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이 글은 대순사상에서 인심과 도심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선·악이나 공·사 등의 가치론적 차원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는 주로 유학과 불교에서 이루어졌는데, 인심·도심의 문제는 유학 전통에서 중요한 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인심·도심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16자를 주자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유학의 도통(道統) 전승과 연관된 요결로 언급함으로써 수양의 심법(心法)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남송(南宋)의 진덕수(眞德秀)가 심(心)·성(性) 수양에 관한 여러 격언을 모아 편찬한 『심경(心經)』 첫머리에 이 16자를 배치했다는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후로 인심·도심의 개념과 가치론적 해석을 비롯한 구체적인 수양 방법론에 대한 여러 논설이 전개되었다. 이는 인심·도심이 도덕 실천력 강화를 위한 수양 공부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대순진리회 소속 도인들의 생활 지침을 명시한 『대순지침』의 “수도는 인륜을 바로 행하고 도덕을 밝혀 나가는 일인데 이것을 어기면 도통을 받을 수 있겠는가.”1)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순진리회는 도덕 실천을 기본사업(포덕·교화·수도) 가운데 하나인 수도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규정하고 있다. 당연히 개인의 사적 영역을 위한 욕구라 할 수 있는 인심과 공공(公共)의 가치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공적 욕구라 할 수 있는 도심의 문제도 수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주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대순사상 연구에서는 인심·도심이라는 주제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 같다.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대순사상의 심성론에 대한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인심·도심의 문제를 대략 논하였을 뿐이다. 최치봉은 “대순사상에서 마음의 작용에 대한 논의는 주자학의 리·기의 지각과 그에 따른 도심·인심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라고 하며 “양심은 형이상의 천성을 지각한 도심을 말하며, 사심은 형이하의 형기를 지각하는 인심을 말한다.”라고 하였다.2) 『대순진리회요람』에는 마음을 ‘양심’과 ‘사심’으로 이분화하며 그 개념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는데,3) 여기에서 인심·도심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설명을 바탕으로 양심과 사심을 각각 주자학에서 말하는 도심과 인심으로 본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윤용복은 양심을 도심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나 사심을 인심으로 대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인심·도심은 유학에서도 시대에 따라 해석의 차이를 보이고 대순진리회의 교리와 부합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므로 그 개념적인 해석에 있어 어느 한 가지로 간단하게 규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4) 이 견해는 교리 전반과의 정합성을 고려하여 총체적인 차원에서 인심·도심의 개념 해석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차선근도 대순진리회의 마음관 연구를 위한 여러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로 “인간 욕망의 관점에서 양심사심론과 성리학의 인심도심론을 비교하는 문제”를 제시한 바 있다.5) 이러한 견해들은 본 연구가 왜 필요한가 하는 이유를 충분히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은 먼저 인심·도심에 대한 여러 관점과 논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대강의 역사와 더불어 그러한 전개의 흐름이 갖는 의미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대순사상의 인심·도심 문제 조명과 관련하여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유학 전통의 여러 논의를 유형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인심·도심 문제에 대한 논의는 유학 전통에서 다양하고 심도 있게 이루어졌으며, 인심·도심은 인간 보편의 마음이라 할 수 있으므로6) 유학적 차원을 넘어 대순사상으로도 충분히 확장 가능한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마지막에는 양심·사심의 문제와 결부하여 대순사상의 인심·도심 개념과 그 가치론적 해석에 대해 조명할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인심·도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이루어져 대순진리회의 마음관 이해와 이념 실현을 위한 하나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Ⅱ. 인심도심론의 전개 역사와 그 함의
문헌상 ‘인심’·‘도심’ 용어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서경』 「대우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7)라는 말은 순(舜)임금이 우(禹)에게 양위(讓位)의 뜻을 밝히며 전한 가르침이다.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학자였던 공안국(孔安國)은 이 인심도심론 속의 ‘인심’을 ‘백성의 마음(民心)’으로 해석하였다.8) 이러한 해석은 당(唐) 초기의 학자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한 공영달(孔穎達)에게로 이어진다. 다음은 이 말에 대한 공영달의 주석이다.
‘도’라는 것은 지름길이니, 사물이 따르는 바의 길이다. 그러므로 인심을 말하고 마침내 도심을 말한 것이다. 인심은 모든 고려(考慮)의 주(主)가 되고 도심은 모든 도의 근본이 된다. 군주를 세움은 사람들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다. 인심이 위태로우면 편안하기가 어려우니,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를 밝혀야 한다. 도심은 미미하니 밝히기가 어렵다. 장차 도를 밝히고자 하면 반드시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고(精),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면 반드시 뜻을 한결같이 해야 한다(一).9)
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 곧 백성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맥을 보면 ‘인심’은 ‘백성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백성의 마음은 모든 고려해야 할 사안 가운데 가장 주된 것이고, 백성의 마음이 위태로우면 백성이 편안하기가 어렵다는 의미로 읽어야 문맥이 자연스럽게 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도’는 만물이 따르는 바의 길이므로 이 도를 따름으로써 백성이 편안할 수 있다. 곧, 도는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길(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심’은 이러한 길을 모색하고 추구하는 군주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영달의 인심·도심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대우모」의 “원문을 따라 마음에 관한 논의를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 맥락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10)
남북조시대와 수(隋)·당대(唐代)를 거치며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였고 유학은 극심한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유학은 사회·국가적 윤리 확보와 사대부계층의 학문적 관심을 새롭게 유도하기 위해 그 철학적 기초를 불교로부터 수용하여 새로운 유학을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신유학이다. 신유학자들은 유학의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북송(北宋)의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이다. 정이천은 「대우모」의 ‘인심’을 ‘사욕(私欲)’ 혹은 ‘인욕(人欲)’이라 하였고, ‘도심’은 ‘천리(天理)’로서 ‘바른 마음(正心)’이라고 규정하였다.11) 인심·도심 개념을 처음으로 천리와 인욕에 연관시키며 윤리적으로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12)
한편, 정이천과 동시대의 인물인 소식(蘇軾, 호 東坡, 1037~1101)은 인심도심론을 『중용』 1장의 주요 내용과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인심’은 뭇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희로애락의 부류가 여기에 해당하며, ‘도심’은 희로애락이 생겨나게 하는 본래의 마음(本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13) 또한, 인심이 곧 도심이고 도심이 곧 인심이나 놓아버리면 둘이 되고 정밀하게 살피면 하나가 된다고 하며, 순(舜)임금의 도심과 인심은 각각 자사(子思)가 말한 ‘중(中)’과 ‘화(和)’라고 하였다.14) 소식은 도심과 인심을 감정의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상태로 규정한 것이다. 정밀하게 살핌으로써 본심인 도심이 절도에 맞게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이 이발의 화이며 순임금과 같은 성인의 인심이라고 하였다. 소식의 이러한 관점은 인심과 도심을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한 정이천과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15)
인심·도심에 대한 논의는 주자에 이르러 체계화되며 더욱 폭넓게 진행되었다. 주자는 인심·도심 개념을 비롯하여 그 발생 원인, 선·악과 관련한 가치론적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공부법 등을 논하며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화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관된 설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인심은 인욕(人欲)이며 도심은 천리라는 정이천의 개념 인식을 그대로 수용하였다.16) 18세기 율곡학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주자의 인심도심론은 인심을 사욕(私欲)으로 보느냐, 형기(形氣)에 속하여 선·악을 겸한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보느냐에 따라 초설과 후설로 구분된다고 주장하였다.17) 다음은 인심·도심에 대한 주자의 후설이라 할 수 있는 설명이다.
인심은 요·순임금도 없을 수 없고, 도심은 걸(桀)·주(紂)라도 없을 수 없다. 대개 인심은 온전히 인욕(人欲)은 아니다. 만약 온전히 인욕이라면 줄곧 재앙일 것이니 어찌 위태로움에 그칠 뿐이겠는가? 단지 굶주리면 먹고자 하고 목마르면 마시고자 하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부류가 이것이니, 쉽게 (인욕으로) 흐를 수 있으므로 위태로운 것이다. 도심은 곧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그 단서가 매우 은미(隱微)하기 때문이다.18)
여기에서 주자가 말하는 인심은 생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자 하고 마시고자 하는 욕구 및 이목구비(耳目口鼻)를 통해 지각하는 감각작용과 같은 심리적 현상이다. 도심은 사단(四端)과 같은 도덕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이 인심은 비록 인욕으로 흐를 가능성이 커서 위태로운 것은 사실이나 온전히 인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심을 인욕이라고 한 입장을 철회하고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심은 요·순과 같은 성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도심 또한 걸·주와 같은 악인에게도 존재하는 인간 보편의 마음인 것이다. 이렇게 주자는 인심·도심을 인간 보편의 마음으로 규정함으로써 도심이 주가 되게 하는 수양 공부를 강조하게 된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주자의 인심도심론에 대해 각자의 학문적 지향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수용과 비판적 계승·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논설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으로 퇴계와 율곡을 들 수 있다. 퇴계·율곡은 인심·도심 개념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주자와 인식을 같이하였다. 하지만, 인심·도심의 발생 근원에 대해서는 퇴계가 주자의 인식을 그대로 수용한 반면에, 율곡은 새로운 인식을 보이며 주자와 다른 인심도심론을 구성하였다.(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한편, 탈주자학적 학문 성향을 보인 다산 정약용은 주자·퇴계·율곡과 인심·도심 개념에 대한 인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질적으로 다른 독창적인 인심도심론을 전개하였다. 다산은 이기론 자체를 부정하며 심·성에 대한 이해에서도 주자학적 인식과 다르므로 수양론 전반뿐만이 아니라 인심도심론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심도심론의 전개 흐름을 보면 송대를 기점으로 큰 변화가 나타난다. 인심·도심을 각각 백성과 군주의 마음에서 인간 보편의 마음으로 이해함으로써 정치적인 관점에서 수양의 문제 중심으로 해석의 관점이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 주체의 변화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당대에는 황실을 중심으로 주로 소수의 문벌 귀족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며 이를 대대로 세습하였다. 하지만, 송대 이후로는 주로 중소 지주계층이 중심이 된 신흥 사대부계층이 정치의 주체가 되었다. 조선조 또한 사대부계층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인심·도심이 윤리적 실천과 관련한 수양의 문제 중심으로 해석됨으로써 점점 이론적으로 체계화되며 다양한 논설이 전개되었다. 이는 인심도심론이 정치 주체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며 수양론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Ⅲ. 가치론적 해석 유형별 인심도심론
「대우모」의 이 16자 구절에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는 사실적 논술을 통해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인심과 도심을 각각 어떻게 제재하고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유정유일’은 방법론이며, ‘윤집궐중’의 실현이 당위적 과제로 설정되어 있다. 인심·도심을 인간 보편의 마음으로 규정함으로써 점차 인심도심론은 수양의 중요 문제로 인식되며 여러 논설이 제시되었다. 이 논설들을 살펴보면 인심·도심에 대한 선·악의 가치론적 해석 문제가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였다. 도심에 대한 해석에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인심의 경우는 사욕으로 보아 악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가치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한편, 다산의 경우는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인심·도심을 각각 ‘악과 선’, ‘가치중립과 선’ 그리고 ‘예비 악과 예비 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심·도심을 각각 악과 선이라는 가치의 대립적 개념으로 인식한 경우는 정이천이 거의 유일하다. 그는 인심·도심에 대해 이론적인 체계를 갖춘 학설이라고 할 정도로 논설을 남기지는 않았다. 정이천의 ‘성이 곧 리다.(性卽理)’라는 명제를 비롯하여 그의 학문을 상당 부분 수용한 주자도 초기에는 정이천의 개념 인식과 같이 이해하였다. 다음은 인심·도심에 대한 정이천의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말과 이를 그대로 수용한 주자의 말이다.
‘인심’은 사욕(私欲)인 까닭에 위태하고, ‘도심’은 천리(天理)인 까닭에 깊고 은미하다. 사욕을 없애면 천리가 밝아진다.19)
정자(程子)께서는 “인심은 인욕이고, 도심은 천리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인심’이란 기(氣)와 혈(血)이 고르게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으로 좋아하고 즐기고자 하는 욕구[嗜欲] 등의 부류는 모두 이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위태로운 것이다. ‘도심’은 본래 부여받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이다.20)
정이천은 ‘인심’에 대해 ‘사욕’ 또는 ‘인욕’이라고 하였을 뿐, 주자처럼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21) 주자는 인심을 기와 혈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육체적인 요소를 가짐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도심은 인간이 태어나며 부여받은 천리로서의 성(性)이며, 구체적으로는 인의예지의 사덕(四德)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정이천이 말하는 인심이 주자가 설명한 인심과 같은 개념이라면, 인심은 곧 사욕이므로 이 인심을 없애야만 천리가 밝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육체를 가짐으로써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의식색의 추구와 같은 생리적 욕구 자체도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자는 후설에서 이러한 입장에 변화를 보인다.
주자 심학(心學)의 대명제는 ‘천리는 보존하고 인욕은 제거하는 것(存天理, 去人欲)’이다. ‘인심’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인욕이 아니라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리적 욕구라고 인식을 바꿈으로써 이는 주자의 정론(定論)이 되었다. 이후 퇴계·율곡·남당 등을 비롯한 조선의 주자학자 대부분은 주자의 인심·도심에 대한 개념 인식과 그 가치론적 해석을 그대로 수용하였다.22) 주자는 『중용』의 “天命之謂性”에 대한 주석에서 하늘(天)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낳을 때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리 또한 부여하니 명령함(命)과 같다고 하며, 사람과 사물은 이 리를 얻어 성(性)으로 삼았다고 규정하였다.23) 곧, 만물은 모두 리와 기의 결합이며, 인간의 마음까지도 그 결합으로 이해한 것이다.24) 인심·도심에 대한 주자의 정론을 살펴보자.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하는 것은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私)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性命)의 바름(正)에서 근원하여 지각을 이루는 근거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써 혹 위태하여 불안하고 혹은 은미하여 보기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형체를 가지지 않음이 없으므로 비록 최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도 인심이 없을 수가 없고, 또한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심이 없을 수가 없다.25)
만약 “도심은 천리이고, 인심은 인욕”이라고 말한다면, 도리어 두 개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다만 도리를 지각한 것은 ‘도심’이고 소리·색깔·냄새·맛 등을 지각한 것은 ‘인심’이니, 다툴 것이 많지 않다. ‘인심이 인욕’이라는 이 말은 병통이 있다.26)
이 두 논설에서 인심은 인욕과 구별되는 가치중립적인 마음이며, 인심·도심은 지혜롭거나 어리석음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가지는 인간 보편의 마음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자는 하나인 마음이 인심·도심으로 분기하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위에서는 마음의 지각이 혹은 ‘형기’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에 근원하여 이루어짐으로써 비롯한다고 하였다.(或生或原說) 곧, 인심·도심이 발생하는 근원의 차이를 그 이유로 본 것이다. 한편, 아래에서는 각각 지각한 것이 다름으로써 인심·도심으로 분기한다고 하였다.(知覺說) 주자는 가장 만년의 정론인 「대우모」의 주석(69세)에서도 그 분기 이유를 ‘혹생혹원설’로 설명하였으나,27) 이 두 요인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28)
여기에서 ‘형기’란 인간의 형체(몸)을 이루고 있는 기를 말한다. 배고프면 배불리 먹고자 하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몸에서 생기고 타인이 간여할 수 없으므로 ‘사사롭다’라는 것이다.29) 인간의 ‘성’은 하늘의 ‘명’으로 몸에 내재한 것인데, 이 명과 성을 가리키는 말이 ‘성명’이다. 이 성은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절대선(絶對善)이기 때문에 ‘바름’이라 한 것이며, 도심은 이 성명에 근원하므로 ‘순선(純善)’ 그 자체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므로 인심은 항상 인욕으로 흐를 개연성이 크다. 이 문제에 대해 주자는 이 두 마음의 사이를 살펴 섞이지 않게 하고(精)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 떠나지 않게 하여(一), 항상 도심이 몸의 주체가 되어 인심이 도심의 명을 듣게 함으로써 모든 언행이 저절로 과·불급의 잘못이 없게 될 것(允執厥中)이라고 하였다.30) ‘유정유일’과 ‘윤집궐중’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며, 원(元)의 학자였던 임은(林隱) 정복심(程復心)의 “어린아이의 마음은 인욕에 아직 빠지지 않은 양심이며, 인심은 곧 욕구를 지각한 것이다. 대인의 마음은 의리가 갖추어진 본심이며, 도심은 곧 의리를 지각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마음이 있음이 아니니, 실제로 형기에서 발생하면 모두 인심이 아닐 수 없고 성명에서 근원하면 도심이 되는 것이다.”31)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여기에는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주자의 지각설과 혹생혹원설이 모두 들어있다. 이는 퇴계가 주자의 이 두 가지 설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퇴계와 같이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대부분 주자의 이 두 가지 설을 모두 인정하였으나, 율곡은 지각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32)
사람의 성이 본래 선한 것은 리(理)이나, 기(氣)가 아니면 리는 발현되지 않는다. 인심·도심 그 어느 것인들 리에 근원하지 않겠는가? 이발(已發)의 때에도 인심의 싹이 있어 마음속에 리와 더불어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근원은 하나이나 흐름은 두 가지이니(源一而流二), 주자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했겠는가? 다만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이렇게 말함이니, 각각 위주로 하는 바(所主)가 있을 뿐이다.33)
율곡은 인심·도심의 발생 근원을 ‘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주자학의 ‘성이 곧 리다.(性卽理)’라는 기본 명제와 “성(性)이 발현하여 정(情)이 되고, 정은 성에 뿌리를 둔다.”34)라는 기본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율곡은 인심·도심이란 ‘정(情)’과 ‘의(意)’를 모두 겸하여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35) 정으로 인하여 의가 비롯되므로 의는 곧 정에 포섭된다.36) 그러므로 인심·도심(정+의 → 정)은 결국 성[리]에 근원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마음의 발생 근원이 ‘리’ 하나라는 것은 주자가 그 근원을 ‘형기’와 ‘성명’이라고 한 혹생혹원설과는 다르다. 율곡은 이 문제에 대해 주자의 혹생혹원설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할 방편으로 ‘형기’와 ‘성명’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곧, 혹생혹원설은 존재론적 진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로 흐르게 되는 요인은 무엇인가? 마음의 발동이 리의(理義)를 위하느냐 식색(食色)을 위하느냐에 따라 분기된다고 하여 ‘마음이 지향하는 대상’을 그 요인으로 보았다.37) 율곡은 여기에 더하여 더욱 근원적인 요인으로 성명이 마음에 자리함에서 유래한 까닭에 도심이 있고, 혈기가 형체를 이룸에서 유래하여 인심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38) 이는 ‘마음이 유래한 바’를 그 요인으로 본 것이다. 또한, “인심·도심 모두가 ‘기의 발동’인데, 기가 본연의 리에 순응하는 것이 있으면 기 또한 ‘본연의 기’이므로 리가 본연의 기를 타서(乘) 도심이 된다. 기가 본연의 리를 변화시킨 것이 있으면 또한 본연의 기를 변화시키므로 리 또한 ‘변질된 기(所變之氣)’를 타서 인심이 된다.”39)라고 하였다. 곧, ‘리를 태우고 발동하는 기의 양태’를 분기의 요인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율곡은 이외에도 마음이 발동할 때 기의 용사(用事)나 엄폐(掩蔽)의 여부에 따라 분기한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40)
이렇게 율곡은 하나의 리(성)에서 발동한 마음이 인심·도심으로 흘러 분기되는 다양한 요인들을 제시하였다. 이는 분명 퇴계나 주자와 구분되는 율곡만의 독창적인 이론 체계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요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율곡 인심도심론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41) 주자학에서는 기의 청탁수박(淸濁粹駁)의 정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율곡은 인심의 발생 원인을 변질된 기나 기의 용사·엄폐 등의 요인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으므로 변질되었거나 탁박한 기를 고쳐서(矯氣質) 순선(純善)한 본연의 성을 회복하는 것이 수양의 관건이 된다.
주자학자들의 인심도심론은 이기론과 주자학적 심성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산은 이기론 자체를 부정하고 인간 존재와 심·성에 대한 이해에서 새로운 인식을 보이며 탈주자학적인 학문 성향을 보였다. 인간을 ‘신형묘합(神形妙合)’이라 하여 정신적인 요소와 육체적인 요소가 결합한 존재로 이해하였다.42) ‘심(心)’에 대한 이해에서는 주자와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성(性)’에 대해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다산은 성을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의 기호’라고 주장하였다.43) 곧,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성향 내지는 속성’을 성이라 한 것이다. 다음은 인심·도심에 대한 다산의 주요 언설이다.
단지 이 백 가지 천 가지 마음은 그 나뉨을 정밀하게 살펴보면, 인심과 도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심이 아니면 도심이고 도심이 아니면 인심이니, 공과 사가 나뉘는 바이며 선과 악이 판가름나는 바이다.”44)
사람과 동물이 성(性)을 같이 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대저 사람이 지각하고 운동하며 식색(食色)을 추구하는 것은 금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오직 그 도심이 발동하는 것은 형체가 없고 바탕이 없는 영명통혜(靈明通慧)한 것이 기질에 깃들어 주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고(上古)로부터 이미 인심도심의 설이 있었다. 인심은 기질(氣質)이 발동한 것이고 도심은 도의(道義)가 발동한 것이다. … 기질의 성은 분명히 사람과 동물이 같이 얻었는데 선유(先儒: 주자 – 필자 註)는 각기 다르다고 하였고, 도의의 성은 분명히 우리 사람만이 홀로 얻었는데도 선유는 같이 얻었다고 말한다.45)
발동한 모든 마음은 인심·도심으로 이분화되며, 공·사와 선·악이 이 두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심-사-악’과 ‘도심-공-선’이 각각 서로 동질성을 지니며 이 양자는 대립적 구조를 띠게 된다. 다산은 인심·도심으로의 분기 요인을 ‘발생 근원의 차이(기질의 성 / 도의의 성)’로 보았다. ‘지각하고 운동하며 식색을 추구하는 것’이란 ‘기질의 성’을 가리키는데, 이는 육체라는 기질적인 요소에 의해 일어나는 성향을 뜻하는 말이다. 인심은 기질의 성이 발동한 것이므로 몸을 가짐으로써 생기는 식색의 욕구를 비롯하여 이목구비를 통해 지각하는 감각작용 등을 말한다. 도심은 도의의 성이 발동한 것이므로 도의를 추구하는 도덕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산의 인심·도심 개념은 주자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인심은 오직 위태롭다’는 것은 내가 말한 권형(權衡)이다. 심의 권형은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으니, 천하에 위태하고 불안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있지 않다. ‘도심은 오직 은미하다’는 것은 내가 말한 성기호(性嗜好)이다.46)
「대우모」의 ‘인심유위, 도심유미’를 다산은 ‘권형’과 ‘성기호’라고 해석하고 있다. ‘권형’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므로 인심은 선·악 미정(未定)의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위태로움이 인심보다 심한 것은 없다고 하였으므로 다산은 인심을 거의 악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성기호’는 선을 좋아하는 마음의 성향이므로 선 그 자체는 아니다. 단지 선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일 뿐이다. 이처럼 다산의 인심·도심은 각각 악과 선으로 흐를 개연성이 매우 큰 가능태이므로 ‘예비 악’과 ‘예비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47)
다산은 모든 공·사와 선·악이 이 인심과 도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으므로 결국 수양 공부는 인심과 도심의 문제가 관건이 된다. 일상의 삶에서 어떠한 일을 실행하기 전에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면 이것이 공적인가 사적인가, 도심인가 인심인가를 맹렬하게 살펴 도심은 배양하고 확충하며, 인심이라면 다스려서 극복해야만 한다고 다산은 말한다.48) 곧, 수양 공부는 이 인심은 절제하고 도심은 배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인심도심론은 기존의 어느 논설과도 구분되는 독창적인 이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Ⅳ. 대순사상에서 인심·도심의 개념과 가치론적 해석
유학과 불·도교는 각기 지향하는 바에 따라 그 방향성에 부합하는 측면으로 마음에 관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유학은 도덕 실천과 수양 공부에 중점을 두고 마음을 주로 도덕적·가치적 차원에서 궁구하고 설명하였다. 불교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열반의 실현에 중점을 두고 주로 인식론적·심리적 차원에서 마음을 궁구하고 규명하였다. 한편, 도교는 불로장생과 건강한 삶을 지향하며 마음을 주로 정(精)과 기(氣)와의 상관관계, 곧 생리적 차원에서 조명하며 설명하였다. 유학과 대순진리회는 지향하는 바가 서로 같은 것은 아니므로 마음에 관한 탐구에서도 방향을 같이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덕 실천은 대순진리회의 이념 실현을 위한 수도 생활에서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므로 도덕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는 유학과 대순진리회의 지향점이 서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유학 전통의 여러 인심도심론은 도덕 실천과 관련한 수양론적 논의였으므로 대순사상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검토하고 수용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심도심론은 인간에게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사적 욕구와 유학적 가치나 이념을 지향하고자 하는 공적 욕구와의 갈등 문제에 관한 논의로만 국한하여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어떤 종교 교단이나 일반 사회 조직, 국가 등과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 누구에게나―공적 가치나 이념의 성격은 다를지라도―적용되는 보편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순사상에서 인심·도심의 문제를 살펴보는 데 있어 유학 전통의 여러 유형이 충분히 그 기반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순진리회의 주요 문헌인 『전경』·『대순지침』·『대순진리회요람』 등에서 인심·도심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 포함된 구절은 이 둘뿐이다.51) 그런데 사는 인심이고 공은 도심이라며 인심·도심을 대립적 가치로 규정하고 있을 뿐 그 개념이나 ‘인심’과 ‘사심’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어떠한 설명도 나타나 있지 않다. 가치론적 문제와 관련하여 ‘사는 인심이요 공은 도심’이라고 하였다. 모든 인간사는 ‘공·사’라는 두 영역으로 포섭되며, 발동한 온갖 마음도 ― 주자와 다산의 인식에서 보듯이 ― ‘도심·인심’으로 포섭된다. 따라서 ‘사는 인심이며 인심은 사’(사 = 인심), ‘공은 도심이며 도심은 공’(공 = 도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결국, ‘인심은 사이며 도심은 공’이라고 가치론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심·도심은 어떠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인용문은 대순진리회 소속 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훈회(訓誨)’의 제2항인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에 대한 설명문의 첫 구절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덕’은 인간의 언어생활과 연관한 것으로 타인에게 말을 선(善)하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덕은 도심의 자취라’는 말만 놓고 본다면 언어생활의 문제만이 아니라 행위까지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은 결국 우리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곧 덕을 이루게 하는 근본의 마음이 ‘도심’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도심이 도덕을 지향하는 마음임을 알 수 있으나, 그 개념 이해를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사람이 세상을 살며 재미[滋味]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의(衣: 입는 것)’라 할 수 있고 ‘식(食: 먹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의와 식 다음에는 ‘색(色: 색을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색의 도(道)에 이름은 각기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이다.52)
해원상생·보은상생의 원리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이념 실천에 힘써야 한다.53)
가정화목·사회화합·인류화평으로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대순진리이다.54)
위의 인용문들은 대순사상의 인심·도심 개념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내용을 가려 뽑은 것이다. 첫 번째 인용문은 인심, 나머지 두 인용문은 도심과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자학자나 다산 등은 모두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종족 보존을 위해 필요한 의식색의 욕구 및 이목구비를 통해 지각하는 감각작용과 같은 심리적 현상을 인심으로, 사단과 같이 도덕을 추구하는 마음을 도심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인심 개념은 인간 보편의 마음이라 할 수 있으므로 대순사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순진리회에서는 도덕 실천을 수도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도심은 이 도덕 실천과 더불어 대순진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이념을 추구하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첫 인용문의 ‘자미(滋味)’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으나, 과거의 한글 문장에서는 ‘재미’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여기에서 ‘색’은 ‘남녀 간의 애정 행위’를 뜻하는 일반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의식색의 도에 이름’이란 사람이 세상을 살며 의식색의 추구를 재미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삶의 길[道]로 여기며 살기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의식색의 추구는 생명 유지와 종족 보존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다. 의식색의 추구를 재미로 삼는다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의 차원을 넘어 ‘즐기고 좋아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것이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그러하다는 것이다.55) 이는 의식색의 추구를 재미로 삼는 것이 바로 인간 삶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 활동의 유지와 종족 보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색의 욕구를 대순사상의 인심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이념 실천에 힘써야 한다’는 말에는 대순진리회가 지향하는 이념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이란 국가(國)와 국민(民), 나아가 인류[蒼生]의 안녕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공적 가치가 담긴 용어들이다. 그리고 ‘가정화목·사회화합·인류화평’은 모두 인간 보편의 가치를 담고 있는 말이다. 이것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대순진리’라는 것은, 곧 대순진리회가 인간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또한 공적 가치를 담고 있는 용어들로 대순진리회가 추구하는 이념이 무엇인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대순사상의 도심은 도덕 실천과 더불어 공적 가치를 담고 있는 보국안민·광제창생·가정화목·사회화합·인류화평·세계평화 등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인심’과 ‘사심’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과 사심(私心)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56)
이 인용문은 대순진리회 ‘훈회’의 제1항인 ‘마음을 속이지 말라.’에 대한 설명이다. 마음은 우리 몸의 주체이며 모든 언어 행동을 주관한다고 한다. 이는 대순진리회의 이념 실현을 위한 수도 생활에서 마음이 핵심적인 의미와 위상을 지닌다는 뜻이다. 이러한 마음을 양심·사심으로 이분화하여 그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고 ‘인성의 본질’이며, 그 속성은 ‘정직과 진실’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며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하는 요인’이라 밝히고 있다.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란 양심이 인간의 선천적이며 본래적인 성품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양심의 근원이 ‘천(하늘)’이라는 말로도 해석된다. 이에 반해, 사심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며 마음이 외부의 사물을 지각함으로써 일어나는 ‘물욕’이 근원이라 말하고 있다.
한편,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는데, ‘마음을 속인다’는 것은 바로 본심인 양심을 속이고 ‘사심’에 사로잡힌다는 뜻이다. 또한,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는 자체가 곧 죄악이 되는 것이므로 ‘사심’은 ‘모든 죄악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되찾기에 전념하라며 이를 당위적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가치론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양심은 ‘정직과 진실’을 속성으로 하고,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며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곧 양심은 ‘선’이고, 사심은 ‘악’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57)
정도나 분수에 넘치게 어떠한 것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慾心)’이다. 이는 무엇을 얻고자 하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바람을 뜻하는 ‘욕구(欲求)’와는 구별된다. 정이천이나 주자(초설)가 ‘인심은 인욕’이라 했을 때의 ‘인욕’은 이러한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 욕심을 ‘사심’이며 ‘악’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명 활동의 유지와 종족 보존을 위한 기본적인 의식색의 충족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필수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욕구는 분명 자신만을 위한 사적 영역으로서 ‘인심’에 속한다. 이러한 ‘인심’을 악으로 볼 수 없으므로 ‘인심’을 ‘사심’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심’과 ‘사심’은 어떠한 관계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사심에 빠질 위험이 있다. 모든 죄악의 근원이 내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되므로 사욕을 누르고 공명지대(公明至大)한 도심을 드러내도록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58)
첫 구절은 「대우모」의 ‘인심은 위태롭다(人心惟危)’는 말과 유사한데, ‘인간의 마음은’이라는 주부(主部)와 ‘언제나 사심에 빠질 위험이 있다.’라는 술부(述部)로 구성되어 있다. 이 술부는 주부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주부의 ‘마음’은 인심과 도심의 합일인 ‘일반적인 마음’일 수도 있고, ‘인심’만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의 속성이 언제나 사심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인심이 흘러서 사심에 빠지게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인심’이 절제되지 않고 정도나 분수를 넘게 되면 바로 ‘사심’이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라 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사욕’은 ‘사심’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대순사상에서는 인심·도심을 각각 사와 공이라며 가치론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인심·도심 개념과 분기의 원인, 그리고 구체적인 공부법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인심·도심의 문제가 하나의 논설로서 이론적 체계화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양심·사심에 대해서는 이를 각각 선과 악으로 규정하며 그 근원을 ‘천(하늘)’과 외부 사물에 대한 지각에서 비롯한 ‘물욕’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되찾기에 전념하라며 양심의 회복을 당위적인 공부의 과제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양심·사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모습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마음과 도덕적 가치를 각각 ‘양심-선 / 사심-악’, ‘도심-공 / 인심-사’로 대응하여 설명하고 있는 점은 유학 전통에서 볼 수 없었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V. 맺음말
인심·도심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서경』은 중국의 상고시대 이제(二帝: 요·순임금)와 삼왕(三王: 우·탕·무왕)의 치국(治國)과 선정(善政)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심·도심 개념을 정치적 관점으로 해석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한·당대에는 황실을 중심으로 소수의 문벌 귀족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였으나, 송대에 들어서며 신흥 사대부계층이 정치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 주체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며 인심·도심 개념도 인간 보편의 마음으로 이해되며 수양의 문제 중심으로 해석의 관점이 변화하였다. 특히, 주자에 이르러 인심·도심에 대한 논의는 이론적으로 체계화되는데, 이후로 인심도심론은 수양론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지니며 다양한 논설을 낳게 되었다.
유학 전통에서 이루어진 인심·도심에 대한 여러 논의는 이 양자의 선·악과 관련한 가치론적 해석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을 보였다. 그 가운데 주자의 만년 정론이 가장 보편화한 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인심은 선·악 미정의 가치중립적 개념이며, 도심은 천리로서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마음이 인심·도심으로 분기하는 이유를 ‘혹생혹원설’과 ‘지각설’로 설명하며 구체적인 수양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퇴계는 이러한 주자의 설을 대체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율곡은 ‘지각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인심·도심의 분기 요인에 대해 다양한 설을 제시하며 주자와 구분되는 독창적인 이론 체계를 구성하였다. 한편, 탈주자학적 학문 성향을 보였던 다산은 인심·도심을 각각 예비 악과 예비 선으로 규정하며 기존의 어느 설과도 다른 독창적인 인심도심론을 제시하였다.
대순사상에서 나타나는 인심·도심이란 용어나 관련 언설도 인심도심론의 이러한 전승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순사상은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사상 체계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전승되어온 유·불·도교의 사상이 상당 부분 바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심·도심을 각각 사와 공이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 인심·도심 개념에 대한 설명이나 그와 관련한 어떠한 논설도 대순사상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치론적 측면에서 인심·도심과 밀접하게 연관된 양심·사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논설을 보여주었다. 대순사상에서는 인심·도심을 각각 사와 공으로, 양심·사심은 각각 선과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다산이 공·사와 선·악을 모두 도심과 인심에 대응하여 규정한 것이나 주자의 인심·도심에 대한 가치론적 해석과 구분되는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선 머리말에서 보았듯이 윤용복은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양심은 주자가 말하는 도심과 같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심을 주자가 말하는 인심이라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본 필자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대순사상은 인간 보편의 이념과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나름의 고유한 이념 또한 담지하고 있다. 인심·도심 개념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므로 이는 대순사상에 담긴 이념과 가치를 전반적으로 고려하여 추론할 수밖에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심은 인간의 생명 활동과 종족 보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색과 같은 생리적 욕구이며, 도심은 도덕 실천과 더불어 대순진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공적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순사상에서는 ‘사심’을 물욕에 의해 일어나는 욕심이며 버려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심은 인심과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주자가 말하는 인심이 대순사상의 인심과 다른 것은 아니므로 주자의 인심과도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순사상에서 양심·사심에 대한 논설이 비교적 체계화되어 제시된 것은 인심·도심보다 양심·사심의 문제가 교리적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크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양심·사심에 대한 논설은 대순진리회의 ‘훈회’ 가운데 제1항인 ‘마음을 속이지 말라.’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된 것이다.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것은 곧 본심인 양심을 속이지 말라는 뜻이며, 이를 대순진리회에서는 ‘무자기(無自欺)’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 무자기는 대순진리회 도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옥조(玉條)이며, 무자기의 실현은 대순진리회의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59) 이러한 점들이 아마도 인심·도심의 문제가 양심·사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을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논문은 어느 한 인물의 인심도심론에 국한하여 밀도 있게 살펴보지 않고 유형별로 나누어 주자와 조선 유학사(儒學史)에서 핵심적인 인물들의 논설을 대략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는 대순사상에서는 아직 인심·도심에 대한 논의가 소략하여 특정 인물과의 비교 검토보다는 인심도심론에 대한 전반적인 양상의 이해가 이 논문의 연구 주제와 관련하여 더욱 실효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학 전통의 여러 인심도심론도 결국은 「대우모」의 16자 요결에서 비롯한 다양한 해석이며 논설이다. 특히, 주자와 다산은 자신들의 심성론에 기반하여 나름의 이론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대순사상에서도 나름의 심성론을 토대로 대순사상 전반과의 정합성을 갖춘 인심도심론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 여기까지 나아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 과제가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