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여는 글
2021년 UN에서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2020년 행복 지수는 149개국 가운데 62위로 OECD 국가들 가운데서는 하위권이다.1) 한국의 행복 지수가 낮은 이유는 디스토피아(dystopia) 지수가 나쁘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 지수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울한 정신 상태를 말한다. 한국은 경제와 기술로는 세계적인 강국이지만, 마음이 불안한 탓에 결국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인에게 불안감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요인으로는 과도한 경쟁, 거주와 취업 문제, 남북 분단 등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이 힘겹더라도, 서로 혐오하거나 갈등하지 않으며 등을 두드리고 격려하며 살 수 있다면, 마음만큼은 불행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인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대에 대한 격려와 위로보다 미움과 비방, 악감정, 인신공격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게 솔직한 현실이다. 그 속에서 만연해진 혐오 감정은 또 다른 갈등과 원한을 생산해내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 하나가 법원에서 간행한 『사법연감』 통계다. 이에 의하면, 2020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발생한 소송 건수는 667만여 건이다. 이 가운데 민사소송만 482만여 건이니,2) 개인끼리 다투다가 법정으로 달려가는 횟수가 휴일을 제외한 평일(250일) 하루에만 1만 9천여 건이나 된다. 한국의 소송 건수를 이웃 일본과 비교해보면 2018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 수가 50배나 많다. 한국 인구가 일본 인구의 절반이 안 되므로 실제 인구 대비 민사소송은 100배 이상이다.3) 소송이 화해로 좋게 해결되는 경우도 일본은 2건당 1건(최대 50%)인데 한국은 4건당 1건(최대 23%)이어서 일본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4) 이처럼 현대 한국에서 개인 간의 다툼은 대화보다 고소와 맞고소의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기 쉽고,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인종ㆍ민족ㆍ문화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혐오와 증오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건 오늘날 전 세계의 공통된 현상이지만, 행복 지수가 낮은 ‘선진국’ 한국은 법적 분쟁마저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법이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또렷한 사건에 대해서 사법기관은 그 모든 분쟁을 완전히 해결해주지 못한다. 법관의 판결은 정의 실현을 보장해주지도 않고 반드시 공정하지도 않다. 가해자가 법이 정해놓은 형벌을 받는다고 해도, 피해자가 자신의 응어리진 마음과 고통스러운 과거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해자가 아무런 죄의식도 갖지 않는 상태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법기관에 기대지 않고도, 원한과 증오를 극복하고 피해자를 위로하며 분쟁까지 해결해주는 장치 가운데 하나로 종교의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5) 종교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을 제공할 때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억누르고 용서와 화합을 유도하는 ‘윤리적 활력(ethical vitality)’을 제공해왔다.6) 예를 들어 기독교의 원수사랑,7)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나 원가(怨家)를 부모처럼 대하라는 가르침,8) 도교의 보원이덕(報怨以德),9) 대순진리회의 해원상생(解冤相生)10) 등이 그러하다.
이 가운데 이 글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여라.”11)고 한 예수의 원수사랑과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12)고 한 증산의 해원상생을 비교의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이 두 종교윤리의 관련성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연구자는 이항녕(1993, 1998, 1999)이다. 그는 해원상생이 원한을 풀라거나 원수를 만들지 말라고 한다는 점에서 원수사랑과는 다르다고 기술했다.13) 이항녕의 연구는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의 차이점을 들춘 첫 시도였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의 기술은 논증이나 분석을 생략하고 짧은 선언에 그치고 있다는 점, 본문에서 살피겠지만 원수사랑에도 원한을 풀라는 논의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보여준다. 그와 달리 김영두(1997)는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이 상통하거나 비슷한 윤리라고 단정해버림으로써14) 제대로 된 비교연구를 수행하지 못했다. 논문 형식을 통해 발표된 연구 성과는 이 정도에 불과한데, 주제가 주는 흥미로움에 비해서는 그 양이 매우 적다.
종교윤리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특히 그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종교윤리학의 관점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리치몬드 대학의 스콧 데이비스(G. Scott Davis)에 의하면, 종교윤리 연구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로 종교윤리가 하나의 사회 규범으로 인정받는 상황을 살피는 법적 패러다임(legal paradigm), 둘째로 종교윤리가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는 측면을 살피는 인격 윤리학(ethics of character), 셋째로 종교윤리를 공리주의 같은 가치 혹은 권리ㆍ교환의 상황에서 이해하는 경제적 패러다임(economic paradigm)이다. 이 가운데 인격 윤리학은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하나의 전통을 형성하도록 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윤리는 하나의 인격을 형성하는 전통을 구성한다고 본다는 뜻인데, 종교윤리학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15) 그러니까 각 종교의 윤리는 각각의 문화적ㆍ사회적ㆍ종교적 배경을 담은 것으로서, 각 종교의 신념에 따르는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 제시된 것으로 보는 게 종교윤리학의 관점이다. 따라서 종교윤리학은 서로 다른 종교들의 윤리들이 유사한 외형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같은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만약 종교윤리들이 유사하다거나 같다고만 단언한다면, 그것은 저마다의 종교윤리들이 가진 배경ㆍ맥락ㆍ신앙, 그리고 그들의 전통이 만드는 각 종교적 인격들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무시하는 것이기에 학술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16)
이 같은 종교윤리학 관점을 활용한다면, 다시 말해서 두 종교윤리가 각각 어떤 배경 위에서 형성되었는지, 어떤 종교적 신념을 담았는지, 어떤 종교적 인격을 지향하는지, 그래서 어떤 맥락에서 정당화되고 있는지 그 과정과 논리를 고찰한다면, 두 종교윤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물론이요, 나아가 기독교와 대순진리회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의 이해까지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 글은 기독교의 원수사랑과 대순진리회의 해원상생을 종교윤리학의 관점에서 비교하는 방식으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 Ⅱ장에서는 두 종교윤리가 각각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Ⅲ장에서는 두 종교윤리의 실행 주체가 어떤 존재인지, 그들이 어떤 종교적 신념 속에서 종교윤리를 실천하는지, 그래서 종교윤리는 어떤 정당화 논리를 갖는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Ⅳ장에서는 두 종교윤리를 실천에 옮길 때 고려해야 할 요소들을 조명할 것이다.
Ⅱ. 성립 배경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은 보편 윤리이면서도, 예수와 증산이 각각 살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기능을 가지지 못했다면, 소수 신종교에 불과했던 그 가르침들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종교윤리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과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가나안17)과 조선의 상황을 간략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18)
예수가 살았던 가나안은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기원전 37년에는 로마의 신임을 업은 헤롯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대적인 건축사업을 벌이고 가혹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계속된 폭정은 유대인이 구세주의 출현을 더욱 고대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출현한 인물이 예수였다.
예수는 유대의 심장 예루살렘 남쪽으로 10km 떨어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이며 가난한 평민이었다. 예수가 자라고 30여 년 동안의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91km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나사렛과 그 일대의 갈릴리 지역이었다. 예수가 어릴 때(또는 태어난 직후) 헤롯이 죽자 아켈라오를 비롯한 그 세 아들이 권력을 물려받았다. 그들 역시 가나안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결국 유대 지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사실 반란은 헤롯이 죽기 전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모세오경을 위반한 채 불경하게 지어졌다는 종교적 이유로 일어나고 있었다.19) 헤롯 사후 반란은 더욱 커져 예루살렘에서는 유월절(逾越節)에 아켈라오 군대와의 충돌로 유대인 3,000명이 사망했다.20) 오순절(五旬節)에는 예루살렘에서 바루스 총독 휘하의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유대 성전의 재산이 약탈되며 많은 유대인이 살해당했다.21) 예루살렘 외에도 가나안 지역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특히 예수가 자라고 있었던 나사렛에서 불과 6km 거리인 세포리스에도 반란이 일어났다. 바루스 총독은 로마군을 동원하여 그곳의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노예로 만들었고 시가지를 불태웠다. 이어 삼포와 엠마오 등 여러 마을을 파괴하면서, 유대 전 지역의 반란을 뿌리뽑기 위해 그 중심인 예루살렘까지 진격하였다. 놀란 유대인들은 항복을 선언했지만, 로마군은 반란자 색출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유대인 2,000명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했다.22) 예수는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성장하여 이웃사랑과 원수사랑 가르침을 폈고, 하느님23)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선포했다.24)
증산이 살았던 조선은 개항(1876년) 이후 극심한 변화를 맞이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선 조선은 급변하는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열강의 흥정 대상으로 전락했고,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차근차근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조정의 부패는 극에 달하여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시달리고[三政의 문란] 삶의 터전을 잃었다.25) 옛날부터 꾸준히 예언되어 온 미륵이나 진인(眞人), 정감(鄭鑑)의 출현을 꿈꾸는 것 정도가 사면초가에 처한 상황에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을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때 출현한 인물이 증산이었다.
증산은 조선의 중심지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220여 km 떨어진 전라도 고부의 궁벽한 시골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라도 일대를 주요 활동 지역으로 삼았다. 그 지역은 관리의 폭압에 분노한 전봉준이 동학의 힘을 모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곳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봉기의 첫 불꽃이 증산의 생가에서 북쪽으로 4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배들평 말목장터에서 타올랐던 탓에, 당시 24세였던 증산은 그것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26) 동학농민운동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고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수만에서 수십만 명에 달했다. 증산은 이런 정황을 지켜보면서 해원상생을 가르쳤고, 자신이 직접 천지인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천지를 개벽함으로써 후천 선경(仙境)을 열 것이라고 선포했다.27)
이처럼 예수와 증산의 시대는 외부의 억압과 내부의 혼란이 극심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줄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데 그 공통점이 있었다.28) 특히, 예수와 증산은 억압에 폭력으로써 맞섰다가 더 큰 폭력으로 잔인하게 진압당한/당하고 있던 현장을 직간접적으로 접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신앙을 걷어내고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은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 대립한 끝에 파멸에 이르고야 마는 참상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와 증산이 그들의 시대에 각각 선포한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은 이전에 존재했던 종교들의 윤리와는 다른 새로운 윤리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적ㆍ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종교적 상황까지 조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를 둘러싼 종교적 상황부터 간략하게 짚어보자. 예수가 등장하기 한참 전인 기원전 6세기 초, 유대왕국은 바빌로니아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고 유대 왕족ㆍ사회 지배층ㆍ종교(유대교) 지도자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Babylon 幽囚]. 덕분에 가나안에 남았던 평민들 사이에는 모세오경에 기반한 유대교의 전통이 희미해졌다. 50년 뒤 가나안에 돌아온 종교지도자들은 파괴된 유대교 성전을 재건축하고 유대의 전통을 다시 세우고자 노력했다. 유대교는 이때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를 ‘현자들의 시대(Ages of Sages)’라고 부른다. 당시 유대교는 모세오경 전통을 보수적으로 고수하려는 바리새파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영적 세계 대신 현실적인 자유를 지향하며 친로마적이었던 사두개파, 토라와 종말론에 입각하여 금욕주의적 은둔 수행에 몰입하는 에세네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29) 예수의 원수사랑은 그러한 유대교와 대비하여 새롭게 제시된 종교윤리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가 원수사랑을 가르치기 전에도 유대교에는 원수를 갚지 말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있기는 했다.30) 원수는 훗날 인간이 아닌 여호와가 직접 벌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31) 유대 율법은 원수에 대한 복수를 인간이 아닌 절대자에게 위임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이 부를 혼란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유대 율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32)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유대 율법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33)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진 보복 허용 규정(탈리오법칙)이 공존했기 때문이며, 또한 고대로부터 내려온 고엘 제도34) 때문이었다.
유대 율법에 보복 금지와 허용 규정이 공존하지만, 예수 시대의 현실은 유대인들이 복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35)고 가르쳤다. ‘너희가 들은 바와는 다르게 말한다’라고 한 예수의 어휘 사용법은 원수사랑이 보복을 금지하는 유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언자적 권위에 의한 자신의 고유한 가르침임을 나타낸다.36)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이 유대 율법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37) 어쨌든 종교적 상황에서 보면, 예수의 원수사랑은 바리새파 등 당시 주류였던 유대 교파의 보복 윤리를 극복하기 위해, 즉 유대 교파가 추구하는 인격과 다른 종교적 인격을 주조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종교윤리였다.
증산이 맞이한 종교적 상황은 한층 복잡했다. 500년 동안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자 쇄국ㆍ척화의 이념적 기반으로 기능했던 유교는 변화하는 시대의 대응에 실패하여 그 위세를 잃었다. 반면, 개항 이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1882년)과 조불수호통상조약(1886년)은 허용되지 못하고 있었던 개신교ㆍ천주교의 포교와 신앙 자유를 가능하게 했고, 일본 승려들의 도성 진출은 그간 금지되어 있었던 조선 승려들의 도성 출입까지 허용하도록 만들었다. 도교 역시 다양한 도교 서적[道書]의 지속적인 간행과 더불어 무상단(無相壇)의 성립으로 이전보다 그 활동량을 더 늘려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최수운의 신비경험을 시발점으로 하여 동학계, 단군계, 정역계 등 새로운 종교의 창시도 잇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다종교 상황에서38) 조선인의 삶에 깊은 영향력을 미쳐오고 있었던 것은 기독교나 신종교가 아니라 유불도 및 무속의 전통 종교들이었다. 증산의 해원상생은 이러한 전통 종교들과의 대비 속에서 새롭게 제시된 종교윤리로 이해할 수 있다.
증산 이전의 조선에서는 가해자나 악한 자에게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인식이 미약했고, 복수로써 원수를 갚는 것이 상식이었다.39) 불교의 자비 사상이나 무속의 굿 의례를 통한 화합 추구는 원수를 사랑하는 윤리 정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사상이나 의례는 실천을 유도하는 이론적 체계화를 갖추지 못했고, 원수를 증오하지 않는 보편적 에토스도 생산해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유교의 역할이 컸다. 유교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복수를 강조한다. 공자는 상대가 나에게 덕을 베풀면 덕으로써 보답하되, 그 상대가 원수라면 덕이 아닌 ‘곧음’으로써 갚으라[以直報怨]고 말한다.40) 덕을 베푼 자라야 덕을 되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원수는 덕을 베푼 자가 아니기에 덕을 되받을 자격이 없고, 오직 곧음으로써 갚아져야 한다. 공자의 이 발언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이 곧이곧대로 대응하라는 뜻으로서, 복수를 찬성했던 것으로 이해된다.41) 공자와 그 후학들이 전한 『예기』와 『춘추공양전』이 한결같이 군주ㆍ부모ㆍ형제ㆍ친구의 원수에게 반드시 보복하라고 가르치고 있음은 공자의 이 입장을 재차 확인시켜준다.42)
유교가 복수를 허용한 이유는 폭력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복수가 예를 행하는 실천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교가 원수에 대한 폭력 행사를 ‘권장’한 까닭은, 원수에 대한 복수를 효충제(孝忠悌)라는 인간의 도리이면서, 유교적 공동체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43) 이러한 이념에 따라 통치되었던 조선은 『대명률』에 근거하여 복수를 금하는 법규를 만들어 두기는 했으나, 실제 복수 사건을 접수해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44) 조선 후기 범죄 재판 사례를 모은 『추관지』에 의하면, 복수는 장려되기까지 했다.45)
이런 상황을 당면하여 증산은 기존의 통념과는 다르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피로 피를 씻는 것과 같으니라.”46)고 말하고,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47)고 가르쳤다. 피를 피로 씻으면 피가 씻겨져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 피의 양이 더 늘어나게 된다는 것, 폭력은 그보다 더한 폭력을 낳는 법이고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악순환을 일으켜 악이 더욱 증폭된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논리였다. 종교적 상황에서 보면, 증산의 해원상생은 유교의 종교윤리와 통치이념 또는 당시의 에토스였던 복수를 극복하기 위해, 즉 유교를 포함하는 전통 종교가 추구하는 인격과 다른 종교적 인격을 만들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종교윤리였다고 할 수 있다.
Ⅲ. 정당화 논리
앞 장에서 역사주의 관점으로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을 서술하였다. 이를 통해 당대의 고된 현실을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극복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는 면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었다. 이런 설명은 이해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초월과 신앙을 배제한 역사주의 관점은 종교윤리를 종교윤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오해하도록 만들 수 있으므로, 종교 신앙 위에서 종교윤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은 종교윤리라는 원래의 맥락을 살려서 보면,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이 근본적으로 같은 게 아님을 보이고자 한다. 종교는 자신만의 세계를 주조하고, 그 세계는 종교마다 다르다.48) 특정한 종교의 윤리 실천을 요구받는 인간은 그 종교 세계 속의 존재다. 원수사랑을 요구받는 종교적 인간과 해원상생을 요구받는 종교적 인간은 각자의 종교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각자의 고유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각자의 고유한 종교적 인격을 형성하고자 한다. 종교가 다르면 종교윤리도 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장에서는 그것을 조명함으로써 각 종교윤리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과 논리를 스케치할 것이다.
사랑이든 상생이든 이타적인 자세로 폭력에 대응하기란 어렵다. 그것을 유도하려면 보상이 효과적이다. 예수와 증산은 종교적 이상세계에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역시 두 종교윤리가 보여주는 공통점이다.
예수의 보상은 하느님 나라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증산의 보상은 증산 자신이 인간세계에 건설하는 후천 선경이 완성될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 보상의 내용은 하느님으로부터 또는 상제님으로부터 은총이나 복록(福祿)을 받는 것, 그리고 하느님 나라 또는 후천 선경에 거주하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상세계의 형식이나 성격(예를 들면 이상세계가 현세인지 천국인지, 이상세계에서 주어지는 임무ㆍ역할ㆍ위상은 무엇인지 하는 것), 실현 시기와 방법 등에 따라 다르다. 보상이 종교윤리 정당성 획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지나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예수와 증산이 장담한 보상 ‘내용’을 비교한다는 것은, 가치 평가적이고 호교론적인 기술로 흐르기 쉬우므로(예를 들면 누가 더 좋은 보상을 제시했는지 하는 것),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종교윤리 실천 추동력은 종교적 보상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보상 내용보다는 보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에 더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기독교부터 정리해본다.
기독교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의 상호주의에 기초를 두고,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49)는 황금율을 이야기한다. 또 한편으로는 상호주의를 버리고 자기희생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예수가 인간을 위해 희생했기에, 그를 믿는 인간이라면 예수의 삶을 따라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50)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상호주의를 뛰어넘는 자기희생의 윤리를 실천해야 하는 근거는, 종교적 보상을 염두에 둔 예수의 다음 발언에서 확인된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51)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2)
예수는 원수사랑을 실천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죄의 사(赦)함을 받게 되고, 하느님과 같은 온전한 인격을 갖춘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종교적 보상을 담은 예수의 이 발언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신앙을 기초로 한다. 기독교는 하느님이 최초로 창조한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뱀의 유혹을 받아 탐욕이 생겨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따먹은 후[原罪, original sin] 벌을 받아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사실, 그로부터 인간은 대대로 원죄를 지닌 채 태어나 노동과 출산 등의 온갖 고통을 겪으며 죄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아담과 하와로부터 비롯된 원죄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써 수많은 죄[自犯罪, actual sin]도 저지른다는 사실, 이러한 죄들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세례(洗禮)와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은총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주요 신앙으로 삼는다.53)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다진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가 원죄를 체계화한 이후로 이러한 신앙 자체가 부정된 적은 없었다.54)
예수가 말한 ‘하느님과 같은 온전한 인격 갖추기’와 ‘하느님에게 죄를 용서받기’는 원죄와 그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모든 죄를 극복하려는 맥락을 가진 표현이다. 예수의 원수사랑은 인간이 모두 죄를 가지고 있는[同罪意識] 존재임을 전제하면서,55) 죄인이 죄인을 처벌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을56) 정당화 논리로 삼은 종교윤리라는 말이다. 기독교는 이 종교윤리를 실천하는 사람을 ‘하느님의 종(Servant of God)’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종은 원수사랑 종교윤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People of God)’이라고 하는 종교적 인격을 획득하고자 한다.57)
증산이 해원상생을 가르친 이유도 종교적 보상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해원상생의 실천이 우주 법칙에 순응하는 길이라고 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증산이 우주의 법칙을 해원상생으로 바꾸어두었기 때문에, 인간이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행위는 우주의 새로운 질서와 규범에 순응하는 것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농사를 짓는 것은 결실의 보상을 얻기 위함이지만, 봄이라야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라야 추수하는 것은 사계절 순환이라는 우주의 법칙에 순응하는 당위론적 행위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해원상생 실천도 종교적 보상을 얻기 위함이지만, 그 실천은 우주가 해원상생으로 나아가는 법칙에 순응하는 당위론적인 것으로 설명된다.58)
인간은 죄도 짓고 원수도 되고 복수도 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기독교는 그 원인을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탐욕을 부린 인간(아담과 하와)의 원죄, 그리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저지르는 죄에 있다고 보았다. 만악(萬惡)의 근원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저지르는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이 부족하며 죄를 벗고 선을 실천할 의지도 박약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간 개인이 죄를 벗고 도덕을 실천한다는 ‘능동적인’ 의지를 포기하고, 예수가 자신을 희생한 삶을 따라 살면 받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59)
이와 달리 증산은 만악의 원인이 인간에게도 있으나 상극(相克)이라고 하는 우주의 법칙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증산에 따르면, 인간만이 아니라 신명까지 포함하는 우주 전체가 상극의 지배를 받았고, 그로 인해 원(冤=怨恨)이 발생했으며, 풀리지 못하고 쌓여만 갔던 원[積冤]은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인간이 서로 다투고 세상이 혼란한 데에는 인간 자신이 져야 할 책임도 있지만, 상극이 적원을 만들어내는 우주의 잘못된 구조야말로 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증산은 자신이 직접 우주의 법칙을 상극에서 상생으로 바꾸고 만고(萬古)의 쌓여온 원[積冤]을 풀어 후천 선경이라는 이상세계를 지상에서 열 것이라고 주장했다.60)
증산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모든 원이 다 풀리는 시대[解冤時代]를 자신이 직접 열 것이라고 장담했다.61) 그에 따라 세상 만물은 각자의 의지에 따라 폭력을 동반하는 부정적인 방향, 또는 덕을 베푸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원을 시도하게 된다. 부정적 방향의 해원에는 멸망의 결실이, 긍정적 방향의 해원에는 복록의 결실이 기다리고 있다.62) 그러므로 긍정적인 방향의 해원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방향의 해원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 역시 해원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방향의 해원은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것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가장 참혹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결국 ‘순식간에’ 상생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퀀텀 리프 성격의 개벽이다.63) 결국 세상은 해원 과정을 거쳐[해원시대] 상생의 길로 걸어가도록 만들어져 있으니, 이것이 우주적 차원의 해원상생이다.
인간은 이제 만물이 해원상생으로 나아가는 개벽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도 그런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여 해원상생을 실천해야 한다.64) 차경석이 원수에게 복수하려고 하자 증산이 그를 만류하면서, 복수는 상극의 선천에서 인간의 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지금의 해원시대를 맞아서는 ‘악의 씨앗을 다시 뿌리는’ 행위가 되어버리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던 것은65) 이러한 맥락을 잘 보여준다. 결국, 증산의 해원상생은 만물이 상극에 지배를 받아왔고 인간은 그 속에서 살아왔던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우주의 법칙이었던 상극이 상생으로 바뀌고 과거의 모든 원이 정리된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인간 역시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상극을 극복하고 상생을 목표로 하면서 모든 원을 정리해야 한다는 신앙을 정당화 논리로 삼은 종교윤리다. 대순진리회는 그 종교윤리를 실천하는 인간을 ‘수도인(修道人, 道人)’이라고 부른다. 수도인은 해원상생 종교윤리를 통해 ‘도통군자(道通君子)’ 혹은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고 하는 종교적 인격을 획득하고자 한다.66)
정리하자면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인간의 종교적 캐릭터는 다르다. 원수사랑을 실천하도록 독려받는 인간은 기독교 세계 안에서 인간 자신이 저지른 죄[原罪, 自犯罪]에 지배받고 살아가는 종교적 존재인 하느님의 종이다. 하느님의 종은 원수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 해원상생을 실천하도록 독려받는 인간은 대순진리회 세계 안에서 인간 자신의 잘못만이 아니라 우주의 잘못된 법칙인 상극에 지배받고 살아가는 종교적 존재인 수도인이다. 수도인은 해원상생을 실천하여 도통군자(=지상신선)가 되고자 한다. 원수사랑은 ‘죄지은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담았고, 해원상생은 ‘상극에 지배받는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담았다. 전자가 잘못의 책임을 인간으로 한정하고 그 잘못을 인간 자신이 절대자로부터 은총을 입음으로써 해결해야 마땅하다는 논리 안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후자는 인간만이 아니라 불합리했던 과거의 우주 법칙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절대자에 의해 변경된 우주 질서에 맞추어 만물과 인간이 동시에 잘못 해결에 참여한다는 논리 안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
서두에서 소개했듯이, 이항녕은 해원상생에 원을 풀라는 것이 있고, 원수사랑에는 원을 풀라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두 윤리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 예수의 말과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증산의 말을 맞대어보면,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두 종교윤리의 차이점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원수사랑에도 원을 풀고 극복하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이와 관련하여 전개되었던 논의가 르상티망론이다.
이 논의를 시작한 인물은 니체(Friedrich W. Nietzsche, 1844~1900)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시대 로마의 억압을 받던 유대인들은 로마에 항거할 힘을 지니지 못한 열등하고 나약한 노예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고, 그 무력함은 복수를 획책하지만 표현하지 못하고 한탄하는 르상티망(원한)을 만들었으며, 그 르상티망은 유대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가져다주었고, 그 가책은 죄의식과 고통을 낳았으므로, 유대인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금욕주의적 이상을 담은 신앙을 만들었다. 이처럼 로마의 억압에 따르는 원한을 억누르고 극복하려 한 결과가 예수의 이웃사랑, 나아가 원수사랑의 실체라는 것이다.67)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도 니체의 주장에 동의했다. 베버는, 로마의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이 로마에게 복수하려는 원한을 가졌으나 그럴 힘은 없었고, 그 복수를 메시아가 대신할 것으로 믿었으나 메시아의 도래가 계속 연기되었으므로, 복수 대신 화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차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화해가 복수심과 원한을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도덕[Ressentimentmoralismus, 원한도덕주의]이니, 곧 이웃사랑ㆍ원수사랑이라는 것이다.68)
막스 셸러(Max F. Scheler, 1874~1928)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원수사랑을 로마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시도, 곧 원한을 풀기 위해 만들어진 윤리라고 한 니체와 베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의 이웃사랑ㆍ원수사랑이 하느님의 인격과 같은 온전한 인격을 갖추어 하느님의 나라 구성원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윤리라고 주장한다.69)
니체나 베버 등 소수이기는 하지만 원수사랑이 원한 극복과 관련이 있다는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니체가 독일어로 말한 ‘원한(Ressentiment)’을 영어 ‘리젠트먼트(resentment)’ 대신 프랑스어 ‘르상티망(ressentiment)’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아직 그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리젠트먼트가 복수를 지향하는 폭력적인 의미여서 유대인들이 당시 가졌던 원한 감정을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본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들은 니체가 말한 원한을 리젠트먼트 대신 르상티망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르상티망은 원한은 원한이나, 무기력하여 적극적으로 복수를 시도하지 못하고 한탄의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내면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르상티망은 복수심 가득한 원한의 폭력적 감정이 아니라, 노예 유대인들이 억압자들이었던 로마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대신 삶에 대한 긍정적인 성취를 얻기 위해 시도했던 감정 경험이었다는 설명을 종종 덧붙인다.70)
이런 맥락에서는 르상티망론이 예수의 원수사랑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로 기능한다. 따라서 통일된 견해는 아니지만, 기독교 일부는 원수사랑에 원한을 풀라는 해원 내용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해원 논의인 르상티망론은 폭력적인 해원이 아니라 인내와 긍정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피해자 입장으로 한정한 해원상생의 일부 논의와 통하는 면이 있다.71)
그러나 르상티망론의 원수사랑이 원한을 푼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원한 풂[해원]이 해원상생과 같은 것은 아니다. 르상티망론으로 본 원수사랑의 해원은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것을 복수할 능력이 없는 한탄 속에서 원한을 내면에 넣어두고 인내하며 삶의 긍정을 찾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해원상생의 해원은 이와 다르다. 전술한 대로, 증산의 종교적 세계에서 원한은 상극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풀리지 못하고 쌓여있는 원한[積冤]은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주범으로 간주된다. 해원은 선천 상극에 따른 세상의 파멸을 종식하고 후천 선경을 열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이때의 해원은 복수와 같은 부정적인 방법도 가능하고, 상생을 목표로 하는 긍정적인 방법도 가능한데, 해원상생의 해원은 상생을 벡터값으로 갖는 것이다. 르상티망론의 원수사랑이 복수하지 못하는 무능함 때문에 원한(르상티망)을 내적으로 삭히고 삶의 긍정적 의미를 찾아야 했던 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의 해원을 담고 있다면, 해원상생은 상생을 지향하며 원한을 왕성하게 풀고 풀어줌으로써 상극의 선천을 종식하고 상생의 후천을 열고자 하는 동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의 해원을 담고 있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Ⅳ. 실천 문제
종교윤리는 종교적 인격 완성을 위한 수단이므로 종교인에게 단호한 실천을 요구한다.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의 실천은 대개 가해자와 피해자를 둔 상황에서 일어난다. 현실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개별 신분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거나 그 신분이 뒤섞이는(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한) 복잡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분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변하지 않는 상황에 한정한다. 이때 각 종교윤리의 실천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을 피해자와 가해자인 당사자의 역할 문제,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인식 문제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원수사랑을 실천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해자는 죄인이다. 피해자는 죄인이 아니나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이다. 기독교 세계에서 인간은 그 누구든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다. 가해자는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피해자도 용서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가 예수의 삶을 본받아 가해자인 원수를 사랑하면, 즉 가해자를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면, 하느님은 그렇게 용서하는 피해자에게 은총을 내려 피해자의 죄를 사해주고 피해자에게 구원을 베푼다. 이것이 원수사랑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논리였음은 이미 서술했다.
가해자의 죄를 사하는 주체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하느님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해자가 피해자를 도외시하고 하느님에게 용서를 먼저 받아버린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죄 사함과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와 하느님이지만, 그 권위에 있어서 피해자는 하느님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용서가 선행한다면 피해자의 용서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용서 과정에서 소외된 피해자는 큰 무력감을 가질 우려가 있다. 용서의 주체로서 피해자보다 하느님의 역할을 더 크게 강조한다면, 피해자를 움직이게 하는 원수사랑 종교윤리의 추동력은 사라지게 된다. 가해자는 절대자에게만 용서를 받으면 모든 죄가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피해자에게 아무런 죄의식이나 반성의 의지를 보이려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원수사랑 실천 과정에서 하느님만큼이나 피해자와 가해자인 당사자들의 역할도 중요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의 역할만 지나치게 강조될 때는 ‘값싼 은혜’, ‘값싼 은총’, ‘값싼 화해’라고 불리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72)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경우를 보자. 대순진리회 세계에서는 가해자가 절대자나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피해자의 원한을 자신이 직접 풀어줄 것이 강조된다. 증산이 만든 종교용어 ‘척(慼)’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척이란 남이 나에게 갖는 원한을 의미한다.73) 척은 가해자가 실천해야 할 윤리를 강조하기 위해 증산이 직접 창안한 개념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갖는 분한 마음이 원(冤=怨恨)이고, 가해자가 볼 때는 그 원이 척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증산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존재하는 원한 감정을 입장에 따라 각각 원(피해자 입장)과 척(가해자 입장)으로 구분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존재하는 원한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풀어야 한다(풂, 풀어줌)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해원상생의 해원은 원을 푸는 것과 원을 풀어주는 것으로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행위다.
피해자가 실천해야 할 해원상생이란, 복수나 저주 대신 상생을 목표로 자기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이것을 할 수 있어야만 종교적 보상을 받는다. 가해자가 실천해야 할 해원상생이란, 피해자가 가진 원한(척)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풀어줌은 절대자가 대신할 수 없고 오직 가해자가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 그 방법은 원한이 발생한 소이연(所以然, the reason why)을 찾아 제거하는 것으로서, 곧 피해자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원칙이다.74) 증산은 이런 방법으로 가해자가 척을 풀어야, 즉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가해자는 ‘무척(無慼)’이 되고, ‘무척이라야 잘 산다’고 가르쳤다.75)
정리해보자. 원수사랑은 피해자의 역할을 강조한 종교윤리다. 피해자는 절대자로부터 죄의 사함과 은총(구원)을 받기 위해 원수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가 피해자를 외면하고 절대자에게 죄의 사함을 먼저 받았다고 믿어버린다면, 이때 피해자는 원수사랑을 실천하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원수사랑은 값싼 은혜, 값싼 은총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절대자의 역할보다는 피해자와 가해자인 두 당사자의 역할을 동시에 더 강조해야 할 숙제를 부여받는다.
해원상생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같이 강조한 종교윤리다. 피해자는 상생을 목표로 자신의 원한을 풀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종교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가해자는 상생을 목표로 피해자의 원한(척)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 방법은 피해자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가해자 역시 잘 살 수 있다. 증산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척을 없애라는 ‘무척윤리(無慼倫理)’로 강조했다.76) 그러니까 해원상생은 ‘무척윤리’라는 가해자 윤리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앞서 보았듯이 원수사랑은 피해자에게 제시하는 실천윤리이고, 해원상생은 피해자에게 제시하는 실천윤리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에게 제시하는 실천윤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해자가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피해자는 원수사랑이나 해원상생을 실천하기 어렵게 된다.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를 보아야 하는 피해자는 더 큰 원한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런 가해자는 언젠가 벌을 받고 파멸할 것으로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결과가 실제로 나타나기 전까지 피해자는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사실, 가해자의 비참한 말로를 상상하는 것조차도 피해자에게는 고통이다. 그러므로 가해자의 반성 여부와 상관이 없이, 오로지 피해자에게만 집중해서, 피해자가 원수사랑이나 해원상생을 실천하도록 독려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어떻게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인식 요령을 피해자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를 보자. 기독교는 원수사랑 실천을 유도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원한 감정을 정리하도록 가르친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편지에 적었던 대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가해자)은 미워하지 마라’는 것이다.77) 흑인 인권보호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국의 목사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1929~1968)도 이것을 강조한다.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피해자는 기독교인으로서 원수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피해자 스스로 용서하는 마음을 개발하고, 가해자가 악한 자가 아니라 선한 면도 있을 것이라고 여겨 가해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해자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그것이 곧 원수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된다고 본다.78) 이처럼 피해자는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고 좋게 인식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게 기독교의 입장이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더라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언젠가는 가해자를 반드시 벌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순진리회의 경우를 보자. 증산은 피해자에게 해원상생을 실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가해자의 반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가해자를 은인으로 인식하라고 가르쳤다.79) 가해자가 실은 피해자 혹은 그 대리인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제께서 천원 장에서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큰 돌에 맞아 가슴뼈가 상하여 수십 일 동안 치료를 받으며 크게 고통하는 공우를 보시고 가라사대 「너도 전에 남의 가슴을 쳐서 사경에 이르게 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생각하여 뉘우치라. 또 네가 완쾌된 후에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생각하나 네가 전에 상해한 자가 이제 너에게 상해를 입힌 측에 붙어 갚는 것이니 오히려 그만하기 다행이라. 내 마음을 스스로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 그러면 곧 나으리라.」80)
이 사례에서 맞은 공우는 피해자, 때린 예수교 사람은 가해자다. 그런데 증산은 그것을 틀어서 오히려 공우가 가해자였으며, 예수교 사람은 공우로부터 과거에 해를 입었던 피해자의 원한을 대행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공우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피해자의 신명(이를 慼神이라 한다)이 지금 여기의 예수교 사람을 통해 대신 복수하게 한 것이고, 그로써 공우 자신의 죄가 사라졌으니, 공우는 이제 예수교 사람을 가해자가 아니라 은인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교 사람 스스로는 공우의 옛날 과오를 자신이 대신해서 벌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결국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게 증산의 설명이었다.
증산은 가해자가 무조건 피해자의 은인이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피해자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의 원한 맺힌 신명[慼神]이 ‘언제나’ 가해자로 하여금 복수를 대신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김형렬이 출타하였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예수교 신자 김중구(金重九)가 술이 만취되어 김형렬을 붙들고 혹독하게 능욕하는지라. 형렬이 심한 곤욕을 겪고 돌아와서 상제께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형렬에게 「청수를 떠 놓고 네 허물을 살펴 뉘우치라.」 하시니 형렬이 명하신 대로 시행하였도다. 그후 김중구는 한때 병으로 인해서 사경을 헤매었다고 하느니라. 이 소식을 형렬로부터 들으시고 상제께서 다시 그에게 충고하시기를 「금후에 그런 일이 있거든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네 몸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만일 허물이 네게 있을 때에는 그 허물이 다 풀릴 것이요 허물이 네게 없을 때에는 그 독기가 본처로 돌아가리라.」 하셨도다.81)
이 사례에서 김중구는 가해자, 김형렬은 피해자다. 증산은 김형렬이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쳤다. 그 방법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고 피해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다. 만약 피해자 자신에게 과거 잘못이 있었다면 그 잘못이 지금의 피해로써 풀리는 것이니 가해자는 은인이 되는 것이요, 만약 과거 잘못이 없었음에도 그런 피해를 입은 것이라면, 가해자는 은인이 아니며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기독교와 대순진리회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반성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원수사랑이나 해원상생을 실천하도록 하는 종교적 방법을 별도로 마련해두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경우에 죄는 미워하되, 가해자(원수)는 미워하지 않고, 가해자에게 선한 면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다. 대순진리회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자신을 반성하고, 가해자를 오히려 은인으로 여기기다. 가해자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없앤다는 측면에서 두 종교윤리는 유사하다. 다만 해원상생은 가해자가 선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게 하는 원수사랑보다, 피해자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가해자를 은인으로 여기도록 한다는 점에서, 원수사랑보다 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한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Ⅴ. 닫는 글
이 글은 피해자가 무조건 가해자를 용서해야 마땅하다는 종교윤리의 필요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원수사랑이나 대순진리회의 해원상생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한 종교윤리인지 따져보자는 것도 아니다. 종교윤리학의 관점에서 두 종교윤리를 비교하여 서술함으로써 그들의 의미를 더 깊게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기독교와 대순진리회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보자는 게 이 글의 의도다.
본문을 정리해서 두 종교윤리를 비교한 결과를 하나의 도표로 나타내보면 <표 1>과 같다.
신앙을 탈각한 역사주의적 관점에서는,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이 폭력을 맞아 같은 폭력으로 맞선 끝에 파멸해버리고야 마는 고달픈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윤리들은 실천이 쉽지 않다. 일정한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그 희생을 추동하기 위해서 신앙을 연료로 주입하고 종교적 보상을 내민다. 신앙과 구원론으로 연결되는 이 윤리들이 종교윤리가 되는 이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종교윤리들을 법적 분쟁과 증오가 만연한 현대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원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미움의 감정이 더욱 깊어져 더 큰 상처와 고통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고통을 덜고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 피해자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 또는 가해자이었음을 인정하고, 원수를 용서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원수/가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다. 여기에는 신앙도, 가해자에 대한 징벌 여부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피해자가 피해자 자신을 아끼고 치유하려는 긍정의 마음 씀씀이가 중요할 뿐이다. 이처럼 고통받는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자기 구제책(Self-Treatment)’이라는 측면에서, 원수사랑이나 해원상생은 비록 종교윤리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세속 윤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
덧붙이자면, 현실적 측면에서 해원상생이 한국 사회의 혐오와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윤리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일정한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만 강조하는, 가해자에게만 강조하는 윤리로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존재하는 원한과 갈등을 풀어낼 수 없다. 해원상생은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똑같이 실천윤리를 제시한다. 상생을 전제로, 상생을 목표로, 상생하는 방법으로써, 가해자는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고, 피해자는 스스로 원한을 풀라는 것이다. 이런 해원상생은 오늘날 피해자와 가해자가 득실거리는 한국, 더 나아가 세계의 갈등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원수사랑의 ‘사랑’과 해원상생의 ‘상생’을 비교하는 작업까지는 하지 않았다. 원수사랑과 해원상생을 또 다른 측면에서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일이지만, 상당한 지면이 요구되는 간단치 않은 노작이어서 숙제로 미루었다. 아울러, 기독교 세계와 대순진리회 세계도 비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항 이후 두 세계의 조우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그 작업을 3개의 단계로 기획했는데, 이 글은 그 첫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남은 2개의 단계는 조만간 돌입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