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서발턴(subaltern)’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자생 신종교 사상: 수운, 증산, 소태산의 비교를 중심으로

박종천*
Jong-chun Park*
*고려대학교 교수, E-mail: baummensch@naver.com
*Professor, Research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orea University

© Copyright 2021,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an 31, 2021 ; Revised: Feb 25, 2021 ; Accepted: Apr 05, 2021

Published Online: Apr 30, 2021

국문요약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은 모두 몰락한 양반 출신의 ‘잔반’(殘班)으로서, 본격적인 종교활동에 앞서 시골 서당의 훈장, 농민, 장사꾼, 술사(術士) 등의 활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상층 양반으로부터 하층 상놈으로 전락하여 주변화된 서발턴적 위상으로 인해 다양한 서발턴들의 표현할 수 없는 염원과 원한을 종교적으로 대표/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성 질서의 질곡을 폭로하고 일탈하면서도 새로운 대안 질서를 이념으로 제시하지 않았던 조선 후기 ‘밀레니엄적 주변종교’ 운동과는 달리, 이들은 모두 지배층의 서발턴적 규제와 억압을 전복시키고 기성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대안적 비전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실천한 ‘유토피아적 대안종교’로서 탈-서발턴(post-subaltern)적 종교를 제시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들의 사상이 서발턴을 대표/재현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교적-사회적 주체로서 탈-서발턴의 사회적 비전을 구현하는 다양한 양상을 비교하여 분석함으로써 근대 한국의 자생적 신종교가 유토피아적 대안종교 사상임을 논증하였다.

Abstract

In early modern Korea, the founders of three main-stream indigenous new religions, Choi Je-woo (崔濟愚), Kang Il-sun (姜一淳), and Park Jungbin (朴重彬), were all ruined yangban, who could no longer maintain the social dignity of yangban. Prior to their regular religious activities, they earned livings as rural teachers, peasants, merchants, and fortune-tellers. They were marginalized for having declined from upper-class nobles to lower-class people. Due to their subalternal status, they religiously represented the inexpressible aspirations and resentments held by various subalterns.

The millennial movements of marginal religions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posed and deviated from the fetters of the established order, but they did not propose a new alternative order to replace it. Unlike these millennial movements, Choi Je-woo, Kang Il-sun, and Park Jungbin all proposed utopian visions of post-subalternal alternative religions that systematically presented and practiced new alternative worldviews characterized by the “Great Opening of the Later World (後天開闢).” The world they longed for was one wherein anti-subalternal social regulation were overthrown, the oppression of various subalterns end, and the established social order was replaced.

In this article, I have argued that three main-stream indigenous Korean new religions, Donghak (Eastern Learning), the Jeungsan-inspired religious movements, and Wonbulgyo (Won Buddhism) are utopian alternative religions. I made this argument by analyzing some aspects by which they represented subalterns and offered subalterns a new religio-social status.

Keywords: 한국의 자생 신종교; 서발턴; 최제우; 강일순; 박중빈; 후천개벽; 대안종교
Keywords: indigenous Korean new religions; Subaltern; Choi Je-woo (崔濟愚); Kang Il-sun (姜一淳); Park Jungbin (朴重彬); the Great Opening of the Later World (後天開闢); alternative religions

Ⅰ.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에 대한 서발턴적 접근의 필요성

동학-천도교, 증산계 교단, 원불교 등은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자생 신종교들인데, 이에 대한 종래의 접근은 일반적으로 ‘민족종교(national religion)’나 ‘민중종교(popular religion)’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 개념은 근대 한국의 자생적 신종교들을 변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고 불명료한 한계가 있다.

먼저, 민족종교 개념1)은 천리교(天理敎)처럼 외부에서 생겨서 국내로 유입된 외래 신종교는 물론, 통일교처럼 국내에서 생겼으나 서양의 기독교에서 비롯된 외부 기원의 자생 신종교 등과 구분되는 한국의 고유한 자생 신종교라는 측면과 더불어, 불교나 기독교처럼 특정한 민족이나 문화권을 넘어서서 세계적으로 확산된 이른바 ‘세계종교(world religion)’와 달리 한민족의 민족주의와 연관된다는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들도 모두 민족주의적 측면을 논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종교는 다른 종교들과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를 차별적으로 구분하는 개념적 변별성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민중종교는 기성질서를 정당화하는 ‘국교’(國敎)나 ‘공인종교’(official religion)와 달리 기득권을 지닌 지배 계급에 대비되는 피지배 계급의 종교라는 측면을 잘 보여준다. 민중 개념은 본래 1970-80년대에 저항적 지식인과 운동권 대학생들이 국가 주도의 근대화에 정치적으로 대항하면서 저항적 주체들의 집단으로 구성한 담론적 개념이었다.2) 이렇듯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개념이었던 민중은 동아시아 유교적 전통사회의 ‘인민人民’이라는 개념 중에서 백성들을 교화하는 주체이자 정치적 지배 계급인 ‘인人’과 달리 교화의 대상이자 피지배 계급인 ‘민民’과 다수의 집단을 뜻하는 ‘중衆’이 결합하여 생긴 근대 한국의 신조어다. 그리하여 민중은 소수 기득권 지배 계급에 대립하고 저항하는 다수 피지배 집단을 뜻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민중종교는 억압하는 소수 지배 엘리트에 저항하는 다수 피지배 계급의 종교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은 단일한 성격의 계급이나 계층이 아니었다. 변혁 담론의 구상 속에서 그들은 억압받는 다수의 사람들이면서도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저항하는 정치 세력이란 특징을 가져야 했고, 생산 계급인 노동자나 농민을 포괄하면서도 그들을 대변하고 계몽하는 지식인과 대학생이 결합하는 사회 세력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민중종교 개념은 동학혁명과 연관하여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에 적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근대 전통사회의 미륵불 신앙이나 『정감록』 신앙 등 기성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종교적 실천이나 반란까지도 포괄하게 되었으며,3)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1980년대 사회운동과 연관된 기독교 민중신학과 민중불교 등을 중심으로 현대로 확장되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억압받고 소외받는 하층민들과 저항적 집단 주체로서 각성하고 정치적으로 실천하는 민중을 서로 혼용하거나 실제로는 다양한 계급이나 계층이 포함되는 민중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상정하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민중종교는 소수 지배층과 다수 피지배층의 계급적 구분을 도식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상당히 다면적이고 복합적이며 심지어 모순적이고 혼성적인 구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념적 모호성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민중종교 개념은 조선시대 농민을 비롯해서 기성질서에 순응하는 전근대적 ‘하층민의 종교’와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기성질서를 변혁하는 저항적 세력인 근대적 ‘민중의 종교’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기도 하지만, 기성질서에 저항하는 피지배 계급의 종교라는 점을 명확하게 부각시킬 경우에도 기성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와 성격을 지닌 새로운 대안 질서를 구성하기보다는 기성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 지배세력의 교체나 하층민의 신분 상승을 염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유교적 전통사회의 가치와 질서의 구심력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세계와 그러한 세계를 이끌어갈 카리스마적 메시야에 대한 열망이 사회적 변란을 추동하는 종교적 원심력으로서 ‘혁세(革世) 종교’의 사상과 실천으로 구현되었으며, 이에 따라 진인(眞人), 아기장수, 정도령, 미륵불 등의 혁세적 영웅과 연계된 신화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예언, 다양한 술수(術數)를 망라하는 주술-의례적 실천 등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혁세종교적 흐름은 유교, 불교, 도교/선도, 무(巫) 등을 포괄하면서 이단적 경향의 유생, 당취(黨聚)적 성격의 승려, 도교/선도적 술수를 구사한 술사, 묵시종말론적 특성의 무당 등을 중심으로 구현되었다.4)

이러한 혁세종교적 변란은 체제의 전복을 꿈꾸기는 하지만 이상사회의 새로운 대안적 질서에 대한 구상이 모호하고 미약하며, 현실사회 질서에 대한 철저한 비판보다는 관직이나 권력을 획득하려는 속물적 욕구가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유토피아(utopia)적 이상이 아니라 밀레니엄(millenium)적 일탈에 불과하다.5) 따라서 전근대 하층민의 종교는 기성질서의 질곡을 폭로하고 일탈적 변란을 주동하였지만, 정작 공인종교로 제도화된 기성종교(established religion)와 기존 사회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적 이념이나 질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대안종교(alternative religion)’라기보다는 밀레니엄적 원심력의 반발로서 전복과 탈주를 꿈꾸는 주변화된 사람들의 한숨을 대변하고 재현하는 ‘주변종교’(marginal religion)였다고 할 수 있다.6) 이에 비해 근대 한국의 자생적 신종교를 대표하는 동학-천도교, 증산계 교단, 원불교 등은 주변종교의 한계를 벗어나서 지배 엘리트의 억압을 대체할 수 있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로운 대안적 교리를 제시하고 동학혁명을 비롯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회적 실천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대안종교’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그러나 기존의 민중종교 이론들은 대체로 주변종교와 대안종교의 차이를 충분히 유념하지 않은 채 모두 민중종교의 범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조선시대 주변종교와 근대 한국의 대안종교가 분명히 연속성이 있지만 서구 제국주의와 근대화의 흐름이 유입되는 가운데 형성되는 근대 한국의 자생적 신종교운동(new religious movement)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다.7) 물론 후천개벽의 변혁 이념과 변혁적 주체로서의 근대적 민중의 저항적 사상과 실천을 강조하는 한국적 민중종교론들도 있다.8) 이런 연구들은 대체로 권력에서 배제되고 억압받는 소외자라는 소극적 측면을 넘어서서 그것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저항 주체로서 민중을 강조하지만, 민중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규정이 애매모호하며 포괄적이어서 개념적 변별성이 불분명한 한계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발턴(subaltern)의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서발턴은 그람시(A. Gramsci, 1891~1937)가 제안한 뒤에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를 비롯한 인도의 서발턴 역사학자들과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을 중심으로 하는 문예이론가들이 발전시킨 개념으로서, 지배 엘리트와 대비되는 피지배 집단이 자신을 주체로서 표현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서발턴은 지배세력으로부터 억압을 받으면서 사회적 헤게모니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당하는 존재이지만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그에 대해 저항하지는 않은 채 부유하는 집단까지 포함한다. 예컨대, 힌두교의 사티(sati)의 사례처럼 인신공양의 희생물이 된 여성들을 한편으로는 인도의 전통적 인습의 희생자로서 외부 세력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존재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런 시각들은 각각 서양 제국주의 백인 남성의 시각과 식민지 인도 남성의 시각일 뿐, 정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여성 자신의 문제와 의식을 제대로 대표/재현(representation)하지 못한다. 이렇듯 야만적 집단이나 계몽의 대상이자 구원받아야 할 희생양으로 규정되면서도 정작 자신을 대표/재현할 수 없는 이들을 서발턴이라고 부른다.9)

이런 맥락에서 앞서 설명한 주변종교는 서발턴의 처지를 대표/재현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변부에서 부유하면서 스스로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부류들은 단일한 계급이나 계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맥락에서 분할된 채 복수로 존재한다. 하층민에는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민중도 있지만, 서발턴은 사회질서에 순응하기도 하거나 사회질서의 주변부에서 안착하지 못한 채 떠돌면서 서로 충돌하는 부류들도 있다. 마치 사회적 계약의 갑을관계에서 ‘을’로 표상되는 부류는 ‘을’뿐만 아니라 ‘병’이나 ‘정’으로 존재할 수도 있으며, 지배계급에 대해서 저항하는 단일한 이해관계의 집단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대한 상이한 관계는 물론 서로 간에도 상충되는 관계를 가질 수 있다.10) 예컨대, 국가의 용역의뢰를 받아 열악한 철거민을 쫓아내는 철거용역 집단은 지배 집단도 아니고 철거민과 대립하지만 사회적 위상으로는 철거민처럼 억압받는 피지배 집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발턴은 단일한 민중세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이질성을 지닌 다양한 피지배 부류들을 총칭하는 개념인 것이다.

기존의 민중종교라는 프레임으로는 이러한 특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조선 말기부터 시작된 한국의 근대 자생적 신종교는 선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남성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하층민, 여성, 아동 등 사회적 위계질서의 주변부로 소외된 사람들을 대표하고 재현하는 서발턴적 주변종교로 출발했다. 조선에서 상층 남성 유교적 지식인인 선비들은 예교(禮敎)의 담론과 예제(禮制)의 사회적 질서를 구성하는 교화(敎化)의 주체였던 반면, 하층이나 여성 등은 교화의 대상이었다.11) 그리하여 하층민, 서얼, 노비, 천민, 무당, 여성, 아동 등은 말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온전히 갖지 못한 채 예교 담론을 수용하고 예제 질서에 순종해야 했던 대상으로 규정당했다. 그들은 유교적 문명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계몽의 대상이자 야만적 집단으로 규정되면서도 정작 자신들을 대표/재현(representation)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발턴’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조선시대의 서발턴적 주변종교에서 멈추지 않고 근대의 탈-서발턴적(post-subaltern) 대안종교로 성장했다. 대안종교는 사회적 위계질서 내에서 지배세력의 담론적 규정과 사회적 억압을 받아 사회적으로 온전히 발언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고 주변화되고 대상화된 서발턴들을 대표/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로운 대안적 비전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거세당한 대상이라는 서발턴적 규정을 벗어나서 스스로 말하고 실천하는 탈-서발턴적 주체로 승화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한국의 자생적 신종교들은 ‘서발턴’들이 스스로 발언할 수 있는 새로운 담론과 질서를 모색함으로써 서발탄적 규정과 주변화에서 벗어나려는 탈-서발턴적 대안종교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런 측면에 주목하여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들이 그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의 사상과 실천을 중심으로 어떻게 밀레니엄적 원심력으로 주변화된 서발턴적 주변종교 단계를 넘어서서 유토피아적 대안을 구현하는 탈-서발턴적 대안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이들 창시자들이 모두 몰락한 양반 출신의 ‘잔반’(殘班)으로서, 본격적인 종교활동에 앞서 시골 서당의 훈장, 농민, 장사꾼, 술사(術士) 등의 활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간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상층 양반으로부터 하층 상놈으로 전락하여 주변화된 서발턴적 위상으로 인해 다양한 서발턴들의 표현할 수 없는 염원과 원한을 종교적으로 대표/재현할 수 있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또한 후천개벽의 대안 이념을 통해 서발턴적 주변종교에서 탈-서발턴적 대안종교로 변용되는 다양한 양상을 비교함으로써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들이 지닌 특징을 드러낼 것이다.

Ⅱ. 수운 최제우의 다시개벽과 탈-서발턴의 주체적 각성

1.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 몰락한 양반에서 탈-서발턴적 각성으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탈-서발턴적 대안종교로서 근대 한국 자생적 신종교의 서장을 연 동학(東學)의 창교자다. 그는 조선 후기에 몰락한 양반인 ‘잔반’ 출신이었다. 잔반은 유교적 엘리트인 사(士)의 명분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사회적 권력과 문화적 권위를 실현시키지 못한 채 상놈 이하로 전락한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잔반은 양반적 정체성이 거세된 주변화된 존재로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 서발턴이었다. 명분과 현실의 괴리에 따른 이중적 정체성으로 인해 몰락한 양반들은 하층민들과 함께 뒤섞이면서 서발턴을 대표하고 재현하는 동시에 서발턴적 규정을 대체할 새로운 혁세적 이념을 탈-서발턴적 대안종교의 교리로 구현하는 주체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유교적 교화에 따라 주변화된 서발턴적 규정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하층민과 유사했으나 그러한 억압을 넘어서서 대안적 이념을 제시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실천한다는 점에서 탈-서발턴적 주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수운은 아버지 근암 최옥으로부터 경주 최씨 가문의 많은 장서를 물려받아서 유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부를 했다.12)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2명의 부인과 사별을 하고 나서 20살에 청상과부가 된 청주 한씨와 3번째 혼인을 해서 수운을 낳았다. 이로 인해 수운은 재가녀 자손의 벼슬 진출을 막는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에 따라 서얼들처럼 문과에 응시할 수 없는 반쪽 양반이었다. 그는 10대에 벌써 양친을 모두 여의었는데, 17세에 부친이 죽은 뒤에는 생계가 막막한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곡식을 심고 거두는 농업은 농사지을 땅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1860년의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수운은 온전한 양반이 아니어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 채 주변화되었으며 하층 농민으로도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서발턴으로 전락했다. 특히 1844년부터 1854년까지 20대 청년기 동안은 생계를 위해 무명[白木]을 거래하는 장사꾼으로 조선 팔도를 떠돌았다.13)

마음에는 가정의 생업이 있었지만, 어찌 심고 거두는 일을 알겠는가? 글공부가 독실하지 못하였고 벼슬할 뜻을 잃어버렸다. 집안 살림이 점점 줄어드니,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나이가 점점 많아지니, 신세가 장차 어려워질까 걱정하였노라. 팔자를 헤아려 보니 춥고 굶주릴 염려가 있고, 나이 사십이 된 것을 생각하니 어찌 아무런 일도 해놓은 것이 없음을 탄식하지 않으랴? 몸담을 곳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누가 천지가 넓고 크다고 하겠으며, 하는 일마다 서로 어긋나니 스스로 한 몸 간직하기가 어려움을 가엾게 여겼노라. 이로부터 세간에 분요한 것을 파탈하고 가슴속에 맺혔던 것을 풀어 버리었노라.14)

10여년간 떠돌았던 장사꾼의 생존 체험은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고 어떤 일에도 안주할 수 없는 삶의 정황 속에서 절망적인 서발턴의 고통을 체득하여 재현하고 대표할 수 있는 주변화된 정체성을 체득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상황은 하층민을 ‘가엾게 여기는’ 서발턴적 공감을 넘어서서 오히려 ‘세간적 분요를 파탈하고 가슴속의 맺힌 한을 풀어 버리는’ 탈-서발턴적 각성으로 변환되었다.

탈-서발턴적 각성은 고통스런 주변적 삶을 벗어나려는 주체적 모색으로서 입산기도와 수행에서 비롯되었다. 수운은 1855년에 한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은 뒤부터 1860년 득도하기까지 생업의 서발턴적 현실과 수행의 탈-서발턴적 각성 사이를 거듭 오갔다. 실제로 1856년 4월 8일에는 천성산 통도사 내원암에 가서 49일 동안 입산기도를 하다가 47일째 숙부가 운명한 환상을 보고 경주로 내려가서 1년간 상을 치르고나서 1857년 7월 재입산하여 적멸굴에서 49일 기도를 드렸으나 역시 성과가 없었다. 그러한 두 번의 실패 끝에 최제우는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천성산에 철점(鐵店)을 차려서 철광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주로 토철과 사철을 사서 용광로에 녹인 뒤 편철을 만들어 팔던 용광업이었다. 그러나 철점 경영을 위해 7명에게 논을 팔았다가 2년만에 철점을 폐업하고 빚 독촉에 시달렸고, 결국은 땅까지 모두 날린 뒤 용담정으로 들어가서 궁극적 깨달음을 얻었다.15)

1860년에 실현된 탈-서발턴적 각성은 현상적인 인간의 마음이 궁극적 실재인 하늘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 ‘수심정기’(守心正氣)의 과정에서 구현되었다.16) 수운에게 강령(降靈)한 한울님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혹은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라는 말씀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차별적으로 규정되는 서발턴적 대상이 아니라 한울님[天主]과 같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또한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의 주문(呪文)은 다양한 층위의 서발턴들이 자기 안의 한울님을 모심으로써 귀천(貴賤),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의 현상적 차별성을 넘어설 수 있는 탈-서발턴적 각성을 구현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런데 탈-서발턴적 각성의 씨앗은 소년기부터 이미 자라나고 있었다. 수운은 어릴 적부터 안방과 사랑방을 마음대로 출입하는 아버지에 비해 안방에만 머무는 어머니를 보면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인식했으며, 양반인 아버지에게 다른 사람들이 먼저 절하는 반면 아버지가 대감을 영접하면서 맞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반상’(班常)의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다.17) 남녀와 상하의 위계질서에서 주변화되는 서발턴에 대한 차별적 억압은 어린 수운의 의식 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남존여비는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의 일방적 ‘여필종부’(女必從夫)의 관념이 사회적으로 구현된 결과였는데, 수운은 이러한 상하질서를 ‘부화부순’(夫和婦順)의 상호적 존중과 남녀평등으로 전환시켰으며,18) 깨달음 직후 아내 박씨를 첫 번째 포덕(布德)의 대상으로 삼아 지극하게 대우하고 여종들을 해방시킨 뒤 한 명은 수양딸로, 다른 한 명은 며느리로 삼은 것은 그러한 사상을 적용한 구체적 실천의 결실이었다.19)

소년기에 배태된 사회적 비판의식은 청년기에 상업과 광업 등의 떠돌이 삶 속에서 차츰 무르익어 마침내 탈-서발턴적 주체의 각성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수운은 집안을 망치는 ‘적서의 구별’[嫡庶之別]과 나라를 망치는 ‘반상의 구별’[班常之別]이 모두 인위적인 차별적 질서이자 ‘고질적 폐풍’(弊風)이라고 비판했으며, 가정과 국가의 사회 공동체 내부에 만연한 고질적인 사회적 차별[層節]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고 상호 호혜적 공경이라는 적극적 대안을 제시하는 한편, 그러한 ‘한울님’으로부터 비롯된 천부적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대안종교의 사회적 비전을 명료하게 밝혔다.20)

그러나 서발턴적 현실은 개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수운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뿐만 아니라 국내를 휩쓸고 있는 악성 전염병과 ‘각자위심’(各自爲心)의 갈등이 각각 ‘상해의 운수’[傷害之數]라는 생물학적 생명의 위기와 서학(西學)을 앞세운 서양 제국주의의 위협으로 전개되자 그것을 극복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을 고민하고 있었다.21) 그리하여 사회적 차별, 생물학적 생존, 민족적 위기의 차원에서 철저히 억압되고 주변화되는 서발턴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천도(天道)의 민중종교, 치유의 생명종교, 동학(東學)의 민족종교를 아우르는 대안종교적 비전을 제시했다. 사회적 차원에서 양반에 의해 상놈으로 주변화되고 생존의 차원에서 질병에 의해 죽음으로 배제되며 세계적 차원에서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서발턴적 대상화를 거부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주체로서 민중, 생명, 민족을 각성했던 것이다.

수운의 탈-서발턴적 각성은 ‘다시 개벽’의 새로운 이상 실현으로 발전했다. 그는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라고 하여 세계적 질병 유행이 새로운 후천 세상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임을 천명하고, 부귀한 자나 빈천한 자나, 민간-민중종교의 신자도 서학-천주교 신자도 모두 제각각 일심(一心)으로 궁궁(弓弓)을 찾는 ‘각자위심’의 세태로는 희망을 찾을 수 없음을 밝혔다.22)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배제되며 주변화된 서발턴들의 원망과 한탄을 그들이 사용하는 동학가사의 가락에 담아 한글로 표기하여 대변하는 동시에 선천의 부귀가 후천의 빈천으로 바뀌고 선천의 빈천이 후천의 부귀로 뒤바뀌는 개벽의 과정을 ‘다시 개벽’의 대안적 비전으로 노래했고,23) 이것이 농학농민혁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듯 ‘다시 개벽’의 대안적 비전은 양반과 상민, 적자와 서얼, 남자와 여자, 제국과 식민지의 일방적인 불변의 상하 위계질서를 상호 존중의 가변적인 수평적 관계 질서로 바꾸는 탈-서발턴적 각성의 가능성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2. 주체적 각성의 내면화와 여성의 탈-서발턴화를 이룬 동학-천도교

수운의 부화부순(夫和婦順)의 논리는 가정을 수도의 장소로 중시한 동학-천도교에서 주체적 각성의 내면화와 여성의 탈-서발턴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초월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 접촉을 가능케 만들었던 최제우의 ‘시천주’를 더욱 발전시켜서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는 ‘인시천’(人是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으로 심화시켰다.24)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라는 인시천 사상은 외재적 대상이었던 초월적 실재의 내면화이자 주체화이며, 사인여천 사상은 인시천 사상의 사회적 실천으로서 주체의 성화(聖化)를 넘어서서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과 섬김을 통해 타자의 성화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사인여천은 부부관계를 넘어서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주인과 하인이 상하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아니라 상호 호혜적 수평관계로서 서로 공경과 사랑을 하는 해야 한다는 가화론(家和論)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라고 역설함으로써 모든 힘 없고 말할 권리조차 없는 서발턴들이 바로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므로 특정한 존재를 주변으로 밀어내고 억압하는 서발턴화를 한울님을 모욕하는 신성모독으로 비판하며 서발턴을 한울님처럼 화순과 공경의 태도로 대할 것을 강조했다.25) 이런 인식에 따라 해월은 시아버지가 베짜는 며느리를 며느리로 취급하지 말고 베짜는 한울님으로 존중할 것을 주문하거나 아이를 경솔히 때리는 가정폭력을 철저히 금지함으로써 가정 내에서 주변화된 며느리와 어린이의 인권을 초월적 실재의 권위로써 승화시켰다.26) 이는 서발턴의 초월성을 인정함으로써 서발턴을 지배당할 대상이 아니라 섬김받을 주체로 변화시킨 탈-서발턴화라고 평가할 만하다.

타자에 대한 존중이 서발턴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탈-서발턴화를 초래했다면, 남과 다투면서 시비하는 개체적 마음과 혈기를 넘어서서 내면의 한울님을 봉양하는 ‘양천주’(養天主)는 주체적 각성의 내면화와 초월적 보편화를 구현했다.27) 해월은 초월적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를 개체적 한계를 넘어서서 내재된 초월성을 보편성으로 승화하는 양천주로 확장했다.

한울을 養할 줄 아는 者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아나니라. 한울이 내 마음속에 있음이 마치 種子의 生命이 種子속에 있음과 같으니, 種子를 땅에 심어 그 生命을 養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은 道에 依하여 한울을 養하게 되는 것이라.28)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결국 봉건적인 차별적 신분제를 철폐하는 민중 서발턴들의 동학농민혁명과 일제 제국주의의 폭압적 지배에 항거하는 식민지 민족 서발턴들의 3.1운동으로 분출되었다. 실제로 천민 출신들을 좌도의 지도자로 임명했을 때 많은 동학 교인들이 항의하자, 해월은 ‘선천의 썩어진 문벌의 고하와 귀천의 차등’이라는 신분적 차별에 얽매인 사고를 엄중하게 질책하면서 최제우가 두 명의 여자 노비를 해방해서 양녀와 며느리로 삼은 일화를 재확인시키기도 했다.

다음으로, 동학-천도교는 여성 서발턴이 스스로 주체적 자각과 자발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해월에 의하면, 수운은 부인(婦人)을 ‘한 집안의 주인’으로 극진히 대우하고 여성이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도통하는 수도의 주체임을 재인식하는 ‘부인수도’(婦人修道)의 사상을 역설하는 한편, 음식 준비, 의복 마련, 아이 양육, 손님 대접, 제사 봉행 등이 모두 주부의 노동과 정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여성 노동의 성스러운 의미와 중요성을 재평가했으며, 후천에는 동학의 근본인 ‘부인수도’에 따라 ‘부인도통’이 활성화된다고 역설했다.29)

이러한 관점은 천도교에 와서 여성이 여권의 신장과 남녀평등의 이상 실현을 위해 직접 발언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형태로 진화했다. 실제로 1906년에는 천도교 부인전도회와 부인전도사제도가 창설되었으며, 1921년 천도교평양여자청년회 이후에는 천도교 내의 여성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남녀 양성 중에 일방이 다른 일방을 지배할 수 없으며, 양성쌍보(兩性雙補)의 새 세상을 도모하는’ 여성30)은 더이상 서발턴의 주변화 규정과 제한으로 억누를 수 없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주체였다.

천도교 여성운동을 주도했던 수의당(守義堂) 주옥경(朱鈺卿, 1894~1982)은 그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수의당은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평양 권번의 기생 출신으로 각종 기예를 익히고 명월관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민족대표 33인이 모여서 3ㆍ1운동을 모의했던 태화관에서 일했고, 천도교의 교주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를 만나 결혼했으며, 활발하게 문화활동과 사회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가난한 경제적 사정에 더하여 여성이라는 점과 기생이라는 점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양반 남성들이 보고 즐기는 대상으로서 복합적인 서발턴이었으나, 천도교 신도가 된 이후에는 서발턴적 규정을 넘어서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활동했다. 특히 1924년 4월에는 ‘인내천’의 주의와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천도교 여성단체인 내수단을 조직하여 여성의 교육과 권리 증진을 위해 힘썼는데, 이런 활동에 의해 남자 가장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의 주의나 주장을 할 수 없는 서발턴으로 규정되었던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기실현을 위해 신앙과 교육의 결의와 행동을 실천하는 주체로 거듭났다.31)

수의당은 ‘남녀의 구별이 없고 장유의 차별이 없는 절대평등’이 비롯된 최제우의 경신년 신비체험과 더불어 ‘여자 한 명이 남자 천명을 살리는’ 부인 내수도(內修道)가 동학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해월의 설법에 근거하여 여성에 대한 서발턴적 규정을 거침없이 벗어버리면서 남녀평등의 인식과 여성의 주체성 자각을 역설했다.32) 이후 천도교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여권 신장을 위한 다양한 여성계몽운동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수의당 외에도 지성당(知誠堂) 양이제(楊利濟, 1892~1984), 법실당(法實堂) 차기숙(車基淑, 1899~1994), 지흥당(知興堂) 최시영(崔時英, 1904~1992), 은성당(隱誠堂) 조동원(1926~) 등 총 5인이 종법사(宗法師)로 추대되기도 했다.33) 이런 활동에 힘입어 여성들도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포덕(布德)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34)

Ⅲ. 증산 강일순의 삼계개벽과 해원공사의 의례화된 연행

1. 증산 강일순 : 서발턴적 술법의 술사에서 탈-서발턴적 의례적 연행의 초월적 주재자로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은 동학-천도교가 민중-민족적 차원에서 이루었던 탈-서발턴적 주체의 각성을 인간계뿐만 아니라 천지신명계까지 아우르는 천지인 삼계(三界)의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했으며, 우주적 차원의 의례적 연행을 주재하는 초월적 상제(上帝)로서 자의식을 드러내었다. 아울러 욕구를 성취하지 못하여 불만족한 결핍의 원을 품은 존재이자 서로 척 짓는 존재로서 선천상극(先天相克)의 갈등을 맺고 있는 서발턴들의 존재 양상을 ‘해원공사’(解冤公事)를 통해 해소하는 주술-의례적 실천을 수행했다.

훗날 다양한 분파로 확장되는 증산계 교단의 창시자인 증산도 수운처럼 한미한 양반 집안의 몰락한 후예인 잔반이었다. 진주강씨 집안은 증산의 12대조대에 고부에 정착했으나, 8대조 이후부터는 이미 문벌 있는 사족(士族)이 아니라 생계형 농민으로 전락했다.35) 증산도 6세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서 8~9세에는 이미 스스로 시를 지을 만큼 공부를 했으나 과거에 응시한 적은 없으며, 24세와 27세에 잠시 처가에서 서당을 열어 학동을 가르친 것을 제외하면 일정한 직업이 없이 다양한 수행과 유력을 감행했다.36)

후대에 체계적 관점으로 편집된 경전인 『대순전경』이나 『전경』 등에는 보이지 않지만, 초기 전승 기록인 『증산천사공사기』에는 증산이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14~15세에 이미 학업을 중단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정읍군 입암면 거사막에서 보리를 거두는 머슴살이를 하고 장성군 백양사 부근 부여곡에서 나뭇꾼 생활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37) 평소 통독했던 음양참위(陰陽纖緯) 서적에서 배운 복서명리(卜筮命理)의 술법으로 익산군 이리를 지나면서 행잣돈을 벌었던 일을 포함해서 유력활동 중에 점복, 풍수, 관상 등의 술수나 주술-의례적 치유를 했다.38)

증산의 이러한 생업 관련 활동은 그가 조선 후기 변란의 민중종교 주도자들이 익혀서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내용과 유사한 양상이다.39) 이에 대해서 『증산천사공사기』에서는 ‘대각(大覺)’을 이룬 1901(辛丑)년 이전까지는 분명히 민간의 다양한 ‘법술(法術)’을 익혔으며, 법술로는 세상 구제에서 한계를 느낀 뒤에야 ‘수도(修道)’의 ‘발심(發心)’과 ‘대각’이 이어진 것으로 서술했으며,40) 대순진리회의 『전경』에서는 ‘불음불식의 공부’를 했다고 설명했다.41) 따라서 적어도 신축년 이전까지는 생업 활동면에서 양반이 아니라 도사(道士)나 술사(術士)로서 주변화된 서발턴의 특성을 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늦어도 1901년 7월의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연’42) 사건 이후로는 우주적 차원의 공사(公事)를 실행하는 초월적 주재자로서의 탈-서발턴적 자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43) 의례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증산의 ‘공사’는 천지신명계와 인간계를 연계하여 서발턴의 원한을 해소하고 갈등을 치유하는 의례적 연행(ritual performance)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44) 일반적 행위와 다른 차별화된 실천을 통해 새로운 의미나 초월적 상제의 권위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의례화된 실천(ritualized practice)45)으로 볼 수도 있다. 신도들이 공사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공사의 의례적 실천 주체는 오직 상제일 뿐이다. 공사의 의례화된 실천을 통해서 상제의 초월적 권위가 드러나고 새로운 삼계개벽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증산은 공사를 통해서 탈-서발턴화를 초래하는 초월적 주재자로서 차별화된다.

먼저, 삼계공사 혹은 천지공사는 서발턴의 원한이 개인이나 사회에 국한되지 않고 명부를 포함한 천지의 우주적 차원과 유기적으로 상호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우주적 연행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순진리회의 종지(宗旨)의 측면에서 볼 때 ‘신인조화’(神人調化)와 ‘해원상생’(解冤相生)의 연계로 이해할 수 있다.46) “선천 상극의 지배로 인해 삼계에 원한이 쌓이고 맺혀서,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재화가 발생하여 참혹하게 되자”, 증산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했다.”47) 인간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사는 먼저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했으며, 이를 위해 강증산은 명부공사를 포함한 삼계공사를 실행했다.48) 이러한 삼계공사는 신도 차원에서 “선령신들이 그 후손들을 척신의 손에서 빼내어 건지는 해원”의 공사였다.49) 또한 인간의 불평불만이 신명계에도 직접 영향을 미쳐서 아내들의 불평이 신명들의 노여움을 초래해서 병이 나거나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이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채 원이 쌓인 인간의 불평과 정성 부족이 신명들의 노여움을 초래하며 신명들의 노여움은 구천상제인 증산도 말리기 힘들 만큼 큰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50)

한편 증산은 왕위를 빼앗긴 단주(丹朱)의 원을 시발로 삼아 인류적 차원의 다양한 해원공사를 실행했다.51) 왕위 계승 후보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원한을 왕권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주변으로 밀려나는 서발턴적 특징으로 포착했던 것이다. 나아가 한맺힌 대상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신명이든, 인간이든 모두 해원의 대상이 된다. 이 점에서 강증산은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 대표적 사례는 일본에 대한 강증산의 인식과 신명공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증산은 서양에 넘어갈 위급한 상황에 처한 동양 형세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일로 전쟁(日露戰爭)을 붙여 일본을 도와서 러시아를 물리치리라”라고 말하는가 하면,52)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로 인하여 일본과 친함이 옳다”는 김병욱 관점에서 동의하면서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자 신명 공사를 행하기도 했다.53) 심지어 서양의 인종 차별과 학대를 피하기 위해 조선을 일본에게 맡기는 공사를 하기도 했다.54)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조선을 일본에 일시적으로 맡기는 공사를 일본 도술신명의 맺힌 척을 풀어주는 연행적 의례의 실천으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증산은 “일본 사람이 조선에 있는 만고 역신(逆神)을 거느리고 역사를 하는데”, “벼슬 한 자들이 다 정(鄭)씨를 생각하면서 두 마음을 품었다”는 점을 역신과 연계하여 설명했다.55) 나아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임진왜란 때 조선을 차지하려 했던 욕망이 좌절된 신명들의 맺힌 한이나 척을 푸는 해원의 과정으로 설명했다.56)

다음으로, 의례적 연행으로서 공사는 민간의 풍습이나 무속의 주술 혹은 도교의 법술(法術) 등과 연결되는 조선 후기 민간종교 전통의 다양한 전승을 해원공사를 위한 의례적 연행으로 재전유하였다.57) 증산은 기존의 다양한 전승을 그대로 쓰지 않고 일정하게 변용하여 창의적으로 재전유했다. 그리하여 천지공사 혹은 삼계공사는 “삼계(三界)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의례화된 실천이었다.58) 따라서 공사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는 상제의 초월적 권능과 신명과 인간을 건지는 구세주적 자의식을 드러내는 실천이기도 했다.59) 그는 기존의 부적이나 주문을 재전유할 때도 일정한 변용을 했을 뿐만 아니라 “풍우, 상설, 뇌전을 일으키는 천계대권을 행하는 때”를 비롯해서 다양한 경우에 “화로에 불덩이를 두르게도 하시고 술잔을 두르게도 하시며 말씀으로도 하시는” 등 “일정한 법이 없었다.”60)

물론 대다수 증산계 교단들은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큰 인존(人尊) 시대”61)를 맞아 “모사재천(謀事在天) 성사재인(成事在人)”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설파한다.62) 그러나 이것은 증산이 구천상제로서 새롭게 짜놓은 천지 도수의 삼계 개벽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천지공사와 무관하게 별도의 새로운 공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증산계 교단들은 구천상제와 신도들 사이에는 각각 천지공사의 주재자와 참여자라는 차이가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학-천도교나 원불교와 분명한 차이가 난다.

해원공사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서발턴적 천민을 탈-서발턴화하는 의례적 연행이기도 했다. 증산의 초기 포교 활동은 종도 김경학의 집을 ‘대학교’로 삼아서 무당 여섯 명을 불러서 그 관건을 벗기고 청수(淸水)를 떠 놓고 4배 절하고 ‘시천주’ 3번을 구송한 뒤 청수를 마시게 하는 것에서 본격화되었다.63) 조선의 무당은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에도 포함되지 않는 인간 이하의 천민이었기 때문에 유교적 교화의 대상에서도 배제된 이들이었으나, 증산은 가장 한이 쌓인 천민들을 해원하는 공사를 다른 존재들보다 앞서 거행했다. 관건을 벗기는 것이 무당으로서의 낡은 정체성을 포기하는 의절이라면, 청수를 떠놓고 마시게 하는 의절은 기존 정체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변화시키는 일종의 정화(purification)이며, 절하며 ‘시천주’ 주문을 구송하는 의절은 말할 권리조차 없도록 규정된 서발턴이 아니라 ‘천주’ 혹은 ‘상제’를 모심으로써 포덕의 교육을 받아 말할 수 있는 탈-서발턴적 정체성 전환의 의례적 실천이었다.

증산의 해원공사는 사회적 위계질서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부귀한 사람보다 거기에서 배제되어 원한이 맺힌 빈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향했다. 해원상생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의 구현이다.64) 이런 맥락에서 증산은 상놈과 천인의 한을 풀어준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을 조선 명부로 삼는 명부공사를 했다. 그는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자”라는 다양한 결핍의 한을 지닌 서발턴들을 자기 사람으로 삼았으며,65) 반상(班常)의 구별을 없애고 천인을 우대함으로써 척을 푸는 해원상생을 강조했다.66)

또한 증산은 ‘천한 사람을 천대하지 말라’고 했거니와,67) 적서(嫡庶)와 명분과 반상(班常)의 구별을 하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서 종도인 김형렬의 머슴 지남식에게 항상 존댓말을 썼다.68) 이밖에도 종도 김광찬과 대화를 나누면서 “촌 양반은 읍내의 아전을 아전놈이라 하고 아전은 촌 양반을 촌 양반놈이라 하나니 나와 네가 서로 화해하면 천하가 다 해원하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양반과 아전의 사회적 갈등을 해원하는 공사로 볼 수 있다.69)

이렇듯 증산의 해원공사는 싸움과 갈등이 아니라 평화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정세개벽(靖世開闢)을 추구한 것이었다. 증산에 의하면, 개인간의 작은 싸움이 더 큰 분쟁과 난리를 초래하며,70) 인간계의 갈등이 천상의 선령신 간의 싸움을 일으키고 그 결과에 따라 인간계의 분란이 결정된다.71) 따라서 증산은 치우, 수운, 전봉준의 농민 혁명처럼 난을 일으켜서 웅패(雄覇)의 술(術)로 실현하는 재민혁세(災民革世)의 동세개벽(動世開闢)이라는 대립적 갈등 표출이 아니라 황제처럼 성인의 도를 구현하는 제생의세(濟生醫世)의 정세개벽(靖世開闢)이라는 평화로운 해원상생을 강조했다.72)

또한 ‘작란’(作亂)과 ‘정란’(靖亂)/‘치란’(治亂)의 대비에서 할 수 있듯이, 증산은 동학을 기존 질서를 무너뜨려서 혼란을 초래하는 주변종교의 원심력으로 평가한 반면, 자신의 종교활동은 혼란을 수습하고 기존 질서를 대체하는 대안종교의 구심력이자 혁신적인 비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작란과 정란/치란은 모두 ‘조화(造化)’라는 관점에서 합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변종교의 기성질서 파괴와 대안종교의 새로운 질서 대체가 조화의 관점에서 하나의 연속적인 신종교운동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 농민혁명이 지향하는 서발턴의 원한은 사회적 위계질서의 역전을 충분히 성취하지 못한 채 실패했기 때문에 또다른 해원공사의 대상이 되었다. 강증산은 왕후장상이 되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자들의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를 했는데, 증산계 교단에서는 이 공사를 후일 차경석이 보천교를 통해 차천자(車天子)로 등극하게 한 공사로 이해했다.73)

한편, 증산은 육체적으로 아프거나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배제되는 다양한 서발턴들의 한을 푸는 해원상생의 삼계공사를 통해 후천개벽을 위한 물샐틈없는 도수를 짜놓았다고 주장하면서, ‘하늘과 땅을 뜯어고치는’ 후천개벽은 ‘오직 어리석고 가난하고 천하고 약한 것을 편이하여’ ‘부하고 귀하고 지혜롭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두 척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해서’, ‘묵은 기운이 차 있는 곳에서는 큰 운수를 감당하기 어려운 까닭에 부자의 집 마루와 방과 곳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 차 있다’고 했다.74) 이러한 인식은 약하고 비천한 서발턴들이 지혜를 얻는 상등인이 되고 강하고 부귀한 자들이 몰락하는 하등인이 되는 후천개벽으로 전개되었다.75)

2. 농민/여성/무당의 해원공사에 대한 해석의 분기

한편, 해원공사는 비주류로 주변화된 서발턴과 헤게모니를 장악한 주류 세력의 사회적 위상을 전복시키는 역전적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상등인’과 ‘하등인’의 역전 현상이다. 조선에서는 양반 상등인이 유교적 교화의 주체인 반면, 상놈 하등인은 교화의 대상이었으나, 증산은 이러한 위계질서를 정반대로 역전시키고 전면적으로 전복시켰다. 그 의례화된 연행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개장국 식사다. 증산은 개고기를 즐겨 먹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천지 망량과 소통하는 의례화된 실천으로서 해원공사의 연행적 의례였다.

나아가 증산은 개고기 식사를 조선시대 내내 하층 서발턴에 속했던 농민들을 개고기를 즐기는 상등인으로서 천지 망량과 소통하는 의례적 연행의 실천적 주체로 승화시켰다. 개고기는 본래 농사를 위해 허락받지 않은 소고기 도살이 법적으로 금지된 조선에서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고 섭취할 수 있는 단백질이라는 점에서 상층 선비들도 즐겼기 때문에 ‘유육’(儒肉)이라고도 불렸으나, 강증산은 개고기를 상등인의 고기로서 천지(天地)를 주장하는 망량(魍魎)76)과 소통하는 음식으로 새롭게 규정했는데, 이로써 개고기를 음식 금기로 설정하는 선천(先天)의 도가(道家)와 대립했다.77) 그런데 이러한 『전경』의 해석과는 달리, 『대순전경』에는 “상등 사람은 곧 농민”이라는 증산의 설명이 추가적으로 더 나온다.78) 이는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간 전통에 대한 재평가라는 점에서 망량과 소통하는 사람을 농민으로 한정하지 않는 대순진리회의 해석과 일정한 차이가 난다.

또한 상등인에 대한 교리 해석에서 볼 때, 『대순전경』이 농민을 상등인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모든 서발턴으로 더욱 확장하는 반면, 대순진리회의 『전경』은 서발턴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는 대신 도덕적이고 포괄적인 해석의 경향이 뚜렷하다. 『대순전경』에 따르면, 종도 박공우(朴公又)가 죽을 사람으로 ‘도인(道人)으로서 표리(表裏)가 같지 아니한 자’를 지목한 반면, 살 사람으로는 ‘들판에서 농사(農事) 짓는 사람과 산중에서 화전(火田) 파는 사람과 남에게 맞고도 대항치 못하는 사람’을 꼽았을 때 증산이 이 대답을 인가하면서 농민, 화전민, 맞고 대항치 못하는 무력한 사람 등을 ‘상등(上等) 사람’으로 설명했다.79) 이처럼 살 사람과 죽을 사람, 상등인과 하등인을 구분하는 설명은 주류 기성종교의 종교적 엘리트와 민간의 비주류 서발턴의 대립을 강조함으로써 서발턴의 강렬한 대변과 역전적 해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대순진리회는 “트집을 잡고 싸우려는 사람에게 마음을 누그리고 지는 사람이 상등 사람이요 분에 이기지 못하여 어울려 싸우는 자는 하등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서발턴적 차원보다는 마음과 행동의 태도와 자세를 더욱 강조하는 도덕적인 경향이 강하다.80) 요컨대, 보천교, 선도교, 증산도 등과 연결되는 『대순전경』이 상대적으로 농민을 비롯한 다양한 하층 서발턴들을 상등인으로 강조하면서 서발턴의 차별적 특성과 전복적 사유를 강조한 반면, 대순진리회의 『전경』은 상대적으로 포괄적이고 도덕적인 해석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증산은 선천(先天)에는 주로 도통하는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교화를 받는 대상에 불과했던 여성을 후천(後天)의 도통하는 군자로서 그 위상을 새롭게 재정립했다.81) 그는 하늘만 높였던 선천에 비해 후천에는 지덕(地德)을 높여서 하늘과 땅을 일체로 받드는 새로운 이상을 제시했다.82) 이러한 음양합덕(陰陽合德)의 토대 위에서 남존여비의 관습이 무너지고,83) 많은 여자들이 도통군자가 되는 후천의 도통진경과 지상선경을 예언했다.84)

그러한 인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음양 도수를 조절하는 정음정양(正陰正陽) 공사이다.85) 강증산은 후천의 음양 도수 조정을 위한 오주 수련 뒤에 종도들에게 점을 찍게 했는데, 여러 명의 아내를 원하는 다른 종도들과는 달리 점 하나만 찍은 뒤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요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 일양이 원리인 줄 아나이다”고 답한 문공신을 ‘정음 정양의 도수’로 인정하였다.86) 정음정양 도수를 통해 남성 가부장 중심의 일부다처제의 전근대적 상황이 종식되고 일부일처제가 정립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여성의 문제는 말할 수 없이 희생되는 과부의 순절 현상이었다. 증산은 과부가 남편을 여의고 순절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청춘과부의 순절을 악독한 귀신이 무고한 인명을 살해한 것으로 비판하면서 종이에 “忠孝烈 國之大綱 然 國亡於忠 家亡於孝 身亡於烈”라는 글을 써서 불사르는 연행적 정화의례를 실천했다.87) 그는 ‘충효열’이 조선시대 유교적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근간이지만, 그로 인해 각각 나라, 집안, 몸이 망한다고 보았다. 유교적 가치, 담론,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죽이고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글 쓴 종이를 불태우는 것은 충효열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수혜자인 임금, 부모, 남성을 위해 희생하는 서발턴인 신하, 자녀, 여성에 대한 사회적 규정의 억압을 해체하는 의례적 연행의 실천이며, 이를 통해 지배담론과 사회구조에 구속되어 말할 수 없는 서발턴들은 제 목소리와 권리를 회복하게 된다. 증산은 남성 가부장 중심의 사회체제에서 억눌린 청춘 과부들의 맺힌 한을 대변하고 해소하기 위해서 과부를 수절시켰던 폐단을 고쳐서 과부와 홀아비를 한쌍으로 맺어 개가시키는 처결을 내린 종도 박공우를 칭찬하면서 그것을 후천 오만년 공사로 정립했다.88)

증산은 그러한 여성 서발턴의 목소리를 복권하기 위해서 “대장부(大丈夫) 대장부(大丈婦)”라는 글을 쓰고 불사르는 공사를 했다.89) 남자에게만 쓰던 대장부라는 용어를 여성에게도 동일한 위상의 한자로 바꾸어 사용한 것은 남녀평등의 이상을 구현한 것이었다. 또한 태인읍을 지날 때 자신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두 노파에게 길을 비켜주고 외면하면서 당시 동행하던 종도 박공우에게 “이제는 해원시대니라. 남녀의 분별을 틔워 제각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풀어놓았으나 이후에는 건곤의 위치를 바로잡아 예법을 다시 세우리라”라고 말하기도 했다.90) 조선의 유교적 예법이 남녀의 분별을 엄격하게 규정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한 것과는 달리, 증산은 먼저 남녀의 분별을 틔워서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풀어놓음으로써 남성 중심의 가치와 질서 속에서 꽉 막힌 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여성 해원의 시대적 과제를 구현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건곤(乾坤)의 위치를 바로잡아 예법을 다시 세운다’고 천명했다. 이것은 원하는 푸는 방식이 파괴적 일탈을 넘어서서 새로운 대안 질서의 구축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대안종교적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는 이러한 증산의 사상을 교리와 조직 구성의 두 가지 측면에서 발전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교리 차원에서 보면, 남성 중심적 ‘억음존양’(抑陰存陽)의 남녀차별에서 ‘정음정양’(正陰正陽)의 남녀평등으로 새롭게 정립했다. 이는 대순진리회의 종지 중에서 음양합덕과 해원상생(解冤相生)을 남녀의 조화와 상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도통진경(道通眞境)은 후천의 여성 도통군자가 충분히 출현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과 함께 덕을 실현하는 합덕(合德)의 주체로서 신인조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도통진경을 이룩하는데, 이 과정에서 남녀간의 해원상생을 이루어야 한다.91) 또한 실제로 이러한 이념과 포덕(布德)의 성과에 따른 연운제(緣運制)의 제도적 기반을 통해 여성 임원이 남성 임원에 2배에 이를 정도로 여성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제도화하기도 했다.92)

이에 비해 남성에게 굴종했던 여성의 적극적 지위를 회복하거나 역전시키는 무당 도수(巫堂度數)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천지 굿으로도 불리는 이 공사에서 증산은 자신이 천하 일등 재인이 되어 장고를 치는 부수적 역할을 하고 고부인이 천지 굿의 춤을 추는 천하 일등 무당의 주도적 역할을 하도록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다른 당이 아닌 무당에게 빌어야 한다고 했다.93) 이러한 무당 도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연행적 함의를 지닌다. 첫째, 무당과 재인이 조선시대 사민의 체제에도 끼지 못할 만큼 최고로 주변화되고 배제된 천인 서발턴이었는데, 증산이 그들의 전통을 무당의 천지 굿이라는 공사 형태로 채택한 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천한 지위에 있던 두 직업군을 가장 성스러운 우주적 연행의 모델로 재전유한 것이다. 둘째, 천지 굿은 가정 내에서 남편과 부인이 각각 맡았던 주역과 조역이 서로 역전된 상황을 의례적 연행을 통해 구현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질서가 남녀 평등의 질서로 바뀌는 퍼포먼스였는데, 증산계 교단 중 일부 종파에서는 이를 ‘상제’를 계승하는 새로운 여성 카리스마의 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증산과 무당도수를 함께 했던 고판례(高判禮, 1880~1935)의 종교적 위상에 대한 해석은 선도교로부터 증산도로 이어지는 종파와 무극도로부터 태극도를 거쳐 대순진리회로 이어지는 종단의 해석이 서로 다르다. 전자는 고판례에게 강증산이 강령했던 사건을 고수부에게 ‘천지대업을 맡기는’94) 종교적 카리스마의 계승으로 해석하여 상제와 대등하거나 버금가는 위상의 수부(首婦)로 설명한 반면, 후자는 다양한 공사에서 강증산과 짝을 이루어 공사를 행했던 다른 종도들처럼 수부를 상제를 단순하게 돕는 보조적 위치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를 여성 무당의 서발턴적 상황에 대한 관심과 남성과 여성의 지위 역전의 의례적 연행이 여성 카리스마의 출현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여부의 차이로 해석할 수도 있다.

Ⅳ. 소태산 박중빈의 정신개벽과 서발턴의 사회적 실천

1. 원불교의 창교자 박중빈 : 정신적 자각과 일상적 실천의 탈-서발턴화

원불교의 창교자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도 앞선 두 창교자들처럼 몰락한 양반가 출신이었다. 그는 밀양박씨 규정공파 양반의 후예였다. 그의 가문은 13대조 박심문 이후 벼슬길에서 멀어져서 영월과 양주 등을 전전하다가 7대조인 박억이 전남 영광으로 들어온 뒤부터 이 지역에 세거했으나 명색만 양반인 잔반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할 만큼 힘든 형편이었다가 중간에는 마름 노릇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조금 호전되었으나 나중에 다시 몰락하였다.95)

소태산은 한미한 양반가에서 태어났고 경제적으로도 몰락한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생에서도 과부였던 강릉 유씨가 소실로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본처 임씨가 죽은 뒤 후처로 생활하면서 낳은 아들이다. 엄밀하게 보면 소실이 낳은 서출 혹은 재가녀의 아들이기 때문에 수운처럼 반쪽 양반의 출생적 한계가 있었다.96) 따라서 출신 성분이나 경제적 상황에서 이미 서발턴으로 전락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으로 인해 소태산은 어릴 적부터 도사를 찾아다니거나 신령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올리는 등의 주변부 서발턴 종교인의 파격적인 행태를 드러내곤 했다. 그는 농사꾼인 아버지와는 달리 제대로 농업에 종사한 경험이 없어서 농사꾼이 되지도 못했다. 대신 지인의 제안에 따라 돈을 투자해서 주막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한때 파시에서 뱃사람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대주고 고기와 교환하여 방매하는 장사를 통해 한때 일정한 경제적 안정을 취하기도 했다.97) 이렇듯 하층민으로 전락한 상황은 서발턴적 삶의 애환을 직접 공감하는 배경이 되었다.

소태산은 서발턴적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서도 구도의 열정으로 인해 때때로 선정에 드는 과정을 반복하다 결국 1916년에 대각을 이루었다. 고요한 명상의 집중 가운데서 우연히 한 생각을 얻어서 사리를 분별하는 지각이 트이고 수양을 하는 영문이 열리고 지혜의 혜문이 열리는 과정을 거친 뒤에 마침내 지각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상태에 안착한 것이다.98) 대각을 이룬 그는 모든 사회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탈-서발턴적 초월을 이루었다.

그런데 소태산은 초기에는 앞서 등장했던 신종교들의 종교적 자산을 일정하게 수용하는 양상을 선보임으로써 그러한 종교적 관심을 지닌 사람들을 흡수하였으나, 나중에는 차별적 개성을 드러내는 재전유를 선보였다. 그는 수운과 증산으로부터 ‘후천개벽’의 이상을 계승했으나, 증산이 동학의 다시개벽을 동세개벽으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세개벽을 역설했듯이, 물질개벽을 넘어서는 사회적 정신개벽의 생활종교로서 원불교를 새롭게 제창했다. 실제로 소태산은 대각을 이룬 뒤에 수운의 『동경대전』으로 문답을 하거나 증산교단 선전원을 불러서 통령의식을 하기도 했다.99) 이런 과정에서 동학의 최제우는 물론 세간에서 광인(狂人)으로 폄하되기도 했던 강증산에 대해서 선지자, 선인, 성현 등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100)

이에 따라 다른 신종교의 창교자들을 ‘도인(道人)’의 연속적 전통으로 수용하는 소태산의 자세는 원불교를 후천개벽 종교의 완성태로 보는 신자들의 포용주의적 관점으로 전개되었다. 원불교 신자들은 선천의 어둠 혹은 겨울에서 후천의 새벽 또는 봄으로 바뀌는 시간과 계절이 바뀌는 리듬을 개벽의 전환으로 비유하여 이해하기 위해, 수운을 첫 새벽의 소식을 알리거나 해동에 맞추어 농사 지을 준비를 지시하는 선지자로 보았고, 증산을 그 다음 소식을 알리거나 농력의 절후를 일러 준 선인으로 이해했으며, 소태산을 날이 밝아지자 일을 시작하거나 직접 농사법을 지도한 스승으로 묘사했는데, 소태산도 이런 설명에 수긍하였다.101) 따라서 원불교 신자들은 동학-천도교, 증산계 교단, 원불교를 후천개벽의 시작, 발전,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원불교를 개벽종교의 최종 완성태로 여기는 포용주의적 민족종교사관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이러한 원불교의 개벽관이 증산이 동학-천도교의 개벽관을 재전유한 것과 유사한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원불교의 2대 교주 정산(鼎山) 송규(宋奎, 1900~1961)는 개벽을 “순수(順數)의 일꾼들과 역수(逆數)의 일꾼들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서로 발전하여 좋은 세상 건설을 촉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102) 이상적인 세상을 만드는 개벽은 역수와 순수가 상호 대립과 발전을 통해 함께 작용하는 일련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또한 “동란자(動亂者)도 성인(聖人)이요 정란자(靖亂者)도 성인”103)이라고 하여 세상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체 작업과 새로운 세상의 대안적 질서를 재구축 작업을 모두 성인(聖人)의 일로 인정했다. 이는 소태산이 제시했던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송규가 다원주의 사회에 맞게 재구성한 삼동윤리(三同倫理)의 세 가지 강령 중 동원도리(同源道理)의 구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는 증산이 수운과 전봉준의 ‘작란’과 증산의 ‘정란’/‘치란’을 각각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부정적 동세개벽과 긍정적 정세개벽으로 비교하면서도 양자를 모두 ‘조화’로 이해한 것과 상통한다. 다만 증산이 상대적으로 전자를 웅패의 술이라고 부정적으로 보고 후자를 성인의 도라고 긍정적으로 본 반면, 정산 송규는 양자를 모두 긍정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동학-천도교를 일면 긍정하면서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는 증산의 관점과 더불어 수운과 증산을 모두 선지자로 대우하면서 원불교를 완성으로 보는 관점의 차이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순수와 역수, 동란자와 정란자를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대안 질서를 제시하는 개벽의 양면적이고 연속적인 측면으로 보는 원불교의 개벽관은 서양의 ‘과학(科學)’이 제공하는 편리한 ‘물질문명’과 ‘도학(道學)’이 풍요롭게 하는 ‘정신문명’이 어우러져서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이 조화 발전하는 광대무변한 문명세계를 실현하려는 후천개벽의 이상을 선보였다.104)

소태산은 융성해지는 물질개벽에 의해 노예 생활로 전락하지 않도록 정신개벽이 조화를 이루는 문명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서’ 이상적 낙원을 구현하려고 했다.105) 이러한 정신개벽의 이상은 소태산이 다른 교법을 참고하고 시국을 검토한 뒤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 등을 통해 최초법어로 상세하게 제시했으나, 그보다 앞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106)는 개교표어를 통해 1932년에 공식 교리서에 등장하였다.107)

그런데 소태산은 이보다 앞서 1921년에 이미 수운과 증산의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천지개벽에 대한 사상을 담은 「낙도가」를 썼다.108) 여기에서 천지개벽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같은 대열인 ‘삼재동열’을 이루지만 ‘최령자는 사람’이요 그가 ‘천지만물의 주인’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소태산의 천지개벽은 수운의 시천주(侍天主)와 증산의 인존(人尊)을 거쳐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정신개벽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109)

이러한 정신개벽의 이상 선포는 저축조합 결성(1917), 간척지 개척(1918~1919), 기도결사(1919) 등을 거쳐 1924년 불법연구회를 창립하는 과정 사이에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태산은 1919년 봄에 방언 공사를 마친 뒤 물질문명의 세력은 융성해진 반면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이 날로 쇠약해진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9인 제자를 모아놓고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천지신명이 이미 감응하여 백지혈인(白紙血印)의 결실을 보는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이루었다.110)

그러나 소태산은 이외의 종교적 이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절제하였다. 강증산이 의례적 연행의 실천인 ‘공사’를 통해 신비한 기행과 다양한 이적을 선보인 반면, 소태산은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도 그에 대해 함구하도록 철저하게 경계했다. 양자 모두 인본적 사상을 공유했지만, 인존사상을 강조하면서도 신명과 사람이 상호 연관되는 양상을 주목했던 강증산이 세간에서 광인으로 평가받을 만큼 파격적으로 우주적 차원의 삼계공사를 펼친 반면, 소태산은 신통묘술(神通妙術)과 기행이적(奇行異蹟)을 철저하게 경계했다.111)

소태산은 강증산의 해원공사를 일정하게 존중하면서도 삼계를 개벽하는 우주적 차원의 연행적 의례보다는 개인 각자가 모두 물질문명을 운용하는 정신적 주체임을 자각하도록 하는 주체적인 자각의 실천적 생활화를 역설했다. 그리하여 특정한 종교적 카리스마나 의례적 연행을 강조하기보다는 법신불(法身佛)의 진리가 드러나서 ‘처처 불상(處處佛像) 사사 불공(事事佛供)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용화회상을 강조했다.112) 만물이 모두 불성이 있으며 인간의 모든 행위가 불공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조선시대 백성들이 난세의 메시야로 이해하고 대망했던 ‘정도령’이나 ‘미륵불’을 특정한 카리스마적 인물이 아니라 보편적 지혜의 각성으로 새롭게 인식했다.113) 이에 따라 무시선(無時禪)과 무처선(無處禪)의 종교적 수행을 통해 불법과 생활이 일치하는 생활불교를 추구했다. 요컨대, 소태산은 생활불교를 표방하는 정신개벽의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을 강조했던 것이다.

소태산은 이러한 주체적 각성을 토대로 삼아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해원상생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의 사은(四恩)을 통해 우주의 모든 존재가 총체적으로 연기적 은혜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상호간 원한 관계를 풀고 상호 은혜 관계를 회복하여 계급, 지역, 남녀, 빈부, 종족 등의 각종 사회적 차별을 극복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문했다.114) 그리고 이러한 정신개벽을 이루기 위한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심전(心田)을 발견하는 견성(見性)과 심전을 계발하는 양성(養性)과 솔성(率性)이 모든 종교의 성인과 부처가 공동으로 삼은 목표라는 점을 밝히고, 심전 계발의 전문 과목으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세 가지 강령을 제안했다.115) 또한 불교의 삼학(三學)인 정(定), 혜(慧), 계(戒)에 해당하는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일원화(一圓化)와 영육쌍전(靈肉雙全)과 이사병행(理事竝行)을 정신개벽의 수행법으로 제안했다.116) 아울러 정신수양에는 염불과 좌선을, 사리연구에는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를, 작업취사에는 상시일기, 주의, 조행의 과목을 각각 두어 체계적인 수행이 가능하도록 했다.117)

이러한 원불교의 정신개벽은 자력양성(自力養成), 지자본위(智者本位), 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 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 등의 사요(四要)를 통해 반상의 차별, 적서의 차별, 노소의 차별, 남녀의 차별, 종족의 차별 등 과거 사회적 폐단을 극복할 것을 역설하면서 사회적 실천의 강력한 지향성을 잘 드러냈다.118)

2. 원불교 여성들의 주체적 자각과 탈-서발턴적 자력양성

소태산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여성들이 많았다. 특히 과부, 이혼녀, 첩실, 화류계 출신 등을 포함해서 한이 깊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119) 예컨대, 1924년 전후의 서울교당에는 이공주, 황정신행, 성의철, 이동진화 등 ‘서방 뺏은 년’과 지환선, 김삼매화, 이현공 등 ‘서방 뺏긴 년’들이 즐비해서 소태산이 상당히 신경을 쓰기도 했으며, 심지어 한 남자의 처와 첩이 동시에 원불교 신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120)

원불교는 이러한 여성들이 스스로 수행하는 주체로서 각성하도록 교리적으로 뒷받침했다. 예컨대, 원불교 사요 중 ‘자력양성’은 초기 교리에서 ‘남녀권리동일’이라고 표현되었는데, 이를 통해 주체적 여성을 강조하면서 교단 내 조직과 제도상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고 남녀차별을 배격하면서 여성교무제도를 제도화하였다.121) “일원은 제불, 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서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일원상(〇)의 진리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드러내고 있으며,122) 사요는 의뢰나 종속에서 벗어나서 평등세계를 실현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잘 보여준다.123) 특히 자력양성의 측면에서는 남존여비와 삼종지도의 폐단을 시정하고 제사권까지 부여할 정도로 정신의 자주력, 육신의 자활력, 경제의 자립력을 근간으로 자력생활을 하는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했고, 지자본위 측면에서는 반상, 적서, 노소, 남녀, 종족 차별을 타파하여 지식평등세계와 문화세계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타자녀교육 면에서는 여권 신장을 위한 평등교육을 역설했다.124)

더욱 중요한 것은 교단조직으로서 남성조직에 견줄 만한 여성조직을 공식적으로 구성하고 운영했다는 점이다. 원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에 비해 여성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소태산은 초기 제자들의 구성에서 법인성사를 함께 했던 남성 9인 제자에 견줄 만한 9인 여제자들을 여자 수위단을 조직했는데,125) 이들은 말할 권리를 상실한 여성 서발턴들이었다. 일타원(一陀圓) 박사시화(朴四時華, 1867~1946)는 과부였고, 이타원 장적조(張寂照, 1878~1960)는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도망친 가출녀였으며, 삼타원 최도화(崔道華, 1883~1954)는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자살을 시도하며 출가한 승려였고, 사타원 이원화(李願華, 1884~1964)는 고아 출신으로 남편 사별 후 재혼한 뒤 다시 버림받아 소태산에게 의탁했던 과부였으며, 오타원 이청춘(李靑春, 1886~1955)은 화류계 출신의 퇴기였고, 육타원 이동진화(李東震華, 1893~1968)는 조실부모하고 왕족의 첩이 되었다가 가출한 여자였으며, 칠타원 정세월(鄭世月, 1896~1977)은 후처로 살았던 과부였고, 팔타원 황정신행(黃淨信行, 1903~2004)은 학벌 좋은 신여성이었으나 초혼에 실패하고 돈 많은 유부남의 첩으로 고통받던 사람이었으며, 구타원 이공주(李共珠, 1896~1991)는 황후의 시독(侍讀)을 하는 명문 출신이었지만 유부남의 첩 출신 과부였다.

한편, 소태산을 따른 초기 여제자들 중에는 여학교를 나온 지식인층 여성들이 상당수 있었으며,126) 소태산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여성들 스스로 자유와 자주의 주체적 각성을 통해 여성교무제도를 마련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이청춘의 의견서는 이러한 의식을 잘 보여준다.

광범하게 조선 여성의 정도는 고사하고도 먼저 본회원인 우리 여성의 정도를 일고합시다. 어떠한가? 균화평일(均和平一)을 주장하는 도덕가인즉 우리집에서도 남자들은 농업부를 조직한다 공업원을 규합한다 하야 직접 본관에 거주하면서 주인의 자격으로 사업과 공부에 전무하지 않습니까. 그와 반면에 우리 여성들은 어떠합니까? 동일한 법하(法下)에 동일한 인생으로서 유명무실한 손에 불과합니다. … 알고 보면 남들이 우리에게 차별대우와 구속을 준 것은 결코 아니라 우리가 지식 없고 생활의 자유가 업고 자주의 능력이 부족하여 스스로 손이 되고 제이자(第二者)를 만들었습니다.127)

9인의 여자 수위단은 1931년 여성 수위단 시보단을 내정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1945년에 남녀 정수위단의 실무체제를 발족할 만큼 발전했는데, 원불교 최고의결기구인 수위단의 조직에 남녀가 같은 수로 조직된 남녀평등의 단 조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128) 원불교의 이런 교직 구성은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양성평등의 조직화 정도가 높다.129)

Ⅴ. 서발턴의 관점에서 본 근대 한국 자생 신종교 사상의 의의

근대 한국의 자생적 신종교들은 제3세계의 근대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신종교로서, 주류 질서와 세계종교 혹은 기성종교에 의해 복합적으로 억압과 배제를 당하는 사회 주변부의 비주류 서발턴을 대변/재현하는 동시에 기존 질서를 초월하는 종교적 사상과 실천을 구현하는 대안종교였다. 그들은 기성 질서의 질곡을 폭로하고 일탈하면서도 새로운 대안 질서를 이념으로 제시하지 않았던 조선 후기 밀레니엄적 주변종교운동과는 달리, 이들은 모두 서발턴적 규제와 억압을 전복시키고 기성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대안적 비전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실천한 유토피아적 대안종교로서 탈-서발턴적 종교를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조선에서 유교처럼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기성종교나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의 세계종교에 대항하여 여성, 무당, 천민 등 다양한 서발턴을 대변/재현/초월하는 대안종교로서 종교적 소구력을 갖게 되었다.

민중의 저항적 주체 측면만을 강조했던 기존의 민중종교론에서는 소수 지배 엘리트에 저항하는 다수 백성을 단일한 민중 세력으로 묶어서 설명했지만,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들은 잔반, 서얼, 여성, 무당, 천민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기성질서에 대한 순응과 저항의 모순적 측면을 함께 지닌 서발턴의 주변종교에서 시작해서 후천개벽(後天開闢), 해원상생(解冤相生), 사은(四恩) 등의 대안적 이념을 통해 탈-서발턴적 대안종교로 발전했다. 예컨대, 세 종교들이 본격적으로 구현하는 양성평등에서 남성에 대비된 여성은 서발턴이라고 할 수 있어도 민중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으며, 단주의 원한을 해원하거나 일본의 원한을 해원하는 강증산의 해원공사에서 단주나 일본은 서발턴적 관점에서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민중이라는 범주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양반과 상민 사이에서 주변화된 잔반이나 서얼, 상민 범주에서도 배제된 무당이나 천민은 물론, 남성에 대해 주변화된 여성들이 서방 뺏은 여성과 서방 빼앗긴 여성으로 서로 갈등할 수 있는 것이 서발턴이지만, 탈-서발턴의 대안적 비전은 갈등의 대결이 아니라 개벽의 변화, 원한의 상호갈등이 아닌 은혜의 상호호혜를 통해 지배 질서에 대한 저항과 일탈을 넘어서서 서발턴적 대상이 아닌 탈-서발턴적 주체로 각성하고 거듭나도록 만들었다.

서발턴이 탈-서발턴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주체로 자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런 능력은 양반들만 갖고 있었다. 따라서 주변종교에서 대안종교로 거듭난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들은 양반 중 서발턴으로 주변화된 인물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실제로 수운, 증산, 소태산 등 동학-천도교, 증산계 교단, 원불교 등 자생적 신종교의 창교주들은 대체로 몰락한 양반 출신의 ‘잔반’, 그것도 서얼이나 재가녀 자녀로서 조선이라는 유교사회에서는 출세의 제한을 받는 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본격적인 종교활동에 앞서 시골 서당의 훈장, 농민, 장사꾼, 술사 등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실제로 수운은 상업과 광업에 종사하면서 전국을 유력했고, 증산은 훈장은 물론 풍수나 점복 및 치유 등을 하면서 여러 곳을 떠돌았으며, 소태산은 한때 상업활동에 종사했으나 역시 정착하지 못하고 수행을 위해 부유했다. 그리하여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서발턴들의 처지를 공감적으로 살피는 한편 상층 양반으로부터 하층 상놈으로 전락하여 주변화되는 서발턴적 위상으로 인해 다양한 서발턴들의 표현할 수 없는 염원과 원한을 종교적으로 대표/재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서발턴적 특징은 창교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추종한 신도들에게서도 명확하게 나타났다. 근대 한국의 자생적 신종교의 초기 제자들은 대체로 잔반, 농민, 노비, 무당, 기생, 여성을 비롯해서 다양한 비주류 서발턴들이었다. 신종교들은 다양한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여 이러한 서발턴들의 권리를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사회적 위상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까지 하였다. 예컨대, 최제우는 노비를 수양딸과 며느리로 맞아들였고, 강증산은 개고기를 먹는 농민의 습관과 천한 무당의 굿을 비롯해서 다양한 서발턴의 한을 푸는 해원공사를 전개했으며, 원불교는 여성 교직의 제도화를 이루기도 하였다.

한편, 본 원고에서는 한국종교사와 비교종교학적 차원에서 근대 한국의 자생적 신종교의 사상과 실천 및 이상세계 구상에 나타난 각 신종교의 사상적 공통점과 차이점을 탐색하고 서발턴의 관점에서 그 의의를 논의했다. 이 세 창교자들의 주요 활동시기는 각각 조선 말기,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에 대응하는데, 이들은 각각 시대적 배경에 맞게 다시개벽, 삼계개벽, 정신개벽 등의 대안적 비전을 전개하였다.

먼저 동학을 통해서 일어난 서발턴의 주체적 각성은 서발턴의 초월성 인정을 거쳐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는 사회적 민중-민족적 다시개벽을 구현하면서 천한 하층민과 억압받는 여성을 중심으로 서발턴들이 스스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동학-천도교에서는 다양한 서발턴들이 초월적 신성을 각성한 주체로서 기존의 규제적 인식과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사회적 실천을 전개했다. 이에 비해 증산을 따르는 종단들은 민족과 계급을 넘어서서 인간과 신명, 지상과 명계 및 천계 등을 아우르는 세계적, 우주적, 다층적 차원에서 서발턴들이 지닌 다양한 원한의 다성성을 인정하고 해소하는 천지공사의 주술-의례적 독자성을 선보였으며, 원불교는 서양의 물질개벽에 대응하여 주체적 정신개벽의 사회적 실천을 은혜의 관점에서 실현하면서 개인수양과 사회적 활동을 강조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증산계 교단이 상대적으로 서발턴의 구원자인 상제의 초월적 주재권을 강조하는 반면, 동학-천도교와 원불교는 주체적 각성의 내면화와 일상적 도덕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들이 후천개벽의 대안적 이념을 제시한 것은 공통적이지만, 서발턴을 탈-서발턴화하는 방식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나타났다. 동학의 다시개벽은 양반 중심의 기성질서를 전복시키는 사회적 혁명의 가능성을 일정하게 실현시키면서 일본과 서양의 제국주의를 견제하는 피지배 민족의 저항과 투쟁을 적극 선보인 반면, 증산계 교단의 삼계개벽과 원불교의 정신개벽 등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전면 투쟁이 아니라 의례적 연행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평화적인 방식의 가능성을 구현했다.

실제로 수운이 ‘시천주’ 사상을 통해 서발턴에게 내재된 초월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종교적 주체성의 기반으로 삼아 계급적 갈등과 민족적 위기를 해소하고 ‘다시개벽’을 통해 다양한 서발턴들의 권리를 회복하는 새로운 대안 질서를 모색한 반면, 증산은 ‘해원공사’의 역동적인 주술-의례적 연행을 통해 서발턴들의 다양한 원한을 다성적 차원에서 대표하고 해소하면서 계급적 차별과 민족적 갈등을 넘어서서 인간과 천지신명계까지 아우르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삼계개벽’의 대안 질서를 구현하고자 했다. 또한 증산이 초월적 주재자의 강생과 의례적 연행을 통해 서발턴을 해방하는 상제의 초월적 개입을 강조한 반면, 소태산은 서양의 물질개벽에 대응하여 ‘정신개벽’의 주체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을 역설함으로써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따라 은혜의 연기적 관계를 강조하고 초월적 카리스마나 의례적 연행보다 생활 속 실천을 강조하는 생활불교의 이상을 전개하였다. 요컨대, 수운이 서발턴 내부의 초월성 자각과 사회적 변혁을 주목한 반면, 증산은 서발턴의 자각과 해방을 위한 초월적 주재자의 주술-의례적 개입을 역설했으며, 소태산은 일상 속의 내면적이고 정신적 수행과 개인들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Notes

강돈구, 『한국 근대종교와 민족주의』 (서울: 집문당, 1992) 참조.

Namhee Lee, The Making of Minjung: Democracy and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 South Korea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07) 참조.

황선명, 『민중종교운동사』 (서울: 종로서적, 1980); 류병덕 편, 『한국민중종교사상론』 (서울: 시인사, 1985); 趙景達, 『朝鮮民衆運動の展開: 士の論理と救濟思想』 (東京: 岩波書店, 2002) 참조.

한승훈, 「조선후기 반란의 종교사 연구: 추국 자료로 본 반란과 혁세 종교」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9), pp.105-122 참조.

같은 글, pp.327-345 참조.

신종교운동을 주변종교와 대안종교로 구분하여 보는 관점으로는 Stephen J. Stein, Communities of Dissent: A History of Alternative Religions in Americ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p.1-12; 박종천, 「신종교영화의 유형과 특성」, 『대순사상논총』 33 (2019), pp.186-188 등 참조.

신종교는 전통적 민중종교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적인 기성종교가 중심을 차지하는 종교적 위계질서의 주변부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운동이다. Lorne L. Dawson ed., Cults and New Religious Movements: A Reader (Cambridge, MA: Blackwell Publishers, 2003) 참조.

류병덕ㆍ김홍철ㆍ김낙필ㆍ양은용, 「한국근세종교의 민중사상연구」, 『한국종교』 14 (1989); 박맹수, 「한국근대 민중종교의 개벽사상과 원불교의 마음공부」, 『동학학보』 13 (2007); 大西秀尙, 「원불교의 민중종교사상 연구」, 『한국사상사학』 31 (2008); 이경원, 「한국 근대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 - 개항기부터 해방이전의 시기를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52 (2012) 참조.

스피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서발턴에 대한 다각적 검토와 심층적 논의로는 Rosalind C. Morris ed., Can the Subaltern Speak?: Reflections on the History of an Ide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참조.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 『황해문화』 96 (2017) pp.61-62.

박종천 편, 『조선시대 예교담론과 예제질서』 (서울: 소명출판, 2016) 참조.

김삼웅, 『수운 최제우 평전』 (서울: 두레, 2020), pp.38-43 참조.

같은 책, pp.47-54 참조.

崔濟愚, 『東經大全』, 「修德文」.

김삼웅, 앞의 책, pp.57-61 참조.

이하 설명은 崔濟愚, 『東經大全』, 「論學文」 참조.

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 『천도교약사』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2006), p.25.

崔濟愚, 『龍潭遺祠』, 「敎訓歌」.

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 앞의 책, p.25; 이상임, 「동학ㆍ천도교에 있어서 남녀 평등의 문제 - 여성 교령의 피택(被擇) 가능성에 대한 논의」, 『동학학보』 57 (2019), pp.105-106.

崔時亨, 『海月神師法說』, 「布德」.

崔濟愚, 『東經大全』, 「布德文」.

崔濟愚, 『龍潭遺祠』, 「夢中老少問答歌」.

같은 책, 「敎訓歌」, “부하고 귀한 사람 이전 시절 빈천(貧賤)이오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富貴)로세.”

崔時亨, 『海月神師法說』, 「待人接物」.

같은 책, 「內修道文」.

같은 책, 「待人接物」.

같은 책, 「待人接物」.

같은 책, 「養天主」.

같은 책, 「婦人修道」.

해당 표현은 『신인간(新人間)』 7호(1926.11.)에 나온다. 김미정, 「동학ㆍ천도교의 여성관의 변화」, 『한국사학보』 25 (2006), p.379.

김응조, 『수의당 주옥경』 (서울: 글나무, 2005), 특히 pp.98-99, p.116 참조.

조극훈, 「생명철학의 관점에서 본 동학의 여성관」 44 (2017), pp.11-12 참조.

이상임, 앞의 글, p.112 참조.

천도교 여성운동의 전개에 대해서는 천도교 여성회 편, 『한울 마음 여인들 : 천도교 여성들의 삶과 수도』 (서울: 혜화종합상사, 2010); 천도교 여성회 본부 편, 『천도교여성회 70년사』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1994) 참조. 다만 종교 조직상에서 종령은 아직까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 이상임, 앞의 글 참조.

김탁, 『증산 강일순』 (파주: 한국학술정보, 2006), p.42 참조.

같은 책, pp.56-57 참조.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p.3.

이상호, 앞의 책, pp.2-3; 김탁, 앞의 책, pp.60-62 참조.

이상호, 앞의 책, p.4; 김탁, 앞의 책, pp.64-68 참조.

주석 5) 참조.

이상호, 앞의 책, p.7.

『전경』, 행록 2장 12절.

같은 책, 행록 2장 12절.

같은 책, 행록 2장 12절 참조.

연행 이론(performance theory)에서 의례적 연행은 특정한 의례적 몸짓과 극적인 사건들의 실행을 통해 세계의 이해와 재구성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하고 새로운 실천을 자극한다. Richard Schechner, Performance Theory (London: Routledge, 1988), pp.171-172; Richard Schechner, The Future of Ritual: Writings on Culture and Performance (London: Routledge, 1993), pp.230-231; 박상언, 「퍼포먼스로서의 의례 읽기, 그 지점과 가능성」, 『종교문화연구』 9 (2007), pp.13-16 참조.

실천이론(practice theory)의 관점에서 의례화(ritualization)는 의미, 가치, 권위를 새롭게 창출하는 차별화된 문화적 패턴의 실천이다. Catherine Bell, Ritual: Perspectives and Dimension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p.80-81. Catherine Bell, Ritual Theory, Ritual Practic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p.ⅸ, p.8, pp.75-76, pp.81-82, p.98 참조.

『전경』, 교운 2장 32절; 『대순진리회요람』, 5. 「교리개요」 참조.

같은 책, 공사 1장 3절.

같은 책, 공사 1장 3절.

같은 책, 교법 2장 14절.

같은 책, 행록 1장 29절, 행록 4장 36절.

같은 책, 공사 3장 4절.

같은 책, 예시 23절.

같은 책, 공사 1장 12절.

같은 책, 공사 2장 4절.

같은 책, 공사 3장 19절.

같은 책, 예시 74절.

박종천, 「임진왜란시 도교 술법(術法)의 수용의 양상 - 정탁의 <약포선조유묵>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31 (2016); 박종천, 「한국의 뇌신(雷神) 신앙과 술법의 역사적 양상과 민족종교적 의미」, 『대순사상논총』 31 (2018) 참조.

『전경』, 공사 1장 2절.

같은 책, 공사 1장 1절.

같은 책, 공사 1장 4절.

같은 책, 교법 2장 56절.

같은 책, 교법 3장 35절.

같은 책, 교운 1장 32절.

같은 책, 교법 1장 2절.

같은 책, 교법 1장 24절.

같은 책, 교법 1장 9절.

같은 책, 교법 1장 38절.

같은 책, 교법 1장 10절.

같은 책, 공사 1장 25절.

같은 책, 교법 1장 53절.

같은 책, 교법 1장 54절.

같은 책, 교운 1장 16절; 교법 3장 30절; 『대순전경』 5장 19절.

『전경』, 공사 2장 19절.

같은 책, 교법 3장 4절.

같은 책, 교법 2장 11절.

같은 책, 교운 1장 44절.

같은 책, 공사 1장 26절.

『대순전경』 3장 130절.

『대순전경』 3장 55절.

『전경』, 교법 1장 55절.

후천의 여성 군자의 위상과 남녀평등이념에 대해서는 이경원, 「대순사상과 여성- 21세기 남녀평등의 새로운 이념모색」, 『대순사상논총』 10 (2000); 박민미ㆍ황희연ㆍ박용철, 「대순사상의 남녀평등이념과 여성성 재조명 – 여성해원의 원리로 본 공덕과 실천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29 (2017) 참조.

『전경』, 교법 1장 62절.

같은 책, 교법 1장 68절

같은 책, 예시 45절.

같은 책, 공사 2장 16절.

같은 책, 공사 2장 16절.

같은 책, 교법 1장 46절.

같은 책, 공사 2장 17절.

같은 책, 교법 2장 57절.

같은 책, 공사 1장 32절.

박마리아,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관점으로 본 대순진리회의 여성관」, 『신종교연구』 22 (2010), pp.13-14 참조.

같은 글, pp.16-19 참조.

『전경』, 공사 3장 33절.

『대순전경』, 3장 31절.

이혜화, 『소태산 평전』 (서울: 북바이북, 2018), pp.72-74 참조.

같은 책, pp.42-44 참조.

같은 책, pp.90-100 참조.

『대종경』, 「수행품」.

박정훈, 『한울안 한이치에』 (익산: 원불교출판사, 1982), p.184, p.195, p.200.

『대종경』, 「변의품」 30장과 31장

같은 책, 「변의품」 32장.

『정산종사법어』, 「도운편」 18장.

같은 책, 「도운편」 18장.

박광수, 「원불교의 후천개벽 세계관」, 『원불교와 종교문화』 44 (2010) 참조.

『정전』, 「총서편」, 제1장 개교의 동기 참조.

『대종경』, 「서품」 4장.

정향옥, 「원불교 개벽사상의 역사적 전개와 특징」 (원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p.44, p.55.

같은 글, p.47 참조.

같은 글, p.45; 신순철, 「「몽각가」와 소태산 가사 수록 문헌 연구」,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9 (2005), p.310 참조.

『원불교교사』 제1편 제4장, 『대종경』, 「서품13」, 「서품14」 등 참조.

『대종경』 「수행품』 42장 참조.

같은 책, 「전망품」 16장 참조.

같은 책, 「변의품』 33장 참조.

윤승용, 『한국 신종교와 개벽사상』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7), pp.219-220 참조.

『대종경』, 「수행품」 60장.

같은 책, 「교의품」 1장.

정향옥, 「한국 신종교 개벽사상의 수행적 성격 – 동학ㆍ천도교, 증산교, 원불교를 중심으로」, 『신종교연구』 34 (2016), p.168.

『정전』, 「교의편」, 「사요」 참조.

이혜화, 앞의 책, p.423.

같은 책, p.428-429.

남성 가부장적 한계를 넘어서는 소태산의 여성관에 대해서는 하정남, 「소태산의 탈가부장적 종교사상과 여성해방운동」, 『종교문화연구』 1 (1999); 박혜훈, 「소태산의 여성관과 원불교여성교무의 현재」, 『신종교연구』 22 (한국신종교학회, 2010) 참조.

『정전』, 제2 교의편 제1장 일원상, p.23.

같은 책, 제2 교의편 제3장 사요, pp.39-46.

박혜훈, 앞의 글, pp.64-66 참조.

이하 9인에 대한 설명은 이혜화, 앞의 책, pp.425-427 참조.

같은 글, pp.75-76 참조.

원광사 편, 『원불교자료총서』 제2권, 불법연구회, 『월말통신』 16호 (익산: 원불교출판사, 1984), pp.47-52.

박혜훈, 앞의 글, pp.71-75 참조.

같은 글, pp.75-76 참조. 다만 원불교에서는 초기부터 기혼여성제자들과 정녀들이 함께 교무로서 입문이 가능했지만, 최근에는 정녀제도가 고착화되어 교무품과 지원시 정녀지원서를 필수요건화하는 성불평등 요소가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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