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면서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과거의 삶을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과거의 삶을 거쳐 현재의 삶이 만들어졌다는 인식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과거와 연관된 삶을 소환하게 만드는 장치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 종교단체들이 항일독립운동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종교단체들은 그 경험이나 항일독립운동을 자신들의 역사적 이야기로 만든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일제강점기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하게 만드는 정치사회적 장치들이 있다. 바로 ‘친일청산’과 ‘과거사청산’을 핵심으로 하는 권위주의 담론이다. 친일청산 담론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지속되다가 노무현정부(2003~2008) 시기에 2004년 <반민족규명법>, 2005년 <친일재산귀속법>과 <과거사정리법> 등이 제정되면서1) 과거사청산 담론2)으로 확대되어 최근까지 지속되고 있다.
해방 이후 지속된 친일청산과 과거사청산 담론 속에서 한국 사회에는 언론을 포함해 ‘일제, 일제 강점, 일제강점기’ 등의 이름 붙이기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3) 학계에서도 196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4) 특히, 1910년 8월 ‘병합조약’ 이후부터 1945년 8월 해방 직전까지의 한국 역사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이름이 붙고, 다시 1910년대에 헌병경찰제에 따른 무단(武斷)통치, 1920년대 이후 시기에 보통경찰제에 따른 문화통치, 1930년대 이후, 특히 1937년 중ㆍ일전쟁 이후에 ‘민족말살통치’라는 이름이 붙는다.5)
과거사청산 담론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이름 붙이기 현상은 ‘일제의 강제 점령과 그에 대한 저항’을 재생시켜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와 항일독립운동의 기억을 소환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 ‘친일-반일의 구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종교단체들은 항일독립운동을 자신의 역사적 이야기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한국 사회의 친일청산을 포함한 과거사청산 담론에서 주목할 부분은 신종교단체들이 항일독립운동의 주체로 호명되는 현상이다. 특히, 1920년대에 창립된 무극도의 경우처럼,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신종교단체들6)의 경우에는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친일-반일의 구도’에서 친일이 아니라 반일 측에 있었다는 설명을 요청받기 때문에 이러한 호명을 피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신종교단체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통해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욕망도 이러한 호명에 부응하게 만든다.
다만, 지금까지 항일독립운동의 주체로 호명된 신종교단체들은 3ㆍ1운동과 직접 관련된 천도교나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대종교 등 몇몇 종교 사례들에 국한되어 있다. 그 외의 다른 신종교단체들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또한 신종교단체들이 스스로 항일독립운동의 기초 자료를 발굴해 집성하려는 노력도 미진한 편이다.
무극도 관련 주요 선행연구들을 보면, 민족종교운동 차원에서 무극도의 역사를 서술한 2003년 『한국민족종교운동사』가 있다.7) 그리고 무극도의 도교적 성격(고남식, 2004), 무극도의 신앙대상이 지닌 성격(진정애, 2011), 정산의 도수(度數)사상(김탁, 2018), 정산의 종교사상(김방룡, 2018), 무극도의 민족운동(안후상, 2019)8) 등을 다룬 연구들이 있다. 그 외에 보천교와 무극도의 종교운동을 다룬 박사논문(박인규, 2019)9)이 있다. 그렇지만 천자등극설과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에 주목한 안후상의 연구를 제외하면, 선행연구들 가운데 아직까지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에 직접 초점을 맞춘 경우는 거의 없다.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 전반을 검토한 연구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일부 선행연구에 무극도와 항일독립운동을 연계한 서술이 있지만 대체로 미진하고, 안후상과 박인규의 연구를 제외하면 분석 자료도 외부 자료보다 내부 자료에 국한되어 있어, 분석 자료의 교차 검토 필요성이라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게다가 ‘정산이 본격적인 종교운동에 뛰어든 동기가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라는 식의 서술10)처럼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거나 논리적 해명이 필요한 부분도 보인다.
이 연구의 목적은 정산과 무극도의 활동을 항일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조명하는 데에 있다. 이 연구의 필요성은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와 항일독립운동의 기억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신종교단체들이 항일독립운동의 주체로 호명되지만 몇몇 종교 사례에 국한된 상황, 그리고 신종교와 항일독립운동 사이의 연결 논리가 미진한 상황 등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서술 내용은 정산과 무극도의 활동 가운데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제II장), 그리고 향후의 연구 과제(제III장)와 이를 위해 필요한 종교와 항일독립운동 사이의 논리적 쟁점(제IV장)이다. 이 연구가 향후 무극도를 포함해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의 연관성을 성찰해 그 외연을 넓히는 데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II.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
무극도(無極道)의 역사적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정산 조철제(鼎山 趙哲濟, 1895~1958, 이하 정산)11)는 1909년(15세) 4월에 부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요령성 유하현(柳河縣) 수둔구(水屯溝, 老姑山)12)에 살다가 1917년(23세) 4월에 환국해 충남 서산을 거쳐 태안 안면도에 정착하고 1918년에 전북 원평 황새마을(현 김제시 금산면 내)로 이사한다.13) 모두 1920년대 이전에 전개된 상황이다.
이어, 정산은 1920년대에 무극도를 창립해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태인도장을 세운다. 다만, 1920년대 당시 교단 명칭은 자료에 따라 무극교(無極敎),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 무극도(無極道) 등으로 표기된다.14) 창립 시기는 1921년 창립설과 1925년 개칭설15) 또는 1925년 창립설16) 등 자료에 따라 다르고, 1919년경에 무극도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기사들도 있다.17) 그렇지만 모두 1925년(31세)을 넘지 않는다.
이어, 1930년대 중반에, 비록 교세가 ‘흠치교계’에서 보천교 다음으로 컸다고 할지라도,18) 교단이 해체되고, 정산은 약 10년간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교단의 해체 배경에는, 1936년 1월 정산이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벌금형’을 받은 바 있지만,19) 경무국이 1935년 일본의 제2차 오모토교(大本敎) 사건 이후 ‘종교유사단체’ 단속을 강화하면서 보천교를 비롯해 무극도, 증산교, 동화교(東華敎) 등을 철저히 탄압하기로 한 방침을 들 수 있다.20) 이와 관련해, 정읍경찰서는 보천교의 경우와 비슷한 시기인 1936년 6월에 정산을 호출해 단발과 함께 포교ㆍ집회ㆍ성금모집 폐지를 명령한 바 있다.21)
그렇지만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교단은 1948년경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하다가 1950년에 태극도로 개칭한다. 그리고 1969년에 대순진리회와 태극도로 분립된다.22) 현재 대순진리회와 태극도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극도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공유하고 있다.
이 연구와 관련해, 무극도의 역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대순진리회와 태극도 모두 정산이나 무극도의 활동을 항일독립운동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교단이 신앙하는 증산이나 정산이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존재이고, 해방 이후 친일청산과 과거사청산 담론이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제강점기와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전경』에 있는 내용을 보면, 증산의 경우에는 일본과 관련해 ‘왜복, 왜경, 왜병, 임진왜란’ 등으로 표현한 사례23)와 ‘일본, 일본 사람, 일본인’ 등으로 표현한 사례가 있다.24) 그리고 증산은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일본의 지기가 강렬해 그 민족성이 탐욕과 침략성이 강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고 언급한 사례,25) ‘일본인이 백호 기운을 띠고 와서 숙호충비(宿虎衝鼻)하면 해(害)를 받으니 사사로운 일로 너무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청룡이 동하면 백호는 곧 물러갈 것’이라고 말한 사례26)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당시의 정세를 도수(度數)로 설명한다.
정산의 경우에도 일본에 대한 저항과 도수를 통한 인식이 보인다. 전자는 1910년[경술]에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했다는 사례27)에서 유추할 수 있다. 후자는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석지가 일본 회사에 넘어갔을 때 ‘도시도수’로 설명하면서 소송계획을 중지시켰다는 사례, 1909년[기유]부터 1941년[신사]까지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 과정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종교단체 해산령’28)을 내리자 종도들에게 인덕도수와 잠복도수로 설명했다는 사례, 고향에서 도수에 의한 공부를 계속할 때 종도들이 왜경의 눈을 피해 도왔다는 사례, 1945년[을유] 7월에 회룡재를 찾은 신자(이용직)를 며칠 더 머물게 한 후 보내니 일본이 망하고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는 사례 등29)에서 유추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지금까지 무극도 관련 교단들을 중심으로 제시된 무극도와 항일독립운동의 연결고리는 정산의 항일의식, 군자금의 전달, 3ㆍ1운동 참여 지시, 산업활동 등이다. 이 가운데 정산의 항일의식 부분은 조부 조영규(趙瑩奎, 호 聚堂), 부친 조용모(趙鏞模, 호 復宇/復宇道丈)와 삼촌 조용의(趙鏞懿, 호 曙山)ㆍ조용서(趙鏞瑞, 호 晨山) 등 가족 배경에서 형성된 것으로 제시된다. 이와 관련해,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조부가 ‘배일 사상가’였고, 부친이 조부의 유의(遺意)를 이어 아우 2인과 ‘반일운동에 활약’했다고 한다.30) 『포덕교화기본원리』에는 정산이 “부조(父祖) 전래(傳來)의 배일사상가로서 반일운동에 활약 … 만주 봉천지방으로 망명하시여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가 도력(道力)으로 구국제세(救國濟世)의 뜻을 정하시고 … ”라는 표현,31) 『대순성적도해요람』에는 “배일사상가인 조씨 가문 … 그의 가문은 반일운동에 활약하다가 … 도주께서는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가” 등의 표현이 있다.32)
좀 더 구체적으로, 조부의 경우를 보면, 『전경』에는 홍문관 정자(弘文舘正字)로 있다가 1905년[을사]에 국운이 기우는 것을 통탄해 피를 토하고 분사했다는 내용이 있다.33) 그리고 『진경』에는 홍문관 정자로 있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극간(極諫)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심화병(心火病)으로 환향 후 토혈 서거(吐血 逝去)했다는 내용, 부친이 조부의 순국 후 우국충정이 더 열렬해졌으나 국내에서 구국활동이 불가능해 아우들(용의ㆍ용서)과 만주로 망명해서 김혁(金赫)ㆍ이석대(李碩大) 등과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만년에 귀국해 정산의 창도(創道)사업을 보좌했다는 내용 등이 있다. 이어, 부친의 군자금 전달 부분에서 정산과 관련된 내용은 부친이 1916년[丙辰] 8월 이동녕(李東寧)과 이시영(李始榮) 등에게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상해로 갈 때 동행했다는 내용이다. 이어, 3ㆍ1운동 참여 지시 부분은 1919년[己未] 2월 초3일에 정산이 ‘나라 전역에 걸친 독립만세운동은 이미 구천상제가 짠 도수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안면도의 도인들을 포함한 전 도인에게 거사에 적극 참여하라고 명했다는 내용이다.34)
이상의 내용을 보면, 정산의 항일의식과 실천은 1916년[丙辰]의 군자금 전달 부분을 포함해 주로 가족의 배일사상을 배경으로 서술된다. 이 부분은 『대순진리회요람』, 『포덕교화기본원리』, 『대순성적도해요람』 등에서 정산의 가족에 대해 ‘배일 사상가, 반일운동, 구국운동’ 등의 표현이 붙는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물론 1919년[己未]의 3ㆍ1운동 참여 지시 부분은 정산이 당시 한 집단의 수장 자격을 가지고 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족 배경만으로 서술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집안 배경을 통해 정산의 항일의식을 강조하는 현상은 선행연구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김방룡(2018)의 연구에도 정산이 15세에 항일운동을 하던 부친을 따라 만주ㆍ심양으로 가서 항일구국운동에 가담했고, 조부가 민영환ㆍ이상설ㆍ이동녕 등과 교유하면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며, 부친과 삼촌 조용의ㆍ조용서가 만주에서 김혁(金赫)ㆍ이석대(李碩大 또는 李奭大, 李鎭龍 오기) 등과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옥고를 치렀다는 점 등이 그대로 담겨 있다.35)
다음으로, 산업활동으로는 주로 진업단(進業團)의 활동이 제시된다. 이와 관련해, 『한국민족종교운동사』(2003)의 ‘정산 조철제의 산업활동과 천자등극운동’ 부분에는, 정산이 1923년부터 3년간 무극도본부 태인도장을 건립하고 제도를 정비하면서 조천자(趙天子)라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 1928년에 진업단 조직 후 여러 지역에서 수리(水利)ㆍ개간ㆍ간척ㆍ벌채사업과 광산업 등을 벌였다는 내용, 1935년에 허가 문제로 안면도와 원산도 간척지가 각각 일본인과 보령군 소유가 되고, 본부도장이 다른 교단들의 부동산처럼 몰수를 당했다는 내용이 있다.36)
또한 『범증산교사』(1988)에는 1928년(무진) 봄에 진업단을 조직해 황무지ㆍ간척지의 개간과 벌채 사업 등을 진행했고, 1930년 봄에 각처 진업단을 2개 단(團)으로 조직해 1개 단 300여 명을 함경북도 무산(茂山), 1개 단 200여 명을 북만주 모란강(牧丹江) 근처로 보내 벌채에 종사하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일본 경찰이 진업단과 독립군의 합세를 경계해 진업단의 해체를 요청하지만 정산이 듣지 않자 무임 귀환을 시키기 위해 철도화물차 10량을 대기시키고 벌채 허가를 취소시키는 등 진업단 활동을 방해했다는 내용이 있다.37)
『전경』에 따르면, 정산은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면서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과 헌금 2만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은 곡물 300석을 투입한다. 그러나 두 섬의 네 곳 가운데 두 곳에서는 심한 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뜻을 이룬 곳은 일본 마상회사(馬上會社)로 넘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안면도의 20만 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鹽田)은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38)
III.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 연구 과제
지금까지 살펴본 정산과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 관련 서술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차원의 과제를 제기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에 강조된 정산의 항일의식, 3ㆍ1운동 참여 지시, 산업활동 등에 대한 자료를 발굴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무극도가 지향한 후천개벽이나 천자등극운동 등이 항일독립운동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첫째, 정산의 항일의식 부분에 대해서는 가족 배경의 서술 자료뿐만 아니라 정산의 항일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자료들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39) 또한 신자들의 활동 자료들을 발굴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신자들의 활동이 정산의 승인 아래 전개되었다고 본다면, 신자들의 활동도 무극도의 활동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조명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여러 언론을 중심으로 정산과 신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정산의 경우에는 1926년 7월에 ‘보안법 위반 및 사기 혐의’로 기소된 후 기소중지 불기소 처분을 받은 바 있다. 또한 1927년 4월에 조용서 등과 함께 ‘협박ㆍ절도ㆍ공갈ㆍ사기ㆍ유괴 혐의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후 기소중지 불기소 처분을 받은 바 있다.40)
신자들의 경우, 1926년에 석진두ㆍ김규린ㆍ김용운 등 3명이 천자등극설과 공산주의 선전 혐의로 인치된 바 있다.41) 또한 동년 9월에 1925년 봄의 ‘조용모(51세) 사건’과 관련해 경북 안동지청과 정읍경찰서가 무극도 본부를 수색하고,42) 10월에 조용모ㆍ이우형ㆍ권태로가 ‘보안법 위반 및 사기 혐의’로 기소된 후 면소(免訴)된 바 있다.43) 그리고 동년 12월에는 김남수ㆍ송재락ㆍ최정희ㆍ최동은ㆍ박붕래ㆍ이윤기 등 6명이 1925년 1월부터 1926년 6월까지 강원ㆍ삼척ㆍ울진 등지에서 무극도 가입을 권유하면서 ‘정치에 관한 불온 언론으로 치안을 방해’했고, 1925년 7월부터 1926년 6월에 걸쳐 입도자를 속여 입회금, 표성금(表誠金), 영대 건축비 명목으로 돈을 빼앗았다고 해서 ‘보안법 위반 및 사기 혐의’로 기소된 후 면소 판결을 받는다.44)
1929년 10월에는 권태로가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선고를 받은 바 있다.45) 1931년 5월에는 경남 밀양경찰서가 김용국ㆍ진성택ㆍ이장락ㆍ최창근ㆍ이승우 등 5명의 무극도 간부를 검거하고, 동년 6월에 검사국이 주선원(周旋員) 이우형ㆍ장득원 등을 호출ㆍ유치한 바 있다.46)
이러한 여러 활동에서 주목할 부분은 정산이나 신자들에게 적용된 보안법 위반이나 치안방해 혐의 등이다. 물론 천자등극설과 공산주의 선전 혐의도 있지만 이 부분은 치안방해 혐의에 포함될 수 있다. 이 가운데 보안법 위반 혐의는, 1941년의 <국방보안법> 제정 전까지 적용 근거였던 1907년 <보안법>이 주로 결사(結社)ㆍ집회와 함께 정치 관련 부분을 억압한 내용이었다는 점에서,47) 치안 방해 혐의는, 1923년 <치안유지를 위한 벌칙에 관한 건>과 1925년 <치안유지법>이 주로 ‘국체의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의 부인’과 관련된 결사의 조직ㆍ가입ㆍ실행ㆍ선전 등을 억압한 내용이었다는 점에서48)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이해될 개연성이 있다.
둘째, 산업활동의 경우, 진업단과 그 활동에 대한 외부 자료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진업단에 대한 정보는 조선총독부가 펴낸 1929년 수리(水利)조합 자료나 1932년 토지개량사업 자료 등에서 찾기 어렵다.49) 그렇지만 『조선의 유사종교』(1935)와 1936년의 『경성일보』, 1929년의《중외일보》와《동아일보》, 1936년의《동아일보》 등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진업단의 경우, 『조선의 유사종교』에 따르면, 1925년에 조직된 ‘노동단체’로 빈민(貧民) 교도를 수리조합, 삼림벌채, 개간사업 등에 알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진업단을 조직한 취지는 ‘안심안신(安心安身)을 위한 의식주의 안정, 즉 농업노동에 중점을 두어 교도의 생활안정을 주안으로 하고 이 노동생활로 안심을 구하고 생활의 안정을 얻어 통령(通靈)의 영역에 이르는 것’50)이라고 한다. 그리고 1936년 7월 『경성일보』의 기사는 『조선의 유사종교』에 있는 내용과 유사하다. 무극대도교가 1925년에 조직한 진업단이 노동단체로 ‘안심안신 차원에서 노동생활로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면서 주문을 암송하고 경문을 읽어 안심 양성에 노력한 후 통령(通靈)공부를 해 신명의 영역에 도달해 천덕에 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51)
또한 1929년 2월《중외일보》와 1929년 3월《동아일보》에는 무극대도교가 1928년 겨울에 추진한 함경북도 삼림벌채사업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기후 격변 문제,52) 1936년 1월의《동아일보》에는 ‘이상향 건설과 안락한 생활과 직위’ 등이라는 충남 논산 안면도 간척사업의 취지와 명의(名義) 신청 문제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53) 그 외에 1936년의《매일신보》 기사에는 무극도가 여러 금광을 출원(出願)해 금광을 경영했다는 내용도 있다.54)
이 자료들 가운데 『조선의 유사종교』와 『경성일보』의 내용은 유사한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진업단의 노동과 종교적 근거의 연관성에 대한 시사이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진업단에서 빈민 교도를 여러 사업에 알선한 이유는 노동생활로 안심을 구하고 생활 안정을 얻어[安身] 통령(通靈)의 영역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는 진업단의 초점이 ‘생활 안정을 통한 안심’이라는 교리 실천에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무극도는 생활 안정과 빈민 구제를 위해 1928년경부터 진업단을 조직한다.55) 진업단은 조선총독부에 등록된 조합 형태는 아니었고, 1935년경까지 약 7년 동안 활동한다. 그리고 무극도는 진업단의 노동에 ‘안심, 또는 안심을 통한 통령’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다. 진업단과 그 활동에 대해 『한국민족종교운동사』(2003)에는 정산이 간척과 각종 이익사업 등으로 현실적 개혁운동을 전개해 민중에게 경제적 토대의 중요성과 그 실현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고 서술된 바 있다.56)
그렇지만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진업단과 그 활동을 조명할 근거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아직까지 연구된 바가 없고 ‘안심’의 교리적 실천과 항일독립운동의 연관성에 대한 해소도 필요하지만, 진업단과 그 활동은 당시 일본의 국체변혁에 해당하는 ‘후천개벽’과 연결될 개연성이 있다. 이러한 개연성은 1930년 봄에 일본 경찰이 북만주 모란강(牧丹江, 흑룡강성) 근처에서 벌채사업에 종사한 진업단원 200여 명과 독립군의 합세를 경계해 진업단의 해체를 요청하고 무임 귀환용 철도화물차 10량을 대기시키고 벌채 허가를 취소했다는 사례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이 개연성을 명확히 하려면 벌채 인허 취소(伐採 許可 取消) 등과 관련된 자료 발굴이 필요하다.57)
후자의 경우, 무극도의 지향 논리인 후천개벽, 지상천국 건설, 천자등극운동 등을 항일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노력이다. 2019년 연구에서 일부 다루어진 바 있지만,58) 무극도의 지향성을 담은 내용들과 항일독립운동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을 밝히는 노력은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 데에 필요하다.
첫째, 1925년[을축]에 설정된 무극도의 목적에서 ‘정신개벽-인간개조-세계개벽’과 연결된 ‘무자기(無自欺)-지상신선 실현-지상천국 건설’ 가운데 특히 지상천국 건설, 그리고 후천개벽 또는 후천선경 등이 항일독립운동과 어떤 논리적 연결 고리를 갖는지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59) 예를 들어, 만약 정산이 생각한 후천선경이 일제의 패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지적60)을 긍정한다면 후천개벽이나 후천선경은 일제강점기의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이루어질 성격이 아니며, 이 맥락을 고려하면 후천개벽이나 후천선경을 지향한 실천들은 항일독립운동과 연관될 개연성이 있다. 물론 이러한 개연성을 확인하려면, 정산이 행한 여러 도수(度數, Degree number)61)들의 내용을 항일독립운동의 차원과 연결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둘째, 천자등극운동을 항일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천자등극운동과 관련된 외부 자료는 1928년 1월과 3월의《동아일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1928년 1월의《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선에는 보천교의 차천자(車天子), 무극교의 조천자(趙天子), 정도교의 신천자(申天子, 신태세)가 있다.62) 그리고 1928년 3월의《동아일보》에 따르면 1928년 2월 말에 정산과 교도 300여 명이 비밀리에 경남 밀양군 밀양면 활성리 산턱의 산정금시당(山亭今是堂) 앞에 모여 천지도수 관련 의례를 진행한다.63) 특히, 1933년 1월부터 1934년 3월까지 검거 사유 총 170건(보천교 98건, 동화교ㆍ수운교 등 72건)을 보면, 교주가 천자로 등극하고 교도들이 고관이 된다는 유언, 즉 천자등극설은 34건으로, 농촌진흥운동의 무용성을 주장한 유언 수치(34건)와 같다.64)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일제강점기에 제기된 천자등극설이나 후천개벽설이나 지상천국 실현 등에는 당시의 일본 국체를 부정하거나 황실 존엄을 모독하는 등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차원이 담겨 있어 항일독립운동의 논리로 이어질 개연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신종교들이 천황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후천선경을 포함해 다른 세계를 지향했다면 이는 종교정체성에 근거한 사회 변혁을 지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향후 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IV.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의 연결 논리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내부 자료(제2장)와 이에 대한 외부 자료(제3장)를 보면 교차 검토가 가능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교차 검토가 불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향후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교차 검토가 가능한 경우에도, 비록 교차 검토를 통해 다소 자료 내용의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라도, 그 내용을 항일독립운동과 연결하려면 ‘과연 해당 내용이 어떤 이유와 기준으로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서술될 수 있을까?’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을 연결하려면 크게 세 가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우선, ① 항일독립운동 범주의 설정 근거와 기준이다. 어떤 활동이나 사건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서술하는 근거와 기준은 서술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직접적인 무장 활동 경력이나, 보안법 또는 치안유지법 위반 등처럼 특정 수준 이상의 혐의나 처벌 경력 등을 항일독립운동에 포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어떤 활동이나 사건이 ‘왜’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서술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지 않아, 이 부분은 ‘독립과 항일’ 범주의 설정 근거와 기준에 대한 과제를 남기고 있다.
다음으로, ② 종교를 항일독립운동에 종속시키거나 종교단체를 항일독립운동단체에 종속시키는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은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을 대등한 변수로 인정하지 않고, 특정 종교에 대해 ‘종교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라거나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단체로 전제하는 설명 방식을 말한다.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은, 비록 항일독립운동을 통한 교단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단의 종교적 차원을 무화(無化)시킬 위험을 지니고 있다.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이라는 두 가지 변수에서 어느 한 쪽이 무화된다면 양자의 연결도 적절하지 않다. 게다가 아래의 두 가지 지점들을 설명하지 않는 한,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첫 번째 지점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일제강점기에 종교 형태, 특히 ‘신종교 형태’를 활용한 이유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총독부가 종교를 ’공인종교, 유사종교, 비종교단체‘로 구분하면서, 신종교에는 ‘사교’라는 시선을 가지고 법제상 권력을 작동시켰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신종교가 일부 조선인에게조차 미신타파 담론 등의 영향으로 비판받는 대상이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무극도도 1927년 5월 정읍에서 개최된 전북기자단대회 제3년 정기대회, 1928년 5월에 예천(醴泉)청년동맹 제2회 정기대회 등에서 보천교와 함께 토의 대상이 된 바 있다.65) 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수시로 신종교의 활동을 보안, 집회, 치안유지, 의료법, 상해 등 여러 차원에서 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66)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신종교의 존재와 활동이 ‘공인종교’에 비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가능해진다.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도대체 왜 ‘공인종교’도 아니고, 행정적으로 ‘종교유사단체’로 취급되지 못하고, 헌병과 경찰이 ‘비합리적’ 집단으로 간주해 주시했던, 게다가 일부 조선인조차 비판했던 신종교 형태를 취했을까? 일제강점기에 신종교 형태가 일반 사회단체나 비밀단체 형태보다 항일독립운동에 유리했던 측면이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 지점은 ‘종교를 가장했다는’ 종교단체가 해방 이후에도 종래의 종교적 정체성 또는 성격을 유지ㆍ지향하는 이유이다. 대종교나 무극도가 순전히 종교를 가장했다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되었다면, 그 단체들은 독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 해산하거나 ‘기념단체’ 또는 사회단체의 성격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현실적으로 기념단체나 사회단체가 아닌 종교단체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독립이라는 특정 목표 설정이 가능했던 사회 환경이 해방 이후에 전면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가능해진다. “이 단체들이 독립 이후 종래의 종교적 정체성 또는 성격을 유지ㆍ지향하는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혹시 이 단체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종교 형태를 가장했지만 그 형태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상의 두 지점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비록 종교인의 활동이나 신종교의 출현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서술한다고 해도,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의 학술적 유용성은 낮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보다 항일독립운동을 신종교 출현 배경의 ‘일부로 설명’하거나 신종교가 종교적 토대 위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관점이 적절해 보인다.
다음으로, ③ 종교계의 항일독립운동의 활동에 대한 종교적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종교적 신념을 포함한 종교적 세계관을 해당 활동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해당 활동이 최종적으로 항일 또는 정치적 독립이라는 목적을 지향했는가’라는 두 지점에 주목한다.
첫 번째 지점과 관련해서는 항일독립운동 관련 인물의 종교적 신념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종교적 세계관의 작동 여부를 묻지 않고 종교인이 개입한 것만으로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을 연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종교가 해당 사건의 주요 변수가 아니어도 그 사건과 종교를 연결할 충분한 의미가 있는지 등을 성찰할 수 있다. 물론 종교단체를 ‘종교인의 인적 연결망’으로 본다면 그 인적 연결망을 활용한 부분도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의 연결 고리로 설명될 수 있다.
두 번째 지점과 관련해서는 항일독립운동 관련 자체가 최종 목적인지 아니면 교리적 목적 실현에 수반된 실천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해당 활동의 최종 목적이 항일독립인지 종교적 세계의 구현인지를 묻는 일은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의 연관성이 ‘부수적 연관성’인지 ‘목적적 연관성’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유효하다. 만약 그 활동의 최종 목적이 종교적 세계의 구현이라면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의 연관성은 ‘부수적 연관성’에 해당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지점은 종교계의 여러 실천들 가운데 어떤 내용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서술할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데에 유용하다. 예를 들어, 이 내용을 ‘기독교계 신사참배 거부 활동이 항일독립운동인가 종교적 활동인가?’라는 물음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이 활동이 국권 상실 이후에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것이라면 시공간상 항일운동에 해당할 수 있다. 둘째, 이 활동의 근거가 ‘우상숭배 금지라는 종교적 신념’이라면 종교와 항일운동의 연결 고리가 성립될 수 있다. 셋째, 이 활동의 최종 목적이 종교적 세계관의 구현이라면 양자의 연관성은 ‘부수적’이다. 즉, 신사참배 거부 활동의 최종 목적이 종교적 세계관의 구현이고 그 실천 과정에 항일의 성격이 있었다면 부수적 연관성을 지닌 기독교계 항일운동으로 서술될 수 있다. 물론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차후에 그 활동의 목적ㆍ과정ㆍ결과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어야 한다.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 앞서 제II장과 제III장에서 정산과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검토했지만, 이 경우에도 항일독립운동 범주의 설정 근거와 기준,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의 재고, 항일독립운동 관련 활동의 종교적 근거 제시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다만, 이 가운데 항일독립운동 범주의 설정 근거와 기준은 종교학 분야를 다소 넘어설 수 있는 작업인 데 비해,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의 재고와 항일독립운동 관련 활동의 종교적 근거 제시 등은 종교 관련 연구에서 해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예를 들어, 항일독립운동 활동의 종교적 근거 제시와 관련해, 진업단 활동의 최종 목적이 종교적 세계의 구현인지 항일독립운동인지를 물을 수 있다. 진업단의 성격은 ‘노동단체’라고 볼 수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교화 목적이 아닌 재화 획득을 위한 노동단체라는 시각과 종교적 목적을 위한 노동단체라는 시각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전경』에는 진업단을 조직한 배경으로 볼 수 있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라는 표현이 있고, 『조선의 유사종교』나 1936년 7월《경성일보》에는 ‘노동생활로 안심(安心)을 구하고 생활의 안정을 얻어[安身] 통령(通靈)의 영역에 도달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다.67) 모두 진업단을 종교적 차원의 노동단체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에 기초할 때, 만약 진업단이 노동의 종교적 근거를 갖고 있고, 일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급자족을 통해 종교공동체를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창립되었다면,68) 나아가 일제가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경계 차원에서 진업단의 활동을 통제하려고 했다면 진업단은 항일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조명될 수 있다. 또한 진업단 활동의 최종 목적이 종교적 목적이었다면, 진업단과 항일독립운동 사이의 연관성은 ‘부수적 연관성’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향후 자료 발굴의 범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편,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무극도와 항일독립운동의 연관성을 검토하기 위해 ‘민족의 개별성 확립, 민족의 통합성 제고, 당대 과제의 인식’ 등으로 구성된 종교민족주의의 틀을 적용해 무극도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분석을 위해서는 향후 무극도 관련 자료들의 적극적인 발굴이 필요하다.69)
Ⅴ. 나오면서
지금까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고 있지만, 정산과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 관련 연구가 미진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어, 정산과 무극도 관련 자료에서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향후의 연구 과제를 제기하면서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을 연결할 때 고려할 지점을 제시하였다.
구체적으로, 정산과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 관련 주요 내용은 가족을 배경으로 한 정산의 항일의식과 3ㆍ1운동 참여 지시, 그리고 무극도의 산업활동으로 구분된다(제II장). 자료 내용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정산과 신자들의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교단 내부와 외부 자료를 발굴하는 일, 아울러 천자등극운동과 후천개벽 등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조명하는 일을 연구 과제로 제시하였다(제III장). 전자는 무극도 내부와 외부 자료의 교차 검토를 가능하게 해 정산과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 관련 내용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에, 후자는 정산과 무극도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의 외연을 확대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이어,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을 연결할 때 단순한 종교단체와 항일독립운동단체를 등치시키는 경향을 성찰한 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종교인이나 종교단체의 활동ㆍ사건을 조명할 때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항일독립운동의 범주 설정 기준이 필요하고,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에 특히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종교 형태’를 취한 이유와 ‘종교를 가장했다는’ 종교단체들이 해방 이후에도 종래의 종교적 정체성이나 성격을 유지ㆍ지향하는 부분을 설명하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의 연관성을 ‘부수적 연관성’과 ‘목적적 연관성’으로 구분해 ‘해당 활동의 근거가 종교적 신념을 포함한 종교적 세계관에 있는지의 여부’와 ‘해당 활동의 최종 목적이 항일독립에 있는지 종교적 세계관의 구현에 있는지의 여부’를 밝혀야 양자의 연관성이 좀 더 정교하게 규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제IV장).
끝으로,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연관해 과거사 청산 문제가 지속되는 한,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종교가 항일독립운동의 주체로 호명되는 현상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신종교와 항일독립운동 사이를 연결하는 학술적 활동도 지속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독립기념관 건립이 추진되던 1982년 10월에 대순진리회의 포덕소 대표들이 결의해 약 1달 만에 국내 종교단체 중 최고 모금액을 세운 이유에 대해 도주가 일제의 탄압을 받고 종단이 해체당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기억70)은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교단의 내적 관심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서술했듯이,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항일독립운동의 주체 호명 현상 등을 고려한다면, 종교계나 학계는 유관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들을 발굴해 축적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심을 가져야 정산과 무극도의 활동을 항일독립운동 차원에서 조명하는 일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종교의 항일독립운동만을 강조하기보다 항일독립운동의 근거를 종교적 세계관에서 찾아내려는 일에 무엇보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앞으로 신종교와 항일독립운동 사이를 연결하는 자료 발굴과 학술 연구의 외연이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