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여는 글
지난 30만 년1) 동안 현생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오면서 77억의 개체 수를 가졌던 적은 없었다. 인간이 지구를 꽉 채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구가 인간을 최대로 수용할 수 있는 규모는 150억 명이다. 지구는 아직 현재 인구의 두 배 정도는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개체 수는 곧 급격하게 줄어들 위기에 처해있다. 그 이유는 오염된 공기와 물, 오존층 파괴, 기후변화, 넘쳐나는 미세 플라스틱과 같은 생태재앙 때문이다.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ㆍ강한 인공지능(AGI)ㆍ소행성 충돌ㆍ화산 폭발ㆍ태양질량방출(CME: Coronal Mass Ejection)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생태문제는 어쩌다 한 번씩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니라, 늘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는 데에 그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사람들은 생태문제에 둔감하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문제뿐만 아니라, 북극과 남극 얼음 융해 등 갈수록 심각해지는 지구 온난화, 덴마크에서 지난 30년 동안 전체 곤충 개체 수가 75%나 줄고 미국에서 10년 동안 꿀벌 40%가 사라졌다거나, 전 세계 척추동물의 52%가 감소하였고 ‘6번째 대멸종(mass extinction)’으로 향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거나 하는 놀라운 뉴스에도 이제는 무덤덤한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생태문제가 일반인의 시야에 잘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넘쳐나는 현대의 자극적인 정보에 둔감해진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생활이 약간의 굴곡은 있을지라도 결국엔 관성의 법칙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는 인간의 이런 태도, 즉 생태문제가 지구를 멸망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지금 당장에는 별다른 해가 없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기든스 패러독스(Giddens’s Paradox)’라고 불렀다. 생태문제는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숨을 쉬지 못하면 바로 죽는 것과 같이, 일정 시간이 흐른 뒤가 아니라 지금 당장 생존과 직결되는 폐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생태문제다. 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지구 멸망 원인을 제공하는 주범은 화산 폭발이나 소행성 충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 바로 이 자각으로부터 생태학(生態學, ecology)2)은 출발한다.
생태학은 생명철학(philosophy of life) 및 환경주의(environmentalism)와 유사한 범주에 있으면서도 구분된다. 19세기 말, 딜타이(W. Dilthey, 1833~1911)ㆍ짐멜(G. Simmel, 1858~1918)ㆍ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등이 주도했던 생명철학은 과학과 철학의 물질만능주의ㆍ합리주의ㆍ실증주의에 반대하면서 자연의 본성(nature of nature)에 근거한 생명의 존재론적 실체와 고귀함을 드러내고자 시도한다. 생명 자체, 즉 생명의 존재 근거와 조건을 찾는 것이 생명철학이다. 이에 비해서 생태학은 생명이 외부 환경과 주고받는 ‘관계’에 더 주목한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또 생태학은 모든 생명의 ‘지속 가능한’3) 미래를 위해 인간이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는 ‘문화적 자각’을 강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태학은 환경주의와 구분된다. ‘환경’은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었음을 전제하는 개념이고, ‘생태’는 인간과 자연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환경주의는 기술의 진보와 개발만으로 생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생태학은 사회제도 및 인간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생태 위기가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생태학의 이런 성격 때문에, 한때 생태학은 ‘체제 전복적 학문(subversive science)’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적이 있었다.4) 이런 맥락에서의 생태학(ecology)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생태주의(ecologism)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는 생태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 수 있을까? 대순진리회는 자연보호사업에서 괄목할 만한 모습을 보일 뿐만 아니라, 생태론에 응용할 수 있는 교리(예를 들어 상생)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에,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지금까지 기술한 내용을 배경으로 해서 이 글은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을 기술함으로써 현재 인류가 당면한 생태문제에 대하여 대순진리회가 어떤 실천적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 또한 기존의 생태론 보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고찰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대순진리회의 교리에서 생태 논의를 추출한 선행 연구로는 윤재근(2001), 김학택(2001), 류성민(2014)의 성과를 거론할 수 있다.5) 윤재근은 대순진리회가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본다는 점, 인간을 조상 선령신 및 신명계와 교류하는 상생의 존재태로 상정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해원상생6)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상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해원상생 윤리는 유기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 나아가 신명계도 포함하기 때문에, 대순진리회는 개체론적 인간중심주의가 아닌 전체론적 생태중심주의에 입각한 생태적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즉 세계의 모든 존재는 하나라는 것이다.7) 김학택은 대순진리회가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일체(一體)이며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유기체적 자연관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자연은 신과 연결되어있고, 인간도 외부세계와 연결되어있으며, 천지인 삼계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진단한다. 따라서 어느 한 곳이 막히면 다른 곳도 막히므로 다른 존재의 원한을 풀어주고 상생하는 것이 행위의 지침으로 제시된다고 주장한다.8) 류성민은 대순진리회가 개벽 이전인 선천에서 개벽 이후인 후천으로 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자 새로운 윤리 규범들을 제시하는 근거는 ‘해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순진리회가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이해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상생’으로 보고, 그러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태도를 윤리적으로 중시한다고 본다. 특히 후천에는 인간이 중심이 되지만 그 입장은 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다루거나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9)
이상과 같이 선행 연구자들은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으로 유기적 세계관과 해원상생의 윤리에 주목하고 있다. 이 글은 이들의 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대순진리회가 유기적 세계관을 가지지만 ‘만물이 동등한 위상을 가지며 전적으로 하나다’라고는 보지 않는다는 점, 해원만이 아니라 보은의 상생 이념까지 더 추가해야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이 글은 대순진리회의 자연관을 정리함으로써 대순진리회 생태론의 기초를 먼저 닦고자 한다(Ⅱ장). 그리고 대순진리회의 인간관 가운데 하나인 인존(人尊) 이념을 검토함으로써 만물이 동등하다는 관점과 인간중심주의 및 생명중심주의의 극복에 대해 살필 것이다(Ⅲ장). 아울러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은 실천 영역까지 아우르는 ‘상생생태론’이라는 틀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한다(Ⅳ장).
Ⅱ. 대순진리회 생태론의 기초 : 자연관
대순진리회의 생태론 기술에 있어서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부분은 그들의 자연관이다. 자연관(view of nature), 즉 인간이 타자인 자연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는지,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밝히는 작업은 생태론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대순진리회의 자연관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최고신 주재 하의 만물동원(萬物同源) 관점이다. 박우당(朴牛堂, 1917~1996)은 1956년에 조정산(趙鼎山, 1895~1958)의 가르침을 담은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을 도인들에게 전했다.10) 이 교리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도지위도야자(道之謂道也者)는 정이무극(定而无極)하고 동이태극(動而太極)하야 태극이 생양의(生兩儀)하고 양의생사상(兩儀生四象)하고 사상생팔괘(四象生八卦)하나니 태극지리생생지수(太極之理生生之數)는 무진무량(無盡無量)하야 변통조화공덕(變通造化功德)을 불가사의(不可思議)일새 … 태극(太極)이 생양의자(生兩儀者)는 음양야(陰陽也)니 음양자(陰陽者)는 천양지음(天陽地陰)이며 … 우유오행상생지리(又有五行相生之理)하니 금생수(金生水)하고 … .11)
간단히 말해서 ‘무극ㆍ태극 → 양의 → 사상 → 팔괘’ 순서로 만물이 분화하고, 이 과정에 음양과 오행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역』 「계사 상」의 우주발생론[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그리고 신유학의 그것과 유사하다.12) 도교 역시 장자 이후로는 만물이 하나의 기[一氣 또는 元氣]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해왔다.13) 즉, 유교와 도교는 만물의 근원이 같다[萬物同源]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대순진리회는 그러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만물동원 우주관을 활용한다. 단, 그 만물에 최고신은 제외된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최고신을 신앙하는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최고신은 무극ㆍ태극 그 자체가 아니라 무극ㆍ태극을 관령(管領)ㆍ주재(主宰)하는14) 존재[無極神 혹은 太極之天尊]이다.15) 최고신이 무극ㆍ태극을 움직여 만물을 창출한다면, 분화된 모든 만물의 근원은 같다. 대순진리회가 자연을 바라보는 기초적인 관점이 바로 이것이다.
둘째, 최고신 주재 하의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유기적(organic) 세계관이다. 생명 유기체는 그 신체 안에 독립된 기능을 가진 기관들을 갖지만,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고 하는 게 유기체적 구성이다. 이 생명 영위 방식이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 혹은 인간-사회의 구조에 나타난다고 보는 게 유기적 세계관이다. 만물동원을 주장하는 동아시아 전통은 대체로 유기적 세계관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고 대순진리회 역시 그러하다. 한 사람의 원한이나 생각이 천지 기운을 막고 천기(天氣)를 어지럽힌다거나, 천지 만물에 신명이 깃들어있다거나, 인간은 선령신과 직접적이고도 긴밀한 관계라고 했던 증산의 발언,16) 신명과 인간은 서로 의지하는 음양의 관계라고 했던 정산의 가르침17)이 그 사례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선행 연구들에 자세하므로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셋째, 자연법칙 중시 관점이다. 증산은 “천지는 일월이 없으면 빈 껍질이요, 일월은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헛된 그림자다[天地無日月空殼 日月無知人虛影].”, “당요(唐堯)가 일월의 법을 알아내어 백성에게 가르쳤으므로 하늘의 은혜와 땅의 이치가 비로소 인류에게 주어졌나니라.”고 말했다.18) 일월의 운행 법칙이 드러나야 하늘의 은혜로움도 드러나고 땅의 이치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 증산은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고 말했다.19) 동아시아에서는 만물이 봄에 태어나고[生] 여름에 성장하며[長] 가을에 거두어지고[斂] 겨울에 감추어짐[藏]이 천하의 기본 법칙인 것으로 이해되었다.20) 최고신이 ‘생장염장’이라는 운동 법칙을 활용함으로써 자연을 다스린다고 한 표현은, 곧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최고신이 자연의 법칙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증산은 생장염장의 네 단계를 더 세분하여 포태양생(胞胎養生: 生)ㆍ욕대(浴帶: 長)ㆍ관왕(冠旺: 斂)ㆍ쇠병사장(衰病死葬: 藏)이 천지의 기본 법칙으로 기능한다[天地之用]고 말했다.21) 이로써 대순진리회는 자연에 내재하는 존재 원리 및 운동 법칙을 중시하는 관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주목할 사실은, 후술하겠지만 대순진리회의 최고신이 우주 멸망의 근본 원인으로 상극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상극 역시 자연의 기본 법칙이다. 여기에서도 자연의 법칙이 중요시된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넷째, 개벽을 기준으로 자연이 바뀐다고 보는 관점이다. 증산은 개벽 후 후천에는 자연에 편벽된 현상이 없어지고, 수화풍(水火風)의 삼재(三災)가 없으며, 사람을 해치는 곤충과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22) 또 정산이 전한 「옥추통(玉樞統)」에 따르면, 개벽이 될 때 신명과 인간, 동식물 등 만물 군생(群生)은 모두 심판을 받고, 하늘과 땅, 산과 바다, 평야와 언덕, 일월과 별, 음양과 오행도 ‘다시 편성’된다고 한다.23) 심판과 개벽 이후에 존재하는 후천의 만물 군생은 기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완전한 상태로 새롭게 변모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순진리회가 개벽 이전의 자연은 상극의 지배를 받고 개벽 이후의 자연은 상생의 지배를 받으며 상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24) 개벽 이전과 이후의 자연은 그 본질이 다르다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더 다루어야 할 주제는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이 방식은 자연을 변혁하는 태도와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로 나뉜다. 자연 변혁은 최고신의 입장이다. 일반 인간의 입장이 아니다. 일반 인간은 자연에 순응할 따름이다. 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자연을 변혁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는 대순진리회의 자연관은 모순적이며 양면가치적(ambivalent)이라고 오해될 수 있다.
첫째, 최고신의 자연 변혁 입장을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서는 하늘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 운행을 살펴 법칙을 찾아낸 뒤 그에 따라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인식해왔다. 이른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다. 근대 이후 서양은 자연을 대상인 객체로 규정하고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여 그것을 인간 마음대로 조작하고자 했다.25) 증산이 활동했던 20세기 초엽은 그러한 서양의 사상 조류가 한국에 상륙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물질문명을 전적으로 수용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자연 개발과 지배로 대표되는 그들의 정신문명에 대해서는 부분적 수용[變法論] 혹은 전면 수용[文明開化論]을 주장하고 있었다.26)
하지만 증산은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天理)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神道: 신명계 혹은 자연의 법칙)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 .”라고 경고했다.27) 그러면서 인간 만물이 모두 상극 법칙에 지배된 탓에 원(冤)이 가득 차 세상이 참혹하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원을 풀며 상극을 없애고 상생의 원리로 세상이 흘러가도록 도수(度數), 즉 법칙을 뜯어고친다고 주장했다. 증산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특정한 종교 활동을 하였다. 그것이 바로 천지공사였다.28) 우주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천지공사로써 그것을 뜯어고치고자 했던 증산은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자연 순응적인 천인감응설, 또는 당시 문명화 담론이었던 자연 지배 혹은 자연 개발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지공사는 증산이 자연을 변혁함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증산은 우주의 근원인 무극ㆍ태극을 주재하는 최고신으로 그려지므로, 대순진리회에서 증산의 이런 입장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자연을 변혁하는 작업, 즉 천지공사는 증산이 설계하였고 그 계승자들인 정산과 우당에 의해 펼쳐진다는 것이 대순진리회의 신앙이다. 증산ㆍ정산ㆍ우당을 제외한 일반 인간은 변혁된 자연을 만나는 데 그치는 것이지, 자연을 변혁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즉 자연 변혁 입장은 최고신 그리고 정산과 우당에게만 해당한다.
둘째, 일반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고 공명해야 한다는 측면을 살펴보자. 원래부터 인간은 자연법칙과 공명해 왔다는 것이 대순진리회의 주장이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게 대순진리회의 기본 전제라는 말이다. 증산이 자신을 따르던 종도들에게 “너희들이 이후로는 추워도 춥다 하지 말고 더워도 덥다 하지 말고 비나 눈이 내려도 불평하지 말라. 천지에서 쓸 데가 있어서 하는 일이니 항상 말썽을 부리면 역천(逆天)이 되나니라.”고 가르쳤던 것이 그 한 사례다.29) 앞서 기술했듯이, 천리(天理)를 거스르며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은 많은 죄악을 낳았다는 게 증산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므로 자연을 변혁하는 주체는 최고신이고, 일반 인간은 그 법칙에 따라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는 선천만이 아니라 후천에도 이어진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대순진리회는 개벽 이후 도래하는 후천에는 인간이 선천에는 하지 않았던 특별한 우주적 사명을 맡아 일을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 역시 최고신 증산이 천지공사로써 ‘새로 정해놓은’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것이다. 후천에도 인간은 자연을 변혁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자연 변혁은 오직 최고신의 뜻에 달린 일이다.
Ⅲ. 인간중심주의와 생물중심주의의 극복
생태론에는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논의되는 것은 심층생태론(deep ecology=근본생태론)과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이다. 심층생태론은 대체로 생태계 위기 극복을 위해 가치관의 획기적인 전환을 요구하면서, 인간의 생태에 대한 관점이 종교적 신념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30) 종교의 역할을 강조하는 편이다. 사회생태론은 사회체계가 생태 위기를 만들었다고 보고 마르크스와 엥겔의 사회변혁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생태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으로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31) 이 글의 관심은 종교와 친화적인 심층생태론에 있다.
심층생태론 내부에도 다양한 흐름이 있다.32) 그 가운데 하나는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을 기독교적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로 진단하고, 그것을 생물중심주의(bio-centrism)로 대치하자는 생태론이다. 즉, 인간이 자연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 때문에 생태문제가 발생했으니 인간과 자연을 완전히 동등한 하나의 생물 단위로 보는 것으로 그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대지(大地)의 일부일 뿐이며 윤리 범주에 자연도 포함해야 한다는 대지 윤리(land ethic)가 그 한 사례다.33) 이 입장은 만물의 내재적 가치를 중시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련성,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일체를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구성요소들의 총합을 넘어선다는 전체론(holism)을 견지한다. 그러나 인간을 자연의 암세포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하고, 동식물을 위해서는 인간을 희생해야 한다거나, 심지어 지구 환경에 적정한 인류는 10억∼20억이기 때문에 인구를 줄이기 위해 에이즈를 퍼뜨리자는 주장까지 한다. 생물중심주의는 인간을 자연과 동일한 위상을 갖는 것으로 설정하고 사회적 가치나 인간적 가치를 배격하기 때문에 과도한 인간 혐오주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비판은 사실로부터의 가치가 존재로부터의 당위를 담보할 수 없다는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 환경보호라는 명분 아래 인권침해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 환경 파시즘(environmental fascism)이라는 주장에 근거된다. 물론 이 비판이 검증되지 않았다거나 무모하다는 반론도 있다.34)
생물중심주의 생태론은 생태 위기를 초래했다고 의심받는 서구의 기독교적인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등장했다. 그러나 인간을 혐오하는 과격성으로 인해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에는 한계를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인간중심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생태 위기 해결을 위한 길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거나(인간중심주의) 동등하다거나(생물중심주의)라는 게 아닌 제3의 다른 관점이다. 이 글은 이 관점을 대순진리회의 ‘인존’과 ‘상생’ 이념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Ⅱ장에서 언급했던 대순진리회의 자연관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키워드는 ‘법칙성’이라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가 자연의 법칙을 중시한다고 했던 직접적인 설명 외에도, 최고신이 무극을 주재한다는 법칙 개념에 근거함으로써 만물동원이나 유기적 세계관이 해명된다는 점, 최고신이 자연을 변혁한다거나 인간이 자연 특히 새롭게 변화된 자연에 순응한다고 했던 것이 모두 법칙과 관계한다는 점 때문이다.
자연법칙을 깨닫고 익히며 그에 공명할 수 있는 존재는 동식물들도 가능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역시 인간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 역시 이 관점을 지지한다.35) 그렇다면 대순진리회는 인간과 동식물의 근원이 같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동식물은 동등한 위상을 가진다거나 전적으로 하나라고 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검토해야 할 주제는 인존이다. 대순진리회의 인간관(view of human being)36) 가운데 하나인 인존은 ‘인간이 존엄하다’는 뜻이어서 인간중심주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증산은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고 말했다.37) 신명이 하늘 영역에 봉해지면 하늘도 신명의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 천존, 신명이 땅의 영역에 봉해지면 땅도 신명의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 지존, 신명이 인간에게 봉해지면 인간도 신명의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 인존이다.38) 인존은 인간이 존엄하다39)는 뜻이지만 존(尊)의 근거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보다 더 우월한 존재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신과 인간의 결합[神人相合] 결과물이 인존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위상이 동등하게 한 자리에서 맞추어진다는 것이 인존의 정확한 의미다.40)
신명이 동식물에 봉해진다면 동식물이 신명의 권위를 갖게 되어 그들이 존귀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신명이 봉해지는 곳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존귀해지는 것이 인간이다. 이러한 인존이념에 따르면 지구 위에 존재하는 250만 종의 다른 그 어떤 동식물보다 인간이 더 존엄하다. 따라서 인존은 분명히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존 이념은 생물중심주의가 경멸하는 서구의 기독교적 인간중심주의, 즉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상이라도 마음대로 개발ㆍ이용해도 된다는 사고방식41)과는 다르다. 인존은 종(種)을 ‘차별’하지 말고 ‘구별’하자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차별 금지 입장은 피터 싱어(Peter Singer, 1946~)와 같이 동등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주지하듯이, 피터 싱어는 종(種)을 차별하는 것[종차별주의, speciesism]을 반대하면서 동식물과 인간이 같은 인격체로서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명체가 ‘자기의 의지가 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때만’ 가치를 갖는다고 본다. 그 어떤 생물 종이라고 하더라도 ‘의지와 실행 가능성’만 만족시킨다면, 그 모든 생물체는 같은 인격체로서 동등하게 대우해야만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싱어에 따르면, 살진 돼지와 보통 인간은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으므로 완전히 동등한 인격체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는 의지와 실행력이 없으므로 인격체가 아니다. 따라서 살진 돼지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갓난아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42) 인존은 피터 싱어에 찬성하지 않는다. 즉, 인존이 종 차별 금지를 주장하는 것은 피터 싱어의 의견과 같으나, 그가 말하듯이 종이 모두 동등하다는 것까지를 말하는 건 아니다. 인존은 인간이 다른 동식물에 비해서 그 위상이 다르기 때문에, 적어도 그것은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기본 전제로 한다. 그것을 토대로 하여 인존과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차이점은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조망될 수 있다.
첫째, 인존 이념이 태동한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 개념이 서양의 기독교적 인간중심주의와는 그 내용이 달랐다. 동아시아 종교전통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과 만물 일체를 강조하는 유기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므로,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존재로 인간을 그리지 않았다. 물론 유교가 낮은 언덕보다 태산이 더 위대하고 토끼보다 기린이 더 우수하다는 식으로, 인간적 가치로써 자연을 재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43) 하지만 동아시아 전통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중추가 되면서도 동식물과 어울림[만물일체]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생물 종을 차별하지 말고 구별하자는 입장이므로, 서구식 인간중심주의와는 그 본질이 다르다.
대순진리회의 인간중심주의 역시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적 인간중심주의와는 구분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입장이다. 물론 동아시아 전통의 입장 그대로는 아니다. 대순진리회가 도(道)와 내가 합일한다[道卽我 我卽道]는 종교적 목표를 갖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이나 만물(최고신은 제외)과의 일체감을 체험하는 신비주의적 전통이라기보다는, 올바른 언행과 처신ㆍ처사로써 법을 잘 준수하고 유리알처럼 마음을 맑게 닦아 무자기(無自欺)를 이룩하여 진리를 체득하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44) 다시 말해서 자연과 합일하는 게 아니라 법칙인 진리와 합일하고 공명하라는 뜻이다. 대순진리회는 인간이 다른 생명 종들과는 구분되며 뭇 생명의 중추가 된다는 동아시아의 전통을 이어받고는 있으나, 자연 그 자체와의 합일 또는 만물 일체라는 지점에서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인존은 미래에 완성되는 인간의 존재성과 가치성을 말하는 것이지 지금 현재 구현된 결과물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인존의 완전 실현은 지금이 아니라 개벽 후의 미래에 이루어진다. 전술했듯이, 신명이 인간에게 봉해지면 인간도 신명의 권위를 갖게 되는 게 인존이다. 그러나 신명이 봉해진다[封神]는 의미는 신명이 ‘거주하게 된다’는 사실만을 적시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증산이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니 비록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옮겨가면 무너지나니라.”45)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원래부터 만물에는 신명이 이미 다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흙 바른 벽에 붙어있는 신은 인존을 만들기 위해 인간에게 봉해지는 신명에 비해서 그 격이 낮을 수 있다. 그러나 만물에는 신이 다 거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위상이 상당히 높은 신명도 있을 수 있다. 웅장한 산이나 거대한 토지, 일월이나 28수 등에 거주하는 신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존의 구현 조건인 봉신은 ‘신명의 거주’라는 사실 외에 다른 무언가를 더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해야 한다.
다음 우당의 훈시는 인존을 만들어내는 봉신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옛날에는 신봉어천(神封於天)으로 모든 권한을 하늘이 맡아서 행사하여 천존시대였고, 현재는 신봉어지(神封於地)로 땅이 맡아서 행사하니 지존시대다. 지금은 지존시대가 다 되었다 하나 이사 갈 때 방위 보고 묘 자리를 보는 등, 아직도 땅에 의존하는 것은 땅에서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신봉어인(神封於人)으로 이 권한을 사람이 맡아서 하게 된다.”46)
이에 따르면, 천존ㆍ지존ㆍ인존을 가능하게 하는 봉신은 신명이 특별한 장소[天地人]를 거주처로 삼아 주어진 사명에 따라 ‘공적인 일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봉신이 되면, 인간은 신명의 권위를 갖고 신명에게 주어진 사명과 권한을 그대로 행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존의 핵심이다. 현재의 인간은 신명이 선천에서 하는 일을 완전히 인계받아서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존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신명이 해왔던 일을 인간이 완전히 넘겨받게 되는 시점인 후천이 되어야 진정한 인존시대가 실현된다는 뜻이다. 지금 현재는 맡은 바 임무를 감당할 신명의 호위를 받는 중이므로,47) 완전한 인존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고 따라서 진정한 인존시대가 열리기 전의 ‘과도기’라고 해야 한다.48)
유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동식물보다 우수하며 만물을 보살피고 양육해야 하는 우주적 사명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본다.49) 대순진리회 세계관에 의하면 그런 역할은 신명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다. 인존이 완전히 구현된 후천의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면 신명으로부터 그 권한을 물려받아 만물을 보살피고 양육하는 우주적 사명을 가질 것이다. 신명으로부터 권한을 이어받지 못한 현재의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우주적 사명을 가질 수 없다. 후천의 인간이라야 신명의 권한을 행사하여 자연의 특정 부분을 맡아서 지배하고 운용할 수 있다. 인존시대의 인간은 신명과 인간이 합일한 상태이며,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지상신선이다.50) 지금은 인존시대로 나아가는 과도기이고 완전한 인존시대가 열린 것이 아니다. 인간도 인존을 완전히 구현한 인존시대의 지상신선이 아니다. 자연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신명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어디까지나 최고신이 변혁한 자연법칙에 순응하고 공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존은 실현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고 지금은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각자에게 맞는 바에 따라 신명의 호위를 받기는 하지만,51) 그렇다고 해서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이 인존이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담은 것이지, 서구의 기독교적 인간중심주의처럼 지금 당장 인간에게 적용되는 개념은 아니다.
셋째, 미래 개념인 인존의 인간중심주의는 서구의 기독교적 인간중심주의와는 내용이 다르다. 기독교적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다른 생명 종보다 우월하다고 전제하에 다른 생명 종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이에 비해 인존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과 다른 생명 종 사이의 상생을 전제로 한다. 즉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인간들끼리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심지어 신명까지 포함한 모든 대상과 상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동식물 등의 타자를 함부로 착취할 수 없다. 기존 대순사상 연구자들은 여기에서 해원상생 이념만을 강조해왔는데, 다음 장에서 살피겠지만 필자는 보은상생의 이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대순진리회 자연관에서 만물은 근원이 같으며 유기적으로 얽혀있고, 그 만물의 관계는 상생이어야 하며, 인간은 다른 존재들보다 그 위상이 더 높고, 최고신이 설정한 자연의 법칙을 잘 준수해야 한다고 본다. 대순진리회는 인간이 존엄하다는 의미의 인존을 말하지만 그 이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의 상생을 전제로 성립되는 개념인 데다가 미래의 이상세계에 구현되는 개념이므로 지금의 인간이 만물을 착취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로써 대순진리회의 자연관과 인존의 인간관은 서구의 기독교적인 인간중심주의 또는 생물중심주의에 치우치지 않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Ⅳ. 실천 담론으로서의 대순진리회 상생생태론
한국은 서구권의 생태학이 확산되기 시작한 1970년대에 생태운동을 시민운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채택했기 때문에,52) 한국의 생태문제 관심은 서구 학계보다 뒤떨어진 편이 아니었다. 한국의 종교학계도 동아시아 종교전통의 생태론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대체로 이들은 동아시아 종교유산에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거나, 유기적 세계관을 갖는다거나, 자연을 살아있는 존재로 본다거나 하는 다양한 생태론적 가치가 내재해 있으며, 특히 한국의 풍류도, 세시풍속과 민속문화에는 현재의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상체계가 깃들어있다고 주장한다.53)
하지만 이들과 같이 한국의 종교전통에서 친 생태적인 요소를 추출하는 것만으로는 생태학의 당위적 목표를 내세우는 정도에 지나지 못한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생태문제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54) 동아시아 학계의 생태론자들은 원자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ㆍ환원주의ㆍ개체주의ㆍ공리주의 등의 서구 정신문명을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보고, 동아시아의 정신문명을 보다 생태 친화적이라고 강조하지만, 서구의 정신문명이 유입되기 이전의 동아시아에도 생태 파괴나 환경오염이 만만치 않았다는 뼈아픈 지적을 경청해야만 한다.55)
대순진리회 생태론이 의미 있는 생태론이 되기 위해서는 친환경적이고 친생태론적인 교리적 요소만 제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실천 영역에서 재구성하여 실천을 추동하는 담론화(making discourse) 작업까지 해야 한다.56) 이 글은 실천 담론으로서의 대순진리회 생태론을 ‘상생생태론(Sangsaeng Ecological Theory)’으로 부르고자 한다.
대순진리회 세계관에 따르면, 개벽 이전 선천에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개벽 이후 후천에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그 어떠한 갈등도 존재할 수 없다. 현재 빚어지고 있는 생태 문제도 상극이 지배하는 선천의 현실이며, 궁극적으로는 개벽으로 이 문제가 해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벽과 후천이 도래하기 전까지 그저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일정한 종교적인 실천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상생의 실천, 구체적으로는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실천이다.
대순진리회는 최고신 증산이 천지공사로써 상극이 지배하던 선천의 법칙을 바꾸었고, 그 결과 미래의 어느 시점[개벽]부터는 우주가 오직 상생의 길만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져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때가 오기 전까지 만물은 각자 자기의 의지에 따라 해원을 도모한다고 한다. 즉, 지금이 바로 해원시대라는 것이다.57) 일반 신명들과 인간들도 해원을 한다. 신명과 인간은 복수나 분풀이를 통한 부정적인 방법으로 해원할 수도 있고, 덕을 펴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해원할 수도 있다. 그 모두는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긍정적인 해원이 바로 해원상생ㆍ보은상생을 실천하는 것이다.58) 이 글은 이것이 곧 대순진리회의 실천적 생태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축이 된다고 본다.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이 자연과 인간, 신명과 인간 사이의 해원상생 실천에 있음은 선행 연구자들도 모두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증산은 “서양의 …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天理)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 .”라고 말했다.59) 이에 따르면, 대순진리회는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을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잘못된 가치관과 산업화를 주도했던 근대 기술 문명으로 본다. 교만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는 태도는 상극적인 것이다. 상극은 원(冤)을 만든다는 게 대순진리회의 주장이다.60) 따라서 산업화 이후 공존과 어울림의 대상에서 정복의 대상으로 전락한 자연은 인간에게 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입장이다.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식물에 대한 언급은 없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동물은 지각이 있고, 인간과 같이 원을 가지며 해원을 시도하는 존재로 상정된다.61) 실제로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면, 동물은 인간에게 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난 2010년 겨울에 한국에서 발생한 구제역 사건을 예로 들면, 딱 석 달 만에 소, 돼지 등 35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이 살처분되었다! 당시 한국 종교계는 정부의 구제역 방지 대책이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라는 항의 집회를 열었고, 생물학자들도 살처분이 바이러스에 저항하는 내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비판했다.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구제역 대책은 지금도 여전히 살처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조류 인플루엔자 대응책 역시 그러하다. 세계의 많은 실험실에서 수많은 동물이 죽어가고 있는 사실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된다.63) 지구 온난화로 서식 환경을 빼앗겨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어가고 있는 북극곰의 사례도 있다. 더 많은 예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동물이 인간에게 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임은 분명하다.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인간과 신명이 가진 원이 풀리지 못하고 방치될 경우 세상은 혼란스럽게 된다고 설명된다.64) 동물의 원은 인간 혹은 신명의 경우와 같이 세상에 재앙을 미칠 수 있는가?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는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첫째, 증산이 뱀도 인망(人望)을 얻어야 용이 된다는 민간신앙을 인정했다는 점 때문이다.65) 이 민간신앙은 뱀이 오래 묵으면 이무기가 되고 그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를 받았을 경우에는 인간에게 해코지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증산은 동물의 원도 혼란을 일으킨다는 점을 긍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에 원한이 쌓이고 결국 세상이 참혹하게 되었다66)는 증산의 발언도 그 사실을 시사한다. ‘사물(事物)’의 범주에 물질세계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가 포함된다면 당연히 동물도 포함될 것이고, 따라서 세상을 참혹하게 만든 원에는 동물의 원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증산은 동물들의 해원을 인정했다.67) 이 역시 동물의 원이 세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음을 긍정했던 것을 방증한다.
정리하면,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는 동물도 원을 갖는다. 그리고 그 원은 인간에게 해를 가져다줄 수 있다. 쌓여있는 원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 풀어야 한다. 우주가 해원의 길로 가고 있고 그것이 자연법칙이므로, 인간 역시 거기에 순응하고 공명해야 하는 까닭이다. 크게 보면, 가해자는 인간이고 피해자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먼저 나서서 동물이 가진 원을 풀어야 한다.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상생을 목표로 삼고 상생하는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더불어서 더 이상 동물이 원한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식물과 만물에까지 확대한 것이 곧 대순진리회의 해원상생 생태 담론이다.
… 강증산 성사(聖師)께옵서는 … 지상천국을 건설하고 … 신명과 … 세계창생을 널리 건지시려고 … 대공사(大公事)를 행하시니 … 해원을 위주로 하여 천지공사를 보은으로 종결하시니 해원 보은 양원리(兩原理)인 도리로 만고에 쌓였던 모든 원울(冤鬱)이 풀리고 세계가 상극이 없는 도화낙원(道化樂園)으로 이루어지리니 … .68)
위 인용문은 『대순진리회요람』의 한 구절이다. 이에 따르면, 천지공사는 해원을 위주로 하여 보은으로 종결된다고 한다. 『전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천지공사는 해원을 주 내용으로 한다. 예를 들어, 증산은 진시황, 전봉준, 최제우, 최익현, 진묵, 이마두(마테오 리치) 등의 원을 풀어주는 목적의 천지공사를 시행했다.69) 원을 품고 있던 신명들이 누군가에 의해 원을 풀게 되었다면 필시 그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할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증산은 베풀어주는 자가 보답을 기대하면 안 되지만,70) 그 베풂을 받은 자는 몰랐다면 모르되 알았다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강조했다.71)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는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심각한 죄에 해당한다. 증산은 ‘배은망덕(背恩忘德) 만사신(萬死神)’72)이라고 하였고,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은 대순진리회가 가르치는 중요한 윤리 규범 가운데 하나다.73) 따라서 해원 뒤에는 보은이 뒤따르는 것이 순리다. 해원을 위주로 하는 천지공사가 보은으로 종결된다거나, 만고의 모든 원한을 풀고 상극이 없는 지상천국을 만들어 나가는 두 원리가 해원과 보은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74)
천지공사는 원한을 풀고 상생의 길을 펼쳐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이 해원상생이다. 해원에는 반드시 보은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해원상생에도 보은상생이 뒤따른다. 결국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상생의 실천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실천을 의미하는 셈이다.75) 이런 맥락이라면, 대순진리회 생태론에 해원상생을 축으로 세웠으므로, 보은상생도 같이 축으로 세워야 자연스럽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최고신과 천지(자연)로부터 받은 생과 수명과 복록의 은혜에 보은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생(生)과 수명(壽命)과 복록(福祿)은 천지의 은혜이니 성(誠)ㆍ경(敬)ㆍ신(信)으로써 천지 보은의 대의(大義)를 세워 인도(人道)를 다하고 … 76)
생(生)과 수명(壽命)과 복록(福祿)은 천지의 대은(大恩)이니 성(誠)ㆍ경(敬)ㆍ신(信)으로써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 77)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인간에게 은혜를 준 장본인은 최고신이지만, 최고신만 인간에게 은혜를 베푼 존재인 것은 아니다. 최고신의 주재를 받는 천지도 자연도 천지신명도 조상도 모두 인간에게 은혜를 베푼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고신과 천지, 자연, 천지신명, 조상의 은혜에 모두 보답해야 한다. 주지하듯이, 대순진리회는 최고신을 신앙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고신만 받드는 것은 아니다. 천지신명도 조상도 모두 공경의 대상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최고신이 인간의 생명을 주었다고 해서 최고신의 은혜만 감사하게 여기고, 정작 나를 낳아준 조상과 부모(산 조상)의 은혜를 등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보은할 수 있어야 서로 빠짐없이 상생이 된다는 것이 보은상생이다.
이것을 생태론 관점으로 옮겨와 다시 정리해보자. 대체로,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공생해야 하는 이유로 강조되곤 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 가능 여부다. 인간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착취하지 말고 자연과 함께 대등한 관계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은 인간의 생존을 그 논의의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생태론에 약간의 변화를 준다. 그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해왔다는 것,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는 그것을 자연이 인간에게 내린 은혜로 인식한다는 것, 따라서 그 받은 은혜를 반드시 갚으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보은하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이 관점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자연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순진리회의 보은상생 생태 담론이다.
Ⅴ. 닫는 글
이 글은 생태학의 이론 문제에 대한 천착이 여전히 필요하고, 종교 세계관으로부터 친 생태적인 요소를 추출하여 생태학의 내용을 더 보강하며 실천을 추동하는 담론화 작업까지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한국 신종교 가운데 하나인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을 기술해 본 것이다.
요약하자면, 대순진리회의 자연관은 최고신의 주재하에 놓인 만물의 근원이 같으며 만물은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 자연의 법칙을 중요시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개벽을 전후로 하여 자연의 본질이 바뀐다고 하는 관점은 대순진리회만의 특징적인 자연관이었다. 또 대순진리회는 최고신이 자연을 변혁하고 인간은 그 변혁된 자연에 순응ㆍ공명하는 삶을 산다고 보며, 해원상생ㆍ보은상생의 이념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만물과의 관계를 이끌어가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것은 각각 해원상생 생태 담론과 보은상생 생태 담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생태론을 상생생태론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대순진리회의 세부적인 생태 논의들은 이 틀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대순진리회의 생태론은 대순진리회 도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터커와 그림 등의 종교 생태학자들은 생태론을 구성하기 위해서 특정한 하나의 종교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전통들의 세계관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78) 대순진리회의 생태론도 대순진리회 내부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종교의 생태론과 마찬가지로 생태문제 해결을 위해 실천적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본문에서 언급했던 대로 서구의 기독교적인 인간중심주의나 급진적이고 과격한 생물중심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핵심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실천에 있다. 자연과 더불어 하는 해원상생이란 자연이 품은 원을 해소한다는 것과 자연이 더 이상 원을 품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 자연과 더불어 하는 보은상생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둘 모두 자연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추동할 윤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생태 담론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글은 대순진리회 생태론 연구의 기초를 구축한다는 의도 속에서, 대순진리회의 자연관, 그리고 인존과 상생 이념을 통해서 그것이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생태 담론까지는 살폈지만, 각 상황에 따른 세세하고 구체적인 실천 요령이라든가 대순진리회 내부에서 어떤 생태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한국 신종교의 경우 생태학적 담론이 풍부함에도 실제 생태운동 실적은 저조하다는 비판도 있고,79) 생태 종교학자들은 환경친화적인 사상을 가진 종교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환경적으로 의미 있는 실천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천의 문제는 이론과 또 다르다는 것이다.80)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전개해 온 대순진리회의 생태운동을 정리하고, 생태위기에 대응하는 세밀한 행동 요령을 제사하는 것은 이 글 앞에 놓여 있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