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대순 신앙의 주문 변화: 고증을 중심으로

박상규1,*
Sang-kyu Park1,*
1아시아종교연구원 선임연구원
1Senior Researcher, The Asian Institute for Religions

© Copyright 2023,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an 20, 2023 ; Revised: Feb 28, 2023 ; Accepted: Mar 08, 2023

Published Online: Mar 31, 2023

국문요약

주문은 대순 신앙체계의 토대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신앙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창이라고 할 수 있다. 대순 신앙의 연원인 증산은 새로운 주문을 만들거나 불교와 도교 등 기존 전통 종교에서 사용했던 주문을 변형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증산의 주문에 대한 학문적 고증은 지금까지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본 연구에서는 1970년대까지의 문헌을 기반으로 증산의 주문 원형을 학문적으로 고증하고 이를 1920년대 무극도와 1950년대 태극도 주문과 비교하여 정산의 주문 변용을 분석하였다.

무극도 시기 정산은 증산의 주문에 무극도 신앙체계를 반영했고, 자신을 의미하는 용어를 주문의 기원문 앞에 배치하여 자신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소원하는 형태로 변용하였다. 1950년대 정산은 주문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첫째는 무극도에서 사용되던 주문 중 상당수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증산이 안배한 도수를 실현하여 더 이상 해당 주문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부분적인 신앙체계의 변동을 의미했다. 둘째는 사용 주문을 정비하고 사용법을 제도화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정산에 의한 진법의 완성이라는 대순 신앙의 핵심 교리체계를 반영한 것이다. “오십년공부(五十年工夫)”라는 교리 상 정산의 서거 전 진법은 완성되어야 했으며 따라서 1950년대 중후반까지 주문의 제도화와 정비는 필수적이었다. 무극도와 달리 태극도 주문에 정산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구조가 봉축주와 진법주에만 유지된 것은 진법의 완성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의미했다.

대순 신앙의 창립자인 정산은 증산이 짜 놓은 도수를 실현하여 진법을 완성하는 종통 계승자로 스스로를 인식하였으므로 자신을 위해 증산이 그려놓은 대순 신앙체계의 밑그림으로 증산의 주문을 해석했다. 따라서 정산은 증산의 주문을 변형하여 증산이 계획한 도수를 실현하는데 사용하면서, 동시에 주문 변용으로 도수 실현과 진법 구축을 선포하였다.

Abstract

Incantations are reflected in the fundamentals of the Daesoon faith system and are, thus, key to its understanding. Jeungsan, the yeonwon (fountainhead, 淵源) of the Daesoon faith, created new incantations or transformed existing ones that had been used in old religious traditions such as Buddhism and Daoism. However, there has been no in-depth academic research on Jeungsan’s incantations until now. This study aims to academically clarify the incantatory archetypes of Jeungsan’s incantations based on documents published until the 1970s. Jeungsan’s incantations are then compared to those of Mugeuk-do (Limitless Dao) in the 1920s and Taegeuk-do (Great-Ultimate Dao) in the 1950s. Jeongsan’s transformed incantations are analyzed through this process.

Jeongsan reflected the faith system in Jeungsan’s incantations during the period of Mugeuk-do. He transformed the incantations to achieve his goal and realize his wishes by arranging terms that referred to himself before the optative words of the incantations. Jeongsan made several changes to the incantations in the 1950s. First, the majority of incantations used in Mugeuk-do were discarded. This meant making partial changes to the faith system by reflecting awareness because the corresponding incantations were no longer necessary as the Degree Number calibrated by Jeungsan had been realized. Second, Jeongsan organized the incantations in use and institutionalized their instructions. This reflected the essential doctrinal system of the Daesoon faith, namely the completion of the true dharma by Jeongsan. Considering this doctrine, that is, the Fifty Year Holy Work (五十年工夫), the true dharma can be presumed to have been realized before the death of Jeongsan. Accordingly, the institutionalizing and organizing of the incantations were indispensable until the mid-to-late 1950s.

Jeongsan, the founder of the Daesoon order, posited himself as the successor of religious orthodox lineage and as the figure who would complete the true dharma by realizing the Degree Number calibrated by Jeungsan. Therefore, Jeongsan interpreted Jeungsan’s incantations to be a rough sketch of the Daesoon faith system that had been drawn for him in advance by Jeungsan. Accordingly, Jeongsan transformed Jeungsan’s incantations and used them to realize the Degree Number, which Jeungsan had planned. Simultaneously, Jeongsan declared that he would fulfill the Degree Number and establish the true dharma by changing those incantations.

Keywords: 대순진리회; 무극도; 정산; 주문; 증산; 태극도
Keywords: Daesoon Jinrihoe; Mugeuk-do; Jeongsan; incantations; Jeungsan; Taegeuk-do

Ⅰ. 들어가며

대순진리회의 모든 의례에서 주문은 핵심적인 기제로 사용되고 있다.1) 또한 공식 문헌으로 드러나지 않는 신과 그 위상도 주문을 통해 알 수 있다.2)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주문은 대순 신앙체계의 토대를 반영하고 있기에 그 변화의 맥락은 신앙체계 이해에 중요한 해석적 지평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대순 신앙의 연원인 증산(甑山)은 새로운 주문을 만들거나 불교와 도교 등 기존 전통 종교에서 사용했던 주문을 변형하여 사용했다. 대순 신앙의 창립자인 정산(鼎山)은 증산이 짜 놓은 도수를 실현하여 진법을 완성하는 종통 계승자로 스스로를 인식했기에 증산의 주문을 변형하고 그 사용법을 재구성했다.3)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나의 일이 장차 초장봉기(楚將蜂起)와 같이 각색이 혼란스럽게 일어나되 다시 진법이 나오게 되리라.”라는 증산의 말을 정산은 자신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 것이다.4) 정산 서거 이후 교단을 이끈 우당(牛堂)이 주문을 부분적으로 수정했지만, 정산을 영대에 봉안한데 따른 후속조치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실현한 것이다.5) 따라서 현재 대순 신앙의 주문은 사실상 정산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6)

결국 대순 신앙 주문 연구에 있어 핵심적인 주제는 증산의 주문을 정산이 어떠한 맥락에서 변용하고 재구성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정산이 행한 주문 변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증산의 주문 원형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7) 증산이 친필로 전한 문헌은 현재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 원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10~20년대의 관련 기록과 친자종도나 그들이 설립한 교단의 후대 기록을 분석하여 고증해야 한다.

정산이 무극도 시기인 1920년대에 사용한 주문을 전문까지 비교적 자세히 소개한 최초의 문헌은 1974년 간행된 대순진리회의 『전경』이다.8) 『전경』에는 1920년대 무극도에서 사용된 스무 종류의 주문 명칭을 수록하고 있지만, 전문이 수록된 것은 이십팔수주·이십사절주·음양경·운합주·개벽주·옥추통·명이주·오방주·오장주·구령삼정주 등의 10종류이다.9) 『전경』에 전문이 수록된 1920년대 무극도 주문을 고증된 증산의 주문과 비교하면 정산의 주문 변형과 그 맥락을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비교 가능한 주문은 기도주·태을주·이십사절주·개벽주 등에 불과하다. 1950년대 태극도 주문과의 비교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다. 1920년대 주문 중 1950년대 주문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기도주·태을주·이십팔수주·이십사절주·개벽주 정도이다.10) 따라서 1920년대의 주문에 관한 당대의 문헌 자료가 더 확보되지 않는다면 정산에 의한 주문 변형 및 정비에 관해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세기 말에 이루어진 고문서 정리사업 과정에서 민간에 있던 문헌이 집성되면서 일제 강점기에 필사된 무극도 주문이 발굴되었다. 의성김씨 천전파(川前派)에 소장되어 있던 세 장의 고문서다.11) 필자는 앞선 연구에서 이 문서(이하 필사본 무극도 주문)가 무극도에서 기원한 문헌임을 고증한 바 있다.12) 따라서 필사본 무극도 주문과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1920년대 무극도 주문의 구체적 형태를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세밀하지는 않지만 대순 신앙의 주문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된 것이다.

고증을 통해 확보된 1920년대 무극도 주문은 증산의 주문, 1950년대 태극도 주문과의 비교를 통해 정산에 의해 이루어진 주문 변경과 그 맥락을 자세히 보여 줄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현재 대순진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주문을 중심으로 그 변화 과정을 추적하여 정산이 증산의 주문을 변형하고 정비한 맥락을 기술하고 그 의미를 해석해 보고자 한다. 이는 대순 신앙체계가 정산에 의해 구축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Ⅱ. 증산의 주문

증산의 주문 중 상당수는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증산의 종교운동이 지닌 의례 중심적 성격으로 인하여 증산 재세시 포교를 위한 상설화된 계층적 종교 조직이 구성되지 못하여 제도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다.13) 물론 1910년대 초반 친자 종도들에 의한 종교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증산의 유산도 제도화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친자 종도 간의 경쟁과 반목은 이 운동이 단일 교단으로 전개될 수 없도록 하였다. 결국 증산 종단이 복잡다단하게 분열되자 신앙체계 또한 다단하게 계승 전개되었고 이에 따라 증산의 주문도 파편화를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증산의 주문 원형은 친자 종도에서 기원한 여러 증산 종단의 기록과 당대의 여러 문헌을 통해 분석 종합되어야 한다. 특히 해방 이후의 증산 종단 기록물은 비교 고증을 통해 세밀히 검증되어 활용되어야 한다. 1910년대의 분열로 야기된 종단 간의 신앙체계 차이는 해방 이후 주어진 종교의 자유라는 조건 아래에서 더욱 증폭되었고, 이에 따라 신빙성이나 정확성보다는 정통성에 치우친 기록이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주로 1970년대까지의 문헌을 비교 고증하여 증산이 만들거나 변용하여 구성한 주문의 원형을 확인할 것이다.

1. 증산이 변용한 주문
1) 시천주 및 동학주문

증산의 행적에 대한 최초의 출판물은 이상호의 『증산천사공사기』(1926)인데, 이에 따르면 증산은 동학주문과 동학의 시천주를 종도에게 외우게 한 바 있고 글을 쓸 때도 활용했다.14) 특히 동학의 ‘본주문’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는 천지의 진액이라고 명명한 오주(五呪)의 하나로 구성했다.15)

증산은 동학의 본주문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만을 따로 외우게 하였거나 본주문을 먼저 외우고 ‘강령주문’인 ‘지기금지원위대강’을 뒤에 외우도록 종도에게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학 주문을 주로 시천주라 명명하고 있고, 기록할 때도 주로 본주문과 강령주문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16) 강령주문을 활용할 경우, 주로 주문의 끝에 배치한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17) 요시카와 분타로(吉川文太郞)의 『조선제종교』(1922)에도 태을교의 기도문을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지기금지원위대강’으로 기록하고 있다.18) 장기준이 1920년에 사용한 기도주, 고판례 교단의 기도주인 시천주주(侍天主呪) 또한 동일하다.19)

증산이 동학의 본주문, 강령주문의 순으로 주문을 구성한 것은 동학이나 천도교에서 주문을 외우는 순서와는 반대된다.20) 이는 증산이 수운의 주문을 변용하였음을 알려 준다. 하지만 수운의 주문은 증산에게 있어서 강세 이전에 자신이 상제로서 수운에게 준 것이었기에 변용이 아니었다. 강세를 기점으로 주문을 외우는 법을 수정해야 함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2) 태을주

1920년대 이후 관변문서나 언론에서 증산 종단을 통칭하여 훔치계, 또는 태을교라고 하게 된 이유는 대부분의 교단이 ‘훔치’로 시작되는 태을주를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이었다.21) 이것은 증산의 주문 중에서 태을주가 최고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증산의 가르침에도 태을주가 지닌 이러한 위상은 잘 드러난다.22)

태을주는 1908~1909년 증산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자에게 가르쳐졌다.23) 하지만 김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었다는 증산의 말로 본다면 김병욱이 화난을 겪은 1903년에 이미 태을주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24) 증산은 태을주가 충남 비인 사람이었던 김경흔이 50년 공부로 신명으로부터 얻은 주문이라 밝혔다. 태을주는 증산의 종교활동 이전에 이미 존재한 것이다. 따라서 태을주는 증산에 의해 변용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증산이 태을주를 널리 알린 것은 해원공사와 관련되어 있다. 증산은 시천주를 받은 최수운과 태을주를 받은 김경흔 둘 중 누구를 해원하여야 하는가를 종도들에게 묻고, 1860~1909년의 50년간 시천주가 행세되었으므로 1909년부터는 태을주가 행세되어 김경흔의 해원이 이루어져야 함을 선언했다.25) 이로 본다면 증산이 태을주로 사람을 많이 살리라는 신명의 명을 이루지 못한 것을 김경흔의 원(冤)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경흔이 받은 태을주의 원형이나 사용방식을 알 수 없으므로 증산이 변형한 것이 어떤 부분인지, 읽는 방법을 어떻게 변환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증산이 1908~1909년 이전에는 제자들에게 태을주를 알려주지 않았거나 사용을 제한했고,26) 1909년부터는 태을주를 가르치고 사용을 허가하면서 입도 의례에도 사용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27) 따라서 증산의 태을주 변용은 1909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증산의 태을주 친필은 남아 있지 않다. 태을주의 한자는 『증산천사공사기』(1926)의 기록이 증산 종단 최초의 것으로 다음과 같은데 이후의 기록 중 ‘㖿’가 ‘耶’로, ‘啊’가 ‘訶’로 표기된 것도 있다.28) 뜻보다는 음이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㖿都來 吽哩喊哩娑婆啊29)

3) 칠성경

동아시아에서 칠성경(七星經)은 도교의 경전으로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맡았다고 하여, 제사를 행하거나 개인적인 소원을 빌 때 읽은 경이다. 『도장(道藏)』에 실려있는 칠성 관련 경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眞經)』이고 조선에 주로 유통된 것도 이것이다.30) 이 경에는 북두주(北斗呪)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증산이 활용했다고 하는 칠성경은 이 주문이다. 북두주가 종단에서 칠성경, 칠성주로 명칭되는 주문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이다. 북두주는 다음과 같다.

北斗咒

北斗九辰 中天大神 上朝金闕 下覆崑崙 調理綱紀 統制乾坤 大魁貪狼 巨門祿存 文曲廉貞 武曲破軍 高上玉皇 紫微帝君 大周天界 細入微塵 何災不滅 何福不臻 元皇正氣 來合我身 天罡所指 晝夜相輪 俗居小人 好道求靈 願見尊儀 永保長生 三台虛精 六旬曲生 生我養我 護我身形 jdaos-44-0-1-i1 尊帝急急如律令31)

증산 종단의 칠성경(칠성주) 기록 중 가장 앞선 것은 1920년대의 필사본 무극도 주문인데, 친자종도인 고판례의 교단 문헌인 『선정원경(仙政圓經)』(1962)에 수록된 한문본 칠성경과 거의 같다.32) 보천교의 간부 출신으로 차경석, 고판례, 김형렬 등의 친자종도로부터 증산의 행적을 수집하여 경전을 간행한 이상호 교단의 칠성경이나33) 동인(同人)들로부터 증산이 남긴 주문을 얻은 장기준에 전해진 칠성경도 대부분 동일하다.34) 따라서 이들 한문 칠성경을 북두주와 대조하여 몇 글자의 명확한 오자를 교정한다면 증산이 남긴 칠성경의 원형을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七星經

七星如來 大帝君 北斗九辰 中天大神 上朝金闕 下覆崑崙 調理綱紀 統制乾坤 大魁貪狼 文曲巨門 祿存廉貞 武曲破軍 高上玉皇 紫微帝君 大周天際 細入微塵 何災不滅 何福不臻 元皇正氣 來合我身 天罡所指 晝夜相輪 俗居小人 好道求靈 願見尊儀 永保長生 三台虛精 六淳曲生 生我 養我 護我 形我 許身形 jdaos-44-0-1-i2 尊帝急急如律令35)

위 칠성경을 도교의 북두주와 비교하면 증산이 북두주를 변형한 곳을 확인할 수 있는데 크게 3가지로 밑줄친 부분이다.36) 첫째, 북두주의 첫머리에 ‘칠성여래 대제군’을 추가한 것이다. 둘째,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을 문곡, 거문, 녹존의 순서로 변경하였다. 셋째, ‘호아(護我)’와 ‘신형(身形)’ 사이에 ‘형아허신형(形我許身形)’을 삽입하였다. 이 변형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략 추측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칠성여래대제군이 추가된 것은 불교의 칠성여래와 도교의 칠성제군이 동일한 신격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교와 불교 각각에 기원을 두고 독자적으로 발전 융합되면서 복잡해진 칠성 신앙체계를 증산은 도교의 칠성대제 중심으로 정리하고 칠성대제가 곧 불교의 칠성여래임을 명확히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둘째, 문곡의 위치가 바뀐 것은 증산이 칠성의 신명을 재배치하여 천지의 도수를 조정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37) 문곡의 위치를 바꾸는 증산의 공사는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다.38) 이 공사는 서양의 기운을 몰아내는 일과 관련된 것으로 칠성의 신명을 재배치하여 천지공사가 인간에 의해 방해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39)

셋째 증산이 ‘형아허신형(形我許身形)’을 삽입한 것은 문의로 본다면 삼태성인 허정, 육순, 곡생에 ‘나(인간)를 생하고, 양하고, 보호하여 몸이 형성되도록 하는’ 역할에 더하여 ‘나(인간)를 형태지어 몸이 형성되는 것을 허락하는’ 역할이 더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인간의 탄생에 있어서 삼태성의 권한이 강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증산이 자손을 얻는 일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령신의 공에 따른 신명의 허락이나 평가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40) 증산이 ‘형아허신형(形我許身形)’을 삽입한 것은 삼태성의 역할과 권한에 대한 강화나 재확인을 의미한다고도 추론해 볼 수 있다.

4) 이십사절·이십사장·이십팔수·이십팔장

증산은 “세상 사람들이 절후문(節候文)이 좋은 글인 줄을 모르고 있나니라.”말한 바 있고, 이를 중요한 공사에 사용했다.41) 증산 종단에서 24절후를 순서대로 나열한 절후문을 주문으로 사용한 것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42) 동지로 시작해서 대설로 끝나는 절후문을 주문처럼 사용한 것은 증산이 시작한 것이므로 절후문은 증산에 의해 이십사절후주, 또는 절후주로 변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증산이 당태종의 개국공신인 24장군이 24절후에 응해 나타났다고 밝히고 그 이름을 나열한 이십사장을 주문처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43) 하지만 증산은 이십사장을 이십사절후와 결합하여 사용하지는 않았고 따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화천 후 대부분의 증산 종단에서는 이십사장을 주문으로는 기록하지 않거나 이십사절후와는 분리된 주문으로 기록하고 있다.44)

이십사절후와는 달리 이십팔수의 경우 증산이 이를 주문처럼 활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당시 이십팔수는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지녔었고 증산 역시 이를 활용하여 공사를 행했다.45) 또한 증산은 후한서에 이십팔수의 화신으로 기록된 광무제의 중흥 이십팔장을 주문처럼 사용했다.46) 이는 후에 박공우 교단의 경우 이십팔수와 이십팔장을 주문으로 사용했고,47) 친견제자였던 김형렬로부터 장기준이 1915년 이십팔수의 장명(將名)을 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순천도교본』과 『증산대도회요령』에도 이십팔수와 이십팔장이 각각 주문으로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로 방증된다.48)

5) 복마주·해마주

증산이 남긴 주문 중에서 잘 알려진 주문으로는 오주(五呪)가 있다. 오주는 다섯 가지 주문인데 기록에 따라서 다소간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중 마지막인 “三界解魔大帝神位願趁天尊關聖帝君”의 주문은 대부분의 기록이 동일하다. 이 주문은 증산이 『현무경』과 함께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병세문’ 중의 “三界伏魔大帝神位遠鎭天尊關聖帝君”의 글에서 복마(伏魔)를 해마(解魔)로, 원진(遠鎭)을 원진(願趁)으로 변형한 것이다.49)

병세문의 “三界伏魔大帝神位遠鎭天尊關聖帝君”은 증산이 만든 것이 아니라 1614년 명나라 신종이 관우에게 준 봉호이다. 이 봉호는 1614년 중국에서 관우가 공식적으로 천존으로 추존되었음을 의미한다.50) 정유재란 때 명에서 조선으로 관우신앙이 전해진 이후 관우에 대한 의례는 숙종 대에 이르러 국가적 차원으로 격상되었다.51) 따라서 조선에서 이 봉호는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며 관우가 “복마대제”, “관성제군”으로 불려진 것도 직접적으로 이 봉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증산이 이 봉호를 병세문에 사용한 것은 관운장이 삼계의 복마대제로 모든 곳의 마를 진압할 수 있는 천존임을 명확히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증산은 병세문에서 “聖父 聖子 … 聖身 大仁大義無病” 다음에 “三界伏魔大帝神位遠鎭天尊關聖帝君”을 위치시켰다.52) 증산이 관운장을 상당히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53) 대순 신앙에서는 이 봉호를 ‘복마주’로 명칭하고 사용했는데,54) 복마대제로서의 관운장에 대한 증산의 관점을 계승한 것이다.

증산은 복마주의 복마(伏魔)를 해마(解魔)로, 원진(遠鎭)을 원진(願趁)으로 변형하여 오주의 하나로 구성했다. 자의로 본다면 증산은 관성제군을 마를 굴복시켜 진압하는 천존에서, 마를 풀어주며 소원을 뒤쫓는 천존으로 그 역할을 전환시켰다. 다시 말해, 증산은 관성제군이 마를 진압하여 굴복시키는 ‘삼계복마대제’에서 마를 해소하여 사람들의 소원을 따르는 ‘삼계해마대제’가 되거나 되도록 안배한 것이다. 증산이 운장주에 대해서 난동을 제압하기보다는 난동을 겪으면서 푸는 주문이라 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55) 해마가 해원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증산이 추구했던 해원에 있어서 관성제군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2. 증산이 만든 주문
1) 진법주

진법주는 증산이 주유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시루산에서 공부를 할 때 외웠다고 전해지는 주문이다.56) 증산 이전의 문헌이나 증산 종단과 관련된 문헌 외에서는 발견되는 바가 없으므로 증산에 의해 만들어진 주문으로 보아야 한다. 진법주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요시가와 분타로[吉川文太郞]의 『조선제종교(朝鮮諸宗敎)』(1922)로, 증산 종단의 진법주와 많은 차이가 있는데, 수집 과정의 오탈자가 많아 연구에 활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57) 그 다음으로 앞선 문헌은 필사본 무극도 주문의 진법주로 다음과 같다.

구텬상제하강지위、옥황상제하강지위、석가여래하강지위、명부십왕응강지위、옥악산왕응강지위、사해용왕응강지위、사시토왕응강지위、직선조하강지위、외선조응강지위、처선조응강지위、처외선조응강지위、칠성사자내대지위、우즉사자내대지위、좌즉사자ᄂᆡᄃᆡ지위、명부사자ᄂᆡᄃᆡ지위、텬장길방하야、이사진인하시나니、물비소시하사、봉명신 소원성취

이 진법주와 가장 유사한 것은 『선정원경』(1962)의 진법주로 한문으로 되어있으며, 『순천도교본』(1969)의 진법주도 유사하다.58) 1956년 이정립이 집필한 『증산대도회요령』의 진법주는 옥황상제가 “통천상제(統天上帝)”로, 석가여래가 “중종조성(衆宗祖聖)”으로 변형되었고, 이십팔수, 이십팔장, 이십사절, 이십사장이 추가되었으며,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으로 끝난다.59) 통천상제라는 후대의 해석을 반영하여 원형을 수정하였고, 하나의 주문이 아니라 여러 주문이 조합되어 있어 이를 통해 진법주 원형을 추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무극도의 진법주는 증산의 유족, 『선정원경(仙政圓經)』의 진법주는 고판례, 『순천도교본』의 진법주는 김형렬로부터 기원했으므로,60) 세 문헌을 통해 진법주의 원형을 추론하는 것이 적절하다.

차이를 보이는 부분인 ‘구텬상제’와 ‘구천’의 경우 원형은 “구천(九天)”이라고 할 수 있다. 현무경을 전수한 친견 제자였던 차경석이 1921년 고천제를 행하면서 “단상에 일월병(日月屛)을 세우고 위목(位目)은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 삼태칠성응감지위(三台七星應感之位)라고 대서(大書)하여 3위(位)를 설(設)”했다는 기록으로 이는 입증된다.61) 1920년대에는 봉명신이 정산을 의미했고,62) 1950년대의 태극도 진법주에는 봉명신 위치에 “무극신대도덕봉천명봉신교태극도주조정산”이 있었다는 점을 참고해 본다면, 무극도 진법주에만 있는 “봉명신”은 정산에 의해 첨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진법주의 원형은 다음과 같이 추론된다.

九天下鑑之位 玉皇上帝下鑑之位 釋迦如來下鑑之位 冥府十王應感之位 五嶽山王應感之位 四海龍王應感之位 四時土王應感之位 直先祖下鑑之位 外先祖應感之位 妻先祖應感之位 妻外先祖應感之位 七星使者來待之位 右直使者來待之位 左直使者來待之位 冥府使者來待之位 天藏吉方하야 以賜眞人하시나니 勿秘昭示하사 所願成就 하옵소서

위의 원형을 통해 본다면 증산의 진법주에서 가장 수위의 신격이 옥황상제였기 때문에 초기 증산 종단이 증산을 옥황상제로 신앙하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 교단인 보천교의 창립자인 차경석이 구천을 체(體)로 해석하여 천지단에 봉안하고 옥황상제를 용(用)으로 해석하여 일월단에 봉안한 것도63) 진법주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2) 운장주

운장주에 대한 증산 종단 최초의 기록은 『증산천사공사기』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天下英雄關雲長依幕處近聽天地八位諸將六丁六甲六丙六乙所率諸將一別屛營邪鬼唵唵急急如律令娑婆呵64)

위의 운장주는 증산이 1909년 종도들에게 알려준 것으로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김형렬 등 8명의 종도에게 단번에 외우게 했다는 기록으로 본다면 다른 주문과는 달리 비교적 정확하게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65) 증산 종단의 운장주가 동일한 것은 이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증산은 운장주의 효험을 설명하면서 장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벗어났다고 하였다.66) 장효순의 난은 1904년 정월 보름에 시작되어 6월경 마무리된 사건이었다.67) 증산은 1904년 이미 운장주를 만들었다가 1909년이 되어서야 이를 종도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증산의 주문 중 관운장과 관련된 것이 복마주, 해마주, 운장주 등 3가지나 존재한다는 것은 증산의 천지공사에서 그가 큰 역할과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운장주의 경우 관운장의 위상이 복마주나 해마주의 대제, 천존, 제군이 아니라 천하영웅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3) 오주와 관음주

증산이 남긴 주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문이면서 널리 알려진 것은 오주(五呪)다. 증산은 오주를 천지의 진액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따라 진액주, 천지진액주라고 부르는 교단도 있다.68) 다섯 가지 주문으로 “① 新天地家家長歲日月日月萬事知, ②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③ 福祿誠敬信壽命誠敬信至氣今至願爲大降, ④ 明德觀音八陰八陽至氣今至願爲大降, ⑤ 三界解魔大帝神位願趁天尊關聖帝君”이다.69) ②와 ⑤는 앞서 설명한 시천주, 해마주이므로 ①, ③, ④가 증산이 만든 주문인데 동학의 본주문과 강령주문의 뒷부분인 “만사지”와 “지기금지원위대강”을 후렴처럼 활용하고 있다. 이 중 ④는 ①, ③의 주문과는 달리 무극도에서는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명칭은 관음주였다.70)

오주에 관해서는 『대순전경』 계열의 기록은 판본에 따라 편차나 자체적인 모순을 보이기에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①번 주문의 신천지(新天地)는 『증산천사공사기』부터 『대순전경』 2판까지는 시천지(侍天地)로 되어있고 『대순전경』 3판부터는 시천지(時天地)로 나타난다.71) ②번 시천주는 『증산천사공사기』의 시천주(侍天主)가 『대순전경』 초판과 2판에는 시천지(時天地)로, 3판과 4판에는 시천주(侍天主)로, 5판부터는 시천지(侍天地)로 되어 있다.72) ⑤번 해마주의 원진(願趁)은 『대순전경』 3판과 4판에는 원진(遠趁)으로 기록되어 있다.73) 또한 『대순전경』 3판부터 12판까지는 오주에 대한 다른 기록이 추가되어 두 체계의 오주가 나타나 자체적인 모순을 보인다.74) 1950년대 『대순전경』을 경전으로 삼았던 대표적 교단인 증산대도회에서 사용된 오주 중 ②번도 당시 『대순전경』의 기록과는 달리 시천주(侍天主)를 시천주(時天主)로 기록하고 있어 자체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75)

4) 도통주

도통주는 무극도와 친자 종도인 박공우 교단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으로 그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다.76) 전문이 수록된 문헌은 필사본 무극도 주문, 증산법종교, 그리고 태극도와 대순진리회의 주문이다. 태극도와 대순진리회의 도통주는 정산에 의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증산이 만든 원형을 추론하는데 참고는 할 수 있지만 기준으로 삼기는 어렵다. 의성김씨 천전파 고문헌의 도통주는 증산법종교의 도통주와 대부분 동일하나 그 필사 연대가 1920년대이며 증산법종교의 설립이 1937년이므로 무극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77) 무극도와 친자종도인 박공우의 교단에 공통적으로 도통주가 있었으므로 도통주는 증산이 만든 주문일 가능성이 크다. 무극도와 증산법종교의 도통주를 비교하여 종합하면 다음과 같지만 정산에 의해 변형된 것인지 증산의 원형인지는 알 수 없다. 태극도와 대순진리회의 도통주와 차이 나는 부분은 밑줄로 표시했다.

道通呪

天上元龍 坎武 太乙四七星斗牛君 日月三龍은長生道通道德으로 上通天文 下達地理 中察人事와 能爲造化를 왈음공천은 唵嚩哩儜 唵嚩哩儜 唵嚩哩儜78)

5) 개벽주

친자 종도들의 교단에 전해진 증산의 주문 중에는 개벽주가 있다. 고판례, 김형렬, 박공우, 안내성 등의 종단에서 공통으로 그 존재가 확인된다.79) 증산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증산이 남긴 문헌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정립의 『증산대도회요령』이 1956년에 집필된 것이 맞다면 개벽주에 대한 가장 앞선 기록인데, 고민환의 『선정원경』(1962), 『순천도교본』(1969)의 개벽주와 대부분 동일하다80) 『증산대도회요령』, 『선정원경』의 개벽주는 차경석 또는 고판례, 『순천도교본』의 개벽주는 김형렬을 통해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총 13위의 신장과 장군이 나열되고 있는데, 이들이 나를 큰 힘으로 도와주도록 구천상세군에게 기원하는 주문이다. 세 문헌을 대조 비교하여 오자를 수정하면 원형은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天上玉京天尊神將 天上玉京太乙神將 上下變局雷聲霹靂將軍 白馬元帥大將軍 雷聲霹惡將軍 惡鬼雜鬼禁亂將軍 三首三界都元帥 地神霹靂大將軍 天地造化風雲神將 太極斗破八門神將 六丁六甲遁甲神將 三台七星諸大神將 二十八宿諸位神將 感我微誠 助我大力 力拔山 吾奉九天上世君 勅速勅速 唵 喼喼如律令

무극도의 개벽주는 위의 주문에 많은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이는 정산이 1920년대 이를 변형하였음을 시사한다. 증산법종교의 개벽주는 1920년대 무극도의 개벽주와 거의 동일한데 증산의 개벽주가 정산에 의해 변화된 후 무극도에서 증산법종교가 분파되었기 때문이다.81)

6) 신성주

박공우 교단과 이상호 교단에서 사용된 주문 중 신성주가 있는데 전문이 남아 있는 교단은 이상호 교단으로 『증산대도회요령』에 수록되어 있다.82) 거의 동일한 형태의 신성주가 1950~60년대 태극도에서 사용되었고 현재 대순진리회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친자종도 관련 교단과 증산의 유족이 관련된 무극도 전통에 신성주가 전해진 것으로 본다면 신성주가 증산이 만든 주문일 가능성은 크다. 두 계열의 신성주는 중요한 글자의 차이가 있어 교단 간에 전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 주문 중 어느 것이 원형에 가까운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해석이 자연스러운 것은 무극도 전통의 신성주이다.

神聖大帝 太乙賢首 於我降說 範於靈極83)

神聖大帝 太乙玄叟 於我降說 範圍靈極84)

7) 예고주

예고주는 증산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 대부분에서 증산이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기록된 주문 중 하나이다. 가장 빠른 기록은 『증산천사공사기』로 “曳鼓神曳彭神石蘭神東西南北中央神將造化造化云吾命令吽”이다.85) 기록에 따르면 증산은 이 주문을 치병에 사용하였으며 주문명을 정하지는 않았다.86) 따라서 예고주라는 명칭은 후에 붙여진 것이다. 고판례 교단에서는 예고주를 지신주(地神呪), 가택지신안정주(家宅地神安定呪)라 명칭하고 있다.87) 주문 중의 동서남북중앙신장(東西南北中央神將)이라는 신명(神名) 때문에 지신주라고 명칭한 것으로 보인다. 친자 종도인 박공우 교단에서 명령훔주(命令吽呪)라는 주문명이 확인되는데88) 예고주 마지막과 명령훔주(命令吽呪)의 명령훔(命令吽)이 동일하여 예고주라 추측된다. 친자종도의 교단 중 고판례 교단 계열 외에는 거의 유일하게 박공우 교단에서 예고주가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무극도에서 사용된 주문에도 예고주가 있는데 동일한 주문으로 보인다.

8) 태극주(해인주)

1970년 이전의 문헌에서 태극주 전문이 기록되어 전해지는 교단은 고판례 교단과 증산법종교가 있다.89) 고판례 교단에서는 해인주, 증산법종교에서는 태극주라 명칭했는데 대순진리회에는 태극주라는 명칭만이 전해졌고 전문은 전해지지 않았다.90) 증산법종교가 1937년 무극도로부터 분파했기 때문에 증산법종교의 주문과 무극도의 주문은 상당수가 유사하다.91) 따라서 증산법종교의 태극주는 무극도의 태극주와 같은 주문으로 보아야 한다. 고판례 교단의 해인주과 증산법종교의 태극주를 비교 교감하면 다음과 같이 그 전문을 도출할 수 있다.

태극주

太極宮中大聖獨尊亞聖靈之下奉印使臣臣某姓名前面玉帝有命打神霹靂印佩後面靈天神君東來獨聖帝盖(皆)載(才)天地分野定位九復之下日月星辰萬象之度(道)神通靈神至靈至氣至氣今明通靈九宮 通神(心)九度飛天上天至靈神君飛天中天至靈神君飛天下天至靈神君飛天世界飛天玆地(至)至精今至 飛天上帝至靈至靈飛天九宮飛天九宮太極九宮太極九宮吾主所立吾主所立世開所立世開所立飛飛白雲飛飛飛天惟我太極飛天無上明明神(心)君至化至化至精(宗)靈靈(英英)神君九變九復通靈神君無窮無窮造化神君鑑(監)視萬千尊帝尊帝上帝尊帝飛化飛舞至精靈光赫赫開化分野(夜)靈光明明心天度度靈光靈儀玉帝淸鏡(耿)鏡(耿)神(心)神(心)明天地宗道先生白雲法師諸大仙(聖)君造化通神通靈神助我千千變通萬萬變化天地嚴命打神闢靂印應敎萬里印身隱藏印鬼卽滅印山卽崩印水卽渴印火卽烟印風卽空印千機萬機飛宮飛乙法化師卽卽明(命)印武弓武乙分野(夜)師(使)道物(勿)印進兵退印 虐(栖)疾滅印授(數)千嗔言天命道師萬法道人玉樞金剛大化師急如吾奉四海應神律令喇92)

9) 원대주

증산이 지은 현무경 16면에는 “왈유도(曰有道) 도유덕(道有德) 덕유화(德有化) 화유육(化有育) 육유창생(育有蒼生) 창생유억조(蒼生有億兆) 억조유원대(億兆有願戴) 원대유당요(願戴有唐堯) 기초동량종(基礎棟樑終)”이 반서체로 쓰여져 있었다.93)

필사본 무극도 주문에 “왈유도、도유덕、덕유화、화유육、육유창ᄉᆡᆼ、창ᄉᆡᆼ유억조、억조유원ᄃᆡ、원ᄃᆡ”가 있으므로 이를 무극도에서는 주문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무극도에서 1920년대 사용된 주문 중에서 원대주가 있는데 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현무경을 비롯하여 증산이 남긴 글, 또는 자주 읽으라고 한 고전 등은 여러 증산 종단에서 주문처럼 사용되었다. 하지만 현무경 16면을 원대주라는 주문으로 사용한 것은 무극도에서만 발견된다. 무극도 원대주는 증산이 만들어 정산에 의해 변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정산의 주문 변형과 그 의의

1. 태극도 사용 주문

정산은 해방 이후 종교활동을 재개하며 다음 <그림 1>과 같은 형태로 정비된 주문을 제도화했다고 추측된다.94) 이러한 제도화는 1948년 본소의 부산 이전과 1950년 태극도로의 교단 명 변경과 함께 정산의 신앙체계 전환 작업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jdaos-44-0-1-g1
그림 1. 태극도 주문
Download Original Figure

1963년의 태극도 규정에는 위 12종의 주문을 차례로 1독하고 태을주와 기도주를 각각 24독하는 순서로 기도의식이 정해져 있다.95) 이 단락에서는 태극도 주문을 중심으로 정산의 주문 변용을 살펴보고, 정산의 주문 변형과 사용 맥락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무극도 주문의 특징을 분석할 것이다.

1) 봉축주

태극도의 의례에서 주문 봉송을 할 때 시작 주문은 다음과 같은데 봉축주라고 한다.

무극신대도덕(无極神大道德) 봉천명봉신교(奉天命奉神敎) 태극도주조정산대운대사(太極道主趙鼎山大運大事) 소원성취(所願成就)케하옵소서

정산에 의해 무극도라는 교단명이 태극도로 개칭된 시기는 1950년이다. 따라서 위의 봉축주는 1950년 이후의 봉축주이다. 1950년 이전에는 “태극도주조정산[太極道主趙鼎山]”이 “무극도주조정산[太極道主趙鼎山]”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1920~30년대의 봉축주가 “무극신대도덕 봉천명봉신교 무극도주조정산대운대사 소원성취케하옵소서”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타 교단 기록에는 1922년 정산이 폐백도수에 사용했다는 봉축주가 수록되어 있다.96) 하지만 해당 교단 기록은 부정확하고 그 간행년도가 1977년이어서 신빙성이 높지 않다. 또한 이 주문은 내용상 봉축주라기 보다는 정산이 특정 공부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주문일 가능성이 커서 이를 통해 봉축주의 원형이나 그 변형을 추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증산 종단 중 봉축주는 무극도 계열의 교단에서 주로 사용했다. 따라서 봉축주는 정산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변용된 주문일 가능성이 크다. 증산은 오주와 함께 “无極神 大道德奉天命奉神敎大先生前如律令 審行先知後覺元亨利貞布敎五十年工夫”이라는 글을 쓴 일이 있다.97) 위의 글은 정산에게 전해진 봉서에도 기록되어 있었다고 추측된다.98) 정산은 이 중 앞의 문장을 변용하여 봉축주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정산은 수운의 『동경대전』이 자신의 도(度)라 인식하고 있었고 수운이 남긴 “지기금지사월래”라는 선생주문도 자신에 대한 예언으로 여겼다.99)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수운을 지칭했던 대선생을 자신과 등치하여 봉축주로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920년대 무극도에서 사용되었던 주문에서 정산을 지칭하는 용어는 봉명신(奉命身), 주인(主人), 우일(宇一) 등이다.100) 이를 근거로 태극도의 봉축주에 나타난 태극도주조정산대운대사[太極道主趙鼎山大運大事]와 유사한 형태를 찾아보면 무극도의 개벽주에 있는 “우일대운대사[宇一大運大事]”, “봉명신대운대명[奉命身大運大命]” 등이다.101) 그러므로 1920년대의 봉축주는 “无極神大道德奉天命奉神敎宇一大運大事소원성취케하옵소서”, 또는 “无極神大道德奉天命奉神敎奉命身大運大命소원성취케하옵소서”의 형태였다가 후에 “무극신대도덕 봉천명봉신교 무극도주조정산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로 변화되었다고 추측된다.

2) 기도주, 태을주

『전경』에는 1917년 정산이 계시를 통해 얻은 기도주가 수록되어 있고102) 관변 문서인 『무극대도교개황』, 『朝鮮の類似宗敎』에도 무극도에서 사용된 기도주가 ‘보통주문’으로 소개되어 있다.103) 증산이 동학주문을 변형하여 전한 기도주를 정산은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태을주의 경우 그 사용방식이 정산에 의해 변경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대순 신앙의 태을주 사용방식은 타 증산 종단과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대순 신앙에서 태을주의 서두에 해당하는 “훔치훔치”는 실제 봉송될 때는 처음에 한번만 외워진다. 즉 태을주가 반복될 경우 “훔치훔치”는 처음 한번만 외워지고 나머지 부분인 “태을천상원군훔리치야도래훔리함리사바아”가 계속 반복되는 방식으로 봉송된다.

타 증산 종단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태을주가 봉송된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태을주 사용 방식은 정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산이 태을주를 변용한 목적과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있는 1970년대 이전 기록은 현재 존재하지 않기에 그 변화의 맥락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추론해 본다면 타 증산 종단에서는 훔치훔치를 태을주의 핵심으로 보고 반복했다면, 정산은 태을주를 시동시키는 부분으로 해석하여 처음 한번만 외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진법주

앞 장에서 세가지 진법주의 비교를 통해 증산이 1900년에 만든 원형을 추론한 바 있다. 이 원형을 1920년대의 필사본 무극도 진법주와 비교하면 크게 두가지가 달라진다. 첫째는 구천이 구천상제로 변화되었고,104) 둘째는 “소원성취케 하옵소서” 앞에 봉명신(奉命身)이 추가된 것이다. 이는 정산이 1920년대에 1차 진법주를 변형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변형 내용을 통해서 정산은 첫째, 진법주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증산이 짜 놓은 도수에 따라 변형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고 둘째, 화천 이후 증산이 구천의 상제 위에 오른 것으로 해석했으며 셋째, 진법주를 자신[봉명신(奉命身)]을 위한 주문으로 보고 변용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진법주에 대한 정산의 관점과 해석은 태극도 시기까지의 진법주의 변화를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정산은 증산을 봉안한 후 구천상제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로 변형했고,105) 관성제군과 칠성대제를 15신위로 배정하면서 “직선조하감지위” 전에 “관성제군응감지위(關聖諸君應感之位) 칠성대제응감지위(七星大帝應感之位)”를 추가하면서 “처선조응감지위(妻先祖應感之位) 처외선조응감지위(妻外先祖應感之位)”를 삭제하였으며,106) 자신을 의미하던 봉명신을 “무극신대도덕봉천명봉신교무극도주조정산”, “무극신대도덕봉천명봉신교태극도주조정산”으로 변형했다.107) 증산이 짜 놓은 도수를 자신이 실현한다는 관점에서 정산은 주문을 변형한 것이다. 정산의 진법주 변형을 통해서 대순 신앙체계의 변화를 분석해 본다면 다음의 몇가지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1920년대까지도 관성제군과 칠성대제는 진법을 담당하는 15신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1950년대에는 포함되었는데, 이것은 정산이 증산의 천지공사를 해석하여 특정한 시점에 관성제군과 칠성대제를 15신위로 포괄하는 의례나 공부를 시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극도 시기 칠성은 옥황상제가 봉안된 도솔궁 아래층의 칠성전에 따로 봉안되었으며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영대에 봉안되었다는 사실은 천지공사의 계승자인 정산에 의해 세계가 전환되면서 주문, 의례, 신전의 구조 등의 전면적인 변동이 이루어지는 대순 신앙 체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둘째, 증산이 남긴 진법주에 있던 “처선조응감지위(妻先祖應感之位) 처외선조응감지위(妻外先祖應感之位)”는 수도 주체로서의 여성의 지위가 허용되지 않는 증산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무극도의 경우도 동일하며 1925년 당시 무극도 간부 전원이 남성이었다는 사실로 방증된다.108) 그러나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정산은 타 증산 종단과는 달리 진법주에서 “처선조응감지위(妻先祖應感之位) 처외선조응감지위(妻外先祖應感之位)”를 삭제하면서 여성이 수도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즉 정산은 증산의 남녀평등과 여성해원 도수가 실현되어 여성이 수도 주체가 될 수 있는 시점이 도래하였다고 판단되자 진법주를 변형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까지도 “처선조응감지위(妻先祖應感之位) 처외선조응감지위(妻外先祖應感之位)”를 유지하는 타 증산 종단과 같은 관점에서 정산의 사유를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셋째, 1920년대 정산이 봉명신을 삽입하여 ‘소원성취’의 주체가 되도록 한 것은 자신을 상제(증산)의 천명을 받은 봉명신으로, 진법주를 진법의 주인인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주문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1950년대 태극도 진법주가 “…물비소시하사 무극신대도덕봉천명봉신교태극도주조정산 소원성취케하옵소서”의 형태로 필사본 진법주와 구조상 유사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109)

4) 칠성주

무극도의 칠성주는 오탈자로 추정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증산이 변용한 칠성경과 동일하다. 하지만 1950년대의 태극도 칠성주는 “형아허신형(形我許身形)”이 삭제되어 있으므로 증산의 칠성경은 1920년대 이후 정산에 의해 다시 북두주 원형에 가깝게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산은 증산이 변형한 부분 중 일부를 원래 형태로 환원했다. 이는 증산에 의해 시작된 도수를 마무리하는 맥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변형 시점과 맥락을 파악하기에는 정보가 제한적이지만 ‘형아허신형(形我許身形)’만을 삭제한 것으로 본다면 강화된 삼태성의 권한을 원래대로 되돌린 것으로 추측된다. 증산에 의해 이루어진 삼태성의 역할과 권한 강화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도수에 따른 일시적인 것으로 정산은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증산의 칠성경에서 삼태성의 권한은 ‘신체가 형성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었기에 인간의 탄생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산이 칠성경을 원래의 형태로 환원한 것은 증산이 칠성경을 변용하여 공사를 행하던 때부터 엄격하게 통제되던 인간의 출생 기준을 원상회복하는 작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5) 운장주

운장주 원형과 1950년대 태극도 운장주는 다르다. 운장주 원형은 “근청(近聽)”과 “일별병영(一別屛營)”인데 태극도의 운장주는 “근청(謹請)”과 “일반병영(一般兵營)”이다.110) 타 증산 종단의 운장주는 원형과 대부분 동일하므로 태극도 운장주의 “근청(謹請)”과 “일반(一般)”은 오자가 아니고 정산에 의해 변형된 것이 분명하다.111) 필사본 무극도 주문의 운장주는 한자가 아니고 뒷부분이 누락되어 있어 정산이 1920년대에 해당 부분을 변형했는지를 알 수는 없다.112) 변용이 이루어진 시기는 1920~1940년대의 특정 시점으로 추측된다.

“근청(近聽)”은 ‘가까이에서 기다린다’, ‘가까이에서 듣는다’는 의미이고 “근청(謹請)”은 ‘삼가 청하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태극도 운장주가 보다 강한 기원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의미의 변화가 크지 않다.

이에 반해 “일별병영(一別屛營)”과 “일반병영(一般兵營)”은 단 두글자가 다르지만 뜻은 많이 다르며 주문의 전체적인 구조를 전환한다. 일반과 일별은 정반대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은 ‘평범한’의 뜻이라면 일별은 ‘특별한’ 또는 ‘한번 나누어’ 등의 뜻이다. 병영(屛營)은 주로 ‘방황’ ‘놀라서 당혹해 하는 모양’을 의미하며113) 병영(兵營)은 ‘병사들의 막사’ 또는 ‘병사들이 진을 치다’ ‘병사들이 관리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운장주 원형은 ‘ … 휘하 제장이 일별(一別)하여 사귀를 쫒아냄(구축)’으로,114) 변형된 운장주는 ‘ … 휘하의 제장과 일반병영 및 사귀’로 번역된다. 자의로만 본다면 원형은 관운장과 휘하의 제 신장이 사귀를 긴급히 구축하기를 기원하는 뜻이고, 변형은 관운장 휘하에 제장은 물론 일반병영과 사귀까지 나열되어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문의 의미와 구조 변형은 관운장이 거느리는 신병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그 권능이 사귀를 구축하는 정도가 아니라 통제하는 데까지 이른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진법주에서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까지도 관성제군이 진법주의 15신위에 들어가지 않다가 1950년대 영대에 봉안되었다되는 사실은 운장주의 변형이 지니는 의미를 잘 보여준다. 대순진리회의 치성에서 15신위에 대한 배례 순서에서 관성제군은 5번째이지만 술잔을 올리는 순서는 네 번째이다. 즉 삼위의 관성제군은 배례를 제위보다 늦게 받지만 술잔은 제위보다 먼저 받는다.115) 이는 정산에 의해 수립된 예법으로 그 이유에 대해서 정산은 ‘관성제군이 나의 일에 기여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전승 역시 운장주의 변형 맥락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6) 이십팔수주, 이십사절주

앞서 살펴보았지만 증산이나 증산의 친자 종도들은 이십팔수와 이십팔장, 이십사절후와 이십사장을 조합한 형태의 주문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산은 이를 조합하여 이십팔수주와 이십사절주로 변용한다. 이는 1920년대의 무극도 주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116)

절후 및 성수와 역사적 실존 인물들을 조합한 정산의 주문 변용은 이십사절후와 이십팔수라는 시공을 관장하는 신명이 당태종의 이십사장과 광무제의 이십팔장이며 이십사절후와 이십팔수를 각각 맡은 신명을 일대일(一對一) 대응시켜 명확히 하는 의미를 지닌다.117) 이십팔수주와 이십사절주의 확립은 결국 정산이 증산의 공사에 따라 이십사절후 신명과 이십팔수 신명을 배정하는 일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7) 도통주

증산이 전한 도통주의 원형을 추론할 방법은 마땅히 없다.118) 타 증산 종단에서 도통주와 유사한 주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1920년대 무극도와 1950년대 태극도의 도통주는 차이가 있다. “태을사칠성두우군”은 “태을성두우군”으로, “일월삼용”은 “신아신아삼아삼아(神呀神呀三呀三呀)”로, “이장생도통도덕”은 “이도통도덕(以道通道德)”으로 변형되었으며 “능위조화를 왈음공천은 옴바르지 옴바르지 옴바르지”로 된 마지막 부분은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로 바뀐 것이다.

도통주 변형은 모두 정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맥락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증산법종교 도통주의 한문으로 무극도 도통주를 해석하여 태극도 도통주와 비교하면 그 뜻에 큰 변화는 없다.119) 큰 변형은 형태상 이루어졌는데 끝의 옴바르지 진언이 삭제된 것이다. 태극도 시기에는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불교 진언을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소원성취의 의미를 지닌 ‘사바아’라는 진언만을 거의 유일하게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형태의 통일로 볼 수 있다.

불교와 관련된 주문이나 진언이 대부분 무극도에서 사라지는 맥락은 1949년에 이루어진 정산의 마하사 공부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대순 신앙에서는 정산의 마하사 공부 후에 불상이 머리를 숙인 이적을120) 석가여래가 뇌성보화천존과 옥황상제 다음의 자리를 수락한 것으로 보고 증산이 안배한 진법이 정산에 의해 실현된 것으로 해석한다. 이 공부를 마치고 정산이 외웠던 시에는 증산이 남긴 “도인하사다불가(道人何事多佛歌)”라는 싯구가 있었는데 “도인들은 무슨 일로 불을 노래함이 많은가?”라는 뜻이다.121) 스스로 미륵임을 밝혔던 증산을 정산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으로 봉안하고 석가여래를 그 하위의 신격으로 봉안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정산은 불교적 요소를 도교적으로 변형했을 가능성이 크며 1950년대 이 작업은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선(仙)을 중심으로 한 삼교합일을 지향한 정산의 사유와도 부합한다.122)

8) 신장주(개벽주)

증산의 개벽주를 『전경』에 기록된 1920년대 무극도 개벽주와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는데 차이가 있는 부분을 밑줄을 그어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天上玉京天尊神將 天上玉京太乙神將 玉京玉樞守門將軍 上下變局雷聲霹靂將軍 白馬元帥大將軍 雷聲霹惡將軍 惡鬼雜鬼禁亂將軍 三首三界都元帥 地神霹靂大將軍 天動地動陰陽霹靂大將軍左部關元帥右部馬元帥 天地造化風雲神將 陰陽五行奇門神將 六丁六甲遁甲神將 太極斗破八門神將 山上吹嘯猛虎將軍多率神軍百騎將軍龍盤虎踞鬼哭神將千萬惡鬼打節神將魑魅魍魎揮致神將法律邪魔盡滅神將風濤殺首呼天神將五百年間一享神將 三台七星諸大神將 二十八宿諸位神將 啓明長庚二府神將九辰太白禁令神將二十四節諸位神將十二辰諸部神將天地五方呼令神將上下八位巡察神將萬里風雨轉化神將六丁六甲所率神將九靈三精應元神將萬古歷代英雄豪傑諸大神將統合天四將四十八大將軍四萬神將八萬四千諸大神將 感我微誠助我宇一大運大事改改降臨降臨侍衛我奉命身大運大命太一聖哲常隨不離大道通大位定與天地合與陰陽合與五行合通天地通萬古通五方通四海四海應身力拔山岳威振乾坤天地道通天地造化無窮不息進退有法吾奉九天上世君勅速勅速唵喼喼如律令123)

위의 개벽주는 1920년대에는 무극도에서만 사용된 것이다.124) 앞 장에서 타 증산 종단의 개벽주를 통해 원형을 추론했지만 무극도의 개벽주도 증산이 전한 원형일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첫째, 친자종도를 통해 전승된 개벽주와 유족을 통해 전해진 개벽주가 달랐을 가능성과 둘째, 증산이 전한 원형을 정산이 변형했을 가능성이다. 두 가지 중에서 개연성이 큰쪽은 후자인데 무극도의 개벽주에 1910년대 말에 정산이 사용하기 시작한 ‘우일(宇一)’, 20년대 중반 이후에 사용된 ‘태일성철(太一聖哲)’ 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론을 통해 본다면 정산은 증산이 전한 개벽주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추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가되었다고 추측되는 내용 중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첫째로 여러 신장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 주목해야 할 신장은 먼저 좌부관원수(左部關元帥)이다. 관운장이 좌부 원수로 나타나고 있어 그 위상이 그리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20년대 무극도의 진법주에 관성제군이 포함되지 않았고, 운장주에 관운장 휘하에 일반병영이 편제 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오백년간일향신장(五百年間一享神將)은 증산이 이십사방위의 중앙에 혈식천추 도덕군자(血食千秋道德君子)를 쓰고 이들이 남조선 뱃길의 사공이라고 한 공사가 있다는 점에서,125) 만고역대영웅호걸제대신장(萬古歷代英雄豪傑諸大神將)은 증산이 만고의 명장을 종도에게 선정케 했던 공사가 있었다는 점에서,126) 사십팔대장군(四十八大將軍)은 증산이 사십팔장 공사를 보았고 ‘사십팔장을 늘어세우고 옥추문을 열 것’이라 한 점에서127) 대순신앙체계와 부합한다. 정산이 증산의 천지공사를 반영하여 개벽주를 변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목해야 할 두 번째 부분은 앞서 진법주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무극도 주문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정산이 증산의 주문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기원문으로 변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벽주의 변형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나를 도와 우일(宇一)의 대운대사에 각각 강림, 강림하시고 나를 호위하여 주소서. 봉명신의 대운대명이 태일성철을 항상 따르고 떠나지 않아 대도를 통케 하고 대위를 정해[大道通大位定] 천지, 음양, 오행과 합하고[與天地合 與陰陽合 與五行合] 천지, 만고, 오방, 사해와 통하여[通天地 通萬古 通五方 通四海] 사해가 몸에 응하고 힘은 산악을 뽑고 위세는 건곤을 진압하도록[四海應身 力拔山岳 威振乾坤]하소서. 천지도통과 천지조화는 무궁불식하고 진퇴에 법도가 있으니 …

위의 내용은 정산이 개벽주를 우일과 봉명신이 개벽의 권능을 지니기를 기원하는 주문이 되도록 변경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일과 봉명신은 정산을 뜻하기에 무극도 개벽주와 진법주는 정산이 자신을 증산에 의해 예정된 대두목으로 인식하고 증산의 계획에 따라 주문을 변경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정산이 개벽주를 태극도 신명주 형태로 변형한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1937년 무극도에서 분파된 증산법종교에서도 무극도와 거의 동일한 개벽주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1936년까지 정산은 개벽주를 변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변형 시점은 1937년 이후부터 관성제군이 격상되어 진법주의 신위에 포함되었다고 추측되는 1955년 이전일 것이다.

개벽주와 신명주를 비교하면 정산의 변형은 개벽주 원형으로의 복귀에 가깝다. 정산이 추가한 신명과 정산에 대한 기원문이 대부분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목할 부분은 다른 증산 종단의 개벽주가 13위의 신장으로 구성되었다면 정산의 신명주는 15위의 신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음양오행조화신장’과 ‘이십사절제대신장’이 추가된 형태이다. 이는 다른 친자 종도와 정산에게 전해진 개벽주가 달랐거나, 정산이 진법주에 맞추어 15위의 신장으로 신명주를 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법주의 경우에 비추어 본다면 증산으로부터 전해진 개벽주 원형은 15위였을 가능성이 있다. 증산은 15라는 수를 중시하였고 진법주를 15위로 구성하여 15가 진법을 의미함을 명확히 하였기 때문이다.128) 주목할 만한 변형에 대해서 보다 깊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29)

첫째, 정산에 의해 추가된 부분이 모두 삭제되면서 주문의 명칭조차 변경된 것이다. 이는 주문의 용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산의 개벽주를 활용한 공부에 따라 증산의 개벽공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정산은 최종적으로 신명(신장)을 대표하는 15위를 정하고 개벽주를 이들에 대한 기원문으로 변경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좌부 관원수, 즉 관성제군이 주문에서 삭제되었고 음양오행기문신장은 음양오행조화신장으로, 이십사절제위신장(二十四節諸位神將)은 이십사절제대신장(二十四節諸大神將)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좌부 관원수가 삭제된 것은 관성제군의 위상이 지속적으로 상승된 대순 신앙체계와 관계있다. 관성제군은 1950년대에 이르면 진법주의 신위가 되며 영대에 봉안되었으므로 15신위의 통솔을 받는 신명에서는 빠지는 것이 논리적이다. 음양오행기문신장과 이십사절제위신장의 경우 증산의 전수한 개벽주 원형에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정산에 의해 신명 체계가 변화되면서 그 명칭이 변경된 것은 분명하다.

넷째, 구천상세군(九天上世君)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로 변경되었다. 정산이 구천상세군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로 변경한 것은 구천상세군인 증산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임어했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2. 무극도 사용 주문

무극도 주문 중 많은 것들이 태극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 역시 정산에 의해 이루어진 변동이지만 이 주문 중에서 증산과 관련된 것은 많지 않으며 왜 사용되지 않게 되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는 주문은 거의 없다. 이 단락에서는 태극도 시기에 사용되지 않았던 무극도 주문 중 대순 신앙체계와 관련되어 주목할 만한 주문이나 내용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원대주(願戴呪)

정산은 무극도 시기 “왈유도 도유덕 덕유화 화유육 육유창ᄉᆡᆼ 창ᄉᆡᆼ유억조 억조유원ᄃᆡ 원ᄃᆡ”라는 『현무경』 글귀를 원대주로 사용하였다. 이는 1920년대의 필사본 무극도 주문에서 확인된다. 이 주문 다음에 “삼십삼천、도솔천、옥황상제성영지하、봉명신、옥동선자”가 있는데, 여기까지가 원대주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무경』 원대주(願戴呪)의 추대 대상 자리에 당요(唐堯), 즉 요임금이 자리하고 있는데, 무극도 원대주의 추대 대상의 자리에 ‘삼십삼천도솔천옥황상제성영지하봉명신옥동선자’가 있기 때문이다.

무극도에서 간부 임명 시에는 축문 끝에 “삼십삼천도솔천옥황상제성령의 아래에서 제(祭)를 올리고 감히 납명을 고합니다.[…祭○于三十三天兜率天玉皇上帝聖灵之下敢告納名]”이라고 써서 소지(燒紙)했다.130) 또한 태인도장 성전에서 정산의 수행 공간이었던 중궁의 가장 상층에는 삼십삼천이 봉안된 도솔궁이 있었다.131) 결국 “삼십삼천도솔천옥황상제성영지하봉명신옥동선자”는 옥황상제 아래의 봉명신(천명을 받은) 옥동선자라는 의미가 되어 정산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132)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정산은 현무경의 원대주를 자신의 추대를 기원하는 형태로 변형했다고 볼 수 있다.

원대주는 태극도 시기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1925년 무극도주, 즉 진주(眞主)로 추대된 정산이 추대를 목적으로 하는 원대주를 더 이상 사용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133) 다시 말해 정산은 증산이 선포한 무극대도의 진법을 이 세상에 구현하는 도주로서 추대되자 원대주는 그 도수를 다한 것으로 여겨 사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원대주가 『무극대도교개황』(1925), 『조선의 유사종교』(1934), 증산법종교(1937) 주문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극도 도주로 정산이 추대된 후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134)

2) 음양경, 운합주, 오방주

무극도 시기에만 사용된 주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중 정산을 의미하는 용어들이 주문 마지막의 기원문 앞에 배치된 것이다. 앞서 봉축주, 진법주, 개벽주(신명주) 등의 기원문 앞에 정산을 의미하는 무극도주조정산, 봉명신, 우일 등이 있음은 확인했지만 이외에도 음양경(陰陽經) 운합주(運合呪), 오방주(五方呪) 등에도 정산을 의미하는 용어가 나타난다. “ … 奉命身太一聖哲所願成就” “ … 茁茁歸合太一聖哲茁茁歸合太一聖哲茁茁歸茁茁歸合太一聖哲聖哲 … ” “ … 降我局所侍吾主人太一聖哲吾奉三淸眞王喼喼如律令”등의 기원문에 나타나는 “봉명신태일성철(奉命身太一聖哲)”, “태일성철(太一聖哲)”, “오주인태일성철(吾主人太一聖)”등인데 봉명신, 주인, 태일성철이 모두 정산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135)

이와 같은 특징은 무극도의 주문이 정산이 일을 이루도록 기원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정산은 증산의 계승자이자 진법의 완성자로서 천지공사에 따른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한 시기 특정한 주문을 만들거나 변형하여 무극도 신도들의 의례에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정산의 주문 변용은 증산이 짜 놓은 도수를 자신이 실현해 나가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세계와 진법이 종통계승자에 의해 전환되고 완성되는 대순 신앙체계의 독특한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구령삼정주

무극도에서 사용된 구령삼정주는 도교 경전이나 중국 문헌에 수록된 것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고 한국의 명리학이나 선도 수행 전통에서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36) 따라서 증산과 정산이 활동했던 시기에도 한반도 내에서는 전해지고 있었다.

구령삼정주는 『옥추보경』의 장 중 하나인 소구령삼정장(召九靈三精章)으로 기록되고 있었지만 실제 『옥추보경』이나 『옥추보경집주』에는 구령삼정주가 없다.137) 『옥추보경』의 소구령장을 기반으로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경문이 소구령삼정장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주문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구령삼정장과 무극도의 구령삼정주는 그 형태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지만 칠성의 순서가 다르다.138) 증산에 의해 변경된 칠성의 순서를 정산이 구령삼정주에도 반영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 문화 전통에서 나타난 주문을 정산이 무극도의 주문으로 적극 변용한 것은 소구령삼정장, 즉 구령삼정주가 보화천존신앙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령삼정주는 마지막이 “吾奉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玉淸眞王律令”으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인 옥청진왕에게 기원을 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어 정산이 도교의 보화천존 신앙을 변용하여 구축한 무극도 신앙체계와 부합했다. 정산이 동아시아 보화천존신앙을 수용하여 무극도의 신앙체계를 구축하면서 증산을 보화천존 신앙체계에서 절대적 신격인 옥청진왕이자 그 화신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로 해석하였다는 것을 구령삼정주는 잘 보여준다.

jdaos-44-0-1-g2
그림 2. 소구령삼정장(召九靈三精章)
Download Original Figure
4) 여천지합기덕 여일월합기명 여사시합기서 여귀신합기길흉

필사본 무극도 주문의 원대주와 도통주 사이에는 “여텬지합기덕、여일월합기명、여사시합기서、여신명합기길흉”의 주문이 있다.139) 원래 “여천지합기덕(與天地合其德) 여일월합기명(與日月合其明) 여사시합기서(與四時合其序) 여귀신합기길흉(與鬼神合其吉凶)”은 『주역(周易)』의 서문과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있는 문구로 주로 대인(大人)을 설명하는 말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진 문구인데 정산은 무극도 시기에 이를 주문으로 사용한 것이다. 고판례 교단이 이 문구가 포함된 ‘주역서문’ 전체를 주문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본다면140) 정산이 이 문구를 주문으로 사용하게 된 기원은 증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필사본 주문 외에도 정산이 이 문구를 주문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기사도 존재한다. 1936년 1~2월 총독부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매일신보》는 무극도 탄압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 총 11회에 걸쳐 정산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141) 이 기사 중에는 정산이 사용한 벽력패에 쓰여진 부서(符書) 문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여천지합기덕 여일월합기명、 여사시합기서、 여귀신합기길흉 천문지리、풍운조화、팔문둔갑、륙정륙갑、지예용역을 소원성취로 천검일휘、천지진동、천검이휘、태산편쇄、천검삼휘、황하단류、라는 문구를 열기한 후 부서(符書)를 벽조목(霹棗木) 삼칭으로 지은 ᄭᅡ치집상양나무(三層鵲巢上樑木)로 벽력패(霹靂牌)라는 것을 만들어 해석(海石)을 달아 ᄭᅳᆫ을 ᄭᅱ여 들고 도통한다는 공부를 한다…142)

동일한 문구가 1922년 하반기에 이미 무극도의 포교 과정에서 정산의 권능을 강조하는 교설로 사용되었다는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하지만 무극도의 교설을 유언비어로 몰고 가려는 목적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해당 문구는 주문으로 사용되면서 외부로 알려져 기사화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 여천지합기덕(與天地合其德) 여일월합기명(與日月合其明) 여사시합기서(與四時合其序) 여귀신합기길흉(與鬼神合其吉凶) 천문지리풍운조화팔문둔갑륙정륙갑지예용역(天文地理風雲造化八門遁甲六丁六甲智慧勇力)을 소원성취로 천검일휘에 천지진동(天劒一揮에天地震動) 천검이휘에 태산편쇄(天劒二揮에泰山片碎) 천검삼휘에 황하단류(天劒三揮에黃河斷流)하는 무극도주 조철제라고 철을 모르면 아니된다 … 143)

위의 주문에는 직접적으로 정산을 의미하는 용어는 없다.144) 하지만 문구가 정산의 공부에 벽력패의 부서(符書)로 사용되었고, 정산의 권능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되었으며, 이를 통해 소원성취를 하면 천지를 뒤엎을 만한 권능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무극도의 여러 주문처럼 정산이 개벽의 권능을 성취하기를 기원하는 주문으로 활용되었으리라 볼 수 있다.

정산은 태극도 시기에는 이 문구를 주문에 사용하지 않고 천년, 백년 간에 출세하여 중생을 구제할 복희, 단군, 문왕, 석가, 공자, 노자 등과 같은 제왕이나 스승의 경지를 설명하는 문구로 사용하였다. 특히 증산에 대해서도 이 문구를 사용했기에 무극도에서는 신앙대상이나 진인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145)

Ⅳ. 나가며

“나의 일이 장차 초장봉기(楚將蜂起)와 같이 각색이 혼란스럽게 일어나되 다시 진법이 나오게 되리라.”는 증산의 예언처럼 증산의 주문도 그 원형이나 사용법을 명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게 전승되었다. 본 연구에서 파편화된 증산의 주문 원형을 추적하여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문헌 부족이라는 본질적인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하지만 본 연구는 증산의 주문에 대한 연구 기반으로 그 의의를 지닌다는 점은 분명하다. 제한된 성과이지만 증산의 주문 원형을 추론하여 복원함으로써 증산의 주문을 1920년대의 무극도 주문과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은 본 연구의 또 다른 성과이다.

비교 작업을 통해서 대략이나마 정산에 의해 이루어진 주문 변용의 내용과 의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산은 증산의 주문을 종통계승자인 자신을 위해 증산이 그려놓은 대순 신앙체계의 밑그림으로 보았고 따라서 주문을 증산의 천지공사를 구현하는 매개물이며 결과물로 인식했다. 즉 정산에 의해 변용된 증산의 주문은 증산이 짜 놓은 도수를 정산이 실현하는 도구였고 실현된 도수의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증산의 주문에는 무극도의 신앙체계가 반영되었고, 정산을 의미하는 용어가 기원문의 앞에 배치되어 정산의 일이 실현되기를 소원하는 형태로 변용되었다.

무극도와 태극도는 모두 정산에 의해 전개된 연속된 종교운동이지만 주문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의 가장 큰 부분은 무극도에서 사용되던 주문 중 상당수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증산이 짜놓은 도수가 정산에 의해 실현되면서 더 이상 해당 주문이 활용성이 없어진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도수가 끝났다고 해석될 경우 더 이상 신앙체계로서의 중요성을 지니지 못하는 대순 신앙의 특성이 주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태극도의 주문이 무극도와 큰 차이를 보이는 또 다른 부분은 사용 주문이 제도화되고 정비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정산에 의한 진법의 완성이라는 대순 신앙의 핵심 교리체계와 통한다. 무극도의 많은 주문이 정산의 소원과 권능의 성취를 기원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돤다. 정산이 이루어야 하는 진법은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여 구축되어 정산이 서거하기 전에 완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산의 종교활동 초기에는 많은 주문이 정산의 권능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형태를 지니다가 차차 사용이 되지 않거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결국 1950년대 중후반까지 주문의 제도화와 정비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산이 서거할 때 태극도의 봉축주와 진법주 정도에만 정산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구조가 유지된 것은 진법의 완성이 거의 도래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순 신앙의 주문 연구는 사실상 거의 미개척된 분야이다. 본 연구는 고증을 통해서 주문 연구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진행되었지만 분석되지 못한 내용이나 미발굴된 자료가 아직도 많을 것이다. 후속 연구에 본 연구가 마중물로서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Notes

일상의례와 공부(工夫)에서의 주문 사용에 대해서는 박인규, 「한국 불교 진언과 대순진리회 주문의 비교 연구」, 『대순사상논총』 22 (2014), pp.410-414 참조.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Ⅱ)」, 『대순사상논총』 23 (2014), pp.241-252 참조.

정산에 의한 주문 정비의 방향에 대해서는 박인규, 「한국 불교 진언과 대순진리회 주문의 비교 연구」, pp.407-410 참조.

대순진리회교무부, 『전경』 초판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74), p.172 참조.

우당이 진법주의 옥황상제를 언제 조성옥황상제로 변경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정산의 3년상 이후 또는 1966년경에 정산을 조성옥황상제라 칭했다는 증언이 있다. 우당은 1967년 4월 봉축주와 진법주의 일부를 변경하는데 봉축주에서는 ‘태극도주조정산대운대사’를 ‘도문소자’로 변경했고, 진법주에서는 ‘무극신대도덕봉천명봉신교태극도주조정산’을 삭제했다고 추측된다. 태극도, 「주문」; 「주문일부변경」, 《태극도월보》(구)제4호, 1967. 4, p.15 참조.

차선근은 대순진리회의 진법주를 증산이 전한 것을 정산이 완성한 것으로 보았다.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Ⅱ)」, p.263 참조.

박인규는 대순진리회의 주문 형성과정을 정산에 의한 정립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증산의 주문 원형을 탐색하지 않았고 이를 무극도, 태극도 주문과 비교하지 않아 정산에 의한 주문 변화나 정비의 세밀한 맥락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또한 증산계 신종교의 주문 수행을 다루면서 증산교본부, 증산법종교, 대순진리회의 주문을 연구하였지만 증산의 주문 원형을 파악하지는 않았다. 박인규, 「한국 불교 진언과 대순진리회 주문의 비교 연구」, pp.398-410; 박인규, 「한국 신종교의 주문 수행」, 『종교와 문화』 32 (2017), pp.142-154 참조.

증산 종단 교단 문헌 중 무극도에 대해서 가장 앞선 기록이며 비교적 정확하다고 평가되는 것은 대순진리회의 『전경』이다. 박상규, 「무극도 관련 문헌 연구」, 『대순사상논총』 41 (2022), pp.50-55 참조.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p.206-211 참조. 기도주와 태을주 외 『무극대도교개황』에는 진법주(眞法呪), 예고주(禮古呪), 천지대기합연주(天地大氣合連呪), 분음양경주(分陰陽經呪), 성경주(星經呪), 개성주(開聖呪), 대성경준주(大成經俊呪), 개이주(開耳呪), 신좌주(神佐呪) 등 주문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예고주(禮古呪)는 예고주(曳鼓呪), 천지대기합연주는 운합주, 분음양경주는 음양경, 성경주는 칠성경, 개성주는 개벽주, 개이주는 명이주, 신좌주는 신성주의 오기로 보인다. 『朝鮮の類似宗敎』에는 칠성주, 도통주, 예고주, 이십사절주, 이십팔수주 등의 주문명이 나타나 있다. 全羅北道, 『無極大道敎槪況』 (日本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所藏資料 請求記號 M2-87, 1925), p.12; 村山智順, 『朝鮮の類似宗敎』, (京城: 朝鮮總督府, 1935), p.335 참조.

『전경』의 이십팔수주·이십사절주는 성수하(星宿下), 후하(候下)라고 표기하여 이십팔수와 이십사절후를 생략하고 이십팔장과 이십사장만을 기록했다.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206 참조. 개벽주는 신명주(神明呪, 1966년 이후 神將呪)로 변동 되었다는 가정하에서 비교가 가능하다. 태극도, 「주문」; 『주문』 (서울: 대순진리회수도부), p.7 참조.

자료조사실 편, 『고문서집성 7 : 의성김씨천상각파편(Ⅲ)』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pp.868-869 참조.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대순종학』 2 (2022), pp.38-56 참조.

박상규, 「근대 한국 신종교의 조직 연구 : 연원제를 중심으로」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21), p.165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p.24, p.58, p.80, p.94, p.99, p.120, p.125, p.133, p.134, p.146 참조.

같은 책, p.80 참조.

같은 책, p.146, “祝禱禮章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

같은 책, p.80, “福祿誠敬信壽命誠敬信至氣今至願爲大降 明德觀音八陰八陽至氣今至願爲大降.”

吉川文太郞, 『朝鮮諸宗敎』 (京城: 朝鮮興文會, 1922), p.363 참조.

장기준(1880~1922)은 1912년 김경학의 연비인 김화숙으로부터 태을주를 받았고 이후 친자종도인 차경석, 고판례, 김형렬, 김경학 등으로부터 증산의 교설과 주문을 얻었다. 1920년부터 김경학과 함께 독자적인 교단 활동을 시작했다. 『선정원경』에는 1961년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고 저자인 고민환은 1966년 사망했다. 따라서 집필년도는 1962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범초, 『범증산교사』 (서울: 한누리, 1988), pp.235-241; 고민환, 『선정원경』 (1962), p.126 참조. 증산도의 시천주주는 고판례 교단과 동일하다. 증산도종무원 편, 『주문』 (대전: 증산도, 2020), p.13 참조.

『천도교의절』 증보삼판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1991), p.16 참조.

吉川文太郞, 앞의 책, pp.361-362 참조.

이상호, 『대순전경』 3판 (서울: 대법사편집국, 1947), p.308; 대순진리회교무부, 『전경』 초판(1974), p.180 참조.

시점이 특정된 문헌은 『증산천사공사기』와 『증산의 생애와 사상』인데 1909년과 1908년으로 차이가 있다.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p.125;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출판부, 1979), p.198 참조.

같은 책, pp.21-23, p.126 참조.

『증산천사공사기』에는 태을주를 받은 이가 김○○로, 『대순전경』 초판에는 김경소(金京訴)로, 2판에는 김경은으로, 3판에는 김경흔(金京訢)으로 되어 있다. 같은 책, p.125;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경성: 동화교회도장, 1929), p.197; 이상호, 『대순전경』 2판 (경성: 동화교회도장, 1933), p.182 참조.

“泰仁 禾湖里 附近에 太乙呪가 喧籍히 傳播된다 하거늘 先生이 가라사대 이는 文公信의 所爲라. 時期가 尙早하니 그 긔운을 거드리라 하시고”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8 참조.

이상호, 『대순전경』 3판, p.303 참조.

『증산천사공사기』에는 ‘㖿’와 ‘啊’로, 『대순전경』 초판(1929)부터는 5판까지는 ‘耶’와 ‘啊’로, 6판에는 ‘耶’와 ‘訶’로 되어 있다. 이정립이 1956년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증산대도회요령』은 『대순전경』 6판과 동일하다. 고민환이 1962년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정원경』에는 ‘㖿’와 ‘訶’로 되어 있다.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125;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7; 이상호, 『대순전경』 3판, p.303; 이상호, 『대순전경』 5판 (김제: 증산대도회본부, 1960), p.429; 이상호, 『대순전경』 6판 (김제: 동도교증산교회본부, 1965), p.353;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김제: 증산대도회, 1975), p.13; 고민환, 앞의 책, p.106, p.120, p.126 참조. 증산교본부에서 발행한 『증산교요령』의 경우 주문은 『증산대도회요령』과 동일하다. 『증산교요령』 재판(1983)과 6판(1990)에 각각 초판이 1966년, 1956년 발행되었다고 되어 있다. 증산대도회의 설립이 1955년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1956년 『증산대도회요령』이 집필된 후 1966년부터 수정증보하여 『증산교요령』으로 6판까지 발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75년에 발간된 『증산대도회요령』은 증산대도회가 증산교본부로 개명된 이후(1963)에도 증산대도회로 활동하던 이들에 의해 발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증산대도회요령』과 『증산교요령』의 내용상의 차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증산대도회요령』에는 봉도식에 고판례가 설위되지 않았지만 『증산교요령』에는 봉교식에 고판례가 증산의 오른쪽에 설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5년 발행된 『증산대도회요령』이 1956년 집필된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23, p.46; 이정립, 『증산교요령』 재판 (김제: 증산교본부, 1983), p.28, p.65; 이정립, 『증산교요령』 6판 (김제: 증산교본부, 1990), p.28, p.65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126. 요시카와는 ‘都來’를 ‘敎’로 기록하고 있다. 吉川文太郞, 앞의 책, p.362 참조.

1864년 삼각산 도선암에서 간행된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은 표제명이 칠성경이다. 『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眞經』 (서울: 三角山道詵菴, 1864) 참조. 조선에서 소격서의 관리를 선발할 때 시험 방법은 “誦禁壇, 讀靈寶經, 科義延生經, 大一經, 玉樞經, 眞武經, 龍玉經, 中三經 [금단(禁壇)을 외워야 하고, 영보경(靈寶經)을 읽고, 연생경(延生經)·태일경(太一經)·옥추경(玉樞經)·진무경(眞武經)·용왕경(龍王經) 가운데 3개를 골라서 해석하도록 한다.]”이었는데 연생경(延生經)이 곧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이다. 『經國大典』, 「예전(禮典)」 取才條 참조.

『中華道藏』 第6冊, p.641.

일부 오탈자와 마지막의 급급여율령이 국문본에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일하다.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p.39, p.55 참조.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p17-18 참조.

홍범초, 앞의 책, pp.236-238; 『순천도교본』 (김제: 순천도법방, 1969), 부록 주문 칠성경 참조.

북두주와 차이가 나는 부분은 밑줄로 표시했다. 고판례를 정통성 있는 계승자로 여기는 증산도에서 사용하는 칠성경도 대부분 일치한다.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18 참조.

세가지 외에는 ‘大周天界’가 ‘大周天際’로 변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별의 위치를 바꾼 것이 아니라 신명을 재배치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차선근, 「칠성주의 ‘문곡’과 ‘육순’」, 『대순회보』 237 (2020), pp.71-76 참조.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123.

이와 관련되어 증산은 “공부하는 자들이 방위가 바뀐다고 말하나 내가 천지를 돌려놓았음을 어찌 알리오.”라고 말한 바 있다. 같은 책, p.263.

같은 책, p.241.

같은 책, p.145;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140; 이상호, 『대순전경』 3판, p.222 참조.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13; 고민환, 앞의 책, p.126; 『순천도교본』, 부록 주문 이십사절 참조. 증산의 친견제자로 보천교를 세운 차경석이 1919년 24방 조직을 60방으로 확대하면서 24절후의 24방을 추가한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박상규, 「근대 한국 신종교의 조직 연구 : 연원제를 중심으로」, p.233 참조.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9; 이상호, 『대순전경』 3판, p.209; 『순천도교본』, 부록 주문 이십사장 참조.

고수부 교단에서는 이십사장을 주문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김형렬의 영향을 받은 장기준 교단(순천교)의 경우 이십사장을 주문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고민환, 앞의 책, p.126; 『순천도교본』, 부록 주문 이십사장 참조. 이상호 교단의 경우 절후주에는 이십사장이 없지만 이십팔수, 이십팔장, 이십사절후, 이십사장이 모두 진법주에 포함되어 있다.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13, pp.15-16 참조. 증산법종교나 증산도의 경우 순천교와 같이 이십사절후와 이십사장을 각각 주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경』 (김제: 증산법종교본부), pp.30-32;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15, p.20 참조.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0, p.236;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328 참조.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9; 이상호, 『대순전경』 3판, p.209;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20, p.143, p.322; 이재원, 「대순사상의 우주관 연구 : 시간관과 공간관을 중심으로」, 『대순종학』 2 (2022), pp.104-105 참조.

홍범초, 앞의 책, p.225 참조.

같은 책, p.237; 『순천도교본』, 부록 주문 이십팔수 이십팔장;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15-16 참조. 증산도에서도 이십팔수와 이십팔장을 각각 주문으로 사용한다.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23 참조.

『증산천사공사기』에는 원진(願臻)으로 『대순전경』 초판 이후에는 원진(願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81;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6 참조.

김탁, 『한국의 관제신앙』 (서울: 선학사, 2004), p.23 참조.

같은 책, pp.48-70 참조.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229;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p.94-95 참조.

같은 책, p.156, pp.270-271, pp.282-283 참조.

같은 책, p.206 참조.

증산은 운장주를 짓고 장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다고 밝혔다. 장효순의 난은 빈사상태였던 장효순의 아들을 증산이 살리지 못하자 효순의 부친이었던 장흥해가 증산을 살인자로 몰아서 구타하고 가족들에게까지 행패를 부린 사건으로 이에 대해서 증산은 분쟁의 기운을 받아서 재앙을 해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책, pp.27-30, p.41 참조.

같은 책, pp.18-20 참조. 증산 종단의 초기 기록에는 진법주와 관련된 일화가 기록된 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증산 종단에 진법주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면 증산이 전한 주문임은 명확하다.

부정확한 음으로 한자를 유추한 듯하다. 吉川文太郞, 앞의 책, p.363.

고민환, 앞의 책, p.134; 『순천도교본』, 부록 주문 진법주 참조.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p.15-16 참조.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p.41-42;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Ⅱ)」, p.264; 홍범초, 앞의 책, p.237 참조.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상』 (보천교중앙총정원, 1948), p.23b.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49 참조.

민영국(편), 『時鑑』 (보천교, 1984), 일월성도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124. 1950년대의 이상호 교단의 기록도 『증산천사공사기』와 대부분 동일하다.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14 참조. 『선정원경』(1962)은 근청(近聽)이 근청(近請)으로 되어있는데 오자로 보인다. 고민환, 앞의 책, p.127 참조.

증산이 운장주를 공개한 시점이 특정되어 있는 최초 문헌은 『대순전경』 초판으로 1909년 봄이다.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6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126.

같은 책, pp.27-32 참조.

고민환, 앞의 책, p.127;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14 참조.

본 글에서 오주는 대순신앙의 경전인 『전경』을 기준으로 했다.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168 참조. 증산도는 고민환, 이상호의 교단과 동일하게 고판례를 증산의 계승자로 신앙하지만 오주는 대순진리회와 동일하게 신천지(新天地), 시천주(侍天主)로 표기한다.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14 참조. 증산법종교의 경우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을 오주로 사용하고 있다. 『법경』, pp.1-2 참조.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p.40-42, p.54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80;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5; 이상호, 『대순전경』 2판, p.180; 이상호, 『대순전경』 3판, p.301; 이상호, 『대순전경』 4판 (서울: 대법사편집국, 1949), p.301; 『대순전경』 5판, p.427; 『대순전경』 6판, p.351; 『대순전경』 12판 (서울: 도서출판 말과글, 2001), p.299 참조. 『선정원경』에는 遠鎭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민환, 앞의 책, p.127 참조. 『선정원경』도 시천지(侍天地)로 기록되어 있다. 고민환, 앞의 책, p.126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80;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195; 이상호, 『대순전경』 2판, p.180; 이상호, 『대순전경』 3판, p.301; 이상호, 『대순전경』 4판, p.301; 『대순전경』 5판, p.427; 『대순전경』 6판, p.351; 『대순전경』 12판, p.300 참조.

이상호, 『대순전경』 3판, p.301; 이상호, 『대순전경』 4판, p.301 참조. 『선정원경』에는 원진(遠鎭)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민환, 앞의 책, p.127 참조.

추가된 오주는 다음과 같다. “① 新天地家家長世日月日月萬事知 新天地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②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侍爲天主顧我情永世不忘萬事宜 ③ 壽命誠敬信至氣今至願爲大降 福祿誠敬信至氣今至願爲大降 ④ 明德觀音八陰八陽至氣今至願爲大降, ⑤ 三界解魔大帝神位願趁天尊關聖帝君” 『대순전경』 3판, p.182; 이상호, 『대순전경』 4판, p.182; 『대순전경』 5판, p.262; 『대순전경』 6판, p.217; 『대순전경』 12판, p.184.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12 참조. 『증산교요령』에는 시천주(時天主)가 시천지(侍天地)로 수정되어 있다. 이정립, 『증산교요령』 재판, p.12; 이정립, 『증산교요령』 6판 (김제: 증산교본부, 1990), p.12 참조.

홍범초, 앞의 책, p.225 참조.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p.51-53 참조.

“옴바르지”는 관세음보살일정마니수진언(觀世音菩薩日精摩尼手眞言)의 vardi, varini에서 유래했으므로 불교식 한자인 唵嚩哩儜로 표기했다. 같은 글, p.52 참조.

홍범초, 앞의 책, p.55, p.207, p.225, p.237 참조.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17; 고민환, 앞의 책, p.127; 『순천도교본』, 부록 주문 개벽주 참조. 증산도의 개벽주도 세 문헌과 동일하다.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20 참조.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p.40-42 참조.

홍범초, 앞의 책, p.225;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14 참조.

「주문」 (태극도); 『주문』 (서울: 대순진리회수도부), p.8 참조.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p.14. 증산도도 신성주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증산도의 설립자인 안세찬 부친의 보천교 활동과 안세찬이 이상호의 대법사 활동에 참여했던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20; 편집부, 「증산도의 연혁으로부터 도맥까지」, 『월간천지공사』 26 (1990), pp.25-27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43.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pp.120-121;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p.294-295 참조. 증산의 행적을 주제별로 편찬한 경전에는 대부분 치병 관련 장에 이 일화를 배치하고 있다.

고민환, 앞의 책, pp.127-128 참조. 증산도는 “예고주; 지신주”로 표기하고 있는데 고판례 교단의 영향으로 보인다.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21 참조.

홍범초, 앞의 책, p.225 참조.

부산에 있는 태극도의 문헌인 『진경전서』(1987)와 『진경』(1989)에도 태극주가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1980년대의 문헌이므로 본 연구에서는 활용하지 않는다. 태극도편찬위원회, 『진경전서』 (부산: 재단법인태극도, 1987), pp.307-308; 태극도편찬위원회, 『진경』 (부산: 태극도출판부, 1989), p.428 참조.

증산법종교의 『용화진경』(1969)은 외부 공개가 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증산법종교의 태극주 전문은 『법경』과 홈페이지를 활용하였다. 『법경』과 홈페이지에서 태극주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홈페이지의 기록을 활용했다. 1995년 『법경』이 출판된 이후 과거의 문헌인 『용화진경』(1969) 필사본이 발굴되면서 수정된 것이 홈페이지의 주문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고민환, 앞의 책, p.138-139; 『법경』, pp.25-30;《증산법종교》, 「태극주」 (http://jsbeob.com, 2022. 10. 9. 검색);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206;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48 참조.

같은 글, pp.40-41 참조.

차이가 있는 부분은 굵은 글씨와 괄호로 표기했으며 괄호가 없는 곳은 누락된 부분이다.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186 참조.

이러한 제도화가 192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가 없다. 1920년대의 무극도 관련 언론 보도에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주문 8종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태극도편찬위원회, 『진경』, p.433; 「惑世誣民(혹세무민)하는 無極大道團(무극대도단)」,《동아일보》 1925. 7. 6. 참조.

『규정』 (부산: 태극도, 1963), 의식규정 p.6 참조. 1966년의 수도규정에는 신명주가 신장주로 기재되어 있다. 『수도규정』 (부산: 태극도, 1966), p.2 참조.

이정립, 증산교사, p.134.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339.

『무극대도교개황』에는 증산의 유서에 “無極大道德也 元亨利貞 布敎 五十年工夫”라는 글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글과 가장 유사한 기록이 바로 “无極神 大道德奉天命奉神敎大先生前如律令 審行先知後覺元亨利貞布敎五十年工夫”인데 실제 봉서에는 이 글이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全羅北道, 앞의 책, p.6 참조.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195, p.220 참조.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p.49-50 참조.

같은 책, p.209 참조.

같은 책, pp.191-192; 村山智順, 앞의 책, p.334 참조.

全羅北道, 앞의 책, p.12 참조.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 대신에 구천상제를 사용한 필사본 진법주는 정산이 증산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하기 전에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필사본 진법주는 정산이 1919년 증산의 유품을 전해 받은 때부터 1925년 4월 무극도를 창도하여 증산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한 때까지 사용한 진법주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산은 증산이 화천 후 금산사 미륵금상에 응해 있다가 1934년에 구천으로 임어했다고 밝혔다는 구전 전승이 있다. 따라서 정산이 1934년까지 사용한 진법주일 수도 있다.

대순 신앙에서 진법주는 항상 15신위로 구성되어야 하기에 신위의 삭제와 추가는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차선근, 앞의 글, pp.243-252 참조. 정산이 15신위를 변경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1936년까지 칠성이 영대나 옥황상제가 봉안된 도솔궁이 아니라 칠성전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15신위가 모두 영대에 명확히 봉안되는 시기는 1955~57년이므로, 정산은 1937~1957년의 특정 시점에 관성제군과 칠성대제를 진법주에 추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상규, 「대순신앙의 천계(天界) 관념 : 무극도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82-2 (2022), pp.198-200 참조.

진법주의 ‘봉명신’이 ‘무극신대도덕봉천명봉신교무극도주조정산’으로 변경된 시점은 1930년대 이후로 보아야 한다. 1920년대 무극도의 주문 중 정산을 무극도주조정산으로 표기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全羅北道, 앞의 책, pp.37-52 참조.

소원성취의 주체로서 봉명신이 사용된 것은 필사본 진법주가 정산이 무극도주로 추대되기 전에 사용된 것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진법주에서 소원성취의 주체가 정산 대신 도문소자가 되는 것은 우당이 정산을 조성옥황상제로 봉안하고 10년이 지난 1967년이었다.《태극도월보》, 「주문일부변경」 (구)제4호, 1967. 4, p.15 참조.

대순진리회의 운장주도 근청(謹請)으로 되어 있다. 『주문』 (서울: 대순진리회수도부), p.5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124; 고민환, 앞의 책, p.127 참조. 증산도의 운장주는 근청(近聽)이 근청(謹請)으로 되어 있다. 증산도종무원 편, 앞의 책, p.16.

증산법종교 또한 원형의 운장주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정산이 운장주를 1937년 이후 변형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일 가능성도 있다. 운장주는 증산 종단 전체에 잘 알려진 주문이고 따라서 증산법종교의 운장주 기원이 무극도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증산법종교 홈페이지》, 「운장주」 (http://jsbeob.com, 2022. 5. 11. 검색) 참조.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한한대자전 4』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p.702 참조.

같은 책, p.700 참조.

민원실, 「지남거(指南車) : 상제님께서 알려주신 척신과 魔가 풀리는 원리」, 『대순회보』 84 (2008), p.29 참조.

자료조사실 편, 앞의 책, pp.868-869;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206 참조.

중국 도교의 28수, 28장 대응과 정산의 대응은 차이가 있다. 이재원, 앞의 글, pp.107-109 참조.

전문이 남아있는 의성김씨 천전파 필사본이 1920년대 무극도 주문이라는 고증 결과와 증산으로부터 전해진 도통주를 1920년대에 정산이 변형할만한 이유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정산에 의한 변형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태을, 두우군, 삼이라는 핵심적인 용어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능위조화는 상통천문 하달지리 중찰인사와 중복되는 의미를 지니기에 삭제 되어도 뜻에 큰 변화는 없다. 왈음공천의 한문은 명확하지 않다.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212 참조.

같은 책, p18, p.213 참조.

박상규, 「대순신앙의 천계(天界) 관념 : 무극도를 중심으로」, pp.183-186 참조. 정산이 1925년 공표한 각도문에는 “仙佛儒大道正通”이라는 선을 수위로 한 정산의 사유가 나타난다.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202 참조.

대순진리회교무부, 같은 책, pp.208-209.

『전경』의 개벽주는 1940년대 이후 증산법종교에서 사용된 개벽주와 거의 동일하다. 1920년대에는 증산법종교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무극도에서 기원한 것이다.《증산법종교 홈페이지》, 「개벽주」 (http://jsbeob.com, 2022. 5. 11, 검색) 참조.

혈식천추는 천년동안 불천위로 제사된다는 뜻으로 오백년간일향(五百年間一享)과 상통한다.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326 참조.

같은 책, pp.110-111 참조.

같은 책, p.2, p.335 참조.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Ⅱ)」, pp.250-251 참조.

‘태극두파팔문신장’, ‘육정육갑둔갑신장’의 순서가 타 증산 종단의 개벽주와 다른 것이 전승과정의 오류인지 아니면 증산의 공사에 대한 정산의 해석에 따른 변형인지를 알 수 없다. 본 연구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全羅北道, 앞의 책, p.10.

최용환, 「伏魔殿을 차저서 無極敎正體 -8-」,《동아일보》1929. 7. 26; 村山智順, 앞의 책, p.336.

옥동선자는 옥동성자의 오기로 봉명신과 옥동성자는 정산을 의미하는 용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p.47-50 참조.

『태극도통감』(1956)의 도주약력에는 정산이 문도들에 의해 도주로 추대(推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태극도통감』, (부산: 태극도본부, 1956), p.17 참조.

원대주로 본다면 천전파 필사본은 1925년의 무극도 창도 이전 안동지역에 전해진 주문일 가능성이 크다. 필사본의 진법주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하감지위가 아니라 구천상제하감지위인 것도 1925년 이전의 주문이라면 쉽게 설명된다.

정산은 1920년대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태일성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pp.49-50 참조.

박한진·채성훈, 『구령삼정주와 신살주술』 (서울: 성숙한 삶, 2016), pp.6-18 참조.

「召九靈三精章」, UCI G701:B-00075369026 참조.

대순진리회교무부, 앞의 책, pp.210-211.

‘여신명합기길흉’은 ‘여귀신합기길흉’의 오기로 추측된다.

고판례 교단은 이 문구가 포함된 주역의 서문 전체를 주문으로 사용했다. 고민환, 앞의 책, pp.131-132 참조.

《매일신보》는 1936년 1월 26일부터 2월 14일까지 총 11회에 걸쳐 무극도의 부정적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권동우는《매일신보》가 당시 총독부 기관지의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하고 당시에는 유래가 없었던 연속보도를 통해 총독부와 언론이 무극도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면서 탄압을 강화했다고 보았다. 권동우는 총 11회의 보도 중 3회는 보도된 바가 없고 7회와 10회는《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www.koreanhistory.or.kr)에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했는데 3, 7, 10회 모두 국립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으로는 확인할 수 있으며 1회의 제목은 “民衆을 荼毒한 無極道의 極惡相‘으로 다른 회차와 차이가 있다. 주문과 관련된 회차는 2, 9회이다. 권동우, 「‘유사종교해산령’의 실체에 관한 연구 : ‘무극도’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학』 165 (2014), p.68 참조; 「民衆을 荼毒한 無極道의 極惡相 (一)」, 《매일신보》1936. 1. 26.; 「[二] 所謂無極道妖怪相」,《매일신보》1936. 1. 31; 「[九] 所謂無極道妖怪相」,《매일신보》1936. 2. 11 참조.

같은 글.

「[二] 所謂無極道妖怪相」,《매일신보》1936. 1. 31.

“여텬지합기덕 여일월합기명 여사시합기서 여신명합기길흉” 바로 앞의 “삼십삼천、도솔천、옥황상제성영지하、봉명신、옥동선자”를 원대주가 아니라 이 주문과 연결하면 옥황상제성령 아래의 정산이 성인의 경지에 오르기를 축원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1956년에 간행된 『태극도통감』의 태극도취지서에는 이와 거의 유사한 “度濟衆生者ㅣ 間千百年而一出하나니 所謂 與天地合其德하며 與日月合其明하며 與四時合其序하며 與鬼神合其吉凶者也라”는 내용이 있다. 우당은 태극도취지서를 일부 수정하여 대순진리회를 정의하는 글로 공표했다. 『태극도통감』 (부산: 태극도본부, 1956), p.2; 「대순진리회」, 『대순회보』 38 (1993), p.2 참조.

【참고문헌】

1.

『經國大典』.

2.

「召九靈三精章」, UCI G701:B-00075369026.

3.

『中華道藏』 第6冊..

4.

『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眞經』, 서울: 三角山道詵菴, 1864..

5.

고민환, 『선정원경』, 1962..

6.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한한대자전 4』,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7.

대순진리회교무부, 『전경』 초판,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74..

8.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출판부, 1979..

9.

민영국(편), 『時鑑』, 보천교, 1984..

10.

이상호, 『대순전경』 초판, 경성: 동화교회도장, 1929..

11.

이상호, 『대순전경』 2판, 경성: 동화교회도장, 1933..

12.

이상호, 『대순전경』 3판, 서울: 대법사편집국, 1947..

13.

이상호, 『대순전경』 4판, 서울: 대법사편집국, 1949..

14.

이상호, 『대순전경』 5판, 김제: 증산대도회본부, 1960..

15.

이상호, 『대순전경』 6판, 김제: 동도교증산교회본부, 1965..

16.

이상호, 『대순전경』 12판 서울: 도서출판 말과글, 2001..

17.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18.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상』, 보천교중앙총정원, 1948..

19.

이정립, 『증산교요령』 재판, 김제: 증산교본부, 1983..

20.

이정립, 『증산교요령』 6판, 김제: 증산교본부, 1990..

21.

이정립, 『증산대도회요령』, 김제: 증산대도회, 1975..

22.

자료조사실 편, 『고문서집성 7 : 의성김씨천상각파편(Ⅲ)』,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23.

증산도종무원 편, 『주문』, 대전: 증산도, 2020..

24.

태극도편찬위원회, 『진경전서』, 부산: 재단법인태극도, 1987..

25.

태극도편찬위원회, 『진경』, 부산: 태극도출판부, 1989..

26.

『규정』, 부산: 태극도, 1963..

27.

『법경』, 김제: 증산법종교본부,.

28.

『수도규정』, 부산: 태극도, 1966..

29.

『순천도교본』, 김제: 순천도법방, 1969..

30.

『주문』, 서울: 대순진리회수도부..

31.

「주문」, 태극도..

32.

『천도교의절』 증보삼판,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1991..

33.

『태극도통감』, 부산: 태극도본부, 1956..

34.

권동우, 「‘유사종교해산령’의 실체에 관한 연구 : ‘무극도’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학』 165, 2014. .

35.

김탁, 『한국의 관제신앙』, 서울: 선학사, 2004..

36.

민원실, 「지남거(指南車): 상제님께서 알려주신 척신과 魔가 풀리는 원리」, 『대순회보』 84, 2008..

37.

박상규, 「근대 한국 신종교의 조직 연구 : 연원제를 중심으로」,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21..

38.

박상규, 「대순신앙의 천계(天界) 관념 : 무극도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82-2, 2022. .

39.

박상규, 「무극도 관련 문헌 연구」, 『대순사상논총』 41, 2022. .

40.

박상규, 「무극도 주문 연구 : 의성김씨 천전파 소장 필사본 고증을 중심으로 」, 『대순종학』 2, 2022..

41.

박인규, 「한국 불교 진언과 대순진리회 주문의 비교 연구」, 『대순사상논총』 22, 2014. .

42.

박인규, 「한국 신종교의 주문 수행」, 『종교와 문화』 32, 2017..

43.

박한진·채성훈, 『구령삼정주와 신살주술』, 서울: 성숙한 삶, 2016..

44.

이재원, 「대순사상의 우주관 연구 : 시간관과 공간관을 중심으로」, 『대순종학』 2, 2022..

45.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Ⅱ)」, 『대순사상논총』 23, 2014. .

46.

차선근, 「칠성주의 ‘문곡’과 ‘육순’」, 『대순회보』 237, 2020..

47.

편집부, 「증산도의 연혁으로부터 도맥까지」, 『월간천지공사』 26, 1990..

48.

홍범초, 『범증산교사』, 서울: 도서출판 한누리, 1988..

49.

「[九] 所謂無極道妖怪相」, 《매일신보》 1936.2.11.

50.

「民衆을 荼毒한 無極道의 極惡相 (一)」, 《매일신보》 1936. 1. 26..

51.

「[二] 所謂無極道妖怪相」, 《매일신보》 1936. 1. 31..

52.

「주문일부변경」, 《태극도월보》 (구)제4호, 1967. 4..

53.

「惑世誣民(혹세무민)하는 無極大道團(무극대도단)」, 《동아일보》 1925. 7. 6..

54.

최용환, 「伏魔殿을 차저서 無極敎正體 -8-」,《동아일보》1929. 7. 26..

55.

《증산법종교 홈페이지》 http://jsbeob.com.

56.

吉川文太郞, 『朝鮮諸宗敎』, 京城: 朝鮮興文會, 1922..

57.

全羅北道, 『無極大道敎槪況』, 1925..

58.

村山智順, 『朝鮮の類似宗敎』, 京城: 朝鮮總督府,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