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낙인이 만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곤혹스러운 사회에 살고 있다. 현실에서 낯선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 그리고 폭력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며, 이러한 현상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손희정의 표현을 빌리면, “‘기승전혐오’로 묘사해도 무방”할 정도다.1) 나도 모르게 타자를 모욕하고 그러한 가운데 타자는 모멸감을 느끼고 있다.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서로에게 잔혹한 행위를 저질러왔다. 행위 그 자체만 보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행위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타자에 대한 잔혹한 행위는 특별하다.2)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언어폭력은 한국사회의 잔혹함과 더불어 이 사회의 불안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노동조건의 불안정성과 비정규직이 증대하고 있는 현실에서 많은 수의 이방인의 편입은 불안감, 즉 나의 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표출된다. “힘겹게 쟁취한 정치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하다고 보는 김누리의 주장이 와 닿는 까닭이다.3)
이 연구는 인간 존재가 지닌 타자성에 주목하여 사회적 약자, 소수자, 이방인 문제를 대하는 것의 이념적 토대를 다룬다. 구체적으로 이 연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불평등과 불안정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신조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타자를 대하는 인간의 근원적 인식과 태도를 분석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프레카리아트는 영어로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를 조합한 용어이다.4) 이 연구에서 주목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 개념에 따르면 현재 한국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필요에 의해 고용했다가 언제든 소모품처럼 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한국사회의 프레카리아트는 누구이며, 이들을 한국사회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불안정한 고용과 노동 상황에 놓인 파견ㆍ용역 등 비정규직, 실업자, 노숙자 등이 대표적인 프레카리아트이며, 이들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불안정한 노동자 계급에 머물러있다. 또한 영세 자영업자, 청년 및 장기 실업자, 니트족 등 구직 단념자 또한 프레카리아트에 속한다. 이들은 현재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고 적정한 임금을 받지 못하며, 당장의 생활도 어려워 자기계발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렇듯 프레카리아트의 범위는 매우 넓으며, 새로운 집단들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프레카리아트는 탈북민이다. 이들은 북녘을 떠나 중국과 제3국을 거치며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지닌 채 남한사회에 들어왔지만 열악한 일자리, 낮은 수준의 복지혜택 등의 사회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 그리고 무관심을 고려하면 탈북민의 실존은 프레카리아트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프레카리아트의 심리는 “분노, 부적응, 불안, 소외”에 의해 결정되기 쉽다는 얀 브레먼(Jan Breman) 설명이 탈북민의 처지를 정확하게 대변한다.5)
여기서 질문은 우리는 탈북민들이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 남한사회와 상생할 수 있는 지혜를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한 답을 이 연구는 타자 철학의 논의로서 환대 개념과 대순사상의 실천윤리의 대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해원상생 개념에서 찾는다. 이 연구는 나의 기준에서 탈북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목소리와 호소에 기울이는 것에 주목하는 환대 개념과 타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자아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보는 해원상생 개념이 오늘날 탈북민과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실천적 사유라고 본다. 특히, 필자는 해원상생 개념은 남한사회가 프레카리아트인 탈북민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데에서 벗어나 이들과의 상생할 수 있는 시공간적 상상력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Ⅱ. ‘프레카리아트’는 누구인가?
아마미야 가린(Amamiya Karin)은 프레카리아트를 “불안정함을 강요받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자본주의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용도 폐기되는 일회용 노동력으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말이다.6) 그러면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는 누구이며, 이들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프레카리아트는 계급 및 신분과 연관지어서 정의할 수 있고, 이 용어가 대중의 대화에서 회자되는 의미의 측면에서도 정의할 수 있다.7)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프레카리아트는 산업화가 낳은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프레카리아트에게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있는 사회적 계약관계, 즉 복종과 한시적 충성을 대가로 노동 보장이 제공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지도 못한 채 불안정한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대부분 ‘도시 유목민’처럼 살아간다.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표현을 빌리면, 프레카리아트는 “끝까지 가지 못하고 잘린 신분”을 뜻한다.8) 또한 이들은 불안정한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에 기반을 둔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둘째,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임시 노동을 하는 소득이 낮은 사람을 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불확실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즉,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삶이 정상적인 삶의 상태가 된 사람을 지칭한다. 이런 측면에서 독일에서는 프레카리아트가 사회적 통합에 대한 희망이 없는 무직자로 묘사되곤 한다. 특히, 이들은 소득의 불안정으로 인해 삶의 방식마저 극도의 불안정성을 보인다는 특징을 보인다.9)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프레카리아트가 성장하고 있는 원인과 그러한 현상이 드러내는 사회적 함의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는 “불안정한 삶의 구조화”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광일은 프레카리아트 성장의 핵심은 고용문제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노동자계급에게 불안정성을 주는 ‘실업’의 문제가 일상적인 것이 됐으며, 여기에 중산층이 향유했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구조와 삶이 더는 지속될 수 없게 된 것이 프레카리아트가 성장하는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광일의 표현을 빌리면, 프레카리아트의 성장은 “‘비계급의 존재’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 되어감을 의미”한다.10)
그렇다면 프레카리아트의 증가 요인인 불안정한 삶을 발생시키는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에 따른 노동의 분절 및 단순화와 그와 맞물려 진행되는 일자리의 급격한 감소가 중요한 요인이다. 둘째, 신자유주의 지구화로 전면화 된 자본의 지배 또한 주요 요인으로 거론된다. 셋째, 계급투쟁에서의 진보좌파의 패배와 지속되는 정치력의 빈곤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인의 측면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이면의 새로운 삶의 대안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 프레카리아트를 양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을 통한 이윤의 실현 이외에 사회를 조직하는 또 다른 준칙들과 그에 근거한 어떤 사회상도 인정하지 않으며, 이런 현실에서 프레카리아트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양산되게 마련이다.11)
나아가 프레카리아트 등장이 의미하는 바는 이들이 겪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는 네 가지 A를 경험한다고 하는 데, 분노(anger), 아노미(anomie), 걱정(anxiety), 소외(alienation)가 바로 그것이다. 분노는 의미 있는 삶을 진척시키기 위한 길이 가로막혀 있다는 좌절과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되며, 아노미는 볼품없고 경력에 보탬이 안 되는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전망으로 인해서 강화된다. 이러한 분노와 아노미의 반복은 만성적 불안으로 이어지며, 그로 인해 프레카리아트는 걱정을 끼고 산다. 그리고 소외는 이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의 훈령에 의해 이루어질 뿐임을 알게 되면서 생겨난다.12)
이렇게 불안정함으로 특징 지워지는 프레카리아트가 대량 양산되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질문은 누가 프레카리아트에 새롭게 진입하고 있는가이다. 답은 간단하다. 누구든 사실상 프레카리아트가 될 수 있다.13) 자본의 지배가 전면화 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든 헐값에 고용됐다가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버림받게 된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장년층보다는 청년층과 노년층이, 다수보다는 소수자가, 정주민보다는 이주민이 프레카리아트가 되기 쉽다. 특히,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탈북민과 같은 이주민은 전체 프레카리아트에서 차지하는 몫이 매우 크다.14)
물론 이주민을 바라보는 한 사회의 시선에 따라 이주민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는 경향성은 각이하다. 예를 들어, 백인과 흑인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인식을 고려하면 백인보다는 흑인이 프레카리아트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같은 흑인가운데에도 출신국과 학력 등에 따라 프레카리아트가 될 잠재적 가능성은 각기 다르다. 즉, 이주민이 프레카리아트로 새롭게 진입되는 데에는 한 사회의 집합적 인식구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되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주목하고 있는 분단체제가 생산해낸 낯선 경계인인 탈북민을 바라보는 남한사회의 인식이 곱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들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Ⅲ. 탈북민의 위치와 타자성
브루킹스연구소 초대 한국석좌(Korea Chair) 캐서린 문은 탈북민들이 남한사회에서 주변인으로 남아 있는 한 어떻게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의 민주주의가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한바 있다. 이 말은 남한사회에서 통일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탈북민15)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한 데, 대부분 차별받고 주류사회에서 격리된 채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인 것이다.16)
2016년 11월을 기점으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들의 수가 3만 명을 넘고17) 정부 관리나 국회의원도 나왔지만, 남한 사회에 정착하고 있는 탈북민들 중 상당수는 차별과 배제를 경험해오고 있다. 남북하나재단의 『2018 북한이탈주민 정착실태조사』에 따르면, 탈북민들의 남한생활 만족도는 72.5%로 나타났으며, 이들의 고용률은 60.4%, 실업률은 6.9%로 조사됐다. 특히, 상용직 근로자 비율이 2017년 57.3%에서 2018년 63.5%로 늘어나 고용안정성이 증대됐으며, 임금근로자의 월평균임금도 2017년 178.7만원에서 2018년 189.9만원으로 늘어나는 등 남한사회에서의 경제활동 상태가 개선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8)
그러나 탈북민들이 남한사회에서 직면하는 어려움과 사회적응의 문제는 경제적 지표의 개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사실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조항에 따라 탈북민은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채 남한사회로 들어오면서 자동적으로 시민권이 부여되며, 정부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토대로 이들의 자립ㆍ자활 의지 및 역량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19) 그러나 탈북민에 대한 지원에는 분단의 맥락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특히, 이들을 지칭하는 공식 명칭인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용어에서부터 분단체제의 상대방인 ‘북한’을 이탈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20) 홍용표와 모춘흥의 표현을 빌리면, 탈북민은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지원과 ‘특별한’ 차별을 동시에 받고 있는 것이다.21) 이러한 탈북민에 대한 남한사회의 이중적인 태도에는 탈북민의 사회적 위치가 반영되어 있다. ‘북한을 이탈’한 이들의 선택이 곧 반(反)북한, 친(親)남한이라는 정치적 입장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강하다.22) 이렇듯 정치적 경계를 넘어온 탈북민에 대한 남한사회의 인식과 태도에는 ‘분단’의 맥락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탈북민을 대하는 남한사회의 태도가 과거 냉전이나 반공규율에 기초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역할을 점차 자본주의적 태도와 가치가 대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사회는 탈북민이 자본주의적 삶, 임금노동자로 특정 기간 이상 노동할 수 있다면 정착이 진척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탈북민을 대하는 남한사회의 자본주의적 태도에는 이들이 경제적으로 홀로서기에 힘든, 즉 여전히 국가의 지원이 필요한 사회적 취약 계층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즉, 탈북민들은 특별한 대우를 해줘야만 자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이 남한사회의 인식에서 ‘지배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23) 이상에서 보면, 모멸을 주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며, 지원제도가 탈북민에게 모멸을 줄 때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24)
또한 남한사회에서 탈북민이 겪는 어려움과 상처는 남한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국가차원에서는 탈북민의 정착과 통합을 위한 제도적 지원을 하고 있지만, 남한주민들은 이들을 온전히 환대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탈북민은 ‘남’과 ‘북’ 어느 일방의 체제적 논리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중층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남한주민들은 ‘북한’체제에서 이탈했다는 측면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탈북민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존재성보다는 남한주민들과는 구분되는 ‘다름’ 혹은 ‘차이’만 부각된다.25) 남한사회가 전제하는 것과는 달리, 탈북민들도 개별적 욕구에 기반 한 삶의 향유를 추구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이 남한주민들에게는 낯설게,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26)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현실과 결코 무관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사회에서 탈북민이 겪는 굴욕과 모멸의 감정은 분단이라는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탈북민을 대하는 지배적인 남한사회의 태도와 감정은 반공주의 트라우마에 의한 심리적 편견에서 시작됐으며, 이러한 양상은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남한주민들의 마음에 깊게 뿌리내렸다.27) 이런 점에서 나(우리) 혹은 남한사회의 탈북민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일정한 분단이라는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러한 감정의 덩어리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이들에 대한 환대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28)
본 절에서는 남한사회에서 탈북민의 타자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운데, 이들이 겪는 모멸감에 대한 사례를 살펴본다. 특히, 이 연구에서 주목하고 있는 사례는 탈북민과 남한사람이 함께 일하고 있는 ‘일터’이며, 일터에서 이들 간의 접촉의 양태는 어떠한지, 남한사람은 탈북민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특히 일터에서 이들 간의 접촉의 양태가 일과시간 이후에는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살펴본다.
본 절에 수록된 탈북민 인터뷰 대상자의 연령대와 성별은 모두 40대 중반의 남성으로 2000년대 중반 남한사회에 입국했다. 연구 참여자의 경험에 주목하는 질적 연구인 인터뷰에서 참여자의 인적 정보는 이들이 겪은 사회적 경험에 대한 맥락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지만, 신상공개로 인해 이들이 겪을 수 있는 난처한 상황들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인구사회학적 배경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연구 참여자들이 공통적으로 남한사회에 입국한 이후 여러 차례 직장을 옮겼다는 점과 과거 직장에 적응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필자는 연구 참여자 인터뷰 내용을 구체적, 개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들을 위험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들의 경험과 견해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인터뷰 내용을 기술할 것이다.
또한 본 절에서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탈북민과 남한사람 간의 사회적 관계의 특징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함의를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기 위해 세 명의 탈북민 정착 지원가들의 의견을 함께 실었다. 특히, 이 세 명의 관계자는 필자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어서 탈북민들이 남한사회에서 겪는 어려운 실상과 그 원인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견해를 들려주었다. 이 세 명의 관계자의 의견은 ‘일터’에서 탈북민과 남한사람의 상호작용의 양태가 ‘일과 시간’과 ‘일과 이후의 시간’에 어떻게 변화하는가와 왜 그러한지에 대한 맥락을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이상의 연구 방법과 함께 진행된 인터뷰 내용들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탈북민과 남한사람간의 상호작용의 양태에서 두 가지 주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남한사회의 탈북민에 대한 이중적 시선이 드러난다. 특히, 일터라는 공간의 성격에 주목해보면 ‘일과 시간’과 ‘일과 이후의 시간’에 탈북민과 남한사람 간에는 일상적인 교류와 단절의 이중적인 접촉의 양태가 나타난다. 둘째, 탈북민의 특권적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추적해보면 탈북민을 대하는 남한사회의 이중적인 태도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원하는 탈북민들의 인식의 근원이 무엇이며, 어떠한 요인들이 이러한 태도와 인식을 (재)생산하는가를 분석할 수 있다.
최근 발간된 탈북민 사회통합조사에 따르면 분명히 남한사람이 탈북민을 대하는 태도가 개선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전히 수많은 탈북민들은 본인들이 일터와 지역사회에서 ‘탈북민’이란 이유만으로 무시당한 경험이 많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국책기관 프로젝트를 계기로 만난 세 명의 탈북민의 남한사회 정착을 도와주는 관계자에 이들에 대한 차별이 정말 줄어든 것인가에 대해 물어봤다. 탈북민의 초기정착을 지원하는 지역적응센터(이하 하나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관계자(C)는 “분명히 ‘일터’에서 이들에 대한 차별이 줄어든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라는 답변을 해주었다. 또한 그 옆에 있는 관계자(B) 역시 비슷한 답변을 해주었는데, “정부에서 탈북민에 대한 차별이나 무시를 하지 말라는 권고가 계속적으로 내려오니까, 이들에 대한 차별이 확연하게 준 것 같다.”라고 말을 하였다.
2016년 7월 초, 필자는 평소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는 두 명의 탈북민을 만나 “차별 혹은 무시당하는 빈도가 감소했는가”를 물어보았다. 40대 중반 탈북민(A)는 “예전같이 직장에서 대놓고 무시하는 말이나, 북한에서 와서 그렇다 저렇다.”라고 하는 빈도는 확실히 줄었다고 말을 하였다. 40대 중반 탈북민(B) 또한 “요즘은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면 거꾸로 본인들이 더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서 잘 안 그래요.”라고 말을 했다.
제가 처음에 와서 일할 때는 진짜 무시 많이 했습니다. 북한에선 이것도 안 배우고 뭐 하냐. 요즘 사람 구하기 힘들어서 쓰지, 안 그러면 내가 너희를 왜 쓰겠냐. 이렇게 우리를 대했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좋죠(탈북민 A).
한편 필자는 2016년에 우연찮게 알게 된 연구자가 탈북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와 같은 젊은 나이대의 북한 출신 연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여 언론 지면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았다.
탈북민들은 입국과 동시에 실업과 빈곤의 힘겨운 환경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 국내에 정착해 있는 탈북민들의 상황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자유와 조국을 찾아왔지만 벌써 수천 명이 ‘탈남’했으며, 이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자살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29)
탈북민 출신 교수의 기사내용이 머리를 맴돌고 있는 시기인 2017년 1월 초 필자는 앞서 국책기관 프로젝트를 계기로 만난 세 명의 탈북민의 남한사회 정착을 도와주는 관계자와 1박 2일로 워크샵을 가게 되었다. 이때 필자는 이들에게 북한출신인 그 연구자를 혹시 아는지 물어보았다.
물론 그 사람을 포함해서 대다수 탈북민이 언론에 하는 이야기가 100% 거짓은 아닐꺼에요. 그러나 탈북민이 하는 모든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안 돼요. 제가 그들의 정착을 도와주면서 보면, 분명히 과거보다 ‘일터’에서 그들에 대한 처우가 좋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거든요. 다만 비단 그 사람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탈북민 중 상당수는 본인들이 어렵게 지낸다는 것을 과장되게 언론에 말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어요.
탈북민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이 어렵게 지낸다는 것을 과장한다는 관계자의 언급은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탈북민에 대한 보호 및 정착지원 제도가 이들의 ‘자립ㆍ자활능력 배양’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경제적으로 홀로서기를 목표하고 있다는 점을 이들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탈북민에 대한 남한사회의 정착지원이 다른 이주민들과 비교하여 많은 이유가 ‘분단’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하며, 특히 이들에 대한 남한사회의 보호 및 정착지원 제도는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다음의 관계자들의 언급에서 보다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이들의 우리 사회 정착을 최일선에서 도와주는 사람이지만, 가끔 나도 이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려해주는 것 같은데 항상 자신들이 무시당한다고 얘기를 해요, 이때 저는 그들 앞에서 뭐라고 말을 해주기가 정말 힘들어요(관계자 A).
나도 가끔은 이들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젠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이들과 언쟁을 한 적도 있다(관계자 B).
그러나 자신들이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받고 있고, 나아가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북민들은 남한사회에서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으며, 특히 ‘일터’에서 남한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일터라는 공간에서는 같은 남한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친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더 학벌과 배경이 좋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잖아요. 근데 탈북민은 자신들이 북한 출신이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라는 관계자(C)의 말은 이들이 탈북민이기 때문에 무시 혹은 배척당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 스스로는 자신들이 북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에 배제당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필자는 본인이 탈북민을 처음 겪게 된 경험을 세 명의 관계자에게 얘기해주었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친지분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던 50대중반 탈북여성을 접했다. 처음에 그 탈북여성은 자신이 조선족이라고 했었지만, 필자의 친지분의 식당에서 일을 시작한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본인이 탈북민이라는 것을 밝혔다. 필자는 지금도 그 탈북여성이 “탈북민이라고 밝히면 사장님부터 나를 ‘안 좋게’ 볼 거 같아서 그랬다. 내가 조선족이니까 일이 끝나고 함께 술이라도 한잔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라고 했던 이야기가 머리를 맴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이렇듯 일터에서 탈북민을 대하는 남한사람들의 태도는 과거보다 우호적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점은 탈북민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탈북민을 위한 보호 및 정착지원이 이들의 경제적 자립과 자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은 남한사람들과 탈북민의 관계가 교환 관계로 구축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동인이다.30) 이러한 상호관계의 동학에서는 탈북민이 더욱 자신들의 정체성에 기초해서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요구하는 것이 용이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부분은 일터라는 공간적 특성에서 기초해보면, ‘일과 시간’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탈북민에 대한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는 ‘일과 이후의 시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남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탈북민들은 여전히 ‘특별한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요구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지표상으로만 보면 남한사회에서 탈북민의 처지는 조금씩 개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탈북민은 ‘외롭다’, ‘무시당하고 있다’, ‘함께 하고 싶다’ 등의 말을 자주한다. 조사결과로는 설명되지 않는 탈북민의 고독과 외로움은 어떠한 사회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김성경은 남한사회가 “탈북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없이 이들을 사회통합의 대상으로 단순화하여 수많은 정책과 해결책 등을 쏟아 내온 것” 때문이라고 평가했다.31)
탈북민에게 제한된 자리만 허용한 남한사회의 구조 내에서 이들은 어떠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에는 큰 어려움 없이 지내요. 근데 일이 끝나면 그들과 내 관계는 끝나요 … 나도 그들과 회식이 아니더라도 소주 한잔하고 싶은데, 자기들끼리 일 끝나면 가고 나는 혼자 남겨지고 그냥 집에 가요(탈북민 A).
일 끝나고 혼자 남겨지면 괜히 내려왔나, 그런 생각도 하게 되요(탈북민 B).
위의 탈북민의 언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은 일터에서 ‘일과 이후의 시간’에는 혼자 남겨지며, 그로 인해 많은 외로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한잔하자고 얘기하면 되지 않아요. 굳이 먼저 기다릴 필요 없잖아요.”라는 필자의 말에 40대 중반 탈북민(B)는 “처음에는 그렇게도 해봤죠. 근데 그렇게 술자리를 함께해도 어색하게 술만 먹게 돼서 이제는 그냥 일 끝나면 먼저 나오게 돼요.”라고 대답을 했다.
이렇듯 일터에서 ‘일과 시간’에 적용되던 탈북민에 대한 남한사람들의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편한 사람들하고 술 먹는 게 좋잖아요. 특히 직장에서 하루종일 일 끝나면 편한 사람끼리는 더더욱 그렇죠(관계자 C).
탈북민과 함께 일하는 사람한테 일과 시간 이후에도 차별이나 배제하면 안 된다고는 못하잖아요. … 이런 문제는 어떠한 정책이 나온다 할지라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관계자 A).
정부에서 탈북민에 대해 차별이나 무시하지 말라는 권고나 지침이 계속적으로 내려오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일과 시간’에는 많이 조심해요. 그렇다고 그들한테 일 끝나고도 탈북민들과 술도 한잔하고 같이 여가를 즐기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하면 더 역효과가 나타나요. 저도 그런 적을 많이 목격 했구요(관계자 C).
법제도적인 차원에서는 탈북민에 대한 남한사회의 연대와 공존의 제스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이들에 대한 무시와 배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는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 혹은 “타자성을 스스로 제거한 타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남한사회의 일반화된 타자는 그들을 “타자성이 존재하는 타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다.32)
“그들은 여가를 보내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생활이 빠듯해서 쉽게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 뭐 하나를 해도 다 돈이 잖아요.”라는 관계자(B)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실제 탈북민의 여가활동 지출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지출이 ‘없음’이라는 응답이 36.4%로 가장 높고, 다음으로 ‘1만원 이상~10만원 이하’ 29.3%, ‘10만원 초과~50만원 이하’ 24.1%, ‘50만원 초과’ 3.3%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나이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여가활동 지출 비용이 거의 없었다.33)
그러나 여가활동 지출 비용에 대한 조사는 조사일 뿐이었다. “내가 돈을 내도 상관없어요. 내가 거지도 아니고 매번 얻어먹을 수는 없잖아요. 근데 같이 한잔 하면 그들은 으레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요. 그냥 내가 낼께요.”라는 40대 중반 탈북민(B)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이 말은 여전히 탈북민에 대한 남한사회의 무시와 배척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한사람들이 탈북민을 배려한다고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탈북민들은 모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탈북민들이 남한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할 경우에 동료 탈북민들과 함께 ‘일과 이후의 시간’을 보내면 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터라는 공간에서 ‘일과 이후의 시간’에 이들이 자신들의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받고, 나아가 요구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제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우리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달갑지 않은데, 탈북민끼리 만나서 이러쿵 저러쿵 한다고 하면, 더 싫어할 거 같아서 요즘은 자주 안 만나요. 그리고 여기서 죽기 살기로 살면서 우리끼리 많이 이용한 경우가 많아서 만나자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피해요(탈북민 A).
이렇듯 일터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성격에 주목해보면, ‘일과 시간’에는 탈북민과 남한사람 간의 별문제 없는 일상적인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탈북민들은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받고 있으며, 나아가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일과 이후의 시간’에는 일터는 이들 간의 일상적인 단절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일과 이후의 시간’에 벌어지는 일상적인 단절로 인해 탈북민은 ‘일과 시간’에도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분단, 보다 구체적으로 남한사회 내의 분단 트라우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물리적인 차원에서 분단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고 북이 분리되어 있는 현상을 의미하지만, 정서적 차원에서 분단의 현실이 만들어낸 심리적 경계가 존재한다. 이때 남한사회에 부과된 분단 트라우마의 화살이 탈북민들에게 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남한사회에서 탈북민의 존재는 포용하고 환대하며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시에 분노와 적대 감정을 불러오는 대상이기도 하다.34)
이상에서 일터라는 공간적인 특징으로 인해 탈북민과 남한사람들 간에는 일상적인 교류와 단절이 계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과 시간’에는 일상적인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더라도, ‘일과 이후의 시간’에는 너무나 태연하게 일상적인 단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교류와 단절이 반복되자, 탈북민들은 북한출신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터라는 공간에서는 서로 다른 권력관계가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일과 이후의 시간’에도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를 요구하는 탈북민과 이들에 대한 ‘특권적 대우’ 혹은 ‘특별한 환대’는 ‘일과 시간’에 한정되기를 희망하는 남한사람들의 태도와 인식이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집합적 인식이 이주민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남한사회에서 탈북민의 삶은 프레카리아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한사회가 프레카리아트인 탈북민과 상생하는 데 필요한 가치이자, 윤리적 토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Ⅳ. 탈북민들과의 상생과 환대의 실천
자아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무관한 것이 아닌, 소속된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사회적 배경을 통해 구성된 자아이다. 이에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공동체적 삶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이며, 그로 인해 자아의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 즉, 자아에게 있어서 타자는 자아의 존재의 확증성을 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존재이다.35) 이 논리를 남한사회(주민들)와 탈북민의 관계에 적용해보면, 남한사회에서 탈북민이란 존재는 단지 소수자, 이방인, 타자로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사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남한사회가 처한 분단체제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탈북민의 존재는 이 사회의 척박한 인정의 토대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남한사회는 탈북민에 대한 인정의 토대와 타자화 양상을 점검해봄으로써 현재 이 사회가 탈북민을 포함한 소수자의 고통을 대하는 인정의 토대를 얼마나 갖추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36)
이런 맥락에서 탈북민은 남한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란 점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물론 남한사회는 이러한 탈북민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남한사회는 탈북민의 존재를 포용하는 것이 아닌, 대상화해오고 있다.37) 그렇다면 우리는 남한사회의 프레카리아트인 탈북민과의 상생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지혜를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필자는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은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 혹은 우리사회 안에 있는 타자의 자리를 인정하는 환대라는 개념과 대순사상의 양심 개념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환대는 나(우리)의 기준에서 탈북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목소리와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다소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들을 기꺼이 맞이하려는 태도이다.38) 특히, 환대는 주체/객체, 주인/손님간의 관계에서 물리적 분리성을 해체적으로 사고하고 특정한 사회적 표식을 뛰어넘어 개인과 개인 간의 대면에 기초한 관계 맺음을 지향한다.39) 또한 환대는 나(우리)의 기준에서 타자를 호명하고 그들의 위치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태도이다.40) 즉, 환대는 타자가 지닌 이방인성과 혹은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개방된 태도인 동시에 그들을 타자화하는 관행에서 나(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점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는 곧 나(우리)를 위한 ‘자기 환대’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41)
아울러 타자는 불편한, 혹은 나의 자리를 잠재적으로 빼앗을 수 있는 존재이면서,42) 동시에 나(우리)에게 이로운 존재이다. 데리다의 환대 개념에 이러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데, 그는 타자의 존재와 타자의 질문이 없다면 주체의 참된 열림도 없으며 상생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주체에게 있어서도 타자의 타자성과 이질성이 존재해야만 자신의 열림과 타자와 환대의 관계맺음이 가능한 것이다.43) 이러한 환대의 속성은 해원상생의 문제의식과도 궤를 같이한다.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위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해원상생의 이념은 남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이 그 자체로 나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4)
이상에서 환대는 탈북민에 대한 남한사회의 태도를 논하면서 “나(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성찰적 과제를 제기한다. 나 혹은 우리의 기준에서 탈북민에게 다가가려는 마음과 실천은 그들과의 관계성의 맥락 속에서 나(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경제적 기반 없이 남한사회에 들어온 탈북민을 일방적으로 환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회적 현실 속에서 환대는 특정 정치 공동체에서 실현되는 과정에서 조건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탈북민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그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45)
이런 측면에서 남한사회에서 프레카리아트의 삶을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겪는 고통에 공감하고 적절하게 개입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환대하는 것이 그 자체로 나를 환대하는 것이라 보는 해원상생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남한사회와 탈북민들과의 관계설정이 자본주의적 가치와 노동의 측면을 중심으로 탈북민들을 인식하는 데에서 벗어나, 탈북민 그 자체를 무한자이자 총체적 인격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기초하여 탈북민을 대하는 것이 아닌, 이들의 존재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타자성과 개별적 존재성에 기초한 관계맺음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46)
인간의 공적 삶이란 물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이치로써 타자와의 관계맺음에서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것이 삶이라고 보는 해원상생의 관점에 주목하면, 탈북민에 대한 환대는 나(우리)를 향한 환대이다.47) 즉, 나의 것을 나누어줘야 한다는 것의 불안함에서 벗어나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마음을 갖고 실천을 하는 것이며, 이때 해원상생의 개념에서 ‘해원’은 나(우리)와 탈북민들 사이의 경계를 낮추는 과정을 촉진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주체가 왜 타자를 환대해야하는 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주목하면, 인간주체의 근원을 향한 회귀적 특성이라는 해원상생의 개념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순사상이 그리는 인간관이 왜 해원상생개념에 주목하고 있는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인간주체가 왜 타자를 환대해야하는 가에 대한 문제에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다. 타자에 대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타자를 향한 환대의 실천은 인간본연의 양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Ⅴ. 나오며
이 연구는 남한사회에서 프레카리아트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겪는 고통을 환대와 해원상생이라는 철학적, 실천적 개념을 가지고 분석한 시도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양산한 불안정함을 강요받는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고 있는 이유와 이 새로운 계급의 정의를 이론적으로 살펴본 후, 대표적인 프레카리아트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탈북민의 남한사회에서의 위치와 타자성을 고찰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이 글은 남한사회에서 탈북민들의 삶이 분단체제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냉혹한 현실임을 지적하고, 이 문제에 깊이 천착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우/열, 상/하의 배타적 위계성을 전제하는 관용과 인정의 관점이 아닌, 환대와 해원상생의 개념을 토대로 탈북민의 타자성과 개별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론적 차원에서 환대와 해원상생의 이론적ㆍ현실적 유용성을 제고하고, 나아가 프레카리아트로 명명되는 타자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연구방법의 다각화를 통해 타자의 문제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이를 통해 관련 연구범위의 확장과 후속 연구주제를 생산하여 타자를 대하는 철학적, 실천적 연구의 지식축적에 기여하고자 했다. 또한 이 글은 남한사회에서 탈북민의 삶과 정체성의 문제를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을 가지고 분석한 첫 시도란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아울러 이 글은 대순사상의 실천윤리의 강령인 해원상생개념의 현대적 함의를 탐색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는 나눔으로써 타자와의 경계를 낮추는 ‘해원’과 그로 인해 타자와의 일상적 어울림, 즉 ‘상생’은 오늘날 타자를 대하는 새로운 윤리적, 실천적 가치인 환대와 문제의식의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순사상이 가진 종교적 함의가 부각된 것과는 달리, 대순사상의 철학적, 실존적 의의는 크게 주목 받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반면에 이 연구는 대순사상의 실천윤리의 강령인 해원상생은 인간주체가 왜 타자를 환대해야하는 가에 대한 종교적 차원을 넘어 실존적 차원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현실적 함의를 갖는다고 보았다. 인간주체가 왜 타자를 환대해야하는 가에 대한 물음에 주목하면, 대순사상이 종교적 차원의 특수한 맥락을 고려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보편적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글이 갖는 학문적 의의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한사회에서 프레카리아트적 삶을 살고 있는 탈북민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가치이자 윤리를 고민해보면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연구자는 새로운 정체를 찾아 북녘을 떠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지닌 채 남한사회에 들어온 탈북민들은 이 사회에서 각기 다른 취향과 욕구를 표현하는 독특한 개인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이에 탈북민의 실존에 대한 이해는 남한적 자아의 관점에서 섣불리 규정하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타자이자 독립적 개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한사회(주민)가 탈북민을 매일의 삶 속에서 주체적 욕구를 지닌 또 하나의 개인으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의 사회통합에 앞서 필요한 가치이자, 윤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