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여는 글
과거의 특정 시대 종교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있어서 그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실관계를 오인하거나 잘못 해석할 때, 해당 현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 치명적 오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까지 연속되고 있는 해당 종교 현상에 관한 기술에도 영향을 미쳐 이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1)
무극도는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무극도 종교 현상을 기술하고 해석하는 작업 또한 앞서 지적한 문제점들을 다소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무극도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교단과는 달리, 경전을 비롯한 교단 내부 문헌이나 기관지 등을 발간한 적이 없어 역사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1920~30년대 천도교, 보천교, 불법연구회(원불교)의 교단 내 기록은 현재까지 다소간 보존되어 있지만, 무극도의 내부 문헌은 사실상 없다. 1920~30년대를 기술한 교단 문헌은 무극도의 후신인 태극도에서 1956년 발간한 『태극도통감』이 최초이다. 하지만 이조차 무극도를 창립한 정산의 행적을 간략하게 담은 ‘도주 약력’에 무극도의 설립, 해산, ‘태극도’로의 교단 명 변경을 정확한 시점 없이 대략 설명하는 정도이다.2) 결국 1950년대까지도 1920~30년대 무극도의 종교적 세계를 정확하고 자세히 투영한 내부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단편적인 신문 기사를 제외한다면 무극도를 1920~1930년대에 기술한 문헌은 일제 관변(官邊) 기록이 거의 유일하다. 도청과 경찰, 조선총독부 촉탁 학자가 일제 식민 지배를 위해 조사하고 기록한 『무극대도교개황(無極大道敎槪況)』, 『보천교일반(普天敎一般)』,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類似宗敎)』가 바로 그것이다.3) 1920~30년대 무극도를 식민 통치자라는 외부인의 관점에서 조사한 자료가 후대의 지평이 아닌 당대의 맥락에서 무극도를 분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식민 지배자의 관점에서 조사된 1920~30년대의 관변 기록만으로 무극도의 종교적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종교 현상에 관한 학문적 연구로서는 큰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종교 현상이 그 세계 내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위상을 더욱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종교적 세계의 지평에서 신앙체계와 교단 역사를 서술한 문헌이나 자료를 반드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무극도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그 종교 현상을 기술한 관련 교단 문헌이 나타나지 않는다. 무극도의 역사와 신앙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문헌화는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70~80년대에 결실을 보았다. 따라서 교단 관점에서 생산된 문헌의 경우 1970년대 이후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당대의 관변 기록이나 후대 교단 문헌을 연구에 활용하려면 오류나 왜곡을 교정하는 작업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당대 관변 기록은 생산 주체가 식민 지배자이므로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소문이나 유언(流言)을 취합하고 각 교단을 강제적이고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조사하여 기술했다는 점을, 후대의 교단 기록을 참조할 때는 반드시 신앙체계의 변동과 종파적 관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단의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과 분열이 있을 때, 해당 종교 현상은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도자의 교체나 교리적 분열 등으로 신앙체계가 급격히 변동되거나 파편화되면 연속선상의 교단 문헌조차 과거의 종교적 세계에 대해 왜곡과 굴절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련 교단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종파 간의 관점과 기술 방향의 차이를 고려하여 보정되어 활용되어야 한다. 신앙체계의 변동과 종파적 관점을 명확히 파악하여 그 변동에 따른 후대의 왜곡을 최대한 피해 사용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본 연구에서는 무극도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인프라 구축을 위해 1920~30년대 일제의 관변 기록을 해제하고 당대의 단편적 기록 및 후대 교단 문헌과 비교 검증하여 그 오류와 한계를 명확히 하여 문헌의 가치를 더욱 세밀하게 평가해 보고자 한다. 또한 후대의 관련 교단 문헌 중 무극도를 서술한 대표적 문헌이 각각 어떤 지평에서 무극도의 세계를 기술했는지를 검토하고 문헌 간 비교를 통해 고증하여 그 자료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1920~30년대 무극도 관련 관변 기록
『무극대도교개황(無極大道敎槪況)』은 일본의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우방문고(友邦文庫)에 소장된 자료로 일제 시기 전라북도 도청이 만든 비밀문건이다.4) 우방문고에는 전라북도 관련 자료가 세 종류가 있는데 ① 1926~1929년에 전라북도 지사를 역임한 와타나베 시노부(渡邊忍, 1883~1955)가 재임 기간에 수집한 ‘와타나베 시노부 문서’, ②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의 『조선사회경제사진집』, ③ 전라북도 도세 안내 책자 및 기타자료이다. 『무극대도교개황』은 마지막 ③에 포함된다.5)
『무극대도교개황』은 대략 1925년에 완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문헌 마지막 항목인 <무극도간부일람표>의 시점이 1925년 11월 5일이기 때문이다.6) 그러나 첫째 항목인 <무극대도교연혁(無極大道敎沿革)>에 1923년까지의 사건에 대해서는 명확히 연도를 표기하다가 그 후 연도 표기 없이 ‘본월 초순(本月 初旬)’과 같이 현재 시점으로 기술한 것은 작성 시작 시점이 1924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7) <무극대도교연혁>이 무극도 본부 대지의 구매 시기를 ‘본월 초순(本月 初旬)’이라고 기재하고 있고 1936년에 간행된 『정읍군지』에서도 무극도장의 시공을 1924년 3월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8)
『무극대도교개황』의 제1~5까지의 항목은 일본어로 된 자료인데, 정보 보고를 위한 감시자료서의 관점이 드러나고 있어 경찰의 탐문 및 정보 수집을 통해 작성된 것이다.9) 그에 비해 후반부 제6 <강령 및 도규(道規)>, 제7 <무극도취지서>, 제8 <무극도간부일람표>는 한글 및 한자로 된 자료이며, 단순히 탐문 등으로 알기 어려운 내부 정보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교단 내에서 정리한 문서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추정하는 것은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총독부가 신종교에 대한 표면적인 유화 전술로 교단 공개를 유인 또는 강제하여 신종교를 이용하거나 기술적으로 탄압을 가해 해체하려고 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즉 1915년 <포교규칙> 제정, 1920년 <포교규칙> 개정, 1920년 법인ㆍ조합 설립 허가 등을 통해 조선총독부는 표면적으로 신종교에 대한 정책 전환을 표방하여 교단 공개를 유인ㆍ강제하고, 교단이 공개되면 기존의 강력한 통제 법령을 적용하여 신종교를 탄압한 것이다.10) 관변 기록인 『무극대도교개황』에서 보천교가 1920년 말 종교유사단체로 공인되었다고 기술된 것도 조선총독부가 통차원에서 신종교의 신고와 등록을 강요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11) 이러한 맥락에서 『무극대도교개황』 후반부의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부분은 1925년 교단 내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무극도가 1924년~25년 강한 탄압을 받았고, 이에 대응하여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받기 위해 활동하면서 교단 관련 문서를 만들었다는 추론을 뒷받침하는 1925년 3월과 5월의 《조선일보》 기사 역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12)
결국 종교유사단체 인정을 조건으로 신종교 교단의 신고와 등록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신종교를 이용, 통제, 해체하려 한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신종교 교단이 그 내부 정보를 일정한 수준에서 식민지 관청에 제출하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헌 대부분은 신종교를 탄압, 해체하는 용도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3) 『무극대도교개황』의 후반부도 이러한 유도와 강제의 과정을 통해 관에서 입수한 내부 문서로 볼 수 있다.
일제 시기 신종교가 탄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종교적이거나 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용어나 내부 정보의 노출을 지양했으리라는 추론은 합리적이다. 『무극대도교개황』의 교리 관련 내용에 종교적으로 비칠 수 있는 용어가 대부분 삭제되고 수행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취지에는 신앙의 대상인 증산이나 상제라는 표현이 전혀 없으며, 신앙 대상도 천(天)이나 도(道)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종지와 목적은 수록되지 않고 ‘사강령’과 ‘삼요체’ 일부만이 강령으로 종합되어 요약되어 있다. 또한 도규에 성직자를 직원으로 지칭하고 있어 마치 법인의 사원(社員)과 같은 형식을 보인다. ‘무극도 간부일람표(無極道幹部一覽表)’도 직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14) 후반부가 사실상 교단 공개의 압력 속에서 탄압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내부에서 작성된 문서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해 본다면 고등 경찰의 탐문과 정보원을 통해 수집 작성되었다고 보이는 일본어로 기재된 전반부(제1~5항)는 일부 사실이 부정확하고 왜곡될 가능성이 있기에 여러 다른 문헌을 교차 검증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부에서 만들어져 외부로 유출되었다고 보이는 후반부(제6~8항)는 1925년 당시의 무극도 실정에 관해 내부에서 생산된 문헌으로 볼 수 있어 무극도 세계의 이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문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보천교에 관한 비밀문건인 『보천교일반(普天敎一般)』은 전라북도 도청이 1926년 6월 만든 『관내 최근 상황설명자료(管内最近ノ状況説明資料)』의 60번째 항목이 별책이 된 것으로, 당시까지 조사된 보천교에 대한 모든 자료를 종합한 문헌이다.15) 무극도에 관한 내용은 약 2쪽에 불과하며, 『무극대도교개황』의 연혁 부분을 일부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16) 무극도의 장래를 상당히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기술하면서 따로 기록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고 마무리한 정도이므로 무극도 연구에 직접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17)
그렇지만 이 자료는 증산의 종교활동이 그의 서거 후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계승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보천교 등 여러 교단이 무극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확인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무극도를 살펴보는 데에 참고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당시의 시점에서 보천교의 내부 조직과 교단의 분열상, 교헌과 각종 규정까지 자세히 수록하고 있어 식민 지배자의 시각으로 인한 왜곡을 교정하면 교단의 성립, 변동, 특징 등을 분석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18) 또한 교단 문헌인 『보천교연혁사』와 『증산교사』가 각각 1948년과 1977년에 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보천교일반』은 당대의 보천교 역사 기록의 가치를 지닌다.19) 『보천교일반』에 수록된 일부 자료가 보천교 교단 공개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보천교가 무극도를 둘러싼 종교 지형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는 관점에서, 『보천교일반』은 일제 공문서와 신문 자료 등과 교차 검증하여 사용된다면 무극도 연구에 참고로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類似宗敎)』는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사자료 42집으로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이 편찬한 문헌이다. 전 13장으로 되어 있는데, 신종교를 유사종교로 취급하여 동학계, 훔치계, 불교계, 숭신계, 유교계, 계통불명 등으로 분류하고 교조의 약력, 기본 교의, 교단 연혁, 그리고 분파를 소개하고 있으며, 교단 분포와 교세, 의식, 영향, 교도, 교적(敎跡) 등을 종합하여 다루고 있다.20) 그 가운데 무극도 관련 내용은 『무극대도교개황』, 『보천교일반』과 차이가 있는데, 『조선의 유사종교』가 1933~34년 무렵의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21) 차이가 나는 내용 대부분은 부정확한데, 이는 1920년대의 무극도 관련 문헌이 대외비로 폐기되었거나 이미 일본으로 반출되어 참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2)
무라야마와 함께 ‘조선민속학회’에서 활동한 민속학자 손진태(孫晋泰, 1900~?)는 무라야마의 조사를 각지의 경찰에 의뢰하여 수행된 것으로 평하고 학술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 바 있다.23) 무라야마는 『조선의 유사종교』 서언(緖言)을 통해 “기록과 정보가 부족하여 당시 성황을 이루는 단체에 대해서 외부적 관찰에서 유래하는 세평에 의존하였고, 교세와 내력에 대해 경무국의 출판물을 참고하고 각도 경찰부에 의뢰해 조사하였다.”라고 하여 공권력에 의한 조사 방법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손진태의 비판을 의식한 듯 현지 조사도 일부 병행한 듯하다. 실제 교단 본부에 가서 지방 교구의 실상을 거듭 조사한 바도 적지 않다고 서술하였기 때문이다.24)
주목할 점은 이 문헌에 1925년 이후의 무극도 신앙체계와 도장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무극대도교개황』으로는 알 수 없었던 1926년~1934년의 무극도의 세계를 조망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또한 본문 뒤에 부록으로 ‘무극도취지’와 ‘무극도강령’을 일본어로 첨부하였는데, 이는 『무극대도교개황』의 <무극도취지서>, <강령 및 도규>와 상응한다. 취지서와 강령은 한국어와 일본어라는 점 외에 차이가 없지만, 도규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도규에서 보이는 차이는 1934년 8월 이전에 무극도의 도규가 개정되어, 조직체계가 일부 변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조선의 유사종교』는 단편적 기록을 제외하면 1926~34년의 무극도에 대한 거의 유일한 문헌이다. 또한 동학계 신종교와 보천교에 대한 1930년대의 정보를 부분적으로 획득할 수 있기에 유용한 비교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이 문헌은 무라야마가 스스로 시인했듯이 ‘외부적 관찰에서 유래한 세평’에 의존한 데서 오는 부정확성과 경찰 조직을 활용한 조사, 그리고 지금까지 학계에서 지적된 무라야마의 한국 신종교에 대한 시각 등을 고려하면서 다른 문헌과의 교차 검증을 통해 신중하게 활용되어야 한다.25)
무극도 성립 시기를 1918~25년으로 본다면 『무극대도교개황』, 『보천교일반』은 무극도 설립 시기의 종교활동, 『조선의 유사종교』는 무극도 발전기의 신앙체계를 기술한 당대의 기록이다.26) 모두 무극도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무극대도교개황』은 탐문 정보와 <도규>, <간부일람표> 등이 수록되어 있어 조직 구성 원리와 작동방식까지도 대략 살펴볼 수 있기에 교단 이해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하지만 세 문헌은 모두 참여관찰에 의해 정보를 얻지 않았고, 그 생산 의도에 따른 왜곡과 해석이 존재하므로 문헌에 대한 면밀한 고증이 필요하다.
무극도는 당대의 교단 내 문헌이 존재하지 않기에 세 자료의 정확성이 고증되고 평가되지 않으면 사실상 이를 활용한 연구는 그 토대가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여러 자료와 비교하여 그 기록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세 자료 중 문헌 간 비교를 통해 더욱 엄밀하게 정확성을 검토해야 하는 대상은 『무극대도교개황』과 『조선의 유사종교』이다. 『보천교일반』에 기록된 무극도 관련 내용이 극히 적고 대부분 『무극대도교개황』과 대략 같기 때문이다.
『무극대도교개황』은 행정력과 경찰력을 활용해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였기에 종파적 편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해제에서 살펴보았듯이 『무극대도교개황』의 제6~8항목은 일본어로 기록된 제1~5항목과 달리, 내부에서 작성된 1차 문서 또는 그 필사본으로 한문과 한글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인을 위하여 한글 조사 옆에 일본어 조사를 부기하였다.27) 『조선의 유사종교』 역시 제6~8항목과 상응하는 부록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자료가 일본어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원본을 교단이 생산한 1차 자료라 보기는 어렵다.
두 문헌이 공통으로 지니는 기사를 비교할 때, 정확한 쪽은 『무극대도교개황』이다. 앞서 밝혔듯이 『조선의 유사종교』는 무극도 도장의 건립을 1922년으로 기술하고 있는 등 1920년대의 사실에 대해서 잘못 기술한 부분이 많다. 두 문헌이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도규>인데, 정확성과 차이가 지니는 의미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다른 문헌과 비교해야 한다. 『무극대도교개황』과 『조선의 유사종교』에 실린 도규를 다른 문헌과 비교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기록은 당대의 신문 기사나 판결문 등이다.28) 1925~31년의 신문 기사와 판결문에는 무극도 조직의 중요 직책으로 도주(道主), 도장(道長), 주선원(周旋元), 주선가(周旋家), 찰리(察理), 순동(巡動), 종리(從理), 연락(聯絡), 부분(部分), 포덕(布德), 운동원(運動員), 운동가(運動家) 등의 명칭이 나타난다.29) 이 명칭들은, ‘도주’와 ‘포덕’을 제외하면, 『무극대도교개황』에만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극대도교개황』의 도규 및 조직 관련 기록이 1931년까지의 실제 상황과 일치했음을 의미하여 상당한 정확성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30)
여러 직책 중 특히 ‘도장(道長)’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6년의 기사와 1927년의 판결문은 정산의 부친인 조용모(趙鏞模, 1877~1951)가 도장의 직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명칭이 지니는 의미나 관련 기사 및 판결문 등을 보더라도 도장인 조용모는 1920년대에 도주인 정산을 대리하여 활동하였다.31) 『무극대도교개황』의 무극도 도규 4조에 “본도(本道)의 도장(道長)은 도중내외사무(道中內外事務)를 총할(總轄) 함”이라는 내용과 일치한다.32) 이는 『무극대도교개황』의 도규가 상당히 정확함을 잘 보여준다.
『조선의 유사종교』의 도규에는 『무극대도교개황』의 직책에 상응하는 직위의 명칭이 모두 변경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도장(道長)의 직책에 상응하는 것은 없다. ‘도장’에 상응하는 직책이 『조선의 유사종교』에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이 문헌의 기초자료가 『무극대도교개황』에 비해 후대의 것임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1920년대의 도규가 1932년 이후 개정되어 『조선의 유사종교』에 게재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조선의 유사종교』에만 나타나는 무극도 간부 직책 중 1925~31년 신문 기사와 일치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무극대도교개황』과 『조선의 유사종교』를 비교해보면 1925년까지는 『무극대도교개황』이 더 상세하고 정확하며, 1925년 이후의 경우에는 조사 시점상 『조선의 유사종교』의 내용이 당연히 더 많다. 물론 『무극대도교개황』의 경우에도 일본어로 기술된 제1~5항의 연혁, 조직, 주문, 치성, 간부이름(幹部氏名) 등의 부분에서 소문에 의존한 정보를 활용하여 명확한 사실관계를 잘못 기술하고 있고, 한자 사용 부분에서 동음이자(同音異字)나 유사 한자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 예로 무극도 창설자인 정산의 탄생지를 밀양으로, 증산의 몰일을 생일로 기재하면서 6월 24일이 아니라 23일로, 주선원(周旋元)이라는 직책을 주시원(周施員)으로, 연락(聯絡)을 연락(連絡)으로, 부분(府分)을 부분(部分)으로 오기한 점 등을 들 수 있다.33) 하지만 내부 문서에서 기원한 제6~8항까지의 <강령 및 도규>, <무극도취지서>, <무극도간부일람표> 등은 다른 문헌과 비교하면 그 정확도가 높다. 1925~26년 무극도가 공산주의 단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본부가 수색받기도 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당시에 교단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가 도규나 간부일람표에 접근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34) 이러한 점들은 이 자료가 내부 문건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상의 문헌 고증의 결과는 1925년 이전의 무극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무극대도교개황』 제6~8항의 후반부, 1926~1934년의 무극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조선의 유사종교』를 활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Ⅲ. 1970~80년대 무극도 관련 교단 기록
무극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련 교단의 문헌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증산의 종교운동에 뿌리를 둔 교단의 시각에서 무극도의 신앙체계와 교단사를 기술한 것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당시의 무극도 내부 기록이 존재한다면 이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무극도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그 신앙체계나 교단사를 기술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더 후대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무극도의 역사와 신앙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작업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74년에 처음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97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증산 종단의 무극도 기록인 『전경』, 『증산교사』, 『태극진경』의 세 문헌을 검토할 것이다.
『전경』, 『증산교사』, 『태극진경』의 세 문헌 중 가장 앞서 출판된 것은 대순진리회의 경전인 『전경』이다. 초판은 1974년 4월 1일 발행되었는데, 대순진리회 교무부가 편찬하고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발행하였다.35) 대순진리회 초기에 간행되어 대순진리회의 역사를 담고 있지 않아 대순진리회 역사 연구에는 활용되지 않지만, 증산과 정산의 행적을 모두 다룬 최초의 경전이기에 무극도와 태극도 연구에는 중요한 문헌이다.
무극도에서 기원한 교단의 최초 경전은 태극도 교화부가 편찬한 『선도진경(宣道眞經)』이다. 초판은 1965년 12월 1일 청문사(靑文社)에서 발행되었다.36) 대순진리회 설립자인 우당 박한경(이하 우당)이 도전(都典)으로 태극도를 총괄하던 시기였으므로 이는 『전경』과 동일하게 우당의 기획이다. 신앙 대상인 증산의 행적을 주제별로 총 9장으로 서술하였지만, 무극도 창립자인 정산에 관해 기술한 내용은 없다.37) 그 연유는 경전 제목의 ‘선도(宣道)’라는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다.
선도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1963년에 간행된 태극도 『수도요람』이다. 이에 따르면 태극도의 역사는 선도기(宣道期), 창도기(創道期), 수도기(修道期)로 나뉜다. 증산의 탄생(1871년)부터 화천(1909년)까지를 선도기(宣道期), 정산이 만주로 망명한 1909년 이후부터 무극도의 설립 및 해산을 거쳐 회문리로 귀향하여 홀로 수도하던 1945년 해방 전까지를 창도기(創道期), 그리고 해방 후 정산이 종교활동을 재개한 후부터 부산 감천에 수도장을 건설하고 우당에게 도의 운영 전반을 맡기고 화천 하기까지를 수도기(修道期)로 구분하고 있다.38) 1960년대 태극도의 세계에서 증산은 이 세상에 도를 펼친 선도주(宣道主)이고, 정산은 증산이 펼친 도를 이어 교단을 세운 창도주(創道主)이기에 증산의 행적을 기록한 경전이 『선도진경』으로 명명된 것이다.39)
우당은 정산의 생애를 기록한 『창도진경(創道眞經)』을 편찬할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1967년 2월 발행된 《태극도월보》 (구) 제2호의 『국문판 선도진경 발간; 창도진경도 금년에 발간계획』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40) 이 기사는 1967년 2월 이전에 『창도진경』의 편찬이 시작되고 있었고 정산의 행적을 정리한 일단의 문헌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태극도가 분열되기 이전 이미 정산의 행적에 관한 자료가 수집되어 정리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창도진경』 편찬 작업은 1968년에 시작된 태극도 내홍과 분열 때문에 진척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20년 가까이 흐른 1987년이 되어서야 태극도에서 정산의 행적이 기록된 『진경전서』의 『태극진경』이 출판되었던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41)
그에 비해 대순진리회는 『창도진경』 편찬 작업을 위해 정리된 문헌을 활용하여 증산의 행적과 언행을 중심으로 한 『전경』에 정산의 행적을 한 장(章) 할애하여 교단사에 해당하는 교운에 배치하였다.42) 이는 앞서 살폈듯이 애초 계획한 『창도진경』을 『선도진경』과 함께 모아 발간하려던 계획을 완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여러 사실은 『전경』의 무극도 기사가 대순진리회 창설(1969년)부터 『전경』 출판(1974년) 시기까지 새롭게 자료를 수집하여 편집된 것이 아니라, 1968년의 분열 이전 결집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경』 편찬위원의 인터뷰 자료로도 확인할 수 있다.43) 인터뷰에 따르면 정산의 행적에 관한 기록인 『전경』 교운 2장의 경우, 대부분 우당으로부터 전달받은 문헌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결국 『전경』의 정산 관련 기록은 1960년대의 태극도의 종교적 세계에서 바라본 무극도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44)
『전경』 편찬에서 가장 주목할 것 중 하나는 교단 외의 학자와 관계자가 참여한 편찬위원회의 구성이다. 이는 객관성과 정확성의 제고(提高)를 추구한 것으로서 타 증산 종단의 역사 기록과 차별성을 띠어 『전경』의 무극도와 태극도 관련 기록의 객관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45)
『증산교사』는 동화교 및 대법사 활동을 정통으로 전제하고 이를 중심으로 증산 종단 전반의 역사를 기술하고 무극도를 비정통적 종파로 분류하여 비판적으로 기술한 문헌이다. 정리한 총 37개의 장(章) 중에 무극도 관련 기록이 5개의 장에 실려있어 무극도 연구에 활용되었다.46) 1977년에 출간되었지만, 원고는 1968년 이전에 탈고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저자인 이정립(李正立, 1895~1968)이 사망한 후 그 유고가 1977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이다.47) 1949년까지의 기사가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1949년 이후에 편집된 것이다. 1장에서 증산이 중요시했던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교단의 미래에 대한 비결로 보면서 계사년(1953)까지의 증산 종단의 교단사로 해석한 점에서 보면 1953년 이후에 편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48)
저자는 1919년 보천교에 입교하여 1922년 교경 편찬위원으로 임명되어 월곡 차경석(車京石, 1880~1936)으로부터 증산의 일화를 듣고 기록한 바 있고, 보천교에서 축출된 이후 친형인 이상호(李祥昊, 1888~1967)와 함께 『대순전경』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대에 동화교(東華敎), 1940년대에 동아흥산사(東亞興産社) 및 대법사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49) 따라서 해당 교단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정확하나 이 외의 교단에 대한 기록은 정확성이 떨어지며 증산 종단의 역사를 편파적으로 기술한다. 따라서 보천교와 무극도 관련 기록에 대해서는 이정립의 종파적 입장을 고려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다.50) 즉 무극도 관련 기록이 여러 장에 걸쳐 존재하지만, 그 종파적 당파성을 고려하여 타 문헌과의 비교를 통해 자료를 활용해야 한다.
『태극진경』은 태극도의 경전인 『진경전서』(1987)와 『진경』(1989)의 후반부로 정산의 행적과 언행에 대한 기록이다. 『진경전서』와 『진경』은 1965년의 『선도진경』 이후 20여 년만에 간행된 태극도 경전으로, 『전경』처럼 교단이 태극도와 대순진리회로 분열된 후 출판되었다.51) 증산 관련 기록은 『무극진경』으로 전반부에, 정산 관련 기록은 『태극진경』으로 후반부에 있으며 모두 연대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태극진경』을 살피기 전에 이 경전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리적 변화의 부분이다. 이는 그 경전의 명칭에서도 드러나는데, 바로 1960년대의 『선도진경』, 『창도진경』이라는 명명법이 『무극진경』과 『태극진경』으로 변화된 것이다. 1980년 출판된 『태극도요람』에서 증산과 정산이 각각 선도주와 창도주로 명명되고 있고, 1983년에 『선도진경』 3판이 출판되었기에 1983년까지 1960년대의 교리체계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52) 그렇지만 1987년의 『진경전서』는 그 제목에서부터 증산을 선도(宣道) 대신 무극(無極)으로, 정산을 창도(創道) 대신 태극(太極)으로 연결하고, 그 관계를 ‘이도일체(以道一體)’로 설정하여 변화를 보인다. 1989년 『진경』에서는 증산과 정산의 신격 앞에 각각 무극주(無極主)와 태극주(太極主)를 부가하여 교리적 변화를 공식화한다.53) 증산과 정산의 관계가 선도(宣道)와 창도(創道)라는 역사적 역할에서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이라는 형이상학적 본체론 및 무극주와 태극주라는 신학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변경되었다.
이는 태극도의 ‘기원(起源)’ 부분에서 증산의 신격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 관한 서술 내용이 변경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즉 1956년 『태극도통감』 초판과 1980년 『태극도요람』의 ‘기원(起源)’에서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 ‘관령주재태극지천존[管領主宰太極之天尊; 태극을 관령주재하는 천존]’이었지만, 『진경전서』(1987)와 『진경』(1989)의 ‘기원(起源)’에서는 ‘관령주재무극지천존[管領主宰无極之天尊; 무극을 관령주재하는 천존]’이다.54) ‘모든 것의 근원인 태극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가 주재한다’라는 태극도 교리체계는 1987년에 이르러 무극과 태극을 분리하면서 크게 변질된 것이다.55)
이 교리적 단층이 발생한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기 어렵지만, 그 중심에 ‘이도일체(以道一體)’라는 새로운 교리체계가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용어는 1980년 이전의 태극도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증산과 정산의 관계에 대한 ‘이도일체(以道一體)’ 교리는 결과적으로 증산과 정산을 대등하게 놓음으로써 정산과 우당을 명확히 차별화하여 우당이 교단을 총괄한 시기였던 1958~68년의 종교활동을 부정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핵심 교리 변경이 태극도에 남겨진 우당의 흔적을 지우려는 의도였음을 시사한다.56)
앞서 살폈듯이 이 교리 변동은 창도주인 정산이 남긴 중요 문헌의 수정으로까지 이어졌다. 태극도의 ‘기원’에만 자구 수정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취지서’에도 기존에 없던 글자를 추가해 수정이 이루어졌다. 즉 “ … 사도로써 내세 하신 분은 공자, 석가, 노자이고 이제 우리 증산성사이시다. [ … 以師道而來者는 釋迦孔子老子而今我甑山聖師也시라.]”를 “ … 사도로써 내세 하신 분은 공자, 석가, 노자이시며 무극으로 내세 하신 분은 이제 우리 강성(증산)상제이시다. [ … 以師道而來子는 釋迦孔子老子也요 以無極而來者는 今我姜聖(甑山)上帝시라]”로 변경한 것이다.57) 무극과 태극을 구분하여 증산과 정산을 각각 무극주와 태극주로 설정한 교리 변경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신앙 대상에 대한 신학적 변화는 신앙과 의례의 체계 전반에 변화를 동반할 것이 틀림없었고, 이는 『태극진경』에 수록된 정산의 행적과 언행 기록에도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58) 『태극진경』의 기록이 1980년대 후반에 급격하게 변동된 태극도의 신앙체계를 기반으로 서술된 무극도와 태극도의 역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더하여 1970년대와 80년대에 수집 정리된 자료들의 신빙성 문제에도 주목해야 한다. 앞서 살폈듯이 1968년 출판을 계획했던 정산 관련 기록은 1974년 대순진리회의 『전경』에 대부분 수록되었다. 『태극진경』을 『전경』과 비교하면 차이가 나는 부분과 추가된 부분이 적지 않다. 이것은 『태극진경』이 1970~80년대 발굴 수집 정리된 자료를 중심으로 한 문헌임을 의미한다.59) 1967~68년에도 1차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던 상황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태극진경』에 추가되거나 수정된 부분은 1차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기보다 대부분 구전과 전승에 따른 2차 자료를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60) 따라서 『태극진경』의 기록은 여러 다른 문헌들과 교차 검증하여 참고자료 정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다음 단락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여러 문헌을 교차 검증하여 그 신빙성에 대해 간략하게 평가해 보고자 한다.
세 문헌의 무극도 관련 기록을 비교하면, 『증산교사』와 『태극진경』 사이에 유사도가 높다. 『전경』의 기록은 1920년대 문헌인 『무극대도교개황』과 유사하다. 그에 비해 『증산교사』와 『태극진경』의 기록은 1930년대 문헌인 『조선의 유사종교』와 유사하다.61) 앞서 분석했듯이 1920년대의 무극도에 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무극대도교개황』과 『전경』의 일치도가 높다는 것은 『전경』에 서술된 1920년대 기록의 신빙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세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
첫째, 『전경』에 나타난 ‘주선원(周旋元)’과 ‘주선원보(周旋元補)’의 직책이다. 정산이 1923년 전교(傳敎)의 임무를 담당하기 위해 두었다는 이 직책은 『무극대도교개황』의 무극도 도규에 나타난 ‘주선원(周旋元)’과 ‘주선보(周旋補)’와 유사도가 높다.62) 이에 비해 『증산교사』와 『태극진경』에는 이와 같거나 유사한 직책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선원(周旋元)과 주선보(周旋補)는 도주와 도장 다음의 상급 직위로 당대의 신문 기사에도 등장하는 공식적인 명칭이다. 따라서 이 명칭의 수록 여부는 문헌의 근거 자료가 1차 자료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전경』의 편찬 시점인 1974년 당시, 『무극대도교개황』이 공개되거나 알려지지 않았기에 『전경』이 이 문헌을 참고했을 가능성은 없다.63) 우당이 태극도를 이끌던 1963년에 간행된 태극도 『수도요람』의 연혁에 주선원(周旋員)의 직책이 무극도의 간부로 나타난다는 점 등은 『전경』의 무극도 관련 전승이 교단 내에서 이어져 온 것이고 다른 계열의 전승에 비해 신빙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1970~71년 대순진리회로 합류하는 ‘태극도정신회’가 1970년에 발행한 태극도 『수도요람』 3판에도 주선원(周旋員)의 기록이 초판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태극도에서 수집된 무극도 관련 전승이 대순진리회까지 이어졌음을 방증한다.64)
둘째, 증산의 종도 문공신(문남용)에 의해 발생한 강도 사건 기록이다. 이 사건의 발생 시점에 대해 『무극대도교개황』은 1923년 3월 9일(음력 1월 22일), 『전경』은 1923년 2월 15일(음 1922년 12월 30일)로, 즉 둘 다 1923년 초로 기록하고 있다. 그에 비해 『증산교사』와 『태극진경』은 이 시점을 음력 1922년 정월로 기록하고 있다.65) 양자 사이에는 약 1년의 차이가 있다. 『무극대도교개황』의 기록이 1924년의 경찰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이 사건의 발생 시점은 『무극대도교개황』에서 명시한 1923년 3월(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66)
다만, 사건 발생 시점에 대해 『전경』이 1923년 2월 15일(음 1922년 12월 30일)로, 『무극대도교개황』이 3월 9일로 기록하여 약 20여 일의 간극을 보이는데, 이것은 『전경』과 『무극대도교개황』이 사건을 각각 발생 시점과 입건 시점을 기준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1936년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기사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사건은 계해년에 정읍군 감곡면 통사동에서 1차 발생한 후 시차를 두고 대전에서 2차로 발생하여 경찰에 입건된 것으로 되어있다.67) 1차는 문공신이 원평의 통사동에서 증산의 유골과 금전 3000원을 탈취한 것이고, 2차는 피신한 정산을 추적하여 대전에서 증산의 좌완 유골과 금전을 요구하다 경찰에 입건된 사건이다.68) 결국, 이 사건에 대한 1970년대 이후의 기록 중 『전경』만이 1923년 2월(양력)로 사건 시점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전경』의 무극도 관련 기록이 다른 기록과 달리 상당히 정확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태극진경』이 이상우의 관점을 중심으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69) 태극도에서 1968년 안면도에 생존해 있던 이상우를 만나 그의 기억과 증언을 ‘창도진경’ 편찬에 활용하려고 한 기록에 비추어 본다면, 『태극진경』의 해당 기사는 1968년 이후 채집된 정보에 근거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상우가 1924년 무극도를 이탈하여 정산을 고발했었다는 사실이다.70) 이는 『태극진경』의 편찬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이상우의 증언이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후에 채집되어 정확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상우의 증언이 지녔던 정확성의 문제는 『태극진경』 편찬 시 관련 자료를 제공한 윤금현의 글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윤금현은 태극도 분열 이후인 1969년에 정산과 관련된 글을 《태극도월보》에 게재하면서 해당 사건 시점을 1924년으로 기술하고, 문공신이 그 사건으로 투옥되어 사망하였다는 잘못된 사실을 게재한 바 있다.71) 이는 이상우의 증언을 기존에 수집된 정보와 비교하지 않고 고증 없이 활용하면서 발생한 문제이다. 1987년에 편찬된 『태극진경』은 사건 시점을 1922년으로 수정하고, 문남용이 당시 옥사했다는 기록을 삭제하였지만, 이 수정 역시 결과적으로 사실과 다르다. 이는 『태극진경』이 『증산교사』를 참고하여 관련 기록을 고증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결국 『태극진경』의 내용 전반에 대해 제기되는 신빙성 문제는 무시하기 어렵다.72)
셋째, 증산의 유골 발굴 시점이다. 『전경』은 정산이 1921년 9월(양력 10월) 증산의 유골을 수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73) 그에 비해 『증산교사』는 그 발굴 시점을 1921년 2월로 기록하고 있다.74) 『무극대도교개황』이 이 시점을 보천교의 공인과 관련하여 1921년 말로 기록하고 있음을 본다면 『전경』의 기록이 정확하다.75)76)
교단 문헌에 대한 해제와 고증 결과는 『증산교사』와 『태극진경』의 무극도 관련 기록이 당대보다 최소 30~40년이 지난 후대의 증언이나 간접 자료에 의존하여 집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전경』의 기록은 그 내용이 간략하지만 사건 관련자들의 직접적인 진술을 기록한 전승 자료에 근거하여 집필되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무극도 연구에 있어서 주로 활용해야 하는 교단 문헌은 『전경』이며 나머지 문헌은 고증을 거쳐 보조적인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Ⅳ. 닫는 글
무극도는 대순진리회와 대순사상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주목을 받는 교단이다. 하지만 그 종교적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자료가 후대의 교단 문헌 등에 제한되어 기존의 연구성과는 단편적이거나 정확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1997년 우방문고가 공개되고 일제의 관변자료가 소개된 이후 상황은 개선되었지만, 무극도 관련 문헌에 대한 해제나 고증 작업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연구 인프라는 새롭게 구축될 필요가 있었다.
본 연구는 무극도 연구의 토대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관련 문헌을 해제하고 고증하여 그 정확성을 평가하고 활용 방법을 제시하여 연구 기반을 확보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고증된 내용을 모두 제시하기에는 분량의 문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싣지 못한 고증 내용은 추후에 소개할 것이다.
무극도 연구에 있어서 1918~1925년 시기는 『무극대도교개황』의 후반부와 『전경』을, 1926~1934년 시기는 『조선의 유사종교』와 『전경』을 기본 텍스트로 삼고, 나머지 문헌은 참고자료 정도로 활용해야 한다. 또한 이 기본 텍스트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을 다른 문헌을 통해 기술하는 것은 주의를 요한다. 왜곡된 관점, 또는 후대에 변경된 종교적 세계와 신앙체계의 관점에서 빈 퍼즐의 그려낸 것이기 때문이다. 빈자리가 전체의 극히 일부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종교 현상에 대한 상상일 가능성이 크다.
무극도 연구의 인프라를 더욱 명확히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극도 관련 문헌의 목록을 단편적 기록까지 모두 망라하여 종합하고 이에 대한 번역과 고증을 체계화할 필요성이 있다.77) 본 연구는 이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