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전경』은 1974년 박우당(朴牛堂, 1917~1996) 도전(都典)의 명에 의해 발간되었으며, 총 7편, 1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7편의 순서는 「행록」,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순(順)이다. 「행록」편(編)은 수편(首編)으로 총 5개 장(章)이며, 구천상제(九天上帝1), 姜甑山, 1871-1909)의 강세(降世)와 화천(化天)까지를 기록한 부분으로 연도별로 되어있다. 「행록」 5개장은 총 223절, 96면이며 구체적으로 보면 5개 장(章)은 1장이 1871~1896년의 25년간, 2장은 1897~1903년의 7년간, 3장은 1904~1907년까지의 4년간, 4장은 1908년 1년간, 5장은 1909년 1월부터 6월 24일까지이다. 장(章)별 구절 수는 1장이 38절(pp.1-16, 16면), 2장이 24절(pp.17-26, 10면), 3장이 6절(pp27-55, 29면), 4장이 57절(pp.56-80, 25면), 5장이 38절(pp.81-96, 16면)이다. 각 장의 절의 수와 면의 수는 2장, 1장과 5장, 4장, 3장 순으로 많다.
「행록」은 상제의 강세와 화천까지의 39년간의 생애를 연도순으로 기록하며 그 내용은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公事)」, 「교운(敎運)」, 「교법(敎法)」, 「권지(權智)」, 「제생(濟生)」, 「예시(豫示)」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종합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전경』의 내용은 7개 편의 편명을 통해 대표된다. 즉 진멸에 처한 삼계를 구하기 위해 상제께서 행한 ‘공사’를 중심으로 상제의 권능과 지혜에 관한 ‘권지’, 치병을 행한 ‘제생’, 상제의 가르침의 법인 ‘교법’, 상제의 가르침의 운세인 ‘교운’, 미래의 일을 보여준 ‘예시’로 되어있으며, 이를 종합적으로 『전경』의 편을 통해 상제의 전 생애를 담고 있는 「행록」편이다.
한편 이상호는 1926년에 상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물인 『증산천사공사기』를 발간한 후 1965년 『대순전경』 6판을 발간하기까지 37년간 상제에 대한 기록을 증보하였으며, 1974년에 『전경』이 발간되기 9년 전까지 상제에 관한 풍부한 전승물을 남겼다.
상제의 생애에 대한 기록문헌의 연구사를 보면 「증산교의 교리체계화 과정」2), 「대순전경의 사적 의의」3)라는 연구를 이어, 상제 관련 최초의 기(記)형태의 문헌인 『증산천사공사기』에 대해 연구한 「증산교의 성립과 증산천사공사기」4) 그리고 상제 관련 기록 문헌의 역사를 살피고 해원(解冤) 주제에 주목한 「해원 주제 강증산 전승연구」5)라는 논의가 진행된 바 있다.6) 여기에 『전경』 (1974)의 「교법」편7)과 「공사」편8)에 주목해서 그 내용을 살피고 『대순전경』 (1929-1965)과의 구절 내용의 변이와 차이점을 논의한 연구도 이루어진 바 있다.
이와 같은 연구사를 토대로 이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 하에 기술되었다. 첫째 상제의 전 생애가 223절로 구성되어9) 기록된 「행록」 구절의 내용이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둘째로 관점이 다를 수 있으나 「행록」 구절이 『전경』의 다른 6개 편과 그 내용상의 상관성이 어떠한가를 찾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행록」 구절의 변이를 『대순전경』과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논의해 보았다. 이를 위해 이 글은 「행록」편 구절에 대해 2장에서는 「행록」 구절의 요점적 정리와 『전경』의 다른 편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고, 3장에서는 「행록」 구절의 변이와 관련해서 『대순전경』과의 차이점을 찾아보기로 한다.
이는 두 문헌의 기록을 비교 분석해서 차이나는 『전경』 기록의 내용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 상제에 관한 『전경』의 기록상 차이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며 대순사상 연구의 문헌자료적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전경』이 구천상제의 모든 행적을 담고 있지만 전(全) 생애가 기록된 「행록」이라는 편에서 상제의 생애가 어떻게 요약적으로 기록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며, 「행록」의 구절들이 『전경』의 여타 편들의 내용을 어떤 양상으로 담고 있는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 구절들에 대해 상제 관련 기록의 사적(史的)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변이의 구체적 면모를 확인하여 풍부한 연구의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Ⅱ. 「행록」편 내용요약 및 『전경』 다른 편과의 내용상 관련성
「행록」의 구절 수는 1장이 38절, 2장이 24절, 3장이 66절, 4장이 57절, 5장이 38절이며, 「행록」 1장부터 5장까지의 총 구절 수는 223절이다. 「행록」편의 각 장별 연도 및 구절 수는 다음과 같다.
장 | 총 절수 | 시작 연월일 | 기록 기간 | 기타 |
---|---|---|---|---|
1 | 38 | 1871 | 26년간 / 26세 | 강씨10), 강세지(1-4절)11) |
2 | 24 | 1897 | 7년간 / 27세-33세 | |
3 | 66 | 1904 | 4년간 / 34세-37세 | |
4 | 57 | 1908년 초 | 1년간 / 38세 | |
5 | 38 | 1909년 1월 2일 | 6개월간 / 39세 | 치상 후 기록(37, 38절) |
5장 223절 | 39년간 |
「행록」편은 총 5개장으로 『전경』 7편 가운데 가장 많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상제의 전 생애를 기록한 것이기에 장도 가장 많은 5개장으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장이 구분되어 이루어진 객관적 근거는 찾기가 어렵다. 위 표를 보면, 상제의 39년간의 생애를 연도별로 균등하게 5개장으로 나눈 것도 아니며 총 223개의 구절을 5개 장으로 분류한 것도 아니고, 내용상으로 나눈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5개 장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연고(緣故)를 찾기 어려운 무엇인가 불규칙성 하에 5개장으로 되어있는 「행록」편은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로 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상제의 전 생애를 요약적으로 적고 있는 유일무이한 상제에 대한 전기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행록」은 1장부터 5장까지 각각 38, 24, 66, 57, 38개의 절로 되어있다. 상제의 생애를 기록한 기간으로 볼 때, 「행록」 1장 구절은 1절의 강씨성의 시조와 중시조의 내력과 고부의 강씨성 그리고 2절의 강세지 주변 지명 설명 등 연도가 없는 구절과 연도가 등장하는 1871년부터 1896년까지의 기록을 적고 있다. 「행록」 2장 구절은 1897년부터 1903년까지의 기록을, 「행록」 3장 구절은 1904년부터 1907년까지의 기록을, 「행록」 4장 구절은 1908년 초부터 1908년까지의 기록을, 「행록」 5장 구절은 1909년 1월 2일부터 1909년 6월 24일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다음으로 『전경』은 「행록」과 공사 및 공사의 세부적 내용에 속하는 「교운」 1장,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 그리고 종통을 전수 받은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 1895-1958)의 생애인 「교운」 2장 편으로 볼 수 있는데, 『전경』의 총 7편 가운데 「행록」은 상제의 전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그 구절은 『전경』의 다른 편 제목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다. 즉 「행록」 구절의 내용은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 등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갖고 있는 『전경』의 축소판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에 추보식으로 적혀있는 「행록」 구절의 내용상 성격을 분류해서 『전경』의 다른 편과 관련지어 표로 요약해 보기로 한다. 먼저 「행록」편 1장 내용을 요약한 후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의 내용과 대비해서 그 구절의 성격을 분류하여 표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절 | 연월일 | 내용 요약 | 『전경』 다른 편과의 관련에 따른 구절의 성격 |
---|---|---|---|
1 | 강씨, 원시성, 중시조, 고부 강씨 | 예시적 성격 | |
2 | 삼신산 | 예시적 성격 | |
3 | 방장산, 시루산 | 예시적 성격 | |
4 | 객망리 주변 지명 | 예시적 성격12) | |
5 | 1871 | 강세지, 강세일 | 예시적 성격 |
6 | 객망리의 현 명칭 | 예시적 성격 | |
7 | 객망리 지명 삼변 | 예시적 성격 | |
8 | 부친 | 예시적 성격 | |
9 | 모친 | 예시적 성격 | |
10 | 탄강시 신화적 화소 | 예시적 성격 | |
11 | 호생의 덕 | 교법적 성격 | |
12 | 7세에 지은 한시 | 예시적 성격 | |
13 | 서당훈장 속셈 아심 | 권지적 성격 | |
14 | 1883 | 모시베 다시 찾으심 | 권지적 성격 |
15 | 기력이 크심 | 권지적 성격 | |
16 | 글씨에 두서자 빈 곳 두심 | 예시적 성격 | |
17 | 부친 빚을 시재(詩才)로 갚으심 | 권지적 성격 | |
18 | 1887 | 상제를 신명이 지킴(절구통) | 권지적 성격 |
19 | 송광사 기둥을 당기심 | 권지적 성격 | |
20 | 1894 | 글방 차리심 | 공사적 성격 |
21 | 1894 | 김형렬 내방, 상제 은둔 | 공사적 성격 |
22 | 1894. 5 | 꿈에 후천진인 내방(來方) | 예시적 성격 |
23 | 동학군 미래 예시 | 예시적 성격 | |
24 | 1985. 봄 | 두승산 시회에서노인이 책을 전함 | 예시적 성격 |
25 | 광구천하의 뜻 세우심 | 공사적 성격 | |
26 | 1895. 5 | 유덕안 제생 | 제생적 성격 |
27 | 190213) | 김경안의 신약전서 | 예시적 성격 |
28 | 신약전서 구해줌 | 권지적 성격 | |
29 | 49일 떡을 찧는 정성 | 공사적 성격 | |
30 | 신작로 | 예시적 성격 | |
31 | 진묵고사와 칠성을 바로 감추심 | 권지적 성격 | |
32 | 율곡고사와 영재 | 교법적 성격 | |
33 | 일진회 발족과 의관 비유14) | 예시적 성격 | |
34 | 명부사자와 나의 사자 | 공사적 성격 | |
35 | 오동팔의 집을 지어줌 | 권지적 성격 | |
36 | 송시열고사와 상제에 대한 신명의 응감 | 권지적 성격 | |
37 | 명당과 아들, 불매백골이장지 | 예시적 성격 | |
38 | 사회적 항렬과 신명의 감정 | 교법적 성격 |
위에서 요약한 「행록」편 1장 내용은 기간이 1871년부터의 기록이다. 이를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과 관련지어 그 내용을 분류해보면 그 양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행록」 1장에서 볼 수 있는 『전경』 기록의 특징은 신농씨 관련 기록이 『전경』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상제께서 원시성인 강씨로 그 성(姓)을 하였기에 강씨성에 대한 설명이 『전경』의 첫 번째 구절로 기록된 것이 된다.
「행록」 1장 내용에서 공사와 관련된 내용은 글방 차리심, 김형렬 내방과 상제의 은둔, 49일 떡을 찧는 정성 등이다. 「교법」과 관련된 내용은 호생의 덕, 율곡의 고사(故事)와 영재(英才), 사회적 항렬과 신명의 감정, 명부사자와 나의 사자 등이다.
「권지」와 관련된 내용은 서당훈장 속셈을 아심, 모시베 다시 찾으심, 기력이 크심, 부친 빚을 시재(詩才)로 갚으심, 상제를 신명이 지킴(절구통), 송광사 기둥을 당기심, 김경안의 신약전서를 구해주심, 진묵고사와 칠성을 바로 감추심, 오동팔 제생 등이다.
「제생」과 관련된 내용은 유덕안 제생이며, 「예시」와 관련된 내용은 강씨, 강세지, 부친과 모친, 탄강시 신화, 7세에 지은 한시, 글씨에 두서자 빈 곳 두심, 꿈에 후천진인 내방(來方), 두승산 시회, 노인이 책을 전함, 신작로, 일진회 발족과 의관 비유, 명당과 아들, 불매백골이장지 등이다.
「행록」편 2장 내용을 요약한 후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의 내용과 대비해서 그 구절의 성격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요약한 「행록」편 2장 내용은 1897년부터 1903년까지의 기록이다. 이를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과 관련지어 내용을 분류해 보면, 그 양상은 다음과 같다.
「행록」 2장 내용에서 「공사」와 관련된 내용은 서당재개, 유불선음양참위 통독, 주유, 김일부와의 만남, 8도 유력, 신인으로 칭송, 만인함열, 귀향과 시루산 공부 시작, 유덕안의 집, 큰소리를 내심, 샘터 너머에서 우심, 시루봉 공사, 공사 말씀, 금수 해원, 백남신과의 만남, 일진회 발족과 대삿갓 등이다.
「교법」과 관련된 내용은 미륵이심, 정집전 고사, 육도삼략 교훈, 추수에 새를 쫓음, 교훈 등이다. 「권지」와 관련된 내용은 안개로 순검 피하심, 천지대도 여심, 대원사 금곡 수명 연장, 김성천 제생과 기운, 안필성에게 권능을 보이심 등이다. 「제생」과 관련된 내용은 김도일 제생이며, 예시와 관련된 내용은 미륵이심이다. 「행록」편 3장 내용을 요약한 후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 편의 내용과 대비해서 그 구절의 성격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요약한 「행록」편 3장 내용은 기간이 1904년부터 1907년 12월 26일까지의 기록이다. 이를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과 관련지어 내용을 분류해보면 그 양상은 다음과 같다.
「행록」 3장 내용에서 「공사」와 관련된 내용은 장효순의 난, 상제 상투의 머리카락, 일진회와 아전 화해, 이경오의 돈, 일본군이 일진회원 21명 사살, 김보경 집에 가심, 면례(김갑칠), 치천하 공부, 주문의 주술, 교회의 의식과 교의, 차경석과의 만남, 차경석 강령, 차경석 선묘 혈음 이동, 차경석에게 교훈(한시), 백의군왕 백의장군 도수 등이다.
「교법」과 관련된 내용은 장효순 사망, 병욱과의 약속, 돈 한두냥 지니심, 부친에 孝言, 광인, 신인, 인연과 천연, 소부(小婦) 징벌, 차경석에게 교훈, 한시(明月千江心共照), 이도삼에게 교훈, 한문(인간 마음), 김형렬에게 교훈(敝衣多垢勝金甲), 김형렬에게 교훈(處世柔爲貴), 맹자 한 구절, 문공신 교훈 등이다. 「권지」와 관련된 내용은 맞불로 소화, 백남신 제생, 정괴산의 복솥, 김보경 집 도적에서 보호, 김병욱 제생(민요, 관직), 72둔, 음양둔, 물로 술을 빚으심, 무뢰한 피해 다른 길, 김덕찬 묘제와 술 등이다. 「제생」과 관련된 내용은 순검 제생, 누이 제생, 황숙경 제생, 김병욱 제생, 문공신 옥에서 제생이며, 「예시」와 관련된 내용은 소시에 지은 한시[運來重石何山遠] 등이다.
「행록」편 4장 내용을 요약한 후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의 내용과 대비해서 그 구절의 성격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요약한 「행록」편 4장 내용은 기간이 1908년 초부터 12월까지의 기록이다. 이를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과 관련지어 분류해보았는데 그 양상은 다음과 같다.
「행록」 4장 내용에서 「공사」와 관련된 내용은 현무가사와 시천주, 태인과 종도들, 시두손님과 천자국, 혈음의 발음, 보리와 빈부 차별, 관운장 서양에, 칠성경 소지, 보리흉년에서 제생, 풍성과 원시성(강성), 김병계 아들 일화, 고부인에게 교훈, 고부인에게 한시, 도적 제생과 천지공사의 도수, 차윤칠 독기 제거, 음양 나약한 자, 변함없는 스승으로의 믿음, 대나무 공사, 송대화 치송, 박공우의 술 버릇, 소시 서당아이 해원 등이다.
「권지」와 관련된 내용은 안필성과 권능, 일본군에게 권능 보이심, 독기 제거, 가뭄 제거, 김갑칠과 우사, 황소 싸움 해소, 구름이 상제행동 묘사, 한공숙 꿈, 구름 가물치 모양, 일이 무위이화로 해소 등이다. 「제생」과 관련된 내용은 손병욱 아내 제생, 김영학 척신 제거이며, 「예시」와 관련된 내용은 고부인에게 예시(큰 살림), 정읍 가는 길(吉行) 등이다.
「행록」편 5장 내용을 요약한 후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의 내용과 대비해서 그 구절의 성격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요약한 「행록」편 5장 내용은 기간이 1902년 1월 2일부터 6월 24일까지이다. 이를 『전경』의 다른 편인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제생」, 「예시」편과 관련지어 분류해보았는데 그 양상은 다음과 같다.
「행록」 5장 내용에서 「공사」와 관련된 내용은 역적질 발언과 천원 군병출동, 고사라는 명과 군병 출동, 일등박문, 태을주 도리원서 시천주, 돈 70냥 관련 일화, 차경석 시험, 발복과 어딘가로 가심, 김경학 및 황응종과 문공신 구타, 학질, 김자현 모 학질사망과 관에 누워 보심, 천곡과 사명당 공사, 용둔, 유불선, 류찬명 글 쓰고 소지, 은신과 부안 궁벽한 곳, 보리밥과 절록, 보고싶거든 금산사로 오라, 임술생 수부 천거, 여러곳에 누워보심과 정기, 상제 간수(看守)한 현무경 종필(縱筆) 등이다.
「교법」과 관련된 내용은 차경석 칭찬(직장)과 돌이켜야함, 강팔문의 횡포와 사망, 사제(師弟)간 평좌와 흡연 허락, 발동 말고 수도하라, 김자현 믿음 표명, 멸망에 모두 구출 못해 원통하심, 이 방에 와서 놀라고 하심, 수원나그네, 차경석과 정가(鄭家), 한문 구절(病勢文) 등이다.
「예시」와 관련된 내용은 백홍 관일과 화천예시, 화천예시와 자현 믿지 않음, 믿음과 후일 상제께서 찾음, 신선으로 출세, 이치화 돈(궤에 보관), 천하사 도모와 화천예시, 화천(化天), 치상(治喪) 등이다.
Ⅲ. 「행록」구절의 내용상 변이
상제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1926년 최초로 『증산천사공사기』가 있었으며, 3년 뒤 『대순전경』 초판이 출간되었고, 이후 1965년까지 36년간 『대순전경』 6판까지 상제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증산교단에서 인정하는 보편적인 상제에 관한 문헌이 『대순전경』이다.
이 장에서는 「행록」편 구절 가운데 『대순전경』 6판과 대비해서15) 구절의 변이 양상이 나타나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행록」 1장 구절에 대해 『대순전경』에서 상관된 구절을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절 | 연월일 | 내용 요약 | 『대순전경』 6판 장, 절 |
---|---|---|---|
1 | 강씨 | ||
2 | 삼신산 | ||
3 | 방장산, 시루산 | ||
4 | 객망리 주변 | ||
5 | 1871 | 강세지, 강세일 | 1장 1절16) |
6 | 객망리의 현 명칭 | ||
7 | 객망리 지명 삼변 | ||
8 | 부친 | 1-2 | |
9 | 모친 | 1-2 | |
10 | 탄강시 신화적 화소 | 1-3 | |
11 | 호생의 덕 | 1-4, 5 | |
12 | 7세에 지은 한시 | ||
13 | 서당 훈장 속셈 아심 | 1-9 | |
14 | 1883 | 모시베 다시 찾으심 | 1-12 |
15 | 기력이 크심 | ||
16 | 글씨에 두서자 빈 곳 두심 | ||
17 | 부친빚 詩才로 갚으심 | 1-10 | |
18 | 1887 | 상제를 신명이 지킴(술주정꾼) | 1-13 |
19 | 송광사 기둥 | 1-25 | |
20 | 1894 | 글방 차리심 | |
21 | 1894 | 김형렬 來方, 상제 은둔 | |
22 | 1894. 5 | 꿈에 후천진인 來方 | |
23 | 동학군 미래 예시 | 1-14 | |
24 | 1985. 봄 | 두승산 시회,노인이 책을 전함 | 1-24 |
25 | 광구천하의 뜻 세우심 | ||
26 | 1895. 5 | 유덕안 제생 | |
27 | 190217) | 김경안의 신약전서 | 2-7 |
28 | 신약전서 구해줌 | 2-7 | |
29 | 49일 떡을 찧는 정성 | 2-15 | |
30 | 신작로 | ||
31 | 진묵고사와 칠성을 바로 감추심 | ||
32 | 율곡고사와 영재 | ||
33 | (1904) | 일진회 발족과 의관 비유 | 4-11 |
34 | 명부사자와 나의 사자 | ||
35 | 오동팔 제생 | 2-39 | |
36 | 송시열 고사와 상제에 대한 신명의 응감 | 2-10 | |
37 | 명당과 아들, 불매백골이장지 | 2-49 | |
38 | 사회적 항렬과 신명의 감정 | 3-132 |
위의 「행록」 1장 구절 가운데 변이가 일어난 구절을 중심으로 『대순전경』과 대비해서 그 구절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행록」 1장 23절: 동학군의 앞 날에 대한 예시적인 내용은 『증산천사공사기』에서는 원신을 묵운해서 다른 한시 시구(詩句)를 알아낸 것으로 나오나 초판에 와서 한시를 일순간에 말해준 것으로 나온다.
「행록」 1장 33절: 『전경』에는 ‘일진회가 발족되던 때 관을 버리고 삿갓을 쓰고 검은 옷을 입으며 구름에 비유’한 내용만 있으나, 『대순전경』 6판 4장 11절에는 일로(日露)전쟁으로 일진회가 흥성하니 백성들이 갑오년(1894) 난폭한 행동을 두려워하자 상제께서 살림과 전답을 팔아 걸인에게 나누어 주니 그들이 자기 재산을 탕패(蕩敗)하자 상제께서 ‘나를 본받으니 살려줌이 옳다’고 한 부분18)이 앞에 더 있다. 또 『대순전경』에는 ‘갓’을 벗고 ‘삿갓’을 썻다고 적혀있다.19)
「행록」 1장 37절: 『전경』에는 상제께 김현찬과 김병욱이 명당을 원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상제께서 두 사람에게 물어본 것으로 되어있어 다르다. 또 김병욱이 작은 집을 얻어서 아들을 낳은 것으로 되어있으며 이에 명당에 대해 김병욱이 허탄해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전경』의 ‘매백골이장지’와 ‘불매백골이장지’가 초판에는 한문이었다가 재판을 거쳐 번역된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행록」 1장에서 볼 수 있는 『전경』 기록의 특징은 신농씨 관련 기록이 『전경』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강씨성의 시조와 중시조의 내력과 고부의 강씨성 그리고 강세지 주변 지명 설명이다. 이는 상제께서 원시성인 강씨로 그 성(姓)을 하였기에 강씨성에 대한 설명이 『전경』의 첫 번째 구절로 기록된 것이 된다. 「행록」 2장 구절에 대해 『대순전경』에서 상관된 구절을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행록」 2장 구절 가운데 변이가 일어난 구절을 중심으로 『대순전경』과 대비해서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행록」 2장 1절: 『대순전경』 6판 1장 27절에는 앞 부분에 동학혁명 이후 국정의 부패와 관헌의 포학 및 토색(討索), 선비의 허례(虛禮), 불교의 무민혹세, 동학의 멸(滅)함, 서교(西敎)의 신장 등으로 민중이 도탄에 빠지자 광구할 뜻을 세워 유불선 음양참위의 모든 글을 읽고 세태와 인정을 체험하고자 정유년에 유력의 길을 떠난 것으로 되어있다. 『전경』은 세태에 대한 내용이 없이 정유년에 글방을 차려 서동들을 가르치며 유불선 음양참위가 천하를 광구함에 한 도움이 되리라 하신 후에 주유(周遊)를 떠난 것으로 되어있다.
「행록」 2장 5절: 『대순전경』 6판 3장 136절과 대응된다. 「행록」 2장 5절 내용 앞에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후 천하지대금산(天下之大金山)’과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명월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 문명개화삼천국(文明開花三千國) 도술운통구만리(道術運通九萬里)’라는 한문 문구가 있고 맨 앞에 ‘매양 구릿골 앞 큰 나무 밑에서 소풍하실 새 금산안과 용화동을 가리켜 가라사대 이곳이 나의 기지라 장차 꽃밭이 될 것이요 이곳에 인성이 쌓이리라 했다’는 한글 글귀가 있다. 이것은 『전경』에 내장산 관련 한문 글귀에 ‘상제께서 어느 때 내장산(內藏山)에 가셨을 때에’라고 한 것과 다르다.
「행록」 2장 16절: 『전경』에는 상제께서 스스로 ‘나는 곧 미륵이라.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육장금신(六丈金神)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한 내용과 아래 입술에 붉은 점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이 부분이 없이 상제의 얼굴이 원만하여 미륵금신과 흡사하며 양미간에 불표(佛表)가 있다고 나온다. 불표도 『전경』에는 ‘둥근 백호주’라고 적혀있다.
「행록」 2장 7절: 『전경』은 경자년 고향에 돌아와 시루산 조모(祖母)의 묘를 면례(緬禮)할 때 류서구가 지사(地師)로 보좌하였다고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경자년(1900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이치안을 주막에서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다르다. 아울러 『전경』에는 상제께서 시루산 상봉에서 공부를 하였고 호둔을 하자 나뭇꾼들이 기겁하여 부친에게 말하여 부친이 가보니 범은 보이지 않고 상제께서 공부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시루산 공부(7절-11절)에 대한 내용이 이어서 전승물로 나타나고 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중요한 시루산 공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다르다.
「행록」 2장 12절: 『전경』에는 앞 부분에 ‘상제께서 신축(辛丑)년 五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 가셔서 그 절 주지승 박 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간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불음 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셔서 四十九日이 지나니 금곡이 초조해지니라’는 내용이 더 있으나 『대순전경』 2장 1절에는 없으며 여러 해 동안 각지에 유력하여 많은 경험을 얻고 신축년에 이르러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지 않고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고 대원사에서 도를 닦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상제께서 천지대도를 연 후 주지 박금곡에게 미음을 가져오라한 것과 본댁에서 가져온 의복에 대해 언급한 부분20)이 『대순전경』 2장 1절에 없다. 또한 『전경』에는 ‘천지대도를 열었다’고 나오나 『대순전경』 2장 1절에는 ‘천지대도를 깨달으시고’라고 나타난다.
「행록」 2장 20절: 상제께서 계묘년 3월에 객망리에서 김형렬에게 「신명에게 요금을 줄 터이니 여산 윤 공삼(礪山尹公三)에게 가서 돈을 얻어오라」고 하여 김 병욱이 전주 거부인 백 남신(白南信)을 천거하였다는 기록도 『대순전경』에는 없어 『전경』이 상제와 백남신의 만남에 대한 풍부한 전승물21)을 담고 있다.
「행록」 2장 23절: 『전경』에는 정읍에 가신 후부터 의관을 갖추었다22)고 나오나 『대순전경』 6판 3장 21절에는 정미년 5월 정읍사람 차경석을 처음 만나23) 정읍으로 가는 날짜로 되어있다. 또 차경석과 물방아집을 떠나 원평에 이르러 남조선 뱃길, 성인 다섯을 낳는 길, 대진은 삼십리라 하고 차경석의 친구인 박공우의 집으로 상제를 모셨다는 내용이 이어서 『대순전경』 3장 61절에는 더 있다. 「행록」 3장 구절에 대해 『대순전경』에서 상관된 구절을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행록」 3장 구절 가운데 변이가 일어난 구절을 중심으로 『대순전경』과 대비해서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행록」 3장 9절: 『전경』에는 1904년 1월에 장효순의 화난을 겪고 김성보의 집에 머물 때의 일로 나온다. 『대순전경』 3장 14절에는 상제께서 머리카락을 베어준 뒤 정남기에게 일진회 탈회를 권하나 말을 듣지 않아 정남기가 패가망신하고 유족이 유리(流離)했다는 기록이 더 있다.
「행록」 3장 12절: 『전경』은 5월의 기록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은 정월의 기록으로 나타난다. 『전경』은 백남신 체포의 공문이 서울로부터 전주부에 전달되어 김병욱이 자신의 화액을 계묘년 겨울에 상제께서 풀어준 일이 있다 말하여 백남신이 김병욱을 통해 상제의 도움을 청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은 백남신이 관액에 걸려서 거처를 감추고 김병욱을 통해 상제에게 간청한 것으로 되어있다. 백남신이 십만냥의 증서를 올린 후에 『전경』은 백남신의 화난이 풀리면서 남 삼도의 세무관이 되어 몇 만냥의 돈을 모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화난만 풀린 것으로만 되어있다.
「행록」 3장 14절: 『전경』은 갑진년 7월의 기록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 6판 2장 37절은 3월의 기록으로 되어있다. 일진회원의 전주부 입성을 막은 것도 『전경』은 최창권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은 정창권으로 적혀있어 다르다.
「행록」 3장 27절: ‘을사년 김 보경의 집에서 종도들에게’ 소시에 지은 글을 외워 주신 것으로 되어있는데24), 『대순전경』 4장25) 8절에는 소시(少時)에 지은 시(詩)로만 나타난다. 시도 한 번에 전체를 말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선생문명이 아닐런가, 선령문명이 아닐런가, 선왕문명이 아닐런가. 선생선령선왕합덕문명이 아닐런가, 우리 득의추가 아닐런가의 다섯 개의 구절과 결합되어 ‘심고하고 받으라’는 것으로 되어있다. 즉, ‘運來重石何山遠 粧得尺椎古木秋은 선생문명이 아닐런가와 霜心玄圃淸寒菊 石骨靑山瘦落秋는 선령문명이 아닐런가와 千里湖程孤棹遠 萬方春氣一筐圓은 선왕문명이 아닐런가와 時節花明三月雨 風流酒洗百年塵은 선생선령선왕합덕문명이 아닐런가 風霜閱歷誰知己 湖海浮遊我得顔 驅情萬里山河友 供德千門日月妻는 우리 득의추가 아닐런가’로 되어있다.
이어서 심고(心告)하고 받으라 한 뒤에 시세(時勢)를 짐작컨대하며 민영환의 만장(輓章)을 말한 후에 만장의 ‘일도분재만방심’으로 하여 세사(世事)를 알게 되리라 하고 ‘四五世無顯官先靈生儒學死學生 二三十不功名子孫入書房出碩士’를 언급한 것으로 적혀있다. 『전경』에는 민영환의 만장(輓章)이 「행록」 3장 27절에 없고 「예시」 37절에 나오며 만장의 앞부분에 ‘상제께서 김 자현에게 이르사 그의 방이 후에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고 일러주시고 민영환(閔泳煥)의 만장을 지어 그에게 주고 「쓸 데 있으리니 외우라」고 하셨도다’ 라는 내용과 결합되어 있다.
「행록」 3장 31절: 『대순전경』 7장 10절과 12절이 합쳐진 형태로 되어있다. 12절은 주문의 주술성에 관한 것이고, 10절은 류찬명과 김자현에게 각각 10만명에게 포덕하라고 하자 류찬명은 대답하고 김자현은 재촉을 받고 응낙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 10절 끝에 『전경』에는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 다르다. 12절에는 『전경』의 내용에 후미(後尾)에 ‘태을주는 역률(逆律)을 범했을지라도 옥문(獄門)이 스스로 열리고 운장주는 살인죄에 걸렸을지라도 옥문이 스스로 열리느니라’는 내용이 『대순전경』에는 더 있다.
「행록」 3장 37, 38절: 두 문헌의 스토리 전개를 보면, 『전경』은 차경석 소개 → 차경석의 전주행의 이유 → 차경석의 상제의 업에 대한 질문 → 상제의 계탕(鷄湯)권유와 벌(蜂)에 관한 이야기 → 차경석의 소송서류 문의 → 차경석의 상제 거처 질문과 상제의 답변 → 차경석이 상제 일행 거처(용암리 물방앗집26))를 따라감(이상 37절) → 차경석이 머물며 상제에게 정읍으로 가기를 간청 → 상제의 차경석에 대한 요청 → 상제의 차경석의 정읍행 재요청에 대한 말씀(이상 38절)으로 되어있다. 『대순전경』 6판 3장 16-20절까지의 전승은 상제의 계탕(鷄湯)권유와 벌(蜂)에 관한 이야기(16절) → 차경석의 상제의 업에 대한 질문 → 차경석의 상제 거처 질문과 답변 → 차경석의 상제의 지식에 대한 시험 질문(17절) → 차경석의 전주행의 이유 → 차경석의 소송서류 문의(18절) → 차경석 소개 → 차경석이 상제 일행 거처(용암리 물방앗집)를 따라감(19절) → 차경석이 머물며 상제에게 정읍으로 가기를 간청 → 상제의 차경석에 대한 요청 → 상제의 차경석의 정읍행 재요청에 대한 말씀(20절)의 순서로 되어있어 이야기의 전개가 다르다.
『전경』의 서사 전개를 중심으로 보면, ‘차경석 소개’에서 『전경』은 일진회 전주 총대를 지냈다고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은 손병희를 좇다가 그의 처사에 불만을 갖고 딴 길을 찾던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차경석의 소송서류 문의’에서 『대순전경』에는 차경석이 송사에서 승소할 것이나 피고의 11명의 식구는 살길을 잃을 것이라는 상제의 말씀이 더 있다. ‘차경석이 머물며 상제에게 정읍으로 가기를 간청’에서는 『대순전경』에 차경석이 상제를 비범히 여겨 수운가사에 있는 구절이 생각나며 깨닫는 바가 있어 집지(執贄)27)했다는 기록이 추가되어 있다.
「행록」 3장 40절: 『전경』에는 어느날 종도들에게 한시를 말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 6판 3장 40절에는 김형렬에게 옛글인 한시를 외워준 것으로 되어있고 이어서 ‘김형렬에게 좌불(坐佛)이 되어 처소(處所)를 잘 지키라하고 상제는 유불(遊佛)이 되리라’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행록」 3장 41절: 『대순전경』 6판 2장 68절에는 금반사치 기운을 옮긴다하고 차경석에게 춤을 추게 하고 박공우에게 북을 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전경』에는 차경석에게 춤을 추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어서 혈음이 장풍(長風)을 받아야 발(發)한다 하니 마침 이장풍이 방으로 들어 왔으며 이때 박공우가 북치는 것을 멈추고 ‘장풍이 오느냐’고 인사를 하자 상제께서 그만 그치라한 내용이 후반에 더 있다.
「행록」 3장 43절: 『전경』은 고양이를 보고 지은 시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 6판 3장 203절에는 ‘조아시(鳥兒詩)’와 ‘묘시(猫詩)’를 외워준 것으로 되어있다. 즉 총 네 개의 시구(詩句) 가운데 1, 2시구는 조아시28), 3, 4시구는 묘시29)로 되어있다.
「행록」 3장 44절: 『전경』에는 ‘급한 일로 오는 사람이 늦어진 것을 물으니 그 사람이 당화주역으로 운명을 비판하는 이가 있어 늦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없다. 다만 『대순전경』에는 한문 글귀 뒤에 ‘경원이 읽은 뒤 불사르니 경관의 조사가 끝났다’는 내용이 있다.
「행록」 3장 46절: 『대순전경』 6판 2장 97절에는 시기가 ‘8월 어느날’로 되어있으며 『전경』에는 ‘김덕찬의 누이동생의 묘제가 있었다’라고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매가에 잔치가 있으니 소풍 겸하여 나가사이다’라고 적혀있다. 또 『전경』에는 말미에 ‘덕찬이 감복하여 술을 마셨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행록」 3장 47절: 『전경』은 ‘상제께서 정미년 시월 어느날 경석에게 돈 삼십냥을 준비하게 하신 후 「이것은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 하시면서 어떤 법을 베푸시고’ 한시를 읽어 준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 6판 3장 28절에는 하루는 경석에게 고시를 외워준 것으로 되어있으며 이어서 경석을 데리고 농바우(籠巖, 순창) 박장근의 집에서 천하대세를 회문산 오선위기형에 붙여 돌린다하고 차경석에게 한 기운을 붙인다하며 박장근의 집 머슴에게 어젯밤의 꿈30)을 물은 기록이 더 있다.
「행록」 3장 51절-66절: 백의장군 백의 군왕 도수와 관련된 구절로 이후 66절까지 같은 내용이다.31) 정미년 12월 문공신과 신경수의 두 집에 왕래하셨고 김형렬이 배알하니 입고 계시던 옷을 빨아 김자현과 다시 오라해서 의복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대순전경』에는 상제와 종도들이 모두 새 옷을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다르며 상제는 일광단 두루마기와 무문모초 바지 저고리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대순전경』에는 옷을 준비하기 이전에 천자신과 장상신을 모아 들여 백의군왕 백의장상도수를 보셔 사람 수효를 삼십(三十) 삼천(三千) 수(數)로 채우신 뒤에 도망할 사람은 미리 도망하라하고 일을 하는 자는 화지진(火地晉)도 한다하고 굳게 다짐하며 보니 12월 25일 이고 21명의 종도들이 남은 것으로 나타난다.
또 『전경』에는 김형렬에게 김자현과 함께 문공신의 집에 있게 하고 상제는 신경수의 집으로 간 것으로 나오나 『대순전경』에는 상제와 종도가 함께 신경수의 아랫방과 윗방에 있던 것으로 적혀있다. 종도에게 관리(官吏)가 두려우면 도망하라 한 내용도 『전경』에는 이때 상제께서 말한 것으로 나오며 또 이때 백의장군 백의군왕 도수를 보시는 때이고 면장과 이장이 들어와 상제께서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여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데 그대가 어찌 이러한 음모에 참여하나뇨’하자 이들이 관부(官府)에 고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 상제께서 고운 일광단으로 옷을 지어 새로 갈아입은 것으로 되어있다. 이 부분이 『대순전경』에는 새벽에 순검이 와서 문공신을 찾고 모두 포박한 것으로 나오며 상제께서 인부들에게 미리 있던 돈과 백목(白木) 몇 필(匹)을 지고 따르게 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 이 시대는 거짓말하는 자는 없이 하는 시대니 바른 말을 하라하고 순검에게도 본 대로 말하라고 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울러 관부에 가는 길에 고부 장터에 이르니 고부는 장차 쏘가 되리로다 하며 큰 인물들이 잡혀 왔으니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리요 하고 장꾼들이 불안해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는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공포시대였다고 『대순전경』에 적혀있다.
또한 『전경』에는 순검이 체포하러 오기 전에 상제께서 화난이 닥칠 것을 종도에게 알리고 12월 24일 밤 새벽에 백순검이 올 것이라고 하니 종도들은 순검 백 명이 닥칠 것으로 알고 흩어지는 종도가 있었으나 새울 사는 백낙규의 형인 백순검이 다녀갔고 이후 무장 순검 수십명이 공신의 집을 포위 결박하며 상제의 거처를 물어 신경수의 집으로 순검이 가서 총대로 방문을 뚫고 위협하였고 상제께서 총대를 잡고 호령하자 순검이 겁을 먹고 총대를 빼려 하였으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나온다. 잠시 후에 상제께서 들어오라 하여 20여명을 포박해서 고부 경무청으로 간 것으로 되어있고 이는 의병의 혐의로 백의군왕 백의장군 공사에 따른 화난으로 나온다. 특히 『대순전경』은 순경들이 쉽게 상제를 포박해서 간 것으로 되어있어 『전경』과 다르다.
아울러 『전경』에는 정우면 와룡리에서 포박되어 덕천면 용두마을에서 상제께서 돝 한 마리를 잡아 모두 함께 잡수시고 고부로 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없다. 또 이 일 이전에 김광찬, 신원일, 박공우를 다른 곳으로 보냈으며 심문에서 의병이 아니며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한다 하였으며 일경들이 심한 고문을 가하자 종도들은 문초(問招)도 받지 않았으나 상제를 원망하기 그지없었고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종도들은 더 공포를 느끼고 벌벌 떨었다고 『전경』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심문(審問)에 대해 『대순전경』에는 일본순검이 ‘의병으로 일본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냐’ 하자 상제께서 ‘이씨 왕가를 위해 일본에 저항하는 것이 의병인데 그런 일을 아니 한다’ 하며 순검이 무슨 일로 모였냐하자 상제께서 ‘혼란복멸(混亂覆滅)에 임한 천지(天地)를 개조(改造)하여 새 세상을 열고 대비겁(大否劫)에 싸인 사람과 신명을 널리 건져 안락(安樂)을 누리게 하려는 모임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때 문형로(통역순검)가 놀라자 상제께서 ‘천하사에 뜻하는 자가 다른 길이 있느냐 도략과 자비가 있으면 어찌 가만히 앉아서 볼 때리요’라고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어서 박권임이 문공신을 구둣발로 차 기절하니 문형로 총순(總巡)이 박권임에게 죄의 유무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혹독히 하냐고 한 것으로 『대순전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전경』에는 문공신에 대해 상제께서 급한 병이니 인곽을 써야 한다하고 회복시킨 것으로 나온다.32) 이후 그믐날 밤에 우뢰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들으시고 ‘이것은 서양에서 신명이 넘어옴이니라’고 적혀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서양에서 천자신이 넘어옴이며 천자신은 넘어왔으나 종도들이 혈심을 가지지 못해서 장상신이 응하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전경』에는 무신년 원조(元朝)에 경무관이 주식(酒食)을 주자 종도들이 일경(日警)들이 죽이려는 것이라 하며 상제를 원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대순전경』에는 문공신을 제생하고 감방을 옮긴 후의 일로 되어있고, 여러 날이 가며 상제를 원망하는 이가 늘자 ‘인생이 일사면 도무사라 죽어도 원망은 말라’하고 문공신에게 ‘일을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을지라도 원통히 하지 말라’는 말을 상제께서 하니 종도들이 이번 화액에 상제께서 대처할 권능이 없다하며 무용의 믿음이고 혹세무민의 사사(邪事)로 사지(死地)에 넣은 것이라 하며 몇 사람은 크게 원성(怨聲)을 발했다고 『대순전경』에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전경』에는 경무관이 취조하여도 아무런 혐의가 없어 상제를 광인으로 취급하여 옥중에 남기고 여러 사람을 석방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상제를 신의(神醫)로서 전에 병을 낫게 해주어 은혜를 잊지 못하고 감옥으로 사람들이 세찬(歲饌)을 드리러 오고 문공신의 친척으로 서의차(敍誼次)온 일이 있다는 것과 단체로 모일 때가 아닌 비상시라고 주의를 준 내용이 더 적혀있다.
이후 상제의 석방일에 『전경』에는 차경석이 2월 4일 경칩일까지 기다려 객망리 본댁으로 모시고 갔고 김형렬은 출옥 소식을 듣고 동곡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이 내용이 없고 상제께서 압수되었던 돈과 백목을 찾아내어 모든 순검과 빈궁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3일을 머문 뒤에 와룡리 황응종의 집으로 가니 차경석이 따른 것으로 되어있다. 이후 화액에 참여한 종도들의 명단과 화액 후 종도들의 근황이 『대순전경』에 있으나 『전경』에는 체포되었던 20여명의 종도 중에 김형렬과 김자현 두 사람만 남고 다 각기 흩어져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나타난다.
또 『전경』에 이후 상제께서 문공신의 집에 가니 문공신이 불쾌한 어조로 불평하며 상제께 고부 음식점 주인이 외상값을 갚으라고 하는데 고부화액 때 가지고 갔던 백목과 돈으로 외상값을 갚지 않은 것을 말하였다고 나오는데 ‘백목과 돈’이 『전경』에는 고부화액에서 이 부분에 처음 등장한다.33)
이 내용에 이어서 『대순전경』에는 문공신이 옥에서 일본순경에게 발로 채여 사경에 들어 상제께서 제생해준 것으로 나오는데 이 내용이 『전경』에는 편을 달리해서 「제생」 35절에 등장한다. 66절에는 20명의 종도 가운데 김형렬과 김자현만이 남고 모든 종도들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 4장 61절에는 11명34)의 이름은 적혀있고 9인은 미상이라 나온다. 또 김형렬과 김자현만 남았다는 것은 『전경』과 같으나 문공신이 수차례 내왕이 있었으며 허성희는 수금(囚禁)시에 불평을 잘 달래서 진정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행록」 4장 구절에 대해 『대순전경』에서 상관된 구절을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행록」 5장 구절 가운데 변이가 일어난 구절을 중심으로 『대순전경』과 대비해서 그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행록」 4장 10절과 15절: 『전경』에는 10절과 15절로 나뉘어져 있으나, 두 구절이 합쳐져서 『대순전경』 6판 2장 77절에 기록되어 있다. 『전경』의 11, 12, 13, 14절은 무신년(1908년) 2월 이후와 4월 사이의 기록으로 나타난다. 시기를 보면 11절 관묘 치성은 『대순전경』에서 6판 4장 135절로 기유년(1909년) 4월 이후의 기록으로 되어있어 다르다. 12절은 3장 69절로 무신년(1908년) 7월 이후로 되어있어 다르다. 13절은 3장 35절로 정미년(1907년) 초사흗날35) 이후 기록으로 나타난다.
「행록」 4장 11절: 『대순전경』 6판 135절에 있으며 맨 뒤에 치성은 헛된 일이라 한 것이 추가되었고 『전경』에는 김덕찬도 시좌(侍坐)한 것으로 되어있다.
「행록」 4장 18절: 『전경』에는 상제를 두려워했다고 나오나 『대순전경』 6판 2장 112절에는 그 연고가 ‘덕찬이 처음에는 자신을 무고히 용소리에 보내 패욕을 당하게 하신 것을 불평하였으나 상제께서 속으로 실없이 알면서 거짓 대답한 것을 아시고 실없는 취한 사람을 만나도록 징벌하심을 깨닫고 더욱 두려워하여 한 번의 생각과 작은 일에도 극히 삼갔다’라고 하여 그 내용이 『대순전경』에 더 자세히 적혀있다.
「행록」 4장 19, 20절: 『대순전경』 6판 8장 46절에는 고부 벌매면 교동 사람 손병욱이라고 상세히 적혀있다. 또 『전경』에는 상제께서 와룡리 네거리에서 박공우가 자신의 집으로 가시자고 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박공우가 황응종의 집으로 가시자고 한 것으로 나타난다.
「행록」 4장 22절: 『전경』에는 차윤경이 고부인과 희남의 병세를 알린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 6판 2장 103절에는 김형렬에게 정읍으로 가리라 이 길이 길행이라 하고 일을 알리리라 한 후에 고부인의 안질만을 알린 것으로 되어있다. 또 『전경』에는 윤경이 새울에서 상제를 만나니 상제께서 오늘은 (고부인과 희남)병세가 어떠냐고 물은 것에 윤경이 집에서 일찍 떠나 모르나이다 하자 상제께서 꾸짖은 것으로 나온다. 이 내용이 『대순전경』에는 없다. 또한 『전경』에는 김경학의 집에 김자현도 차윤경과 같이 간 것으로 되어있고 대흥리에 도착 고부인과 희남의 병을 고쳐준 것으로 적혀있다. 『대순전경』 6판 2장 105절에는 대흥리로 가는 큰 길과 샛길에서 군자가 어찌 샛길로 가리오 하며 큰 길로 갔으나 정읍 읍내 즐비한 일본인 상점에 한 사람도 밖에 나선 자가 없고 고부인의 안질을 하룻밤 앓으신 후 무신 납월 공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행록」 4장 36절: 『전경』은 ‘김병욱의 아내’로 나오고 『대순전경』 6판 2장 95절에는 ‘손병욱의 아내’로 되어있으며 와사증이 일어난 것을 황응종이 본 것으로 적혀있다.
「행록」 4장 55절: 『대순전경』에는 무신년 동짓달에 있던 일로 나오며 김광찬이 집에 돌아가 처자 권속을 대할 낯이 없다 하고 자살하겠다고 적혀있다. 이에 대해 상제께서 ‘사지종용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사지분란(事之紛亂)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나니 자방(子房)의 종용(從容)과 공명(孔明)의 정대(正大)를 본 받으라’고 한 내용이 더 추가되어 있다.
「행록」 4장 56절: 「행록」 4장 56절의 ‘내가 정읍으로 가리니 이 길이 길행이라. 뒷 일은 네게 통지하리라’는 내용은 『대순전경』 6판 103절에도 나오나 『전경』의 내용은 상제께서 광찬이 자살하겠다는 것은 나를 죽으라고 한 것이라고 한 후 박공우를 데리고 동곡을 떠나 정읍 차경석의 집으로 간 것으로 나온다. 『대순전경』의 내용은 앞에서도 보았지만 차윤경이 고부인의 안질을 아뢰고 다음날 새올로 가는 도중 일본군사의 심문을 받고 새올에 도착해 자지 않고 새벽에 백암리로 간 내용과 같이 나오는 것이 다르다. 다음으로 「행록」 5장 구절에 대해 『대순전경』에서 상관된 구절을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행록」 5장 구절 가운데 변이가 일어난 구절을 중심으로 『대순전경』과 대비해서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행록」 5장 1절, 2절: 『대순전경』 6판 4장 131절과 같은 내용이나 『대순전경』에는 이튿날 모든 일을 마치시고 고사를 지내려 하실새라는 내용이 맨 앞에 나오며 차경석 만이 아니라 고부인에게도 고사를 지내라고 한 것으로 적혀있다.
「행록」 5장 5절: 『전경』에 안내성이 곤봉으로 마룻장을 치고 상제께서 ‘일등박문이 필요하고 이등박문이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순전경』 6판 4장 95절에는 안내성에게 ‘일등박문이 여기 계신데 이등박문이 어찌 머리를 들리요 하여 꾸짖으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다르다.
「행록」 5장 6절: 『대순전경』 9장 5절과 내용상 대응된다. 『전경』에는 임상옥 집에 가셔서 보신 공사가 자세히 나오고 그 공사는 글을 쓰고 그 종이를 가늘게 잘라 잇고 집의 뒷담에서 앞 대문까지 펼치니 그 종이 길이와 대문까지의 거리가 꼭 맞은 공사이다.
또 『전경』에는 수각리 사는 김문거에게 간 내용이 있고, 만경 삼거리 주막집에서 쉬고 있는데 한 중이 앞을 지나가자 돈 세 푼을 준 내용이 등장하는 것이 『대순전경』과 다르다. 아울러 『전경』에는 ‘다음 날에 형렬이 전주로 동행하니라. 이에 앞서 상제께서 「오늘 너희가 다투면 내가 죽으리라」 이르신’ 내용이 있다.
「행록」 5장 9절: 『대순전경』 6판 4장 132절에는 기유년 1월 4일로 되어있으나 『전경』에는 3월 어느날로 되어있다. 시간상 3개월의 차이가 있는데 앞에서 본 차경석의 고사와 관련된 일은 기유년 1월 2일의 일로 나타난다.
「행록」 5장 10, 11절: 『대순전경』 6판 2장 107절과 대응된다. 『대순전경』에는 상제께서 대흥리에서 납월공사를 보고 기유 정월 초 이튿날 관재(官災)를 피하여 백암리 경학의 집에 갔다는 내용이 맨 앞에 있다. 또 『전경』에는 최창조의 집에 갔다가 솔밭을 지나 ‘최창겸’의 집으로 간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최덕겸’으로 되어있다. 또한 『전경』에는 ‘경학의 형이 어떤 술객이 경학을 속여 가산을 탕패(蕩敗)케 한다는 소식을 듣고’ 라고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경학이 술객에 홀려 살림을 돌보지 않는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전경』에는 순검이 최창조의 집에 세배하러 찾아온 황응종과 문공신을 구타한 내용이 11절 끝부분에 더 기록되어 있다.
「행록」 5장 12, 13, 14절: 『전경』에는 김자현의 지혜를 떠 보기위해 학질에 대해 물어본 것으로 되어있고, 『대순전경』에는 학질에 대해 김자현과 대화를 나누고 상제께서 전주로 간 것으로 나온다. 또 김자현의 노모(老母)가 학질로 죽은 후 상제께서 노모를 모실 관속에 누운 것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대순전경』에는 ‘내 몸에 맞는다’라 하고 뒤에 김자현을 불러 널 한 벌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내용이 더 있다.
「행록」 5장 15절: 『전경』에는 ‘4월 어느날 김보경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시는데’라는 내용이 맨 앞에 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없다. 『전경』에는 백지 넉 장을 펴고 천곡이라 썻다고 나오나 『대순전경』에는 양지 석장에 천곡을 썻다고 나온다. 치복과 ‘성환’으로 하여금 글을 쓴 종이를 마주 잡게 하고로 나오나 『대순전경』에는 치복과 ‘송환’으로 되어있다. 상제와 갑칠이 하늘의 구름에 대해 나누는 대화에서도 『전경』은 상제께서 갑칠에게 명하는 내용이 생략되었으나 『대순전경』에는 질문한 내용이 적혀있다.
이후 『전경』은 백지 한 장의 복판에 ‘사명당’이라고 적었다고 나오나 『대순전경』에는 양지 중앙에 ‘호승예불 군신봉조 오선위기 선녀직금’이라 적었다고 되어있다. 또 『전경』에는 사명당에 대해 ‘밝을 명자를 쓴 사명당’이라고 되어있다. 네 개의 혈을 설명하는데 있어 조화는 불법에 있으니 호승예불혈이오가 『대순전경』에는 조화는 불법에 있으니 호승예불 기운을 걷어 조화를 쓰고,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선술(仙術)에 있으니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오가 무병장수는 선술에 있으니 오선위기 기운을 걷어 무병장수케 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혈(群臣奉詔穴)이오가 군신봉조는 장상이 왕명을 받는 것이니 그 기운을 걷어 나라를 태평케 할 것이요. 선녀직금혈(仙女織錦穴)로 창생에게 비단 옷을 입히리니는 선녀직금은 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힌다는 설명이 각각 『대순전경』에는 추가되어 있다.
「행록」 5장 19절: 『대순전경』 6판 4장 161절과 대응된다. 『전경』은 어느날 김성국의 집에 오셔서 용둔을 하리라고 한 내용으로 시작하나, 『대순전경』은 용둔공사 앞에 불가지 관련 공사가 같이 연결되어 있다. 즉 치복과 여러 종도들에게 불가지를 풀고 가활만인하리라 하며 교자를 타고 불가지로 가며 옛 글인 한시를 읊은 내용이 더 있다. 따라서 교자를 타고 김성국의 집으로 간 것으로 되어있다. 또 용형(龍形)을 만든 것은 『전경』과 『대순전경』이 같으나 『대순전경』은 불가지 공사가 용둔 공사 앞에 더 있는데 교자를 타고 김성국의 집에 이르러 ‘교자를 내려 놓은 자리’에서 용형을 불사른 것으로 되어있어 『전경』과 다르다.
「행록」 5장 19절: 『대순전경』 6판 9장 22절과 대응된다. 『전경』에는 김자현은 6월 어느날이라고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스무 하룻날 저녁에 송환으로 하여금 자현을 부르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제께서 자현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고 한 물음에 『전경』에는 지성으로 믿사오며 고부화액 때에도 상제를 따랐나이다라고 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자현이 만일 믿음이 부족할 진대 고부 화란 끝에 곧 배반하였을 것이외다 하자 상제께서 ‘네 말이 옳도다’한 것으로 적혀있다. 이어 『전경』에 상제께서 ‘장차 어디로 가리니 내가 없다고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고 한 것이 『대순전경』에는 ‘돌아오도록 잘 믿고 있으라. 만일 내 그늘을 벗어나면 죽으리라’고 되어있다. 김자현이 모시고 따라가겠다는 물음에 『전경』은 ‘어느 누구도 능히 따르지 못할지니라. 내가 가서 일을 행하고 돌아오리니 그때까지 믿고 기다리라. 만일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을지니라’고 하였으나, 『대순전경』에는 ‘너는 갈 곳이 못되느니라’고 간단히 말 한 것으로 되어있다.
「행록」 5장 20절: 『전경』에는 맨 앞에 ‘상제께서 六월 열흘께는 심기가 불편하셔서 동곡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청도원 김 송환의 집에 들러서 유숙하시니라’고 되어있으나 『대순전경』 6판 4장 164절에는 ‘청도원 김송환의 집에 이르시니’로만 되어있다.
「행록」 5장 22절: 『대순전경』 6판 9장 14, 18절과 대비된다. 『전경』의 내용은 18절 뒤에 14절이 연결된 구조로 되어있다. 『대순전경』 9장 18절에는 상제께서 ‘한 사람만 있어도 나의 일은 성립되리라’하니 대개 종도들은 천하사를 도모하는데 위지(危地)에 들어가서 죽게 될지라도 믿겠느냐는 뜻으로 알았더라는 내용이 더 있다. 또 『전경』에는 상제께서 ‘궁벽한 곳’에 숨으면 너희들이 ‘반드시’ 찾겠느냐 라고 되어있으나 『대순전경』 9장 14절에는 ‘내가 이제 몸을 피하려 하노니 너희들이 능히 찾겠느냐’라고 되어있다. 종도들의 찾겠다는 대답에 『전경』에는 ‘그리 못하니라. 내가 너희를 찾을 것이오. 너희들은 나를 찾지 못하리라’로 되어있고 『대순전경』 9장 14절에는 ‘너희들은 나를 찾지 못할 것이요. 내가 너희들을 찾아야 만나보게 되리라’로 기록되어 있다.
「행록」 5장 23절: 『대순전경』 6판 9장 10절과 대비된다. 『전경』에는 ‘내가 어느 곳에 숨으면 좋을까’라고 물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악하여 몸 둘 곳이 없으므로 장차 깊이 숨으려하노니 어디가 합당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행록」 5장 24절: 『전경』에 ‘온 누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모두 구출하기 어려우니’라고 되어있고 『대순전경』 6판 5장 37절에는 ‘전 인류가 진멸지경에 이르렀는데 아무리 하여도 전부 다 건져 살리기는 어려우니’라고 나타난다.
「행록」 5장 25절: 『대순전경』 6판 9장 7절과 16절이 결합된 형태로 되어있다.
「행록」 5장 27절: 『전경』에 ‘상제께서 식사를 전폐하시다가 이레만에’로 되어있으나 『대순전경』에는 ‘이달 초 열흘께부터 음식을 폐하고 소주만 마시시다가 스무 이튿날’로 기록되어 있다.
「행록」 5장 30절: 『전경』에 ‘나를 잘 익혀 두라’고 되어있고 『대순전경』 6판 9장 15절에는 ‘낯을 잘 익혀두라’고 기록되어 있다.
「행록」 5장 32, 33절: 『대순전경』 6판 9장 28절과 대비된다. 5장 33절 앞 부분까지에서 『대순전경』에 ‘강일순서신사명’이라 했으나, 『전경』에는 ‘강일순호남서신사명’이라 한 것 외에는 9장 28절과 같고 뒷 부분에서 『전경』에 ‘이 때에 신 원일이 상제께 천하를 속히 평정하시기 바라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하노라’는 내용은 9장 28절에는 없다.
「행록」 5장 34, 35절: 『대순전경』 6판 9장 30, 31절과 대비 된다. 34절의 내용은 24일 이른 아침에 차경석을 불러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이냐’고 나무란 것으로 되어있다. 『대순전경』에는 밀수(蜜水)를 드시고 모든 종도들이 물러간 후 차경석이 들어오자 ‘정가 정가 글도 무식하고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냐’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있으며 이어서 곧 화천한 것으로 적혀있다. 그러나 『전경』 「행록」 5장 35절에는 수박에 소주를 넣어 우물에 담구었다가 수박을 놓고 ‘내가 이 수박을 먹으면 곧 죽으리라.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속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옳으니라’고 한 후 밀수(蜜水)를 드시고 김형렬에게 기대어 가는 소리로 태을주를 읽고 누우신 것으로 되어있다. 이어 무더위에 종도들은 뒤 대밭가에 나가고 황응종이 방이 너무 조용해서 방을 들여다보니 조용히 누워 계신 상제께 가까이 가서 화천하신 것을 발견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에 종도들이 황급히 와서 상제의 화천을 이렇게 허무하냐고 탄식한 것으로 나온다. 이 부분이 『대순전경』에는 ‘종도들이 천사의 시체를 방안에 모시고 나와 탄식하며 허망한 일이로다 대인의 죽음이 어찌 이렇게 아무 이상이 없이 잠자는 것과 같으리요’라고 적혀있다. 이 내용이 『전경』에는 ‘황응종이 소리치니 종도들이 황급히 달려와서 상제의 돌아가심이 어찌 이렇게 허무하리오 하며 탄식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대순전경』에는 ‘비가 뿌리며 우레가 크게 일어나고 번개가 번쩍인 것’으로 간단히 기록되어 있으나’ 『전경』에는 ‘갑자기 뭉게 구름이 사방을 덮더니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화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九天)에 통하였다’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행록」 5장 36절: 『대순전경』 6판 9장 32절에는 본댁에 부고하고 부친을 모셔 와서 궤 안에 장치한 돈으로 치상한 것으로 간략히 나오나 『전경』에는 여러 종도는 떠나고 여섯 사람만이 상제를 지켜보고 부친이 왔으며 김형렬은 정신을 수습지 못하였고 궤 속에 간수한 돈으로 치상하고 남은 돈은 본댁으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대순전경』에는 ‘구릿골 앞 큰 골 장탯날 기슭에 외빈(外賓)했다’고 나온다.
Ⅳ. 맺음말
「행록」편(編)은 상제의 강세와 화천까지를 기록한 부분이다. 「행록」은 연도별로 되어있으며 5개 장(章)이다. 「행록」은 상제의 전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그 구절은 『전경』의 다른 편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이상호는 구천상제에 대해 1926년 『증산천사공사기』를 발간했으며, 다시 자료를 보완 증보하여 경전의 형태를 띤 『대순전경』을 발간하였다. 이후 『대순전경』은 1965년 6판까지 증보 간행되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 하에 기술되었다. 첫째 상제의 전 생애가 축약되어 기록된 「행록」 구절의 내용이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둘째로 「행록」 구절이 『전경』의 다른 6개 장(章)과 그 내용상의 상관성이 어떠한가를 찾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행록」 구절의 변이를 『대순전경』과 비교하여 논의해 보았다.
「행록」의 내용을 『대순전경』과 비교해 보면 특별히 「행록」에만 있는 중요한 내용들이 있다. 첫째, 강씨성의 유래에서 강신농으로부터 상제께서 강세한 고부에 강씨가 어떻게 살게 되었는가를 설명한 부분으로 인세에 강씨로 오고 신격위에 강성(姜聖)이 있는 면에서 중요하다. 상제께서 강세한 지역에 삼신산(三神山)이 있고 강세지의 명칭이 변천한 것은 신이한 면을 담고 대순사상과 깊은 상관성을 보여준다. 둘째, 시루산 공부에 관한 기록이다. 『대순전경』에는 시루산 공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따라서 3년간의 주유(周遊) 이후 천지공사 이전 상제의 행적에 있어 시루산 공부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전승으로 평가되는 바 『전경』의 기록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전경』과 전대 문헌인 『대순전경』을 비교해서 변이들을 보면 몇 개의 구절들과 함께 특히 백의군왕 백의장군 도수, 상제의 화천 등에서도 『전경』의 내용은 『대순전경』과 다른 면모의 변이를 보여준다.