내는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유형의 중독 사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한 유형의 중독 현상이 있다하더라도, 모든 유형의 중독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원리적(原理的)”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균형의 일탈(Off-Balance) 또는 조화의 상실(Loss of Harmony)이다. 한자문화를 공유하는 동양의 사유전통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도가철학은 자연과 인간의 건강한 생명성이 유지되는 것이나, 사회·문화의 역동적 전개 과정에서 유지되는 건전함은 여러 가지 관계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균형과 조화(balance and harmony)”를 유지하는데 달렸다고 주장한다. 이런 도가철학의 사유의 전통 맥락에서, 본고는 중독 개념에 대한 철학적 이해·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중독 현상의 ‘도가철학적 해석’에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중독”에 대한 철학적 숙고·해석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지만, 의학적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이해와 해석을 시도하지 않는다.
Ⅱ. 중독을 관조(觀照)하는 법 : 질병(疾病)과 약(藥)의 이중성
사회적 병리현상으로서 중독은 사회적·병리적 치유(治癒)의 대상이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회적 규범에서 일탈의 행동으로 규정하는 대표적인 병리현상이 “알코올, 마약, 도박, 인터넷” 중독이다. 중독은 중독에 빠진 당사자의 삶을 파괴하고, 중독자의 가족과 주변 인간관계를 파괴하며, 더 나아가 중독자가 살아가는 사회와 세상을 파괴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건강한 지속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사회는 중독의 병리현상을 관리하고 치유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대의 병원 탄생과 관련이 있으며, 가까이는 중독을 치료하는 다양한 시설과 인력의 양성에 연관된다. 현대의 문명국가는 중독이라는 병리현상이 사회에 끼치는 엄청난 부정적 효과를 충분히 인식하기 때문에 질병의 치유 뿐만 아니라 복지(福祉)의 차원에서도 치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한다. 즉 중독의 병리현상을 위한 전담 사회복지 시설을 구축하고, 중독 관련 업무에 특화된 인력을 양성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노력들은 중독을 병리적 관점의 질병으로 인식하는 현대의학의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중독을 대처하는 국가·사회적 대응의 기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병리현상에 대하여 의학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시도이다. 그리고 병리현상이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여 사회·문화적 대응을 마련하는 행정적 접근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는 병리현상이 지닌 의미와 기제(機制)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관조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중독은 사회적 규범과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므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중독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시도한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다. “중독은 구성의 산물이다. 들뢰즈는 관계적 힘의 구성을 반복해서 발생하는 차이의 역량으로 풀어낸다. 중독은 시간의 차원에서 반복의 힘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독의 발생적 원리는 관계적 힘들이자 차이소들을 만들어내는 어떤 마주침에서 찾을 수 있다.”2) 들뢰즈의 관점은 중독의 병리현상을 후기-구조주의 철학의 지평에서 관조하는 사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의 존재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 맺는 관계적 그물망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차이의 요소들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삶의 변형된 한 모습으로 중독을 해명할 수 있다. 들뢰즈에 의해서 중독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길이 열린 것이다.
본래 고대 그리스 철학의 효시가 되는 탈레스(Thales)는 우주의 모든 생명이 생멸(生滅)의 현상을 지속하는 원리·실재를 “물(water)”에서 찾았다.3) 탈레스는 그리스 자연철학의 창시자이며 천문학과 물리학 그리고 수학 등에 조예가 깊었다. “만물의 원리는 물이다. 모든 개별자들은 물에서 나오고, 물로 돌아가는 순환을 지속한다.”4)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우주자연과 만물의 변화현상을 설명하면서, 조화와 균형의 원리로 운동하는 물의 순환 현상에 주목하였다.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우주와 생명의 현상을 이해할 때 정적(靜的)인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生滅)의 운동을 지속하는 동적(動的)인 존재의 현상을 탐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철학의 원리에 보조를 맞추면서 고대 그리스의 과학이 발전한다.
인간의 질병을 연구하는 의학의 분야에서도, 고대 그리스 의학자들은 질병의 고정·불변적 본질을 탐구하기 보다는 병리현상의 역동성과 일탈(逸脫)의 성격에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자면,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저술과 그의 치료에 나타나는 그리스의 의학의 모습은 존재론적이 아니라 동적(動的)이며, 국소적이 아니라 총체적인 질병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피지스)은 인간의 내부나 외부에 관계없이 조화와 균형이다. 이러한 균형과 조화의 파괴가 질병이다. 이러한 경우 질병은 사람의 안에 있는 어떤 부분일 수 없다. 이러한 질병은 인간의 모든 부분에 깃들어 있고 인간 자체이다.”5) 이런 의학적 관찰에서 질병에 대한 접근법이 형성되는 것인데, 질병을 이해하는 관점이 바로 자연철학의 우주적 지평과 연결되어 있다. 더 나아가 “질병은 단순히 불균형이나 부조화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체의 새로운 균형을 얻기 위한 자연의 노력이다. 질병은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화된 반응이며, 유기체는 치유되기 위하여 질병을 만든다. 치료는 쾌락주의적 반응과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치료의 반응을 수용하고 필요하다면 이를 강화해야 한다.”6) 유기체로서의 생명이 자기치료의 일환으로 쾌락적 요소를 치료의 수단으로 도입할 수 있고, 이는 자연스럽게 중독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중독은 일종의 병리현상이다. 중독이 사회적 병리현상이거나 의학적 병리현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중독에 대한 이해와 해소방안을 마련하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시도한다. 이 때 병리현상을 관조하는 인식(認識) 또는 처방(處方)의 태도는 상이할 수 있다. 중독의 현상을 우주자연의 생명현상 원리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임상의학의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치료할 수도 있다. 질병의 원인을 유기체적 원리를 고려하여 생명현상의 일탈과 병리현상으로 접근하지 않고, 환자의 현재적 상황에서 표면에 나타난 증상만을 관찰하고 즉자적으로 대응하여 치료할 수도 있다. 예컨대, 고열의 환자가 병원에 들어왔을 때, 어떤 의사는 기계적으로 해열제를 투여하거나 얼음주머니를 사용하여 열을 내리게 할 수 있다.
한자문화권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한의학은 대체로 기화론(氣化論)이라는 일종의 유기체적 우주관을 공유한다. 우주는 기(氣)의 운행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만물의 한 종에 속하는 인류도 근본적으로 기적(氣的) 운행의 범위 내에서만 기능을 발휘하는 개별자들이며, 총체적으로 보자면 우주자연의 일부이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고대의 자연과학은 의학, 천문학, 철학 등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7) 동양의학의 근본 원리를 정초(定礎)한 책이 『황제내경(黃帝內經)』인데, “『내경』은 의학이론 뿐만 아니라 진한시대의 천문학, 역법, 기상학, 지리학, 심리학, 생물학 등 여타 과학 분야의 내용을 풍부하게 기록하고 있다.”8)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한의학에서 질병을 이해하는 방식은 단독적 실체가 아니라 유기체적 전체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중독의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예컨대, 우주의 변화과정이 지속하는 역동적 과정에는 일종의 일관된 규칙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리듬(Rhythm)”이다. 이 리듬을 음악에 적용한 것이 동양 음악의 운율(韻律)이다.9) 우주의 운행은 일정한 리듬을 타고 있어서 유연하고 막힘없이 변화 과정을 지속한다. 이런 리듬은 우주자연의 총체적 진리를 표현하는 궁극적 개념인 도(道)에 포괄된다. 인간의 신체도 생명현상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리듬을 지닌다. 이러한 리듬이 심장박동이나 숨 쉬는 호흡의 균형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생체적 리듬이 깨지면 질병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10) 한의학의 시각에서 생명의 근원은 원기(元氣)이며, 기(氣) 자체가 생명현상의 동력(動力)이다. 원기는 바로 진기(眞氣)이다. 한의학의 기초이론에서 볼 때, 원기는 선천지기(先天之氣)·호흡지기(呼吸之氣)·수곡지기(水穀之氣)의 세 종류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심신(心身)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세 가지 기로 이루어진다.
진기는 우주자연에서 부여 받는 것이며, 곡기(穀氣)와 함께 신체에 가득 찬다.11)
선천지기는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지니게 되는 기이고, 호흡지기는 대기의 공기를 마시면서 얻게 되는 기이며, 수곡지기는 물과 곡식 등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기이다. 원기는 다시 정(精)·기(氣)·신(神) 등으로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다. 한의학의 시각에서 볼 때, 질병이란 신체를 이루는 기운(氣運) 또는 생명현상의 균형이 일탈하는 것이며, 이는 원기의 운행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지평에서 볼 때, 질병의 현상은 동일한 한의철학의 원리에 입각해서 볼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조화와 균형의 일탈 현상이다. 그러므로 “질병(疾病)과 정상(正常) 또는 병리(病理)와 생리(生理)”는 존재론적 단절성이 없는 근원적 하나의 운동 양태일 뿐이다.
질병 현상이 있으면 치료도 가능하다. 현대의학의 질병체계에서 볼 때, 질병의 치료라는 것은 실체적 존재자로서의 질병에 대한 병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상응하는 치료약을 투여하여 해결하는 것이다. 중독의 현상을 실체적 존재자로서의 질병으로 여긴다면, 역시 흡연 중독과 같은 어떤 하나의 중독현상에 맞는 해약(解藥)을 투여하고자 할 것이다. 현대의학의 고도화된 기술과 수준을 한마디로 폄하할 수는 없겠다. 우리의 관심은 질병을 관조하는 일종의 한의철학의 원리·성격이다. 약(藥)은 그리스어 파르마콘(Pharmakon)과 같다. 그러나 파르마콘은 영구불변의 실체적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파르마콘 즉 약은 양약(良藥)과 독약(毒藥)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파르마콘은 양가적(ambivalent)이다.”12)
예컨대, 우리나라의 자생식물 중에 부자(Ranunculaceae, 附子)가 있다. 이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식물이며, 주로 약용으로 쓰인다. 시골에서 일반인들이 소화성 궤양이나 신경성 위장염의 증상이 있을 때, 이 풀을 달여 먹으면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초이다. 그러나 이 풀은 음허(陰虛)하거나 열증(熱症)이 있을 때는 복용을 금지해야 한다. 부자라는 풀 자체가 열증을 증폭하여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등 독약 또는 해약(害藥)으로서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약과 독약은 본질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병리현상이 보이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질병 자체가 불변적 본질이 없는 일련의 생리(生理) 현상일 뿐이다. <파르마콘>으로서의 약은 고정불변의 특효(特效)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Ⅲ. 중독을 보는 도가철학의 관점
도가철학은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우주론처럼 일종의 유기체적 기화론(氣化論)에 기초해 있다. 우주자연 속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기의 운동으로 이루어지는 우주변화의 과정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주자연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태도에서 볼 때, 도가는 우주자연의 본질에 대한 질문보다 우주자연의 운동 또는 기능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도가철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자연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쓸모가 없다. 그냥 “우주자연은 어떻게 변화하고 운동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고, 답을 구하며, 그 모습을 닮아가는 인생을 추구할 뿐이다. 도가철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중독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중독 현상의 변화와 운동과정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질문이 앞선다. 이런 태도가 중독을 보는 도가철학의 관점이다.
도는 일기(一氣)를 생성하고, 일기는 음양(陰陽)을 생성하고, 음양은 화기(和氣)를 생성하고, 화기는 만물을 생성한다. 만물은 음기를 업고 양기를 안아서, 충기(冲氣)로서 조화를 이룬다.13)
인간의 생명은 기가 모인 현상이다. 기가 모이면 생명 현상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주자연은 통틀어 하나의 기라고 하는 것이다.14)
도가철학은 중독의 주체인 “자아의 해체”를 시도한다. 우주자연의 운행 변화라는 큰 시각(BIg view)에서 볼 때, 인간의 자아는 고정불변의 본질이 없다. 우주자연의 운행을 설명하는 기화론(氣化論)의 맥락에서 인간은 “기의 취산(聚散)”으로 생사(生死)의 현상을 일으켰다가 그냥 사라지는 일시적 흔적(痕迹)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독 자체도 본질적 실체가 없는 일시적 흔적일 뿐이다. 인간의 생명 현상은 우주자연의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현상과 동일하다. 그러나 우주론적 지평에서 보거나, 또는 천문학적 숫자로 150억 년의 긴 세월 선(線)상에서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실존적(實存的) 고뇌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 국한해 볼 때, 피와 살이 생생하게 경험하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실존적 현실이 이념적 본질보다 앞서는 것이다.
인간은 하루하루 분망한 일상(日常) 속에서 수많은 욕망을 일으키며 살아간다. 노자와 장자가 욕망의 허망함을 아무리 지적해도 욕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욕망 자체가 우주를 추동하는 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욕망의 실상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도가철학이 내세우는 욕망의 법칙은 과욕(寡欲)이다. 이기적 욕망은 늘 생명 현상의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소박함을 유지하고,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망을 적게 해야 한다.
성스러움과 지혜를 끊어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된다. 인의를 끊어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도와 자애를 회복한다. 교사함과 이익을 끊어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이 세 가지는 문명의 꾸밈일 뿐이라 부족하다. 그러므로 돌아갈 곳이 있게 해 두어라. 있는 그대로 소박함을 유지하고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망을 적게 하라.15)
문명의 과잉은 인간의 욕망도 과잉으로 이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성스러운 가치를 고원(高遠)하게 설정해 놓고 사람들에게 저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경우 사람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면 안 된다. 본래 높고 낮은 경지는 상대적인 것이지, 가치의 우열로 등급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고하상경(高下相傾)”16), 즉 높은 것과 낮은 것은 서로 의존하여야만 성립할 수 있는 대대(對待)의 관계이다. 그런데 높은 것이 낮은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지닌다고 왜곡이 되면 욕망의 일탈이 시작된다. 이념적 가치는 언제나 자연의 균형성을 깨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성스러운 세계와 세속적 세계가 대립하면서, 성스러운 세계를 고귀(高貴)한 것으로 차별화하는 순간 인간의 자연성은 균형을 잃는다. 균형을 잃으면 타자(他者)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사회적 병리현상이 생기게 되는 기제가 바로 이것이다.
작은 지식은 큰 지식에 미치지 못하며 짧은 생년은 큰 생년에 미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까닭을 아는가? 조균(아침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며, 혜고(씽씽매미)는 봄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짧은 생년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것이 있는데, 오백세로 봄을 삼고 오백세로 가을을 삼는다. 상고에 대춘이라는 것이 있는데, 팔천세로 봄을 삼고 팔천세로 가을을 삼는다. 그런데 팽조는 오늘날 오래 사는 것으로 특별히 소문이 나서 뭇 사람들이 그 팽조에게 수명을 견주고 있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17)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여 부유한 자가 더 고귀한 인생이라고 강조하면서 왜곡된 가치관을 수립하는 순간 인간은 부(富)를 추구하는 왜곡된 욕망에 휩쓸린다. 지식을 축적한 자와 지식의 축적을 이루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지식의 축적을 많이 이룬 자가 더 고귀한 지위를 얻게 하면 사람들은 지식의 축적에 지나치게 매진하게 된다.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지위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열등감과 의기소침의 상태로 전락한다. 이념적으로 왜곡된 가치체계의 해악(害惡)은 인간의 생명이 지닌 자연성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노자와 장자는 이념적 장치에 매몰된 인위적 가치의 노예로 살지 말고, 자연성이 살아 있는 소박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견소포박(見素抱樸)”의 실천 원리이다.
성(聖)과 속(俗)의 존재론적 단절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세계가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가지며 가치 지향적 세계로 존재한다고 여기면, 사람들은 저절로 이념의 노예로 전락한다. 성스러움에 대비하여 세속적 삶을 살거나, 지식이 넘실대는 곡학아세(曲學阿世)에 대비하여 무식한 촌부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충의(忠義)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영웅지사 대비하여 식당의 요리사로 연명하는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열패감(劣敗感)을 갖게 된다. 이런 열패감은 사회·문화적 삶에서 뒤처지거나 도태되고 있다는 실존적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이라는 이념이 사람의 건강한 생명성을 해치는 기제와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가철학은 이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허(虛)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여. 만물이 함께 생장하는 곳에서, 나는 순환의 이치를 본다. 무릇 만물은 풀처럼 쑥쑥 자라지만 각자 모두 근원으로 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것을 또 제 명(命)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제 명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常)이라 하고, 상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하니, 명을 모르면 망령되게 흉한 짓을 저지른다. 상을 알면 포용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하면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린다.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면 하늘에 부응하고, 하늘에 부응하면 도에 부응한다. 도에 부응하면 영원할 수 있다.18)
도가의 세계관에 기초해서 볼 때, 인위적 가치체계의 과잉은 욕망의 일탈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생각을 비워서 겸허(謙虛)에 이르게 하면 욕망의 불꽃이 잦아든다. 욕망의 발흥이 가라앉으면 심신의 평안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욕망이 치솟으면 욕망의 일탈로 나아간다. 욕망의 일탈은 사회적으로 건강한 욕망이 균형과 조화를 잃는 것이다. 욕망이 균형과 조화를 잃어가면서 발생하는 병리 현상의 하나가 중독이다. 사람들이 중독의 길로 빠지는 원인의 기저(基底)에는 문명의 “이념적 과잉”이라는 기제가 작동한다. 그러므로 중독을 치유하는 길은 우주자연의 이법(理法)대로 무심(無心)하게 살아가면서, 생명 현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건강한 욕망을 회복하는 것이다.
Ⅳ. 도가적 한의철학의 지평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듯이, 동양의 한의학에서 가장 좋은 의사는 병이 생기기 전에 치유하며, 그 다음 수준의 의사는 막 병이 생기려 할 때 치유하고, 가장 낮은 수준의 의사는 이미 병이 난 뒤에 치유한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저명한 한의사인 허준(許浚)은 『동의보감』을 편찬하면서, “그 질병을 치유하려면, 먼저 그 환자의 마음을 치유하라.”19)고 설파하였다. 여기에는 인간의 신체와 우주자연은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도가의 일원적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주자연의 법칙인 도(道)가 인간의 병리현상인 질병을 치유하는 의학의 원리와 일치하게 된다. 이것을 한의철학의 명제로 정식화한다면, “도(道)로써 병리를 치유한다.(以道療病)”라고 할 수 있다.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길은 자연법칙에 순응(順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길을 가는 삶이다.
자연과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한자문화권의 사유방식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기화론적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은 서로 감응하며 관계를 지속하는 상응(相應)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을 우주자연의 큰 틀에서 보자면 당연히 우주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종(種)의 차원으로 보면, 인간과 인간 이외의 자연사물 사이에는 인식(認識) 차원의 구별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인간은 자연과 서로 교응(交應)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관계를 전통적으로 “천인감응(天人感應)”이라는 명제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모습을 닮는다.”20) 인간의 생명 현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생리현상과 병리현상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할 때 원만한 삶의 현상으로 기능하면서 영위되어 갈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중독과 같은 병리현상이 저절로 순치(順治)된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질병에 대처하는 도가적 풍격(風格)의 일단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目昏思寢即安眠, 눈이 어두워지니 잠을 자면 편안하고,
足軟妨行便坐禪. 발이 쇠약해 다니기 어려우니 좌선을 하네.
身作醫王心是藥, 몸은 의사요 마음은 약이니,
不勞和扁到門前. 이름난 의사인 의화와 편작을 부를 필요 없네.21)
병리와 생리는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질병을 치료하는 영단묘약(靈丹妙藥)은 없다. 질병을 관리하여 정상적 균형을 회복하는 요체는 바로 몸과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눈이 어두워지고 정신은 혼미해져 가는 일은 인생의 여정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이런 자연의 이치에 저항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조급한 마음을 가질 것도 없지만, 지나친 우려를 품을 일도 아니다. 눈이 어두워지면 잠을 자기 편안하고 흉물스러운 몰골들을 보지 않아서 좋다. 다리에 힘이 없어지면 편안히 않아서 인생을 반추하고 우주자연의 이법을 헤아려 보면서 우주자연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자잘한 병리현상이 나타난다 하여도 의화나 편작 같은 천하제일 명의가 필요 없어진다. 내 몸과 내 마음이 우주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는 삶, 이것이 바로 최고의 의사요, 신묘한 처방이며 명약이다. 이런 경지에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는 사회적 소외나 문화적 고독으로 인한 괴로움이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중독과 같은 병리현상은 끼어들 틈이 없다. 동양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마음은 한 몸의 으뜸이 되는 기관이다.22)
모든 질병은 마음에서 생겨나고, 마귀(魔鬼)도 마음에서 일어난다.23) 마(魔) 또는 마귀란 마음의 혼란 상태이며, 이는 균형과 조화를 잃은 상태의 중독과 같다. 동양사상에 입각한 한의학의 생태학적 원리는 근본적으로 무위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삶에 기초한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할 때 가장 안정된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 이때 자연법칙의 모습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을 이루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계절의 순환과 밤낮의 변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나타나지만, 한 순간도 멈추지 않으면서, 역동적 균형을 이루며 운행한다. 인간의 신체도 역동적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가 가장 조화로운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적 사유방식의 범형을 보여주는 윤리치침서의 하나인 『명심보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사람은 생존하고, 자연의 도리에 거스르는 사람은 사망한다.24)
이 말은 “자연의 계절 법칙에 따르면 살고, 자연의 계절 법칙을 거스르면 죽는다.”25)는 의미이다. 한의학의 철학적 원리는 우주와 인간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인데, “과잉(過剩)”은 조화와 균형을 깨는 병리적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과잉은 인간에게서 질병을 야기(惹起)한다. 더 나아가 인간 욕망의 과잉은 자연의 파괴(기후변화)를 야기하고, 자연과 인간의 불균형(질병) 현상으로 나타난다. 인체 내부의 여러 가지 조건들은 인체 외부의 자연환경과 미묘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이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병리현상이 나타난다. 우주의 총체적 균형과 조화를 우선시하는 사유는 만물이라는 개별자들의 자가성(自家性) 또는 주체성(subject)을 지워버리는 사유이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지만, 자신을 아는 자는 현명하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세지만, 자신을 이기는 자는 강건하다.
만족을 아는 자는 부유하지만,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는 뜻이 있다.
자기의 바른 자리를 잃지 않는 자는 오래가고,
몸이 죽어도 완전히 썩어 없어지지 않는 자는 장수한다.26)
자기의 아상(我相)을 고집하고 무위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는 자는 자기의 바른 자리를 잃게 되므로 오래 갈 수 없다. 우주 만물은 개체의 영원불변한 자아를 유지할 수 없고, 오직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타자와 관례를 맺으며 일시적 현상으로서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가, 바로 다른 형태로 변화해 가는(transforming) 과정적 존재이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어떤 개체들도 영원불변의 자아를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주 만물은 개별적 자아를 넘어서 우주적 자아로 확장될 수 있다. 개별적 자아는 없어지지만, 우주적 자아로 합일되는 지평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와 타아는 배타적 차별성을 지우고 총체적 일원성으로 합일하는 것이다. 정상과 병리 또는 생리와 질병의 이분법적 분리도 양자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우주적 지평에서 볼 때, 정상적인 현상과 병리적인 현상은 존재론적 차이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운행에서 역동적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부른다. 우주자연의 질서는 무의지(無意志)·무목적(無目的)의 특성을 지닌다. 저절로 움직이는 내재적 동력(動力)에 의해 운행하는데, 우주자연의 운행이 지속되어 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미학적 용어가 신운((神韻; Cosmic Rhythm)이다.27) 운(韻)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매개의 개념이 된다. 세상은 균형과 조화의 운율(韻律; Rhythm)대로 출렁이며 흘러간다. 사람의 생명도 균형과 조화를 따라서 오고[生] 갈[死] 때가 가장 좋은 상태이다. 인간사회에서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원인 중의 하나가 소외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법은 만병통치의 알약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주자연과 같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다. 병리현상을 관조하는 한의철학의 원리에서 볼 때, 병리현상이 난무하는 인간의 세상은 내 마음대로 고치거나 조작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오히려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이 옳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 생명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 살 수 있는 복지사회를 이루거나 평등한 세상을 향한 인간적 여정(旅程)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욕망이 과잉되어 병리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중독과 같은 병리현상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균형과 조화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무위자연의 원리를 삶에 적용해 보라는 충고이다. 이것이 병리현상을 관조하는 도가적 한의철학의 정도(正道)이다.
Ⅴ. 결론
중독의 사회적 폐해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알코올중독은 폭력과 자포자기로 인해 가정을 파괴하고 직장과 사회윤리의 질서를 붕괴시킬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중독은 각기 사회적 폐해를 낳는 부작용이 있다. 도가철학은 우주자연을 저절로 운행해 가는 일종의 “우주적 풍랑(風浪)”으로 본다. 이런 우주적 풍랑 속에서 영구적인 본질을 유지할 수 있는 개체는 없다. 중독이라는 병리현상이 아무리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어도, 그것은 지금 당장 공고하게 응어리져 있는 일시적 흔적일 뿐이다. 언젠가는 봄날의 햇살 아래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모든 병리현상은 생리적 균형의 일탈일 뿐이다. 우주자연의 운행이 쉼 없이 지속되듯이, 생명이 지속적 활동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면 중독과 같은 병리현상은 저절로 치유된다.
영원불변의 개체와 영원한 개별적 현상은 존재할 수 없다. 인간 세상의 선악(善惡)도 순수한 선과 순수한 악으로 이분할 수 없다. 선과 악은 서로 기대고 있는 우주적 현상의 일환일 뿐이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햇빛은 더없이 고마운 기운이지만, 한여름의 뙤약볕을 피하는 사람의 심정이 되면 가증스러운 불빛으로 여겨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구의 에너지 원천인 태양의 빛도 때로는 과하면 독이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Co-vid 19)의 창궐이 3년 간 지속되면서 일상의 곳곳에 생활소독제가 비치되었다. 세균을 죽이기 위하여 뿌리거나 바르는 손소독제의 사용 빈도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소독제는 넓은 범위에서 보면 화학물질이면서 독약이다. 현재 바이러스의 위험을 막는 차원에서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소독제의 위험성은 유용성만큼이나 적지 않다. 무턱대고 소독제의 사용 빈도를 늘려 가면, 소독제의 위험성이 현실적 유용성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도가철학은 이 지점에서 균형점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역동적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아야 지속가능한 상황이 이어진다. 파멸을 막는 길은 균형과 조화의 원리를 준수하는 것이다. 지구의 기후위기는 곧 지구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위기이다. 이것은 지구가 자정(自淨)의 작용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스스로 자기의 정화와 조절 능력을 발휘하면 해결될 문제이다. 그러나 이미 지구 공동체가 우주자연의 질서 속에서 함께 운행하는 자기 균형과 조화의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인간 개개인의 차원에서도 자정의 생명 현상이 지속가능하도록 자기의 정화와 조절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약화되면 병리현상이 발생한다.
중독과 같은 병리현상은 실제로는 실체적 본질이 없다. 다만 삶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병리적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서 중독의 현상이 조금씩 심화되어 질병의 현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어떤 계기나 인연에 의하여 조금씩 쌓여 견고하게 굳어진 일종의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결코 영원한 본질이 있는 악의 표상이 아니다. 이런 이치를 자각(自覺)하는 순간 그런 병리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도가철학의 처방은 단호하다. 욕망의 일탈이 바로 병리현상을 일으킨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그러므로 과(過)와 불급(不及) 사이의 균형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원리의 자각과 실천 속에서, 결국 병리적 중독 현상과 같은 모든 시름은 우주변화라는 대화(大化)의 풍랑에 씻기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