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본 논문은 퇴계의 리(理), 다산의 상제(上帝), 수운의 천주(天主), 증산의 상제(上帝)를 중심으로 이들 속을 관통하여 흐르는 고대 종교적 천관(天觀)의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성격을 고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로써 이들의 리ㆍ상제ㆍ천주ㆍ상제라는 외형상의 개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실제로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다. 물론 이들 사이에 세부적인 차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니, 그 차이도 아울러 고찰한다. 이를 통해 퇴계의 리, 다산의 상제, 수운의 천주, 증산의 상제가 가지는 내용과 그 이론적 특징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고대로부터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성격을 대표하는 천(天)의 내용을 소개한다.1) 『설문』에는 “천은 정수리이다. 지극히 높아 위가 없으며, 일(一)과 대(大)로 이루어져 있다”2)라고 하니, 천은 사람에 비유하면 머리 꼭대기인 정수리에 해당한다. 지극히 높아 위(그 이상)가 없는 최고의 존재로써 결코 둘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일자(一者)이다. 이러한 천에는 황천(皇天)ㆍ민천(旻天)ㆍ상천(上天)ㆍ호천(昊天)ㆍ창천(蒼天) 등의 여러 호칭이 있으며, 이들은 또한 크게 주재적 의미의 천(皇天ㆍ旻天ㆍ上天)과 자연적 의미의 천(昊天ㆍ蒼天)으로 구분된다.3)
이처럼 천에는 ‘주재적 의미’와 ‘자연적 의미’가 혼재하지만, 고대에는 주로 주재적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천이 죄 있는 자를 벌한다”4) “높은 천이 노했으니 감히 놀 수 없다”5) “천이 여러 백성을 낳으신다”6)는 것처럼, 천은 만물의 생성뿐만 아니라 상벌을 주관하며,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는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로 인식된다.
특히 ‘주재적 의미’의 천은 ‘상제가 이 세상을 주재한다’는 말처럼, 상제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다. 『서경』ㆍ『시경』에는 상제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나는 상제를 두려워하니 감히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7) “위대하신 상제께서 아래(세상)를 굽어보심이 밝으시니, 사방을 살피시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하신다.”8) “상제는 늘 일정하지 않아서 선을 행하면 온갖 복을 내리고 악을 행하면 온갖 재앙을 내린다.”9) “상제에게 류(類)제사를 지낸다.”10) 등등. 즉 상제는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로서 숭배(제사)의 대상이며, 세상 사람들의 어려움을 구제하거나 화복(禍福)을 내리는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천과 상제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로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경』ㆍ『서경』에는 천과 상제를 나란히 기술하기도 한다. “호천상제께서 나를 남겨두지 않으셨다.”11) “황천상제께서 그의 원자를 바꾸셨다.”12) 게다가 후대의 주석에서는 상제를 천의 다른 이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3) 결국 천이란 상제라는 개념과 동일하게 이해되는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로서 궁극적 실재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천(=상제)에 대한 해석은 시대가 발달하고 인간의 사유수준이 향상되면서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의미가 약화된다.14) 이러한 천의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의미는 후대(특히 송대 이후)로 내려오면서 천의 이법적 의미(원리ㆍ법칙)로 내재화된다. 이 과정에서 천은 리(理)로 대체되며15), 이러한 리(=천)는 결국 천명을 통해 인간에게 성으로 내재화된다. 여기에서 바로 송대 성리학의 핵심 명제인 성즉리(性卽理)이론이 성립된다. 다시 말하면, 리란 인간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라기보다는, 인간 속에 있는 내재적 존재(존재근거 또는 도덕근거)로 파악된다. 여기에서 인간이 리를 가짐에 따라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된다.16) 이것은 천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리에는 천의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성격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 리는 우주만물의 근원적 존재, 즉 우주만물의 생성과 운행질서를 총괄함으로써 우주만물을 생성하고 조화하는 주체가 된다. 이에 주자는 “천지가 있기 전에는 다만 리일 뿐이다. 리가 있으므로 곧 천지가 있는 것이다. 만약 리가 없다면, 천지도 없고, 사람도 없고, 사물도 없을 것이다.”17)라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주자는 리가 상제처럼 직접 상벌을 내리는 인격적 주재자라는 데는 회의를 보인다. “지금 하늘에 한 사람이 그 안에서 죄악을 판단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다. <그렇다고> 전혀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18) 즉 상제처럼 이 세상에 상벌을 내리는 인격적 주재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만물의 생성과 운행이 그렇게 되도록 하는 이법적 주재자는 존재한다는 말이다.19) 이렇게 볼 때, 주자는 리의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이법적 주재자는 인정하면서도, 상제와 같은 인격적 주재자에 대해서는 회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퇴계는 주자와 달리,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리를 강조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러한 천의 시대적ㆍ사상적 흐름 속에서 퇴계의 리, 다산의 상제, 수운의 천주, 증산의 상제의 내용적 특징을 고찰하고, 아울러 이들이 명명하는 리ㆍ상제ㆍ천주ㆍ상제의 의미에는 실제로 고대 종교적 천관의 성격이 그대로 녹아져 있음을 확인한다. 다시 말하면, 상고시대 천의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성격이 퇴계의 리, 다산의 상제, 수운의 천주, 증산의 상제로 이어지고 있다.20) 비록 다산이 리를 비판하고 인격적 주재자인 상제를 상정하지만, 이것은 퇴계의 리가 가지는 성격과 그 역할이 다르지 않으며, 또한 수운의 천주나 증산의 상제가 가지는 성격과도 그 역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21)
Ⅱ. 퇴계 이황의 리
먼저 퇴계(이황, 1501~1570)의 리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대저 일찍이 깊이 생각해보니, 옛날과 지금 사람의 학문도술이 다른 까닭은 단지 ‘리’자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른바 ‘리자가 알기 어렵다’는 것은 대략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알고 완전히 이해하여(眞知妙解)’ 아주 지극한 곳에 이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중리를 궁구하여 아주 확실한데 이른다면 이러한 사물(리)을 간파할 수 있다. <이것은> 지극히 허하면서도 지극히 실하며, 지극히 없으면서도(無) 지극히 있으며(有), 움직이면서도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면서도 고요함이 없으며, 지극히 깨끗하여 털끝만큼도 더할 수 없고 털끝만큼도 뺄 수 없는 것으로서, 음양오행과 만사만물의 근본이 되지만 음양오행과 만사만물 속에 구애되지 않으니, 어찌 기와 뒤섞어 하나로 인식하거나 하나의 사물로 볼 수 있겠는가.22)
옛날과 지금 사람의 학문상의 차이는 ‘리’자를 제대로 아는지의 여부에 있다. 즉 지금 사람은 ‘리’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리’자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알기 어려운 것 역시 대충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리는 대충 알아서는 안되고 참으로 알고 완전히 이해하여 아주 지극한 곳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리’를 말하지만 그 의미를 철저히 간파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이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학자들이 ‘리는 정의(情意)도 없고 조작(造作)도 없다’는 무위성(無爲性)에 근거하여 리를 지나치게 기의 소이(所以, 원리ㆍ법칙)로 제한시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23)
이어서 퇴계는 참으로 알기 어려운 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리는 지극히 허하면서도 지극히 실하며, 지극히 없으면서도 지극히 있으며, 움직이면서도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면서도 고요함이 없다.” 즉 신의 의미라는 것이다. 주렴계는 『통서』에서 “움직이면서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면서 고요함이 없는 것은 신이다”라고 하여 “움직이면 고요함이 없고, 고요하면 움직임이 없는 것은 사물이다”는 것과 구분한다.24) 주자 역시 『주자어류』에서 “움직이면서도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면서도 고요함이 없는 것은 신이다. 움직이면서도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면서도 고요함이 없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25)라고 해석한다. 퇴계는 주렴계와 주자가 말한 ‘움직이면서도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면서도 고요함이 없는’, 즉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고요하지 않는 것도 아닌(또는 허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실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신의 의미로써 리를 해석한다.
또한 “음양오행과 만사만물의 근본이 되지만, 음양오행과 만사만물 속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와 섞일 수도 없고 기에 의해 구속되지도 않는, 즉 기 없이도 존재하는 리의 실재성을 명명한 표현이다. 게다가 “털끝만큼도 더할 수 없고 털끝만큼도 뺄 수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더할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라는 의미이며, “지극히 깨끗하다”는 말은 완전무결한 선한 존재요 최상의 진리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리란 더 이상 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一者)이다.
더 나아가 퇴계는 이러한 리를 그대로 고대의 인격적 주재자인 상제의 개념과 연결시킨다.
다만 무극<의 진수>과 음양오행<의 정기>이 묘합(妙合)하여 엉기고 만물을 화생하는 곳에서 보면, 마치 주재하고 운용하여 이와 같이 하게 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즉 『서경』에서 말한 “오직 위대한 상제께서 백성에게 속마음을 내리시다.”라고 한 것이나, 정자가 말한 “주재하는 것을 상제라고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 이 리는 지극히 높아서 상대가 없으니 사물에게 명령하고 사물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26)
위대한 상제께서 백성을 내시는 것처럼, 리의 주재와 운용에 의해 만물이 생성ㆍ존재한다. 즉 리에서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 마치 상제께서 백성을 내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퇴계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주창조설(우주발생론)과 마찬가지로, 우주만물이 모두 리에서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볼 때, 리는 한갓 원리와 법칙의 의미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의 시원으로서 모든 존재를 생성하는 근원적 실재자의 의미를 갖는다. 퇴계는 이것을 “리는 지극히 높아 상대가 없으니 사물에게 명령하고 사물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는다”라는 말로 대신한다.
여기에서 “사물(기)에게 명령하고 사물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기에게 명령하고 기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리가 기에게 명령하므로 기는 절대로 리를 이길 수 없다. “리는 본래 존귀하여 상대가 없으므로 사물에게 명령하고 사물에게서 명령을 받지 않으니, 기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27) 기는 절대로 리의 상대가 될 수 없으니 리가 기에 대해 주재ㆍ명령의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또한 퇴계는 이러한 리와 기(만물)의 관계를 장수와 병졸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천지간에는 리가 있고 기가 있다. 리가 있으면 바로 기의 조짐이 있고, 기가 있으면 바로 리의 따름이 있다. 리는 기의 장수가 되고 기는 리의 병졸이 되어 천지의 공능을 수행하는 것이다.28)
물론 퇴계도 리와 기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不相離)를 인정한다. “천지간에는 리가 있고 기가 있다. 리가 있으면 바로 기의 조짐이 있고, 기가 있으면 바로 리의 따름이 있다.” 그럼에도 리는 기를 통솔ㆍ주재하는 장수이고, 기는 리에 의해 통솔ㆍ주재되는 병졸이다. 장수가 병졸을 통솔ㆍ주재하듯이, 리는 기를 통솔ㆍ주재한다. 따라서 리는 주재하는 자가 되고, 기는 주재되는 대상이 된다. 이로써 리는 우주만물에게 명령할 뿐이고 명령을 받지 않으며, 우주만물의 생성ㆍ변화ㆍ운동을 주관ㆍ주재하는 절대적 지위를 갖는 최상의 존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퇴계는 “기가 있기 이전에 먼저 리가 있으며, 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리는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9)라고 강조한다. ‘기가 있기 이전에 이미 리가 있다’는 것은 리가 기 속에 내재하는 소이(所以)의 의미가 아니라, 만물을 생성ㆍ조화하고 주재하는 절대적 실재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기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초월적ㆍ절대적 실재로서의 리를 긍정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퇴계는 기가 있기 이전에 리의 실재를 인정하기 위해서 불상리(不相離, 혼륜)보다 불상잡(不相雜, 분개)의 인식방법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퇴계는 리를 한갓 원리ㆍ법칙ㆍ표준 등의 의미로 내재화시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장군이 병졸에게 명령하듯이, 리는 기(우주만물)에게 명령하는 존재이며, 우주만물의 생성ㆍ변화ㆍ운동을 주관ㆍ주재하는 초월적ㆍ절대적 지위를 갖는다. 이러한 리의 초월적ㆍ절대적 의미가 강조될수록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요 인격적 주재자인 천(=상제)을 대신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퇴계는 리를 천과 연결시켜 인격적 주재자의 대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정자가 말하기를 “쇄소응대(灑掃應對)는 바로 형이상의 것이니, 왜냐하면 리에 크고 작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다만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갈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땅위는 모두 천이니 비록 어두운 방에 있더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가르침을 볼 수 있다. … 대개 천은 리이다. … 이 리의 유행은 있지 않는 물건이 없고, 그렇지 않은 때가 없으니, 정자와 선생님의 말씀을 믿지 않겠는가.30)
땅위는 모두 천이다. “그대와 함께 노닌다.”라고 한 것처럼, 어디에 간들 천이 아니겠는가. 무릇 천은 리이다. 진실로 리가 있지 않는 물건이 없고 그렇지 않는 때가 없음을 안다면, 상제가 잠시도 떠날 수 없음을 알 것이다.31)
“천은 리이니” 리는 천의 다른 이름이다. “지상의 모든 것이 바로 천이다. 즉 지상의 모든 것이 바로 리이니, 비록 어두운 방에 있더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상제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對越上帝), 늘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로는 “리의 유행은 있지 않는 물건이 없고, 그렇지 않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즉 어느 때나 어느 곳에 리가 있지 있음이 없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말하면 리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방에 홀로 있을 때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퇴계는 리에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인격적 존재인 상제와 같은 지위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활물(活物)로서의 리와 경외(敬畏)의 대상으로서의 천(=상제)이 퇴계의 리 속에 병존하니, 결국 리=천=상제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마음을 잡고 몸을 삼가여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32) 수양논리를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퇴계는 왜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리를 강조하는가.
이것은 결국 리가 실재하느냐의 문제이다. 예컨대 율곡(율곡학파)처럼 불상리의 관점에서 ‘리는 기의 소이이고 실질적인 작용을 모두 기의 몫으로 돌린다면’33) 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쓸모없는 물건이 된다. 리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면, 인간의 이기적 욕망(기)은 무엇으로 억제할 것이며, 사회의 혼란(기)은 무엇으로 수습할 것인가. 이것은 리에 이 세상을 제어하는 유위(有爲)의 실질적 주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리의 주재가 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역사(役使)하지 않는다면, 그 주재는 있으나마나한 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퇴계는 “리를 거의 사물(死物)로 알았다.”34), 즉 리는 결코 ‘사물’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배하고 제어하는 진정한 주재자로 확신한다. “높디높게 위에 계실지라도 날마다 여기를 살피시니,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속이는 것이 용납되지 않음을 반드시 알 수 있을 것이다.”35) 물론 이것은 다산이 리의 지위를 낮추고 인격적 존재인 상제를 상정한 것과 구분된다.
Ⅲ. 다산 정약용의 상제36)
먼저 다산(정약용, 1762~1836)의 리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무릇 천하에 무형(無形)한 것은 주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집안의 어른이 우매하고 지혜롭지 않으면 집안의 만사가 다스려지지 않고, 한 고을의 어른이 우매하고 지혜롭지 않으면 고을의 만사가 다스려지지 않거늘, 하물며 태허처럼 텅 비어 있는 하나의 리를 가지고 천하의 만물을 주재하는 근본으로 삼는다면, 천지간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37)
리는 만물의 주재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기존 성리학의 ‘리가 기(만물)를 주재한다’는 것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다. 그 이유로써 리는 무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무형한 것이 주재가 될 수 없고, 어떤 유형의 인격자라야 주재가 가능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마치 한 집안의 어른이 집안을 다스리고 한 고을의 어른이 고을을 다스리는 것처럼, 어떤 유형의 인격자라야 천하의 만물을 주재하고 이로써 천지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다산은 실제로 천하의 만물을 주재해나갈 유형의 인격자로 상제를 상정한다.
밤에 산 속을 가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두려운 것은 호랑이와 표범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군자가 어두운 방 속에 있을 때에도 두려움에 떨면서 감히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상제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명(命)ㆍ성(性)ㆍ도(道)ㆍ교(敎)를 모두 하나의 리로 돌려버린다면, 리는 본래 지각(의지)이 없고 위엄과 권능도 없거늘, 어찌 경계하고 삼가할 것이겠으며 어찌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것이겠는가.38)
다산은 무형의 리 대신에 인격적 주재자인 상제에 주목한다. 사람들이 밤중에 산길을 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은 산속에 호랑이와 표범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듯이, 사람들이 감히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것은 상제가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제의 감시ㆍ감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다산은 상제와 구분되는 리의 성질을 “리는 본래 지각이 없고 위엄과 권능도 없다”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지각이 없고 위엄과 권능도 없는 비인격적 존재인 리와 달리, 상제는 지각이 있고 위엄과 권능도 있는 인격적 존재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비인격적 존재인 리는 결코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행동을 감시ㆍ감독하지 못한다. 이러한 리의 비인격적 특징을 “리는 사랑도 미움도 없고, 리는 기쁨도 성냄도 없으며, 텅 비어있고 아득하여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다”39)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반대로 상제는 사랑과 미움, 기쁨과 성냄이 있는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라는 말이다.
다산이 보기에는, 비인격적 존재인 리로서는 사람들의 행동<도덕적 실천>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다만 실질적인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엄과 권능을 가진 인격적 존재인 상제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하고, 조심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도덕적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산은 “<무형한> 리는 천하의 만물을 주재하는 근본이 될 수 없다”라고 단언한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위엄과 권능을 가진 상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상제란 무엇인가. 이것은 하늘ㆍ땅ㆍ귀신ㆍ사람의 바깥에서 하늘ㆍ땅ㆍ귀신ㆍ사람ㆍ만물의 부류를 조화하여 제재하고 안양(安養)하는 자이다.40)
여기에서 다산은 상제에게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존재의 지위를 부여한다. ‘하늘ㆍ땅ㆍ귀신ㆍ사람의 바깥에서’, 즉 하늘ㆍ땅ㆍ귀신ㆍ사람을 벗어나 있는 초월적 존재요, ‘하늘ㆍ땅ㆍ귀신ㆍ사람ㆍ만물의 부류를 조화하여 제재하고 안양(安養)하는 자’, 즉 우주만물을 생성(조화)하고, 그들을 주재하며, 그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보살피는 인격적 존재이다. 이러한 상제는 귀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지극히 존귀하고 지극히 위대한 최상의 존재인 것이다. “천지귀신들이 분명하게 늘어서 있고 빽빽하게 나열해 있지만, 그 가운데 지극히 존귀하고 지극히 위대한 자는 상제일 뿐이다.”41)
이렇게 볼 때, 상제는 초월적 존재로서 시공간에 제한되지 않으므로 언제 어디든 이르지 않는 데가 없다. 비록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방에 있더라도 이르러 보살피고 감시하니, 사람들이 두려워서 감히 나쁜 짓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무형한 리와 달리, 실제로 위엄과 권능 또는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므로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태허처럼 텅 비어있는’ 무형의 리와는 사람들이 느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다산은 언제 어디든 늘 지켜보고 있는 상제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마음을 속여서 삿된 생각과 망령된 생각을 하고, 간음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도, 그 다음날 의관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 용모를 꾸미고 있으니, 수연히 흠이 없는 군자이다. 수령도 알지 못하고 군왕도 살피지 못해서 종신토록 거짓을 행하고도 당대의 명성을 잃지 않고, 거리낌 없이 악을 저지르고도 능히 후세의 존경을 받는 자들이 천하에 널려있다.42)
사람들은 남이 보는 곳에서 대놓고 간음하거나 도둑질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쁜 짓을 하면 나라의 국왕이나 고을의 수령이 그들을 잡아다가 처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간음하거나 도둑질하면 어떻게 될까. 이때도 국왕과 수령이 처벌을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을 “수령도 알지 못하고 군왕도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간음이나 도둑질이 아닌, 즉 자신을 속이는 삿되고 망령된 생각과 같은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들은 더더욱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다산은 남이 보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폐단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비록 간음하고 도둑질하더라도 남들이 알지 못하므로 의관을 바르게 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그럴 듯하게 꾸미고 있으면, 조금의 흠이 없는 군자가 된다. 남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거짓된 행동은 종신토록 계속되니 “거짓을 행하고도 당대의 명성을 잃지 않으며, 거리낌 없이 악을 저지르고도 후세까지 존경을 받는다.” 이러한 일들은 한둘이 아니라 천하에 널려있다. 이러한 사회현실에 직면하여, 다산은 “<남이 보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마음을 속이고 제멋대로 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으면, 종신토록 도를 배워도 요순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다”43)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산이 보기에, 이러한 타락(특히 지배층의 타락)한 사회현실 속에서는 위엄과 권능을 가진 상제만이 감시ㆍ감독할 수 있다. 즉 외적으로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ㆍ감독할 수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에게 삿되고 망령된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감시ㆍ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제가 언제 어디서든 감시ㆍ감독한다는 것을 알면, 아무리 담력이 큰 사람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하늘의 영명(靈明)은 곧바로 사람의 마음과 통하여 은밀한 곳도 살피지 않음이 없고 미세한 곳도 비추지 않음이 없으니, 이 방을 지켜보고 날마다 살핌이 여기에 계신다. 사람이 진실로 이것을 알면, 비록 큰 담력을 가진 자라도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44)
‘하늘의 영명’은 상제를 말한다. 상제는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굽어보고 계시니 “은밀한 곳도 살피지 않음이 없고, 미세한 곳도 비추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이 방을 지켜보고 날마다 살피며 여기에 계신다.”45) 즉 상제께서 항상 살피고 계시니 감히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격적 존재로서의 상제에 대한 인식 하에서만이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가능하며, 더구나 삼가고 두려워하는 경외심 속에서 실제로 상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다산은 상제의 실재성을 확신하며, 만약 상제의 실재성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다면 결국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 역시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46)
이렇게 볼 때, 다산은 상제가 내려다보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국가사회의 윤리규범적 기강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성리학의 최고 위치에 있던 리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일종의 위엄과 권능을 가진 인격적 주재자인 상제를 위치시킴으로써 도덕실천의 추동력으로 활용한 것이다.
다산이 보기에는, 비록 성리학이 말한 것처럼 리가 아무리 극존무대(極尊無對)한 존재로 명명될지라도, 이러한 리가 직접 나서서 실제로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작용)을 행사할 수 없다. 즉 상제처럼 사람들의 행위를 직접 감시ㆍ감독하는 어떤 강제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는 무형하므로 지각이 없고 위엄과 권능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다산의 생각일 뿐이며, 적어도 퇴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퇴계는 리를 천=상제와 거의 동일한 지위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다산의 리에 대한 해석은 퇴계와 달리 지나치게 무위(無爲)ㆍ무형(無形)한 의미로 제한ㆍ축소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산은 성리학이 천을 리로 해석함으로써 기존에 천이 가지고 있던 인격적 주재자(종교성)의 역할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한다. 결국 다산의 상제는 천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므로 상제=천의 등식이 성립하지만, 리에 대해서는 결코 주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상제≠리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Ⅳ. 수운 최제우의 천주47)
먼저 수운(최제우, 1824~1864)이 37세 때에 이루어진 신비체험을 소개한다.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리는데, <무슨 병인지>병의 증세를 알 수도 없고, 말로 형용할 수도 없을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문득 귀에 들리므로 깜짝 놀라 일어나 캐물었다. 대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 또한 공(功)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칩니까.”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에게 신령한 부적(靈符)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모양은 태극(太極)이며, 또 모양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이 부적을 받아 사람들의 질병을 구제하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를 대신하여 가르치면, 너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펼 것이다.48)
1860년(37세) 4월 5일에 수운은 마침내 상제를 만나 직접 문답하는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상제는 수운에게 자신을 상제라고 소개한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이것은 상제가 확실히 인격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어떤 신선의 말씀이 문득 귀에 들린다.”라고 하여 상제의 음성만 기술될 뿐이고, 실제로 상제가 어떤 형상(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이어서 상제는 자신이 수운에게 나타난 목적을 설명한다.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이란 상제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상제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세상) 속에 직접 개입하여 어떤 일을 행사하거나 구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제는 세상 사람들과 존재론적으로 범주를 달리하는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또한 공이 없다’, 즉 상제 혼자서 어떤 일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상제가 직접 세상일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수운을 세상에 보내어 상제를 대신하여 상제의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즉 수운이 상제의 대리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상제의 법을 가르치고 그들을 구제하라는 일종의 계시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한 법의 내용은 인용문에서 볼 때 ‘사람들의 질병을 구제하는 것’을 가리킨다.
나아가 수운은 이러한 가르침이 서도(西道), 즉 당시 서양 사람들의 종교인 천주(가톨릭)의 가르침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강조한다.49)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칩니까. 그렇지 않다.” 즉 비록 당시에 유행하던 서양의 종교인 천주와 명칭은 같지만50), 그것과는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상제는 가르침의 내용으로 부적과 주문을 제시하는데, 즉 부적으로 질병을 구제하고 주문으로 사람들을 가르쳐서 이 세상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또한 부적의 이름과 모양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나에게 신령한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모양은 태극이며, 또 다른 모양은 궁궁이다.” 부적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므로 약이라 하되, 보통의 약보다 신비하고 효험이 크다는 의미에서 선약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 부적의 모양은 태극(☯)이고 또 다른 모양은 弓弓이다. 여기에서 弓弓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궁(弓)자를 겹쳐 놓은 모양으로 ○, ✝, 등 여러 종교적 문양과 그 역할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51)
이렇게 볼 때, 상제는 수운에게 강림하여 가르침을 전수하고, 수운은 그것을 포교하여 상제의 뜻을 실현시키고자 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상제의 뜻, 즉 ‘사람들의 질병을 구제하는 것(세상의 구원)’과 같은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즉 상제 혼자만으로는 상제의 뜻을 실현시킬 수 없고, 반드시 인간과의 공동의 노력을 통해야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용담유사』속의 「용담가」에도 보인다. “님 하신 말씀, 개벽 후 5만 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궁(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 너희집안 운수로다.” 즉 천주가 세상을 개벽한지 5만년 동안 세상을 구제하려고 애를 썼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수운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천주의 뜻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 추가할 것은 바로 주문의 내용이다. 주문은 모두 21자로서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이다. 그 뜻은 “<천주(=상제)의>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려주기를 바랍니다. 천주를 모시고 조화를 정하는 것을 영원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운은 천주가 ‘지극한 기운을 크게 내려주시는’ 초월적 존재이요, 동시에 부모처럼 ‘천주를 모실 수 있는’ 인격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지극한 정성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에 천주를 모실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이다. 이로써 천주는 신앙의 대상으로 하늘 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몸과 마음 안에 모셔져있는(내재하는) 존재가 된다. 천주가 사람들의 마음 안에 모셔짐에 따라, 신분상의 빈부ㆍ적서ㆍ남녀 따위의 구분 없이 누구나 평등한 존재가 된다.52) 왜냐하면 부귀한 사람이든 빈천한 사람이든 그 안에는 모두 동일한 천주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천주’사상에는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근대적 정신이 투영되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53) 이러한 내재성의 강조는 특히 다음의 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몸이 몹시 떨리고 추운데, 밖으로는 신령과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말씀을 내려주는 가르침이 있으되,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 마음으로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고서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고 묻기를 “어째서 이렇습니까.” 대답하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하니, 귀신이란 것이 나이다.54) 지금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주문)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를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할 것이다.”55)
이 글은 앞의 「포덕문」보다 5개월 뒤에 저술된 것이다. 이 글 역시 「포덕문」에서처럼, 수운이 상제를 만나는 강렬한 체험을 소개한다. 「포덕문」의 ‘어떤 신선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처럼, “밖으로는 신령과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말씀을 내리는 가르침이 있다.” 즉 어떤 신령한 존재로부터 가르침을 전수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상제가 세상 사람들처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세상 사람들과 범주를 달리하는 초월적 존재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수운은 이러한 초월적 상제를 사람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에 상제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즉 상제의 마음이 바로 수운의 마음이라고 천명한다. 이것은 상제가 수운(사람) 안에 모셔져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써, 이것이 바로 ‘시천주’사상이다. 이로써 상제는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 안에 내재하게 된다. ‘상제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나의 몸이 상제를 모시는 거룩한 장소가 되니, 결국 모든 사람들이 상제를 모신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56)
이렇게 볼 때, 수운이 말하는 상제(=천주)는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임을 알 수 있다. 수운은 상제가 밖에서 가르침을 내리는 초월적 모습을 보여주면서, 또한 우리 마음에 모셔져 있는 내재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재성의 강조는 『용담유사』에 나오는 다음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玉京臺)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 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가.”57) 사람들은 상제가 하늘 위의 옥경대에 계신다고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말을 하는데,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수운은 “해음 없는 이것들아 날로 믿고 그러하냐, 나는 도시 믿지 말로 님을 믿어셔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 말가.”58) 분별없는 사람들아. 나(수운)를 믿지 말고 님(=상제=천주)을 믿어라. 님이 네 몸에 모셔져있는데 어찌하여 멀리서만 찾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내재성의 강조는 그대로 실천적 측면으로 연결된다. 상제가 내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더 나아가 다른 만물에도 계시지 않음이 없으므로 누구나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로 대우하게 된다.59) 이처럼 수운의 상제(=천주=님)는 퇴계의 리와 다산의 상제처럼 초월적ㆍ절대적 인격적 주재자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사람 안에 모셔져있는 내재성을 강조하는데 그 특징이 소재한다고 할 수 있다.60)
여기에서 수운의 리의 해석을 추가한다. 그렇다면 수운에 있어서의 리의 역할은 어떠할까. 수운의 리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동경대전』에 나오는 리의 용례를 살펴보면, ‘동정변역지리(動靜變易之理)’(「論學文」), ‘삼재지리(三才之理)’(「論學文」), ‘무왕불복지리(無往不復之理)’(「論學文」), ‘고락지리(苦樂之理)’(「論學文」), ‘기연지리(其然之理)’(「不然其然」) 등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리의 궁극적ㆍ근원적 의미보다는 대체로 ‘무엇의 리’, 즉 기의 원리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다산이 ‘리는 무형ㆍ무위한 것이므로 실제로 사람들에게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처럼, 수운 역시 리가 가지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 자리에 상제(=천주=님)로 대체한 것이 아닐까한다.
Ⅴ. 증산 강일순의 상제61)
증산(강일순, 1871~1909)은 최고의 주재자로 신격을 지니면서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상제로 자임한다.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이신 상제께서는 신미년 1871년 11월 1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씨가(姜氏家)에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降世)하시니 존호는 증산이시다.62)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63)
이 글은 상제인 증산이 인간의 모습으로 강세하신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구천대원조화주신’은 이 우주를 총괄하시며 우주 삼라만상을 삼계대권으로 주재하시는 전지전능한 최고의 신이다. 증산은 ‘구천대원조화주신’이신 상제께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세상에 오셨으니, 증산이 곧 전지전능한 최고의 인격신이며 상제이다. 이것은 예수가 인간으로 살다가 죽은 것, 즉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인즉, 상제께서 구천에 계시는데 천지신명인 신성ㆍ불ㆍ보살 등이 상제가 아니면 혼란에 빠진 천하를 구제할 수 없다고 호소하므로, 이에 <구천에 계시던 상제께서 마음을 움직여 천하를 구제하기 위하여>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서 삼계(三界)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다가, 전북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이르러 30년을 머물렀다. 상제가 1860년에 수운에게 세상을 구제하는 대도를 알려주었으나 수운이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자, 1864년에 수운에게 주었던 대도를 거두고, 그가 직접 1871년 9월 19일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씨 가문에 인간의 모습을 빌어 세상에 내려와서 천지공사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1901년에서 1909년까지 총 9년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천지공사는 이것이 다 마쳐진 해에 인간상제의 사명도 다하게 되니, 1909년 음력 6월 24일로 39세로 화천(化天)한다.
이어서 증산은 상제가 인간세계에 강세한 구체적 이유를 설명한다.
나는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노불사(不老不死)하며 영원한 선경(仙境)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64)
삼계의 대권은 우주를 구성하는 세 가지 근본 요소인 하늘ㆍ땅ㆍ인간세계를 통치하는 대권(大權), 즉 최상의 권능을 뜻한다. 증산은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先天)의 막히고 단절되어 상극에 빠진 천하를 구제하기 위하여, 즉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이 땅에 오셨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인류를 위한 종교적 대역사를 이룩하고자 강세하였다는 것이다.
증산은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여 그 절대적 권능으로써 인간을 위한 대역사(大役事)를 행사하니, 이를 증산은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말로써 규정한다. ‘천지공사’란 글자 그대로 하늘과 땅을 뜯어 고쳐 새롭게 만드는 공사이다. 이를 통해 천지에 맺힌 모든 원한을 풀어내고, 천지의 운행법칙을 상극에서 상생으로 조정하며, 후천의 새로운 선경(仙境)이 펼쳐질 도수를 만들어 우주 전체인 삼계가 조화되는 지상선경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를 좌우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천지의 주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 상제의 권능으로서만이 가능하며65), 특히 증산에 있어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를 행한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증산이 삼계의 대권을 가지고 천지공사를 하겠다고 선언하였다는 것은, 사실상 그 스스로가 최고의 신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최고신의 강림이 아니면 안된다는 자각에 기인한 것으로써 이 세상을 최고신에 의해 다스려나간다. 그리하여 자신이 곧 인간으로 강세한 상제로 자임하고 그 권능에 의한 대역사를 단행함으로써 직접 이 세상을 구제하고 민중의 염원을 해소시키려 한 것이다.66)
또한 증산은 이러한 천지공사로 이루어지는 후천선경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제시한다.
후천에는 또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도 조화로써 창생을 법리에 맞도록 다스리리라. 벼슬하는 자는 화권이 열려 분에 넘치는 법이 없고, 백성은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을 것이며, 병들어 괴롭고 죽어 장사하는 것을 면하여 불노불사(不老不死)하며 빈부의 차별이 없고, 마음대로 왕래하고 하늘이 낮아서 오르고 내리는 것이 뜻대로 되며 지혜가 밝아져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시방 세계에 통달하고 세상에 수(水)ㆍ화(火)ㆍ풍(風)의 삼재가 없어져서 상서가 무르녹는 지상선경으로 화하리라.67)
인류가 바라는 최고의 이상세계가 후천이며, 이 속에는 모든 종교의 궁극적 경지를 포함하여 지상선경이며 도화낙원이다. 이 세계를 이루는 방법이 바로 천지공사이며, 이는 다름 아닌 권능자인 상제에 의해서만이 주도될 수 있다. 후천의 사회는 서로간의 원한이 없어지고, 상극이 자취를 감추고 상생이 득세하여 약하고 병들고 천한 자가 기세를 얻으니, 적서(嫡庶)ㆍ반상(班常)의 구별과 빈부의 차이가 사라지고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습이 사라진다. 결국 살아서 불노불사하는 지상신선을 실현하게 되며, 살아서 지상천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로써 증산은 총 9년간에 걸쳐서 천지공사를 이루면서 신비한 이적을 행하는데, 이러한 행적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로 연속된다.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인사를 드리는 김 갑칠(金甲七)에게 농사 형편을 물으시니 그는 「가뭄이 심하여 아직까지 모를 심지 못하여 민심이 매우 소란스럽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네가 비를 빌러 왔도다. 우사(雨師)를 너에게 붙여 보내리니 곧 돌아가되 도중에서 비가 내려도 몸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시니라. … 행인들은 모두 단비라 일컬으면서 기뻐하는도다. 흡족한 비에 모두들 단숨에 모를 심었도다.68)
이러한 내용에서 상제의 초월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비를 담당하고 있는 우사(雨師)를 활용하여 필요한 비를 얻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 우사가 어떤 특정한 작용을 행하는 기능신에 해당한다면, 상제는 최고신의 권능으로 다양한 기능신을 통솔ㆍ주재하는 위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제보다 하위의 신들은 이러한 최고신의 주재 하에서 각자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해나간다.
이렇게 볼 때, 증산 상제관의 핵심은 최고신인 상제의 인신화현(人身化現)에 있다. 인간의 몸을 지니고 인간의 생애를 통해서만이 진정으로 인간이 처한 당면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인간 상제의 권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결국 신적 존재로만 인식되어 왔던 상제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고, 그로 인해 행해지는 종교적 대역사, 즉 민중이 원하는 이상세계를 구체적 현실에서 이루어내려는 대역사는 기존의 관념(관념적 상제관)에서 탈피된 실재성을 지향하는 특성을 보임으로써 민중들에게 보다 다가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바로 퇴계ㆍ다산ㆍ수운과 구분되는 증산의 상제가 가지는 종교적 특징이 소재한다.
여기에서 증산의 리에 대한 해석을 추가한다. 그렇다면 증산에 있어서의 리의 역할은 어떠할까. 증산의 리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경』에 나오는 리의 용례를 살펴보면, “리가 비록 높다고 하나 태극무극의 겉에서 나오며 일용의 사물 간에서 떠나지 않는다(理雖高, 出於太極无極之表, 不離乎日用事物之間).”(제생 43절), “이미 알고 있는 이치에 인하여 더욱 궁구하면 자연히 마음이 저절로 열린다(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自然心自開也).”(제생 43절)는 등이 있다. 이들 내용에 근거하면, 리는 만물 속에 내재하며 만물의 이치를 담지하고 있는 원리ㆍ법칙의 의미에 해당한다. 이러한 해석은 다산ㆍ수운의 해석과 다르지 않으며, 퇴계가 말하는 리의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의미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Ⅵ. 결론
이상으로 퇴계의 리, 다산의 상제, 수운의 천주, 증산의 상제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고찰하였다. 물론 이러한 내용상의 변화는 당시 시대적ㆍ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있음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혼란할수록 이법천(理法天)과 같은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도덕적 원리를 세우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고, 이로써 실제적 위엄과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인격적 주재자가 요청된다. 특히 수운과 증산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이러한 인격적 주재자가 천상에서 내려와서 사람들 안에 모셔짐에 따라 사회현실을 변화시키는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며,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강세함으로써 인격적 주재자에 대한 관념성에서 탈피된 실재성을 지향하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고대 유학에서의 천(=상제)은 주로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의미로 쓰여왔다. 그러나 이러한 천은 시대가 발달하고 인간의 사유수준이 향상되면서 초월적인 의미가 약화되고 이법적(원리ㆍ법칙) 의미로 내재화된다. 이것이 바로 이법천이며, 이 과정에서 천은 리로 대체된다. 이러한 리(=천)는 초월적ㆍ인격적 존재로서 두려워하는 대상(상벌)이 아니라, 주로 우주만물의 작용원리나 인간의 도덕근거로 해석된다. 이것이 바로 송대 성리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퇴계는 이러한 리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다. 그렇다고 퇴계의 리가 이러한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퇴계의 리는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이론체계에 기반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퇴계의 리에는 단순히 원리ㆍ법칙(또는 이법적 주재자)의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에 해당하는 천(=상제)의 의미를 내포한다. 리는 우주만물(기)을 낳고, 우주만물을 주재하며, 더 나아가 리에 실질적인 상제의 지위를 부여한다. 따라서 퇴계의 리는 주자성리학의 이론을 계승하지만, 주자보다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성격을 더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자가 천을 리로 해석함으로써 천의 이법적 성격을 강조하였다면, 퇴계는 이러한 리를 다시 상제로 재해석함으로써 천의 인격적(종교적) 성격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69)
다산에 이르면 리의 의미가 축소되고, 인격적 존재인 상제를 중심으로 이론체계가 구성된다. 리는 무형한 것으로써 “지각도 없고 위엄과 권위도 없으므로” 사람에게 어떠한 감시ㆍ감독의 역할을 행사할 수 없다. 무형ㆍ무위한 리로서는 사람들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다만 유형의 위엄과 권능을 가진 인격적 존재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하고, 조심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도덕적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리에 대한 해석은 적어도 퇴계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따라서 비록 다산이 무형의 리에 대한 비판 위에 인격적 존재로서의 상제를 제기하지만, 이때의 상제는 고대 천관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운 역시 다산과 마찬가지로 초월적이고 인격적 존재인 천주(=상제)를 상정한다. 물론 수운에 있어서 천주=상제=님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수운은 상제를 직접 체험하는 과정 속에서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존재인 상제를 확인한다. ‘지극한 기운을 내려주시는’ 초월적 존재이며, 동시에 부모처럼 ‘천주를 모실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이다. 특히 수운은 이러한 천주가 천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모셔져 있음(侍天主)을 강조한다. 천주가 사람들 안에 모셔짐에 따라 신분귀천의 구분없이 누구나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가 된다.
증산은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전지전능한 권능으로 천지공사를 행사한 절대적 존재이니 고대의 천관에 비해 초월적 성격이 더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증산처럼 상제가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는 것은 동아시아 전통에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사상이 당시 민중들에게 있어 대대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민중의 입장에서 민중의 처지를 이해하고 현실의 문제를 개벽할 수 있는 권능 때문이다.
퇴계ㆍ다산ㆍ수운의 상제가 아무리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우리의 감각을 초월해 있는 관념적 존재의 상제라면, 증산의 상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실재적 존재이다. 증산의 상제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 내면의 자각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지 초월적인 권위로 인간의 경배대상으로만 남는 관념상의 신격(神格)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관념 속에 머무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화신(化身)한 신으로써, 인간이 처한 당면문제를 인간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해결해나가기 위해서 요청된 인간 상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증산의 상제는 당시의 민중이 국내외의 불안으로 질곡된 현실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러한 현실의 주체가 되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의 초월적 권능으로 민중을 계도함으로써 단순히 정신적 위안과 피안처를 제시하기보다는 천지공사를 이루어내는 총체적인 여건의 변화와 함께 이상낙원을 현실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천지공사 역시 이러한 현실세계를 구체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권능자의 작업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총괄하면 퇴계의 리, 다산의 상제, 수운의 천주, 증산의 상제 속에는 고대 종교적 천관인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성격이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리의 초월적ㆍ절대적이며 인격적 주재자의 성격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퇴계의 종교적 성격은 다산의 상제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수운의 천주나 증산의 상제로 이어진다. 반대로 이것은 퇴계의 리에 대한 종교적 전통의 기반이 없었다면, 다산의 상제, 수운의 천주, 증산의 상제로 이어지는 이론체계를 세우는 작업 또한 어려웠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천지공사를 실제로 행사하는 증산의 상제는 퇴계ㆍ다산ㆍ수운의 상제와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퇴계의 리가 갖는 종교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